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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30구간 - 동엽령에서 육십령까지

by 범여(梵如) 2014. 1. 27.

덕유산! 남쪽구간은 이름만큼이나 그리 德스럽지는 않더이다

 

☞ 산행일자: 2014년1월26일~27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맑고 청명함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9.5km + 어프로치 5.1km   / 11시간 15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20여명과 함께

☞ 산행코스: 용추교-안성탐방지원센터-칠연폭포 삼거리-동엽령-1,380봉-돌탑봉-1,428봉

                  무룡산-1,280봉-삿갓골재대피소-삿갓봉-1,340봉-월성재-남덕유산

                  서봉(장수 덕유산)-영각사 갈림길-삼자봉-대포바위 갈림길- 할미봉-육십령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북상면, 함양군 서상면 / 전북 무주군 안성면/장수군 계북면, 장계면

 

甲午年에 들어선 지도 벌써 한 달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이 즈음에도 작년처럼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계속해서 복잡한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얼마전에 전북 고창 동림저수지에서 일어난 AI 고병원성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번지는 바람에

닭과 오리를 키우는 농가들이 좌불안석이다... 양평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는 셋째 형님은

어쩐지 걱정이 앞선다... 오늘은 안부 전화라도 해봐야겠다

 

그뿐이야! 전 국민이 몽땅 개인정보가 다 털렸다고 해서 과언이 아닌 카드사들의

개인정보 유출사건... 정말 기가 막힐 일이다... 그런데도 사건 수습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경제부총리라는 자가 하는 발언 한번 들어나봤소.‘개인신상 동의는 다들 해 준거 아니냐고’

얼빠져도 한참이나 얼빠지 자 아닌가 싶다.이보시요! 금융권에 통장개설이나 대출 등

개인신상정보 동의하지 않으면 모든게 가입이 안된다는거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의 입에서

나올법한 소리요? 당신이 한 소리는 ‘상처난 부위에 소금 뿌리는 것과 뭣이 다르요’ 한심한 짓거리 하고는...

 

우리나라 금융권 개혁을 해도 한참을 해야할 것 같소.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서도

고작 벌금 600만원만 내면 그만이라니...그러니 개인신용정보를 그렇게 우습게 보지...

 

몇년전 일본의 모리나가(森永) 분유가불량품 문제로 150년의 역사를 가진 회사가 문을 닫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우리나라도 금융권은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장사를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예.대 마진 차익으로 자기들 배만 불리는 금융권 이 시기에 개혁을 해야 되는건 아닌지...

불법을 저지르면 문을 닫게 만들어야 정신을 차리지

 

자기들은 부도나면 정부에 손벌려 공적자금 받고 민초들의 호주머니 털어서 빚은 안갚고 성과급

잔치나 하는 파렴치하고 한심한 작자들...대기업들한테는 수천억 아니 수 조 단위로 떼여도 찍소리

못하고 힘없는 민초들한테는수퍼 甲 아니 폭군 비슷하게 군림하며 비 올때 우산 뺏는 작태...

이번 기회에 확 바꾸시길

 

이번에 내 정보도 털린 모양이다... 대출관련 스미싱과 팩스가 최근 부쩍 늘어난 걸 보니...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덕유산 자연환경 휴양림(전북 무주군 안성면 소재:04:05)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에 오른 다음에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습관처럼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하여 내리니 경부고속도로 황간 휴계소다.

이게 뭐야... 나중에 알고보니 이 버스가 1.3주에 낙동정맥을 .4주에 백두대간을 가는데

오늘 낙동정맥 가는걸 착각하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아닌 경부고속도로로 향해서

가는 바람에오늘은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되는 대형알바를 한 셈이다.

ㅋㅋㅋ 박 사장 오늘은 속 좀 쓰리겠소... 하고 놀리니 염장지르지 말란다.

 

무주 안성탐방센터 앞에 내리니 하늘은 정말 맑다. 별은 쏟아지고 달빛도 청명하다.

그리고 날씨도 그리 춥지 않아 산행하기엔 딱 좋은 날씨이다.

안성탐방지원센터(04:15)

차에서 내려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

어둠속에 헤드렌턴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동엽령으로 향하는데 지난번 하산할 때 잔뜩

쌓였던 눈은 어제 내린 비의 영향으로 눈이 녹아서 빙판으로 변해있어서 그런지 아이젠을

착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미끄럽다... 모두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걷기만 한다.

들리는 거라고는 동료 산꾼들의 스틱소리와 눈 밟는 소리밖에.. 

칠연계곡 갈림길(04:30)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동엽령으로 올라서는데 날씨는 상당히 덥다.

출발하면서 고어텍스 자켙 것옷을 벗었는데도 몸뚱아리는 땀으로 범벅이 된다.

잠시후에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등산객들과 같이 섞이는 바람에 우리 동료산꾼은

보이질 않고 계속해서 동엽령까지 4.5km 구간을 치고 올라간다.

