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4년 4월 26일~27일(무박산행)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원 20여명과 함께
☞ 경북 예천군 상리면/ 문경시 동로면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요즘 한국의 시계는 세월호 침몰이후 모두 멈춘듯한 靜中動의 행보이다보니
어디가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기 힘들고 모두가 다운된듯한 분위기 탓이라
참으로 힘이든다... 이단종교의 사이비 교주 한사람 때문에 가뜩이나 힘든
民草들의 삶이 더욱 더 힘들어지는 모습이다
나 역시 그런곳에 민감한 업종에 종사하다보니 요즘 상당히 타격이 많다
그렇다고 사람 노릇 안 할수도 없고... 토욜날에는 하루 3곳의 예식장인데
지방에서 하는 한 건은 봉투로 대신하고 강남과 강북을 오가면서 예식장을
다녀오니 어느듯 오후 4시가 넘었다... 텃밭의 야채에 물을주고 사무실에서
잔무를 처리한 다음 휴식을 취하지도 못한 채 대간길에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단양군에서 설치한 저수령 표시석
버스가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에 접어드는 바람에 깊은 잠에서 깨어나 국밥 한그릇으로 이른 아침
아닌 아침을 먹은 다음 다시 버스에 올라 단양읍내를 거친 다음에 북한산보다(836m) 높은 저수령에 5년만에 다시왔다
정상에는 폐업을 해버린 주유소와 정상석 2개, 도로정비 표시석, 관광안내도, 충북 바이오엑스포 안내판 등 온갖 조형물들로
절제의 간결미가 있어야 할 오지의 고개가 번잡하기만 하다거기다가 저수령의 충북 표시석과, 경북 표시석 2개가 산꾼의 눈에 상당히 거슬린다
도 경계의 있는 저수령이야 충북에서 설치하면 어떠하고 경북에서 설치하면 어떠랴마는각각 설치한다고해서 달라질 것이 없는데
벤뎅이 소갈머리같은 양쪽의 처사에 정말 못 마땅하다.이것도 우리나라에서 만연하고 있는 부처이기주의, 지역이기주의의 소산물인가.
이번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민낯으로 드러난 공직사회의 이기주의 정말 개혁을 해도 확실히 할 때다.대통령의 힘으로 못하면 민초들이
일어나서라도 말이다
저수령(低首嶺:850m:03:25)
경북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와 충북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를 잇는 고개로
경계로 한 도계(道界)로 927번 지방도가 지나며 옛부터 저수령이라고 불렸다.
지금의 도로를 개설하기 전에는 험한 산속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며 지나다니는
길손들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설과 저수령에서 은풍곡(殷豊谷)까지 피난길(避難路)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외적(外敵)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저수령에서 내려 스트레칭과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에 우측 능선으로 오른다
들머리에 오르자 5년전에 없었던 용두산 등산로 이정표와 해맞이 제단석이 있다 용두산 갈림길(03:50)백두대간 남한구간 738km중에 33개 시.군을 거치는데 이곳 문경시를 지나는
구간이 116km라고하니 문경시가 도.농 복합시이긴 하지만 크긴 큰 모양이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와 경북 문경시 동로면 석항리를 연결하는
넓은임도로 문경의 오미자길이란 안내판과 함께 아치형 철재로 터널을 만들어놨다
예전엔 예천과 문경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였으나 지금은 잊혀진 고개로 변해 버렸다.
무명봉에서 내려와 우측 철재터널을 통과하여 능선으로 올라선다
장구재의 지명유래의 지료는 찾을수가 없어서 조금은 아쉽기만 하다
차량 두대 정도가 교차할 수 있는 임도로 옛저수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구재에 설치된 오미자의 안내판 관리되지 않은 오미자의 터널은 조금은 흉물스럽게 보인다.자연을 자연답게 그대로 두지 이곳에 오미자가 제대로 자라지
못할게 뻔할것 같건만 전시행정의 한 부분을 보는거 같아서 씁쓰름하다
장구재에서 무명봉에 올랐다가 다시 어둠속에 안부로 내려선다
동로면 석항리 웃돌목 마을로 향하는 길은 등로가 뚜렸하다
옥녀봉(玉女峰:1,077m:04:15)단양군 대강면 방곡리와 문경시 동로면 석항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예전에 옥녀라는 처녀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간 정혼자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봉우리인데 처녀가 돌이 되었다는
그 돌도 보이질 않고 아무런 표식도 없어서 어둠속에 모든게 구분이 안된다
산행시작 후 처음으로 이곳에서 물한금 마시면서 선 채로 휴식을 취한다
'옥녀'는 대개 옥황선녀, 다른 말로는 선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풍수에서 옥녀는 선인과 함께 지형에 가장 많이 비유되는 형상이다.
