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6년 5월 8일
☞산행날씨:약간 흐린 날씨에 엄청나게 무더운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0km / 9시간 57분 소요☞참석인원: 진권아우와 둘이서
☞산행코스: 구영고개-218.1봉갈림길(왕복)-218.1봉-감나무밭-임도-넓은공터-NO33송전탑-164봉-포장도로-이동통신탑-진양하씨 묘지-금오산 도로-갈림길-666봉(산불감시초소)-도로-687봉-761.2봉-문바위 갈림길-도로
석굴암갈림길-해맞이공원-금오산-덕천마을갈림길-마애불-죽산박공묘지-대송마을 갈림길-628봉 삼거리-
너덜길-송문리갈림길-433봉-연대봉-신노량갈림길-임도-급수탱크-구노량마을-남해대교
☞소 재 지: 경남 하동군 양보면/ 진교면 / 금남면오늘(5월7일)은 음력으로 4월 초하룻날이라 오전에 절에 갔다가 부지런히 조계사에 들려 연등 하나를
켜고 연등축제가 열리는 동국대학교 운동장으로 향한다
해마다 초파일 1주일전에 열리는 연등축제에 조계종 포교사로서 행사에 참여한다
포교사 활동을 한 지가 17년차가 되다보니 이제는 고참이라 그런지 초발심은 많이 퇴색된 느낌이다...
부처님께 미안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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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에서 조계사까지 이어지는 제등행렬에 참석하여 행사중에 제등행렬이 시작되는걸 보고...
서울 남부터미널 → 진주행 21시 버스표
집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베낭을 메고 남부터미널에 도착하니 버스 출발 5분전이다
서둘러 버스에 오르긴 했지만 가족들에겐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다
며칠전 아들이 아버지! 일요일에 가족끼리 식사나 한번 하고 싶은데 이번에도 산에가요 한다
응! 아빠가 약속을 해놨어... 어떡하지... 아들이 안가면 안돼요 하는데 할 말이 없다
딸과 예비사위, 아들이 엄마, 아빠에게 한번 쏘겠다는데... 아빠가 주말이면 산으로 도망을 가니...
애들한테 늘 빵점짜리 아빠인데도 부모말 한번도 거역하지 않고 예쁘게 자라준 애들이 고맙기만 하다
더군더나 딸은 내년부터 남의 집 식구가 되는데...애들한텐 늘 미안하기만 하다
이런저런 잡념 때문인지 낮에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힘들게 다니다가 버스르 탔는데도
오만가지 때문인지 잠을 이룰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진주에 도착하고 (00시 40분)
낡은 여관을 빠져나와 터미널 건너에 있는 식당에 들려 육계장 한그릇을 먹고는 집에서
가지고 온 빈 도시락에 맨 밥을 사서 베낭에 넣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진주에서 진교가는 버스 시간표
지난번에는 진권 아우의 친구들 덕분에 편하게 들머리에 도착했는데 이번엔 오늘이 어버이날이라
친구들이 부모님 찾아뵈러 가버린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버스를 진교까지 가야하는데 버스표를 예매한다
근데 버스표 파는 여자가 어찌나 뻣뻣하고 불친절한지... 거기다가 매점에서 커피한잔 마시는데 커피파는
늙은 할마시도 대나무를 삶아 처먹었나... 뻣뻣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내미가 뚝 떨어진다
진주 버스터미널에서 진교가는 버스에 올라 진주시내를 빠져 나가기도 전에 버스는 이상한 소음이
계속 울리는 바람에 상당히 신경이 곤두선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참다 참다 더는 못 참을것 같아서 이보소! 기사양반 차량을 정비도 하지 않고 운행을 하면 어떡하요
이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당신이 책임질거요 하고 소리를 지르니 그때서야 다른 사람이 한마디씩 한다
기사가 하는 수 없이 차를 세우고 보닛을 열어 이것저것 만지더니 물을 보충하니 차량에 소리가 나질 않는다
진교터미널(07:20)
차량을 정비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진교 터미널에 도착하고
버스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오늘의 들머리인 구영고개로 향한다(택시비 7,000원)
구영고개(105m:07:30)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와 진교읍 월운리 구영마을 잇는 고개로 구영마을에서 지명을 따온듯 하다
지난 3월 20일에 이곳을 왔으니 꼭 50여일만에 다시 구영고개로 와서 마지막 구간을 준비한다
구영고개에 도착하여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 (07:40)
구영고개에서 우측으로 오르자마자 밤나무밭으로 통하는 우측의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구영고개에서 바라본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朴達里)의모습
양보면 박달리는 옛날 수문장을 지낸 이씨 성을 지닌 이가 거주하면서 밤이면 달빛이 유난히 밝아
달동[月洞]이라 불렀는데,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밝은 달’을 박달(朴達)이라 음차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조선 말 서양곡면(西良谷面)으로 박달촌·봉곡촌·성치촌·세곡촌·반계촌이 있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양보면 박달리가 되었다. 개편 당시 봉곡촌이 봉곡(鳳谷)으로,
박달촌이 박달·집홀(執忽)로, 성치촌·세곡촌이 세곡(細谷)[일명 가느실]으로, 반계촌이
반계(磻溪)로 되어 모두 다섯 개 마을로 개편되었다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게 이루어진 마을로 동쪽으로는 화봉산(花峰山), 서쪽으로는 성치산(城峙山),
북쪽으로는 학방산(일명:학봉산)이 마을을 감싸고 남쪽으로 멀리 금오산을 바라본다
마을 중앙에는 박달천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가고 있다
저곳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우리나라 트로트 가요계의 유명한 작사가인 정두수 선생의 고향이다
1937년 4월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1963년 진송남의 ‘덕수궁의 돌담길’을 시작으로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남진의 ‘가슴 아프게’,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등 3500여곡의 노랫말을 지은
전설적인 작사자로 지리산·섬진강·한려수도 등 삼포(三浦)의 고장 하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고향 하동을
소재로 한 노랫말도 눈에 띄게 많다
고향 성평리의 돌담길을 돌아서며,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자꾸만 뒤돌아보며 천리타향으로
떠나던 사람(일제강점기 전쟁터로 끌려간 삼촌)을 그린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를 비롯해
하춘화의 ‘하동포구 아가씨’, 설운도의 ‘하동사람’ 등이 대표적이다
능선을 오르는데 밤나무밭 아래는 야들야들하고 먹을만한 참취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한 30분이면 간단하게 한 베낭을 챙길것 같은데 진권아우는 벌써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저 젊은것이... 이렇게 좋은것을 두고 그냥 가다니... 하는 수 없이 따라간다.
