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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땅끝기맥(終)

땅끝기맥 제7구간 - 닭골재에서 땅끝마을까지

by 범여(梵如) 2014. 9. 14.

 

☞ 산행일자: 2014년 9월 12일~13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맑고 선선한 바람... 그러나 엄청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8km (GPS 거리 20.8km) / 10시간35분 소요

☞ 참석인원: 좋은 사람들 산악회 27명과 함께

☞ 산행코스: 닭골재-134봉-작은 닭골재-임도-관음봉-바람재-달마산 북봉

                  달마산-문바위-작은금샘 삼거리-대밭삼거리-귀래봉-하숙골재-떡봉

                  도솔암 갈림길-도솔암-도솔봉-임도불골이재-262봉-헬기장-임도-241봉

                  232봉-김해김씨 가족묘-230봉-임도-납골묘-마련고개-언제나봉-갈두재

                  땅끝테마호텔-망집봉(정자)-사자봉(땅끝전망대)-땅끝탑-토말(땅끝마을)

소 재 지: 전남 해남군 현산면, 북평면, 송지면

 

최근의 주변의 아픈 사람과 돌아가신 지인들 때문에 맘이 상당히 심란했다.

그래서 추석 연휴를 조신하게 보내고 병원에서 종합 검사를 받느라 술 한잔

못하고 종합검사를 받았다... 정확한 결과는 2주후에 나온다고 하고 위와 대장 내시경

결과 대장에 꽤나 큰 용종 2개와 직장에 하나가 나왔다고 하면서 술을 먹지 말란다.

에공~~~ 뭔 재미로 살란 말인가? 이제는 산에나 재미 붙이고 살아야제

지난 5월 첫째 주에 땅끝 기맥 1구간을 끝내고 2구간을 나서려 했는데 올 여름에 남도지방에는

웬 넘의 비가 많이 오는지... 차일피일 미루다가 5년전 낙남정맥 하였던 산악회에서

땅끝기맥 마지막 구간을 한다기에 마지막 구간이라도 먼저 끝냈야겠다고 생각하고

산악회를 따라서 밤 11시에 양재동에서 산악회 버스를 오른다

 

버스에 올라 예전처럼 잠을 청해보지만 요즘의 내 맘을 대변이라도 하는지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한참을 뒤척이다 도착한 곳이 서해안 고속도로 고창 고인돌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버스는 오늘의 들머리인  해남의  닭골재에 도착하니 새벽 3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닭골재(03:50)

전남 해남군 현산면과 북평면의 경계에 있는 13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로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4차선 신 13번 국도가 지나가는 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현재 이 고개는 새로 생긴 도로에 모든 영화를 빼앗겨 버리고 산꾼이나 다니는

잊혀진 고개로만 남아있다.

 

해남 地誌에 기록되어 있는 ‘닭골재’의 지명유래는 고개 아래에 있는 동네 지명이

‘딱골’이라하여 그 마을의 지명이 이 고개의 지명이 된 듯하며 ‘딱골’은  딱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해남지지에는 ‘저동(楮洞)’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이 고개의 지명은  ‘저동치(楮洞峙)’인데 딱골재라 부르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민들이 ‘닭골재’라 부르면서 변음이 되어 그렇게 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쏙 썩이는 똑닥이 카메라

3년전에 거금 60만을 넘게 주고 산 Camon G-10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20여일전에

15만원을 주고 수리를 하고 오늘 처음 가져왔는데 초반부터 작동이 잘 안되면서 쏙을 썩인다

촬영도 잘 안될뿐더러 속을 썩이니 맘이 급하다... 내가 걸어온 길을 정확하게 기록해야 하는데...

산행을 시작하다(04:00)

닭골재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니 희미한 임도가 나오고 철조망을 만나면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철조망을 따라서 좌측으로 조금 올라가니 철조망 문이 열려있고 철조망을 지나니 뚜렸한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올라서니 무명 묘지가 나오고 다시 임도로 올라선

다시 임도를 따라서 조금을 더 지나니 慶州 金公 묘지를 만나고 다시 길을 걷는다

어둠속에 길은 잘 보이질 않지만 선답자의 시그널이 가끔은 보이는데

이 산악회는 잘 알다시피 산꾼들이 개인 플레이가 심한 곳이라 터치를 잘 안하고

산행대장이 있긴 하지만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곳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선두에 선 사람들은 죽기살기로 어둠속으로 내달린다

음력 팔월 스무날의 하현달은 떠있긴 하지만 산속으로 들어오면 칠흙같은 어둠이다

그런데 선두로 내달리던 산꾼들은 기맥길을 벗어나 우측으로 내려가 버린다

가던지 말던지 나혼자 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데 한참을 먼저가던 산꾼들이 다시

나의 헤드렌턴을 불빛을 보고는 내 쪽으로 온다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전혀없고 거기다가 넘어진 잡목으로 길을 걸을수가 없다

더군더나 이곳은  자리공, 두릅나무,등 각종가시나무들이 초반부터 산꾼을 지치게 한다

136봉(04:40)

136봉에서 다시 잡목을 헤치고 나가는데 초반부터 몸뚱아리는 상처투성이다

136봉 주변에는 약초단지인지 해남군수의 경고판이 붙어있다

136봉에서 잡목을 헤치고 내려오니 濟州夫氏와 부인 金海金氏 묘지를 지나

임도로 내려서니 어둠속에 작은 닭골재라는 곳으로 내려선다

작은 닭골재(05:05)

어둠속에 임도를 만나고 주위에는 편백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이곳 비포장 도로에서 우측으로 1분정도를 가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사거리 임도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직진하여 시멘트 포장도로

들어서니 우측에는 서부지방 산림청장의 경고판이 나온다

경고판을 지나자마자 편안한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희미한 임도를 올라선다.

