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6년 3월 6일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짙은 박무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6km / 5시간 20분소요☞참석인원: 진권아우와 둘이서
☞산행코스: 고운동재-산죽지대-902.1봉-산죽지대-875봉-묘지-797.5봉-무명봉-반천리갈림길-789.8봉2개월만에 다시 신백두대간 2구간을 나선다
이번주에는 지난 일욜과 3월 1일 연속으로 지맥길을 걸었더니만 피로도가 심하고
거기다가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엘 갔더니 위에 염증이 심하다고 술과 짠 음식을 자제하란다
토욜에 진권아우랑 신백두대간 2구간을 하기로 하였는데 사실 자신이 없다
일기 예보를 보니 토욜과 일욜 새벽까지 우리가 걸어야 할 산청과 하동지역에
비가 온다고 하여 이 핑계 저핑계를 대면서 연기를 하려고하니 진권아우가
우리가 산행할 시간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무조건 가자고 하는데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젊은것이 응아가 다음에 가자고하면 다음에 갈것이지...
하는 수 없이 형님이란 자존심을 구기고 싶지않아 조금 일찍 퇴근하여 베낭을
챙겨서 간단하게 저녁 한술 뜨고 버스 탑승지인 남부 터미널롤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진혁진님 지도(이 구간은 신백두대간과 낙남정맥 구간 겹쳐짐)
오늘 구간의 고도표
서울 남부터미널(19:45)
집에서 출발하여 15분만에 남부터미널에 도착한다
남부터미널발→진주행 버스표
저녁 8시에 남부터미널에서 진주가는 버스에 오른 다음에 평소 습관처럼 깊은 잠에 빠진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중간 휴게소에도 깨지않고 자다가 함양 I.C를 지나는데 갑자기 차량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깨어나는데 마치 여름철 장마철처럼 비가 내린다
버스는 단성I.C를 빠져나와 원지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는데 비는 앞이 안보일 정도로 내린다
그래 계속 이 정도로 내려라... 이 핑계로 산에 가지말고 좀 쉬게...
진주시외버스 터미널(23:35)
진주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이 근처에는 찜질방이 보이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근처 모텔로 향하는데 숙박비를 45,000원이나 달란다
우리가 잘 자야 시간이 4시간인데 너무 비싸다 싶어 모텔을 나와 두리번거리니
근처에 목욕탕을 겸한 허름한 여관 간판이 보이길래 들어가니 숙박비를
25,000원을 달란다... 하는 수 없이 이 여관에 투숙했는데 시설이 얼마나
낡았는지 마치 70년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 나오는 여인숙같다
직업이 인테리어인 범여는 실내장식에 민감한지라... 벽지며, 삿시, 화장실
모든게 골동품처럼 보인다... 그래도 싼맛에 잠을 청하고 새벽 4시반에
일어나 씻고 여관을 나와 시외버스 터미널앞 김밥천국에서 육계장을 먹는데
진권아우의 대학동기가 찾아오고 잠시 후 진주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고등학교 동창이 밥도 사주고 자기 차량으로 이곳에서 60km 거리에 있는
산행 들머리인 고운동재까지 태워주는 바람에 참으로 편하게 산행을 진행한다
진주에서 고운동재까지 태워준 진권아우 고등학교 동창
진주에서 이곳까지 자가용으로 1시간 10분정도 소요가 된다
원래는 진주에서 중산리까지 오는 06시 15분 버스를 타고 중산리에서 이곳까지
택시로 오려고 했는데 아우님 친구 덕분에 편안하게 고운동재에 도착한다
그러고보니 진권아우님! 인생 잘살았구먼... 암튼 고마우이
지지난해 영산기맥 때 진권아우와 둘이서 걸을 때 마산에서 함평까지 회를 가지고 온
친구도 있었고, 지난해 신낙남정맥길에는 김해 친구들이 장어구이로 보신시켜 줬고
이번에도 신세만 지는구려... 젊은이 복 받을기야!
