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면 지명유래
태백산 부석사 현판
부석면 지명유래
甘谷里(감곡리) 감실(監室) 村. 옛날 이 마을 앞에는 鑑湖(감호)라 불리 우는 못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뜻에서 못에 물이 가득 차기를 빌었으며 그 때마다 못물이 가득차서 해마다 풍작을 이룩하였고 그리하여 훗날 감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봉(道蜂)·도복(都卜)·도부랑(桃浮浪) 村) 마을 양편에 산봉우리가 여려 곳에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로 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道蜂)도봉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또 국모봉으로 가는 길이라 하여 (道蜂)도봉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초기 宋涵(송함)이란 察訪(찰방)이 이곳을 개척하여 桃浮浪(도부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조 말엽에 와서 (道蜂)도봉이라 개칭 하였다고 한다. 석남(石南)·성남(城南) 村) 마을의 남쪽에 큰 바위가 공중에 뜬 듯 솟아 있어 이를 공중바위라고 하며 이 바위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하여 (石南)석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산마을 村) (石南) 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산세가 마치 두 팔로서 둥글게 포근히 이 마을 안은 모양을 하여 있기에 안산마을이라고 부른다 한다. 영모암(永慕岩·影慕岩·靈慕庵) 村) 마을 뒷산에 큰 암자가 있었는데 그 암자의 그림자가 바위 같다 해서影慕岩(영모암)이라 하였으며 또 조상들을 그리는 뜻에서 永慕岩(영모암)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한다. 선바우·입암(立岩) 村) 마을 앞 입구에 洞樹인 느티나무 옆에 크고 높은 바위가 충암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흡사 깎아 세운듯 한 바위가 잇는데서 연유하여 立岩(입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둔전마 村) 도부랑 동쪽에 위치한 옛날 화전민들이 몇 집 모여서 화전을 일구어 살던 마을로 지금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폐동이 되었다. 범바위 마을 村) 永慕岩(영모암)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이 마을에 커다란 바위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바위의 형상이 흡사 범을 닮았다고 해서 범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
南大里(남대리) 텃골·기곡(基谷) 村) 南大(남대)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화전민들이 이룩한 마을이다. 남대리(南大里)·남대(南大)·남대궐(南大闕) 村) 順興(순흥)으로 귀양 온 금성대군이 端宗復位(단종복위)를 위해 이곳에서 자주 밀사를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자 그를 애석하게 여긴 백성들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남대궐이라는 현판을 붙인 것에 연유한 것이다. 짐또배기·마지천리(馬吱川里)·마흘천(馬屹川) 村) 남대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가장 번성기에는 36가구였으나 현재는 17가구뿐이다. 각 성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약초를 재배하여 생계를 이어 가고 있다. 샛터·상신기(上新基) 村) 남대궐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종대왕을 흠모하는 백성들로 생긴 화전민 촌이다. 가장 번성기는 32가구였으나 소개령으로 철거 또는 이주로 인하여 현재는 5가구뿐이다. 소란·송내(松內) 村) 남대궐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낙락장송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며 가장 번성기는 34가구였으나 현재는 12가구이다. 농업의 약초 재배를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다. 중마·중리(中里) 村) 소란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가장 번성기는 16가구였으나 거의 이곳을 떠났고 몇 집이 화전을 일구어 생활하고 있다. |
