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4년 4월 26일~27일(무박산행)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원 16명과 함께
☞ 산행코스: 좌석리-고치령-863봉-1,032봉(H)-마당치(세목삼거리)-1,032봉-연화동 갈림길-1,061봉-늦은맥이재☞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순흥면, 풍기읍 /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단양읍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연등축제
초파일을 열흘 앞두고 동국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연등축제가 열리고 축제가 끝난후 동국대에서
종로를 거쳐 조계사까지 제등행렬이 펼쳐지는 불교계의 1년중에 가장 큰 행사이건만 올해는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축제가 아닌 추모 행사로 열려 상당히 차분하게 행사가 진행된다
시끌벅적한 축제가 아닌 석가모니불 정근만이 대운동장 마이크에 울려 퍼진다
행사에 참석한 후 저녁 6시에 거행된 지인의 결혼식 참석한 후 제등행렬은 참가하지 못하고
서둘러 집에와서 베낭을 챙겨 양재역으로 가니 버스가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다
좌석리(座石里마을(경북 영주시 단산면 소재:03:30)
마을 한 중간 논 바닥에 "앉은 바위"라는 넓직한 바위가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대간꾼들에게는 참으로 낮 익은 마을이다.
등, 하산시 고치령까지 접속구간이 만만치 않아 대 부분 이곳에서 트럭을 이용한다.
이곳은 6-7가구가 살고 있는 새거리 이고, 계곡건너 상/하좌석리를 합치면 20여 가구가 된다고 한다.
조금 더 상류 지점 계곡 속에는 연화동이 있고 그곳까지 합해서 행정 구역상 좌석리라고 한다
어제 좌석리 이장에게 전화를 한 탓인지 버스가 도착한 소리를 듣고 서둘러 나와서 트럭을 세운다
트럭을 타고 20여분을 지난 다음에 오늘의 들머리인 고치령에 도착한다.
고치령(古峙嶺760m:03:50)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마락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좌석리에서
고치령까지는 1톤 정도로는 차량이 다닐 수 있으나 고치령에서
마락리 방면으로는 비포장 도로로 차량이 다닐 수 없는 고개이다
마락리(馬落里)라는 지명유래는 큰 바위로 된 절벽이 있는데
죽령 다음으로 영남과 충북, 강원, 서울 등지로 통하는 주요 통로였다.
상인이 말에 짐을 싣고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광풍으로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게 되었는데 말이 죽지 않았다 하여 말굴이라는 한자어인
마락((馬落)이라고 하였고, 조선시대 금성대군과 단종사이에 왕래하던
밀사가 말에서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마락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경북 영주시에서 충북 단양군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크게 3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가 죽령이요, 죽령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을 하면 두 번째 고치령
그리고 세 번째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개가 마구령이다.
조선 초기 정유재란 이후 정축지변(순흥땅의 단종 복위사건)이 나기 전에
이곳의 순흥부사(이 보흠)와 금성대군이 영월땅으로 유폐된 단종을 만나기
위해 밀사로 넘던 곳이 이곳 고치령이다
고개 정상에는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과 조카 단종의 혼을 달래려 있는
산령각과 장승들이 서있고 정상 표시석과 이정표가 고개 정상을 지키고 있다.
단종(端宗) 복위의 애환서린 한 많은 고치령(古峙嶺)
고치령에는 국망봉 11.1km, 마구령 8km의 이정표와 함께 공터의 좌측 소백산 방향에는 백호모양의
수마석과 표지석이 있고 소백지장(小白地將) 장승을 가운데 두고 포도대장군과 단산대장군 장승이 서있다.
우측 태백산 방향 공터 위에는 조금 앙증맞은 산령각(山靈閣)과 태백천장(太白天將)을
가운데 두고 양백대장과 항락 장승이 서 있다.
흔히들 장승하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을 연상하는데 ‘포도대장군’ ‘소백지장’ ‘태백지장’ 등은 생경하다.
고치령은 단순히 보부상들이 물류를 위해 넘던 고개가 아니다.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애사'의 슬픔을 간직한 한(恨) 많은 길이며,
또한 태백산과 소백산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고개라고 한다.
영주사람들은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은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고 믿고,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단종복위를 꽤하다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어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은 '소백산 신령이 되었다'고 믿어왔다.
그들 조카와 삼촌 사이에는 죽어서야 만날 수 있었던, 육신은 넘을 수 없었던 고개 고치령이 있는 것이다.
산령각은 태백산 산신인 단종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금성대군은 소백산 산신으로 화했다고 한다. 태백의 산신인 단종과 소백의 산신인 금성대군을 모셨으니,
이곳 산령각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험하기로 이름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兩白之間)인 고치령에 산신각을 짓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영혼이 되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줬다.
산신각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인 금성대군이 함께 모셔져 있다고 한다.
