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3월 24일(무박산행)
☞산행날씨: 맑은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19.67km/ 8시간 소요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와 함께
☞산행코스: 큰재-475봉-683.5봉-국수봉-용문산 기도원 갈림길-용문산
도치랑 갈림길-기도터 바위-474봉(무좌골산)-작점고개-포장도로
난함산 갈림길-사기점 고개-곤천고개-502봉-매봉재-금산-추풍령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공성면, 모동면 / 김천시 어모면,봉산면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자고로 옛 先人들이 하신 말씀 왈(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거늘
근데 요즘 뉴스 보기가 겁이난다. 명색이 우리 사회 지도층이 썩어도 이렇게
썩은 줄은 예전엔 몰랐었다. 국방장관 후보자로 내정됐던 자가 무기중개 로비스트도
모잘라 전 국민이 애도했던 천안함 폭침사건 때 골프를 치지 않았나?
법무차관으로 내정됐다 10여일만에 낙마한 자는 성상납이란 입에 담기조차
힘든 지저분한 일까지... 거기다가 국무위원으로 지명됐던 자들이 한결같이
부동산 투기 등 온갖 불법은 다 저지르고 거기다가 자녀들은 한결같이
병역면제냐? ... 당신네 자식들은 왜그리 군대도 못가는 XX들만 있단 말인가.
茶山 선생이 지하에서 벌떡 일어날 일만 생기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늦으나마 박 대통령이 지명철회를 했으니 참으로 다행이긴 하지만
부정을 저지른 자는 一罰百戒로 다스려 원칙이 바로서는 사회를 만드시길.
국민들이 낸 祿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국민들에게 下心으로 봉사할 생각은
않고 맨날 군림 하면서 못된 짓거리나 일삼으니... 한심해도 정말 寒心하다
난 박 근혜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다. 대통령에게 부탁하고 싶다.
대통령 重任할 일 없으니 인기와 지지율에 연연하지 마시고 평소하던대로
원칙을 지키시어 功過로 정책을 펴시길... 나중일은 歷史가 판단할 일이고...
청렴과 원칙을 생명으로 하여 국민을 하늘로 섬기는 정책을 펴시길 바란다.
民心이 天心이라 하지 않았던가요. 기득권층에 휘둘리지 말고 과감한 개혁을
해주시고 이번에 사건에 연루된 문제의 공직자들 과감하게 처리하시길...
내 사람을 중용하여 인의 장막에 갇히지 마시고 과감한 인재를 등용하시길 바란다.
특히 국가가 百尺竿頭에 있는데 국가의 안위를 책임질 군인들이 골프장에
있었던 자들은 맨날 골프장에서 골프만 치게 과감하게 옷을 벗기세요.
대한민국에 숨어있는 인재들 엄청 많습니다.
오늘도 답답한 가슴을 안고 밤 11시 20분에 백두대간 산행길에 오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지난주 월요일 밤늦게 고향선배에게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자기 사촌인 종석이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내용이다.
그 친구는 시골 우리집 바로 아래에 살았던 친구로 나는 서울서 살고
그 친구는 진주와 김해에 살았던 관계로 내보다 한살 위이긴 하지만
친구로 지내면서도 그리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선배에게 이런
문자를 받고나니 갑자기 남의 일같지 않아서 1주일내내 우울하기만 하다.
아직 60도 안 된 나이도 뭣이 그리도 급하기에 하늘나라로 떠났단 말인가?
슬프고 울적한 마음에 혼자서 이틀동안 폭음을 하였다.
친구여! 부디 왕생극락을 발원한다...사바세계의 집착은 버리시고 고이 잠드소서.
큰재(320m:04:40)
서울에서 자정에 출발한 버스는 오늘 산행 길이가 짧은 관계로 휴게소에서 휴식시간이 길어진다.
처음 휴게소는 깊은 잠에서 빠져 어딘지 모르고 2번째 휴게소인 당진~상주간 고속도로
화서 휴게소에서 1시간 가량 휴식을 취한후에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모동면으로 빠져야 하는데
지난번 기사분이 아니라서 그런지 영동쪽으로 빠지는 바람에 버스가 알바한 덕분(?)으로
새벽 4시반이 넘어서야 오늘의 들머리인 큰재(상주시 공성면)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에 별은 금방이라도 쏟아질듯하고 약간의 바람이 불어온다.
버스에서 내려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산행준비를 하는데 오늘은 모두들 여유가 있다.
대장의 인원 점검이 끝난후에 서서히 들머리 능선으로 접어든다.
4년전 백두대간 북진길에 큰재에서 내려와 땀에젖은 몸을 좀 딲으려고 이 집에
들려 수돗물 썼다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은 집이다. 산꾼들에겐 욕쟁이 할머니로
소문난 집이었는데 지금은 그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신곡리 남실마을 표시석 앞 도로에서 좌측 들머리로 접어들어 산행을 시작하다.
