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4년 6월 14일~15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짙은 안개... 오후엔 맑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20.3km + 어프로치 약 3km / 11시간 40분 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원 16명과 함께
☞ 산행코스: 이화령-헬기장-681m봉-군부대-헬기장-돌탑-조봉-헬기장-산상습지-분지리갈림길
황학산-흰드메 갈림길-헬기장-전망대-옥녀봉 갈림길-암릉지대-헬기장-백화산-1,012m봉
만덕사 갈림길-암릉지대-평전치-뇌성산 갈림길-사다리재-곰틀봉-암릉지대-이만봉
마당바위-용바위-시루봉 갈림길-사선봉-배너미평전-963m봉-888m봉-905m봉
희양산성-975m봉(왕복)-희양산-975m봉-암릉구간-지름티재-구왕봉-마당바위
오봉정고개-주치재-은티재-은티마을-주차장
☞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마성면, 가은읍 / 충북 괴산군 연풍면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이화령(梨花嶺:548m:03:10)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유래는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유릿재라 하였다.
그 후에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화령으로 불리게 됐었는데 배꽃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가 가득한 이화령에서 내려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3:20)
이화령 정상 휴게소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하늘에는 계사년 음력 오월 열여드렛날의
달은 휘영청 떠있는데 짙은 안개가 이화령을 휘감고 있다.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의 쥔장인 박 사장님이 타주신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스트레칭을 한 다음에 동물 이동통로를 지나 들머리를 향해 산행을 시작한다
동물 이동통로 아래에 있는 경북과 충북의 경계 표시
이화령 동물이동통로 터널을 빠져 나오니 우측 축대위엔 이화령 수준점이 있다
수준점을 지나 우측 층층 계단으로 올라 등로로 진입한다
군부대 경고판(03:25)
군부대 경고판이 나오고 어둠속이지만 예전에 북진길의 대간길과는 다르게
군부대와 헬기장, 681봉을 지나지 못하게 좌측 사면으로 우회길을 만들어
놨지만 그래도 원칙으로 대간길을 걷고싶어 경고를 무시하고 원형 철조망을
넘어서 헬기장으로 올라선다
헬기장
원형 철조망을 넘어니 헬기장이 나오고 헬기장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선다
두번째 헬기장(03:32)
어둠속에서 만난 군 시설물
예전에는 없었는데 아마 이것 때문에 대간을 우회시킨 모양이다
681m봉(03:38)
봉우리 정상에는 삼각점과 넓은 공터가 있다
이곳에서 내려오니 군 교통호가 있고 좌측의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상당히 등로가 미끄럽다
조심 조심해서 좌측으로 한참을 내려오니 우회길과 만난다
681m봉 삼각점(△ 문경 401 / 2003 재설)
헬기장처럼 생긴 시멘트 공터를 어둠속에 지나간다
산꾼들이 안전산행을 기원하며 얹어놓은 돌탑도 보이고...
어둠속이긴 하지만 등로는 완전히 고속도로 수준으로 길이 좋다
무명봉(04:15)
힘들게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무명봉 정상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하다
조봉(鳥峰:673m:04:20)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문경에서 세운 조그맣고 앙증맞은 정상석이 산꾼을 반긴다
지명유래는
조선시대 말엽 이 산봉우리에 새들이 많이 있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산길을 걷는데 홀딱벗고 새의 울음소리와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야심한 새벽길을 걷는 산꾼 범여에겐 청량제같은 구실을 한다
헬기장(04:25)
조봉에서 길을 마치부지런히 트레킹하듯이 걷는다
주위에는 벌목을 한 다음 정리한 목재가 보이고 마치 정원을 걷는듯한 기분이다
조봉에서 5분 정도를 지나니 잡풀이 무성한 헬기장이 나타난다.
산상습지(04:35)
헬기장에서 10분 정도를 굉장히 편하게 걷는데 산상습지가 나타난다.
조금 더 또렸히 카메라 앵글에 담아보려 하지만 똑닥이 카메라의 한계에 무리가 따른다
속리산 구간 비재와 갈령 삼거리의 가운데 위치한 못재에 이어 두 번 째 만나는
마루금상의 습지(연못)이다.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백두대간 전체를 두고도 대간 능선 한가운데에 이렇게 웅덩이가 있는 곳은 여기뿐일 것이다.
2009년 5월 24일 백두대간 북진때의 모습
전망암(04:45)
습지를 지나서 고도편차가 거의 없는 길을 걸어가다 능선 옆 전망암에 오른다.
예전 북진길에 이곳에서 주흘산의 멋진 풍광을 즐겼는데 오늘은 깨스가 가득하다
2009년 백두대간 북진길때 전망암에서 바라본 주흘산과 중부내륙고속도로
분지리(盆地里)갈림길(05:05)
이정표 이화령(백두대간 →, 흰두뫼 분지 안말50분↑, 백화산80분 ←)가 있다
거기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문경읍 각서리와 풍덕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북쪽 길은 분지리 안말로 이어지는 곳인데 이정표에는 선답자의 시그널이 많이 달려있다.
