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6년 5월 21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엄청난 무더위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9 km / 7시간 1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갈현고개-성황당-임도-530m봉-안부 삼거리-456m봉-태봉-태봉활공장-군사도로-통신탑 삼거리
563m봉 포기(임도를 따름)-안부 사거리-563m봉-사격경고판-빨간 깃대봉(1)-빨간 깃대봉(2)-428.7m봉
임도-496m봉-456m봉-안부-530m봉-501m봉-554m봉-폐초소-572m봉-군부대 막사-587.4m봉-벙커봉
교통호-헬기장-전망초소-헬기장-헬기장-헬기장-428.3m봉(H)-군도-군도사거리-승리 전망대-헬기장
마지막 참호-탱크 방호벽- 민통선 차단기
☞ 소 재 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작년 12월에 2구간을 마치고 3월 1일(2016년)에 수헌.산으로님과 마지막 구간을 하기로 했는데그 사이에
개성공단 폐쇄라는 돌발 변수로 남.북 관계가 경색되는 바람에 민통선 안 지역인 이곳을 산행하기가 부담스러워
미뤄 왔는데 늘 가슴속 한 구석의 응어리처럼 남아있어 해가 긴 요즘에가는게 편할듯 싶어서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대득지맥 3구간 개념도 (박종율 선생 자료인용)
동서울발 → 문혜리행 버스표
동서울 터미널에서 문혜리가는 06시 50분발 버스는 07시가 되도록 갈 생각은 않는다
07시가 다 되어서야 버스는 출발하여 장암, 의정부를 거쳐 포천과 철원의 골목골목을 다 거친
다음에 2시간 30분정도 걸린 다음에 문혜2리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괜스레 맘이 급해진다
조금 시간을 단축하려면 동서울에서 신철원가는 버스(3000번)를 타면 무정차 차량이라2~30분 정도 시간이 단축된다
문혜2리 버스 정류장(09:20)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갈현육교를 향하는데 시간은 10분이 채 안걸리고 택시비는 5,000원이다
철원군 갈말읍에 있는 문혜리(文惠里)는 덕암산 밑에 자리한 농촌마을로 근처에 가로개가 있다.
자연마을로 너랫골, 아랫삼셍이, 평촌 등이 있다. 너랫골은 개울에 너래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아랫삼셍이는 삼성리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생긴 지명이다. 평촌은 벌판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갈현고개(葛峴:352m:09:30)
철원군 갈말읍 문혜1리 갈현동에 속해있으며 지포리에서 와수리로 가는
43번 국도로 구도로는 도로의 기능을 상실했고 이 버스 정류장도 폐쇄된 상태이다
문혜리 삼거리 동북쪽에 위치한 갈현고개는 칡이 많아 고개 이름을 갈현(葛峴) 또는
갈고개(가루개)라고 불리우며 영험 있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있다
택시에서 내려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물한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다.