묘지가 있은 듯한 넓은 공터를 지나니 희미한 삼거리가 나온다
218.1봉 갈림길(07:53)
신백두대간 능선에서 살짝 비켜 나있는 218.1봉으로 베낭을 벗어놓고 향한다
나보고 하는 소리인가...
218.1봉(08:00)
판독이 불가능한 218.1봉 삼각점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좌측으로 약초를 재배한듯한 농장인듯한데 온갖 험한 문구로 산꾼을 겁박한다
임도를 따라 진행하는데 간벌을 한 후 소나무를 심어논 곳을
지나는데 그 아랫쪽으로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 마을이 보인다
등로에서 바라본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의 모습
진교면 월운리(月雲里)는 이명산 달운재 밑에 터를 잡은 마을이므로 달운재 또는
달음재라 하던 것이 월운으로 바뀐 것으로 여겨지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하동군 동면의 백토동(白吐洞)·월운동(月雲洞)·갑정동(甲井洞)이 통합되어 동면
월운리가 되었고, 1933년 진교면 월운리가 되었다
북쪽으로 이명산을 등지고, 이명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남북으로 긴 띠 모양으로
형성한 골짜기 사이로 들판이 펼쳐져 있다. 산지 서북쪽 산기슭에 월운이, 서남쪽 산기슭에
갑정이 터를 잡았고 두 마을 모두 집촌(集村)을 형성하였다.
월운 앞은 분지로서 부채처럼 펼쳐진 들판이 마주하고 있다
감나무 농장옆 임도길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감나무 농장 끄트머리에서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들어선다
좌측에 보이는 능선이 NO32 송전탑이 있는 능선이다
원 맥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서 NO32 송전탑으로 갔다가 휘돌아 와야 하는데 그냥 임도따라 진행한다
NO32송접탑에서 내려오는 능선의 임도를 만나고...
송전탑 건설로 인해 생긴듯한 넓은 임도를 따라서 룰루랄라 하면서 걷는다
좌.우로 이어지는 넓은 공터에서 직진으로 걸어간다
아직까지 등로는 무쟈게 좋고...
임도 우측으로 NO33 송전탑이 보인다
힘들게 능선을 치고 오르니 나뭇가지에 선답자의 시그널 서너개가 보이는데 지도상에도 나타나지 않는 164봉이다
164봉(08:55)
후답자들은 선답자들의 시그널을 따라 오르면 개고생하니 임도를 따라 편하게 오시길...
조금전의 개고생을 보상하려는지 편안한 등로는 계속되고...
조금전에는 농장 주인이 겁박하더니 이젠 하동군에서 겁박을 한다
전국의 무수한 산길에서 하도 많이 당해놔서 웬만한 겁박에는 눈도 깜짝 안한다
벌목지가 나오고 그 너머로 가야할 금오산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사천만이 아련히 보이고...
지례리(知禮里) 갈림길(09:20)
임도로 내려오니 우측으로 지례리로 연결되는 도로를 만나고 좌측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하동군 양보면 지례리 장성촌에 김씨 성을 가진 부호가 정착하면서 지내골[지금의 예성(禮城)]을
한자로 지례곡(知禮)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전해 오며 조선 말 서양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모고리촌·장성촌·예동땀이 예성으로, 가락골·사기점이 가락(佳樂)으로,
구무고개·화촌촌이 화촌(花村)으로, 꽁매·만지동이 만지(晩池)로 통합되어 양보면 지례리가 되었다.
이동통신탑 앞을 지나니...
진교농장 앞이 나오고...
아카시향이 진동하는 도로를 따라서 정처없이 걸어간다
도로 우측 능선이 우듬지 구간 능선이기는 하나 그냥 도로를 따라간다
꼬들배기
(주)자연 정문(09:23)
나노라인(09:25)
콘크리트 제조업체인 (주)자연이란 회사를 지나니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나노라인 회사 담장 앞에는 촬영하지말라, 출입하지 말라
벌금을 물린다는 경구문이 붙어 있는데 이 회사 CEO는 전직이 보안대 출신인가?
