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
서초동은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하여 붙여진 동명으로 일명 상초리, 서리풀이라고도 칭하였다.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에서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당산마을
당산마을은 당골마을과 마산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당꿀로도 불린다.
현재 남부터미널이 있는 남쪽 남부순환도로변에 10여호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옛날산제를 지냈던 당이 있었다.
사도감마을
이 마을은 현재 영동중학교 일대를 말하는데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사도감이라고 불렸다.
이와 연관되어 양재역 부근에 사도감고개가 있었고 그밖에도 사도감개울, 사도감들, 사도감다리 등도 있었다.
왕촌
반포대로와 남부 순환도로가 만나는 지점인 서초동 1451번지 일대에는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고려가 멸망한 뒤 왕씨가 정착하여 500년 동안 거주해 온 곳이다.
조선 건국 후 왕씨가 멸족을 당하게 되자 태조 이성계의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나 자신의 후손들을
더 이상 멸족시키지 말고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성계가 특명을 내려 왕씨들을 더 이상
처형시키지 말고 찾아서 잘 살게 해 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 왕미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서초동 산 127번지에 그의 아들 왕효곤을 비롯하여
100여기의 왕씨 선조의 묘가 있었으나 1971년 도시계획사업에 따라 모두 이장되었다.
개발 전까지만해도 20가구의 왕씨 가문이 살고 있었다.
장안말
서초동 삼풍아파트 남쪽 일대를 장안말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세종 10년(1428) 임영대군에 봉해졌고, 세종 21년 여색에 빠졌다 하여 일시 직첩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문종 1년(1451) 왕의 직접 지도로 신무기인 화차를 제작하였으며, 그 후 세조를 보좌하여 조정과 백성을 위해 노력했다. 정곡은 현재 법원단지와 그 남쪽 일대를 말하는데, 옛부터 정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입구에 자연석 2개에 '鄭谷(정곡)'이라 정중만의 글씨로 새긴 것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 이 돌은 반포로변 해주 정씨 대종친회 건물 앞에 옮겨져 있다.
[ 잠원동 ]
잠원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실리와 사평리로 불려왔는데 1914년에는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로 칭했고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잠원동이 되었다. 잠원동은 뽕나무, 양잠과 관계가
깊었던 곳으로 조선시대엔 이곳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잠원동이란 동명도 양잠과 관련있다. 원래 잠실리라 불리던 것이 서울로 편입될 때 송파구의 잠실과
구분하기 위하여 잠실리의 「잠」자와 인근 신동면 신원리의 「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인근지역은 뽕나무밭이어서 뽕 나무 묘목을 재배하고 양잠을 치는 농가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한강변에
이 지역이 위치하고 있어 뱃사람 또한 많았다.
사평장터
오늘의 설악아파트 1동 북쪽, 한신아파트 337동 동쪽 잠원로 부근에는 지금부터 60여년전까지 사평장터가 있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아 돈대마당이라고도 불리던 곳인데 그 동쪽에는 200년 된 느티나무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강나루
한남대교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원래 한강진이 있던 곳으로 예전부터 수상교통의 길목이었다.
일찍이 신라 때는 북동이라하여 이곳에서 큰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때는 사평도라하여 진선이 배치되어
교통편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제1의 도선장으로 송파·노량진과 더불어 경강 3진을 이루었다.
한강나루 북쪽에는 양진단이 있어 나라에서 봄·가을로 사고예방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부근에는
제천정이란 정자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선비들이 자연을 즐겼다.
한편 한강나루의 진선으로 관선 10척이 있었다. 세종때 삼전도를 신설하면서 1척을 이관하 여 9척으로
운행되다가 15척으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한강진은 삼전도와 더불어 대모산 기슭의 헌·인릉과 나루
동쪽의 선정릉으로 가는 길목으로 역대왕들의 도강이 있었고 봉은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한 도성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연산군 때는 청계산 수렵을 위한 부교가 가설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교를 설치하여
도성을 함락하려고 하자 의병들이 이를 파괴하여 작전을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현재 한남대교가
경부고속도로에 이어지는 것은 옛날 한강진을 건너 삼남으로 이어지는 옛 길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옛 지명의 유래
현재 농가공산품판매센터(잠원동 65-32번지)부근에는 할떡거리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에
떡 하나로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양반이 묻혀 있다는 양반산소가
현재 잠원동 천주교 성당 뒤쪽에 있다.
