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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18구간 - 하늘재에서 이화령까지

by 범여(梵如) 2014. 6. 2.

산행일자:  2014년 5월 31일~6월1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흐리고 무척더움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8.6km (실제거리약 21km) / 11시간 40분 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원 16명과 함께

☞ 산행코스: 하늘재-모래산-탄항산-평천재-959봉-부봉갈림길(왕복)-부봉-동암문-763봉

                  764봉-북암문-마패봉-군막터-조령(문경새재)-깃대봉 갈림길(왕복)-깃대봉

                  813봉-마당바위-선바위갈림길-제2관문 갈림길-799봉-928봉-안부-쭈구리바위 갈림길

                 절골갈림길-신선암봉-제1관문 갈림길-889봉-상암사터갈림길

                 조령산-헬기장-조령샘-헬기장-안부-759봉-헬기장-헬기장-이화령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 괴산군 연풍면

 

5월의 마지막날 밤 1주일만에 오늘밤도 베낭을 메고 백두대간길을 나선다.

지구 온난화 현상인지 아직도 6월도 되지 않았는데 한여름의 이상고온으로 인한

폭염으로 30도가 넘는 날씨에 백두대간 코스중에 가장 난코스중에 드는 신선암봉,

조령산 구간이라 체력저하와  2주전부터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려 상당히 부담스럽다

2대간 9정맥 9기맥이 끝나는 8월말까지만이라도 조금 참아줬으면 좋으련만...

 

쥔장 잘못만나 혹사당하는 내 두다리한텐 미안하지만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걸 어쩌랴... 딱 3개월만 부디 참아주면 안되겠냐?

양재역에서 대간가는 버스에 탑승하여 동료산꾼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다음에

산행대장인 진권이 아우님이 코스 설명을 하는데 어찌나 겁을 주는지...

중부 내륙고속도로 괴산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오늘의 들머리인 하늘재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하늘재에 있는 계립령 유허비(경북 문경시 문경읍 소재;03:10)

신라 아달라왕 3년(서기186년)에 개통되어 처음에는 계립령으로불리다가 조선시대 부터

하늘재(해발525m)로 불리는 곳으로서,삼국시대에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신라 경순왕의

마의태자와 적주공주가 패망의 한을 품고 이 고개를 넘었다는 전설고 함께 주변 곳곳에 오랜

역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충북의 ":자연환경명소100선" 중

10걸로 지정된  곳이다

 

좌.우측에 관음리(문경)와 미륵리(충주)가 있는데 佛家에서는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現世라고하고 미륵보살이 상주하고 계시는 곳을 來世라고 하는데 현세와 내세를

넘나드는 하늘재...마치 하늘이 낮으막한 곳에서 내려앉은 듯하다

하늘재에 버스가 도착하니 야심한 새벽녘에 하늘재 산장의 가로등만이 산꾼을 반긴다

 

지난번 유쾌하지 못했던 하늘재 산장에는 적막감만 감돌고 개쉬끼가 이방인을 향해

 

마구 짖어대는데 쥔장이 미우니 개쉬끼도 미운 느낌이 든다

 

버스 박사장님이 타주는 커피한잔 마시고 몸을 푼 다음에 동료산꾼들과 산행을 시작한다

 

하늘재 표시석

 

하늘재에서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서 1주일전에 만났던 표시석을 만난 다음에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우측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만나 이화령으로 향하는데

 

좌측의 오미자 농장에서 붙은 놓은 경고문구가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5년전 북진길에 국공파 단속요원들을 피해 이곳에 한참이나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모래산(03:25)

 

5년전 북진길에서는 보지못했던 뜬금없이 모래산이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지도상에는 766봉으로 표기가 되어있는 곳이다

 

이정표를 지나서 내려오는 우측으로 어둠속에 모래처럼 보이는 능선이 나온다.

 

이정표(마패봉8.0km 부봉삼거리4.0km  하늘재0.8km) 가 서있다

 

사실 모래가 아니고 모래보다 굵은 마사토이다

뿌리가 훤히 들어나 있는 갈참나무를 지나 계속해서 오름길을 오르는데

 

아직까지 몸뚱아리가 예열되지 않은 상태인지 초반부터 무척이나 힘이든다.

 

등로 곳곳에는 ‘내무부’라는 콘크리트 말뚝을 많이 만나는데

 

이곳은 월악산 국립공원 표시를 나타내는 표시석인듯 싶다

 

통천문(通天門) ?

 

오름길이 계속된다... 어둠속에 멋진 암릉등을 만나는데 통천문처럼 생긴 암릉도 만난다

 

이정표(03:50)

이정표(마패봉 7.1km, 부봉삼거리 3.1km, 하늘재 1.5km)를 만난다

이정표를 지나 10분정도를 오르니 암릉구간에 고사목 한그루를 만난다.

 

이곳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물한모금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다

 

탄항산(炭項山:856m:04:05)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월항삼봉(月項三峰)이라고도 부르며 월악산국립공원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가까이 마의태자 의 전설이 깃든 미륵사지와 고대 삼국시대부터 호서와 영남을

잇는 하늘재를 감싸고 있는 아기자기한 산세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세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 하여 삼봉이라 부르나 예전에 산삼이

많이 난다 하여 삼봉(蔘峰)이라 부르기도 하며,또한 탄항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옛날에는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산 남쪽 월항마을 사람들은 봉화봉이라고 부르기도 한 산이다.

 

동국여지승람 문경조에 탄정산(炭頂山)으로 표기되었던 탄항산은 세종실록지리지

문경조와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에 탄항산으로바로잡아 놓아 지금까지 탄항산으로 불리고 있다

북으로 수려한 부봉과 포함산이 웅장하게 서있어 백두대간 종주자들에 의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산 정도에 불과한 산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아름드리 장송들과 암봉들은 나름대로 산행의 재미를

만끽해 주기에 충분한 산이다. 

 

정상은 노송과 절벽,괴석 등으로 어우러지고 정남으로 주흘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백두대간상의 하늘재 직전에서 남쪽으로 들어간 계곡이 아름답고, 정상 서편에서

북쪽으로 뻗은 칼바위등길은 너럭바위, 홈바위, 칼바위 등으로 어우러져 스릴 있는 하산 길이다 

탄항산 정상 이정표

 

평천재(平天峙:04:25)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에서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를 잇는 고개로

월항재라고도 부르면 탄항산과 부봉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이곳은 대간 산꾼들보다는 봄에 산나물 채취꾼들에게 알려진 고개이다

평천재의 고개 이름이 달목재(동쪽의 평천리에 월항마을 달메기말=달목말이 있다).