동엽령이 가까워지는 나무 계단에 도착하니 아래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추위가

엄습해오고 세찬 바람으로 인해 베낭에서 고어텍스 자켙을 착용하고 모자를 눌러쓴다.

동엽령 이정표(1,320m:05:45)

1시간 30분에 걸쳐 오르막에 치고 오르니 동엽령에 도착한다.

이곳까지 같이 올라왔던 산악회는 백암봉으로 향하고 우린 무룡산으로 향한다.

동엽령 정상 안내판

이곳 덕유산 구간은 같은 국립공원임에도 불구하고 표지판을 설치하는데 상당히

인색하다는 걸 느끼는데 지난구간과 같이 이곳 동엽령 정상에도 똑같은 느낌이다.

德스러워 그럴까? 너무 너그러워 그럴까...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는다.

 

덕유산의 옛 고개 중 동엽령(冬葉嶺, 1,320m)은 깊은 산중에 있는 덕에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겨울잎'으로 해석되는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 일대에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기가 어렵다.

무주와 동엽령을 마주하고 있는 거창군에서 동엽령을 '동업이재'로도 부르는 것을 보면 이런저런 짐작을 해볼 수는 있다.

거창군이 발간한 <거창군사(居昌郡史)>는 동엽령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토산품을 교역하기 위해 넘나들던 재이다.

재로 오르는 병곡 대하골(현재 거창군 북상면 병곡리)에는 옛날 동업이재를 넘나들던

나그네를 위해 술을 빚어 팔았다고 하는 주막터가 있다."

2009년 12월 26일 백두대간 북진때의 사진

그때는 안내판에는 분명히 동엽령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지금은 떡을 사먹었나...

덕유산 산행 개념도

1359봉 이정표(06:10)

 

동엽령에서 무룡산 향하는 길은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다.

세차게 불어오는 북풍한설은 참으로 인내하기가 힘이들 정도이다.

잠깐사이에 사진한장 찍기 위해서 장갑을 벗는데 그 사이에 손이 굳어 버린다.

멋지게 펼쳐지는 상고대는 어둠속이라 그림의 떡이고 능선에는 바람을 막아줄

방패막이는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능선에 엄청나게 쌓인 눈은 다저져서

돌덩이처럼 단단하여 러셀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로움만도 어딘데.

 

佛家에서 말하는 염일방일(拈一放一)이  이런걸 두고 하지 않는지...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하나를 쥐고 또 하나를 쥐려 한다면  어느날 그 두개를 잃게 될 것이다

 

그저 백두대간을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늘 고맙게 생각하며 걷는다.

1380봉(06:22)

돌탑봉(06:34)

어둠속에 사진 몇커트 찍는 사이에 동료산꾼을 놓쳐버려 꼴찌에 걷다가 돌탑봉에

도착하니 대장을 비롯한 동료산꾼들이 휴식을 취한다... 선 채로 휴식을 취하다

우측으로 꺽어져서 무룡산으로 향한다.

돌탑봉 이정표

일출이 시작되려나 보다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06:45)

동지가 지난지가 한달이 지난 탓인가? 해가 참많이 길어졌다.

이제 서서히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헤드렌턴을 벗어도 될 정도이다

1,428봉(07:10)

일출을 준비하는 동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서둘러 무룡산으로 향한다(07:15)

무룡산(舞龍山:1,492m:07:20)

경남  거창군 북상면 산수리와 무주군 안성면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산수마을 사람들은 ‘흰덤뿌대기’라고 부르는 깨끗하고 신령스런 산이다.

옛 이름은 불영봉(佛影峰)으로 백두대간상의 남덕유산과 북덕유산(향적봉)을 이어주는

산으로 용이 춤추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삿갓재 대피소에서 내려가는 길인 황점마을은 용의 꼬리에 해당한다

눈에 파묻혀버린 무룡산 정상 삼각점

동엽령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천신만고(?) 끝에 무룡산에 올랐을 때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무룡산의 이름이다. 왜 무룡산일까?

다수의 봉우리를 거느린 전국의 명산들 가운데 ‘산’이란 봉우리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설악산(대청봉), 대청봉, 중청봉,.. 지리산(천왕봉)에는 명신봉, 반야봉 등이 상징이다.

소백산(비로봉)도 국망봉, 상월봉 등도 마찬가지이다.

 

덕유능선의 가운데 위치한 무룡산. 이 산의 중심으로 산의 형세는 판이하게 다르다.

향적봉, 중봉 등은 ‛德裕’라는 이름에 걸맞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반면

반대편의 동봉(남덕유산), 서봉(장수 덕유산)및 삿갓봉은 위압적이고 고압적이다

전혀 덕유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룡산을 중심으로 남덕유와 북덕유가 분리되길 원했던 것일까?

날이 밝아지면서 가야할 삿갓봉, 남덕유산, 서봉(장수덕유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너무 멋있어 다시한번 바라본다.

새벽에 지나온 능선도 뒤돌아보고...

무룡산에서 맞이한 일출(07:30)

1년에 50번 가까이를 무박산행을 하는 범여

거의 매주 아침마다 산에서 맞이하는 일출이지만 덕유 능선의 일출은 남다르다.