산 모양이 옥녀가 북을 치는 형상이면 옥녀격고형, 옥녀와 선인이 조화를 이루면
와우적초형 이런 풍수의 영향으로 옥녀의 이름이 산에 많이 붙은 것으로 추측된다
어둠속에 헤드렌턴에 모든걸 의지한 채 求道者처럼 묵묵히 대간길을 걷는다문복대(門福臺,1074m)
경북 문경시동로면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저수재와
벌재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봉우리으로 백두대간이 죽령, 도솔봉, 향적봉,
저수령을 지나 문경시로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큰 산을 이뤘는데 이 산이 바로 문복대다.
백두대간 산줄기가 소백산을 거쳐 예천군을 지나 문경 땅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지켜서서
복(福)을 불러오는 문(門)과 같은 첫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봉산이라고도 불리는 문복대는 한줄기가 북으로 뻗어 수리봉·신선봉과 도락산을 두고 있다.
정상 표지석은 2001년 가을 문경의 산들모임산악회에서 이곳에 세워 지나는
산행객들에게 길잡이가 되도록 했다
본래의 문복대는 북으로 더 올라가 수리봉, 황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시작되는 곳을 이르는 이름이었다.
이 산 밑에 배나무골, 호박골, 세작골, 성골을 두고 있으며, 이 골짜기들이 모두 동로면 석항리를 이루고 있다.애기나리꽃이 이렇게 많은 많은 군락을 이룬곳도 처음본다
돌목재(05:25)
문경시 동로면 석항리 돌목마을에서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를 넘는 고개로
이 지역 사람들은 석항재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지명유래는 아마도
고개 아래에 있는 돌목마을에서 유래한 듯 싶다
돌목재에서 다시 오름길을 올라서니 이곳 날씨는 추웠던 탓인지 이제사 잎이나기 시작한다
천상의 화원을 펼쳐지는 등로를 혼자걷고 싶어서 나홀로 길을 걷는다.
1.3주에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기맥길을 걷다보니 이젠 여럿이
다니는 산행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져 이젠 홀로 산행이 너무나 즐겁다
어차피 이 세상 올 때에도 홀로왔고 가야할 때도 홀로가야 하기에
홀로가는 산길이 즐거운 걸까?... 고독이 아니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쥐오줌풀도 산꾼을 반기고...
쇳골 갈림길(05:35)
문복대2.5km ← →황장산 6.6km 이정표에서 90도 우측으로 꺽어져서벌재를 향해서 내려가는데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빠지면 동로면 적성리쇳골마을로 내려가는 길인데 희미하게 등로가 보인다.
앞에가는 동료산꾼은 저만치 가버리고 뒤에오는 산꾼들은 보이지도 않고...잘 알지도 모르는 노랫말을 흥얼거린다...
♪♪...야~~~ 내 나이가 어때서 ♬♬문경쪽 등로에는 접도구역 표시는 아닌 것 같은데 콘크리트 말뚝이 자주 보인다
조금 낮은 지대로 내려오니 철쭉꽃이 지기 시작한다
대간길을 걸으며 生老病死, 地水火風, 花無十日紅
인생사가 함축된 많은 것을 배운다... 자연이 위대한 스승이란 걸 가르쳐 준다
이정표(05:45)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우측에 커다란 묘지 1기가 나오고...
잔디 대신 둥굴레와 야생화로 뒤덮인 묘지가 나오고...
벌재로 내려서니 5년전 북진길에 없었던 데크목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건너편 도로위에는 동물이동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5년전 북진길에 아픈 기억(단속요원에게 적발)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주위의 동태를 살피고 벌재로 내려서는데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어서
재빨리 벌재로 내려선다
벌재 이정목
동료산꾼들은 구름다리를 지나는데 난 벌재로 내려선다.
