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22구간 - 늘재에서 갈령삼거리까지

by 범여(梵如) 2014. 7. 28.

☞ 산행일자: 2014년 7월 26일~27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약간 흐린 날씨에 무척 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0km(어프로치 1.3km포함) / 11시간 소요 (휴식시간 2시간 40분포함)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18명과 함께

☞ 산행코스: 늘재-629m봉-696m봉-밤티재-594m봉-916m봉-암릉구간-헬기장-문장대-문수봉-청법대

              경업대-신선대-입석대-비로봉-천왕석문-헬기장-천왕봉-1,058m봉-703m봉-667m봉-639m봉

              피앗재-803m봉-형제봉-갈령삼거리-헬기장-갈령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산외면, 내속리산면 / 경북 상주시 화북면, 화남면

 

지난주는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로 인해 온 국민들을 벤붕으로 빠트린 구원파라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 유 병언이 순천의 매실밭에서 백골로 발견되는 비참한 末路를 보았고

그의 아들이 오피스텔에 숨어 있다가 잡히기도 한데 이 나라가 도대체 어느게 정상인지는

모를 정도로 정말 혼란스럽다...모든게 탐욕과 집착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닐까?

 

지난 3월에 시작한 백두대간 南進이 이제 2구간만 남았는데 오늘은 그 동안 위험구간으로

분류되어 미뤄왔던 속리산 구간을 가기 위해서 밤 11시에 양재역에 도착하여 동료산꾼들과

반가운 해후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잠을 청한다

버스는 마지막 휴게소인 당진~상주간 고속도로 화서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후에 오늘의

들머리인 늘재(상주시 화북면 소재)를 가는데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愛馬의 쥔장 박 사장이

네비 따라서 가다가 알바를 하는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1시간 늦게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늘재(380m:03:50)

경북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와 입석리 경계에 있는 재로서  '비탈이 길게 늘어진 재'란 의미라고

한다고 하는데 어둠속이라 뭔가 뭔지를 구분하지 못할 것만 같은데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을

나타내는 야광 간판이 산꾼을 반기는데 산꾼이 아닌 버스가 30분정도를 알바하는 바람에 차에

내리자마자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 늘재에서부터 속리산 문장대까지 단속구간이라 단속요원이 출근하기 전에

이 구간을 통과해야 하기에 밤티재까지는 베낭을 차에두고 스틱만 가지고 출입금지

목책을 넘어서 속리산으로 향하는데 어제 내린 비의 영향인지 높은 습도에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가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예고한다... 오늘도 범법자의 신세지만 내 나라

내 땅을 당당하게 걷겠다는 일념 하나로 백두대간 길을 나선다

무명묘지(03:55)

늘재에 올라선 지 5분만에 등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무명묘지를 지나고 다시 편안한

안부 능선을 걷는데 베낭을 메지 않은 탓인지 동료산꾼들의 발걸음이 상당히 빠르다.

좌측 대간길 아래에 있는 윗늘티 마을의 가로등만이 이곳에도 사람사는 곳임을 알려준다

안부를 지나 지도상의 629봉을 지나니  약간의 오르막에 암릉구간이 시작되고  새끼 손가락보다도

적은 로프가닥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암릉구간을 통과하는데 높은 습도에다 약간의 안개, 바람 한 점이 없다

696m봉 갈림길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한없이 알바하는 구간으로 대간 산꾼들에게 알바 코스로

유명한 곳인데 더군더나 이곳은 낮에는 단속요원들 때문에 통과할 수 없는 곳이기에

알바하기에는 더 없은 좋은 곳이다... 범여도 북진길에 짙은 안개속에 1시간 이상

소득도 없이 알바를 한 곳이기도 하다

696m봉(04:40)

갈림길에 바로 옆에있는 696m봉에 오르니 약간의 안개가 살짝낀 암릉구간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가 5년만에 찾아온 범여를 반긴다... 이곳에서 동료산꾼들과

선 채로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와서 좌측 능선으로 내려선다

696m봉을 내려서 약간의 암릉구간을 지나니 무명묘지 1기가 나타난다

무명묘지 1기가 나오고 직진의 뚜렸한 길이 나오는데 이곳으로 가면 동물이동통로로 가는

길인데 이곳으로 가도 대간 길이긴 하나 급경사의 절개지라 산꾼이 오르긴 힘이든다

무명묘지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면 수로가 나오고 수로를 따라 내려서면 밤티재가 나온다

밤티재에 서 있는 출입금지 표지판

정녕 동.식물과 대간 산꾼이 공존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밤티재의 개구멍을 통과하는데 울 산악회 아리돌인 주원아빠는 뭘 저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이다...역쉬 젊음이 좋긴 좋아...

