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4년 3월 8일~9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눈... 그리고 짙은 박무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22km / 9시간 30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12명과 함께
☞ 산행코스: 복성이재-601봉-시리봉 갈림길-아막산성터-돌탑-781봉
새맥이재-697봉-암릉-헬기장-88고속도로-사치재-628봉-성터-618봉
유치삼거리-매요마을-유치재-573.2봉-통안재-송신탑-고남산-필바위
785봉-615봉-595봉-562봉-장재-여원재
☞ 소 재 지: 전북 장수군 번암면 / 남원시 아영면, 동면,산동면, 운봉읍, 이백면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가감없이 서술되어 있다.
조선 개국을 주도한 개국공신이며 한 나라의 기틀을 잡는
과업을 수행한 정치가이며 역사가이고 법률가이며 철학가였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웠지만 조선에 버림받은 불운의 혁명가였다.
성리학 바탕으로 민본 덕치주의를 주창하여 고려사를 편찬하는 등
역사활동에도 관심을 보였고 그가 저술한 <조선경국전>은 '경국대전'의
기틀을 마련한 삼봉 정도전
유림의 대표적 인물로 왕실 정치보다는 대신 정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늘날 정치제도에 비유하면 내각 중심제를 주장하여 조선을 개국한
이 성계의 王師였던 무학대사와는 정적으로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인물이다.
요즘에 중,장년세대에 정도전에 대한 열풍이 불고있는 느낌이다
난 정 도전을 접하게 된 것은 내년부터 십승지 산행을 준비하면서 하면서
이곳 저곳의 자료를 수집하다 알게 되었는데 마침 정초부터
KBS 역사드라마 ‘정도전’을 시청하면서 푹 빠졌고 그래서 요즘에
정도전을 다룬 김탁환의 소설 ‘혁명’을 사서 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재의 정치판을 보면서 마치 그시절 정도전을 보는 듯 하다.
이제 3개월밖에 남지않은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은 민초들의
아픈곳을 얼마나 알고 있으런지... 정도전의 저술과 삶의 읽고 민초들이
뭘 원하고 뭘 바라는지 정확하게 인지 하였으면 한다.
오늘 걷게되는 남원 고남산 구간의 운봉지역도 십승지 중의 한곳이라
잔뜩 기대를 하면서 백두대간가는 버스에 오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거리와 지도
복성이재 선답자들의 시그널
양재역에서 밤 11시 조금 넘은 시간에 버스에 오르니 지난 1년간을 2주마다 만나는 동료산꾼들 중
꽤나 많은 인원들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많이 빠지는 바람에 13명이 단촐하게 대간길에 나선다.
낮에 자그만한 현장 하나를 급하게 마무리짓느라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차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정차하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덕유산 휴게소에 내리니
하늘의 별은 촘촘하고 아무래도 비는 오지 않을것 같은 기분이다.
휴게소에서 해물순두부 한그릇을 먹은 다음에 다시 버스에 올라 새벽 4시가 다 된 시간에
오늘의 들머리인 복성재에서 도착을 하는데 이곳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상당히 춥다.
거기다가 간간히 눈발이 뿌려 차에서 완전무장을 한 다음에 버스에서 내린다
복성이재(550m:04:10)
복성(複星)마을에서 연유되어 생긴 이름인데 그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복성마을은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시 아영면 성리 사이에 있는
조그만 한 산골마을로 행정구역으로 번암면 논곡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의 능선이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룬 첩첩산중이어서 농로도 제대로 없었다.
엣날에 변도탄 이라는 기인(奇人)이 있었는데 나라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양관(糧官)으로 있었다.
어느 날 천기를 보고 삼년 내에 국가에 큰 전란이 잇을 것을 알았다. 앞으로 전란에 대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 했으나 평화시에 흑세무민(黑世誣民)한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했다.
변도사는 하는 수 없이 피난처를 물색 하던 중 지리산을 의중에 두고 천기를 보니
북두칠성의 복성(複星)이 갑자기 남쪽에서 비치므로 별빛을 따라 지리산 쪽으로 가다가
별 빛이 멎은 곳에서 쉬었다. 이곳이 오늘날 복성부락에서 약간 떨어진 웃 복성마을이다.
변도사는 이곳에 움막을 짓고 피난을 했으며 전란 후에도 머물러 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같이 이름이 되었다고 전한다.
복성이재에 서있는 흥부골 조형물
버스에서 내려 추위를 대비하여 장비를 점검하고 완전무장을 한 다음에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들머리에 출발하여 조금을 오르니 어둠속에 임도가 나타나고 우측으론 차단기가 보인다
옛복성이재(04:20)
아영면 흥부마을로 통하는 커다란 임도가 있고 이정표가 있다
예전에 현재의 복성이재가 있는 도로가 생기기 전에 이곳을 넘어
흥부마을 사람들이 장수군 번암면 성암마을로 넘너든 고개같다.
