백두대간중에서 가장 편한 非山非野 지역인 중화지구대를 걷다
☞산행일자: 2013년 3월 10일(무박산행)
☞산행날씨: 맑음, 강한 바람에 일교차가 상당히 심함
☞산행거리: 도상거리약23.3km G.PS거리 25.8km/ 9시간 40분소요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30여명과 함께
☞산행코스: 신의터재-쑥밭골재-금은골 안부-지기재-개머리재-백학산
477m봉-윗왕실재-463m봉-512m봉-개터재-회룡재
회룡목장-큰재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화동면, 외남면, 내서면,모서면,모동면, 공성면
백두대간을 완주한 지가 어언 4년이 지났지만 늘 가슴 한 구석에 꽉 막힌듯한 갈증을 이기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백두대간이 뭔지도 모르고 죽기살기로걷기만 하였기에 정맥과 기맥, 지맥길을
걷다가 다시 한번 백두대간을 걸어보고 내가 걸었던 그 길을 기록을 한번 남겨볼 요량으로
내가 3년전에 호남정맥을 마친 산악회에서 3월에 백두대간 남진을 시작한다기에 북진을
완주는 했고하여 남진길에 베낭을 메고 산악회를 따라 나선다.
원래 계획은 진부령에서 시작하여 지리산 천왕봉에서 피날레를 장식하기로했으나 올해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오고 지금은 국립공원들이 경방기간이라 입산통제를 하여 부득히
백두대간 35구간 중에 24구간인째인 신의터재에서 큰재까지의 코스를 시작한다.
이 구간은 백두대간중에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非山非野 구간으로 흔히들 산꾼들에게는
보너스 구간으로도 불리는 구간으로 눈감고도 시간당 3km를 간다는 곳이다.
밤 11시에 양재역에 도착하니 모르는 산꾼들도 많고 레인저 회장님 을비롯한 안면있는
지인들도 많이 있어 부담은 없으나 오랫동안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기맥, 지맥을 많이
한 탓에(?) 상대방 산꾼들에게 민폐가 안 될지 걱정스럽다.
이번 대간길에는 리딩할 대장이 호남정맥길에서 같이 걸었던 젊은 친구라서내가 짧은
숏다리로 따라 갈지도 걱정이고...
버스가 도착하여 3년만에 만난 산꾼들과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버스에 오른다.
차에 오르자마자 습관처럼 깊은 잠에 푹 빠졌다가 2번째 휴게소인 당진~상주간고속도로인
화서휴게소에 도착하니 새벽 1시30분밖에 되지 않았다.이곳에서 거의 1시간을 지체한 다음에
차에 올라 02시 45분에 들머리인 신의터재에도착을 하는데 바람이 얼마나 센 지 몸을 겨누기도
힘이들 정도이지만 그래도 경칩이 지난지가 5일이나 된 탓인지 바람은 그리 차갑지는 않다.
백두대간 북진을 할 때는 이 구간은 당일 산행코스로 진행했는데 새벽 3시부터
시작을 하니 3시간을 넘게 컴컴한 밤길을 걸어야 하니 아쉽기만 하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신의터재(新恩峴:280m:02:45)
경북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서 평지리 넘어가는 고개로
원래의 이름은 신은현(新恩峴)이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신의터재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에 어산재로
바뀌었고 1995년도에 신의터재의 이름을 되찾았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에 내륙에서 왜군과의 첫 교전 장소였고
최초의 의병인 김준신 장군이 의병을 모았던 곳이라고 한다.
일제때 민족정기를 말살한다고 “어산재”로 개명되었고 문민정부 수립후 광복50주년을
맞아 옛이름을 되찾고 이곳에 표석과 의사비를 세워져 있다.
화동면 주민들은 화동재라고 부른다.
이곳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이며 낙동강과 금강물로 나누어 지는 곳이기도하다.
해발 280m의 높은 고지대로 고랭지 포도 팔음산 포도가 유명한 곳이기도하다.
4년만에 첫발을 내디딘 이곳 신의터재는 감회가 참 새롭기만하고
그때의 기억이 나는데 오늘은 어둠속이라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이곳에서 가까운 팔음산 포도가 유명한 지 팔음산 포도를 선전하는 광고판이
보이고 예전에 없었던 정자도 보이고 하지만 모든게 새롭기만 하다.
그리고 절곡 김준신 의사비가 야심한 밤에 이 신의터재를 지키고 있다.
상주의 첫 의병 김준신(金俊臣)의사 제단비
1592년 4월 13일 조정에서는 매일 일과처럼 벌어지는 당파싸움에
휘둘리고 있을 때 바다건너 왜국(倭國)에서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땅을 침략하자 선조는 서둘러 평양성을 지나 의주 땅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당파 싸움으로 날을 새던 조정 간신들이 줄행랑을 친 사이에 내 고향
의령에서 홍의장군 곽재우를 중심으로 영남땅에 불길처럼 번진 의병들이
일어나 이 나라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
이곳 상주땅의 의병인 김준길도 신의터재를 중심으로 왜적을 상대하다가
상주 북천에서 장렬히 전사를 한다.
낙화담(落花潭)- 사진 펌
화동면과 내서면을 오가는 백두대간 신의터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판곡리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준신 의사 제단비가 있다. 김준신 의병장은 앞서 들렀던 북천에서 의병을 이끌고
왜군 정예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분이다. 당시 김준신 의병장은 중과부적으로서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남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며 부하들과
함께 왜군 수백 명을 죽이고 장열하게 전사했다.
