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리
원래 연천현 현내면 지역으로, 조선시대 연천현의 관아가 있어 읍내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이 군내면으로 개칭되면서 군내면 읍내리가 되었다. 1945년 해방 직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4년 1월 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개의 행정리, 2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천말 : 솟대봉 북쪽에 있는 마을. 군자산에서 발원하는 작은 개천의 옆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아랫말 : 연당자리 부근에 있는 마을.
◇남창말[南倉洞] : 솟대봉 서쪽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 당시 연천현에 딸린 창고인 남창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광무읍지(光武邑誌)』 창고조에 “남쪽 창고가 2칸이다 (南倉十二間)”라고 간략한 규모만 적혀 있다. 한국전쟁 전에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윗말 : 남창말 북쪽에 있는 마을.
◇윗샘골 : 연천향교 터 밑에 있는 마을. 두레박 우물이 있던 곳이다.
가재울고개[加尺峴, 邑峴] : 읍내리에서 현가리의 가재울로 넘어가는 고개.
관사터 : 아지봉 동쪽에 있던, 조선시대 연천현감의 관저. 현재는 민가가 있다.
괴모골고개 : 며치골고개 북쪽에 있는 고개.
괴목골고개 : 읍내리에서 군남면 옥계리로 넘어가는 고개. 현재 90번 군도가 나 있다.
구읍논 : 망곡산 서쪽에 있는 고래실논. 읍내리에서 가장 좋은 논으로 봄에 한 되의 종자를 심어 한 섬의 수확을 거두었던 논이었다 한다.
기우제터 : 읍내리 서쪽, 아지봉 산록에 있던 기우제 터. 조선시대에 가뭄이 심하게 들면 읍내리 주민들이 기우제를 올렸던 곳이라 한다.
매봉 : 읍내리와 현가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먹적골고개 : 읍내리에서 차탄리 지혜동의 막바지로 통하는 고개.
며치골고개 : 읍내리에서 군남면 선곡리의 며치골로 통하는 고개. ‘작은고개'라고도 한다.
부군터 : 매봉 남쪽, 부군나무가 있던 자리. 한국전쟁 전까지 무당들이 부군굿을 올렸던 곳이라 한다.
샘고개 : 괴목골고개 서쪽에 있는 고개. 90번 군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이 고개를 넘어 군남면의 옥계리로 넘어다녔다.
솟대봉 : 읍내리에 있는 산.
쇠공터 : 아지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어떤 소경이 약수를 마시고 눈을 떴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아랫샘골 : 김잠(金岑)의 묘가 있는 골짜기.
아지봉(阿只峰) : 읍내리 서쪽에 있는 봉우리. 연천현의 진산인 군자산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군자산에 비하여 작은 봉우리라 하여 ‘작은'*‘낮은'의 뜻을 가진 ‘아지'에서 음을 취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연당자리 : 솟대봉 아래에 있던 연못. 예전에 연꽃이 많이 자생했다 하여 불리던 이름으로, 지금은 논으로 변해 있다.
연천관아터 : 솟대봉 북쪽에 있던 조선시대 연천현의 관아 터. 『광무읍지』에 실린 관아의 규모는 79칸의 0동 건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10년 일제 강점 후 철도가 부설되면서 차탄리 지역으로 군청사가 이전하자 관아 건물은 철거되었고 지금은 농경지와 민가로 변해 있다.
움풍배미 : 연천관아터 옆에 있는 움푹 들어간 논.
지골고개[智惠峴] : 지칫골에서 차탄리 지혜동으로 넘어다니는 고개.
지칫골 : 핑구너머 서쪽에 있는 골짜기.
축동자리 : 읍내리 개천말 부근에서 효자문까지 남북으로 있던 축동나무 자리.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읍내리의 지형은 차탄천으로 인하여 재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 되어, 이 곳에 지기를 돕는 수구막이 역할을 하도록 축동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이 곳에 있던 밤나무, 전나무 고목들을 모두 베어 버렸다.
큰고개 : 읍내리 남창말에서 군남면 선곡리로 넘어다니는 고개.
핑구너머 : 지칫골 남쪽에 있는 산등성이. 읍내리에 연천현의 관아가 있었을 때 얼음을 보관하던 저장고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효자문(孝子門) : 연천관아터 동쪽에 있던 효자문 자리. 효자문에 얽혀있는 사연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차탄리
원래 연천현 현내면 지혜동리 지역인데,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혜동리를 차탄리로 명칭을 변경하고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954년 1월 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4개의 행정리, 35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고, 군청*경찰서 등의 주요 행정 관청이 위치하는 연천군의 중심지이다.
◇앞시울[前谷] : 차탄리 현충탑 서쪽에 있던 마을. 차탄리에서 가장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골[智惠洞] : 해골 북쪽에 있는 마을. 지혜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해골[鶴洞] : 군자산 동쪽에 있는 마을. 유래에 대해서는 예전에 동막리 부물현에 곡성 임씨가 선대묘를 쓰려고 땅을 파니 학이 나와 이 곳으로 날아왔다 하여 해골이 되었다는 설과, 지형이학의 모습과 닮았다 하여 해골이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한국전쟁 전에는 곡성 임씨(谷城任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가마터 : 농사시험장 남쪽에 있던 가마터.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인들이 세운 벽돌공장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공굴다리 : 차탄천에 있는 경원선 철교의 옛 이름. 교각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는데 ‘공굴'로 어휘가 변하여 불리고 있다.
군자산(君子山) : 높이 327.8m.
꽃자봉 : 봉화봉 동쪽에 딸린 조그만 봉우리.
농사시험장자리 : 차탄천 동쪽의 3번 국도 옆에 있는 농사시험장.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후 지금까지도 연천군의 농사시험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덕녕이[德寧谷] : 봉화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덕녕이등 : 군자산 남쪽에 있는, 군남면 삼거리와 경계가 되는 산등.