포도대장군은 20년 전부터 단산면에 포도재배를 시작하여 현재 100여 농가가 포도마을을
이루고 와인도 생산하는데 포도 농사에 대한 풍년을 기원하는 장승인 듯싶다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에서 나오니(一自怨禽出帝宮)
짝 잃은 외로운 몸 깊은 산중에 있구나(孤身雙影碧山中)
밤마다 잠들려도 그럴 겨를이 없으니(暇眠夜夜眠無假)
수없이 해가 가도 끝없을 이 한이여(窮限年年恨不窮)
자규 소리 멎은 새벽 뫼엔 조각달만 밝은데(聲斷曉岑殘月白)
피눈물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血淚春谷落花紅)
하늘도 귀가 먹어 슬픈 사연 못 듣는데(天聾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수심 많은 사람의 귀에만 홀로 밝게 들리는가(何柰愁人耳獨聰)”
고치령 이정표
고치령(760m)은 백두대간 상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이른바 양백지간(兩白之間)으로 양백지간 일대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 침입이 없는 명당으로 알려진 곳으로 영월, 영주 일대가 이에 해당하며
십승지 중의 한 곳이기도 하다. 야심한 새벽에 이곳 저곳을 두루 살핀 뒤
단체사진을 찍고 04시 정각에 산행을 시작한다
동료 산꾼들과의 단체사진
1,032봉(04:30)
고치령에서 올라서서 조금은 빡세게 치고 오르니 아직까지 몸이 예열되지 않은 탓인지 숨이차다
조금씩 걷기 시작하여 몸에 땀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몸뚱아리는 정상으로 돌아오는듯 하다
좌측 영주쪽은 아직도 야심한 새벽인 탓인지 도심의 불빛은 환하기만 하다
첫번째 헬기장인 1,032봉을 지나면서 길이 좋은 탓인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정표(←국망봉 9.2km, 고치령 1.9km:04:40)
어둠속에서 급한 오름길을 치고 오른다. 음력 삼월 스므 여드랫날 새벽이라 주위는
너무 컴컴하여 주위의 사물이 확인되지 않은 채 헤드렌턴 불빛에 의지한 채 걷는다
조금을 더 오르니 멋진 암릉을 만나는데 아마도 형제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정표(←국망봉7.7km →고치령 3.4km: 05:20)
이제 서서히 주위의 어둠이 걷히면서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동료 산꾼들의 발걸음이 의외로 빠르다. 아마도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에 다들 마음이 급한가보다.
암릉을 우회하여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주위에는 이제 갓 올라오기 시작하는 고비나물이 많이 보인다
어둠속에 짙은 구름사이로 해는 벌써 저만치 올라와 버렸다
중천까지 올라와 버린 일출(05:50)
마당치(06:00)
마당치 이정표
2번째 만나는 헬기장(06:05)
헬기장에서 2분정도를 걸어니 연화동 갈림길이 나온다
연화동 갈림길(06:07)
백두대간에서 단산면 좌석리 연화동으로 내려가는 고개이다
다시 편한길을 걸어가는데 어제 낮에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탓인지 자꾸만 졸음이 몰려온다
우측으로 우량경보기가 있다는 표지판을 만난다
이정표(←국망봉 4km 고치령 7.1km→:06:25)
고목사이에 틔운 새싹
얼레지
백합과(百合科 Lili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로키는 30㎝ 정도이고 비늘줄기를 가진다.
잎은 2장으로 마주보는 것처럼 달리는데 잎가장자리는 밋밋하나 주
름이 지기도 하며, 잎에 무늬가 생기기도 한다.
4월경 잎 사이에서 나온 꽃자루 위에 보라색 꽃 1송이가 아래를 향해 핀다.
꽃잎은 6장으로 뒤로 젖혀지며,안쪽에 진한 자주색의 W자형 무늬가 있다.
수술은 6개, 암술은 1개이지만 암술머리는 3갈래로 나누어진다. 열매는 삭과(蒴果)로 익는다.
봄철에 어린잎을 나물로 먹으며, 초가을에 비늘줄기를 캐서 쪄먹거나 이질·구토 치료에 쓰고 강장제로 사용한다.
숲속의 나무그늘에서 자라는데, 나무에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피었다가 잎이 나올 무렵에 열매를 맺고
죽기 때문에 봄을 알리는 식물로 알려져 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란다. 삼푸를 감은 머리를 뒤로하고
욕실에서 갓 나온듯 요염한 자태로 뭇 남성을 사로 잡는 꽃
김 선우 시인은 ‘얼레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을 한다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어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아침식사 (06:30~07:10)
고치령에서 출발하여 3번째 만나는 헬기장에서 아무래도 날씨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이라 조금 이른 시간에 밥상을 펼친다
인원이 너무 적어서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각자 가져온 음식을 꺼내니 훌륭한 식단이다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아침을 먹고 베낭을 꾸리는데 조급증(?) 증세를 보이는 동료산꾼
몇명은 벌써 사라져 버리고 없다
오늘로 백두대간을 완주하시는 육부능선님께서 졸업기념으로 귀하디 귀한 노봉방주를 가져 오셨다.
