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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13구간 - 도래기재에서 고치령까지

by 범여(梵如) 2013. 11. 25.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사라져간 民草들의 哀歡이 깃던 길을 걷다

 

☞ 산행일자:  2013년 11월 23일~24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맑은날씨에 바람에다 꽤나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6km   / 10시간 50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18명과 함께

☞ 산행코스: 도래기재-옥돌봉-문수지맥 갈림길-1,015봉-박달령-왕바위골 갈림길

                  1,246봉-선달산-어래산 갈림길-늦은목이-갈곶산-934봉-1,057봉-894봉

                  마구령-1.096봉-854봉-830봉-미내치-877봉-950봉(자개지맥 갈림길)-고치령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 경북 봉화군 춘양면, 물야면 / 영주시 부석면, 단산면

 

요즘은 모든게 매사에 자신이 없어진다.

자꾸만 나 자신이 心身에 힘이 부치고 뭔가에 자신이 서질 않는다.

한달 넘게 계속되는 설사가 멈췄다가 계속되고 하여 병원에서 종합검사를

받아 봤지만 특별한 증상은 나타나질 않는데 그 증상은 계속 반복되니 답답하다.

 

마치 요즘 국내 정치상황 증상과도 같은 것일까?

주변국인 일본이란 나라는 계속해서 도발을 해오고 중국이란

국가도 모두가 똘똘 뭉쳐서 국익을 위한 총성없는 전쟁을 치르건만

어떻게 된 건지 이 나라는 아직도 국회의원이란 자는 與.野 할거 없이

사사건건 자기들 이익을 위해 상대방 발목잡기에 나서는 꼬락서니...

저런 자들이 국민의 民義를 대표하다니... 앞일이 캄캄하다.

 

거기다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박 창신 신부라는 분이 대통령을 下野하란다.

그것도 북한 연평도 포격 3주기에... 그러면서 연평도 도발을 비롯한

북한의 의도대로 움직이니, 과연 어느나라 신부인지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때 희생된 젊은 군인들을 모욕하지 말았으면 한다.

 

대통령 노릇하기 참으로 힘들겠다... 그런데 그 힘든자릴 왜 하려는지

짧은 소견으로 이해가 안된다... 맨날 먹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국회의원 자리

1/3로 줄이야지, 산적해 있는 민생 법안 처리 내팽개치고  뭐하는 짓거린지.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공사현장의 준비를 위해 하루를 부지런히 다녔더니

몸이 많이 피곤하다. 거기다가 내일 동창 아들 결혼식에 봉투 보내고

또다른 지인 결혼식에도 봉투를 보내고 모든걸 잊으려고 오늘 저녁도 대간길에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구간의 3D 지도와 고도표

도래기재 들머리(03:30)

중앙고속도로 영주 I.C를 빠져나온 버스는 꼬불꼬불한  88번 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버스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버스에서 잠을 깬다.

이윽고 목적지인 도래기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꽤나 차가운

날씨가 산꾼을 반기고 하늘에는 계사년 시월 스무 이틀날의 하현달이

별과 함께 초롱초롱... 차갑게 부는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차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준비를 한 다음에 단촐한 대간식구들이 산행을 시작한다.

도래기재(導驛峙:754.9m)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와 우구치리를 이어주는 고갯길로서 고갯마루에는 금정굴로 불리는 터널이 있어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였으나 근래에 폐쇄되고 현재는 고갯마루를 관통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이어주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88번지방도가 지나간다.

 

산행 들머리의 도래기재 안내판에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름을 따와서 도래기재라고 한다.

도래기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導驛里)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이 되어 현재는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재넘어 우구치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을 닮아서

우구치(牛口峙)라 불린다.”고 적혀있는데 영주,봉화의 윤승일님의 글은 금정으로 불리는 우구치는

금광이 열리면서 인구가 수천 명에 이르고 극장이 설치될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당시 캐낸 금이나

은 등의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도래기재 아래에는 1925년 터널이 뚫렸다.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지만 터널은 ‘금정수도’라는 이름표를 단 채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우구치리에서 금정수도까지 광물을 운반하는 삭도를 ‘도래기’라고 부른 데서 고개 이름이 연유했다는 것이

금정광산의 내력을 아는 이들의 말이다. 송아지만 한 금이 묻혀 있다는 금광은 폐광된 지 오래고

금정수도 역시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라고 한다.

데크목 계단 오르막 휀스에 걸려있는 시그널

4년전 북진길과는 달리 급경사의 오르막에는 데크목 계단을 설치해 놔서

어렵지 않게 산행을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어 편한 대간길을 걸으나 한편으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사라지는 느낌이라 안타까운 모습이다.

점점 대간길이 편한것으로 택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가 제 맛인데

이 구간은 지반번 구룡산과 도래기재 구간과는 달리 산림청에서 상당히 신경을 쓴 느낌이다.

곳곳에 표지판과 이정목 등에도 디자인이 산뜻한 느낌... 보기는 그리 싫지는 않았다.

소나무,신갈나무,물박달나무 숲이 지역은 해발 915m 지점으로 910m 이하에는 굴참나무 군락이.

920m 이상에는신갈나무 군락이 경계를 이루며 자라고 있는 생태학습장이다.

상층에는 소나무(일명:춘양목), 신갈나무가 , 중층에는 물박달나무, 굴참나무,하증에는 노린재나무,

철쭉, 생각나무,개옷나무,조록싸리,잣나무,초본층에는 미역줄나무,비비추,단풍취,잔대,삽주,노루발 등이

함께 자라고 있고 골짜기에는 피나무 군락이 자라고 있다. 

주국유림관리소에서 설치한 계시판의 내용

잠시 후에는 진달래 터널이 시작되는데 좌.우로 진달래 나무가 즐비하고

능선아래 도래기 마을의 가로수 불빛만이 사람사는 곳임을 알려준다.

능선에는 해발 1,000m 넘는 지역이라 그런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 더욱 더 춥게 느껴진다.

이정표(04:05)

550년 철쭉 갈림길(04:20)

보호수 철쭉나무 고유번호:제2006-1호 / 나이:550년 지정일 2006.5.25 / 높이5m 둘레105Cm

위치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산1-1 / 영주국유림관리소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쭉나무로서 보존가치가 있어 보호수로 지정하여 지속적인

보호관리를 하고자 함. / 남부지방산림청장

세계 최대의 철쭉나무

도래기재에서 옥돌봉으로 올라서는 길은 봄이면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곳이다.