탄항재(炭項재), 숯목재등으로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동쪽의 문경읍 평천리 월항마을쪽에서 평천재-동암문을 걸처 서쪽의 동화원과 조령으로

이어지고, 북쪽의 미륵리와 수안보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평천재에서 임도파들은 동암문까지 지름길로 갈 수 있는 구간이다

평천재에서 상당히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급경사 암릉에는 5년전

 

북진길에서는 없었던 암름길에 철계단이 설치가 되어있다

 

주흘산 갈림길(959m:04:50)

 

이정표(마패봉5.0km 부봉삼거리1.0km 하늘재3.6km)가 있다

 

지도상에는 959봉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여명이 밝아 오면서 맞은편에 있는 부봉(釜峰)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주흘산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문경에서 설치한 구조 안내판이 나온다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철게단 사이의 멋진 암릉... 환상 그 자체다

 

멋진 암릉구간에서 부봉을 바라보면 동료산꾼들과 인증샷을 남긴다

 

암릉 사이의 철계단을 지나서 내리막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오르니 부봉삼거리가 나온다

 

부봉삼거리(05:20)

 

부봉삼거리에 도착하여 백두대간 능선에서 500m정도 떨어져 있는 부봉으로

 

향하는데 대장을 비롯한 동료산꾼 어느 누구도 가지않고 조령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코뿔소님과 둘이서 부봉삼거리에 베낭을 벗어놓고 부봉으로 올라간다

 

부봉으로 오르는 암릉구간

 

부봉(釜峰:917m:05:30)

문경시 문경읍과 충주시 수안보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주흘산의 제2 봉우리로 정상엔 무명묘지 한 기가 있다.

주흘산에서 보면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가마솥(부:釜)봉이라고

붙혀진 지명이란다.

 

제2관문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시루봉, 가매바우, 가매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매봉은 가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봉은 여섯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특히 내주흘 능선에서 한눈에 부봉을 바라볼 수 있으며 절경이다.

부봉 밑에는 굴이 있어 6.25전쟁 때에는 피난처로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문경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 뒤의 암산으로 6개의 봉우리중 제2봉인

부봉(917m)가 가장 높으며 정상에는 표시석과 무명묘지 1기가 있으며

좌측으로 동화원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

부봉에서 동화원 가는 이정표

백두대간에서 500m 떨어진 부봉을 제1봉이라 하고 높이는 917m,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다음 차례대로 이어져 조곡관에서 가장 가까이 보이는 봉이 제6봉이다.

제2봉은 933.5m, 제3봉이 911m, 제4봉이 923.9m, 제5봉이고 사자바위가

있는 제6봉이 916m이다. 우리들이 부봉이라고 흔히 부르는 봉이 제1봉이다.

2봉이 가장 높지만 백두대간과의 관계 때문일 것으로 본다

 

부봉에서 맞이하는 일출

 

부봉 삼거리 아래에서 해가 뜨긴 했지만 저 멀리 포암산 뒤로 솟아오르는

 

일출은 환상 그 자체이다... 짜릿하게 다가오는 환희,

 

조령으로 도망간 산꾼들은 모르리라

 

특히 부봉의 자태는 단연 압권이다.

‘白雲抱幽石(백운포유석)

흰 구름이 바위를 안고 있다 詩와 禪을 결합하여 자연을 곧잘 노래한 것으로 알려진

당나라 寒山의 詩 한 구절로서 深山幽谷(심산유곡)의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 보는 부봉이 이러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다만 오늘은 날씨가 청명하니

碧空抱幽石(푸른 하늘이 바위를 안고 있다)라고 해야 할 듯이다.

그러나 하늘에 구름이 조금 걸려 있거나 옅게 흐린 날씨면 부봉은

영락없이 白雲抱幽石의 모습일게다.

산속에서 도를 추구하는 신선들에게 딱히 어울리는 경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오늘의 전 구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신선봉이 마루금 밖에 서 있는 것일까!

부봉에서의 인증샷

 

부봉을 외로이 지키고 있는 무명묘지

부봉에서 바라본  주흘산의 모습

 

다시 부봉삼거리(850m:05:40)

 

왕복 20분에 걸쳐서 부봉 정상을 구경하고 내려오니 

오늘 후미그룹으로 오는 김포패밀리 일행을 만나서 같이 조령으로 향한다

 

부봉 삼거리에서부터 조령(조령3관문)을 지나 깃대봉 아래까지는

 

계속해서 이렇게 조령산성터와 나란히 대간길을 걸어가는데 이곳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군사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동암문(東暗門:05:45)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역이었던 이곳 1,500여년 역사가 흐르는 곳으로

동쪽에 있는 암문이라고 해서 동암문이라고 부른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였던 온달장군이 한강유역을 두고 치열한접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부봉과 백두대간 능선(마패봉~동암문)사이의 계곡이 달매기골이며, 이 계곡의 길을 따라 오르면

백두대간 길에 설치된 동암문을 만나며, 동암문에서 부봉1봉쪽으로 오르면 제2관문 계곡(이모모리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달매기 고개이다

 

달매기 고개는 동화원에서 시작되는 달매기골이나 제2관문에서 시작되는 이모모리골을 따라 올라 

문경읍 평천리 월항(달매기)으로 가는 길로서 달매기골과 자연부락명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

 

동암문은 동화원에서 부봉1봉 쪽(서쪽)으로 달매기골을 따라 오르면  백두대간 상에 축조된

암문(暗門)은 일종의 비밀통로로서 평상시에는 성벽과 같이 막아 두었다가

필요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고구려의 산성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성(城)을 에워싸 적에게 기습 공격을 가할 때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동암문이란 동쪽에 있는 암문으로 새벽에 지나온 평천재에서 이곳까지

등로가 연결되어 있어 가끔 임도파들이 이용하는 길이기도 한 곳이다

동암문 아래에서 비박산꾼 4명이 플라이만 쳐놓고 비박을 하고 있다.

이곳부터는 고도차가 거의 나지않는 육산(陸山)으로 편안하게 대간길을 걷는다.