그런데 먼저 간 동료산꾼들은 편안한 임도를 따라 바람재로 가버리고 내 뒤를

따르던 산꾼들만 나를 따라서 힘들고 고된 산행길로 접어든다

어둠속에 희미한 임도로 올라서자마자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묘지 4기를 만나고 다시 잡목을 헤치고 나간다

어둠속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왜그리도 반가운지...

헬기장(05:20)

관음봉(227m:05:35)

헬기장에서 15분을 길도 없는 곳을 치고오르려니 참으로 힘이든다.

어렵게 정상에 오르니 지도상에 관음봉으로 표기된 이곳은 그야말로

잡목만이 가득하고 관음보살님은 어딜가셨나 아무데도 보이질 않는다

다시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는데 정말로 죽을 맛이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급하게 내려서니 무명묘지를 만나고 임도로 내려서니 지도상 바람재를 만난다

바람재(05:50)

해남군 현산면 월송리와 북평면 이진리를 연결하는 재로 4륜 자동차가

다닐만큼 넓은 임도가 지나는 곳이며 작은 닭골재에서 이곳까지 임도로

연결되며 특히 무박산행을 하면서 어둠속에 지나갈 코스이며 아둔한

범여처럼 어둠속에 관음봉을 올라 개고생 하지 마시고 임도로 오시길...

 

관음봉에서 바람재로 떨어져서 좌측으로 조금 진행을 하다가 우측 능선으로 오른다

이곳은 준.희님이 걸어둔 ‘땅끝기맥 여기가 바람재입니다’라는 아크릴  표지판이

선답자의 산행기에 등장하기에 어둠속에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능선으로 오르니 이곳 역시 억새를 비롯한 잡목이 태클을 거는데 정말 미치겠다

 

잡목을 헤치고 힘들게 치고 오르니 주위에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고 달마산 입구에

들어서니 멋진 농바우가 마치 사열을 하듯 꽃꽃이 서서 사열을 하듯 서있다

 

땅끝기맥 등로에서 바라본 해남군 현산면 월송리의 모습

완도 앞바다에 일출은 시작되고...(06:15)

북평면 남창리와 달도의 모습

해남군 북평면과 남창리와 완도 사이에 있는 섬 ‘달도’는 배의 닻을 닮아 ‘닻도’라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이 되어 사람들이 부르기 좋게 ‘달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남창리에는 조선 중기까지 ‘달랑진’이라 불리운 수군 기지가 있었으며 수군기지가

조선조 인조 때 남쪽에 있는 북평면 이진리로 옮겨가고 달랑진 남쪽에는 조운창을

지어 남창(南倉)이라 불렀는데 남창은 조세로 거둔 대동미를 싣고 한양으로 가거나

먹거리가 부족했던 제주도로 식량을 공급햇던 창고이다

 

려말선초 왜구의 침략이 유난히도 많았던 이곳 해남... 특히 조선조 명종 때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불렸던 달랑진 사변(을묘왜변)이 터졌던 곳으로 왜구의 침략으로 해남, 강진

영암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그때 조선의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인해 민초들의 안위보다는 자기 당파의 이익을 위해

국력을 소비한 터라 왜구에 대해 선제 공겨보다는 교린을 통한 달래기 작전으로 일관했고

민초들에겐 공도정책(섬 주민은 육지로 해안가 주민들은 내륙 깊숙한 곳으로 이주)을 통해

소극적으로 대응 하였다.

아침 해를 바라보며 능선으로 오르니 암릉구간이 시작되고...

이곳부터 도솔봉까지 멋진 암릉구간이 시작되지만 이 구간은 넘무 험하여

암릉 아래로 우회하여 급하게 내려섰다가 다시 치고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남도의 들녁이 한가롭게 보이고...

바람재(06:20)

암릉을 우회하여 안부로 내려서니 이정표에 또다른 바람재를 만나는데

이곳은 바람재라는 지명답게 바람이 상당히 세차게 불어댄다

우측으로 송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은 이진리로 내려가는 길인데

달마산을 오르는 일반 등산객들은 주로 송촌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는지

안내 산악회의 시그널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지나온 임도가 있는 곳이 지도상 명기된 바람재인데... 이곳도 바람재라니

약간은 혼란스럽다... 어느 선답자의 지적대로 농바우 아래에 있으니 농바우재가 어떨런지...

뒤돌아 본 농바우의 모습

뒤돌아보니 대흥사를 가슴에 품고있는 두륜산이 아련히 보이고...

등로에서 바라본 이진진(梨津鎭)의 모습

조선시대에 수군기지가 있었던 곳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임진년에

침범하지 못했던 이곳 전라도 땅으로 침범을 하는데  그 당시 선조 임금은

전황이 다급하자 권율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 당시 조선 수군을 지휘한 원균은  칠전량 전투에서 왜의 수군에게 괴멸된 상태이다

당시 조선 수군의 전함은 칠전량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줄행랑을 쳤던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의 12척만이 장흥 회령포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당시 이 순신장군이 아마 지금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능선에 올라서니 송지면에 위치한 가공산(334.8m)이 보인다

우리나라 산 이름중에 가.나.다 순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산이란다

달마산이 멋진 모습으로 범여의 시야에 다가오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마치 수석전시장 같은 느낌을 주는 달마산의 암릉구간... 길이가 13km란다

능선 삼거리 06:45)

우측으로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능선 아래에는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의 산그리메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진리에는 이진산성이 있다고 한다

 

 

이진리 마을 뒷쪽에 있는 이진산성은 정유재란 이후인 1598년(선조21년)에

진(鎭)이 설치됐고 1627년(인조5년)에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는데 성이 축성

년대가 이때쯤으로 추정된다

 

이진리(梨津里)는 지형이 배처럼 생겼다고하여 배진 또는 이진이라 하였는데

서전리를 일부 병합하여 이진리라 부른다고 한다

보면 볼수록 환상적인 달마산 암릉구간

또다시 암릉구간을 오르지 못하고 우측으로 우회하여 달마산으로 향한다

잠시후에 가야할  달마산 정상의 모습

며느리 밥풀

숨어우는 바람소리에 가을은 성큼 우리곁에 다가오고...