분지리(盆地里)는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연풍군 현내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괴산군 연풍면으로 바뀌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리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황학산(黃鶴山:912.8m:05:15)
전설속의 누런 학에서 유래 되었으며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3번 국도인 이화령 남쪽 6㎞ 거리에 솟아 있고 바로 옆에 있는 규모가 큰 백화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호젓한 산길과 억새밭, 참나무 숲길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정상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문경읍이 뚜렷이 보이고 그 너머로 운달산도 조망된다는
곳이나 오늘은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조금은 아쉽다
산 가까운 곳에는 연풍향교와 연풍성지가 있으며 연풍향교는 조선 중종 때 창건되어
여러 차례 중수되었고, 연풍성지는 조선 정조 때의 신해교난 이후 연풍 지역에 은거하며
신앙을 지키다 순조 때 신유교난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자리를 성역화한 곳이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해가 뜰 시간이건만 시간이 갈수록 짙은 안개가 더욱 심해진다.
정상석 옆에 비박을 하는 산꾼이 우리들의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다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백화산을 향하여 서둘러 길을 떠난다
흰드메 삼거리(05:35)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흰드메와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民草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지 등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잊으진 길이 된 모양이다
흰드메는 안말에서 30여 분 거리에 위치하며 분지리 맨 꼭대기에 올라앉은
이 마을은 '겨울철 흰 눈 덮인 모습이 흡사 하얗게 핀 꽃 같다'는 백화산(白華山) 턱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어 흰두뫼, 흰드뫼 등으로 불리다가 흰드미로 바뀌었다.
흰드미는 산 높고 골 깊은 산비탈이지만 땅이 넓고 기름져 옥수수든 감자든 콩이든
팥이든 심는 대로 풍작이었으며 그래서 삶에 지친 민초들이 희망을 심는 땅이었다.
그들은 아침 해가 산등성 위로 고개를 들 때부터 저녁 어스름이 연풍 들녘에 깔릴
때까지 땀으로 범벅된 채 이랑을 팠다. 그러다가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살림이 피면 산을 내려갔고,그 빈자리는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공간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서 본격화된 화전민 정리 사업으로 하나둘 이곳을 등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외롭게 땅을 일구던 홍태식 할아버지 내외가 1990년대 중반 산에서 내려오자
흰드미는 지도에만 이름을 남긴 빈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반대편에 있는 문경 마원리는 고려시대부터 영남과 중부지방을 잇는 교통요지로
말(馬)을 많이 길러서 마원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특이하게 생긴 갈참나무
헬기장(05:35)
전망대 암릉(05:35)
이곳은 전망이 아주 뛰어난 곳인데 오늘은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백두대간 북진 길에서(2009,05.24)
전망암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향해 내려선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상당히 등로가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암릉을 우회한 다음에...
다시 로프에 육신을 의지한 채 능선으로 올라선다
옥녀봉 갈림길(06:00)
우장풀 사이로 난 대간길은 마치 둘레길같은 느낌을 준다
백화산 헬기장
헬기장을 지나자마자 백화산 정상이 나타난다
대단혀요 - 김포대님
백화산 정상에 올라서니 정상석 옆에 동료산꾼 김포대님이 텐트를 치고 비박을 한다
이 양반 3박4일동안 산에서 야영을 하면서 백두대간을 타고 있는데 산신령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안되는데 아뭏든 존경스럽고 부럽으며 장차 내 롤모델이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아무 꺼리낌없이 유유자적 산 한번 타고 싶다
백화산(白華山:1,063.5m:06:05)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마성면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겨울철에 눈덮인 산봉우리의 모습이 한얀 천을 씌운듯이 보여서
붙혀진 이름이란다.
백화산은 성인(聖人)을 따라 세상에 나타난다는 봉황의 수컷이라고 하며
그 발치에 봉생(鳳生), 우측에 봉황이 울었다는 봉명산(鳳鳴山) 좌측으로
신라시대의 고찰인 봉암사를 두고 이화령과 시루봉으로 날개를 펼친
봉황새의 형상이라고 한다.
백화산은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이화령에서 잠시 숨을 죽인 뒤
속리산을 향하면서 치솟은 산으로 백두대간 문경지역으로 들어와 한참을
치고 들어가다가 빠지는 말발굽의 형세를 하고 있는데 그 정점이 이곳 백화산이다
조선말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처로 이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백화산은 멀리서 보면 봉황이 노는 형국이라고 한다.
특히 문경쪽에서 바라보는 정상부는 암릉으로 되어있어 봉황의 부리이고
정상은 봉황이 하늘을 날며 땅을 굽어보듯이 천지간의 산과 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백화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지나온 대간, 조령산과 주흘산, 부봉 그리고 그 너머 월악산과
가야할 곰틀봉, 이만봉, 희양산의 정상도 조망이 되는 곳이다.