철쭉 군락 속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든 550년 된 철쭉나무가 자란다.

백두대간 등산로에서 살짝 비껴난 비탈을 지키는 철쭉은 나무 둘레가 1m가 넘는다.

수령과 크기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경우라 한다.

가장 오래된 철쭉나무를 지나 오르막길에는 철쭉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옥돌봉 이정표

옥돌봉(1242m:04:35)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물야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옥석산이라고도

부르며 정상 아래의 하얀 바위 탓에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바위는 햇빛을 받으면 예천에서도 보인다 해서 예천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산 아래 마을은 그 빛이 비친다 해서 서벽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동여지도는 백병산으로 적고 있다.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같은 산으로 서북쪽으로는 선달산과 이어진다.

옥돌봉은 한자로 옥석산(玉石山)으로 기록되어서인지 두 가지 이름으로 불러진다.

 

옥돌(玉石)이란 귀한 것과 천한 것, 선과 악 등 상반된 뜻이 합성된 말이다.

세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나쁜 것이 있어야 좋은 것이 있으며, 좋은 것은 나쁜 것으로 인해 더욱 드러난다는

의미이니 옥과 돌은 서로 화답하며 뒤따르는 존재일 것이다 

대간은 오늘 산행의 초입에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

옥돌봉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옥돌봉에서 이어지는 거리표

옥돌봉 정상 헬기장

정상 부근은 예전과 달리 새로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고 주위도 많은 손질을 해놨다.

이곳에서 동료산꾼들과 인증샷을 남기고 후미가 오길 기다렸다가 너무 추워서

다시 길을 떠나는데 산이 높아서 그런지 주위에는 잔설이 보이기 시작한다.

문수지맥 갈림길(04:45)

문수지맥(文殊枝脈)이란?

낙동강의 서쪽과 내성천(乃城川)의 동쪽을 흐르는 산줄기로, 백두대간 박달령과

도래기재 사이에 솟은 옥돌봉(1,244m)에서 남으로 갈래친 산줄기는 문수산(文殊山 1,207.6m)으로

 내려와 봉화군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명호의 만리산(791.6m), 도산의 용두산(665m)을

거쳐 녹전의 봉수산(569.6m), 북후의 불로봉(482m)으로 이어진 뒤 안동의 조운산(朝雲山 635m)을

지나 학가산(鶴駕山 874m)에 이른다.

 

학가산으로 향하는 문수지맥은 조운산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갈래를 나누어 봉정사가

있는 명산 천등산(天燈山 575.4)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문수지맥의 원 흐름은 학가산에서 보문산(641.7m)으로 이어진 뒤 풍천의

검무산(331.6m)을 거쳐 예천군 지보면의 나부산(334m)을 지나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삼강리(三江里)를 돌아 예천의 명물로 알려진 의성포(義城浦)의

맞은편 절벽인 회룡대(回龍臺)에서 끝난다.

문수지맥 갈림길 이정표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주실령이 나온다.

실령(朱實領783m)은 기슭에 산림이 울창하여 머루, 다래 등

열매가 많이 열린다 하여 붙혀진 이름이라 한다

옥돌봉과 문수산 사이의 안부로서 봉화군 물야면과

춘양면을 잇는 915번 지방도가 지나는 아주 험한 고개이다.

오전약수(梧田藥水:사진.글 - 펌)

청송 달기 약수, 설악의 오색 약수와 더불어 우리 나라의 3 대 탄산약수이다.

조선 제8대 성종(1470~1483)때 발견된 이 약수는 이듬해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뽑는 대회에서

전국 최고의 약수로 선정된 기록이 있다.조선시대에 전국의 최고의 물 맛을 가리는 대회가 

있었다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다


이 약수는 오전리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오간던 곽개천이라는 장사꾼이 쑥밭에 누워 자다

만병통치의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꾼후 옆을 보니 약수가 솟고 있었고 이 샘이 오전 약수이다.
이 약수를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당시는 이곳이 풍기군에 속했음)를 지낸 주세붕 선생이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과 같은 물이다" 하고 약수터 옆 바위에 "말고 깨끗한 아음을 지니라"는 

휘호를 남겼다.(인생불로 요산요수)
약수의 성분은 탄산성으로 오색약수, 필례약수와 같이 혀 끝을 톡 쏘는 맛이 타 약수에

비해 뛰어나고 청량감을 비교할 데가 없어 위장병과 피부병, 심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전한다.

 

오전약수탕이 있는 마을은 예전에 쑥밭이란 뜻에 애전(艾田)으로 불리던 곳인데

이 쑥밭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지역이 물이 합수되는 지역이라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였기에

그런 뜻으로 수전(水田)이라 하였는데, 다른말로 쑤뱅이라 불리던 것이 쑥밭으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하나는 이곳 약수물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

문둥병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고 이 지역에 있는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먹고 하여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쑥밭이라 불리웠다 한다.

 

이 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쏘는 맛이 일품이며 주요성분은 유리탄산, 망간,

마그네슘이온, 염소, 중탄산, 칼슘이온, 철분으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1,015봉(05:23)

문수지맥 갈림길에서 어둠속에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계속해서 잔봉을 오르내리지만 코스 자체는 그리 힘들지는 않으나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꽤나 차갑기만 하다

도래기재에서 고치령까지 산길 65리. 이렇다 할 이름난 봉우리를 간직하지 못한 탓에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아니면 찾는 사람이 드물고 바위를 좀처럼 보기 힘든 육산이다.갈참나무와 낙엽송이 마루금까지 빼곡하고

등산로 옆으로는 철쭉과 진달래가 무성하다.제대로 된 조망은 옥돌봉과 선달산에서나 만날 수 있으나

옥돌봉은 야심한 새벽이라그냥 패스하고 부지런히 걷지마는 추위 탓인지 땀은 전혀 나질 않는다.

어둠속에 다시 치고올라 꽤나 높은 봉우리인데 아마도 지도상에 표기된 1,015봉인 모양이다.

다시 잔봉을 오르내린 끝에 먼저간 산꾼들의 소리가 들리면서 박달령에 도착한다.

