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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

연천군 신서면의 지명유래

by 범여(梵如) 2016. 9. 6.

 

본래 철원도호부의 외서면 지역인데, 1895년(고종 32) 외서면이 신서면으로 개칭되면서 신서면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성평리(城坪里)와 속전리(粟田里)를 병합하여

성평리에 속해 있던 갈마동(渴馬洞)의 ‘마’ 자와 조밭골[粟田里]의 ‘전’ 자를 따서 마전리라 하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하여 철원군에서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마전리 전지역이 휴전선과 인접한 민통선 지역이 되어 현재 출입 영농만 가능한 1개의 법정리 지역이다.

 

마전리(馬田里)

 

◇갈마동(渴馬洞) : 선창말 동쪽에 있던 큰 마을.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 형국의

산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중종 때 기묘사화의 화를 피해 이 곳에 정착한 한양 조씨

통덕랑 조논걸(趙論杰)의 후손들이 한국전쟁 전까지 큰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검성골[儉城谷] : 선창말 북쪽에 있던 마을. ‘거룩하다’*‘크다’의 뜻으로 쓰인 고어의 ‘’에 뿌리를 두고,

음이 변한 ‘검’과 ‘산’*‘성’의 뜻인 ‘잣‘*‘잿’에 골짜기가 합하여 ‘큰 산골짜기의 마을’이라는 뜻의 ‘검잿골’로

불렸으나, 한자로 지명을 옮기면서 ‘검성(儉城)’으로 표기된 땅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한양 조씨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바람터 : 고래골 가장 북쪽에 있었던 마을. 옛 인목면 신현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밑에 있다 하여

‘현저동(峴低洞)’으로도 불렸던 곳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는 뜻이 아니라, 산의 안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산은 고어 ‘받’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것이 개음절화하면 ‘발’로 변하였고, ‘안’과 합하여 ‘발안’이 되었다가

다시 ‘터’를 합하여 발안터 > 바란터 > 바람터로 변한 것이다.


◇선창말[先昌洞] : 검성골 아래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한양 조씨들이 살았다.


◇조밭골[粟田洞] : 신당골 북쪽에 있던 마을. 예전부터 조를 많이 심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약 500년 전에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정착한 뒤 한국전쟁 전에는 윤씨가 40호,

박씨가 30호 가량 집성촌을 이루었다 한다.

 

*가느채골 : 기와가마골 동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가래울 : 도툼밭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가래나무가 많았다 한다.

 

*가장골 : 갈마동에 있는 골짜기. 가장자리를 뜻하는 ‘갓[邊]’에서 유래된 사실에서 갈마동의

가장자리에 있는 골짜기임을 알 수 있다.

 

*갈궁골 : 중치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 냇줄기’ 또는 ‘냇줄기가 갈린 곳’을 뜻하는 옛말 ‘가’에

뿌리를 둔 ‘갈’에서 나온 이름이며, 안장바위 쪽 골짜기와 이 골짜기로 들어오는 입구에 물줄기가

갈라져 있어 ‘갈’에 대한 입증을 해 주고 있다.

 

*갈마산(渴馬山) : 갈마동 북쪽에 있는 산.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한양 조씨의 묘가 있다.

 

*건넝골 : 검성골 서쪽, 작은지바기 안에 있는 골짜기. 석가단 골짜기의 건너에 있다 하여 ‘건너골’로

불려지던 것이 ‘건넝’으로 어휘가 변하였다.

 

*검성골고개[儉城峴] : 큰지바기와 작은지바기 사이에 있는 고개. 조밭골에서 검성골로 넘어다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래골[高羅洞] : 공장골 서쪽, 바람터까지 이어지는 큰 골짜기. 옛 고라동리 지역이 된다. 

‘  골[谷]’ 뒤에 매개모음 ‘’가 붙어 ‘고래’가 되고 여기에 다시 ‘골’이 합해져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는 지명이다.

 

*고속골[枯束谷] : 윗배나무골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국사랭이 : 굿고개 서남쪽에 있는 깊숙한 골짜기. 단순히 국사봉에 딸려 있는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국사’에 ‘-앙이’와 같은 접미사가 붙었고 ‘앙이’가 다시 ‘랑이 > 랭이’로 음이 변한 땅이름이다.

 

*굿고개 : 가래울과 비조울 사이에 있는 고개.