5년전 2009년 7월12일날 하루 230mm가 내리는 폭우속에서도단속당한 경험이 있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주위를 살핀다
벌재(伐峙:625m:05:50)
경북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와 충북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를
잇는 고개로 59번 국도가 지난다 과거 이곳을 지나는 도로를
33번 지방도라 하였으나 지금은 59번 국도로 승격돼 있다.
벌재라는 지명유래는 붉은재에서 왔다고 한다.
벌재의 남쪽마을이 문경시 동로면인데 이 이름 에서 고개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적성리의 적 자가 붉은적“ 赤”이어서 고개이름이 ‘붉은재‘ 가
된 것을 이고장말로 벌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설은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황장목을 벌목해서
나르던 고개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벌재는 『증보문헌비고』,「여지고」등의 옛 기록에 벌치(伐峙)로 기록되어 있다.
그 명칭은 편의상 벌목재, 버리기미재, 밀치, 밀재, 밀목치 밀항등과
마찬가지로 벌(伐)의 목을 형상화한 이름으로도 볼 수 있으나
본래는 이 지역의 지명으로 남아있는 적성(赤城)과 관련된 옛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충북 단양의 옛 지명이 적성(赤城)이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백두대간
양쪽 지역인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와 단양군 적성면에 모두 그와 관련된 지명이 있다
벌재부터 월악산 국립공원에 포함이 되는 구간이다.
桑田碧海가 되어버린 벌재의 모습
희귀 동.식물을 단속한다는 미명아래 단속이 심하기로 악명높은 벌재에
예전에 있던 단속초소는 보이질 않고 동물이동통로와 데크목 구름다리에
꽃으로 단장된 소공원 안에는 쉼터 역할을 하는 멋진 육각정까지...
동.식물을 위한건지 인간들을 위한건지 도저히 이율배반적인 처사 이해가 안된다
벌재 표시석 뒤에는 문경시장은 42억이나 들여서 공사를 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면서 국공파들은 대간 산꾼들을 죄인 취급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다
동.식물을 위한건지... 국공파들의 일자리 때문인지... 우매한 산꾼의 머리로는 알 수가 없다
동물이동통로 옆에 있는 육각정
동물이동통로 위의 모습
미안합니다... 얼른 지나갈께요
동물이동통로를 지나서 단속구간을 10분동안 치고 오르니 헬기장이 나온다
단속구간을 빠져나오니 기분이 홀가분하다
헬기장(06:10)
헬기장 정상에서 조금 이른 시간에 아침상을 펼친다
오늘은 오랫만에 동년배 산꾼인 원일님이 동행하여
가져온 쭈꾸미에 볶음밥으로 빌붙어 식사를 한다
캠핑 전문가답가 나처럼 대간산꾼과는 달리 푸짐하다
약 1시간 가량의 느긋한 식사를 마치고 다세 베낭을 멘다
928봉(07:30)
등로에서 바라본 천주산(좌측) 공덕산(우측)의 모습예천이 고향인 온누리님의 고향에선 천주산을
붕어산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산 봉우리가 붕어 주둥이처럼 생겨다고 하더군요
잠시후에 가야할 치마바위의 모습도 보이고...
폐백이재(07:50)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에서 문경시 동로면 도하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문경쪽은 길이 뚜렸하나 단양쪽은 길이 잘 보이질 않는다
황장산의 옛 지명이 ‘봉산’으로 지정된 곳이고 이곳은 그 길목에 해당되어
허가받지 않은 사람의 벌목을 금지하는 ‘팻말이 박혀있던 고개’ ‘즉 패박이재’가
변음되어 페백이재로 불리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다른 설은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가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리는 광경을 떠올려
폐백이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예전에 이 고개는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혼자서는 이 길을 지나지 않는다는 고개이다.
폐백이재에서 급경사를 치고 오른 다음에 무명봉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아침에 지나온 문복대와 928봉의 모습
능선 안부의 철쭉 군락지를 지나는데 바람은 계속 불어대고
그래도 원일님이 오셨는데 비가 안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이다
워낙 비를 많이 몰고 다니는 분이라... ㅋㅋㅋ 그럴줄 알고 우의도 가져 왔는데...
