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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

여주군 가남면의 지명 유래

by 범여(梵如) 2016. 2. 13.

가남면(加南面)

 



가남면의 지명 유래


여주군 1읍 10면의 하나로 본래 여주군의 지역으로서 여주읍내 남쪽이 되므로 근남면(近南面)이라하여 안정(安定), 금교(金橋), 동막(東幕), 금곡(金谷), 조촌(朝村), 금대(金大), 송림(松林), 삼장(三莊), 원승(元承), 연대(漣臺), 귀일(貴日)의 11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3월 1일 행정구역에 폐합에 따라 곡면(谷面)의 화연(花漣), 평리(平里), 오산(五山), 본동(本洞), 두리봉(斗里峯), 상귀(上貴), 주봉(周峯), 흑석(黑石), 공심(公心), 삼신(三申), 색군(色軍), 하귀(下貴), 일신(日新), 헌해(獻海), 태평(太平), 신문(新文), 대사(大寺), 다업(多嶪), 활산(活山), 상응(上應), 건장(建章)의 동리와 수계면(首界面)의 하거리(下巨里) 일부와 음죽군(陰竹郡), 근북면(近北面)의 흑석(黑石), 자은(自隱)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서(加西)의 가(加)와 근남(近南)의 남(南)자를 따서 가남면(加南面)이라 하여 화평, 오산, 본두, 양귀, 은봉, 심석, 건장, 삼군, 하귀, 금곡, 안금, 금당, 송림, 삼승, 연대, 정단, 신해, 태평, 대신, 상활의 20개리로 개편 관할하고 있으며, 동쪽은 여주읍과 점동면, 남쪽은 이천시 장호원과 설성면, 서쪽은 대월면과 부발읍, 북쪽은 능서면에 다다르고 있다.

 





제1절 태평리(太平里) (구전자: 이천옥 84세)


ㆍ섬비- 원래 여주군 가서곡면에 속했던 마을로 1914년 3월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명동, 방아다리, 섬배, 신대동, 구장터를 병합하여 대명산 아래 큰 들이라는 뜻으로 태평이라 하였다 한다. 태평1리를 마구실, 방아다리라 하고 태평2, 4리는 섬배 또는 선비, 태평3리는 새터라 한다.

ㆍ구장터(구전자: 이천극 48세)- 옛날 장날이 섰었다 하여 구 장터라 한다.

현재는 농협앞쪽에 장이 5일마다 선다.

ㆍ대명동(구전자: 이천극 48세)- 대명산 밑에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대명동(大明洞)이라 하고 또는 마구실이라고도 한다.

ㆍ대명산- 옛날 조선시대 왕가에서 왕자를 낳으면 이곳에 태(胎)를 묻었다고 하여 원래 태봉(太峯)이라 부르다가 언제부터인지 태명산(太明山)으로 불리었고 현재는 대명산(大明山)으로 불리우고 있다.

※원래는 한박산이다. 한은 크다는 뜻이고 박은 밝(明)의 뜻이다

ㆍ대문이 (구전자: 이천옥 84세)- 마구실 서쪽 매명산 밑에 있는 들로 정월대보름 15일 전서부터 부정 없는 사람을 뽑아 함부로 말을 못하게 하고 마을에 금줄을 쳐놓고 이곳에서 산제사를 지냈다 한다.

ㆍ마구실 (구전자: 유수희 94세)- 조선시대에 어느 임금이 민정을 살피고 돌아가던 길에 이곳에 임시로 막을 치고 잠시 쉬었다가 간 곳으로 원래는 막의실(幕依室)이라 부르던 것이 오늘날 마구실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구(마구리)+실(동네)

ㆍ마구실 (구전자: 이종옥84세)- 마을 산의 형상이 말 모양이라 하여(마구실)이라 한다.

ㆍ마곡산 호랑이 유래- 이천군 마곡산에 큰 호랑이가 살았는데 이 호랑이가 대명산 에서 태평리 새터까지 왔다 갔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이 호랑이를 산신령님으로 받들어 해마다 대명산에 제를 지냈다 한다.

ㆍ무둥굴 - 안산 넘어 골짜기를 말한다.

ㆍ바머리 - 이곳에 큰 바위가 있었다하여 바머리골 이라 한다.

※바(바위)+머리(모리)=바우모리

ㆍ바머리 큰바위(구전자: 이천옥84세)- 바머리골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에 큰 부자가 살면서 손님대접을 많이 하였다 한다.

그 부인은 매일 같이 술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손이 트고 매우 힘이 들어, 하루는 스님에게 자기의 심정을 이야기하니 스님이 말하길, 그럼 저 바머리골 큰 바위를 없애버리면 된다하여 그 바위를 없애버리니 큰 부자는 망했다는 것이다. 집안이 망했으니 손님대접을 할 수 없으니 술을 만들 필요가 없지 않은가.

ㆍ방아다리 (구전자:이천옥84세)- 태평4리에서 설성면 약 1km 지점에서 대신1리로 갈라져 가는데 그 형상이 디딜방아 모양으로 된 사이에 10여호가 살고 있어(방아다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곳에 디딜방아가 있었다.

※삼거리의 명칭

ㆍ방축골 (구전자: 이천옥84세)- 이곳에 방죽이 있었다하여 방축골이라 한다.

ㆍ벅구들- 들판이 길게 뻗어 나갔다하여 벅구들이라 한다.

※벋은귀(모퉁이)들

ㆍ봉바골 (구전자:이종옥84세)- 복호형, 즉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며, 또한 바위들이 많아 옛날 여우가 많았다 한다.

※봉(峰) 바우골의 변음

ㆍ부수골- 역고개 가는 골짜기

ㆍ부처골- 옛날 이곳에 절과 부처가 있었다하여 부처골 또는 부처댕이라고 한다.

ㆍ상촌(구전자: 이천옥84세)- 마구실 위쪽에 있는 마을로 상촌(上村) 또는 늘말 또는 작은 마구실이라 한다.

ㆍ새산수 (구전자:이천옥84세)- 새터 옆에 있는 마을로 산소(묘)를 새로 써서 새산수라 한다.

ㆍ새장터 - 농협앞쪽에 새로 5일장이 선다하여 새장터라 한다.

ㆍ새터 - 죽산 박씨가 이웃 일신(日新)에서 이곳에 처음 마을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 새로 터를 잡았다하여 새처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대동(新垈洞) 이라고도 하며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 장수촌이라고도 한다.

ㆍ서낭고개(구전자: 이천옥84세)- 서낭당이 있었다하여 서낭고개라 한다.

ㆍ서설미산 (구전자:유수희94세)- 시설미산은 태평리 최서쪽에 위치하고 신해리와 경계를 이룬 산으로 서쪽에 있다하여 서(西)자와 설(說)자를 썼고 비교적 낮은 산이어서 미(未)자를 써서 서설미(西說未)라 불리우게 되었다한다.

※서(西)+살(살피, 경계)+미(山)

ㆍ서설미고개- 서설미산 밑으로 옛날 한양으로 과거보러 갈 때 이 고개를 넘었으며 전쟁 때는 군사요지로 군량미를 쌓아 놓았던 창고가 있었다 한다,

ㆍ섬배동(구전자:이천옥84세)- 마을의 형상이 두꺼비 모양이라 섬배동(蟾背洞)이라 한다.

ㆍ섬배- 지형이 배형상이라 섬배라 하고 배가 짐을 가득 실으면 떠나야 하듯이 이곳에서 재산을 모으면 떠나야 한다.

그냥 눌러 앉아 살면 도로 재산을 탕진하여 어려워진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태평리는 외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다.

※섬(선立)+배(山)=우뚝한 바위, 치성드리는 바위가 있는 곳

ㆍ섬비 (구전자: 이종옥:84세)- 태평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이곳 부락 뒷산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던 당시, 마을형상이 두꺼비 모양이라 원래는 섬배(蟾背)라 부르다가 섬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선비라는 말의 유래는 하도(下道)에서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갈 때 선비들이 이곳에 많이 머물게 되어 선비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 섬배 참조

ㆍ쇠파리- 시설미 고개 밑에 있는 들로 시꾸댕이가 많아서 쇠파리라 한다.

※쇠=새(間 또는 新)+파리(발:산자락) 파리는 발바리의 변음이다=산간에 있는 산줄기

ㆍ신대동 (구전자:이종옥84세)- 현 태평3리를 신대동(新垈洞) 또는 새터라 한다.

ㆍ아랫거리(구전자:이천옥84세)- 섬비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아랫거리라 한다.

ㆍ역고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에서 장사나 명인이 태어난다하여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이곳의 혈을 끊으니까 땅속에서 피가 솟아났다는 설이 있다.

※역은 ① 옆 (側)의 변음 ② 逆 되돌은

ㆍ역골 (구전자:이종옥84세)- 마을 옆에 있는 골짜기라 역골이라 한다.

※역고개 참조

ㆍ역골저수지- 역골에 있는 못이라 역골저수지라 한다.

ㆍ웃침- 섬비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웃침이라 한다.

ㆍ작은마구실(구전자:이천옥84세)- 마구실은 큰마구실과 작은 마구실로 구분되는데 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을 작은마구실 또는 늘말 이라고도 한다.

※마구실 참조

ㆍ전천교(구전자:이천옥84세)- 국도 3호상인 가남면 태평리에 있으며 1966년도에 놓은 다리로 연장 52.4m,폭 10m,높이 3m로 5경간이며 하중은 13.5톤이다

태평리 앞개울(벌더구니 개울, 또는 버더구니 개울)에 있는 다리라 전천교(前川橋)라 한다.

※앞개울 다리라는 뜻에서 명명됨.

ㆍ진설미- 들이 넓고 길어서 진설미 들이라 한다.

※진= 긴(長), 설미=山

ㆍ집너머 (구전자:이천옥84세)- 마구실 너머 쪽에 있다하여 집너머라 한다.

ㆍ집너머 (구전자:이종옥84세)- 새터 너머 쪽에 있다하여 집너머라 한다.

ㆍ큰마구실(구전자:이천옥84세)- 작은마구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큰말이라고도 한다.

※마구실 참조

ㆍ태평리- 옛날부터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이곳에서 쉬어가게 되어 많은 선비들이 모이는 곳으로 오로지 글 읽기에만 몰두하여 마을 사람모두가 만사가 태평하다하여 태평리(太平里)라 부르게 되었다.

 




제2절 신해리(新海里) (구전자: 이대식67세, 박명호84세)


본래 여주군 가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헌해동, 태평동 일부와 소개곡면의 일산동 일부를 병합하여 일신과 헌해의 이름을 각각 따서 신해리(新海里)라 하였다.

일신은 부락 주민들의 부지런히 일을 하여 나날이 새로워진다고 하여 일신(日新)이라 하고, 헌바다는 마을의 형상이 무명을 짜는 바디모양이라 하여 바디하고 하였는데 새 바디는 잘 끊어지므로, 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하여 헌바디라 하였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헌바다가 되었다 한다.

또한 신해1리와 2리를 합친 부락으로 신해1리는 일신이라 하고 신해2리는 헌해동 또는 헌 바다라 부르는데 일신의 신(新)자와 헌해동의 해(海)자를 따서 신해리(新海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일신(구전자: 박명호84세)- 조선시대 죽산 박씨가 처음 터를 잡아 살아오면서 일신(日新)으로 불리워 왔다고 하는데 부락주민 모두가 부지런히 일을 하여 나날이 새로워진다고 하여 일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헌바다 (구전자: 이대식67세)- 이 부락의 형상이 무명을 짜는 바디 모양처럼 생겨서 바디라고 하려다가 이왕이면 바디 중에서도 새바디는 실이 잘 끊어지기 때문에 잘 끊어지지 않는 헌바디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헌바다가 되었다 한다.

또는 마을 앞에 큰 냇가가 있어서 큰바다, 큰바다 하다가 헌바다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헌(한(大))+받(들) = 큰 들의 뜻으로 한밭의 변음이다.

ㆍ이댕이(구전자:박명호84세)- 옛날 이씨 형제가 자리를 잡고 살았는데 마을의 형상이 동이처럼 생겼다하여 이동이라 부르다가 후에 이댕이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마을)+댕이(등성이)

ㆍ창골(구전자:박명호84세)- 임진왜란 당시 군사들이 먹을 군량미르 보관하였다고 해서 창곡(倉谷)으로 불리웠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창골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찬(滿)+골(谷)= 찰안곡(滿內谷)

ㆍ창골(구전자:이대식67세)- 봄이 되면 창꽃(진달래)이 만발하여 창골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봄만 되면 진달래가 많이 핀다 한다.

ㆍ가시리(구전자: 박명호84세)- 일신 북쪽에 있는 들

※가시 (가생이)

ㆍ겨리실- 일신 가시리 옆에 있는 들

※겨리(붙은, 쌍) 또는 가리(川)의 변음

ㆍ구리스 물(구전자:이대식외 4명 67세)- 겨리실 꼭대기쯤에 있는 샘으로 땀띠나 옻이 오르면 이 물로 닦아내면 깨끗이 났다 한다. 일명 옻물 운덩이라 한다.

ㆍ달봉산(구전자:이대식외 2명 67세)- 해발 약 100m 정도의 야산으로 토끼가 달을 보고 껑충뛰는 형상이라 달봉산이라 하며 정월 대보름이 되면 산에 올라 달구경을 하면서 소원을 빌었다 한다.

또한 이곳에서 큰 장군이 나온다하여 일본 놈들이 쇠꼬챙이를 박아 산의 혈을 끊었다한다.

※달(산)+봉(峰)

ㆍ달봉산에서 놀 때 불렀던 노래 (구전자: 이기운64세)

다 떨어졌다 헌바다, 어깨너머 잔등

솥 떨어졌다 솥단이, 코 뚫었다 맹골

어기설기 마구실 무섭다 범골

거지 많다 부필리 쑥 들어갔다 쑥디

휘휘 둘러 두리봉

ㆍ달봉재(구전자: 신이섭외 4명 60세)- 정감록에 의하면 달봉재는 옥토바오형 즉 토끼가 달을 보는 형상으로 이달봉재 주변에는 8군데 명당이 있어 지관들이 7군데는 찾아 묘를 썼으나 현재까지도 한 군데는 못 찾았다 한다.

이곳에서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 하여 일본인들이 두려워하여 이곳에 쇠고챙이를 박아 혈을 끊었다 한다.

※달봉 참조

ㆍ도두머리(구전자:권기춘외4명60세)- 토끼가 달봉산을 쳐다보는 형상이라 하여 도두머리 또는 도토머리라 한다.

※도두(돋=솟은)+머리(모리 모퉁이)

ㆍ 도두머리(구전자:이기운 외 1명 64세)- 배틀위에 도토마리 언져 놓은 형상이라 하여 일명(도토머리)라고도 한다.

ㆍ돌다리(구전자:권기춘60세)- 옛날 돌로 다리를 놓았다 해서 돌다리라 한다.

ㆍ돌맹고개- 서설미산에 있는 고개로 돌이 많아서 돌맹이 고개 또는 지형이 병처럼 생겨서 병만이 고개 또는 건뱅이 고개라 한다.

※돌맹(돌매(回山)), 병만(봉미(峰山+안(內)), 건뱅이(건배미(마른논, 건답))

ㆍ동명산- 옛날 나라에 국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동명산에 올라 울었다고 한다.

ㆍ멱저리-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막힌골

ㆍ문앞들(구전자:박명호84세)- 일신 마을 앞에 있어 (문앞들)이라고 한다.

ㆍ목탁봉-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는 형상이라 목탕-봉이라고 한다.

ㆍ물방아거리- 옛날 물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ㆍ미머리고개- 일신에서 태평리 넘어가는 고개로 작은 바머리 곡이라고도 한다.

※미(山)+머리(首 꼭대기)

ㆍ바탕가시리(구전자:이대식67세)- 밭이 많아서 바탕가시리라 한다.

※바탕(바라진, 버려진)+가시(가생이)

ㆍ삼형제 산- 마을 앞산에 봉우리가 3개 있어 3형제와 같다하여 3형제 산이라 한다.

ㆍ서낭고개(구전자:박명호84세)- 서낭당이 있어 서낭고개라 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ㆍ신해 저수지- 일명 일신저수지라 한다.

ㆍ양달말 (구전자:이대식67세)- 창골 양달쪽에 있는 마을

ㆍ오참이(구전자:권기춘60세)- 오참이의 논이 많았다 한다. 일명 오침이하고도 한다.

※오(외 獨, 孤)+치(峴, 山)+외딴 등성기

ㆍ왜들(구전자:이대식67세)- 오침이 넘어 저수지 밑으로 들이 넓어 왜들이라 한다.

※외들=한들=큰들

ㆍ우미길(구전자:권기춘60세)- 동명산 밑에 있는 골짜기로 왜들 서쪽을 말한다.

ㆍ음달말(구전자:이대식67세)- 창골 음달 쪽에 있는 마을

ㆍ이댕이- 일신에서 좀 떨어져 있어 이댕이라 한다.

또는 물방아가 있었다 해서 물방아거리라고도 한다.

※이(외딴, 외)+댕이(땀, 등성이)

ㆍ이밀 절이(구전자:박명호84세)-일신에서 헌 바다 가는 쪽으로 이댕이 못 미쳐 골짜기라 하여 이밀절 이라 한다.

ㆍ일신- 신해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일신동이라고도 한다.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고 훗날 지어진 이름이다.

본래의 말로 날 +새로 추측된다.

ㆍ일신동- 옛날 가서 곡면에 속했던 마을로 일신이라고도 한다.

ㆍ일신숲- 일신 뒤쪽에 있는 숲을 말한다.

ㆍ작은 말(구전자:권기춘60세)- 일신 남쪽 골짜기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하여 작은말이라 한다.

ㆍ작은말고개- 작은말 뒤에 있어 작은말고개라 한다.

