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내 땅을 걸으면서 이렇게 가슴 조이면서 대간길을 걸어야 하나?
☞ 산행일자: 2014년3월22일~23일 무박산행
☞ 산행날씨: 맑음... 산행하기 딱좋은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20.6km / 9시간 40분소요☞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16명과 함께
☞ 산행코스: 여원재-입망치- 수정봉-노치마을-고기 삼거리-큰고리봉 -정령치만복대-1350봉-묘봉치-작은 고리봉-성삼재
☞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이백면, 운봉읍, 산내면 / 전남 구례군 산동면, 광의면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여원재 입구(03:25)여원재에서 바라보는 일몰인 女院落照는 雲峰八景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아름답다고 한다
이곳은 고려 말 주막에 살던 젊고 아리따운 주모의 전설이 전해진다.
영남과 호남을 오가는 길손들에게 웃음으로 밥과 술을 내놓는 신세라 해도 어찌 왜구에게
몸을 빼앗기랴 하여 왜놈의 손을 탄 왼쪽 젖가슴을 스스로 도려내고 자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여원재를 지나던 이성계의 꿈에 나타난 백발의 여인은
왜적을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알려주어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138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 이라고 한.(이 고을에는 황산대첩비가 있다고 한다.)
이성계가 전투가 끝난 후 고갯마루에 오르는 길목에 여원이란 사당을 짓고 여인의 넋을 달랬고
주민들은 이 고개를 여원재라 불렀다 지금 여원재 도로 아래의 암벽에 왼쪽 젖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서 있다.
이끌던 동학군이 이 고개에서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말 정읍땅의 고부군수 조 병갑이 민초들의 악랄한 수탈행위에 봉기하여
시작된 동학민중혁명이 활짝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져 간 곳이기도 한
여원재 이 한많은 고개에서 이른 새벽에 산행을 준비한다 (03:40)
운성대장군(雲城大將軍)이 서있는 여원재
수많은 역사적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 지 여원재 들머리에 서있는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같은 운성대장군의 응원을 받으며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 여원치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잦았다. 규모가 큰 왜구들은 남해로 상륙해 강을 따라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환히 밝힌채 영업준비에 열심히다.
5년전 북진길에 이곳에서 수완좋은 주모에게 현혹되어 지갑을
털린적이 있는데 그래도 그때의 간판을 바라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여원재에서 200m쯤 가니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포장도로를 40여m쯤 따라가니 좌측에는 나와 本이 같은 慶州金氏 묘지가 나온다 도로 좌측에 있는 경주김씨 가족묘지 주지사 갈림길(03:55)주지암(住智庵)이라고도 부르는 이 절은 호국선교종 총본산이라고 한다
임도를 따라서 조금을 올라가다가 다시 좌측 능선으로 접어드는데 이곳은
지난구간인 사치재에서부터 계속되는 소나무가 가득하여 참으로 걷기 좋은
곳이지만 아쉽게도 어둠속에 걷는다는게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양지산성의 흔적(?)표주박처럼 2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양지산성의 흔적같은데 어둠속에 확인이 안된다
입망치 남쪽에 남쪽에 위치한 양지산성은 확인된 성의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대간 등로 정비는 아주 잘되어 있고 미안할 정도의 이정표가 잘되어 있다.
어둠속에 내리막을 한참 내려오니 입망치가 나온다.
입망치(笠望峙:545m:04:50)남원시 이백면 과립리와 오른쪽 운봉읍 행정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갓바래재라고도 한다.
고개의 유래는 고개에 스님이 삿갓을 지고 가는 모습의 산혈(山穴)이 있어서 갓바래재라고 불렀다고하고 갓(笠)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서 입촌(笠村)되어 갓바래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옛날에는 우마차가 많이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입망치를 가로질러 조금전에 내려온 만큼 다시 고도를 높이면서 수정봉으로 오른다
폐헬기장(05:10)한참을 고도를 높이면서 올라간다. 어둠속에 멋진 솔밭사이로 걷는데
이제 약간의 바람이 불긴 하지만 그리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잠시후에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수정봉 아래에 있는 폐헬기장이다.
헬기장을 지나니 수정봉 정상에서 가장 먼저 삼각점을 만나는데 이곳을
찾는 산꾼들은 삼각점에 관심이 없는듯 낙엽속에 파묻혀 있다
수정봉 정상 삼각점(△운봉303 / 1981 복구)수정봉(水晶峰:804.7m:05:20)
전북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 주천면 덕치리, 이백면 양가리의 경계를 이루는 수려한 봉우리로낙동강 유역의 분수계가 되며, 두 개의 산봉우리를 표주박 형태로 감싸는 양지산성이 있다.