밤티재(栗峙:500m:05:05)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서 충북 괴산군과 보은군을 잇는 고개로 997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밤티라는 지명유래는 이곳이 산이 높은 지대라 농작물이 잘되지 않아 마을 전체에

밤나무를 심었는데 밤 율(栗) 고개 티(峙)를 써서 밤티재라고 부르면 율치(栗峙)라고도 부른다

밤티재에서 잠도 못자고 우릴 기다리고 있는 愛馬의 쥔장 박사장에겐 좀

미안하긴 했지만 베낭을 메지 않고 걸은 탓에 예상 시간보다도 15분 빨리

도착하여 버스에서 베낭을 챙겨 서둘러 펜스 뒤의 등로로 올라 속리산으로 향한다

移葬된 묘자리를 지나니 또다른 무명묘지 한 기가 대간길 가운데 있다.

이곳에서 동료 산꾼들과 물 모금 마시고 본격적인 속리산 오름길을 시작한다

본격적인 암릉구간으로 접어든다

 

등로에서 멋진 소나무 한그루를 만나고...

 

암릉구간을 시작하기 전에 아침 햇살이 비치는 속리산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되고...

속리산(俗離山)

속리산은 조선 8경의 하나로 손색이 없을만큼 빼어난 암봉을 자랑하는 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9개의 빼어난 봉우리가 있어서 구봉산(九峰山)으로 불렀다가

신라시대에서 부터 속리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속리산의 유래는 신라 말 진표(眞表)율사가 법주사를 중창하기 위해

보은 땅을 들어서는데 밭을 갈던 소들이 진표율사를 알아보고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들이 저럴진대 하물며 우리야’ 하며 대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길로 낫과 괭이를 버리고

속세(俗)를 떠나니(離)... 그 이후로 속리산이 불렀다고 한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소금강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호서제일의 가람인 법주사가 있어 유명해진 곳으로 1970년 3월20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칡넝쿨, 할미꽃, 모기가 없어서 3無의

산으로 유명하며 경북 상주와 충북 보은에 걸쳐있는 탓에 상주 속리산,

보은 속리산으로 불리운다.

누워서도 힘들고 기어서도 힘이드니 어쩌란 말이요

힘든 곡예를 하면서 암릉구간을 통과한다

뚱뚱한 사람들이 이 구간을 포기해야 할 듯 싶다

오늘 암릉구간은 나같은 숏다리는 참으로 많은 비애를 느낀다

짧은 다리로 아슬아슬하게 암릉구간 지나니 다리의 힘줄에 너무나

많은 무리가 가는지 오른쪽 도가니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암릉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구간을 지나니...

또 다시 좁고 좁은 암릉구간을 지나야 한다

좌측 능선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칠형제 바위가 멋진모습을 연출한다

지나야 할 암릉구간의 모습

다시 고도를 높이면서 호젓한 산죽 능선을 걸어도 보고...

오늘의 가장 난코스인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마치 여인들의 자궁같은 코스로 시간이 상당히 소요가 되는데

여인들의 産苦를 알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한 사람씩 조금만 로프에 매달려 조심스럽게 암릉구간을 통과한다

암릉구간의 구멍으로 들어선 다음에...

앞에가는 울 산방 가장 멋쟁이 장동건님도 오름길이 아찔한 모양이다

가장 어려운 구간을 힘들게 통과하니...

또 다른 암릉구간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가야할 문장대와 관음봉이 멋진 모습으로 산꾼을 유혹한다

마지막 암릉구간을 통과한 다음에 산죽군락지를 지난다

산꾼을 겁박하는 무인 감시 카메라

산죽길을 지나면서 접어던 스틱을 펴고 등로로 올라서니 국공파들이 설치한

감시 카메라에서 단속구간에 들어왔으니 빨리 나가라고 방송을 한다

쪼금만 지둘러(기다려)... 있으라 고사를 지내도 안 있을테니까.

드디어 단속구간을 벗어난다... 던도 10만원 벌고...ㅋㅋㅋ

내 나라 내 땅도 맘대로 걷지 못하는 심정... 우야면 좋을꼬

단속구간을 벗어나니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피로도가 몰려온다.

문장대 헬기장(07:30)

문장대 주변에는 580여종의 동물과 670여종의 식물이 서식한다고 하며

특히 희귀식물인 백색 진달래를 비롯한 주모과 금낭화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문장대 정상의 모습

문장대(文藏臺:1,033m:07:35)

경북 상주시 화북면과 충북 보은군 속리면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에서 비로봉에 이어서 2번째 높은 봉우리로 흰 구름이 항상 정상에

걸려 있다고 해서 운장대(雲藏臺)라고 부른다.

평생에 문장대를 세번 오르면 극락을 간다고 했다

 

운장대라 불리운 문장대는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가 복전암에서

감로수를 마시며 요양을 하고 있을때 꿈속에서 월광태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 현몽하여

운장대에 올랐더니 “삼강오륜(三講五倫)”을 명시한 책 한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하여 문장대로 불리웠다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가히 3천명이 앉을만하다고 과장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정상에 서니 온 사방이 두루 보이는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바로 앞은 관음봉은 손에 잡힐듯하고 그 너머로 묘봉, 상학봉, 미남봉으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관음봉 넘어의 묘봉은 산세가 빼어나고 아름다워 묘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문장대 정상석이 2개나 서 있는 넓은 광장에서 동료산꾼들과...

