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4년2월8일~9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짙은 안개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9km + 어프로치 약2km / 9시간 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14명과 함께
☞ 산행코스: 육십령-샘터-깃대봉(구시봉)-민령-북바위-덕운봉-논개생가 갈림길
영취산-1066봉-선바위고개-백운산-중고개재-중재-지지계곡-743지방도
☞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서상면,백전면 / 전북 장수군 장계면, 번암면
혹시 님께서는 2014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도로명 주소를 아시나요?
아마 모르긴해도 7~80%는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편한 주소를 두고 천문학적인 세금을 써가면서 주소를 바꾸고 있는지
가방끈 짧은 범여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왜 그짓거리를 하는지...
지금 시행하고 있는 도로명 주소는 미국이나 유럽처럼 도시를 설계하고 집을 짓기전에
도로를 먼저 개설한 다음에 한 나라들은 그게 맞을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덩어리에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나라에는 맞지 않은 실정인데 굳이 현재까지
4,000억이 넘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어도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네요...
혹자 서구에서 공부하고 온 고위직에서 나온발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서구에서 잘 맞다고 해서
우리한테 잘맞는 건 절대 아니잖소어느 사람은 이렇게 말합디다...
일본이 자본수탈을 위해 만든거라 바꾸는 것이라고...
내가 보기엔 아니라오. 그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써온 것을...
옛말에 뱁새가 황새따라가다가가랑이 찢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 하지 않았던가요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육십령(六十嶺:734m:03:35)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방에는 1m가 넘는 폭설로 인하여 대다수 산악회의 대간산행이 취소된 가운데
우린 남쪽인 덕유산 끝머리인 육십령으로 가기위해 양재역으로 향하는 시점에도 눈은 내린다.
이런저런 사유로 인하여 오늘은 가장 적은 인원인 14명이 버스에 올라 육십령에 도착하니
주차장에는 달랑 우리 한 팀밖에 없고 주차장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혔다.
버스 박사장이 끓여주는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에 장비를 점검하고 04시 정각에 산행을 시작한다
육십령의 유래
경남과 전북의 도계이지만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서 군사 요충지이다.
지금의 육십령 마을은 1930년 경 경남과 전북을 잇는 국도가 개통되면서 생겨난 마을이며
그 이전에는 북쪽으로 두루봉 뒤 군장동(軍藏洞)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군장동은 북으로 합미봉, 남으로 두루봉 골짜기에 자리하여 옛날 군사무기를 저장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남쪽의 두루봉은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으며 적에게 위장하기 위하여 섬꺼치(꺼적데기)를 엮어서
산봉우리를 둘러 덮어 적에게 군량미 노적가리로 보이게 속였다고 한다
육십령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도둑떼가 많아 고개 아래 주막에 육십인 이상 모여야 산을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 했다고 하며. 또 하나는 이곳에서 안의 감영까지의 거리가 육십리요
장수감영까지의 거리가 육십리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또 안의에서 이 고개까지
오르려면 육십고개를 돌아오게 된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남진할 때 경남지방에는 이곳으로 제일 먼저 들어왔는데 넘어올 때에
오백여명의 아군이 이곳을 지키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한 곳이다 (함양군 홈페이지 참조)
육십령 함양쪽 표시석
함양쪽의 육십령 표시석에는 물레방아골 함양이라고 써있다.
이것은 청나라의 기행문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 지원이 조선시대에 함양 안의 현감으로
봉직시 국내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곡식을 찧는 디딜방아에 활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2003년부터 함양군내의 모든 축제를 물레방아 축제로 통일하여 개최한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4:00)
육십령 장수지역 주차장에서 100m정도 올라서니 이정표를 만나는데 예전에는 도로로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올라섰지만 지금은 백두대간이 동물이동통로로 연결되어
지금같은 이정표가 있는데 우측으로 백두대간 남진길을 이어간다.
