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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29구간 - 빼재에서 동엽령까지

by 범여(梵如) 2014. 1. 13.

 

☞ 산행일자:  2014년1월11일~12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세찬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3.5km + 어프로치 10.3km   / 10시간 15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24명과 함께

☞ 산행코스: 빼재(신풍령)-1,039봉(빼봉)-갈미봉-대봉-월음령-못봉-싸리덤재-횡경재-귀봉

                  백암봉(송계삼거리)-중봉-향적봉-백암봉-안성계곡 삼거리-동엽령-칠연폭포삼거리

                  칠연폭포-용추계곡-안성탐방지원센터-통안마을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고제면, 북상면 / 전북 무주군 설천면, 안성면

 

甲午年 새해를 맞이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나니 세월한번 참으로 빠르다

.그리고 올해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인데 참으로 요즘

시국을 보면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가는 느낌이라 답답한 느낌이다.

경장(更張)은 ‘거문고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을 때 낡은 줄을 풀어서

새 줄로 바꿔 소리가 제대로 나게 한다’는 이다.

 

새해들어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힘찬 도약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낡은 관습에 얽매여 서로를 비방하는데 혈안인 정치권을 보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멀어도 한참 멀었다.

가의 이익은 내팽겨친 채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는 이 나라의 지도층 인사들 해도헤도 너무한다.

 

지난 연말에는 철도노조가 열차를 세우면서 까지 자기들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파업을

하더니만 정초부터 의사들이 겉으로는 국민들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뻔히 보이는 잔머리로  자기들 밥그릇을 지키려고 파업을 결의하는 걸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그런걸로 파업을 하려면 나같은 자영업자들은 100번도 파업을 더해야 하는데우린 힘이없어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올해는 제발 나보다 남을 배려하는 自利利他  정신으로 삽시다

 

 

 

 

오늘 산행구간 지도와 고도표

빼재 정상의 팔각정

원래는 지난번 눈과 추위로 엄청나게 고생한 소백산 구간을 이어가야 하는데 북쪽은 눈과

암릉구간이 많아서 봄으로 미루고 이곳 남쪽인 덕유산 구간으로 코스를 잡았다.

밤 11시 10분 양재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후에

무주 I.C를 빠져나와 빼재를 향하는데 오늘은 산꾼이 아닌 버스가 알바를 하는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늦게 들머리에 도착을 하는데 그것도 빼재 정상이 아닌 고개 아래에 있는

폐업한 신풍령휴게소에 세우는 바람에 500여m 를 걸어 올라와서 산행을 시작한다.

 

지난해 5월에 이곳에 왔으니 8개월만에 다시 이곳을 찾는데 그래도 팔각정이

어둠속이지만 반갑게 산꾼을 맞이한다... 고개 정상의 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빼재(920m:03:55)

전북 무주군 설천면과 경남 거창군 고제면을 있는 37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로 이름이 셋이나 된다.

빼재(수령 또는 신풍령)에 세워져 있는 『백두대간 안내비』 적힌 빼재의 유래를 보면

『빼재』는 삼국시대부터 각 국의 접경 지역이었기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수많은 민관군이

이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고 임진왜란 시 이곳의 토착민들은 산짐승들을 잡아 먹어가며 싸움에 임했다.

그 산짐승들의 뼈가 이곳저곳에 널리게 됐다고 해서 “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며 뼈재가

경상도 방언으로 빼재가 되었다고 한다.

 

험준한 산길을 넘나들던 시절 고개를 넘던 사람들의 재물과 목숨을 빼앗아 죽은 사람의 뼈가 산을 이루어 뼈재요,

이 고개를 넘나들던 주민, 사냥꾼 혹은 산적들이동물 및 가축들을 잡거나 약탈하곤 하면서 뼈를 버려 둔 곳이라 하여

뼈재라고 불렀으며 ‘빼재’는 ‘추풍령’을 본뜬 ‘신풍령’이라는 휴게소가 고개 아래쪽에 들어서면서 ‘신풍령’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나, 일제강점기에 고개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빼’를 ‘빼어나다’로 해석하는 바람에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수령(秀嶺)」즉 빼어난 고개라는 뜻의 표지석이 세워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휴게소는 페업 상태고 이곳 주민들은 옛 이름인 ‘빼재’로 불리기를 원하고 있고 앞으로