억새가 하늘하늘 바닷가 산이라 그런지 조금 덥기는 해도 약간 추위를

느낄만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산행하기는 더없이 좋은 날씨이다

오늘 거쳐야 할 도솔봉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능선 위롤 올라서니 누군가가 멋진 돌탑 하나를 멋지게 쌓아 놓았다

잠시후에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너럭바위처럼 생긴곳이 있는 달마산 북봉에 오른다

달마산 북봉과 달마산 정상의 모습

달마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해남군 북평면

달마산 정상은 점점 가까워지고...다시 암릉구간 아래로 섰다가 올라선다

이곳은 암릉구간인데다 바위가 이슬에 젖어 한순간 방심하면 다치기 딱 좋은 곳이다

조심~~~ 또 조심

달마산 정상 봉수대(돌탑)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 하여 '불을 써는(써다는 켜다의 전남 방언) 봉'이라 해서 불썬봉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불썬봉 대신 이 지점에서 북쪽으로 470m쯤 떨어진 곳에 '달마산(達馬山)'으로 오기했다.

극심한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산봉우리에서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했다한다

 

봉수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어느 학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하고

어느 학자는 12세기 중반인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봉수대에선 밤이면 횃불, 낮에는 연기로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긴급함을 알렸다.

이곳 달마산의 봉수대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완도의 숙승봉과 북일 좌일산으로 연결하던 봉수대다

그래서 달마산 정상의 봉우리가 불선봉 또는 불썬봉이라 불렀는데 이는 전라도 사투리로

‘불을 켜다’,‘불을 써다’라는 유래에서 따온 지명으로 봉수대와 관련된 지명인듯 하다

이곳이 달마산의 최정상인데 예전에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이

커다란 돌탑이 자리를 잡고있고 바로 아래에 달마산이 아닌 달마봉이란 표시석이 서있다.

그리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미황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달마산((達摩山:489m:07:20)

해남군 북평면과 현산면, 송지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땅끝을 향해

펼처져 있는 암릉이 다도해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불썬봉”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곳에 봉수대가 있어서 ‘불을 사용하다’라는

남도 사투리에서 ‘불쓴 봉우리’라는 뜻으로 불썬봉이라 부른것을 미황사 스님들이

불선봉(佛禪峰)이라 부르는 바람에 불선봉이 되었다는 설이다

 

달마산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시조가 된 달마대사가 머무를 만큼 산세가 뛰어나다는 데서 유래했다.

기록상으로 고려의 무외 스님이 처음으로 이 산을 달마산으로 불렀다.

그는 '달마산 정수리의 바위들은 사자와 용, 호랑이가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불썬봉을 불선(佛仙), 불성(佛聖)봉으로도 부른다. 미황사 스님들은 달마봉으로 쓴다

 

달마(達摩)란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인 ‘다르마’에서 유래되어‘경전’ 또는 ‘진리’를

의미하며 달마대사는 중국에 선(禪)을 전한 후 천축국(인도)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동의 바닷가 달마산에 머물렀다는 설로  이 산의 이름을 달마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달마(達摩)는 조사선의 초조(初祖)로 인도의 스님이었는데 중국으로 건너와

선맥(禪脈)을 이어 육조 혜능조사로 이어져 우리나라 조계종맥으로 이어지는 스님이다

이곳 달마산 지명이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달마대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달마산 자료를 보면서 아쉬운 점은 현재 지명인 달마산(達馬山)이 옛 문헌인 `해동여지도`(해남)에는

달마산(達磨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에는 달마산(達摩山)으로

표기되어 있어 한자가 각기 다르고, 달마대사의 달마(達摩)와도 다르다.

일설에 의하면 현재의 산 이름은 일제강점기부터 한자를 잘못 사용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국의 명산기`에서 “국내에 전해오는 모든 문헌들이 한결같은데도 현대지형도에서만

달마산(達馬山)이라고 쓰고 있는데, 혹 일본식 표기를 그냥 따른 것이 아닌가 하고도 여겨진다”는 내용이다.

 

달마대사는 본래 인도 파사국(波斯國)의 왕자였다.

 6세기 전후에 북위(北魏)로 건너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가 되었다.

당시 주류를 형성한 강설불교(講說佛敎)의 모함을 받아 여섯번이나 독약을 받았다.

결국 중국에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인도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 전설에 대한 우리나라 땅끝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달마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해남으로 왔다고 믿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 때 무외스님이 쓴 글에

 “1281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이 산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나와서 달마산을 향해 예를 올리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만 듣고도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가 머무를 땅이다”라며

그림으로 그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선돌(立石)

달마산을 지나면서 연이어지는 암릉구간

마치 설악산에 온듯한 착각을 할 만큼 멋진 암릉구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달마산 능선을 많은 산꾼들이 공룡의 등줄기라 부른다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를만큼 풍광이 수려하여 힘찬 기상과  장엄한 기운을 얻는다고도 하며

조물주가 일만이천봉의 금강산을 만든 후에 힘이 남아 땅끝마을에  작은 금강산을

만들어 수석을 전시했다고 할만큼 빼어난 풍광이다

땅끝 해남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해 내륙 최남단의 산이라고 불리는

달마산은 수려한 산세와 시원한 조망을 자랑하는 화려한 산이다.