谷穀里(노곡리) 남자일·남절·윗호크랭이·호문(好文)·남사동(南寺洞)·남좌동(南佐洞) 村) 용수산의 남쪽 가운데 마을터가 제일 좋다고 하여 南第一(남제일)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음이 와전되어 남절이라 부르고 있다. 은행정(銀杏亭) 村) 魯谷(노곡) 1里(리)에 속한 자연 부락으로서 마을 부근에 雜木(잡목)이 우거져 있고 마을 어귀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동민들이 은행나무를 신성시하여 잘 보호하고 다른 나무는 벌목을 하고 집을 지우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뒤 은행나무 밑에다 亭子(정자)를 짓고 마을의 吉福(길복)을 빌며 살아 왔다하여 銀杏亭(은행정)이라 불려졌다. 망골·두곡(杜谷)·두릉(杜陵)·두신(杜新) 村) 용수산 봉우리에서 뻗은 산줄기가 마을 전체를 막고 있어서 막은 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와전되어 망골로 부르고 있다. 망골·銀杏亭(은행정)·새터를 합하여 두신(杜新) 농촌진흥조합을 만들었으며 두곡(杜谷)의 杜字(두자)와 新基(신기)의 新字(신자)를 따서 (杜新)이라고도 부른다. 양지마·양중동(陽中洞) 村) 小白山脈(소백산맥)의 가개봉에서 이어진 용수산 중턱에 자리잡은 양지 바른 곳이므로 양지 마을이라 부렀다. 일제 때에 양지마을·중마을 낙절을 陽中農村振興組合을 만들었던 까닭에 陽中洞(양중동) 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에서 쑥 들어간 곳에 등심이라는 골짝이 있는데 조선조 말엽에 72名(명)의 隱士(은사)가 속세를 피하여 이곳에 은기 하였다 하여 듬실의 어귀를 杜門洞天(두문동천)이라고도 부른다. 중마·노실·너걱(魯谷)·중리·답곡 村) 여러 마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중마라고 불렀다. 노실이란 명칭은 옛날에 백로가 많이 살았고 백로 집이 많았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며 또 논이 많은 골짜기라고 沓谷이라 한다고도 했다. 새터·신기(新基) 村) 魯谷 1里에 속한 자연 부락으로서 망골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점차 가구 수가 불어나서 망골에는 집을 더 지을 터가 없기에 새로운 마을로 잡은 곳이며 새로 마을 터를 개척하여 살았다고 하여 새터라 부리어 졌다. |
寶 溪 里(보계리) 보계(寶溪)·보교(寶轎) 村) 마을의 골이 깊어 水源(수원)이 좋으며 가뭄에도 개울의 물이 마르지 않아 농사에 凶豊(흉풍)이 없는 곳이며 이 작은 개울이 보배스럽다고 해서 寶溪라 칭하였다는 설도 있고 또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마치 가마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寶溪라고도 전해 오고 있다. 보게실(寶溪室)·원보계(元寶溪) 村) 보계는 원래 寶溪庵(보계암)이 있어서 연유된 것이라고도 하며 寶溪란 極樂淨土 즉 고뇌가 없는 곳을 일컬으며 마을 깊숙이 산 속에 방같이 둘러 싸여 있어 이 곳을 寶溪室(보계실)이라 한다. 옛날에는 實字가 든 곳은 避難室(피난실)이라 한다. 옛날에는 室子가 든 곳은 避難處(피난처)로 알맞았으며 지금도 이곳을 元寶溪라 부르고도 있다. 광챙이·광릉동천(廣陵洞天)·광릉(廣陵)·광창(廣倉) 村) 원래 이 곳을 廣倉으로 불러 왔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르기도 쉽고 소리 나는 대로 광창이로 불렀으며 다시 광챙이로 불리고 있다. 사람에 따라 廣陵洞天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불바우·뿔바위·각암(角岩·珏岩) 村) 마을 입구에 뿔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이런 연유로 뿔바위·珏岩이라 칭하였다. 어원이 차츰 변하여 부르기 쉽게 불러 불로 바위가 바우로 불리어져 불바우라 한다. 그러다가 뿔이란 말이 좋지 않다하여 쌍구슬 각字를 써서 珏岩이라고도 쓴다. 상모치·점마·모치방(慕痴坊)·모치(毛致) 村) 모치래기(메추라기)라는 새가 이곳에 있었는데 마을의 산이 모치래기 새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毛致(모치)라 칭하였다 한다. 자연 부락이 산재되어 있고 위쪽을 上毛致, 가운데를 中毛致, 아래쪽을 下毛致라 부르고 있다. 후바우·오룡동(五龍洞) 村) 60여 년 전에는 이곳을 호바우라고 칭하였다 하며 그 후 송원식이라는 사람이 와서 앞산의 봉우리가 용같이 생긴 다섯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五龍洞이라고 命名하여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응징이·응정(應亭) 村) 마을 앞산의 모양이 매의 부리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사람들은 應亭(응정)이라고 불렀으며 그 후 점차로 발음이 訛傳(와전)되어 지금은 응징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좌실(文佐室) 村) 불바우 마을에서 북서 간 약 1km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창원 黃氏(황씨)들의 薺室(제실)이 단 한 집 있을 뿐이며 주위에는 황씨 先代(선대)의 묘지가 산재하고 있다. 제궁골·제궁마·제궁마을·제궁촌(薺宮村) 村) 廣倉 남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이곳에 宣城(선성) 金氏(김씨)들의 薺宮(제궁)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이에 연유하여 제궁마 또는 薺宮村(제궁촌)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하모치(下毛致) 村) 상모치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서 이곳에 상모치·중모치·하모치의 세 개 자연 부락이 타원형으로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산재되어 있다. |