상주시 공성면 신곡리에서 도곡리를 넘어가는 920번 지방도 지나는 곳으로
이 신곡리는 일면 납실 또는 남실이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김천에
살던 신씨(申氏)가 이곳으로 피란와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신곡(申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어둠속에 동료 산꾼들이 사라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좌측 공성면지역은 아직도
깊은 밤인지 불빛만이 저곳이 마을임을 알려준다. 등로는 아주 양호하다.
475봉(05:15)
큰재에서 출발한 지 30분만에 475봉에 도착하여 물 한모금을 마신다.
오늘따라 선두들도 도망(?)가지 않고 후미를 기다리는 여유를 보인다.
모두들 다 모여서 선 채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683.5봉(05:35)
475봉에서 출발한 지 20분만에 683.5봉 능선에 도착한다.
대간길 가운데 있는 삼각점은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국토지리원에서는 다시 재설해야 할 듯 싶다.
좌측 아래 나무에 걸려있는 아크릴 표지판에는 민영봉이라 쓰여있다.
683.5봉 삼각점
대간길 가운데 있는 삼각점을 지나 좌측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어둠속이지만 이 지역은 마사토 지역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선두 그룹들은 벌써 저 멀리 국수봉 오름길로 올라가는지 헤드렌턴 불빛만 보인다.
683.5봉 아래에는 4년전에도 있던 표지판이 아직도 그대로이다.
예산이 없는건지, 성의가 없는건지, 의지가 없는건지 알 수가 없다.
서서히 고도를 높혀서 국수봉으로 향하는데 여명이 밝아오면서 사물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국수봉(掬水峰:763m:05:50)
경북 상주시 공성면 영오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최근엔 지명이 웅이산(熊耳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두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물을 뜬다는 의미의 掬水(국수)’, 라 부르는데
뜬 물은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내리게 마련이다.
말인 즉 국수봉 또한 물을 가르는(낙동강과 금강을 가른다) 분수령이라는 뜻일게다.
큰재에서 남쪽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상에 솟은 산으로 맑은 낮에 국수봉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민주지산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날이면 백두대간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되는 곳이다.
오늘은 어둠속에 산행을 하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간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山)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정상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고 아울러 낙동. 금강의 분수령이므로 국수(菊水)라 한 듯 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하여 웅이산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어둠속에서도 인증샷을 하나 남기고...
2009년 3월 22일 4년전 백두대간 북진 길에서... 저 땐 영계였는데 ㅋㅋㅋ
世波에 찌든 범여도 이젠 많이 늙었다. 가는세월 어찌하랴. 막을수가 없으니.
지나온 구간의 백학산도 아련히 보이고...
여명이 밝아오건만 상주시 공성면쪽은 아직도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보인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고 전망도 좋아 일출 감상은 최적의 코스이지만
시간이 맞질않고 조금 서있으니 추워서 일출 감상을 표기하고 아쉬움만 남긴 채
용문산으로 향한다. 편한길에 양탄자가 깔린듯한 낙엽이 수북한 길을 내려선다.
지나온 국수봉의 모습
날이 밝아지면서 사물이 뚜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용문사 갈림길(06:20)
상주시에서 워낙 이정표 설치를 잘해놔서 알바할 일은 전혀 없을듯 하다.
그런데 이정표의 거리와 시간은 전혀 맞지 않아서 실망스럽다... 조속히 시정하시길.
용문산 기도원 갈림길(06:30)
이곳부터 좌측은 지난구간부터 쭈~욱 대간길을 같이 걸어온 상주시(공성면)와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김천시 어모면과 대간길을 같이하기 시작한다.
기도원 갈림길에서 내려섰다가 다시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예전에
없었던 나무계단들이 많이 설치되어 대간꾼들에 지장을 주고있다.
물론 토사유출 방지를 위한 고육책이긴 하지만 산꾼들에겐 계단은 쥐약이다.
계단 설치를 피하고 토사유출도 방지하는 시스템은 없는지...
계단을 올라서서 능선위로 오르는데 좌측에 무명묘지 1기가 있다.
이상하게 생긴 소나무와 갈참나무를 만나고...
잠깐 걷는 사이에 日出을 놓쳐 버리고 해는 벌써 中天으로 떠올랐다.(06:43)
등로에서 바라본 김천시 어모면(禦侮面)
삼한시대 이전은 미상이나 구전으로는 어모국(禦侮國)이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시대에는 금물현(今勿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경덕왕 16년)에 어모현으로
개칭하여 개령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경산부(京山府. 星州)에 일시 예속되었던 적도 있었다.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정종(定宗)의 태(胎)를 봉안하였다 하여, 1416년 어모 김산을
합하여 김산군이라 칭하였고, 이 지방은 천상면. 천하면. 구소요면이 되었다.
1914년 김산을 김천군이라 개명하였고, 1920년 천상면. 천하면을 합하여 아천면이라 하였으며,
1934년 아천면과 구소요면을 합하여 어모면이라 칭하고 그 관하에 13개동을 두었다.