문장대의 넓은 광장에서 정상으로 올라선다

문장대 정상에서 바라본 관음봉(觀音峰:985m)

법주사 북쪽 계곡 안쪽에 있는 봉우리로 문장대 서쪽으로 큰 골 건너에 있으며

관음(觀音)이란 관세음보살을 말하며 문장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봉우리이다.

보살은 대자대비하여 중생이 고난중에 열심히 그 이름을 외면 구제하여 준다는 보살이다.

택리지를 저술한 이 중환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청화산은 안개에 휩싸여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속리 주능선의 모습

속리산(俗離山)은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한반도 산줄기의 근원을 이루는 12종산의 하나이다.
그 산세가 웅대하고 기묘한 바위봉우리들이 구름위로 솟아 있어
옥구슬이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소금강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기암괴석과 맑은 물, 울창한 산림은 천년고찰 법주사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대한 8경"에도 꼽힌다.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봉, 8대, 8석문으로 대표된다.
8봉은 천황봉을 비롯해 비로봉, 문수봉, 보현봉, 길상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이고,
8대는 문장대를 비롯해 입석대, 신선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를 말하며,
8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을 일컫는다.

문장대의 암릉 곳곳에는 뜻모를 한자들이 암각되어 있다.

문장대 정상에 본 칠형제 능선과 산수유릿지

속리산국립공원 화북 공원 관리소에서 청법대로 연결된 능선으로

1995년 청주 청심산악회에서 개척하였는데 개척당시 9피치를 개척하던

김 선주씨가 추락하여 사망한 곳으로 故 김선주씨를 기리는 뜻에서

9피치 40m 벽을 선주벽이라 명명했다하며 그 때가 산수유가 필 무렵이어서

산수유릿지라고 부른단다

俗離 36景

속리산은 예로부터 빼어난 山水들이 즐비해 俗離 36景이라 하였는데

그 중에서 第一景이 이곳 문장대로 옛부터 시인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문장대의 이곳저곳을 두루 살핀 다음에 문장대 아래의 광장으로 내려선다

문장대 광장으로 내려가는 호젓한 길

아침만찬(07:50~08:20)

10여전 문장대 올랐을 때는 이곳에서 매점이 있었던 자리였는데

지금은 철거되고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 식사 장소로는 최적이다

이곳에서 동료 산꾼들과 아침 만찬을 즐기며 막걸리 서너잔을 마시니

단속구간과 암릉구간을 통과하며 굳어진 긴장이 풀리니 피로가 몰려온다

30분간의 만찬을 즐기고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에 신선대로 향한다

문장대 광장에 있는 이정목

문장대 광장의 모습

광장에서 출발하여 국립공원의 편안한 길을 걷는데 스마트폰에 깔아논

트랭글의 앱에서 청법대를 지나간다고 알려주는데 그냥 지나친다

청법대(聽法臺)를 지나면서 바라본 천왕봉과 비로봉의 모습

 

청법대(聽法臺)는 5개의 봉우리가 마치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좌대(座臺)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빠져 넋을 잃고

헤매다가 이 봉우리에서 불경을 외우는 소리에 제 정신을 차렸다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청법대는 문수봉과 신선대 사이에 있는 암릉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오를수가 없으며 샛길로 돌아 우뚝 선 바위로 오를수가 있다고 한다

청법대를 우회하여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철난간이 나온다

철난간을 지나서 다시 돌계단을 오르니 국립공원에서 유일한 사설매점이 나온다

신선대(神仙臺:1,026m:08:50)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주막이 있다.

옛날 속리산의 빼어난 절경에 혼을 빼앗긴 어느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서 백학이 수없이 날아오르며 춤을추고 있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이 고승이 평생 원하는

신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떠나 달려 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그곳을 바라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을 달려갈 엄두를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고있는 봉우리를 신선대(神仙臺)라 불렀다고 한다

신선대에서 바라본 청법대와 문수봉의 모습

신선대에서의 파티

오늘 산상파티의 주최자는 울 산방에서 가장 주력이 빠른 천리마님이시다

천리마님께서 동료산꾼들을 위해 이곳에서 파는 귀한 산당귀주에다 감자부침개

묵무침을 먼저가서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동료들이 조금전에 아침을 먹은 탓이지

다들 달라들지 않으니 김포오야지님이 조금은 민망했던지 호객행위를 한다

워낙 酒님을 좋아하여  2잔이나 연거푸 마시니 그야말로 꿀맛이다

천리마님 잘 먹었습니다... 복받을깁니다

다시 호젓한 산죽길을 따라서 천왕봉으로 향한다

산죽길 너머 나뭇가지 사이로 속리산의 멋진 구간이 보이는데 환상적이다

왜 속리산이 우리나라 12대 명산이며 조선 8景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멋진 속리산의 암릉구간