北 枝 里(북지리) 갓띠·북지리(北枝里)·관대(冠帶) 村) 마을의 뒷산에 갓 모양이며 그 기슭에 마을이 띠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으므로 갓띄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순흥군 봉양면 이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영주군 부석면에 편입되었다. 조선조 中宗(중종) 이후 淸州(청주) 鄭氏(정씨)가 群居(군거)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가구만 살고 있다. 송두들·속두들·송고(松皐) 村) 소백 소맥에서 흐르는 溪谷(계곡)의 맑은 물이 동리 중심을 뚫고 흐르고 있으며 景觀이 좋을 뿐 아니라 부석사와 地境(지경)한 마을로서 사찰 외곽을 둘러싼 松林(송림)이 마을 뒤에 우거져 언덕을 이루었기에 송두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방골·방동(方洞) 村) 부석사 동쪽에 위치한 인접 촌락으로 부석사 전성기에는 僧坊(승방)이 있는 洞里(동리) 즉 房洞(방동)이 와전되어 方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은 30여 가구가 취락을 이루고 있다. 허뭇거리·허문거리(虛門一) 신기(新基) 村) 浮石寺(부석사) 입구에 자리 잡은 山村(산촌)이며 奉花(봉화) 物野(물야) 方面(방면)으로 가는 노변에 위치한 관계로 행인들의 약탈 등 행패가 심하여 마을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자 마을 입구의 골목을 없애고 문을 페쇄해 버렸으며 이런 연유로 허뭇거리라 일컫게 되었다. 지금의 마을은 그 뒤 질서가 잡히자 위치를 옮겨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여 신기라고 했다. |
上石里(상석리) 수사(水沙) 村) 上石里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 질러 흐르는 내가 잇는데 그 중에서 이 마을 앞 내가 다른 곳보다 물이 많이 흐르고 모래가 많이 쌓였다하여 옛날부터 水沙(수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탄(挑灘)·석탄(石灘) 村) 옛날에는 이 마을 앞에는 돌여울이 흐르고 있어 石灘이라 불리어 왔다 조선 시대 順興府에 속해 있을 때 石灘은 도강면 감산 봉양면에 소속되었고 또 이곳에 道岡書堂(도강서당)이 있었으며 복숭아나무가 많았다는 데 연유되어 桃灘(도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솔안·송내(松內) 村) 이 마을 주위에는 수백 년이나 되는 老松(노송)들이 松林(송림)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노송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松林 속의 마을이라고 하여 솔안 또는 송내라고 불렀다. 감살미·감산(甘山) 村) 이 마을 둘레의 산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옛날에는 이곳에 감나무가 많이 있는 산밑이라는데 연유하여 甘山이라 하였다. 지금은 부르기 쉽게 소리 나는 그대로 감살미로 부르고 있다. 들마·평촌들·평촌(坪村) 村) 들이 넓고 들 가운데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 해서 들마을이라고 불렀다. 170년 전에 들 옆의 산기슭으로 마을을 옮겨서 평촌이라 부른다. 고산(高山·孤山) 村) 마을 뒤에 우뚝 솟은 외로운 산이라서 孤山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順興府(순흥부) 당시 高山里(고산리)로 불러 왔으며 또한 山勢(산세)가 높다고 해서 高山(고산)으로도 부르고 있다. |