원단동 이란 마을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풍수 설에 따라
남산의 누에를 먹이기 위한 뽕나무를 마을에 많이 심었고, 세조가 이곳에 원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옛날에 활을 쏘았던 시장 터가 있었고, 옛날 황새가
앉았다하여 황샛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잘 나왔다고 한 다.
[ 반포동 ]
반포동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 즉 반포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곳이 홍수피해를 입는 상습침수 지역으로 반포라고 불렀다 한다.
반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하반포리 지역이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확정에 따라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부르게 되었다.
1963년 1 월 1일 법률 제1172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이 동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인해 훼손되었기 때문 에 찾아 볼 수가 없다.
1960년대만 해도 신반포로 이서지역의 대부분은 모래사장 또는 늪지 대로 강물 속에 있었다.
약간 높은 지역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갈대밭과 뽕나무밭이 우거 져 있었으며, 채소농업과 양잠업이 행해졌던 곳이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큰 비가 내려 한강 의 수위가 높아지며 이곳 대부분이 침수되어 농작물의 피해가 자주 있었다.
일제 때에는 지 금의 반포아파트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유사의 사리채취로 생계를 잇는 이가 많았다.
게루지 마을
현재 주공아파트 3단지에는 고모래산이라는 야산으로 게루지마을이 있었고 천주교인의 공동묘지였다.
별바위 터와 말무덤 터
옛날 어느 임산부가 산기가 있어 친정인 마포로 가다가 진통이 심해 견딜 수가 없어 길옆 갈대밭에 들어가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태를 끊을 수가 없어 어려워 할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흰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태는 갈대잎으로 끊으면 되나 아기가 걱정이다"라고 하며 당부하기를 "뒤에 말탄
병사가 쫒아 올텐데 그가 아기는 어떻게 낳았으며, 태를 어떻게 잘랐느냐고 추궁할 것이니 그때 가대로
잘랐다고 말하지 말아라" 만일 말한다면 아이를 죽일 것이다."하고 일러주고는 하늘로 사라졌다.
곧이어 말탄 병사가 뒤쫓아와 산모에게 추궁을 하자 산모는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병사는 즉시 아이를 죽였다. 이 때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아기가 죽은 뒤편 큰 바위에서 무수히 많은 왕벌이 쏟아져 나오더니
그 병사를 향해 날아가 병사와 말을 쏘아 죽였다. 그 후 벌이 나온 큰 바위를 벌바위라고 불렀다.
현재 이 곳에는 반포전화국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방사를 태우고 온 용마가 벌에 쏘여 죽은 것을 안타까이 여긴 마을 사람들은 용마를 정성껏 묻어 주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반포동 1번지 경남쇼핑센터 옆이다.
서래마을
사평로 동쪽 팔레스호텔 뒤쪽에는 예부터 이곳에 살아온 20여호의 원주민들이 있는데,
이 일대를 서래마을 또는 서애마을, 서릿마을이라고 부른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의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해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또 서애라는 마을 이름은 매곡동(현 조달청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마뉘꿀이라는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이 자기네 서쪽 물가에 있고, 뒤에 깎아지른 듯한 산이 있으므로 불렀던 이름이다.
서래마을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의이죽으로 요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래마을은 원래 반포 15차 한신아파트가 지어져 있는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피해를 입고 이주해 와 형성되었다.
원곡마을
둥근말이라고도 불린 원곡마을은 산 모퉁이에 둥글게 이어져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현재의
강남성모병원 뒤쪽이다. 현재 이 병원의 기숙사 자리는 전에 빙고꿀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이곳은 골짜기가 깊어 겨울에 언 얼음이 늦봄까지도 녹지 않아 이같은 이름이 생겼다한다.