 

*귀제비바위 : 천덕

산 정상 바로 밑에 있는 큰 바위. 여름철이면 귀제비들이 많이 서식하며 새끼를 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늘깨시 : 의승애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햇볕이 잘 안 드는 음지에 위치하여 ‘그늘곁’으로 불리던 것이

‘그늘깨시’로 음이 변한 이름이다.


*기와가마골 : 신당골 안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기와를 구웠던 가마가 있었다 한다.

 

*낡은터 : 가장골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아주 오래된 집터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논골 : 새알골 남쪽, 논이 있는 골짜기.

 

*다리골 : 박영골 아래에 있는 좁고 작은 골짜기. 산의 고어 ‘닫’이 개음절화한 ‘달’이 ‘다리’로 연철되어

소리 옮김이 된 것으로, 산골짜기라는 뜻의 지명이다.

 

*도툼밭골 : 보략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밭이 특이하게 솟은 곳에 있다 하여 ‘솟아난’의 뜻인 ‘돋은’이

‘도툼’으로 음이 변하여 불려지고 있는 골짜기이다.

 

*돌고지[回串] : 갈마동과 성창말 사이로 곧게 뻗어 나와 있는 야월산 자락의 긴 산부리. 그 모양이

새의 부리처럼 생겼다 하여, 이러한 지형을 지칭하는 말인 ‘곶’과 이 곳을 지나가자면 모퉁이처럼

산자락을 돌아야 한다 하여 ‘돌곶’이 되었으나, ‘곶’ 뒤에 ‘이’가 붙어 연철되면서 ‘고지’로 음이

변하여 ‘돌고지’가 되었다.

 

*돌아모탱이[回隅] : 선창말 옆에 있는 산부리 끝. 지형이 모퉁이처럼 생겨서 돌아 지나 간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두리봉①[加沙峰] : 조밭골 동쪽에 있는 봉우리. 둥근 모양의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이 두루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한자 지명인 가사봉의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두리봉② : 바람터 서쪽, 신현리와 중면 마거리 경계에 있는 둥근 봉우리. 높이 3

39m. 정상에 올라서면 신서면*중면 지역이 두루 내려다 보인다는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두묵골 : 검성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의 뜻으로도 쓰였던 고어 ‘둠’이 두 > 두무 > 두묵(두뭇)으로

연체되면서 ‘골’과 합하여 ‘두묵골’로 발음된다.

야월산에 딸린 산골짜기라는 뜻을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막골[幕洞] : 고래골 중간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우거진 숲 속에 초막으로 된 세 집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묘골 : 다리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묘가 있었다고 한다.

 

*문앙골 : 도툼밭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뭐래기 : 갈마산 동쪽, 갈마고개 쪽으로 있는 큰 골짜기.

 

*바랑골 : 수루네미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큰바랑골과 작은바랑골로 나뉘어진다.

‘모란’*‘달안’*‘발안’이 들어가는 골짜기 이름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모두 ‘산의 안쪽’ 또는 ‘골짜기 안’이라는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바랑골 또한 산의 뜻을 가진 고어의 ‘받’에 어근을 두고 음이 변한 ‘발’과 ‘안’이 합쳐져 ‘산 안쪽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의 ‘발안’이 되었으나, 차츰 앞 음절의 ‘ㄹ’을 옮겨 받으며 뒤에 따라붙는 ‘골’과 합쳐지면서

발안골 > 바란골 > 바랑골의 변화를 거쳐 ‘바랑골’로 굳어졌다.

 

*박영골 : 갈마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

 

*반바리 : 갈마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배나무골 : 선창말 위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한다.

 

*배바위등 : 수루네미고개 동쪽에 있는 큰 산. 높이 421m. 예전에 온 천지가 물바다가 되었을 때

이 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에 배를 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보략골 : 부대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본래 철원도호부의 외서면 지역인데, 1895년(고종 32) 외서면이 신서면으로 개칭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고라동리*중사리*공장동리*성평리의 일부를 병합하고 논골에서 이름을 따와

‘답곡리’라 하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 「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해 철원군에서 연천군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휴전선과 인접한 민통선 지역이 되어 출입 영농만 가능한 법정리이다.

 

◇금곡리(金谷里) : 당골과 텃골 앞에 있던 큰 마을. ‘사이’의 뜻으로 쓰이는 ‘새’가 지방에 따라 ‘쇠’로

발음되는 현상에 의해 도랑리와 고래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쇠골’로 불리다가, 한자로

이름을 옮기면서 ‘쇳골[金谷]’이 된 것이다.


◇아랫논골[下畓洞] : 윗논골 아래에 있던 마을.


◇윗공장골[上公將洞] : 아랫공장골 북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12호 살았다고 한다.