해남의 산, 하면 일반적으로 두륜산이나 주작산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해남에서 산 좀 탄다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달마산이 해남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달마산은 바위들이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어 마치 금강산을 길게 펼쳐 놓은 듯하다 하여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현기증이 날 만큼 급경사의 데크목을 따라서 내려 간 다음에...

급경사의 데크목 계단을 내려간 다음 우측으로 꺽어진다

문바위

문바위재(07:35)

문바위 아래에는 통천문(일명: 개구멍)이 있는데 겨우 한사람이 빠져나갈 만큼의

구멍으로 등로를 이어가는데 그것도 뚱뚱한 사람들이 힘이들것 같다

하늘가는 문은 이렇게도 힘이 든다는 말인가?

하얀 물봉선

또다시 데크목 계단으로 내려선다

왜 이곳 달마산이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리우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또다른 이정표를 만나고...

작은금샘 삼거리(07:45)

작은금샘 이정표가 있는 안부로 내려선다

작은 금샘은 금서동굴 쪽으로 10분정도 내려가야 하는데 금샘을 찾기가 그

리 쉽지 않으며 해남군에서는 금샘을 보호하기 위해 이정표를 설치하지 않았단다

완도 앞바다의 모습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다음 백과사전 인용)

잠시후에 넘어야 할 달마산 주능선의 모습

능선으로 오르니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우측 아래에는 남도의 끝자락에 자라잡고 있는 미황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능선에서 바라본 미황(美黃寺)사의 모습

신라 경덕왕 8년(749년)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石舟)가

사자포구(지금의 갈두상)에 닿자 의조 화상이 100여명의 향도와 함께

쇠등에 그것을 실고 가다가 소가 크게 한번 울면서 누운 자리에 절을 세워

통교사(通敎寺)라 하였으며 소가 마지막 멈춘곳에 절을 세우니 미황사였다.

 

그때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다하여 아름다울 ‘미(美)’, 금인(金人)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것을 기려 누를 ‘황(黃)’이라 미황사(美黃寺)라 하였다

위의 설화를 볼 때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에도 중국(당나라)이 아닌

바다를 통해서 인도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설화를 뒷받침하는 부분이 미황사 초입에 있는 마을이름에서 알 수 있다.

미황사 입구에 있는 우분(牛墳)마을... 소가 묘지 마을이란다

 

미황사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사찰로 바닷길 불교 전래를 추측케 하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천년 고찰이다.

바위의 누런 이끼, 금빛 나는 금샘, 달마전 낙조를 미황사의 3황(黃)으로 꼽는다.

줌으로 당겨본  미황사의 모습

 

미황사의 창건설화

749년 신라 경덕왕 때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나타났다. 

배 안에서 범패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다가갔지만 배는 그 때마다 번번이 먼바다로 밀려갔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의조화상이 목욕을 하고 동네 사람 100여명을 이끌고 포구가 나갔다. 

그러자 배가 바닷가에 다다랐는데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 안에는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문수보살,40성중(聖衆) ,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金環),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불상경전모실 곳에 대해 의논하는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소는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 화상이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지금의 인도)의 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고 있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불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 하더란다.  

의조 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땅바닥에 눕더니 일어났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일어나지 아니했다.

의조 화상은 소가 처음 누웟던 자리에 통교사(通敎寺)를,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美黃寺)를 지었다 하며 

 미황의 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黃’은 금인(金人)의 황금색에서 따왔다고 한다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947호)

대웅보전 우물천정에 범어(梵語)가 적혀있어 해로를 통한 인도불교가

유입이 됐음을 알 수 있는대목이다

또한 대웅보전 주초석(柱礎石)에는 바다 게와 거북이상이 조각되어

있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미황사는 한반도 내륙의 위도상 가장 끝에 자리잡은 사찰로서

신령스런 달마산의 기슭에 있는데 달마산은 미황사의 불상과

석양빛, 암릉이 조화를 이뤄 달마산의 삼황(三黃)이라 부른다고 한다

미황사 주변으로는 동백꽃 군락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작은 금샘 삼거리를 지나 조금 넓은 너럭버위 위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잠깐 사이에 寒氣가 들 만큼 추위가 엄습해온다

암릉 사이로 내려섰다가 다시 우측 암릉구간으로 올라선다

암릉 암릉 사이의 조그만 구멍이 미타혈(彌陀穴)이라고 하며 이곳에서 조금만

내려서면 작은 금생이 있다고 하는데 몸도 으시시 하고 관음봉을 갔다 오느라

후미그룹이라서 금샘에 들리는 걸 포기하고 도솔봉으로 향한다

멋진 암릉구간은 계속되고... 조금전에 우회하며 지나온 구간

잠시후에 가야할 암릉구간

너덜겅 같은 암릉구간을 계속 지나는데 좀처럼 산행속도를 낼수가 없다

잠시동안 편안한 등로를 걸어보기도 한다

칼날 능선을 곡예하듯이 걷는 이 맛 정통 산꾼이 아니면 모르제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의 모습

대밭삼거리(08:40)

오늘 가야할 능선의 모습... 도솔봉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스마트폰 트랭글 앱에서 귀래봉이라고 알려준다

귀래봉(471m:08:50)

귀래봉에서 바라본 떡봉의 모습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을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가는 구절초

오늘 산행을 하면서 계속해서 암릉구간을 걷지만 정말 멋진 仙景들이

산꾼의 눈을 즐겁게 한다... 좌.우 능선에 펼쳐지는 해남 들녘의 넉넉함과

완도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海風... 남도의 금강산이 불릴만큼 멋진 장관들

단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여름날씨만큼 무더운 날씨의 퇴약볕이 산꾼을

괴롭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질 않는다... 대신에 그만큼 눈이 호강을 하고 있으니...

가야할 도솔봉과 그 너머로 남해바다가 보이고...