탁트인 전망에서 일망무제로 맞이하는 일출 더없이 가슴 벅차오른다

무룡산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기 위하여 10분정도 머문 다음에 삿갓재대피소로 향한다.

무룡산 아래 능선 위에는 덕유의 일출을 찍기위해 출사나온 찍사들이 삼각대를 이용하여

일출 촬영에 정신이 없다... 멋진 작품을 하나 건지기 위해 이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동료산꾼 노루님, 주원아빠, 배왕초님

늘 산악회를 위해 애쓰는 우 대장님 - 고생많소

삿갓재대피소로 내려가기 위해서 계단을 내려서는데 비박산꾼하는 산꾼의 텐트를 만난다.

계단 아래로 내려오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잠시후에 올라야할 남덕유산과 삿갓봉이 보인다.

우리의 아침 만찬을 펼쳐야 할 삿갓재대피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삿갓재 대피소는 2층으로 된 최신식 건물이다. 1층에는 보일러실과 취사장이 있고,

2층에 숙소가 있으며 등산객들은 1층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2층에서 숙박을 해결한다.

숙소는 2층 침상으로 되어 있으며, 총 7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용료는 1박에 비 성수기 7000원,

성수기 8000원 이며, 침구류(담요) 대여료는 1장에 1000원이다.

숙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라면이나 과자류 등 인스턴트식품을 판매하며 캔이나 음료수 건전지 휴지 등

꼭 필요한 물건만을 판매한다. 사고를 우려해 술은 일체 팔지 않는다.

밤에는 심야전기를 이용해 난방을 하기 때문에 방의 1층은 따뜻한 편이다.

삿갓재 대피소(1,280m:08:10)

삿갓재 대피소에 도착하니 시간이 어중간한 탓인지 우리 산악회 외는 다른 산악회

몇 명만이 있는 한적한 분위기이다... 오늘은 오랫만에 같이 동행한 동료산꾼 젠틀맨님,

그리고 맨날 온다하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수선화 총무에게 부도를 내버려서

양치기 소년이 돼버린 수풀림 아우님 등 참으로 반가운 동료들과 아침상을 펼친다.

 

난 한달전에 구입한 휘발유 버너 콜맨을 시험 해보는데 역시 화력하나는 쥑인다.

거기다가 어제 이곳에서 비박 아닌 숙박(?)을 한 장동건 만큼이나 잘생긴 산까치님이

가져온 소고기에다가 젠틀맨님이 구룡포에서 공수해 온 과매기 등등 화려한 만찬이

펼쳐지는데 다른 산악회에서 온 반바지 차림으로 온 친구가 자기는 컵라면 하나

가지고는 여기저기 입만 가지고 삽질을 하고 다니는데 가관이 아니다.

술과 음식은 물론이고 자기 입만 채우는 것도 모잘라... 자기 식구들도 갖다 퍼먹인다.

근데 울 식구들은 내가 아는 친군줄 알고 아무말도 못하다가 내가 뭐라고하니

다들 맨붕 상태이다... 정말 웃기는 짬뽕이다.

동료산꾼님들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자요! 그냥 복 지었다고 생각들 하시요

따뜻한 곳에서 50분동안 정말 포식을 하고 다시 대간길을 나선다.

산까치님

젊고 참으로 잘 생겼다... 부럽당 나도 10년만 젊었어도

이젠 6학년이 다되어 가니 몸뚱아리 여기저기가 아프오고 고물상이 되어가니 걱정이다.

흔히들 인생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힘을 내보자... 노래가사처럼 ‘내 나이가 어때서’... 중략...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이정표(09:20)

능선에서 바라본 명천계곡과 명천저수지(무주군 안성면 소재)

양치기 소년(?) - 수풀림 아우... 종종 보세나

삿갓봉 가는길에서 조금전에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본다

언젠가 서울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본 詩가 생각이 난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산도 마찬가지이다.

무작정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은 멋을 모르는 사람이다.

산을 가다 뒤를 돌아볼 여유를 가진 그대는 정말 진정한 산꾼이다

 

드디어 삿갓재 대피소에서 힘들게 치고 오르니 삿갓봉이 나타난다.

정상에 오르니  온 천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멋진 날씨이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도 너무좋다

욕심 버리면 모든걸 다 얻을 수 있는데  저 산아래에서

 아옹다옹 하는 불쌍한 衆生들은 어떻게 제도할꼬?

삿갓봉(1,418.6m:09:30)

경남 거창군 북상면과 전북 무주군 안성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멀리서 보면 삿갓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으로 남덕유산이

손에 잡힐듯이 보이고 바로 아래에는 월성계곡 끝자락에 황점마을이

보이고 바로 아래에는 조금전 지나온 삿갓재대피소가 있다. 

