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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일반 계시판

내일이 동지(冬至)

by 범여(梵如) 2013. 12. 21.

동지(冬至)

  24절후의 스물두 번째 절기. 일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개관
동지(冬至)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동지선(남회귀선) 곧 황경(黃經) 270도의 위치에 있을 때이다.

그래서 양력 12월 22일이나 23일 무렵에 든다. 양력으로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中冬至), 그믐 무렵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태양력인 동지에다가 태음력을 잇대어 태음태양력으로 세시풍속을 형성시켜 의미를 부여하였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하였다.

태양의 부활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 하는 것이다.

이 관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는 말처럼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으로 전하고 있다.

또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장가가는날’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주나라에서는 이날 생명력과 광명이 부활한다고 생각하여 동지를 설로 삼았다.

당나라 역법서(曆法書)인 선명력(宣明曆)에도 동지를 역(曆)의 시작으로 보았다.

『역경(易經)』에도 복괘(復卦)에 해당하는 11월을 자월(子月)이라 해서 동짓달을 일년의 시작으로 삼았다.

 동지와 부활이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신라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당(唐)의 선명력을 그대로 썼으며, 충선왕 원년(1309)에 와서

 원(元)의 수시력(授時曆)으로 바뀔 때까지 선명력을 사용하였다.

이로 보아 충선왕 이전까지는 동지를 설로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구미(歐美) 각국의
성탄절(크리스마스)도 초기 기독교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Mithraism)의

동지 축제일이나 태양 숭배의 풍속을 이용해서 예수 탄생을 기념하게 한 것이다.

신약성서에도 예수의 탄생 날짜 기록은 없다.

농경민족인 로마인의 농업신인 새턴(Saturn)의 새턴네리아 축제가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 성했고,

그 중 25일이 특히 동지 뒤 태양 부활일로 기념된 날이었다.

 

궁중풍속
궁중에서는 원단(元旦)과 동지를 가장 으뜸 되는 축일로 생각하여 동짓날 군신(君臣)과

 왕세자(王世子)가 모여 잔치를 하는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다.

해마다 중국에 예물을 갖추어 동지사(冬至使)를 파견하여 이날을 축하하였고,

 지방의 관원(官員)들은 임금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친다.

나라에서는 이 책에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달력은 황장력(黃粧曆), 청장력(靑粧曆), 백장력(白粧曆)의 구분이 있고, 관원들은 이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것을 단오에 부채를 주고받는 풍속과 아울러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였다.

이조(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표지가 파란 청장력을 선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달력은 내용이나 효용도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

 특히 옛날에는 농경 본위의 사회였던 만큼 24절기 등 때에 맞추어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달력이 요긴하였고,

기재 내용도 그에 맞게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에도 동지 무렵의 연말연시가 되면 새해 달력을 주고받는 풍속은 여전하다.
황감제(黃柑製)라는 임시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는데,『동국세시기』11월조에 제주목에서

귤, 유자, 귤감을 진상하는 일을 적고 있다. 이 귤들을 종묘에 진상하고 신하들에게도 나누어준다.

옛날 탐라의 성주가 이를 바칠 때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도 이를 답습하여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귤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과거의 이름을 감제(柑製)라 했다. 내의원에서는 소의 다리를 고고 여기에 백강(白薑), 정향(丁香), 계심(桂心),

청밀(淸密) 등을 넣어서 전약(煎藥)을 만들어 진상하였는데, 각 관청에 이를 나누어 주었다.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동지가 되면
동지하례(冬至賀禮)를 행하며 버선을 선물하는데 이를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고 한다.

또 종묘에 청어(靑魚)를 천신하는데 경사대부(卿士大夫)의 집에서도 이를 행하였다고 한다.

 

민간풍속
동짓날이 되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연못의 수면이 얼어붙어 얼음의 모양이 쟁기로 밭을 갈아놓은 것처럼 된다.

이것을 용갈이[龍耕]이라고 한다.