노봉방주란 노지에서 바람과 이슬을 맞은 벌집을 말하는데 옛부터 땅 속에 숨은 보물이라 하여
산삼보다 더 좋고 귀한 영양식품으로서 본초강목에서는 거풍공독(풍을 물리치고 독을 없앤다)
산종지통(종기를 없애고 통증을 멎게함)에 탁월한 효능을 가지며 특히 화병(禍病)에 특효이고
거시기가 약한 남정네에게도 좋다고 하여 서너잔을 얻어 마셨는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ㅋㅋㅋ
말벌집+말벌+애벌레+꿀이 있는 것을 담근것을 정통 노봉방주라 하며 벌집만을 담근것을 노봉주라 한다
귀하디 귀한 술을 가져오신 육부능선님 정말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능선으로 오르는데 비가 쏟아질런지 바람이 불어온다
다시 요염한 자태를 뽐내면서 산꾼을 유혹하고 있는 얼레지의 모습
우측의 나무사이로 신선봉이 살짝 보이기 시작한다
저 아래 남도지방에는 진달래는 고사하고 철쭉까지 지고 온 산이 綠陰으로 우거져 있는데
이곳 소백산은 아직까지 진달래도 제대로 피지 못하고 산은 아직도 겨울이다
게으름뱅이 진달래는 아직 꽃을 피울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있다
신선봉 갈림길(07:35)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가곡면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소백산 신선봉은 그 이름에 걸맞는 인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봉우리다
누가 선을 그었으며 누가 바둑을 두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화강암에 각인된 바둑판을 신선봉에서 만날 수 있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소백산 신선봉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신선봉에 오르면 대한민국 내륙의 국토가 빗어내는 장엄한 자연의 힘과 믿음직스러운
우리땅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봉우리가 신선봉이다. 신선봉은 소백산(小白山) 비로봉
북쪽으로 국망봉을 지나 상월봉을 만나고 계속 북쪽으로 진행하다 육산의 단조로움에
파격(破格)의 미(美)를 보여주기 위하여 솟아 난 바위산이 신선봉이다.
신선봉 갈림길 이정표
이곳에 우측으로 가면 단양 구인사로 향하는 구봉팔문 능선 꼭 한번 가고싶은 능선이다
늦은맥이재(07:45)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율전으로 내려가는 고개로
정상에는 데크목 쉼터 탐방로 안내판 그리고 이정표가 있으며 단양쪽은 등로가 뚜렸하다
늦은맥이의 지명유래를 찾아봤으나 아무데도 없어서 조금은 아쉽기만 하다
우려했던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베낭에서 우의를 꺼내 입었지만 우려한 만큼 그렇게
많은 양의 비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산행중 비가 오는건 귀찮기만 하다
그 바람에 산행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다
늦은맥이재의 탐방 안내도와 이정표
박새어린잎이 새순을 피우고 있다
고목사이에도 꽃은 피고 있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이 ‘황무지’ 라는 시에서는 세상 만물이 움을 트고 수많은
생명 꽃들이 피어나는 계절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하였다
어쩌면 그말이 정확하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T.S 엘리엇의 깊은 혜안(慧眼)에 그져 놀라울 뿐이다
아름다운 야생화가 만발한 이 아름다운 소백 능선을 걸으면서 지금도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배에 갖혀 차가운 바닷물에 시신으로 변해있을 17세의 어린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어린 학생들...‘움직이리지 말라는’ 안내 방송만 믿었다가 이승과 이별한 저 어린학생들을
생각하면 분명 4월은 잔인한 달이 맞은 것 같다
미안하고 미안하구나... 어른들의 잘못으로 너희들은 희생시킨 죄, 무엇으로 사죄해야하나...
이정표(08:10)
비의 양이 그리많지 않아 불편한 줄은 모르겠으나 갑자기 몰려오는 짙은
안개로 인해 주위의 전망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오리무중이다
상월봉 가는 길(08:12)
지도상에 엄연히 있는 상월봉을 소백산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설치한 이정표에는
그 어디에도 상월봉 표지판이 없다. 분명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멋진 봉우리이건만
위의 이정표를 보고서 대다수 대간 산꾼들이 그냥 지나쳐 버린다
우리 팀들도 거의 모르고 지나가버렸고 나와 동료산꾼 하늘마음님만 정상으로 오른다
이곳은 추운 날씨 탓인지 이제서야 진달래가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다
상월봉(上月峰:1394m:08:20)
경북 영주시 순흥면과 충북 단양군 가곡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소백산
봉우리중에 3번째로 높은 봉우리이고 지도상에도 엄연하게 표기가 되어 있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소백산 국공단에서 설치한 이정표 그 어디에도 상월봉이란 표식은
없는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봉우리 바라 아래의 이정표에도 상월봉이란 표식이 없어 대간 산꾼들이 그냥 지나친다
상월봉은 부처님 얼굴처럼 생겼다해서 상월불봉(上月佛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건
아무래도 소백산 자락 아래에 있는 천태종의 총본사인 구인사를 창건한 상월대종사와
관련되어 있는게 아닌가 싶다
상월봉의 상징인 버섯모양의 바위
바위 위의 바위 위에 또 하나의 윗돌을 깎아서 얹어놓은 것처럼 기이한 조각품이다.