이곳을 관통하여 뚫리는 터널 이름 또한 ‘빼재 터널’로 불리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4:00)

수령(秀嶺)이라는 이정석 좌측 임도를 따라오르면서 산행을 시작하는데 지금 시간의

기온이 -8.2도를 가리키고 바람이 불긴하지만 최근에 많이 추웠던 학습효과 때문인지

그리 추운 느낌은 아니고 하늘엔 별과 음력 섣달 열이틀날의 달빛이 대간길을 안내한다.

현재의 기상으로 보면 능선에서 멋진 덕유능선을 감상할 수 있을것  같다.

임도를 오르다가 끄트머리에서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이동통신 중계기지(04:05)

잠시후에 이동통신 중계기지를 만나는데 바람이 많이 부는 탓인지 붕~붕거리는

기계음이 마치 동물들의 울부짖음 같아서 은근히 겁이난다

어둠속을 계속해서 치고 오른는데 능선 가운데 건설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을 만난다.

빼봉(1,039m:04:30)

지도상에는 1,039봉으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지금은 빼봉으로 부르고 있다.

아마 빼재에서 따온듯한 명칭 같아보이며 정상에는 이정목(←빼재 1.0km, →횡경재삼거리

6.8km, 송계삼거리 10.0km)과 삼각점 안내판이 있으나 눈 속에 파묻혔는지 삼각점을 찾을 수가 없다.

빼재 정상 삼각점 안내판

어둠속에 無心으로 계속해서 오르막 내리막길을 계속 반복한다.

진행할수록 점점 눈의 양은 많아지기 시작하는데 점점 힘이든다.

오늘 구간은 대간 거리는 그리 길지 않으나 접속구간이 길고 거기다가 무명봉을 제외하고

표기된 봉우리만 1,000고지 이상을 10개 이상을 넘어야하는 그리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눈의 양은 점점 많아지고 갈미봉부터는 산꾼들이 다닌 흔적이 없어 러셀을 해야만 했다.

갈미봉 이정목

갈미봉(葛嵋峰:1,210.5m:05:35)

5년전 북진길에는 없었던 지명과 이정표가 보이는데 아마 이곳 좌측 능선아래에

있는 거창군 고제면 칡목마을이 있어서 붙혀진 지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봉우리의 형상이 갈모(雨帽:비에 젖지 않기 위해 갓 위에 덮어쓰는

작은 우산 모양의 비 가리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계속해서 고도를 높이는데 눈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고 오르막이 많다.

그러나 예전에 없었던 로프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어 그리 힘들지는 않다

대봉(大峰:1,263m:06:05)

어둠속에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눈의 양이 장난이 아니다

이정표(3.6km 횡경재 4.2km ,송계삼거리 7.4km→) 꼭대기에 매직으로 '대봉'이라 적혀있다.

대봉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는 투구봉(1247.7m)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흔히 대봉을 '지봉(투구봉) 삼거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독도에 유의해야 할 지점이다. 

 

이곳에서 후미가 올 때까지 선 채로 2~3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려선데 바람의 영향탓인지 눈이 많은 곳은 사람의 키만큼 쌓여있다.

달음재/월음령(月陰嶺:1,078m:06:35)

경남 거창군 북상면과 전북 무주군 설천면 무주 구천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월(月)을 '달'로 바꿔 표기해서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무주 방면인 북쪽의 월음계곡으로 내려서면 만나는 곳이 구천동 구월담(九月潭)이다.
월음(달음)은 '달 그림자'를 뜻하는 데, 구천동 33경 중 하나인 구월담에 

달밤이면 이 능선 그림자가 비쳐진다는 것이다. 

대봉에서 내려온 만큼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늘 산에서 배우는 것은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만고의 진리불변인 것 같다.

못봉(1342.7m:07:25)

정상 이정석에는 못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봉(池峰)의 연못 ‘池’를 따서 우리말로 못봉으로 해 놓았다.