낙동정맥과 한강기맥길에서 만났던 일제시대에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소나무에 칼자국의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 70년도 넘은 아픈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30분 정도를 걷다가 휴식을 취하려고 베낭을 내린다

 

764봉(06:20)

 

동암문에서 35분정도 걷다가 조그만 봉우리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아무도 다니지

 

않는 봉우리 정상에 조그만 돌덩리에다가 누군가가 ‘모봉 760m’라고 써놨는데

 

이곳은 지나치기 좋은 곳이다. 왜냐하면 능선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옆사면으로 치기에...

 

오랫만에 오신 김포대님

 

김포패밀리 일원인 김포대님이 거의 6개월만에 같이 대간길을 걷는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등로에다 막걸리 한잔을 올리면서

 

산왕대신에게 무사산행을 기원하는  예를 올리는데 상당히 진지하다

 

祭를 끝내고 막걸리에다 과일과 초콜렛을 나눠먹고 휴식을 취한다

 

일제시대의 아픈 과거가 그대로 남아있는 대간길

 

70년도 넘은 일제 강점기의 대동아 전쟁 무렵 일본은 전쟁 물자가 모자라자

 

우리나라 산하의 소나무에 흉터를 내면서 송진을 채취하였다고 한다.

 

그 아픔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간길...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6년동안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은 어떠한가

 

주변국들에 사죄는 커녕 갖은 망발을 일삼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라는

 

자는 반성은 커녕 또다시 군국주의 부활은 꿈꾸고 있으니...

 

등로에서 만난 표식이 없는 삼각점

 

다시 조령으로 향하는 길을 떠난다

 

스타소나무

 

북암문(北暗門:06:45)

넓은 안부로 내려서는데 이곳이바로 북암문이다

좌측으로 동화원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뚜렸히 보인다

 

북암문은 동화원에서 마패봉으로 오르는 골짜기인 부야문골(또는 북암문골)을 따라

 

가다보면 북암문(또는 북문)을 만나는데 이또한 마패봉에서 하늘재 방향으로 뚝 떨어진

 

백두대간상에 설치된 조령산성의 북문으로서 이 북암문은 동화원에서 충주시 수안

 

보면 미륵리의 지방도597호선의 지릅재로 넘어가는 길목에 축조된 석문이다

 

북암문의 이정표

동화원(桐華院)은 지금부터 약 500여년前 密陽朴氏가 처음 정착한 이래 30여戶의 民家가 형성되었으며

5~6戶의 客主와 院이 있던 곳으로옛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한잔의 술과 음식으로 즐겨 쉬어가던 곳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동학 봉기 이후 산적들의 출몰에 여러 길손은 이곳 동화원에서 며칠을 쉬면서

큰무리를 이뤄 安全하게 지나다녔던 곳이기도 였다고 한다.옛 院은 통상 하루 보행길 參拾里 간격으로

있었으나(新東國與地勝覽), 이곳 문경새재는 조령원(3.5Km)ㅡ>동화원(3.5Km)ㅡ>신혜원(3.5Km)으로

십리(拾里)마다 院이 있었는데, 이는 이곳 문경새재가 운송및 지리적 여건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산적들의

횡포에도 그 영향이 있었다 한다.
 
또한 동화원은 교통취락 成立에 경제적인 배경에 依한, 驛, 院, 渡, 中의 一部로서
시장 취락형태의 店, 幕, 酒家, 客主, 旅閣을 형성하고 있었던 곳이다 

북암문을 가로질러 조령성의 흔적을 따라서 오르막으로 오른다

 

능선으로 오르니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이 아련히 보인다.

 

월악산(月岳山)

달이 뜨면 주봉인 영봉(靈峰·1097m)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문헌에는 삼국시대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또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무산되어 ‘와락산’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름만큼이나 산이 높고 그 세(勢)가 험악해 설악산, 치악산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악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천혜의 지형 덕분에 예로부터 월악산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도 많았다.

지금의 충북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과 경북 문경시 일대를 말하는 중

원(中原)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중원을 장악하는 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유 때문이다.

후백제의 견훤은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무산됐고 몽골 침입 때 월악산 일대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동학농민전쟁 때 관군에 패퇴한 서장옥(전봉준의 스승)이 숨어든 곳도 월악산이었고, 광복 후

빨치산 마지막 잔당들이 최후를 마친 곳도 이곳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산 주변엔 많은 역사적 상흔과 전설이 서려있다.

풍수학적으로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충족시키는 곳이 명당으로 불린다.

그런 면에서 충주호를 끼고 4개 시·군에 걸쳐 있는 월악산 일대

곳곳은 대부분이 명당 후보지라고 볼 수 있다.

 

봉우리 높이만 150m. 하늘을 찌를 듯 기운차게 솟아있는

봉우리는 ‘한국의 마테호른’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또 영봉은 보는 각도에 따라 진안의 마이산처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고도 한다.

그래서 ‘네 얼굴을 가진 봉우리’로도 불린다. 북서쪽에서 보면 쫑긋한 토끼귀,

동쪽에서는 쇠뿔, 남쪽에서 보면 거대한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보는 듯 하다고 한다.

조금을 더 올라서자 급경사에는 철계단이 나타나는데 주흘산이 나타난다.

 

철계단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맞은편에 있는 주흘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시작부터 끝까지 주흘산을 바라보며 산행을 하는데 왜 주흘산이 문경의 眞山인지 알것같다

 

철계단을 지나서 나무 계단이 나타나고 잠시후 우측으로 사문리 탐방지원센터 갈림길이 나온다

 

사문리 탐방지원센터 갈림봉(910m:07:10)

사문리(寺門里)는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마을로 면소재지에서 3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미륵리

방향으로 2㎞쯤 올라가면 신선봉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마을은 한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 마을 자리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하며

지금도 절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사문리 탐방지원센터를 올라서니 넓은 안부 능선이 나온다

 

마패봉 정상가는 길에서 만난 돌탑

 

신선봉 가는 길

 

마패봉(馬牌峰:927m)

문경시 문경읍과 충주시 수안보면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암행어사

박 문수가 조령 제3관문 위에 쉬면서 마패를 관문 위의 봉우리에 걸어 놓았다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지도상에는 마역봉(馬驛峰)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경북 문경지역에서는 마패봉으로 부르고 충북 괴산지역에서는 마역봉으로 부른다

 

마패봉은 제3관문(鳥嶺關) 북쪽에 있는 봉우리로 마역봉(馬驛峰) 또는 마패봉(馬牌峰)으로 불리며,

제3관문(鳥嶺關)에서 시작된 산성은 마패봉으로 연결되고 마패봉에서 북암문, 동암문을 거쳐 부봉까지 이어진다.

