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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21구간 - 버리미기재에서 늘재까지

by 범여(梵如) 2014. 7. 14.

☞ 산행일자: 2014년 7월 12일~13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비... 짙은 안개에 높은습도, 오후에 맑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6.7km (실제거리 18. 5km) / 11시간 25분 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원 17명과 함께

☞ 산행코스: 버리미기재-675m봉-곰넘이봉-미륵바위-헬기장-불란치재-촛대봉-촛대재

               대야산-중대봉 갈림길-송이바위-대문바위-코끼리바위-거북바위-밀재

                 집채바위-구멍바위-849m봉-854m봉-고질라바위-통시바위갈림길-고모치

                 737m봉-안부삼거리-조항산-암릉-갓바위재-801m봉-전망암-886m봉-858m봉

                도석재갈림길-청화산-870m봉-750m봉-570m봉-정국기원단-의자바위-성황당

                늘재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농암면 / 상주시 화북면 / 충북 괴산군 칠성면, 청천면

 

이제 백두대간 길도 서서히 종반길에 접어드는 느낌이다

빨리 마무리 짓고 나홀로 호젓하게 목적 산행이 아닌 침낭하나 짊어지고

바람 부는대로 발길 닫는대로 유유자적하며 여유로운 산행을 하고 싶다

1년 반가량 같이 다녔던 동료산꾼들과의 아쉬운 작별인사도 준비해야 할듯 싶다.

정맥, 기맥, 지맥을 나홀로 다니면서 느낀점은 산은 역시 혼자 다녀야 제 맛을 알것만 같다.

가다가 힘들면 쉬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베낭배고 잠자고...  나홀로 산행의 묘미가 아닐까.

난고(蘭皐:  김삿갓) 선생이 뭐 부러울게 있남... 내가 김삿갓인데 ㅋㅋㅋ

 

이제 서너번 남은 백두대간  대간길중에서 가장 난코스인 버리미기재에서 늘재구간을 나선다.

오늘 구간은 거리는 거리 길지 않으나  초입부터 국공파들의 강력한 태클(단속)을 거는 구간이라

야심한 밤에 가야하고 업다운이 심한데다가 직벽에 가까운 암릉구간이 있는가하면 위험한 구간이 많아

대간 산꾼들에겐 가장 악명높은 구간이기도 하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밤 11시에 양재역에서 대간가는 버스에 올라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휴게소에 내리니 서울서는 오지 않았던 비가 쏟아지니 괜스레 맘이 무겁다.

이곳은 비가오는 날에 상당히 위험하여 대장의 결정으로  산행 시간을 2시간 늦추기로 하고

버스에서 2시간정도 새우잠을 잔 다음에 새벽 5시가 다 된 무렵에 들머리인 버리미기재에

도착을 하였는데도 빗줄기는 그치지 않아 베낭을 메고 산행을 준비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버리미기재(05:00)

괴산군 칠성면과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로 922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옛날 기근이 심할 때 이곳에서 화전민들이 터를 잡고 조그만 밭떼기를

빌어 먹이던 곳이라는 뜻이고 또 ‘보리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의미로

‘보리먹이’가 다른말로 ‘빌어 먹이다’라는 경상도 방언이 변음되어

지명이 되었다는 고개이며 또 아홉번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빌어먹이던

팔자가 지독하게도 박복한 주막집 과수댁이 고단한 삶을 살며 넘나들던 고개이었다

민초들의 배고픔과 척박하고 고단한 삶은 보는듯 하여 가슴이 아프다

국공파의 출입금지 단속초소가 이른 새벽부터 산꾼을 겁박한다

버리미기재 단속초소

버스에서 내리니 새벽 5시경... 비는 그칠줄 모르고 계속 내린다.

어제 출발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이곳의 날씨를 검색하니 가끔 흐린 날씨에 강수 확률 28%라 별 신경을

안썼는데 산행에 지장을 줄만큼 비가 내리니 나뿐만 아니라 동료 산꾼들도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의 쥔장 박 사장님이 끓여준 따듯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산행을 준비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이곳까지 왔는데 대간 산꾼들이 비 온다고 안가고, 힘들다고 안가면 언제 대간을 마치나?

몇년전 방영된 ‘제빵왕 김 탁구’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대사가 생각이 난다

‘천재가 노력하는 자에 못 이기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에 못 이긴다’ 하지 않았던가

산행도 마찬가지 인듯 싶다... 비오는 걸 피하지 못할거라면 즐기면 될것 같아 대간 산꾼들에겐

저승사자와도 같고 ‘수퍼 甲’질을 하는 국공파가 출근하기 전에 산행을 시작하기에 서둘러 산으로 오른다

헬기장(05:20)

초반에 조금 빡세게 오르는데 짙은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 등로가 잘 보이질 않는다.

날이 밝을 시간이 지났건만 비가 오는데다가 산 속이라 그런지 아직도 헤드렌턴에 의지한다

거기다가 비에 젖은 등로가 상당히 미끄러워 초반부터 계속 미끄러지며 걷는다.

얼마를 걸었는가... 헬기장에 오르니 우의를 입은 탓인지 초반부터 속옷까지 다 젖어 버린다

에~공, 비에 젖으나 땀에 젖어나 젖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아 우의를 벗어 버리고

비를 맞으면서 걷는데 이게 훨씬 시원하고 좋은것 같다

서서히 암릉구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암릉구간... 굉장히 긴장하며 조심해서 걷는다.

이런 날은 잠깐만 방심해도 대형사고가 발생하기에...

서서히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며 헤드렌턴을 접어 베낭속에 넣는다

잠깐 사이에 짙은 안개가 살짝 걷히면서 지난구간의 장성봉이 보인다.

지난 구간에 걸었던 장성봉의 모습

장성봉(長城峰)은 멀리서 보면 만리장성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시 암릉구간을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조금전에 지나온 암릉의 모습

다시 암릉구간을 곡예하면서 걷는데 이곳은 대간 산꾼들이 설치해놨는지

손가락만한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이 로프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암릉구간을 지난다

장성봉은 다시 짙은 안개속으로 숨어버리고...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괴산군 칠성군 관평리 숯가마골의 모습

그림은 정말 환상적인데 가지고 온 똑닥이 방수카메라에 습기가

가득차서 좋은 그림을 잡는데 한계를 느낀다... 그 대신 눈이 호강을 한다

곰넘이봉에서의 인증샷

곰넘이봉(733m:06:00)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와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의 경계에 있는 암릉의 봉우리로

커다란 암릉위에 오석(烏石)으로 만든 앙증맞은 정상석이 서있는데 암릉으로

오르기 싫어하는 산꾼이나 암릉 아래의 우회길이 있어 방심하면 놓치기 쉬운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 곰이 넘어 다녔다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정상석이 있는 암릉 오기 직전의 암릉이 곰의 등처럼 생겼다해서 부른 이름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세숫대야를 엎은 높은 것처럼 보인다는 대야산도 살짝 보이고...

미륵바위(688m:06:20)

완벽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여인의 몸매처럼 멋지게 생긴

암릉으로 대간길의 뭇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바위로

일명 촛대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집채 만한 암봉을 머리에 이고

우회를 허락치 않으며, 비록 짧지만 지친 가랭이가 힘주어 벌리기엔 너무

 

높아 보여 고소 공포증이 살짝있는 범여는 미끄러운 정상을 올라가길

포기하고 밑에서 물끄러미 감상만 한다.