수정봉은 운봉읍에 속해있는 지리산의 한 봉우리로 운봉 쪽에서 바라보면
야산과 같이 보이지만 남원 쪽에서 바라보면 지리산의 주능선과 같이 하늘금에
맞닿아 있고, 산세는 부드러운 능선길로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3등 삼각점과 5년전에 없었던 정상석이 새로운 모습으로 멋지게 설치되어 있고
옛 정상목과 스텐레스 안내판도 그대로 설치되어 있다
북진길에 이곳에 올라 우측으로 보였던 동편제의 本香인 운봉읍의 모습은 지금 불빛만 보인다
2009년 11월 15일 백두대간 북진때에 수정봉 정상에서
산경표상에 아주 중요한 수정봉
백두대간의 맥에서 가장 극적인 분수계를 만나는 이 수정봉은 남원에 들어선
백두대간은 매요리~고남산~여원치~입망치를 지나면서 이곳 수정봉에 다다른다.
수정봉에서 바라보면 주천면 덕치리 벌판 너머에지리산 서북능선 자락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여암 신경준 선생이 저술한『산경표』에서 말하는 백두대간을 비롯한
1정간 13정맥 모두는 하천을 둘러싼 하천의 유역분지 분수령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가장 큰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은 한반도 물줄기를
동서로 가르는 주맥으로서 가장 큰 분수령맥이다.
이런 백두대간이 수정봉에 다다르면 더 이상 능선을 타고 지리산으로 갈 수가 없다.
수정봉에서 좌우 즉 덕산저수지로 빠지는 낙동강 물줄기와 노치마을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요천, 섬진강 물줄기를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좌우 물줄기가 나누어지는
노치마을 길을 따라서만이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평지가 산이 된 셈이다.
그러나 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 길을 따라 정확하게 산길을 이어 놓았다.
그리고 이런 분수계를 따라 운봉읍과 주천면의 경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평지가 산이 되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정확하게 지키는 구간인 것이다
수정봉은 운봉분지를 에워싸는 북서산릉의 한 봉우리로 화강암이 변성받은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심층풍화된 남원화강암의 운봉분지에 비해 풍화에 강한 암질 산으로 남아있다.
오랜 지질시대엔 정령치에서 구룡폭포로 빠지는 물줄기가 24번 국도를 따라 낙동강쪽으로 흘러갔으나
급사면의 구룡천이 상류쪽으로 심하게 침식이 진전되는 두부침식(頭部侵蝕)에 의해 정령치 물줄기와
만나면서 정령치 물줄기는 방향을 바꾸어 구룡천으로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하천이 흐르지 않는 구간이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계가
된 것이며 이를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로 보는 것이다.
수정봉 안내판
예전의 그대로인 수정봉 이정목
판소리의 고향 운봉의 모습(2009.11.11 북진때의 사진)
하지만 이 지역에 음악의 싹이 튼것은 오래 전 일로 통일신라 때
옥보고는 거문고를 가지고 운봉에서 제자를 가르쳤는데 바래봉 북쪽의
옥계동 계곡이 옥보고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흥록은 조선 말기 운봉 화수리 비전 마을에서 태어났다.
판소리를 본격적인 창으로 생성시킨 대가들은 모두 송흥록에게 전수받은 제자들이었다.
즉 송흥록의 수제자인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에 의해 중고제가 주덕기의 아들 상한과
순창 사람 박유전에 의한 서편제가 갈려 나갔다. 이 때문에 송흥록은 판소리의 증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송홍록의 종손으로 송광록.송우룡 등 쟁쟁한 명문가 출신인 대천재 송만갑도 운봉 화수리 비전 마을에서
태어나 일곱살에 소리에 입문했다. 판소리 200年史에 가장 많은 제자를 가진
송만갑의 歌風은 요즘 판소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고종의 생일 잔치에 전라도 광대 대표로 임금 앞에서 노래를 불러 절찬받은 장재백과 가야금의 천재인
장행진도 운봉 출신이었고. 수궁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박초월은 고향은 아영면 청계리지만
어릴적에 송흥록과 송만갑의 고향인 화수리 비전마을로 이사가서 소리를 익혔다고 한다.
오랫만에 대간길에 동참한 수풀림 아우가 地氣를 받겠다고 솔밭에 앉아있다
10여분간 수정봉 정상에서 물한모금 마시고 사진을 찍으며 휴식을 취한 다음에다시 노치마을로 향하는데
아직도 어둠이 짙게 깔려서 멋진 소나무를 보지못하는게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고 하늘에 떠있는
하현달도 이젠 이별을 준비한다
잠시후에 성터의 흔적인듯한 돌담이 나오는데 아마도 노치산성인듯 하다
노치산성 터(05:25)
노치산성은 남원시 주천면 노치마을 뒷산인 수정봉에 있었던 산성으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운봉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해발 500m 이상되는 산봉우리에는 많은 산성들이 있다.