옛 복성이재를 지나서 나무 계단을 밟고 어둠속에 아막산성터를 향해서 간다
시리봉 갈림길(04:30)
이정표(←아막성 0.2km, 흥부묘 0.7km↑시리봉 2.0km →복성이재 1.2km)가 서있다
곧이어 아막산성의 돌밭길이 시작되고 어둠속에 조심해서 산성을 향해 오른다.
아막성의 자리는 장수와 남원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아막성에 남겨진
가야의 유물은 금관가야의 뒤를 이은 대가야의 것이다.
금관가야 몰락으로 가야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대가야는 왜와 중국의 다른 나라와 연결할
바닷길이 필요했고 아막성은 섬진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 한다.
섬진강에서 아막성에 이르는 봉우리에 남아 있는 봉화대터는 물길을 지키려는 가야가 세운 것이다.
1500여 년의 세월의 강을 건너 가야의 기억을 더듬어갈 실타래를 풀어놓은 것은 산 아래 월산리와 두락리의 고분들이다.
높이 4~5m에 직경 20m 안팍의 고분은 나무가 자라 산이 되었다가 개간돼 경작지로 변했다.
그 과정에서 유물들은 도굴됐고 전설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반복된 전쟁으로 사람살이가 끊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되풀이된 탓이다.
백제의 것으로만 알려졌던 고분이 1989년 전북대발굴단의 조사 결과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가야 양식의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가야의 역사는 긴 침묵을 끝낼 수 있었고 더 많은 숙제를 남겼다.
아막산성(阿莫山城) 터(630m:04:32)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면 아영면 성리에 걸쳐있는 산성으로
봉화산과 시리봉 사이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백제에서는 아막성(阿莫城), 신라에서는 모산성(母山城)으로 불렀다.
아막(阿莫)은 주성(主城)또는 주곡(主谷)을 뜻하는데 이 지역이 섬진강의
계곡 분지를 나타내는 지형상의 특색과 그 만큼 중요한 방어진지라는 의미다.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주도권을 잡기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167년에 백제는 신라릐 서방을 침공하였고, 서기 170년에
백제는 또다시 신라를 침범하였다... 그 후인 서기 188년 초고왕 10년에 백제는
또다시 신라가 점령하고 있는 모산성(아막성)을 침략하는 등 이 산성을 두고
신라와 백제가 영토분쟁이 치열한 곳이 이 아막산성이었다.
그 후 백제 무왕 3년(602년) 백제는 4만의 군사로 아막성을 공격하였으나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하여 성을 탈환하는데 실패하였으며 그러나 후일
재차 공격을 하여 성을 탈환하였지만 다시 신라에 빼앗겼다.
그 후 무왕 17년에 백제는 또다시 총공격을 감행하여 탈환하였다.
모산이나 아막은 운봉의 옛 지명으로 신라의 영토임을 알 수 있다.
성은 포곡식 산성이며 현재 파악되는 성의 규모는 632.8m 이며
3개의 문지와 치성, 토루, 우물, 적대, 수구 등이 확인되고 있고
현재는 북문지가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동, 서문지는 잔존 부위가 남아있는 곳도 있으나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다.
축성법은 산 사면에 내탁하여 축성하고 그 위에 넓이 3.5m 정도의 회랑을 설치하였다.
석축의 높이는 6m에 이르며 능선과 이어지는 성곽 외면에는 공호를 파서 둘렀다.
북문지 안쪽에는 운성암이란 암자가 자리를 잡고있다.
어둠속에서 만난 아막산성 안내판((전라북도 기념물 38호)
허물어져 내린 돌들을 조심스레 밟고 올라 오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간다.
수백년, 아니 수천년동안 이 땅의 숨결이고 삶이었던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들을 느끼며 아팠다.
지나온 시간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루고,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 아이들과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란 결코 잊혀 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천 수백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사란 언제나 오늘의 의미를 갖는 것이니 말이다.
역사란 언제나 오늘의 일이다. 오늘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지나간 역사란 없다. 역사란 언제나 오늘이다.
결코 잊혀 질 수도 없고 잊혀 져서도 안 되는 오늘의 일이다
어느 지성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지금 우리가 일본에 당히고 중국에 치이는 이유는 역사의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일까.
우리나라보다 땅덩어리와 인구가 훨씬 적은 이스라엘을 무시하는 국가가 있던가?
그건 유태인들의 투철한 역사인식이 바탕이 된것 때문이 아닐까
산성 안내판을 지나 2분정도를 지나니 문패없는 묘지를 만나는데
야심한 새벽에 깊은 잠에(?) 빠져있는 망자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어둠속에 계속 아막산성터의 흔적들이 보이면서 걸어가는데 이곳도 지난구간
봉화산 매봉구간 못지않게 진달래 군락지를 이루고 있지만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아막산성터 돌탑(04:40)
산성터를 넘어서니 어둠속에 돌탑을 만난다. 지난 5년전 북진길에 여러기의 돌탑을
만났는데 오늘은 짙은 어둠속이라 그런지 커다란 돌탑 1기만 보이고 좌측 능선
아래로는 아영면 흥부마을은 아직도 깊은 밤에 빠져있고 마을의 가로등 불빛만 보인다
이곳이 날이 밝으면 전망이 참으로 좋은 곳인데 아쉽기만 하다.