동쪽 방향으로는 성철 스님이 오랜 동안 머물렀던 김룡사 뒷산인
운달산(1,097m)도 조망이 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남쪽 방향을 바라보면
영남 대로상 점촌에서 문경으로 들어오는 900미터를 넘나드는 봉우리를 따라
S자형으로 흐르는 조령천이 막아서는 진남교반이 있고 그 위로 고모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왕건이 견훤에게 쫓길 때 벼랑으로 도망가는 토끼를 보고 길을 찾았다는 토끼비리가
영강 천변을 따라 비탈길에 아슬 아슬하게 걸쳐 있다.
그래서 이 구간은 임진 왜란 때 군사 한명 없이 왜군의 진로는 하루 지연 시킨
영남대로 중 가장 험난한 구간이다.
백화산 정상에는 북진길에서 만났던 삼각점은 보이질 않고 이런 표지판이 있다
백화산 정상의 시그널들
산이 높아서 그런지 잠깐사이에 寒氣가 들만큼 추위가 엄습해온다.
바람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너무 추워서 서둘러 길을 나선다
등로에서 만난 원추리
다시 백화산이 바라보이는 멋진 조망처가 나오지만 이곳도 전망은 꽝이다
만덕사 갈림길(06:20)
무명봉(1,001m:06:25)
만덕사 갈림길을 지나면서 암릉구간을 우회하여 무명봉으로 오른다
잠시동안의 편안길을 걷는다 싶더니 또다시 암릉구간을 만난다
10여분간을 암릉구간을 지난 다음에 평전치에 도착한다
평전치(平田峙:06:50)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와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인말을 잇는 고개로
일명 평밭등이라 부르고 있으며 예전에는 분지리에서 상내리를
민초들이 넘나드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인적이 없는 잊혀진 길이다
이정표(백화산50분 ← 괴산군 연풍면 분지(안말)60분 ↑이만봉 희양산→)가 있고
평전치의 유래의 안내 표지판이 달려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허기진 몸으로
몸을 숨겼던 첩첩산중으로 분지말은 천헤의 은신처였다고 한다
평전치의 안내판
평전치에 도착
평전치에 도착하여 조금 이른 시간에 아침상을 펼친다
오늘은 인원이 적어서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편하게 식사를 한다
식사를 하는데 옷이 땀으로 젖은 탓인지 상당히 춥다.
바람막이 자켓을 입고나서야 조금은 낫다... 산행에서 가장 중요한 게 체온유지이다
40분간의 여유로운 식사를 마치고 커피까지 마신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뇌정산(雷霆山) 갈림길(981m:07:45)
벼락이 잘 치고 물 난리도 많이 나서 인근 마을에서는 `뇌정산'이라고 부르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으며 현재는 안에서 스스로 다스린다는 뜻을 지닌 내정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여전히 인적이 드물어 산행지도에는 초입만 겨우 표시되어 있는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서 부터는 잠깐 만난 문경시 마성면과 이별을 하고 가은읍으로 접어든다
886m봉(08:00)
사다리재(08:23)
문경시 가은읍 한밤미 마을에서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를 잇는 재로
원래 지명은 미전치(薇田峙)라 했는데 사다리재는 그 출처나 연원이 불분명한
이름이며, 본래는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한밤미 마을과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분적골)
마을을 오가던 ‘고사리밭등’이 고개의 옳은 이름이라고 한다.
고사리밭등은 분적골 사람들이 고사리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부르던 이름으로
고비 미(薇)자를 써서 '薇田峙'라 하였다.
원래는 사거리였는데 문경쪽은 통행이 전혀었어 길이 없어지는 바람에
삼거리가 되어 버렸지만 분지리쪽은 백두대간 당일구간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 구간을 끊기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하늘마음님이 가져온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휴식을 취한다
사다리재 이정표
이만봉119신고안내 제4지점 통과 곰틀봉 오름길의 가파른 너덜지에 119신고 안내문이 있다
곰틀봉(:972m:08:55)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와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옛날에 곰이 살았다는 이야기와 이 부근에 반달가슴곰이 서식하고 있어서
곰을 잡는 틀을 놓았던 곳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우측으로 뇌정산 정상과 좌측으론 천년고찰 봉암사가 있는
가야할 희양산이 보여야 할 전망이 너무 좋은 곳이건만 짙은 안개가
태클을 거니 너무도 아쉽기만 한 시간이다
정상에는 죽은 소나무에 누군가가 ‘곰’이란 표시만 해놨으뿐 아무것도 없다
곰틀봉에서 뇌정산을 바라본 풍경
곰틀봉에서의 아쉬움을 안고 계속해서 암릉길을 걷는다
암릉 전망대(09:00)
북진길때 이곳에서 바라본 주흘산의 모습(2009.11.22)
암릉 사이에 수줍은 여인처럼 다소곳이 피어있는 산꿩의 다리
곰틀봉을 지나 암릉구간의 조망을 포기하고 내려선 다음 다시 올라서니 이만봉이 나온다
이만봉(二萬峰:990m:09:15)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오석으로 만든 정상 표시석이 서 있다.