지난구간 날머리였던 고운동재의 모습
신백두대간은 영신봉에서 돌고지재 지나 547봉까지는 낙남정맥과
겹쳐지는 구간이라 대부분의 산꾼들이 이곳은 생략하고 547봉부터
우듬지 구간이라 하여 그곳부터 시작하나 난 영신봉부터 끝까지 걸어려고
처음부터 개고생하면서 걷는데 이곳 고운동재에 도착하니 안개가 자욱하다
진권아우 친구차를 타고 거림(내대리)을 지나 삼신봉 터널을 통과한 다음에 힘들게
고갯길을 오르는데 청학동에 놀러온 사람들인지이른 새벽에 트래킹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정상에는 철조망펜스와 출입금지 표지판과 외삼신봉까지 영구통제구간이 보이고
2차선 포장도로가 있지만 이곳 아래로 삼신봉 터널이 뚫리면서 지금은 산꾼이나 오르는
잊혀진 도로가 되어가고 있다
고운동재(孤雲洞峙:790m:06:50)
경남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에서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인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1200여년전 신라 말기 고운(孤雲) 최 치원 선생이 자신이 은거할 유토피아를찾아 들어갈 때
넘어던 고개가 고운동재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신라의 대학자요 문장가로 당나라에서 명성을 날리다
29세인 나이로 헌강왕(890년)때 귀국하여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고국의 회생을 위해 혼신을 다했지만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현실의 괴리 앞에 청운의 뜻을 펴지 못하고 관직을
버리고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청학동에 은거를 결심한다.
고운(孤雲) 최 치원 선생이 즐겨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 강주(지금의 경북 의성), 합천 청량사(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등이었는데 특히 지리산 쌍계사 부근이
이상향의 청학동이 있는고개 고운(孤雲)이 유토피아를 꿈꾸던 고운동재였다.
최치원 진영, 조선시대, 117.8×76.5cm, 견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고운(孤雲) 최치원(857~미상)은 신라시대의 조기유학생이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그는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 그의
아버지는 “10년 안에 급제를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공부에 힘쓰라”고 말했다 한다.
아버지의 기대대로 18살에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관료 생활을 하며 빼어난
글 솜씨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을 꾸짖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6두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885년 신라로 돌아왔지만 신분제의 벽에 막혀 뜻을 펼치지 못했다.
개혁안 ‘시무 10여조’를 지어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진골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후 그는 세속을 떠나 지리산에 은둔했고,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퍼졌다
진권아우님의 친구는 우리와 작별하고 청학동쪽으로 향한다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속한 청학동(靑鶴洞)은 해발 800m의 지리산
삼신봉 남쪽 자락에 신라시대 최치원이 은거했던 그림같은 마을로 청학이
노닐던 곳이라는 전설을 가진 곳으로 수많은 묵객들이 유토피아를 찾아
나섰던 바로 그른 곳이라는 느낌이 들게하는 산세와 물줄기를 지니고 있다.
靑鶴이란 새는 신선이 타고 다니면서 도술을 부리는 새로,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었다고 하며. 이곳 도인촌은 유불선삼도합일 경정유도회
(孺佛仙三道合一更儒道會)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유교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불교,선도와 동학 서학을 하나로 합하여 도를 크게 밝혀 유도(儒道)를
다시 일심으로 교화하는 道라는 뜻이다.
대부분은 식량을 자급하고 양봉과 축산에 약초와 산나물을 채취하여 하동장에
내다팔아 생필품을 구해쓰며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여 흰 한복차림에 처녀,
총각은 머리를 땋아 댕기를 드리고 성인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성인 여자들은 쪽을 찐다.
한결같이 흰 옷 도포를 입고 언젠가는 이상향의 세계가 이곳에 올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7:00)
오늘의 들머리는 양수발전소 상부댐 좌측방향 약20m 지점 우측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로표지판 뒤편에 산악회 시그널이 달려있는 곳으로 오른다.
소요자방(逍遙自放)하던 孤雲 선생이 넘던 고개에서 오늘 산행을 시작한다
지난 구간 외삼신봉 아래에서부터 고운동재까지 산죽의 괴롭힘을 무척이나
당했는데 오늘은 초반부터 산죽의 공세에 시달리는데 거기다가 새벽까지
내린 비 때문에 등로에 들어서자마자 모든게 젖어 버리는 것이 초반부터 힘든다
등로에서 바라본 산청양수 발전소 방향
새벽까지 내린 비의 영향탓인지 산청 양수발전소 방향은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반천리에 산청양수발전소가 있고 그 너머로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모신 산천재(山天齎)가 있는 곳인데 모든게 하얀 여백이다
산청 양수발전소 상부댐(2010년 8월8일 낙남정맥길 때의 사진)
산청군 시천면 고운동에서 반천리로 흘러드는 계곡이름이 반천(反川)이다.