억새밭에서 저 아래 보이는 마을이 흥부전에 나오는 흥부 마을이란다
저 아래 성리(흥부마을) 가 보인다. 우리나라 판소리중 '동편제'의 발생지라 한다.
또한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흥부가의 배경이된 마을이기도 하다.
백두대간 북진길에 이곳에서의 모습(2010.01,14)
781봉(04:55)
산행후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베낭을 내리고 휴식을 취하면서 물한모금을 마신다음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781봉에서 5분정도를 가니 조그만 암릉이 나오고 진달래군락지다
이곳에서 무심코 편한길을 내려가지 말고 암릉 우측으로 꺽어지면 대간길이 나온다.
781봉(05:35)
781봉을 지나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울님의 乳頭처럼 생긴 암릉을 만나 내려선다.
내리막길은 편안한데 싸라기기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어둠속에 묘지를 만나는데 ...
비석이 오래된 탓인지 碑文의 글씨가 마모되어
내용을 판독할 수가 없을정도라 포기하고 계속해서 어둠속에 길을 걷는다.
새맥이재(570m:05:50)
전북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에서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와 논곡리를
잇는 고개로 옛 민초들의 애환이 밀려오는듯한 느낌이다
아막성과 가까운 이 재는 신라와 백제가 땅따먹기 게임으로 밀고 당기며 싸우던
곳이요, 이성계는 이곳 남원땅을 침략하여 노락질을 일삼던 왜구를 물리치고,
조선 개국의발판의시금석을 마련한 곳이 오늘 걷고있는 이곳 운봉땅이 아니였던가?
또한 개화기에 동학의 힘찬 민중이 마지막 항거로 쓰러져 누운 고개가 이곳이였으며
그리고 동족상쟁의 피비린내 속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오직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빨치산에 몸을 담았다가 이유도 없이 죽어간 이 山河를 범여는 어둠속에 걸어간다
새맥이재에서 능선을 치고 오르니 T자형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는데 선두에 가는 동료산꾼들은 뭣이 그리도 급한지 벌써 697봉
아래까지 갔는지 렌턴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후미그룹인 우리는 이곳에서
물한모금 마시면서 시화님이 주신 찰떡파이와 비바리 총무가 가져온 한라봉
한조각씩 나눠 먹은 다음에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697봉(06:20)
정상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달려있고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서는데 여명이
밝아오면서 주위의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지난번 북진때 이곳에서 지리산주능선을
감상하면서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그 그림은 오늘 짙은 박무로 꽝이다
헬기장(06:40)
헬기장에서 바라본 88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남원시 아영면 아곡리 소재)
날은 밝았지만 똑닥이 카메라의 한계 때문인지 그림이 영 엉망이다
백두대간 북진때의 88고속도로와 지리산 휴게소의 모습(2010.01.14)
헬기장에서 조금 내려오니 하산길이 Y자 갈림길이다.
그리고 양쪽으로 선답자의 시그널이 달려있는데 원래 대간길은 좌측이다
그런데 앞에간 동료산꾼들은 우측으로 내려가 버렸지만 우리 후미팀은
좌측으로 내려선다... 이곳은 산불피해 지역이라 4년전엔 상당히 흉물스러웠는데
지금은 자연적으로 많이 복원된 느낌이다
사치재(沙峙:500m:07:00)
전북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에서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을 잇는 고개로
이슬재라고도 하며 광주에서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사치(모래재 부락:장수군 번암면 소재)는 과거 백제의 영토였으며,
신라 영토인 가산리(남원시 아영면)와는 국경 분쟁지였다고 한다.
88 올림픽을 기념하여 만든 고속도로는 2차선이라 중앙 분리대가 없는 탓인지
고속도로 사고율이 가장 높은 곳이도 하다. 그리고 맥길로 짤라버려 불편하기 그지없다.
국도보다도 못한 고속도로여서 나도 이 지역을 다닐때는 이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주변 국도를 많이 이용했는데 지금은 4차선도로로 확장중이며, 백두대간 잇기
복원공사의 일원인지 지난번에 지나온 육십령처럼 터널을 만드는 중이다.
차량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고속도로를 불법으로 무단횡단하여 공사장 아래로 내려선다.
백두대간 북진때의 사치재 모습
사치재는 옛날 전란시절 재 아래 숲 속에 몇 집이 살고 있었는데 군사들이
이곳을 지나 갈 때에 이 마을 한 집에서 아낙네가 베를 짜고 있었다.
그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군사들이 하는 소리가 그 새소리 참말 처량하다
하면서 동리가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다하여 모래재라 이름 하였다고 전한다.
풍수설에 의하면 비안낙사(飛雁落沙)라 하여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은 형국이라 한다.
88고속도로가 확장중인 공사장 현장을 내려가서 등로로 접어든다.
이곳은 고속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대간길이 많이 훼손시켜 놨다.