박달령(朴達嶺:1009m:05:35)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있는 박달령은 선달산과 옥돌봉 중간에 있는 고개로

고치령,마구령,도래기재와 함께 과거 보부상들이 경상도와 강원도 영월을 드라들던 길목이다

정상에는 널따랗게 잘 정비된 헬기장이 있고, 한쪽에 산신각이 있으며,전각 형태의 쉼터와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야영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헬기장 우측에는 봉화군과 경상북도에서 세운 자세한 "백두대간 등산 안내도"가 서 있고,

그 옆의 이정표에는 "(서쪽)선달산 4.8km,(동쪽)옥돌봉 3.08km" 라 적혀 있다.

그리고 박달령 북쪽 50m 아래에 샘터가 있다고 이정표가 서있다. 

박달령 정상에는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오전약수쪽에서이어져 온 임도가 있어서

사륜구동형 차는 올라 올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박달’은 배달이라는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배달이란 곧 고대한국을 가르키는 말이니 박달이란 상고시대 우리의 국가명이다.

또한 박달(朴達, 또는 白達)은 檀(박달나무)을 뜻하며, 이는 곧 단군의 ‘단’을 의미한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있다.

박달령 산령각(山靈閣)

박달령은 고치령, 마구령과 함께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경상도와 강원도 영월을 드나드는 길목으로

유명하며 뒤에 있는 산신각에서는 이들의 安寧을 기원하며 매년 4월 초파일에 지금도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박달령 정상에 있는 현재의 산령각은 노후되어 1994년도에 중수한 산령각이다.

 

우리 조상들이 숭배하던 고향마을의 성황당이 1960년대 후반부터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앙을 떠나 마을사람들의 공동체 형성의 공간이라는 긍정적인 면은 깡그리 무시되고

미신이라는 이름하에 많이도 때려 부셨던 메카시즘의 광풍이 몰려와 수많은 성황당이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던 시절이 대한민국에도 있었다.

그때 박달령 산령각도 꽤 많은 오명과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까? 그

래도 용쾌도 살아남은 박달령 산령각을 만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만남이 되었던 그때

그시절에 있었던 광풍의 이름이 안타깝게도 농촌부흥의 기치를 내건 새마을운동이었다.

태백산신을 모시던 산령각은 ‘朴達嶺城隍神位’라는 위패가 놓여 있다.

성황당 문을 열고  문을 열고 영혼들의 안부를 물어본다.

문을 여니 동료산꾼 높은하늘님은 신기한 듯 연신 카메라 세터를 눌러댄다.

배지붕의 기와가 우람하고 탱화 없이 단장된 커다란 신령 위폐가 엄숙하고 단정해 보인다.

박(밝고큰)달(산,언덕)재는 제천의 금봉/박달도령 쪽이 알려져 있지만 높이로는

이곳이 더 높은 고개다.(1009) 또한 박달나무의 단목령(檀木嶺)도 같은 의미겠지만

억지 漢譯보다는 우리말이 정겹다. 선달산과 옥석산 사이에서 수많은 보부상들을 맞이하며

봉화와 영월의 소식을 물어보던 영혼들이 이젠 마루금 지나 다니는 대간 꾼들에게서

무슨 소식을 들어려 할 것인가... 예를 갖추고  다시 문을 닫는다.

박달령 이정표

박달령에서 처음으로 전체가 다모여 잠깐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물한모금을 마신다.

그런데 뱃속에서 이상신호를 보낸다. 바로 옆 화장실에서 들어가 앉으니

설사가 계속되는데 정말 미칠것만 같다... 그래도 가야지

산행이란 내겐 곧 신앙이나 마찬가지이니... 걷는것도 수행이려니 하고 걸어야지.

화장실에서 나오니 동료산꾼들은 벌써 다 가고 없다.

한참을 걷은 다음에야 후미그룹을 만나는데 날씨가 춥긴춥다.

겨울 장갑을 끼었는데 손가락이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박달령 헬기장이정표(06:15)

아직도 어둠은 걷히지 않는데 능선 좌측 아래의 어느 마을인지 가늠이 되지 않고

불빛만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임을 확인시켜 주는듯 하다.

이정표 옆에 있는 주인이 없는 의자만이 대간길의 산꾼을 반기고 있다.

이정표 - 2 (06:30)

박달령을 출발한 지 45분이 지나니 2km를 지나 왔다는 구조 이정목을 만나고

능선 정상에는 갈참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산꾼을 반기는데... 조금을 더 가니

쉼터같은 휴식공간에 의자가 놓여 있는데 서서히 여명이 밝아온다.

잠시 후 조금을 더가니 먼저가던 동료 산꾼들이 아침상을 펼칠 준비를 한다. 

선달산 옹달샘 갈림길 (07:05)

원래는 선달산에서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1.1km 전방에서 아침상을 펼치는데

처음에는 바람이 불지 않다가 상을 펼치고 버너에 불을 붙이고 나니까

바람이 부는데 추워도 너무 추워 손끝이 빠져 나가는 느낌이다.

가져온 오뎅에다가 김치를 넣어 얼큰하게 아침을 먹고나니 조금은 낫긴 하지만

계속해서 엄습해오는 추위 땜에 서둘러 베낭을 챙겨 선달산으로 향한다.

일출은 시작되고...

선달산 옹달샘에서 조그만 무명봉을 치고올라  암릉이 있는 안부 능선을 걷는다.

이곳 음지에는 언제 눈이 왔는지 등로에는 잔설이 보인다... 잠시후 선달산에 도착한다.

선달산(仙達山:1,236m:08:15)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영주시 부석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봉이 김선달을 연상케 하는 선달산의 유래는 여러 갈래로 다양하다.

 

신선이 노닐던 산이란 뜻의 仙達山이 먼저 올라야 할 산의 先達山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남쪽 산기슭 부석사의 浮石을 일컫던 우리말 [선돌]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 산 북동쪽 지능선상의 마대산 동쪽 산기슭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일대에 위치한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언 봉이 김선달)의 신위를 모신 당집과 묘소에서 그 이름을 유추하기도 한다.