이곳 정상에서 동료산꾼들과 여유로운 휴식을 취한다 

 

미륵바위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미륵부처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조금은 억지스런 모습이 보인다.

이곳 대야산과 조항산 구간에는 산 기슭에 사찰을 보기가 힘들정도이다

미륵바위 넘어로 가야할 대야산이 살짝 보인다

벤댕이 소갈머리보다 더 좁은 국공파

미륵바위에서 우측으로 돌아 급경사의 암릉구간 사이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곳에

 

예전에 있었던 로프를 짤라버려 이 구간을 포기하고 한참을 우회한 다음

등로 아래로 내려서는데 안 그래도 등로가 미끄러워 예민한 오늘 산행에 해도해도

국공파들 정말 알밉기만 하다... 민초들의 녹을 먹고사는 공무원들이 항상 군림하며

지시하는 그 형태 정말 못마땅하다

온 산을 다 파헤치는 멧돼지는 그대로 두고 50cm의 좁은 등로를 다니는 대간꾼에겐

왜 그리도 야박한 지?... 상생할 수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폐헬기장(06:40)

폐헬기장을 지나면서 잠깐동안 육산(陸山)을 걸어서 내려서니 불란치재가 나온다

불란치재(500m:06:50)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서 괴산군 청천읍 관평리 경게에 있는 고개로

옛 문헌에는 불한령(佛寒嶺), 불원치(佛院峙), 불한현(佛寒峴)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춥지않은 고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을 보면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의 깊은 계곡길로 두 봉우리

양쪽으로는 다시 장성봉과 대야산이 가로막고 있어 한겨울에도 바람이

따스하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인듯 하다

또한 ‘불이 났던 고개’라고 하여 불란치재라 불린다고 한다

'불이 났던 고개'라는 붙임보다는 '不寒嶺'에서 유래됐음이 그럴싸하다.

아무튼 문경 완장리와 관평리를 통하는 이길이 버리미기재에 포장도로를 빼앗기고

점점 풀섶으로 뒤덮혀지는 통에,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고 그냥 마루금 능선으로만

산꾼에게 기억될 뿐이다.

불란치재에서 다시 조금 올라서니 촛대봉이 나오고 이젠 비는

그친 뒤이지만 엄청난 습도로 인해 산꾼을 빨리 지치게 한다 

2009년 4월 26일 북진길에서 이곳에서 만났던 이정표

예전에 이곳에 있었던 이정표들은 국공파들이 모조리 없애버렸다.

참으로 한심한지고... 그렇다고 대간 산꾼들이 안다니나 ㅉㅉㅉ

촛대봉(661m:07:05)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청천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불란치재에서 대야산 오름길에 있는 봉우리로 암릉 능선길에

앙증맞은 정상석만 있을 뿐 별 특징이 없는 봉우리이다.

촛대봉 지나면서 등로사이로 바라본 대야산의 모습

직벽에 가까운 등로가 초반부터 산꾼들의 기를 죽인다

촛대봉을 지나면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묘지를 이장한듯한 넓은 공터가 나오고...

점점 가까워지는 대야산의 모습

촛대재(07:20)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피아골에서 괴산군 칠성면  관평리 상관평

넘어가는 고개로 촛대봉 아래에 있는 고개라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일반 등산객들이 대야산을 오를 때 주로 이곳으로 많이 올라오는지 안내

 

산악회의 시그널과 안내 표지판이 많이 보이지만 상관평으로 가는 길은

등로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이곳에서 대야산 오르는 길은 등로 정비가 비교적 잘되어 있다

김해 토요산악회의 시그널

경상도 산꾼들의 산사랑 대단혀요

이곳부터는 스틱을 접고 두발이 아닌 네발로 기어올라야 하는 그 악명(?)높은

직벽으로 오르는 구간인데 비가 온 이후라 그런지 상당히 미끄럽다

출입금지 표지판

북진길에 이곳에서 똑닥이 카메라를 아래로 떨어트려 40분간 헤맨 기억이 아련하다

1차로 로프로 한번 꺽은 다음에 우측으로 올랐다 다시 직벽으로 오른다

직벽능선에서 바라본 관평리 숯가마골의 멋진 雲海

자일이 없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곳이다

 

대야산 오름길에 아래로 내려다 볼수록 아찔한 현기증이 날 만큼

직벽 크랙이 짧은 다리로서는 확보가 불가능한 길이로 디딜 틈을 만드니,

로프에 매달린 채 비에젖은  미끄러운 직벽 경사면에 점프 접지를 시도할 수 밖에 없다.

거의 직벽에 가까운 암릉길을 로프 한가닥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대야산으로 오른다

오늘구간 가장 힘들었던 구간을 통과하여 안부에 오르니 건너편의 장성봉과

애기암봉, 원통봉이 운해에 가려 멋진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자체가 장관이다

안부 능선에 올라 조금을 더 가니 대야산이 나온다

대야산 (大耶山:930.7m:08:20)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와 괴산군 청천읍 이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신선이 내려와 노닌다는 선유동(구곡)과 용추계곡을 거느린 명산으로

원래의 지명은 선유산(仙遊山)이였다고 한다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문경조에는 대야산 (大耶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동여지도 문경조에는 대치산(大治山)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예전에 홍수가 났는데 온 천지가 다 잠겨버리고 정상 봉우리에

세숫대야만큼 남아 있다고 해서 대야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고

또다른 설은 정상이 세숫대야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문경쪽으로는 선유계곡과 용추계곡, 괴산쪽은 화양구곡이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대야산 동쪽은 선유골로 옛 시인과 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보고 지고를

논하며 詩想을 읊조린 곳으로 유명한 곳이면 산림청이 지정한 100대 명산이다

대야산 정상에서

대야산 정상에 오르니 용추계곡에서 피아골로 해서 대야산에 오른 2030의

젊은 등산객들이 대야산 정상을 점령(?)하여 아침상을 펼치고 있다.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상 주위에는 젊은 등산객들로 가득하다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백두대간의 백화산과 희양산을 지나 속리산을 가기 전에 있다.

계곡이 아름다운 산으로 경북쪽에는 선유동계곡과 용추계곡,충북쪽으로 화양구곡이 있다.

대하산·대화산·대산·상대산 등으로도 불리지만 1789년 발행된 문경현지에 대야산으로 적혀 있다.

 

내 가슴을 적시며 흐르는 동서 양편의 선유계곡 은 물살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암초에

부딪치며 흰 물결을 뽐내며 대간 마루금으로 거꾸로 솟아 흐른다.

문경 가은 용추골 선유구곡을 노래하는 고운 최치원의 영혼이 괴산 선유동

구름속에서 훨훨 넘나든듯... 대홍수때도 대야만큼 남았다면 우리말 세숫대야가

어울릴텐데 억지 한자글이 그런데로 중후하게 적혀있으니, 역시 한자는 뜻이고

소리고 간에 우리네 머리에 이미지로 한 품위 자릴 잡고 있는 모양이다.