이만봉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 아래 골짜기(현 분지리의 중간 부분)에 2만여 가구가 난을 피해 와서 살았다는 설과
만호라는 벼슬을 한 李 씨가 이곳 동리에 살았다는 설 등이 있다.
만호(萬戶)라는 벼슬은, 고려·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의 관직(종4품, 무관)으로서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초기에는 수군을 중심으로, 나중에는 지방에도 외침에 대비할 목적으로 직책과 임무가 부여 되었다고 한다.
이만호골이 시작되는 연풍면 분지리
이만호골이 시작되는 도막은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였던 권율장군이 군막을 쳤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충북과 경북을 가르는 경계선에 있으며 괴산군에서 최고봉인 백화산과 희양산의 중간에 위치한다.
독립된 산이기보다는 황학산, 백화산. 시루봉,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능선으로 표시 된다
이만봉을 내려서니 커다란 암릉이 길을 막아선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우회를 한 다음에 우측 암릉으로 올라선다
용머리 바위(09:30)
이만봉에서 서북쪽으로 내리막을 약간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밧줄이 매여 있는
굉장히 넓은 마당바위와 용바위의 암릉지대를 지나게 되며, 이곳에서 희양산을
바라보는 조망이 아주 멋진 곳이다.
백두대간의 문경 구간이 참으로 넓고도 길다.
백두대간을 거쳐가는 마루금이 116km(110km)라는 설도 있음)라고 하니
엄청나게 길게 통과하며 우리나라 100대 명산중에 문경에 있는
산(4개:주흘산, 황장산, 대야산, 희양산)이 가장 많다고 한다.
대간 벌재에서부터 안생달리, 차갓재, 하늘재, 이화령, 은티, 버리미기재, 늘재까지
여러 구간에 걸쳐 있으며 예전에는 안생달리 조금 지나서 대미산 이전까지는
예천군 이었는데 해방 후 행정구역 조정으로 문경으로 편입 되었다고 한다.
지나온 곰틀봉과 이만봉이 조금씩 보이고...
가야할 희양산도 몸뚱아리를 조금씩 들어낸다
이만이골 갈림길(09:40)
시루봉 갈림길(09:45)
시루봉(914.5m)은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의 모양새가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여 있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시루봉 갈림길이라 해놨지만 이곳보다 배넘이고개에서 올라가는게 훨씬 가깝다
963m봉(09:55)
시루봉 갈림길에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등로 주위에 우장풀이
초원을 이루고 있고 간간히 비치기 시작하는 햇살이 따사롭기만 하다
지도상에 963봉인데 누군가 희양산 사선봉이란 아크릴판을 붙혀놨다
사선봉(四仙峰)이라... 4명이 신선이 노닐었다는 곳인가?
이른 새벽에 지나온 조봉과 우측으로 갈미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내리막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조금전에 지나온 963m봉(사선봉)의 모습
급경사로 내려서니 넓은 평지가 나오고 잠시후 배넘이 평전이 나온다
평소에 아침만 먹으면 도망(?)가던 김포오야지님이 같이 동행을 한다
배너미평전(10:15)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군 경계에 있는 백두대간 안부능선으로
우측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고개를 배너미 고개라고도 하는데 배너미라는
뜻은 고개의 불룩한 부분이 배가 넘어가는 곳이라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호남정맥 구간에서 보성군 주월산 아래에 배너미고개가 있었는데
배너미재를 한자로 풀어쓰면‘배 주(舟) 넘을 월(越) 재 령(嶺)’이라
배가 넘어 다녔다는 고개라는 뜻이다,
호남정맥길 배너미재 위의 산이 주월산(舟越山)이었고 지난 4월에 걸었던
백두대간 성삼재 가는 길에서 만난 고리봉도 배를 묶은둔 곳이라 했는데
아마도 예전에 이곳이 강이나 바다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은티마을 내려가는 길이다
지리산 세석 평전 덕유평전에 이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평전(平田)이라는 지명답게
이곳부터 시루봉 갈림길, 그리고 은티 마을 갈림길까지는 넓고 평탄하다.
시루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노란 소나무 잎이 길을 덮고 군데군데 박석이 쌓여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박석(薄石)은 경복궁 근정전 앞 마당에 깔아 놓은 검고 얇은 돌로서
균일한 두께로서 단단하고 크기도 적당하여 아주 용도가 많으며 강화도에 많다고 한다.
원래 오늘 산행은 이곳 배넘이 평전에서 은티마을로 내려가기로 했는데
인원도 적고 산행거리가 너무 짧아서 은티재까지 가기로 한다.
배넘이 평전에서 산행을 마감했으면 당연히 시루봉을 갔을 터지만
은티재까지 구간이 바뀌는 바람에 시루봉을 포기하고 희양산으로 향한다
배넘이 평전에서 우 대장과 김포 오야지님
배넘이평전에서 후미팀과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길을 나선다
910m봉(10:40)
910m봉에 오른 다음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암릉구간과 우회길이 나온다
871m봉(10:47)
우회길을 버리고 위험한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이젠 안개가
걷히고 오늘 가야할 구왕봉이 우측에 보이고 희양산도 보인다
희양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구왕봉의 모습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인 희양산도 보이고...