단지 그곳으로 오를 수 없다는 것이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경업대(慶業臺) 갈림길(09:05)

신선대에서 산죽길로 조금을 더 내려오니 우측으로 경업대와

법주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경업대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400m정도 내려가야 하는데 속리산 8臺중의 하나인 경업대의

지명의 유래는 임 경업장군이 독보대사(獨步大師)를 모시고

심신을 단련했는 곳이라 한다

입석대 앞 이정표(09:15)

이곳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천왕봉으로 향한다

나무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은 입석대의 모습

입석대(立石臺)

신선대와 비로봉 사이에 있으며 조선 중기의 임경업 장군이 7년동안 수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청법대와 마찬가지로 매우 험준하여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다

조선조 인조(16대임금)때 임경업 장군이 6년동안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단련할 때

그가 어느정도 단련이 됐는지 알 수가 없수가 없다.

 

하루는 석굴에 앉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의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다. 장군은 정신을 차려 그의 말을 들으니 ‘마주 보이는 석벽위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의 비석처럼 세워 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 들린다

장군은 경업대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세우려 했으나 일으키지 못했다.

이에 장군은 그의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수련하여 수도 7년째 되던 해에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데 성공을 했는데 그 후부터 ‘돌을 세웠다’해서 입석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비로봉(毘盧峰;1,032m:09:30)

보은군 내속리면과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진표율사가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 안에서 좌선을 할 때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비췄고 이에 율사께서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햋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있었다

율사께서 황급히 합장배례를 한 후에 그곳을 달려가보니 비로자나불께서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

진표율사께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모든것을 두루 비친다는 뜻)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봉우리를 비로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로봉 정상엔 오르지 못하고 암릉사이를 통과한다

고릴라 바위를 바위를 지나 이정목에서 다시 철계단을 내려섰다 다시 산죽길로 올라선다

천왕봉 가는길엔  각종 기암괴석들이 마치 수석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멋지게 펼쳐지는 속리산의 암릉을 옛 선인들은 속리산을 말하기를 이 산의

연봉들을 푸른 연꽃 또는 玉으로 빚은 연꽃 같다고도 하여 소금강산 또는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이라 하여 그 승경을 조선8경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사람 키보다도 큰 산죽길을 따라서 천왕봉으로 향한다

산죽길을 지나면서 뒤돌아본 암릉구간의 모습

신라 말기의 문신이자,유학자,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이곳 속리산의 비경에 반해 다음과 같은 멋진 시 구절을 남겼다고 한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은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려하고...
山非離俗 俗離山(산비이속 속리산)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은데, 사람은 산을 떠나려 하는 구나~!

조물주의 멋진 조화로 이곳은 마치 수석 전시장을 옮겨 놓은듯 환상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과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부정(否定)에 의해 새로움을 만들어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불일치 없는 완전한 조화는 없을지라도, 행여 나 스스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개인적,

가족적,민족적 이기심을 이 산중까지도 짊어지고 오르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배움을 느낀다면, 지나오고 나아갈 행로가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이 대간길에서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남은

삶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으리라...

멋진 암릉구간을 지나 내리막을 내려서면서 만난 이정표

배석대(拜石臺) 갈림길

천황봉에서 상고암으로 내려오는 길가에 있는 바위로 사람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608년에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과 공주 덕만(후에 선덕여왕)이 왕자 법승을 데리고

속리산에 와서 국운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기도하였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매일 아침마다 현재의 배석대 바위 위에서 국왕이요,

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바위가 하루는 덕만공주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배석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왕석문(天王石門:09:40)

배석대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천왕석문

마치 지리산 통천문을 지나는  느낌이지만 내가 보기엔 통천문보다 훨씬 나은 느낌이다

머리를 숙이지 않고는 갈 수 없는게 마치 요즘 인간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추태를 꾸짖는 것 같다... 오만과 탐욕을 다 버리고 下心으로 살아가라고...

석문을 지나니 산꾼들의 염원을 담은 조그만 돌탑이 나온다.

나 역시 이곳에다 돌멩이 하나를 얹어놓고 길을 떠난다

우측에는 엄청난 바위를 받치고 있는 나무 한그루를 만나는데

前生에 무슨 業報를 지었길래 저렇게 힘든 삶을 살아갈까?

상고암(上庫庵) 갈림길(09:55)

속리산은 주봉이 천왕봉이지만 문장대의 명성에 가려 푸대접을 받는곳이다

흔히들 속리산하면 문장대란 공식이 정답인양 알지만 천왕봉이 엄연한 주봉이다

법주사 방향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속리산을 능선 위에서 보면 W자 형태로 능선이 펼쳐져 있다.