40분 이상을 걸어 올라오니 좌측으로는 산삼 휴양림이란 이정표를 만난다.
깃대봉 약수터(04:55)
山自分水嶺의 원칙으로 걷는 백두대간을 하면서 종주하면서 등로 옆에서 만나는 샘터는 그리 흔치않다
지리산을 제외하면 미시령 구간의 상봉 아래의 샘터와, 능경봉 아래에 인풍비 단망비 샘터, 백봉령 남쪽
갈미봉의 샘터, 포암산의 하늘샘, 조령산 제3관문 약수터와, 조령산의 조령샘, 대덕산 오르기전에 만났던
북사면에 있었던 얼음골 약수터, 앞으로 가야할 지리산 아래 남원 운봉읍 노치리에 있는 노치샘,
그리고이곳 깃대봉의 약수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많이 내린 탓인지 水量은 꽤나 많은 편이다.
한 가지 아쉽다면 바가지가 없다는 점이다... 베낭에서 컵을 꺼내 물한모금을 마신다.
물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고 물맛은 참으로 맛있다
육십령에서 출발한 지 1시간여만에 약수터에 도착하여 동료산꾼들과 물한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구시봉(1,014.8m:05:10)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옛 이름은 깃대봉이었는데
2006년도에 지명을 구시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옛날 임금님이 신하나 백성들 중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땅을 하사했는데, 이를 사패지(賜牌地)라 했고,
이 땅에는 누구의 사패지라고 하는 깃대를 꽂아 놓은 데서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깃대봉은 덕유산 남쪽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가을 억새가 장관인 곳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으로, 두 나라 영토에 주둔하던 병사들이 번갈아 기를
꽂았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며 깃대봉 동쪽 물은 추상천을 지나 낙동강으로, 서쪽 물은 장계천을 따라 금강으로 향한다.
지금도 일부 지도에는 깃대봉으로 표기가 되어 있고 구시봉의 유래는 뒷면에 새겨져 있다구시봉 표시석 뒷면
구시봉 정상석 뒤에 새겨져 있는 깃대봉과 구시봉 유래: 산림청에서 세운 푯돌에는 「구시봉」이라
적어놓고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로 그 아래 주둔하던 군사들이 기를 꽂은 곳이라 하여
깃대봉이라 불렀으나, 옛날 한 장수가 이 산에 올라보니 산 형태가 구시형이라 2006. 1. 6 「구시봉」
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고 적고 있다.
구시형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구시(1) - “ ‘구덩이’의 경상도 사투리”, 구시(2) -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흔히 큰 나무토막이나 큰 돌을 길쭉하게 파내어 만든다.” 고 표기해 놓았는데,
구시봉이란 여기서 구시(2)를 두고 한 말이다.
구시봉 정상 나무에 붙어있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정상에는 표시석과 삼각점, 그리고 구급함과
전일상호신용금고에서 세운스텐레스 표지판과 예전의 북진길에서 없었던 뭔 의미인지는 모르나
국기를게양할 수 있는 국기봉을 3개나 세워놨다... 북진길에 정말 주위의 멋진 조망을 어둠속에
상상도 못하고 잠깐사이에 추위가 엄습해와서 서둘러 영취산으로 향한다
구시봉 정상 2등 삼각점(△함양21 2000복구)
구시봉 정상에 있는 응급함
구시봉 정상 아래로 내려서니 어둠속이긴 하지만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구시봉에서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는 곳에서 앞 사람만 따라가다보니...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산꾼을 반기면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곳이 민령이다
민령(岷嶺:05:40)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와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를 잇는 고개로
민령은 바로 논개의 생가와 무덤을 오가는 대간의 고갯길이다. 밋밋한 고개’라는
우리 이름인데, 소리에 따라 ‘岷’이라는 한자를 음차하여 부른 이름이다.
논개의 출생지는 고개너머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지만 묘지는 서상면 금당리에 있다.