《대동지지》를 따르자면 금산의 옛 이름이 어모(禦侮)였음을 알 수가 있다.
어모는 한자로 적혀 있으나 기실은 어머니에 대한 김천의 방언으로 적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니까 감천에 어머니 신격을 부여하던 그 시기에 거북 신앙과 물 신앙이 한데 어우러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이르러 1398년에 김산현의 황악산에 정종의 태를 봉안하고 김산군으로 승격되면서 별호를
금릉(金陵)이라 하여 어모현을 폐합하였다. 1601년에 아포에서 역모가 있어 개령현이 김산군에
폐합되었다가 9년만에 복원 되고, 1629년에 김산군에서 다시 역모가 일어나 김산군은 김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1년만에 복원되기도 했다.
김천의 위치 및 자연환경
경상북도 서북부의 관문으로 서쪽에 충청북도 영동군과 전라북도 무주군과 접경을 이루고,
남쪽으로 경상남도 거창군, 동쪽으로 칠곡군. 성주군. 구미시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 으로
상주시와 인접하며, 중앙에 김천시가 위치하고 있다.
또한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경북선 철도가 지나며
국도 3, 4, 30호선이 동서남북으로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울에서 250km, 부산에서
190km 떨어져 있으며, 대구와 대전의 중간 지점으로 동경 127°와 북위 35°어름에 자리하고 있다.
소백산맥이 서남으로 뻗으면서 추풍령(235m). 황악산(1,111m). 삼도봉(1,176m). 대덕산 (1,291m).
우두령, 수도산(1,327m)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으며, 동으로 살티재(箭嶺). 별 미령. 백마산(716m).
금오산(977m)이, 북으로 백운산(618m). 여남현(汝南峴). 용문산 (710m)이 백두대간의 정기를 이어가고 있다.
삼도봉에서 발원한 부항천과 우두렁에서 발원한 감천(준용하천)은 지례면 도곡리에서 합류하여
김천시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류하며, 추풍령과 황악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 리는 직지천은
김천시 신음동에서 감천(직할하천) 본류와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르고 있으며, 대체로 지형은
산악지대로 전체 면적의 7할을 산이 차지하고 있고, 감천 양안으 로 평야를 이루고 있어 가히
감천이 낳은 천혜의 곡창이라고 하여 지나침이 없다.
김천은 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 후기부터 일제시대 말기까지 우리나라 5대 시장의 하나로 발전해
오다가 광복후는 쇠퇴하고 지금은 공업의 부흥으로 농공복합의 지역으로 발 돋움하고 있다.
응북리 갈림길(06:50)
가야할 용문산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고...
등로에서 바라본 용문산 기도원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근처에 기도원(애향숙:愛鄕塾)을 세운 뒤, 일명 용문산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곳이다.
서울과 부산 사이 바로 중간에 위치하고, 영남과 호남의 분계선이며, 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남북 양대 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의 특성으로, 남한 중심에 위치한 소위 '성산'으로 파악한 것이다.
초창기 애향숙은 신앙적인 목적보다 일제하의 설움에서 오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출발하였다가 이후 애향숙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기도원 운동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라 한다.
현재 전국 3만여 명의 신도가 연중행사로 기도대집회를 열고 있다.
1979년 3월 30일 미국 오순절(五旬節) 성결교회와 제휴하여 대한예수교 오순절 성결교회를 설립하고
제단법인체를 구성하여 7명의 인사로서 사무, 전도, 교육, 출판, 농림, 건설, 후생의 7국을 각기 분담하여
용문산기도원 사업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있다고 한다.
용문산 정상 이정표
용문산(龍門山:710m:07:00)
경북 김천시 능치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응북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옛 지명은 맷돌봉이라고 불렀다.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이 있다.
1800년 무렵 박송이란 유생이 산세를 보고용문산(龍門山)이라 이름 지었고,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기도원인 애향숙(愛鄕塾)을 세우고,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는
누구나 다 용납하고 만나 준다’는 뜻으로 ‘용(龍)’자를 용서하다는 의미의 ‘용(容)’자를
써서 용문산(容門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25000 지형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산이지만 용문산기도원(일명 용문산 신앙촌)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경북 상주군 공성면 백학산, 국수봉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 산줄기가 용문산을 지나 갈현(葛峴), 사기점고개,
추풍령(秋風嶺)으로 이어지며 이 일대 백두대간 산줄기 높이는 500~700m로 대체로 낮은 산지를 이룬다.
능선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고, 동쪽 비탈면인 용문산마을에서는어모면의 주요
하천이자 어모천을 대표하는 지명인 아천(牙川)이 발원하여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다가
갈현 부근에서 발원한 아천의 다른 지류와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본류를 이룬다.
영동군에 속하는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반계천과 추풍령천을 이루어 초강으로 흘러든다.