왜군은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예기치도 않은 곳에서 타격을 입게 되자 분풀이를 하기 위해
김준신 의병장 가족이 살고 있는 화동면 판곡리로 몰려갔다. 그러나 어찌 무기도 없는 민간인이
왜군 정규군을 당하겠는가. 마을사람들은 힘을 합쳐 저항했지만 남자들은 거의 학살당했고,
부녀자들은 왜군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 마을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연못 이름이 낙화담(落花潭) 이다.
임진왜란 당시 1,600여 평에 이르렀다는 낙화담은 세월이 흐르면서 메워져 이제는 불과 60~70평 남짓한
연못으로 변해 버렸다.못 가운데 조성한 작은 섬엔 수백 년 묵은 노송 한 그루가 옛 이야기 들려줄 듯 서있다.
낙화담 노송 옆에는 노산 이 은상 시인이 쓴 낙화담 詩碑가 있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
절사곡(節士谷) 피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
설악(雪岳)높은 봉이 본대로 이르는 말
꽃은 떨어 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이곳 상주에는'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던 정기룡 장군을 비롯해 우복 정경세, 김준신 의병장이
이렇듯 환란의 시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 분이 모두 한 해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주 에서 태어났으니 참 특별한 인연임에 틀림없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상선(상주와 선산)에 있다’고적은 것은 이 분들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三白의 고을 尙州
백두대간 능선이 남북으로 67km나 지나가는 상주 땅은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를
가로막은 1,000m 급 이상의 산들이 이곳 상주땅에서 중화지구대를 만들면서
고도가 낮아져 예로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자리잡고 살았고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와 경부선 철길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경주와 상주의 첫 글짜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라 한 것은 상주가 군사적으로나
지형적으로 천혜의 요새이기 때문이다.
영남을 가로지르는 낙동강은 삼한시대에 풍부한 물과 기름진 들녘에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었던 낙양(洛陽)에서 유래 되었는데 낙양의
동쪽에 흐르는 물이라 하여 낙동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영남의 큰 고을인 상주(尙州)는 예로부터 쌀, 곶감, 누에가 유명하여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낙동강이 흐르는 기름진
들녘에는 상주쌀이 유명하며 중화지구대 골에서 흐르는 차가운 일교차
때문에 사과, 배, 포도가 당도가 높고 특히 남쪽에서 나는 감은 떪은
맛이 나는것이 이곳에는 떪은 맛이 없어지고 당도도 최상으로 만들어져
전국의 곶감 수확량의 60%를 차지하며 해마다 누에축제를 열 정도로
상주 누에는 유명하다고 한다.
금강과 낙동강 수계 분수령
상주의 지형은 제법 복잡하다. 백두대간이 서부로 지나지만 이 산줄기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을 끼고 있거나 그 서쪽의 공성•모동•모서•외남•화동•화서•화남•화북면 이렇게 적지 않은
8개 면이 모두 상주 고을 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백두대간 분수령을 경계로 도계(道界)나 군계(郡界)를 나누던 관습은 적어도 이곳에선 통하지 않는다.
분수령이 이 지역에서 면계(面界) 역할조차 제대로 못하는 까닭은 분수령의 산세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중화지구대’라 불리는 이 구간은 아마도 백두대간 전 구간 중에서 분수령의 고도가 가장 낮은 곳일 성싶다.
마루금은 겨우 해발 200~400m 내외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야산지대를 이룬다.
그러나 백두대간 분수령으로선 낮아도 농사터로는 고원지대다. 이곳은 평지와 평균
기온이 3~5℃ 차이가 나는 까닭에 당도 높은 과일을 생산하는 과수농업이 아주 발달해 있다.
예전 대간길에 없었던 팔각정도 보인다. 이리저리 어둠속에서도 모든게 새롭기만 하다.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데 산행대장과 선두들은 귀신에 쫒기는 지 아님 조급증이 나는지
벌써 음력 정월 스무 아흐렛날 칠흙같이 컴컴한 새벽에 렌텐에 의지한 채 어둠속에 사라진다.
초반부터 졸지에 아리송 아우님과 함께 난 산행 준비도 마치지 않은탓에 꼴찌가 된다.
산행을 시작하다(03:07)
바람이 드세기만 하다. 머리에 쓰고있는 모자가 날아갈 것만 같다.
아리송 아우님과 둘이서 3년만에 같이하는 산행에 지난날 남도길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급증(?) 환자들이 다 가버린 대간길을 걷는다.
그래도 2번째의 대간길이기에 여유롭기만 하다. 그리고 그물망처럼 촘촘히
박혀있는 이정표가 너무많아 미안스럽기만 하다... 거기다가 그 많은 시그널까지...
흔히들 대간길은 고속도로요, 정맥길은 국도, 기맥길은 지방도, 지맥길은 임도라 한다.
4년동안 1년에 1,500km 이상 걸으며 山戰水戰 다 겪은 범여가 이런델 동요하진 않지...
능선에 올라서니 과연 대간길은 말 그대로 고속도로(?)이다.
팔각정이 서있는 능선 뒤에는 상주시에서 세운듯한 백두대간
표식을 나타내는 돌비석이 어둠속에 보인다.
4년전의 이정표가 그대로가 보인다. 모든게 반갑기만 하다.
쥔장 고마우이... 근데 어쩌지 우린 진부령이 아닌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는데 ㅋㅋㅋ
고도 편차가 거의없는 대간길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걷는다.