지금 내가가는 이 등로가 원래 대간 길인데 요즘은 이곳에서 우측으로한참 올라가
유정리 육교를 지나 743번 도로를 따라서 유치 삼거리에서매요리로 가겠끔 등로를 바뀌어놨다 (산행지도 참조)
그러고보니 헬기장에서 사치재로 내려가는 우측 등로가 그 길이었던 모양이다.
평소에 범생이 스타일인 대장이 산꾼들을 데리고 우측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원칙을 고집하고 등로로 내려온 범여와는 길이 엇갈려 버린 것이다.
잠시후에 등로로 올라서니 접근금지란 표찰이 보이는데 그렇다고 산꾼이 안가냐
이 바보들아! 공사를 하려면 산꾼들을 배려한 다음에 공사를 해야지
국민의 祿奉으로 살아가는 당신들의 행정편의주의 언제쯤 변할런지...
원래 사치재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대장에게 전화를 하니 자기들은 벌써
밥상을 펼쳤단다... 하는 수 없이 우리끼리 밥상을 펼쳐야겠는데 눈발을 굵어지면서
많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바람까지 부니 밥상 펼치기가 고약하다.
그렇다고 매요리까지 가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아침만찬(07:20~08:20)
하는 수 없어 조금 낮은 등로 안부의 넓은 공터에 밥상을 펼치는데 눈발은 더욱 거세진다.
집에서 가져온 비닐로 바람막이겸 간이지붕을 만들어 동료산꾼들과 가져온 부대찌게와
밥으로 1시간 가량의 느긋한 만찬을 즐기고 디저트로 커피까지 마신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金海許公의 묘지를 지나 오르막으로 오르니...
조금씩 고도를 높이니 산성터인 듯한 너덜길이 나타난다.
이곳이 그 옛날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맞대고 영토분쟁을 한 곳이라 그런가 보다
눈발이 조금 가늘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눈은 내리지만 그래도 비보다는 낫다
등로에서 바라본 사치마을의 모습(장수군 번암면 유정리 소재)
봉우리가 있는듯 없는듯 한 618봉을 지나니 완만한 등로가 슬리퍼 구간임을 알려준다
오늘 구간은 대표적인 樹種이 소나무이다... 건강한 소나무들이 산꾼들을 반긴다.
식사를 마치고 30분정도 편안한 길을 걸으니 유치 삼거리가 있는 743번 지방도와
24번 국도가 만나는 T자 도로가 나온다.
駐: 슬리퍼구간: 길이 편하여 슬리퍼 신고도 갈수 있을 정도로 편한 길
유치삼거리(420m:08:55)
도로를 가로질러 밭 둔덕을 따라서 가다가 능선으로 올라선다
유치삼거리 도로표지판
조그만 능선인 非山非野 구간을 5분정도를 걸어가니
또다시 유치삼거리에서 갈라진 24번 국도를 다시 만나는데...
먼저갔던 김포오야지님이 과메기에다 파, 김으로 소주를 마신다.
영감탱이 좋은건 혼자 다먹고 다니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치랴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과메기를 안주삼아 한잔을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난다
24번 국도를 따라서 매요리로 향한다... 이곳 운봉읍은 한네산 산악회의
JR아우님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2012년 7월 1대간 9정맥을 마칠때
보구곶리 마지막 구간에 막걸리를 지고와서 축하해 준 그 고마움을
갚아야 하는데 본지가 오래됐구나... 아우님 잘 사는지 모르겠네
남원시
남원시는 전북 동남부에 위치한 남원은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이 발달하였고, 천헤의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이 산재한 관광도시다.
지리산의 서북 관문인 남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가진 곳이다.
벼 한말을 심으면 140두를 추수할수 있다는 축복받은 땅이다.남원은 국악의 발상지이고
이성계의 이조 창건의 단초가 된 곳이며, 황산대첩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남원성싸움이 있던 곳이다.
삼국시대 남원성 서편에 만인의 총(萬人義塚;사적 제272호) 은 정유재란때
전사한 1만여 명과 순절한 8충신을 합장한 무덤이다.
또 운봉읍 화수리에는 1380년 이성계,이지란장군의 황산대첩비가 세워져있다.(1577년 선조10년)
왜장 아시누키 미야코를 물리친 사실을 기념한것이다.남원은 통일신라 경덕왕(757년)이후 1
300년간 지속된 지명이다.남원은 옛부터 목기특산물,유배지,춘향전,기생이 유명한곳이기도하다.
지금 길을 걷고있는 이곳 운봉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고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판소리라 함은 이조 영조, 정조 때 가장 널리 보급되어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고
주로 남자들이 부를 수 있었던 것을 이조말 대원군이 경복궁 경회루 落成式때
진채선이란 여성을 불러 소리를 하게 된 이후부터 여성명창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정도이며 판소리는 크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강산제)등 세 가지로 나눠진다고 한다.
지리산을 휘감고 있는 남원은 역사와 문화유적의 보고이다.
송홍록,송만갑,김정문,이화중선,강도근,안숙선,오갑순,강정렬등 수많은
명인명창을 배출한 국악의 성지이자 판소리 동편제의 本鄕이다.