즉, 수정봉의 노치산성, 준향리의 음지산성·양지산성, 장교리·고남리·가산리·황산의 석성,
신기리의 토성 등이 있고 산성의 주변지역에는 준향리·매요리·임리·권포리·연재마을·비전마을
등지에서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고분이 확인되며 또 준향리에는 가야토기의 도요지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지역과 이웃한 아영면과 동면에서는 월산리·건지리·두락리 등의 삼국시대 고분군이 조사된 바 있다.
연산골 갈림길(05:35)
연산골 갈림길에서 조금 지나니 고인돌처럼 생긴 암릉을 만나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예전에 없었던 이정표가 나오고 어둠속에서 봐도 솔밭길은 기가 막힌다
이정표(05:45)
이정표에서 이젠 계속해서 급경사로 내려선다.
땅바닥이 마사토 토질이라서 미끄럽긴 하지만 남원시에서 설치한 시설물
땜에 안전하게 내려서니 노치마을 당산이 나오는데 이제사 날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지만 노치마을 가로등 불빛은 아직도 켜져있다.
노치마을 당산제전(06:05)
당산에 도착하니 500년 이상된 멋진 소나무는 5년전의 그대로 모습으로
산꾼 범여를 반기지만 아직도 주변이 어두워 똑닥이 카메라 앵글로 잡을 수
없어 두고두고 아쉬운 맘만 든다... 30분만 늦게 산행을 출발했더라도 좋았을텐데
노치마을 당산제(堂山祭)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 마을에서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였다.
옛날 노치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민씨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들 중에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가난한 거지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 거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묻어 주려고 하였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묻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관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눈이 녹아 있는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이 산에 보답하기 위해서 음력 1월1일 밤 12시에 주산제(主山祭), 곧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노치마을 당산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월 1일에 지냈는데, 몇 년 전 자손이 없던 마을노인 두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전답을 동네 당산답으로 기증을 하여, 마을주민들이 두 노인을 위해 해마다 7월15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얼마 전부터 당산제를 7월
백중으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마을 뒷산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소나무와 토석단이 결합된 형태이고, 할머니 당산은 큰 바위이다.
당산제를 지내기 한 달 전에 제주로 축관, 헌관, 밑주비(음식 장만하는 집)를 선정한다.
이들은 먼저 동네 우물물을 퍼낸 후 대나무와 금줄을 둘러서 외부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제를 지낼 때는 오전에 금줄을 쳐놓은 우물물로 음식을 마련하여, 당일 자정에 뒷당산(할아버지 당산)에서 먼저 제를 지내고, 바로 내려와서 우물에 친 금줄을 걷어다가 마을의 조산에 쳤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모든 사람이 문밖출입을 삼가고, 비린 것을 먹으면 안된다. 또 상주를 제외한 모든 집 대문에 금줄을 치며, 특히 제주들의 집에는 마당에서 부엌까지 황토를 깔아 놓는다..
옛날에는 정성이 부족하면 호랑이가 동네 개를 물어갔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낼 때 불을 켜놓으면 정월 대보름날까지 그대로 놓되, 한밤중에라도 꺼지면 즉시 다시 켜놓았다고 한다
노치마을 당산 소나무(2009.11,15 북진때의 사진)
수령이 500년 이상이나 된 소나무 4그루가 멀리서 보면 한그루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4그루가 아닌 5그루이다... 하나는 너무 작아서 치질 않는 모양이다
당산에서 바라본 노치마을의 모습
노치마을에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지만 아직까지 똑닥이 카메라는 보이는데로 잡아주질 못한다
멋진 소나무를 카메라 앵글에 담지 못하는게 두고두고 아쉽지만 그것도 내 德이 부족하려니
하면서 여명이 밝아오는 노치마을로 내려선다
노치샘(06:10)
마을 골목을 따라 내려서니 노치샘이 나온다
이른 아침에 바가지로 물한모금을 마신다... 속이 시원하다.
골목길에서 좌측으로 빠지지 않고 우측으로 빠져 백두대간 조형물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노치마을 가운데에는 커다란 노거수 한 그루가 있고 백두대간 기념석과 사각정자와 화장실이 있다
대간 기념석은 대한민국 전도, 「백두대간과 14정맥」,「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국내 유일 마을,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라고 적혀 있다
비보풍수(裨補風水·풍수의 원리에 따라 재앙을 막는 것)의 한 모습인 조산탑을 돌아들어 자리잡은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에 백두대간 기념물이 세워져 있는 마을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당산나무를 만난다.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풍모를 잃지 않아 지나는 이들을 감탄케 하는 잘생긴 소나무 다섯 그루는
덕유산에서 흘러온 기운이 넘쳐 지리산에서 오는 정기를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멀리 지리산의 주능선은 병풍처럼 버티고 서 돌아드는데도 마을 사람들이 그리 믿는 데는 내력이 있다.