그리고는 버스 정류장과 주택 사이의 마을 안으로 접어든다...마을에서 좌측으로 가니 성황당이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9:35)
갈현고개 성황당은 박종진의 모외 토속신자들이 영조 48년(서기 1772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성황당은 부락과 부락을 수호하는 신에게 재난을 없애고 복을 빌고 또한 여행의 안전과 모든 소원을
성취 바라는 마음에서 도로가 가져가던 물건을 하나씩 놓고 지나 다녔던 곳이고 이 성황신은 영특하다하여
근래에까지 부근의 무녀들과 토속신앙 신봉자들은 매년 일년에 두 번 음력 4월8일, 9월9일에만 서낭제를 지내고 있다
다시 마을을 되돌아 나오다(09:40)
지맥상으로 대득 지맥길은 성황당 뒷쪽이 맞는데 성황당을 지나 능선으로치고 오르니 잡목들이
너무 많이 있어 도저히 치고 나갈 공간이 안 보인다...하는 수 없이 다시 마을을 되돌아 육교 아랫쪽으로
내려가니 도로 건너편에는 백골상이 보이는데 백골부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설립한 것이라며
대득지맥 첫 구간인 자등현에서 만난것과 같은걸로 보아 백골부대 관할인 모양이다
백골부대의 정신과 혼이 담긴 백골상이 보이는 곳에서 좌측으로 포장 농로를 따라서 오른다
포장 농로 좌측에는 인삼포가 보이고 비닐하우스 있다
y자 갈림길(09:50)
좌.우 갈림길을 버리고 능선으로 치고 오른다
능선으로 치고 오르니 등로는 보이질 않고 교통호와 군벙커...땅바닥에 삐삐선만 어지럽게 깔려있다
초반부터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며 올라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간간히 잣나무 군락지를 만난다
낡은 띠지를 만나는데...지맥길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무명봉(10:15)
무명봉에서 직진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지니 맥길에서 자주 만나는 산너울님의 시그널을 만난다
좌측으로 꺽어지자마자 다올선생의 시그널...잘 계시죠?
군인들이 깔아논 삐삐선이 맥길을 인도한다
암봉(10:20)
암봉에 올라서니 대득지맥 분기봉인 각흘봉과 광덕산이 보이고 그너머로 한북정맥이 아련히 보인다
지난번에 걸었던 대득지맥의 주봉인 대득봉이 가깝게 보인다
소나무가 있는 암봉을 지나 고도를 조금씩 높이기 시작한다
군 교통호를 지나니 530m봉이 나오고...
530m봉(10:30)
대한민국 육군의 환경에 대한 의식수준... 참으로 한심하다
안부(10:40)
들머리 포장도로 우측에서 이어지는 임도와 만나는 곳이다
530봉에서 안부로 내려서자마자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다시 임도(10:45)
능선으로 오르자마자 다시 임도를 내려오는데 무의미하다... 후답자들은 그냥 임도로 진행하시길...
잠시 임도를 진행하니...
특용작물을 심어놨으니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보이는 곳에서...
좌측 군벙커가 있는 능선으로 치고 오르니 태봉이 나온다
태봉(泰峰:560.1m:10:50)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내대리와 문혜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인식할 수 없는
삼각점과 선답자들의 시그널 몇개만 보일뿐...휴전선과 인근한 산이라 그런지 자세한 정보는 없다
정상 아래는 태봉활공장이 있고 철원 평야와 동송읍내가 한 눈에 보인다
태봉이란 지명은 아무래도 옛날 궁예가 이곳 철원에 태봉국을 개국한 것과 관련있지 않을까?
궁예(?~918)는 후고구려를 창건한 인물이고, 태봉(泰封)은 그가 철원을 도읍으로 세운 나라 이름이다
궁예의 신분을 두고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궁예는 신라 사람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으로, 어머지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궁예가 태어나자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한다”는 천문관의 말에 왕은 궁예를 죽이려 했고,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다치게 하여 한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신라는 9세기 후반 통치력이 급속히 약화됐고 부실한 재정을 메우려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전국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놨는데 중이 되었던 궁예는 진성여왕 5년(891) 지금의 경기도 안성
죽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기훤의 휘하에 들어간다. 이후 지금의 강원도 원주인 북원의 반란군
두목 양길에게 다시 투신했다. 궁예가 강릉 땅 명주를 점령했을 때 그의 세력은 이미 상당한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태봉 정상 삼각점
궁예는 명주로부터 서북진(西北進)해 주변 각 고을을 모두 휩쓴 뒤 철원에 자리 잡는다.