지금에 와서는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상태여서 퇴화한 고개가 되어 길의 흔적조차 희미하다.
교통이 편리해진 지금에야 이곳 민령을 넘너들 사람이 없어졌으니 등로가 제구실을 못하므로
고개도 퇴화하여 민령을 쉽게 확인할 수조차 없으니...
눈속에서 만난 북바위(06:20)
지금이야 전북과 경남의 경계이지만 삼국시대에는 이곳이 백제와 신라의 영토분쟁이 치열한 곳이였다.
신라와 백제가 전쟁을 할 때 자기들이 이기면 이곳에서 북을 쳤다고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북바위 이정표
백두대간 북진길때의 북바위의 모습(2009.01,04)
장계는 예로부터 산수가 잘 어우러진 곡창지대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그런지 호남 좌도 농악의 이름난 상쇠들이 많이 배출됐던 고장이 장수라고 한다.
이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전망이 트여 함양군 서상면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고, 서북쪽엔 오동저수지와 장수군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어둠속에 5년전 북진때의 상상을 하니 좌쪽 금당리 추상,추하 마을이 손에 잡힐듯하다.
논개의 출생지와 사당은 우측 장수군 궐촌(주촌) 마을에 있으나,
그 무덤은 경남 함양에 있으니, 진주에서 옮기던 혼백이
이 고개를 넘지 못할 까닭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영취산과 육십령의 중간지점 이정표
이정표 옆에는 여인네의 젖가슴처럼 볼록하게 나온 바위가 눈에 쌓여있다.
지금부터는 사람의 키보다 더 큰 산죽의 터널을 지나가는데 여기저기 할키니 상당히 성가시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서서히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오늘은 짙은 박무로 일출은 애초부터 포기했다.
하지만 일출이 시작되기 직전이라 그런지 날씨는 생각보다도 상당히 춥다
977.1봉(07:20)
날이 밝아오지만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산죽길을 지나니 멋진 암릉이 나타나는데 977.1봉이다...
우회길도 있지만 고집을 부리며 암릉으로 올라선다
정상에서 내려와 다시 편안한 등로를 걷는다
설날이 지나면서 해가 많이 길어진 모양이다.
7시 반 정도 되니까... 천지사방이 훤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호젓한 산죽길을 걷는데 주위의 상고대가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낼 만큼 환상 그 자체이다.
덕운봉 갈림길(956m:07:45)
덕운봉 갈림길 정상에 오니 허기가 지기 시작하는데 마땅히 아침밥상 차릴곳이
별로 보이질 않는다... 겨울산행은 이 부분이 가장 큰 고민이다.
다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조금을 더 걸어간다
논개 생가 갈림길(08:05)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인데 논가 생가지이다.
충절의 여신 주논개
1574년 영취산 북쪽의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있다.
대간에서 나고 대간에 묻힌 것.논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보통 경상우도의 병마절도사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로,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촉석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잔치에 참석하여 일본 장수인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
논개의 영정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제2차 진주성 싸움).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
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詩人 변영로님의 논개
논개 생가지 이정표가 있는 넓은 공터에서 비닐하우스 움막을 짓고
여기서 아침상을 펼친다... 50여분간 따뜻하게 아침을 먹고나니 한결낫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 비닐하우스 움막을 걷는사이에 선두는 영취산으로 도망을(?) 가고...
영취산(靈鷲山:1075.6m:09:30)
전북 장수군 계남면과 경남 함양군 서상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영취산(靈鷲山)은 원래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주위에 있는
산으로 부처님께서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 얻은 뒤 설법을 하시던 곳이
영취산(영축산이라고도 함)이다. 양산 통도사 뒷산이 인도의 영취산과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영취산이라고 하며 통도사 대웅전(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상이 없다
영취산 하면 철쭉으로 유명한 여수의 영취산이나 양산 통도사를 외호하고 있는
영취산을 떠올리며 대간상의 영취산은 산꾼들 사이에 그다지 회자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오르는 영취산 또한 예사롭게 여길 수 없다.