경상도 말로 하면 상월봉은 '웃돌봉'이다. 상월봉이란 이름은 아마 신의 솜씨로 만든 것
같은 저 바위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국망봉에서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서 보면
상월봉은 그저 그렇고 그런 바위 무더기들이 모여있을 뿐이다
(출처:작은 꽃들이 모여서 지키는 큰 산 시인 이향지님 글 중에서)
소백산 구봉팔문의 지도
‘구봉팔문’은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 뒤편 소백산 방향으로 뻗어 있는 9개의 봉우리와
8개 골짜기를 일컫는 것으로 골짜기라는 지형적 특성에다
법문에 이르는 8개 문이라는 종교적 의미가 덧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구봉팔문’을 지형적 입장에서 정리하면 소백산맥의 주요 봉오리 가운데
국망봉(해발 1420.8m)에서 출발할 수 있는데 국망봉 바로 옆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상월봉(1394m)이 있으며 구봉팔문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상월봉에서 소백산맥을 뛰쳐나온 산맥 한 줄기가 남한강 방향으로 길을 내며
신선봉(1376m)~민봉(1361.7m)∼표대봉(1313m)의 지맥을 펼친다.
가곡면 새밭에서 영춘면 백자리 사이에 펼쳐진 신비의 9개 봉우리는
새밭·귀·배골·곰절·덕평·뒤시랭이·여의생·밤실·아곡문봉이 이어지고 있다.
9개의 봉우리 사이에는 새밭·귀기·배골·곰절·덕평·여의생·밤실·아곡문안 등
8개의 골짜기가 인간의 접촉을 꺼리고 있다.
‘구봉팔문’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은 구인사 초대종정인
상월원각대조사 묘소(적멸궁)가 있는 수리봉 정상부 한 곳 뿐이다.
또한 스케일이 커서 한 눈에 넣기도 어렵거니와 조망지점마저
감춰져 있어 구봉팔문은 늘 안개 속에 감춰져 있는 형국이다.
구인사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불제자가 오르지 못한 법문을 상월스님이
올랐으며 국망봉과 신선봉 사이의 봉오리에 올라 상월이라 새겨 상월봉이 됐다고 한다.
또 9개의 봉우리는 법문의 단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각각의
수행단계를 거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구봉팔문(법월팔문)은 수행의 해석까지 덧붙어 늘 신비의 대상이 돼 왔다
"소백산 줄기들이 어우러져 봉우리 아홉개를 형성하고 그 골짜기들이 모여 생긴
여덟개의 문을 보고 있노라면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예전에 부처가 이곳을 법문로 잘못알고 오르려 했다는 이야기에서 "법월팔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봉팔문의4번째 봉우리로 우뚝 솟은 영주봉(수리봉) 정상에는
구인사의 최초 큰스님이었던 삼월원각대조사의 무덤인 적멸궁이 있다.
적멸은 불교의 세계에서 해탈의 경지를 뜻하며 이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세
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구인사 일주문(一柱門:2013.08.05)
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이다. 전국에 말사 108개를 거느리고 있으며, 현대식
콘크리트건물로 된 이색적인 대가람(大伽藍)으로 1966년 8월 창건되었다.
그러나 이미 1945년부터 상월원각(上月圓覺)이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고, 천태종의 재흥을 다졌다.
소백산의 비로봉·연화봉·국망봉·신선봉 등 구봉팔문(九峰八門) 중 제4봉인 수리봉 밑에,
풍수설에서 말하는 이른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한가운데 연꽃 모양의 지형에
자리잡은 이 절은 짧은 기간 동안 크게 발전하여 전국 굴지의 사찰이 되었다.
또한, 1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5층 대법당을 비롯한 당우(堂宇)들도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 절은 창건주가 세운 천태종 중흥 3대지표인 애국불교·대중불교·생활불교의 참뜻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종래의 염불 중심의 의례종교를 탈피하고 부처의 자비심이
곧 애국애족이며, 이를 위하여 모든 불제자가 스스로 주경야선(晝耕夜禪)하는 실행자가 됨으로써
호국사찰로서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낮에는 승려들도 작업복을 입고 일하며, 식량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경내의 주요 건물로는 20억 원을 들여 준공한 높이 33m, 넓이 900평의 5층 대법당, 1
35평의 목조대강당인 광명당(光明堂), 30칸의 수도실인 판도암, 18칸의 특별강원인
설선당(說禪堂), 침식용의 향적당(香寂堂), 400평의 3층 건물인 총무원청사, 60평의
사천왕문과 거기에 안치된 국내 최대의 청동사천왕상 등이 있다.
수리봉 계곡에 있는 불사(佛舍)와 편의시설까지 합하면 약 5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5만 6000명이나 된다.
상월봉 정상에 오르니 짙은 안개로 인하여 한치 앞도 안보이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암릉인 상월봉 정상에서 내려서니 길은 여러갈래이다... 그리고 선답자들의 띠지도
여러 방향으로 나있어 좌측으로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되돌아와 우측으로 내려서니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은 넓은 평원처음 생긴 지형에는 진달래 군락지이다
이직 피지도 않은 진달래 군락지에서 동료산꾼들과...
진달래 능선 가운데를 걸으며 국망봉으로 향한다
그래도 부지런한 넘은 꽃망울을 터트렸다
진달래 능선을 지나니 드넓은 평원이 나오더니 멋진 암릉을 만난다
편안길을 걸어가는데 잠시후에 마의태자의 한이 서렸다는 국망봉이 눈앞에 나타난다
국망봉(國望峰·1,420.8m:08:45)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왕건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허사로 끝나자 엄동설한에 베옷 한 벌만을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한다.
