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의 지명 유래
1. 가수동(佳水洞) , 가숫골
부처네, 발안 등지에서 오산으로 장을 보러오던 사람들이 쉬던 곳으로, "물(水)"이
"아름답다(佳)"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샘골"을 병합하여 "가수리(佳水里)"라 하였다 한다.
부처네, 발안 등지에서 오산으로 장을 보러 올 때 이곳에서 쉬면서 소에게 죽을 먹이던 곳이라 하여 "쇠죽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2. 가장동(佳長洞) , 가장골
"가장골"이라 하던 지명을 한자로 "가장리(佳長里)"라 부르게 된 것으로 그 뜻은 "가장자리"란 뜻이라 한다.
◆ 찬우물
조선조 7대 세종대왕이 몸에 난 종기 치료차 온양에 거동할 때 이곳을 지나다가
찬 물 맛을 보고 "찬우물"이란 이름을 붙었다고 한다.
3. 금암동(錦岩洞) , 금바위 , 검바위
이 마을 가운데는 잘생긴 바위가 있어 옛부터 이를 "금바위"라 불러 왔는데,
이를 "금암(錦岩)"으로 고쳐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 장군(將軍)터
금바위 서쪽 여계산(如鷄山)에 있는 터로서 조선조 선조(宣祖)때 이괄(李适)장군이 말을 달려 무술을 닦았다고 한다.
4. 궐동(闕洞), 구정말, 구정촌
조선조 17대 정조 16년(1792년), 이곳에 살던 공서린의 위폐를 봉인한 궐리사에
현액을 내린 일이 있는데, 이를 따라 "궐리(闕里)"라 부르게 되었다.
◆ 궁터
이 마을의 지형이 활 궁(弓)자처럼 되어있다고 하여 "궁터"라 하였는데, 그 뒤
"궁(弓)"보다는 "궁(宮)"이 좋다고 하여 궁터(宮垈)"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줒전, 대호밭
옛날 이곳에 대밭(竹田)이 있었다고도 하고, 또는 이곳의 산 모양이 큰 호랑이같다고 해서
"대호(大虎)밭"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새장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오산이 폐허가 되고, 오산천변에는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들이 생겼다.
따라서 이곳에 새로운 장이 섰다고 해서 "새장터"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5. 내삼미동(內三美洞), 안삼미실, 안삼미
조선시대 정조가 부왕인 사도세자가 뭍인 현융원(顯隆園)에 행차할 때 이곳 죽미령(竹美嶺)을
바라 보면서 "삼미"라 했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이 삼미(三美)가 되었다는 것이요,
내삼미(內三美)라는 마을은 삼미실(三美谷) 안쪽에 있다고 하여 "안삼미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죽밑
죽미령 밑에 있는 마을 이라하여 "죽밑"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능곡(陵谷), 능골
"안삼미"서쪽에 있는 마을로 사도 세자의 능(陵)이 있는 화산(花山)골짜기에 있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을 "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 이다.
6. 누읍동(樓邑洞) , 눕세 , 눕소
동네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이라는 데서 "누운 소"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누음소, 누읍새, 눕새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7. 두곡동(斗谷洞) , 말여울
옛날부터 이 마을을 "말여울(馬灘)"이라 불렀는데, 이 말과 비슷한 "두곡(斗谷)"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잿말
누읍 북쪽에 있는 마을
8. 벌음동(伐音洞), 버르미
이 마을 모퉁이에서 이상한 큰 소리가 나면 마을이 편안치 못하다고 하여, 이 소리를 없엔다는
뜻으로 "벌음리(伐音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9. 부산동(釜山洞), 가마뫼
이곳의 지형이 가마솥(釜)같이 생겼다 하여 "가마뫼"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釜山"이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10. 서랑동(西廊洞), 사랑이
200여년전 이 마을이 생겨날 때는 "사랑(沙浪)"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에는 서랑(西廊)이라 쓰기
시작했으나, 속명은 지금도 "사랑이"라고 부른다.
11. 서동(西洞)
◆ 서촌(西村), 서녘말
여들(초평:草坪)에서 가장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리(西里)"라고 부른 마을이 다시 동서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서촌(西村)"이라 부르며 "서녘말"이라고도 한다.
◆ 동촌(東村), 동녘말
이판서라는 사람이 한양에서 낙향하여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불려졌다고 하는데,
이곳을 "여야(餘野)"또는 "여들"이라고 한다.
12. 세교동(細橋洞), 잔다리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래 이 마을 앞 냇가에는 작은 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세교리(細橋里)"라 했고
우리말로는 "잔다리"라 부르고 있다.