백두대간 북진때에 모습(2009.11.15)
일제가 조선땅의 백두대간 맥을 끊으려고 묻었다는 목돌도 전시되어 있고...“일본 사람들이 땅을 잘 알잖우.
저그 지리산의 기운이 시작하는 곳에 뜸을 떴다니께.” 노인의 손끝이 가리키는 물을 댄 논에 지리산의 그림자가 비친다. 일본인들이 땅의 기운을 막는다고 구덩이를 파 숯을 묻고 돌침을 놓은 뒤 아예 저수지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마을 사람들이 저수지를 없애고 돌침을 꺼내놓았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내린 물도 덕유산에서 내린 물도 물길은 정확하게 노인이 일러준 곳에서 만나 좌우로 갈라져 흐른다.
마을의 조산은 마을 좌우로 헛헛한 기운을 보하고 흐르는 물을 따라 마을의 정기가 새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미신으로 치부하면 보이지 않지만 이치를 따져보면 비보풍수는 자연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옛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흐름은 발원지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산을 하나의 줄기로 이해하니 산의 발원지도 백두산 한 곳이어야 하고, 지리산의 시작은 덕유산의 산줄기가
내리막을 타다 비로소 오르기 시작하는 노치마을로 보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기념석 옆에 설치된 지리산 둘레길 화장실
화장실에 들어가면 음악소리가 나오는데 마치 양재천 화장실에 온 느낌이다
노치마을(550m:06:20)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은 조선조 초에 경주 정씨가 터 잡고, 이어 경주 이씨가 들어와 형성되었다는
노치마을은 해발 550m의 고랭지로서 본래 이름은 갈재이다.
마을 앞 지리산의 관문인 고리봉과 만복대에 갈대가 많이 있어 갈재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 갈대 노(蘆)고개 고개(峙)’ 표현하여 노치마을이라 불리운다.
한국전쟁때는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으로 완전히 불타버린 아픔이 있는 이 마을은 전국에서 백두대간 능선이 유일하게 통과한다.
대간이 통과하는 동쪽은 운봉읍에, 서쪽은 주천면에 속해 한 마을에 두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마을 뒷산에는 삼국시대때 축성된 노치산성이 있다.
이 마을은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갈대 노(蘆) 고개 치(峙)를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평지가 아닌 고개임을 암시한다.
노치마을은 섬진강과 진주 남강의 분수령으로 물의 흐름이 나뉘게 된다.운봉고원인 이곳은 옛날 바다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바다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가재마을은 바닷가재에서 딴 이름이고, 주촌(舟村)은 ‘배마을’이란 뜻이며, 고리봉은 배를 맨 고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노치마을 벗어나 고기리로 향한다
마을 전봇대에는 대간꾼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하늘에는 갑오년 음력 이월 스무사흘날의 하현달이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보이는데... 집착을 버리셔요... 사는 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덕치보건진료소(06:30)
운천교회
도로를 따라 끊어질듯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
운천교회를 지나니 노치마을 표시석이 있고 이곳에서 노치마을에서
나오는 도로와 730번 지방도와 만나서 고기리 방향으로 향한다
주천면 덕치리와 운봉읍 주촌리 사이 730번 지방도는
운봉분지의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로서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이다
도로를 따라가다가 좌측 해송나무 군락지에서 아침밥상을 펼친다
아침만찬(06:30~07:30) - 동료산꾼 시화님 사진인용
동료산꾼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내놓으니 그야말로 산상뷔페이다.
1시간의 여유로운 식사에 뜨거운 커피까지 한잔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730번 지방도도를 따라서 고기 삼거리로 향한다
도로 좌측에 있던 예전의 정령치 모텔은 운봉자연치유센터로 바뀌었다
고기 삼거리(07:40)
남원시 주천면에 속하는 고기리는 고촌리와 내기리를 병합하여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라 하였다.
고촌리는 마을이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며,
내기리는 깊은 산중의 안쪽에 있는 안터마을에서 유래되었다.
내기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정씨와 이씨가 피난와서 정착하여 형성되었고,
고촌마을은 경주이씨, 밀양박씨 등이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1995.1.1 남원시와 남원군의 통폐합에 따라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가
되었고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여 매우 높고 깊은 산중 마을이다.
해발 500~600m에 이르는 고산지대로 정령치에서 발원하는 원천천의
상류지역으로 물이 매우 맑고 마을 앞으로는 지리산 자락의 높은
산이 펼쳐져 있어 산수경관이 수려하다
걸어온 730번 지방도와 남원에서 정령치로 오르는 737번 지방도가 만나는
고기 삼거리에서 도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본격적적인 지리산
서북능선으로 접어드는데 큰고리봉까지 고도를 750이상을 높혀야 한다.