반천은 물이 거꾸로 올라 간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우리 선조들은 반천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냇물이 거꾸로 올려보내 발전을 하리라 예측도 못했을
터인데 선조들의 先見之明에 거져 감탄스러울 뿐이다.
약초재배지를 지나는데 아직도 전기울타리는 그대로이다
고운동재를 오르면서 초반부터 산죽과의 전쟁(?)은 시작된다
범여의 키보다도 훨씬 큰 산죽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데 그 옛날 우리 선조들에게는
이 산죽으로 저 먼 하동장까지 가져가 판돈으로 생계를 이어간 눈물젖은 빵의 상징이었는데
이젠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인걸...이곳의 맥산행을 하는 산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지리산 산죽은 800m ~1200m 높이에 분포하여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데 6년전보다 지역이 훨씬 넓은 느낌이다
902봉(07:10)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인 902봉은 산죽에 완전히 포위가 되어 버렸다
희미한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으로는 시천면 반천리로 향하는 길이고 맥길은 우측이다
산죽에 완전히 막혀있는 902봉 정상 나뭇가지에 비맞은 선답자의 시그널만 범여를 반긴다
산죽을 헤치고 우측으로 내려서니 잠시동안 산죽길을 벗어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875봉(07:16)
잠시동안 편한길을 걷다가...
또 다시 산죽의 횡포에 시달린다
아직도 부두목을 구하지 못하셨나요?
묘지(07:30)
넓은 공터에 낙엽만 무성하고 관리가 안된 묘지 한기가 보인다
6전에 이곳을 지나온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그땐 서진을 했으니...
또다시 산죽지대가 나오는데 예전에 비해선 산죽지대가 더욱 넓어진 느낌이다
산죽지대를 지나 호젓한 길을 잠시 걷다가...
또 다시 산죽지대를 만남을 반복한다
안부로 뚝 떨어졌다가 힘들게 치고 오르니 797.봉이 나온다
797.5봉(07:50)
또 다시 산죽과의 전쟁(?)은 시작되고...
다시 안부로 떨어졌다가 오르막을 오르니 멋진 봉우리가 나오는데 지명은 없다
사진찍기 좋아하는 진권아우가 가다말고 포즈를 취한다... 오늘도 아우 전속 찍사다
무명봉에서 왔던 길을 뒤돌아보니 지나온 지리산 주능선이 안개사이로 살짝 보인다
짙은 안개 사이로 얼굴을 드러내는 지리산의 모습
산이나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뒷태가 가장 으뜸인 모양이다
반천리(反川里)갈림길(08:10)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마을로 주산의 북쪽 산지에 위치하여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천이 흐르고 자연마을로는 고운동, 주암, 재산 등이 있다.
고운동은 주암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신라 말기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하여 고운동이라 부르게되었으며 해발 700m에 위치한 고운마을
(고운동)은 이 일대 고운계곡에 마을을 이루는 곳이었으며 마을의 역사가 거의 1200년에 이른다.
예전부터 고운동 일대는 풍수지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당자리로 알려졌다고 전한다.
하지만 반천리에 지리산 산청양수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댐이 건설되고 고운계곡일대
마을은 수몰되었고 사람들 대부분이 마을을 떠났고 현재는 고운동의 예전 모습은 사라지고
고운호(인공호수) 주변의 몇몇 집들만 남아있다. 고운호는 산청양수발전소의 상부댐이며
발전소의 시설용량은 700MW이며 35만kW발전기 2기가 운용된다. 1호기는 2001년 9월 28일,
2호기는 같은 해 11월 8일에 준공되었다. 상부댐의 높이는 92m이고 댐의 길이는 380m이다.
하부댐은 시천면 내대리에 있으며 댐의 높이는 69m이고 길이는 318m이다.