◇윗논골[上畓谷, 畓洞] : 잣나무골 남쪽에 있던 마을. 『순천이씨세보』에 의하면, 조선 초 연천읍 현가리

도당골에 은거했던 이양소의 손자 이눌(李訥)이 부친 이극문(李克文)이 세상을 뜨자 이 곳에 모시고

묘 아래에 살면서 근처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작했다고 한다.

그후 마을 사람들이 이눌의 고사에 의해 이 곳을 ‘노은동(老隱洞)’ 또는 ‘논골[畓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윗논골*아랫논골*건너말에 이안눌의 후손인 순천 이씨(順天李氏) 4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잿말*잿드루*성드루[城坪里] : 아랫논골 북쪽에 있던 마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산골이므로

‘산’ 또는 ‘성’의 고어 ‘잿’에서 뜻을 따와 ‘잿말’이라 했던 것이, 한자로 지명을 옮기면서 ‘잿’이 ‘성’으로 풀이되었다.

잿말은 ‘산골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아직 이 곳에서 성터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이 마을 앞에 펼쳐진 비교적 넓은 들의 이름도 잿말에 연유하여 ‘잿드루’로 불려지고 있다.  


◇중절이[中寺里] : 고래골고개 남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중사라는 절이 골짜기 안에 있어 지명이 생겼다고

하나 그 터가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에는 ‘중겨리’로 어휘가 변하여 불리워졌다고 한다.

 

답곡리(畓谷里)

 

 *감동골[甘洞谷] : 텃골 동쪽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고래골고개 : 부령골에서 고래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곰기[熊起] : 잿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대광리의 곰기들과 연결되는 골짜기여서 지어진 이름이다.

 

*국사봉(國師峰) : 윗공장골 서북쪽, 마전리와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뾰족한 봉우리. 높이 338m. 정상에는

약 50여 평 넓이의 평지를 이루고 있는데 예전에 절이 있던 곳이라 전해지며, 한국전쟁 전에는 봉우리

정상에 파손된 불두*와편*석재들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금바위등 : 불당골 북쪽에 있는 바위가 많은 산등. 높이 265m. 정상부에 호랑이가 새끼를 치던 ‘범의굴’이 있다고 한다.

 

*달고개[月峴] : 대광리의 음송골로 넘어다니는 고개.

 

*달봉 : 윗논골과 잿말 사이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달맞이를 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산’의 뜻으로 쓰여지던 고어 ‘달’이 ‘봉(峰)’과 합하여 한자식의 ‘달[月]’로 풀이된 것이라고도 한다.  

 

*당골[堂谷] : 텃골 아래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예전에 불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한국전쟁 전까지도 완형의 석불좌상이 절터에 있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도장골[倒葬谷] : 막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어떠 사람이 할아버지 묘 위에 자식의 묘를 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뒷골 : 금바위등 아래에 있는 골짜기. 잿말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만장골 : 푸려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뭐래기 : 새고개 아래에 있는 골짜기.

 

*배나무골 : 막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분토골 : 배나무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을 의미하는 고어 ‘’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지명이다. ‘’의

모음이 변한 ‘붉’에서 ㄱ 또는 ㄹ이 떨어져 나가 산을 뜻하는 수많은 파생 지명을 낳는데, 이곳 분토골

역시 ‘’에 어근을 두고 산을 뜻했던 고어 ‘붇’이 ‘붓’으로 바뀌면서 ‘터’와 ‘골’이 합하여져 ‘산 안쪽에

자리한 터(마을)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의 ‘붓터골’이 되었으나, 다시 음이 변하여 지금은 ‘분토골’이

된 것으로 보인다.

 

*불당골[佛堂谷] : 잣나무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지만,

절 이름 및 연혁은 자세하지 않다.

 

*새고개[間峴], 윗고개 : 읫논골에서 윗공장골로 넘어가는 두 마을 사이에 있는 고개.

 

*시구터[三丘垈] : 김우서 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얼음냉수[氷水山] : 곰기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한여름 삼복 더위에도 이가 시리고 발이

얼 정도로 찬 샘물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원쉰모루 : 김우서 묘 아래에 있는 모퉁이. 예전에 어떤 고을 원님이 가던 길을 멈추고 이 곳에서

쉬고 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물레방아가 있었다.

 

*음골 : 금바위등 북쪽에 딸려 있는 골짜기. 햇빛이 안드는 음지가 되어 지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의신골 : 푸려골 동쪽에 있는 좁고 긴 골짜기.