평소에 이곳을 양넘 지갑줏듯이 편하다고 동료산꾼들을 꼬셨는데
오늘도 범여님은 뻥쟁이라고 비난이나 받지 않을까 모르겠네 ㅋㅋㅋ
들머리에는 데크목 계단을 설치하여 초반에는 편하게 오른다
멋진 소나무의 향연은 계속되고...
반갑습네다
고리봉 오르는 첫번째 이정표(07:55)
이정표 옆에는 密陽朴氏의 묘지가 있고 묘지 좌측으로 우회하여 오름길을 오르며 고도를 높인다
동료산꾼들이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후미에서 호젓하게 솔밭길을 걸어간다
해발 900m이상 올라오자 식물분포도가 서서히 비뀌기 시작한다.
울창하던 소나무숲이 서서히 줄어들고 갈참나무를 비롯한 잡목들이 많다
좌.우 양쪽으로 소나무와 삼나무가 뚜렸하게 구분되어 있다
소나무와 산죽이 어우러진 호젓한 대간길
해발 1,000m가 넘어서자 식물분포도는 완전히 갈참나무가 지배한다
급경사의 암릉 오름길로 접어든다
암릉지대의 급경사로 오르니 멋진 암릉이 산꾼을 반기고...
좌측으로 내려다보니 고기 삼거리에서 정령치로 통하는 737번 도로가
보이고 파란물이 가득한 고기댐과 그 너머로 주천면의 들판이 보인다
정면으로 바라보니 아침에 지나온 수정봉과 노치마을그리고 우측으로 덕산저수지가 아련히 보인다
큰고리봉 아래의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이곳은 음지라 그런지 잔설이 남아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빡세게 힘주어 능선위로 오르니 온 사방이 다 보이는 큰고리봉에 도착한다
큰고리봉(1,305m:09:10)
전북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북고리봉 또는 큰고리봉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잠시후에 만나야 할 남원과 구례의 경계에 있는 작은 고리봉과의 구별을 짓기위해 큰고리봉이라 하는데
이곳이 해발이 조금 높아 그리 부르는 모양이다 또 달리 부르는 이름은 환봉(環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동쪽에 세걸산(世傑山), 남서쪽에 만복대(萬福臺)를 마주보고 있다.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도 그 맥을 달리하는 바위산이다.
고리봉이란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리봉은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 마을 뿐만 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 왔다.
수일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과(대추, 밤, 곶감)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1962년 가뭄이 극심할 때 풍수설에 의하여 고리봉 정상 부근에 있는 묘를 파헤쳐야만
가뭄이 해소된다는 풍문이 떠돌아 대강면 사석리로 갓 시집온 어느 아낙이
자기 증조모님의 묘인 줄도 모르고 파헤쳐 버렸다 한다.
그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금잔디를 심었다 하며,1945년 이후 아낙네들이
기우제에 참가하여 남자들보다 아낙네들이 주축이 되어 기우제를 지냈는데,
1973년 6월과 7월에 걸친 극심한 가뭄 때 대강면 사석리 아낙네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도중 큰 비를 만났다 하는데 지금은 거의 수리안전답으로 되어
우뚝 솟은 고리봉의 영험은 전설로 남아 있다.
큰고리봉 정상암릉으로 이루어진 고리봉 정상에는 이정표(←정령치 0.8km →바래봉8.6km↑고기리
삼거리3.0km)와2등 삼각점(△운봉 23/1991재설)이 있고 가야할 정령치와 만복대 그리고 맞은편의
반야봉이한 눈에 들어오며 좌측 능선은 지리산 서북능선으로 세걸산과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으로 이어진다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수풀림 아우
큰고리봉 정상 삼각점(△운봉 23/1991재설)
큰고리봉에서 바라본 반야봉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좌 퇴계 우 남명”으로 불리웠던 영남 사림의
太頭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하늘이 열번을 울어도 지리산은 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곳 서북능선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이제사 겨우 그 뜻을 알듯싶다.
첫날밤을 치르고 떠나버린 반야도사를 기다리는 마고할미의 근심인지 반야봉은 박무에 가려있다.
지리산 8경의 하나인 반야낙조로 유명한 반야봉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때문에
"아기궁뎅이처럼 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럽다
반야봉은 보는 곳에서 따라 모습이 바뀐다고 하는데 이곳의 반야봉은 마치 여인의 둔부같이 보인다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가야할 정령치와 만복대가 시야에 들어오고...
고리봉 정상에 선 동료산꾼들
서북쪽으로 눈을 돌리니 주천면과 이백면 그너머 남원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큰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향하는 길에는 산성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큰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가는 이곳은 정령치에 가까운 곳이라 아마 마한시대부터 있었던 성이 아닐까?