895년이 되자 궁예 세력은 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고, 이듬해 송악의 대호족 왕건 부자가 귀순해 오자
898년 도읍을 지금의 개성인 송악으로 옮긴다. 궁예는 이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충북을 아우르는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901년에는 후고구려의 왕을 자처한다.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905년에는 다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다. 본격적인 철원 왕도(王都)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길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무인년 6월 궁예가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했다. 기묘년에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는
대목이 보인다. 무인년은 태조 원년인 918년, 기묘년은 919년이다. 이렇듯 철원은 태봉의 도성에 그치지 않고
고려의 도성이기도 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태봉 정상의 모습...비운의 왕 궁예의 말로를 보는듯 하다
태봉활공장(10:53)
아침에 내렸던 문혜리와 갈말읍(신철원)의 모습
갈말읍(葛末邑)은 강원도 철원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읍으로 관내에 군청이 소재하며, 철원팔경의 하나인
삼부연폭포가 있다.
읍사무소가 있는 신철원리(新鐵原里)를 비롯하여 강포리(江浦里) · 군탄리(軍炭里) · 문혜리(文惠里) 등 11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여지도서』 철원도호부에 갈종면(葛宗面)은 서자곡리(西自谷里) · 눌치리(訥雉里) · 지습포리(池濕浦里) ·
풍전역리(蘴田驛里) · 토성리(土城里) 등 12개 리를 관할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 「철원부지도」에는 가말면(加末面)으로, 『1872년지방지도』 「철원구방지도(鐵原九坊之圖)」에는
갈말면(乫末面)으로 지도의 남동쪽에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갈말면에 지포리(芝浦里) · 군탄리 ·
문현리(文峴里) · 지혜리(芝惠里) 등 33개 리가 수록되어 있다. 갈종 혹은 갈말에 사용된 갈(葛, 乫)은 보통 가르다의
의미로, 종(宗)은 마루 · 꼭대기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한탄강 계곡의 갈라진 땅의 형세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군탄리는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와 군졸들이 이곳에서 한탄하여 생긴 지명이라고 전해지지만, 군향탄막(軍餉炭幕)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지명인 듯하다. 문혜리는 문현리와 지혜리가 1914년에 통합된 이름이며, 신철원리는 지포리에
속하던 지역이 철원군청이 이곳에 설치됨에 따라 신설된 지명이다.
1972년에 평강군 남면의 정연리가 편입되었고, 1979년에 갈말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만간 걸어야 할 은장산도 보이고...
지장산과 한탄(왕재)지맥과 차탄(보개)지맥쪽의 중군봉도 보인다
활공장을 나오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임도를 만나고... 통신탑을 바라보며 걷는다
이동통신 갈림길(11:00)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현오님의 산행기에서 캡쳐)
산으로님이 저술한 대한산경표에는 각흘산에서 분기하여 대득봉과 갈현고개를 지나 활공장(태봉)을
지나 임도에서 우측으로 올라가 무인감시 카메라가 있는 봉우리에서 남대천이 아닌 좌측으로 꺽어져
독바우골, 문고개. 278봉을 지나 한탄강컨트리클럽,170,2봉을 지나 동온동의 도로를 따라서 가서
한탄강과 문혜천이 만나는 군탄리 합수점에서 끝나는 것을 문혜지맥이라고 한다
우회길(11:05)
모퉁이 돌아가는 길 옆 전봇대 있는 곳에서 산속으로 접어드니 특수작물 재배지역이라 출입금지란다
이것저것 안따지고 치고 들어갔다 잡목에 갇혀버려 오도가도 못하다가 다시 빽하여 임도로 향한다
태봉 아래에서부터 계속해서 만나는 경고문
내리막 임도를 따라서 걸어가니...