망곡산(望哭山) : 연천역 서쪽에 있는 둥근 산. 구한말 고종과 순종의 국상 때 관내 유림과 주민들이 이 산에 올라가 궁궐 쪽을 바라보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안타까워 하며 통곡하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연천읍의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봉화봉(烽火峰) : 군자산 남쪽에 있는 봉우리. 높이 244m. 예전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를 올렸다고 하며, 지금도 봉수지의 유구가 남아 있다.
뽕나무거리 : 연천군청 남쪽에 있던 밭. 일제강점기 때 잠업을 장려하여 이 주위 모두가 뽕나무밭이 조성되었던 곳이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성지골구럼 : 차탄리 봉수지 동쪽에 있는 골짜기.
수레여울, 수레울[車灘] : 공굴다리 북쪽의 장진천에 있는 여울. 도당골에 은거했던 고려 진사 이양소를 만나기 위하여 연천으로 친행하던 태종의 어가(御駕)가 이 여울을 건너다 빠졌다 하여 ‘수레여울'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다.
연천역(漣川驛) : 망곡산 동쪽에 있는 경원선 역. 한국전쟁 전 북한이 남침 준비를 위하여 설치했다는 탱크 하역시설이 남아 있다.
용봉(龍峰) : 봉화봉 남쪽에 있는 봉우리. 군남면 왕림리와 경계가 된다.
제사공장터 : 현재 연천읍 시가지 시장거리에 있던 제사공장. 일제강점기 때 건립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다. 지금은 2*7일에 연천장이 선다.
본래 강원도 철원도호부 관인면의 하리(下里) 지역인데, 906년(광무 0)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의하여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부곡리라 하였으나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954년 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983년 2월 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포천군에 편입되었다가, 989년 월 일 「대통령령」 제12577호에 의하여 연천읍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부곡리는 한국전쟁 이후 전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으로 편입된 곳으로 민간인이 살지 않아 행정리와 반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문지터[文址基] : 다락터 서쪽에 있던 작은 마을.
◇샛말 : 다락터와 문지터 사이에 있던 작은 마을.
◇안터[內垈] : 가마봉 남쪽에 있던 마을.
◇점말[店村, 沙器幕] : 두태봉 북쪽에 있던 마을. 조선 초기에 번성했던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던 곳이라 한다.
◇지장골[地藏洞] : 점말 북쪽에 있던 마을. 신라 말에서 조선 초까지 지장사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칡목이[葛項洞] : 가마골 동쪽의 벌판에 있던 마을. 예전에는 칡덩굴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인동 장씨(仁同張氏)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가는골 : 큰농바위 동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가마골[釜谷] : 재인폭포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예전에 골짜기 안에 숯가마가 많았기 때문에 가마골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원래는 ‘크다'는 뜻의 고어 ‘감'이 골과 합하여 ‘감골'이 되었다가 매개모음 ‘ㅇ'를 개입시켜 ‘감의골'이 되어 ‘큰 골짜기' 라는 뜻인 ‘가마골'로 명명되었다. 이것이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곡(釜谷)'으로 표기된 것이다. 또한 가마골은 재인폭포에서 다라미고개까지의 ‘큰골'과 그 왼쪽인 ‘작은골'을 합친 전체의 큰 골짜기 이름이기도 하며, 한국전쟁 전에 전주 이씨들이 살았고, 관인면이 철원군에서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최초의 관인면사무소가 설치된 곳이기도 했다.
가마봉[釜峰] : 재인폭포 동쪽에 있는 가마처럼 생긴 바위 봉우리. 높이 282m.
가마소[釜沼] : 재인폭포 위에 있는 소. 가마솥처럼 동그랗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가치목[加齒項] : 큰골과 지장골 사이에 있는 목.
가치목골[加齒項谷] : 원적사지 동쪽, 가치봉 밑에 있는 골짜기.
가치목골 : 뒷골 북쪽, 가치봉 쪽으로 있는 골짜기.
가치봉(加齒峰) : 가치목 남쪽에 있는 바위 봉우리. 치아처럼 생긴 길고 큰 바위들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개옻약수 : 문지터 남쪽에 있는 한탄강 절벽의 약수. 많은 물이 폭포처럼 장관을 이루며 떨어지는 약수폭포는 한국전쟁 전까지도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고 한다.
검은박골 : 지장사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과바위[過岩] : 큰골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예전에 다라미고개로 올라가자면 바위 밑을 모퉁이를 지나가듯 돌아가야 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바위 옆으로 직선의 비상도로가 나 있다.
과바위골짜기 : 과바위 동쪽에 있는 골짜기.
구들떼기 : 두태봉 동쪽에 있는 둔덕. 한국전쟁 전까지도 이 곳에서 나는 구들돌을 주변 마을에서 많이 캐 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나막골 : 외나무다리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낫가리바위[露積岩] : 가마봉 남쪽, 한탄강변에 있는 큰 바위. 모양이 곡식을 쌓아둔 노적가리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다라목골 : 지튼골 북쪽, 다라미고개에 딸린 골짜기.
다라미고개 : 가마골에서 신서면 내산리 절골로 통하는 높고 큰 고개. 고구려어 계통에 많이 나오는 산의 옛 음인 ‘달'이 달아 > 다라로 음이 변하는 과정에서 산의 원음인 ‘뫼'가 발음 습관에 따라 변한 ‘미'를 합하면서 달뫼가 다라+미+고개로 합성되어 ‘다라미고개', 즉 ‘높이 솟아 있는 산 사이로 있는 고개'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다라미현(多羅美峴)'으로 한자 표기가 되어 있다.