이러다가 중요한 구간을 눈감고 가다가 산행이 마무리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겨우 동료산꾼들의 꼬랑지를 잡았다. 이곳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이곳은 마사토 지역이라서 상당히 미끄럽다. 오늘 길이 좋아서 새 등산화
길 내려고 신고왔는데 새것이라 미끄럽지 않아서 좋다.
어찌나 쏘다니는지 1년에 등산화 2컬레 이상이 작살이 나니...웬
내리막길에 내려서니 어둠속에 포도밭같은 농장이 나오고 다시 임도를
조금 걷다가 좌측으로 꺽어져서 능선을 올랐다가 내려서니 성균 진사까지
지낸 창녕 성씨 묘지가 나오고 선두가 오늘 처음으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넓은 묘지터엔 ‘進士成均 成公之墓 孺人 長水黃氏附’ 라는 낡은 비석이 서 있는 곳에서
처음으로 30여명의 백두대간 출정대가 모여서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한다.
이른 새벽에 망자들의 시끄러워 주무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어둠속에 서둘러 지기재로 향한다.
진사(進士)란 생원과 함께 조선시대에 성균관 대과(大科)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시험으로서 유교
경전을 보는 명경과와 시부책과 한문학 시험을 보는 제술과에 합격하면 진사의 호칭을
받았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관직의 수는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도 정기시험인 식년 이외에 알성시,
별시 등을 치뤄 많은 수많은 예비 관료들을 배출하였고, 대부분의 생원, 진사, 선달들은 과거시험을
보아서 양반시험을 유지하는데 불과한 신분이라고 하며 진사라는 이름 자체가 벼슬은 아니였다고 한다
휴식을 취하고 지기재로 내려오는데 낡은 비석이 있는 커다란 묘지 아래 좌측에도
위에 있는 창녕 성공의 비석이 있는데 이곳에는 진사 이외에도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란
직책이 추가로 적혀 있는데 후손들이 새로 세운듯한 비석인 모양이다.
조선시대에 통정대부에게 내리는 교지
대간이나 정맥, 기맥, 지맥길에 자주 만나는 통정대부나 통덕랑의 비석 문구를 자주 보는데
통정대부(通政大夫)란 벼슬이라기 보다는 그 지역에서 덕망있는 나이드신 분에게 내리는
예우차원에 부르는 직책이라고 보면 좋을듯한 단어이다.
드디어 지기재에 도착을 한다.
드디어 예전에 없었던 철책 펜스에는 대간 산꾼들에게 걸어논 시그널이 주렁주렁하다.
지기재에 도착을 하니 바람은 조금은 잦아드는 느낌이다.
지기재(260m:04:20)
경북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에서 대포를 잇는 고개로 901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지기재의 유래는 옛날 동네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적기(賊起)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마을 이름을 따 지기재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고 한다.
백두대간 중화 지구대인 이곳 상주지역은 고개마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 표지판이 있다.
동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서쪽으로 떨어지면 금강으로 흘러든다.
자연은 이렇게 양보하고 배려하며 정말 멋지게 살고 있는데 우리 인간들은 탐욕과 집착으로
만물의 영장 역할을 하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구나.
같은 민족으로서 전세계에 유일무이한 분단국가도 모잘라 북쪽에 새로이 등장한 나이 30도 안된
귀때기가 새파란 지도자가 등장하여 핵이란 위험한 장남감(?) 으로 한반도를 겁박하고
있는데 여의도에 계시는 지체높은 분들은 그런건 眼中에도 없이 자기들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으니...
제발 나리들! 정신들 차립시다... 民草들은 지금 최악의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며칠전 열반 3주기를 맞은 이 시대의 스승인 法頂스님이 오늘따라 왜그리 그리운지.
스님이시여! 이 시대에 정신 못차리는 衆生들에게 엄한 회초리를 들어주소서...
도로가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서 모서면의 상징물이 지기재를 지키고 있다.
이곳 역시 상주 포도가 유명한 모양인지 신의터재와 마찬가지로 포도를 상징물로
내세우는 걸 보아서는 모동면과 모서면 지대 포도 주생산지인 모양이다.
지기재 도로를 건너서 포도밭을 끼고 다시 어둠속에 능선으로 고도를 높인다.
역시 백두대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곳곳에 이정표와 시그널!
어쩌면 기맥과 지맥을 타는 산꾼 범여는 이젠 이런곳이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길이없는 길을 잡목과의 싸움을 하면서 걷는데 10km를 가도 이정표 하나 정상석
하나 없고 선답자들의 시그널 하나 구경못하며 걷는게 허다한데 너무 호사스런 산행이 아닌지?
포도밭을 지나 고도를 높이니 예전에 없었던 계단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잠시 후에 능선으로 올라서 안부 능선을 우측으로 꺽어지니 어둠속에 묘지2기가 나온다.
이곳 능선이 오늘 산악회에서 나눠준 지도에는 안심산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예전 지도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고 아무런 표식도 없어 무시하고 지나간다.
다시 우측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어둠속에 묘지 2기가 나타나고 내리막길에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낙엽이 푹신하여 걷기는 참으로 편하다.
오랫만에 만난 아우 산꾼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무심코 걷는데
갑자기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오면서 좌측으로 포도밭이 나오는데
졸지에 400m 정도를 알바를 한 것이다. 다시 빽하여 원위치를 한다.
묘지에 내리자마자 넓은 임도를 포기하고 좌측으로 꺽어져야 하는데
그곳에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나무 뒤의 대간길을 어둠속에 놓쳐 버린 것이다.
좌측 능선으로 내려오니 급경사가 나오고 조금 내려가니 알바하면서
만났던 포장도로와 만나는 길이 나온다. 도로를 따라서 조금 올라가다가
다시 우측 능선으로 들어서서 고도를 조금씩 높혀간다.