특히 백두대간의 학습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백두대간은 山自分水領 원칙에 따라 이어진다.
그리고 대간은 정맥과 함께 10대강을 나눈다 10대 강 가운데 3개의 강 유역을 나누는 곳은
한남금북정맥이 갈라지는 속리산 천왕봉과 금남호남정맥을 낳는 이 곳 영취산 등 단 두 곳뿐이다.
속리산 비로봉은 낙동강, 금강, 그리고 한강(남한강)의 유역을 가르며, 영취산은 낙동강, 섬진강, 금강의 유역을 나눈다.
그래서 이 두 곳을 三派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취산 표시석 뒷면
넓은 공터로 이루어진 영취산 정상에는 돌탑이 있고, 삼각점(함양 309, 2002 복구)이 있다.
그리고 전일상호신용금고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1,075.6m/(북쪽)깃대봉 7.5km, (서쪽)무령고개 0.4km,
(남쪽)백운산 3.8km'라 적혀 있고, 또 하나 서부지방산림관리청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육십령 11.8km,
중치 8.2km'라 적혀 있다. 그리고 장수군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낙동강, 금강, 섬진강 분수령'이라 적혀 있으며,
육십령 약 11km(7시간), 장안산 약 3.5km(2시간), 백운산 약 3.5km(2시간), 샘터(무룡궁) 약 0.5km(30분)이라 적혀 있다.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면 이 비는 정상석과 부딪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즉 낙동강 유역으로 흘러들어가야 할 빗물이 정상석과 부딪쳐 섬진강 혹은 금강유역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섬진강에 스며들어야 할 너무나도빗물이 금강 혹은 낙동강 유역으로
스며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운명은 뜻하지 않게 바뀔 수 있다” 는 인간세상의 원리와 너무나도 닮았다.
영취산 정상 삼각점(함양 309, 2002 복구)
영취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범여 개인적으로는 이곳 영취산이 참으로 감회가 깊은 산이다.
내가 백두대간이란 것을 처음 알려준 산이기도 하다.
사연은 이러하다... 옛부터 산을 좋아하긴 했지만 맨날 가는 산이라곤 북한산이다.
1년에 40번정도는 북한산을 갔을정도이니 알만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도봉산이였는데
같이 다니는 친구가 갑자기 김포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삶이 바뀌어 버렸다.
그러던 중에 어느 친구가 백두대간 한번 가보자고 하여 따라나선 첫 구간이 이곳
영취산에서 육십령 구간이었다... 그땐 백두대간이 뭔지도 모르고 따라 나섰는데
그 친구는 중간에 포기하고 난 그 해(2009년)부터 지금까지 매주 산에 돌아다닌게 오늘까지 왔다.
대부분의 지도에 '무령고개'로 표기되어 있는 무룡고개는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장계면 경계에 위치해 있다.
해발 930m의 높이로서 장안산(1075.6m)과 영취산(1236.7m)이 만나는 안부의 고개다.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는 '금남호남정맥'이란 이름으로 이 고개를 거쳐서 장안산으로 넘어간다.
무룡(舞龍)은 '용이 춤을 춘다'는 뜻으로
무룡궁(舞龍宮)이라 부르는 큰 명당에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산세가 마치 용이 꿈틀꿈틀 살아서 무룡고개에서 장안산으로 올라가는 형상이라 한다.
또한 선인들은 호남인의 재질과 예기가 이상의 무룡궁의 산경에서 부터 보았다는 것이다,
무룡궁의 산세가 힘차게 치솟아 장안산에 좌정한다. 그러므로 장안산은 호남과 호서의 조산이며 진산이다.
무룡궁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서북으로 금강의 최상류지대이며, 서남은 섬진강의 최상류이고,
동남은 낙동강의 상류지대가 된다.