다락터[樓垈] : 한탄강 북쪽 고려고분군 주위에 있던 마을. 예전에 누각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원래의 의미는 산의 고어 ‘달'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종자산*가마봉*보장산 등이 주위에 위치하고 있는 보개산 남쪽의 산촌으로, 어휘가 변하여 오늘의 다락터로 불리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달터 > 달아터 > 다라터 > 다락터. 한국전쟁 전에는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덜거렁바위 : 지장동 입구에 있는 바위. 높이 약 8m. 바위 상단에 천연적으로 올려져 있는 바위 모양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같이 들려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돌고개 : 과바위 북쪽에 있는 고개. 원적사지까지 오르는 일부 구간에 돌이 많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두태봉(頭泰峰) : 칡목이 동쪽에 있는 봉우리. 정상 부분이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뒷골 : 점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명지미기 : 무당소 서쪽에 있는 골짜기.
무당소 : 작은골 중앙에 있는 소.
문바위골 : 큰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
병풍바위[屛風岩, 赤壁] : 옹장골 안에 있는 병풍처럼 생긴 큰 바위. 바위 색깔이 붉어 ‘붉은벽낭'으로도 불리며, 한국전쟁 전까지도 호랑이가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북대(北臺) : 삼형제바위 서쪽에 있는 봉우리. 포천군 관인면 중리와 경계에 있다.
불당골[佛堂谷] : 명지미기 북쪽에 있는 골짜기. 암자가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불선바위골 : 옹장골 안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가 부처가 서 있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사기막고개[沙器幕峴] : 부곡리와 포천군 관인면 중리 경계에 있는 고개. 사기점으로 넘어다니는 고개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사기터골 : 백자요지 옆에 있는 골짜기. 조선 후기 경영되었던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사태나무골 : 문바위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산제당터 : 해골 북쪽에 있는 산제 터. 한국전쟁 전까지 가마골 주민들에 의해 매년 정월 초에 소를 잡아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특히 이 곳에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원인 모르게 부러져 전쟁을 예고한 영험한 나무였다고 한다.
삼형제바위[三兄弟岩] : 지장동 북쪽에 우뚝 솟은 세 개의 바위. 마치 삼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것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새 대기 : 가치봉 남쪽에 있는 넓은 평지. 억새풀이 많이 자라는 곳이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성령(城嶺) : 작은골에서 동막리 범골로 넘어가는 고개. 동막리산성의 뒤에 있는 고개가 된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성지골 : 큰골 입구에 있는 골짜기.
수내미 : 큰골 가장 북쪽에 있는 골짜기.
숫돌바위 : 과바위 위에 숫돌처럼 생긴 바위.
옹장골 : 지장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외나무다리골 : 과바위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이 골짜기 입구에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일방아골 : 무당소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골 : 가마골 안에서 서쪽으로 있는 큰 골짜기.
작은농바위골, 작은은바위골 : 성지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 안에 농짝 같은 큰 바위가 있다.
작은두묵골 : 점말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재인고개[才人峴] : 재인폭포에서 칡목이로 넘어가는 고개.
재인폭포(才人瀑布) : 가마골 입구에 있는 폭포. 높이 8.5m. 이 폭포에는 고을 원님의 탐욕으로 인한 어느 재인의 죽음과 그 아내의 정절을 담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여지도서』는 다른 전설을 싣고 있는데, 옛날 어느 원님이 재인 아내의 미색을 탐하여 현재의 재인폭포에서 재인으로 하여금 광대줄을 타게 한 후 줄을 끊어 죽게 하고 재인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였다. 그러나 절개 굳은 재인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원님의 코를 물어 뜯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 후부터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코문리'라 칭하게 되었으나 차츰 어휘가 변하여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같은 책 연천현 산천조에는, “재인폭포는 연천관아에서 동쪽으 로 20리 거리인 원적사(圓寂寺) 동구에 있는데, 벽립해 있는 양 절벽 사이로 수십 길 높이를 수직으로 흐르며 떨어진다. 옛날에 재인이 마을 사람과 함께 폭포 아래에서 놀다가 그 마을 사람 아내의 미모가 뛰어난 고로 흑심을 품은 재인이 자기 재주를 믿고 그 자리에서 장담하며 말하기를 ‘이 절벽 양쪽에 외줄을 걸고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은 재인의 재주를 믿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 아내를 내기에 걸게 되었다. 잠시 후, 재인은 벼랑 사이에 놓여 있는 외줄을 타기 시작하는데, 춤과 기교를 부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평지를 걸어가듯 하자, 재인이 반 정도 지났을 때 마을 사람이 줄을 끊어 버려 재인을 수십 길 아래로 떨어져 죽게 하였다. 이 일로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재인폭포는 보개산과 한탄강이 어울리는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맑은 물로 인하여 사시사철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 명승지이다.
절터밭골 : 지장사지 옆에 있는 골짜기.
종자산(種子山) : 두태봉 동쪽에 있는 산. 높이 642.8 m. 포천군 관인면 중 2리와 경계에 있다. 아주 옛날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산 정상이 간장종지[種子] 만큼 남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튼골 : 원적사지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찍쩍골 : 과바위 서쪽에 있는 골짜기.
찬물내기 : 병풍바위 옆에 있는 좁은 골짜기. 얼음처럼 차가운 약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초막골[草幕谷] : 가는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초막이 있었다 한다.
총대여울 : 안터와 포천군 창수면 신흥리 사이에 있는 한탄강 여울.
큰고개 : 지장골에서 포천군 관인면 중리의 큰골로 넘어가는 고개.
큰골 : 재인폭포에서 다라미고 개 정상까지 있는 큰 골짜기.
큰농바위, 큰은바위골 : 작은농바위골 위에 있는 골짜기.
큰두묵골 : 두태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퉁막골 : 작은골 안에 있는 골짜기.
퍼렁소 : 원적사지 남쪽에 있는 소. 약 5m 높이의 퍼렁소폭포 밑에 있는 이 소는 한국전쟁 전에 가마골 내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곳으로, 이 소에 명주실을 담그면 고문리 한탄강에 있는 귀웅소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근에 이 곳은 도로가 나면서 메워져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해골 : 재인폭포 서쪽에 있는 골짜기.