능선에 오르자마자 다시 고도를 낮춰서 내려가니 어둠속에 포도밭을
만나고 이동통신 중계탑이 나오면서 개머리재로 내려선다.
개머리재(290m:05:30)
상주시 모서면 소정동과 대포리(일명 함박골)를 잇는 도로로, 개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포도나무밭 사이로 농로인 포장도로가 나 있으며 이곳 사람들은 소정재((召井峙)라고도 부른다.
소정동은 산 중복에 위치하여 식수를 길어 올려야 했기 때문에 우물을 길어 올린다는 뜻의 소정(召井),
대포리(大杓里)는 이곳 지세가 북두칠성의 자루인 두 병이 능히 될 수 있다는 뜻에서 부른 것이라 한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우리 일행이 아닌 다른 일행의 산꾼을 만난다.
카니발 한대가 이곳에서 산행을 위한 산꾼들을 태워온 모양이다.
흔히들 하늘길이라고 불리는 백두대간이 마을 가운데까지 내려왔다.
이곳은 포도밭과 사과밭 그리고 4년전 여름철에 지날갈 때 보니 담배밭도 있었다.
그리고 농사들 짓는 민가들도 보인다. 산이 내려와 물끄러미 인간세상을 바라본다.
뭣이 그리도 궁금한 지? 궁금할 것 하나도 없소이다. 오직 사바세계의 苦行만 있을 뿐...
산이 아니 높고 낮음은 백두대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 같다.
백두대간은 하나의 산줄기이며 그 산줄기 자체가 하나의 산이다.
높고 낮음,오름과 내림, 들어감과 나감이 모두 하나였다. 높은 산이나 낮은 산,
오르막이나 내리막, 산으로 들어가는 일과 나오는 일 등이 모두 한가지였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 하나의 산, 하나의 산줄기를 이루는 것이다.
'옛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하나의 산줄기로 인식한 것은 조화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화를 이루어야 숲이 되고, 산이 되고,자연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얼마전 여성 산악인인 남 난희님의 “낮은 山이 낫다”라는 책을 읽은적이 있는데
그 책 내용이 이곳을 말함이 아닌지? 그녀는 스물 일곱살 나이의 겨울에 76일동안 백두대간을
혼자서 완주하고 여자나이 스물 아홉에 여자로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을
등정하신 분이란다. 지금은 하동 쌍계사 위의 지리산 자락에 산다고 하는데 꼭 뵙고 싶은 분이다.
개머리재에서 사진 한장을 찍는 사이에 알바를 한 선두그룹은 보상이라도
받으려는지 이곳에서 그냥 내달리기 시작한다. 마치 미친 년 널뛰듯이...
호남정맥길에 늘 하~하~ 하면서 호탕하게 웃으시는게 트레이드 마크인
올해 70의 연세인 노바 형님께서 영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인다.
내 베낭에서 스프레이 파스를 꺼내서 형님 다리에 뿌린 다음에 같이 길을 걷는다.
개머리재 건너서 밭 가운데를 지나니 잡목과 잡풀이 가득하다.
4년전 여름에 이곳을 북진하면서 상당히 고생을 한 구간이라 기억이 생생하다.
앞서가던 동료 산꾼들은 불빛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 어둠속에 죽기살기 가봐야 서울로 갈때는 똑같은 버스로 갈텐데 ㅋㅋㅋ
임도(05:50)
이 길은 마치 S자형태로 이리저리 휘어지면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그러면서 넓은 임도가 나타나고 다시 오늘 산행중에 유일한 산 지명이
붙은 백학산을 향해서 서서히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오늘은 졸지에 아리송 아우와 여유로운 길을 걷다보니 후미 아닌
후미대장이 되어 버린 꼴이다. 사실 어둠속에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심사가 꼬여버린 소나무(?)
고도를 높혔다가 다시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선두들이 휴식을 취한다.
여기서 새로 대간에 참여한 산꾼들이 과일과 먹을 것 이것 저것을 준다.
선배 대접 받는 느낌이다. ㅋㅋㅋ 그래 선배님들 잘 모셔야지.
예전 우리도 그랬으니까... 요즘 뺑뺑이 세대들은 잘 모르지
그래도 명색이 중학교 시험봐서 들어간 나같은 고시출신들의 기억에는 말야
선배들이 강조하는“하느님과 선배는 동기이다 고로 선배는 하느님이다”
그러니 아그들도 선배 잘모셔야지 ㅋㅋㅋ
선두들은 다시 일어나 출발하고 몇몇 산꾼들은 이곳에서 여유를 부린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주위의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해가 뜨기 직전이라 그런지 날씨가 상당히 추워지기 시작한다.
시간상으로는 해가 뜰 시간이 지났지만 이곳은 앞에 백학산이 가로막혀 있어
해는 보이지도 않고 잔뜩 흐린 날씨이다. 그러면서 자꾸만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능선 안부를 걸어가다가 내리막을 내려서니 차량이 다닐정도의 넓은 임도가 나온다.
대포리(大杓里) 임도(400m:06:50)
옛 도안현(道安縣)의 지역으로 백학산 밑이기 때문에 한박골, 함박골, 또는 대포동이라고 했다.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노산리(蘆山里)를 병합하여 대포리라고 했다고 한다.
함박골에서 모동면으로 넘어가는 도로에는 포장도로로 되어 있고 지도상에는 약수터가 표시되어 있다
오늘 처음으로 힘들게 산으로 오르는 느낌이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데 손끝이 빠질정도로 시리기 시작한다.