조금후에 걸어야 할 등로의 궤적

월성치 가는 길에서 만난 이정표

덕유능선에서 뻗어나간  시루봉의 모습

상고대 터널이 계속되는 멋진 장관의 연속... 겨울 산행의 白味를 맛보며 걷는다

남덕유산 가는 길에 멋진 설경에 감탄을 하면서

人(사람)이 山(산)에 오르면 仙(신선)이 된다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거꾸로 人(사람)이 谷(계곡)을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俗(속)이니,

우리는 대부분 신선이 아닌 속세의 삶에 찌들려 살아가고 있다.

 

신선으로 사는 것과 속세에서 사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신선으로 산다는 것은 꿈,사랑,돈,권력,명예... 등의 세속적인 가치를 초월하여 사는 것일 것이고,

속세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가치를 그리워하고 추구하면서 꽃을 피우며 살아가야 하는

큰 차이... 그게 사바세계에 살아가는 衆生의 한계일까?

조금전에 지나온 삿갓봉의 모습

능선에서 바라본 황점마을(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소재)

 

황점은 옛 이름이 삼천동(三川洞)으로, 조선조 때 쇠(鐵)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한다.

유황(硫黃)을 많이 구웠다는 데서 황점(黃點)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지금도 월성광산이 있다.

동료산꾼들과 노거수가 산꾼을 반기는 호젓한 길을 걷는다.

이윽고 멋진 전망바위에서 아래로 내려서니 월성치가 나오는데

이곳부터는 대간 북진팀들을 간간히 만난다.

전망바위(10:20)

월성재(황점마을 갈림길:10:24)

월성재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유래 되었는데 월성계곡이 유명하다.

월성계곡은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창선리에 위치하며 남덕유산(1507.4m) 동쪽 자락의 월성천을

따라 형성된 길이 5.5㎞의 계곡이다. 흔히 거창의 피서지로는 수승대와 금원산 일대를 최고로 꼽지만

 호젓하기로는 월성계곡이 더 우위를 차지한다. 거창읍내에서 거열산성군립공원, 수승대를 차례로

지나고 북상면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남덕유산 방향으로 들어가면 병곡리와

산수리로 들어가는 갈림길 삼거리에서부터 월성계곡이 시작된다.

계곡의 폭은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주변 산세가 워낙 거대해 수량이 풍부한 편이다.

예전에 월성치라고 붙혔전 안내판은 어딜가고 지금은 그냥 안내판만 서있다.

뭘 그리도 감추고 싶었는지... 아님 귀차니즘의 영향인가?

2009년 12월 26일 북진때의 사진 

월성계곡(황점마을) 가는길

거창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월성계곡은 백제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서려있는 곳으로 전설에 따르면 백제 왕자 서동(薯童)이 신라 공주 선화를 꾀어서 백제의 도읍

부여로 돌아가던 길에 쉬어 간 곳이라고 한다. 또 신라의 사신이 후백제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가는 도중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였기에 신표 인장을 버리고 달아났던 곳이라고도 한다.

 

월성계곡의 첫머리는 강선대(降仙臺)와 모암정(帽岩亭)이다.

강선대는 조선 인조 때 척화신 동계 정온(鄭蘊) 선생이 남한산성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던

 덕유산 모리재 초입에 있는 명소로 경치가 좋아서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었다는 전설이 있다.

대를 들러리하고 있는 맞은편 고숲(古林)에는 모암 임지예(林芝藝)를 기려 세운 모암정이 물과 어울린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계곡을 돌 때마다 마을이 있고 넓은 반석이 개울을 따라 펼쳐진다.

 

창선리에 이르면 암반을 타고 흐르는 물 흐름이 마치 눈이 흩날리는 모습같다 하여 분설담(濆雪潭)이라 부르는 명소가 나온다.

바위 벼랑을 끼고 돌아 흐르는 물길 아래 누운 반석이 물결에 패이고 패여 물고기 비늘 형상을 이룬다.

분설담 위쪽에는 마치 양 날개로 병사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듯한 당당한 위풍의 장군바위가 서 있다.

17세기 화가 진재 김윤겸(金允謙)의 진경산수 화첩에 그려진 경치를 그대로 빼닮았다

 

월성에서 황점으로 오르는 길 중간 지점에는 사선대(四仙臺)가 있다.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머물러 송기(宋基) 또는 송대(宋臺)라고 불렀다.

1909년 고종의 5남 의친왕 강()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전() 승지 정태균을 찾아와 머물면서

북상·위천 지방의 우국청년들과 이곳 일대를 뒷날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준비하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구국의 한이 서린 곳이다.

왕실의 선원(璿源)을 뜻한 이름으로 사선대(思璿臺)라 부른 것을, 바위 포갬이 4층이고

돌 위에서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에 의해 사선대라고 부른다.

기단 위의 3층 석탑을 방불케 하는 사선대 맨 위 바위 모양은 마치 거북 같기도 하고,

봉황새 모양 같기도 한데, 그 머리 부분이 남덕유산을 바라보고 있다.

월성재에서 다시 급한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무슨 용도인지는 잘모르는 안테나를 만나고...