ㆍ집너머- 일신 뒤쪽 너머에 있는 들을 말한다.

ㆍ창곡마을(구전자:이대식67세)- 창골을 창곡(倉谷)이라 한다.

ㆍ창골마을- 창골을 창곡이라 한다.

ㆍ터골- 옛마을 터였다 하여 터골이라 한다.

ㆍ토마리- 산모퉁이 돌아가는 곳이라 하여 토마리 또는 토머리라 한다.

ㆍ헌바다- 헌해동이라 고도 하며, 현 신해2리를 말한다.

※헌(희(白), 바다, 바닥, 乾地)

ㆍ헌해동- 헌 바다라고도 하며 현 신해2리를 말한다.

ㆍ황장군묘(구전자:박명호84세)- 옛날 황장군이 있어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일신에서 정단리로 왔다 갔다 하였다 한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서 제관을 뽑아 해마다 황장군 묘에 제를 지냈는데 현재는 묘를 이장시키고 그 자리에는 마을창고가 들어서 있다.



제3절 상활리(上活里)


ㆍ활산(活山), 응암(應岩) (구전자:강신옥80세)- 원래 이천 동면 지역이었으나 조선 효종왕비 인선왕후를 영릉으로 모시고 나서 여주 가소곡면에 속했던 행정구역으로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응동과 활산리를 합하여 상응동의 상자와 활산리의 활자를 따 「상활리(上活里)」라 한다.

상활리는 1ㆍ2리로 구분하는데 상활1리를 「활산(活山)」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곳 마을 앞에는 위로부터 아래로 활을 잡아당긴 형상의 산이 있어 옛날에 남평 문씨가 터를 잡았다하나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그 후 함평이씨가 이곳 중간 지점에 사당을 짓고 부락을 이루게 되면서 산의 모양이 활모양이라 하여 「활산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상활2리를 「응암(鷹岩)」이라 하는데 이곳 마을 뒷산에 매봉재라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산 전체에는 별로 돌이 없는데 산봉우리에는 큰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상징하여 「응암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상활리 (구전자:은대용80세,정유석80세)- 구전자의 어린시절 기억으로는 어려서 취학 전 어린아이들이 「어깨동무 새동무 말산서 말을 타고 활산서 활을 쏘고, 여주 활산 가만둬」등등 동요 비슷하게 어깨동무하고 노래하며 놀았다는 생각이 나며 그 전부터 어른들은 마을 이름을 「활산리」라고 불렀고, 또한 상활2리는 응암리라 불렀다 한다.

또 현재 이천시 부발읍 응암리를 이천 응암리, 상활리를 여주 응암이라고 불렀다 한다.

응암이란 리명은 아마도 마을 뒷산꼭대기 매 바위라고 큰 바위가(여기서 매사냥도 많이 했다함) 현재도 있는데 여기서 응암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그 전에 어른들은 여주 응암(현재 상활2리)을 상(上)응암, 이천 부발읍 응암리를 하(下)응암이라 불렀다한다.

따라서 상(上)응암의 상(上)자와 활(活)산이란 활(活)자를 연합하여 상활(上活)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상활리(구전자:강신옥외2명80세)- 원래 이 마을 형상이 활을 잡아당긴 굽은 활의 모양으로 생겨 이왕이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활이 되었으면 좋겠다하여 최상(最上)의 활인 상활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활산 (구전자:강신옥외4명80세)- 원래 이곳은 마을 앞에 위로부터 아래로 활을 잡아당긴 형상의 산이 있어 옛날에 함평이씨가 이곳 중간 지점에 사당을 짓고 부락을 이루게 되면서 산이 활모양이라 활산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활산의 원래 이름은 살뫼다. 살뫼란 지금의 유래와 같이 활처럼 둥글게 생겼다는 것은 산 주위 마을의 형태고 산의 중심부 자체는 뾰족하다하여 살 뫼라고 부르고 한자로 산 이름을 쓸 때 살의 뜻은 활자를 쓰게 된 것이다.

ㆍ상활리(구전자:은대용,정유석70세)- 도덕적인 면에서 상류인(上流人)이 생활(生活)하는 마을이라 상활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ㆍ활산(구전자:강인구47세)- 마을이 활의 형상이라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돈을 벌면 오래 살지 못하고 자꾸 마을을 떠나간다고 즉 마을이 활의 형상 때문이라고 한다.

활살이 당기면 날아가듯이

ㆍ활산(구전자:신재선63세)- 마을 앞에 원산들이라는 산이 있는데 근처의 한량들이 모여서 활터를 만들어놓고 서로 기량을 뽐내면서 놀았다하여 마을 이름을 ‘활산’ 이라 하였다하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ㆍ응암(鷹岩)(구전자:강신옥80세)- 이곳 마을 뒷산에 매봉재라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산에는 전반적으로 돌이 없으나 이상하게도 매봉재에 큰 돌이 있어 그 바위를 상징하여 응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응암은 원래는 매봉바위다. 매는 새 종류의 매가 아니고 뫼의 변음이다.

결국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 보다는 순수한 우리말 산봉우리가 뜻인데 뫼(山)을 매로 부르면 서 매(鷹)자를 쓰게 된 것이다.

ㆍ뒤주밀산 큰 참나무 (구전자:강인구47세)- 활산 남쪽에 있는 산으로 일명 비룡개산 이라고도 한다. 이 산꼭대기에는 큰 아름드리 참나무가 있었다 한다.

옛날 고향을 떠나거나 멀리 외출을 하였을 때 이 큰 참나무를 보고 마을을 찾아 왔다고 하며, 또한 6ㆍ25전쟁 때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뒤주밀산에 있는 큰 참나무를 보고 다시 고향을 찾아왔다 한다. 그러나 얼마전 이 큰 참나무는 벼락을 맞아 고사 되었다 한다.

ㆍ비룡개(구전자:신재선63세)- 상활리 뒤주밀산 끝자락에 큰 늪(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여기서 큰 용 한마리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 한다.

그래서 용이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해서 「비룡개」라 한다.

※한자로 옮겨 쓰면서 잘못된 것이다.

비(飛)는 날의 뜻인데 날은 원래 산날(줄기)이고 용(龍)도 산내룡의 뜻이다.

개는 가쟁이의 뜻이다. 결론은 산날미가 쟁이의 뜻이다.

ㆍ활산과 동악- 활산은 동학란 당시의 동학도들이 많이 활동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헐렸지만 허섭씨(許攝氏) 집터에 박희학씨가 살던 집이 바로 동학도들이 목재를 한 개씩 가지고 와서 집을 지었다 한다.

또한 왜병과 관병이 와서 동학도들과 대립할 적에 앞들 제방(양화천제방) 쪽에 수많은 동학도들이 인해전술을 방불케 하여 왜병과 대처하였다고 하니 동학도들의 활동이 가공할만하다는 것을 짐작하겠다.

ㆍ매봉재(구전자:강인구47세)- 상활리 서쪽에 있는 산으로 그 산에는 돌이 별로 없으나 산꼭대기에는 큰 돌이 있어 그 바위를 응암이라 부르게 되었다하며 매 사냥도 많이 하였다한다.

따라서 마을 이름의 응암(鷹岩, 매응자, 바위암자) 은 매사냥과 관계가 깊다 한다.

※매봉= 매+ 봉=산봉우리

ㆍ뒤주밀 산, 비룡개산(구전자:신재선63세)- 활산 남쪽에 있는 산으로 큰 우물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하여 비룡개산이라 한다. ※ 비룡개 참조

ㆍ두리봉(구전자:강인구47세)- 응암 서쪽에 있는 산으로 그 형상이 둥그스름하다하여 두리봉이라 한다.

※머리 봉이란 뜻

ㆍ꽁지 우물- 상활리에 있었던 우물물로 샘이 잘나와 물이 항상 넘쳐흘러서 꽁치(꼬리)모양을 했다고 하여 꽁지우물이라고 한다.

ㆍ꽁지 우물골- 상활리 꽁지우물이 있어 마을을 꽁지우물골 이라 한다.

ㆍ금곡골- 활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천말의 반대편 마을을 말한다.

※금(金)은 쇠고 새 의 변음이다.

ㆍ토머리- 활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잔 등골의 반대편 마을 현재 마을회관이 있다.

※토는 터(垈)의 변음이고 머리는 모리(모랭이)의 뜻이다.

ㆍ잔등골- 활산 북쪽, 긴 잔등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ㆍ여주응암(驪州鷹岩)- 여주활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여주군과 이천시의 경계가 되는데 이곳은 여주군에 속하며 지금의 상활2리 파발막 동쪽 마을을 말한다.

※응암 참조

ㆍ응달말- 활산 명막골 고개 오른쪽에 있는 마을로 동쪽을 산이 막고 있어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해서 응달말이라 한다. 양달말의 반대편 마을

ㆍ양달말- 활산 명막골 고개 좌측에 있는 마을로 햇빛이 잘 든다 해서 양달말이라 한다.

응달말의 반대편 마을.

ㆍ비렁골- 상활리에 있는 마을로 땅이 매우 메말라서 비렁골이라 한다.

※비렁은 벼랑의 변음이 많다.

ㆍ돌박재(구전자:강인구47세)- 활산에 있는 마을로 특이하게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돌 박재라 한다. 현재 응암 교회가 있다.

※돌은 石이고 박은 박혔다는 뜻이 아니고 받(山) 이란 뜻이다.

ㆍ당다우골- 당다우골(마을)

활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명막골의 반대편에 있는 마을

※당은 닥의 변음이다. 우는 위의 변음이다,

ㆍ명막골- 활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당다우골 반대편에 있다.

※명은 메안의 줄임이 변음 되고 막은 막힌 곳의 표현이다.

메+안+막= 메안막골 → 명막골

ㆍ동천말- 활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서천말의 반대편 마을

ㆍ서천말- 활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천말의 반대편 마을

ㆍ뱀문골- 활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뱀이 많았다 한다.

ㆍ실미- 상활리에서 으뜸으로 마을을 말한다.

※살은 뾰족하게 내민 산뿌리의 뜻이고 미는 山이다.

산 뿌리가 내밀은 주위에 있는 마을에 붙여진 이름이다.

ㆍ명막골고개- 명막골 뒤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명막골 참조

ㆍ명막골 고래(들)- 명막골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ㆍ살미들- 마을 앞에 있는 큰 들로 정단리 까지 연하여 있다.

ㆍ여주응암고개- 여주 응암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응암동 참조

ㆍ멀미 들 (구전자:강인구47세)- 명막골 고개 밑에 있는 들을 말한다.

※멀미는 긴등의 뜻이다.

ㆍ도두머리- 여주응암(현재 상활2리) 동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도두는 솟은의 뜻이다.

ㆍ부처 모탱이들- 옛날 어떤 농부가 논을 갈 때 겨리(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를 말함)로 논을 갈았다 해서 겨레실이라 하였다 한다.

※겨리는 쌍, 두개의 뜻으로 두 땀이 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ㆍ개미골- 옛날 어떤 농부가 척박한 땅을 개미처럼 열심히 일을 하여 논을 만들었다 고해서 개미 골이라 한다.

※ 개미는 가미(邊山)의 뜻이다.



제4절 대신리(大新里) (구전자: 최만식외 5명73세)


본래 여주군 가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문동, 대사동, 다업동을 합하여 대사동의 대(大)자와 신문동의 신(新)자를 따서 대신리(大新里) 라 한다.

대신리는 옛날에 원님이 태어났고 유명한 큰절이 있었으며 다업동의 넓은 들이 확장되면서 부락이 날로 융성하였다고 하여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으로 대신리(大新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안터(구전자:남윤관외5명42세)- ①조선시대 이곳에 김인천 이라는 사람이 고을 원님으로 벼슬하게 되어 원님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살기가 좋아지게 되어 (살기 좋은 터)라 하여 안터 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안 (內)

②대신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신문동(新文洞)이라고도 한다.(구전자:최만식외 2명 73세)

ㆍ신문동- 안터를 신문동(新文洞)이라고도 한다.

ㆍ안터(구전자: 이인환외 2명58세)- 현 여주읍 대왕리 일대에는 문화 유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세종대왕의 영릉을 이장해 오면서 모두 떠나 지금 대신리(안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이 안터는 임금으로부터 사사 받은 터라 한다.

옛날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여주에는 살기 좋은 터가 5곳이 있는데(구전자:남윤관외4면 42세)

①금사면의「천양」 ②점동면의 「모래실」 ③ 여주읍의 「삼밭골」 ④가남면의 「일신」 ⑤가남면의 「안터」를 5안터라 한다.

ㆍ댓절 (구전자:전윤철외8명64세)- 옛 신라 시대에 이곳에 큰 절이 있었던 터라하여 대절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은 「댓절」이라 불리우고 있다.

※절이는 절(寺) 이 아니고 마을의 옛말 댓은 뒷의 변음

ㆍ대사동(구전자: 최근철외5명66세)- 댓절을 일명 대사동(大寺洞)이라한다.

※댓절이 참조

ㆍ다업동(구전자:최근철외3명66세)- 원래 이곳은 부락이 없었는데 이웃 부락에서 산을 개간하고 경지를 일구게 되어 차츰 부락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일이 많다고 하여 다업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대절이)+업(옆側) (대절이 옆 동네)

ㆍ다엽동- 다업동을 일명 다엽동이라 한다. ※다업동 참조

ㆍ금베틀(구전자:이인환외4명58세)- 옛날 이 마을 은행나무 밑에 큰 부자 대감이 살았는데 어떤 큰 난리가 일어 나 피난 갈 때 금 베틀은 우물 속에 던져놓고 피난 갔다 와서 다시 우물 속에 금 베틀을 건져내려고 하니 비가 와서 못 건졌다 한다.

비가 그쳐 또 건지려고 하면 또 비가오고해서 결국 건지지 못하였다 한다.

이후 이 우물은 메워지고 작은 협곡(샘물)만 남아 있는데 이 마을에서는 가뭄이 들어 비가 안 오면 이 협곡을 파내면 비가 왔다 한다.

※금(새)+베틀(뱃들, 山野)

ㆍ찬우물 (구전자:최만식외5명73세)- 손발이 차가울 정도로 찬물이 흘러나오는 굴이 있는데 땀띠, 부스럼등 피부병이 나면 떠다 먹거나 목욕을 하면 말끔히 낫다 한다.

옛날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찬물을 떠다 냉장고 대신 사용할 정도로 차가웠다 한다.

따라서 마을에서는 우물을 신성시 하여 금줄을 쳐놓고 마을에서 가장 부정을 안탄 사람을 뽑아 매년 가을이 되면 찬 우물에 정 제사를 지낸다 한다.

여기에는 마을의 대동단결의 의미도 있다 한다.

ㆍ대신천(구전자:남윤과외2명42세)- 여주군 가남면 대신리에서 시작하여 가남면 정단리 양하천으로 합류되는 연장 10㎞이다.

ㆍ댓절굴(구전자:최만식:73세)- 댓절 뒤에 있는 골짜기로 굴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댓절굴이라 한다. (댓절 참조)

ㆍ도두무골 (구전자:이인환외3명68세)- 도둑이 많았다 해서 「도두무골」 이라 한다.

※ 도두(돋은)+무골(뭇골, 물골)

ㆍ두우물(구전자:이인환외5명58세)- 안터 동쪽에 있는 우물로 안 우물과 바깥우물로 「두우물」이 있다하여 「두우물」이다.

※ 두물 (雨水)

ㆍ망월봉(구전자:최만식외2명73세)- 정월 대보름에 망월(달맞이)을 했다하여 「망월봉」이라 한다.

ㆍ묵은 터(구전자:전윤철외3명64세)- 옛날 마을이 있었던 터라 하여 「묵은 터」라 한다.

ㆍ물미산(구전자:이인환58세)- 물이 많아 물미산이라 하며 옛날 산사태로 산이 무너져 뱅기리 골에 쌓였다 한다.

그래서 「뱅기리골」 이 둥그스름하다 한다.

※물(水)+미(山)

ㆍ바깥우물 (구전자:최만식외2명73세)- 안터, 두 우물 중 바깥쪽에 있는 우물로 온 마을 사람들의 식수로 이용했으며, 해마다 여기에 소를 잡아 정 제사를 지냈다 한다.

ㆍ바라미 (구전자:이인환58세)- 바람(서풍)이 많이 불어 「바래미」라 한다.

원래 문화 유씨들이 살았으나 도둑들이 많아 안터로 이사했다 한다.

※바래(발아진, 넓어진)+미

ㆍ박산고개 (구전자:최만식73세)- 설성면 마국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로서 마국산은 박의 뿌리이며 이곳박산고개에는 박넝쿨이 무성하여 박이 항상 주렁주렁 열렸다 한다.

그래서 박이 난다고 하여 박산 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한 이 고개에는 서낭당이 있었다한다.

※박+ 산+ 고개

ㆍ반상골- 대신3리에 있는 골짜기

※반산(그리 높지 않은 비산비야)

ㆍ밤나무 실(구전자:최근실외5명66세)-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 실」 이라 한다.

방죽골 (구전자:이인환외3명58세)- 바래미 남쪽에 있는 들로 방죽(작은 늪지대)이 있었다 해서 「방죽골」이라 한다.

ㆍ뱅기리- 물 미간에서 산사태로 흙이 떠내려와 지형으로 둥그스름하게 만들어서 「뱅기리」라고도 하고 또한 대신천과 건장천이 만나 물이 빙글빙글 돌면서 흘러 간다하여 「뱅기리」하고도 한다.

ㆍ봉상 절이- 안터 뒷산에 있는 골짜기 ※ 봉(峰)+상(上)+저리

ㆍ봇들(구전자:전윤철외3명)- 동네 입구에 보가 많아서 봇들이라 한다.

ㆍ부수골(구전자:이인환58세)- 안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ㆍ새늘 (구전자:이인환58세)- 댓절 남쪽에 새로 만든 들이라 하여 새 늘이라 한다.