지나온 능선
이곳 아래까지 3시간을 넘게 눈을 감고 오다시피하여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독립군(나홀로 산행) 산행이 그립기만 하다. 혼자서 해뜨면 산행 시작하고
해지면 끝나는 산행을 하지만 연합군(단체산행)의 작전 수행이 헷갈린다.
무조건 산행대장의 룰을 따라야 하니 어두워도 무조건 가야하기에...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아마도 국사봉인듯 싶다... 다시 백학산으로 향한다.
백학산 안부 능선으로 올라서니 해는 벌써 중천으로 올라와 버렸다.
백학산(白鶴山:07:30)
경북 상주시 모동면과 내서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장자봉(莊子峰)이라고도 부르고,
백학산 서쪽 능선은 성봉산(572.1km)으로 이어 진다.
백학산은 세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세번째 봉에 앙증 맞게 생긴 정상석이 서 있다.
산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 백학이 내려와 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정상에서 윗왕실마을을 바라보며 백학산이 마을을 마치 학이 알을 품은 듯 감싸안은 형세라고 한다.
이런 터를 포란지세(包卵之勢)라고 하는데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이 으뜸으로 치는 명당이란다.
백학산 北東으로 계류가 발원 내서면을 경유 北川이 되어 낙동강에 유입된다.
또 하나 계류는 南西로 판곡지에 유입해 반계천이 되고 금강으로 흘러든다.
표고가 낮은 중화지구에 백학산은 중후함을 갖춘 으뜸 산으로 이 지역 횃불처럼 신성한 숭상의 대상이었다 한다.
오늘 산행구간 25여km 중에 유일하게 山名이 붙은 곳이다.
백학산 정상에서 백두대간 출정식 기념으로 약식으로 백두대간 山王大神들을
모시고 1년 6개월간의 대장정동안 무탈하게 산행을 해달라는 기원제를 올린다
산행 총무와 쾌도쎄무란 젊은 여성 산꾼이 나물을 많이 해와 푸짐하다.
大幹 山神에게 禮를 올리는 산악회 광풍회장님
산행대장과 산악회 회장님이 산신에게 예를 올리고 그 다음으로 완주를 할
산꾼들과 왔다리 갔다리 할 게스트 산꾼 순으로 예를 올린 다음에
산 정상에는 너무도 바람이 많이불고 추워서 제를 모신 다음에 백학산
아래 바람이 없는 곳으로 옮겨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제물을 음복을 한다.
추워도 너무 추워서 버너를 피워서 라면을 끓여서 따뜻한 국물로
몸을 녹이고 소주 5잔을 마시고나니 몸이 좀 풀리는 느낌이다
1시간 가량의 만찬을 느긋하게 즐기고 다시 산 정상으로 올라와서
30여명이 단체 사진을 찍은 다음에 대간길을 이어간다.
백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상주시 山河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를 함께 부르면서 유래되었다”
"백두대간과 낙동강이 빚어낸 삼백(三白)의 고을 상주는 흰쌀과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이다
쌀, 누에, 곶감의 공통점은 모두가 하얗다는 것이다. 영남지방의 큰 고을이었던 상주(尙州)는
예부터 이 세 가지로 유명해 상주를 흔히 ‘삼백(三白)의 고을’이라고 불렀다.
우선 ‘삼백미’로 불리는 상주쌀은 경기미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질이 좋았고, 임금의 수랏상에도 오르던 진상품이었다.
게다가 생산량도 많아 한때 상주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은 강원도 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그것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고 한다.
그 다음은 누에.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누에치기를 시작한 지는 4,000년쯤 되었는데,
상주 함창읍은 신라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하지만 한때는 산기슭을 온통 차지했을
뽕밭은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양잠농가도 더불어 사라져 예전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도 함창 장날엔 명주장이 설 정도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은척면 두곡리에
은척뽕나무로 불리는 350년쯤 된 늙은 토종 뽕나무가 있는 것도 이 고장의 누에치기가 아주 오래됐음을 알려준다.
상주는 시내 가로수는 물론이요,, 마을 길가에도 온통 감나무다. 그래서 가을엔 주민들이 감을 따는
광경을 쉽게 만날 수 있고, 가을에서 겨울 사이엔 어딜 가나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이 익어가는 건조장을 쉽게 볼 수 있다.
요즘 곶감은 분명히 말간 빛이 도는 주황색인데 왜 ‘삼백’에 속할까? 사정은 이렇다.
타래에 그대로 건 곶감에서는 하얀 분가루가 생기지 않고 사람이 손으로 만지작거려야만 분이 생겨난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곶감을 걸어놓고 손으로 만지며 모양을 만들었기에 하얀 분이 나와 곶감을 감쌌던 것이다.
이렇게 해야 곶감을 오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 하얀 분이 나오지 않아도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삼백의 고을’로 유명한 상주는 영남지방에선 확고한 권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우선 영남의 행정명인 경상도(慶尙道)는 신라의 천년 고도인 경주(慶州)와 상주(尙州)고을의첫 글짜를 하나씩
따온 것이며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은 삼한시대에 상주 벌판에 자리 잡았던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던
낙양(洛陽)에서 유래했는데, ‘낙양의 동쪽에 와서야 강다운 면모를 갖추고 흐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하니
상주가 대단한 곳임을 이해할 만하다.
상주는 낙동강 주변의 기름지고 널찍한 들녘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이살기 시작했으며
곡창지대 뿐만 아니라 천혜의 방어막인 백두대간에 금과 철을 비롯한짛자원을 품고있어 옛날부터 전략적 요충였다고 한다
화북면 속리산 자락에 있는 견훤산성과 모동면 백화산에 있는 금돌산성이 그 좋은 예다.