좌측이 문장대이고 우측이 천왕봉이며 그 가운데 우뚝솟은 봉우리가 비로봉이다

이곳이 속리산 전체를 가장 잘볼 수 있는 곳이다.

상고암 산신각 뒤로 올라가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면 문장대도 보이고 천왕봉도 보인다

마치 기암괴석을 모아논 암릉 전시장 같은 느낌을 주는곳...

속리산 전체 계곡 구석구석을 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이곳 상고암이란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539~575) 14년(553년)에 천축에서 불법을 구하고 귀국한 의신조사에

창건된 가람으로서 불법을 안주할 수 있는 탈속의 가람이란 뜻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이 험준한 이곳이 속세를 떠니 불법의 진리를 펼칠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다고 한다

또한 법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중건됐는데 지금에 남아있는 문화재는

모두 이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였고 고려 태조1년(918년)에

증통국사가 중건하였으니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추춧돌만 남아 있는 것을

1626년(조선 인조4년)에 벽암대사가 옛건물을 모방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1891년(고종 28년)에 탄응선사가 머물면서 15년간에 걸쳐 중수하여 오늘의

법주사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법주사 대웅보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하고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둘레 390㎝로서 우리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고, 오른쪽 노사나불의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은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 양식으로, 5층은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진 펌)

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로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년)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율사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으며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대찰(大刹)답게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한 법주사

지금 법주사 회주로 계시는 월탄 큰 스님과 얼마전에 법주사 주지로 계셨던 지명 큰스님 등

지명 큰 스님께서는 저와 한 달에 한번씩 모이는 월례회 멤머이시기도 하다.

늘 겸손한 자세로 대하시는 모습이 마치 이웃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모습

나처럼 미혹한 중생에겐 옆에서 뵙기만 해도 환희심이 절로 나는듯 하는데

늘 총무 소임을 맡고있는 나에게 뭣이던지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늘 고맙기만 한 큰 스님이시다

장각동 갈림길(10:05)

좌측으로 올라서면 갈림길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이곳에서 내려서면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상오리 칠층석탑과

장각폭포가 나오는 곳으로 장각동(長角洞)은 소의 뱃속모양의 명당터를

일컫는 곳으로 우복동(牛腹洞)의 쇠뿔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이란다.

장각동 갈림길에 있는 헬기장

천왕봉(天王峰:1,058m:10:10)

충북 보은군 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속리산 능선 9개의 봉우리중에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 속리산의 主峰이긴 하지만 문장대의

유명세에 가려 주봉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옛날 대자재천왕이 10월 인일 축시에 이곳 천왕봉으로 내려와

45일동안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천왕봉 정상에 서면 속리산의 9봉9대(九峰九臺)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정상에서 우측으로 50m 정도 내려서면 대목재가 나오는데

우리나라 십이지종산(十二之宗山)의 하나이자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쳐 이곳부터 한남금북정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천왕봉에서 가지를 쳐 안성 칠장산까지 와서 북쪽으로 김포 문수산

아래 보구곶리에서 맥을 다하는 한남정맥과 남쪽으론 칠장산에서

태안 앞바다인 안흥만에서 맥을 다하는 420km의 금북정맥의 시발점이 이곳이다

천왕봉 정상에서 바라본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들

천황봉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방을 조망하며 삼파수(三派水)의 갈래를 훑어본다.

대간길 동쪽 장각마을로 흐르는 물은 농암천(籠岩川)을 거쳐 낙동강

으로 이어지고,남쪽 대목리로 흐르는 물은 삼가저수지(三街貯水池)를 거쳐 금강을 이루겠지.

서쪽의 은폭동 폭포에서 놀던 물은 사내천(舍乃川)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질 것이고...

 

천왕봉은 바위 덩어리의 다른 봉우리와는 달리 둥글고 덕스러운 육산이다.

여기서 한반도의 중요한 뼈대가 하나 갈라져 형성된다. 한남금북정맥이다.

영취산에서 낙동강, 섬진강, 금강 등의 三派水를 통해 섬진강 유역을 대신한 금강유역이

여기 천왕봉에서 한강(남한강)유역에게 자리를 내주는 곳이다.

천왕봉 정상 삼각점(△속리 11 / 2003 재설)

맑은 날 천왕봉에 서면 발 아래 펼쳐지는 산들의 모습은 마치 천왕봉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듯 장엄하다.

속리산을 12대 宗山의 하나로 삼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과 떨어져 있기를 희망했기에 세상의 경배를

받아온 속리산의 아름다움은 8봉, 8대, 8석문의 24절경을 꼽는다.

8봉은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수정봉을 이르고,

8대는 문장대·입석대·신선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봉황대·산호대를,

8석문은 내석문·외석문·상환석문·상고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추래석문을 이른다.