지봉은 우리말로 못봉인데 옛날에 이 근처에 큰 연못이 있었다는 유래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이정표에는 송계삼거리 4,9km 신풍령 6,1km가 가리키듯 어느 쪽을 보아도 갈 길이 멀기만 하다.

 

덕유산에는 지봉이 두 곳이나 있어 서로 혼돈하기 쉽다.

대간길에 걸친 지봉(못봉)이 있고, 대봉 북쪽 능선에 다른 池峰(투구봉)이 또 있다.  

못봉 헬기장(07:30)

못봉에서 5분거리인 헬기장으로 향하는데 날은 밝기 시작하는데 새벽에 출발할

때와는 달리 날씨가 자꾸 흐려지면서 주위가 짙은 운무로 가려진다.

북진길 때에 이곳에서 향적봉을 멋지게 봤던 기억이 아련한데... 아쉽기만 하다.

이곳에서 아침만찬을 즐기려고 했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서 다시능선 아래로 내려선다

아침만찬(07:40~08:30)

헬기장에서 능선 아래로 내려와도 좀 덜하긴해도 바람 불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는 수 없어 내가 가지고온 비닐로 즉석비닐하우스로 만들어 24명이 들어가긴

좀 비좁긴해도 그래도 따뜻하게 50분간의 아침만찬을 즐긴다

싸리덤재(1,300m:08:40)

거창군 북상면 송계사와 무주군 설천면 오수자골을 지나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고개로 싸리덤재라 고 부르기도 하는데 적설량이 많아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덤'은 경상도 방언으로 바위나 벼랑을 뜻하는데 '싸리덤재'에는 바위가 없다.

송계사에서 오르다보면 '수리덤'이라는 바위지대를 만난다.

 여기서 좌측은 횡경재, 우측은 지봉안부로 올라서는 길이다.

따라서 지봉안부로 올라서는 길을 '수리덤에서 넘어가는 길'이라

하여 수리덤재라 하던 것을 잘못 발음해서 '싸리덤재'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봉과 백련사를 잇는 등산로 중간에 위치한 오수자굴

고려시대에 오수자스님이 수도를 하며 득도를 했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의

자연동굴로 동굴의 폭은 10m, 깊이는 10m쯤 되는데, 이 동굴에 겨울이면

 ‘남근 고드름’이 수십개씩 생겨나 등산객의 발길을 잡는 곳이다

백련사 일주문(2010, 2,25... 백두대간 북진때의 사진) 

 

백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로

신라 신문왕백련선사께서 초암을 짓고 수도하던 중

그곳에서 흰 연꽃이 솟아 나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쳤다

백련사 일주문 편액

덕유산백련사(德裕山白蓮寺)’라는 편액은 탄허(呑虛)스님이 쓴 글씨이다

싸리덤재를 지나면서 눈의 양은 계속 증가되지만 그래도 얼어있어 발이 빠지지 않는게 다행이다

눈에 파묻힌 호젓한 산죽길을 나홀로 걸어간다

갈참나무 노거수도 만나고...

횡경재(橫徑峙:1,350m:09:00)

거창군 북상면과 무주군 설천면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백련사방향은 ‘ 등산로 아님’표지판이 서있고 덕유산도 안내도가 있다.

횡경재의 뜻은 '가로질러 넘어가는 고개'란 뜻이다.
제법 아늑하고 공터가 있고 갈색의 앙증맞은 이정표가 있다.

송계사에서 오르는 길과 백련사에서 오르는 길이 만나 교차되는 지점이다.

날이 밝으면서 짙은 박무가 계속 몰려오는 바람에 멋진 덕유능선은 보이질 않는다.

계속해서 고도를 높혀서 가는데 같이가던 호화준족인 단현님과 노루님은

도망(?)을 가버리고 배왕초와 장동건보다도 더 잘 생긴(범여의 생각中에서)

산까치, 그리고 오늘 새로 오신분과 함께 같이 길을 걷는다.

귀봉(1,370m:09:25)

귀봉 또는 거봉(居峰)으로도 불리는데 눈이 많이 쌓인 탓인지 별 특징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 좋은 곳으로 구천동계곡 끝에 있어 계곡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곳 이정표는 '남덕유분소(송계사) 4.2Km / 송계삼거리 2.3Km / 향적봉(대피소) 4.3Km‘라 적혀있다. 

