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4년2월23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옅은 박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산행하기 좋은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1.7km + 어프로치 1.5km / 5시간 45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26명과 함께
☞ 산행코스: 742번 지방도-중재-월경산갈림길-월경산-광대치-936봉-944봉-연비지맥 분기봉
봉화산 쉼터-봉화산-다리재-꼬부랑재-치재-매봉-복성이재
☞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백전면 / 전북 장수군 번암면, 남원시 아영면
지난 한 주는 머리가 멍멍하여 정신이 나간 느낌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경주의 마우나리조트에 눈사태로 강당 지붕이 내려앉아 꽃봉우리를 피어
보기도 전에 열아홉 어린애들이 9명이나 숨진 일이 발생했는데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부모들의 심정... 남의일 같지가 않구나
나 역시 몇년전 일본에 딸을 유학 보내놓고 지진이나 사고가 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일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삼가 故人들의 명복을 빌며
부디 왕생극락하길...
또하나의 사건은 국민스타인 피겨선수 김 연아 선수의 아쉬운 은메달 소식이다.
그 부분에 전혀 무지한 범여가 보기에도 우리 선수가 훨씬 잘했는데
러시아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았겠다... 4년동안 고생한 보람도 없이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전 세계 매스컴이 난리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어리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인배다운 행동에 참으로 흐뭇하다.
그래 그대가 진게 아니고 푸틴이 이긴거야... 멋진 피날레에 박수를 보내마
이번에는 백두대간 길이 무박이 아닌 당일이라 맘이 참으로 편하다.
토요일에 누님의 팔순이라 형제들끼리 저녁을 먹고 집에와서
휴식을 취한후에 이른 아침에 당일 산행이라 가볍게 베낭을 챙긴
다음에 탑승장소인 양재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742번 지방도(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10:50)
참으로 오랫만에 당일 산행을 해본다... 더군더나 백두대간은 처음이다.
오늘은 중간에 구간 나누기가 애매하여 당일 산행으로 하다보니 평소보다
많은 산꾼들이 참석하여 모처럼 버스안의 분위기가 활기찬 모습이다.
양재역에서 탑승하여 신갈에 도착하니 한강기맥을 같이한 붕어잡이님이 동행한다.
붕어잡이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장수I.C를 빠져나와 동화댐을 지나 지난번에 내려왔던 지지리에 도착을 한다.
오랫만에 출발지에서 단체사진을 남기고...
지지계곡을 지나서 밭가운데를 통과하고 다시 잡목이 우거진 등로로 들어선다
넘어진 나무를 통과하는데 군대도 안 갔다온 여인이 땅바닥을 기어서 통과한다.
그러고 보면 자연을 참으로 공평하다... 남.여 모두 공히 기어야할 곳은 기어야하니...
이곳은 이젠 완연히 봄기운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구정을 쉬고 지난번에 못다한 소백산 구간으로 가는줄 알았는데 대장이 아마도
지리산 초입인 성삼재까지 밀어부칠 모양이다... 겨울마다 보아본 복수초는 아마도 올해는 못볼것
같은 느낌에 조금은 서운하다... 하긴 올해 못보면 내년에 보지 뭐
중재가는 길에서 만난 고목
중치가는 어프로치 구간에는 예전에 밭이었던 흔적도 보이고...
중치(中峙:650m:11:10)
경남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기마을과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백운산과 월경산 사이에 있으며 중치와 중기마을은 임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정표에는 복성이재 12.1km← →백운산 4.6km라고 쓰여있는 이정표가 있고
‘가운데에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이곳에서는 ‘백운산과 월경산의 가운데’라는 의미다.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에 이 고개 이름을 딴 중재마을이 있다.
중치에서 동료 산꾼들과 인증샷을 남기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 월경산으로 향한다
동료들과 인증샷을 남기고 우측으로 꺽어져 식재된 나무들 사이로 월경산으로 향한다
잠시후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 능선으로 오르니 예전에 없던 옆사면 우회길이 나온다.