韶川里(소천리) 남산(南山) 村) 면소재지 남동쪽에 위치한 丘陵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老松이 울창한 風致林(풍치림)을 이루고 있으며 구릉 남동쪽에 인가가 30여 가구 모여 있고 景致(경치)가 빼어 난 마을이다. 달터·월대(月帶) 村) 韶川(소천) 5里(리)에 속한 자연 부락 중 가장 작은 마을로서 마을을 둘러싼 山勢(산세)가 아름다운 半月形局(반월형국)이며 다래 덩굴이 우거진 밑에 몇 가구가 집을 지어 살았는데 다래 덩굴 밑에서 달이 뜨는 것을 보면 달이 띠를 두른 듯 하다하여 月帶(월대)라 하였으며 그 뒤 우리말로 달터라 불려졌다. 두들마(坡上洞) 村) 마을의 생긴 모양이 뱃머리 형상이며 언덕 위의 마을이라는 데서 두들마라고 불렀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물이 나지 않아 마을 동쪽의 내 건너에 있는 우물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 서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옛날 鄭(정) 玉(옥) 黃海道(황해도) 監司(감사)가 태어났을 때 심었다고 하며 樹令(수령)이 약 280여 년 된다고 하며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물구지·물거지(勿居地)·수양동(水陽洞) 村) 양지바르고 따뜻한 마을이며 물이 맑고, 호수처럼 생겼다고 하여 물구지라 불렀다. 아무리 춥고 바람이 부는 날이라도 따뜻한 마을이라 한다. 마을 앞에 城隍堂(성황당)이 있고 동민의 吉福(길복)을 기원하고 풍년을 빌기 위하여 지금도 음력 정월 보름날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봉래골·도래동·봉래(蓬萊) 村) 옛날에 양 봉래라는 사람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蓬萊洞(봉래동)이라고도 하였다. 봉래골 남동쪽에 위치한 蓬萊寺(봉래사)는 1953년에 法華宗(법화종)의 사찰로 건축하였으나 그 후 天台宗(천태종)으로 改宗(개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그랭이·사문(沙文)·상사문(上沙文) 村) 옛날에 학문이 높은 선비 金熙紹(김희소)가 경치가 좋은 산천을 찾아다니며 글 읽기를 즐기던 바 이 동네에 있는 폭포에서 글을 읽고 폭포로 이루어진 모래밭에 글을 썼다고 하여 동명을 沙文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설에는 이곳에 옛날부터 사기그릇을 굽는 옹기굴이 있어서 사그랭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소내·쇠내·소천(韶川)·우천(牛川)·하사문9下沙文) 村) 浮石面(부석면) 소재지 마을이며 옛날에는 牛川·소내·쇠내라고 불렀다. 鳳凰産(봉황산)밑에 위치하여 봉황산과 연유한 봉황새는 風流(풍류)를 좋아한다고 牛字(우자)를 韶字(소자)로 변경시켜 韶川(소천)이라 하였다고도 하며 또 일설에는 鄭(정) 玉(옥) 監司(감사)의 號(호)가 牛川(우천)이라서 牛川이라 하다가 韶川(소천)으로 개칭되었다고도 한다. 진골·장곡(長谷) 村) 韶川(소천) 2里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뒤편에 낮은 산줄기가 연이어져 있는 긴 골짜기로 형성된 마을이다. 옛날 安東(안동) 金氏(김씨)의 늙은이가 이 골자기에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그 뒤 인가가 골짜기에 길게 들어서게 되어 長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가 지금은 우리말로 진골이라 부르고 있다. 탑두리·탑들·탑평(塔坪) 村) 동리에서 북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탑이 있었다. 탑을 세운 연유는 지형이 蛇頭形(사두형)으로 생겨 당시 뱀이 많아서 사람의 왕래가 곤란하여 소통책으로 蛇頭形(사두형)의 목을 자르고 水路(수로)를 낸 후 蛇頭(사두) 지점에 탑을 세우고 지명을 塔坪(탑평)이라 하였으니 그 후부터는 뱀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탑이 없어졌으나 塔(탑)이 섰던 저리는 남아 있다. 새마을 村) 韶川(소천) 3里(리)에 속한 자연 부락으로서 소천 동네를 동서로 흐르는 沙門川(사문천) 냇가에 형성된 마을이나 1972년의 집중 폭우로 가옥 전답이 매몰 유실되어서 정부의 수해 복구 사업으로 새마을 주택을 집단으로 신축하여 새로운 부락이 형성되었다. 그 뒤 새마을 주택으로만 이루어진 마을이라 새마을로 불려졌다. 재궁터 村) 韶川(소천) 6里(리)에 속한 마을로서 塔坪(탑평) 마을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마을이 처음 생길 때는 昌原(창원) 黃氏(황씨)들이 산기슭을 개간하여 터를 잡고 살아 왔으며 그 마을에 昌原(창원) 黃氏(황씨)들이 薺室(제실)을 지운 뒤부터 제궁터라 부르고 있다. |
龍岩里(용암리) 화부(花釜)·교천(交川)·화감(花甘) 村) 산의 형상이 花釜之形(화부지형)으로 부근이 지면보다 높아서 흡사 꽃봉오리가 피어 있는 모양으로 보이며 그 꽃봉오리 안에 동네가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花釜洞이라 한다. 한편 이는 風水地理說(풍수지리설)에 의해서 명명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동네는 延安(연안) 金氏(김씨)의 世居地(세거지)이며 옛날부터 萬石巨富(만석거부)로 양반이 행세하며 살아 오던 곳이다. 망가매 만갑(萬甲)·망감(望甘) 村) 마을 앞산의 지형이 萬甲藏身之形(만갑장신지형)과 같다고 하여 萬甲(만갑)이라 하였다 한다. 옛날 道僧(도승)이 이동네를 지나가다가 앞산을 바라보며 절을 네 번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만갑 앞들을 四拜(사배)들이라고도 한다. 