임도사거리(11:15)
좌측으로는 내대리이고 우측으로는 지경리로 향하는 길인데 임도인지 軍道인지 몰라도 무척 넓다
직진으로 지맥길을 향하는 망가진 철조망이 등로를 가로막고 있다
내대리 방향에 경고판이 서 있는데 이 지역이 산삼과 장뇌삼 재배 지역인 모양이다
지나온 통신탑이 있는 봉우리를 바라보면 길을 걷는데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바로 앞에서 무쏘 트럭 한대가 내려오면서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어딜 가냐고 한다
기분이 좀 나쁘다... 보면 모르시냐고... 등산가는 중입니다
산도 없는 이곳에 왜 다니냐 묻는데... 이런 ㅆㅂㄴ이 다 있나...내 발로 내가 걷는데
왜 그러시냐고 하니까... 이곳은 산삼과 장뇌삼 재배지역이라 상당히 민감한 곳이란다
그거야! 댁의 사정이고 난 산삼이 우째 생긴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그냥 가버린다
563m봉(12:23)
기분도 잡치고하여 정상을 오르지 않고 그냥 임도로 향하는데 햋볕이 무척이나 따갑다
다시 임도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잡목과 억새를 헤치고 오르는 길에서 만난 시그널
570m봉 정상에서 만난 여영님의 시그널
대득지맥길에 마지막으로 시그널을 봤다... 이곳을 지나면서는 시그널을 만날 수가 없었다
570m봉(11:45)
잡목 너머로 철원읍이 시야에 들어오고...
망가진 철제 간판을 지나는데 등로는 아예 보이질 않는다
잡목과의 사투를 벌이면 악천고투 끝에 능선에 오르니 벙커봉이다
벙커봉(11:55)
뒤돌아 본 570m봉
벙커봉에서 바라본 철원의 들녘
흔히 강원도하면 산으로 형성된 곳이란 선입감으로 들녘이 없다고 하는데 철원은 아니다
마치 호남평야를 온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넓은 들이 펼쳐지는 곳이 이곳 철원이다
왜 궁예가 이곳 철원땅에다가 도읍을 정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철원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으며 휴전선 155마일(249㎞) 중 70㎞가
이곳 철원땅을 지날만큼 넓은 지역으로 예로부터 이곳은 정치.군사적 요충지로 특히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철원 북방 풍천원 벌판에 커다란 궁궐을 짓고 태봉국의 수도로 삼았다.
평강고원과 철원평야로 펼쳐지는 드넓은 들판은 당시 대동방국의 웅지를 품기에 충분한 터전이었으리라.
가야할 대득지맥 능선
벙커봉 아래는 사격장과 토교저수지가 보이고...
벙커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곳곳에 경고판이 서있다
철원들판 저 너머가 북한땅인데...
임도와 만나는 지점에서 다시 능선을 타고 간다
조심해서 갈께요
깃대봉(12:02)
좌측 능선으로 내려가면 지도상에 삼각점이 있는 428m봉이 있다는데 갈 일이 없다
가야할 대득지맥 능선의 모습
깃대봉에서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임도가 나오고 한참 동안을 임도를 따라 걷는다
임도(12:05)
임도를 걸어가는데 날씨는 덥고 자꾸만 목이 타들어 가는데 아무래도 식수가 부족할 듯 싶다...
수통을 보면서 식수 조절에 들어간다
점심식사(12:30~45)456m봉(12:50)
등로에서 바라본 갈말읍 지경리와 김화읍의 모습
갈림길(12:57)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우측으로 계속가면 587.4봉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만난다
새로 조성된 벙커와 교통호를 만난다
인적이 드문 탓인지 부드러운 참취나물이 꽤나 보인다.. 조금 수확을 하고...
헬기장인 듯한 넓은 공터도 지난다
쪼개진 바위(斷石)도 지나고...
무명봉을 넘어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는데...
녹슨 철조망이 보이기 시작하고...