※새 + 늘

ㆍ새터말(구전자:최만식73세)- 마을 회관 서쪽에 새로 터를 잡았다하여 「새터말」 이라 한다.

ㆍ신웅골(구전자:남윤관42세)- 들에 시꾸뎅이가 많아서 「신웅골」이라 한다.

ㆍ안우물(구전자:최만식73세)- 안터 두우물중 안쪽에 있는 우물

ㆍ얀굴(구전자:이인환58세)- 자작나무가 많아 「얀골」이라 한다. ※ 얀(이안)

ㆍ오목골(구전자:최만식73세)- 골짜기가 오목해서 오목 골이라 한다.

ㆍ왜미(구전자:이인환58세)- 마을 앞에 있는 들로 바래미와 피리기 중간에 있는들

※왜(외=외딴)+미

ㆍ안터은행나무- 약 350년 된 은행나무로 두 그루가 있는데 위에 있는 은행나무(상상봉)에는 황새 한 쌍이 집을 짓고 살았으며 은행나무(하상봉)에는 백로나 왜가리가 집을 짓고 평화롭게 살았다 한다.

ㆍ절골 (구전자:최만식외3명73세)- 댓절이라는 큰 절이 있었던 골짜기로 미륵이 있었다 한다.

ㆍ청룡뿌리(구전자:이인환58세)- 댓절이는 바라 볼 때 산 능선의 줄기가 좌청룡, 우백호 형상이라 하여 청룡뿌리라 한다. ※산 뿌리 끝자락 부위

ㆍ탑골(구전자:최만식외4명58세)- 댓절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탑이 있었다하여 탑골이라 한다.

ㆍ피리기 (구전자:이인환외4명58세)- 댓절 동쪽에 있는 들로 들이 넓어서 피리기 들이라 한다.

ㆍ필억이- 피리기 들을 일명 필억이라고도 한다.

ㆍ창들 (구전자:최만식외5명73세)- 피리기 윗들을 창들이라 한다.



제5절 은봉리(隱峯里) (구전자:조성환62세)


본래 여주군 소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주봉리, 흑석동 일부와 가서면의 자은동 일부, 음죽군 근북면의 흑석리, 자은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자은(慈恩)과 주봉(周峯)의 이름을 따서 은봉리(隱峯里) 라 한다.

은봉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은봉1리를 두리봉, 자은동 안터라 하고 은봉2리를 목골이라 한다.

ㆍ검은들(구전자:조성환62세)-검은 돌이 있어 검은 들이라 한다. ※검(大)+들(坪)

ㆍ두리봉- 조선시대 중엽부터 석(石)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러 와보니 사방으로 두루두루 높고 낮은 봉우리가 있어 당초에는 두루봉이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하여 두리봉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두리는 두(頭)의 뜻

ㆍ딴봉새- 두리봉 산과 숫돌봉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봉우리가 따로따로 있다하여 딴봉새라 한다.

ㆍ마초간- 옛날 소풀을 많이 베어 먹여서 마초간이라 한다. 이곳에는 옛 경충로(서울과 충주)의 구도로가 있다.

ㆍ목곡동- 목곡동 또는 목골이라 한다.

※木은 몰(隅) 의 뜻

ㆍ목골- 조선왕조 개국 당시 진주 정씨가 난을 피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당시 이곳은 골이 깊고 나무가 무성할 뿐만 아니라 특히 고목이 많아 목곡(木谷)이라 불리웠는데 변음 되어 목골로 불리우고 있다 한다.

ㆍ방축골 (구전자:조성환62세)- 옛날 방축이 있었다하여 방축골이라 한다.

ㆍ보광사- 1957년 건립된 사찰로 전국적으로 넓고 밝은 유명한 사찰이 되라고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 한다.

ㆍ부터골- 옛날 부자가 살았다하여 부터골이라 하나 그 후 마적떼가 들어와 망했다 한다.

※부터는 붓(筆) 형태로 뾰족한 골의 뜻.

ㆍ신작로께- 신작로(新作路) 옆에 있는 마을을 뜻한다.

ㆍ솟돌봉- 일제시대때 숫돌을 캐던 곳이라 하여 숫돌봉이라 한다.

ㆍ쌍내골- 두 내가 합쳐지는 곳이라 쌍내 골이라 한다.

ㆍ안말- 목골 안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주막이 있었다 한다.

ㆍ안산- 새로 생긴 마을로 18가호의 천주교인들이 살고 있다.

ㆍ안터- 두리봉 안쪽에 있는 마을의 뜻

ㆍ여주 자은동- 검은돌 서쪽에 있는 마을로 여주 자은동과 이천 설성 자은동로 나누어져 있는데 여주와 이천 경계가 된다. 반은 여주에 반은 이천에 딸려있다.

ㆍ자은동- 조선시대 퇴계 이황 선생께서 이웃 마을인 장호원읍 사읍리에 거주하는 고을의 원님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아무도 없이 단신으로 수일간 은거하였다가 간 곳이라 하여 자은동(自隱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은은 작은의 뜻으로 작은동, 작은 등을 于 한자로 표기하면서 자은이라 하였다.

ㆍ온바리(구전자:조성환62세)- 쌍내골 너머 자은동으로 올라가는 들을 말한다.

※온은 왼(左)+바라는 발(야산)= 왼쪽 산자락

ㆍ온수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샘으로 겨울에도 손이 시리지 않을 정도로 물이 따스해서 온수들이라 하며 지금도 샘이 있다. (溫水)

ㆍ은봉리- 은봉리는 자은동과 주봉동(周峯洞) 2개 부락이 합쳐서 은봉리가 되었는데 자은동의 은(隱)자와 주봉동의 봉(峯)자를 따서 은봉리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잔동- 현 자은동을 일면 잔동이라고도 한다. ※자은동 참조

ㆍ잔디골- 잔동 뒷골 짜기로 잔디가 많아서 잔디골이라 한다. ※잔등골의 변음

ㆍ주봉동- 두리봉의 옛 명칭이다.

※두리를 한자로 쓰면서 두루주(周)자를 쓴 것이다.

ㆍ흰산- 옛날 산에 나무가 없어 흰 산이라 했다 한다. 지금은 산림녹화사업으로 나무가 많다. 현재 동명철강공장이 있다.

※흰을 밝은의 뜻, 햇빛을 제일 먼저 보는 산.

ㆍ소죽골- 소먹이가 많아서 소죽골이라 한다.



제6절 건장리 (建章里) (구전자:박호채72세(전지역)


본래 여주군 가서면의 지역으로 건쟁이 또는 건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소개곡면의 공심리 일부를 병합하여 건장리라 하였다.

옛날 해주정씨가 500년 전 이곳에 머물러 살아왔는데 원래 토지가 토박하고 메말라 있고 지형이 길게 뻗은 형상이라 건장리라 부르다가 지금은 건장 또는 건쟁이라 부른다.

ㆍ찬샘배기들- 찬 샘이 있어 찬샘 배들기라 하고 샘물이 너무 차가워 피부에 옻이 오르면 이물로 목욕하면 낫다 한다. ※배기= 박힌, 백인(방언)

ㆍ묵은터- 옛날 이곳에 부자가 살았는데 집 뒤로는 봉황처럼 생긴 큰 바위가 집을 덮을 정도로 컸다 한다.

어느 날 스님이 시주하러 왔을 때 잠결에 누가 왔느냐 하니 하인이 스님이 시주하러 왔다하여 대감이 외양간에서 오물을 퍼다 스님 바리에 집어넣었다 한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며느리가 너무 딱해서 바리의 오물을 버리고 쌀을 넣어주었다 한다. 이때 하인들이 말하길 우리 영감님의 성격이 고약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스님에게 말하니 그럼 저 봉화바위를 깨트리라고 하여, 바위를 깨트리자 그 후 부자는 망했고, 그 착한 며느리는 자살했다 한다.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어 묵은 터라 한다.

ㆍ작답골- 지형이 지게 작대기처럼 생겼다 해서 작답골이라 한다.

※작은 잣(小)의 변음이고 답은 달(山)의 변음이다. 즉 작은 산골이라는 뜻이다.

ㆍ집너머- 동인말 너머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ㆍ온발이골- 이곳에서 물건을 소나 말로 운반했다해서 온발이라 한다.

※온은 왼(左), 발이는 발(山). 왼쪽 골짜기의 뜻

ㆍ용머리골-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머리골이라 한다.

※ 용머리는 산뿌리 끝의 뜻임.

ㆍ우물말 - 옛날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여기에는 아주 좋은 우물이 있었다하여 우물 말이라 한다. 지금은 메워 없어졌다.

ㆍ쇠등- 지형이 소의 등처럼 생겨서 쇠등이라 한다,

※샛등(사이의 산등) →새등 →쇠등

ㆍ시제골- 숫돌봉 밑에 있는 골짜기로 해주정씨의 시제지내는 묘가 있어 시제이라 한다.

※새재(샛고개) 골의 변음

ㆍ쌍내골- 두 골짜기의 물이 합해져서 은봉리 잔등 쪽으로 흐른다 해서 쌍내골이라 한다.

ㆍ새터말- 건장리에 새로 된 마을

ㆍ숫돌봉- 옛날 이곳에서 숫돌을 많이 캐어 내서 숫돌봉이라 한다.

ㆍ병무관고개- 건 자일에서 이천시 장호원읍 나래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병모양처럼 생겼다하여 (병무관고개)라 한다. ※병목안 고개

ㆍ복구들- 옛날 사당패들이 북치고 놀았다 해서 복구들이라 한다.

※ 북쪽귀(귀퉁이)들 = 복귀들

ㆍ묵은터- 옛날 부자가 살았다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어 묵은터라 한다.

ㆍ방축골- 방죽이 있었던 곳으로 옛날 매우 가뭄이 들었는데 이 방죽에서 용이 승천하면서 비가 내렸다는 설이 전해온다.

ㆍ마구논골- 논의 형상이 말의 입처럼 생겨서 또는 땅이 매우 메말라서 마구논골이라 한다.

※마구리논들

ㆍ묵은말- 옛날 아름드리 고목나무들이 많았다 한다.

※말림(산의 연고자나 소유자가 땔나무나 풀 베는 것을 금지시키던 산=시초장(柴草場)을 폐지시킨 산

ㆍ동인말 건장리 동쪽에 있어서 (동인말)이라 한다.

※동(마을)안쪽마을 = 동안말의 뜻

ㆍ골말- 건장리 한 복판에 있는 마을

ㆍ다담실- 본래 음죽읍 땅인 다담동 이었으나 지금 빈터만 남아 있다.

※ 달(山)+안(內)+말=달안말→달암말→다담말

ㆍ건쟁이- 건장리의 옛 마을 명칭이다. ※ 건장리 참조

ㆍ가눗들- 큰 들에 사잇길이 있어서 가눗들이라 한다.

※가에(가쟁이) 늘은들(늘어난)=가에는들=가는들=가눗들

ㆍ개방축골- 방축골 옆에 있는 골짜기

ㆍ건너말- 우물말 건너쪽에 있다하여 건너말이라 한다.

옛날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제7절 심석리(心石里) (구전자:안광열76세) )


본래 여주군 소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공심리(公心里)와 흑석동(黑石洞)을 합하여 심석리(心石里)라 한다.

ㆍ공심이(구전자:박득규74세)- 심석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옛날 소개곡면에서 속했던 마을로, 옛부터 부락 뒷편에 산봉우리가 3개 있는데 모양이 귀공(公)자처럼 생겼으며 부락 앞으로는 산허리가 마음심(心)자형으로 굽어 있어 그 모양을 따서 공심(公心)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공심동(구전자: 박득규74세)- 공심이를 공심동이라고도 한다.

ㆍ구일고개- 공심이에서 양귀리로 넘어가는 고개

ㆍ논나무재 (구전자 :안광열76세)- 흑석에서 양귀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노나무(논나무,옷나무)가 많아서 논나무재라 한다.

※논(畓)+나무(너머)+재(논고개로 넘어가는 고개)

ㆍ논나무재 전설- 가남면 금당리, 양귀리에 흑석 사이에 작은 논나무 고개와 큰 논나무 고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흑석 쪽에 있는 것이 본래의 고개인 큰 논나무 고개이고 양귀리 방향의 고개가 작은 논나무 고개이다.

이 두 고개는 각각 큰 항아리고개, 작은 항아리 고개 등으로 별칭을 갖고 있다.

이 고개는 길이라 매우 길고 인적도 없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언제부터인지 이 고개에 얽힌 음울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흑석쪽 고개 끝 산자락에서 6ㆍ25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후퇴중인 인민군이 수없이 죽어 온 산이 인민군의 시체로 뒤 덮혀 붉은 피가 골짜기로 흘러 내렸다는 것이다.

그 후로 큰 논나무 고개를 사람이 지날 때면 고개 양옆의 산봉우리의 사시나무가 울고, 커다란 항아리 모양의 바위 속에서 마치 항아리의 울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와 지나는 행인에게 공포감을 주고 있어 아마도 수많은 인민군의 원혼이 저승에 못가고 이 항아리 바위 속에 들어가 슬피 울고, 그 울음 때문에 사시나무가 떨면서 같이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ㆍ물탕골- 정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약수물이 나온다 하여 물탕골이라 한다.

추운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 한다.

ㆍ미륵바위- 흑석 동쪽에 있는 돌미륵으로 높이 약1.8m이다.

옛날 이곳 부락 뒤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정신이 이상하게 된 여자가 비 오는 어느날 이 바위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별안간 벼락이 쳐서 그 여자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한다.

지금까지도 오줌을 누던 흔적이 희미하나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다.

원래는 벼락바위라 불러오다가 언제부터인지 미륵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ㆍ미틔골- 정봉 북쪽 큰 골밑에 있는 골짜기로 쑥 들어가서 미틔골이라 한다.

※미(山)+티(峙)+골(谷)

ㆍ벼락바위(구전자:안광열76세)- 공심리에서 하귀리 넘어가는 쪽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벼락을 맞아 여러 조각이 났다하여 벼락바위 또는 벽암이라 한다.

ㆍ병목안- 흑석 앞에 있는 골짜기로 병처럼 오목하게 생겨서 병목안이라 한다.

ㆍ부처댕이(구전자:박득규74세)- 공심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절이 있었으나 폐허가 되고 현재는 돌부처만이 서 있다.

ㆍ소바위- 공심리 좌측에 있는 바위로 소처럼 생겼다하여 소바위라 한다.

※솟은 바위

ㆍ심석리- 행정구역상 심석1리 공심이와 심석2리 흑석을 합친 부락으로 공심이의 심(心)자와 흑석의 석(石)자를 따서 심석(心石)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속삼봉(구전자:안광열76세)- 공심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봉우리가 3개 있어 속삼봉이라 한다.

ㆍ아래우물- 공심리는 웃공심리와 아래 공심리로 나누는데 아래공심리에 우물이 있어 아래우물이라 한다.

ㆍ아랫공심리- 공심리는 웃공심리와 아래공심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래쪽에 있어 아랫공심리라 한다.

또는 아랫말이라고도 한다.

ㆍ오마니- 논나무재 밑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 5만석꾼인 큰 부자가 살았다 한다.

떡을 해먹으면 얼마나 많이 했는지 그 쌀을 씻는 물이 삼군리까지 흘러 내렸다 한다.

※ 오무라진 안쪽(內) 옴안이→오마니

ㆍ웃공심리(구전자:안광열76세)- 공심리 윗쪽 마을로 웃말이라고도 한다.

ㆍ월편- 아랫공심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바라본다 해서 월편(越便)이라 한다.

옛부터 이곳 월편은 부락이 형성될 당시 초승달 모양으로 생겨서 달 조각의 형상이므로 월편(月片)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ㆍ자우실- 공심리 서쪽에 있는 들로 자와 실이라고도 한다.

※자(재 峴)+우(위)+실

ㆍ장승거리- 소바위 뒤쪽에 있는 숲으로 장승이 서 있었다하여 장승거리라 한다.

ㆍ절터- 옛날 부처댕이에 있었던 절터를 말한다.

ㆍ정봉 - 마을 앞쪽에 봉우리가 있는데 이 봉우리의 형상이 고무래처럼 생겨서 고무래정(丁)자를 따서 정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정(頂 제일높은)+봉(峰)

ㆍ주막거리- 옛날 한양에 과거보러 가고 올때 쉬었다 가는 주막이 있었다하여 주막거리라 한다.

ㆍ큰골- 정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이 커서 큰골이라고 한다.

ㆍ터앞- 마을 앞에 있다하여 터앞이라 한다.

ㆍ흑석- 검은 바위가 많아 흑석(黑石)이라 한다. 또는 흑석동이라고도 한다.

ㆍ흑석에 관한 전설- 이곳 마을 앞산에 옛부터 병풍바위와 신랑바위라 불리우는 두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비만 오려고 하면 이곳 신랑바위가 검은색으로 변해 지므로 이 바위를 상징하여 검은 바위 즉 흑석(黑石)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흑석(큰바위)



제8절 삼군리(三軍里) (구전자: 임현옥86세(전지역) )


본래 여주군 소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신동과 색군리를 병합하여 삼군리(三軍里)라 하였다.

자연부락으로 삼군1리를 맹골이라 하며, 삼군2를 색군이라 한다.

이곳은 옛부터 삼신산(三神山)이라 칭하는 산이 위치하고 그 아래쪽으로 작은 샘이 있어 삼신탕이라 불리어 삼신동(三神洞)이 되었는데 조선 중엽 현재의 삼군2리인 색군동과 합치게 되어 삼신동의 삼(三)자와 색군동의 군(軍)자를 따서 삼군리라 하였다 한다.

ㆍ가골- 골짜기가 가늘고 물이 귀해서 땅이 매우 메말라 가골이라 한다.

※가(가생이 邊)+골(谷)

ㆍ가마리- 옛날 이곳은 물이 잘나서(샘이 잘나서) 농사가 잘 되었다 한다.