先達이란 ‘과거에 급제하고도 아직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는 신분’

이라는 뜻과 ‘먼저 올라야 할 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선답자 최창남은 '먼저 깨달은 산'이라는 뜻으로 보고 '선(先)'자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의 '먼저'가 아니라 '선험(先驗)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仙達이란 ‘仙道를 추구하는 무리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아무래도 先達이라는 이름보다 仙達이라는 이름이 더욱 끌린다.

그렇게 보아야 태백산의 가치와 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儒道(유도), 佛道(불도)와 함께 동북아 사상계의 큰 줄기를 형성하는 仙道(선도)는 최치원의 풍류도와 닮아 있다고 한다.

고달픈 현실 생활 속에서도 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즐겁게 살아갈 줄 아는 삶의 지혜와 멋을 풍류라고 한다.

이러한 풍류는 철따라 물 좋고 산 좋은 경관을 찾아 춤과 노래를 즐기면서 자연과 친해지는 생활로 표출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도가 중국에서 건너 온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점이다.

정리하면, 선도 즉 풍류도는 산을 찾아 춤과 노래를 통해 각박한 세속적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인생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순수함에 잠겨보는 우리 고유의 ‘삶의 멋’이라 할 수 있다.

선도 즉 풍류도가 우리민족의 DNA이며, 한국인들의 삶과 문화가 곧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이다.

우리의 한류가 왜 강세를 보이고 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세가 산(대간)에서 탄생했다는 점도 공감할 수 있다.

동료산꾼 육부능선님과 인증샷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다. 1.3주엔 백두대간 북진, 2.4주엔

백두대간 남진을 진행하시는 분인데 12월 20일에 피날래를 장식하신단다.

미리 축하를 드리며 늘 안산 즐산하시기를 바랍니다.

선달산 정상 삼각점(△예미 23 / 1995재설)

어래산 갈림길(08:20)

외씨버선길은 경북 청송에서 출발하여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 이르는 장거리 도보여행길이다.

현재는 전구간이 연결되어 있지는 않고 각 군마다 1개 구간이 개설되어 있는 상태다.

현재 개설되어 있는 외씨버선길 봉화구간은 춘양면사무소에서 춘양목산림체험관까지 17.6km거리다.

없던 길을 새롭게 만든 것은 아니고 기존에 있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에 이정표를 설치하였다.

선달산에서 늦은목이까지는 1.8k인데 절반을 왔다... 내리막길에 수북한 낙엽이 쌓여있어

걷기는 참으로 좋았고 여기서부터 조급증 환자(?)들인 호화준족인 육부능선, 탄현, 물찬제비

노루님들은 벌써 치고 나가기  시작하는데 금새 뒷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곳 선달산을 지나면서부터 백두대간의 강원도 구간을 완전히 벗어난다.

장장 7개월간의 대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구간이다... 내리막길에는 춘양목이라

불리는 금강송들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하는데 같이한 김포오야지님과

깔끄막님은 소나무의 氣를 받으려는지  소나무를 자꾸만 안아본다.

어린 춘양목 군락지

늦은목이 내리막길 좌측 오전리 생달마을 쪽에는 어린 춘양목이 빽빽히 식목해놨는데

그 사이로 겨울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여린 빗내림이 보인다... 존일이 있을라나.

 

춘양목이란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인 적송을 일컫는 별칭이다.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방에서 벌채된 적송을 춘양역으로 운반해 와서

춘양역에서 기차에 적재되어 타지방으로 반출됐다.

그리하여 타지방 사람들이 춘양에서 온 적송이라 하여 다른 고장의 적송과

구별하기 위해 춘양목이라 부른 데에서 이런 별칭이 생겼다.

적송(赤松), 금강송(金剛松), 황장목(黃腸木) 등으로 불리는 춘양목은 잔가지가 적고,

곧게 자라며, 잘 썩지 않는 우수한 목재여서 예전엔 궁궐이나 사찰 건축, 혹은 관곽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의 국보 제1호인 목조반가사유상을 만들었다는 바로 그 소나무이다. 

일본 교토의 광륜사에 모셔져 있는데 일본이란 나라는 적송이

생산되지 않는데  2002년 일본 교토, 나라, 오사카로 졸업여행을 갔어

교토의 고류우지(廣隆寺)에 들렸을 때 일본에서 만난 한국인 가이드는

일본사람들은 죽어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불상이 이곳 봉화에서 생산되는 춘양목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한 관람객이 불상이 너무 아름다워 불상을 만지다가 새끼 손가락이

부러졌는데 일본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고 한다. 일본내에서는

적송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것이라고 우기던

일본 사학자들은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인데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일본의 형태로 불상을 성형했다고 한다

춘양목(春陽木)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의 높은 산 지대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속이 붉고

단단하며 껍질이 앏아 건축재 가구재 따위로 많이 쓰인다.

춘양목이란 우리 나라 토종 소나무로서 적송을 일컫는 별칭이다.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적송들이 벌채되어 춘양역에 운반되어 와서 거기서

기차에 적재되어 타지방으로 반출되었다.그리하여 타지방 사람들이 춘양에서 온 적송이라 해서

다른 고장의 적송과 구별하기 위해 춘양목이라 부른 데에서 생긴 이름이다.

적송,금강송,황장목등으로 불리는 춘양목은 잔가지가 적고, 곧게 자라며, 잘 썩지 않은

우수한 목재여서 예전엔 궁궐이나 사찰 혹은 관곽을 만들 때 주로 이용하던 우리 나라 산림을

대표하는 토종 소나무이다. (남파님의 블로그 인용)

 
일본 국보제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일본의 국보 제1호는 높이 123.5센티미터의 목조 신라 불상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이는 교토의 고류우지(광륭사, 廣隆寺)에 있다.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 출가 이전의 이러한 태자 모습은
중생 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이 불상이 신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초이다.

서기 603년에 추고천황(推古天皇, 592-628)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574-622)가

교토 땅의 신라인 지도자였던 진하승 공에게 전해주었고, 진하승 공은, 즉시 봉강사를 창건했다.

이 봉강사가 현재 교토의 우즈마사(太秦)에 위치한 고류우지(광륭사, 廣隆寺)의 옛 이름이다.