그래서 신라는 상주를 북방 경영의 전초기지로 삼았고,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이곳을 제2의 도읍으로 일컬을 만큼 소중하게 여겼다. 이런 상주의 위상은 고려를 지나 조선까지 이어졌고 세종 때에는 경상도 감영이 설치되기도 했던 상주의 전성시대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경상도 감영이 대구로 옮겨가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477m봉(08:45)
백학산에서 계속해서 고도를 낮추어 가고 시간이 지나면서
혹독하게 추웠던 날씨는 해가 나면서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윗왕실재(400m:09:15)
상주시 모동면 효곡리 윗왕실 마을과 외남면 소상리를 연결하는
1톤 트럭이 다닐정도의 넓은 임도가 자나가는 고개로 4년전 없었던
동물이동통로가 새로 설치되어 있다. 윗왕실마을 고개라 해서 윗왕실재란다.
왕실(旺室)이란 사위가 산으로 둘러 쌓여, 마치 구중궁궐처럼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산세가 왕이 기거하는 왕궁과 같다 하여 ‘왕재’라 하였으나, 민초들이
함부로 왕을 입에 올리지 못하던 시절이라 뒤에 ‘실’자를 붙여 왕실재가 되었다 한다.
윗왕실재에 있는 동물이동통로인지 사람이동통로인지?
4년전 대간길에 없었던 윗왕실재 능선에는 동물이동통로라는게
설치되어 있는데 동물보다는 산꾼이동통로로 보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동물들이 좋아하는 환경은 전혀없다 하물며 난간조차도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스텐레스로 되어 있으니... 동물들이 다니겠나
난간 데스리에는 산꾼들의 걸어둔 시그널만 요란하다.
혹시 상주시장 나리께서는 산꾼들을 동물로 분류하는 건 아니시겠지?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만들어 동물에겐 무용지물같은 이동통로...
담당 공무원 나리께선 이곳 한번이라도 현장 점검은 하셨는지 궁금하다.
동물 이동통로 넘어로 본 윗왕실마을
백학산에서 너무 추워서 마시지 못한 막걸리 한사발을 이곳 통로아래의
넓은 공터에서 날씨도 풀렸겠다...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한 잔을 한다.
지기재 산장 쥔장이 붙여논 이정표
상주시에서 친절하게 붙여준 이정표의 시간 개념은 너무 엉터리인데
反하여 지기재 산장 쥔이 붙여준 시간표는 상당히 정확하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이정표보다는 개인이 붙혀논 이정표를
더 신빙성을 갖게하는 이유는 누가 현장에 더 충실했냐는 뜻이 아닐까?
흔히 산꾼들은 기상청을 구라청이라 했는데 이같은 맥락이 아닐까...
예전에 너무 일기예보가 틀려서 그랬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진 느낌이다.
백두대간 구간중에서 화령재에서 부터 추풍령에 이르는 구간을 대간 산꾼들은
흔히들 非山非野 구간이라고도 하고 보너스 구간이라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중화대 지구라고 한다.
실개천 하나없는 백두대간 화령재에서 추풍령구간 54.69km를 중화대는
1,000m급 이상되는 백두대간이 속리산 천왕봉에서 고도를 200~400m로
낮추면서 화령재에서 추풍령까지 중화지구대를 만든다.
지구대(地溝帶: rift valley)란 지층이나 암석이 변형되어 연속성이 파괴되어
긴 폭으로 요지(凹地) 생긴 지형으로 하천의 침식으로 인한 계곡과는 달리
두개의 단층이 지진이나 화산 폭발로 인해 단층활동으로 인해서 약한 부분이
함몰된 것을 말하며 우리나라에는 추가령지구대, 형상강지구대, 길주명천지구대가 있다.
지나온 백학산이 보인다. 백학산이 산꾼에게 상당히 아쉬움을 표하는듯 보인다.
고도차가 거의 없는 능선을 걷다가 다시 조금 고도를 높이는데 응달에는
눈이 조금씩 보인다. 오늘은 덕산 고문님과 알쏭아우님, 그리고 산악회
살림꾼인 총무님, 처음 대간을 시작한다는 길빛님이 함께 걷는다.
근데 조금 뒤쳐져 오던 알쏭 아우님이 잔나비 걸상버섯을 따서 자랑을 한다.
짜샤! 고런거 있으면 응아한테도 갈켜 줘야지 하는데 형! 저아래
있는 거 잔나비 걸상버섯 아니야 하고 말하는데 능선 아래에
잔나비 걸상버섯 2개가 나무에 붙어있는게 아닌가...
얼른 베낭을 벗어놓고 총알처럼 내려가서 전리품을 챙긴다.
알쏭 아우님 고마우이...
잔나비 걸상버섯은
균모는 폭이 50cm가 넘는 것도 있으며 두께는 30~40cm로 반원형으로
낮은 산 모양에서 말굽 모양이나 종 모양으로 된다.
표면은 각피로 덮여 있고 회백색 또는 회갈색이며 표면에 코코아 가루같은
포자가 싸여 코코아색을 나타낸다. 살은 초콜렛색이고 두께는 1~5cm이며
모피같은 코르크질이다. 관공은 다층을 이루며 각층의 두께는 0.5~2cm이고,
황백색 또는 백색인데 만지면 암갈색으로 된다. 자루는 없고 균모가 기주 옆에 붙는다.