 

이 마패봉은 깃대봉, 조령산, 백화산, 주흘산, 부봉, 월악산, 금수산 등 주변의 아름다운 산들이 

모두 조망되는 백두대간상의 전망대로 포암산에서 하늘재로 내려선 백두대간이 북암문에서

마패봉을 헐떡이며 올라서서는 주변의 절경과 함께 잠시 쉬었다가 조령관으로 방향을 꺽어버리는데 

이 마패봉에서 칼날같이 빠져나간 능선끝에 신선봉이 자리잡고 있다

 

5년전 대간 북진길에 괴산군에서 설치한 마역봉(馬驛峰)이라 써여진

 

검은 오석(烏石)으로 된 표시석은 온데간데 없고 초라한 깨진 표시석만 보인다

 

이곳도 지명 때문에  지역감정이 생겨서 없애버리지는 않았는지...

 

지난번 남덕유산 옆에있는 서봉(장수 덕유산)의 표시석처럼...

 

마패봉에서 바라본 신선봉의 모습

신선봉(神仙峰:967)은 충주시 수안보면과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백두대간 마패봉에서 1.3km, 수안보 온천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는 산으로

괴산 35명산에 들만큼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란다

산세가 아름답고 암릉으로 이루어져 산행의 묘미를 더해주는 곳으로 신선봉의

옛 지명은 할미봉이라고 하며 지금도 이 지역 주민들은 할미봉으로 부르고 있다.

할미를 닮은 할미바위가 있어서 붙혀진 지명인데 지도상에는 신선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패봉 정상에서

 

마패봉에서 조령3관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암릉길이 시작된다.

 

선바위(07:30)

선바위를 지나 급경사의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백두대간 등로 가운데에 무명묘지 1기가 있다

 

편안한 등로로 내려서니 오미자 터널이 나오는데 저수령과 벌재에

 

있는 것과 똑같이 만들어놨는데 이 곳에 있는 오미자는 잘 자라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위치 선정이 잘못된 듯 싶다...이것도 전시행정이 아닌지...

 

군막터(軍莫址:07:45)

 

예전에 조령관을 지키던  지키던 군사들이 대기하는 장소란다.

 

군막터를 지나  좌측 조령3관문 휴게소 아래에 먼저 도착한

 

동료산꾼들이 아침밥상을 펼친 곳으로 향한다

 

아침만찬(07:50~08:50)

 

오랜만에 여유로운 아침밥상을 펼치는데 오늘은 우리와 다른 산악회에서

 

북진을 하는 천리마님께서 부평에서 유명하다는 인동주를 가져와서 주신다

 

지난번에 봉화산 구간에서 너무나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연거푸 4잔을

 

마시고 거기다가 휴게소에 산 동동주 2잔까지... 아침 밥숫갈은 들지도 않았는데

 

배가 부르다... 그래도 산행은 먹는만큼 간다하지 않았던가

 

동료산꾼이 가져온  소불고기에다 억지로 도시락을 다 먹는다

 

천리마님 인동주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1시간 가량 여유로운 아침만찬을 즐긴다음 다시 베낭을 멘다.

 

좌측으로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길 100選에 선정된 문경새재길이 보인다

 

 

문경새재는 전 구간이 흙길이다. 우리나라의 부흥시킨 故 박정희 대통령하면

수식어로 따라 붙는데 박 대통령께서 이곳만은 시멘트 포장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문경새재 옆으로는 계곡과 수로가 있어 언제든지 손발을 닦을 수 있다.

뙤약볕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우거진 숲도 걷는 재미에 한몫을 한다.

이처럼 수려한 자연경관 덕에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뿐 아니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選'과 명승32호로도 지정됐다.

낮은 물론이고 늦은 밤에도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다.

상상만으로도 운치 있는 풍경이다. 문경새재는 제1관문인 주흘관을 시작으로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으로 이어진다.

전체 길이는 6.5km. 일정이 빠듯하다면 1관문이나 2관문까지만 걸어도 좋다.

문경새재도립공원에 들어서면 자연생태전시관, 사계절썰매장, 새재스머프마을,

옛길박물관 등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들 중에서 옛길박물관은 과거길,

여행길 등 조선시대 길과 얽힌 문화를 재조명해놓았다.

1708년에 축성된 제1관문 주흘관을 지나면 왼편에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이 나온다.

'태조왕건', '대조영', '대왕세종' 등 내로라하는 사극은 죄다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운이 좋으면 실제 촬영 장면을 볼 수도 있다.

이곳에서 약 2.5km를 더 걸어가면 1594년에 축성한 제2관문 조곡관이 나온다.

가는 길목에는 고려와 조선시대 숙식을 제공하던 국영여관인 조령원터, 일제가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V자로 파놓은 상처 난 소나무, 조선 후기에 세워진 산불됴심비,

조선시대 신구 경상 관찰사가 업무 인수인계를 하던 교귀정 등이 있다

경북 문경에 소재한 문경새재는 영주 죽령, 영동 추풍령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고갯길로 꼽힌다.

5백여 년간 문경새재를 넘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중에는 입신양면을 꿈꾸는 청춘도 있고, 거상을 꿈꾸며 봇짐을 메고 다녔던 보부상들도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한양까지 추풍령을 넘으면 보름, 죽령을 넘으면 열엿새가 걸렸다고 한다.

문경새재는 열나흘 정도면 너끈히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지름길인 셈이다.

그런데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에게 문경새재는 지름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낙방하고, 죽령은 대나무 미끄러지듯 낙방한다는 징크스가 그것이다.

 

문경새재는 거리가 짧은 만큼 길이 험하고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조령(鳥嶺)이라 불리기도 했다.

 다른 뜻으로 백두대간 조령산 마루를 넘는 고개란 의미도 포함된다.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라는 설도 있다.

조령산성의 동문인 동암문을 만나게 되고, 이 동암문은 하늘재, 월항마을로 연결되는 길목이었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의 조령산 를 넘는 재이다.

조령성(鳥嶺城:08:50)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새재 정상 마안부에 위치한다.

선조 초에 쌓고 1708년(숙종 34)에 중창하였으며 ‘영성’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이라고도 한다.