진 공은 이 신라 불상을 모시고 오늘의 고류우지의 전신인 봉강사를 신라인의 씨사(氏寺)로서 창건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고대 기록에 전해지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이 한결같이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일부 학자가

이 불상이 '신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 90Cm)'이

 바로 고류우지의 목조 신라불상과 똑같은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현재는 삼국 시대의 것으로만 되어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의 이 신라 목조 불상이 일본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에서만 나는 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의 목조 불상의 특징인 것이다

늦은목이재(800m)

늦은목이는 선달산과 갈곶산 사이의 안부로서 백두대간 동쪽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생달마을과 백두대간 서쪽 영주시 단산면 남대리를 잇는 고갯마루로

일반적으로 낮은 산능선이라 부르는데 이곳이 해발 800m 이니 이해가 잘 안된다. 

예전엔 보부상들이 넘나들었으나 지금은 대간산꾼들이나 가끔 드나드는 고개이다.

이곳부터 소백산국공원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늦은목이 좌측 오전리 생달마을 쪽으로 약30여m 정도 내려가면 내성천 발원지가 있다.

 

늦은목이는 비슷한 이름이 여러곳에 있다.

다음 산행 소백산 구간에는 늦은메기라는 이름으로,

낙동정맥 주왕산 구간에는 느지미재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익숙하다.

대부분 고개 아래 동리에서 이곳을 올라 오는데 느지막하게,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라고 한다 

 

좌측 오전리로 내려가면 생달리이고, 우측 남대리는 정감록에 명시한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양백 지간에 숨어있는 명당이 있다고 남사고가 지시한 곳이다.

순흥으로 유배와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영월과 단양 쪽에서 부석으로 장을 보러 가던 장꾼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모여서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도에 보면 주막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늦은목이 옹달샘

이곳이 내성천의 발원지란다. 가뭄탓인지 물이 말라있다.

이 옹달샘 아래에 있는 마을이 생달마을이다.

백두대간 기슭에 ‘생달’이란 마을이 두 군데 있다. 즉 문경의 대미산 아래에도

생달이란 마을이 있고, 이곳 선달산 아래에도 생달마을이 있다. 

이곳부터 여태껏 같이해 온 태백산군과 작별을 하고 소백산 국립공원군으로 접어든다.

오늘이 태백산군(太白山群)의 마지막 구간이지만 가야할  소백산군(小白山群) 구간과는

시사하는 바가 확연히 구분된다. 소백산이 참선, 수행, 부처 등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면 태백산은 배달, 단군, 선도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 및 사상과 연계되어 있다.
태백산의 마지막 구간인 갈곶산을 통해 우리 땅이 어떻게 형성되는 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오늘 구간의 선달산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 즉 한류의 원천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를
그리고 박달령은, ‘박달’이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늦은목이부터는 나혼자 호젓하게 길을 걷는다.

오르막을 오르지만 그리 힘들지 않은 완만한 코스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혼자 걸을때가 참으로 좋다.

20분 정도를 걸어니  갈곶산이 나오고 앞서가던 김포 패밀리 팀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갈곶산(966mm:09:20)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와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갈곶산은 지나온 다른 봉우리보다 낮고 조망할 수 없으며 특이사항이 없는데 산이란 지명을 갖고 있다.

황장산을 지나 촛대봉-투구봉-솔봉-도솔봉-삼형제봉-연화봉-비로봉-국망봉-상원봉으로 이어지다 

갈곶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소백산권은 모두 봉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갈곶산은 소백산에서 벗어나 태백산권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갈곶"이란 뜻을 알 수 없지만 소백과 태백의 양백 중간에서 어느쪽으로 붙어야 할지 정말 갈 곳을 모르는

산으로 표지석도 없다.

 

남쪽 봉황산(819)으로 이어지는 길과 북쪽 선달산 대간길의 삼거리를 이룬다.

봉황산 방향으로 가면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화엄10찰(華嚴十刹)로 유명한

부석사(浮石寺) 향하는 길이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거리가 너무 멀어 접어야 할 듯싶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갑곳산(甲串山)이라 불리우니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가는 배가 머물렀던 선착장이던가..

절 이름에서도 돌이 떠다니니 (부석:浮石) 은하수 건너 멀리 영혼들의 여행을 떠나는 출발지인가..

또 재미있는 사실은, 안양루에 걸려 있는 편액에는 ‘봉황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지만 일주문의 편액에는

‘태백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다는 점이다. 부석사가 봉황산에 있으니 ‘봉황산 부석사’라는 표현은 당연하다.

봉황산이 부석사의 主山(한양으로 치면 북악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태백산 부석사’라니…

 

‘태백산 부석사’라는 말은 몇 가지를 생각케 한다. 첫째, 태백산이 부석사의 祖山이라는 것이다.

 한양으로 치면 삼각산(북한산)에 해당한다.

 태백산이 부석사의 조산이니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 역시 태백산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봉황산 역시 대간의 일부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봉황산이 마루금은 아니지만 山體(산체)로

보면 분명 대간의 일부이다.

우리 전통지리에서는 대간이라는 개념을 線으로 보지 않고 영역으로 보고 있었음을 부석사 일주문 편액을

 통해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산경표에서도 대간 마루금을 지나는 산뿐만 아니라 주변 산(예를 들면 오대산,

 계방산, 월악산 등)도 기록하고 있다. 마루금 산행에서도 사람 발자국만 남게 되는 가느다란 선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대간의 개념을 선으로 보지 않고 영역으로 보는 것은 최근 대간 복원, 자연 및 생태

보호의 가장 기본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둘째, 조산은 백두산 방향으로 정해진다는 점이다. 국내 모든 산의 큰 할아버지 격인 太祖山은 백두산이다.

한양의 주산인 북악이 조산인 삼각산 그리고 한북정맥, 대간을 거쳐 백두산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부석사의

주산인 봉황산은 조산인 태백산을 거쳐 백두산으로 이어진다. 만약 소백산이 봉황산 바로 옆에 있다 하더라도

 소백산은 지리산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조산이 될 수 없다.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 18호 )  

부석사라고 하면 무량수전을 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지만 내부 모양이 썰렁하고, 실제 건물은

중간 중간 새 목재로 교체되었으니 제대로 된 조형미를 갖추고 기품 있는 최고의 목조건물은 무량수전이다.

그런데 이 무량수전은 사찰 축조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황장목이나 춘양목이 아닌 느티나무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다...느티나무(槐)는 나무(木)에 귀신(鬼)이붙어있다는 뜻이다. 어떤 귀신이 붙어있을까.