암릉 좌측아래의 용추계곡은 지금 오리무중이라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용추계곡은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면서 남긴 비늘자국이 하트모양이

 

소(沼) 양 옆으로 선명히 남아있는 용추폭포가 있으며 달이뜨는 밤이면

바위와 계곡이 달빛에 비친다는 월영대, 무당소, 온갖 형상의 암반위로

얼음처럼 차고 깨끗한 계곡물이 흘러 눈길이 가는 곳마다 탄성이

절로 나는 곳이라는데 오늘은 멋진 계곡대신 짙은 안개만 바라본다

용추계곡의 모습(펌)

仙遊九谷(문경 가은, 고운 최치원)

옥하대(玉霞臺) 영사석(靈梭石) 활청담(活淸潭) 세심대(洗心臺) 관란담(觀瀾潭)

탁청대(濯淸臺) 영귀암(泳歸岩) 난생뢰(鸞笙瀨) 옥석대(玉釋臺)

 

仙遊九谷(괴산 송정, 퇴계 이 황)

仙遊洞門(선유동문),경천벽(擎天壁), 학소암(鶴巢岩), 연단로(鍊丹爐),와룡폭(臥龍瀑),

난가대(爛柯擡), 기국암(碁局巖), 구암(龜岩), 은선암(隱仙巖)

 

문경 가은 용추골 선유구곡을 노래하는 고운 최치원의 영혼이 괴산 선유동

구름속에서 훨훨 넘나든듯... 대홍수때도 대야만큼 남았다면 우리말 세숫대야가

어울릴텐데 억지 한자글이 그런데로 중후하게 적혀있으니, 역시 한자는 뜻이고

소리고 간에 우리네 머리에 이미지로 한 품위 자릴 잡고 있는 모양이다.

대야산 정상 삼각점(속리 305 / 2003 재설)

대야산 정상을 젊은이들에게 빼앗기고 우린 아침만찬을 즐기기 위해 건너편

중대봉 갈림길이 있는 암릉으로 가는 중이다

중대봉 가는길에 있는 암릉

대야산 정상에서는 조망뿐만이 아니라 능선 그 자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서 온갖 형상을 만들어내며 눈을 즐겁게 한다.

소나무들도 여기에 합세한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암릉과 이들

암릉의 틈을 비집고 들어선 소나무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선 시대 윤선도가 해남 보길도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하면서 지은 시조 五友歌(오우가),

이 오우가에 나오는 돌(石)과 소나무(松)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왕 五友歌 그리고 오우가의 소재인 돌과 소나무를 언급했으니

나머지 소재인 물(水)과 대나무(竹)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대야산은 동쪽으로 용추계곡을 낳고 있는데 이 계곡은

국내 어느 계곡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가경을 보여주고 있다.

 

용추계곡 상단부와 마루금의 밀재 사이에는 산죽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용추계곡은 윤선도의 五友 가운데 하나인 물과 견줄만하며,

산죽 군락은 비록 키가 작긴 하지만 대나무에 대체할 수 있을 게다.
이 정도면 윤선도가 노래한 五友 가운데 四友는 오늘 구간에서 다 만나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대야산은 산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서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느꼈던 낭만을 전달해주는 대간 최고의 경치를 간직한 곳이라 할 만하다.

중대봉 갈림길(08:30 ~ 09:10)

이곳 암릉에서 우측으로 가면 중대봉이 나오는 갈림길이다

이곳 정상 암릉에서 동료산꾼들과 아침상을 펼치고 너무 목이말라

션한 막걸리 2잔에다 맥주, 소주 등 주종을 안가리고 연거푸 마셨더니

속이 알싸하다... 그 다음에 아침밥과 커피까지 마셨지만 이른 새벽에

비를 너무 많이 많았더니만 寒氣가 들 만큼 추위가 엄습해와 서둘러

바람막이를 입고 동료산꾼들과 40분간의 아침만찬을 즐긴 다음 밀재로 향한다

중대봉 갈림길에서 좌측 암릉으로 내려선다

대야산은 거북바위, 대문바위, 코끼리바위, 호랑이 바위, 할매통시바위,

구멍바위 등등 기묘한 바위들이 전시장을 방불케할 만큼 많은데

지난 5월초 영산기맥 마지막구간 유달산을 온 것같은 느낌이 든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소나무 이외 다른 나무들이 바위틈에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대비를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야산 石松의 조화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오래 오래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행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단언컨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닐 터이다.

 

다른 나무로의 천이를 거부하고 소나무를 고집하는 것은 자연을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란 곧 변화와 발전이 아닌가.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아가며 발전한다.

인간 세상이 늘 안정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지만 자유 및 평등 등 기본적 인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행복 추구권이 확장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만약 새로운 변화 없이 방향만을 뒤로 돌리려 하는 변화는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

방향만을 되돌리려는 변화는 필연적으로 실패를 수반한다. 동서양 및 국내외의

수 많은 사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두는 것 이는 곧 法이다. 法이란 물(氵)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去)는 뜻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역사의 발전이 곧 법을 지키는 것이겠다.
‘자연이 곧 법이다’  오늘 구간에서의 배움이다.

계속해서 급경사의 암릉구간을 지나간다

흉물스런 안내표지판

오늘 대야산 구간에서부터 늘재까지 오는 동안 상당히 눈에 거슬리는

안내 표지판을 만난다...부산 낙동산악회 대간팀의 표지판인데

상당히 눈에 거슬리는게 정말 못 마땅하다.

물론 이 구간은 백두대간 코스중에 최대 난코스이기도 하지만 길도 애매하여

알바할 구간이 많아 표지 깔판을 이해는 같은 산꾼으로서 충분히 이해는 한다.

하지만 깔판은 마지막 후미대장이 꼭 회수하여 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것이

최소한의 예의이거늘... 아직까지 이 산악회는 그런 매너를 배우지 않았는지...

그렇다면 산악회 간부인 회장님과 선두대장님 필히 숙지하셔서 실천하기 바랍니다.

당신네들이 버리고 간 깔판은 비에 맞아 찢어지고 지저분하여 다른 산꾼들이 눈쌀을

찌푸린다는 걸 필히 명심하시어 ‘단디 회수해 가이소’

이 대간길은 후손들에게 잠시 빌려쓰는 소중한 자연이란 명심하시길...

고래바위(09:25)

고래바위 옆면의 모습

고래바위 하단의 모습 - 나뭇가지로 받혀놓은 것은 우스꽝스럽다

고래바위를 지나 급경사로 내려선다.

암릉구간을 지나는데 비에젖은 마사토와 소나무 뿌리가 상당히 미끄럽다

밀재 5분이라는 이정표를 만나고...

대문바위(09:32)

나무를 받혀놓지 않으면 문이 닫혀 버린다고 한다

동료산꾼들은 대문이 닫히면 빠져나오지 못할텐데 겁도없이 여유만만이다

대야산 20번 구조안내 표지판

이름모를 커다란 바위를 지나니...

암릉 옆사면이 주절상리를 연상케하는 멋진 암릉이 나오고...