1907년 훼손되어 홍예문 일부와 석축만 남은 것을 1975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곳은 북쪽의 마패봉과 남쪽의 깃대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이 마주보며 소멸하는 고개마루로

앞쪽(충북 괴산군 연풍면)은 비교적 좁은 계곡부이고 뒤쪽(경북 문경시 문경읍)은 넓고 편평한 편이다

 

임진왜란중에 영의정이었던 유 성룡의 제안에 의해 선조27년(1596)~30년(1600)에

축조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 많이 붕괴되었으며 숙종 10년(1684년)에 이르러

조령의 설관 문제가 논의되어 숙종 35년(1709년)에 조령산성이 축조되면서

제1관문(주흘관), 제2관문(조곡관 혹은 조동문), 제3관문(조령관)을 설치하였다.

제1관문 양쪽에 뻗은 성이 초곡성이고 제2관문 성은 중성 제3관문인 이곳이 조령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1872년 지방도에 나타난 조령산성모습.

주흘관이 하문, 조곡관이 중문, 조령관이 상문으로 표시되어있고,북암문, 동암문도 표시되어있다.

여지도의 모습조령산성은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문경새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문경새재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북쪽의 마패봉(925m), 동쪽의 부봉(917m), 주흘산(1075m), 서쪽의

깃대봉(812.5m), 조령산(1,026m)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곽은 3곳에 위치한 관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다. 

각각의 성곽은 크게 문루와 이와 연결되는 평지성, 평지성과 연결되어 좌·우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루 아래에는 모두 홍예문을 두었고, 평지성은 매끈하게 다듬은 입방체형 석재나 면과 모서리를 다듬은

성돌로 바른층쌓기를 하였고, 산성은 20~60㎝ 내외의 석재로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문루의 명칭은 1·2·3관문에

걸려있는 현판에 따라 각각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라 하고, 산성의 명칭은 초곡성, 중성, 조령성이라 하겠다.

산성의 규모는 초곡성(草谷城) 2,270m, 중성(中城) 40m, 조령성 899m 정도이다. 이 외에 북암문과 동암문에도 각각 333m, 750m 정도의 성벽이 있다.

 

부대시설로는 동암문, 북암문, 포루, 우물터 등이 있다. 그런데 문경새재와 관련된 각종 고지도에는

이외에 동창, 산창 등이 표기되어 있고, 최영준은 1관문 뒤에 조령관, 별장영, 산창, 병영, 무기고, 마당

등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놓았다.1) 이것은 곧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들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현재 이들이 위치했던 곳에는 KBS 촬영장이

들어서 있으며 이로 인해 옛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將向大丘覲親(장항대구근친) / 徐居正(서거정)

 

崎嶇鳥嶺似羊腸 꾸불꾸불 새재 길 양장 같은 길
瘦馬凌兢步步僵 지친 말 부들부들 쓰러질 듯 오르네
爲報行人莫相怨 길 가는 이 우리를 나무라지 마시게
欲登高處望吾 고갯마루 올라가서 고향 보려함일세

 

조령약수 앞에있는 돌에는 서거정의 詩 한수가 쓰여있다

 

문경새재(650m)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고개로 조령(鳥嶺)이라

부르며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 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울창한 고개로서

새들도 쉬었다가 넘었다는 고개 정상에는 조선 숙종 34년(1708년)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館)이 산꾼을 반긴다

 

경상도 문경에서 새재로 오르는 길에는 조선시대에 나그네의 숙소였던

‘원터’와 조선조 산불을 막기위해 세워진‘산불됴심’ 비가 세워져 있으며

옛날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넘나드는 유서깊은 길이였다.

 

추풍령을 넘어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 하여

금기가 있지만 새재를 넘으면 장원급제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단다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아주 중요한 고개로

사회 전반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중앙집권제를 실시한 조선왕조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X자형으로 9개

대로를 국도로 설치하였으며 그 중에 제4로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천혜의 요새였던 문경새재가 임진왜란(1592년) 당시 상주를 치고 거침없이

문경새재로 넘어온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천혜의 요새인 이곳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무사히 넘은 다음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이 고니시 유키나카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이 같은 연유로 약 6.5km 거리에 이르는 협곡 중간에 1594년 제2관문이

조곡관을 세우고 훗날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3관문인 이곳을 세웠다.

조령약수(鳥嶺藥水)

조선 숙종34년(1708년) 조령성 축성시 새재정상(650m)에서 발견된 약수는

과거급제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을 넘나들 때 갈증을 해소 시켜주는

유명한 약수터로 사시사철 솟아올라 옛날부터 이 약수를 즐겨 마시면

장수하는 백수령천(百壽靈泉)이라고 한다

조령약수는 명성에 비해서 초라하기 그지없다

 

가뭄탓인지 약수는  메말라 있다... 겨우 기다려 약수맛을 보고 깃대봉으로 향한다

 

조령 산신각(山神閣)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으며,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신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 하는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 불교의 토착화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조령에서 식사를 마친 다음에 이곳저곳을 두루 살피고 다시

 

대간길을 나서는데 아침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깃대봉 갈림길(09:17)

깃대봉 갈림길에 도착하였는데 이곳 역시 동료산꾼들은 그냥 지나치는데

나와 코뿔소님만이 베낭을 벗어놓고 깃대봉으로 향한다

 

깃대봉(835m:09:20)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위치한 봉우리로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봉우리로 치마바위봉 또는 솔대배기라고도 하며

지명유래는 임진왜란때

 

신립장군이 깃대를 꽂았던 자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깃대봉에서

망치등(조령원터뒤 능선)으로 그리고 마성으로 연결된다

봉우리 아래에는 치마바위가 있고 능선으로 넘어가면 조령산 휴양림이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베낭을 벗어놓은 갈림길도 되돌아오니 후미팀이 기다리고 있다. 

 

813봉(09:25)

 

깃대봉에서 되돌아와  오르막을 오르니 삼각점이 있는 813봉이 나타난다

 

삼각점은 글씨가 마모되어 제대로 식별을 할 수가 없다

 

마당바위(09:30)

 

마당바위 정상에서

 

주흘산의 멋진 전망을 감상하고 다시 내려서니 편안한 안부가 나온다

 

마당바위(09:45)

 

마당바위에 설치된 안전표시등

 

치마바위골 갈림길(09:50)

 

서서히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어느 산답자의 산행기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구간이 40군데도 넘는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오늘 산행구간중에 가장 힘들다고 하는 신선암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주흘산의 모습

주흘산 이라는 뜻은 우뚝선 우두머리산 이라는 말로 주변에 대미산과 조령산등 천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하지만 그중에서도 산세가 힘차게 뻗어있어 주변 산들을 호령하는 산으로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인 중악(中嶽)으로 우러러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스런 영산(靈山)으로

받들어 왔던 곳으로 문경읍을 감싸고 있는 문경의 진산으로 주흘산 최고봉은 1106m의 영봉 이다.