귀래봉을 지나면서 등로는 상당히 유순해진다

가야할 도솔봉 쪽도 암릉구간이 만만치는 않지만 암릉 우회구간이 많아 어렵지는 않다

하숙골재(09:10)

곱디 고운 산비장이도 쭈구렁 밤탱이가 되어버렸다.

세월의 무게앞에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하나보다

산은 뒤돌아 볼 때가 가장 예쁜가보다...

산비장이

하숙골재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니 해남군 북평면 평암리 들판은

서서히 황금물결로 바뀌어 가고 풍요로운 완도 앞바다가 보인다

완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김과 다시마의 생산지이며 해남으로

유배왔던 孤山 尹善道의 손길이 남아있는 보길도와 매혹적인 청산도가

있는 곳... 완도땅이 참으로 여유롭기만 하다

떡봉(422m:09:25)

떡봉 정상에 오르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완도 앞바다와 우측으로 진도가 보인다

시원스레 바람이 불어대건만 날씨는 상당히 덥고 햇볕은 따갑기만 하다

평암 저수지가 보이고 그 너머에는 완도 앞바다

넓은 공터를 만나고... 다시 편안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전망바위(09:45)

층꽃나무

가야할 도솔봉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편안한 길을 걷는다

멋진 암릉구간 우회하며 도솔봉으로 향한다

도솔봉은 점점 가깝게 보이고...

도솔암 갈림길(10:05)

도솔암 요사채

도솔암의 연혁

이곳부터는 땅끝 천년숲 옛길이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아마 삼남길을 말하는 모양이다

도솔암 가는 길

도솔암으로 미륵 부처님을 만나러 간다

요즘 하도 난세이다보니 민초들이 살아가기는 너무나도 벅차다

부처님! 사바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모두 다 구제해주실 간절히 서원합니다

딱 한 무리들만은 절대 구제하지 마시고요...여의도에 살면서 할일은 안하고

꼬박꼬박 세비만 챙기는 300명은 절대 구제하지 말아 주셔요

도솔암 맞은편 삼성각 뒷쪽 암릉

고려시대 고승이셨던 무애대사께서는 달마산 주변의 암릉들이  수석전시장 같다고 했듯이

이곳 달마산 구간을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르는데 한치의 모자람도 없는듯 하다

도솔암((兜率庵)

흔히 달마산 도솔암을 소개할 때 하늘에 맞닿은 암자, 땅끝에서 만나는 하늘끝,

남도의 금강산인 달마산에 핀 연꽃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도솔암은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미황사를 창건하기 전에 수행하던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암자로 조선조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이 순신장군에게

대패한 왜군들이 해상 퇴로가 막혀 달마산으로 퇴각하던 중 에 불을 지른 바람에

소실되었는데 월정사의 법조스님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깍아지른듯한 암릉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암자. 마치 제비집을 연상케 하는 도솔암

미황사의 12번째 부속 암자로 해남 8경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는 도솔암의 풍광

마치 금강산에 온 것처럼 착각을 느끼니 왜 이곳이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른 이유를 알 것같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도솔암은 달마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로 원효성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여러 스님들의 기도처로도 사용되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달마대사의 法身이 늘 상주하는 곳’으로 기록이 되었으며 드라마 ‘추노’ , ‘각시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가 촬영된 장소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탄 암자이기도 하다

도솔암 마당에서 바라보니 진도의 울돌목이 아련히 보이는듯 하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명량”... 1,7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여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던 그 명량대첩의 그 장소가 진도대교 아래의 울돌목이다

이 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0척의 왜선을 대파하여 풍전등화 같았던 조선을 구한 성웅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였던 모양이다

 

지금의 진도는 세월호 침몰이라는 충격적 사건에 휩싸여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희생된 어린 생명도 생명이지만 진도 주민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온 국민이 경제적으로 직격탄을 맞았는데도 요즘 그 사건을 빌미로 법안처리 하나

하지않고 월급만 꼬박꼬박 챙기는여의도의 한량들 민초들에겐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산다

당신들이 정말 세월호로 희생된 저 영혼들에게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면

정말 뼈를 깍는 심정으로 민초들에게 봉사해야 되는 건 아닌지... 언제쯤 저꼬라지 그만 볼라나

도솔암에 들리니 조금 이른 시간인데 스님과 신도 2명이 사시예불을 올리고 있다.

스님의 염불하시는데 방해가 될까봐 법당내로 들어가진 못하고 마당에서 부처님께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다시 도솔암을 나와 삼성각으로 향한다

도솔암에서 예를 올린 스님과 여신도 2분이 삼성각을로 예를  올리려고 오신다

이곳에서 50여m 정도를 내려가니 바위틈에 용담(龍潭)이라는 샘이 있다.

이 용담샘은 굴 천정에 드러난 물길에서 물이 굴바닥에 떨어져 샘이 생기는데

이러한 샘의 구조는 우리나라에서 몇 곳이 안 된다고 한다

 

이 굴은 ‘용굴’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 굴에서 2마리의 용이 나와 승천했다고 한다

바위 앞에서 용이 입을 벌려 바위가 뚫리고 용이 뿔로받아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

 

용담물은 가끔 누런빛을 띄는데 하늘로 올라간 황룡이 아쉬움에 자신의 몸에서 난

가루를 샘에 벽에 묻어두고 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담아래 마봉 사람들에 의하면 용굴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굴에서 떨어뜨린

고무신이 진도 앞바다에 나타난다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 삼성각을 지나 암릉을 넘으면 땅끝기맥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있다고 하였으나 그곳이 지금은 위험하여 폐쇄시켰다고 한다

그러는 바람에 삼성각에서 물한모금과 사과 2쪽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도솔암 요사채가 있는 등로로 되돌아 온다 

도솔암 요사채로 되돌아 가는 길에서 바라본 도솔암의 모습

도솔암은 V자 형태로 벌어진 절벽 사이에 쌓은 석축 위에 앉아 있다.