현재는 샘이 장마에 휩쓸려서 없어졌다 한다. ※가(邊)+마리(머리, 모리(隅))

ㆍ가장골- 골짜기가 가지처럼 갈라져서 가장골이라 한다. ※ 가장 (가쟁이, 변두리)

ㆍ검줄 ※ 검(곰(大))

ㆍ고뿌리- 삼군리와 심석리의 경계가 된다.

※고뿌리 =곱(倍 또는 曲)+부리(튀어나오는 곳)

ㆍ능골- 골짜기가 매우 작아 능골이라 한다.

※능(늠의 변음(늘어난)+골(谷) 큰 골에 붙은 곁가닥 골로 논밭이나 호수가 늘어난 곳이라는 뜻

ㆍ돌채미- 마을 앞쪽에서 승마장 가는 들

※돌(돌아 回)+참= 때, 시점

ㆍ맹골- 현 삼군1리 즉 맹골을 맹곡(猛 도는 孟谷)이라 한다.

※맹(매(山)+안(內)+골(谷) 산뿔 안동네라는 뜻. 양쪽을 산으로 안은 동네

ㆍ맹골- 맹곡, 삼신동으로 삼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 삼신당이 있었다 한다.

ㆍ맹골- 소가 누워있는 와우상(臥牛像) 이라고 하여 소의 울음소리를 상징하는 음(音)으로 ‘맹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먹실- 삼군리에 있는 돌 ※먹(물→뭇→묵(墨)→ 먹)

ㆍ멱절- 삼군리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절이 있어 멱절이라 한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옛날 고서방네가 묘를 썼는데 그 수 파보니 금붕어 3마리가 튀어나왔다 한다.

그래서 고서방네가 망했다는 설이 있다.

※멱(막힌)+저리(터垈)

ㆍ방축골- 삼군리에 있는 골짜기로 방축이 있어서 방축골이라 한다.

ㆍ삼신동- 맹골을 삼신동 이라고도 한다.

※삼(셋)+신(귀 귀퉁이 모서리) 삼각행태나 그중 한 구탱이에 위치

ㆍ삼신탕- 맹골에 있었던 샘물로 지금은 샘이 안나온다.

ㆍ색군리- 현 삼군2리를 색군리(色軍里)라 한다.

※색(새 間)+군(川)+샛내(새개울 마을이란 뜻)

ㆍ색군이- 옛부터 이 마을을 하귀리에 물이 맑아 선녀들이 내려와서 빨래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선녀들의 옷이 떠내려와 이 마을 하천에 걸렸다고 하여 색군이로 불리었다고 한다.

ㆍ색군이들- 색군이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ㆍ안골- 맹골 안쪽에 있는 들로 삼군리의 본토를 옛날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이 없다.

ㆍ안산- 맹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 바위가 있는데 이곳을 파면 여자가 바람이 났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은 절대 못 파게 했다는 설이 전해져 온다.

ㆍ절골- 삼군리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절이 있었다 한다.

ㆍ지마발- 마을 앞들을 지마발들이라 한다.



제9절 오산리(五山里) (구전자:박치정72세)


본래 여주군 소개곡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앞에 동그란 외딴 산이 있어 오미, 또는 오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산리(五山里)라 하였다.

ㆍ가남 휴게소- 오산 북동쪽에 있는 영동 고속도로의 휴게소, 상ㆍ 하행선 양쪽에 있다.

ㆍ감나무재- 오산리 마산재 너머에 있는 들로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다 하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고 특히 주위에 감나무가 많았다하여 감나무재라 하며, 절구통등 생활용품이 출토되었다 한다.

ㆍ공개들- 마을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곰개들 (큰 갯들)

ㆍ그리이스군 참전비- 가남 휴게소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비로, 1950년 6ㆍ25전쟁 때 전사한 그리이스군 741명의 영령을 기린 비다.

비 몸의 높이 7.20m, 밑단높이1.50m, 비 몸의 둘레 9.88 m, 밑단의 둘레16.08m 이다.

ㆍ긴 배미- 오산리에 있는 들로 논배미가 길다하여 「긴배미」라하고, 옛날에는 큰 웅덩이와 빨래터가 있었다 한다.

ㆍ동동산- 마을 앞에 있는 둥그란 산으로 본래는 바귀산이라 한다.

※독(獨) 동산의 변음

ㆍ동동산 바위- 동동산에 있는 바위로 마귀할미가 치마에 가지고 가다가 치마가 찢어져 떨어뜨렸다 한다.

ㆍ마산재(들)- 마을 뒤쪽 마산재 밑에 있는 들을 말한다.

※마는 말 (산말)의 뜻

ㆍ마산 - 마을 뒤쪽 산에 있는 고개

ㆍ미꾸리- 마을 오른쪽 영동 고속도로 밑 부근에 있는 들을 말하며, 미꾸라지가 많았다하여 미꾸리들이라 한다.

※미는 밑(下) 꾸리는 구리(골,고래)

ㆍ바위 뒤- 마을 앞 동동산 바위 뒤에 있는 들을 말한다.

ㆍ보뚜멍- 마을 왼쪽편 들에 샘이 잘나는 웅덩이가 있었고 거기에는 큰 보가 있었다하여 ‘보뚜멍’이라 한다.

ㆍ새내(들)- 동동산 미티에 있는 들로 두리봉쪽 들을 말한다. ※새+내

ㆍ새말- 오산리 서쪽에 새로 된 마을로 오산 초등학교 뒤쪽 마을을 말한다.

일명 신촌 이라 한다.

ㆍ새자리- 오산리에 있는 들로 새가 많이 날라와 앉았다하여 새자리라 한다.

※새(新)+자리(전답)

ㆍ솔모롱이- 오산리 영동 고속도로 육교 너머 부근으로 옛날에는 소나무가 많아 (솔모롱이)라 했으나 지금은 소나무는 없고 개간하여 경작지로 쓰고 있다.

※솔은 산+ 모롱이(隅)

ㆍ솜바위- 오산에 있는 들로 솜처럼 흰 바위가 많다하여 솜바위라 한다. 솜은 석(섬바위)

ㆍ신촌(新村)- 새말을 일명 신촌이라 한다.

ㆍ아랫 모퉁이- 오산리 아래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로 오산에서 가장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ㆍ안골- 새말 뒤쪽 감나무 재와 마산재 중간에 있는 들을 말한다.

ㆍ안터- 새말 뒷산 안쪽에 있는 들로 마을터 였다.

ㆍ엉건이- 오산리 왼쪽편 본두리 다리 부근 들을 말한다. ※ 엉은 언(못)건이는 건너

ㆍ오미 - 오산리의 옛 마을 이름 ※오능 외(욋단)+미는 (山)

ㆍ오산교- 지방도 335호상인 가남 오산리에 있으며 1971년도에 놓은 다리로 연장 4m, 폭6m, 높이5m, 4경간이다.

ㆍ왁대 을 - 시내들 즉 동동산 부근의 들을 말한다. ※왁대는 윗대(윗터)

ㆍ웃 모퉁이- 오산리 위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로 정미소 부근을 말한다.

ㆍ홰나무골- 오산리 앞산에 있는 골짜기로 전나무, 물푸레나무, 홰나무가 있어 황새, 백로,왜가리 등이 서식하였으나 지금은 날아오지 않는다 한다.

※홰는 (새들의 울이나, 쉬어간다는 뜻, 또는 보금자리)

ㆍ횡경골 - 오산리에 있는 솜바위 넘어 들을 말한다. ※횡경(가로, 橫)

ㆍ오산리- 아주 먼 옛날에 할머니 한분이 오갑산에서 바위를 날라다 놓고 은거 도중 마지막 바위를 기운이 빠져 떨어뜨린 곳이다.

지금도 「바구산」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한편 서산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오견형(鼇犬形, 자라모양)으로 오산이라 한데서 한때는 오산으로 불리웠고. 또한 바구산에 까마귀가 많아 오산으로도 불리웠으나 재수가 없다고 하여 오산(五山)이라 하였다 한다.

※오(鼇)는 흉조(凶鳥)의 뜻이다.

본래는 자라오(鼇)의 오산이다, 앞산이 자라처럼 생겼다는 뜻이고 그 전에는 순수한 우리말로 잘미(작은 산, 잣다른 산)을 한자로 자라산(鼇山)으로 표기한 것인데 후에 까마귀오(烏) 또는 다섯오(五)자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ㆍ바귀산 - 마을 앞 들 가운데에 있는 작은산(넓이 약 300평정도)으로 농사철에 김을 매거나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농악놀이의 장소로, 여름철에는 천렵의 장소로 많이 이용되어 일명「동동산」 이라고도 부른다.

특이한 것은 산 가장자리에는 뱀이 있으나 가운데에는 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운데에서는 여름철에 나무를 그늘 삼아 낮잠도 자고 마음껏 놀았다는 것이다.

현재는 몇 년 전부터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지낸다.

※ 발귀산 (전답 귀에 있는 산)



제10절 정단리(鼎丹里) (구전자: 손교환70세)


본래 여주군 가서곡면의 지역으로서 소(늪)에다 용재를 지내는 제단이 있으므로 소단, 솟단 또는 지형이 솥처럼 생겼다 하여 솥단이 또는 정단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일신동(신해리)의 일부를 합해서 정단리라 하였다.

ㆍ정단리(鼎丹里) - 마을의 형상이 앞에는 대신천이 반원형을 이루며 흐르고, 뒤에는 낮은 산이 대신천을 마주 바라보고 반원형을 이룬 부락으로 마치 솥뚜껑 형이라 솥단이라 부르다가 정단리로 지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솟(속(內)+단이(댕이)

ㆍ솥단이- 멀리서 보면 부락의 형태가 마치 솥뚜껑 같다하여 솥단이(鼎丹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솥(속 內)+단이(댕이)

ㆍ소단, 솟단, 솥단이- 정단리의 옛 자연부락 명칭.

※솟(솟은, 돋으라진)= 단이(달이 山)= 들가운데 산이 있는 부근

ㆍ용마묘- 옛날 정단리에 어린아이가 태어낳는데 하루는 부모가 잠깐 나갔다가 아이를 보러 방에 들어 왔으나 뜻밖에도 3일도 안된 아이가 방의 선반위에 앉아 있어 부모님이 깜짝 놀랐다 한다. 보니 옆구리에 날개가 있었다 한다.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지만 권력 다툼이 심한 때라 부모님이 잘못하면 이 아이 때문에 3족이 멸할까 두렵다하여 잠자고 있는 아이를 맷돌 짝을 얻어 죽였다고 한다.

그러자 정단리 뒷너머들 청소(연못으로 논 10마지기-2천평-정도 넓이라고 한다)에서 큰 용마가 나와 주인을 찾겠다고 마을을 서너 번 돌더니 사흘 만에 죽었다 한다.

용마가 죽자 마을 사람들이 잘 묻어 주어 묘가 보전돼 오다가 언제부터인가 나무와 풀이 우거져 묘의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한다.

마을 뒷산에 묘가 있다.

※용(山)+마(말, 마루)

ㆍ진늪(장늪)- 장단리 오른편에는 반디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긴늪, 일명 장늪이 있다.

여기에는 이심(악어와 비슷하게 생겼다 함)이라는 괴물이 살고 있어 주위에 송아지를 메어 놓으면 이심이가 잡아먹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한다.

지금은 메워져 논이 되고 부근에 작은 늪이 있다.

ㆍ가루개- 정단리 뒤쪽에 있는 들로 넓은 공간이 있어 논에서 벼를 베어다가 이 공간에서 추수하였다하여 가루개 마당들이라고도 한다.

※가루 (갈 支,分)+개(가 邊) 냇물이나 산이나 들의 갈림 지점

ㆍ국개(들)- 정단리 뒷산쪽에 있는 들 ※구구(골)+개(가쟁이)

ㆍ김치내골- 참나무가 많은 골짜기 숲으로 승냥이가 많아 사람이 다니지 못하였다고 한다.

ㆍ꽃말림- 정단리 왼편에 있는 산으로 꽃이 많이 피었다 하는데 특히 봄만 되면 진달개가 장사진을 이루었다 한다. ※꽃(곧은 直)+말림

ㆍ도둑놈 굴챙이산- 정단리 뒤쪽에 있는 산으로 산이 험하여 도둑놈들이 많았다하여 도둑놈 굴채이산이라 했다 한다.

ㆍ동동산- 정단리에 있는 산으로 봄, 여름에는 농악놀이, 천렵등 노는 장소로 많이 이용했다 한다.

ㆍ뒷너머- 정단리 뒤 너머에 있는 들로 청소(연못)에서 용마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메워져 논으로 사용한다.

ㆍ뒷내뚝- 정단이 뒤에 있는 뚝으로 일명 「뒷내개울」 이라고도 한다.

ㆍ반디- 정단리 오른쪽에 있는 들.

ㆍ밤모릉이- 정단리 밤 모퉁이에 있는 바위

※밤(바우)+모퉁이

ㆍ보들- 정단리에 있는 들로 얼마 전까지 집이 몇 채 있었으나 정단리로 이사 오거나 타지로 떠나갔다.

보가 있었다하여 보들이라 한다.

ㆍ사미(沙美)들- 마을 앞에 있는 들로, 옛날 제방을 쌓기 전에 장마에 하청이 범람하여 논에 모래가 쌓여 지금도 사미들에는 다른 들보다 모래가 많다고 한다.

일명「살미들」 이라고도 한다. ※살(살피, 경계)미

ㆍ앞내뚝- 정단리 앞에 있는 제방으로 마을 앞에 있는 뚝이라 하여 앞내 뚝이라 한다.

ㆍ앳동지- 정단리 좌측 편에 있는 들을 말한다. ※앳(욋)+등지

ㆍ용개- 정단리 오른쪽에 있는 들로 「응개 」라고도 한다.

※응(느러진)+개(가쟁이)

ㆍ정단교(鼎丹橋)- 정단리에 있는 다리로 1972년 완공된, 길이 40m, 폭5m 이다.

다리를 완공하기 전 마을 사람들이 통나무 다리를 놓고 생활하였는데 초등학교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등에 업어 건너 주기도 했다 한다.

ㆍ한자리 들 - 정단리에 있는 들로 일신(신하리) 쪽 등너머 끝자락 가에 있다.

※한(큰)+자리(놓지)



제11절 화평리 (花坪里) (구전자:유경복외3명68세)


ㆍ평리, 화련- 원래 여주군 소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화련(花蓮)과 평리(坪里)를 합하여 화평리라 하였다.

ㆍ화평리- 원래 이 부락은 화련의 화자와 평리의 평자를 따서 화평리라 하였는데 지금도 비교적 들이 넓고 계절에 따라 꽃이 많이 피는 부락이라 살기에 좋다한다.

ㆍ평리- 옛날에 이곳 안골과 뒤골에 원주 원씨 집안이 자리 잡아 살았으나 들이 좁고 응달진 곳이라, 현재 살고 있는 부락으로 옮겨서 자리 잡고, 원씨가 사는 들이라 하여 원평리라 부르다가 후에 원씨가 떠나자, 원자를 빼고 평리(坪里)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원은 본래부터라는 뜻이고 평리는 들 말이라는 뜻이다.

ㆍ큰골 (구전자:유경복68세)- 화련 뒤쪽산 골짜기로 골짜기가 커서 큰골이라 하며 일명 「터앞골」이라 한다.

ㆍ화평교- 지방도 335호사인 가남면 화평리에 있으며 1971년도에 놓은 다리로 연장 16m, 폭4m, 높이4m, 4경간이다.

ㆍ탑골(구전자:장익환45세)- 화련 마을 위쪽에 사찰과 탑이 있었으나 빈대가 너무 많아 태워버렸다 한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ㆍ텃골(구전자:유경복68세)= 본두리 쪽에 있는 미리 본 들쪽에 있는 들로 행정구역은 본두리 구역이다.

ㆍ조배비(구전자: 장익환45)- 화련 마을 앞 들을 말한다, ※조배는 좁은이고 비는 매미다.

ㆍ새 본들 (구전자:유경복68세)-가남 휴게소 앞에 있는 들로 보가 있었다 한다.

※새는 사이 본은 번 (버든) 들이다.

ㆍ진흙구덩이- 평리 오른쪽에 있는 들로 진흙이 다른 들보다 많아서 「진흙구덩이」 라고 한다.

ㆍ방앗고리- 마을 뒤쪽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거기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한다.

일명 밤골이라 한다.

ㆍ벌 본들(구전자:유경복68세)-가남 휴게소 앞에서 정단리 쪽까지의 들로 보가 있었다 한다.

※ 벌은(버덩) 본은 번(버든)들이다.

ㆍ뒤골- 평리 뒤쪽산 골짜기에 옛날 원님이 살았다 한다. 지금도 기와장, 사금파리 등이 출토되며 그 터가 있다 마을 뒤쪽에 있다하여 뒤골이라 한다.

ㆍ미리본들- 본두리쪽에 있는 들로 보가 있었다 한다.

※머리는 말의 파생어로 밀이고 본들은 번(벋은) 들이다.

산자락 끝에 있는 들이다.

ㆍ도마니- 화련 뒤쪽 들을 말한다.

※ 도마니는 돔(도는 回+안 內) 모퉁이 안쪽에 들이다.

ㆍ돌래- 화련과 평리 사거리쯤에 있는 들로 굽어져 있어 돌아 갔다해서 돌래라 한다.

※돌(回) +래(川)

ㆍ당골(구전자:장익환45세)-화련 에서 마래리쪽으로 서낭당이 있어 당골이라 한다.

ㆍ아래굴미(구전자:유경복68세)- 평리 마을 뒤쪽산골에 있는 들로 중간 굴미 아래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굴미= 골(谷) +미(山)

ㆍ금부터(구전자:장익환45세)- 금부처가 있었다 해서 금부터라 한다.