5년전 북진 때와는 달리 급경사의 봉우리로 오르지 않고 좌측 옆사면으로 걷는다
2주전에 올랐던 백운산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멋진 바위 하나를 만나고... 다시 오르막으로 오른다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토사 유출로 인해 무너진 대간길을 복원하는 현장도 만나고...
등로에서 바라본 백운산과 중재마을(함양군 백전면 소재)
옛날 중재(중기마을)에는 바람둥이 소금장수가 보따리 장사처럼 바람처럼 왔다
갔는데 어느 과부가 소금장수의 감언이설에 정을 주어 임신을 하였다고 한다.
산달을 4개월 앞두고 소금장수가 다시 왔길래 과부가 임신 사실을 말하니
결혼할 입장이 아니라고 하면서 기다리란다.
그리고는 주막에서 주모와 정쌓기를 하고 밤새 몰래 동네를 빠져나가다가
연못(沼)에 빠져 죽었는데 중기 마을에서는 이 소(沼)를 소금쟁이 소(沼)라고
부르며 과부도 해산하다가 아이와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월경산 갈림길(11:55)
이곳 백두대간 능선에서 300여m 정도 떨어진 월경산을 향해 베낭을 벗어놓고 갔다온다.
월경산(月鏡山:980.4m:12:00)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와 경남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 능선에서 약 200m정도 떨어져 있는 산으로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산이다.
지명의 유래는 약 200년쯤 한 사람이 고향을 떠나와 지지리 계곡에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밤 달빛이 밝아 밖을나와 하늘을 쳐다보니 유난히 보름달이
빛을 더해 고향생각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월경산이라 불렀고 살던 마을을 광대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리 산악회에서 아이돌 스타인 주원아빠와 함께
월경산 정상 삼각점
되돌아 온 월경산 갈림길(12:05)
폐헬기장(12:15)
좌측으로는 약초재배단지의 철조망이 있다.
약초재배 단지의 펜스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이정표(←중치 2.6km ↓봉화산 5.3km)가 있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광대치(廣大峙:12:25)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 광대동과 경남 함양군 백전면 대안리를
잇는 고개로, 우측으로 내려서면 장수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지지리계곡이 있다
광대치는 ‘넓고 큰 고개’라는 뜻이다. 동서 양족에 계곡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능선과 동쪽의 능선도 해발이 높아 산 속에 갇혀 있는 형상이다
월경산에서 달이 크게 비치는 고개라고 하여 광대치라 부르며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을 광대동이라고 한다.
광대치에서 조금을 치고 오르니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암릉구간이 나오고...
936봉(12:45)
정상에는 서부지방 삼림청에서 설치한 이정표(중치←4.1km →봉화산 3.8km)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같이 모여서 휴식을 취한다
물론 선두팀들은 거리도 짧은 오늘 산행에 뭘 그리도 급한지 도망가고 없고.
오늘 첫번째 베낭털기를 하는데 봉화산에서 산신님에게 올릴 막걸리
반말을 가지고 오신 천리마님...부천에서 가장 맛있다는 인동주(忍凍酒)를
2L짜리 팻트병 5개중에 내 베낭에 한병이 있었는데 인동주를 가지고 오신
쥔장 천리마님은 선두로 도망가버려 쥔장의 허락도 없이 이곳에서
한 병을 나눠 마시는데 어찌나 그 넘의 술이 입에 착착 감기는지 5분도 안되어 동이나 버린다.
그리고 가지고 온 빵과 과일을 나눠먹고 봉화산으로 향한다
안부 능선을 편하게 걸어 내려가다가 내리막을 내려서니...
좌측으로 약초재배단지가 나온다
잠깐 동안의 산죽길이 보이더니...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아침에 출발지점인 지지리 계곡과 그 너머
장수의 진산인 장안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영취산에서 시작하여
조약봉(주즐산)까지 연결되는 금.호남정맥 능선이 다시한번 오라는듯 손짓을 한다
우람한 저 장안산 역시 한민족 분단의 슬픔을 안고있는 산이다
장안산은 해방후 좌.우 이념의 대결속에 국군에 쫓겨 남진하던 빨치산의
이현상 휘하부대가 지리산을 들어가면서 거쳐 지나간 산이기도 한 곳이다.