개골산(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국망봉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또 하나는 조선 선조(宣祖)때 무쇠장이(水鐵匠) 배순(裵純)이라는 사람이 왕이 승하하자 3년 동안
이 봉우리에 올라와서 왕성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나라에서 그
를 표창하고 무쇠점을 하사하여 배점(裵店)이라 한 것이 배점리라는 지명이 생긴 유래이다
(한국지명총람 참고)
정상표석이 옆의 안내 설명에는 마의태자가 엄동설한에 베옷 한 벌만을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개골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국망봉이라 이름 붙여졌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육부능선님 축하합니다
1년동안 대간길을 同苦同樂을 했던 육부능선님이 이곳 국망봉에서 방점을 찍으며
백두대간 완주를 끝냈단다... 축하할 일이지만 헤어지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동년배로서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셨는데 정말 축하 드립니다
국망봉 이정표
지난해 12월 14~15일 죽령에서 고치령구간을 산행하다가 폭설로 인하여 죽령에서 이곳까지
왔다가 고치령까지 가는걸 포기하고 국망봉에서 초암사로 탈출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접속구간이다
이곳에서 국망봉 뒤로하여 어의곡리로 빠져도 되나 그냥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까지 진행한다
지난해 12월에 엄청난 폭설로 인해 중도 포기하던 모습
초암사 갈림길(1,380m:09:00)
초암사 대웅전내 석가모니불
초암사는 소백산의 남쪽자락 국망봉 아래 죽계구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계곡 끝자락에
쉼터마냥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사찰인데 이곳은 규모나 명성에 비해 역사가 무척이나 오래돼 찾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초암사의 역사는 무려 천년이 넘는다.
의상대사가 호국사찰을 짓기 위해 이곳에 초막을 짓고 땅을 찾다가 결국 부석사를 짓게 되었다는 곳이다.
의상은 부석사를 지을 때까지 초막에 머물다가 부석사가 완성된 후에 초막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초암사라 했다.
그 후 임진왜란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모든 건물이 다 없어졌다가 1970년중반에 보원(寶元)스님이
주석하면서 새로이 법당을 짓고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였다. 절 아래까지 시멘트 길을 놓아
절을 찾아가는 아기자기한 산길의 묘미는 없어졌지만, 소백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에겐 더 없는
중간 기착점이 되어주기도 한다.(출처:야후)
초암사 갈림길 이정표
다소곳이 피어있는 할미꽃
멋진 암릉구간을 지나고...
이젠 빗방울 많이 가늘어져서 우의를 벗어도 되듯싶다
철계단을 치고 올라서니...
멋진 암릉이 산꾼을 반긴다
비로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죽계구곡의 모습
소백산 자락 죽계구곡이 있는 이 계곡은 고려후의 명현이며, 문장가인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의 무대이며, 퇴계와 신재 등
유현들이 유상하던 자취들이 있어 비교적 알려진 계곡이다.
죽계란 순흥 읍내 동편쯤에서 소수서원, 배점을 거쳐 초암에 이르기까지의
대략 5리정도의 계곡을 말하는데 이 물은 국망봉 아래 석륜골에서 나오는 물과
하가동에서 나오는 물이 중봉 아래서 합류해 초암부근에 이르러 죽계의 첫머리가 된다.
죽계구곡이 위치하는 순흥지방은 삼국시대부터 있어왔다.
조선시대에도 도호부로 유지됐다가, 금성대군의 난으로 인해 폐지된 뒤 다시 숙종년간에 순흥부가 됐다.
현재는 영주시 순흥면으로 돼 있다.
죽계천(竹溪川)에서 죽계(竹溪)라는 지명유래는 지방의 향토지나,
시문에도 나오지는 않아 그 유래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대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는 환경인 이곳 지형에 유독 대나무 ‘죽竹’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이 보이는 것은 그 연원을 따져보아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죽령(竹嶺)을 비롯해 대밑골, 죽계천이 있는 순흥지방의 내죽리(內竹里), 죽동(竹洞) 등
대나무 죽자가 들어간 지명이 곳곳에 보인다. 죽령의 경우 그 개척자의 이름인
죽죽(竹竹)의 이름을 따서 죽령(竹嶺)이라 이름했다고 전해지는
유래가 여러 사서와 향토지에 나와 있어 그 연원을 알 수 있다.
어의곡리 갈림길(09:50)
본래 영춘군 대곡면의 지역으로서 엉어실이라고도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웃엉어실(上於衣谷), 아래엉어실(下於衣谷),
한디미(閑谷洞), 귀기(九益),?? 새밭(乙田), 밍기리(命吉里)를 통합하여
어의곡리라 해서 단양군 가곡면에 편입하였다
죄송합니다
어의곡리 갈림길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려니 다음과 같은 팻말이 있다.
관피아인 곡공파한테 맞섰다가는 영원히 등산을 못할 것 같아 자존심을 굽히고
백배 사죄(?)한다...죄송합니다... 오늘은 비도오고하니 한번만 봐주셔요
소백산 아고라 지대
이 곳은 해발1300m이상인 소백산의 아고라지대로 바람이 세고 비와 눈이 자주 내린 곳 으로
습기가 많고 키가 큰나무가 잘 자랄수가 없는지대이다 아고라 지대는 아한대 기후지대로
신갈나무 철쭉 등,바람과 추위을 잘,이겨내는 야생식물이 자연과 균형을이루며 살고있다
소백산 정상 비로봉 가는길
비로봉 정상에서 발을 들여 놓으니 돌탑이 가장 먼저 산꾼을 반긴다
비는 그치고 짙은 안개가 소백산 자락을 휘감고 있는데 뒤돌아보니 조금전에
짙은 안개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국망봉이 안개가 살짝 걷히면서 마치
고려시대에 개성의 뭇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했던 황진이의 치맛자락처럼
보일락말락 하면서 산꾼 범여의 애간장을 다 녹인다
백두대간은 강원도를 지나면서부터 우락부락한 악산(嶽山)에서
완연히 높이를 낮추는 육산(陸産)으로 확연히 변한다.