호젓한 길을 걷고 있긴 하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주위의 조망은 기대할 수가 없다
지금 낙남정맥을 걷고있는 후배 산꾼들의 흔적이 보인다...반갑다
조그만 공터를 지나 5분정도 걸으니 789.8봉이 나온다
789.8봉(08:30)
정상의 나뭇가지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과 준.희님의 산패가 걸려있고 4등 삼각점이 있다
789.8봉 삼각점(△곤양 403 / 1985 재설)
안부(08:35)
다시 안부로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초반부터 체력의 과부하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주산(主山:831m)갈림길(08:40)
능선 좌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나뭇가지로 사이로 커다란 봉우리가 보이는데 주산이다
주산(831m)은 산청군 시천면과 하동군 청암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고려시대 대각국사께서
천태종을 창시하시고 주산의 남쪽인 오대에 큰 법이 머물곳이라 하여 절을 지어니 그절
이름을 오대사라 하였는데 그로 인해 주산을 오대 주산이라고 했다
갈림길에서 급경사로 떨어지는데 낙엽이 쌓인 등로는 엄청나게 미끄럽고 비가 많이
왔는지 등로에는 빗물로 인해 낙엽이 쓸려간 흔적들이 뚜렸이 보인다
생강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다
저희들은 내려가니 힘이 전혀 안듭니다
질마재에서 이곳으로 오르는 길은 엄청난 급경사다
급경사로 내려서니 묘지가 보인다
면천박씨(沔川 朴氏) 묘지(08:58)
길마재(鞍峴:510m:09:00)
경남 하동군 묵계리 장재기 마을과 옥종면 궁항리 1014지방도와 연결되는
시멘트 임도길이며 승용차가 지날수 있는 도로로 이동통신탑이 서있다
길마재란 고개 지형이 길마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한자론 안현(鞍峴)으로 쓰고
'질마재', '질매재'란 이름으로도 사용되며 짐을 싣을때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인 길마(질마)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또 고개 좌측 마을이 빈이터라서 빈이터재라고도 하고
옛 묵계리로 넘어가는 도로로 열두 모랭이란 질매재 먼당(높은 곳의 경상도식 발음)에서
묵계로 가는 모퉁이로 열두 번을 돌아간다는 뜻이라는데 추측컨대 길다는 모퉁이의 진고개와
모랭이가 합쳐져 진모랭이재가 질매재, 질마재를 거쳐 길마재가 된 모양이다.
우측의 궁항리(弓項里)는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고 해서 활미기 또는 궁항이라고 부른다.
지리산에 은거해 있던 빨치산들이 자주 이용하던 고개라고도 한다.
아무런 표식도 없는 이곳에 누군가 길마재라고 써놨다
길마재를 가로질러 우측 능선으로 완만하게 올라서니...
관리가 안된 무명묘지 한 기를 만나고...
나뭇가지 사이로 주산이 보인다...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산불감시초소가 나온다
산불감시요원이 돌로 만든 아궁이에 버려진 냄비... 산불감시가 아닌 산불을 낼까 걱정이다
553봉(09:10)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보이고 우측 아래로는 멋진 하동호가 보이는 곳인데
오늘은 아예 조망을 포기해야 할듯 싶다... 갈수록 짙은 안개는 더 심해진다
낙남정맥길에 이곳에서 바라본 하동호(2010년 8월 8일)
하동댐의 구축으로 조성된 하동호는 하동군 청암면의 중이리·상이리·평촌리 일대 청암계곡에
산중 호수를 이루고 있으며 ‘청암호’라고도 한다. 수원(水源)은 지리산에서 발원한 묵계천과 금남천이다.
산불감시초소를 내려와서 옴팍한 곳에서 진권아우가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형님! 오늘 컨디션이 영 아니네요’ 하면서 초코파이 하나를 건넨다
잠깐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계속해서 진하게 밀려오는 박무(薄霧)
자꾸만 진권아우님과 거리는 멀어지고...
독매고개(09:30)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에서 청암면 상이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고개라기보다는 밋밋한
봉우리에 불과하다... 우측아래 청암면에 뒷독매라는 조그만 마을이 지형도상에 있다
청암면 상이리(上梨里)는 대부분의 지대가 산지로 조성되어 있는 산간 마을이다.
비교적 고도가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지형이다.
