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산천조에 청계산(淸溪山)이라 되어 있고,
관천현 산천조에는 청계산이라 쓰고 일명 청룡산(靑龍山)이라 한다고 써있다.
과천읍지에도 이러한 내용이 있다.
좌청룡 우백호의 개념으로 오른편에 있는 관악산을 백호산이라 부르고,
왼편에 있는 청계산을 청룡산이라 불렀을 것이다.
17세기에 세워진 청계사 사적비 등 여러 곳에 청룡산이라 되어 있고,
택리지 산경표 대동여지도 등에는 청계산(靑谿山)이라 되어 있다 한다.
맑을 청(淸)자가 아니라 푸를 청(靑)자를 썼고, 시내라는 뜻이 같기는
하지만 골 곡(谷)자가 붙은 계(谿)자를 쓴 것이다. 옛날 청룡이
이 산의 허리를 뚫고 나와 하늘로 올라가서 청룡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 과천에 있는 막계동은 맑은 개울이 있다 해서 '맑은 개울', '맑은 계곡'이 '막개'가 되고 한자로 '청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 또는 시내가 있는 산' 이라는 뜻의 청계산의 이름이 예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계산은 또 청제산(靑帝山), 청청산(靑靑山), 청한산(靑漢山)으로 쓰인 기록도 있다 한다.
맑고 깨끗한 곳을 선비들은 즐겨 찾는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분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조선조 연산군 때 일두 정여창도 이 산자락에 숨어 살며 무오사화의 고비 때만은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만년을 지냈다.
국사봉(國思峰)은 고려 말 조윤이 망한 고려를 생각하고 그리워했던 봉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국사봉에는 봉화대가 있었다거나, 어느 선비가 나라님을 그리워한 유래를 가졌다거나,
또는 나라를 위한 기도터나 도당굿터가 있었다는 등
대부분 나라와 관계와 있는 사연들이 많다.
만경대가 망경대로 이름이 바뀐 것도 이색 등 고려 유신들이
이 바위봉우리에서 망한 고려의 서울(개성)을 바라보며 그리워한 터라 해서 정여창이 고쳐 불렀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는 청계사를 제목으로 지은 이색의 시가 있다.
청계산이 일두 정여창과 얽힌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더 있다.
이수봉에 그 이름의 유래에 관한 큼직한 비가 서 있다.
내용은 정여창이 그의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 등이 연루된 무오사화를 예견하고
이 산에 은거하여 두 번에 걸쳐 목숨을 건졌다 해서
목숨 수(壽) 자를 쓴 '이수봉(貳壽峰)' 이라 한다는 것이다.
망경봉 서남쪽에 있는 천연동굴 마왕굴은 한때 고려 말의 조윤과 정여창이 은거했던 굴로 알려져 있고,
매봉과 망경봉 사이에 있는 혈읍(血泣)재는 피눈물을 흘리며 운다는 뜻으로
정여창이 청계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무오사화를 겪고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한 데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
금정수(金井)
석기봉 북서편에 있는 금정수는 언제나 금빛 색깔을 띠고 있다는 샘으로,
정여창이 종성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사약을 받아 죽고 시신까지 찢기는
극형을 받은 뒤에는 금정수의 물이 피빛으로 변했다가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 복권된 때부터는
다시 황금빛으로 되돌아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견선생과 삼거리 헬기장에 있는 안내판에 고려 말의 충신 조견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조 창건의 일등공신인 조준의 아우 조윤은 형의 변절과 망국과 동시에 죽한 못한 자신의
무능을 부끄러워하여 개와 같다는 뜻으로 개 견 부가 붙은 견(성급하다, 절의를 지켜 뜻을 굽히지 아니 하는 일)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를 개를 따른다는 뜻으로 종견이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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