용문산 삼각점
용문산 정상에서 바라본 지장산과 학무산
아침 만찬(07:10~08:00)
목적 산행을 하는 산꾼들답지 않게 여유로운 아침 만찬을 즐긴다.
호남정맥을 같이한 동료산꾼들이 많은 탓인지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올만에 소주, 막걸리, 중국에서 가져온 독주까지 마시고 소고기에다
만두국까지 범여의 입은 오랫만에 호강을 한다.
여유로운 식사가 끝난 다음에 용문산 정상 헬기장에서
단체로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떠널 준비를 한다.
떠나기 직전에 워밍업을 준비하는 동료산꾼들
떠나기 직전에 워밍업을 준비하는 동료산꾼들
용문산에서 출발하여 로프가 있는 암릉을 잠시 내려갔다가
그리 힘들지 않는 687봉을 오른 다음에 내려서니 도치량마을로
내려가는 희미한 길이 보이는데 그냥 지나치기 좋은 길이다.
도치랑 마을 갈림길에서 만난 생강나무꽃
다시 고도를 조금 높이기 시작하니 움막이 나타나고...
기도터 바위(08:28)
4년전에 대간길에는 무속인인듯한 자가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는 않은듯 보인다. 움막터 뒤에
있는 바위가 지도상에는 기도터 바위라고 표시되어 있늗데
기도가 잘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도 영험을 보지 못해서 ㅋㅋㅋ
옻이 많이 생산되었다는 도치량 마을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움막이 있는 기도터 바위에서 급경사를 내려온다.
이곳 능선은 중화대지구라 그런지 참으로 편하다.
다만 낙엽이 많아 먼지때문에 고생은 되지만 말이다.
고도를 낮추니 움푹파인 고개가 나오는데 이곳인 갈현이라 불리는 칡고개이다.
갈현(葛峴:08:35)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에서 경북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도치량으로
넘나드는 고개로 갈현 또는 칡고개라 부르는데 예전에 칡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 고개 아래에 도치량마을은 최근까지도 옻(漆)이 많이 생산되어 옻칠을 하는 행랑
즉 도칠랑(塗漆郞)이라 하는 것이 변음이 되어 그 후 도치량(道治良)으로 변했다고 한다
갈현에서 부터는 그야말로 룰루랄라하면서 편안 안부길을 걷는데
늘상 그렇듯이 이런 편한길을 걸으면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2~3분정도 졸면서 걷는데 잠깐사이에 몸이 개운한 느낌이다.
좌측 능선 사이로 지나온 국수봉과 용문산이 보인다.
무좌골산(474m:09:00)
에전에는 474봉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지도상에 무좌골산이라
기록이 되어있건만 그 유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아무데도 없다.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이 지역 다른산과 마찬가지로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삼각점만 덩그러니 대간길 가운데에 있다.
무좌골산 삼각점
무좌골산에서 고도편차 없이 편안한 능선을 15분 정도 걸으니 작점고개가 나온다.
작점고개 내림길로 들어서니 김천시에서 설치한 백두대간 안내도가 나오고...
작점고개에는 예쁘고 앙증스러운 옛표시석이 있고 최근에 김천시가 설치한듯한 엄청나게 큰
백두대간 표시석(4년전에는 없었음)이 있는데 구태여 비싼 세금들여서 큰 설치한 이유를
모르겠다. 이것도 보여주기 위한 전시행정이 아닌가 싶어서 씁쓰름하다.
김천시장 나리! 표시석이 없으면 모를까... 엄연히 표시석이 있는데 큰 것을 세운 이유를
우매한 산꾼 범여는 모르겠소... 제발 민초들이 낸 세금을 내 주머니 돈 생각하듯 아껴쓰소
능치쉼터 정자
이곳은 엄격하게 말하면 영동군 작점고개가 아닌 김천시 능치고개가 맞다.
행정구역도 영동군이 아닌 김천시이다... 이름은 영동군이고 소유는 김천시 형국이다.
이곳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며 사진도 찍고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한다.
이곳에서 동료 산꾼들과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고...(이슬이님 사진 캡쳐)
작점(雀店)고개(09:15)
경북 김천 어모면 능치리에서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 넘어가는 한적한 고개로
성황뎅이 고개, 여덟마지기 고개라는 별칭도 있다 하며, 김천 어모면에서는 능치재라 부른다.
작점고개 이름은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에서 딴 것이며, 여덟마지기 고개란,
충북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성황뎅이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정작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 정자에는 ‘능치쉼터’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고갯마루 아래 능치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간 종주 자료에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는 것은,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작점리 마을은 충북 최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부터
유씨가 자리잡은 마을로 소백산 줄기이며 마을 뒷편에는 난함산 상단에 국영통신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200여년전 전국에 제일가는 유기 생산 공장이 작점리 전 지역과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일대까지 공장이 분포되어 있어 유기점포 판매상인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새‘작’자의 "雀"과 유기점포가 많아 "店"자를 따서
작점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장수하는 마을로 손꼽혀 있다.