이 산 아래 있는 덕산계곡은 영화 ‘남부군’에서 이 현상 휘하의 빨치산부대가
옷을 벗고 목욕을 하던 곳을 촬영한 계곡이기도 한 곳이다
안부 능선에서 바라본 대안리(함양군 백전면 소재)
윗안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대안(大安)마을은 지수땀, 양지땀, 음지땀,
섬땀, 대상골 등 5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제일 먼저 들어와 터를 잡은 성씨는 십칠세기에 안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김해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고 장성과 박사가 배출된 마을이다.
음지땀과 양지땀 사이에는 물레방아가 있었으나 폐쇄되었고, 지수땀은 면내에서
유일하게 딱을 원료로 하여 한지 생산을 주업으로 삼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으나
한지(창호지)의 수요가 없어 중단되고 말았다"
가야할 능선 안부 너머로 봉화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늘은 날씨는 산행하기 좋은 날이나 중국발 초미세 먼지로 모든게 흐리기만 하다.
조그만 땅덩어리인 이 한반도는 나쁜 이웃 때문에 늘 골병이 든다.
늘 대국으로 자처한 중국에서 불어오는 미세먼지로 한반도가 병들어가고 있고
동쪽의 쪽바리 놈들은 역사를 부정하며 우경화에 치딛고 있지 않나
한 술 더떠 아베라는 일본 수상 넘은 요즘 하는 짓거리 정말 가관이 아니다.
자기 역사를 부정하고 반성하지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걸 왜 모르는 지?
어제는 자기나라 시네마 (島根)현에서 독도를 자기 땅(다께시마:竹島)이라
우기면서 행사를 강행하는 걸 보면 이사부 장군이 지하에서 땅을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피해국가에 반성하고 보상을 하는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인지... 그러니 소인배 짓거리 그만들 하시게, 니네 쪽바리들 경제적으로는
일류국가가 될 진 모르겠으나 정치적으론 절대 일류국가가 못되는 걸 명심하시게
그게 뭘 의미하는지 이 나라 지도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국가가 힘이 없기 때문 아닐까.
쪽바리들이 과연 상대가 한국이 아닌 미국이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國祿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정치인 나리들! 이제 제발 당신네 밥그릇 싸움 좀 그만하고
뭐가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정신 똑바로 하고 사시요
944봉(13:25)
944봉은 넓은구간으로 이루어져 전망이 멋진 곳이지만 오늘은 아니올씨다
944봉에서 바라본 속금산(장수군 번암면 소재)
개구리의 입처럼 생긴 바위도 5년만에 다시 만나고... 반가워요
백두대간 능선에서 바라본 연비지맥의 줄기
오늘 구간은 남덕유산, 영취산, 백운산의 험한 구간을 내려와 경남 함양을 거쳐, 장수, 남원을 지나면서
함양 서상면에서 남원 주천면 위의 고리봉 올라가기 직전까지 숨을 고르기 위한 구간.
900~1200m의 대간 능선 타는 맛이 쏠쏠하다... 대간을 처음 타는 동료산꾼들에게
오늘 구간은 수월하다하며 이야기하면 내가 뻥쟁이라고 안 믿는 쾌도세무님이 오늘은 내 말을 믿는다.
그만큼 여유롭고 수월하다는 얘기이다... 이곳은 상주구간의 非山非野 구간같은 느낌이 드나보다.
여유로운 안부 능선에 오르니 선두로 내달리던 산꾼들이 모여 휴식을 취한다
이곳 정상은 넓고 평평한 곳으로 정상에는 조그만 봉분의 무명묘지 2기가 있다.
그런데 이곳을 서부지방 산림청에서 무명봉으로 표기를 해놨는데 이곳을 왜
무명봉이라 표기를 해놨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곳은 지형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곳으로 연비지맥이 시작되는 곳이요
삼군(남원시, 함양군, 장수군)의 경계에 맞닿은 곳을 무명봉이라니...