멋진 암릉들은 지나고 나니 나무계단의 내리막길이 나온다

밀재(蜜峙:662m:09:50)

문경시 가은읍 용추계곡에서 월영대를 지나 괴산군 청천면 농바위골을 잇는 고개로

나무가  우거져 밀림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고개를 넘어려면 밀림을 헤치고 가야한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으로 원래는 밀목령(密木嶺)이라 불렀다고 한다

버리미기재에서 이곳 밀재까지 비탐방지역 구간이라 그런지 5년전 북진 때 서있던

이정표는 모조리 다 없애버렸다... 비탐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대야산 정상에는

항상 등산객들로 북적거리는 곳이다

산수국(山水菊:학명: Hydrangea serrata for. acuminata (S. et Z.) Wils.)

장미목 범의귀과의 쌍떡잎식물로 낙엽관목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거치엽수국, 탐라산수국이 있다.

흰색, 분홍색, 파란색, 보라색 등 색깔이 아주 다양하게 피는 꽃으로, 처음부터 색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색깔이 조금씩 변하는 것이다. 꽃봉우리 주위에 예쁜 꽃잎들이 피는데 이것은 암술도

수술도 없고 꿀도 들어있지 않은 가짜 꽃이고, 가운데 부분에 볼품없는 것이 진짜 꽃이다.

야성적이고 청초한 느낌을 준다.이 꽃은 꿀이 없기 때문에 벌이나 나비가 날아들지 않아,

절에서 많이 심는다고 한다. 추위와 공해에 강해 도시조경에 적합하다.

중부 이남의 표고 200-1400m의 약간 그늘진 곳이나 돌밭에 많이 자생한다.높이 약 1m이다. 작은가지에 털이 난다.

잎은 마주나고 긴 타원형이며 길이 5∼15cm, 나비 2∼10cm이다. 끝은 흔히 뾰족하며 밑은 둥근 모양이거나 뾰족하다.

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가 있고 겉면의 곁맥과 뒷면 맥 위에 털이 난다.

꽃은 7∼8월에 흰색과 하늘색으로 피며 가지 끝에 산방꽃차례로 달린다.

주변의 중성화는 꽃받침조각이 3∼5개이며 꽃잎처럼 생기고 중앙에는 양성화가 달린다.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5개, 수술은 5개이고 암술대는 3∼4개이다.

열매는 달걀 모양이며 9월에 익는다.

 

탐라산수국(for. fertilis)은 주변에 양성화가 달리고, 꽃산수국(for. buergeri)은 중성화의

꽃받침에 톱니가 있으며, 떡잎산수국(for. coreana)은 잎이 특히 두껍다.

나무 껍질을 학질, 해열 등에 다른 약재와 같이 쓴다.

꽃말은 “처녀의 꿈”이다. 한국, 일본, 타이완 등지에 분포한다.

 

출처: 무지개세상

밀재에서 조금 올라서자마자 다시 암릉구간이 계속된다

무명봉에 오른 다음 다시 좌측으로 우회를 하니...

집채만안 바위가 나오는데...암릉 이름이 집채바위란다

집채바위(10:25)

땅나리의 모습

849m봉(10:45)

통시바위 갈림길(11:00)

마귀할멈 통시바위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려서면 고모치 가는 길이고

좌측 통시바위 쪽으로 계속가면 가은읍에 있는 둔덕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다.

'통시'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변소" 즉 화장실을 뜻하는 단어로
우리나라 전래 설화에 의하면 거인이 용변을 보면 그 물은 홍수를 일으키고 또한 강을 만든다.
마귀할미 통시바위를 조금 더 지나면 손녀마귀 통시바위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북으로 흘러

용추골과 만나는 가마소의 깊고 푸른물이 대골 계곡을 만들어 월영대로 들어가는 물이 마귀할멈의

쉬~~~이(오줌)란 말인가? .

통시바위 갈림길에서 계속해서 고도를 낮추어 고모치로 향한다

고모치 가는길은 또다시 짙은 안개가 몰려와 50m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지경이다

고모치로 향하는 길은 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산꾼들은 이런 길을 가장 싫어한다... 왜냐고요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야하니까

고모치(古毛峙:11:15)

문경시 농암면에서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바로 아래에는 고모치라는 샘이 있고 고개 가운데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다.

고모치의 어원은 고치, 고치령, 고모령, 곰치, 고모치, 고미재 등이 있는데

이 중에 고치나 고치령은 높고 험하다는 뜻으로 고치(高峙)의 개념으로 쓰이고

고모령, 곰치, 고무치, 고미재 등은 곰고개 또는 곰의 고개라는 개념으로

분류되어 웅치(熊峙)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고모치의 전설

옛날 농암면 궁기리에 사는 고모가 고개너머 청천면 삼송리의

조카집에 갔다가 저녁 늦게서야 집으로 되돌아 갔다.

때는 겨울철이라 마침 폭설이 엄청나게 내리고 추운 날씨였다

고모가 떠나고 폭설이 내리자 조카는 아무리 생각해도 늦은 밤길과

추운 날씨속에 재를 넘어간 고모가 걱정이 되어 고개길로 뒤따라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고모는 고개마루 성황당 근처에서 탈진한 상태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조카는 고모를 부축하여 함께 고개를 내려가려고

시도했으나 심한 폭설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둘 다 얼어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고모치에서 좌측 아래로 10m 정도 내려서니 조그만 바위 사이레서 흘러 내리는

석간수(石間水)가 있는 고모치 샘으로 내려가 석간수 한잔을 마신다.

가뭄 탓인지 물의 양은 그리많치 않아서 조그만 팻트병 하나를 채우려면 5분이상 걸린다.

하늘말나리(학명: Lilium tsingtauense Gilg)

백합목 백합과 여러해살이풀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우산말나리·산채·소근백합이라고 한다.

말나리와 비슷하나 꽃이 하늘을 향해 피기 때문에 하늘말나리라고 한다.

비늘줄기는 달걀꼴이고 지름 2∼3㎝이며 비늘조각이 성기게 달린다.

 

줄기는 곧게 자라 높이 1m에 이른다.

줄기 가운데 달린 잎은 6∼12개가 바퀴살모양으로 돌아가며 난다.

윗부분의 잎은 어긋나고, 그 모양은 바소꼴이나 타원형이며, 밑이 좁고 끝은 뾰족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진다.

 

꽃은 7∼8월에 노란빛을 띤 붉은색으로 원줄기 끝과 가지 끝에서 위를 향하여 핀다.

꽃잎은 여섯 조각이며, 황적색 바탕에 자줏빛 반점이 점점이 생기고 갈고리 모양으로 조금 뒤로 말린다.

수술 6개, 암술 1개가 있으며 꽃밥은 노란색이다.

열매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의 원주형이고 10월에 익으며 3개로 갈라진다.

꽃잎에 자줏빛 반점이 없는 것은 지리산하늘말나리, 짙은 노란색 꽃이 피는 것은 누른하늘말나리이다.

 

하늘에 피는 상상의 꽃으로 대개 마음이 따뜻하고 사려깊은 사람을 빗대어 부른다.

관상용으로 이용하거나 참나리와 같이 약용하고 비늘줄기는 식용한다.

한방과 민간에서 종기, 토혈, 강심, 해독 등에 약재에 쓰인다.

한국 전지역 및 중국 산둥성 산야에 분포한다.

 

다른 이름으로 우산말나리, 산채(山菜), 홍백합(紅百合), 소근백합(小芹百合)이라고도 한다.