우리나라 고전을 대표하는 춘향전과 흥부전,현대문학의 걸작인 혼불의 무대이기도하다.
24번국도를 따라가다가 국도를 버리고 Y자의 길에서 우측으로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향한다
잠시후에 매요리 마을로 들어서니 우측에 매요교회가 보이고...
폐교된 운성초교
매요교회 맞은편엔 폐교된 운성초교가 을씨년스럽게 자리잡고
있는데 우리나라 농촌의 현 실정을 보는것 같아 씁쓰럼하다
매요리 휴게실(09:10)
매요리 휴게소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에겐 사랑방이요 주막이며 쉼터이기도 한 곳이다
매요리 휴게소 쥔장 신 순남 할머니 아침식사를 한 지가 얼마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랴...매요리 휴게소(063-634-1844)에서 들러 쥔장 할머니를 부르니
안에서 인기척이 난다.
막걸리 한 잔을 하려고 하니 갑자기 내리던 눈이 폭설로 바뀌는 바람에 밖에서
머뭇거리던 대장은 선 채로 막걸리 한잔하고 도망가 버리지만 회장님, 마린님,쾌도세무님,
난 아예 등산화를 벗고 할머니의 안방으로 들어가 상을 펼친다.
막걸리와 담백한 맛의 김치에 막걸리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평소엔 술을 입에 대지 않으시던 깔끄막님은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연달아 막걸리를 마신다...
기분이 무척 좋으신 모양이다30분간의 여유로운 휴식에 커피까지 마신 다음에 할머니에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매요리 휴게소 앞에서
매요마을(남원시 운봉읍 소재)
매요리는 운봉읍 소재지에서 부터 4km 지점에 있으며 8번 군도가 마을 앞을 지나며
이곳에서 남역역까지 운행되는 버스가 있다 ... 백두대간을 통과 2개마을 중에 하나인 곳이다
마을 뒤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가며 고남산과 황산의 날줄기로 장수군 번암면과 경계에 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매요마을은 말의 허리 형국이라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마을 이름을 말마(馬), 허리요(腰)를 써서 '마요리(馬腰里)'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유정대사(惟政大師:사명당)가 산천을 유람하며 이곳 마요리에 머무를 때 지금의 마을 이름으로 바꿔놓았다는 애기가 전해지는데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해서 눈속에서도 꽃이 시들지 않고 순결한 향기가 난다는 의미로서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로 고쳤다고 한다.
지리산 북쪽 운봉고원에 자리잡고 있는 평온하고 조용한 동네이다
또한 이마을 우리나라 십승지중에 하나인 운봉구간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초석을 마련했던 황산대첩... 황산대첩비가 이곳에서 가까운 비전마을에 있다
황산대첩 파비각(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황산은 해발 695미터의 암벽으로 형성된 산으로써 고려 우왕6년(1380년) 9월 5일 당시 삼도통사였던
이성계 장군과 여진출신 의동생 이두란이 삼남을 휩쓸고 노략질을하는 왜구의 괴수 아지발도가 이끄는
아군보다 10배가 많은 왜구를 황산협곡에서 섬멸시켜 대승을 거둔 곳으로 황산대첩 이라 부르며 이
를 기념하기 위하여 선조 10년 (1577년)에 화수리 강변에다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이 대첩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하여 그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수록되어 있다.
1945년 1월 일제의 한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의하여 일제 경찰이 비문을 완전히 마멸시킨뒤 비를 폭파하였으나 조국광복이후 폭파당시 흩어졌던 파편들을 주워모아 이곳 화수리에 황산대첩비각을 재건하여 민족의 웅비와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자료인용)
KBS드라마 화면
운봉 일대에는 황산대첩과 관련한 지명이 많이 유래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피바위, 인월, 군마동, 인풍리 등이다.
피바위는 황산대첩비에서 인월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천변에 있는데 당시 왜구들이 흘린 피로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하여
붙여진 것이며, 인월은 날이 저물어 도망가는 왜구를 쫓아 달을 당겨놓고 밤늦게까지 싸워 전멸시킨 것이에 유래하였고,
인풍은 이성계가 바람을 몰고 다니며 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산 부근에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토성이
있고, 당시 군대가 주둔할 때 말을 매어 놓은 곳이라 하여 군마동이라 하였다.
운봉십승지 지도
십승지(十勝地)란 천지 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10군데의 지역을 말한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인간은 끔찍한 질병과 굶주림, 추위와 더위,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서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십승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러한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자손이 끊기지 않고
후세에까지 보존될 것이라고 하여 재난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십승지가 있다고 하는 곳은 다음 열 곳이다.
1.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5.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10. 남원 운봉 두류산(지리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지리산 주변에는 구례나 남원, 경남의 함양.하동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있다. 모두가 한폭의 그림같은 마을이고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정감록' 에 따르면 이 도시들보다 지리산으로 오르는 중간지대인 운봉 (雲峰) 을 십승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운봉은 오늘날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그 주변을 가리킨다.
이곳은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나며 가히 오래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 이라고 했다.