보안을 요구하는 특수회사도 아닌 평범한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임에도 이런 문구를...
이보시요! 출입을 하라고 해도 바빠서 들어갈 시간도 없소이다
당신네들의 공장 뒷쪽이 우듬지구간의 114봉 봉우리기는 하나... 그냥 도로따라 갈라요
산괴불주머니
남해고속도로 굴다리(09:38)
하동군 진교면 안심리 신안마을과 안심마을의 경계에 있는 곳으로 진교에서 양보면소재지로
이어지는 1033번 지방도로가 지나가고 그 윗쪽으로는 남해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우측에는 안심마을 표시석과 안심마을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데 좌측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난다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진교농공단지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안심 마을은 하동군 진교면에 있는 마을로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안심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보이며, 자연 마을인 신안은 안심마을 안쪽의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조선 말 곤양군 금양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하동군 금양면 안심리가 되었고,
1933년 하동군 진교면 안심리가 되었다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꽤나 큰 규모의 에스앤피(주) 공장이 보인다
진교농공 산업단지(09:40)
남해고속도로와 진교농공단지로 인해 맥길이 애매한 곳이다
박성태 선생이 저술한 신산경표상의 우듬지 구간은 이곳에서 (주) 성광이라는 공장
뒷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곳을 맥길로 표기하고 있지만 최근에 부산, 경남지역의 산꾼들을
중심으로 조금전에 지나온 에스앤피 (주) 공장 뒷쪽 능선을 우듬지 구간이라고 주장하며 그쪽으로
산행하는 산꾼들도 많지만 대다수 산꾼들은 공장 도로인 신안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맥꾼이 모르고서야 걸을 수 있지만 알고서야 원칙대로 가는게 맞을듯 싶어 성광이라는
공장 앞으로 지나는데 뒤따라오는 진권아우는 불만이 많다... 편한길로 가자는 뜻이다
젊은것이 편안한 길 찾으려면 100대 명산이나 다닐것이지... 맥길은 왜 걷나...ㅎㅎㅎ
(주)성광 공장을 지나니 진교로 가는 길 우측에 홈플러스 협력업체라는 식품공장이 보인다
도로 아랫쪽으로는 백련리로 향하는 길이다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白蓮里)는 조선 말 하동군 동면 백련동(白蓮洞)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
백련동과 고현면 안심동(安心洞)이 통합되어 동면 백련리가 되었고, 1918년 진교면 백련리가 되었다
백련·사기[일명 사기실]·신기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백련은 금오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나지막한 산줄기 골짜기 사이에 자리 잡은 마을로 매년 ‘찻사발과 연꽃 만남의 축제’가 열리고 있다.
사기는 고령토 산지로서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토기 문화가 형성되었던 곳으로, 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된 백련리 도요지가 있다. 도요지에서 영화 「취화선(醉畵仙)」이 촬영되었다.
신기는 구한말 이후에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백련리에는 백련리 도요지 외에도 하동요, 춘강요, 현암요,
새미골요 등 여러 도요지가 있으며, 일본의 국보 이도다완[井戶茶碗]의 원류로 추정되는 하동 막사발이
생산되고 있으며 새미골 금정미술관이 있어 도자기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가야 시대 고분군인
백련리 고분군과 진교농공단지가 있다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도로 우측으로는 (주) 성광 공장이 보이고...
5월달에 웬 쑥부쟁이... 참으로 개념이 없다
도로를 버리고 능선으로 들어선다
때죽나무
작은 종모양의 앙증맞은 하얀꽃이 나무를 뒤덮을만큼 많이피는 우리나라 산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옛날 제주도에서는 때죽나무를 엮어서 빗물을 받아 모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받은 빗물은 좀처럼 변하지 않앗다고 하며 열매나 잎에는 마취 성분이 들어 있어서
찧어서 냇물에 풀어 놓으면 물고기가 기절하여 이를 천렵에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길은 없어지고 잡목의 저항이 너무 심해 진행할 수가
없는데 뒤따라 오던 아우는 편안 도로를 두고 이런곳으로 간다고 불평불만이 엄청 심하다
가야할 금오산 전위봉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최근에 부산. 경남 산꾼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신백두대간 능선... 맥상으로 보면 맞는듯싶다
맥상의 길이 전혀없고 잡목이 너무 많아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절개지 수로를 따라 오니 감나무밭이 앞을 가로 막는다
진권아우의 불평도 들어줄 겸 수로를 따라서 마을 도로로 내려선다
아이쿠 깜짝이야!
앞만보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어린 독사 한마리가 공격자세를 취한다
이런 겁대가리 없는 넘을 봤나... 스틱으로 건드리니 도망은 커녕
점프를 하면서 나쪽으로 뛰어 오르는게 아닌가
얼른 스틱에 걸어서 공장 마당으로 던져 버리고 마을 도로로 내려선다
마을 도로로 내려서니 대성암이라는 암자가 주택가 자리잡고 있다
다시 조금을 더가니 신안마을회관이 나오고 어르신 두 분이 우릴 반긴다
신안마을회관(09:55)
마을회관 앞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초콜렛 하나와 음료수를 마시면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후에 마을회관을 지나 주택가 사이로 올라 대밭으로 들어선다
대밭에는 지금 이 동네 사람들이 죽순 수확이 한창이다
나도 이곳에서 10개정도의 죽순을 수확한다
대밭을 지나니 마을의 농로가 나오고 신안마을 저수조가 보인다
신안마을 저수조(10:20)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지나가니...