비슷한 종으로 화피에 자줏빛 반점이 없는 지리산하늘말나리와 짙은 노란색 꽃이 피는 누른하늘말나리가 있다.

꽃말은 ‘순진’, ‘순결’, ‘변함없는 귀여움’이다.

 

출처: 무지개세상

조항산 가는 길에서 만난 이정표

고모치에서 동료산꾼들과 잠깐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조항산으로

오르는데 고도를 250m 가량을 높이면서 올라가려니 참으로 힘이든다

그래도 등로 주위의 푸르름이 가득한 잡풀과 야생화들이 산꾼을 응원한다

닉이 천리마일 정도로 빠른 주력을 자랑하는 천리마님과 울 산악회에서 가장

잘 생긴 산까치님(범여의 생각中에서) 평소엔 진작 도망갔을 산꾼들과 오늘은

같이 걸어가는 호사를 누린다... 이런 저런 世上事를 얘기하면서...

500m 이상을 다시 빡세게 고도를 높이는데 아침에 내린 비 때문에

등로는 무척이나 미끄럽고, 높은 습도로 인하여 무척이나 힘이든다

꿩의 다리(학명 Thalictrum aquilegifolium L.)

미나리아재비목 미나리아재비과의 쌍떡잎식물로 여러해살이풀이다.

'꿩의다리'라는 이름은 줄기가 아주 가늘기 때문에 꿩의 다리에 비유해서 지어진 것이다.

다른 이름으로 우정금, 당송초라고도 한다. 산기슭의 풀밭에서 자라며 높이가 50∼100cm이다.

줄기는 속이 비었고 곧게 서며 가지를 치고, 털이 없으며 녹색 또는 자주색 바탕에 분처럼 흰빛이 돈다.

잎은 어긋나고 줄기 아래쪽의 잎자루는 길지만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짧아져 없어지고 2∼3회 깃꼴로 갈라진다.

 작은잎은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고 길이가 1.5∼3.5cm, 폭이 1∼3cm로 끝이 얇게 3∼4개로 갈라지며 끝이 둥글다.

 

꽃은 7∼8월에 흰색 또는 보라색으로 피고 지름이 1.5cm 정도이며 줄기 끝에서 산방꽃차례를 이루며 달린다.

꽃받침조각은 4∼5개이고 길이 3∼4mm의 타원형이며 5∼7맥이 있다.

꽃이 피기 전 꽃받침에 붉은 빛이 돌고 꽃이 피는 동시에 떨어져 나가며 꽃잎은 없다.

수술은 많고 길이가 10mm이며, 수술대는 윗부분이 주걱 모양이고, 꽃밥은 넓은 줄 모양으로 노란빛을 띤 흰색이다.

열매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거나 타원 모양이며 길이가 6∼8mm이고 날개 모양의 돌출물이 3∼4개 있다.

길이 4∼5mm의 가는 자루에 붙어 열매 5∼10개가 모여 달린다.

 어린 잎과 줄기를 식용한다. 한방에서 감기·두드러기·설사·장염·이질·B형간염·결막염·종기 등에 약으로 쓴다.

아시아 및 유럽의 온대에서 아한대에 분포한다

의상저수지 갈림길(11:55)

이곳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가면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의상저수지(삼송리)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조항산 가는 길인데 우측으로도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달려있어 조그만 방심하면

알바하기 십상이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울 선두 멤버들도 무심코 가다가 돌아온 곳이기도 하다

조항산 오르는 길에서 만난 꿩의다리

조항산으로 오르는 전망바위에 올라서니 짙은 안개로 인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조항산(鳥項山:951m:12:05)

문경시 농암면과 괴산군 청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마귀할멈 통시바위에서

바라보면 갓바위봉이 새의 부리로, 조항산이 새의 목덜미로 보이는 지세라

조항산(鳥項山)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하면 옛날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홍수 때 이곳 정상이 물에 떠있는 새의 목덜미를 닮았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또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 주민들은 옛부터 이곳 조항산을 갓바위봉이라고 부른다.

옛날 천지개벽으로 온 세상이 물로 잠겼을 때 정상 꼭대기만 ‘갓(冠帽)’만큼

물 위에 나와 있었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란다

또한 궁기리에서 이 산을 바라볼 때 정상이 M자형으로 봉우리가 두개로 보인다고 한다

실제 봉우리중 좌측 봉우리가 갓바위봉보다 낮게 보인다고 한다

우측으로 정상보다 높게 보이는 암봉을 갓바위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조항산 정상에서 바라본 채석장의 모습

짙은 안개로 인해 채석장만 어렴풋이 보일뿐 그 뒤에 있는 둔덕산은 아예 안보인다.

조항산 정상 뒷면

이곳에 오니 선두로 도망간(?) 동료산꾼 노루님과 배왕초님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마지막 남은 션한 캔맥주 하나를 마시고 빵하나로

원기를 보충한다... 정상 좌측으로 조금가면 갓바위봉이 나오는데 가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아무도 갈것 같지도 않고 오늘 산행구간이 거리는 그리 길지않으나

암릉구간이라 속력을 낼 수도 없고 길이 미끄러워 입맛만 다시고 청화산으로 향한다

조항산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섰다가 암릉구간 안부 능선을 걷는다

조금전에 내가 지나온 암릉구간의 모습

암릉 안부 능선을 지나다 다시 대슬랩구간의 능선으로 올라선다

가야할 청화산은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숲길을 헤치면서 뒤따라 오고있는 후미팀 동료 산꾼들

능선 안부에서 바라본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의 모습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이 활을쏘며 무술을 연마하며

야망을 키웠던 마을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궁기리의 옛 지명은 고모리(古毛里)였고 마을에서 넘나들던 고개가

조금전에 지나온 고모치이다 .

‘고모’라는 지명이 많은데 이는 새가 높은 곳에서 춤을 춘다는 의미인

고무(高舞)의 발음이 변음되어 고모라 불렀다고 한다.

고모(古毛), 고무(高舞), 조항(鳥項)등은 괴산 방향의 삼송(三松)이라는

지명과 함께 모두 새와 관련된 지명이란다

궁기(宮基)는 우리말로 궁터라는 뜻으로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서

궁을 짓고 군사들을 훈련시킨데서 유래된 지명이며 이터골, 옛터골,

궁터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당초 문경현의 자료에는 궁기리라는 지명은 없고 고모리가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모리와 마암리(馬巖里) 일부를 병합해

농암면으로 편입시켰다고 한다

뒤돌아본 조항산의 모습

등로에서 바라본 조항산과 갓바위봉

갓바위재 가는 등로에서 바람이 잘부는 바람골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헬기장(13:05)

갓바위재(766m:13:07)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에서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갓바위란 지명은 조항산의 한 봉우리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한다

지나온 조항산과 가야 할 청화산 사이에 있으며 고모치가 삼송리로

편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삼송리에서 이 고개를 넘어 농암면 소재지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갓바위재보다는 고모치를 주로 많이 이용했는데

고모치는 지금 대간 산꾼이나 이용하는 고개이고 이곳 갓바위재는

의상저수지에서 오르는 일반 등산객들의 발걸음으로 등로는 뚜렸하다

큰갓버섯(학명: Macrolepiota procera (Scop. ex Fr.) Sing) 

갓의 지름은 8-20cm로 난형에서 차차 편평하게 되나 가운데가 약간 볼록하다.