호남정맥을 같이한 김 준길 후미대장님과 3년만에 만나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작점마을 쪽으로 내려가다 좌측으로 올라서니...
도로 좌측 절개지로 올라서니 능선 아래로 능치리 가는 길이 보인다
능치리 가는 길
능치리는 예로부터 도요지가 많은 것을 미루어 보아 오래된 마을로 여겨진다.
1568년 평택임씨가 입향하였으나, 거의 떠나고, 몇 집만이 살고 있다.
1578년 경주최씨 진반이 황금면 반수에서 이주하였다.
능청 마을은 1889년 밀양박씨 형희가 공성 영오에서 이주하였고,
황산여씨와 풍양조씨 양문도 일찍 들어와 살았다.
능치 1리는 능점. 능청 두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초에는 어모현에 속하였다. 1
416년 김산현이 승군됨에 따라 본현을 흡수하고, 김산군 구 소요면과
아천면을 통합하여 어모면이라 개칭하고 그 관내가 되었다.
1949년 군을 금릉이라 개명하고, 1971년 능청. 능점을 합하여 능치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어모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10km 떨어진 산간 오지에 있는
두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두 마을의 거리는 800m 정도이며, 능청(能靑)에는
초등학교와 보건진료소가 있다. 동쪽은 옥계리에 인접하고, 북쪽은 깊은 골짜기로 능치 2리에
이어지고 서쪽은 충북땅인 황금면으로 이어진다. 능치 혹은 능점. 능청에서 능(能)-계의 지명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곰을 뜻하는 말이다.
능치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곰티라고 풀이하면 옳을 것으로 본다.
능선으로 올라서서 좌측 능선으로 향하는데...
우측에는 密陽朴公의 묘지가 있다.
密陽朴公의 묘지를 지나니 다시 조그만 안부가 나오고...
안부에서 좌측으로 나가니...
난함산 올라가는 포장도로가 나온다(09:43)
도로로 진입하니 좌측으로 태양광 방열판이 보이는 신애정신병원과
신애원 농장이 나오는데 농장에서 밭에 버린 가축분뇨냄새가 코를 찌른다.
포장도로를 10분정도 걸어가다가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서서 5분 정도를 걸으니 헤어진 도로를 다시 만난다.
다시 도로를 만나서 계속해서 올라가니...
길가에는 봄을 알리는 버들강아지가 보이는데 이곳은 아직은 추운 모양이다.
지난 일요일 수도지맥 합천과 고령구간에는 진달래와 생강나무에 꽃이
滿開하고 쑥과 같은 봄나물이 많이 나온것과 비교하면 이곳은 그곳보다 조금 더 추운가보다.
다시 도로를 따라서 10분 이상을 걸어 올라간다.
오늘 아침에 지나온 국수봉과 용문산을 비롯한 능선들이 보이고...
다시 도로에서 좌측 급경사의 절개지로 오르는데 햇병아리 산꾼 쾌도는
도로를 따라 진행을 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난함산까지 간 모양이다. ㅋㅋㅋ
옛말에 ‘뱁새가 황새따라 가면 가랭이 찢어진다’ 했거늘 햇병아리가 고수중에
고수인 감사님, 영만님, 준길대장 따라가다 대형 알바를 한 모양이다.
쾌도여! 그 분들은 알바해도 대처할 능력이 있는 분이다만 병아리가
고수 따라하면 안되는겨! 앞으로 기분에 충실하시게... 오늘은 비싼 수업료 낸겨
5분정도지만 오늘 처음으로 코가 닿을만큼 급경사로 올라선다.
다시 능선 안부를 걸으니 난함산 갈림길이 나온다.
난함산 갈림길(10:10)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군부대와 KBS송신소 있는 난함산이
나오는데 이곳 등로가 뚜렸하여 바짝 신경을 써야할 듯 싶다.
이곳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조금전에
올라온 만큼 내려가는데 잠시후에 헤어진 포장도로와 다시 만난다.
우이씨! 금방 내려올 길 괜히 올라간 것 같아 왠지 손해본 느낌이야 ㅋㅋㅋ
난함산 갈림길 올라갔다 내려오니 후미팀들이 도로로
가는 바람에 졸지에 맨 꼴찌가 되어 버렸다.
기왕 늦은거 길빛 아우님과 캔맥주 하나 나눠 마시고 여유롭게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추풍령으로 향한다.
우측으로는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여유롭게 산행을 한다.(10:15)
능선으로 접어들어 안부 능선을 따라 내려가니 잠시후에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를 진행하다가 잠시후에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사기점 고개(沙器店:390m:10:40)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沙器店)고개다. 이 고개 북쪽 너머는 영동군 추풍령면의 작점리다.
사기점 (沙器店) 고개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서 편안한 안부 능선을 걷는다.