 

*잣나무골 : 윗논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잣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절이고개[中寺峴] : 푸려골에서 중절이로 넘어다니던 고개.

 

*지석묘자리 : 아랫논골 동쪽, 하천 옆에 있던 북방식 지석묘가 있던 터. 일제강점기에 큰 장마가 이 곳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아깝게 유실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텃골[垈谷] : 배나무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 옛날 집터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푸려골 : 의신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본래 철원도호부의 외서면 지역으로, 험준한 보개산의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산리라 하였으나,

1895년(고종 32) 외서면이 신서면으로 개칭되면서 신서면으로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고 민간인 입주가 허용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인접지역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하여 철원군에서 연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 행정리, 3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리들[桃李坪, 桃李洞] : 불견산 동쪽에 있는 마을. 고대산에서 발원하여 이 마을 앞을 지나 내산리

중앙을 관통하는 아미천이 마을을 크게 돌아서 흐른다는 점에서 마을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돈다는 뜻의 ‘돌’이 음이 변한 ‘도리’와 이 곳의 넓은 ‘들’이 합쳐져 ‘도리들’이 된 것으로, 한자도

이 발음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목목골[墨墨洞] : 큰고개 동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곳의 조상 묘를 찾을

적에 관 안에서 흰 새가 ‘목목 목목’하며 날아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이씨와 윤씨들이 7가구 살았던 곳이다.


◇신(진)틀거리[陣機洞] : 현재 내산리의 가장 위에 있는 마을. 예전에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한다.


◇윗신틀거리 : 신틀거리 북쪽에 있던 마을.


◇대소라치[大松亭] : 윗신틀거리 북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까지도 집성촌을 이루었던

배천 조씨(白川趙氏)들이 산제사를 모시던 큰 소나무 고목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마을 북쪽에 있는 대소라치고개에서 그대로 음을 따와 불리워지는 이름이라고도 한다.


◇삼각동(三角洞) : 신틀거리 동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삼각형 모양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한양 조씨(漢陽趙氏)들이 살았다고 한다.


◇초막(草幕) : 심원사 부도장 건너에 있었던 마을 이름. 한국전쟁 전에는 몇 채의 초가가 있던 곳이다.

 

 내산리(內山里)

 

 *고대산(高臺山) : 내산리와 대광리, 철원군 철원읍 율리리와 경계에 있는 높은 산.
 

*과우(過隅) : 도리들과 신틀거리 사이에 있는 큰 산모퉁이. 이 곳을 지나려면 크게 굽어서 돌아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라미고개[多羅美峴] : 절골에서 연천읍 부곡리의 가마골로 넘어가는 고개.

 

*대광산(大光山) : 목목골 북쪽, 도신리*대광리와 경계가 되는 산.

 

*대소라치고개 : 울음성에서 대광리의 윗대광골로 넘어다니는 고개. 대송정 마을에 있던 큰 소나무로

인하여 ‘대(大)’+‘솔[松]’+‘치(峙)’라는 합성 지명으로 이루어졌으나 앞 음절과의 연결 과정에서

매개모음 ‘아’가 동반되어 ‘ㄹ’이 뒤로 옮겨오면서 ‘대솔아치’가 ‘대소라치’로 변한 이름이다.

 

*동마네미고개[東馬踰峴] : 절골에서 포천군 관인면 중리의 큰골로 넘어가는 고개. ‘동쪽에 있는

높은 산마루를 넘는 고개’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뒷고개 : 신틀거리에서 목목골로 넘어가는 고개. 신틀거리 마을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들음바위[擧岩] : 윗신틀거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번쩍 들려있는 모양인 큰 바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맑은 계곡물이 약 15m 높이의 자연 암반 사이를 직류하며 떨어지는 폭포가 있어 운치를

더해 주는 경승지이다.

 

*막터골[幕垈谷] : 대소라치 동쪽에 있는 골짜기.

 

*법화골[法華洞] : 절골 서쪽, 불견산에 딸려 있는 골짜기. 신라 때 창건된 법화사가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복희골 : 윗신틀거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산의 뜻으로 쓰였던 고어 ‘’이 ‘’ > 복’으로 음전되어 ‘골[谷]’과

합하는 과정에 중간 매개모음 ‘이’가 ‘희’로 변하여 ‘산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북마네미고개[北馬踰峴] : 삼각동에서 포천군 관인면 삼율리의 담터로 넘어가는 큰 고개. 옛날에 이 고개로

말이 넘어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는 ‘으뜸’*‘높음’의 뜻으로 쓰였던 고어의 ‘’의

음운 변천으로 ‘말’이 되어, ‘넘는다’는 뜻의 ‘네미’와 합쳐져 ‘북쪽에 있는 높은 산마루를 넘는다’는 뜻의

‘북말네미 > 북마네미’가 된 것이다.

