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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

여주시 점동면의 지명 유래

by 범여(梵如) 2016. 2. 5.

점동면의 지명 유래

 

여주 군청 소재지인 여주읍의 남쪽에 자리 잡은 점동면은 동쪽으로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과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그리고 남쪽으로는 음성군 감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계 지점에 위치한 면이다.

 

과거에 여주군 지역은 충주 혹은 광주에도 속한 바 있었는데 지금의 점동면 지역은 1895년 갑오경장

당시(고종32년)에는 충주에 잠시 속하여 근동면과 점량면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896년에는 경기도에 편입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근동면의 일부와 점량면이 통합되어 지금의 점동면이 된 것이다.

 

근동면은 여주읍의 점봉리, 능현리, 멱곡리를 포함하고 지금의 점동면 중에서 처리 근처까지 였으며,

점량면은 오갑산 서편 능성 아래 청미천과 그 하구인 삼합리 지역까지 포함하였던 것이다.

 

예전에는 한강의 수운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내왕이 빈번한 곳이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바뀌고 농업이 쇠퇴하면서 1965년 이후로 인구가 격감하고 있다.

남한강과 섬강 그리고 청미천이 합수하는 지점이고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가 경계를 이루는

특수한 지리적 상황이 앞으로 역사, 문화, 관광지로서 큰 변모가 기대가 된다.

 

ㆍ淸渼川(청미천)

安城 一竹에서 내려오는 물과 陰城 甘谷面을 경유하여 흐르는 물이 서로 장호원의 白足山 기슭 남쪽에서

合流해서 장호원을 경유하여 우리 관내의 점동면 원부리로 흘러 德坪里 玄水里, 三合里를 경유하여

康川面 康川里와 점동면 도리 사이에 흐르는 남한강으로 合流하는 河川 이다.

이 河川은 많은 平野를 이룩하면서 흘렀고 또 管內에 들어와서 占東面 일대의 평야를 이룩하여 이들의

관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여름철 우기에는 나룻배가 다닐 수 있고, 옛날 하상이 깊었을 때는 우기에 여강을 거쳐 장호원까지

나룻배가 오르내릴 때도 있었다.

 

제1절 청안리(淸安里)

ㆍ청안리(淸安里)- 점동면 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안골」과 「주막거리」 두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최근에는

「도둑재」에 인가가 들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청안리 서북방에 신통산(新通山), 서남방에는 강금산(江金山)이 있으며 남쪽 멀리 오갑산이 내다보이는

아늑한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청안(淸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즉 제일 큰 마을인 「안골」과 남쪽 멀리 흐르는 「청미천」에서 행정 지명을 작명한 것이다.

 

ㆍ안골- 청안리에서 제일 큰 마을로서 신통산 아래 아늑한 계곡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들어서 「안골」이라 하였다.

즉 주막거리에서 볼 때 신통산자락 계곡 안쪽에 있는 아늑한 마을이므로 「안골」이라 불렀다.

 

ㆍ챙골-「안골」마을에서도 가장 윗쪽 신통산 계곡 깊숙히 자리 잡은 마을이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수리(頂)+안(內)+골=높은 안골이, 수레(車)+안골=치안골=챙골, 방아가 있는 안골마을

 

ㆍ주막거리 -「주막거리」는 장호원과 여주 그리고 가남 태평리로 연결하는 도로에 주막이 생겨나고 인가가 들어서면서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면사무소가 들어서고 점동면 행정의 중심지로 번창하여 큰 마을로 발전하였다.

단순히 주막이 있으니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주막거리에서 여주로 들어오는 길 약200m되는 지점 우측 편에 서낭고개가 있었으나 새롭게 넓은 길이

개설되면서 돌무더기는 훼손되어 없어지고 큰 참나무는 두그루 현존한다.

 

ㆍ도둑재-「안골」에서 신통산으로 오르는 길이 잇는 계곡을 「도둑재」라 하였는데 이 길은 예전에

여주로 통하는 길로 이용되어 사람들 내왕이 있었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험한 계곡을 지날 때 도둑을

만나는 두려움 때문에 「도둑재」라 일컬었다고 하지만 지명유래는 분명치 않다.

 

※돋(도드라진)+고개=돋으재=돋우재=도둑재, 지형상 나타난 길의 모습에서 유래된 지명

 

ㆍ신통산- 청안리의 서북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신통산(新通山)은 청안리의 북쪽을 아늑하게 감싸주는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이 산기슭에 여주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며 사람의 내왕이 많았다 한다.

 

지명의 유래는 알수 없다.

청안리「도둑재」에서 여주로 통하는 길 옆 신통산 중턱에 「미륵」이 서 있으며, 50년 전(1950년경)에

미륵이 있는 곳 근처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사람을 죽인일이 있으며 안골에 사는 주민 여러사람들이

이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하였다고 한다.

 

※신통사(神通寺) 절이 들어있던 산

ㆍ가래울 고개- 청안리「주막거리」에서 동쪽으로 300m 위치에 있는 언덕으로서 사곡리, 삼합리를 거쳐 강원도

원주의 부론과 충청북도 충주의 앙성으로 통하는 길이 지나며 「가래울고개」 아래 사곡리 「가래울」 이라는 마을이 있다.

 

ㆍ큰개울- 강금산과 신통산 계곡에서 시작된 물이 가남면 금당리에서 흘러 청안리 앞을 지나 청미천에 이르는 개울로서 부구리 앞의 나군이 뜰을 관통한다.