소백산의 가장 큰 특징은 지리산의 세석평전과 덕유산의 덕유평전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릉이 광활하게 펼쳐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 文次郞)가 지형에 따라
한반도의 산지체계를 분류한 산맥 개념이 나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우리 전통의 산지 체계인 백두대간은 산의 흐름, 즉 능선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진 산줄기로 나눠 이름 붙였지만 산맥은 지형지질에 따라 체계를 달리했다.
지질이 유사한 지형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래서 산맥은 산줄기가 사라진 강으로도 연결돼 산의 맥이 가끔 끊어지기도 한다.
소백산맥도 그중의 하나인 것이다.
중부권의 대표적인 육산인 소백산은 지형적으로는 온화한 평원을 이루고 있지만
바람과 눈(雪)에 있어선 어느 산보다 세차고 적설량이 많다.
이는 소백산이 위치한 지세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겨울철 시베리아에서 발원한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이때 내륙 깊숙이 진입한 대기는 소백산맥의 높은 장벽에 부딪혀 강제 상승한다.
수증기를 머금은 대기는 산사면을 타고 오르면서 단열팽창으로 냉각돼 눈으로 변해 내린다.
바로 동서로 길게 소백산 줄기가 바람을 가로 막으며 커다란
장벽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세찬 바람에 휘몰아치는 눈은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일종의 ‘푄(Föhn)현상’이다.
소백산이 설악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제일 설경(雪景) 명산으로 꼽히는 이유다.
이로 인해 소백산의 북쪽인 단양·제천은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차갑고
강한 바람이 부는 데 반해 남쪽의 영주 지방은 기온이 더 높게 나타난다.
반면 여름철의 경우 기온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백산이 날씨와 기온조절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로봉 정상 삼각점(△단양425 2003 재설)
비로봉(毘盧峰:1439m:10:00)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순흥면의 경계에 있는
소백산의 최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비로봉은 부처를 의미하는 산이다.
비로(毘盧)란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본래의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법(法)이 세상에 몸을 입어(身) 드러난 법신불(法身佛)로
'공(空)의 인격화된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비로봉은 그 이름만으로도 부처의 산이다.
우리나라의 산에는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많다.
주로 큰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 이 이름을 지니고 있다.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치악산 비로봉(1288m),
속리산 비로봉(1057m)과 소백산의 비로봉이다. 모두 부처의 산이다.
부처의 법을 드러내어 사방팔방으로 온 누리에 퍼지게 하는 산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름이 '비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리의 빛이 막힘없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산이니 말이다.
산봉우리를 영험하게 여겨 불교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비로봉 정상에는 이정표와 표지석, 산행객들이 쌓아놓은 돌탑,
그리고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다.
표지석 뒤에는 서거정(徐居正)의 시 한편이 새겨져 있다.
정상석 뒤면 정상석 후면에는 조선시대 대학자인
서거정의 시 "소백산"이 음각되어 있다.
小白山連太白山 (소백산연태백산)
逶迤百里揷雲間 (위이백리삽운간)
分明劃盡東南界 (분명획진동남계)
地設天成鬼破慳 (지설천성귀파간)
소백산 태백산에 이어져
구불구불 백리길 구름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이젠 구름이 완전히 벗겨져서 국망봉이 완전히 다 보인다
오늘이 비로봉이 7번째이지만 바람도 불지않고 이렇게 좋은 날은 처음이다
눈을 서쪽으로 돌리니 조금전만 하더라도 짙은 안개로 한 치앞도 보이지 않더니만
이젠 연화봉 정상에 있는 소백산 천문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 아래로 영주시 순흥면의 산그리메가 시원스럽게 다가온다
비로봉에서 내려서면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진 순흥면이다.
안향 선생의 후손으로 알려진 순흥 안씨 문중은 1454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에게 몰살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당시 단종은 인근 영월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이곳 순흥에 유배돼 있었는데,
순흥 안씨의 사대부들은 둘 사이를 오가며 거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소백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가 개울을 이루는 순흥 청다리
밑에서 하루 수십 명씩 사대부들의 목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피비린내 속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사람들도 오랜 세월 안씨 성을 버리고 숨어 살아야 했다.
핏물은 죽계천 물을 따라 흘러 20리 밖에서야 멈췄으니 그 마을 이름이 ‘피끝’이다.
피끝마을 사람들은 논바닥에 우뚝 선 소나무 밑에 형 수양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 금성의 주검이 묻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순흥 안씨 문중은 음력 10월 초하루면 그때 그 자리에 모여 제를 올린다.