 

*불견산(佛見山) : 내산리와 도신리 경계에 있는 높은 산.

 

*불견이고개[佛見嶺, 佛峴] : 법화골에서 도신리의 사기막골로 넘어가는 고개.

 

*산지배소 : 신틀거리 마을, 수덕원 앞에 있는 소. 지금은 매몰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석봉(石峰) : 윗신틀거리 북쪽, 대광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높이 544m.

 

*울음성 : 내산리 가장 북쪽, 고대산 아래에 있는 골짜기.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은삼각골 : 삼각동 남쪽, 환희봉 쪽으로 난 골짜기. 삼각동에서 안쪽에 위치한 까닭에 ‘안삼각골’로

불리던 것이, ‘안’이 ‘은’으로 음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작은막터골 : 막터골 아래에 있는 작은 골짜기.

 

*작은목목골 : 도리들 북쪽에 있는 골짜기. 목목골과 상대되는 이름이며 도신리의 독개미골과 통한다.

 

*장승내[長丞川] : 석대암에서 발원하여 아미천으로 합쳐지는 개울. 예전에 심원사로 들어가는

입구인 이 개울 옆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절골[寺谷] : 법화골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보개산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던 심원사 외에도

많은 절들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큰고개, 목목이고개 : 목목골에서 도신리의 광대울로 넘어가는 고개.

 

*통생이고개 : 막터골에서 포천군 삼율리에 있는 담터의 싸리박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사이로 통하는’의 뜻인 ‘통새’가 음이 변하여 ‘통생이’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화장골[火葬谷] : 부도장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골에서 수도하던 승려들이 입적하면

불교 장례법인 다비식을 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환희봉(歡喜峰), 지장봉(地藏峰), 석대봉(石臺峰) : 신서면 내산리와 포천군 관인면 중리의 경계에 있는

연천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높이 877.2m. 현재 ‘지장봉’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회골[檜谷] : 삼각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도신리

본래 철원도호부의 외서면 지역인데, 1895년(고종 32) 외서면이 신서면으로 개칭되면서 신서면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도랑리*신순리*빈연리 등 3개 리를 병합하여 도신리라 하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민간인 입주가 허용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동인접지구의행정구역에관한임시조치법」에 의하여 철원군에서 연천군

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5개 행정리, 44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시울[九水洞], 옥동(玉洞) : 대광중학교 부근에 있는 마을. 옛 『철원읍지』에는 이 곳의  빼어난

경치 때문인지 신선이 사는 별천지에 비유하여 ‘옥동(玉洞)’이라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이 곳에 집성촌을 이루었던 우봉 김씨 문중에 김학도(金學道)라는 선비가 마을 이름을 자신의

호인 ‘구계(九溪)’로 고쳐 부르다가 어감이 좋지 않아 구수동으로 고친 사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구수’는 고대산에서 독개미골까지 이르는 동안 아홉 개의 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을 가리킨다고 한다.


◇노루맥이[獐項洞] : 서재골 서쪽에 있던 마을. 지형이 노루목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래는 ‘늘어진’*‘넓은’의 뜻인 ‘너르’가 ‘노루’로 음이 변하여, ‘넓게 늘어진 목’이라는 의미이다.


◇능안 : 원앞산 앞에 있던 마을. 이곳에 위치한 김응구의 묘를 능에 비유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우봉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도랑리(道浪里) : 국사봉 북쪽에 있던 마을. 답곡리의 공장골과 고래골에서 내려오는 두  도량(내)의

안에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으로, 예전에 활을 쏘던 정자가 있었다 하여 ‘사정동(射亭洞)’으로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방아다리(杵橋洞) : 태봉 북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디딜방앗간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보맥이 : 원앞산 서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차탄천을 가로 막은 보(洑)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이후 옛 마을터에는 군부대가 들어서 있고 지금은 새로 설치된 큰 보가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삼둔이[三屯洞] : 벙바위 북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예전부터 가구 수가 줄지도 늘지도 않고 세 가구만

살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안골[內洞] : 서재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도로에서 들어가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안골과 안골로 나뉘며 한국전쟁 전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15호 살았던 곳이다.