ㆍ중간굴미(구전자:유경복68세)- 평리 마을 뒷쪽산골에 있는 들로 윗굴미와 아래굴미 중간에 있는 들을 말한다. ※굴미는 골+미

ㆍ윗골미- 평리 마을 뒤쪽산골에 있는 들로 맨 위에 있는 들을 말한다.

※굴미=골+미

ㆍ가장골(구전자:장익환45세)- 마을 뒤쪽 광대리쪽 들을 말한다.

※가장은 가장자리 변두리의 뜻이다.

ㆍ곰다리 들 (구전자 :유경복68세)- 미리본들 쪽에 있는 들로 행정구역은 본두리 구역이다.

일명 고분다리라 한다.

※곰은 크다는 뜻이고 다리는 들이다. 고분다리는 곱은 들의 뜻이다.

ㆍ굴미- 평리 마을 뒤쪽산골에 있는 들로 윗굴미, 중간굴미 아래굴미로 나눈다.

※굴미= 골+미

ㆍ화련(구전자:장익환45세)- 조선 초엽에 이곳 탑골이라고 하는 골짜기에 큰 절이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던 스님이 지형을 보고 연못에 꽃이 핀 형상이라, 부락이 들어서게 되면 자손이번창할 곳이라는 말을 듣고 한집, 두 집 모여 살면서 마을 이름을 화련(花蓮) 이라 하였다 한다.

※ 화련사(花蓮寺)의 고지(古地)



제12절 본두리(本斗里) (구전자:신필순74세(전지역) )


본래 여두군 소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동, 두리봉리와 근남면의 동막리, 귀일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본동과 두리봉의 이름을 따서 본두리라 한다.

조선조 말엽에 서계면에 예속 ?조구동?이라 불리어 오다가 서계면과 남면이 합치자 본동으로 개칭되었고 광복이후 두리봉과 합쳐 본두리로 불리어 오고 있다.

ㆍ가재울- 본두2리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재가 많았다 해서 가재울 이라 한다.

※가 +잿+울= 가잿물

ㆍ고운두렁이- 지금으로부터 약1.000년경에 서씨라는 일가족이 살고 있던 곳으로 집 앞에 길고 곧은 논두렁이 집 앞을 가로질러 있어 곧은 두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은 집이 없다. ※곧은 +두렁

ㆍ구시울- 본두1리(묘촌) 고운 두렁이 밑에 있는 들을 구시울들이라 한다.

※곳(直)+울→ 곳시울- 구시울

ㆍ긴등고개- 마을 북쪽 등성에 있는 고개로, 고개가 길어서 긴등고개라 한다.

※ 긴+등(산마루)

ㆍ길은 골- 본두2리 마을 앞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가 곧바라서 (곧장 나서) 또는 길어서 길은 골이라 한다. ※긴+골

ㆍ농바위- 본두1리 뒷산에 농(장농)처럼 생겼다하여 농바위라 한다.

※논+바위=농바위(논다랭이위의 바우)

ㆍ당골- 옛날 당집, 또는 절이 있었다하여 당골 이라하며 지금은 없어졌다 한다.

※당+골

ㆍ도말 -본두2리(해촌) 북쪽에 잇는 들을 말한다. ※도+말

ㆍ동막(東幕)- 본두리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자연부락으로 옛날 안성과 장호원에서 곡식이나 각종 물건을 가지고 여주로 가는 길목에 4개의 주막이 있었는데 상인들이 이곳에서 술과 음식을 사먹고 쉬었다가는 곳이라 하여 본두리에 「동쪽」과 「주막」에 막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금강 골프장이 생겨서 해촌(본두2리)으로 옮겨와 살고 있어 동막이란 마을은 없어졌다. ※ 동(洞)+막(입구)

ㆍ동막앞- 동막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ㆍ두리봉- 이 마을에는 말의 형상과 비슷한 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가 논에서 곡식을 싣고 곡식창고로 가는 말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유래에서 마을 이름을 두리봉(斗里峯)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두리(말, 마리(山)+봉=높은 봉)

ㆍ산말 (산꼭대기)의 뜻인데 말을 한자로 옮겨 쓰면서 말두(斗)자를 쓰게 된 것.

ㆍ뒷자리- 마을 뒤쪽에 있어 뒷자리라 한다. ※자리는 농토를 말한다.

ㆍ뒷자리 개울- 본두2리 뒷자리에 있는 개울을 말한다.

※자리 (들 또는 농지의 뜻)+개울(川)

ㆍ메리기- 해촌 동북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지기(치기)- 면적을 뜻함, 모자리를 했다가 이양하기전에 종자로 직파할 때 종자 한말(1斗)이 소요되면 한마지기 한섬(1石)이 소요되면 한 섬지기다.

메는 무(無)가 변음 된 것으로 종자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모른다(넓다)는 뜻이다.

ㆍ묘촌- 현 본두1리를 묘촌(墓村)이라 한다.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고 한자를 사용한 후에 지어진 이름이다.

ㆍ묘촌-조기울- 원래 본두1,2리를 조기울이라 칭하여 오던 중 1700년대에 좌의정 김이소(金履蕭) 묘를 이곳 부락 중심에 이장한 후 묘촌(墓村) 조기울로 불려지고 있다.

※조기= 족(작은 小)이+울(당초에는 작았던 마을)

ㆍ바우자리- 옛날 바위가 많이 있었다 해서 바우자리라 한다. ※뒷자리 참고

ㆍ박작들- 현 본두2리 회관터를 박작들이라 하였다 한다.

※ 박+직(잣, 작은)+들 들가운데 작은 독산이 있거나 낮은 산끝에 있는들.

ㆍ방축굴- 옛날 방죽이 있어 방축굴이라 하였으나 현재는 금강 골프장으로 쓰인다.

(매립되었다)

ㆍ사내굴(벌)- 본두3리 두리봉쪽에 있는 들로 사내굴 또는 사내벌이라 한다.

※사(살피,경계)+내

ㆍ살구리-본두2리 영동고속도로 굴다리 부근들을 살구리들이라 한다.

※살 +구(귀) +들= 높은 머리들

ㆍ소곡동- 본두 1, 2리를 소곡동 또는 조기울이라 한다.

※조기울 참조 昭는 照가 잘못된 것.

ㆍ앞자리- 본두2리(해촌)마을 앞에 있는 들을 앞자리들이라고 한다.

ㆍ앞자리- 개울 앞자리에 있는 개울을 앞자리 개울이라고 한다.

ㆍ잘가리- 동막 앞에 있는 들을 잘가리라 한다.

※잘 +가리(개울)=잔개울, 작은 개울

ㆍ조개곡- 조개곡을 또는 조기울이라 한다.

ㆍ조개울- 조개울을 또는 조기울이라 한다.

※조기울 참조

ㆍ조기울- 본두리에서 가장 으뜸되는 마을로 조선시대 조개울면 또는 소개곡면이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가남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해촌 조기울, 묘촌 조기울로 나뉘어져 행정상 묘촌 조기울을 본두1리로 해촌 조기울을 본두2리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에는 불떨이, 또는 낙화놀이라는 동제의식이 있는데 해마다 음력 정월16일 밤이면 각 집마다 소나무 껍질과 숯을 섞어 빤 가루를 메밀집 잿물을 들인 창호지로 싸 말아서 지름8㎝, 길이50㎝쯤 되게 만들어서 마을 한가운데 있는 향나무와 미루나무 사이에 걸쳐 맨 철사 줄에 매어달고 불을 붙여 불똥이 떨어지는 밑에 제물을 차려놓고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현관이 되어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평안과 만복을 비는데 해촌과 묘촌이 해마다 번갈아 가면서 지낸다.

※조기는 족(작은 小) 의 뿌리 말이다.

ㆍ주막거리- 옛날 마을 입구에 주막이 있었다하여 주막거리라 하며 지금은 밭이 되 있다.

ㆍ중방축- 큰 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방죽이 있었으나 지금은 금강 골프장에 매립되었다.

ㆍ직묘- 고둔 두렁 이를 일명 직묘(直畝)라고도 한다.

ㆍ찬샘골- 긴등 미티에 있는 골짜기로 농사에 이용할 정도로 샘이 잘나서 찬샘골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현재는 금강 유리 공장 터로 매립되었다.

ㆍ참샘배기- 찬샘이 있어 참샘배기라 한다.

※ 참샘=찬샘보다는 끊어지지 않는 샘(진짜= 참 가짜= 개)

ㆍ큰골- 동막 북쪽에 골이 커서 큰 골이라 한다.

ㆍ큰골고개- 큰골 뒤쪽에 고개가 있는데 큰골에 있다하여 큰골고개라 한다.

ㆍ한터- 옛날 이곳에 한 집이 살았다 해서 한 집터 또는 한터라 한다.

ㆍ한(大)+터(垈)

ㆍ해촌 조기울- 일제 시대 농촌 식량증산을 위하여 부락마다 농촌진흥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마을 진흥회 명칭은 부락 중앙에 괴목인 해나무가 있어 해촌 진흥회라 하였으며 광복 이후 해촌 조기울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해골- 마을 한가운데 해나무가 있어 마을 명칭이 일명 해나무골 , 해골, 해촌, 해촌조기울로 불리어 온다. 옛날 도승이 심었다 한다.



제13절 하귀리(下貴里) (구전자:김교천61세)


원래 여주군 소개곡면의 면소재지로서 귀일(양귀리)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귀일 또는 하귀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귀리라 하였다 한다.

자연 부락 명으로 세군이 또는 시군이라 한다.

ㆍ건너말( 구전자: 김철수54세)- 시꾼이 건너 쪽에 있는 마을로 송촌말 이라고도 한다.

ㆍ검배(구전자:김동성69세)- 마을 앞에 있는 들로 검은 바위가 있어 검배들이라 한다.

※검(곰의 변음)+배들(들)=큰들 큰 산 밑에 있는 들의 뜻

ㆍ구레 ※구레(고래)

ㆍ구시울- 옛날 양반 중에 이차라는 사람이 딸을 아홉 명을 두었는데 결혼을 다 시키고 나서 죽자 사위들이 각각 글을 써서 깃발을 만들어 상여 앞에 꽂았다 한다.

그래서 「구시울」이라 한다. ※ 구시= 굿=귀퉁이

ㆍ남여글(구전자:김교천61세)- 논 ㆍ산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여우짓을 많이 했다하여 남여갈 불여우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다.

ㆍ닭발터- 하귀리 앞쪽 외딴집이 있어 닭을 많이 먹여 닭밭 터라 했다 한다.

※닥+발 +들밭이 아니고 산밭(비탈들)이라는 뜻

ㆍ되랭계 터(구전자:김동성69세)- 되돌아 간 다해서 되랭계터라 한다.

ㆍ방구내미- 방씨네가 많이 살아서 방구내미 들이라 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밧귀+내미(너머)

ㆍ뱀터(구전자:김교천61세)- 들판이 뱀처럼 가늘고 길어서 뱀터라 한다.

※뱀(배+미)+터=변에 붙어 내려간 들

ㆍ뽈터- 어려서 짚을 공처럼 둥글둥글하게 만들어 공을 차던 곳이라 뽈터라 했다 한다.

삼밭골- 옛날 이곳에서 산삼을 캤다 해서 삼밭 골이라 하며 지금도 어딘가에 산삼이 있을 거라는 설이 있다. ※산+박+골

ㆍ세군이(구전자:김교천외3명61세)- 옛날 송촌말에 큰 소나무가 있고 세군이 마을 입구에 또 큰 물푸레나무가 있고 동네 우물뚝에 오랜 된 향나무가 있어 선녀들이 나무 등에 줄을 메어 그네도 뛰고 또는 냇가에서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여 이 줄에 널었다 한다.

그래서 줄이 세 개라 세군이, 또는 선녀들이 빨래를 하였다하여 세군(洗裙)이라 한다.

※세(새,사이)+군(내)

ㆍ시군이(구전자:김동성외3명69세)- 마을 앞 개울가에 빨래터가 있었는데 선녀가 살면서 빨래를 하였다고 하여 세군이로 불리어 오다가 현재는 시군이로 부르고 있다.

하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시(새)+군

ㆍ소라터 ※소라(솔-언덕위,높은)

송촌말- 시군이 건너 쪽에 있는 마을로 소씨들이 살았다하여 송촌말이라 하고 또는 건너 말이라고도 한다.

ㆍ아래귀일(구전자:감동성69세)- 하귀리의 옛 지명으로 양귀리의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귀일 라고도 한다.

ㆍ안터- 옛날 안씨들이 살았다하여 안터라 하며 지금은 집이 없다.

옛날 방씨가 살았던 벼 노적가리를 쌓아 서로 마주 보였을 정도로 부자였다 한다.

ㆍ엉계미 ※엉계=언(물, 못)+개(가쟁이)+미

ㆍ영장개

ㆍ전다래

ㆍ주막거리- 옛날 주막이 있었던 곳이라 주막거리라 한다. 지금은 없어졌다.

ㆍ집뒤- 마을 뒤쪽에 있어 집 뒤라 한다.

ㆍ집뒤골- 송촌말 뒤에 있어 집뒤 골이라 한다.

ㆍ책계

ㆍ터앞들- 시군이 앞에 있다하여 터앞들이라 한다.

ㆍ하귀동- 현 하귀리를 하귀동이라고도 한다.

ㆍ하귀리(구전잠:김교천61세)- 옛날 이곳에 빨래터가 있었는데 선녀가 살면서 빨래를 하였고, 이 지역이 소개면 소재지로 빨래터 아래는 전혀 집을 지을 수가 없는 부적지라 빨래터 아래 집이 귀하다하여 하귀리라 하였다 한다.



제14절 안금리(安金里) (구전자:김성채67세)


본래 여주군 근남면의 지역으로 안금리는 1,2리로 나뉘어져 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안장골의 안(安)자와 금교동의 금(金)자를 따 안금리라 하였다.

옛날 뒤쪽에 대포산과 칠갑산 사이에 금다리 또는 쇠다리를 놓으면 왕터가 될 부락이라 하여 쇠다리라 하다가 쇠뚜리로 불리었고, 안장골은 마을 앞에 말안장 같은 바위가 있어 바위형상을 따 안장골이라 하고, 안장골 앞에 있는 마을은 한사람의 대지(한사람의 밭이었다 함)였다 해서 한밭이라 한다.

ㆍ쇠뚜리 (구전자:심성채외1명67세)- 부락의 터가 왕터인데 부락을 둘러싼 대포산과 칠갑산 사이에 쇠다리(金橋)를 놓아야만 왕터가 된다고 하였으나 당시 쇠다리 사설이 불가능하여 명칭만 쇠다리로 불러오다가 변음 되어 쇠뚜리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지금의 안금 2리로 웃담과 벌 담으로 나뉘어져 있다.

※쇠의 원뜻은 새의 뜻이다. 새+들(뚜리)이다.

ㆍ안장골(구전자:김성채외2명67세)- 옛날 부락앞 논 가운데에 말안장 같은 바위가 있어 바위이름을 안장바위로 불러 오던 중 그곳에 부락이 들어서자 바위의 형상을 따서 안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장은 말안장, 소질마 처럼 손톱달 형태의 들이나 골이다.

ㆍ한밭(구전자:촤순묵)-안금1리는 안장골과 한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안장골은 마을 왼쪽에 있고, 한밭은 오른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즉 한밭은 집터가 현재는 여러 필지로 나누어져 있으나 옛날 에는 몇 집 안 되는 가옥이 한 사람의 대지(한사람의 밭)로 되어 있어 한밭이라 한다.

※한은 크다는 옛말이다 큰+발= 큰밭

ㆍ원당사 건립유래 (구전자:김성채67세)- 옛날 이곳에서 부처가 나왔다는 이유에서 여흥 민씨가 여기에 절을 건립하였는데 실은 땅속에 콩을 심어 놓고 그 위에 부처를 오려 놓고 콩싹을 트게 하여 그 위에 있는 부처가 땅속에서 솟아난 것처럼 꾸몄다는 것이다.

원당사는 1916년 민씨 집안에서 아들이 귀하다하여 절을 건립했는데 지금은 대법사로 명칭이 바뀌어 전해오고 있다.

ㆍ쇠뚜리느티나무- 쇠뚜리 느티나무는 군 나무로 지정된 320년된 나무로, 나무가 울고,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라에 큰 혼란이 일어난다고 한다.

ㆍ금전 구덩이(구전자:최순묵)- 장호원에 큰 욕심꾸러기 부자가 살았는데 그 부자의 돈을 뺏어 먹기 위하여 안금리 대법사 골짜기에 구덩이를 파놓고 금을 묻어 놓고 금광이 있다하여 장호원 욕심꾸러기 부자에게 팔아먹었다 한다.

그래서 금전구덩이라 하며 지금도 버스2~3대가 들어갈 정도의 굴이 파여 있다.

ㆍ가골 (구전자: 김성채67세)- 안금리 마을 뒷산 쪽에 있는 골짜기

※가는 가쟁이, 가생이, 변두리의 뜻이다.

ㆍ갈구쟁이 - 안금리 대포산에 있는 골짜기 갈라진 골짜기

ㆍ구일고개- 안금리 안장골에서 양귀리로 넘어가는 고개

※귀(모퉁이 隅)+일(날 山)=귀퉁이, 모퉁이 산의 고개

ㆍ금교동(金橋洞)- 안금2리의 옛 자연부락 명으로 일명(쇠뚜리)라 한다.

※쇠(새)+다리(달)

ㆍ다락터- 안 금리 대법사 올라가는 곳에 있는 들

※다락(달)+터=산중턱에 있는 곳.

ㆍ당고개 안 금리 안 장골 동쪽에 있는 고개로 서낭당이 있었다.

※닥 山이 堂으로 변음된 경우가 많다.

ㆍ당앞- 안 장골 동쪽에 있는 들로 서낭당이 있었던 앞들을 말한다.