향로봉(香爐峰) : 지장동 동쪽에 있는 봉우리. 높이 616m. 모양이 향로와 같이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향로봉골짜기 : 문바위골 남쪽, 향로에 딸린 골짜기.
홀짝골 : 퉁막골 위에 있는 골짜기.
상리
본래 연천현 동면의 지역으로 ‘웃골'이라 하였다. 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좌찬리(左贊里)라 하였다가,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웃골'에서 이름을 따 ‘상리'라 하고 군내면에 편입되었으나, 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954년 1월 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20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터동[庫垈洞] : 신망리역 북쪽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 이 부근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보관했던 연천현의 읍창(邑倉)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연주 현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다방거리(茶房巨里) : 경원선 동쪽에 있는 마을. 1954년 수복 후 연천읍 관내에 최초로 다방이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새능 : 신망리역 서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곳에 큰묘를 썼다 하여 새능으로 불리우고 있으나 현재 묘는 확인되지 않으며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신망리(新望里) : 경원선 서쪽에 형성된 시가지. 이 곳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954년 5월 피난민 정착 지역으로 지정되어, 미군 제7사단에서 3만 평의 부지 위에 세대당 330㎡의 대지에 59.4㎡ 크기의 목조 가옥 00호를 건립하여 선착순으로 피난민을 입주시켰다. 당시 연천읍에서 가장 먼저 입주가 시작된 이 곳을 미군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라는 뜻의 신망리(New Hope Town)로 명명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웃골[上洞] : 밤골 위에 있던 마을. 상리의 유래가 되는 곳이다.
◇쟁골[齋宮洞] : 마정승 묘 서쪽에 있던 마을.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333∼1367)의 황후였던 기황후(奇皇后)의 묘와 재실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까지 한양 조씨(漢陽趙氏)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좌찬이[左贊洞] : 새능 북쪽에 있던 마을. 조선시대에 의정부 좌찬성 벼슬을 한 우계 이씨(牛溪李氏)가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큰밤골[栗洞] : 필리핀군 참전비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밤나무가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한국전쟁 전에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황해촌(黃海村) : 닭운이 남쪽에 있는 마을.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닭운이[鷄鳴洞] : 아랫쟁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묘를 쓰려고 땅을 파니 닭이 울며 나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산 안에 있는 마을' 이다. 산은 고어 ‘닫'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닫'이 지금에 와서는 그 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드물고 연철 음절과의 관계나 다른 낱말과 유사성으로 인하여 ‘닷',‘닥', ‘닭'등으로 옮겨간 것이 대부분인데, 닭운이의 예에는 닭(山) + 안(內)> 다간 > 다그니> 달그니> 닭운이로 변한 것이다.
당이네구럼 : 솟을봉 옆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당인(唐人)이 살았다고 한다.
동묘고개[東墓峴] : 원골에서 와초리의 능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동가(東家)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동이정골 : 망골 남쪽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동이우물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둠뫼산 : 좌찬동 중앙에 있는 둥근 산.
*등정골, 된정굴 : 마정승 묘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망골 : 신망리역 북쪽에 있는 골짜기.
*미래고개 : 필리핀군 참전비 앞에 있는 고개. 현재 324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미래골 : 신망리역 남쪽에 있는 골짜기. 미래고개 옆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솟을봉 : 좌찬이 북쪽에 있는 봉우리. 중면 합수리와 경계를 이루며, 이 곳을 기점으로 하여 군자산과 옥녀봉으로 양 산맥이 갈라진다.
*시랑말고개 : 쟁골에서 중면 합수리의 시랑말로 넘어다니는 고개. 시랑말에서는 ‘쟁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랫쟁골 : 닭운이 서쪽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재궁동의 아래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외산부리 : 솟을봉에서 재궁동으로 뻗어 내려온 산부리.
원골[院谷] : 둠뫼산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조선시대에 관원과 나그네들이 이용하던 국영 여관인 원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당시에는 한양과 함경도를 잇는 역로(驛路)가 이 곳을 거쳐 철원도호부로 연결되었다.
원모루[院隅] : 현 상리초등학교가 위치한 곳의 옛 이름으로, 옛날 원의 앞에 있는 모퉁이. 한국전쟁 전에는 장승과 주막이 있었으며, 부근에는 연주 현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현가리
원래 연천현 동면 가척리(加尺里) 지역인데,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척동과 현사동을 병합하여 현사동의 ‘현' 자와 가척동의 ‘가' 자를 따서 현가리라 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954년 1월 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개의 행정리, 10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무사리[玄沙洞] : 도당골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가재울[加尺洞] : 벼락바위 부근에 있던 마을. 한자 표시인 ‘가척동'은 가장자리의 사투리인 ‘가새'나 ‘가쟁이'를 한자로 옮겨 쓰는 과정에서 실제의 뜻과 연관이 없는 ‘加尺' 또는 ‘佳尺'으로 표기한 것이다. 즉, 가재울은 차탄천변의 ‘가장자리 언덕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국전쟁 전에 이 마을에는 진주 강씨(晋州姜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수복 이후에 민간인 입주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
◇도당골[陶唐洞], 청화동(淸華洞) : 가무사리와 가재울 사이에 있는 마을. 조선 개국 초 고려 신하 이양소(李陽昭, 367∼?)가 숨어 지냈던 곳이다. 그의 높은 지조를 후세 사람들이 도연명에 비견할 만하다 하여 도연명이 은일한 곳인 ‘도당'에서 뜻을 따와 도당동이라 이름지었고, 조정에서 내려준 그의 시호인 ‘청화'에 연유하여 청화동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마을이다.
귓논 : 절텃골 앞에 있는 논. 귀가 진 모서리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긴등 : 현가리와 군남면 옥계리의 경계가 되는 긴 산등.