운봉은 동으로 팔랑치, 서쪽에 여원치라는 큰 재를 두고 있다.
북에는 덕유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막고 있고 남에는 지리산이 자연경계를 이룬다.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운봉으로 가려면 각각 팔랑치와 여원치를 넘어야 한다.
가령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려면 이 두 재만 단단히 지키면 된다.
해발 평균 450m로 서울 남산의 두배 높이에 자리한 운봉은 그런 점에서 '하늘의 요새' 라고 하겠다.
고려말 남해안을 날뛰던 왜구들도 이곳을 범하지 못했고 근세의 동학농민전쟁은 물론 해방후 빨치산전투에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매요마을을 지나 ...
조그만 고개에서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마을의 고개에 서있는 이정표
마을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둘레길 같은 길을 계속 걸어가는데
눈은 주적주적 내리지만 떡눈이라 그리 미끄럽지는 않다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았는데도 미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을과 도로 그리고 산판을 잇는 임도가 4년전에 비해서 많이 보이는 느낌이다.
유치재(柳峙:626m:10:15)
남원시의 운봉읍 임리와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 사이를 연결하는 고개로 버들재라고 한다.
백두대간 줄기로 북서쪽의 시리봉에서 산지가 이어지며, 동쪽으로 통안재, 고남산 등이 위치한다.
『여지도서』(운봉)에 "유치(柳峙)는 황산에서 뻗어 나오며 관아의 북쪽 7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동일문헌 남원부의 기록에도 "팔량치와 닿아 있는 곳이며 영남으로 통하는 길이다.
관애를 만들어 방어할 만하다."라고 하여 그 이전부터 지명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남원과 운봉 대부분의 지리지에서 유치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고지도에 남원부와
운봉현 사이, 명저치(鳴猪峙) 남쪽에 유치가 묘사되어 있다
573.2봉(10:25)
밋밋한 봉우리라 봉우라기보다는 일반등로인데 삼각점(운봉403/ 1981재설)이 있다
호젓하게 걸어가는 후미팀들
상사바위 갈림길(10:45)
704봉(10:55)
704봉은 봉우리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등로처럼 보이는데
이곳 운봉지역 자체가 워낙 고도가 높은 곳이다보니 산꾼들이 감각이 없어 보인다
오늘 후미에 동행한 젊은 처자 쾌도세무님이 맨날 나보고 뻥쟁이라 그랬는데
오늘은 정말 수월한 코스라면서 내 말을 인정한다 ㅋㅋㅋ
704봉에서 내려서니 무명묘지가 보이고 이윽고 통안재 도로가 보인다
통안재(655m:11:10)
남원시 산동면 대기리에서 운봉읍 권포리와 임리를 잇는 고개로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란다. 고개 위에는 고남산 통신탑이
내려다 보고있고 서어나무들이 있는 넓은 공터가 보이며 이 지역
사람들은 독골재라고 부르며 고남산 정상에 있는 KT송신소로 가는 포장도로이다
권포리(權捕里)는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고남산 아래서 산신제를 올릴때 주둔하던 마을로
군사와 말을 샘터 주변에 터를 權氏 일가의 권세가 커다하여 권포리(權捕里) 하였다 한다
고남산은 이성계 장군이 왕업을 이룬 것과 연관이 있다 하여, 일명 태조봉·제왕봉이라 하였다.
제왕봉은 모든 산의 제왕이 되므로 인근 지형 역시 권력을 편다는 의미로 붙인 마을 이름이다.
삼봉 정도전이 권포리(權佈里)라 지었다 한다.
눈을 맞으면서도 즐거워하는 깔끄막님, 쾌도세무님, 마린님
통안재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서 어느 산꾼이 메직으로 표기를 해놨다
통안재에서 눈을 맞고 서있는 노거수 서어나무의 모습
대간길에서 만난 3월의 멋진 상고대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고남산으로 향한다
20여m를 오르다가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 숲속으로 접어든다
숲속 등로는 나무계단인데 눈이 쌓여서 상당히 미끄럽다.
잠시 후 다시 도로를 만난 다음에 또다시 등로를 가로지르니
고남산 정상에 아래에 자리잡고 대간길을 막고있는 KT 송신소를 만난다.
고남산 KT송신소(11:25)
KT 송신소가 백두대간을 완벽하게 점령한 바람에 ...우측 도로로 내려선 다음에...
백두대간 등산 안내도를 끼고 좌측으로 오른다
KT송신소 우회길을 타고 올라가니...
고남산 헬기장(11:35)
헬기장을 멋진 암릉구간을 만난 다음에 미끄러운 눈길을 5분 걸으니 고남산 정상이 나온다
고남산(古南山:846m:11:40)
남원시 산동면(山東面) 부절리(釜節里)와 운봉읍 권포리(權布里)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태조봉(太祖峯)·고조봉(高祖峯)·제왕봉(帝王峯)·적산(赤山)·일광산(日光山)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앞의 것들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어 붙여진 이름들이다.