잠시후에 만나야 할 남덕유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능선에서 내려서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다시 우측으로 꺽어지니 남덕유산 이정표가 나온다

남덕유산 갈림길(11:00)

백두대간 능선에서 0.3km 떨어져 있는 남덕유산 정상

그래도 올라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에 지체없이 정상으로 오른다

정상 직전에서 만난 이정표

남덕유산(南德裕山:1507m:11:15)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계북면의 경계 능선에 솟아있는 산으로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에서 15km정도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덕유산의 제2의 고봉이다. 

향적봉이 있는 북덕유는 마치 부드러운 육산으로 여성의 산으로 불리는 반면,

삿갓봉 위에 있는 무령산을 경계로 하여 남덕유는 멋진 암릉과 거친 남성상을 연상케

할만큼 험한 능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향적봉은 백두대간에 2km 넘게 떨어져 있는

반면 남덕유산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이루므로 전문 산꾼(?)들에게는 향적봉보다는

남덕유산이 더 의미있는 산으로 회자된다.

 

지도상 적힌 이름은 제 1 덕유산이며 옛날엔 황봉 (黃峰), 봉황산 (鳳凰山) 으로 불렸다.

2008 년 11 월 1 일부터 옛 이름인 봉황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에서 남쪽으로 15km지점에 위치한 덕유산의 제2고봉(高峰)이며

마루금에 놓인 봉우리는 하봉, 중봉, 상봉으로 이루며 상봉이 되는 봉우리는 동봉(東峰)은

남덕유산, 서봉(西峰)은 장수 덕유산으로 불린다.

 

남덕유산은 북덕유산과는 달리 장쾌한 기상으로 솟은 바위 뼈대는 개골산이라 불린다.

산 경치가 묘향(妙香)과 금강(金剛)을 닮아 황홀할만큼 아름답다.

남덕유와 장수 덕유로 불리는 동봉과 서봉사이 황새늦은목이라는 능선을 갖고 남쪽으로

육십령의 대령을 안고 자수정 산지로도 유명하다.

또한 장수쪽의 토옥동(土沃洞) 계곡을 거느리며 그 아래는 장수온천이 분출되고 있으며

동봉은 삿갓봉을 거느리고 구한말 거창의 의병사의 빛난 한쪽을 기록하고 있다.

 

남덕유산은 3대강의 발원샘을 갖고 있다. 육십령은 금강(錦江)의 발원샘이며 정상 남쪽

기슭에 있는 참샘은 진주 남강(南江)의 첫 물길이 되며 북쪽 바른골과 삿갓골샘은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黃江)의 첫 물길이다.

함양쪽에 있는 영각사는 신라 헌강왕 2년(876)에 심광대사(審光大師)가 창건 했으며

조선 세조 31년(1449) 원경(圓鏡)대사가 중건 하였으며 중종 18년(1523)에 성묵(性默)

대사가 중창한 절로 6.25때 설파(雪坡)대사가 감수하여 만든 화엄경판까지 불타버려

1959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관리가 안되는 삼각점

남덕유산에 오르니 맑고 쾌청한 날씨탓인지 정상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우리처럼 대간 산꾼은 아니고 영각사에서 올라오는 일반 등산객들인데 인증사진 하나

남기기도 힘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고 정상 옆 데크목에는 아무렇게나 앉아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인해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거기다가 삼각점 표지판과 있고 삼각점은 데크목 아래에 묻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거기다가 정상석 옆에는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이 사람들에게 마구 짓밟히고 있다.

데크목 계단에 묻혀버린 삼각점 안내판

신선으로 살아갈 수 없어 세속적인 가치를 떨쳐버릴 수가 없기에 그 가치를

틔워내기 위해서고통스러울 수 있는 세속의 삶을 살아가면서 못다핀 꽃을 피워야 한다.

아직은 그리움과 집착으로 그것을 터트려 겉으로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내 삶이

마음 속에서 곪아 썩는 못난 아픔으로 그칠 것 같아 세속적인 삶일지언정

꽃을 피우는 일이 꼭 고통스럽고 아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프지 않으니 흔들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나 아프도록 그리워는 해야 하는데,

감정이 마모되거나 무미건조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런 고통과 절실함이 메말라가면

그리움의 향기도 탈색된, 그저 그리워하던 것이니까? 라는 정도의 집착으로 남아갈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향기를 잃은 그리움은 본질적인 것을 상실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픈 만큼의 진실성이야말로 그리움을 향기롭게 하는 것일 텐데...

아픔이 사라지면서 그 진실성도 가벼워지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아픔은 그리움을 존재의 안으로 새긴 흔적이 되어야 한다.

아픈만큼 처절한 그리움도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직은 아프도록 그리워하라.

북쪽 능선을 바라보니 아침에 지나온 무룡산 너머로 향적봉이 보이고...