표피는 갈색 또는 회갈색인데 터져서 인편으로 되고 바탕은 연한 갈색 또는 연한 회색이며 갯솜질이다.

살은 백색의 솜모양이고 주름살은 백색이며 떨어진 주름살이다.

대 길이는 15-30cm이고 굵기는 1.2-2cm로 표면은 갈색~회갈색이며 표피가 갈라져

뱀 껍질 모양을 이루고 속은 비었으며 근부는 부푼다.

대의 상부에 있는 턱받이 윗면은 백색이며 아랫면은 회백색이며 상하로 움직일 수 있다.

포자의 크기는 15-20×10-13㎛로 난원형이고 표면은 평활하고

발아공이 있으며 위아미로이드(거짓전분)이고 포자문은 백색이다.

식용하며 제주도에서는 초이버섯이라고 한다.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숲속, 대나무밭, 풀밭, 목장 등의 땅에 단생 또는 군생하는 외생 균근성 버섯이다. 한다

하늘나리가 많이 피어있는 호젓한 등로를 걸어간다

다시 암릉구간인 801봉으로 오르기 위해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다시 안부 능선을 조금 걸으니 암릉구간인 암봉이 나오고... 

지나온 조항산과 그 너머 둔덕산의 모습 

암봉에서 동료산꾼 김포오야지님과 천리마님

801m봉에서 바라본 의상저수지(충북 괴산군 청천면 소재)

801m봉에서 바라본 잠시후 가야할 등로의 궤적

오늘의 도상거리는 거리 길지 않은데 암릉구간에다 비 온뒤라 등로가 엄청나게 미끄러워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니 이제 슬슬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피로도가 밀려온다

801m봉에 올라서니 청화산이 아련히 보이기 시작하는데 엄청나게 멀게만 느껴진다

암릉에서 바라본 궁기리의 모습

문경 가은읍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태어난 고향답게 견훤의 전설이 많은 고향이다

농암면 궁기리는 견훤이 군사를 모아놓고 훈련을 하던 곳이라 했고 궁기리 아랫마을에 있는

말바위는 견훤이 야생마를 길들여 천하의 명마를 만들어 타던 중 활과 말이 누가 빠른가를

내기 하였는데 아차산으로 활을 쏘고 말을 달려 말이 졌다는 성급한 생각으로 말의 목을치니

그때서야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801m봉에서 바라본 청화산의 모습

801m봉(13:30)

다시 숲사이 등로를 헤치면서 801봉을 조금을 내려오니 바람이 불어대는 안부 능선에서

회장님과 봄^^님이 우리를 기다리는데 맛있는 빵과 쥬스를 잔뜩 내놓으시는 바람에

허기를 면한다... 회장님이 가져온 저지방 우유를 마시던 시화님이 저지방 우유를

안 먹겠단다... 왜냐구요 저지방 우유를 마시면 애들이 지방대학을 가고 서울우유와

연세우유를 마시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다나 우쨌다나... 역쉬 시인다운 상상력 ㅋㅋㅋ

이젠 배도 부르고 하니 큰 걱정은 들었다... 사실 베낭속에 액체 종류밖에 없다

쥬스, 물, 등... 탄수화물을 섭취해야 할 건드기가 없기에 좀 불안했는데...

다시 암릉구간으로 올라 858m봉으로 계속 대간길을 이어간다

조금전 내가 걸어온 등로의 궤적

계속되는 암릉구간의 연속

원추리 (학명: Hemerocallis fulva L.)

원추리는 백합목 백합과 원추리속의 총칭, 또는 그 중의 한 종을 가리킨다.

백합과 비슷한 큰 통꽃이 피는 여러해살이풀로 키가 1m 정도이다.

영어로는 day-lily라고 하는데 아름다운 꽃이 하루만 피고 시들어 버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시름을 잊게 해준다는 중국의 고사가 있어서 훤초(萱草), 또는 망우초(忘憂草)라고도 부른다.

줄기는 없으며, 뿌리로부터 여러 개의 잎이 뭉쳐서 나오고 잎의 생김새는 난초잎 모양으로 길게 뻗어 있다.

잎은 칼처럼 생겼는데 길이 60-80cm, 폭 1.2-2.5cm로서 밑에서 두 줄로 마주나고

끝이 활처럼 둥글게 뒤로 젖혀지며 흰빛이 도는 녹색이다.

 

꽃은 주로 6-8월 꽃줄기 윗부분에 여러 송이의 노란색 또는 주황색 꽃이 위를 향해 달린다.

꽃잎은 끝이 뒤로 휘어지며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잔주름이 있다.

열매는 모가 난 넓은 타원형이고 그 속에 검은색의 종자가 많이 들어 있다.

뿌리가 사방으로 퍼지며 일부가 방추형으로 굵어진다.

다른 이름으로는 등황옥잠, 등황훤초, 금침채, 훤초(萱草), 의남초(宜男草),

훤채(萱菜), 황화채(黃花菜), 넘나물, 훤초근이 있다.

옛부터 원추리는 봄의 대표적인 맛있는 산나물의 하나였는데 이때는

'넓나물', '넘나물'이라고 따로 이름을 지어 불렀다

또 여름철에는 꽃을 따서 김치를 담가 먹거나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한다.

원추리 뿌리는 멧돼지가 즐겨 파서 먹을 만큼 영양분이 많아 자양강장제로도 쓰였고

녹말을 추출하여 쌀, 보리 같은 곡식과 섞어서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또 꽃의 술을 떼고 밥을 지을 때 넣으면 밥이 노랗게 물들고 독특한 향기가 난다

 

한방에서는 덩이뿌리를 말린 것 또는 생것을 훤초라 하여 강장, 이뇨,

지혈, 소염제, 황달, 여성질환, 소화, 결석병, 간질환 등에 약으로 쓴다

원추리속의 식물은 양지에서 잘 자라고 튼튼하며, 크고 아름다운 꽃이 봄부터 가을에 걸쳐 계속해서 핀다.

동아시아의 온대지역에 10종 정도가 분포하고, 한국에는 7종 1변종이 분포한다.

출처: 무지개세상

 

858m봉(14:10)

다시 안부 능선으로 떨어졌다가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오르막길에 산죽길이 시작되고... 이럴땐 션한 맥주 한잔이면 힘이 나련만

오늘은 알콜 음료가 초반에 동이 나버렸으니... 생각하면 뭘하나 죽은자식 불알 잡기지

도석재 갈림길(14:55)

이곳부터는 백두대간과 십승지 우복동구간과 겹쳐지는 등로이다.

우복동(牛腹洞)은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서쪽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병풍바위에 막혀있고 북쪽은 백두대간 고개인 늘재를 넘어야 괴산으로

연결되며 남쪽 역시 백두대간 상에 있는 고개인 갈령을 넘어야 상주로 갈 수 있다

고개를 넘지 않는 유일한 통로인 동쪽인 문경가는 길은 가파란 벼랑이 있는 쌍룡계곡이 있다

예전부터 접근조차 하기 힘든 아주 깊은 골짜기의 마을이다.