871m봉을 지나면서 서서히 희양산성터가 보이기 시작한다
희양산성터
삼국사기에 견훤이 희양산성에서 가은땅을 공격했다가 실패했다고 했는데 자세한 기록은 없다
신라말에 경순왕이 봉암사로 피난 왔다가 이곳 희양산성 중턱 성골(城谷)이라는 곳에 피신했는데
성터가 지금도 성 아래 있느데 수백명이 들어가는 굴이 있다고 한다
이 성터가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혹은 고려)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바로 후백제 견훤의 고향이자 그 아비 아자개(阿慈介:고향은 상주)의
세력 기반이었던 곳이 바로 남쪽의 가은읍 일대였기 때문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뒷산인 희양산 정상에 있는 석성(石城)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 성이 있으니 삼면이 모두 석벽(石壁)이며
옛 군창(軍倉)이었다고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희양고성은 가운현 북쪽 15리에
삼면이 모두 석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말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이 성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잠시 2∼3분 후 흐무러진 성터에 119 표지판(제4지점)이 있는 4거리 갈림길에 이른다.
이곳이 예전에 은티마을에서 가은의 성골과 홍문정으로 넘어가던 고갯마루이다.
희양산성터 사거리(11:05)
괴산군 연풍면 은티마을과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를 잇는 사거리로
이곳은 은티 마을에서 좌측 가은읍 봉암사 옆 성골로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지금은 가은 방향으로는 봉암사에서 길을 막아 놓아서 통행이 금지 되었다.
이곳은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혹은 고려)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희양산성은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에 있는 희양산(999.1m)의 북쪽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의 고개(850.5m) 일대와 그 동남쪽 바로 아래 산사면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능선 위에 있는 성벽은 전체 길이 288m, 높이 1~2m, 상부폭 1m 내외로 북쪽을 지키고,
사면의 성벽은 남쪽을 방비하며 연장 130m, 높이 1~3m, 상부폭 1~2m이다.
계곡에는 물이 빠져 나가도록 큰 돌로 사이가 약간 뜨게 축조하였다. 성돌은 자연석과 함석을 사용하였으며,
능선의 성벽은 약간 조잡하고 사면의 성벽은 치밀하다. 성벽이 없는 곳은 자연 암벽으로 되어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산성의 주된 방어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축성한 것으로 보이며 농성하였을 때는
모든 방위와 방어가 가능한 산성이다. 『여지도서』에는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 성이 있으니 3면이 모두
석벽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희양고성에서 후삼국 말기에 경순왕이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교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희양산성터 사거리 이정표
이곳부터는 100대 명산인 희양산이 있어서 그런지 일반 등산객이 많이 보인다
산성 아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쐬며 휴식을 취한 후에 희양산으로 향한다
희양산 갈림길(980m:11:30)
희양산 갈림길 좌측으로 500m 떨어진 곳에 희양산이 자리를 잡고있다.
오늘따라 희양산에는 안내 산악회에서 온 등산객이 엄청나게 많다.
왁자지껄이면서 떠들어대는 등산객들을 대하면 사람사는 냄새를
느낄 수 있지만 목적산행을 하는 대간꾼들은 엄청나게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목적 산행을 하는 산꾼들은 나홀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에...
희양산 정상 가는 길에서 바라본 구왕봉의 모습
희양산!
오늘 백두대간 길의 불교에서는 희양산을 우리 국토의 사리라고도
하며, 혹자는 희양산은 우리 국토의 丹田이라고도 한다.
버리머기재에서 희양산을 거쳐 하늘재에 이르는 마루금은 여타 마루금과는 달리 인체의 內臟처럼
동서로 반복적으로 휘어지며, 이 가운데 희양산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호칭이다.
그래서 그런지 희양산 아래에는 한국 선불교의 대표 사찰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희양산은 이런 산세나 지형보다 불교사적인 면에서 더 가치를 발한다.
해방 이후 한국 불교는 600년 동안 이어온 조선왕조의 억불(抑佛)정책의 족쇄와
일제의 ‘사찰령’으로 대표 되는 종교말살 정책의 폐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47년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혁신 운동이었다.
스님들은 제일 먼저 왜풍을 일소하고 수도 도량으로 거듭날 것을 결의했다.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 재를 없애고 화려했던 가사(袈裟)도 괴색으로 바뀌었다.
신라 헌강왕 때 창건된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이지만 근대와 와서는 한국 현대불교의 탯 자리로도 유명하다.
해방 직후 성철, 청담, 자운 등의 스님들이 “부처의 법대로 살아보자”며 용맹 정진한 곳이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것이
봉암사의 기본 수칙이 되었다... 오직 부처님 뜻대로 살자!
희양산 정상에 서면, 오늘 비록 조망은 시원찮지만 정상 그 자체의 자태만으로도
명산 반열에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또한 아래로 내려다 보면 풍수에 문외한이라하더라도 봉암사 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다.