이 구간은 덕유산중에서도 가장 한적한 코스로 백두대간 종주팀 이외는

찾지않고 특별한 볼만한 것이 없는 탓인지 이정표만 달랑있고 길이 다듬지

않은 탓인지 오늘 45L짜리 베낭이 자꾸만 나무에 걸리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다 

반가운 시그널

백암봉 가는 길에서

백암봉 전위봉으로 올라섰다가 다시 안부로 내려서는데 비박족들을 만난다.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올 8월이면 대간길도 끝나고 기맥길도 끝난다.

나도 이제 홀로텐트와 침낭하나 달랑지고 저런 생활을 함 해보련다.

백암봉(白巖峰:1,490m:10:20)

경남 거창군 북상면과 전북 무주군 안성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송계사 삼거리라고도 부르는 곳으로 안성 방면으로 하얀 암봉을 내리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안성 방면으로 피라밋처럼 삼각형으로 솟아오른 가새봉이 그 아래 망봉까지 지능선 꼬리를 늘어뜨리고 서있다.

향적봉과 중봉, 덕유평전의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서 덕유산의 한가운데이다.

대간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꺾어졌다가 북향하고, 남쪽으로는 지리산으로 뻗어내린다.

구천동으로 내려가려면 중봉 못 미쳐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오수자굴을 경유한다.

'흰바위봉'이란 뜻인데, 바위의 색이 엄격하게는 회색에 가깝다고 한다.

송계사 가는 길

송계사 대웅전

거창군 북상면 남쪽 덕유산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로서 신라시대 원효와 의상대사가 652년(진덕여왕 6년) 영취사(靈鷲寺)를

창건한 뒤 5개의 부속 암자를 세우면서 송계암이라고 이름지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이곳에서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영취사를 비롯하여 5개의 암자가 모두 소실된 뒤 폐허로 있다가 숙종때에

진명(眞溟)스님께서 송계암만 중건을 하였는데, 6.25 전쟁때에 다시 전소된 것을 1969년에 중창하였다.

1995년 원정(圓靜)스님이 1969년 중창때에 건립한 영취루가 기울어진 것을 해체하여 다시 짓고

문각(門閣)이라 이름을 바꾸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대웅전, 문각, 요사채가 있다.

유물로는 아미타여래좌상과 소종(小鐘) 탱화 3점등이 있고 전통사찰 제57호로 등록되어 있다.

송계사(松溪寺) 전경

산의 정기가 강할수록 많은 사찰이 자리 잡는다고 한다. 덕유산이 그러하다.

덕유산의 강강한 기세를 받아 옛날 무주구천동에 일곱 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북상면 일대에도 일곱 개의 사찰이 있었지만 지금은 송계사만이 고찰로 남아 있다.
북덕유산 골짜기를 따라가는 송계사 계곡은 청정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향적봉 가는길

이곳 백암봉에서 2.1km 떨어진 향적봉으로 향한다.

향적봉은 덕유산의 주봉이기는 하지만 백두대간 능선에 많이 떨어져 있기에

오늘은 향적봉으로 가고싶은 욕심땜에 무리하게 초반에 산행 속도를 내는 바람에

거의 선두권에서 백암봉에 도착하여 대장한테 눈치보일 각오를 하고 뒤도 안보고

향적봉으로 향한다... 사실 대간팀들은 향적봉으로 거의 가지 않는 편이다.

백암봉에서 향적봉 가는 길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향적봉가는 길

백암봉에서 덕유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어디가 덕유의 앞모습이며 뒤 모습인지 궁금해진다.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는 남덕유가 뒤 모습일까?

아니면 마루금에서 비켜난 덕유의 최고봉 향적봉이 뒤 모습일까?