이 우복동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게 살 수 있다하여 이 땅의 민초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복동의 명칭은 호리병에서 맑은 물이 흐르는 지형을 닮아 붙혀진 지명으로

조선 숙종(19대) 때 청담 이중환 선생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에 ‘우복길지(牛腹吉地)가

청화산에 있다’ 하여 ‘우복동’이라 불리며 이 중환 선생의 호가 청담(淸潭) 또는

청화산인(淸華山人)이라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우복동천(牛腹洞天)’이란 명칭은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우복동 중심 용유동 길가에 비스듬히 누운 바위에 ‘洞天’이라 새긴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동천이라는 뜻은 하늘의 동네라는 의미일진데 민초들의 이상향인 우복동을 함부로 밝힐 수 없어

양 사언이 지명을 밝히지 않고 ‘洞天’이라고만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제들도

우복동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을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그의 저서

다산산문집에 수록된 ‘우복동가(牛腹洞家)’라는 싯구에 은유적으로 꼬집어 놓았다고 한다

도석재(시루봉)삼거리에서 진권아우와 김포오야지님

대간길은 좌측으로 꺽어지고 시루봉 방향은 직진인데 이곳은 십승지

 

코스의 하나인 우복동천 환종주 37.8km 원점회귀 코스로 속리산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충북 알프스구간이고 동쪽은 우복동천 구간이다

 

산을 걷다보면 시루봉이란 지명을 참으로 많이 만난다

2구간 전인 평전치 위인 시루봉도 만났으니...이곳 역시 뻔한 이름이 아닐까?

시루를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다시 걷고 조금을 더 걸으니 청화산에 도착한다

그런데 정상은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다

정상석만 없다면 그냥 지나칠번한 그냥 밋밋하기만 한 곳이다

청화산(靑華山:984m:15:05)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경북 문경시 농암면,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죽군락과 소나무가 많아 겨울에도 푸르게

보인다고 해서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擇里志”에서

‘앞,뒤면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라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고 극찬을 한 곳이다

 

청화산은 원래 북쪽 골짜기 산아래 청운동 마을과 남쪽 방향의

신화동 마을 동쪽으로 화실이란 마을이 있어 자연스럽게 화산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 중환이 스스로의 호를 ‘靑華山人’으로

불리면서 청화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은 약 1,000년전 고려의 건국이념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지리적 개념으로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가장 처음 사용한 이가 이 중환이라고 한다

청화산 정상에서 인증샷

청화산에 서면 청화산을 찾았다가 요즘 시쳇말로 청화산 경치에 뿅 가서

자신의 호를 ‘靑華山人’으로 起名했다는 인물이 생각난다. 이중환이다.

조선 중기 인문지리서의 바이블이라 일컬어지는 택리지의 저자이다. 그가 청화산의

경치를 두고 각종 최고급 형용사를 동원하여 극찬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청화산의 경치가 아니더라도 이중환하면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두어가지 있다.

‘大幹’이라는 명칭을 그가 처음 택리지에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은 약 1,000년 전 고려 건국이념(신화 혹은 설화)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지리 개념으로서의 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는 이중환이 처음이다.

그가 조선 중기 대표적인 실학자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풍수사상!

다소 초현실적이며 객관적이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서구 학문에 비해 검증 면에서 한계를 지닌

풍수사상은 미신으로 치부되어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풍수는 환경오염 및 생태계 파괴를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테면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 수 있었던 것이 좋은 예가 된다.

평양일대가 배가 떠가는 行舟形이라 우물파기가 금지되어 있었다.

우물(구멍)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풍수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지금 검증할 방법이 없지만 평양 일대의 지반이 실제 우물을 파면

침하의 우려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검증된 사례도 있다. 안동 하회마을이다. 이 지역 역시 行舟形이어서 우물을 파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 하회마을은 지반이 뻘과 모래로 이루어져 帶水가 형성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런 땅에서 나오는 물은 식수로도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이 밖에 풍수사상이 환경보호, 조경 및 생태보호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문·무과를 제외한 잡과에 해당하는 실용 기술학이었던 풍수학이

오랜 기간 동안의 찬밥대우에서 벗어나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셈이다.

특히 풍수학은 최근 백두대간 마루금 타기가 새로운 트랜드로 자리잡으면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고 하는데 원래 풍수사상이 신라 말 선승 도선국사의

 水根木幹(백두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개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대간꾼들은 충분히 가슴 뿌듯하게 생각할 만하다. ………

그러고 보니 대간은 죽었던 학문까지 살려내는 별난 재주도 가지고 있다

靑華山人은 이 중환의 호로서 그는 속리산 천봉만학이 하늘금을 그리고

남쪽으로 이어진 도장산과 청계산(두루봉, 대궐터산)을 넘어 봉황산까지

이어진다 청화산 아래에 있는 화북면 장암리는 마을 뒤에 웅장한 바위가

있어 장암리(長巖里)요, 용유리는 암.수 한쌍의 용바위와 용이 놀았다는

바위자리가 있다고 한다. 용유동은 병화(兵禍)가 침범하지 못하는 마을로

즉 전쟁이나 천재지변에서도 안심하게 살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이다

 

이 중환은 청화산 일대를 복지(福地)라고 했다.

청화산 아래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마을을 오래전부터 풍수적 측면에서

실제 소의 뱃속(牛腹洞)처럼 안온하다하여 십승지로 불리는 마을이다

시루봉, 청화산, 늘재, 문장대,천왕병, 형제봉, 갈령, 도장산으로 이어지는

둥그런 산줄기 안의 분지에서 바깥 세상으로 트인곳은 시루봉과 도장산

사이에 있는 용유리의 병천부락 뿐이니 이 일대가 牛腹洞이라고 한다

이 중환이 탄복을 했다는 청화산 정상

그러나 凡夫인 범여가 보기에는 그저 밋밋한 산에 불과하고 그나마 정상석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봉우리에 불과할 뿐일것 같은데... 仙人과 凡夫의 차이인가

고모치에서 이곳 청화산까지 오는데 거리는 그리 멀지 않으나 비 온뒤의 높은 습도,

그리고 미끄러운 등로에다가 암릉구간이라 예상보다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현재까지 걸어온 시간이 10여시간 가까이 걸어온 탓인지 평소에 좋지않은 오른쪽

무릎이 과부하가 걸리는지 시큰거리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가지고 다니는 에어스프레이로 뿌려보지만 큰 효과는 없다

동료산꾼들과 정상 옆에 있는 넓은 암릉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이곳부터

늘재까지는 나홀로 쉬염쉬염 걸어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청화산 정상 헬기장(15:30)

청화산에서 늘재로 내려가는 길은 끝까지 내리막길에다가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마사토 지역이라 상당히 미끄러워 아픈 다리를 질질끌며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연리지(?)

가지가 붙어서 자라면 연리지이고 줄기가 붙어서 자라면 연리목이다

전망암(15:50)

이곳에 서니 다음구간에 가야할 속리산 구간 능선들이 아련히 보이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급경사의 내리막 로프구간은 계속되고...

정국기원단(精國祈願壇:14:00)

碑文엔“白頭大幹 中元地” 등의 글구가 새겨져 있고 돌로만든 커다란

향로 2개가 양쪽으로 서 있다.