마애불상군 갈림길(09:38)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고리봉 마애불상군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애불상을 꼭 참배하고 가고 싶은데 고리봉에서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후미가 되어 동료들에 민폐가 될까봐 아쉬운 맘을접고 정령치로 향한다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보물 1123호) - 사진 펌
지리산 서북능선 큰고리봉 아래 개령암터 뒤 절벽에 새긴 이 마애불은
크고 작은 12구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불상군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12구의 마애불상으로 큰리봉 아래 개령암터 뒤 절벽에 조각되어 있다.
3구를 제외하고는 훼손이 심한 상태이며 가장 큰 불상은 4m로 조각솜씨가 가장 뛰어나고,
불상 아래에 ‘명월지불(明月智佛)’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큰 체구와 형식화된 이목구미, 간결한 옷주름 등 각부의 조각양식과
수법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큼직한 얼굴과 형식화된 이목구비, 장대해진 체구와 간략해진 옷주름 등에서도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거불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1∼2m의 작은 불상들 역시 조각수법이 모두 같으며, 각 부분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서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으로 지리능선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고기삼거리에서 정령치로 오르는 737번 지방도로얼마나 꼬불꼬불한 지 강원도에서도
볼 수 없는 길을 만나는데 저 도로를 개설할 때 환경단체와 지역민간의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정령치로 가는 길
정령치에 도착하여 정령치 대피소에서 맥주 한잔 하려고 했는데 셧터문은 굳게 닫혀있고...
대피소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뭔일일까?... 의문은 1분도 안걸려 풀렸다
정령치(鄭嶺峙:1,172m:09:45)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덕동리 달궁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737번 지방도가 지난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의하면 기원전 84년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眞韓)과 변한(弁韓)의
침략을 막기위해 鄭氏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이곳을 지키게끔 하였다고 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령치는 황령치(黃嶺峙)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 곳은 고개 마루가 운동장 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 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의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 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는데
천지를 올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령치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어메 산이 가네이!」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 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 장군이
내리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아 고갯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6.25 사변 전만 해도 정 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정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 있어 옛날 전설(마한의 별궁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정령치 대피소가 텅텅비어 있는 이유는 지금이 경방기간이란다.
그것을 모르고 온 것이 좀 난감하기만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만복대 가는 길은 굳게 닫혀있다.내 나라 내땅을 걷는데도 이래저래 통제를 받는데
늘 국공파들은 산꾼들을 어린애 취급을 한다... 이것저것 하지마라 하면 벌금 매긴다늘 하는 일상들...
짜증이 난다. 民草들의 祿을 먹으면서 늘 민초들에게군림하려고 하는 저 짓거리 언제쯤 안보려나...
며칠전 대통령께서 공무원들의 규제에 대한 폐해를 지적하면서 손톱밑의 가시를뽑겠다고 끝장토론을
벌였는데 산꾼들에게 국공파들은 손톱밑 가시가 아니라대못입니다... 산꾼으로서 제안할께요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으시고 출입도 무제한이 아닌 일정하게 줄이십시요.
사실이지 산을 타는 사람만큼 순수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특히 맥산행을 하는 전문 산꾼들은 티끌 하나도 산에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나요
그건 우리가 아닌 ㅈ(?)도 모르는 일부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위해 한포플리즘 아니던가요...
산꾼들 범죄자 만들지 말고 제대로 하셔요
이곳에서 일부는 도로로 가고 간을 집에다가 빼놓고(?) 다니는 범여는 기어이 월담을 한다.
겁없는 영감탱이김포오야지님이 자기를 따라 오란다. 벌금은 자기가 책임진다고...영감탱이가 존 일이 있나?
1인당 십만원씩을 물어 주려고 나중에알고보니 책임을 본인이 질테니 벌금을 우리보고 내란다 영감탱이 하고는 ㅋㅋㅋ
지금부터 범법자의 신세로 대간길을 걷기는 하지만 다들 즐겁다
만복대로 가야할 능선의 모습
폐헬기장(10:00)
산꾼을 늘 어린애 취급하는 국공파들
호젓한 산죽길을 걸어서 만복대로 향한다
갈참나무 군락지
정령치와 만복대 중간지점의 이정표
암릉구간을 지나...
만복대 아래의 음지에는 아직도 잔설이 많이 보인다
만복대로 향하는 능선의 모습
나는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지 않는다.
나를 정복하고 다스리고자 산에 오르는 것이다.
내 마음안에 우뚝 솟아있는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른다.
보이는 산이야 언제든지 누구에게 정복되어지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산, 즉 내 마음안에 자리한 산을 정복하고 싶어 한다,
늘상 때묻지 않은채 성성하게 서있는 마음의 산을 기대하면서.
(황 청원의『마음으로 부르는 이름 하나』中에서
만복대 오름길에서 뒤돌아 본 정령치에서 걸어온 능선의 모습
드디어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인 만복대 정상에 오른다
만복대 정상 이정목
만복대(萬福臺 1438.4m:10:55)
만복대는 전남구례군 산동면과 전북의 남원시 경계에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로 성삼재(1,090m)와 정령치(1,172m) 사이 백두대간 구간 가운데 가장
높은 꼭지점을 형성한 곳이며 풍수지리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전형적인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고 했을 만큼 복스럽게 생긴 모양새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 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북풍한설에 피어난 설화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지리산 최고의 억새능선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린다..