자연마을로는 감나뭇골, 장티, 무군터 마을 등이 있으며 감나뭇골 마을은 감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장티 마을은 장재라고도 불리며 장이 열리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무군터 마을은 지형이 장군이 날 곳이라 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일제시대에(金淇範)선생의 고향이 이곳 청암면이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오르는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오르막만 가면
체력이 다운되는데 진권아우는 그것도 모르고 부지런히 도망을 가고... 돌고지재까지
4시간 30분안에 도착해야 오늘 날머리로 정해놓은 수구재까지 갈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몇번이나 선 채로 쉬었다가 오른다
컨디션 저하인지 체력적인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이젠 술을 좀 줄여야겠다... 새로 옮긴 사무실 주변에는 전부 아는
사람이라 매일 마시다시피 하니... 그럴 수 밖에... 좀 조신하게 살아야지
거기다가 이번주는 지맥길을 2번이나 했던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정말 힘들게 능선을 오르니 산죽에 파묻힌 칠중대고지 정상이 나온다
칠중대고지(七中隊高地:565.2m:09:50)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와 청암면 상이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여순반란사건 때
지리산 일대에 숨어 있는 반란군을 소탕하기 위해 7중대가 주둔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7중대고지를 넘은 이후는 산죽군락이 보이지 않는 육산의 모습이다.
60년이 된 아직도 벙커 흔적이 남아있는 슬픈 역사의 현장니다
1945년 해방이후 좌.우 이념대립으로 심각한 사회적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지리산 아랫쪽인
이곳도 그 혼란에서 예외는 아니였다... 그 와중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民草는 얼마이던가
그 민초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얼마나 알았겠는가... 오직 처자식의 생계를 위한 몸부림...
해방이 지난지가 70년이 지난 아직까지 이념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민초들의 팍팍한 삶은 아직 변하지 않았으니...
칠중대고지 정상 삼각점(△곤양 404 / 1985 재설)
6.25 격전지의 느낌을 풍기는 칠중대야 이미 이 능선을 떠났겠지만, 승자도 패자도
즐겁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사상전이 되고만 동족의 비극 속에서 누굴 기념하고 누굴 탓하리요..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희생된 선량한 민초들의 그 恨을 누가 풀어주리오
山竹길에 묻혀진 고지 삼각점 처럼 그 의미를 찾기가 힘들구나..
비에젖은 낙엽을 밟으며 부드러운 陸山을 걸어간다
등로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아무런 특징도 없는 584봉을 만난다
584봉(10:20)
완만하게 고도를 낮추니 TV 안테나도 6년전 그대로이다
양이터재로 내려서니 지리산 둘래길 10코스 안내판과 간이화장실, 나무의자, 양이터재
표지판, 돌로만든 지리산 둘레길을 만들때 도움을 준 후원인들의 이름을 새긴 돌들이 보인다
양이터재(梁李峴:480m:10:30)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와 청암면 평촌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상에는 지리산둘레길이 지나는 곳이라 그런지 간이화장실을
비롯한 각종 시설물들이 보이고 자동차가 다닐만큼 넓은 도로로
6년전 낙남정맥길에 없었던 시설물들이 많아 조금은 번잡한 느낌이다
고개 동쪽 아래 궁항리에는 양이터 마을이 있는데 지명은 그 마을에서 따왔다
양이터란 지명은 동학란 때 양(梁)씨와 (李)이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하여 양이터라
불렀는데 이곳은 낙동강과 섬진강 水界가 갈라지는 곳으로 지리산둘레길의 동남쪽인
위태~하동호 구간(지리산둘레길 10코스)이 지난다.
궁항마을, 양이터마을에서 양이터재를 지나 나본마을을 지나면 하동호를 만나게 된다
양이터 고개의 모습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
벤취도 보이고... 예전의 민초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고개
지금은 팔자(?)좋은 사람들의 힐링코스이기도 한 고개이다
도로를 개설할 때 돈을 낸 사람들인가?...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양이터재를 가로질러 다시 완만한 능선을 오르건만 이젠 이런 곳에서도 산행속도가 나질 않는다
능선을 올라 좌측으로 꺽어져 가는데 양지라 그런지 생강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봄이오는 소리가 들리시나요?
무명봉(10:50)
무명봉 정상 아래에서 우측 사면길로 맥길은 이어지나 혹 정상에 뭔가
있을 것 같아 올랐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시 갈림길로 내려선다
행님은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젊은것이 무명봉에 오르지도 않고 갈림길에서 날 기다린다
무명봉을 지나 고도차가 거의 나지않은 등로를 따라간다
폐헬기장(?:11:00)
벌목을 한 다음에 아주 정리가 잘된 능선을 따라 오르막을 오른다
무명봉(11:05)
산으로 가는 마음
내 마음
주름살 잡힌 늙은 산의
명상하는 얼굴을 사랑하노니,
오늘은 잊고 살던 산을 찾아 먼길을 떠나네.