무명봉(870m:13:50)
전북 장수군 번암면, 남원시 아영면, 경남 함양군 백전면의 경계에 있느 봉우리로 서부지방 산림청에서
무명봉이라고 팻말을 붙혀 놨는데 차라리 ‘삼군봉’이나 ‘연비지맥 분기봉’이라 명명함이 어떨런지?
무명봉 정상에서 바라본 연비지맥 줄기
무명봉을 내려오면서 남쪽은 남덕유산부터 우리와 대간길을 같이 걸어온 함양군과 작별을 하고
새로운 전북 남원시 아영면으로 접어들지만 북쪽은 여전히 장수군과 대간길을 같이한다.
지금부터 지리산 아래 고리봉까지는 전라북도의 산능선을 걸어갈 것이다
무명봉 정상에 있는 문패없는 묘지 2기... 참으로 다정스럽게 보인다
생전에 참으로 금술이 좋았던 모양이다
연비지맥(鳶飛枝脈)은 ?
백두대간 봉화산(△919.8m) 북쪽 1km 지점인 전라북도 장수군, 남원시와 경상남도 함양군의 경계인 약 945봉에서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 전북과 경남도계를 따라 옥잠봉(680m),88고속도로,연비산(842.8m),오봉산(879m),팔량재를 지나
삼봉산(1186.7m)에서 전북도경계를 벗어나 경남 함양군으로 넘어가 동북진하여 지안재,팔두재, 화장산(586.4m)을 지나
임천(臨川)이 남강에 합류하는 함양군 유림면 장항리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8.2km의 산줄기로 임천의 우측 분수령이다.
연비지맥개념도
능선에서 바라본 남원시 아영면(阿英面)의 모습
아영면(阿英面) 남원시의 북동단에 위치한 면으로 동쪽은 함양군, 서쪽은 장수군,
남쪽은 인월면, 북쪽은 장수군과 함양군에 접해 있다. 면을 중심으로 봉화산, 연비산,
상산, 성산으로 주위가 에워싸여 있고, 관내의 주요 하천은 남쪽으로 흘러 풍천에
모이며 흘러나가다가 만수천과 합수한다. 면 소재지인 갈계리(葛溪里) 를 비롯하여 11개 리를 관할한다.
지명은 이 일대에 있던 고려시대의 고지명인‘아영(阿英)’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757년(신라 경덕왕 16)까지는 모산현(母山縣)에 속해 천령군(天嶺郡, 현 경남 함양군)에 예속되었다.
이후 운봉현으로 개칭되었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운봉현이 남원부의 관할이 되면서 아용곡(阿容谷),
또는 아영(阿英), 아막(阿莫)이라 하였다. 당시 북상면(北上面)과 북하면(北下面)에 해당되었다.
당시 북상면은 아곡동(阿谷洞)·봉대동(鳳臺洞)·청계동(淸溪洞) 등 13개 동리로,
북하면은 부동(釜洞)·월성동(月城洞)·이동(梨洞) 등 9개 동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후 아곡리(阿谷里)·봉대리(鳳臺里) 등 11개 리로 이루어졌다. 1
995년 남원시 아영면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면 소재지인 갈계리는 이곳에 정착 당시
천년묵은 칡덩굴이 우거지고 마을 앞으로 냇물이 흐르고 있어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출처:국토지리정보원<한국지명유래집>)
무명봉에서 동료들과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봉화산으로 향하는데 이곳은 억새군락지로
유명한 곳이다... 4년전에 이곳에 난 산불로 인해 산불 흔적이 있었는데 산불에 탄 나무가
사라진 곳에 억새가 이 능선을 완벽하게 점령(?)하여 억새군락지로 변해 버렸다
봉화산 쉼터(850m:14:00)
남원시 아영면 구상리와 성리 장수군 번암면 동화리를 잇는 임도로서 장수쪽은
바리게이트가 쳐저있고 남원쪽은 차량들이 오르내리는데 아마도 소방임도인 듯 하다.
이곳은 4년전에는 없었던 데크목 계단과 멋진 육각정이 서 있다
봉화산 쉼터 임도에 있는 육각정과 이정목
임도를 건너 억새능선으로 오르니 가야할 봉화산이 보이고...
진달래 나뭇가지에 새집이 하나있고...