◆ 큰말, 양짓말
세교리에는 3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큰 마을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도 "큰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건너말 , 월존
"큰말"의 동쪽 내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건너말"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오리골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날 이곳에는 "오리나무"가 많았다고한다. 그리하여 마을이름을 "오리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3. 수청동(水淸洞), 수청말
이곳에는 예날부터 밁은 물이 늘 솟는 샘터가 있어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이 물을 약수로 마시고 있다.
그리하여 이곳을 "수청리(水淸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예날에는 이곳을 "멸안"이라 하였는데, 그 뜻이 희미해 지자 발음이 비슷한 "명학"이라 하고
한자로는"오학(嗚鶴)"이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뜻은 "산의 안쪽 마을" 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 문시(文市)
이곳은 옛날 문시면(문시면)의 사무소가 있었던 곳 인데, 1914년 성호면과 통폐합되었는데도
아직도 노인들은 이 마을을 "문시(文市)"라 부르고 있다.
◆방곡(芳谷), 뱀골, 뱅골
옛날 이곳에 뱀이 많다고 해서 "뱀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한자로는 발음이 비슷한 "방곡(芳谷)"이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14. 원동(園洞), 원동골, 원동
옛 청호면 지역으로 오산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원래는 "원동(園洞)"이라 하던 곳이다.
◆ 당말(堂말), 당촌(堂村)
예날에 한 길손이 한양으로가는길에 배를타고 한강을 건너던중 예쁜 돌 하나가 배위로 튀어 오르자
이것을 가져다가 뒷산에 당집을 짓고 모셨다고한다. 그랬더니 이 돌이 어찌나 영험하던지 말을 타고
이 앞을 그냥 지나려하면 말의 발이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고한다.
◆ 밀머리
역말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이곳에 홍수가 지면 "물이 밀리는 머리쪽에 있다."고 해서 "밀머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신원리(新園里)
"원리(원리)"곁에 새로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신원리(新園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역촌(역촌), 역말
옛 청호역(靑好驛)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한양을 오가던 길손이 쉬어갈 수 있는 주막과 마방(마방)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피(皮)씨이 원대(遠代)가 살았다고 한다.
◆ 우촌말(佑村말), 수원 우촌
역말 남쪽의 새로 된 마을로서 이곳 가까이 평택군 진위면 고현리(振威面 古縣里)에 있는
우촌말(佑村말)이 있는데 이곳과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흔히 "수원 우촌"이라 부르던 곳이다.
15. 지관동(紙串洞)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전에 이곳에는 종이를 뜨는 조지서(造紙署)가 있던 곳이라고 해서
흔히 "조꼬지"라 불렀는데, 한자로는 "紙串里"라 부르게 되었다.
◆독골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길이 없으나 옛날에는 이곳에 독(옹:饔)을 굽던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을 "독골(옹곡:饔谷)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6. 양산동(양산동), 양산골
양산봉(陽傘峰)이라 부르는 봉우리아래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해서 "양산리"라 하게 되었는데,
한자로 쓸 때에는 이것을 "양산리(陽山里)"라 한다.
◆작은말
양산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데서 이렇게 불려졌다.
17. 오산동(烏山洞), 오미
◆ 남촌(南村)
오산읍사무소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이곳을 "남촌(南村)"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당(堂)집터
이곳에 옛날에 신사당(神祠堂)이 있었다고 해서 "당집터"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샛터말
이곳에는 원래 마을이 없었던 곳인데,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교통의 요지가 되자 차츰 취락이
발달하여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하여 "샛터말(新基村)"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8. 외삼미동(外三美洞), 밧삼미, 바깥삼미실
죽미령(竹美嶺)의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외삼미동(外三美洞)"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밧삼미"라고 한다. "밧"은 "밖"의 옛말이다.
19. 청학동(靑鶴洞), 학고개, 학현
이 마을 뒷산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이곳에 학(鶴)이 날아와 살았고 하여 마
을 이름을 "청학리(靑鶴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20. 탑동(塔洞), 탑마루
전설에의하면 옛날 흙으로 쌓은 탑(塔)이 이곳에 있어 "탑동(塔洞)"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그 크기를 알 수 없다.
다만 큰 탑이 있었던 곳은 알 수 있으며, 이곳을 "탑재"라고 한다.
◆ 돌모루
이 마을 모퉁이에 큰 돌이 있었다고 하여 "돌모루"라고 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창곡(倉谷), 창골
이 곳은 옛 수원군 초평면 소재지가 서녘말에 있었을 당시, 정부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고해서 "창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윗말"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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