ㆍ덕산바위- 쇠뚜리에서 안장골가는 중간에 있는 바위로, 비가 내리면 물이 급속히 내려가기 때문에 중간에 덕산 바위에 부딪쳐 물살이 약하게 내려가기 때문에 안장골을 보호하는 바위라 한다.

또한 이 덕산 바위에 정성을 드려 빌면 소원을 성취한다고 한다.

※덕(큰)+산= 바우

ㆍ동막고개- 안금리 한밭에서 본두리 동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ㆍ되논- 안장골 동쪽에 있는 들로 서낭당이 있었던 남쪽 길 위에 있는 논을 말한다.

※되= 돌아앉은, 돌머리주위

ㆍ돌굴봉- 안금리 한밭 북쪽에 있는 둥그런 산을 말한다.

ㆍ뒤골- 안금리 안 장골 뒤에 있는 들을 말한다.

ㆍ등골- 안금리 목골 앞산에 있는 골짜기로 말한다.

ㆍ떡배미- 안당골 되는 서쪽에 있는 논으로 큰 흉년에 떡 한시루와 바꾸었다 하여 떡배미라 한다. 그냥 배미라고도 한다. ※떡(큰)+배미

ㆍ말미깨- 안금리 한밭밑에 있는 들 ※끝머리 가장자리

ㆍ말배미- 안금리에 있는 논으로 모말(정사각형으로 생긴 것으로 쌀을 측정하는 도구)처럼 생겼다하여 말배미라 한다. ※말은 크다는 뜻이다.

ㆍ매봉- 쇠뚜리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매사냥을 많이 했다 한다.

※ 매+봉

ㆍ목비- 안금리 대법사 너머에 있는 산 ※비탈목의 뜻

ㆍ물탕골- 안금리 쇠뚜리 쪽두리봉 중간 턱에 있는 골짜기로 약수터가 있다하여 물탕골이라 한다.

ㆍ배미- 떡배미의 다른 말이다.

ㆍ뱀산- 안금리 바로 앞에 있는 산으로 뱀처럼 생겼다하여 뱀산이라 한다.

ㆍ뱀골- 뱀산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뱀이 많거나 또는 뱀처럼 생겼다하여 뱀골, 뱀산이라 한다.

ㆍ벌담- 안금리 쇠뚜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민진후 의 비석을 중심으로 아래 마을을 말한다. ※평지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

ㆍ범벅골- 안금리 쇠뚜리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 호박범벅 한동이와 바꾸었다 해서 범벅골이라 한다.

ㆍ병풍바위- 쇠뚜리에서 안 장골 내려가는 중간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병풍처럼 생겼다 해서 병풍바위라 하며, 겨울에도 물이 따뜻해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다.

ㆍ사구막골- 안금리 쇠뚜리 마을 앞 동쪽 골짜기에 사기를 만들어 팔던 곳으로 사기점이 있었다 해서 사구막골이라 한다.

※사구는 사이(삿)의 변음이고 막골은 막힌 골이란 뜻이다.

ㆍ사냥개- 쇠뚜리 앞산 길 건너 산에 있는 골짜기

ㆍ사로리- 안금리세서 하귀리가는 들을 말하며 모래가 많았다 한다.

또한 사로리 은 안금리에서 하귀리로 걸어갈 때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와 걷기가 힘들 정도로 겨울에는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한다. ※살로(살피, 경계실)

ㆍ순자골- 마을 동쪽 대포산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을 바위를 깨뜨려 구들장을 떳다 해서 순자골이라 한다. ※ 순(손,작은)+작(잣,小)=아주작은골

ㆍ쇠다리- 안금리 한밭 동쪽에 있는 마을로 쇠뚜리, 또는 금교동이라 한다.

현 안금2리의 자연부락명이다. ※새다리라는 뜻

ㆍ숲거리- 쇠뚜리 마을 뒷산에 있는 길로 특히 참나무가 많아 숯을 만들어 팔았다 한다.

지금도 숯가마타가 남아 있다. ※숲=수(藪)

ㆍ산등바위- 안금리 목골 앞산 밑에 있는 바위

ㆍ안 장골- 안장동이라고도 하며 안 금리 으뜸 되는 마을로 안장바위가 있다.

ㆍ안장동- 안장골을 또한 안장동이라고도 한다.

ㆍ안장바위- 안장골 남쪽에 있는 바위로 말안장처럼 생겼다 해서 안장바위라 한다.

ㆍ연재방아골- 쇠뚜리 대포산에 있는 골짜기로 연자방아가 있었으며 지금도 연자방아를 만들던 틀이 있다.

ㆍ웃담- 벌담 위쪽에 있는 마을

ㆍ웃등골- 안 장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

ㆍ원당사- 원당사(願堂寺)는 쇠뚜리 서북쪽에 있는 절로, 지금은 대법사(大法寺)라 한다.

ㆍ원서골- 안금리 앞에 있는 골짜기

ㆍ윗터- 사구막골 위쪽에 있는 들

ㆍ절골- 원당사(대법사)가 있는 골짜기

ㆍ정찰골- 안금리 금당리로 넘어가는 골짜기

ㆍ족두리봉- 쇠뚜리 뒤쪽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족두리처럼 생겼다하여 족두리봉이라 한다.

※족+두리(머리)= 낮은 봉우리

ㆍ중바위- 안금리에 있는 바위로 중처럼 생겨서 중바위라 한다.

ㆍ중산골- 중바위가 있는 골짜기라 중산골이라 한다.

ㆍ진골- 골짜기가 길 다해서 진골이라 한다.

ㆍ집고개- 안장골 뒤에 있는 고개

ㆍ탁골- 안금리 정찰골 밑 우측에 있는 골짜기 탁= 턱이나 터의 변음

ㆍ헌터- 대법사 올라가는 다락터 남쪽에 있는 들

ㆍ흔티- 정창골 밑 흔티고개 밑에 있는 들

ㆍ흔티고개- 정창골에 있는 고개

ㆍ대포산- 대포산은 여주읍 하거리와 가남면 안금리, 본두리 경계에 위치한 비교적 험한 산으로 바위가 많이 산재해 있는데 그중에 우뚝한 바위 1개가 대포 모양으로 쭉 뻗힌 형상을 하고 있어 그곳에 살고 있던 인형왕후의 오빠 민진후가 대포산이라 하였다 한다.

※원래 환희산(歡喜山)인데 환희는 귀뿔(隅角)이라는 뜻이다.

ㆍ안금천(安金川)-여주군 가남면 안금리에서 시작하여 삼군리 대신천으로 합류되는 연장 약5.5㎞이다.



제15절 양귀리(兩貴里) (구전자:장영준78세)


본래 여주군 소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산귀동과 근남면의 귀일동을 병합하여 두「귀」자를 따서 양귀리라 하였다.

ㆍ양귀리(兩貴里)- 이 부락은 1개리가 두땀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개 땀은 「양지말구일」 또1개 땀은 「음지말 구일」로 불리어오다가 양쪽 구일을 합하여 양귀리 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귀(귀퉁이)+일(울 마을)

ㆍ구일(久逸)- 이곳 구일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누구나 이사만 오면 몇 년 안 되어 부자가 되어 귀일 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부락을 중심으로 길을 내자 2개면으로 나누어져(소개곡면의 산귀동과 근남면의 귀일동) 2개의 귀일이 생겼다.

그 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다시 합치게 되자 구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해골고개- 해골 널림에 있는 고개로 양귀리에서 금당초등학교 가는 지름길로 이용되었다.

ㆍ해골널림- 산이 넓고 평평해 옛날 쇠꼴을 많이 베었다 한다.

ㆍ철갑산- 철갑산은 양귀리, 안금리. 금당리의 경계를 이룬 높은 산으로 산세가 장군머리처럼 우뚝 솟아 있고 양편으로 철갑을 입은 장군의 모습처럼 첩첩이 작은 봉우리에 비늘이 달려 있어 철갑산이라 한다. ※ 철(새)+갑(솟은)

ㆍ잠봉산 - ※ 잠(잔 小)+봉(峰)

ㆍ지골- (구전자:장영준78세)

ㆍ영장께들- 영장께는 「빨리 가자」는 의미가 있다한다.

ㆍ웃갱기골- 마을 위에 있는 골짜기라 웃-갱기골이라 한다, (갱기골 참조)

ㆍ음달말- 양달말 반대편에 있는 마을로 응달쪽에 있다하여 음달말이라 한다.

ㆍ생교말림(구전자:이창영외3명75세)- 옛날 여주 향교에서 관리하던 산이라 하여 생교 말림이라 하는데, 지금은 개인 산이 되었다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땔감을 많이 구했다 한다.

ㆍ양귀교(구전자:장영준78세)- 지방도 335호상인 가남면 양귀에 있으며 1971년도에 놓은 다리로 연장 12m, 폭 7.5m 높이 2m 2경간이다.

ㆍ양달말- 음달말 반대편에 있는 마을로 햇빛이 잘 든다하여 양달말이라 한다.

ㆍ사장고개(구전자:이창영외2명75세)- 뱀처럼 꼬불꼬불하다하여 「사장고개」라 하며,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였을 때, 태평리로 넘어가는 지름길이었다 한다. ※사장(샛장등)

ㆍ상거리(구전자:장영준78세)- 강니미와 가느다리골이 갈라지는 곳을 말한다.

ㆍ무당바위- 북당골에 있는 바위로 무당이 북을 치며 굿을 하다 죽었다 한다.

ㆍ북당골- 옛날 절에 큰 북이 있었다 해서 북당골 또는 불당골이라고도 한다.

※북(북쪽)+당

ㆍ돌 패기골- 돌이 많아 돌로 만든 보가 있었다하며 물고기가 많았다 한다.

※ 돌+패기

ㆍ망영이골 ※ 망영

ㆍ구일 양귀리에서 가장 으뜸 되는 마을로 조선 숙종 때서부터 불러오는 지명이라 한다.

※귀일 (귀퉁이 모소리, 角),

ㆍ논내미재- 일명 논나무재, 논나무, 옻나무가 많아서 또는 산 정상에 항아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 항아리 고개라 한다.

ㆍ가는 다리골- 골짜기가 길고 가늘어서 가는 다리 골이라 한다. ※가는 +다리(달)

ㆍ강니미골- 가느다리 골 위에 있다 해서 강니미골이라 한다. ※강니+미

ㆍ고래들- 마을 앞에 있는 들로 들이 넓어서 고래들이라 한다.

※고래(골, 봇물을 대지 않는)




제16절 연대리(蓮臺里)


본래 여주군 근남면의 지역으로서 연대산 밑 골짜기가 되므로 연대굴 또는 연대등, 쑥디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대리 라 한다.

연대리는 지형이 연꽃 형상이라 하고, 쑥디는 연대 산골짜기가 움푹하게 파인 곳이라 쑥디라 한다.

마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이 멀리서 바라보면 연꽃형상을 이루고 있다하여 연대리라 불렀고, 연대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를 연봉이라 부른다.

ㆍ쑥디- 가평간씨와 여흥 이씨. 대성으로 옛날에 두 성씨가 피난처를 찾아 사방이 안 보이는 외진 곳을 찾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는데 움푹하게 파인 곳이라 「쑥디」라 불렀다 한다.

※쑥은 솟은 곳, 띄는 티(峙)다. 불쑥 솟은 고개, 쑥 들어간 골짜기 끝에 있는 고개라는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마을이 연대산 골짜기에 쑥들어 있어서 쑥디라고도 하고, 들에 쑥(식물)이 많아서 쑥디라고 도 한다.

ㆍ서시리- 연대리 부락에서 서쪽으로 약1㎞ 떨어진 곳에 주막 한집이 살고 있었는데 연대리에 처음 지은 집으로 서편에 위치하고 있어 서시리(西始里)라 하였다 한다.

일명 「곽지」 라고도 한다.

※서시리는 西堂 (서쪽울, 마을)이다

ㆍ가마골(구전자:이인성 70세)- 연대리 연대산에 있는 골짜기로 이천시와 여주군의 경계가 된다. ※가마는 큰의 뜻이다.

ㆍ공고개(구전자:이인성외 4명 70세)- 연대리에서 음성, 죽산 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무인지경이라 도둑놈이 많았다 한다. 고개 마루에는 서낭당이 있다.

※공은 곰(大也), 큰 고개의 뜻이다.

ㆍ공곡- 공고개 쯤에 있는 골짜기 ※ 공은 곰(큰)의 뜻이라 큰골이라는 뜻.

ㆍ굴 바위(구전자:간병택71세)- 바위가 구멍이 뚫려있어 굴바위라 한다.

ㆍ굴우물 - 굴로 된 우물이 있어 굴우물이라 한다.

ㆍ곽지 - 서리시 또는 주막거리라고도 한다. ※ 곽지는 구역지다.

ㆍ괭비

ㆍ군량골(구전자:간병택외4명71세)- 옛날 전쟁 중에 창고를 짓고 군량미를 쌓았다 해서 군량골이라 한다, 지금도 기와장 등이 출토된다 한다. ※구리안

ㆍ궁골(구전자:간병택71세)- 옛날 군량을 준비하던 곳이라 한다. ※ 궁(크다)

ㆍ눙고개- 옛날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낼 때 절대 이 눙고개로 상여가 넘어가지 못하였다 한다. 그 이유는 마을에 흉사가 있을까봐 그랬다 한다.

※눙= 누은

ㆍ능안(구전자:이인성70세)- 옛날 여흥 이씨 묘가 여주 세종대왕 영릉자리에 있었는데 영릉을 이장해 오면서 여흥이씨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지게에 연대리까지 왔는데, 지관이 말하길 오갑산에 명당이 있으니 오갑산에 묘를 써라하여 다시 지게에 지고 가려하자 지게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 묘를 썼다한다. 그래서 이곳을 능안이라 한다.

※능= 산줄기의 뜻, 산 안골

ㆍ대창(大倉)- 큰 창골을 말하는데 군량골 넘어 작은 창골과 큰 창골이 있다.

즉 군량미를 쌓아 놓았던 작은 창고와 큰 창고를 말한다,

※창골= 차안골=차안은 수리안= 수리안은 높은 안골이다.

ㆍ동막골 ※동막=가로막이

ㆍ매봉재- 연대산 꼭대기 봉우리를 매봉재라 한다.

여기에는 옛날 통신수단의 하나인 봉수제가 있었다 한다. ※매=山

ㆍ미력골- 미륵불이 서 있다 하여 미력골 또는 미륵절이라 한다.

ㆍ묘막(구전자:간병택71세)- 옛날 나쁜 병(전염병)으로 죽으면 이 묘막에 보관했다가 병균이 없어지면 전염병이 그치면 그 임자가 가져다 묻었다 한다.

ㆍ배바위(구전자:이인성외5명70세)- 배처럼 생겼다하여 배바위라 한다.

※ 배는 산 또는 큰 의 뜻

ㆍ족두리 바위- 바위가 족두리처럼 생겼다하여 족두리바위라 한다.

ㆍ북당골(구전자:간병택외4명71세)- 옛날 전쟁 중에 북을 쳐서 군인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했다하여 북당 골이라 한다. 또한 이곳에 불당이 있었다 한다.

ㆍ북바위- 바위가 북처럼 생겼으며 두들기면 북소리가 났다하여 북바위라 한다.

ㆍ뾰족바위- 바위가 뾰족하게 생겼다하여 뾰족 바위라 한다.

연대산 꼭대기에 있는 바위로 옛날 남ㆍ 여가 사랑을 속삭였다 하여 사랑바위라 한다.

ㆍ새낭골(구전자:간병택71세)- 참나무가 무척 많았다 한다. 새+낭(날미-날)

ㆍ사정께-마을 입구에 느티나무가 있는데 여기에 정자를 지어놓고 활을 쏘던 장소라 하여 사정께라 한다.

ㆍ소죽골- 소(연못)가 있어서 소죽 골이라 한다.

ㆍ소창(小倉)- 작은 창골을 말한다. ※창골참조

ㆍ수풍- 오리나무 숲이 많았다 한다.

ㆍ안골- 마을 안쪽에 있는 골짜기라 해서 안골이라 한다.

ㆍ양지땀- 연대리 양지쪽에 있어 양지땀 마을이라 한다.

ㆍ연대리- 연대리를 연대굴이라고도 한다. ※굴은 골

ㆍ연대동-연대리를 연대동이라고도 한다.

ㆍ연대 미륵불(구전자:간병택외5명71세)- 미력골에 있는 미륵으로 높이 약 2m정도로 다리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

ㆍ음지땀(구전자:간병택71세)-연대리 음지쪽에 있어 음지땀 마을이라 한다.

자월 용수정(구전자:간병택외3명71세)-일제시대 때 용수정이라는 못을 파서 식수로 이용하게 했다. 지금은 메워져서 없어졌다.

ㆍ자채낭골(구전자:간병택외4명71세)- 옛날 임금님께서 드시던 자채벼를 재배하던 곳이라 하여 자채낭골 이라 한다. ※잣재(작은고개)안골

ㆍ작은 창골(구전자:간병택71세)- 전쟁 중에 군량미를 쌓아놓던 작은 창고가 있었다 하여 작은 창골이라 한다. ※창골 참조

ㆍ주막거리(구전자:이인성70세)- 술을 팔던 곳으로 일명 「서시리 주막」 또는 「곽지」라 한다.

ㆍ큰골(구전자:간병택71세)- 골짜기가 커서 큰골이라 한다.

ㆍ큰 창골- 전쟁중에 군량미를 쌓아놓았던 큰 창고 가 있었다 해서 큰 창골이라 한다.

ㆍ토끼울- 토끼가 많아서 토끼울이라 한다.

ㆍ헌더미- 지금은 원예작물재배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제17절 금당리(金塘里) (구전자:조문섭외5명66세)


본래 여주군 근남면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대도, 송당동 등을 병합하여 김대동의 김(金)자와 송당동의 당(塘)자를 따서 금당리 라 한다.