[ 방배동 ]
방배동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고을'이라는 설과 이 동자체가 '한강을 등진 모서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세조의 큰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자리를 세종에게 넘겨주고 전국을 돌아다닐 때 자신의 왕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갔다 하여 방배동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방배리였던 이 동리는 1963년 1월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관악구가 설치되자 관악구 사당1동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1일 사당1동의 분동으로
방배동은 독립하게 되었고 이때 인구는 8,480명이었다. 1978년 10월 10일 방배동은 1·2동으로 분리되고
1980년 4월 1일 사당동의 일부를 편입, 강남구로 이관되는데 이때 이 편입된 부분이 방배본동이 된다.
1985년 9월 1일 방배2동에서 방배3동이 가라져 나오고 1988년 1월 1일로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1991년 9월 방배본동과 1동의 서문로와 동광로 남쪽과 사당로 북쪽을 갈라내어 방배4동이
신설됨으로써 방배동의 행정은 방배본동·1·2·3·4 동에서 나누어 맡고 있다.
남태령
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여시골(엽시골), 즉 여우고개라 불리는 고개가 흔하게 널려 있다.
이는 예전에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이었다.
한양에서도 인근 경기도로 나가는 관문에는 곳곳에 여우고개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다름아닌 오늘날의 남태령이었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로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이다.
18세기 말 효성이 극진했던 정조는 수원에 있는 선친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었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다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이가 "이 고개 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로 불리는데, 왜 거짓말을 아뢰느냐'고
힐책하자 이방 변씨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나 신하로서 임금께 여우고개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하고 아뢰니 정조가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에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부르게 된 것은 호랑바위가 있는 가까운 골짜기에 호랑골과 여 우골이 있어
여우가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명명되었다는 설과, 예날에 천년 묵은 여우가 사 람으로 변신하여 이 고개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 남태령이 란 이름이 붙게 된 시기에 대해 광해군 때 만들어진 춘향전에 이 남태령이 이미 나오고
있으므로 정조 이전에 불려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방배동 고분
방배동에는 고분이 있었는데, 이 고분에서 1970년대에 조선 초기의 목우 6점이 출토되었다.
높이 7~8cm의 목우들은 출토 당시 부분적으로 부식된 곳도 있었으나 거의 완전한 형태였으며,
원래 채색을 한 듯 약간의 채색 흔적이 남아있다.
6개중 5개는 인물상으로서 3개는 여인상이고, 2개는 남자상이다.
남자 한 사람은 평정건을 쓰고 한 사람은 변발을 하고 있어서 고려 후기 몽고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옷도 남자는 두루마기 같은 포를 입고 있고, 한 여자는 머리에 몽수를 쓰고 두 여자는 고려말에
유행했던 얹은 머리를 하고 있으며, 길이가 긴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나머지 한 개는 마상으로서
균형이 잘 잡히고 사실적인 표현에다 나무결을 잘 살린 작품이다.
이 고분은 방배동의 개발로 인하여 현재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방배동 옛지명의 유래
이 지역은 근래에 신흥주택가로 발전한 곳이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자연부락 명칭들을 통해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천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천촌말이라 불렀고, 그 뒤에 있는 골짜기를 뒷굴, 그 뒷골에 있는 논을 뒷굴논,
천촌말 고개 너머의 벌을 뒷벌, 천촌말과 사궁말앞 벌을 앞벌, 천촌말 근처의 산개천둑을 갤둑이라 하였고
거꾸로 넘어간다 하여 가꿀고개, 논이 깊어 구레논, 쪽박 엎이 놓은 것 같다하여 쪽박산, 산 아래로 뱅돌아간다
하여 뱅도래미, 새로 생긴 마을은 새말, 옛날에 큰 마을이 있었던 터는 새텃말, 뱀장어가 많아 장앗들,
치달은 골짜기라하여 치골, 호랑이가 살았다는 호랑바위, 돌 한쪽으로 건너던 다리로 임금의 거동하던 길을
쪽다리,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하여 이복촌(이북굴)이라고 불렀다.
[ 양재동 ]
양재동은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양재동으로 불렀는데,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양재동사무소가 생겨났다.