  무량수전 편액   (고려 31대 공민왕의 글씨)부석사의 아름다움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전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단언컨대 대간 마루금을 감상할 수 있는 전국 사찰 가운데 부석사를 따라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부석사 安養樓(안양루)의 위 혹은 안양루를 지나 無量壽殿(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뒤를 돌아보면 대간

마루금(소백산 줄기)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수많은 명사들이 이 장면을 보고 넋을 잃었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2)’ 저자>이 그랬고,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님의 <‘무량수전 베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도 그랬다.

조선시대 시인 김삿갓 또한 빼 놓을 수 없다.

……百年幾得看勝景(일생동안 과연 몇 번이나 이처럼 뛰어난 경치를 보겠는가),

歲月無情老丈夫(무정한 세월, 이미 나는 늙었구나)……”

안양루에 걸려있는 김삿갓의 시이다. 풍자와 해학의 대명사인

김삿갓이 전혀 김삿갓답지 않은 센티멘탈한 시를 썼다.

김삿갓 또한 안양루에서 대간 마루금을 보고 취했음이 틀림없다.

천하의 김삿갓도 대간 마루금의 경관 앞에서는 기를 펼 수 없었던가 보다. 

조선시대 시인 김삿갓 또한 빼 놓을 수 없다.  

갈곶산 능선에서 만난 老松

부석사를 품은 봉황산은 이곳 갈곶산 좌측에서 맥을 이어간다.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부석사의 풍광은 장엄하다. 경상도를 이루는 수많은 산들과 물줄기들이

모두 부석사의 품에 안기는 듯 펼쳐진다. 양백지간은 바로 부석사에서 바라보이는 땅을 이르는 말이다.

 

천년왕국을 이어온 신라에 반기를 들었던 궁예는 세력을 얻은 뒤 부석사의 한 전각에 걸린 신라 왕의 초상에 칼을 들이댔다.

그 초상의 주인은 궁예의 아버지인 헌안왕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초상에 칼을 들이댔다는 것은 패륜을 상징하고,

신라 왕의 초상에 칼을 들이댔다는 말은 최초로 민중에 기댄 권력을 세워 미륵정토를 구현하려던 개혁군주로서

궁예를 상징한다.갈곶산에서 함께했던 김포오야지님과 깔끄막님은 먼저 가버리고 나혼자 4km 가까이를 혼자걷는 호젓함을 맛본다.

 

갈곶산 저 아래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부석사의 풍경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나 혼자 걸으면서 가수 정태춘이 부른 ‘탁발승의 새벽노래’를 흥얼거린다.

‘주지스님의 마른기침 소리에 새벽 옅은 잠 깨어라 하니, 만리 길 너머 파도소리처럼 꿈은 밀려나고,

속세로 달아났던 쇠북소리도 여기 산사에 울려 퍼지니, 생로병사의 깊은 번뇌가 다시 찾아온다.

번뇌란!!! 요즘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 단어이다.

 

娑婆世界에 사는 衆生의 苦, 執着... 다 내려놓고 싶다.

그런데 그게 아직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衆生의 修行이 부족함이련가?

부석사 능선위의 大幹길을 걸으면서 모든걸 털고싶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봉화군의 山河

이곳은 울진, 영양, 영덕, 청송과 함께 경북의 최오지이면서 우리나라의

오지중에 오지로 통하는 곳이라 인적이 드문 곳이다.

오늘 내가 걷고있는 이 대간길도 대간을 종주하는 산꾼이 아니면 올 일이 없는 곳이다.

그런 이곳이 2009년 1월에 이충렬 감독이 만든 워낭소리란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노인에겐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그런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이 소는 최노인의 베스트 프렌드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이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 소리도 귀신같이 듣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른다.

심지어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고집쟁이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 하면서 최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른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환상의 친구다.
그러던 어느 봄, 최노인은 수의사에게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거라는 선고를 듣는다.
 

(中略)

늙은 소는 죽기 며칠 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마지막 땔감을 집에다 실어 놓는다.

 

소와 인간의 교감이 후반부로 갈수록 뭉클하게 다가오며 결국 삶이 다한 소와

이별하는 부분에서의 노부부의 모습이안타깝게 긴 여운을 남기며 비추어진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는 노부부의 삶. 늙고 충직한 소가 함께 하며

말 못하는 소에 대한 할아버지의 강한 애정이 수시로 표현된다.

속세에 찌들고 복잡 다양해져 가는 사회 속에서 이러한 단순하고

투박한 삶의 모습이 잔잔하게 그려지는 워낭소리는 두 명의 노부부와

한 마리 소가 이끌어내는 인간사의 진솔한 모습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우리의 삶,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서 묻히는 것이 인간이고, 그러한 삶의 모습이 보여지는 영화이다. 

 

주인공인 최 원균 할아버지가 지난달 10월 3일에 별세를 하셨단다.

 

봉화군의 유래

 

봉화(奉化)의 지명유래

 삼한시대: '고사마현(古斯馬縣)',
신라의 경덕왕 때: '옥마현(玉馬縣)',

고려의 현종 때: '봉성현(鳳城縣: 현 안동시의 속현(屬縣))

고려 공양왕 때: '봉화현(奉化縣)'


 고려 현종때 봉화군은 봉성현(鳳城縣)이라고 한 유래를 찾는다면,

지금도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에 가면 봉성현의 관아(官衙)였던

봉서루(鳳棲樓: 공민왕의 친필 현판)가 그 당시 역사의 증거물로 현존하고 있다.
이는 "봉황이 날아 깃들다"는 형국의 누각이라하여 봉서루라고 했다.

따라서 봉성은 '봉황이 깃들어 있는 성(城)'이라 하여 봉성이라 명했다.


봉화는 고려 공양왕 때부터 붙인 지명이다. 이는 "문헌(文獻 <眞書>)의 지방으로

화(化)하는 풍속으로 현민(縣民)들이 이 眞書를 받들어 준다"라는 의미로 구전하고 있다.
 봉화는 예로부터 전국에서 '가장 작은 고을 중에 선비는 가장 많은 고을'로 이름나 있다.