희양산과 봉암산. 이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산과 사찰을 없을 게다.
이런 희양산의 화강암 덩어리는 한북정맥에 있는 산들에서 볼 수 있는 판상절리(板狀節理) 현상의
박리(剝離) 작용으로 생긴 돔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언뜻 보면 서울의 불암산을 확대시켜 놓은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불암산의 불암사도 지증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희양산 정상 가는 길에는 멋진 암릉과 금강송이 환상적이다
희양산(曦陽山:998m:11:40)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정상은 백운대라 부르면
동.서.남 삼면이 거대한 암벽으로 구성된 암산(岩山)이다
암봉(岩峰)들이 열두판의 꽃잎처럼 펼처져 있어 멀리서 보아도 우람하고 단단한 기운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세로주위의 산군(山群)을 호령하고 있는듯 하며 남쪽 산 아래에는
천년고찰 봉암사가 자리를 잡고있다.
희양산은 문경지방에서 보아야만 희양산을 참맛을 느낄 수 있지만 산문(山門)을
1년에 한번밖에(사월 초파일) 개방하지 않는 희양사가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부득히 은티마을로 오를 수 밖에 없다.
희양산을 둘러보고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가 ‘산이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 처져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고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의 물은 백겹의 띠처럼되었으니
뿔없는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듯 하다’ 며 감탄을 하고 이 땅을 얻은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둑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백화산을 일으켰던 소백산 줄기가 서쪽으로 휘어지면서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그 산들 중 하나가
희양산으로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산이다. 산 중턱에서 정상쪽으로
암벽을 두르고 솟은 모습이 특이하며 옛날 사람들은 장엄한 암벽을 보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 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빚어논 바위들이 기기묘묘하고 바위끝에서 내려다 보는
봉암사의 까만 기와지붕이 감회를 불러 이르키고 20리 봉암사 계곡이
소나무숲에 쌓여 진풍경을 연출한다.
백두 대간을 달려오는 백호산과 이만봉이 가까이에 서 있고 원북리 계곡이 깊게 느껴진다.
희양산 정상에서 멋진 仙景을 감상하고 부지런히 갈림길로 되돌아 온다
되돌아온 희양산 갈림길(12:00)
희양산 길림길에서 지름티재로 내려가는 길은 90도에 가까울 정도로 직벽 암릉이다
거기다가 일반 산행을 하는 등산객들이 아래에서 엄청나게 올라온다
갈길 바쁜 목적산행을 하는 산꾼들은 괜스레 맘이 급해진다 거기다가
여성 등산객들은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한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해결사로 나서서 등산객들을 정리한다
희양산 갈림길(2009, 11,22 대간 북진길)
희양산 일대에는 봉암사 소유의 임야로 봉암사의 요청으로 인해 입산이 통제된
구간이란 표지판이 붙어있다. 하지만 이곳을 지키는 스님은 보이지 않으며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꾼이면 애써 통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대신 이곳은 청정도량이니 예를 갖춰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한다.
직벽 로프구간 200m를 내려오는데 30분 이상이 소요됐다
그래도 내려오는 산꾼들은 우리밖에 없고 양해를 구해서 내려온 시간이다
급경사를 내려오니 멋진 암릉들이 즐비하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봉암사에서 설치한 목책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봉암사를 외호하고 있는 노거수
목불인견(木不忍見)
거대한 암릉을 손가락보다도 더 적은 나뭇가지로 받쳐있는
저 뜻은 선지식(禪知識)은 어떻게 해답을 내 놓을까?
목책을 따라서 조금 더 내려오니 지름티재가 나온다
지름티재(640m:12:45)
괴산군 연풍면과 문경시 가은읍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재로
희양산과 구왕봉 오르는 길이 지름(기름:油)을 칠해 놓은것 처럼
미끄럽다하여 지름티재라고 불리고 있다
지름티재 정상 바로 위에는 감시초소가 있고 좌측 봉암사 쪽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초소와 목책이 있어서 봉암사쪽으로는 출입을 할 수 없으며
은티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목책 너머로 스님 한 분이 올라오시기에 저두일배의 예를 올리고 구왕봉으로 오른다
조금전에 내가 내려온 등로의 궤적
지름티재에서 급경사로 올라오니 봉암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암릉에 올라 봉암사를 향해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 봉암사! !
한국 불교의 불교의 생명수와도 같은 봉암사를 품고있는 희양산은 너무도 아름답다
일체중생이 번내의 틀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출가인은 분발하여 사람마다
본래 구국한 불성을 바로보아 사람과 스승이 천상됨이라...
봉암사(鳳巖寺)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국사(智證國師) 도헌(道憲)이 창건했다.
그리하여 봉암사에 선풍이 크게 떨치니 이것이 바로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국정쇄신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런 헌강왕의 개혁의지를 심어준 이념이 곧 지증국사의 선사상이었다.
그리고 특기할 사항은 해방 직후인 1947년에 소위 '봉암결사'라 하여 한국 현대불교의
초석을 다져놓은 획기적인 불사가 봉암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1982년 봉암사를 조계종 종단에서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 뜻에 부응하여 문경시에서는 사찰 경내 땅을 확정 고시했다.