 

절경이 3종류 8가지로 정리된 이유를 불교의 숫자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3은 불교에서 이르는 3개의 세계를, 8은 불교의 수행 방법에서 기인한 팔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라 했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에 비추는 달은 천 개의 모습이 된다.

속리산은 하나지만 그 뜻은 보는 사람마다 걷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맞다’ ‘그르다’ 다툴 일은 아니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장각동의 모습

천왕봉 정상에서 주위의 仙景을 감상한 다음에 우측으로 내려서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갈령과 늘재를 관문으로 동쪽의 상주 화북면 일대는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의 하나인 우복동천 이다.

한남.금북정맥 분기점(10:30)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10분간의 급경사로 내려서니 안부 능선이 나오는데 대목재이다

한남. 금북정맥(총 도상거리 158.1km)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왕봉(1057.7m)에서 분기하여 북으로는

한강(총길이 494.5km)과 남으로는 금강(총길이 401km)의 분수계를 이루며, 충청북도를 북서방향으로

연결하고,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까지 백두대대간에서 남한의 정중앙을 잇는 큰 산줄기이다.

한남 금북정맥은 칠장산에서 3정맥의 분기점으로 갈라지며, 충북 보은의 구봉산등 500m급의 많은 봉우리를

넘으며 이어지다 청주의 선두산과 백제시대의 유명한 상당산성을 지나 괴산의 좌구산을 넘고, 음성의 보현산과

소속리산을 넘으면서 9구간 정도 꾸준히 500m~600m급의 정맥 길로 줄기차게 이어오다 음성의 금왕읍을

통과하면서 표고 150m 이하의 구릉지대(도상거리 20여km)를 지나면서 끈질기게 이어지게 되고, 다시

이천의 마이산을 넘으면서 안성의 칠장산에 올라 한남 금북정맥은 분기된다.

 

금북정맥(총 도상거리 282.4km)은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며, 안성땅을 지나 충남의 천안과 예산의 산줄기를

거처 홍성과 당진, 서산을 지나 태안의 지령산에서 서해바다로 그 맥을 가라앉히고, 한남정맥(총 도상거리 178.5km)

칠장산에서 북서쪽으로 경기도 용인과 수원의 산줄기를 거쳐 부천과 인천을 지나 김포의 문수봉에서 한강하구로

그 맥을 가라앉히는데 3정맥 총 도상거리 619km에 달하는 큰 산줄기이다

대목재(10:40)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마을과 보은군 내속리면 대목리를 잇는 고개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56대)은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영화를 누렸지만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월악산 덕주사에

누이 덕주공주를 두고 망국의 한을 품고 백두대간 하늘재를 넘어 소백산

국망봉에서 나라잃은 설움의 한을 달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행적이 묘연했던

경순왕 행적비는 상오리 장각동에 있다고 한다

대목재에서 오르막을 치고 올라서니 구조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오르막을 오르니 편안한 안부가 나온다.

오랫만에 대간길을 나선 주원아빠와 깔끄막님과 같이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이젠 얼마남지 않은 구간에 이별을 고해야 할듯 싶다

특히 주원아빠... 울 아들과 비슷한 또래인 젊은이가 백두대간 탄다는 게

나에겐 그저 신기하고 기특할 뿐이다

나도 아들하고 대간길을 걷고 싶은데 무술 유단자이면서 유격대 조교 출신인

아들은 군대생활 하면서 산에 질려 버렸는지 산에가자 얘기만 하면 도망가버리는데...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무명묘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온 탓인지 우측 무릎의 통증은 점점 심해진다

이 자리에서 그냥 주저안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

이제 천왕봉에서 겨우 1km밖에 지나오지 않았는데...

703m봉(11:00)

멋진 암릉구간이 나오면서 시야가 확 트여있어 저 멀리 뾰족한 구병산이 보인다

멋진 선경을 자랑하는 충북 알프스의 능선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노루, 깔끄막님과 주원아빠와 함께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다

베낭에서 맥주와 막걸리를 꺼내 마시고 과일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 피앗재로 향한다

암릉구간을 내려서서 안부 능선을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725m봉(11:25)

안부 능선을 걷는다... 703m봉에서 맥주를 같이 마셨던 동료산꾼들은 다들 도망가고(?)

천리마님만이 나와 동행을 하는데 좌측 능선으로는 지나온 천왕봉이 아쉬운듯 쳐다본다

離別을 너무 아쉬워하지 마소... 만나면 헤어지는게 世上事 인연이 아니겠소

안부에서 살짝 내려와서 옆길 사면으로 등로를 이어간다

엊그제께 비가 내린 탓인지 나뭇잎 사이로 싸리버섯이 보이기 시작한다

동료산꾼 천리마님과 주위에서 부드러운 싸리벗섯을 조금 수확하는데

된장찌게에 넣어서 먹을 한 끼는 되겠다

667m봉(12:05)

장각동과 백두대간의 갈림길이다. 대간길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90도 꺽어진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유명한 장각폭포와 금란정이 있는데 폭포 아래 널찍한