◇장거리(場巨里) : 태봉 아래에 있던 마을. 엣날에 장이 섰던 곳이라 한다.


◇점말[店村] : 광대울 입구, 3번 국도 옆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 독개미골에 경영되었던 백자도요지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솥을 주조했던 솥점이 있었다 한다.


◇창말[倉村] : 태봉 동쪽에 있는 마을. 철원도호부에서 관할했던 5개의 곡물 창고 가운데 하나인 서창이

있던 곳으로 『철원읍지』에는 이 창고의 위치와 규모에 대해 “서창은 철원 관아에서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는데 규모는 16칸이다(西倉在府西三十里十六間)”라고 적고 있다.

 

 

도신리(道新里)

 

 *가는골 : 방아다리 서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광대울[光大谷] : 두리봉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대광산(大光山) : 백일봉 남쪽, 도신리·대광리·내산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541.3m.

 

*독개미골[獨琴谷] : 원앞산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예전에 우봉 김씨 문중의 어떤 선비가 이 골짜기

입구 모퉁이에 초당을 짓고, 거문고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원래의 뜻은 이 골짜기 안에 있는 몇 기의 백자도요지로 인하여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다 하여

‘독 + 가마 + 골’로 불리던 것이 ‘독개미’로 음이 변하여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철원읍지』에는

이 곳을 ‘독검리(篤儉里)’로 기재하고 있다.

 

*두리봉 : 창말 남쪽, 광대울 입구에 있는 봉우리. 정상부가 둥글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투맥이 : 보맥이에서 연천읍 와초리로 넘어다니던 고개. 우봉 김씨 족보에는 ‘이태항(二太項)’으로 기재되어 있다.

래는 이 곳의 지형이 불룩하게 돋아 있는 산등성이 사이로 넘어다니는 목이 되어, ‘돋은 + 목’으로

불리워지던 것이 ‘두투(도투)맥이’로 발음이 변한 것이다.

 

*뒷골 : 보맥이 마을 뒤편에 있는 골짜기.

 

*말구산 : 독개미골 입구에 있는 봉우리.

 

*목목이고개[墨墨峴] : 광대울에서 내산리 목목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큰고개’ 또는 ‘아리랑고개’라고도 한다.

 

*목탁봉 : 옛고개 옆에 있는 목탁처럼 둥근 조그만 봉우리.

 

*미골 : 태봉 서쪽 국사봉에 딸려 있는 골짜기. 단순히 산골짜기의 뜻인 ‘뫼골’이 ‘미골’로 어휘가

변하여 불리워지는듯 하다.

 

*백일봉 : 대광리역 동쪽, 도신리와 대광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벙바위 : 방아다리 북쪽, 산부리 끝에 있는 바위. 옛날에 부엉이집이 있었다고 한다.

 

*불견산(佛見山) : 불견이고개 북쪽, 내산리와 경계에 있는 산. 높이 535m.

 

*불견이고개[佛見嶺, 佛峴] : 사기막골과 내산리 법화골 사이에 있는 큰 고개.

『불교영험설화집』에 실려 있는 「심원사대종불사기(深原寺大鍾佛事記)」에 이 고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고려 목종 때 일이다. 보개산 심원사에서 대종불사를 하는 데 참여한 대광리의 앉은뱅이 박춘식과

장님 이덕기가 대종준공식에 가는 도중, 이 고개에 이르러서 부처님을 뵙고서 눈이 뜨이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그 큰 재를 ‘부처님을 뵌 고개’라 하여 ‘불견령(佛見嶺)’이라 하였고, 부처님의 광명이 크게

내려 비친 이덕기와 박춘식이 사는 마을을 ‘대광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불견산*천광골*대광산*

샛대광*광대울이라는 이 곳과 관련된 지명이 지금도 쓰이고 있다.

 

*사기막골[沙器幕谷] : 도신리 가장 남쪽, 연천읍 옥산리와 경계에 있는 큰 골짜기.

조선 후기에는 백자도요지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새골 : 태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보맥이와 방아다리 마을의 사이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서재골[書齋谷] : 가는골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우암 송시열이 한때 머무르며 강론을 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손맞이비냥산[賓延] : 원앞산 남쪽, 연천읍 와초리와 경계에 있는 산.