즉 희양산 봉암사의 법당을 중심으로 반경 4km 이내는 특별수도원 지역으로 고시함으로써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봉암사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불교계의 염원이 담긴 사찰이므로 그 배후가 되는 희양산에 대한 특별관리를
등산객들은 이해해야 할 줄 믿는다.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희양산
희양산은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타고 앞으로 달려가는 형상이란다
희양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서면(지름티재) 이내 가파르게 구왕봉을 오른다.
구왕봉에서 서서 뒤돌아 보는 희양산의 모습은 눈을 의심케 한다.
어줍짢은 형용사로는 희양산의 위용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숨이 막힌다’는 생각밖에 다른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구왕봉 오르는 등로에서 바라본 희양산과 가은읍 원북리의 모습
희양산 남쪽 봉암사가 있는 고을이 문경시 가은읍이다
후삼국 시대 한반도의 한쪽을 장악하고 고려, 신라와 자웅을 겨루던
인물이 문경 가은 출신의 견훤(甄萱)으로 황간 견(甄)씨의 시조로 본래의
성은 李氏로 아자개의 아들이다
892년(진성여왕6년)에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측하여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후백제를 세워 왕이되어 세력을
넓혀 나갔지만 935년 왕위 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로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였다가 이듬해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킨 비운의 인물이다.
문경군 가은읍은 1970년대에는 탄광이 40여 개나 있던 탄광촌이다.
지금도 읍 소재지 석탄 박물관에 가면 실제로 지하 갱도의 채굴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가은읍 갈전리 아차 마을은 후삼국 시대 패권을 다투던 견훤이 내어난 곳이다.
다음 구간 대야산 아래 궁기리는 군사들을 훈련 시킨 곳이며
상주시 화북면과 화남면 지역에는 견훤의 이름이 붙은 산성도 남아 있다.
구왕봉(九王峰:879m:13:20)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맞은편에
있는 희양산의 명성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신라 헌강왕 5년(879년) 지증대사가 봉암사에 자리를 정하고 그 곳에 있는
큰 못을 메울때 연못에 살던 아홉마리의 용을 지증대사가 신통령을 발휘하여
내쫒았는데 쫒겨난 용들이 멀리가지 않고 봉암사와 희양산이 잘 내려다보이는
이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 지증대사에게 연못에 살게 해달라고 울부짖었으나
소원을 들어주지 앉자 여기에서 돌로 변했는데 이 봉우리를 구왕봉이라 한다
원래는 구룡봉(九龍峰)이었는데 봉암사에서는 이 산을 날개봉이라 하며
매년 이곳 정상에 소금단지를 묻어 氣를 눌러 준다고 한다
구왕봉 표시석 뒷면
구왕봉은 희양산 아래 봉암사 창건 당시 각종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모양새나
경치로 보면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산으로 그저 일반 산이나 다름없이 둥그스럼하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양산보다 구왕봉이 더 마음에 든다.
나는 ‘사리’가 아니라 ‘사리 항아리’ 혹은 ‘들러리’라도 좋다. 가능하다면 구왕봉을 닮고 싶고,
구왕봉처럼 살아가고 싶다. ‘남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산 ...
살아가는데 필요한 평범한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산이기 때문이다.
봉암사 창건 설화에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지으려 할 때 지금의 봉암사 터가 연못이어서 그 연못을 메우려고 하니
거기에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증대사가 도술을 부려 용을 쫓았더니 뒷산으로 올라가서 그 산을
구룡산(九龍山)이라 했던 것이 변해서 지금은 구왕봉(九王峰)이 됐다고 한다.
구왕봉에 올라 크게 숨을 한번 내쉬고 베낭에서 마지막 남은 캔맥주 하나를 나눠 마신다
이젠 위험구간을 다 벗어나니 긴장이 풀리는지 갑자기 졸음이 몰려온다... 자고 싶다
등로에서 바라본 은티마을의 모습(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소재)
은티마을은 희양산과 악휘봉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만나는 합수지점이고,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계곡물이 자주 범람하여 수해를 입는데 계곡줄기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여인네의 오줌줄기
같다하여 수해방패막이로 마을앞 큰나무밑에 남근석을 세워놓고 매년 이 남근석앞에 동네 남정내들이
여인의 손을 빌리지않고 음식을 장만하여 제를 올리는 마을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니
확연하게 그 모습이 마치 여인의 자궁처럼 보이니 여궁혈(女宮穴)이란 풍수지리설을 이해할 것 같다
오봉정 고개(14:05)
문경시 가은읍 원북면 오봉정 마을에서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은티마을을
넘나드는 고개로 고개 정상에는 안동권과 부인 경주손씨의 묘지가 있다
이곳에서 문경쪽은 봉암사로 인해 길이 폐쇄가 되었고 은티마을로만 길이
있는데 지명유래는 오봉정 마을에서 따온듯 싶다
주위가 구암봉, 원평봉, 주치봉, 장성봉, 애기암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였다고 하여 오봉정이라 불렀다한다.