백두대간 등로와 나란히 가고있는 장수쪽의 임도
조금전 무명봉에서 이곳까지 내가 걸어온 능선을 뒤돌아보고
다니 능선으로 오르니 이곳도 예전에 없던 데크목 계단이 나온다.
봉화산 정상 산불감시 카메라
정상의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매서운 눈으로 산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데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1984년’의 대목에 나오는 장면처럼 기분이 꿀꿀하다.
하긴 내가사는 강남에선 하루에 최소 300번이상 CCTV에 사생활에 노출된다고
하니 그리 놀랄일도 아니긴 하지만... 정상에 오르니 군산대학교에서
유적 발굴을 하는지 온 정상을 다 파헤쳐 놓아 어지럽다.
봉화산(烽火山:919.8m:14:15)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동화리의 경계산령과 남원시 야영면의 최북단 접경 지역에
위치한 산으로 역사적인 유적지를 간직하고 있다.봉화산은 봉수대의 유적이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을뿐만 아니라 오래된 봉화 봉수대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하겠다.
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 주 140 간 석축 남원 함양 계라 하여 곧 봉수대는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에 있고 봉수대의 둘래 약 252m이 되는데 돌로 쌓은 것으로 남원과 함양 간의 경계선에 있다.
이 봉수대는 대체로 통일신라이후부터 폐지된 것으로 보이며 백제와 신라의 국경 분쟁이 잦았던 운봉과
아영면 부근에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봉화산은 위 기록에서와 같이 봉화산은 전에는
장안산으로 불리워졌고 봉화, 봉수대가 봉화산으로 불리운 것이 확실하다.
봉화산 정상에서 88올림픽 고속도로와 지리산의 수많은 연봉들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다.
봄철에는 봉화산을 오르는 산등성이가 철쭉꽃으로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현재는 정상에 산림 측량 기점인 삼각점이 있어 동화리 노단지역 산의 기점지역이다.
용담을 품은 봉화산은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급한 소식을 알리던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어 아쉽다.
지역주민들은 일제시대에 깃대를 꼽고 측량을 했다는 의미로 깃대봉으로도 부른다.
전북지역에는 많은 봉수대 터가 있는데,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에 자리잡은 803봉의
태평봉수대가 가장 크고 원형이 그대로 복원돼 관심을 끌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 삼국사기에는 백제 온조왕이 봉수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봉화산 정상에서
봉화산 정상 삼각점(△ 함양23 2002 재설)
백두대간 5기 산꾼들이 봉화산 정상에서 약식으로 백두대간 산신들을 모시고
간단하게 술한잔을 올린다... 그렇다고 거창한 시산제야 산악회 차원으로
할 것이고, 난 독립군이라 시산제날 영산기맥 한바리 해야하니 참석하지 못하고하여
음력 정월 보름에서 이월 초하루 사이에 잔한잔 올리는게 산신에게 예의일 것 같아
내가 제안하여 된 행사인데 동료산꾼들이 십시일반으로 동참하였는데 너무 판이
커져버려 동료 산꾼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준 것같아 상당히 미안하다
5기 동료산꾼들... 다들 복받을깁니다. 무탈하게 지리산까지 완주하입시다
봉화산 정상에서 약식으로 祭를 마치고 가지고 온 음식으로 음복을 하며
1시간 이상의 여유로운 이야기꽃과 휴식을 취한후에 복성이재로 향한다
내리막길을 계속 내려가다가 조그만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이정표가 있지만
이정표에 기록된 글씨에 바래져 표식을 알 수가 없다
다리재(?:15:28)
지도상에는 이곳을 다리재라고 표기를 해놨는데 아무런 표식도 없어 확신이 서질 않는다
다시 멋진 소나무 숲을 지나 내려간다
오늘 길은 아마 대간 산행을 하면서 가장 편한 길 같다.
마치 길에서 양넘 지갑 주운듯한 횡재를 하고 발이 호강하는 대간길 같다
생강나무 꽃봉우리가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느낌이다
조금을 지나 내려오니 보리수 군락지가 보인다.