장안산과 영취산을 이어주는 무룡고개는 풍수지리학상으로 입수(入首)라 표현하는데
이는 머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 무룡고개에는 연산군 때 역적으로 몰린 유자광이 참수된 후에
금부에서 그의 뒤를 추적한 결과 조상의 묘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조상의 묘소 덕분으로 왕후장상이 끊이지 않았다며 나졸을 보내 묘소를 파헤쳤다는 설이 있다.
장수군은 '무진장'이라 불리는 전북 3대 오지 중 한 곳이다.
게다가 무룡고개는 장수에서도 오지 취급을 받았으므로 그야말로 오지 중 오지인 것이다.
그러니 이곳을 찿기가 얼마나 어렵고 외졌던 곳인가를 이정도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실감하고도 남을 것이다.
금.호남정맥 분기점인 영취산
금남호남정맥 전체 개념도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가기 전 영취산에서 분기하여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인데, 금강과 섬진강, 낙동강 등 3강의 분수령인 영취산(1076m)에서 시작되어 장
안산(1237m), 사두봉(1015m), 신무산(897m), 팔공산(1148m), 시루봉, 성수산, 마이산(678m),
부귀산(806m)을 거쳐 조약봉(565m)에서 끝나고 이곳에서 다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이 분기한다.
이렇듯 금남호남정맥은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갈라지는 조약봉분기점까지
도상거리 약 65.2km의 산줄기로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9정맥 중 가장 짧은 산줄기이지만 최고봉인 장안산(1236.9m)을 위시로 1,000m급 산들이 산재해 있어
자못 웅장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진안의 명산 마이산도 지나간다.
영취산 정상 이정표
이른 새벽에는 어둠속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왔지만 아침이 밝아오면서
백두대간 등로의 상고대는 神이 만든 최고의 예술작품 그 자체이다.
날씨는 흐려 짙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등로의 상고대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자연은 참으로 위대한 스승임을 깨닫게 한다.
한가지를 잃어면 한가지를 얻게 한다는 교훈을...
오늘은 짙은 박무로 멋진 능선구경을 못하지만 환상적인 상고대를 볼 수 있으니...
호젓한 산죽길을 걷는다
선바위고개(09:40)
선바위고개에서 부터 백운산까지는 계속해서 산죽길이 이어진다
선바위는 이곳에서 우측 100m 지점에 있는 바위가 선바위인데
그 바위의 지명을 따와서 붙인 고개라고 한다
멋진 상고대는 계속해서 연출되고...
1,066봉(09:50)
정상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간의의자 2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주위에는
싸리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좌측으로 함양군 서상면 부전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계속해서 싸리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암봉(10:00)
1,066봉부터 편안하게 고도차가 별로없는 길을 걷는데 10분정도 걸으니 ‘전망좋은 암릉’이라는
표시판이 나오는데 이곳에 오르고 싶지만 지금은 온 천지가 짙은 안개로 덮혀있어 어차피
전망바위에 올랐다가 되돌아와야 하기에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좌측으로 우회하여 내려선다
호젓한 산죽길과 상고대의 멋지고 화려함에 취해 몽환적 분위기속에 걸어간다
멋진 노거수도 만나고...
산죽(山竹) 군락지
산죽은 솔잎과 마찬가지로 약알카리성으로 대나무과 식물에서 가장 작고 약성이
강하며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에 주로 자생하며 조릿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항암제, 당뇨병, 고혈압, 위궤양과 화병(火病)치료에 효과가 있으며
항암 치료로는 가지 씨앗을 볶고, 산죽 뿌리를 잘말려 다려 먹으며 좋고
산죽잎을 잘 건조하여 잘게썰어 물에 타먹으면 여름 더위에 특효라고 한다
이정표(10:10)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상고대터널...
환상 그 자체이다
암릉구간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또다시 산죽밭이 이어지고...
夢幻的 霜固臺로 인해 정신을 잃어버린 지경이다.