갑자기 내려갈 수 없는 절개지에 부딪히고... 다시 뒤돌아서 우회하여 내려오니 공단에서 올라오는 도로를 만난다
도로에서 우측 시멘트 도롤에서 올라 좌측 능선으로 오르는데 우측으로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아마도 요즘 새로 대두되고 있는 맥길을 이용하는 산꾼들의 것인듯 하고 시멘트 도로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 우측으로 바라보니 조그만 저수지인 검단소류지가 보이고 곧이어 매실밭이 나온다
매실밭과 감나무밭이 나오는데 간간이 음나무 두릅나무들이 보인다
매실밭 가운데의 등로를 지나간다
밤나무 단지를 지나 다시 능선으로 접어든다
부드러운 참취와 두릅, 음나물 순들이 많이 보이나 이런 곳에서는 오해받기 싫어서 눈길도 주질 않는다
비교적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오니 옛 남해고속도로가 나온다
옛 남해고속도로(130m:10:35)
새로 생긴 남해고속도로에 모든 영화를 다 빼앗겨버린 구 남해고속도로를
지나 좌측의 아임허브관광농원 간판을 끼고 들어서니 돌탑과 주택이 보인다
농장안에 있는 돌탑
이곳 주택에는 차량서너대와 사람들이 있는데 간에 좋다는 엉컹퀴 캐다가 씻고있는 중이다
이곳에서 물한모금 얻어 마시고 양해를 구한 다음에 컨테이너 하우스옆 매실밭을 가로 지른다
매실밭을 가로질러 올라가니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절개지 오르는 길에 가시나무의 저항이 엄청 심하다
잠시 후 대밭이 나오고 대밭을 헤집고 나오니 조그만 도로를 만난다
좌측에는 농산물 저장고인듯한 창고들이 보이고 절개지 수로를 따라서 올라 간다
이곳에서 약간 문제가 생기면서 오늘 산행중에 엄청난 개고생을 한다
지나서 보니 수로에서 조금 더 진행하여 점선방향으로 올라야하는데 우측으로 간다
우측 절개지 윗쪽으로 보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이곳에서도 죽순을 조금 수확하고...
뒤돌아 본 농산물 저장고의 모습
이곳에서 엄청난 오류를 범하며 알바를 하고 개고생을 한다
절개지에서 올라서니 대밭이 나오고 직진으로 뚜렸한 길로 향하는데
원 맥길은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 11시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무심코
직진을 하니 우측에는 계곡물이 오르고 갑자기 그 좋던 길이 사라진다
그때서야 지도를 꺼내보니 원점회귀는 시간이 넘 많이 걸릴것
같아 무작정 좌측 능선으로 치고 가는데 말 그대로 미칠것만 같다.
엄청난 개고생을 하면서 등로에 복귀하니 전망암이 나온다
전망암에서 바라본 진교농공단지
380봉(11:50)
380봉에서 희미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니...진양씨 묘지가 나온다
진양하씨 묘(11:52)
계속되는 오르막이다... 근데 주위에는 고사리가 지천이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가랴... 비닐봉지를 꺼내 고사리를 따는동안
진권아우는 얼마나 빨리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금오산 도로(500m:12:10)
도로로 올라서서 금오산 정상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혼자서 셀카놀이도 해가면서...
아직도 많이 남았습니다
갈림길(12:22)
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이정표←정상(해맞이 공원 2.6km→약수골랜드 1.4km)가 있고 좌측으론 안심마을에서 올라오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준.희선생의 격려문구...언 넘의 쉬끼가 이짓거리를...손모가지를 그냥 댕강...
피톤치드향이 가득한 소나무 숲을 걸어간다
바람은 솔솔 부르고 이런 맛에 산에 오는거 아닌감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666봉 정상
먼저 도착한 진권아우...난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여유롭기만 하다
666봉 정상에서 바라본 금오산의 모습
능선 아래로는 남해고속도로와 양보면소재지... 그 너머로는 지리산이 아련히 보인다
하동군은 신라통일 이전 모래가 많은 지역이라 하여
한다사군(韓多沙郡)으로 불리어오다가 신라 경덕왕대에
이르러 섬진강의 동측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하동”이라 칭하여 오고 있다.
666봉(12:37)
666봉을 내려서서 점심밥상을 펼칠 장소를 물색한다
집에서 가져온 반찬에다가 아침에 산 밥에 막걸리 한잔...꿀맛이다
약 2달만에 같이 걸어온 진권아우... 늘 고맙기만 하다
30분간의 여유로운 식사를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다시 금오산으로 향하는 도로로 내려선다
다시 우측 능선으로 오르는데 쓰러진 소나무와 잡목으로 인해 길은 보이질 않고...