『동국세시기』 11월 월내조에는 “충청도 홍주 합덕지에 매년 겨울이 되면 얼음의 모양이

 용이 땅을 간 것 같이 되는 이상한 변이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언덕 가까운 쪽으로

세로 갈아나간 자취가 있으면 이듬해는 풍년이 들고,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복판을 횡단하여

갈아나가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혹 갈아나간 흔적이 동서남북 아무 데로나 종횡으로 가지런하지 않으면 평년작이 된다고 한다.

농사꾼들은 이것으로 이듬해의 농사일을 징험한다. 경남 밀양 남지에서도 용이 땅을 갈아 이듬해의

농사일을 징험한다고 한다(湖西洪州合德池 每年冬 有龍耕之異 自南而北 縱而薄岸則歲穰 自西而東

徑斷其腹則荒 或西或東或南或北 橫縱不整則荒穰半 農人推之來歲輒驗 嶺南密陽南池 亦有龍耕 以驗年事).”는 내용이 있다.
또 이날은
동지부적(冬至符籍)이라 하여 뱀 ‘사(蛇)’자를 써서 거꾸로 붙여 잡귀를 막는

속신(俗信)이 있으며, 팥죽을 쑤어먹지 않으면 쉬이 늙고 잔병이 생기며 잡귀가 성행한다는 속신이 있다.

 동짓날 일기(日氣)가 온화하면 이듬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많이 죽는다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여긴다. 또 동짓날이 추우면 해충이 적으며 호랑이가 많다는 믿음이 있다.
예부터 동짓날이 되면 백성들은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겼다.

또 일가친척이나 이웃간에는 서로 화합하고 어려운 일은 서로 마음을 열고 풀어 해결하였다.

오늘날 연말이면 불우이웃 돕기를 펼치는 것도 동짓날의 전통이 이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동지 팥죽 이야기

동짓날 민가에서는 절식(節食)으로 팥죽을 쒀 먹었다. 이를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 '동지시식(冬至時食)'이라 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팥은 비다민이 많은 곡식으로 팥죽을 먹으면 잔병 없는

건강한 겨울을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병(病)은 귀신이 옮기는 것이라고 믿던 시절에 팥의 붉은 색이 액(厄)을

막고 잡귀를 없애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행(五行)에서 붉은 색은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여인네들이 빰과 이마에 연지 곤지를 찍는 것이나,

자식을 낳으면 부정을 막는다 하여 붉은 황토를 대문 밖

양쪽에 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팥죽과 관계된 전설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태양 탄생일'이라 하며 축하하였다.
옛날 크리스마스날은 성경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날이 일정하지 않다가, 로마 교황청이

 4세기경부터 25일로 정하여 세계의 명절로 삼은 것을 보면 동지와도 크게 연관된 것 같다. 

 

 

 

 
  -중국 요순 시대에 공공씨(共工氏)라는 사람에게 천하의 망나니인 아들이 하나가 있었는데,

 동짓날에 죽어서 병을 옮겨 주는 역신(疫神)이 되었다.
그 망나니 아들이 살아 생전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역신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는 것이다.

 (共工氏有不才之子, 以冬至死爲疫鬼, 畏赤小豆, 故冬至日作赤豆粥以禳之……).                                                                                                               -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팥죽 속에는 찹쌀로 단자(團子)를 만들어 넣는데 새알 만큼한 크기로 만들었다 하여 '

 새알심’이라 부르며 자기 나이 수대로 넣어 먹기도 하였다.
  겨울 속에 겨울이 동짓날이지만 옛사람들은 동짓날에 날씨가 온화한 것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것은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와야 다음 해에 질병이 적고 풍년이 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추워야 나쁜 병균이 다 얼어죽고, 눈은 비가 얼어 내리는 것으로 농사에 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고인의 지혜가 이런 경지였다.
난방시설이 부족하였던 옛날 우리의 선인들은 하루하루 낮의 길이가 1분씩 길어지기 시작한다고

하는 동지(冬至)를,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을 향한다 하여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래서 음력11월을 유달리 '동짓달'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팥죽의 유래

엣날 중국 진나라의 공공이라는 사람에게는 늘 말썽을 부려 속을 썩이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는데, 어느 동짓날 그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죽은 아들은 그만 역질 귀신이 되고 만 것입니다.역질이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그 당시에는 역질이 마을에 돌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 꼼짝없이 앓다가

죽어 버리니 공공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해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공공은 생전에 아들이 팥을 무서워 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팥죽을 쑤어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습니다.