봉암사에서 산길로 약4km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1970년 독가촌 정리시에 완전히 폐촌이 되었다고 한다
오봉정 고개 정상의 이정표
오봉정 정상에 있는 安東權公과 부인 慶州孫氏의 묘지
오봉정 고개에서 다시 마지막 고개를 지나 봉우리를 치고 올라선다
주치봉(683m:14:15)
넓은 공터에 아무런 표시석도 없는 그냥 밋밋한 봉우리로
우측으로 내려가면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길로 시그널이 달려있다.
이곳에서 급경사로 내려서서 은티재를 향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은티재(銀峙:540m:14:25)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오봉정에서 괴산군 연풍면 은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은티재 또는 오봉정 고개라고도 부르며 은티(銀峙)마을은 조선시대에
의인촌리(義仁村里)라는 동네 이름이 일제 강점기에 인재의 출현을 막기위해
은티(銀峙)라고 개명을 하였으며 이곳에 은광(銀鑛) 탄광이 있었다고 한다
은티재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은티마을로 향해 내려가는데 5년전 북진길에
비해서 이곳도 과수원으로 인해 길이 많이 변형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동료산꾼 하늘마음님, 김포대님과 같이 내려오다가 적당한 곳 계곡으로 들어간다
계곡에서의 알탕
지름티재에서 탈출(?) 한 우 대장 아우한테서 연락이 온다
은티마을 계곡은 공사중이라 알탕장소가 없다고 한다
우린 적당한 곳에서 셋이 홀라당 벗고 알탕을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과수원 한 가운데로 접어드는데 과수원 집을 향해서 김포대님이 소리를 지른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김포대님 해병대 동기(381기)라는 분이 분당에 살다가
이곳으로 낙향하여 사신다고 한다
은티마을 가는 길에서 바라본 희양산과 시루봉
괴산군 연풍면의 은티마을은 희양산, 구왕산, 악휘봉, 시루봉, 덕가산 등 명산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들 산행의 들머리가 되고 날머리가 되기도 한다.
은티마을은 대간 산행을 하면서 여러차례 들른 곳인데, 풍수지리면에서 볼 때 여궁혈(女宮穴)
이라 한다. 그 때문에 센 여풍을 누르기 위해서 마을 입구에 남근석을 세워놓고 있다.
김포대님 해병대 동기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맥주 3병과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30분이상
담소를 나누면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김포대님 해병대 동기집에서 바라본 마분봉(馬糞峰, 776m)
마분(馬糞)이란 뜻 그대로 말의 똥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연풍 사람들은 말똥바위산 이라고도 부른다.
마분봉 정상부는 절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남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UFO 바위가 있다.
동쪽 능선길에는 '마법의 성'이라 불리우는 칼날능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남자의 심벌과 너무나 닮은 남근석이 보인다
아마도 은티마을의 음기 때문에 생긴 암릉이 아닌지?(범여의 생각 中에서)
김포대님 친구 덕분에 잘얻어 먹었습니다
은티마을 주막집
5년전 북진길에 반다리 아우 데리고 땜방 왔다가 개구리탕을 먹고 간 기억이 생생한데...
산꾼들에게 여시(여우의 경상도 방언) 아줌마로 소문난 酒母(이름이 이종숙)는 잘 있구나
주막집에 걸려있는 대간 산꾼들의 흔적
양근석 유래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에 위치한 은티마을은 희양산과 악휘봉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이 만나는 합곡점에 있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 때문에 가끔 수해를 보는데 그 개울 줄기가 여인네의 오줌 줄기 같다 해서
수해의 방패막이로 마을 앞에 남근석을 세워 놓고 끔찍이도 위하고 있다. 약 50cm정도의 작은 비석처럼 생긴 돌이다.
은티마을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이 생긴 여근곡(女根谷)이라고 한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잇으며 기가 쎈 음기를
막기위한 풍수의 하나로 마을에 남근석을 세워놓고 전나무를
심어 놓았다고 유래비에 적혀있다.
은티마을 유래비석과 장승
조선 초기 연풍현 당시 현내면 연지동에 속해 있었으며 1812년에 작성된 동절목(洞節目)에는 인지동 의인촌리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인義仁이라는 동리명이 한국의 민족 정신이 함유 되었다고 하여 은치(銀峙)로 개칭하였다.
1914년 일제 때 행정구역 통 폐합 시 주진리라 하였으며 8.15이후 행정구역 세분화 작업 시 이곳은 다시 주민들에 의해
“은티”라고 하였다. 풍수 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여궁혈(女宮穴)로서 동리 입구에 남근을 상징하는 물건을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주민들이 아들딸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입구 송림에 남근석을 세우게 되었다. 1996.6.20 은티마을 동민 일동
맥주를 얻어느라 꽤나 늦게 내려오는 바람에 버스에서 기다리는 동료산꾼들에 미안하다
버스에서 올라 문경으로 가서 맛있게 늦은 점심을 먹고 귀경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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