산에는 그 고요한 품안에 고산식물들이 자라니.
마음이여
너는 해가 저물어 이윽고 밤이 올 때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좋다.
산에서
그렇게 고요한 품안을 떠나와서야 쓰겠니?
(신석정·시인, 1907-1974)
안부에 또다시 떨어졌다가 힘들게 치고 오르니 방화고지란다
방화고지(665.8m:11:15)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와 옥종면 회신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로 산 모양이
촛대처럼 생겼다 하여 촛대봉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옛날 방화(봉화)하여 국령을
알리는 신호로 사용 했다는 산고지에서 난 이름인 방화고지라 널리 부르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해방후 빨치산을 토벌하면서 칠중대고지와 연유된 것도 같다
방화고지에서 또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 다음 안부에서 다시 치고 오른다
나와 같은 바람이 났군요
651봉(11:30)
힘들게 651봉으로 오르니 먼저 도착한 진권아우가‘ 행님아! 오늘 컨디션이 영 좋은가베’ 하면서 초콜렛과 물을 권한다
아우가 준 초콜렛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다시 내리막으로 향하는데 잡목의 저항이 엄청 심하다
무명봉(11:35)
다시 길을 걷는다
잘 정리된 벌목지를 지나니...
편백나무 조림지가 나오고...
무명봉(11:50)
무명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편안한 등로를 따른다
무명봉에서 내려서니 봉분이 망가진 채 방치되어 있는 묘지가 연이어 나오고
조금을 더 내려와 안부에서 다시 조그만 봉우리로 오르막을 시작한다
무명봉이 나오지만 정상은 오르지 않고 옆사면길로 통과한다
넓은 임도를 따르니 안부가 나오고...
안부(12:05)
안부를 통과하니 우측으로 밀양박공 묘지가 나오고...
밀양박공 묘지 아랫쪽으로는 돌고지재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인다
375봉(12:10)
375봉 지적삼각점의 안내판
375봉을 내려섰다 좌측으로 오르니 우측으로 묘지가 나오고... 신백두대간의 마지막인 금오산이 아련히 보인다
좌측으로는 매실농장이 보이고...
봄이오는 소리
갈대숲을 지나...
낙남정맥 능선이 보이고...
매화꽃이 滿開하고...
대나무숲을 지나 도로로 내려선다
돌고지재가 보이고...
돌고지재 수준점
돌고지재(回峙:310m:12:20)
하동군 횡천면 전대리와 옥종면 회신리 돌고지를 넘나드는 고개로 돌거리재, 회티(回峙)
돌고개라 부르는 것으로 봐 돌아 올라가는 고개 또는 돌고 도는 고개라는 뜻으로
돌고지재라고 불렀고 또 다른설은 이 고개를 넘는 서포∼옥중간 도로가 돌이 많다 하여
돌고개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옛날 보부상들이 하동에서 진주로 넘어갈 때 가장 빠른길이란다
전남 광양에서 강원도 양양으로 가는 59번 국도가 지나며 1003번 지방도가 만나는 삼거리
상에 있어 하동 내륙 산간 지역과 동부 산청 덕천강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요지로 발전해 왔다
원래의 산행 계획은 수구재까지 가기로 했는데 내가 너무 컨디션이 안 좋아 포기하고 싶은데
진권아우님도 흥이 안나는지 더 이상 가고 싶은 맘이 없는 모양이다... 완벽하게 이해가 일치한다
이곳에서 수구재까지는 3시간정도 더 가야하고 그렇게 되면 상경 시간이 늦어진다
정상적인 컨디션이라면 이곳까지 30분이상 줄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이곳에서 일단 옥종이나 횡천으로 나가야하기에 이정표 아래에 있는 택시 번호를
확인하는데 횡천에서 1톤 트럭한대가 오는게 아닌가... 얼른 손을드니 트럭을 세워준다
이게 뭔 횡재여!... 잽싸게 트럭에 올라타서 진주를 가려고 하니 옥종까지 태워 달라고 했다.