 

문득 언젠인가 지하철에서 본 詩가 생각난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시냇물이나 각종 나무들도 뒷모습이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뒤 모습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앞모습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앞모습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영화배우 혹은 탤런트들도 뒤태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앞모습은 성형 등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라는 뜻이 담긴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뒤 모습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것. 이를테면 자연은 앞 뒤 모습의 구별이 필요치 않으며

자체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내가 가고 있는 대간 마루금도 앞 모습 뒤 모습이 구별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덕유산은 그렇지 않다. 뒤 모습은 없다 하더라도 분명 앞 모습은 있다.

향적봉이 바로 앞모습이다. 그리고 향적봉이 앞 모습이 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라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지금 그 향적봉을 만나러가는 중이다

중봉 오르는 길에서 뒤돌아본 덕유평전

이곳은 소백산, 지리산 세석평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평전의 하나로 아고산대이다.

향적봉 가기전에 만나는 중봉오르는 길은 데크목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향적봉으로 오르는 많은 인파들과 안성계곡에서 불어오는 북풍한설은 살을 에이는듯 하다.

오늘 여태껏 걸어오면서 느꼈던 추위와는 格이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간간히 뿌려대는 눈발에 자켓 모자를 쓰지만 이내 강한 바람이 벗겨버린다.

덕유산 산신의 진노함일까? 아님 덕유산을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山神의 의중을 헤아릴 수는 없는 衆生의 한계인가?... 다소곳이 몸을 낮추며 산신님의

심기를 거드리지 않기 위해 애를쓰며 능선 정상에 오르니 中峰을 만난다.

중봉 정상의 이정목

덕유산 지도

"예부터 '덕(德)이 많아 넉넉한 산, 너그러운 산'으로 불리고 있는 덕유산은 

 향적봉(香積峰)을 주봉으로 삼고  달리는 덕유연봉(德裕蓮峰)들이 장장 100리길의 

대간(大幹)을 이루며 영·호남을 가르는 우리나라 12대 명산중 하나다.

 

삼남을 굽어보는 덕유연봉의 최고봉인 향적봉에 오르면 북으로 가깝게는

적상산(赤裳山, 1,038m)을 아래에 두고 멀리 황악산(黃岳山), 계룡산(鷄龍山)이 보이며,

서쪽은 운장산(雲長山), 대둔산(大屯山), 남쪽은 남덕유산을 앞에 두고 지리산(智異山),

반야봉(般若峰)이 보이며 동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 금오산(金烏山)이 보인다. 

 

향적봉 정상에서 발원한 옥수가 흘러 내리며 구천동 33경을 만들고, 북사면의

무주리조트, 서남쪽의 칠연계곡을 이루어 수많은 탐방객들을 맞이하는 덕유산은 두문산(斗文山, 1,051m),

칠봉(七峰, 1,161m),거칠봉(居七峰, 1,178m) 등의 고봉(高峰) 등을 거느리고 봄철이면 칠십리

계곡에 빨간 철쭉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으로 피서객을 손짓하며, 가을이면 붉게 타는 단풍으로

만산을 물들이고, 겨울이되면 하얀 눈이 뒤덮인 설경속에 설화를 피워 신비경을 이룬다."

   -국립공원덕유산 홈페이지 참조-

중봉(1,594m:10:50)

향적봉 가는 길

꽃 중에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만.. 겨울나무 마른가지에 피는 꽃은 꽃 중에 꽃이다.

눈과 바람이 만든 꽃, 청초하면서 화사한 꽃에는 풀꽃처럼 평화와 憂愁가 깃들어 있다.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고 꿈에 그리던 피안처라면 이곳에 붙박여 살고 싶다.

아침의 평화... 애오라지 붙들고 놓고 싶지 않다.

그러나 .....! 인생길, 산길 그 어느 길도 한곳에 머무를 수 없는 길. 구름도 흐르고

모든 것은 사라지고 지나가기에..서리꽃도 한순간 피어있는 꽃이기에....