자연부락명으로 김대를 금당1리, 송당동 또는 소댕이를 금당2리라 한다.

ㆍ금당리- 금당리는 김대와 송당동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김(金)자와 송당동의 당(塘)자를 따서 금당리로 불리어 오고 있다.

소댕이(구전자:조문섭외2명66세)- 옛날 물 무재 너머에 백천조씨(白川趙氏)가 터를 잡았다하여 조촌동 이라 불러오다가 해방 이후 송당들이란 부락 앞들 이름을 따서 송당동이라 하였다가 변음 되어 「소댕이」라 한다.

※ 소는 솔의 변음이고 댕이는 등성이 이다, 야산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다.

ㆍ조촌동(구전자:조대섭65세)- 금당2리에서 금당1리로 넘어가는 물무재 고개 넘어 왼쪽편에 옛날 백천조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하여 조촌동이라 한다.

지금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조촌은 좁말(좁은골)의 한자표기어다.

ㆍ안강골(구전자:조무증65세)- 조선 효종때 금당2리에서 금당1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조촌동 이라는 부락 안으로 조씨와 송씨 몇 호가 터를 잡고 편안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곳을 안강(安康)이라 하였다 한다.

※안은 안쪽(內)이고 강은 (뫼 崗)이다, 안쪽 산이란 뜻이다.

ㆍ떡바뎅이(구전자:원호상외5명66세)- ①금당2리에서 서쪽으로 2㎞쯤 떨어진 곳으로, 옛날 에 대포산, 철갑산, 갱금산등 고산에서 전쟁을 하다 승리하고 나서, 이곳에서 떡을 해 먹었는데 떡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떡살을 씻은 물이 흘러 점동면 청미천까지 탁하게 흘러서 「떡바뎅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떡은 덕-크다거나 높다는 뜻이고 바는 받이며 뎅이는 등성이다.

즉, 큰 산등성이라는 뜻이다.

ㆍ떡밭텡이(구전자:조문섭66세)- ②옛날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오는 손님마다 떡을 해서 후하게 대접하자 그 집 하인들의 식역이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인들이 부근에 있는 중절 스님에게 손님이 오지 않으면 우리 신세도 편안 할 텐데 하고 하소연하자, 스님이 말하길 옆 연못에 살고 있는 이무기를 죽여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 길가에 대나무 쪽을 박아 놓으면 이무기가 지나다가 찔려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후 이무기가 찔려 죽고 나자 부자는 망했다는 것이다.

③구전자:(원용관42세)- 옛날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그 부인이 외로이 살기 때문에 손님들을 융숭히 대접하고자 떡을 해서 잘 대접했다 한다.

그러자 옆 연못에 살고 있던 이무기가 샘이 나서 그 부인을 해치자 그 부자는 아침에 망했다한다.

④(구전자:조문섭66세) 옛날 부자가 망하고 나서 조행섭(작고)씨가 그 터를 찾아 집을 다시 짖고 살았는데, 6ㆍ25전쟁 때 난리를 피해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잠시 피난민 수용소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한다.

ㆍ황새머리(구전자:조대섭65세, 조문섭66세)- ① 이 지형이 황새머리처럼 생겼다하여 황새머리라 하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며 여기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임진왜란 때 이여송 또는 일제시대 때 일본 놈들이 두려워하여 그 혈을 끊는다하여 그 곳을 파헤쳐 길을 만들었다 한다.

② 옛날 묘터를 잡을 때 지관이 묘를 얕게 파서 묻자, 이상히 여겨 지관을 붙잡아 고문을 가하여 그 이유를 묻자, 그러면 한자면 더 파봐라 했더니 그 속에서 학 또는 황새가 날라 갔다하여 황새머리라 한다.

ㆍ천마산 선바위(구전자:원용관42세, 조문섭66세)-① 말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상으로 천마산(天馬山)이라 하는데 그 정상에는 선바위(仙岩)라는 큰 바위가 서 있어, 이 지역에서 큰 인물이 날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일제시대에 일본 놈들이 두려워하여 그 혈을 끊는다하여 그 바위를 깨트리자 바위에서 피가 솟아 나와 골짜기로 흘러 내렸다는 것이다.

그 골짜기의 흙의 색깔이 검붉은 색인데 그 이유가 바위에서 흘러나온 피가 온 골짜기의 흙을 적시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② 천마산에는 선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옛날 효성이 지극한 분이 이곳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병이 나서 위독하자 꿈에 신선이 나타나 말하기를, 뒷산 바위 밑을 보면 꿩이 숨어 있으니 그 꿩을 잡아다 아버님께 해 드리면 병이 날 것이라는 현몽을 받아, 바위 밑에 가보니 꿩이 숨어 있어 잡아다가 해드리니 아버님의 병이 쾌차하였다 한다.

그래서 선바위(선암-(仙岩))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한다.

※선바위는 입암(立巖-우뚝한 바위)이다.

ㆍ장암사- 1940년경 평양에서 남하해온 사람들이 절을 세워 운영하다가 그 후는 어떤 보살 할머니가 관리하다 세상을 떠나자 빈 절이 되었다 한다.

그 후 1970년경 마을의 노병준(작고)씨가 꿈을 꾸었는데, 스님 한분이 나타나 신선바위(선바위)밑에 사찰을 건립하고 장암사라 하라는 현몽을 받아 부락민이 건립한 사찰이다.

ㆍ가마골(구전자:원용관42세,조문섭66세)-① 옛날 절이 있었던 곳으로, 스님이 말하길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와서 빌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하여 많은 양반집 부인들이 가마를 타고 와서 불공을 빌었다하여 「가마골」이라 한다.

② 옛날 금당리 이남 사람들이 한양을 갈 때, 여주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많은 양반네들이 가마를 타고 이 가마 골을 넘어 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마꾼들이 이곳을 지나는데 여기에는 아늑한 샘이 있어 가마꾼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다 한다.

그래서 「가마골」이라 한다.

※가마는 크다는 뜻이다, 큰 골에 붙여진 이름이다,

ㆍ가골(구전자:원호상66세)- 골이 가늘고 길어서 (가골)이라 한다.

※가쟁이(변-(邊)골이다.

ㆍ감주뱀이(구전자:입병돈64세,조문섭66세)-①옛날 어느 해에 매우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가 힘들자, 감주 한 동이와 바꾸어 먹었다 해서 감주뱀이라 한다.

② 옛날 진씨 부자에 홀로된 과부댁이 살았는데 비석거리에 논이 있어 여기서 수확되는 쌀은 모두 감주만 해 먹었다 해서 감주 뱀이라 한다.

ㆍ가시락터 (구전자:조대섭66세)- 큰 샘과 증보가 있었다 한다.

※가시는 가생이란 뜻이다.

ㆍ개경주(구전자:조문섭65세)- 금당2리에 있는 마을로, 금당교회 부근을 말한다.

ㆍ골말-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골말이라 하며, 진씨, 신씨가 처음 살았다 한다.

ㆍ곽지(구전자:조대섭65세)- 일명「서시리」라 하며 옛날에 주막이 있었고 이를 서시리 주막이라 한다. ※ 구역지란 뜻이다.

ㆍ금당교(구전자:원용관42세)- 지방도로 335호상인 가남면 금당리에 있으며 1969년도에 놓은 다리로 연장10m, 둑6m, 높이 2m 1경간이다.

ㆍ김대(구전자: 조무중 64세)

① 먼 옛날 이곳에 금전팔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금전팔이의 금(金)자와 판 장소가 연대산 이어서 연재의 대(垈)자를 따서 김대(金垈)라 불리었다 한다.

※금(金)은 새, 대(垈)는 터, 새터라는 뜻이다.

②(구전자:조대섭64세) 금당1리의 옛 이름으로 금대동이라고도 한다.

ㆍ갈산듸(구전자:원용관42세)- 금당2리의 북쪽 천마산 자락에 있는 들로 큰 산뒤 옆들을 말한다.

ㆍ독쟁이(구전자:조대섭64세)- 지형이 독처럼 생겼다 해서 「독쟁이」라 한다.

※독은 돌(石) 쟁이는 목쟁이다.

ㆍ두멍보(구전자:임병돈64세)- 큰 샘이 있고, 거기에는 보가 있었다하여 두멍보라 하며,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빨래도 하고,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윤이 난다 한다.

※두멍은 둠(둥근)의 뜻이다.

ㆍ둥금이 재(구전자:조문섭66세)- 비석거리에서 안강골 넘어가는 고개로 형상이 둥글다 해서 「둥금이 재」라 한다.

ㆍ뒷 모퉁이- 마을 뒤쪽에 모퉁이에 있다하여 뒷 모퉁이라 한다.

ㆍ멀듸고개- 두멍보 가는 쪽의 고개로 큰 산뒤나 가마 골에서 땔감을 해올 때 이 고개에서 쉬었다 가고 했다.

※머러은 말(山의) 뜻이고, 듸는 티(峙)다.

ㆍ말부리- 옛날 전쟁을 할 때 말을 많이 매어 놓았던 곳이라 하여 「말부리」라 한다.

※말은 산마루, 부리는 부랭이다(산부랭이에 위치했다는 뜻이다)

ㆍ모랭광낭골- 모래가 많아 모래광실, 또는 모래광골 이라고도 한다.

※모래는 몰(말의 패생어로 산이란 뜻), 광실은 넓은 곳이란 뜻이다.

ㆍ문앞에(구전자:원호상66세)- 마을 앞에 있다하여 문앞에 들이라 한다.

ㆍ물 무재고개(구전자:조대섭64세)- 금당2리에서 금당1리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고개로, 옛날 백천조씨가 이 부근에 터를 잡고 살았다 한다.

※물은 말의 파생어고 무재는 고개의 뜻이다. 고개라는 뜻이 겹쳐져 붙은 이름이다.

ㆍ바른골(구전자:조문섭66세)-곧고 큰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아서 「바른골」이라 한다.

※곧은골의 뜻이다.

ㆍ백절(구전자:조대섭64세)- 옛날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절이 있었다 해서 「백절」이라 한다.

ㆍ뱀생이(구전자:조문섭66세)- 뱀이 많았다해서 「뱀생이」골이라 하며, 어느 해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뱀샘이 골을 떡 한 시루와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ㆍ뱅골- 지형이 둥그스름하다 하여 뱅곡이라 한다.

※뱅은 배안→ 배암 →뱅

ㆍ아랫말- 금당2리 아래쪽 마을

ㆍ비석거리- 선정비들이 서 있다하여 비석거리라 한다.

ㆍ안강곡- 소댕이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안강골이라 한다.

※안(內)+강(崗,山)+골(谷)

ㆍ분토골- 물무재 고개 넘어 분묘처럼 흙을 많이 쌓아 놓은 형상이라 「분토골」이라 한다.

※분토는 분토(粉土)가 나오는 곳도 있고, 분터(墳垈)라 하여 고려장 터도 있다.

ㆍ부리실- 큰 부리실, 작은부리실이 있는데 연못에 연꽃이 많아서 ‘부리실’ 이라 한다.

※부리는 튀어나온 곳이라는 뜻이다.

ㆍ샛터말- 금당2리 서쪽에 새로 터를 잡았다하여 샛터말이라 한다.

ㆍ예지비- 금당2리 북쪽에 있는 들로 장암사가 있다. ※옛집

ㆍ세쟁이(구전자:조대섭64세)

ㆍ소당들(구전자:조문섭66세)- 금당리에서 가장 으뜸 되는 들로 지형이 솥뚜껑처럼 생겼다하여 소당들이라 한다. ※소댕이 참조

ㆍ오능골- 금당2리 개경주 앞에 있는 들로 비석거리를 말한다.

※오는 외(외딴)+능은 음(늘은)

ㆍ왁새을- 왁새가 많아서 왁새을이다.

ㆍ송당교(구전자: 원용관42세)- 지방도 335호상인 가남면 금당리에 있으며 1969년도에 놓은 다리로 연장5m, 폭5m, 높이 2m 1경간이다. 앞개울이 흘러가고 있다.

ㆍ웃 모퉁이(구전자:조대섭64세)- 금당1리 위쪽에 있는 마을로 모퉁이가 된다.

ㆍ숲바께- 숲쟁이 바깥쪽에 있는 들을 말하며 큰 느티나무 3그루가 있었다.

※숲 밖앗쪽

ㆍ아래 모퉁이- 금당1리 아래쪽 마을을 말한다.

ㆍ은관이(구전자: 조대섭66세)- 마을 북쪽 욕골 앞들을 말한다.

ㆍ숲안(구전자;조문섭64세)- 숲쟁이 안쪽에 있는 들. 금당우체국 가기 전을 말한다.

ㆍ숲쟁이- 소나무 숲이 많아서 숲쟁이라 한다.

ㆍ요골(구전자:조문섭66세)- 은관이 뒤들을 말한다. ※위골이라는 뜻이다.(윗골)

ㆍ엄나무골- 엄나무가 많아서 엄나무 골이라 한다.

ㆍ장나드리(구전자:조문섭66세)- 하키 비슷한 운동놀이로 서로 선을 그어놓고 막대기로 장(막대기공)을 치는 놀이를 하던 곳이어서 장나드리라 한다.

※장터(겨자)가는 거리

ㆍ주막거리- 옛날 마을 앞에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라 한다.

ㆍ장터(구전자:조대섭66세)- 옛날 우(牛)시장이 있었다 한다.

ㆍ정동이(구전자:조문섭64세)- 개경주 옆에 있는 돌

ㆍ조산들(구전자:조대섭64세)- 금당1리 동.남쪽 논 가운데 작은 산이 있어 조산이라 하고, 여기에는 충수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한다.

지금은 오래된 느티나무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조산은 새산 독산이다.

ㆍ중봇들- 옛날 중보가 있어 중봇-들이라 한다.

ㆍ중절(구전자:조문섭64세)- 옛날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중절이라 한다.

부처등 유물이 많이 나왔다한다.

※중절이는 가운데 말이라는 뜻이다.

ㆍ직골(구전자:조대섭64세)-골짜기가 직선처럼 생겼다하여 직골 이라 한다.

ㆍ착골(구전자:조문섭66세) ※찻골(次谷)= 두 번째 가는 골

ㆍ큰골- 골짜기가 크다하여 큰골이라 하는데 우측을 동력골 또는 바른 나무들이 많아 바른 골이라 하며 좌측은 엄나무가 많아 엄나무골이라 한다.

ㆍ학교모퉁이(구전자:원용관42세)-금당2리 서쪽 모퉁이에 초등학교가 있었다하여 학교모퉁이라 하며, 지금은 금당1리에 금당초등학교가 건립돼 있다.

ㆍ햇골(구전자:조대섭64세)- 금당1리에서 양귀리로 넘어가는 골짜기.

※해가 뜨거나 질 때 걸치는 골.

ㆍ금당리 선돌(구전자:원용관42세)- 조선시대 태종의 부마가 덕실 (점동면 덕평리)에 살았는데, 부마가 어느 날 개금산에 올라가 이곳에서 내 눈에 보이는 땅을 소유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사람을 시켜 그 뜻을 임금에게 고하자, 임금은 “그래 어디까지 보이더냐”고 묻자, “남대문 턱이 보일 듯 말듯하다”고 아뢰었다고 한다.

이에 임금은 부마를 처벌할 수 없어 그 사람을 가두고 신하들을 시켜 개금산을 정찰하게 한 후 개금산으로부터 사방10리에 경계표시인 선돌을 세워, 그 안에 있는 토지를 부마에게 주어 세금을 받고 살게 하였다 한다.

현재 점동면 처리, 완쟁이, 덕실, 가남면 금당리 4곳에 그 선돌이 있다.

※선돌은 신석기시대 유물로 인위적으로 세운돌이다.



제18절 금곡리(金谷里) (구전자:허영만69세)


본래 여주군 근남면의 지역으로 쇠일, 소일 또는 금곡리 라 하였는데 ,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곡리」라 한다.

옛날 조씨(趙氏)가 살다 떠나 조촌동(朝村洞)이라 했고,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허씨가 들어와 12대째 살고 있는 허씨 집성촌이다.

또한 마을앞 개금산에서 금을 캐어 내던 곳이라 하여 「쇠야」(金野)라 부르다가 금을 캐는 사람들이 많자 「소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개금산에 개만한 금덩어리가 묻혀 있다는 전설에 따라 금(金)자와 곡(谷)자를 따서 금곡리라 하였다 한다.

ㆍ소일(쇠일)(구전자:조준상74세)- 옛날 부락 앞 개금산에서 금과 중석 등을 캐어 내던 곳으로 원래는 쇠야라고 부르다가 금을 캐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쇠일」로 부르던 것이 현재에 이르러 소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쇠(새)+일(울, 마을)= 새간에 있는 마을의 뜻이며 쇠가 소로 변음된 것.

ㆍ금곡리(金谷里)(구전자:허영만69세)- 이 마을은 개금산을 마주 보고 있으며 개금 산에는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전설에 따라 금자와 곡자를 따서 「금곡리」라 하였다 한다.

※금(쇠라는 뜻에서 금(金)자를 쓴 것인데 쇠는 금(金)의 뜻이 아니고 새(사이)의뜻이다.) 사이에 있는 골짜기 즉 샛골이다.

ㆍ강금산(剛金山)의 전설

①옛날 이 산에 개와 같은 모양과 크기의 금을 묻어 두었는데, 억수같이 비가 내리고 난 직후 산 안개 속에 그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때 안개 속을 헤집고 이 금덩이를 캐려고 그 형상을 따라 산 속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갔으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는 교훈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식목을 하여 다시는 그 개와 같은 금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아무도 다시는 금덩어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마을도 평안한 채 살아온다 한다.

지금도 그 개만한 금덩어리는 강금산 어딘가에 묻혀 있을 거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강(崗)은 강(崗)의 고자(古字)이다, 산 이름 중에 강자가 붙은 것은 등성이라는 뜻이다.