동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진양기맥 능선인 월성산, 그리고 금원산, 기백산, 거망산, 황석산 등

거창의 명산들과 그 너머 지리산인듯한 봉우리가 보이건만 확인할 길은 없다

남덕유산 정상에서 내려와 넓은 공터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남덕유산과 서봉사이에 있는 황새목이의 모습

 

'德이 많고 너그러운 어머니의 산'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덕유산 그 연봉중에

'작은 히말라야'라고 불릴만큼 설경 산행의 백미를 자랑하는 남덕유산(1507m)..

 

속리산을 지난 백두대간의 굵은 마루금은 한반도 남쪽을 동서로 나누며 남하하고,

산줄기는 지리산을 만나기 전 천미터가 넘는 멧부리를 뿜어내는데 바로 덕유산의 연봉들..

조선중기의 풍수가인 격암 남사고(南師古)는 '덕유산 일대에 사람을 살리는 기운이 가득차 있다'며

병란을 피하는 십승지로도 예언한 곳이기도 한 이곳

 

조선시대에는 남덕유산을 봉황산(鳳凰山) 혹은 황봉(黃峯)이라 불리웠다는데..

"여지도서"에는 '황봉은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달려 나와 이 산봉우리를 이루고,

관아의 서북쬭 65리에 있다' 라고 하였으며

"대동지지"에는 '봉황산 즉 덕유산 동쪽 지맥은 서북쪽 70리에 있다'라고 적혀 있다.

남덕유산에서 황새목이를 지나 서봉을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눈으로 인해 미끄럽다.

급한 능선을 올라 철계단 오르기 전 양지바른 곳에서 동료산꾼들과 휴식을 취하면서

과일과 빵을 나눠 먹으면서 10분정도 쉰 다음에 급경사의 철계단으로 오른다.

700여개의 철계단을 밟으며 서봉(장수덕유산)으로 오르는데 고도를 500이나 올려야 한다

조금전 내가 걸어온 등로의 궤적

장쾌한 골산으로 이루어진 남덕유와 부드러운 육산인 북덕유(향적봉)로 나뉘는 덕유산

 

한반도 남쪽에선 지리산 다음으로 크고, 넉넉하며 덕이 있는 덕유산.. 그 덕유산의 연봉들이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덕유산에 남(南)자를 앞머리에 붙여 불리우는 이름..남덕유산.

 

덕유산 일대는 대표적인 다설다우(多雪多雨) 지역으로 강원도 못지않게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덕유산은 한반도의 남부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기에

겨울철 시베리아 고기압이 확장하며 서해를 건너면서 수증기를 가득 머금은 대기는

빠른 속도로 내륙으로 진입하며 이 때 백두대간 덕유산의 높은 산을 만나 냉각되어 많은 눈이

내리게 되는데...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연유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서봉에서 바라본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모습

서봉(西峰:1,492m:12:10)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계북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남덕유산(동봉 1,507.4m, 서봉 1,510m)은

주봉인 향적봉(1,614m.북덕유산)을 먼 발치에 두고, 남도 산의 조종인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드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남덕유산 하면 1,507.4m의 동봉을 두고 일렀다. 하지만 백두대간 종주가 성행하면서 서봉을 거치는

등산인들이 많아졌고, 서봉이 동봉보다 높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서봉을 남덕유산의 주봉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지도상에는 서봉의 높이를 1,492m로 표기해 놓고 있다

 

옛날에는 남덕유산 또는 서봉을 봉황산 이라 하여 매우 신성시 했다고 한다.

문헌비교와 산경표에는 백두대간은 대덕산을 경유 덕유삼봉-백암봉-봉황산을 거처 육십령으로 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남덕유산인지 장수 서봉인지 가늠할 필요가 있다.

장수 사람들은 이 서봉을 장수덕유산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서봉정상에는 5년전 북진길에서 만난 표시석은 보이질 않는다.

산행을 끝나고 동료산꾼 하늘마음님을 통해서 그 사연을 알고는 失笑를 금할수가 없었다.

사연인 즉 장수사람들이 자기네 땅에 있는 서봉에 함양군이 표시석을 세웠다고 기분이

나빠서 뽑아서 30m 아래로 굴러 버렸다고 하는데... 벤뎅이보다도 더 좁은 소갈머리하고는... ㅉㅉㅉ 

그걸 없애버렸으면 당신네들이 만들어 놓던지... 코딲지만 땅덩어리에서 뭔 이기심은 참으로 한심한 자들

엄연히 따지면 경계 능선이니 전부 당신네꺼는 아니잖어

5년전 북진길때의 서봉에서(2009.12.26) 

아쉬움을 남기고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갑자기 남자 두사람이 진로를 막는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같이 온 여자분이 쉬~이를 하는 중이란다... 급했던 모양이다

꿩대신 닭이리고 이곳 이정표에다 서봉이라고 표기해놨다.

서봉 아래 돌탑옆에 있는 이정표

가야할 할미봉과 그 너머로 다음구간에 가야할 깃대봉, 영취산 백운산도 보이고...

눈덮인 능선을 따라서 육십령으로 향한다.