능선 주위에 있는 생강나무꽃은 이제사 노란 꽃봉오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조그만 무명봉에 올라섰다가 다시 평평한 안부길을 걸으니
좌측으로 난함산이 산꾼 범여를 반기는 듯 하다.
난함산(卵含山:733.4m)
대간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난함산(卵含山)은, 다수의 백두대간 종주 자료에
묘함산(卯含山)으로 표기돼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 '卯含山'이라
표기돼 있기 때문이 빚어진 일이다. 그러나 현지명은 분명 난함산(卵含山)이다.
현재 난함산 정상에는 한국통신의 무선통신 중계소가 있는데, 그 이름도 난함산 중계소였다.
지도를 만들 때 난(卵)자가 묘(卯)로 오식된 게 확실해 보인다. 산의 형국이 알을 품고 있다 해서
명명된 것일 텐데, 십이지(十二支)의 넷째이자 동쪽을 가리키는 말인 묘(卯) 자가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아마도 한문에 ‘알 난(卵)’을 ‘토끼 묘(卯)’로 잘못 해석한
해프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범여의 생각 中에서)
그래서 한문 교육 부활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지명의 70%가 한자인데 안 가르치니...
500봉(11:05)
다시 조금 힘들게 힘들게 치고 올라서니 500봉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먼저간 우 진권 대장과 동료산꾼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와 길빛 아우님은
난함산 갈림길에서 맥주 마시는 통에 꼴찌라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죽기살기로 왔는데 도로로 가신 분들이 난함산으로 갔다고
기다리는 중이란다. 그 덕분에 이곳에서 여유있게 간식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한다... 햇병아리 쾌도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힘들다고 도로로 갔는데 ...
이것에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금산 방향으로 향한다.
내려섰다가 다시 조그만 437.5봉을 거쳐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곤천고개(11:19)
김천시 봉산면 곤천마을에서 영동군 추풍령면 작동마을과 작점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무심코 가면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이다.
지도상에는 옛고개로 표기가 되어 있다.고려 말까지는 마을 앞에 건천내가 있어 건천이라 하였으나.
그 후 음향오행설에 의해 조선시대 황간군 백호촌장 손정만이 곤천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손씨를 비롯하여 여러 姓氏가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502봉(11:28)
502봉에서 내려와 평지 비슷한 능선길에는 海州吳公의 묘지가 나오는데
백두대간 산꾼들에게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주는 묘지이다.
죽어서도 봉사를 하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아침에 지나온 구간인 국수봉과 용문산이 아직도 보인다.
오늘 산행은 ⊃형태로 빙 둘러오는 코스이라 지나온 구간이 한 눈에 보인다.
수줍은 색시마냥 다소곳이 산꾼을 반기는 진달래 꽃망울
능선 우측 나무 사이로 꽤나 커보이는 추풍령 저수지(충북 영동군 소재)가 보인다.
498봉(12:00)
멋진 소나무와 암릉이 있는 498봉에서 급경사로 내려선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산행하기는 최적의 날씨이다.
보스 아우님과 하늘마음님과 함께 이런저런 세상사를 얘기하면서
재미있게 산행을 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와서 능선으로 살짝 비켜나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나니 몸이 훨~~~ 가벼워진 느낌이다.
멋진 암릉사이로 우회를 하여...
지나온 500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고...
다시 조그만 무병봉에 올라섰다가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상처투성이로 산의 절반밖에 남지 않은 급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울님만큼이나 예쁜 생강나무꽃도 산꾼을 반기고...
매봉재(12:15)
드디어 흉물스러운 금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난 이 구간이 3번째 길이다.
올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오만하고 탐욕스런가를 느낀다.
저 북쪽의 백두대간길 자병산 구간과 마찬가지로...
그래도 파 먹을만큼 파먹고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는지 아님 강제적
행정 명령에 못이겨 그런지는 몰라도 나무들을 조림해놨다.
등로에서 바라본 금산(金山:370m)
경북 김천시 봉산면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북지역에서 보면 산이 온전하게 보이나 충북지역은 산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반쪽만 남아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채석장 개발로 대간 자락의 북사면 절반이 사라진 산으로, 자병산과 더불어 대표적인 백두대간
훼손 지역으로 꼽힌다. 일제 때부터 석재를 파기 시작하다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용 자갈 공급, 그 다음에는 고속 전철용 자갈 공급을 위해 깎아졌다.
채석을 중단한지는오래 되었고 사태 방지 등의 정리 공사한 후 방치 되고 있다.
아찔한 벼랑으로 변해버린 산 정상에는 어느새 인적이 뜸해진
백두대간 종주로가 벼랑과 평행선을 그리며 아슬아슬하게 뻗어있다
금산 오름길에도 봄은 오고있고...
금산은 이래저래 상처 투성이다. 경북지역은 최근에 산불이 났는지
나무들이 火魔를 입어 시커멓게 그을려 있어 보는 산꾼들을 안타깝게 한다.