하지만 주봉은 영봉보다 낮은 1,076m인데 이곳이 주봉(主峰)이 된것은 산세가 막 비상하려는 학의 모양인데

이곳 주봉이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 이라고 한다. 또한 주흘산에서 이곳의 조망이 가장 좋은데 그래서 높이에

상관없이 이곳을 주봉으로 삼았다고 한다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을 보면 문경의 지명

주흘산으로부터 지어진 이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주흘산은 영남에서 서울 가는 방향으로 달리다가 영남의

제일비경지인 진남교반의 고모산성을 돌아서면 우뚝하게 솟아나있다.

1,000m 정도의 아름다운 산이다. 맵시 있는 여자 같기도 하고,

절세미인이 단장을 하고 앉은 듯 단정한 산이다.

좌우대칭이 어우러져 있고, 내리 뻗은 품세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기도 하다

 

산 모양이 정자관(程子冠)처럼 생긴 것도 문경의 지명생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자관은 모자인데, 모자를 옛 우리말로는 ‘고깔’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 했다.

우리 말 ‘고깔’의 이두 식 표현이라고 보여 진다.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라고도 했는데,

이 역시 주흘산의 생긴 모습이 정자관처럼 생긴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자연은 인간의 심미적 대상이자 교감의 대상이었다.

심미적 대상을 넘어 자연과 교감했던 이유는, 자연을 인간이 포함된 만물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道가 구현되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이 단지 마주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이 생명을 가지는 유기체로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 가운데에는 ‘바위’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법.

그래서 옛날의 많은 현인들은 바위를 찬미하곤 했을

것이다.

 

고산 윤선도 五友歌에 나오는 바위 구절도 좋은 예이다.

그러나 바위를 인간과 평등한 관계로 보는 데에는

蘆溪 박인로의 立巖別曲(입암별곡)을 빼놓을 수 없다.

無情(무정)히 서있는 바위 有情(유정)하여 보이는구나
最靈吾人(최령오인)도 直立不倚(직립불의) 어렵거늘
萬古(만고)에 곧게 선 얼굴이 고칠 적이 없구나

초장은, 바위도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유기체라는 것을 뜻하고, 중장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지내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낸다.

종장에서는 인간이 결코 최고의 반열에 올라설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위의 영구적모습에서 초연(超然)하고 달관한 군자의 모습을 보여 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환경 위기는 ‘인간중심 사고에서의 탈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수백년 전에 예견하고 있다 하겠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탈피!’ 바위가 유난히도 두드러지는 오늘 대간의 훈계이다.

제2관문 갈림길(10:15)

 

제2관문이라 불리는 조곡관(鳥谷關)의 모습

남쪽으로부터 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조곡관(鳥谷關)’ 또는 ‘영남제2관(嶺南第二關)’이라고 한다.

문경새재에 있는 3개의 관문 중 1594년(선조 27) 신충원에 의해 가장 먼저 축성되었다.

조선 후기 숙종 때 관방을 설치할 때 주흘관(草谷城)과 조령관(鳥嶺城)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옛 성을 개축하여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다.

 

그 후 1907년 훼손되어 방치되던 것을 1975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때 ‘조곡관’이라고 개칭하였다. 이곳은 1․3관문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 비해 계곡부가 가장 좁다.

그 뿐만 아니라 서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동쪽도 비교적 산세가 험하고, 앞쪽 5m 정도 되는

지점에 성곽과 평행하게 개울물이 흘러서 외적을 방어하기가 쉽다.

 

임진왜란 당시 신충원이 이곳에 축성을 한 것도 이러한 자연지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곽은 크게 문루와 이와 연결되는 좌우의 평지성, 동쪽(오른쪽) 평지성과 연결된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루는 돌로 축조한 홍예문 위에 있다. 문루 아래는 잘 다듬은 입방체형 돌로 바른층쌓기를 하고

그 중앙부에 높이 3.6m, 너비 3.5m, 길이 5.8m의 홍예문을 두었다.

이때 석재들은 높이를 거의 일정하게 다듬어 8단으로 축조하였다.

문루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이다. 좌․우에 협문이 1개씩 있다.

문루 앞쪽에는 ‘조곡관(鳥谷關)’, 뒤쪽에는 ‘영남제2관(嶺南第二關)’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암릉구간에 접어들면서 스틱을 접고 두발이 아닌 네발로 걸을 준비를 한다

 

로프를 타고 내려오니 우측으로 멋진 암문이 산꾼을 반긴다

암릉사이로 멋진 소나무도 보이고...

 

조령산 휴양림에서 올라왔다는 젊은 친구들

힘들다면서 탈출로는 찾는 중이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설명을 해주니 어르신 고맙습니다

갑자기 논네가 된 기분 같아서 영 그렇다. 머리에 염색을 해야 될것 같다

어르신이라니 짜사... 형님이라고 불러라이

799봉(10:30)

암릉에 오르니 주흘산이 가장 잘보이는 위치이다.

오늘은 후미팀이 막강(?)하다. 평소에 선두로 도망가던 회장님이

후미조에 붙었고 우대장, 수선화 총무, 서리님, 시화님,마린님, 막내

쾌도세무님까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과일과 음료수로 원기를 보충한다

 

암릉 위에서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소나무

 

마치 지난구간 구부시령에서 아홉 서방이 거쳐간

 

박복한 여인의 삶처럼 참으로 안쓰럽게 보인다

 

조심하소 넘어지면 큰일나니... 나무로 받쳐놨잔혀

 

암릉을 계속해서 오르 내린다

 

잠시후에 가야할 923봉이 엄청 높게 보인다

 

119-05 구조물(10:55)

 

셀수도 없을만큼 로프에 이 육신을 의지한 채 암릉을 오르내린다

 

928봉(11:00)

 

928봉 정상에서 바라본 잠시후 가야할 신선암봉

 

928봉에서 바라본 문경새재의 모습

 

계속해서 암릉구간을 오르내린다

 

잠시후면 가야할 등로의 궤적

 

928봉 정상의 낙락장송

 