아래에서 보면 하늘 속에 절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도량인데,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불을 질러 원래 건물은 아예 사라졌다. 그동안 절터만 남았다가

지난 2002년 6월 법조 스님과 신도들이 공을 들여 새로 법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솔암 요사채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편안한 주차장을 따라서 도솔암 주차장으로 향한다

도솔봉이 지근거리에서 보이기 시작하고...

암릉과 이정표가 있는 이정표에서 편안한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서 도솔봉으로 향하니 이곳은 잡목이 너무 우거져 한발짝도 더

나갈수가 없을 정도라 엄두가 나질 않고 더군더나 새벽에 아무도 가지

않았던 관음봉을 오르는 바람에 동료들과 1시간의 갭을 메우려니 이 길로

가면 도저히 상경시간을 맞출수가 없어서 고육지책으로 다시 되돌아서

편한 임도로 도솔암 주차장으로 향한다

편안한 임도로 되돌아와서 도솔암 주차장으로 향한다

도솔암 주차장(10:40)

주차장에서 좌측 시멘트 도로를 따라 도솔봉 정상으로 가야하나 어차피 정상에는 갈 수가 없고

봉우리 한참 아래에 도솔봉이란 표시석이 있어서 별 의미도 없을것 같아 그냥 땅끝마을로 향한다

도솔봉(兜率峰:417m) - 사진 펌

전남 해남군 송지면에 있으며 달마산 5봉중에 가장 마지막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은 군부대가 자라잡고 있다

도솔봉의 지명은 소백산의 도솔봉, 불갑산의 도솔봉 등 우리나라 산봉우리중에 꽤나 많이등장하는 지명이다

 

도솔(兜率)은  도솔천에서 유래하면 범어(梵語) 듀스타(Tusita)의 음역으로서, 의역하여 지족천(知足天)이라고 한다.

즉, 이곳에 사는 무리들은 오욕(五欲)을 만족하고 있음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그 산의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있는 욕계(欲界) 6천 중 제4천인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도솔천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원은 수많은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내원궁(內院宮)이라고 부른다. 이 내원궁은 석가모니가 인도에 태어나기

직전까지 머무르면서 중생교화를 위한 하생(下生)의 때를 기다렸던 곳이다.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보살은

현재 이 내원궁에서 설법하면서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하여 성불(成佛)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도솔천은 미륵보살 정토(淨土)로서, 정토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미륵보살 신앙은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삼국시대에 크게 융성하였다.

신라시대 원효는 도솔천에서 왕생할 수 있는 수행방법을 제시하였고 특히 백제 무왕은 

미륵보살이 인간세상에 하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익산에 미륵사(彌勒寺)를 세웠다고 전한다.

 

해남군의 관광지도

해남을 옛날에는 바다 기슭의 후미진 구부렁이란 뜻으로 새금(塞琴:변방 새(塞) 거문고 금(琴)이라

불리우기도 했고 바닷물에 잠기는 땅이란 뜻으로 침명(浸溟:적실 침浸) 어두울 명(溟)이라 불리우기도 했으며,

물가에 버려진 땅이라는 투빈(投濱:던질 투(投)濱 물가 빈(濱)이라 불리우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초 침명현(浸溟縣)이 해남현(海南縣)으로 바뀌면서 비로서 해남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단다.

조선 중기 동의보감을 펴낸 의성 허준(1539-1615)이 유배되었던 곳도 이곳 해남 땅이다.

도솔암 주차장에서 바라본 도솔봉의 모습

도솔암 주차장에 서 있는 땅끝 천년숲 옛길 안내판 

포장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다가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으로 접어드니 이곳 역시 아예 길이없다... 맨 꼴찌만

아니라면 우짜든지 맥길을 찾아보련만... 우리팀원들은

아무도 가지 않았는지 이곳은 산꾼이 다닌 흔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되돌아와서 편안한 포장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포장도로에서 바라본 해남군 송지면의 산그리메

송지 저수지의 모습

포장도로를 돌아서니 잠시후에 가야할 땅끝지맥의 능선이 보이고...

도솔암 주차장에서 포장도로를 따라서 10여분을 내려온 다음 좌측으로 꺽어진다

갈림길 이정표(10:53)

이곳부터는 완전한 육산(陸山)으로 삼남길과 겹쳐지는 구간으로

등로는 상당히 편안하다... 이곳부터 속력을 내면 동료들을 따라 붙을 수 있을까?

등골나물

불골이재(10:58)

삼남길이란 해남 땅끝마을 해안에서 시작하여 강진, 나주, 광주, 장성을 지나

전북 정읍, 완주, 익산, 충남 논산, 공주, 천안, 경기 평택, 수원을 거쳐 과천

남태령을 넘어서 남대문까지 천리가 넘는 트레일 워킹코스로 조선시대 10대

대로(大路)중 우리나라에서 최장거리 도보코스이며 이 길을 통해서 관리들은

임지로 파견하고 진상품을 이동했으며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나 장사를 보부상들도

이 길을 걸었으며 또 제주도나 남도지방으로 유배를 왔던 선비들이 걷던 길이기도 하다

끝마을 가는길에서 뒤돌아 본 도솔봉의 모습 

264봉(11:05)

좋은 길을 만나서 빠른 속도로 걷다가보니 264봉 정상에서 쉬고있는

산꾼들을 만나고 그들을 추월하여 빠른 속도로 땅끝마을로 향한다

조그만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등산로 팻말이 깨진 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이곳 역시 산꾼들이 편안한 임도로 가버렸는지 지나간 흔적이 전혀 보이질 않고

많이 퇴색돼버린 사르리님의 시그널이 숲속의 포로가 되버린 채 외롭게 달려있다

거미줄이 얼굴에 걸리고 잡목의 저항을 받으며 내려서니 묘지가 나온다

南平 文公과 부인 竹山 安氏의 묘지의 지나니 다시 무명 묘지 2기가 나온다

묘지로 들어오는 길을 따라서 내려서니...