 (조선 총독부부 문건 등) 따라서 역으로 "봉화지방은 글을 하는 선비들이 많았고

서책(眞書)의 가르침에 따라 문신과 충신 그리고 효자 효녀 열녀 등이 많이 났던 곳이다.

이는 옛적부터 내려오는 풍습으로 모든 현민(郡民)들이 흠모하고 받들어 왔다"는

 의미로 이해를 하시면 될 것 같다.

이곳도 지난 구간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겨우사리가 많이 보인다.

무명봉(10:15)

갈곶산에서 이곳까지 혼자서 50분을 걸어오니 먼저간 김포오야지님이 휴식을 취한다.

나도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데 뒤에 오던 우 대장, 하늘마음님과 조우를 한다.

1,097봉 헬기장(01:35)

이정표 (←마구령2.0km / 늦은목이3.9km→) 를 지나니 헬기장이 있는

1,097봉이 나오는데 전망은 있으나 짙은 박무로 저 멀리 문수지맥의

주봉인 축서사를 품은 문수산이 박무에 가려 희미하게만 보인다.

헬기장을 내려서니 암릉구간이 나오고 바위틈을 끼고 내려섰다 다시 오른다.

이정표 (마구령0.5km / 늦은목이5.4km)

무명봉 헬기장(11:10)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가고...

헬기장을 내려서니 멋진 소나무들이 보이는데 마구령으로 먼저간 동료산꾼들 한테 연락이 온다.

국공파들이 단속을 하니 조심하란다... 웬 단속? 아! 지금이 경방기간인 모양이다.

조심해서 주위 동태를 살펴보니 단속차량은 보이지 않는다... 쨉싸게 禁線을 넘는다.

일단 금지선만 넘으면 현행범이 아닌 이상 단속근거가 없기에...

까딱하면 오늘도 산행 전과 별하나를 추가할뻔 했네그려

마구령(馬駒嶺, 810m:11:15)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에서 남대리로 넘어가는 곳에있는 마구령의 유래는

이 길이 충청도와 강원도를 있는 관문으로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하여

마구령이라 하였으며 경사가 심해 마치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렀다한다 

 

마구령은 고치령, 죽령과 함께 소백산을 넘는 세 개의 고갯길 중 하나였다.

영남 선비들의 과거길로 ‘영남대로’라 불렸던 죽령 길과 영월 하동과 이어지는 마구령 길,

그리고 단양 영춘과 이어지는 고치령 길 등이었다. 세 길은 모두 백두대간 주능선 중 하나다.

 옛기록에 馬兒峴으로 기록된 이곳이 마구령으로 불리어 짐은 메기재의 借音說 또한 그럴듯하다.

마구령 표지석 뒷면에는위치 :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 위도37.01.21 경도128.39.24유래 :

충청도 강원도를 통하는 관문으로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마구령이라

하였으며, 경사가 심해서 마치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하여 매기재라고도 하였다.

마구령에서 또하나의 영역표시를 하고...

마구령 수준점

마구령에서 단속요원인 국공파가 없음을 확인하고 후미팀들이 베낭을 풀고 간식을 먹으며

원기를 보충한다. 오랜만에 대간길에 온 알송아우, 대장, 회장님과 높은하늘, 하늘마음 등

술 한잔을 나눈다. 난 자꾸만 설사 때문에 조심을 하지만 그래도 베낭을 뒤지니

40도짜리 진도홍주 한 병이 있어서 동료산꾼과 나눠 먹는데 하늘마음님이

더덕주 한병을 꺼내는 바람에 서너잔을 마셨더니만 알딸딸하다.

휴식을 취한 다음에 고치령으로 향하는데 아직도 8km나 남았단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남대리쪽을 향하다가 쨉싸게 등로로 올라선다.

출입통제 안내문을 무시하고 철책선을 넘어 대간길로 올라서니 조금전 마신 술 때문인지

초반에 치고 오르는게 상당히 힘이 들지만 이런 것 쯤이야...

능선을 치고 오르니 일제시대의 아픈 추억을 안고있는 소나무들을 만난다.

대간 능선에 올라서니 소나무 마다 톱질 자국이 역력하다.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자원 수탈이 어디에까지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상처들이다.

 

미안하구나... 너희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그런데도 바다건너 쪽바리 새끼들은

아직도 반성은 커녕 자기들은 잘못이 없다고 지랄발광을 하는데도

여의도에 지체높은 나리들은 아직도 주제파악을 못하고 자기들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으니 너희들 한테 볼 면목이 없구나... 국가가 힘이 없는걸 어쩌랴.

국공파의 단속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여유로운 牛步걸음으로 걷는다.

초반에 빡세게 친 다음에 완만한 능선을 치고 오르니 헬기장이 나타난다.

1096.6봉 헬기장(12:10)

넓은 헬기장에는 3등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1096.6봉 삼각점(△예미317 /2004재설)

폐헬기장(12:45)

30분을 완만한 능선을 오르내린다. 오늘은 거리는 약 26km 라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고도편차가 별로없는 완만한 길이라 참으로 편하다.

폐헬기장을 만나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미내치(美乃峙:820m:13:20)

경북 영주시 부석면 소천리 달터마을에서 단산면 마락리를 잇는 고개로

4년전 북진길에서는 미내치 이정표가 있었는데 이번 산행에는 보이지 않아

순간적으로 놓칠뻔한 고개였다. 이곳은 소백산 국립공원 구간이라

이정목과 구조목 표지판이 기가 막히게 잘되어 있지만 아런게 조금은 아쉽다.

일반적으로 충청도와 경상도에서는 령(嶺)이라는 한자 표현보다는

티, 치, 재라는 순우리말을 사용한다. 은티, 지름티, 고치, 미내치 등이 대표적이다.

2009년 8월2일 북진때의 모습

자개지맥 (紫蓋枝脈) 지맥 갈림길(950m:13:45)

자개지맥 (紫蓋枝脈)지도와 개념도 

백두대간 고치령을 들머리로 삼아 1.1km 떨어져 있는 자개지맥 분기점은

경북 영주시 단산면과 부석면 경계 959봉 밑에서 시작되며 대체로 남쪽으로

자개산▲858.7m, 천마산386m, 대마산▲372.9m, 유능산299m를 거쳐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 물섬의 서천과 내성천 합수점으로 이어지는 실거리 51.9km의 지맥이다.