가을이면 금빛으로 출렁이는 억새의 군무가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친 지리산
주능선의 웅장함과 어우러져 장쾌한 풍경을 연출한다.
만복대 능선은 대체적으로 심원 계곡이 있는 동쪽 사면은 완만하고,
산동마을이 있는 서쪽사면은 급경사를 이룬다.
따라서 서쪽의 남원, 구례, 운봉 같은 큰 고을로부터 접근하려면
가파른 능선은 자연스레 천연의 요새가 된다.이 때문에 마한의 피난 왕조는 물론이요,
빨치산들도 한동안 심원계곡 일원에 진을 치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만복대를 정점으로 하는 만수천은 남원시 산내면 협곡을 빠져나가,
함양 산청 휘어돌며 엄천강~남강~낙동강 물길따라 부산까지 흘러간다.
그러나 분수령 서쪽으로 쏟아진 빗물들은 도계선 때문에 각기 물길 달리하고 있지만,
산동면의 서시천이나 봉쪽 수지천은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광양만에서 짠물로 변한다.
만복대에서 작은 고리봉으로 향하는 능선산 전체가 억새와 철쭉나무로 되어있다
1,350봉(11:10)
1,350봉에서 바라본 구례군 산동면에 위치한 산수유 마을동네 전체가 노랗게 물들어 있고
축제행사의 앰프소리가 이곳까지 들린다.
아쉽다면 똑닥이카메라의 한계 때문에 노랗게 보이는 산수유를 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만복대에서 이곳까지 혼자 걷는다. 억새밭을 지나고 산죽길도 걷고...
약간의 박무로 인해 지리능선은 흐리게 보이지만 산행으로
성취한 기쁨의 쾌감은 보이질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룬 나만의 만족스런 감정은 가득 채워져 포만감의 절정을 맛보듯 하다.
이 순간을 위해 홀로 기도하듯 걸어왔고 사람 마다 갈 길의 목적지가 있기에 걷는 것이다.
걷는것도 수행이다...일요법회에 참석하여 천수경을 독송하고 108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포행(布行: 걸으면서 하는 수행)도 수행이다
힘은 드나 地, 水, 火, 風, (땅과 물, 태양과 바람) 有情 無情, 모든 자연과 내가
의사소통하는 시간이며 망념된 생각을 버리고 내 자신을 되돌아본다.
無念과 無心이라 하여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답지 않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그치는 것이라 했던가. 一心이 되면 찰나적 이나마
무념과 무아의 경지에 진입하는 계기가 된다.
지나가면 없고 미래는 당도하지 않아 알 길이 없다. 현재는 그 속에 끼여 간격이 없다.
자연의 이치는 물은 흐르고, 인연 따라 바람 불면 구름은 뭉치기도 흩어지기도 한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썩은 고목엔 꽃이 피질 않는다.
묘봉치 가는 길에서 바라본 반야봉의 모습
반야봉은 어디서 보나 뒷테가 아름답다.
이곳에서 바라본 반야봉은 마치 여인네의 젖가슴처럼 보인다
가야할 작은 고리봉이 보이고...
동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노고단과 노고봉이 보이고...
뒤돌아본 만복대의 모습
폐헬기장(11:35)
山河를 마구 작살낸 멧돼지 쉬끼들온 산을 아작을 낸 멧돼지는 보호를 받고
폭이 50cm도 안되는 길을 걷는대간꾼들은 죄인취급 받는 이 나라...
대통령 각하께서는 어케 생각합니까?
이 나라 등산객들중에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처럼 순수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꼬박꼬박 세금 내면서 죄인 취급을 언제까지 받아야 하는지요?
내 나라 내 땅을 걸으면서도 언제까지 가슴 조이면 대간길을 걸어야 하는지 해이가 든다
묘봉치(妙峰峙:1,108m:11:40)
구례 산수유 축제로 유명해진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상위마을에서
하늘아래 첫동네로 불리는 덕동리 심원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정상에는 넓은 공터에 헬기장이 있고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이정목이 있다
지명의 유래는 심원쪽에 있었다는 묘봉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정령치에서 월담을 하여 국공파들을 정탐하기 위해서 먼저 가던 우 대장과
선두팀들이 산상파티를 벌이고 있어서 이곳에 동참하여 소맥 2잔을 연거푸
마시고나니 기분이 굉장히 좋다... 후미가 오길 기다리면서...
묘봉치 정상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에 성삼재로 향한다
작은 고리봉 가는길에서 만난 차돌백이
이정표(12:25)
이정표를 지나서 산죽길을 걸으면서 다시 오르막길을 걷는다.