계속되는 암릉구간

가야할 조령산의 모습

 

안부(11:15)

 

우측으로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한섬지기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한섬지기의 지명유래는 수옥폭포 서남쪽에 있는 곳으로 앞 들의 면적이

 

한섬지기(20두락)라 해서 붙혀진 마을 이름이란다

 

반가운 시그널

 

물개바위(범여의 생각 中에서)

 

928봉에서 쭈구리바위 갈림길로 내려가는 길은 마사토 지역의 엄청난 절개지라

마치 스키를 타듯이 미끄러져 내려서니 안부가 나온다

쭈구리바위 갈림길(11:22)

쭈구리 바위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2km정도 가면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바위로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 먹을만큼 큰 쭈구리가 살고 있었는데

바위에 앉으면 물 속의 쭈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젊은 아가씨나 새댁이 지나가면 이 놈이 희롱을 하였다고 한다

쭈구리 바위 갈림길 이정표

 

이곳의 이정표는 모든 방향이 문경쪽 위주로 되어 있다.

 

기왕이면 괴산쪽 방향도 표시했으면 좋으련만... 조금은 편협한 생각같다

 

이곳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는데 한섬지기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도 시원하다...오늘은 후미팀들이 너무나도 여유롭게 휴식을 많이 취한다 

 

한참동안을 휴식을 취하고 신선암봉으로 오르는데 굉장히 급경사라 곧바로 치고

 

오르지 못하고 약간 좌측으로 꺽어져 오르는데 상당한 체력이 요구가 된다

 

조금전에 지나온 928봉의 모습

 

절골갈림길(12:00)

쭈구리바위 갈림길에서 이곳까지 0.3km 올라오는데 30분 가까이 걸릴 정도로

힘이드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절골방향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도와준다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 안부를 지나니 신선암봉이 나타나는데 이 구간은 북진보다

남진이 훨씬 힘이드는 느낌이다... 절골은 상암사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신선암봉(神仙岩峰:937m:12:02)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암릉으로 형성된 봉우리로

예전에는 고사리봉, 할미봉, 온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문경새재도립공원에 속해있다.

신선암봉(神仙岩峰)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신선이 놀았다고 붙혀진 지명으로 괴산의 명산 35곳중에 하나이다

조금전에 힘들게 지나온 능선들

신선암봉 정상에 올라서니 이곳은 다른곳과 달리 일반 등산객들이 많이 있다

주로 경상도에서 온 산악회 회원들인데 영덕, 창원, 구미에서 온 산악회인데

이 분들은 이곳에서 점심상을 펼치는데 등산을 왔는지 먹으러 왔는지 이해가 안된다

 

북쪽으로는 괴산군 연풍면과 바로 아래의 절골계곡이 보인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도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 조령산으로 향한다

 

신선암봉 정상에서

 

가야할 대간 등로의 궤적

 

본격적인 암릉길에 나서는데 오늘 구간중에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오금이 저릴정도로 아찔한 릿지산행을 한다

 

우측 절골 아래로 내려다보니 오금이 저린다

 

한번 삐끗하면 황천길이다...조심조심 걸어야지

 

조금전 지나온 신선암봉과 주흘산 북쪽 능선의 모습

조령산 119 - 04안전등(12:45)

 

조령산, 신선암봉이 있는 탓인지 대간 시그널보다는 일반 산악회 시그널만 보인다

 

마당바위 갈림길(12:50)

 

마당바위 갈림길 이정표

 

다시 급경사의 오름길을 올라선다

우측 아래로는 절골과 연풍면이 보이고 889봉 오름길은 직벽에 가까울

 

정도의 급경사라 입에 난내가 나는데 이곳은 등산객들이 많아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직벽에 가까울 만큼 급경사에다가 암릉에 로프까지... 시간이 자꾸만 지체되고

 

거기다가 일반 등산객들이 많이 내려온다... 시간당 1km 걷기가 싶지 않다

 

힘든 오르막길 옆에 있는 예쁜 큰 앵초가 산꾼을 격려한다

 

힘들게 889봉에 올랐다가 다시 올라온만큼 내려서는데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듯 하다

 

큰앵초

앵초 앵초과 속한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20~40센티미터 정도이며, 전체 잔털 있고

뿌리줄기 짧게 으로 뻗으며, 원줄기 없다. 뿌리에서 나고 둥근 콩팥모양으로

가장자리 옅게 갈라져 있으며 이빨 모양 톱니 있다. 7~8월에 홍자색 층층으로

달려 피며, 열매 삭과()이고 어린순 나물 먹는다.

숲속 냇가 축축한 에서 자라, 우리나라 일본 등지 분포한다.

학명 Primula jesoana이며 꽃말은 ‘행운의 열쇠’라고 한다.

 

상암사터 갈림길(13:15)

 

조령산 오름길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써면서 올라가는데 노루오줌꽃이 많이 피어있다 

 

안부 능선에 올라서서 좌측 전망대 능선에 도착한다

 

조령산 오르기 직전에서 만난 전망대...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천하의 地勢는 山川에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문경의 산천은

백두대간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110km의 대간 줄기를 따라 수없이

뻗어내리는천하 제일의 지세를 갖추고 있는 곳으로 1,000m 급

이상의 산만도 9개나 있고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중에

4개나 보유하고 있는 백두대간중에 가장 중요한 구간이다

조령산(鳥嶺山:1,025m:13:35)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날아가는 새들도 쉬어가는 산이란다. 정상에는 5년전 북진에 만났던

“白頭大幹 鳥嶺山”  표시석이 산꾼 범여를 반긴다

 

오늘 산행구간 중 최고봉으로 기암괴석과 멋진 나무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그 옆에는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故 지현옥님의 추모비목이 서있다

 

故 지 현옥님의 추모비

조령산 정상에 서니 구조물이 눈에 띈다. ‘故지현옥’의 추모비이다.

1993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여성 산악인이다. 그러나 1999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한 후 하산 길에 영원히 산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언젠가 모 잡지에서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본적이 있다.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해 넘을 수 없는 사회적 편견을 넘어가야만 했다.

여성 등반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냉소와 질시에 비하면 시체가 나뒹구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죽음의 공기도 차라리 견딜 만 했다……”

지금도 지현옥 하면 ‘한국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지만

정작 그녀는 이런 수식어를 좋아하지 않을 듯하다.