지나온 능선들을 뒤돌아 본다. 범여의 숏다리가 많이도 걸어왔다.
금산 정상(12:25)
금산 정상에서 작점고개 넘어가는 도로를 바라보는데
도저히 현기증 때문에 더 이상을 바라볼 수가 없다.
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경상북도 금산군(金山郡)에 소속된 황금소면(黃金所面)지역으로 교통의 요충지라
고려 때부터 추풍역(秋風驛)을 설치하였다. 황금이란 지명은 현 사부리에 있었던
황보(黃寶)와 금보(金寶)라는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1906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충청북도 황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황간군 오곡면(吾谷面)의 일부와 경북 상주군(尙州郡) 공성면(功城面)의
일부를 병합하고 사부리(沙夫里), 추풍령리(秋風嶺里), 죽전리(竹田里), 작점리(雀店里), 관리(官里),
지봉리(池鳳里), 신안리(新安里). 계룡리(溪龍里). 웅북리(熊北里) 등 9개리로 개편하여
황금면(黃金面)이라 칭하고 영동군에 편입하였다.
1971년에 추풍령리를 추풍령1구와 2구로 분리하였고 1982년에는 신안리를
상신안리와 하신안리로, 1984년에는 관리를 관리와 학동(鶴洞)으로, 작점리를 작점과
작동으로 분리하여 14개 이동이 되었다. 1985년 관리를 관리와 후리(後里)로 분리하여
9개 법정리, 15개 행정리, 31개 자연마을을 관할하게 되었고, 1991년 7월 1일부터
지방자치법에 의거하여 군 조례 1332호로 추풍령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人間의 傲慢과 貪慾으로 인해 회복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금산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후손에게 물려줄 자연. 더 이상 훼손은 안된다.
착잡한 마음을 안고 아슬아슬한 정상을 내려와 추풍령으로 향한다
정상을 내려와 금산 정상 이정표가 있다.
4년전에는 정상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했는데...
금산의 유래와 내역을 적은 이정표
금산은 탐욕스런 골재 채취업자의 표적이 될듯싶다
산 전체가 암석으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
금산에서 추풍령 고개로 내려간다.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 추풍령 휴게소가 보인다.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 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
(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 준공기념탑"
경부고속도로의 가장 중간인 추풍령 휴게소에 준공 기념탑이 서 있다.
이 기념탑의 설명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우리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이 고속도로를
자랑하기 위하여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의 중간이며 가장 높은 이곳 추풍령에
건설과 번영을 상징하는 높이 30.8M의 탑을 세운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건설된 고속도로로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의 아우토반을 보고 온 뒤 감명을 받아
특유의 군대식 밀어붙이기로 건설한 도로라고 잘 알려져 있다.
공기는 불과 2년 5개월에 불과했습니다.
최단기간 건설로 기네스북에 오른 고속도로,
전국 일일 생활권 연결로 산업화 시대를 열어젖힌 조국 근대화의 기수.
경부고속도로를 수식할 때 흔히 하는 말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커팅식(1970년 7월 7일)
금산에서 추풍령을 내려가는데 햇빛은 따갑기만 하다
저너머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와 경부고속도로 그리고 기차가 지나간다.
바로 앞에는 김천과 영동을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을 지나간다.
내륙 한양길의 절반 - 반고개인 추풍령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금산에서 추풍령 내려가는 길에는 예전보다 큰 비닐하우스가 들었다.
비닐하우스 단지를 끼고 추풍령 고개로 향한다.
능선에서 내려와 비닐하우스 좌측을 돌아 내려간다.
금산 내려오는 길(12:35)
다음 구간에 가야할 눌의산도 보이고...
새로생긴 김천~영동간을 잇는 4차선 추풍령 4번국도의 모습
도로옆에 서 있는 백두대간 이정표
백두대간 산꾼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있는 모텔 카리브 앞 도로인
추풍령고개에서 있는 추풍령 노래비에서 오늘 산행을 마친다.
추풍령(秋風嶺:221.3m:12:40)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룬다.
높이가 221로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추풍령은 죽령,조령, 화령과 함께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4대 고개였다.
그러나 다른 고개에 상대적으로 비해 낮기 때문에 관방으로서의 역할이
미약했던 것 같다. 관방이란 방어진지 또는 요새 개념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을 조령과 추풍령으로 정했다.
왜군이 이들 두 고개를 너머 충주와 청주를 진출한 다음에 한양으로 입성했다.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최고의 문장가인 다산 정약용은 ‘추풍령을 넘어며’라는
시를 지어 임진왜란 때 이 고개를 지키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지금은 추풍령을 넘어 대전과 천안을 지나 서울로 이어지지만 옛날에는
청주와 죽산(지금의 안성땅)을 지나 한양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태백산 소백산이 산세도 장하구나.
달리던 용의 머리 여기에서 수그려.