능선 아래서 바라본 서봉의 모습

능선 아래로 고도를 낮추니 호젓한 산죽길에 눈은 녹은 탓인지

등로는 질척거리고 예전과 달리 이곳으로도 일반 등산객들이 많다.

능선 안부에는 바람의 영향으로 1m가 넘는 눈들이  쌓여있다.

능선에서 바라본 남덕유산 아래에 있는 진양기맥 분기점의 모습

진양기맥은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갈래를 쳐 남강 유역인 진양호의 남강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59.1km의 산줄기로 남강과 황강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진양기맥의 서쪽 또는 남쪽의 물은 남강으로 흐르고 동쪽은 황강과 낙동강 본류로 흐른다.

백두대간에서 남덕유산에서 분기하여 남강과 낙동강의 정확한 분수령이 되는 산줄기로 본다면

의령 한우산에서 응봉산, 우보산, 돌문재쪽으로 이어가는 우봉지맥이 되겠지만  대부분 산세나

거리가 더 멀다는 이유로 자굴산, 집현산, 광제봉, 남강댐으로  이어가고 있다.

미끄러운 암릉구간을 오르는데 내려오는 등산객들과 맞물려 시간이 지체된다

암봉정상(12:45)

미끄러운 암릉길에 로프를 타고 오르는데 평소에 좋지않은 팔목에

힘을 줬던 탓인지 자꾸만 팔이 저리고 어깨가 아파오니 걱정이다

영각사 갈림길(12:50)

갈림길에서 조금 내려와 양지바른 곳에서 동료산꾼들과 빵과 맥주,

소주에다가 과일까지 먹은 다음에 다시 육십령으로 향한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우회길이 나오는데 잠시후에 다시 만난다

고도를 계속 낮추니 또다시 산죽길을 만나고...

헬기장(13:18)

경남덕유교육원 갈림길(13:25)

육십령← 5.2km 남덕유산 3.6km 이정표가 서있다.

갈림길 이정표

삼자봉(13:38)

좌측으로 내려서면 경남덕유교육원 내려가는 봉우리로

정상에 넓은 봉우리 이정표에는 지도상에도 없는 삼자봉이라 써놨다.

삼자봉 갈림길

2012년 1월 8일에 걸었던 진양기맥 능선을 바라보며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할미봉 아래까지는 편안한 능선을 따라서 걷는다

구조표시목을 지나니...

암릉으로 오르는 데크목 계단을 만나고...

가야할 할미봉이 보이는데 직벽에 가까운 암릉이라 앞이 캄캄하다.

갑자기 팔굼치가 더 아파오는 느낌이다.

젊음이 좋긴 좋구나... 부럽다

암릉정상에서 바라본 장수군 장계면과 계북면의 모습

지나온 남덕유산과 서봉의 모습

직벽에 까까운 암릉길에다가 응달이라 빙판이 진 곳을

로프 한가닥에 몸을 의지한 채 할미봉으로 올라간다.

엄청 미끄럽다

위로 올라오니 데크목 계단인데 정작 위험한 곳은 로프라 이해가 안간다.

대포바위 갈림길(14:30)

우측 아래에 변강쇠 거시기만큼이나 커다는 남근석이 0.43km 아래에 있다고

표시를 해놨건만 가고 싶은 맘이야 굴뚝 같지만 로프에 힘을 다 빼버려 그냥 지나친다

대포바위

임진왜란 때 장수를 치기 위해 육십령을 넘던 왜군들이 대포바위를

조선군의 대포로 착각하여 함양으로 우회해 남원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장수군 일원이 피해를 면했다는 설이 있다. 또

한 가까이 보면 남자의 성기와도 비슷하여 남근석으로 불리는데,

남자 아이를 못 낳는 여자가 이 바위에 다가와 절을 하고 치마를

걷어 올리면 남자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할미봉(1,026m:14:32)

경남 함양군 사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멋진 암릉으로

된 멋진 곳이 있으면 주위 전망이 일품으로 장상에는 삼각점이 있다.

할미봉 유래를 보면 할미봉 아래에는 성터가 있는데, 할미봉의 이름은 이 성터에서 유래한다.

옛날 어느 할머니가 치마폭에 돌을 날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할미봉이라 했다는 설과

 

할미봉 서쪽 산자락에 있는 반송 마을 사람들은 할미봉이 원래 ‘쌀미봉’인데 할미봉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조선 시대 때 이곳에 합미성이 있어 합미봉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1961년 국토지리정보원 지명일람표에는 합미봉으로 고시)

 

옛날 한 도승이 할미봉 정수리의 암장을 보고 우리나라 군사가 수년간 먹을 쌀이 쌓여 있는

형상이라 했다 하여 합미봉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한다.