포자 : 크기는 8~9×5~6μm이고 불로초 버섯과 같은 모양으로 난형이다.
2중막으로 되고 내막은 연한 갈색이다.
1년 내내 활엽수의 고목 또는 살아 있는 나무의 껍질에 무리지어 나며 부생생활로 목재를 썩힌다.
외국에는 크기가 1m 정도 되는 것 도 있어서 원숭이들이 버섯 위에 앉아 놀기도 한다.
512m봉(10:25)
후미에 오시는 분들이 윗왕실재에 탈출을 시도하는 바람에 졸지에
우리가 꼴찌가 되버린 느낌이지만 다들 여유만만하다.
다시 이곳에서 베낭을 풀고 총무님 가져온 배와 내 베낭에서 나온
산토리 생맥주 그리고 막걸리로 즉석 산상파티가 벌어진다.
후미팀의 느긋함... 대장이 알면 졸라 짜증내겠지만 할 수 없다.
그러면 죽기살기 가지말고 담부터 후미로 오소 ㅋㅋㅋ
휴식을 취한후에 내리막길을 향하는데 대간길은 역쉬 달라...
심심찮게 산꾼을 만나는데 다들 약간 맛이간 느낌이다.
베낭에 달은 시그널이 J3이다. 아이고 무서븐 사람들!
어디서 출발했냐고 물으니 부항령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김천 부항령이면 우리의 3구간을 갈곳을 한구간에...
이보시요 살살하이소... 도가니 아작나요
개터재(380m:10:55)
경북 상주시 모동면 효곡리와 공성면 봉산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길은
뚜렸하나 인적이 드문었던지 아님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는지 대간길
이외는 잡초만 무성한 곳이다. 원래 개터재는 이곳에서 공성면 효곡리 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편리상 개터재로 불렀는데 누군가 이곳 이정목에 옛고개라고
메직으로 써놨다. 이곳에서 사진 한컷 남기고 다시 능선으로 오른다.
효곡리는 효자와 열녀가 많이 배출되어 마을 이름이 효곡리로 지어졌고,
인심 좋고 범죄없는 마을로도 유명세를 다 하고 있다고 한다.
개터재의 유래는 유용하게 식량을 제공한 날짐승들이 많아 개터재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산세가 마치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부근의 봉산마을, 효곡마을, 왕실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 해서
봉산재, 효곡재, 왕실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편의상 개터재를 가로질러 다시 대간길을 이어간다.
개터재에 올라서니 양지바른 곳 우측에 여산송씨와 해주오씨 부부 합장묘가 보인다.
이곳 능선 정상의 봉우리는 꽤나 높지만 이곳은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산사면
옆구리를 끼고돌아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지나온 백학산이 살짜기 보인다.
백학산에서 이곳까지 ⊃형태로 빙돌아서 대간길 山自分水嶺을 이어가는 형태이다.
조금전에 지나온 512m봉의 모습
능선 사면을 타고 가다가 좌측 능선 아래로 내려선다.
이곳은 날씨가 따뜻한 탓인지 가시나무 잎사귀가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난다.
우측 회룡리에 있는 넓은 황토밭이 나오는데 이곳 밭은 대간길 포토존 단골메뉴다.
양지바른 곳에서 고이 잠든 망자의 천년주택을 지나 능선을 걷다가
다시 고개로 내려서니 커다란 노거수 옆으로 서낭당 흔적인듯한
돌무덤이 나오고 회룡목장으로 연결하는 희미한 고개가 연결된다.
서낭당 고개를 가로질러 다시 편한 능선으로 걸어간다.
이곳이 실제 회룡재(回龍峙)라고 한다
소나무 사이 길을 걷는데 머리가 개운하다.
연세가 많으신 덕산고문님과 알쏭아우님과 세상사는 얘기를
나누면서 여유로운 산행을 계속 이어간다.
봄이오는 소리가 들리시나요?
회룡재(回龍峙:340m:11:25)
상주시 공성면 봉산리 골가실 마을에서 모동면 회룡리를 거쳐서 상판저수지로
연결하는 고개로 이곳 고개 우측으로는 엄청나게 큰 회룡목장이 자리를 잡고있다.
회룡재의 유래를 보면 풍수에서 재의 형상이 용이 뒤돌아 보는 형세라고 해서
회룡재라고 부르는데 백학산에서 고도를 낮춰 이곳까지 왔다가 큰재를 지나
다음 구간인 국수봉과 용문산에 오르는 용트림의 地勢라 그렇게 부르나? (범여의 생각中에서)
임진란 후에 생긴 마을로 예씨(芮氏)와 옥천전씨(全氏)가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회룡재 우측에 있는 농장에서 올라오는 축산 분뇨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4년전에 많았던 소들은 눈에 뛰질 않는다. 사실 요즘 소. 돼지, 닭을 키우는
농가들이 상당히 힘이드는 모양이다. 우리 셋째 형님도 양평에서 꽤나
큰 양계장을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고기값은 폭락하는데 식당에서 고기값은
그대로이니... 새로 출범한 정권에서 이 문제를 잘 풀어셔서 생산자와 농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구조를 만드시길... 중간업자의 농간을 차단하시어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구조를 만드시길 기대한다.
또다시 이곳 양지에서 자리를 잡고 마지막 베낭을 비운다.
마지막 남은 소주와 포도로 원기를 보충하고 이른 새벽에
산행을 시작한 탓인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피로회복으로 가져온 박카스를 마시고 나니 조금은 나은 느낌이다.
생강나무에 꽃이피기 시작한다.