등로에서 바라본 남원시 아영면 구상리의 모습
구상마을은 조선조 말엽에 초계변씨(草溪卞氏)가 입주하면서부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구한말에 이르러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정감록(鄭鑑錄)>비결이 성행하자 자손들의 안전을
기하는 이렇다하는 가문들이 피난지로 알고 찾아와 거주하게 됨으로써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만 해도 이곳은 사람이 드물고 천연의 밀림이 우거진 깊은 골짜기므로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인명에 피해를 끼치니 사람들은 자연히 산신을 섬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집집마다
정성을 드리고 매년 마을 공동으로 산신제(山神祭)를 모셔 개를 잡아 호랑이에게 바쳤다하여
마을 이름이 구식(拘食)라고 하였다한다. 또 일설에는 호랑이가 먹이로 개를 찾는다고 해서 구
색(拘索)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다 마을의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장차 아홉 재상이
나올 수 있는 명당자리라 하여 구상(九相)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출처:남원시<아영면사무소 홈페이지>)
꼬부랑재(15:45)
지도에 꼬부랑재라 나와있고 좌측으로 아영면 구상리로 내려가는 희미한 길이있다.
백두대간길에서는 민밑한 안부를 지나며 꼬부랑재라는 느낌을 느낄 수 없다.
대간길 능선과 동쪽 655봉과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치재와 연결되는 꼬불꼬불한
임도를 두고 꼬부랑재라는 이름이 형성된것 같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등로에서 바라본 아영면 성리(흥부의 마을)
남원시 아영면 성리마을은 판소리 다섯 마당 중의 하나인 흥부전의 배경이다.
이 마을은 전해 내려오는 설화와 지명을 근거로,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로 밝혀졌다.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복덕가(福德家) 춘보설화(春甫說話)가 전해져 오고 있다.
흥부가와 춘보설화는 가난 끝에 부자가 된 인생역정, 선덕의 베품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유사하다.
실제로 성리마을에는 박춘보(朴春甫)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망제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망제를 지낸다.
지명은 고전에도 등장했던 지명이다. 길 양쪽으로 감자농사가 한창인 '허기재'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 사람들이 도운 고개라고 전해진다
“형수님 저 흥분되(데)요” 이 말을 들은 형수는 주걱으로 시동생을 패댄다.
형수가 성희롱하는 시동생을 그냥 놓아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고전 소설과 사투리가 적당히 어우러져 만들어진 익살스러운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오늘 대간은 복성이재에서 시작하여 중재로 이어지는 구간(약 14km)이다. 오늘의 구간에서는 아무래도 흥부전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듯하다.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백두산 방향으로 나아가다 복성이재 오른쪽에
흥부마을(아영면 성리)이 있다. 그런데 여기가 원조 흥부마을이라고 하면 화를 낼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인월면 성산리 사람들이다. 수년전 서로 흥부 마을 원조라고 시비가 붙었을 때 모 대학팀이 고증한 결과
성산리는 흥부의 출생지 그리고 성리는 발복지라고 결론을 내리며 분쟁을 잠재운 바 있다.
그러고 보니 형수 성희롱 사건은 주무대는 아영면 성리가 아니라 인월면 성산리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성산리는 놀부마을인 셈이다.
그런데 흥부전이 픽션이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픽션으로 알고 있었는데? 하여간 흥부전이 픽션이든 아니든
흥부는 놀부의 등쌀에 못 이겨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가서 새로운 둥지를 튼다. 여기가 바로 아영면 성리이다.
멀리 갔음에도 대간을 넘어서지 못하고 복성이재 아래 마을에 자리잡은 것이다.
어쨌든 대간은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흥부전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꼬부랑재를 지나니 복분자 나무와 자리공들이 말라 비틀어진 능선을
편하게 걸으니 저 멀리 매봉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시야에 나타난다.
드디어 매봉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유명한 봉화산 진달래 군락지가 나타난다.