소(沼)와 절벽위의 정자와 소나무가 어울어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다

장각마을에는 상오리의 7층 석탑(보물 제683호)이 있고 이곳은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

낭만자객, 이 순신 등 드라마 촬영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무릎 통증으로 인해 더 이상 걸을 수 없을것 같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지만

후배 산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않아 억지로 참고 다시 피앗재로 향한다

고려 중엽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오리 7층 석탑(2011.03.13 한남.금북정맥 때의 사진)

아름다운 자태로 뭇 사람들을 유혹하는 장각폭포와 금란정의 모습(2011.03.13 한남.금북정맥 때의 사진)

667m봉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지금부터는 아무래도 힘이들 것 같아서

동료산꾼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김포오야지, 주원아빠와 형제봉으로 향한다

흰털 깔대기 버섯

향이 좋으나 식용 버섯인지 독버섯인지 구분이 안되기에 식용하지 않은게 좋다

흰색 갓에 흰색 털이나서 눈이 얕게 쌓인것처럼 보여 이름이 붙혀진 것으로 보이며

여러개의 버섯이 큰 원을 그리면서 자라는게 특징이라고 한다

며칠전에 비가 온 탓인지 독버섯으로 분류되는 버섯들이 많이 보인다

안부에 내려섰다가 다시 암릉구간으로 오른다

무명봉으로 오르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다시 내려서니 피앗재이다

피앗재(12:45)

보은군 내속리면 대목리 만수동에서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옛날에 첩첩산중이라 피난지로 적합한 곳이어서 ‘피화재(避禍峙)’로 불렀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이 되어 피앗재로 불리웠다고 한다.

옛날에는 보은의 만수동 사람들이 상주 화북장을 보러 다녔던 중요한 고갯길이었으며

만수동 계곡은 풍광이 뛰어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란다

전쟁이 일어나 팔도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와서 살아온 탓에

아직도 이곳에서는 전국 각지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도착하니 어디서 출발한 지는 모르지만 대간 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부터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형제봉까지는 魔의 구간이다

지쳐있는 상태에서 다시 치고 오르려니 참으로 힘이든다

피앗재에 서 있는 이정목

형제봉 가는길은 참으로 힘이든다

이름없는 무명봉을 몇개나 넘었는지 기억도 나지않을 만큼 힘이든다

803m봉(13:15)

803m봉 정상은 암릉이라  오를수가 없어서 좌측 능선에 선답자의 시그널이 있다

사면길에서 바라본 803m봉 정상의 모습

형제봉 가는 길에서 만난 잔나비 걸상버섯

이제 형제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가뿐 숨을 쉬면서 안간 힘을 다해 오르막을 오른다

피앗재를 거쳐 형제봉에 오른다

형제봉에서 뒤를 돌아다보면 전혀 기대치 않았던 조망을 할 수 있다.

지나온 천왕봉-비로봉 등을 연결하는 능선이 마치 하나의 봉우리처럼 보인다.

속리산은 여타 산처럼 봉긋한 하나의 봉우리가 정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연결 능선이

집단적으로 어우러져 하나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모양이다.

형제봉(兄弟峰:832m:13:30)

보은군 내속리면과 상주시 화북면과 화남면 사이에 있는 삼면 경계봉으로

커다란 암릉 2개가 함께 솟아 있다고 해서 형제봉이라고 부른단다

피앗재에서 상당히 고도를 높혀서 올라서니 충북 알프스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속리산 능선에서 구병산으로 이어지는 충북 알프스 능선이 장쾌하다

형제봉 정상에서의 인증샷

형제봉 정상에서 바라본 작약지맥 능선의 모습

형제봉 정상에 걸려있는 선답자들의 시그널

형제봉 정상에서 바라본 상주쪽 속리능선

같은 마루금內에서 같은 봉우리를 보아도 느낌이 이렇게 다르니 만약 마루금 바깥(外)에서 보면 어떨까.

다행히도 속리산 부근에는 이런 산이 있다. 천왕봉 동쪽 우복동 건너에 자리 잡은 도장산이다.

도장산에 서면 형제봉-천왕봉-입석대-문장대 능선이 거침없이 一字를 그리고 있다.

하늘에 걸린 병풍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알 수 있다.
속리산 옆에 이런 산(도장산)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안에서도 보고

바깥에서도 보고 해서 균형잡힌 객관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미 알아버린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그 사물이나

사람이 지닌 새로운 면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 대간의 가르침이다.