그 다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트럭 쥔장이 진주를 가려면 옥종을 가지말고 단성으로
가라고 하면서 단성까지 태워 주겠단다... 단성까지면 여기서 길이 얼만데... 또다른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본격적인 범여의 뻔뻔함(?)을 드러낸다... 기왕이면 단성말고 원지까지
태워주소 하니까 잠시 망설이더니만 태워 주겠단다... 이 분은 지리산 삼신봉 터널 근처에서
사시는 분인데 횡천에 있는 농장에서 일을하고 집으로 가는 중이란다
서울에서 조그만한 사업을 하다가 IMF 때 사업이 부도나서 이곳으로 왔단다
돌고지재에서 원지까지는 40km가 넘는 거리이고 삼신봉 터널과는 정반대이다
내 고향이 이곳 근처라 지리를 잘 아는터라 원지만 가면 서울가는 차는 20분에 한대씩 있다
원지시외버스 터미널 앞(13:10)
원지까지 태워준 고마운 트럭 쥔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베낭을 내린 다음에
터미널 안에 있는 화장실에 들려서 스틱과 신발을 간단하게 씻고는 신안면사무소앞 정자로 향한다
원지의 모습
이곳은 산청군 신안면소재지가 있는 곳으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가깝고
원지에서 진주를 비롯한 여러곳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라 산청읍보다
땅값이 비싼 곳으로 시골치고는 꽤나 큰 편이다
신암면 하정리에 있는 원지는 다복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신안원(院)이
있었다고 하여 원지 또는 원목정이라 하였으며 신안면은 산청군의 관문이자
남부 6개면의 중심지이며 적벽산(160m)과 백마산(262m)과 선유동계곡이 있다.
산청이 배출한 인물 중에 그 족적이 가장 뚜렷한 사람으로는 고려 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의류혁명’을 일으킨 문익점과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쓴 남명 조식이 있다.
남명은 처사로 자처하며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경북 안동의 퇴계 이황에
견줄 만큼 독특한 학풍을 이루었다. 단성면에 문익점 면화시배지가 있으며,
시천면에 덕천서원·산천재와 묘소 등 남명 조식의 유적이 있고 이곳 원지에서 단계천만
건너면 겁외사가 있는데 현대 한국불교의 가장 큰 스승이자 가야산 호랑이로 유명한
퇴옹당 성철 대선사(退翁堂 性徹大禪師 )의 고향이 단성면이다
원지시외버스 정류장
하루 평균 2000여 명이 이용하고 570회에 걸쳐 버스가 운행하며 진주를 출발한 서울, 인천행
시외버스가 중간 경유하며, 지리산 방면 각 지역으로 시외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산청군 군내버스 일부 노선의 기점 역할도 하고 있는 산청군의 교통 거점이자 요지이다
서울로 귀경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갑자기 허기가 진다
산에서 점심을 먹진 못한 탓이라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팔각정에 가서 젖은 옷을 말리고 이곳에서 버너를 피워 라면에다
떡국과 참치를 넣어서 맛있게 점심을 해결하는데 오늘은 조신하게
酒님을 알현하지 못한다... 위가 너무 아프다
글고 술을 먹지 못하니 사는 재미도 별로 없지만...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겠다
맛있는 점심에 후식으로 커피에다 과일까지 먹고는 근처 목욕탕에 가서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의관정제를 한 다음 목욕탕을 나오는데 진권아우가
이리저리 전화질을 해댄다
목욕탕을 나오니 내 고향(의령)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무척이나 반갑다
이곳에서 30분이면 내 고향을 가는데 고향 떠난지 어언 40여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자주 가지 않으니 고향에 대한 애정도 많이 식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반갑다
이리저리 전화질을 해대던 진권아우가 ‘형님 진주로 갑시다’ 하는게 아닌가
‘와 가자카노’ 하니까 내가 백두대간을 다녔던 산악회에서 낙남정맥 진주구간을
타는데 오늘 산행이 일찍 끝나서 현재 촉석루를 구경하고 있는데 16시 출발이란다
원지에서 진주로 간 다음 다시 촉석루에 도착하니 반가운 동료산꾼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산악회 버스를 얻어타고 서울로 향하는데 오늘은 이래저래 빈대, 앵벌이
뻔돌이 노릇을 했지만... 덕분에 경비는 엄청 줄였다... 다들 고마웠고 복받을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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