매봉 : 현가리와 읍내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매 사냥을 했던 곳이라 한다.
벼락바위 : 가재울 중앙에 있는 바위. 예전에 연천 지방에 심한 가뭄으로 기아에 허덕이던 때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구걸을 다니던 한 가족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바위에서 어린 자식을 죽인 일이 있었다. 마침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부모는 벼락에 맞아 죽고, 넙적한 모양의 바위는 지금의 모습처럼 깨져버렸다 한다.
선덩어리 : 도당동 중앙에 있는 둥근 산.
쇠주골[巢鳥洞] : 도당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숫돌봉 : 가재울 서쪽, 군남면 옥계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안골[安谷] : 도당골과 가무사리 사이에 있는 작은 골짜기.
읍고개 : 가재울에서 읍내리로 넘어가는 고개.
잣나무골 : 도당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잣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절텃골[寺垈洞] : 가재울과 도당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나 문헌에 상세하게 전해 오는 것이 없고, 다만 빈대에 의해서 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올 뿐이다. 현재 절이 자리했던 곳에 민가가 들어섰으며 그 옆에는 이 절에서 사용했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 전에는 청풍 김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연천읍 식수를 관리하는 상수도사업소가 있다.
지당골 : 가재울 중앙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지당암'이라는 절이 있었다는 설과 산제당이 있었다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해 오는 곳으로, 현재 그 터에서는 소량의 와편이 출토된다.
청화산(淸華山) : 가무사리 서쪽의, 군남면 옥계리와 경계가 되는 산. 『순천이씨세보』에 의하면, 도당골에 은거했던 이양소가 매일 이 산에 올라 송악을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고려조의 신하로서 절개를 지킨 곳이라 하여, 조정에서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이 산을 “백이의 맑은 기풍과 희이의 빛나는 산이라 (伯夷之淸風希夷之華山)”는 뜻에서 두 자를 취해 ‘청화산'이라 명명했다 한다.
옥산리
원래 연천현 동면 지역으로 마을 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있는 둥근 산이 있어 ‘오미'라 불리우던 곳이었으나, 이의 한자 지명을 ‘玉山'으로 표기함에 따라 오늘날의 옥산리로 불리우게 되었다.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에서 군내면에 편입되었고, 945년 해방 이후에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954년 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6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지말 : 오미 남쪽에 있던 마을. 지금은 군 사격장으로 이용된다.
◇당뒤[堂後洞] : 당뒤산 아래에 있는 마을. 예전에 신당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불계동(佛溪洞) : 모정산 남쪽에 있는 마을.
◇안터[內垈] : 망두산 남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조선 후기 이 곳에 은거했던 병조참판 정래주(鄭來周, 680∼1745)의 후손인 동래 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오미[五味洞] : 당뒤산 남쪽에 있는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파평 윤씨 집성촌이었던 곳이다. 마을 중앙에 따로 떨어져 있는 당뒤산으로 인하여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이라는 뜻의 ‘오미'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五味'로 표기하였다고 한다. 현 옥산리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가장골산 : 모정산 남쪽에 있는 산.
감투봉 : 불견이고개 남쪽에 있는 봉우리. 동막리와 경계가 된다.
개새낳터 : 안터 남쪽에 있는 터.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골밭 : 소반번지 서쪽에 있는 밭. 전염병이 돌 때 죽은 아이들을 이 곳에 버려 항시 여우가 들끓었던 곳이라 한다.
관산이 : 다래우물 동쪽에 있는 골짜기.
관산터 : 오미 마을에 있던 관선정 터. 『여지도서(輿地圖書)』 연천편 고적조에는, 이 정자에 대하여 “관선정은 연천관아에서 동으로 0리 거리에 있는데,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예전에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 하며 그 터가 남아 있다 (觀仙亭在縣東十里諺傳古有仙人游此云有遺基)”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전쟁 전에는 이 주위에 밤나무, 소나무 고목들이 우거져 있어 오미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였으나, 지금은 군 사격장이 들어서 있다.
관자골 : 사기막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군논 : 관산터 옆에 있는 논. 옥산리에서 가장 크다 하여 ‘큰논'이라 불리워오다 ‘군논'으로 어휘가 변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귀웅못 : 오미 남쪽의 차탄천변에 있는 못. 소의 구유와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은 매몰된 상태이다.
동막리
원래 연천현 현내면 지역으로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내면에 편입되었고 945년 해방 직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954년 11월 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선 초부터 요업이 번창했던 곳으로 ‘독막[陶幕, 甕幕]'으로 불리다가, 차츰 어휘가 변하여 ‘동막'으로 굳어져 ‘동막리(東幕里)'라 하였다. 현재 2개의 행정리, 4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막골[東幕洞] : 부물현 동쪽에 있는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둔치 : 동막골 동쪽 둔덕에 있는 마을.
◇망근도리 : 동막리 태실 옆에 있는 마을. 지형이 망건처럼 생겼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벙골[富興洞] : 자라바위 동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강릉 김씨(江陵金氏)가 살던 마을이었다.
◇부물현[復武夷洞] : 임장서원 터 남서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중국의 주부자(朱夫子)가 생장한 무이촌과 흡사하다 하여 ‘또 하나의 무이촌'이라는 뜻의 부무이동으로 명명하였다 한다. 713년(숙종 39)에 사액된 임장서원은 이러한 이유로 주자를 봉향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전에는 곡성 임씨가 큰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삼봉동(三峰洞) : 중수꾸미 북쪽에 있던 마을. 세 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샘골[泉谷] : 태봉 남쪽에 있는 마을.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이 끝난 후 마을이 새로 들어섰다고 한다.
◇왜둔치[瓦屯洞] : 여내골 동쪽에 있던 마을.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기와말'이라고도 불리웠으며, 현재는 군 유격장이 있다.