667m봉에서 먼저 출발한 탓에 형제봉에 먼저 도착하여 웃옷을 벗어서 좀 말리고

간식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후미팀들이 도착을 한다

이젠 갈령까지 내리막길이라 조금 수월할 것 같아서 혼자서 먼저 천천히 걸어간다

갈령(葛嶺) 삼거리(680m:14:20)

삼거리 정상에는 산행 안내판과 이정표, 원형으로 만든 쉼터가 있으며

직진을 하면 백두대간 길이고 좌측으로 내려서면 갈령으로 가는 작약지맥길이다

작약지맥(芍藥枝脈)은

백두대간 속리산 형제봉 동쪽 0.6km지점의 721봉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북으로 영강, 남으로

이안천을 가르며 영강과 이안천이 합해지는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서 맥을 다하는 48km의 산줄기다.

영강은 태봉리에서 이안천 물을 보탠 다음 5km 더 흘러 낙동강에 들어간다.

북으로는 백두대간과 운달지맥, 남으로는 숭덕지맥을 건너보며, 두루봉(874m), 칠봉산(597m),

작약산(774m), 수정봉(486.5m)을 거쳐 함창읍 태봉리 논 한가운데 섬처럼 솟은 태봉산(106m)을 끝으로

산줄기를 마감한다.

행정구역은 상주시 화북, 화남면계로 출발을 하고, 칠봉산, 작약산을 지나면서 문경시계와 접한다.

상주시 함창읍에서 끝을 맺는데 상주시의 최북단을 달리며 사실상 상주시의 북쪽 울타리 역할을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함창IC를 건너가야 하고, 함창읍 시가지를 관통하게 되므로 마지막

구간은 대부분 산길이 아닌 도로주행이 되겠다

형제봉에서 이곳까지 나홀로 내려온다... 급경사를 내려온 탓인지

오른쪽 도가니에 불이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후끈거리며 통증이 몰려온다.

원형의자에 베낭을 내려놓고 물한모금 마신 다음에 에어파스를 무릎에 뿌리니

기분상 조금은 나은 느낌이다... 5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갈령으로 향한다

갈령가는 내리막길의 좌측 능선으로 조금전에 지나온 형제봉이 보인다.

홀로 산행길에 유일한 동반자인 MP3를 듣는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흥얼거린다... 내가 선택하여 걷는 길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 인생 고달프다 울어본다고 누가 내 맘 알리오...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 아니냐...천년을 살리오 몇백년을 살리오

세상은 가만 있는데 우리만 변하는구료...부초가은 내 인생♬♪

십승지의 하나인 상주 우복동의 모습

풍수가들은 이렇듯 ‘속리산 천황봉, 청화산, 도장산을 잇는 삼각형 산줄기의 형세가 마치

속세를 떠난 유·불·선의 대가들이 모여 앉아 담론하는 형국’이라 말한다.

그 삼각형 한가운데 자리한 화북의 용유동(龍遊洞)은 민초들이 절박하면서도

질박한 꿈을 모아 이뤄낸 이상향이다.

용유동은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신비한 마을.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다 하여 우복동(牛腹洞)이라고 부른다.

 

우복동의 지세를 보면 서쪽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바위병풍에 첩첩이 막혀있다.

또 북쪽은 백두대간 늘재를 넘어야 괴산으로 연결되며, 남쪽은 갈령을 넘어야 멀리

상주로 갈 수 있는데다가, 고개를 넘지 않는 유일한 관문인 동쪽의 문경 가는 길은

가파른 벼랑이 연이어 있는 쌍룡계곡이 막고 있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으나 이처럼 예전엔 접근조차 어려운 깊디깊은 산골이었다.

결국 우복동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 하여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이

영원한 이상향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복동 믿음의 중심지인 용유동 길가엔 ‘洞天’이라 쓰인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누운 바위

표면에 새겨진 멋들어진 글씨는 조선의 명필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친필이라 전한다.

우복동의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분명 우복동천(牛腹洞天)일 것인데, 우복동을 함부로 밝힐 수가 없으니

양사언이 지명을 밝히지 않고 그냥 동천이라고만 쓴 것”이라고 말한다.

 

멋진 암릉구간을 지나서 급경사로 내려오니 군부대 교통호가 있고 잠시후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14:48)

갈령 내려서는 길에서 만난 갈령 도로개통 기념비

갈령(葛嶺:14:50)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49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주변에 칡이 많다하여 ‘칡 갈(葛)’字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고 있는 곳으로 십승지중의

하니인 상주 우복동이 있으며 6.25동란 때 한국군 제7연대가 인민군을 맞아 첫 승리한

화령장 전투중에 격전지로 유명한 곳으로 상주에서 보은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도로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4차선의 넓은 도로가 지나가는 갈령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지금은 나처럼 대간 산꾼이나 찾는 한적한 고개가 되어 버렸다

갈령 표시석 뒷면에 새겨진 갈령 유래의 내용

갈령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동료산꾼이 건네준 션한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인 다음

愛馬를 타고 상오리에 도착하여 박사장님이 섭외한 상오리 마을회관 수돗가에서

홀라당 벗고 시원하게 알탕을 하고 식사를 하러 화북면 소재로 가서 김치찌게에다

소주 한병을 마신 다음에 서울로 오는 버스에서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