등로사이에서 바라본 회룡목장의 모습
안부 능선으로 내려오니 회룡목장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나온다.
회룡목장(11:50)
목장도로를 타고 100m 정도를 내려오다가 다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엉터리 이정표
회룡목장에서 이곳까지 포장도로를 따라서 걸어오는데 2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10분소요라고 적혀있다. 산꾼들을 굼벵이로 아나...
아님 굼벵이 이정표란 말인가... 이 구간 이정표는 믿지마시고 참고만 하시길,
능선으로 올라서니 대간길 가운데에 연달아 묘지 2기가 나온다.
그러면서 그냥 마실길 걷듯이 편하게 대간길을 이어간다.
왠 심사가 꼬였는지 등로길에 비비 꼬여있는 노거수 2그루를 만나고...
상주시 공성면(功城面)의 모습
사방이 백학산(615m)·국수봉(760m)·백운산·서산(506m) 등으로 둘러싸여 전형적인 산간분지를 이루고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남천이 수지상 하계망을 이루며, 마름모꼴의 충적평야를 형성했다.
효곡리·우하리의 인삼재배와 봉산리의 양잠이 활발하고, 유적으로 초오리사지와 상주무곡리폐탑이 있다.
옥산(玉山)·금계(金溪)·장동(掌洞)·거창(巨倉)·영오(靈梧)·이화(以花)·산현(山玄)·평천(平川)·무곡(茂谷)·
용안(龍安)·초오(草梧)·인창(仁昌)·용신(龍新)·효곡(孝谷)·봉산(鳳山)·오광(五廣)·우하(于下)·신곡(申谷)·
도곡(道谷) 등 19개 동리가 있다
큰재가 점점 가까워 지는 모양이다. 차량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잠시후에 대간 능선길에 엄청나게 큰 봉분의 무덤 2기를 만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봉분은 크지만 비석이나 상석은 없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양지바른 무명 묘지에 개한마리를 가진 분이
누워 계시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 산악회의 띠동갑인 원일님이시다.
오늘 산행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참으로 멋진 어른이신데(?)
드디어 큰재에 있는 백두대간숲생태원을 지나 도로가 욕쟁이 할머니집 마당에
세워진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로 향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학교라서 우측
마을길로 내려왔는데 지금은 대간 능선이 하교 가운데로 통과한다.
오늘 처음으로 후배산꾼이 찍어주는 바람에 인증샷을 남긴다.
백두대간숲생태원
고갯마루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폐교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가 있던 자리에 백두대간 숲생태원이 있다.
'부산녹색연합 생태학교 백두대간교육센터'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산림청에서 세운 <백두대간숲생태원>이 세워진 건물이 있는데
마치 고급 펜션같은 느낌을 주는데 대간 산꾼들이 얼마나 이용을 하는지
몰라도 비지니스 마인드로 볼 때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듯 싶다.
산림청에서 운영하니 적자가 나도 세금으로 메우면 되겠지만 개인이나
기업이 이윤창출을 계산하면 전혀 아닐듯 싶다.
백두대간숲생태원 준공석
4년전 페교된 학교 건물에서 북진 날머리인 이곳에서 수풀림 아우님이
울진에서 공수한 문어에다가 코가 비툴어지도록 마신 술판 기억이 아련한데...
오늘 아우님이 동참하지 않은게 아쉽기만 하네.
큰재(320m:12:45)
상주시 모동면에서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2차선 아스팔트 고갯길로서
이름이 큰재라고 하지만 고도를 잔뜩 낮춘 탓인지 큰재라는 느낌은 전혀없다.
공성면의 3번 국도와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고갯마루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폐교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가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산림청에서 세운 <백두대간숲생태원>이 세워져 있다.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 교적비
백두대간 상에 있는 유일한 학교인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다.
도로 안쪽에는 1949년 11월 개교하여 597명의 학생을 배출하고
1997년 3월 폐교되었다는 내용이 적힌 교적비가 있다.
4년전 이곳에 사시던 욕쟁이 할머니네 마당에는 큰 차를 댈만큼
넓은 주차장이 있고 우리의 愛馬가 거기에 서있다.
4년전 여름 국수봉에서 내려와 씻으려고 물 좀 썼다가 할머니한테
엄청나게 욕을 얻어먹은 기억이 생생한데... 할머니가 얼마전 돌아가셨단다.
이곳에서 장비를 정비하고 버스에 올라 모동면소재지로 향한다.
이곳이 삼국시대에는 신라에서 경주 다음으로 큰 고을이었다.
또한 삼국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격심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격전지로 아주 긴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낙동강 중류지역의 중심지였던 창녕 일대가 비사벌주(比斯伐州)라면 상주(尙州)는 상류지역의 중심지로
신라의 사벌주(沙伐州)로 말기에는 아자개가 점령을 하고 그의 아들 견훤은 후백제를 일으켰으나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격화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신검에 이르러 왕건에게 몰락하게되는 후삼국시대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던 곳이다.
버스에서 찍은 상판 저수지
이곳 상주시 모동면에 있는 저수지는 낙동강과 가까운 곳이지만
이곳 물은 충청도로 흐르는 금강수계로 흘러 들어간다고 한다.
저수지를 지나자마자 깊은 잠에 빠진다.
모동면소재지 식당가는 잠깐 사이에...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를 끝내고
서울로 도착하여 집에 오니 저녁 5시 30분밖에 되질 않았다.
오랫만에 일찍 온 탓에 한 집에 같이사는 아들을 오랫만에 본다.
둘이서 통닭 한마리 시켜서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백두대간 2차 남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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