책바위(08:25)
책바위를 지나면서 안부에는 판석처럼 생긴 조그만 바위를 많이 만난다
이곳은 날씨가 추운 탓이지 이제사 꽃봉오리가 보이네요
다시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 오르막으로 오른다
커다란 암릉을 떠받치고 있는 저 나무도 요즘의 나처럼 고단한 삶을 살고 있구나
갑자기 同病相憐 같아 惻隱之心이 느껴진다
능선을 치고 오르니 좌측 능선끝에 전망바위가 나오는데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전망바위(08:45)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도락산의 모습
전망바위에서 다시 우측으로 돌아와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가야할 황장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치마바위 능선으로 올라선다
암릉 아래로는 작성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작성산성(鵲城山城)의 흔적
문경군 동로면 황장산에서 충북 쪽으로 트인 험한 계곡의 물길 하류인 문안골에 자연의 험준함을 이용해
쌓은 성벽으로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고려 공민왕이 전란을 피해 대지국사의
안내를 받아 황장산 부근에 머물렀을 때, 작(鵲) 장군이 황장산에서 새 진지를 다듬고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올 뿐이다.
또한 그 보다 훨씬 앞서 927년 견훤이 이 성을 지키다 고려 태조 왕건의 공격을 받은 뒤 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아울러 전해진다.
치마바위(09:00)
치마바위에서 만난 낙락장송
암릉구간을 치고 올라서니 1,004봉이 나오고...
등로의 시야에서 계속 따라 다니는 천주산
헬기장(09:05)
치마바위에서 바라본 수루봉과 여우목 고개
폐헬기장(09:15)
황장재(09:07)
감투봉과 치마바위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와 명전리를 잇는 길이다.
이 고개는 생달리의 동로초등학교생달분교(폐교)와 명전리의 문안골로 이어지는 길로 등산로가 잘 나 있다.
문안골쪽으로는 오르는 길에 고려시대에 자연석으로 쌓았다는 작성이 남아 있다.
생달리 토사골쪽은 수리봉이 있으며 리지가 형성돼 암벽훈련 코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급경사의 암릉을 치고 오른다
힘들게 치고 오른후에 입석바위를 만나고...
칼날 능선을 따라 곡예를 하면서 걷는데 강한 바람땜에 애를 먹는다
唯有一生一色(유유일생일색) 八面起淸風(팔면기청풍)
오직 생기일색만 있으면 팔면에 맑은 바람이 일어난다..
생기란 곧 생명력이다.
희망과 기대가 넘치는 그런 삶을 뜻하는것이다.
뭔가 꿈을 가지고 열심히 정진하고 노력하는 사람,
곁에 누군가 그런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주변사람이 덩달아서 괜히 신이나고 생기가 넘친다.
산을 함께 걷는 동료란
靑風가 같은 존재다.
그 자체가 희망이요,용기다.
황장산(黃腸山:1,077m:09:50)
경북 문경시 동로면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1/25,000지도에 황정산(黃庭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에는 작성산(鵲城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문경 군지(1982년)에는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정확한 이름은 황장산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그것은 황장목이 많고 1925년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조사국에서 발행한 『조선의 산악 명칭과 소재 높이』에
황장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노인들이 황장산이라고 부르고있다.
작성(鵲城)과 봉산(封山) 표석이 있는 산이며, 울창한 계곡과 암릉에 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다.
황장산의 이름은 황장목이 많은 데서 유래했다.
황장목은 왕실에서 대궐이나 임금의 관, 배 등을 만드는 데 쓰는 최고 품질의 소나무를 말한다.
송진이 꽉 차 속살은 누렇고, 목질이 단단하고 결도 곱다.
조선 숙종 때(1680년)는 나무 보호를 위해 벌목과 개간을 금지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하고 관리를 파견, 감시했다.
당시 세워진 봉산 표석(지방문화재 제227호)이 명전리에 남아 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과도한 벌채 등으로 황장목이 없다.
본래 조선말기까지 작성산(鵲城山)이라 불리었는데 이는 인근의 고려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성산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동지지”나 “예천군읍지”등에 그 기록이 있다.