다시 조금전에 헤어졌던 편안한 임도를 만나고...

이 구간부터는 이정표가 아주 잘되어 있어서 길을 잊어버릴 일이없다

등로에서 바라본 송지면 송호리의 모습

무명묘지 1기를 지나니 그늘이 진다고 그랬는지 나무의 모가지를 댕강

짤라버린 묘지를 지나는데  보기가 그리 썩 좋지는 않다

아직까지 묘비에는아무런 기록이 없는걸로 봐서 가묘가 아닌가 싶다...

김해 김공의 호화묘지 옆으로 지난다

묘지를 지나니 넓은 억새밭이 나오는데 이곳이 지도상 헬기장이다

앞에 보이는 시멘트 도로를 바라보고 그 너머는 232봉이다 

마련고개(12:00)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와 통호리 넓골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

임도는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으며 기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 걷는데 퇴약볕이 어찌나 따가운지 한 여름을 방불케 한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10분정도를 걸어올라 오니 넓은 공터의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 앞에는 시원한 바다가 산꾼을 유혹한다... 해남의 앞바다는 참으로 깨끗해 보인다

金海金氏 가족묘(12:10)

지난 겨울에 영산기맥을 걸으면서 장성, 영광, 함평, 무안지역에서 느낀

감정이지만 남도 사람들의 조상들에 대한 禮敬... 참으로 존경스럽다

묘지 주차장 앞에 펼쳐지는 해남 앞바다

묘지를 지나면서 시멘트 도로는 끝이나고 좌측 비포장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 내리막길에서 만난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

무룻

괭이밥

해남군 송지면 비열도의 모습

부드러운 삼남길을 계속 걸어가다가 조금 올라서니 너덜길이 나오고

다시 좌측으로는 남해바다가 시원스레 보이지만 햇볕은 엄청나게 따갑다

임도(12:30)

넓은 임도에 도착하여 우측으로 조금 내려가니 포장 임도가 나온다.

그러나 맥길의 능선으로 봐서는 좌측 능선으로 가야만 하는데 사유지인지

뭔지는 몰라도 우측 임도로 기맥길이 이어지고 산꾼들도 전부 그 방향으로 간다

선두로 가던 한사람, 한사람씩을 따라 잡는데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여성 한분이

물이 떨어져 굉장히 힘들어 하는 모습으로 물 한모금을 부탁한다

오늘 날씨가 바람이 조금 불기는 하여도 이곳 능선은 나무가 없어서 햇볕을 피할

수가 없고 거기다가한 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운 날씨이다

나도 물 3L와 쥬스, 스포츠 음료를 가져오긴 하였지만 이젠 물 700ml밖에 남지 않았고

아직도 가야할 길이 4km나 남았지만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어서 물을 준다.

 

흔히 산꾼들의 일화에 산행을 하면서 ‘마누라는 빌려줘도 물을 안준다’ 는 말이 있다

물을 달라는 자체가 커다란 결례이기에... 특히 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라 물을 피해

다니는 맥 산꾼들에겐 철칙이다... 왜냐하면 물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임도 그늘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S자 형태의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도로가 시작되는데 아직도 날머리까지 4km이상 남았다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편한 길을 지나니 무명묘지 한기가 나오고 다시 조금을 지나니

전주이씨의 묘지를 만난다... 산행시간이 9시간이 지나니 굉장한 피로도가 몰려온다

유인 전주이씨 묘지의 특징은 제주도 무덤에서나 볼 수 있는 돌담을 쌓아놓은 것이 이채롭다

전주이씨 묘지로 내려서니 또다른 무명묘지가 나오고 잠시후에 홍천용공과

부인 박씨 묘지가 나오고 저멀리 사자봉 정상에 있는 전망대가 아련히 보인다

묘지를 지나서 우측으로 꺽어져 땅끝으로 향한다

 

묘지를 내려오니 똑같은 장소에 2개의 이정표가 있는데 삼남길의 이정표는 해남 땅끝까지

2.78km이고 해남군에서 설치한 이정표는 4km라고 표기를 해놔서 상당히 혼란스럽다

언제나봉(12:55)

묘지를 지나서 옆사면길을 통과하여 능선에 오르니 너덜겅이 나오는데

이곳이 지도상에는 언제나봉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이곳에서 생면부지의 산꾼들과 조금밖에 남지않은 물한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언제나봉에서 조금 내려서니 순찰사를 지낸 洪川龍公과 配부인 江陵劉氏와

海南尹氏의 호화로운 묘지가 나온다... 참으로 부럽다... 죽어서도 부인 2명과 같이 있으니

본부인과 후처와의 관계도 돈독했던 모양이다...女福도 많으셔

묘지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20여m 내려가다가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임도 입구의 이정표

홍천룡공 묘지에서 20여분 동안 호젓한 길을 걸어오니 갈두재에 도착한다

갈두재(葛頭峙:13:17)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의 송호(松湖)해수욕장과 갈두(葛頭)리 사이를 잇는 고개다.

송호해수욕장이 우리나라에서 최남단의 해수욕장이고, 갈두리가 우리나라 최남단의

마을이라고 보면, 이 재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남단의 재라고 해야하겠다. 규모로 보아서

재라고 하기보다는 고개로 우리나라 최남단을 통과하는 77번 국도가 지나가고 최근에

설치한듯한 구름다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해남땅끝테마호텔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구름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돌아서서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호텔 마당으로 들어선다 

호텔 마당으로 들어서서... 조금을 지나니

호텔마당 끝으로 가서 산책로라는 표지판을 따라서 걸어간다

호텔 마당에서 바라본 해남군 송지면 앞바다

호텔을 빠져나와 산책로를 걸어서 나오니 목책이 처져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오르니 호화묘지와 사각정자가 나오고 지나온 도솔봉이 보인다

사각정자를 지나니... 꽤나 긴 데크목 계단이 나오고...