가마소 : 독조골에 있는 소. 모양이 가마솥 같다고 한다.
감투봉 : 수리봉 북쪽에 있는 봉우리.
기차바위 : 가마소 동쪽에 기차처럼 생긴 바위. ‘줄바위'라고도 한다.
낚시내골 : 둔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어떤 사람이 이 곳에서 낚시를 즐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너벅소 : 풍혈 북쪽, 아미천에 있는 넓은 소.
도장골 : 태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도장 주머니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독조골 : 동막동에서 새매기까지 있는 큰 골짜기.
동이점모퉁이 : 삼봉동 남쪽에 있는 모퉁이. 옛날에 동이를 굽던 요지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등정거리 : 동막리산성에서 샘골로 뻗어 내려온 산등.
반나저리소 : 너벅소 아래에 있는 소.
밤나무골 : 자가골 맞은 편에 있는 골짜기.
버섯바위 : 독조골 중앙에 있는, 버섯처럼 생긴 바위.
벌바위골 : 청소년수련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어떤 사람이 벌을 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벌봉 : 동막동 동쪽에 있는 바위 봉우리. ‘덜봉'이라고도 한다.
범바위 : 풍혈 서쪽에 있는 바위. 부엉이집이 있다 하여 ‘벙바위'로도 불리운다.
법화골[法華洞] : 불견이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
비아골 : 임장서원지 동쪽에 있는 골짜기.
새매기 : 독조골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
서낭댕이 : 용수꾸미 동쪽에 있던 서낭당 터. 지금은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성재[城嶺] : 벙골에서 부곡리 가마골로 넘어가는 고개. 동막리산성의 뒤에 있는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수리봉 : 새매기 북쪽 옥산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높이 477m.
신주바위 : 왜둔치 남쪽, 아미천변에 수직으로 솟은 넓고 큰 바위.
아미천(峨嵋川), 동막골개울, 구곡천(九曲川) : 신서면 내산리의 고대산에서 발원하여 차탄천으로 합류하는 준용하천으로, 한국전쟁 전에는 동막리 입구에서 내산리 심원사까지 이르는 동안 열두 번을 곡류한다 하여 ‘열두구비 개울' 이라고도 불리웠다.
애기봉 : 샘골 남쪽, 통현리와 경계에 있는 작은 봉우리.
애미내벌[峨嵋川坪] : 부물현 남쪽에서 차탄천까지 펼쳐진 들. 아미천이 옆에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양금재봉(養金財峰) : 동막동 북쪽에 있는 뾰족한 봉우리. 높이 310m. 일설에는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지만 중국의 고부현 무이촌과 지형 조건이 흡사하다 하여 지명을 그대로 옮겨와 명명한 경우이다. 그러나 중국 무이촌의 한자표기는 현재의 표기와는 다른 ‘양금령(陽琴嶺)'이다.
여내골 : 감투봉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열두고팽이 : 수리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감투봉에서 뻗어 내린 산등이 열두 개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옛날소 : 서낭댕이 남쪽에 있는 소. 현재 매몰되었다.
오리터 : 임장서원 터 서쪽에 있던 큰 연못. 예전에는 오리들이 떼지어 놀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논으로 변해 있다.
오피고개 : 독조골에서 삼봉동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한국전쟁 이후 군부대에서 관측소(OP)를 세웠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옻우물 : 샘골 서쪽에 있는 약수. 옻오른 데 효험이 있다 한다.
용수꾸미 : 부물현 동쪽, 아미천에 있는 약 4m 깊이의 소. 큰 바위굴이 있어 이무기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왔으나, 현재는 매몰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자가골 : 양금재봉 동쪽에 딸린 골짜기.
자라바위 : 삼봉동 북쪽 아미천에 있는, 자라 모양의 큰 바위.
작은왜골 : 왜둔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장가물 : 용수꾸미 동쪽에 있던 우물. 장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이곳 약수를 매일 마셨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매몰되어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중수꾸미 : 삼봉동 앞에 있는 큰 소.
지당물 : 현 동막리 유원지에 있는 소. 예전에 이 곳에 절이 있어 이 소의 물로 매일 불전에 다례를 올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찬우꾸미[?翠巖] : 삼봉동에 있는 명승지. 『광무읍지』에는 “찬취암은 연천관아에서 동쪽으로 10리쯤에 있는 경승지로 층층이 쌓여 있는 크고 험한 바위들이 서로 마주 대하며 서 있는 형상인데 일명 ‘삼봉암'이라고도 한다. 주위의 골짜기는 깊고 그윽한데 그 사이를 흐르는 아미천의 깊고 푸른 물은 바위 위에 피어난 많은 꽃들과 골짜기의 푸른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경치는 가히 선경이라 할 만한 곳이다. 또한 이 곳에는 심한 가뭄이 들면 연천현감이 보개산에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단이 있다(?翠巖在縣東十里許層巖鼎峙一名三峰巖 洞壑深邃溪潭湛泓巖花澗松景致殊絶有祈雨壇)”라고 적혀 있다. 또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연천현감직에 있었던 윤두수가 이 곳의 경치에 매료되어 ‘찬취암'이라 명명했다는 기록도 있다(?翠巖在寶盖山上高聳蒼翠通望遠近本朝尹斗壽縣 監時遊其上名之). 이밖에 조선 후기 연천현감을 역임했던 신유한(申維翰)의 문집인 『청천집(靑泉集)』에 있는 「찬취암기(?翠巖記)」*「보개산천기우문(寶盖山川祈雨文)」 등의 기록에도 이 곳에 대하여 상세히 나타나 있다. 최근에는 개발되어 많은 피서객이 찾아오는 유원지로 자리잡았다.
큰골 : 동막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큰왜골 : 왜둔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왜골에 상대되는 지명이다.