1975년에 강남구에 속했다가 1988년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신설됨에 따라 양재동은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고, 1992년 양재동은 1·2동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양재동
옛부터 말죽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양재역, 양재원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로 조선시대에는
사상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주요 상업지역이었다.
우면동
산모양이 소가 졸고 있는 형태의 산이라하여 불려온 우면산 기슭에 있으므로 붙여진 동명이다.
1988년에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현재 원지동과 함께 양재1동 사무소가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원지동
조선시대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역과 함께 설치되었던 원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원지라고 하던 것을 잘못 표기하여 현재의 원지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원지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신원동이었다가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현재의 신원동과
분리되었는데, 바람골·양수리·원터마을의 3개 부락을 원지동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말죽거리
말죽거리는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을 지칭하는데 강남 일대에서는 양재동, 역삼동이란
동명보다 말죽거리라고 하면 알아 듣는 사람이 더 많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 곳을 말죽거리라고 칭하게 된 내력은 옛날 제주도에서 올려보낸 말을 한양으로
보내기 전에 이 곳에서 최종적으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얼마전까지도
양재동사무소 동쪽의 헌릉로변 게리 또는 거여리에는 많은 마방이 있었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충청도·경상도로 가려면 한남동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말죽거리는 이대로의 첫 길목이었다. 이와 반대로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한강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식하는 곳이 말죽거리였다.
따라서 말죽거리에는 조선초부터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
즉 멀리서 온 여행자들은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저녁을 먹은 뒤이 곳에 묵었던 것이다.
또한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압구정등에서 전송하는 벗들과 마지막 주연을 나누고 헤어져 저녁나절에
찾아든 첫 숙소가 말죽거리에 있는 주막이다.
이들은 이제부터 천리길을 가야 할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이르면서 자신도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이 곳 일대를 말죽거리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 곳에 이르러 유생 김이 등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들고 갔기 때문에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그 밖에 다른 설은 병자호란때 인조가 청나라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청나라는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이 때 이 곳은 청나라의 장사 용골대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였다.
즉 청나라의 기마병들이 산성을 향하여 공격을 가한 후에는 교대로 이곳 병참기지에 물러나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말죽을 쑤어 먹였다 하여 말죽거리라고 칭하였다는 것이다.
우면산
소가 졸고 있는 형세라 하여 우면산(牛眠山)이란 이름이 붙었다.
우면산의 부분 이름으로는 갓 바위가 있는 산이라 하여 관암산(冠岩 山), 산이 도마와 같아 하여 도마산,
옛날에 활을 쏘던 사정이 있던 곳으로 사정산(射亭山), 수정이 채굴되었다 하여 수정봉(水晶峰), 졸고
있는 소의 낭심에 해당되는 곳이라 하여 알봉 등이 있다.
우면산 은 표고 293m로 서초구의 방배동·우면동·서초동·양재동의 경계 를 이루고 있다.
관악산 줄기였던 우면산은 남태령 고갯길의 확장으 로 관악산과 완전히 분리되어 도시 속에 고립된
형세를 띠고 있지만 산속의 여러 계곡에서는 맑은 옹달샘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울창한 삼림으로
다양한 동·식물군이 자연 서생하고 있다.
서울시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우면산은 산책로 및 등산로 가 태극·범바위·우면산·산골 약수터 등
20여개소의 약수터와 연 결되어 있으며 대성사·정도전의 묘·이존오의 사당·예술의 전당 등 문화유적과 사찰,
문화공간이 복합되어 있어 도시주민들의 아늑 한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서초구청에서는 매월 첫째주
일요일은 "구민 걷기의 날"로 정하고, 우면산 등산로를 오르고 있어 주민 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양재역
말죽거리에 있었떤 양재역은 조선시대에 시행된 역원제도(驛阮制度) 에 따라 설치된 주요 역이었다.
양재역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중 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세공의 수송, 관료사행의 마필 급여와
숙식의 제공, 변방 군정의 보고 및 민정시찰, 비행관리의 규찰 등을 담당했다. 역은 30리마다 대로변에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양재역도 대로변에 있었음이 호가실하다.