도로(13:10)
도로에서 이정표(←정상 해맞이 공원 1.9km→약수골랜드 2.1km)와 하동군수 명의의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무조건 좌측으로 쑤시고 들어가는데 도대체 답이 보이질 않는다
앞서가던 진권아우는 포기하고 도로로 내려가 버린다
이런 곳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는데
아우님따라서 도로로 갈것 후회가 막심하다... 미칠것만 같다
천신만고끝에 687봉에 오른다
687봉(13:22)
687봉 정상의 모습
687봉 정상에서 바라본 하동군청 소재지의 모습
금오산과 바로앞에 보이는 761.2봉의 모습
761.2봉가는 것도 장난이 아니다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의 모습
참으로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
묘지의 흔적같은 곳을 지나자마자 또다시 잡목의 태클은 시작되고... 진권아우의 현실적 선택... 부럽다
준.희님은 지나신지가 오래된 모양입니다
또다시 넘어진 소나무의 횡포에 시달리다 올라서니 삼각점이 있는 761.2봉에 도착한다
761.2봉(13:50)
687봉에서 바로 앞에 있는 761.2봉까지 10분도 안되어 갈 거리를
강력한 잡목들의 횡포와 태클속에 30분 이상이라는 시간을 허비한다
761.2봉 삼각점(△ 남해 11 / 2001 이설)
이 험한 곳에 1등 삼각점이라니... 아마도 금오산 정상에서 옮겨온 모양이다
또다시 잡목의 저항과 횡포는 시작되고...
천신만고끝에 험한 길을 빠져나오니 휴게용 의자는 넘어진 소나무속에 갇혀있고...
문바위 갈림길(13:55)
이정표(←정상 해맞이공원 1.0km →문바위 0.3km)가 있는 곳에서 KT송신소가
있는 곳으로는 통행이 불가능하여 좌측 도로로 내려서는데 진권 아우한테서 전화가 온다
자기는 금오산 정상에 도착한지가 1시간이 넘었다고하면서 빨리오라고 한다
문바위 갈림길에서 바라본 KT 송신소
금오산 정상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서 간다
도로에서 바라본 금오산 정상의 모습
하동군 진교면(辰橋面)모습
하동군 진교의 원래 명칭은 민다리였는데 일제 강점기에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민’이 ‘진(辰)’이
되고, 하평(下坪) 앞 고룡천에 돌다리[橋]가 있었으므로 진교(辰橋)라 하였다는 설이 전해 온다
조선 말 하동군 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월운리(月雲里)·관곡리(冠谷里)·고이리(古梨里)·
송원리(松院里)·백련리(白蓮里)·진교리를 관할하였고, 1918년 하동군 진교면으로 개칭되었다.
1933년 금양면[지금의 금남면]의 안심리·고룡리·양포리가 편입되었고, 1963년 9개 리, 30개 마을로 개편되었다.
1989년 금남면 술상리가 편입되었고, 1995년 안심리 신안마을이 분동되었다
북쪽으로 봉명산과 이명산이, 서남쪽으로 금오산이 우뚝 솟아 있고 동남쪽으로는 남해와 접한다.
관곡천이 북서쪽에서 진교면을 가로지르다 남쪽에서 고이천과 만나 남해로 흘러든다.
관곡천 유역에 남북으로 긴 띠 모양의 농지가 펼쳐져 있고, 구릉지 기슭에 마을이 터를 잡았다.
도로옆에는 거북형상의 약수터가 있고...
KT 송신소 앞(14:00)
드디어 금오산 정상에 오른다
공군부대에 정상을 빼앗긴 채 정 상 아래에는 커다란 몽돌처럼 새긴 곳에 우측으로는 한글로 “소오산”이라
적혀 있고 좌측에는“金鰲山”이라 써놨는데 산 하나를 두고 2개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 상당히 혼란스럽다
표시석 뒷쪽에는 금오산의 유래 표시판이 있고 , 경남지방 기념물 제122호인 금오산 봉수대 표시석이 있다
도로 아랫쪽으로는 해맞이공원이라 칭하는 데크목 광장에 화장실까지 겸비해 있고 금오산 어드벤쳐라는
커다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조형물의 경관이 금오산의 풍경을 망치는듯 보인다
금오산(金鰲山:849m:14:15)
경남 하동군 진교면과 금남면, 고전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자그만한 산줄기가
남해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자라를 닮아서라고도 하고, 오행으로 볼 때 산의 형상이 금상(金相)
이라 하여 금오산으로 명명했다고 하며 또다른 이름은 볏단을 쌓아올린 노적가리를 닮았다고 해서
소오산이라 불렀으며, 병의 모가지처럼 생겼다고해서 병요산(甁腰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하동 금오산은 지리산의 동남쪽으로 뻗은 줄기로 하동군 동쪽 남해 연안에 자리잡은
해발 849m, 둘레 80리의 웅장한 산으로 북쪽의 진교면 안심리에 있는 금오산 줄기인 태봉(胎峰)은
일두 정여창의 태지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금오산 동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금남면 중평리 장사동에는
충의공 정기룡의 태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금오산에는 고려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축성했다는 금오산성과
금오산 봉수대와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마애불이 금오산 아래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동명이산(同名異山)의 금오산이 여섯 군데 있는데 경북 구미 금오산(977m)과
경남 밀양 삼랑진 금오산(730m), 경남 하동 진교 금오산 (849m), 전남 여수 금오산(323m),
경주 남산 금오산(468m) 그리고 충남 예산 금오산(234m)이 있다