올 겨울에 가장 멋진 상고대 터널을 걷는다
상고대 터널을 지나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북진길에 없었던 새로 설치된
암릉 로프구간을 지나서 다시 된 오르막을 치고 올라가니 먼저간 동료산꾼들의
소리가 들리면서 백운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백운상 정상 초입에서 만난 선답자들의 시그널
정상에 오르니 백운산 정상에는 앙증맞은 오석(烏石)에 붉은글씨로 “白雲山”이라
쓴 표시석과 이정표가 있고 좌측으로 서래봉가는 코스에 시그널이 잔뜩 걸려있다.
백두대간 북진길에 이곳에서 정말 환상적인 조망을 생각하고 왔는데 아직까지
이곳은 짙은 안개로 인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백운산(白雲山:1278.6m:10:55)
백운산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와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백전면에 경계를 하고 있다.
백운산의 이름은 흰백(白), 구름운(雲)을 써서, 산이 높아서 산봉우리에 항상 흰 구름을
감싸안고 있는 산이라 뜻이다. 백운산의 물줄기는 서쪽은 백운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옥산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
쪽으로는 장안산과 괘관산, 북쪽에는 깃대봉과 남덕유산, 남쪽으로는 월경산과 봉화산 등이 보인다.
백운산을 만산홍엽의 가을 단풍과 금상첨화로 산허리마다 흐드러진 갈대와 싸리나무,
그리고 산죽이 한데 어우러져 비경의 극치를 이루는 산으로 유명하다.
백운산에서의 조망은 많은 선답자가 최고급 형용사를 동원하여 표현하고 있다.
특히 윤제학은 그의 대간 산행기에서 백운산에 올라서면“왜 백두대간이 이 땅의
등뼈인가를 털끝만큼의 의심 없이 실감하는 순간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어차피 대간을 배우러 나선 산행길, 이들 모두 백운산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임을 기대케하는 어법들이다.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봉과 남덕유산(2010.01.16 백두대간 북진때의 모습)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중봉과 끝봉의 모습(대간 북진길때의 모습)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이 선명하게 보이고, 코앞에 보이는 곳은 앞이 중봉이고 뒤에가 끝봉이다.
좌측 바로앞이 중봉과 끝봉이 보이고 그 너머로 거창의 괘관산과 또다시 그너머 지리산이 보이건만
오늘을 전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하지만 그 대신에 정말 환상적이 상고대를 원없이 봤으니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닌듯 싶다... 세상사 살아가면서 밑지는듯 사는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정상에 잠시 머물면서 또 다른 백운산을 생각해본다.
북한산의 백운대를 비롯하여 한북정맥의 백운산(포천), 한남정맥의 백운산(경기도 의왕시와 성남시의 경계),
호남정맥의 백운산(광양), 낙남정맥의 백운산(사천), 낙동정맥에서 가지를 친 밀양 백운산 등등 수없이 많다.
국토지리 정보원에 수록된 약 6,000여개의 산 가운데 백운산이라 명명되는 산만 해도 약 4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수많은 백운산이 존재하지만 백두대간 상에는 오늘 오르는 백운산이 유일하다.
왜 백운이라고 불리워졌을까? ‘白雲’이라는 말은 ‘밝은’의 음차에서 유래되었다.
산 이름에 ‘밝은’이 이토록 많은 이유는 옛사람들이 산을 속세에 광명을 주는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마다 산신령 운운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백두산, 태백산, 소백산, 함백산 등도 결국 같은 ‘신성하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동료산꾼들과의 인증샷
백운산 정상에서 후미의 동료들을 기다리면서 대간길에서 상상도 할 수없는
30분간의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면서 소주에다 맥주를 말아 진하게 한잔을
하고나니 추위가 가시는 느낌이다. 여유로운 휴식에다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백운산 정상 아래로 내려오니 좌측으로 묵계암과 상연대 갈림길이 나온다.