엄격하게 말하면 봉화산은 진달래가 아닌 억새로 유명하고 매봉이 진달래로 유명하다
치재 사각정에서 바라본 지나온 봉화산의 모습
사각정자(장수군에서 설치)에서 바라본 건너편
데크목(남원시 설치)에 있는 동료산꾼들의 모습
정자에서 바라보니 매봉 오르는 길은 진달래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치재(660m:16:05)
남원시 아영면 성리 치재마을에서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역적재를 잇는 고개로
깊은 계곡에 양 옆으로 진달래가 배꼭히 군락을 이루는 곳이다
이 지역은 각종 버섯류와 산과일, 산채나물, 고랭지채소 등을 많이 생산하는
지역으로 주로 대간의 동쪽 사면에서 이루어진다.
고개라는 뜻의 ‘峙’와 ‘재’가 합쳐져 지명이 되었다.
치재에 서면 흥부마을로 유명한 아영리 성리마을도 내려다보인다.
이 마을에는 판소리에 나오는 화초장 바윗거리, 흰죽배미, 노리다리 등의 지명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
이곳 아영면이 고향인 동료산꾼 깔끄막님은 예전에 아버님이 금광을
운영하셨다고 하면서 이 고개를 넘어 심부름을 많이 다닌 곳이라고 한다
치재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
이곳 치재에도 예전에 대간 북진길에 비해서 많이 변해있다.
고개를 경계로 남원쪽에는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장수쪽에는 사각정자가 설치되어 있다
진달래 군락지 터널을 따라서 매봉으로 향한다
드디어 매봉 정상에 오른다
매봉(721.2m:16:15)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와 남원시 아영면 성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자도상에는 매봉이란 지명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백두대간 북진길인 2009년 1월 4일 기록에는 매봉이란 자체가 없다.
정상에는 무인산불감시 카메라, 남원시에서 설치한 이정석과 데크목 광장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는데 아마 진달래 군락지 때문에 급조된 봉우리가 아닌가 싶다.
정상에 서니 좌측으로는 흥부마을로 불리는 성리와 구상 저수지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복성이재에서 노단리로 연결되는 751번 지방도가 보이며 정면에는
다음구간 새벽에 올라야 할 아막산성터와 그 너머로 시리봉이 아련히 보인다
진달래 능선이 있는 치재의 반대편 복성이재 쪽에는 예전에 없던
염소목장이 들어서 반대편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 모양새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그 너머로 아막산성터와 백두대간 능선에서 약간 떨어진 시리봉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복성이재에서 노단리로 이어지는 751번 지방도와 노단리 마을이
보이고 넓게 보이는 공터는 장수군에서 조성한 역적재에 설치한 주차장이 보인다
노단리(魯壇里)는
남노령의 주봉을 이룬 대성산 동쪽 언저리에 포근하게 자리잡은 삼백여 대촌의
명당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마을이 번암면 소재지인 노단마을이다.
이 마을은 근세 조선초 중엽에 형성된 흥성장씨 취락이다.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명명했다 하는데, 이 마을의 주룡을 이루는 산이 성현이
명기를 띠었다해서 대성산이라 이름하였다 하며, 이 마을의 형국이 노나라에서 태어난
대성인(大聖人) 공자님의 집터와 같다고 하여 노단(魯壇)이란 이름을 붙혔다는 것이다.
이렇듯 명당이라 그런지 시골답지 않게 날로 번성해 가고 있다.
조금전에 내가 지나온 능선의 모습
이 지역 사람들의 心性만큼이나 부드럽고 유순하다
매봉 정상에서 이곳저곳을 두루 구경을 한 다음에 좌측 염소목장 철조망을 끼고 복성이재로 향한다
매봉 남쪽에 조성된 염소목장
염소목장 옆쪽 소나무 숲을 끼고 내려오니 慶州李氏 가족묘가 나오고...
잠시후에 복성이재 안내판이 나오면서 751번 지방도로 내려서면서 산행을 마무리 한다
복성이재 안내판
난 이 복성이재가 희미한 첫사랑(?)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고개이다.
내가 2009년 1월 4일 백두대간이라 걸 처음 시작한 곳이 이곳이다.
그로부터 산에 미쳐서 1대간 9정맥 8기맥 10지맥 정도를 하고 대간
남진을 하는 것을 시작한 곳이 이곳 복성이재이니 남다른 감회가 밀려온다.