구미의 금오산과 밀양 삼량진의 금오산, 충남 예산의 금오산, 경주 남산에 금오산 등 내육지에 있는 산은
금가마귀 산이란 뜻의 (金烏山) 즉 反肴之孝(까마귀의 효성)의 상징으로 신선시하며 숭배하고 있는 반면에,
해안가에 있는 하동의 금오산과 여수의 금오산은 금자라 산이라는 뜻인 금오산(金鰲山)이다
금오산 정상석 뒷쪽에 있는 금오산 유래의 표지판
금오산 어드벤쳐
하동 해맞이 공원
자동차로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어 멋진 남해안의 일출을 바라보며 하룻밤 비박코스론 안성맞춤이다
가야할 깃대봉과 연대봉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좌측으로는 하동군 진교면 일대와 사천만... 그 너머로 사천 와룡산이 아련히 보인다
금오산 정상의 이곳저곳을 두루 감상하고 공군부대 정문 방향으로 오른 다음에 좌측으로 내려서니
이정표(←덕천마을 3.45km, →금오산 정상 0.1km)를 바라보며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소나무 한그루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암릉 좌측으론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 앞에 있는 이정표... 맥길은 대송 →3.5km 방향으로 향한다
하동 금오산 마애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0호:14:30)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금오산 8부 능선에 위치한 금오산 마애불(磨崖佛)은 굴 속의
바위벽에 선으로 새긴 이 불상은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잘 드러난다
불상은 달을 업은 채 마치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듯한 형상을 하고 있고 불상 옆에는
9층 석탑이 새겨져 있으며 불상의 얼굴은 넉넉한 편이며 옷자락(法衣)은 양쪽 어깨에
걸쳐(通肩) 내려와 있지만, 그 윤곽은 뚜렸하지 않다
광배(光背)는 원형으로 거신광(擧身光)과 두광(頭光)으로 되어있다
손모양은 가슴에 두손을 올리고 주먹진 왼손의 검지를 세워 오른손으로 감싸안은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와 중생이 하나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고유한 손모양이다
비로자나불은 또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도 부르는데 부처님의 진리가 태양의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치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화엄경(華嚴經) 의
중심 불상으로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급하게 촬영을 하다보니 마애불 자체가 뚜렸하지 않다
마애불상 경내의 모습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마애불을 주마간산격으로 보고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금오산 마애불을 내려오자 竹山朴公 묘지를 만난다
이정표(14:35)
묘지를 내려오니 이정표(↖청소년수련원 3.2km, ↗ 대송 3.5km, 덕천마을 3.0km)에서
대송, 덕천마을 표시가 있는 쪽으로 내려서는데 이곳에서 좌.우 어느쪽으로 가도 맥길로 이어진다
너덜길같은 암릉구간으로 내려서니...
너덜길을 지나니 조그만 능선에서 급경사로 내려선다
구조 이정목을 지나니 대송리 갈림길이 나온다
대송리(大松里) 갈림길(14:45)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는 마을에 큰 소나무가 있어 대송(大松)이라 하였다.
달리 대송개라고도 하였는데, ‘개’는 포구를 뜻하는 말로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
대송포촌(大松浦村)이라는 관련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대송동(大松洞)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높은 산지가 자리한 북동쪽의 금오산(金鰲山)[849m] 줄기가 남서 방향으로 남해를 향해
뻗어 내린 100~300m 산지 사이로 평지가 길게 형성되어 있고, 거기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골짜기에서 발원한 작은 물줄기들이 대송천을 이루어 대송들 한복판을 지나 남해로 흘러든다.
대송, 사등(砂登), 환치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뒷편의 금오산 정상 남쪽
아래 달바구[月岩]라 불리는 바위굴 암벽에 고려 시대 불상으로 추정되는 하동 금오산
마애불(河東金鰲山磨崖佛)[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0호]이 있다.
사등마을은 조선 후기 충주 지씨(忠州池氏)가 남해군에서 건너와 정착한 이래 김해 김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들이 정착하였다. 환치마을에는 하동군 생활 폐기물 매립장이 있고,
마을 앞으로 남해가 펼쳐져 있다. 조계종 사찰인 금정사(金頂寺)가 있다
청소년 수련원 방향으로 향한다
잘계시죠?...아직도 여전한 발걸음이시네요
628봉 정상인데 오르지 않고 옆사면길로 맥길을 이어간다
628봉 갈림길(14:50)
628봉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급하게 내려서는데 커다란 암릉과 너덜지대가 나온다
직진하면 동쪽으로 분기한 진바등을 지나 큰설산으로 향하는 등로인 모양이다
신 선생님 이곳은 무슨 분맥인가요?
갑자기 등로는 거칠어지고...