오늘날에도 이 곳에 지하 철 양재역이 설치되어 이 지역 교통 편리에 큰 몫을 하고 있는 것도 전날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또 이 양재역은 정미사화(丁 未士禍)와 관련이 있다. 조선초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왕의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국권을 좌우하게 되었다.
명종 2년(1547) 9월 부제학 정언각이 어느날 그의 딸을 전라도에 전 송하기 위해 양재역까지 갔다.
그런데 벽을 보니 붉은 글씨로 "위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등이 권력을 농락하여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그대로 서서 기다리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 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때 이기·정 순붕 등이 "이것은 지난 번 을사사화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다"라고 주장하여
봉성군(鳳城君) 등을 처형하고 송인수·이언적 등 20여명을 유배시켰다. 이로써 사람들이 다시 화를 입어
이를 정미사화라고 하고, 일명 "양재역 벽서의 옥(獄)"이라고도 부른다.
이존오 사당
우면동 49번지에는 고려 공민왕때 언관(言官)을 지낸 석탄 이존오 (石灘 李存吾)의 사당이 있다.
이존오(1341~1371년)는 고려말 정몽주 와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때 관직에 올랐다.
당시 신돈(辛旽) 이 국정을 그르치고 있어도 그의 권세에 눌려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하자
신돈을 몰아내고 국정을 바로 잡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왕과 용상이 나란히 앉아 있는 신돈의 무례함을 정면으로 힐책하여 신돈이 황급히 아래로 내려앉은 일도 있었다. 그는 그 일로 좌천되 어 전라도로 귀양가게 되었고, 석탄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371년 31세로 별세하였다.
그가 죽은 후 공민왕은 그의 충성심을 깨닫게 되어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이 사당에는
석탄선생의 아들인 경절공도 함께 모시고 있다.
태봉
우면동 형촌마을 옆에 있는 나지막한 봉우리를 태봉(우면동 291- 1번지)이라고 하는데, 이 곳은
조선시대 원산군의 태를 묻은 곳 으로 알려져 있다. 커다란 돌 항아리 내에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를
넣어두었다고 전해지나, 일제 때 일본인들이 도굴해 현재는 돌 항아리만이 남아 있다.
10여년전 일본의 한 미술관련 잡지에 는 이와 관련하여 "이 항아리는 2개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에서 갖고 왔다"라고 게재되어 있어 당시의 지명과 일치하고 태봉의
유래와 백자의 존재도 사실인 것 으로 확인되었다. 이 일대는 우면산에 둘러싸여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바람굴
원지동은 현재 서초구의 남쪽 끝 청계산 옥녀봉 아래 계곡마을인 데, 탄천의 지류인 여의천이 흐르고 있다.
이 개천을 조금 거슬 러 올라가면 세원에서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는 청계산 입구 에 조그만 마을
바람굴이 있는데 이곳은 산이 높고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하여 이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거여마을
현재 양재2동사무소가 위치한 곳을 가리키는 말로 원래는 이곳 지형이 게모양을 닮았다하여 게리라고
불리다가 거여, 거여리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1958년 북방식 지석묘 6기가 발견됐으나 도 시계획에 밀려
지금은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지석묘의 원래 위치는 양재천 남방 100m지점이라 한다.
또한 이곳에는 융수군수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양수리마을과 술바위
원지동 관현사 입구에는 현재 유원지 주차장이 들어선 곳에 옛날 양씨와 수씨가 살았던 양수리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폐동되어 단 지 그곳 골짜기와 들판이름으로만 불리는데 지금은 묘를 쓸 수 없지만 이 골짜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마을 입구 경부고 속도로 옆에 술바위란 유명한 바위가 있는데, 이는 옛날 지방에 서 서울로 올라가는
선비들이 여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쉬어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마을 왼쪽에는 개드락이라는
골짜 기가 있고, 위쪽으로는 청계산 제2야영장이, 그 오른쪽에 장사바 위와 넙적바위가 있다.
삼남도로
원지동과 신원동의 경계가 되고 서울에서 성남시로 통하는 2차선 포장도로가 있는데 이것이 삼남도로이다.
조선시대에 삼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이 길은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길 로 달래고개를
넘어 너더리(板橋)를 거쳐 용인이나 수원으로 오 갔었다.