군 벙커를 만난다
554m봉(13:30)
위장흙 팻말을 지나 허물어진 위장망에 의자들이 있는 봉을 지나 또다른 봉을 넘어서니
세멘트 폐초소 자리가 있고 저 앞에 587.4m봉과 군막사가 보면서 내려선다
내리막길에 약간 바람이 부는데 더덕냄새가 진동을 하여 살펴보니 더덕이 보인다
안부에서 오르막을 오르는데 폐철조망이 2~3중으로 처져있다
572m봉(14:00)
벙커봉 윗쪽으로는 교통호가 있고 정상에는 폐TV 안테나가 보인다
임도사거리(14:02)
임도를 지나니 시멘트 도로가 우측으로 군막사가 있지만 군인들은 보이질 않는다
막사옆 좌측 능선으로 오르는데 벙커와 교통호를 지나 오늘 산행중 가장 높은 587.4m봉에 오른다
587.4m봉(14:15)
꽤나 넓은 정상에는 여려개의 군 안테나와 전망대가 있고 2등삼각점도 보인다
전망대 너머로 토교저수지 너머로 북한의 산들이 보인다이곳이 오늘 산행구간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587.4m봉에서 바라본 토교저수지철원군 동송읍 양지리에 있는 토교저수지는 철원8경중의 하나로
남북 분단으로 인해북한지역에 위치한 봉래호의 물줄기가 끊어져 황폐화 되어버린 철원평야를 살리기 위해
1976년에 완공된 토교저수지는 강원지역 제1의 곡창지대인 철원평야를 적셔주는 저수지로 면적이 344ha에
2억5천만톤의 용수를 저장할 수 있어 저수지라기보다는호수에 가깝다고 한다...두루미, 고니, 독수리 등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의 야생조류들이 찾아오는 철새도래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뒤돌아 본 587.4m봉의 모습
587.4m봉 삼각점(△김화 21 / 1994 재설)
군 철조망을 따라서 내려선다
뾰족한 암릉을 지나...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에서 우측의 넓은길을 버리고 좁은 직진길로 향한다
헬기장(14:23)
대득지맥의 끝 지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초소(14:25)
초소는 비어있고 문은 잠겨 있다... 아마 근무는 하지 않는 모양인데 이곳에 서니
북한 지역의 군사시설들이 한 눈에 보이고 북한의 전략적 요충지인 오성산도 눈 앞이다
초소 아래에는 준공 기념비가 있다
전두환 대통령 훈시
82년도에 全統이 다녀간 모양이다
오성산이 지척이다
6.25전쟁 당시 김일성이 한국군 장교 견장 한트럭하고도 안 바꾼다고 했던 산이다
교통호 우측으로 간 다음에...
공터에서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져야 하는데 무심코 직진을 하여 5분정도 알바를 한다
군 벙커를 지나...
교통호를 따라 내려가다 임도로 가는데 낙엽이 무릅까지 차오른다
안부에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계속해서 군 시설물들을 만난다
조금전에 내려왔던 등로를 뒤돌아 보고...
초소봉(15:20)
교통호를 따라서 편한 길을 걸어간다
약간의 암릉 지대를 지나니...
헬기장(15:22)
헬기장을 지나 교통호를 끼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내리막길에 가느다란 로프가 있는 곳을 내려서서 임도를 따라서 걷는다
또다시 교통호를 끼고 우측으로 꺽어져 뚜렸한 임도를 따른다
428.3m봉 : 헬기장(15;40)
북한땅에 있는 오성산이 보인다
저 오성산만 탈환하면 평양까지 꼭 바로 뚫리는 북한의 군사적 전략지역 산이다
맞은편에는 지정학적 열세에 놓여있는 우리 지역의 별유봉 OP가 보인다
군 시설물이 나오고 임도에는 마치 골프장 페어웨이처럼 잔디가 깔려있다
임도 사거리(15:55)
우측에는 묘지가 있고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임도 옆으로는 커다란 바위를 쌓여 올려 검은 위장막이 처져있다
임도 사거리에서 직진을 하는데 이곳부터는 민통선이라... 상당히 조심스럽고 민감하다
넓은 교통호와 벙커, 軍道가 아주 잘 관리되어 있다
승리 전망대(15:57)
위장막과 벙커, 지휘관의 초소가 보인다
승리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대득지맥의 합수점과 북한땅의 오성산과 서방산이 보이고 우리군 OP가 있는 별유봉이
보이는데 이곳의 분위기는 평화로운 모습과는 달리 대낮에도 확성기 방송을 하는지 시끄럽다
오성산 아래로 낮은 능선군에 우리측 OP가 보이는데 지정학적으로 보면 엄청난 열세이다
오성산이 얼마나 전략적 요충지인지 김일성이가 국군장교 군번 3트럭 하고도 안 바꾼다고
호언 장담했다는던 오성산(1040m)! 오성산은 우리측 OP가 있는 성제산 (471m)과는
다윗과 골리앗으로 비교될 정도로 지정학적으로 열세이다.