(강(崗)은 멧등(山 - 산등성이)을 뜻하고 가파르고 척박하여 바위가 노출되는 산에 붙혀지는 글자다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 참조)

②(구전자:허성문외 4명 50세) 옛부터 이 산에서는 개만한 금빛이 비추어 많은 사람들이 금에 욕심을 내어 그 위치를 확인하고자 산으로 올라가면 보이지 않고 산에서 내려오면 또 금빛이 보이고 하여 산이 외로워 금빛을 띄워 아름답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산으로 유혹하여 외로운 정을 달랬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일명 개금산 또는 갱금산이다.

※강금산의 전설 참조, 剛(굳셀강)은 崗(뫼강)의 뜻으로 사용한 것 같다.

ㆍ기차바위(구전자:권순만외3명 40세)- 마을 뒷산 꼭대기쯤에는 기차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옛날 힘이 센 장수(장사)가 기차바위를 쇠지게로 지고 와서 마을에 갖다 놓았으나, 어린 아이들이 그 바위에서 놀다 다칠까봐 다시 쇠지게에 지고 산으로 옮기던 중 쇠지게가 부러져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한다.

허씨 집안에서는 이 기차바위 때문에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믿고 있으나, 지금은 암석 채취로 거의가 훼손되어 마을 사람들이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ㆍ귓골(구전자;허성문외2명50세)-개금 산 앞에 있는 들로 물이 많은 골짜기로 일명 샘골(샘이 많이 나서)이라 하는데 비만 오면 항상 물이 넘쳐 걱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근심 걱정 때문에 귀가 밝아져 「귓골」이라 하였다 한다.

※귀(귀퉁이 )+골 (谷)

ㆍ절터골(구전자:허실경외3명45세)- 옛날 어떤 지관이 명당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연대리 서시리 주막에서 바라보니 금곡리 뒷산, 지금의 절터가 명당이라 부랴부랴 달려와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애만 태우다 돌아가곤 했다 한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ㆍ쇠일, 소일 현 금곡리의 자연 부락명칭

※쇠:소(색)+일(울, 마을)= 샛동네

ㆍ새터말 (구전자:허영만69세)- 일명 새터로 금곡리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을 말한다.

ㆍ아랫말- 금곡리의 새터말의 아래쪽 마을로, 아랫말 사람들의 공동 우물과 주위에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ㆍ닭모름(구전자:허성문50세)- 새터말 서쪽 모퉁이로 옛날 닭을 몰고 놀았다하여 「닭모름」 이라 한다.

※닭은 닥의 뜻이고. 모름은 모퉁이(모롱이)의 뜻이다.

ㆍ금곡천(金谷川)(구전자:허영만69세)- 여주군 가남면 연대리, 금당 리에서 시작되어 점동면 부구리 청미천으로 합류되며 연장5.5㎞, 유로 연장8㎞, 유역면적 16.25㎞이다.

금곡리에서 시작되어 금곡천이라 하며 한강의 제2지류이다.

ㆍ강금산(剛金山) (구전자:허성문50세)- 일명 개금산 또는 갱금산으로 불리는 강금산은 가남면 금곡리, 송림리, 점동면 덕평리, 부구리 경계에 걸쳐 있는 높이 280m의 산으로 청미천과 오갑산을 바라보는 가남면 동부 지역의 상징적 산이며 금당초등학교의 교가(校歌)의 대상이 되고 있다.

ㆍ금곡교- 지방도 335호상인 가남면 금곡리에 있으며 1972년도에 놓은 다리로 연장10m, 폭 6m, 높이 2m 1경간이다.

ㆍ사까찌- 산 모양이 삿갓모양이고 구슬이 달린 모양이라 하여 「사까찌산」이라 한다.

※삿= 셋(間)= 사이의 뜻이고, 까는 갓(가생이)의 뜻이며 찌는 티 또는 치(고개)의 뜻이다.

삿갓치의 변음이다.

ㆍ안골- 금곡리 1번지로 새터말 안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ㆍ앞뒷골- 앞 뒤 꽉 막혀 있는 골짜기로 어떤 사람이 혼자 살았다 한다.

ㆍ절터골- 새터말 뒷산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하여 절터 골이라 한다.

ㆍ오링골- 금곡리 마을 앞에 있는 들로 오리가 많이 날아와 놀던 곳이라 하여 오링 골이라 한다.

※몰이(모롱이) 안골의 변음

ㆍ섯바탕(섶바탕)- 귀골 밑에 있는 들로 비가 오면 물이차 논뚝이 자꾸 무너져 섶을 많이 됐다.

섶이 많아서 섶바탕이라 한다. ※ 섭= 잎나무

ㆍ선들 금곡리 서쪽에 잇는 들로 선돌이 있다하여 선들이라 한다.

※ 선돌들 (立石坪)

ㆍ샘들- 마을앞 바로 외딴집이 있는 부근의 들로 샘이 많이 나서 샘들이라 한다.

ㆍ멍에미(들)- 금곡리 마을 앞 동쪽에 있는 들로 잉어가 많았다 한다.

일명(잉어보뚤)이라 한다. ※ 멍에 (반달형으로 굽은)+미

ㆍ갱금들- 마을 앞 갱금산 자락에 있는 들을 말한다.

※강금산의 변음으로 그 산자락의 들



제19절 송림리(松林里) (구전자:최성규69세)


옛날 음죽 북면 땅이었다가, 여주군 근남면의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어실, 새터, 으능쟁이를 병합하여 가남면의 송림리(松林里)로 즉 소나무 숲이 무성함으로 송림리라 한다.

개금산에 위치한 부락으로 국권파탈 당시 이곳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였는데, 이곳에 마을 터를 잡아 소나무 송(松)자와 수풀림(林)자를 따서 송림리(松林里)라 하였다 한다.

ㆍ새터- 조선시대 강릉 최씨 문중의 한 사람이 어시리 에서 남서쪽 사양진 장소를 택하여 새로 잡은 터라 하여 새터라 한다.

ㆍ어시리- 부락에서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왔으나 사람들이 성품이 짓궂은 것이 타부 락에 비교할 수 없어 어시리라 불렀다 한다.

※여주 땅으로 편입 되기 전에 음죽의 어서이촌(於西伊村)의 일부다.

본래 이름은 엇이리다. 엇은 서로 엇갈려 있다는 뜻으로 군계에 위치해서 점동면 쪽은 여주 땅이면서 움죽 쪽으로 쑥 들어와 있어 엇갈려 있는 곳이란 뜻으로 엇이리였다.

이것이 변음되어 어시리다.

ㆍ은응쟁이- 강릉 최씨 한분이 큰 은행나무가 있는 곳을 집을 짓고 살게 되어 은행쟁이라 불리던 것이 은응쟁이라 불리우고 있다 한다.

ㆍ효자 최세유의 묘- 송림에는 최세유(崔世溜)라는 효자가 살았는데, 어린시절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 모시는 범절이 정성과 존경으로 남다른 효도를 하여 일가친척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도 감복하였다 한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병을 얻어 병상에 누우심에 온갖 정성으로 치료해 들여도 차도가 없자 매일 정한수를 떠놓고 하늘에 빌며 백방으로 치료약을 구해다가 주어도 효과가 없자, 어느 날 동네 사람이 말하길, 환자의 대변을 맛보면 병세를 알 수 있다하여 어머니의 대변을 맛보는가 하면, 몹시 위급한 상황에 이르자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계속 단절하여 피를 흘려 어머니 입에 넣어 다시 소생하시게 하여 24일간이나 더 사시게 하였다.

그러나 그 정성도 허무하게 끝내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 노막을 짓고 3년상을 다한 효자라 한다.

이에 마을 선비들이 이 사실을 나라에 상소하여 나라에서는 효행을 사상하게 여겨 영조 1757년 에 효자문을 세우게 하고 정육품 벼슬을 내리고 그 후에는 정오품 공조정랑으로 올려주었다.

향리에서는 효자문을 건립하여 보전하여 오다가 6ㆍ25 전쟁 때 파괴되었다 한다.

ㆍ송림리 베틀 운덩이, 다듬이 운덩이- 옛날 이 마을에 진씨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손님 대접을 많이 하다보니 하인들의 일이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이때 스님이 시주하러 왔을때 하인들이 일이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신세좀 편안하게 해주시오” 하니 스님이 말하길 새터 앞산에 있는 바위를 깨뜨려 버리면 된다하여 하인들이 바위를 깨트리니 진 부자는 망했다는 것이다.

그 후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갖다 묻어 베틀을 묻었다 해서 베틀운덩이, 다듬이를 묻었다 해서 다듬이 운덩이라 한다.

지금은 진부자네의 집터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ㆍ괭지들 ※구역지 들의 뜻

ㆍ당뒤들- 당집 뒤쪽에 있다하여 당뒤들이라 한다.

※당은 닥(山)의 변음이다.

ㆍ덕고걔(구전자:최성규69세)- 새터에서 연대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

※덕은 크다는 뜻이다.

ㆍ도구막골- 도구막골 풀이 많아서 도구막골이라 한다.

※ 동리 밖이란 뜻

ㆍ동방골- 은응쟁이 동쪽방향에 있다하여 동방골이라 한다.

ㆍ뒤구리- 뒤쪽 구석에 있어서 뒤구리들이라 한다.

※구리는 고래의 변음

ㆍ밤나무골(구전자:최춘웅60세)-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골이라 한다.

ㆍ병풍바위(구전자:최성규69세)- 병풍처럼 생겼다 하여 병풍바위라 하며 절이 있었다 한다.

ㆍ삿갓재 고개가 삿갓처럼 생겼다하여 삿갓재라 한다.

※삿갓은 새+가(가쟁이)

ㆍ산숫골- 골짜기에 산소(묘)가 많아서 산숫골이라 한다.

ㆍ삼쟁이- 삼승리 삼쟁이에 연결되어 있어 삼쟁들이라 한다.

ㆍ새터앞- 새터 앞에 있다하여 새터 앞들이라 한다.

ㆍ샘치(구전자:최성규69세)- 샘이 잘나서 샘치 들이라 한다.

ㆍ석달미- 은응쟁이 앞들을 말한다. ※ 석달+미

ㆍ서낭고개- 서낭당이 있어서 서낭고개라 한다.

ㆍ순옥골- 논이 질퍽해서 즉 시꾸뎅이가 많아서 순옥골이라 한다.

※순오고은 손옥(작고 오그러진) 골

ㆍ숯고개

①숯고개 밑에 있는 마을

※숲은 숫으로 숭상(신앙의 대상)하는 산의 뜻

②어실이에서 덕평리 넘어가는 고개 밑에서 숯을 만들었다하여 숯고개라 한다.

ㆍ숯고개들- 숯고개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ㆍ숲풍- 마을 앞산에 소나무가 많아서 숲풍이라 한다.

ㆍ안들- 새터 안쪽에 있다하여 안들이라 한다.

ㆍ배나무 들- 배나무가 많았다하여 배나무들이라 한다.

ㆍ애공박골 ※욋단곡 박(外)의 골짜기

ㆍ오랑가리 ※가리는 개울의 원어

ㆍ왝두락(구전자:최순웅60세) - 송림리에서 삼승리 내려가는 들을 말한다.

※왯뚜락= 왯(욋단)+뚜락(들)

ㆍ은응쟁이- 큰 은행나무가 있어서 은응쟁이라 하며, 저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ㆍ자월들- 순옥골 서쪽들을 말한다. ※자는 작은 월은 들

ㆍ장골- 골짜기가 길어서 장골이라 한다. 장치기 놀이하던 골의 듯도 됨

ㆍ절골- 개금산에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 하여 절골이라 한다.

ㆍ창내미(구전자:최순웅60세)- 은응쟁이에서 연대리 넘어가는 쪽을 말한다.

※네미는 너머란 말

ㆍ큰골(구전자:최성규69세)- 골짜기가 커서 큰골이라 한다.

ㆍ토골- 골짜기가 깊어서 토골이라 한다. ※터골

ㆍ항아골- 골짜기가 항아리처럼 생겼다하여 항아골이라 한다.

※한(큰)+안+골

ㆍ흔터- 옛날 마을이 있었다하여 흔터 또는 헌터라 한다.



제20절 삼승리(三乘里) (구전자:원용관74세)


본래 여주군 근남면 지역인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장리, 원승리, 송림리 일부를 병합하여 삼장(三壯)과 원승(元承)의 이름을 따서 삼승리(三承里)라 하였다.

ㆍ삼승리- 처음에는 원씨가 자리를 잡고 살아 원승리라 칭하여 오던 중 한비 두 집 늘어감에 따라 2개 자연부락이 증가되어 삼정이와 구터로 부르게 되고 이 삼개 부락을 통합하여 삼승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승리 참조

ㆍ삼정이(구전자:김근배외4명75세)- 이 부락은 속삼골(삼쟁이), 가삼골(가삼재이), 삼장골 등 3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 삼정이(삼쟁이, 삼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은 산의 변음, 재이는 장(긴 長)의 변음

ㆍ아랫말- 삼승리는 자연부락이 6개부락(웃말-원승이, 삼정이, 아랫말, 헌터, 음달말, 황터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아래에 터를 잡았다고 하여 아랫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ㆍ원승이- 옛날 강원도에 살던 원씨가 처음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원씨가 자리 잡은 곳이라 하여 원(元)자를 땄고, 이 사람이 부락에 대를 이어 살게 되자 승(承)자를 붙여 원승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갈+ 안+골= 갈라진 안골

ㆍ강심재(구전자:원용관74세)- 가장골 밑 골짜기를 말한다.

강삼= 가심 =가쟁이

ㆍ동네말림- 동네에서 공동으로 마림했다 해서 동네말림이라 한다.

※말림이란 조선시대 고관, 세도가 또는 부락자체에서 자기네들만이 땔나무나 풀을 베고, 다른 사람은 금지시키는 것으로 시초장(柴草場)이라고 하였다.

ㆍ동네 말림고개- 동네 말림에 있는 고개라 동네말림고개라 한다.

ㆍ무술봉- 일명 후산이라고도 한다.

※무술 = 뭇숫(물이 많이 흐르는 골 위의)+봉(峰)

ㆍ방축골- 방죽이 있었다 한다.

ㆍ분토골(구전자:이석모72세)- 분토가 많이 났다하여 분투(토)골이라 한다.

ㆍ삼승천(三乘川)(구전자:원용관74세)- 가남면 삼승리에서 시작하여 점동면 덕평리 청미천 으로 합류되는 연장4.1㎞, 유로 연장5.5㎞,유역면적 10.51㎞로 청미천의 지류이다.

삼승리에서 시작된 하천이라 삼승천이라 부른다.

ㆍ삼장골(구전자:김근배75세)- 골짜기가 3개로 나누어져 있다해서 삼장골이라 한다.

※삼장곡(三長谷)

ㆍ삼장리(三壯里)(구전자:김근배외2명75세)- 삼장리는 삼당이, 삼쟁이, 삼정이라 부른다, 지형이 삼장 (농삼장)처럼 생겼다 해서 삼장리라 부른다.

※삼+장+이 큰 마을 세군데 중 하나거나 큰 땀이 세 개 있는 마을의 뜻

ㆍ샘골- 큰 샘이 있어 샘골이라 한다.

ㆍ숯고개(구전자:원용관외3명74세) - 숯을 구웠던 고개로 숯가마가 있다.

숫은 탄(炭) 보다는 응-숫놈) 또는 이주위에서 제일 높은 산의 뜻에서 연유된 것임.

ㆍ쑥디 모롱이- 삼승리에서 연대리(쑥디)로 넘어가는 모롱이라 해서 쑥디 모롱이라 한다.

※쑥디= 숫 + 티

ㆍ아랫말- 일명 하촌이라 하는데 6개 부락중 아래 터를 잡았다하여 아랫말이라 한다.

ㆍ원수골(구전자:원용관74세)- 원승이 방죽골 위쪽 골짜기를 말한다.

원(원(元)래)+수+골

ㆍ원승리- 원승이, 삼승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

원(원래, 元祖의뜻)+숫(雄) +里

ㆍ원승이 고개(구전자:원용관74세)- 원승이에서 이천시 장호원읍 풍게리로 넘어가는 고개

ㆍ음달말- 6개 부락중 하나로 응달쪽에 있어 음달 말이라 한다.

ㆍ음달말 고개-음달말 뒤에 있는 고개

ㆍ음달말 들- 음달말 앞에 있는 들

ㆍ엄장골(구전자:이석모외3명75세)- 부자 엄장자가 살았다 해서 엄장골이라 한다.

※엄장( 엄지, 제일, 첫째)

ㆍ장골 고개(구전자:원용관74세)- 아랫말 뒤로 송림리 장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골짜기가 길어서 장골이라 한다.

ㆍ터앞- 원승이 마을 앞에 있다하여 터앞이라 한다.

ㆍ텃골- 옛날 집터가 있었다 해서 텃골이라 한다.

ㆍ토골- 골짜기가 깊어서 토골이라 한다. ※ 토(터 垈)

ㆍ하촌(下村)(구전자:원용관외4명74세)- 아랫말을 일명 하촌이라 한다.

ㆍ할미골(구전자:원용관74세)- 할미꽃이 많아서 할미골짜기라 한다.

※할(한, 깊은)+미(山)

ㆍ할미골고개- 할미골에 있는 고개라 할미골 고개라 한다. (할미골 참조)

ㆍ헌터(구전자:이석모외4명75세)- 옛날 집이 있었으나 무너져 헌터가 되었다가 최근 다시 마을이 생겼다.

※헌= 한(큰, 깊은)의 변음

ㆍ황터울 (구전자:원용관74세) - 황토가 많아서 황터울이라 한다.

황(한 大)+터+울(마을)

ㆍ황터울 앞- 황터울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황터 참조

출처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http://www.yj21.net/cms.asp?intMenuIdx=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