황장목(黃腸木)은 줄기의 고갱이 부분에 송진이 적절히 베어들어 속살이
누런 소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그 모양이 마치 누런 창자와 같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벌재 휴게소의 누런 나무기둥이 황장목임을 알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천황의 정원이라 하여 황정산이라고도 하였고,
지금도 이 산을 황정산(皇庭山)으로 부르거나 표기한 지도를 가끔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잘못 된 표기이며, 황정산은 단양 쪽 맞은편에 따로 있다.
골짜기가 깊어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고, 낙동강의 지루인 乃城川(내성천)의
지류인錦川의 상류부가 산의 남쪽사면을 감돌아 흐른다.
황장산 정상에
동료산꾼들과 함께
출임금지 구간 표지판을 지나 암릉구간으로 접어든다
오늘의 최고 위험지대의 암릉구간을 조심스레 지난다
황장산은 암릉이 많은 골산(骨山)으로 베바위, 멧등바위, 투구봉, 감투봉, 치마바위 등이 있다
길게 뻗은 홀산인데도 문안골, 우망골, 토시골 등의 계곡이 있다.특히 문안골은 수량이 풍부할 뿐 아니라
50여평 정도되는 반석도 있고북쪽으로 뻗어있는 단양천 유역과 함께 월악산국립공원의 동쪽끝에 해당된다
위험한 암릉구간을 지나 조금 넓은 암릉구간에 서니 월악산 국립공원구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 같이 산행하는 원일작가님이 8월에끝나는 19좌(대간, 9정맥, 9기맥)의 플랑카드의
모델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면서 계속 내 사진을 찍어주는데 너무나 고맙기만 하다
詩는 시화님이 써 주실거고... 다들 고맙습니다
원일님 고맙습니다
다음구간에 가야할 대미산도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는 대미산으로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역시 산과 여자는 멀리서 봐야만 아름답게 보이는가보다
멧등바위차갓재에서 올려다보면 둥그런 묘지처럼 생겼다하여 멧등바위라고 부른다
로프를 타고 직벽에 가까운 암릉을 로프 한가닥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내려선다
版石이 깔린 암릉구간을 내려가니...
투구봉 갈림길(10:35)
백두대간은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직진방향의 투구봉가는길이 너무 잘되어 있어서 바짝 신경을 써야할 구간이다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등로에는 물뿌레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좌측으로 오늘의 날머리인 안생달마을이 보이고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가 서있다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헬기장(11:00)
작은 차갓재(11:02)
작은 차갓재에 오니 오늘 컨디션 난조로 인해 산에 오르지 못한 회장님이 우릴 반갑게 맞는다
다시 무명봉 하나를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우측에 무명 묘지 한 기가 있고 차갓재에 도착한다
차갓재(740m:11:20)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 차갓마을과 동로면 명전리를 거쳐 충북 단양군 단성면으로 이어진다.
안생달 마을에서 백두대간길에 올라서면 차갓재와 작은차갓재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하고 있으며, 차갓재의 유래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동로면 생달리 안생달 마을과
생달리 차갓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서 차갓마을에서 유래된 고개이다.
일설에는 재 넘어 또 재가 있다는 차가(且加)재에서 유래했다는 고개다.
그런데 여기서 차갓재의 "갓"은 충청도나 전라.경상도에서는 "주변:이란 뜻의 사투리이며
"갓"은 "가치"로 발음되어 이를 한문으로 옮겨적을 때 "가치"에 가장 가까운 까치작(鵲)의
첫 글자를 쓰고 문안골에 있는 작성산성에서 재성(城)자를 빌려와 鵲城山으로 명명하였다.
‘차갓’은 ‘차가’의 본디말로 ‘막힌 집’ 즉 ‘산골의 마지막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늘 대간길 정중간을 통과하면서 1년을 넘게 우리 산꾼을 무사산행을 돕고
외호해준 대간길의 山神님들에게 약식으로 술한잔 올리는 행사를 한다
백두대간 정중간인 차갓재(시화님 사진 인용)
차갓재에 이르면 대간 남한 구간 중간지점이라는 구조물이 있다.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중간지점까지 왔으니 대간이 뭔지, 대간은 산맥과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겠다.