그녀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운 인물로 각인되기를 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의 외침은 이 땅에서 기득권세력과 맞서 싸우려는 민중의 바램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령산 정상은 사방으로 두루 두루 공평한 조망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지현옥이 쉬기에는 안성마춤인 것으로 보인다.

부디 편안하게 쉬시길.

 

 
 

지 현옥(1962~1999)

충남 논산 출신 여성 산악인으로 1998년 7월에 여성 최초로 파키스탄령 희말라야 가셔브롬 제2봉을 무산소 단독등정을 하였고 1999년 4월 세계에서10번째로 높은 희말라야 안나푸르나봉을 정복하고 내려오다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산악을 배우고 훈련하였던 곳이 이곳 조령산이어서 지인들이 이곳에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조령산 정상에서

 

조령산 정상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면서 베낭털기를 한다.

 

여태껏 아끼고 아꼈던 션한 캔맥주와 막걸리 한통 과일과

 

과자로 원기를 보충하고 등산화에 양말까지 벗어버리고 휴식을 취한다

 

참으로 힘들었던 구간을 지나고 이젠 편한 내리막길만 남았기에 바짝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나왔던 암릉구간을 벗어나니 긴장이 풀리고

 

그러다보니 갑자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다 

 

조령산 정상에서 후미팀과 단체사진

 

조령산을 지나면서부터 등로는 암릉에서 완전히 육산(陸山)으로 바뀌고 뚜렸한

등로를 걸어오다가 잣나무 군락지에서 헬기장을 만나 좌측으로 꺽어서 급경사로 내려선다

 

헬기장(13:55)

 

촛대바위 갈림길

직진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잠시후에 넓은 공터가 나오고 이정표를 만나는데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가득하고 잠시후에 조령샘을 만난다

 

조령샘(14:10)

조령샘을 지나면서 만난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옆사면으로 이화령을 향한다

너덜길

 

너덜길 지나면서 만난 노거수

조령산 내리막길부터 나홀로 산행을 한다... 암릉구간을 지나면서 부터

 

긴장이 풀린 탓인지 잠이 몰려오기 시작하여 잠을 이기기 위하여 빠르게 걷는다.

 

너널길을 지나면서부터는 길은 완전히 고속도로 수준이다

 

헬기장

헬기장을 지나자마자 이정표가 있는 안부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 삼거리 안부(14:25)

←이화령 20분 ↑이화령15분 조령산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대간길은 직진으로 하여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대간길 이화령 방향 15분으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실제론 35분이 소요됐다

 

잠시후에 폐헬기장을 만나고...

폐헬기장에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군 교통호가 봉우리를 휘감고 있다

759봉 헬기장(14:40)

 

759봉 헬기장을 지나니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지 대간길답지 않게

 

잡풀이 무성하다... 아마도 대간꾼들도 험한 길을 버리고 조금전에 지나온

 

좌측의 편한길로 다니는 모양이다... 산행후에 안 일이지만 우리 일행도

 

이 대간 능선을 탄 사람은 나혼자였던 모양이다

 

조금을 지나니 주변에 산딸기가 지천이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런걸 그냥두고 가다니...

혼자서 한참동안 산딸기를 따서 입에다 넣는데 최근의 가뭄탓인지 상당히 달다

 

헬기장(14:45)

도대체 헬기장이 몇개야... 갑자기 헷갈리네 걸어서 5분거리에 또 헬기장이 있으니...

이곳에서 아주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급경사로 내려서니 관리가 안 되어 있는 진주강씨 묘지를 나오면서

 

저 아래에 있는 이화령 휴게소와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가 보인다

 

또 만난 헬기장

 

지금 이화령에는 백두대간 잇기 공사의 일환으로 동물이동통로와 주변환경

 

개선공사가  한창인데 동물이동통로 바로위에 또 헬기장이 있다.

 

조령산에서 이화령까지 거리는 불과 2.7km 밖에 되지 않는데 헬기장이 무려

 

5개나 설치가 되어 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이곳은 동물이동통로 바로 위에 헬기장이라니...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참으로 한심한 지고

 

예산낭비가 아닌지 감사원의 감사청구라도 함해봐야겠다

 

이화령 아래로 지나가는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모습

지금 이화령은 공사중

 

백두대간 맥잇기 공사의 일환으로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동물이동통로가 완성되고 주변 공사가 한창이다.

 

문경쪽에 있었던 백두대간 표시석도 괴산쪽 광장으로 옮겨놨다

 

이화령(梨花嶺:548m:15:00)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잇는 고개로

옛날 영남과 영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과거에는 이곳보다 오늘 산행에서 지나온 조령이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주로 이용되었으나 산세가 험준하여

이곳 이화령으로 국도가 생겼다고 한다

 

이화령은 조평천과 연풍천이라는 하곡에서 배꽃이 많이피는 계절이면

하얀 배꽃이 온 산으로 뒤덮혀 눈이 온듯 하였다고 해서 ‘배나무 이(梨)

꽃 화(花)’자를 써서 이화령(梨花嶺)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화령의 본래 이름은 ‘이우래재’였다고 한다

‘이우리재’의 정확한 연원은 알려진게 없지만 고개를 넘을 때

산짐승이 무서워 여럿이 함께 ‘함께 어울려 넘는 고개’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고지도에는 이화현(伊火峴)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일제시대에 이곳으로 신작로가 생기면서 이화령으로 바뀌었단다.

2007년 문경시가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불린 이화령이란 지명을

폐기하고 이우릿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고개 아래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이화령 터널이 뚫리면서

이 고개는 서서히 잊혀져 가는 고개로 변해 버렸다.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했던 이화령 백두대간

복원 사업은 5년전 북진길에 없었던 동물이동통로가 대간길을 이어주고 있다 

이화령 문경쪽의 모습

 

11시간 40분간의 긴 산행을 마치고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동료산꾼들과 산행을 종료하고 인증샷을 남긴 다음에 문경으로 향한다

 

문경온천

 

이화령을 출발하여 15분만에 문경온천에 도착하여 온천수로 샤워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려서 올갱이국으로 다들 맛있게 식사를 한다

 

오늘은 오랫만에 산행에 동참한  김포대님이 점심을 쏘신다... 잘 먹었습니다

 

지난해 3월에 시작한 백두대간길도 이젠 5구간밖에 남지 않았다.

 

미운정 고운정 다들었던 동료산꾼... 이젠 상대방 눈빛만 봐도 뭔 생각하는지

...

알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 참으로 고맙기만 하다... 다들 수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