정국(精國)이란 용어는 조용하고 편안한 나라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백두대간 중원지라 한 것은

남한에서 동서남북의 정중간의 뜻이 아닐까

 

또한 백의민족 성지 부실기조 삼파수(白衣民族 聖地 不失基祖 三巴水)라 적혀있다.

부실기조란 백의민족인 우리 조상들의 얼을 잃지 않겠다는 뜻이며

삼파수란 세갈래의 물줄기 근원지란 뜻으로 민족 뿌리의 성지란 뜻이란다

정국기원단은 나라를 평안하게 해달라는 기원단과 의병장

이강년 장군의 공덕비를 겸하고 있다.

 

이 강년은 조설말기 의병장으로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부사과로서

선전관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을 하고 낙향하였다.

 

1885년 명성왕후 민비가 시해되자 1896년 고향인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 등 부정부패한 관리들을 효수(梟首)하고

제천의 의병장 유인석(柳麟錫)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어 문경새재, 조령 등에서

1907년 한.일 신협약으로 조선군대가 해산을 당하자 단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주 등을 공격하였고 이어서 싸릿재 유치(柚峙), 죽령 등에서 전과를 올리며

북진을 하여 1908년 가평전투에서 승리한 뒤 적의 기습으로 체포되어

순국하였다고 한다

 

내리막길 기원단의 맞은편에 속리산이 보인다

속리산이 우람한 남성의 산이라면 청화산은 아기자기함을 갖춘 여성스런 산이다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속리산 구간의 능선

암릉구간을 내려선 다음 소나무 군락지 옆사면을 따라서 간다

대간 옆에는 5년전 북진길에서는 없었던 콘크리트 임도가 나있고...

이정표를 만나서 조금을 더 내려가니...

원 대간 능선에는 장뇌삼을 심어 놨다고 해서 철조망을 막아놔 좌측으로 내려서니...

넓은 공터가 나오면서 성황당이 보이기 시작한다

늘재에 있는 성황당 유래비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은 늘재에 당(堂)이 있으니 백두대간 성황당이다.

이 당은 원래 탑의 신앙과 산신신앙을 혼성한 서낭신앙에서 유래하여

신라, 고구려 때는 횡액 질병을 막고 길손의 무사여행을 기원하는 소박한

민간 토속이었고 조선에 이르러 동제(洞祭)로 발전하여 오다가 잦은 국난을

당하면서 국태민안을 위해 성황신을 백신(白神)의 장으로 모시고 관민이 신봉하는

전통 신앙으로 승화되어 당(堂)도 지지(地誌)에 등재되어 왔다.

 

이러한 유서를 지닌 신당이므로 그 위치가 환경유적과 사실(史實)이 찬연하다

이를 개관하면 이 늘재는 낙한(落漢) 양대강의 분수령이다.

강의 원류를 따라 개통된 도로는 동남으로 영호남 서북으로 충청도와 서울로

통하는 장정(長程)의 깃점이며 고대의 라제(羅濟)의 국경으로 각축지대라

견훤산성이 축성되었고 근세에는 정기룡(鄭起龍)장군의 임란전첩지가 용화동에

있으며 세조대왕께서 백관과 함께 노니신 문장대와 용화온천을 비롯하여

고승(高僧)과 명장(名將)이 수련한 유적이 있다.

 

특히 한말 경술국치후에 의사(義士)들이 창의하고 만세운동이 전개될 때 통로가 되고

쉼터이며 도창의 대장 이강년(李康年) 선생의 묘소가 지척에 있다.

그리고 때맞추어 늘티에 전상석(全相錫) 처사가 우국일념으로 이 성황당을 창건하여

동민과 함께 지성기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백여년이 지난 이제 그의 증손 충환(充渙)이

유지를 받들고 이상배(李相培) 국회의원과 김근수(金瑾洙) 상주시장이 산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당(堂)을 중창하여 선인들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수범하고 후진의 교육장이 되게

하여 백두대간의 영기(靈氣)를 실감나게 하였다. 이에 그간의 유래의 유래와 성황당 중창의

경위를 약기하여 비를 세워 영원히 기념하는 바이다

늘재에 있는 성황당의 모습

5년전에 비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채 방치된 상태이다.

성황당과 유래비의 모습

늘재에서 만난 백두대간비

백두대간 큰 산맥이 동으로 뻗어와서, 금강산 먼저서고 속리산 뒤에섰네

미륵관음 양봉높아 자비세계 너그럽고, 충청, 경상도의 경계한 산 장엄하도나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백남 김 시빈 선생의 속리산이란 詩이다.

무릎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에서 컨디션 난조까지 겹쳐서 힘들게

11시간 25분의 긴 여정끝에 한 구간의 산행을 마친다

정말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이젠 장거리 산행에 자꾸만 자신이 없어진다

이젠 이 짓거리를 그만해야 할듯 싶다.

 

등산이란 숭고한 대자연과의 조우가 가져다주는 정신적 충만감과 이성의 자극,

건강에대한 자신감,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느낄 수있는 무한한 인간의 능력들...

이처럼 자연 그 자체에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경쟁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산에 들어서기만 하면 불타는 경쟁심으로 앞으로 돌진하듯 걷는 사람들도 분명있다.

 

이것은 일종의 기호와 같은것으로 그들을 무어라 탓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그들이 자연을 충분히 즐기며 걸어오는 사람들을 비난할 근거 또한 없다.

세상의 온갖 추악한 모의들이 산에서 일어나는 법은 없다.

 

석가나 모세, 예수의 예처럼 세상의 지혜들은 종종 산위에서 이루어진다.

산 위에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우며

도대체 저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아웅다웅 다투고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마련이다.

늘재(371m:16:25)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용유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32번 국도가 지난다.

고개 위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붙어진 지명으로 또 다른 표현은 양쪽에서

올라오는 고개가 완만하여 늘어진 고개라 하여 늘티,늘고개,늘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은 고개이기는 하지만 고개를 중심으로 민초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지역을 나누고, 물줄기가 갈라지는 고개이기에 어느 높은 고개 못지않고

크고 당당한 모습이다

 

늘재에 내려서면서 남.북으로 행정구역이 동시에 바뀐다.

북쪽인 충북쪽은 괴산군에서 보은군으로 바뀌고 남쪽은 백두대간 중에

장장 110km를 지나는 문경지역이 끝나고 상주지역으로 접어든다

 

패잔병처럼 힘들게 혼자 늘재에 도착하니 야심한 새벽에 우리를 안전하게

태워준 愛馬의 쥔장 박 사장님이 늘재에서 반갑게 우리를 맞아준다.

그걸로도 모잘라 500m 아래에 있는 마을회관과 정자를 섭외하여

거기까지 태워다주는 쎈스를 발휘하니 너무나 기분이 쿨하다...복받을 겨

장암2리 마을회관(상주시 화북면 소재)

마을회관에 도착하여 회관옆 수도가에서 팬티만 입은채로 노천욕으로 깔끔하게

알탕을 즐긴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회관옆 정자에서 막걸리로 뒷풀이를 한 다음

50km 떨어진 보은읍내로 들어와서 삼계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서울로 온다.

오늘은 울 산악회에서 가장 열공파인 하늘마음님께서 삼계탕을 쏘신다

식사가 끝난 다음에 총무님이 스폰서 한 수박으로 입가심하는데

하늘마음님과 수선화님 복 받을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