복성이재(福星峙:601.4m:16:35)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아영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산줄기는
시리봉과 봉화산을 잇고 물줄기는 낙동강과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복성(福星)마을로 연유해서 생긴 이름인데 그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복성이 마을은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시 아영면 성리 사이에 있는
조그만한 산골마을로 행정구역으로 번암면 논곡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의 능선이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룬 첩첩산중이어서 농로도 제대로 없었다.
엣날에 변도탄 이라는 기인(奇人)이 있었는데 나라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양관(糧官)으로 있었다.
어느 날 천기를 보고 삼년 내에 국가에 큰 전란이 잇을 것을 알았다.
앞으로 전란에 대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 했으나 평화시에 흑세무민(黑世誣民)한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했다. 변도사는 하는 수 없이 피난처를 물색 하던 중 지리산을 의중에 두고
천기를 보니 북두칠성의 복성(複星)이 갑자기 남쪽에서 비치므로 별빛을 따라 지리산 쪽으로 가
다가 별 빛이 멎은 곳에서 쉬었다.
이곳이 오늘날 복성부락에서 약간 떨어진 웃 복성마을이다.
변도사는 이곳에 움막을 짓고 피난을 했으며 전란 후에도 머물러 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같이 이름이 되었다고 전한다.
복성마을은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시 아영면 성리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산골마을로 행정구역은 번암면 논곡리에 속한다.
이 마을 뒤로는 소백산맥(태백정간)의 능선이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루며 유유히 남북으로 뻗어가고 있다.
이 마을은 첩첩산중이어서 농로가 제대로 뚫리지 못하고 있다.
복성마을은 아래와 같은 연유로 취락이 이룩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변도탄이란 기인이 있었다. 변도탄은 나라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양관으로 있었다.
그가 어느날 천기를 보고, 삼년내에 국가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을 알았다.
앞으로 닥쳐 올 전란에 대비,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했으나
평화시에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했다.
변도사 보아하니 북두칠성의 복성이 갑짜기 밝은 빛을 남쪽으로 비추므로 별빛을 따라
지리산쪽으로 가다가 별빛이 멎은 곳에서 쉬었다.
이곳이 오늘날 복성부락에서 약간 떨어진 복성이라는 곳이다.
변도사는 이곳에 움막을 짓고 피난때 가지고 왔던 많은 양곡을 가루로 만들어서 벽과 천장을 발랐다.
이삼년 뒤에 마침내 나라에 큰 전란이 일어났다.
외적의 침입으로 임금께서는 몽진길에 오르고 왕족과 중신들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어느날 구름처럼 몰려드는 피난민 틈에 허기가 지고 노독으로 기진맥진한
왕족일행을 발견하고 벽을 떼어서 죽을 수어 먹게 하여 목숨을 구하였다.
또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군을 위하여 움막에 발랐던 쌀가루를 군량미로 사용하였다.
몇 년 동안 계속되었던 전란은 끝이 나고 한 사람 두 사람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복성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변도탄이 피난올 때 군량미를 가지고 온 죄는 크지만 국가 위급시 국가를 구하는 군량미로 긴요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임금께서 죄를 사하고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원시 송동면의 변씨들이 변도탄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5시간 45분의 여유로운 산행을 마치고 다음구간 새벽에 올라야 할 들머리를 확인하고
산행을 마무리하는 스틱을 접고 버스를 타고 노단리 역적재에 있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이곳 주차장에서 봉화산 정상에서 祭를 지내고 남은 음식과 산악회 총무인 수선화님의
친정인 제주도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온 갑오징어에다가 배와 미나리를 넣어 푸짐하게
넘은 회에다가 소주, 맥주, 막걸리 가리지 않고 배터지게 먹고나니 세상사 부러울 게 없다.
손 큰 제주도 비바리 저러다가 대간 끝나기 전에 부도 안날랑가 모르겠네...
암튼 내가 저지른 행사땜에 여려사람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올 한해 무탈하게 안산, 즐산하시고요... 이 보시공덕으로
대박 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들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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