원터마을
삼남도로를 가다보면 청계산 제1야영장과 청계산기도원 입구가 나타나는데, 여기가 원터(院基)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여행자를 위한 원(院)이 세워져 있었던 관계로 원터라 불려진 것이다.
원지동 400번지에 일대에 원이 있었는데, 1970년대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석축이 없어지고 현재는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다. 이 원터마을은 경부고속도로가 놓임에 따라 주민들의 일부가 이전하였고
옛 농촌주택은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다.
[ 내곡동 ]
내곡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동으로 불리다가 1914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로
바꾸었고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내곡동으로 이름이 바뀌어 성동구 언주출장소가 관할하게 되었다.
내곡동
옛 언주면의 일부로 본촌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안골, 안말로 불리던 것을 한자명으로
내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 동명의 유래인데, 일명 양지말이라고도 칭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헌·인릉이 있어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으며, 수목이 울창하여 호랑이·여우 등의
짐승이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내곡동을 둘러 싸고 있는 산 중에 인릉산은 내곡동고 성남시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내곡동 산 13-1번지에 헌릉·인릉이 자리잡고 있어 산 이름이 되었다.
염곡동
염곡동은 이곳 지형이 염통과 같이 생겼으므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염통곡, 염곡동이라 하였다.
염곡동의 현재 위치는 동쪽은 내곡동과 접하고 서쪽은 양재동에 닿아 있다. 그리고 북쪽은 구룡산을
경계로 강남구 포이동과 분계되어 있고, 남쪽은 야산을 경계로 신원동과 잇대어 있다.
신원동
조선시대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개 위해 역과 함께 각 요로에 설치되었던 원의 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새원" 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탑성골
탑성골은 염통골 남쪽 헌릉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버스정류장 이름도 탑성골로 되어 있다.
탑곡은 옛날 이곳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에는 경주 이씨가 11대 이전부터
살기 시작하여 아직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
옛날 옻우물
과거 염곡동에는 아홉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구룡산 전설에 따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동에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8군데가 매몰되고 현재는 염곡마을 북동쪽에 구룡산 제1약수라는 옛날 옻우물만이 남아있다.
이 옻우물이란 약수 이름은 옻이 오른 사람이 이 우물 물을 마시거나 우물 울로 씻어내면 옻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염통골
염통골 또는 염통곡으로 알려진 염곡동은 집성촌으로 창녕조씨가 많이 거주하고있고 전주 이씨도
몇 거주하고 살고 있는데 전주 이씨는 420여년 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후 20년 늦게 창녕 조씨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 이전까지는 조씨가 80~90여호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떠나갔다.
샘마을
내곡동의 샘마을은 1972년에 창경궁·창덕궁 인근의 종로구 와룡동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함으로써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는 박석고개 왼쪽에 정착했으나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 때 헌릉로 현재 신흥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어둔골
헌·인릉 입구 박석고개에서 남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신흥마을이 있다.
이름 그대로 광복 후 월남민들의 개척단이 이룩한 새로 생긴 마을이다.
원래 이곳은 어둔골이라 하였는데 나무숲이 우거져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 호랑이도 자주 출현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전국에서 제일 품질이 뛰어난 수제양털이불
생산업체가 들어서 있다.
평촌
신원동의 근본이 되는 마을로 본촌이라 하고 또 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이라고도 한다.
평촌은 벌말을 한자로 바꾼 이름이다. 이 벌말 438번지 13호에는 김진사댁이 있었는데 전에 과거를
보던 선비들이 이 사랑방에서 숙식을 하고 갔다 한다.
취락구조개선 사업으로 대부분 성남으로 이사 가고 지금은 원주민이 반으로 줄었다.
벌말은 김해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으며 6·25동란 때 인민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지명 유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주시 부석면 지명유래 (0) | 2016.10.25 |
---|---|
연천군 신서면의 지명유래 (0) | 2016.09.06 |
청계산의 지명유래 (0) | 2016.07.30 |
[스크랩] 지리산 유래(구례군청) (0) | 2016.06.10 |
오산의 지명 유래 (0) | 2016.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