오늘 백두대간을 졸업하는 육부능선님과 함께
소백산 일대는 예로부터 산삼을 비롯하여 많은 약초가 자라 지금도 약초 채취가 활발하며,
풍기는 이들 약초의 집산지이자 풍기 인삼으로 이름난 곳이다.
소백산 일대는 웅장한 산악 경관과 천연의 삼림, 사찰, 폭포가 많으며 주변에
부석사나 온달산성 등의 명승고적이 많아 1987년 12월에 소백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 면적이 320.5제곱킬로미터로 경상북도 영주시ㆍ봉화군, 충청북도 단양군에 걸쳐 있다.
공원 내에는 희방사ㆍ부석사ㆍ보국사ㆍ초암사ㆍ구인사ㆍ비로사ㆍ성혈사 등 여러 사찰과 암자가 있다.
특히 나라 안에 제일가는 절로 평가받는 부석사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소백산 기슭에 자리한 희방폭포는 소백산의 정봉인 비로봉으로 등정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높이 28미터로 내륙에서는 가장 큰 규모인 희방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에는 숲과 그늘과
괴암이 한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폭포 바로 위에는 선덕여왕 12년에 두운대사이
창건한 희방사가 자리한다. 다음은 『택리지』의 기록이다.
소백산 비로폭포 계곡의 모습
‘한국의 알프스’라 불리는 소백산은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 하나로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이르는 소백산은 총 면적이 320.5km에 달하는
큰 산맥을 이루며 1000m 고봉이 줄지어 있어 웅장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소백산은 봄에는 철쭉꽃이 만개하는 5월말에서 6월초까지 온 산이
천상의 화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연분홍빛으로 물들인다.
겨울철에는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은 지역이라 은백의 능선에 정신줄을 놓을 정도다.
소백산은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어 볼거리도 많은 지역이다.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쪽인 영주시 방면에는 부석사를 비롯하여 소수서원,비로사,희방사 등이 있고,
서쪽과 북쪽에는 고수동굴,노동굴,천동굴과 구인사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던 온달성이 잡고 있다.
비로봉 정상에서 서북쪽 기슭에는 살아 천년,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된 주목군락이 자리잡고 있다.
이중환의 “방사 남사고(南師古,조선 명종때 학자, 호;격암)가 소백산을 보고
말에서 내려서 절하며 말하기를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라고 말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이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소백산을 오른 기록이 상세하게 산행 일정을 전하고 있다.
퇴계의 전임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周世鵬)도 소백산을 올랐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은 순흥의 백운동서원(신재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서원으로 뒤에 퇴계가 명종으로부터 백운동서원이란 액자를 받았다)을 출발하여
지금의 배점리를 거쳐 죽계계곡을 따라 석륜사,중백운암을 경유하여 국망봉에 올랐다.
국망봉 위에서 술 석잔을 마시고 시 일곱장을 쓰고 나서 해가 기울어 중백운암에서 묵고 다음날 하산하였다고 한다.
소백산 북릉인 신선봉(1272m)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내려간 능선이 부채살처럼
펼쳐지며 아홉개의 능선에 여덟 골짜기를 만들어 낸 곳을 구봉팔문이라 부른다.
제 3관문봉과 제4관문봉 사이 골짜기인 여생이문 안 아래쪽에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가 자리잡고 있다.
소백산의 산행 들머리는 일곱군데로 단양 방면에는 구인사코스,어의곡리코스,천동리코스가
있으며,영주시 방면에는 죽령코스와 희방사코스,비로사코스,배점리코스가 있다.
작은 백산에서 유래한 소백산
소백산의 ‘백산’은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
’에서 유래한 것인데,
소백산은 여러 백산 가운데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다.
예로부터 신성시되어온 산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 3국의
국경을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허리 위로는 돌이 없고, 멀리서 보면 웅대하면서도 살기가 없으며,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이라서 많은 사람을 살릴 산이다.
” 조선 중종 때의 천문지리학자인 남사고가 이렇게 말한 소백산(小白山)은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 사이에 있는 산이다.
태백산(1568미터)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대간에 위치한 이 산은
해발 1440미터에 이르며, 북동쪽에 국망봉(1421미터)이 있어 험준한 연봉을 이룬다.
북서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이른바 고위평탄면을 이루며,
그 위를 국망천이 흘러 남한강에 유입된다. 동남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급하다.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죽계천이 발원한다.
소백산 정상에서 25분간의 여유로운 휴식과 멋진 仙景을 감상하고 하산을 시작한다
즐거워하는 동료산꾼들
소백산 주목 군락지
비로봉 바로 아래는 천념기념물 제244호인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일반인 통제구역이다.
옛날 통제하지 않던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망봉과 비로봉~연화봉 능선을 따라
3만여 그루가 분포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안내판에 적어 놓았다.
주목뿐만 아니라 왜솜다리, 모데미풀 등 희귀식물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목은 한국, 중국 북동부, 일본 등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등 높은 산악지대나 추운 지방에서 주로 자란다.
'주목(朱木)'이란 이름은 나무의 껍질이 붉은 색을 띠고 목재도 붉은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나이가 오래가고,
목재가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 나무로 잘 알려져 있다.
소백산의 주목군락은 소백산의 정상인 비로봉과 제1연화봉 사이에
주목 3,798그루(2007년 기준)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는 곳으로,
특히 비로봉 아래쪽 주목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곳을 울타리를 설치해 보호하고 있다.