운동기구들도 보이고...

망집봉(168m:13:30)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와 갈두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오르는 길은

데크목 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정상에는 멋있는 팔각정자가 설치되어 있고

지난온 도솔봉과 가야할 땅끝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이곳에서 후미에서 같이가는 처음보는 산꾼들과 마지막 베낭털이를 하는데

아끼고 아껴뒀던 션한 캔맥주 맛이 왜그리 꿀맛이던지...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의 모습

망집봉 정상에서 바라본 송호리의 모습

땅끝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사자봉이 보이기 시작하고...

망집봉에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쉼터가 나오고...

땅끝탑 갈림길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땅끝탑이 나오고 직진으로 마지막 봉우리인 사자산으로 향한다

목책길을 따라서 올라서니 화장실이 나오고 잠시후 사자산 주차장이 나온다

사자산 주차장(13:50)

주차장에서 우측 산책로를 따라서 전망대 방향으로 향한다

사자산(獅子山:156.2m:14:00)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에 있는 산으로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하며

예전에는 칡이 많이 난다고 해서 갈두산(葛頭山)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사자산으로 부르고 있으며 정상에는 땅끝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산 전체가

공원화 되어 버려서 마치 서울 남산이나 부산의 용두산처럼 되어있다

 

사자산 전망대 앞에 있는 땅끝지명 유래비

땅끝의 유래는 한반도 최남단으로 북위 34도 17분 21초인 해남군 송지면이다

만국 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 남쪽 깃점을 이곳 해남현에서 잡고 북으로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이천리라 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부르고 있다.

땅끝 전망대에서 바라본 보길도와 노화도의 모습

땅끝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오며 바로앞에 노화도와

보길도가 보인다... 맑은 날이면 한라산이 보인다고 한다

 

보길도하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떠오르는 섬이다

고산 선생은 제주도를 가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보길도로 피항을 했는데

 

보길도의 풍광에 반해서 세연정(윤선도의 원림) 부근을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정원을 꾸몄으며 자연 계곡을 막아 연못을 만들고 연못 가운데 세연정이란

정자를 지어 “어부서시사”란 시를 썼다고 한다

땅끝 전망대에서

땅끝 전망대까지 같이 온 산꾼들은 이곳에서 몇명은 전망대로 올라가고

몇명은 모노레일을 타고 땅끝마을로 내려가 버린다.

땅끝기맥 산행을 하러 온 것인지 아님 안내 산행을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결국 홀로 땅끝탑으로 향한다... 그런데 오던 길에 물을 달라고 했던 여성산꾼이 동행한다 

전망대 아래에서 만난 또다른 땅끝 조형물

조형물을 지나니 데크목 계단이 내려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 땅끝탑으로 향한다 

땅끝탑(土末塔:14:15)

땅끝 끝자락 토말탑이 있는 바닷가 갯바위가 위도(북위 34도)상으로 한반도의 끝이다

한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사자봉 아래 바닷가에 있는 땅끝탑... 이젠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국 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 남쪽의 깃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을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이천리를 잡아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땅끝기맥 종착지

땅끝기맥의 최남단인 이곳 위도상으로는 34도 17분 21초로 더 이상 갈곳이 없다

우리 선조들은 이곳을 땅끝 또는 ‘흙 토(土)’ ‘끝 말(末)’을 토말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상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이다

2012년 4월 15일 금북정맥길 서해안 끝 안흥진을 찍었고, 2012년 11월 4일

동해안 끝자락인 호미기맥 끝단인 호미곶을 찍고 오늘 이곳 토말을 찍었으니

갈 수 없는 북녘땅을 빼놓곤 다 봤으니 어쩌면 범여는 福이 많은 사람이 아닌지...

땅끝의 종착지인 갯바위까지 갈 수 있것만 아무도 오질않아 인증샷을 남길수가 없다.

혼자 다니면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삼각대를 가지고 다니는데 오늘은 산악회를 따라

오기에 삼각대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땅끝마을로 향한다

땅끝마을 가는길의 이정표

나이들어 다리에 힘떨어지면 호젓하게 삼남길도 함 걸어봐야지

바닷가를 끼고 호젓한 삼남길을 걸어가니 우측엔 대리석 탁자와 이 비석이 있다

보길도로 향하는 바닷길

땅끝마을 가는 길에서 만난 정자

이곳에는 아마 나와 같이 버스를 타고 오신분인지 기다리다 포도를 먹으라고 건넨다~~~ 감솨

갈두항의 모습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하얀 여객선이 보길도가는 배란다 

모노레일 탑승장을 지나 땅끝마을로 접어든다

땅끝마을 앞 바다에 있는 맴섬

땅끝마을 앞 갈두항 옆에는 조그만 섬이 두개 나란히 있다

한 쌍의 매미처럼 보인다고 해서 맴섬이라고 불린다

형제섬

땅끝마을에서 삼남길이 시작되는 곳

땅끝마을(14:35)

땅끝마을이 있는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는 원래 마을 이름은

‘더 이상 갈 수 없다’ 라는 뜻의 갈수리(葛水里)였는데 물이 귀한 해안지방에서

좋지 않은 이름이라 해서 ‘갈두리’로 바꿔 불렀으며 호젓한 분위기와는 달리

지금의 땅끝마을은 모텔과 식당이 빼곡히 서 있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상의 최남단은 마라도이지만 육지의 최남단은 이곳이다

이곳에서 오늘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고 우리를 태우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