북쪽으로 통한 시내 황간으로 달려가고
서쪽으로 뻗은 산은 적상산을 에워쌓네
봉마다 우뚝우뚝 성벽은 쌓였다만
이 재가 요새란 걸 어디 누가 안단말고
청주 고을 큰 들판 천리에 트였으니
추풍령을 빼앗기면 멱살을 잡히리라
남상규 노래비가 있는 추풍령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가수 남상규님의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그 옛날 남쪽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 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 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秋風으로 불리고 있다.
가수 남상규씨 노래로 힛트한 추풍령 영화 포스트(1965년)
* 장르 : 드라마 / 가족
* 개봉 : 1965 .4 .23 (대한연합영화사)
* 기획 : 전옥숙
* 제작 : 홍의선
* 감독 : 전범성
* 각본 : 전범성
* 출연 : 김진규, 이경희, 최남현,석일우, 박종화, 한은진
* 음악 : 정윤주 ,주제가(남상규 - 추풍령)
* 수상 : 대종상 조연상(최남현),2006 여성영화인상 공로상(이경희)
* 내용 : 가난한 철도원의 아름다운 삶을 담은 이야기
3대째 내려오는 추풍령 토박이 선로수 박춘보(김진규)는
선로수 직업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아들을 대학에 진학시켜 나중 그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철도국의 간부로 임명된다는 훈훈한 인간승리의 드라마다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 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기적도 숨이차서
목메여 울고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떠나간 아쉬움에
뼈에 사무쳐
거치른 두뺨 위에
눈물이 어려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원래 이 노래는 이미자가 부르기로 한 것을 몇군데를 수정하여 남상규가 불렀다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노래는 대힛트하여 남상규라는 이름을 가요계에 최초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추풍령 노래비 옆에 있는 영동관광 안내도
추풍령에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는데 나를 태우고 온 愛馬는
나만 빼놓고 사라져 버린다. 근데 난감하다. 난 대장과 총무 전화번호를
비롯한 그 누구의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리고 식당도...
버스가 간 곳으로 한참을 가도 버스와 식당은 보이질 않고 하여 다시
충북 영동쪽으로 올라가는데 자가용 한대가 서서 나를 태우는데
동료 산꾼들이 차를 가지고 온 모양이다. 같이 식당으로 향한다
도로 굴다리를 건너 김천쪽으로 내려가니 우측 광장에
청풍명월의 고장 충청북도 표지석이 서있고 그 옆에는
진사와 군수를 지낸 분의 공덕비가 서 있다.
진사와 군수의 공덕비
공덕비를 지나서 식당을 찾아서 김천쪽으로 내려가는데 우측에
‘또 오셔요 함께하는 충북’ 안내판 아래에 “당마루(唐嶺) 광천2리”이라는
조그만 검정색 오석비가 앙증맞게 서 있다.
고추장돼지갈비로 유명한 추풍령할매갈비와 고갯마루의 광천2리가 10여m
거리에서 경북 김천시와 충북 추풍령면을 가른다.
광천 2리의 표석에 왜 당마루(唐嶺)라고 써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영남과 호서의 접경인 당마루(唐嶺)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강점기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우측 추풍령 광장에는 산수유가 피기 시작한다.
식사 장소인 옥희가든 가는 길
옥희가든에 도착을 하니 먼저 도착한 동료산꾼들이 반긴다.
그런데 이곳은 백두대간 산꾼들이 많이 이용을 하는지 식당안에
웬만한 동네 목욕탕만한 샤워장 시설을 갖추고 1회용 면도기와
치솔, 비누, 타월까지 제공하는데 너무나 좋다.
식사야 집행부에서 계산을 하니 잘 모르겠고 식사로 나온
청국장도 먹을만한데다가 반찬으로 나온 봄나물이 一味이다.
거기다가 쥔장 남자분이 경상도 사나이답지 않게 나긋나긋하고 친절하다.
깔끔하게 샤워를 마친 다음에 청국장에다가 산악회에서
가져온 맥주+소주를 말아서 5잔을 마시고 나니 기분 정말 쥑인다.
거기다가 산행거리가 짧다고 난함산까지 갔다가 늦게온 동료 산꾼들
덕분에 더욱 더 여유롭게 먹고 마시니 정말 멋있게 대간 한구간을 마친다.
대간 산꾼들에게 샤워장 시설 때문에 강추하고 싶은 식당이다.
이름도 萬人의 남자들에게 첫사랑의 추억을 안겨줄 법한 옥희라...ㅋㅋㅋ
후미팀이 식사를 마친 14시 20분에 서울로 향하는데
술을 조금 과하게 마신 탓인지 깊은 잠에 빠진다.
신탄진 휴게소에 들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차에서 가져온
이스리와 산악회 회장님이 하사하신 문어로 또 술 한잔을 하고
버스에 올라 서울 집에 도착하니 저녁 6시... 초저녁에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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