효과가 있었던지 그 날 이후로 역질은 사라졌고 이를 본받아 사람들은 역질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었다고 합니다. 옛사람들은 붉은 색은 귀신들이 싫어하는 색이라고 생

각했기에 곡식들 중에서도 유난히 붉은 색을 지닌 팥을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 합니다

 

불교에서의 팥죽의 유래

옛날 신라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선비가 살았는데, 사람은 참으로 진실하였으나, 집안이 궁핍하였습니다.

어느날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고자 하여 쉬어가게 해주었더니, 다음날 새벽 길을 떠나기 앞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서로 친구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이후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종종 찾아와 내년에 벼를 심으라 하면 벼가 풍년이 들고, 고추를 심으라 하여

고추를 심으면 고추농사가 풍년이 되는 등, 수년간 많은 재산을 모으게 하여 그 선비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허나, 이상한 것이 그 과객은 늘 한밤중에 찾아와서는 날이 새기 전 닭이 울면 사라졌습니다.

주인인 선비는 재물은 남 부러울 것 없이 많이 모았으나,

세월이 갈수록 몸이 계속 야위어가더니 마침내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병색이 너무나 심하게 짙어지자, 그 선비는 어느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는데,

스님께서는 그 과객에게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라 하였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 과객은 백마의 피를 가장 싫어한다 하였습니다.

젊은 선비는 스님의 말씀을 새겨 들은 이후로, 점점 그 과객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선비는 자기 집의 백마를 잡아 온 집안 구석구석 백마의 피를 뿌렸더니

그동안 친절하던 과객이 도깨비로 변해 도망을 가면서 선비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 선비는 건강이 다시 좋아졌습니다.그런데 해마다 동짓날이면

이 과객이 잊지않고 찾아오는지라 젊은 선비가 스님께 해마다 백마를 잡아서

피를 바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방도를 묻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렇다면 팥물이 백마의 피와 빛깔이 같으니 백마의 피 대신

팥죽을 쑤어 그것을 집에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동짓날 팥죽을 끊이는 유래라 하기도 합니다.

삼국지의 전략가 제갈량이 남만(베트남)을 평정하러 갔을 때 노수의 귀신들이 사람의 목을

 원하는지라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유래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자비정신이 넘치는 불교의 동지 이야기가 만두의 전설과 비슷한 점은

 바로 불교의 불살생(不殺生)*자비 방생이 그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를 밝히는 이도 있습니다.

또 초순에 동지가 들면 그 해는 애기 동지라 하여 일반가정에서는 팥죽을 끊이지 않고 절에 가서 팥죽을 먹고 돌아오는 풍습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동지의 전통을 사찰에서 맛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속을 종교적 차원에서 받아들여 더욱 그 의미를 심화시킨 불가의 동지절 행사,

이런 전통의 향기를 지켜온 불교인들이 이제 다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씨를

일체 모든 생명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동지와 관계 있는 속담

동지 때 개딸기: 철이 지나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물건의 비유

동지 섣달에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 :동짓날이 추워야 풍년이 든다
동지 섣달에 베 장방이를 입늘 망정 다듬는 소리는 득기 싫다.:  다드이 소리가 듣기 싫다.

동지섣달 긴긴밤에 임 없이는 살아도, 삼사월 긴긴해에 점심 없이는 못 산다

.: 동지 섣달 기나긴 밤을 홀로 드새는 독수공방의 외로움보다 삼사월 춘궁기의 배곯는 고달픔이 더 절박하고 심각하다.

정성이 지긋하면 동지 섣달에도 꽃이 핀다.:  지성이면 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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