道僧(도승)이 四拜(사배)한 이유는 앞산의 지형이 萬甲藏身之形으로 산중이 장군이 태어날 묘터가 한자리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전설은 동민들에게 잘 알려지고 있다. 새두들·봉구(鳳邱) 村) 본 마을이 생기기 전에 매봉산의 형상이 매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새가 살지 못했다고 하며 동네가 생기고 사람들이 숲을 가꾸니 새들이 날아와서 살았다고 하여 새두들이라 한다. 새말·신촌(新村) 村) 농토를 따라 한 집 두 집 모여서 살게 되었고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새마을이라 칭하게 되었다. 용바우·용암(龍岩) 村) 마을 입구에 용머리 형상의 바위가 있어서 용바우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바위에 雲行雨施(운행우시) 龍臥花岩(용와화암)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은 金奎秀(김규수)의 글씨라 전한다. 재궁물 村) 용바위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이 마을에는 재궁이 있다. |
愚谷里(우곡리) 무덤실·매곡(梅谷) 村) 옛날에 이 마을 뒤편에 기를 굽는 옹기굴이 있었으며 동민들이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한편 마을 주위에 梅花나무가 많아서 매화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하여 일명 梅谷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할미골·비기실·비곡(飛谷) 村) 비기실 뒷골을 할미골이라 하는데 딸을 다섯이나 둔 할머니가 살다가 老後에 딸들이 집을 찾아 가서 살려 했으나 딸들의 구박이 심하여 다시 본가로 돌아오던 중 비기실 귓골에서 쓰러져 죽었다. 동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죽은 노파를 ane어주고 이골을 할미골이라 불렀다. 그 할머니 무덤에는 지금도 해마다 할미꽃이 핀다고 한다. 우수골·우곡(愚谷)·독지곡(獨池谷) 村) 옛날에는 獨池谷이라 하였으며 마을 뒤편에 땀띠에 특효가 잇는 약수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우수골 또는 愚谷(우곡)이란 동명은 자기 洞里(동리)를 낮추며 他洞(타동)을 높인다는 뜻에서 유래된 동명이라 한다. 맴정·매암정(梅岩亭) 村) 옛날에 海岩(해암) 孫興慶(손흥경)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으며 이 사람이 늘 큰 바위 위에 앉아서 낚시를 즐겼으며 그 바위에 정자를 짓고 자기의 號를 따서 梅岩字(매암자)이라 했다 孫興慶(손흥경)의 후손들이 지금도 보계리의 불바위라는 동네에 살고 있다. |
林谷里(임곡리) 숲실·곰마·임곡(林谷) 村) 본래 順興郡(순흥군) 봉양면의 지역으로서 숲이 울창하였으므로 숲실 또는 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임곡 1里(리)로 개편되었다. 고마을·고촌(庫村) 村) 소백산맥을 등진 山村으로 1914년 전 봉양면 당시 면소재지에 인접한 부락으로 面倉庫(면창고)가 있어 고마을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농외소득을 많이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한밤실·새골·소골·대율(大栗) 村) 밤나무가 많고 밤의 생산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奉化(봉화) 琴氏(금씨)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수 가구만 남고 그 외는 淸州(청주) 鄭氏(정씨)등 각성이 우거하고 있다. 쇳골·샘골 村) 임곡(林谷) 2里(리)에서 파생된 산촌이며 소백산맥을 뒤로하여 초원이 좋아 養畜(양축)의 적지로서 가축의 放牧(방목)으로 생계를 이은 몇 가구의 농가가 산재하고 있었으나 6.25 동란 때 이주되었고 지금은 再入住(재입주)하여 담배·과수 등을 재배하고 있다. 덕거리(德巨里) 村) 한밤실을 거쳐 마구령 입구 산록에 자리 잡은 수 가구의 路邊(로변) 주막촌으로서 南大里(남대리)· 寧越(영월)·의풍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이라 옛 행인들이 내왕 중 여기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두들·당고 村) 庫村(고촌) 北方(북방) 1km 지점의 소백산맥 깊숙한 곳에 몇 가구의 火田民(화전민)들의 보금자리였으나 6.25 동란 전 공비 소탕 작전 때 소개되었으며 현재는 폐동이 되고 자취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웃숲실·상임곡(上林谷) 村) 林谷(임곡) 1里(리) 本洞(본동)으로 옛날 봉양면 당시에는 면 소재지였기에 편의상 上下 부락으로 구분되어 불려졌을 뿐 행정 동리는 한 마을로 숲실이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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