조선 중기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응구(金應九, 1555∼1625)가 세상을 떠나자 원앞산에 유택을 모시고

그의 아들 삼형제가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묘 옆으로 나 있는 큰 길로 사람과 우마의 통행이

빈번하여 늘 근심하다가, 짚신과 행전을 만들어 행인들에게 건네주면서 보맥이 쪽으로 돌아서 가도록 인도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삼형제의 효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산을 ‘손맞이비냥산’이라 이름지었고, 예전에 함경도로

가는 대로였던 이 고개가 삼형제로 인하여 사람이 통행하지 않는 고개가 되어 ‘옛고개’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어두니골 : 목목이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나무가 무성하여 숲이 우거진 음지가 되어 골짜기

안이 항상 어둡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내골 : 사기막골에 있는 골짜기. ‘얕다’의 고어 ‘여내’에서 뜻을 따와 지어진 이름이다.

 

*옛고개[古峴] : 원앞산 동쪽에 있는 고개. 현재 3번 국도가 지나간다.

 

*원앞산 : 태봉 남쪽에 있는 산. 높이 125.1m. 능안 마을에 국가의 국영 여관인 원이 있었는데 원의

앞에 있어서 원앞산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작은골 : 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큰골과 상대되는 지명이다.

 

*작은독개미골 : 독개미골 남쪽에 있는 골

대광리(大光里)

 

본래 철원도호부의 외서면 지역으로, 1895년(고종 32) 외서면이 신서면으로 개칭되면서 신서면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웅기리*신탄리를 병합하여 대광리라 하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민간인 입주가 허용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인접지역의

행정구역에 관한임시조치법」에 의하여 강원도 철원군에서 연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 행정리, 20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탄리[新炭里], 새숯막 : 신탄리역 주위에 있는 큰 마을. 현재 대광 2리 지역에 해당하며, 경원선의

마지막 역으로 철도가 중단되는 곳이다. 예전부터 고대산의 풍부한 임산 자원을 목재*숯으로 가공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마을로, 『여지도서』에도 “新炭”이라 적혀 있으며 철도가 부설된 뒤로는 숯가공이 더욱 번창했다 한다. 그러나 ‘새숯막’이라는 지명이 대광리와 철원 사이에 주막거리가 새로 생겼다 하여 ‘새술막[新酒幕]’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술’을 ‘숯〔炭]’ 자로 잘못 표기하였다는 설도 있다.


◇아랫곰기골[下熊起洞] : 성트르골 위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전주 이씨 2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곰기골은 ‘큰 곰이 일어나서’라는 뜻이나, 본래는 신성하고 높으며 으뜸을 뜻하는 옛말인 ‘’이 ‘크다’는 뜻으로도

쓰이면서 ‘곰’으로 음이 변하여 단순히 ‘크고 긴 골짜기’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윗곰기골[上熊起洞] : 아랫곰기골 북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전주 이씨 2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윗소목개[上牛牧浦, 小牧浦] : 대광리 북쪽에 있던 마을. 한자 지명은 ‘소를 방목하던 곳’이라는
뜻이나,

소는 ‘사이’의 뜻인 ‘새’가 사투리의 발음 습관으로 인해 ‘쇠’로 옮겨간 것이다. ‘목’ 또한 ‘牧’이 아닌 ‘項’의

뜻을 가지고 있고, ‘개’도 단순한 장소의 뜻을 갖는 것으로, 성트르골로 넘어다니던 ‘사이의 목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지명이다.

 

*갈고개 : 신탄리역에서 매바위 앞을 지나 철원군 철원읍 율리리로 넘어가는 고개.

‘가른다(나눈다)’의 뜻으로 쓰였던 옛말 ‘가’가 변한 ‘갈’이고개와 합쳐져 지어진 이름이다.

고대산 북쪽 산줄기에 있는 이 고개를 기준으로 하여 마을이 나뉘어진다는 뜻을 갖는다.
 

*갓모바위 : 대광리 북쪽, 곰기골 입구에 있던 큰 바위. 그 모양이 갓모자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수복 후에 인위적으로 파손되어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개찡골 : 퉁지미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고대산(高臺山) : 대광리*내산리와 철원군 철원읍 율리리 경계에 있는 높은 산.

높이 821.1m. 신탄리 지역에서는 이 산을 ‘큰고래’라 부르고 있으나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곰기고개[熊起峴] : 성트르골에서 답곡리의 곰기로 넘어다니던 고개.

 

*공동묘지 : 정기소 동쪽 동그란 모양의 산에 있는 공동묘지.

 

*달고개[月峴] : 음송골에서 답곡리로 넘어 가는 고개. ‘산’을 뜻하는 고어인 ‘달’이 ‘고개’와 합쳐지면서

‘산고개’라는 뜻의 ‘달고개’가 되었으나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면서 ‘달’이 하늘의 ‘달’로 오기된 것이다.