헬기장(14:00)

고치령 헬기장(14:05)

먼저 도착한 동료산꾼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다.

오늘은 술을 피하고 싶어서 가급적 동료산꾼들과 거리를 두었다.

이곳에서 마지막 동료가 도착한 이후에 고치령으로 내려선다.

고치령(古峙嶺:760m:14:20)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와 백두대간 너머 단산면 마락리를

잇는 고갯마루로서 현지인들은 ‘고치재’라 부른다.

고치령 정상은 백두대간의 중요한 길목으로 여러기의

장승이 서 있으며,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엔 ‘국망봉 11.1km,

마구령 8.0km’라 적혀 있고, 고갯마루 한쪽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국토지리원 자료에 古峙(옛 고개)로 기록되어 있는 고치령을 양백지간(兩白之間)

또는 “고치재” 로 부르기도 하며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가르는 고치령은

조선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죽령 다음으로 중요한 고개였으나 세조에 의해

유배당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던 이곳 사람들의 노력이 발각되어 폐쇄

되었다는 설도 있는 곳이다.

 

고치령은 또한 한강 수계와 낙동강 수계를 나누는 중요한 고개이기도 하다.
백두대간 죽령을 지나 동북으로 흐르던 소백산 줄기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처음 만나는 큰 고개가 바로 고치령이다.
그러므로 고치령에는 역사적인 사연과 백성들의 애환이 많이도 서려 있다.

고치령 산령각

양백지간이라 하는 이 곳에는  영월로 유배된 단종과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단종의 삼촌으로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사사당함)을 기립된 것이라 하는데전하여 내려오는 전설은 이러하다.

 

영월땅으로 유배되었던 단종이 어느날 하얀 도포차림에 말을 타고 고치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단종대왕에게 “어디를 가느냐 ” 물어보는 백성에게 단종이 말하기를... “태백산”에 놀러 간다고 하였다.

이날 오후 단종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사람들은 단종의 혼백이 태백산에 들어 태백의 산신이 되었고

그의 신하였던금성대군은 소백의 산신이 되었다고 믿어왔던 사람들은 혼령이 되어 만나는조카와

삼촌(단종은 금성대군의 조카이다)을 위해 양백지간인 고치령에다가산령각을 짓고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는 어김없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고치령이 바로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이 뜻을 세우고
수시로 넘나들던 대표적인 장소다. 이곳이 단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수양대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을 통해서다.
1455년 6월 금성대군은 형인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다
이곳 순흥에 유배당한다. 그는 이곳에서 순흥도호부사인 이보흠의 도움을 받아
단종 복위를 계획한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백성들이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도록
산신령에게 기도하던 장소다. 또 과거 순흥지역에서 영춘으로 말을 이용해
세곡을 옮길 때 사고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기를 기원하던 신당(神堂)이기도 하다.


단종대왕과 금성대군을 모시는 고치령의 산령각(山靈閣)은 좌. 우 기둥에 주련(柱聯)은 다음과 같다. 

왼쪽에는  차산국내지령지성(此山局內至靈至聖) "산이 모두 영역이 모두 지극하게 성령스럽고

성스러웠다고 한다"라고 쓰고 오른쪽에는 만덕고승성개한적(萬德高勝性皆閒寂)수만가지 덕이 높고

번성해서 모든 사람의 본성이 여유로우면서 고요하기를 바란다"고 써 있다.

우리 민족은 산을 중심으로 애환이 있는 곳에 산신각을 세워 안녕을 기원하였다. 

 

고치령의 소백산 입구에 자리잡은 장승은 ‘小白地將軍’이라는 간판을 그리고 맞은 편

태백산이 시작되는 곳에 서 있는 장승은 ‘太白天將軍’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소백산은 땅을, 태백산을 하늘을 의미하며 하늘과 땅 사이라는 뜻이다.

갈곶산을 소백산권으로 보았는데 이곳의 장승을 보면 고치령을 중심으로 양백을 나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참위설에서 10승지(十勝地)라는 곳이다 

고치령 서북쪽 마락리에서 계속 서북쪽으로 내려가면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로 이어지고,

의풍리에서 김삿갓 유적지가 있는 강원도 영월의 와석리는 지척이다. 그리하여 마구령 아래의

 남대리, 고치령 아래의 마락리, 그리고 충북의 의풍리, 강원도의 와석리 등 3개 도의 마을들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오지 중의 오지 마을들로서 더불어 하나의 생활권을 유지해 왔으며,

참위설에서 10승지(十勝地)라는 곳이다.

십승지지(十勝之地)

참위설(讖緯設)과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던 술가(術家)들의 말로는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안동(安東)의 춘양면(春陽面:지금의 봉화),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예천(醴泉)의 금당동(金堂洞), 공주(公州)의 유구(維鳩)와 마곡(痲谷)

영월(寧月)의 정동상류(正東上流), 무주(茂州)의 무풍동(茂豊洞),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을 가리킨다.

 

한편 정감록(鄭鑑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신(保身)할 땅이 열이 있으니 첫째는 풍기 예천이요

둘째는 안동의 화곡이요, 셋째는 개령의 용궁이요,

넷째는 가야요, 다섯째는 단춘(삼풍, 의풍리)이요

여섯째는 공주위 안산심마곡이요, 일곱째는 진목이요

여덟째는 봉화요, 아홉째는 운산봉 두류산이요,

오래 살 땅이라 착한 정승과 좋은 장수가 이어 나리로다.

열째는 풍기의 대.소백산이니 길이 살 땅이라 장수와

정승이 이어 나리로다 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는 물론  3.1운동 후 이러한 괴설(愧設)을 믿고

솔가(率家)하여 이사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고치령 이정표

고치령에서 산행을 마치고 좌석리까지 6km를 내려가야 하는데 산악회에서

좌석리 이장에게 전화하여 트럭을 타고  좌석리에 도착하여 산악회 버스를

타고 부석사 입구쪽인 소천면으로 가서 동료산꾼 하늘마음님이 스폰서하여

목욕탕에서 30분정도 깔끔하고 샤워를 하고 산악회 왕총무님이 식대를

스폰서 해주어 염소탕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서울로 출발한다

다들 고맙고요... 世世生生 福 받을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