계속해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잠시후에 암릉구간이 나오면서 우측으로 우회를 하는데 오늘은 선두에 회장님과
김포오야지님이 선두에 섰는데 다들 롱다리라 내리막길에 엄청 빠르다.
숏다리인 범여는 따라가려 하니까 가랭이가 찥어지는 느낌이다
엉터리 이정표(11:40)
아직까지 중재까지는 3km 이상이 남았는데 1.7km라고 표기가 되어있다.
산림청 관계자들은 백두대간 산꾼들을 멍청이로 아나?... 당장 고치시요
또다시 산죽 군락지를 만나면서 계속해서 급경사의 고도를 낮춘다.
오늘 처음으로 산능선을 구경한다... 짙은 박무가 조금씩 걷히면서 발 아래에 있는
함양군 백전면 중기마을이 보이고 다음구간에 가야할 월경산이 아련히 보인다.
하지만 우측에 있는 장안산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함양군(咸陽郡) 지도
함양군(咸陽郡)은 대한민국
서부에 있는 군이다. 군의 남쪽으로 지리산 국립공원이 위치한다.
경상남도의 서쪽, 지리산 북쪽에 위치한다.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된 이 지역의
서쪽에는 소백산맥의 고산 준령이 많고 덕유산·기백산·지리산 등 높은 산이 솟아 있다.
서쪽에는 팔량치(520m)·육십치(640m)의 고개가 있어 전라도와 연결된다.
남강의 상류 위천·임천 등이 흐르며, 북부의 안의분지와 남부의 함양분지는 비교적 넓은 침식분지이다.
신라 때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군(含郡)이라 하였다.
경덕왕때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치고 운봉현과 이안현의 두 영현을 두었다.
그 후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鍊使)를 두었다. 고려 현종3년(1012년)에 강등하여
함양군으로 개칭되었다가, 후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한때 현이 되었다가
1395년 조선 태조 4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예로부터 좌 안동, 우 함양으로 불리워질 정도로 선비와 충효의 고장으로
유명하며 담양, 구례와 함께 정자문화로도 유명한 곳이다
함양 출신의 인물로는 조선시대 성종때 대학자인 정여창과 문장가인 유호인이
함양출신이고, 근세에는 소설가 이외수, 축구선수 하석주가 이곳 출신다
이곳 출신은 아니지만 서상면 옆에있는 안의현감(安義縣監)으로 지낸 연암 박지원이 있다
(위키백과사전 인용)
금남.호남정맥길 - 장수군의 진산인 장안산은 지금 오리무중임다.
백두대간 북진때에 이 장소에서 본 장안산의 모습(2010.01.16)
반가온 선답자들의 시그널
중고개재(755m:12:15)
동쪽은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중기마을에 이어지고, 서쪽은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에 이어지는
고개로 조금후에 가야할 중재와 이름이 비슷해서 산행하는 사람들이나 지방 주민들도 자주 혼돈하는 곳이다
고개 동쪽 백운산 자락은 신라시대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한 영은사지를 비롯해
많은 암자가 있는데 특히 선농일치(禪農一致)에 의한 선농불교를 제창한 용성스님이
평소 선사의 지론인 선농일치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호미를 들고 세운 농장인
화과원(華果院)이 이곳에 있으며 화과원 동쪽 백운산을 넘는 고개를 절고개라 하였는데
이 절고개가 중(스님)들 많이 넘나드는 고개라 하여 중(衆)고개라 부렀다고 한다.
용성스님은 장수군 번암면출신으로 기미독립선언서 대표 33인중 한 분이다
진종(震鐘) 백용성(白龍城) 대선사(1864~1940)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탄생하신 백용성 대선사는 16세 때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화상을
은사로 혜조율사를 계사로 수도 정진하였으며 한일합방 후 국권 침탈을 일본에 대항해서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선농불교의 대각사상을 바탕으로
독립계몽운동에 온 힘을 다 기울렸다.