아침에 가장 먼저 햇빛을 받아 빛나 일광산이라 하고, 저녁이면 노을에 붉은 빛을 띤다 해서 적산이라 불렀다.
남쪽으로 반야봉을 비롯 수정봉이 보일 듯 말 듯 동쪽으로는 운봉 평야가 있다.
이 산의 고도는 846.5m에 지나지 않지만, 송신탑이 말해주 듯 중요한 통신시설의 한 곳이다.
이 산은 또 "운봉평야"에 우뚝 솟아올라서, 예부터 전쟁터와 격전지의 방어선이 되곤했다는데,
지역 주민들이 "고남산"을 "태조봉"이라고 불렀다는 연유는 다음과 같다.
고려말 우왕 6년(1380)에, 왜구 2천명을 이끌고 인월면 인월리에 본진을 둔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에 맞선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변안렬을 참모로 삼고, 퉁두란을 아장으로
삼아 1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을 출발하여 전주 한벽당에 잠시 쉬었다가 대오를
정비한 뒤 남원에 도착하였다. 이때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출발할 때,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크게 노하여 불길하다 하면서,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뒤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한 뒤, 이 산의 이름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불렀다고 한다.
고남산 정상에서 동료산꾼들과
아래에 있던 감시초소는 정상으로 올라가고 정작 정상에 있어야 할 정상석은 아래에 있다.
속된말로 主客이 전도된 느낌이다... 4년전 북진길에서 이곳에 서니 一望無際였는데
오늘은 30m앞도 보이질 않는다... 눈은 조금씩 그쳐가기 시작한다.
이곳 고남산을 중심으로 남원지역 곳곳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듯 하다.
다음구간에 걸어야 할 지리산의 성삼재, 정령치.팔랑치가 기원전 삼한의 전장(戰場)이었던 데 비해,
여원재를 중심으로 한 고남산 주변은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요, 노략질에 눈 멀었던 왜구들의 무덤이 아니었던가.
무장(武將 , 려말 이성계))은 고남산의 기를 빌어 왜구를 섬멸했고,
고산자 선생은 이곳에 서서 대동여지도에 넣을 곡중분수령을 찾아 지리산을 찾아들지 않았을까?
백두대간 북진길에 고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운봉들녘의 모습(2010,01,14)
고원에 드넓게 자리를 잡고있는 운봉읍은 작물이 잘자라고 물산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신라와 백제가 서로 이곳을 차지하기 치열한 영토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며
고려말에는 왜구들의 침탈로 몸살을 알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주위 조망(사진 펌)
고남산 정상에 있어야 할 정상석은 정상아래 펑퍼짐한 곳에 있고 실질적인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이동통신사 중계기지가 고남산의 쥔노릇을 하고 있다.
산불 감시원은 오늘 눈이 오는날이라 불이 날 염려가 없어서 그런지 출근하지 않았고
초소문은 굳게 잠겨있다... 초소 좌측을 우회하여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정상을 내려서니 4년전 북진길에 만났던 데크목 계단이 반갑게 산꾼 범여를 반긴다
급경사로 내려섰다가 다시 암릉으로 된 능선으로 오른다
두번째 데크목 계단이 나온다.
다시 눈이 휘날리기 시작하고...계단을 내려서니 멋진 암릉이 나오는데 근육질의 우람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 바위가 지도상에 표기된 필바위이다.
필바위(11:55)
필바위는 내린 눈으로 너무 미끄러워 로프를 타고 내릴 수 없어서 좌측으로 우회하여 내려선다
필바위를 지나 내리막길에는...
金海金公 묘지가 나온다
묘지를 지나 양쪽에 도열해 있는 소나무 숲 가운데로 걸어간다
785봉(12:10)
상고대가 만발한 억새도 만나고...
지금부터 편한길을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고남산에서 여원재까지는
직선거리로는 얼마되질 않지만 ∩자 형태로 빙돌아 가는 탓에 5.4km나 되는 거리이다
595봉(12:45)
595봉을 지나니 눈에 파묻혀 있는 무명묘지 한기를 만나고 다시 편한 능선길을 걷는다
좌측으로 조망이 확트이는 능선이 나와 평소같으면 지리산 능선이 한번 쫘~악 들어올 곳 같은데 ...
보시다시피 짙은 박무로 하얀 도화지처럼 보인다
내리막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묘지가 보이는데 앞에가던 하늘마음님이 갑자기
미끄러지는데 다행히 다친데는 없는 모양이다... 등로는 생각보다 미끄럽다
묘지를 지나서 직진의 넓은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562봉(13:10)
562봉에 올랐다가 대간길은 좌측 내리막으로 꺽어진다.
등로 우측에는 가선대부를 지낸 김해김공의 묘지가 있다
안개가 자욱한 소나무 숲으로 내려서니...
4년전 북진길에는 없었던 밭이 나오고 이곳 밭을 끼고 우측으로 들어선다
장재(13:25)
이정표(←여원재 0.4km → 고남산 5.0km)가 있는 T자 길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T자길에서 2분정도를 걸어 내려오니...