 

*달팽이골 : 아나골 아래에 있는 달팽이처럼 생긴 골짜기.

 

*대광산(大光山) : 석봉 남쪽, 대광리*도신리*내산리와 경계가 되는 산. 높이 541.3m.

 

*대소라치고개[大松亭峴] : 윗대광골에서 내산리 대송정 마을로 넘어다니던 고개.

 

*독산(獨山), 일자산(一字山) : 푸르네미 남쪽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

높이 161m. 산의 형상이 ‘一’ 자 모양이라 하여 ‘일자산’이라고도 부른다.

 

*뒷골 : 아랫곰기골과 윗곰기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아랫곰기골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만가대(滿家垈) : 원두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현재 목장이 자리하고 있으나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매바위 : 갈고개 남쪽에 있는 검은빛으로 뾰족하게 솟은 큰 바위산. 예전부터 이 산 바위 틈에 매들이

둥지를 틀고 서식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해 오지만, 실제로는 ‘산’의 뜻인 ‘뫼’가 ‘매’로 발음되면서

‘매[鷹]’와 연결지어 해석하고 있다.

 

*무당소 : 갓모바위 아래에 있던 소. 예전에 이 곳에 방목했던 소를 이무기가 잡아먹고 코뚜레만

남겨 놓았다는 전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수 없다.

 

*백일봉 : 대광리역 동쪽에 있는 봉우리.

 

*벼락바위 : 대광리역 북쪽에 있는 바위. 예전 이곳에 벼락이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복희다리 : 석봉 서남쪽에 있는 깊은 산골짜기. 내산리 복희골로 넘어가는 높은 곳이어서

산의 옛말 ‘달’이 변한 ‘다리’와 합하여 이루어진 이름이다.

 

*삼배울산 : 백일봉 북쪽에 있는 산. 세 개의 산자락이 대광리 마을 쪽으로 뻗어 내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삼배울’은 셋을 뜻하는 ‘삼’과, 산을 뜻하는 ‘받’에 어근을 둔 ‘배’에 ‘골짜기’의 뜻을 가진 ‘울’이 합쳐져,

‘세 개의 산골짜기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복합 지명이다.

 

*샛대광골[間大光谷], 아랫대광골 : 천광곡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일제강점기 때 사이비종교로 악명 높았던 백백교도들이 양민을 살해하고 암매장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석봉(石峰) : 대소라치고개 남쪽에 있는 봉우리. 높이 544m. 정상부에 돌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석장골[石葬谷] : 수리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에 이 골짜기 안에 돌로 무덤을 만들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큰 석실묘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멸실되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성트르골 : 수리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답곡리의 성드루[城坪]로 넘어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드루’가 ‘트르’로 어휘가 변한 것이다.

 

*쇠골 : 윗곰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쇠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 쇠골이라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옛날 이 골짜기 안에서 중석광이 크게 번창했을 때 갑자기 굴이 붕괴되어 모두 죽고 그들이 쓰고

다니던 50개의 패랭이만 있었다 하여 ‘쉰패랭이골’로 불리다가 차츰 어휘가 변하여 ‘쉰골’로 바뀌었다는 설도 전해 온다.

 

*수리봉 : 소목개 북쪽에 있는 높은 봉우리. ‘높음’*‘으뜸’의 뜻으로 쓰였던 고어 ‘술’이 ‘수리’로 연철되어

봉(峰)과 합쳐진 이름으로,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쉬양골 : 신탄리역 북쪽에 있는 골짜기. 50개의 작은 골짜기로 이루어졌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아나골 : 쉬양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어떤 풍수가가 능자리를 잡으러 이 곳에 와서 보니

100개의 골짜기가 되어야 하는데 99개의 골짜기가 되어 능을 쓰지 못했다 하여 ‘아흔아홉골’로

이름 지었으나, 차츰 말이 줄어 ‘아나’로 불리워지는 곳이라 한다.

 

*아랫골 : 소목개 위에 있는 작은 골짜기. 윗골과 상대되는 지명이다.

 

*아랫소목개 : 음송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윗소목개와 상대되는 이름이다.

 

*양지골 : 백일봉 북쪽, 샛대광골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옹기골[店村] : 대광리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옹기점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다.

 

*용담고개[龍潭峴] : 신탄리역에서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의 용담 마을로 넘어다니던 고개.
 

*원두골 : 공동묘지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이 골짜기 앞에 관리나 여행객에게 숙식을 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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