직벽에 가까운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금오산에서 이곳까지 직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빠르게 내려오다보니 무릎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엄청난 통증이 온다
그런데도 앞서가는 진권아우는 귀경시간 때문인지 엄청난 속도로 도망을 간다
이러다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을것 같아서 먼저가서 서울로 가거라 난 알아서 갈테니까
하고 말하면서 먼저 갈 것을 권하니 아우는 그렇게는 못하다고 하면서 나의 보조를 맞춰준다
으름나무도 보인다
금오산 정상에서 대치재까지 500여m의 고도를 직벽에 가깝게 급하게 내려서니
넘 힘이 들었고 다리에 힘을 많이 주었던지 계속해서 통증은 계속된다
하는 수 없이 베낭을 내려놓고 에어파스로 통증이 오는 무릎에 뿌리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윤판나무
대치재(大峙:275m:15:15)
동물이동통로 아래로 1002번 지방도가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대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우측에
점곡마을이 있어 점곡재라 부르기도 하는 고개이다
좌측에 있는 대치리(大峙里)는 한때 금남면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깃대봉 오르는 도로에서 바라본 1002번 지방도와 사천만의 모습
대치재에서부터는 일반 등산로와 만나기에 등로는 아주좋다
NO59송전탑(15:25)
NO59 송전탑을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깃대봉 철쭉군락지라는 제단이 있는데
이곳은 아마도 하동군에서 철쭉 축제를 하는 곳인 모양이다
인위적으로 철쭉을 많이 심어놨고 깃대봉으로 오르는 등로에는 나무계단으로 만들어 놨다
갑자기 급격하게 체력이 저하되는데 진권아우는 야속하게도 먼저 가버린다
가던지 말던지 상관하지 않고 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여기부터는 나무 계단길인데 고도 150m를 한순간에 다 올려야 된다.
뒤돌아 본 금오산
NO59 송전탑에서 치고 올라오니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지친 범여를 반기고...
다시 고도를 높여야 하는데 가면 갈수록 힘이 부친다
많은 철쭉이 있건만 유독 이 넘만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먼저 깃대봉에 오른 진권아우의 여유...행님은 죽을 지경인데...
깃대봉 정상에 오르니 옛날 군부대에 주둔했던 모양이다
정상에는 녹슨 철조망이 처져있고 사격장 불발탄이 있어 출입을 금지하라는 경고판이 있다.
깃대봉(503.8m:15:45)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대치리, 송문리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예전에 군부대가 있었던 봉우리라
그런지 정상에는 신갈나무 한그루만 외롭게 서있고 철조망과 사격장 불발탄이 조심하라는 경고문구가
있는걸로 보아서 육군의 사격장이었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없는 벌거숭이산이라 그런지 주위 사방으로는 모든게 다 보인다
조금전에 지나온 금오산과 우측의 광양의 백운산 그 옆으로 억불봉... 언젠가 가야할 억불지맥 능선이 아련하다
앞에는 사천만과 광양만... 남해지맥 능선도 보인다... 가야할 지맥길은 너무 많은데... 세월은 너무 빠르다
가야할 연대봉 아래의 채석장으로 인해 흉물스럽게 보인다
하동화력발전소와 광양만... 그 너머로 광양제철소가 희미하게 보인다
사천만을 바라보면서 아침재로 내려서는데 이곳은 신갈나무를 비롯한 잡목들이 엄청나게 괴롭힌다
아침재(240m:16:05)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서 대치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아직도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우측의 송문리쪽은 농장이 보이고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마지막 힘든 구간이다
아침재의 유래는 옛날 어느 스님이 아침 일찍 이 재를 넘다가 스님의 마을보다
해가 일찍 뜬다고 해서 아침재라 불렀다고 한다
아침재를 지나 다시 오르막길은 시작되고...
현오님의 시그널인가?
다시 잡목의 횡포에 시달리면서...
갈림길(16:15)
시누대가 있는 너덜길로 접어든다
암릉구간을 지나니... 너덜길이 나온다
너덜길(16:25)
너덜겅에서 바라본 지나온 금오산과 깃대봉의 모습
너무 힘들어 주저안고 싶습니다.. 다리에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송문리(松門里) 갈림길(16:38)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는 곤양군 서면 소송동(小松洞)의 ‘송’자와 수문동(水門洞)의 ‘문’자를
따서 송문리(松門里)라 하였으며『호구총수(戶口總數)』에 곤양군 서면의 소송포촌(小松浦村)·
수문포촌(水門浦村),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옹기점[일명 수문동]이라는 한글 명칭이
기록되어 있고 미법·수문·소송·신기(新基)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미법마을은 송문리 중심 마을로 금남면사무소·금남면 보건소·노량초등학교 등이 들어서 있다.
수문마을 앞으로는 남해의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고, 마을을 지나는 국도 19호선의
소송교차로와 금남교차로가 있으며 문화 유적으로 송문리 화석 유적이 있다.
433봉(16:40)
어떤 지도에는 이곳을 연대봉이라 표기한 곳도 보인다
연대봉으로 오르는 넓은 등로에는 무명묘지 한 기가 있다
국립공원 표시 말뚝이 있는데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말함인가?
연대봉(蓮台峰:477m:16:45)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송문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산의 지세가
연꽃처럼 생겼다고 해서 연대봉(蓮台峰)이라 불렀다고 하며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라 전시에는 관군을 주둔시킬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최근에 조성한듯한 돌탑은 봉수대 역할을 한 곳이다
연대봉 산성은 옛날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작은 성이며 눈 아래 남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며 왜구를 방어 하던 요새로 수비군을 두었다고 한다
신백두대간의 끝지점인 남해대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백두대간은 지리 천왕봉에서 웅석봉을 거쳐 경호강에서 그 끝을 마감하지만 지리산
영신봉에서 남진하던 낙남정맥의 마루금이 그 방향을 동진하기 위해 바뀌는 옥산 직전에,
한줄기 남진하는 맥이 있어 그 줄기가 이곳 하동 금오산을 크게 일구고 깃대봉을 세우고
다시 마지막 연대봉을 거쳐 남해바다 노량앞에서 끝나는 이 구간을 ‘신백두대간’ 이라고 한다.