좌측에 눈에 묻힌 묘지에는 멋진 소나무 2그루가 있고그 너머로는 운봉읍 장교리 장치마을이 안개속에 아련히 보인다
잠시후에 장교마을로 이어지는 포장농로를 건너 비닐하우스 우측으로 가는데
먼저갔던 비바리, 장동건, 노루님들이 우측으로 내려서서 알바를 하고 원위치 하고있다
이보시게! 무조건 빨리가는게 좋은 건 아니여... 아직 느림의 美學을 맛보지 못하셨나?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다시 조그만 농로를 건너 직진하는데 농사철에는 이곳으로
못오고 좌측 마을입구로 가야하는데 오늘은 편의상 밭 가운데를 통과한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이정표
이제 여원재까지는 200 m밖에 남지 않았는데 재가 가까워졌는지 차량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인 여원재로 내려선다
여원재(女院峙:470m:13:40)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일명 연재라고도 하며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24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 서편에 구릉을 이룬 곳이 운봉읍이며
섬진강의 상류가 되고 이 지류가 남원시가지를 거쳐 광양만으로 빠진다.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엔 함양. 운봉. 남원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 이기도 하였다.
고려말 침입한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 이 성계가 이 재에 도착했을 때 백발의 할머니가 나타나 그대들의
용모와 지혜가 뛰어나 지리산 신령님의 도움으로 크게 무찌르리라는 할머니의 예언대로 이곳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성계가 그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여원치(女院峙)
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학란 때도 관군과 농민군의 전투가 치열했다는 곳이란다.
원래 연재(鳶峠)라 불렀으나 여원재로 이름이 바뀐 것이며, 고개 마루턱에 여신을 수호하는
산신각이 있어 그곳을 여원(女院)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여원재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는데,
고려말 이성계장군이 운봉현까지 내려와서 그 지역 양민들을 괴롭히던 왜구를 무찌를 때, 꿈에 여신이 나타나서
이성계에게 길을 인도했다는 전설이 있다. 여신은 함양(咸陽)에 살던 청상과부로 왜구의 우두머리
아치발도(阿只拔都)가 가슴을 만지며 희롱하자 칼로 더럽혀진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그 후 원수를 갚고자 이장군의 꿈에 현몽하여 여신으로 나타나 전략을 알려주어서 적장 아치발도를 죽게 하고
대승을 거두었다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 한다. 훗날 이성계는 이 여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사당을 짓고
여원이라 불렀다 한다.
연재라고도 불리는 이 여원재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 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은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한편 조선 말 동학민중혁명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또한 이곳 운봉이다.
남원을 지나 운봉으로 남상하던 동학군들이 고남산 서쪽 기슭 가말재(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까막재로 표기)에
진지를 구축한, 민관이 힘을 합한 토포군에게 참패를 한다.
여원재에 있는 동학혁명 유적지 표시석
여원재에 있는 雲城大將軍 벅수
다음구간 들머리에 서있는 눈이 큰 벅수가 10여 시간의 힘든 산행을 마친 산꾼을 위로한다.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으로 이 벅수가 세워져 있는 마을은 천석꾼과
만석꾼 등 부자들을 배출한 마을로 꽤나 부자 동네가 많다고 한다.
이곳 남원시 운봉읍은 넓은 고원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부자들이 많은 곳이라 한다
9시간 30분간의 산행을 마치고 장비를 정리한 다음에 버스에 올라 남원으로 향한다
오늘은 이곳이 고향인 동료산꾼 깔끄막님이 남원에 있는 콘도 사우나에 들려서
동료산꾼들을 목욕재계를 시킨 다음에 광한루 옆에 있는 추어탕집으로 안내한다
광한루 옆에 있는 추어탕 거리로 향하는데 남원추어탕이 어떤 연유로 유명한 지는
몰라도 추어탕집이 굉장히 많고 도로에도 미꾸라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예전에는 새집을 다녔는데 그곳이 조금 불친절한 것 같아 부산집을 다녔고
최근에는 현식당이 음식맛이 좋다고 하여 깔끄막님이 이곳으로 안내한다
현식당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정도 된 탓인지 손님은 별로없다.
추어탕이 나오는데 전라도 음식답게 깔끔하고 담백한 것이 입에 착착 감긴다.
추어탕에다가 소맥 2잔을 마시고 버스에 올라 바로옆에 있는 광한루를 구경하자고
하니까... 우대장이 오늘은 날씨도 춥고 바람이 불어 춘향이가 그네를 안 탄다는
썰렁개그에 다들 광한루 관람을 포기하고 서울로 향한다.
오늘 목욕과 추어탕을 스폰서하신 깔끄막님 올내내 대박나시고 복받을 깁니다
예전보다 조금 일찍 양재동에 도착하니 동료산꾼 배왕초님이 양재지맥 단합대회를 한잔다.
배왕초, 쾌도세무, 나 3명이서 치킨에다가 생맥주 3잔을 마시고 집으로 향한다
오늘은 이래저래 입이 호강을 한다... 배왕초님 복받을겨...근데 왕초보 딱지는 언제떼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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