건너편에는 반야봉과 노고봉이 한 눈에 들어오고... 호화준족이신
천리마님의 첫사랑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걷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천리마님의 지론 ‘남자는 첫사랑을 못잊고 여자는 끝사랑을 못잊는다’나...ㅎㅎㅎ
헬기장(12:35)
헬기장을 지나 오르막을 올라 우측으로 꺽어지는 지점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작은 고리봉(1,248m:12:40)
전북 남원시 산내면과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령치”뒤에 있는 “고리봉”과 구별하기 위해 “작은 고리봉”이라고 한다.
정상에는 구례군에서 설치한 검은 오석으로 된 표시석이 있다
산세가 흡사 배의 닻을거는 쇠고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은 지명으로
“고리봉”은 한자로“環峰”이라고 한 것이라 “고리 환(環)”이라 부른 모양이다.
아득한 옛날 남해안 하동 앞 바다에서 섬진강을 따라 거슬러 남원의
오수정까지 배를 오르내렸다고 하는데 그때 오르 내리던 배들을 묶어
놓았던 고리가 이 산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작은 고리봉 정상에서
작은 고리봉에서 성삼재가 한 눈에 보인다.
이곳에서는 몸을 숨길수 없는 곳이다.
조금 먼저 내려가는 대장은 목소리도 줄이라 정상에서 내려오라 계속 말하건만
동료산꾼들은 대장의 속이 새카맣게 타는줄도 모르고 그저 여유만만이다.
대장은 정령치에서 도로로 탈출한 회장님과 계속 교신을 하면서 애간장을 다 녹인다
작은 고리봉에서부터 등로를 따라 성삼재로 향하다가 성삼재 1km 이정표를 지나
당동마을 갈림길 직전에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서 도로로 접어든다.
그런데 먼저 도착한 회장님도 얼마나 속이 탔던지 도로를 따라서 내려와 우리를 맞이한다.
그러니까 성삼재 700m 전까지 밖에 못갔으니 나중에 땜방하기로 하고...
회장님과 우 대장의 속은 새카맣게 탔을망정 후미 그룹들은 다들 즐겁기만 하다.
일단 도로로 도착한 다음에야 국공파들이 현행범이 아니니 단속하진 못할것이고...
훔쳐먹는 사과가 맛있다고 했던가... 스릴 넘치는 산행을 마치고 성삼재로 향한다 ㅋㅋㅋ
도로를 따라 성삼재로 향하는 동료산꾼들
도로를 따라서 5분정도를 걸으니 성삼재 300m 이정표가 나오고...
오늘 날머리인 곳에는 철책이 굳게 닫혀있고...
8월달 지리산 마지막 구간에 땜방해야지...
하늘아래 첫동네 심원마을 표지판을 지나면서 성삼재에 도착한다
성삼재 주차장(13:20)
주차장에 도착하니 愛馬로 우리를 태우고 온 박사장이 우리를 반기고 여기서 장비를
정리한 다음에 정령치, 육모정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남원 시내로 들어와
지난구간 들렸던 하이츠 콘도 사우나에서 깔끔하게 샤워를 끝낸 다음
의관정제를 마치고 광한루 옆의 추어탕집인 현식당에 들려서 맛있게 추어탕을 먹는다
오늘도 고향이라고 깔끄막님이 목욕비를 스폰서 하시고 김포오야님이 추어탕을
사줘서 배불리 먹고 귀향하는 차량에서 깊은 잠에 빠진다.
양재동에 내려서는 수풀림 아우가 주관하는 양재치맥에서 생맥주와 치킨으로
맛있게 먹고는 집에와서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니 새벽 4시가 좀 넘었다.
깔끄막님, 김포야지님, 수풀림 아우 복받을 겨
성삼재(性三峙:1,102m)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에 있는 지리산 능선 서쪽 끝에 있는 고개로,
구례군과 남원시를 잇는 861번 지방도인 지리산 종단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정령치 고갯길과 함께 군사목적으로 만들어진 도로는 확장과 포장을 거쳐
관광도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성삼재에서 천은사까지의 구간에는 1988년 개통된
지리산 횡단도로(지방도 861번)가 개설되어 있는데 거리는 약 10㎞이다..
고갯마루에 주차장과 휴게소, 전망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성삼재의 유래는 삼한시대에 진한 대군에 쫓기던 마한 왕이 전쟁을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와 심원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적을 막으며 오래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임시 도성이 있었던 곳이 달궁이라 이름지어져 불렸다 한다.
그 당시 마한 왕은 달궁을 지키기 위하여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八郞峙) 서쪽 능선은 정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치(鄭嶺峙), 동쪽은 황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령재(黃嶺峙)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姓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으므로 성삼재(姓三峙) 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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