또 이 산줄기를 ‘백두대간 우듬지’(꼬리나 끝을 의미)라 하여 ‘백두지맥’ 또는 ‘금오지맥’으로 부르기도 한다
진권아우가 만들어 온 플랑카드를 들고 인증샷
하동화력발전소와 광양만의 모습
연대봉에서 신백두간 끝지점인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내년쯤에 한번 걸어볼 예정인 남해지맥 능선들이 범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천만 넘어 와룡산은 짙은 박무에 갇혀있고...
녹두산에서 뻗은 끝 지점에 관음포가 보인다
남해대교가 있는 노량해협은 한산, 명량과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로 이순신장군이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던 순간부터 한산도 앞바다로 나아가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학익진
전법으로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을 좌절시키던 한산대첩, 13척의 배로 울돌목의 빠른 물살과
변화가 심한 조류를 이용해 133척의 일본 함대를 상대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 낸 명량대첩,
일본군의 탈출을 막기 위해 노량 앞바다로 나아가 최대의 격전을 벌이며 7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던 노량대첩.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을 구하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도망가던 왜군을
추격하다가 이 순신 장군이 전사하신 곳이 저곳 관음포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유키나가(小西 行長)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 왜교성 전투인데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 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에 주둔 중이던 소요시토시(宗義智 등은 고니시 군을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향했다.
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음: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觀音浦)에 매복시켰다
이튿날인12월 16일(음: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고,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 ·
낙안군수 방덕룡 · 흥양현감 고득장 등과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적탄에 맞아서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군과
함께 일단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였으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연대봉 정상에서 노량 앞바다를 바라보면 다시한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지금 이 나라도 그때 못진않은 亂世임에도 불구하고 장군처럼 출중한 인물이 없단 말인가?
백선
연대봉에서 한동안 내리막길을 내려온다
묘지가 나오고...
묘지 윗쪽엔 묘비가 아닌 연대봉을 가리키는 표시석이 서있다
신노량 갈림길(17:00)
이곳에서 뚜렸한 직진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희미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향한다
우측으로는 금남면소재지가 있는 신노량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귀경하는 차량시간 때문에 맘이 급한 진권아우는 좋은 길 두고 힘든 곳으로 간다고 불평을 한다
그리가면 맥길이 아니고 한참을 우회하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여...
아예 길이 보이지도 않는데 계속해서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묘지(17:15)
날머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차량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기 시작한다
임도를 만나 구노량마을로 내려간다
구노량마을 식수탱크를 만나고... 남해대교옆에 새로운 교량을 세우는 중이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출발하는 4번에 걸쳐 이곳 노량앞 바까지 왔다
이곳에서 맥이 바다로 입수하면서 난 또 한곳의 맥길을 마무리한다
어제 연등축제 행사 때문에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잠을 3시간 밖에
자지 못한 탓인지 참으로 힘들게 이곳까지 왔다
동행한 진권아우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남해대교 입구(17:28)
절개지에서 구노량마을을 지나 남해대교가 있는 곳이
신산경표에 의한 백두의 꼬리 “우듬지” 의 끝자락이다
노량육교에서 내려서서 노량앞바다로 향한다
노량앞 바다(17:33)
지리산 영신봉에서 걸어와 이곳에서 脈이 바다에 입수하면서 범여의 발길도 멈춘다
진권아우와 함께 인증샷
이쪽 마을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이고 다리 건너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이니... 군은 다르지만 마주보고 있는 마을의 지명은 같다
남해대교 아래에 있는 이순신장군 동상
노량앞 바다에서 다시 남해대교로 올라오는 길에 깨끗한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깔끔하게 머리도 감고, 몸뚱아리를 씻은 다음에 의관정제를 하고 올라오는데 남해에서 진주로 가는
버스가 지나가 버리는게 아닌가... 버스 정류장에서 30분 이상을 기다린 다음에 진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구노량 버스 정류장(17:55)
이곳에서 30여분 정도 버스를 기다리다가 18:20분경에 남해에서 진주가는 버스에 올라
진주에 도착하니 19시 20분경... 황금연휴의 마지막날이라 그런지 서울가는 버스표가 없다
지금 예매할 수 있는 버스표가 밤10시 20분이다... 매표소 직원에게 사정을 하니 저녁 8시에 한장,
저녁 9시에 한장이 있다고 하기에 진권 아우를 먼저 보내고 난 밤9시 표라서 여유가 많다
진권아우를 보내고 나니 배는 고픈데 밥 생각은 없다...그냥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뿐이다
터미널 안의 매점에서 소주 한병에 맥주 2병을 말아서 오뎅을 안주삼아 저녁을 대신한다
무료하게 혼자서 1시간 이상을 개기다가 밤 9시에 서울가는 버스에 올라 깊은잠에 빠진다
21시 진주발 → 서울행 버스표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집에 오니 새벽1시경...아!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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