학창 시절 달달 외우던 산맥이라는 개념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藏文次郞)가 1903년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에서 비롯되었다. 고토분지로가 망아지 네 마리와 인부 6명을 데리고 겨우 14개월 동안
답사한 다음 작성한 것이라 하니 오류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고토분지로의 개념이 오로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도록 했다면
일제의 의도가 불순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 개념은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심지어 중국에서도 사용되는 개념이다.
산맥 개념에 조선의 氣를 꺽겠다는 의도가 담겼다는 주장은 지나친 국수주의적 해석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맥 기준은 땅위의 어떤 선상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땅속의
구조선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우리 조상들의 대간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다시 말하면 대간은 땅의 모양(지형)을 기초로 하여 산줄기를 표시한 데 반해
고토분지로의 산맥개념은 땅의 성질(지질)을 따라 표기한 것이다.
사실 우리의 대간 개념은 거의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과학적이다. 대간이란, 산줄기가 강 유역의 경계를
나누면서 산줄기 전체가 연결되기도 하고, 고을과 동네를 묶어주는 개념이다.
즉 대간이 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우리 고유의 자연인문지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간에 따라 물줄기가 나누어지고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마을은 문화, 관습 및 언어 등에 차이를 보인다.
이는 곧 각 지방은 서로 다른 문화와 방언을 가지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대간의 형성 원칙에
따르면 대간은 백두산을 거쳐 중국 대륙을 가로 지른 다음
에베레스트까지 이어지니 참으로 오묘하고 절묘하지 않는가.
그러니 대간과 산맥을 굳이 비교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왜소화할 필요는 없다.
대간은 대간이고 고토의 산맥은 산맥이다. 애당초 서로 다른 개념이다.
분명한 것은 대간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더욱 설득력있고 호소력있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차갓재에는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이라 씌여져 있는 두 장승이 세워져 있으며,
두 장승 사이로 문경 `산들모임`에서 세운 기념 빗돌이 낮게 자리하고 있다.
그 빗돌에는 ‘백두대간이 용틀임하며 힘차게 뻗어가는 이곳은 일천육백여리 대간길 중간에 자리한 지점이다.
넉넉하고 온후한 마음의 산사람들이여! 이곳 산 정기얻어 즐거운 산행 되시길….’ 이라 씌여져 있다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의 장승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썩어 빠진 채
나뒹굴어져 있는 것을 동료 산꾼들이 일으켜 세운 뒤 간단한 의례를 올린다
다시 일어선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
약식으로 山王大神들에게 祭를 올리고 안생달로 내려선다(11:50)
마지막 등로에서 만난 애기똥풀
안생달 마을로 내려서는 길에는 온통 오미자밭이다
우리나라 오미자의 45%가 이곳 문경시 동로면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날머리인 안생달 마을의 모습
오미자(五味子)오미자나무과(五味子─科 Schisandraceae)에 속하는 덩굴성
관목으로 목련과(Magnoliaceae)로 분류하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이고
뒷면 맥 위에만 털이 있고 가장자리에는 잔톱니가 있다.
꽃은 길이가 7~10㎝, 지름이 1.5㎝ 정도이고 암꽃과 수꽃이 6~7월경에
다른 그루에서 피는데 연붉은빛이 도는 황백색이다.
꽃덮이조각[花被片]은 6~9장이고, 수술은 5개, 암술은 많다.
꽃이 진 후 꽃받기[花托]가 5㎝ 정도 길이로 길게 자라 열매가 수상(穗狀)형태로 내리 달린다.
공모양의 열매는 8~9월에 붉은색으로 익는다. 각지의 산골짝에 군락을 이룬다.
오미자(五味子)·남오미자(南五味子)·북오미자(北五味子)·북미(北味)·현급(玄及)·회급(會及)·
조선오미자(朝鮮五味子)·홍내소(紅內消) 등으로도 불리며, 한방과 민간에서는 신맛이 강한 열매를
오미자라고 해 단독치료에 쓰이고, 해소제·자양제·강장제·수렴제 등으로 사용한다.
이외에도 가지의 껍질을 물에 담가서 그 물을 머리에 바르기도 하며, 가을에 포도송이처럼 붉게 열매가
달리기 때문에 집 안에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오미자술은 예로부터 정력제로 알려져 있으며, 오미자를 물에 담가 놓고 차(茶)처럼 마시면 기침을 다스리는 데도 효능이 있다.