미련을 떨치고 搖之不動의 마음을 다독여본다.
“선한 마음을 가진 자는 세상에 선한 면을 보며 참되게 살 것이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자는 세상에 아름다움을 보며 아름답게 살 것이요“ -펌-

산은 내게 세상을 아름답게 보며 살라고 산에 들 때 마다 무시로 審美眼을 길러준다

향적봉 대피소(11:05)

향적봉 대피소에 도착을 하니 백련사에서 올라오는 등산객과 백암봉에서

온 사람 그리고 무주리조트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향적봉(香積峰:1,614m:11:10)

전북 무주군 설천면과 안성면의 경계에 있는 덕유산의 주봉으로

향기가 쌓여 있는 봉우리'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가까운 곳의 적상산 '향로봉'에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면 그 향기가 이곳에 와서 쌓이고, 그 향기를 찾아 온

산신들이 기도를 들어줬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으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남한에서 4번째로 높으며 옛적에 광려산(匡慮山) 또는 여산(廬山)으로 불렸다.

이 후 이성계가 고려 명장시절 이산에서 수도 전념할 때 수많은 맹수들이 우굴 거렸으나

한 번도 해(害)를 입지 않아 덕이 풍부한 산이라 하여 덕유산이라 하였다.

덕유산의 최정상인 향적봉(香積峰)은 향나무가 많았다한다.

지금은 향나무대신 중봉부군에 주목 몇 그루만 남아 있다

향적봉 정상 이정표

크고 넉넉한 덕스럽고 기상 넘친 덕유산은 찾는 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

남덕유와 북덕유로 구분된 덕유산은 남덕유는 암봉 의지형에 날카롭다면

북덕유는 전형적인 육산으로 매우 유순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중환의“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흙산인데 九泉洞이 있고 천석이 깊숙하다.

난리를 격을 때 이산에 숨어들면 적군이 찾지 못한데서 “덕이 큰산” “넓고 크다” 라고 하였다

. 또한 임훈의 “덕유산향적봉기”에는 무주구천동을 불공을 이룬자 9천명이 머문 둔소라 했고

박문수어사가 천(千)씨 부자와 관련해 구천동민을 신도로 다스렸다.

구(具)氏와 천(千)氏가 많이 산다고 해서 具千洞이라 한다고 하는 말도 있다.

어찌 되었던 크고 웅장한 산세의 덕유산은 무주구천동의 33비경을 만들고 수많은

탐방객에게 자연의 넉넉함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향적봉 정상 돌탑

德이 많아 어머니의 품처럼 너그러운 산으로 불린다는 덕유산 정상 향적봉

오늘은 한없이 너그럽고 자애로운 어머님보다는 자식들에게 냉정하고 강인한

어머니상인 모습이다... 거기다가 덕유설경을 감상하러 온 전국의 등산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바람에 마치 남대문 시장 노점상을 방불케한다

잠깐 사이에 땀이 식은 탓인지 엄청난 추위가 엄습해온다

같이간 동료산꾼 배 원장님과 함께 서둘러 백암봉으로 향한다

우리나라 특산종인 구상나무는 높이가 18m에 이르는 상록교목으로 老木의 껍질이 거칠다.

종자는 길이 6mm정도이고, 날개는 45mm 정도이며, 지리산, 가야산, 한라산 등지에서

자생하는 희귀식물로서 덕유산에는 향적봉을 중심으로 해발 1,000m 이상지역에서 자생하고 있다.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주목과 구상나무 군락지인데

하얀 눈으로 뒤덮인 상고대를 감상하는 등산객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온갖 자태로 산꾼을 유혹하는 설경과 상고대로 인해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고...

설해목 (雪害木)

해가 저문 어느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 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 주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을 들어 주는데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고 안 계신 한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노사의 모습이다.

산에서 살아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 들이 많이 꺾이게 된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 올 때,
우리들은 깊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 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사밧티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 앙굴리말라를 귀의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 도 차별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법정 스님의 글중에서 .

환상적인 덕유능선의 상고대

되돌아 온 중봉 갈림길(11:35)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오수자굴과 무주 구천동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구천동과 설천의 유래

산자락을 끼고 흐르는 무주구천 동계곡은 나제통문에서 덕유산 향적봉 아래까지

28km에 달하는 계곡으로, 이 계곡에는 33경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구천동계곡의 ‘구천동(九千洞)’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덕유산에 9천 명에 이르는 성불공자(成佛功者)가 살았다 하여 ’구천동‘이란 설이 있고,

<박문수전(朴文秀傳)>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 ‘구씨(具氏)’와 천씨(千氏)가 살며 집안 싸움을

하는 것을 어사 박문수가 해결해 준 뒤로부터 ‘구천동(具千洞)’이라 불리다가 지금의 구천동

(九千洞)으로 바뀌었다는 설 등이 있다.