할미봉 정상 삼각점

할미봉 정상에서 바라본 함양군 서상면의 모습

장수 경주마 목장

할미봉 정상에서 트랙이 보이는 곳이 목장이다. 말이 목장이지 종마장이라 한다.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저 종마장이 이곳에 들어올 때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즉 말 똥물을 마시게 될 지도 모를 마을 주민들이 저 목장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찬성할 리는

만무였던 바, 위정자와 한국마사회는 저 시설이 들어옴으로서 지역 경제 발전에 획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는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며 교묘하게 주민들을 속여 허가를 받아냈는데

결국 저 시설의 직원들은 관사에서 생활을 하고 쇼핑이나 외식 등은 전주나 서울로 올라가고

관광 수입이라 해 보았자 눈에 보이는 것도 없다고 한다

오늘의 날머리인 육십령과 그너머로 괘관산, 백운산이 보인다.

남덕유산에 자리잡은 영각사도 보인다

영각사(靈覺寺)

영각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876년(신라 헌강왕) 심광(深光)이 창건하였고,

190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강용월(姜龍月)이 중창한뒤 한때 많은 불제자들의 수챙저로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6,25 때 또 다시 법당내에 보존되오던 화엄경판과 함께 소실되었으나

1959년에 국고보조를 얻어 해운이 법당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건 뒤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는 영각사.

다만, 1770년(영조)에 상언(尙彦)이 화엄경 판목(板木)을 새겨서 이 절에 장격각을

짓고 봉안하였는데 봉안한 상언에 대한 이야기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글. 사진 - 펌)

할미봉 정상은 올라온 만큼이나 내리막도 급경사이지만  다행히 이곳은 양지라

눈과 얼음이 다 녹아 버렸고 로프시설이 잘되어 있어 큰 어려움은 없다.

준.희님의 응원을 받으면서 팔굼치의 아픈 통증을 참으며 길을 내려간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꽤나 큰 규암(차돌바위)이 보인다.

헬기장(14:55)

육십령 1.5km 남았다는 이정표에 도착하니 배에서 밀어내기 신호를 보낸다.

이곳 갈림길에서 살짝 비켜서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이에

동료산꾼들은 야속하게도 육십령으로 가버리고 혼자서 걸어간다.

1.2km 지점부터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길로 걸어간다.

잠시후에 산성인듯한 흔적이 보이고 묘지가 나오는데 구조목에 0.2km 남았다는

표시를 보고 편하게 걷는데 고무줄 표시인지 7~800m를 걸은 다음에야 육십령이 나온다.

마지막 0.2km 는 왜 이리도 긴지... 잠시후에 육십령을 만나는데

예전에 없던 동물이동통로가 생겨서 끊어졌던 대간길이 이어져 있다.

육십령 동물이동통로 위(15:28)

동물이동통로 위에서 바라본 육십령 함양지역의 모습

백두대간 마루금 복원의 모습... 참 잘한 정책이다

동물이동통로를 지나 우측으로 내려오니 장수 육십령을 만난다.

백두대간 육십령 동물이동통로

육십령(六十嶺:734m:15:30)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을 통과하는 26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육십현(六十峴) 또는 육복치(六卜峙)라고도 하는데, 백두대간 중의 덕유산(德裕山)과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있으며 신라 때부터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이 고개는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로 전주~대구 간 국도가 지나간다.

예부터 함양-장수 주민들의 물류를 교환했던 고개라고 한다.

육십령 유래

1. 함양의 감영에서 이곳까지가 60리 길이고, 장수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도

60리(24km)라고 하여 육십령이라고 한다.

여암 신경준 선생의 山經表 에는 "六十峙"- 南來 安義西六十里 長水北四十里 라고 쓰여 있다.

안의 서쪽 60리, 장수 북쪽 40리에 "육십령"이 있다는 뜻이다.

 

2. 이 고개를 넘으려면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어 육십령이라 했다

 

3. 옛날엔 이 고개에 산적들이 많아서 60명이 모였다가 올랐다는 이야기인데,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 양쪽 산아래 마을에서 며칠씩 묵어가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밑에는 장정들이 모여 있던 주막이라 해서 장군동(壯群洞)이 있고,

산적을 피해서 살다가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해서 피적래(避賊來)라는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보면<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어 세 번째 이야기가 신빙성이 높다.

 

4. 박정희 대통령은 군장동 사람들에게 산 속 군장동에 살지 말고

길가에 나와서 살라고 흙벽돌집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고갯마루 연립 주택식으로 지어진 하얀색 집들이 그때 박 대통령이 지어준 집들이다.

군장동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이 그때부터. 육십령마을이 군장동 사람들에게 새 삶의

터전이 된 것도, 고개이름이 육십령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라고 한다.

육십령 장수지역의 모습

마지막 후미가 올 동안에 차량에서 기다리다가 후미가 도착한 다음에 장수면 계북면에 있는

식당으로 옮겨서 시원한 동태탕에다가 그 지역을 막걸리를 마시고 서울로 향한다.

오늘은 배왕초에서 태양으로 닉을 바꾼 배원장이 식사를 대접한단다.

서서히 왕초보에서 대간 산꾼으로 바뀌는 배원장을 바라보는 범여는 그저 흐뭇하기만 하다.

배 원장 오늘 공양 잘 받았오... 세세생생 복받을기요

명절쉬고 양재지맥에서 한번 뭉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