유기산·염류·타닌 등이 주요성분이다.
열매의 맛이 5가지로 난다고 하여 오미자라 한다. 비슷한 종(種)으로 제주도에서 자라는 흑오미자(S. nigra)가 있다
학명은 Schizandra chinensis이고 아세아가 원산지이며 꽃말은 ‘다시 만납시다’란다
안생달마을(12:10)
문경시 동로면 생달마을에 대한 재미있는 지명유래가 있다.
생달리(生達里)는 '산달' 또는 '산다리' 로 불리웠는데 '안산다리'와 '바깥산다리'가 있다.
생달은 산과 달만 볼 수 있는 두메산골이라는 뜻으로 산(山)월(月), 산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고,
그 후 생달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마을 어귀에 다리가 있고 그 다리에서
사람이 떨어졌으나 죽지 않고 살았다 하여 산(生)다리라 해서 산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속설도 있으며,
또한 마을 뒷산에 고불형(顧佛形)의 명당(名堂)이 있다는 풍수설(風水說)에서 안산다리 마을입구에 '고불목'이라는
자연부락이 위치하고 있다
안산다리(안생달)는 생달리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다.
대미산과 황장산 사이 해발 500m 부근의 마을인데, 한 때 70여 가구가 숯을 구워 팔며 살았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부터 숯 생산이 금지되면서 가구수가 줄게 되었다. 그때문에 지금은 15가구 정도만 겨우 남아 아주 작은 마을로 변하게 되었다
모처럼 대간길에서 여유있는 산행을 즐겼다.
더군더나 갑장인 원일님의 구수한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같이 동행했던 산행 넘넘 즐거웠습니다
오실때는 미리 공지하지 마시고 번개로 신청하시길... 비가 올지 모르니 ㅋㅋㅋ
속리산 구간도 좋을 것 같고... 멋있게 사시는 모습 너무 좋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요
5년전 북진길에서 오미자 막걸리를 맛있게 먹었던 한백양조장은
온데간데 없고 듣도보도 못한 피플와인 창고가 들어서 있다.
이런 오지에서까지 외래어로 도배를 하다니... 조금은 씁쓰름한 느낌이다
날머리에 도착하여 오미자 창고뒤의 수도에서 깔끔하게 알탕을 한다 (원일님 사진)
뒷풀이(원일님 사진)
오늘은 산악회 회장님이 요즘에 금겹살로 불리는 비싼 제주도 흑돼지 삼겹살을 비행기로 공수해왔고 거기에다가 야채까지...
또 총무님인 비바리(수선화님)가 맛있는 김치에다 각종 밑반찬을 잔뜩 가졌왔는데 아마 집에 냉장고가 다빈것 같은데
손가락만 빨고 밥을 먹지 않을까 걱정이다... 왠 여인이 통이 저렇게도 큰 지?우대장이 밥까지 가져온 바람에 대간길
뒷풀이중에 가장 잘 먹은 것 같다 깔끄막님이 스폰서한 와인에다 삼겹살 정말 맛이 죽인다.
오랫만에 뵌 레인저 회장님,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한 참이슬아우님, 유성님범여의 입을 호강시켜준 모든분들 다들 복받을 겨
오랫만에 저녁 6시도 안되어 양재역에 도착하여 우 대장과 산행에 참석못한 쾌도세무님과 합류하여 양재치맥의
만찬을 벌이는데 비가 내려 술마시기 존날이다.잠시후에 호남정맥을 같이한 공작산 아우...
그리고 늦게 동참하여 술값을독박 쓴 배왕초님 너무 고마웠소...10명의 식구라 지출이 만만찮을텐데 ㅋㅋㅋ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백두대간 2차 남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 남진 제18구간 - 하늘재에서 이화령까지 (0) | 2014.06.02 |
---|---|
백두대간 남진 제17구간 - 차갓재에서 하늘재까지 (0) | 2014.05.26 |
백두대간 제14-2구간 - 고치령에서 국망봉까지 (0) | 2014.04.27 |
백두대간 남진 제34구간 - 여원재에서 성삼재까지 (0) | 2014.03.24 |
백두대간 남진 제33구간 - 복성이재에서 여원재까지 (0) | 2014.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