 

설천이라는 지명에 대한 유래는 구천동과 관련이 있는데, 옛날 불교 전성기 시절 구천동에

많은 사찰이 있어 구천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수도하던 곳이라 하여 구천동, 구천둔이라고

전하여 오는데, 구천동의 구천승려가 밥을 짓기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쌀을 씻던 하얀 쌀뜨물이

구천계곡을 따라 이곳까지 온통 눈과 같이 하얗게 흘러내렸다 하여 눈 설(雪)자와 내 천(川)자를

붙여 설천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안성계곡에서 올라오는 세찬 바람으로 인하여 몸을 가누기가 힘이든다

송계삼거리(11:55)

백암봉으로 되돌아와서 백두대간 길을 원대복귀하여 동엽령으로 향하는데

동엽령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어찌나 많은지 어깨가 부딪혀서 길을 걸을수가 없을 정도이다.

백암봉의 유래가 된 암릉

백색이라기 보다는 눈이 덮혀 그런지 회색에 가깝다.

뒤돌아 본 백암봉의 모습

동엽령 가는길

 동엽령 가는길에 바라본 덕유능선을 타면서 조국의 山河가 이렇게 예쁘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사춘기 때 이성에게 느끼는 연정(戀情)을 산에서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겠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연정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름다운 것은 지켜줘야 하고 그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려는 것보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간에

얼마나 따듯한 교감이 이루어질까

덕유능선에서 바라본 거창군 북상면 병곡리 계곡

이곳은 경남에서 가장 오지라는 뜻으로 함경도의 산수갑산에 빗대어

경상도의 산수갑산으로 불릴만큼 오지이라고 한다.

4년전 북진길엔 참으로 날씨가 너무 좋아 거창의 장쾌한  산그리메가

정말 멋있는데 오늘은 시야가 좋지 않아서 아쉬운 맘으로 동엽령으로 향한다.

꾸역꾸역 밀려오는 등산객으로 좁은길에 어깨를 부딪히며 걷는게 불편하기

그지없어 정말 피곤하구나... 기맥이나 지맥길에 익숙해져 있는 범여의 몸뚱아리가 고역이다.

안성계곡 갈림길(12:20)

동엽령이 가까워지나 보다... 사람소리가 많이 들린다

동엽령(冬葉嶺:1,320m:12:40)

경남 거창군 북상면 병곡리와  전북 무주군 안성면 용추리를 잇는 고개이다

덕유산에는 빼재(신풍령), 동업령, 육십령 등 3개의 큰 고개가 있는데

다른 두 고개와는 달리  동엽령(冬葉嶺)은 깊은 산중에 있는 德에 그 모습을

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겨울 잎'으로 해석되는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 일대에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기가 어려우며 무주와 동엽령을 마주하고 있는 거창군에서 동엽령을 '

동업이재'로도 부르는 것을 보면 이런저런 짐작을 해볼 수는 있다.


동업령은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토산품을 교역하기 위해 넘나들던 재넘이로

재로 오르는 병곡 대하골(현재 거창군 북상면 병곡리)에는 옛날 동업이재를 넘나들던

나그네를 위해 술을 빚어 팔았다고 하는 주막터가 있었다고 한다.

 

겨울산의 덕유산은 마치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연상케한다.

첩첩산중으로 장쾌하게 이어진 크고 작은 연봉들이 눈가루를 흩날리며 선경을 연출한다.

덕유산은 남부지방에 있으면서도 서행의 습한 대기가 이 산을 넘으면서 뿌리는 많은

눈 때문에 겨울 산행코스로최고의 인기를 모으는 곳이며 눈옷을 입고있는 철쭉군락과

주목,구상나무숲이 한폭의 동양화를 보여주듯 설화가 감탄을 자아낸다.

동엽재 정상에는 수많은 등산객들 때문에 발디딜 틈이 없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안성탐방지원센터로 향한다.