풍혈(風穴) : 동막동 남쪽에 있는 천연 바위굴. 전체 깊이 6m, 높이 2.2m. 무더운 여름철에 얼음이 녹지 않을 정도로 찬 공기가 흘러나오고, 반대로 겨울철에는 그 주위에 얼음이 얼지 않고 따뜻한 김이 솟아오르는 기현상을 보이는 곳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곳에다 잠종(蠶種) ,000여 매를 저장했다고 한다.
피묵골 : 벌바위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항막술 : 양금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항막골'으로도 불리운다.
호랭이굴 : 자가골 남쪽에 있는 바위굴. 예전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한다.
고문리
원래 연천현 현내면 무수동리 지역이었는데,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무수동리를 고문리로 개칭하고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13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래동 : 장승모루 동쪽에 있는 마을.
◇고문리[古文洞] : 토토봉 동쪽에 있는 마을. 고문 2리의 중심지이다.
◇느즌모루 : 아랫삼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낮은 모퉁이'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청산면 장탄리에 있는 풀무산과 연관시켜 대장간의 연모인 ‘모루'와 같다 하여 풍수지리설을 대입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한자로는 ‘만우동(晩隅洞)'으로 쓰여지고 있다.
◇무시울[無愁洞] : 아랫삼거리 동쪽에 있는 마을. ‘무수'*‘무시'의 땅이름을 가진 곳은 공통적으로 물과 관련이 있다. 물의 고어는 ‘'*‘'*‘뭇'*‘믈'로 발음과 표기가 되어 왔는데, 무시울의 어근은 ‘뭇'에서 찾을 수 있으며 뭇 + 울 = 뭇(의) 울 > 무울 > 무시울로 변한 것이다. 즉, 무시울의 뜻은 ‘마을 밖으로 한탄강이 크게 휘돌아 흐르는 곳'으로 풀이 되어야 하는데,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무수'로 표기한 것이다.
◇번드리[返道洞] : 고문초등학교 주위에 있는 고문 1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 들이 번듯하고 넓다 하여 ‘번 + 들'이 번들이 > 번드리가 되었으나, 한자로는 ‘반도동'으로 쓰여지고 있다.
◇오봉동(五峰洞) : 오봉사지 입구에 있는 마을.
가마봉[釜峰] : 오봉고개 동쪽에 있는 봉우리. 통현리와 경계가 되며 가마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귀웅소 : 가래동 남쪽, 한탄강에 있는 소. 소의 구유 모양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꽃창모루 : 무시울과 번드리 사이에 있는 산모퉁이. 어떤 사람이 이 곳에 선대 묘를 쓰고 주위에 진달래*철쭉*개나리 등의 꽃나무를 많이 심어, 매년 봄이 되면 만개한 꽃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낡은절골 : 오봉사지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일명사가 빈대로 폐사가 되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남봉고개[南峰峴] : 고문리와 통현리 사이에 있는 고개.
당재너머 : 오봉동에서 무시울로 넘어다니던 고개.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덕고개 : 아랫삼거리에 있는 고개.
무엄밭골 : 오봉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
복호낭 : 작은 토토봉 북쪽에 있는 긴 낭떠러지.
불탄소 : 번드리 동쪽, 한탄강에 있는 소. 현재 농업용수 취수장이 있다.
붉은덕고개 : 느즌모루에 있는 고개.
붉은데기[赤峴] : 느즌모루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 흙이 붉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삼거리 : 고문초등학교 남쪽에 있는 삼거리. 무시울*재인폭포*신답리로 가는 세 갈래 길이 된다.
선바위 : 수리봉 남쪽에 우뚝 서 있는 큰 바위.
수리봉 : 남봉고개 동쪽에 있는 봉우리.
썰래터 : 작은토토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아가바위골짜기 : 장승모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아랫삼거리 : 느즌모루 동쪽에 있는 삼거리 . 통현리*고문리*신답리로 갈라지는 길목에 해당된다.
안장봉[鞍峰] : 오봉사지 뒤편에 있는 봉우리. 안장 모양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연당(蓮堂) : 고문리 중앙에 있는 집.
오봉고개[五峰峴] : 오봉동에서 통현리의 건쟁이로 넘어다니던 고개.
원배미골 : 김계하(金啓河) 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토토봉 : 토토봉 동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
장승모루 : 진사래밭 북쪽에 있는 모퉁이.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진사래밭 : 번드리 동쪽에 있던 긴 밭.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토토봉 : 고문동 서쪽에 있는 두 개의 높은 봉우리. 높이 411.2m. 산이 특이하게 톡 나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허궁다리[虛空橋] : 오봉사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 큰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와초리
본래 연천현 동면(東面)의 지역으로 ‘기새'라는 마을이 있어 한자로 음을 빌어 와초리라 하였다.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내면에 편입되었고, 945년 해방 직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북한 관할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954년 1월 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개의 행정리, 6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부분의 지역이 민간인 입주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
◇거림동(巨林 洞) : 지경터 남쪽에 있는 마을.
◇기새[瓦草洞] : 도당말 동쪽에 있던 마을. 기와를 구웠던 곳이라 하여 ‘와초리'라 불리웠다고 하는데, 한편 이질 설사의 생약인 오이풀 또는 외동풀이 무성히 자라던 곳이라 한자로 의역하여 와초리로 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조선시대에는 내시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었으나, 한국전쟁 전에는연주 현씨(延州玄氏)가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도당말[都堂村] : 절고개 북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까지도 마을 뒤편 산록에 있던 큰 소나무에 매년 소를 제물로 마련하여 산제를 올렸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반남 박씨(潘南朴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도리말 : 박집산 북쪽에 있던 마을.
◇새말[新村] : 손맞이비냥산 아래에 있는 마을. 경원선 철도가 지나간다.
◇세류동(細柳洞) : 도당말 북쪽에 있던 마을.