넓은들 한가운데로, 솟아올라 천헤의 요새로 남과북이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 피비린네 나는공방전을
벌였으나 지금은 북녁땅이 되버린 오성산을 넘어서면 평양까지는 일사천리라는데...오성산을 빼았기면
군사요충 지는 물론이려니와 평양을 내여주는 것과 다름이없는지라 국군과 북한군은 피아간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그 유명한 금화(김화)전투의 현장이 저 곳이다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곳의 하나가 이곳 금화지구 전투인대 오성산 탈취전 ( 奪取戰)때 중공군
15,000 명 전사 , 국군 5,000명이 전사했고 12차레나 주인이 바뀐 피어린 전투였다고 한다
오성산 전투중 가장 잘 알려진 전투가 저격능선 전투인대 1952년 10월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백병전
42회 와 6주간에걸처 저격능선의 주인이 12번이 바뀐 전투로 중공군은 이 전투를 상감령(上甘領) 전투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금화지구(金化地區) 전투는 오성산이 아니라 김화 동북방 오성산 으로부터 남쪽으로 이어진 580봉
돌출 능선으로 오성산을 위협하는 필수적인 접근로 상의 요충지로 이곳 전투에서 적군 사살 7600명 , 포로72명의
전과와 아군전사 458명, 부상 1704명, 실종 22명이었다고 한다
휴전협정 조인시 때까지 43일 동안 33번 주인이 바뀌었다는 금화지구 전투는 오성산 지능선 세봉우리로
지금은 우리수중에 들어왔지만 주봉인 오성산은 끝내 탈환하지 못했다고 한다
승리전망대에서 바라본 대득지맥 합수점
승리전망대로 아래로 내려서니 군도는 아주 잘 관리되어 있다
이곳은 민통선 안이라 굉장히 민감한 지역이긴 하지만... 다행히 군인들은 안 보인다
軍道 옆에는 이런것도 보이고...
헬기장(16:15)
우측의 군도를 버리고 직진 능선으로 올라서니 빨간 깃대 2개가 서 있다
천연 동굴을 이용한 벙커도 보인다
본봉(1,062m)이 쌍두봉을 이루고, 동봉(927m), 서봉(1,050m), 남봉(781m), 북봉(920m)등이 둘러싸고 있다.
오성산은 지금은 갈수 없는 북녁땅이 되어버린 산으로 , 김일성이가 한국군 장교군번 3트럭 하고도
안 바꾸겠다고 호언 했던 오성산(일명 아버지산)을 바라보는 범여의 맘은 착잡하기만 하다.
내리막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가니 마지막 초소봉이 나온다
마지막 초소봉(16:25)
이곳에서 서니 맞은편에는 우리 군의 민통선 최북단 OP가 있는 별유봉과 성제산이 보이고그 너머로는
갈 수 없는 북한땅의 오성산과 서대산이 보인고 바로 앞에는 한탄강과 남대천(화강)이 만나는
대득지맥 합수점이 보이는데 저긴 지뢰 매설지역이라 갈 수 없는 아쉬움만 남는다
갈 수 없는 합수점
초소 아래로 내려 갈 수가 없다... 무수한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지 아니면
북한에서 떠내려온 목함 지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뢰 경고판이 많이
보이는데 저 경고판을 무시하고 목숨을 담보로 내려갈 자신이 없다
유유히 흐르는 저 한탄강은 내 맘 알겠지.