1919년 독립선언 33인에 만해(卍海) 한용운 선사와 함께 불교대표로 서명하여 3.1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으며 그로인해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혐의로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악명높은 서대문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 정화에 힘을 쏟았다.
1927년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 자락에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선농일치(禪農一致) 운동을
통한 민족구제 및 사원경제 자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기지로 활용하면서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다
중고개재를 지나면서 뒤돌아보니 조금전에 내려온 백운산이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
중고개재를 치고 올라 조금을 지나니 벤치 2개가 나란히 있고...
먼저 지나간 동료산꾼들의 족적이 뚜렸히 남아있는 백두대간 길
등로 우측에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좌측으론 또다른 묘지 2기를 만난 다음에 또다른 묘지 한기를 지나니 695봉이 나온다.
695봉 오르는 길은 대부분의 산꾼들이 정상을 오르지 않고 우측 옆사면으로 간다.
정상에서 90도 우측으로 꺽어지니 산죽길이 나오면서 중재가 나타난다.
중재(中峙:12:40)
경남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기마을과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를 잇는
고개로 예전에 民草들이 넘던 고개였지만 지금은 백두대간 산꾼들이나
찾는 잊혀진 고개로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가 고개를 지키고 있다.
중재라는 지명은 중기마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함양쪽으로 내려가면 길이 참 좋은데 어제 내린 눈으로 인해 차량이
마을까지 오를 수가 없기에 부득히 길이 나쁜 지지리 계곡으로 내려선다
계곡으로 내려서니 이곳에선 버들강아지가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지지계곡(知止溪谷)
이 계곡은 번암면 지지리와 장계면 대곡리 상단이 서로 면계를 이루며 영취산에서
한 맥은 경남 함양군 백전면을 거쳐 지리산으로 가고 정맥은 장안산으로 이어진
협곡에서 시작하여 지지리, 동화리,남원, 구례, 곡성을 지나 삼백리 하동포구에
이르는 섬진강의 최상류임 장안산과 백운산 사이에 위치한 10km의 계곡으로
울창한 수림과 청류수가 조화를 이뤄 사시사철 아름답지만 특히
만추의 계곡은 온통 붉어지니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는 나무 중의 하나인 고로쇠 나무에서 2~3월에는
고로쇠물을 채취해 농가의 소득을 높이고 있으며 두릅, 더덕, 도라지,
취나물, 고사리, 표고 버섯, 한봉등이 채취되고 있다고 한다
도로위엔 우리를 태우고 愛馬가 보이고하여 계곡에서 아이젠과 스패치를 벗고
간단하게 씻고나니 땀냄새도 가시고 훨씬 홀가분하다
지지계곡 옆에서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모습
743번 지방도(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 소재:13:00)
9시간의 여유로운 산행을 마치고 장비를 정리한 다음에
옷을 갈아 입는걸로 산행을 마무리 한다
장수(長水)는 장안산과 영취산이 그리고 금강, 섬진강, 낙동강이 분수삼강(分水三江)
하는 최상류로 호남정맥의 기봉이면서 호서지역의 진산은 지리산이 아니라 장안산이라
주장하는 장수 사람들... 유명인물로는 양영대군(세종대왕의 큰 형)의 세자폐위를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된 황희정승과 기생 논개, 한국 불교의 큰 별이셨던
3.1독립선언문 33인이셨던 백 용성 조사가 장수군 출신이다.
산행을 마치고 하늘마음님이 구룡포에서 직송 해왔다는 과매기와 막걸리로 한잔을 하고
후미가 다 도착한 다음에 이곳에서 가까운 수분재로 옮겨서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산도 잘타고 평소에 연장자들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며 그야말로 모범생인
노루님께서 점심식사를 스폰서하는 바람에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하늘마음님, 그리고 노루님 복받을 겨... 올 한핸 존일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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