◇지경터[地境垈] : 새말 남쪽에 있는, 와초리에서 가장 큰 마을. 신서면이 철원군에 속해 있었을 때 이 마을이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도신리와 와초리의 경계가 되는 차탄천을 선으로 하여 도신리 지역부터는 기후 차이로 인하여 보리농사가 안된다고 한다.
◇회옥골[懷玉洞] : 자작고개 아래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거림들 : 거림동 주위에 있는 들판.
국사봉(國師峰) : 장골 북쪽에 있는 봉우리. 높이 366m. 신서면 도신리와 경계가 되며 ‘망재'라고도 불리지만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능골[陵谷] : 동묘고개에 딸린 골짜기. 개녕군(開寧君)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능모루 : 도당말 북쪽에 있는 모퉁이. 개녕군 묘 앞에 있는 모퉁이가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동묘고개[東墓峴] : 능골에서 상리의 원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두투맥이 : 세류동에서 신서면 도신리의 보맥이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두드러졌다는 뜻의 ‘두투'와 장소라는 뜻의 ‘목'이 합쳐진 ‘두투목'이 ‘두투모기'를 거쳐 ‘두투매기(두투맥이)'가 된 이름이다.
박집산 : 거림동 서쪽에 있는 산. 예전에 궁궐에서 반남 박씨에게 하사한 사패지(賜牌地)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지금도 박씨의 묘가 많다.
북파지 : 회옥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북쪽으로 패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사관머루 : 박집산 북쪽에 있는 들판.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새배기논, 기새골논 : 새말 서북쪽의 긴 골짜기에 있는 고래실논.
새터산 : 능모루 뒤편에 있는 산.
선두밭골 : 회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손맞이비냥산 : 충현탑이 있는 조그만 산.
아래산골 : 회옥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안골 : 개녕군 묘 서쪽에 있는 골짜기.
요골 : 새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윗골[上洞] : 세류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피부병에 효험이 있는 옻물약수가 있다.
자작고개 : 회옥골에서 중면 합수리의 무조래로 넘어가는 고개. 예전에 이 고개 정상에 도둑과 호랑이가 들끓어 지나던 사람들이 자주 실종되었다고 한다. 깊숙히 스며들거나 졸아든다는 뜻을 가진 ‘잦다'라는 뜻에서 ‘자잦고개'라 불려지던 것이 차츰 변하여 자작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잔바다골 : 세류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한국전쟁 전에는 공주 이씨(公州李氏) 5가구가 살던 곳이다
장골[長谷], 긴골 : 회옥골에서 국사봉까지 이르는 긴 골짜기.
절고개 : 와초리 도당말에서 상리의 망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고개 중간 지점에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나, 지금은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진응달고개 : 장골과 윗골 사이에 있는 고개.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음지가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푸묵골 : 절고개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돈을 주조했던 곳이라 하여 ‘푸묵골' 또는 ‘풀무골'로도 불리운다.
회골 : 국사봉 남쪽에 딸린 골짜기.
통현리
본래 연천현 현내면 지역인데, 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현내면을 군내면으로 개칭하면서 통현리라 하여 군내면에 속하게 되었다. 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954년 1월 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2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쟁이[乾貞洞], 팔판서마을 : 통재 동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이전까지 강릉 김씨 25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곳으로, 조선 후기까지 8명의 판서가 배출되는 등 강릉 김씨의 권세가 하늘까지 닿을 정도였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군부대가 들어서 있고 민간인은 살지 않는다.
◇고포리 : 통현리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마을 앞 벌판에서 곡사포 부대가 주둔한 바 있다. 이후 마을이 형성되자 부대장이 곡사포 부대와 인연이 있다 하여 고포리라고 명명하였다. 현재 통현 2리 지역이다.
◇새말[新村] : 통재 북쪽에 있던 마을. 일제강점기 초에 새로 형성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통재[通峴] : 통현리와 동막리, 차탄리 경계에 있는 마을이자 고개. 현재 3번 국도가 나 있고, 한국전쟁 전에는 주변에 전주 이씨가 많이 살았다.
가래나무골 : 가사평에 있는 우묵한 골짜기. 예전에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가마봉[釜峰] : 건쟁이 동쪽에 있는 봉우리. 가마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고문리와 경계가 된다.
가사평(袈裟坪) : 통재 남쪽에 있는 넓은 들.
고돌이 : 김첨경 묘 남쪽에 있는 골짜기.
금장골고개 : 금장골에서 고포리로 넘어가는 고개.
금장골 : 통현리 지석묘 동쪽에 있는 골짜기.
남봉고개[南峰峴] : 통현리와 고문리 사이에 있는 고개.
능골 : 홈방골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강릉 김씨의 큰 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능안[陵內] : 김시환 묘 서쪽에 있는 골짜기. 회인현감 김종윤(金宗胤), 예조판서 김시환(金始煥) 등 강릉 김씨 문중의 큰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방메 : 김상익 묘 남쪽에 있는 골짜기.
배산[舟山] : 통재 서쪽, 차탄리와 경계에 있는 둥근 산. 높이 92.7m. 배가 물 위에 떠 가는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여지도서』에는 산 중앙에 깊은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확인하기 어렵다.
비석거리 : 새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 도로 옆에 조선 중기 전옥서봉사를 역임한 김득원(金得元)의 신도비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수달피굴 : 통재 서쪽, 장진천 절벽에 위치한 천연 굴. 한국전쟁 전까지도 수달이 서식했었다고 한다.
수리봉 : 건쟁이 남쪽에 있는 봉우리.
애기봉 : 김상성 묘 북쪽에 있는 봉우리.
오봉고개[五峰峴] : 건쟁이에서 고문리 오봉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위러지 : 새말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오로지'라고도 불리운다.
작은금장골 : 통현리 지석묘 북쪽에 있는 골짜기.
홈방골 : 고포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자료 인용] http://www.iyc21.net/_coun/01_yc/m09/a01_b09_c06.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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