지난 겨울 대득지맥 분기봉인 832봉을 출발하여 3번에 걸쳐 이곳까지 와서
한탄강과 남대천이 만나는 저곳에 입수를 하며 맥이 끝나는데 난 내려가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본다
대득지맥의 인증샷마져도 어둡게 나온다
한탄강은 우리나라 어느 강보다도 변화무쌍하고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이 강은 발원지에서 임진강의 합류점까지 현무암으로 된 용암지대를 관류하기 때문에 곳
곳에 수직절벽과 협곡이 형성되어 절경을 이룬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대개 절경에는 슬픈 전설이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더구나 이 강은 분단의 장벽과 연결됨으로써 더욱 그런 인식을 굳게 한 것 같다.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서 물살이 급한 개울을 ‘여울’이라 한다.
한자어로 쓴다면 천탄(淺灘)이 되겠으나 어울리지 않게 고유어 ‘한’을 섞어 한탄이 되었다.
지명어가 주는 주술성 때문인지 이 강은 오늘에 와서 한민족 비극의 대명사가 된 느낌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 왜 그와 같은 한자말을 써야 하는지, 그래서 탄식 서린 비극의 강이
되어야 하는지 바로 그 점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초소봉에서 한탄강을 바라보며 다시 되돌아와서 군도를 따라 마지막 길을 떠난다
도로에서 바라본 남대천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어천리에 위치하고 있는 수리봉에서 발원하여 군 일대를 지나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김화 동북방의 금성천(金城川, 혹은 末乾川)에서 갈라져 김화군 근동면 교전리와
광삼리를 지나면서 서남쪽으로 흐르고, 군의 김화읍 생창리를 경유하여 학사리에서 와수천을 합류하여
갈말읍 정연리에서 한탄강으로 유입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대천(南大川)은 현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지도서』에도 같은 기사가 실려 있고, 『1872년지방지도』 「김화군지도」에는 읍치 남쪽을 흐르는
하천에 남대천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김화읍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이기 때문에 지명이
유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조선지지자료』에는 남대천(역말
울)이 김화군 군내면 생창리에 있는 하천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유역을 따라 운장분지(雲長盆地) · 청양분지(淸陽盆地) · 험석분지(險石盆地) 등 비옥한 평야가 전개된다.
현재는 김화남대천 쉬리마을 다슬기축제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는데 이지역 사람들은 화강(花江)이라 부른다
계속해서 만나는 지뢰 경고
남대천(화강)을 따라서 편안한 길을 걸어간다
민통선 안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남대천
짙은 향기를 내뿜는 찔레꽃은 분단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탱크 방호벽(16:40)
남대천 강 가운데는 콘크리트 파일과 H빔이 무수히 박혀있다
드디어 민통선 지역을 벗어난다
민통선 차단기(16:45)
긴장은 풀리고, 크게 심호흡 한번하고 물한모금 마시고 도로를 따라서 지경리로 향한다
민통선 바깥속의 남대천에는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의 여유로움 뒷쪽엔 오성산이 보인다
내 나라 내 땅에 있는 저 오성산!...언제쯤이면 걸어 보려나
지경리를 향해서 한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민통선 안에서 농사일을 마치고 가는 트럭이
지경리까지 태워주는 바람에 지경리까지 편하게 와서 택시를 타고 와수리로 향한다
와수리발 → 동서울터미널행 18시 10분 버스표
와수리 터미널(17:40)
택시에서 내려 버스표를 구매한 다음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매점에서 캔맥주 2개에 쏘세지 하나로 대득지맥 졸업을 자축한 다음 버스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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