그런데 이곳은 예전과는 올라오고 내려가는 등산객들 땜에 엄청 시간이 걸린다.

이정표(12:50)

이곳에서 많은 인파 때문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수선화 총무와 온종일

찍사까지 했는데 배신을 때리고 도망간 배왕초... 오늘 처음오신 분과 만나

물한모금을 마신 다음에 계곡을 계속 내려간다

눈덮인 계곡을 지나니...

호젓한 산죽길도 나오더니...

이내 이정표가 서있는 조그만 능선을 지나 고도를 낮추며 넓은 길을 만난다.

소나무와 갈참나무 한그루가 뒤엉켜 있는 곳을 지나니...

조그만 다리 하나가 나오고...

계속해서 용추계곡을 따라서 오늘의 날머리인 덕유산 안성탐방지원센터로 향한다

다시 또다른 다리를 건너니 간이화장실이 있는 넓은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칠연폭포 삼거리 갈림길이란다.

칠연폭포 갈림길(13:38)

이곳에서 후미도 몇명 있겠다... 망설임도 없이 300m 떨어진 칠연폭포로 향한다

칠연폭포(七淵瀑布:13:45)

무주군 안성면 통안마을 뒤 덕유산 쪽에 반석으로 형성된 계곡과 그 일대를 칠연암동이라 하는데,

무주구천동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폭포, 소와 담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작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뒤지지 않는다. 이곳의 대표적인 명소는 칠연폭포로

일곱개의 폭포와 못이 연이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폭포는 위에서 아래로 소와 소 사이를 맑은 물이 완만한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칠연계곡과 문덕소에 얽힌 전설옛날에 한 도사가 신선이 되기 위해 하늘에 기도를 하는데,

계시를 받기를 비법이들어있는 비책이 안성면 봉산마을 책바위에 있음을 알고 무주 안성으로

찾아와 책바위에서 책을 얻어 비법을 전수받고 용추폭포 부근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느껴 길가에 있는 노랭이 영감집에서 점심을 청하게 되는데 그 집 주인인 노랭이 영감이 쫓아버린다.

 

그러나 며느리는 몰래 쌀을 가져와 도사에게 주게 되는데 이에 도사는 신선이 되기위해 공부한 것을

잊어버리고 화를 참지못해 도사를 도와준 며느리를 불러내고는 노랭이 영감집을 폭포로 만들어 버린다.

이를 알게된 옥황상제께서는 도인에게 호통을 치며 덕을 배풀었는지를 물었던

장소라 해서 문덕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옥황상제에게 벌을 받은 도사는 칠연폭포에서 한 폭포마다 1년씩 7년에

걸쳐 반성을 하며 도를 닦아서 옥황상제의 용서를 받아 향적봉에 올라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무주군지에 전해온다

칠연폭포에 들렸다가 혼자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우측의 용추계곡 옆에는

건강한 소나무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잠시후 대장한테서 전화가 온다.

조금은 미안한 感은 있지만 보고 싶은걸 봐야하는 성격 때문에...

덕유산 안성탐방 지원센터(14:05)

안성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였는데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는 보이질 않는다.

전화를 하니 다시 500m 를 더 내려 오란다. 도대체 오늘 접속구간이 얼마야?

대간길은 13.5km 밖에 안되는데 어프로치구간이 10.3km... 그래도 보고 싶은걸

다 봤으니 그리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까 싶네그려

덕유산 통안마을(14:15)

마을로 내려오니 우리의 愛馬가 보이고 향적봉을 들리지 않은 동료 산꾼들이

식당에 모여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단현님과 하늘마음님이 주시는 막걸리를

연거푸 4잔을 마시고 나니 살 것만 같다... 이윽고 오늘 몸살로 컨디션이

안 좋은 깔끄막님이 늦게 오는 바람에  버스를 타고 무주읍내에 들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깔끄막님이 자기 고향에 왔다고 식사를 쏘는

바람에 맛있는 쌈밥 정식에다 소+맥 5잔을 마시고 버스에서 깊은 잠에 빠진다.

 

신년초에 쌈밥을 사신 깔끄막님, 막걸리를 쏘신 하늘마음님 복받을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