소백산의 주목은 고지대의 입지 특성 때문에 강한 바람과 겨울철 강설(强雪)로 인해서
대부분의 줄기가 비틀리고, 가지가 휘어져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대부분 나무의 높이는
7m 정도이고, 둘레는 일정치 않으나 2m 정도에서 밑으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있다.
연화봉 정상에서 있는 소백산 천문대가 선명하게 보인다
주목군락지 감시초소
천동 주차장 갈림길(10:35)
천동 주차장 갈림길 탐방 안내도
모데미풀
미나리아재비과(―科 Ranuncul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로한국에서만 자라는 고유식물이다.
1935년 지리산 운봉 쪽 모데미라는 곳에서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가 발견한
식물로 소백산·덕유산·설악산 등지에서도 자라고 있다. 키는 40㎝에 이르며, 뿌리에서
여러 개의 줄기가 나와 모여 자란다. 잎은 5갈래로 깊게 갈라졌으며, 잎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들이 나 있다.
꽃은 흰색이고 지름은 2㎝ 정도이며, 뿌리에서 나온 긴 꽃자루 끝에 1송이씩 핀다. 꽃받침잎과
꽃잎은 각각 5장으로 꽃잎은 엷은 노란색이나 꽃받침잎은 흰색이며 암술과 수술이 많다.
열매는 골돌(蓇葖)로 꽃자루 끝에 방사상으로 달린다. 물기가 있거나 능선 등 자라는 곳이
제한되어 있어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식물이다. 모데미풀속(―屬 Megaleranthis)도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고유속으로 모데미풀 1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꽃말은 아쉬움, 슬픈 추억이라고 한다
모데미풀 군락지를 지나니 멋진 주목들이 산꾼을 반긴다
주목군락지 쉼터(10:40)
죽어서도 도도한 자세를 잊지않은 朱木
계곡을 내려오는데 산꾼들의 다리에는 쥐약인 돌로 만들어진 등로가 이어진다.
무릎에 불이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
그래서 국립공원을 싫어하는데 이곳도 지리산, 설악산과 같이 돌로만든 등로가 이어진다
아직도 4.8km가 남았다니 눈앞이 캄캄하다
소백산 옹달샘(11:05)
민백이 대궐터(11:15)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민백이 대궐터를 만난다
돌로만든 등로를 내려오니 쉼터가 나오고 넓은 임도로 2분정도 내려서니 천동쉼터가 나온다
천동쉼터(11:20)
신선암(12:00)
계속되는 돌로만든 등로를 지나가는데 다리의 통증이 너무 심해 주저앉고 싶다
신선2교(12:05)
이제사 안내 산악회 등산객들이 올라오는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천동자연관찰로(12:20)
천동계곡의 모습
소백산 북부 탐방지원센터(12:28)
이곳이 해발 462m이란다
다리안교(12:35)
다리안교를 지나니 산악인 허영호의 기념비가 있고 다리 아래는 다리안 폭포가 보인다
산악인 허 영호님 기념비
다리안 폭포
충북 단양군 단양읍 천동리 소백산 자락에 있는 폭포로 이 폭포가 위치한 지역으로
들어오려면 입구 골짜기에 높이 있었던 구름다리를 건너야만 했다하여 다리안 폭포
(橋內瀑布)라는 이름이 붙혀졌다고 전해진다
폭포수의 흐름은 삼단으로 되어있고 작은 소(沼)를 이루고 있으며 용이 승천할 때
힘껏 구른 발자국이 크게 찍힌곳이 소가 되었다고 하여 용담폭(龍潭瀑)이라고도 한다
소백산유스호스텔
소백산 유스호스텔을 지나니 우측으로 넓은 공원같은 건물이 나오는데 우뚝솟은
동상이 하나 서있다. 자세히보니 대동여지도를 만든 古山子 선생의 동상이다
이곳 소백산과 고산자 선생의 관계는 뭐가 있을까?
공원에 있는 수준점(12:40)
넓은 공원을 지나니 다리안 관광지가 나오고 주차장에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가
보이면서 오늘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데 갑자기 많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차에 올라서서 베낭을 내리는데 동료산꾼 하늘마음님 막걸리 한잔을 하자고 하여
음식점으로 들어가니 오늘따라 무척이나 친근감을 표시하는 배왕초와 노루님이
죽고 못나는 사이처럼 막걸리를 죽거니 받거니 하는데 막걸리를 연거푸 4잔을
마시니 배가 부르다... 그런 다음 공중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무도 없기에 홀라당
벗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버스에 오른다
하늘마음님 사진 인용
버스는 다리안 관광지를 출발하여 단양읍내를 지나고 도담산봉을 지나는데
비는 계속 쏟아지고 그 사이에 깊은 잠에 빠지는데 버스는 제천의 유명한
식당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곰탕과 한우 육회로 식사를 하고 육부능선님
대간 완주를 축하하는 행사를 치른 다음에 서울에 와서 2부행사로 양재지맥에서
배왕초님과 둘이서 마늘치킨에다가 생맥주 2잔씩을 마시고 이른 저녁에 집으로 향한다
육부능선님 곰탕과 육회 잘 먹었습니다... 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백두대간 2차 남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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