 

ㆍ구름절

청안리 남쪽에 자리 잡은 강금산의 북면 산자락에 언제나 구름이나 안개가 끼어 있으므로 그 지역을 구름절이라 한다.

※구릉(丘陵)+저러이=구릉절=구름절, 지형의 모습에서 생겨난 지명

 

ㆍ용두바위- 강금산 정상 아래 용머리 형상의 큰 바위가 있어 용두바위라 불리워지고 있다.

 

제2절 부구리(富九里)

부구리는 구비실, 동편, 밖앗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앞에서 기름진 나군이 뜰이 있어서,

예부터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여 「부구(富九)」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한 예전에는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하여 구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큰뒷골산 아래에 구비실 마을, 작은 뒷골산 아래에는 동편마을, 매봉아래에는 밖앗말이 형성되어 있으나

지금은 세마을이 경계가 없을 정도로 밀집되어 있는 한 마을이다.

밖앗말에서 침수피해를 당한 주민이 이주하여 사는 곳이 구비실 서편에 있는데 이곳을 새터라 부른다.

작은 뒷골 산에는 문효공 민진장(文孝公 閔鎭長)의 묘가 있으며 동편에서 밖앗말로 돌아드는 길옆의

「구석의(具錫儀) 효자비」가 있다.

 

ㆍ구비실 - 기름진 나군이 뜰이 마을 앞에 펼쳐져 부유한 마을이었다 한다.

그러나 마을 이름이 「구부(九富) 」인지 「구부(邱富)」 인지 아는 이가 없다.

※ 굽이=구비=구부, 마을 앞을 흐르는 큰 개울 굽이굽이 흐르는데서 붙여진 마을이름. 구비실-구부실

 

ㆍ동편 - 구비실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편이라 일컫는다.

 

ㆍ작은 뒷골산- 동편마을 북쪽에 있는 산으로 작은 뒷골 산에는 박수고개라 칭하는 언덕이 있고 서낭이 있다.

 

ㆍ밖앗말 - 매봉아래 아늑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인데, 「동편」 마을과 얕으막한 산 능선을 경계로 마을이 형성되어

그 산 능선 밖의 마을이라 하여 「밖앗말」 이라 칭하였다.

침수지역이라 낮은 곳에 살던 사람들은 새터로 이주하여 지금은 작은 마을이다.

 

ㆍ나군이 뜰 - 부구리 앞에 펼쳐진 기름진 뜰을 말하는데 청안리에서 내려오는 큰 개울을

기준으로 마을 안쪽을 나군이 뜰이라고 칭한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매납보, 두간보 등 가뭄에 대비한 저수지가 있었다.

 

ㆍ새터 - 「밖앗말」의 인가중에 저지대에는 상습적으로 수해를 당하므로 「구부실」 옆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이곳을 「새터」라 일컫는다.

※새로 생긴 마을이나 또는 마을과 마을 사이의 마을

 

ㆍ매납보 : 부구리 앞에는 기름진 「나군이 뜰」이 있는데 그곳에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조달하기

위한 큰 웅덩이가 있었다.그중의 하나가 「매납보」 라고 불려졌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산너머보 =뫼너머보=모너미보=매납보, 마을 앞쪽 맨 앞에 있는 보

 

ㆍ두간보 - 「매납보」와 마찬가지로 「나군이뜰」에서 농사에 필요한 물을 조달하기 위한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두간보」 이다.

그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사이를 막은 두간보=杜間洑

 

ㆍ매봉- 부구리 마을 중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밖안말」 뒤편의 산을 「매봉」이라 한다

그 이름의 유래는 분명치 않다.

 

※뫼봉(山峰)=미봉=매봉

 

ㆍ박수고개- 부구리의 가운데 마을 「동편」의 뒷산 즉 「작은뒷골산」에 「박수고개」가 있고 거기에 서낭이 있었다.

박수고개의 지명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박수무당이 살았다는 설이 있으며 그러므로 박수고개로 불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받(山)+새(間)+고개=받새고개=박새고개=박수고개

즉 산과 산사이에 길이 나고 그곳의 고갯길을 박수고개라 한다.

 

제3절 덕평리(德平里)

덕평리는 강금산 산자락에 형성된 덕실, 주막거리, 들말, 닥박골, 은행촌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앞에는 청미천이 흐르고 청미천변에는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바 「개기뜰」 이라 부른다.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행정지명을 정할 때 덕실(德谷)에 넓은 들(坪村:들말)이 있다는 뜻에서 덕평(德平)이라

이름을 붙인 것 같다.

 

ㆍ덕실(德谷) - 조선조 태조의 부원군인 길창군 권규(吉昌君 權珪)의 묘가 덕실마을 뒷산에 있는데 그 묘비에 「덕곡(德谷)」이라고 지명을 밝히고 있는바 이미 550년 전에도 「덕실」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었으며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길창군(吉昌君)의 묘역에는 경안공주(慶安公主)의 묘가 있다.

원래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궁골」이었으나 전염병으로 마을이 황폐되고, 그 후 지금 덕실 마을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ㆍ궁골- 덕실이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강금산 아래 넓은 계곡을 이룬 자리에 길창군 권규의

큰 저택이 있고 그 식솔들이 거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궁골」이라는 이름은 궁궐 같은 부원군 권규의 큰 저택이 있으므로 불려진 이름이다.

지금은 인가가 없으며 예전에 전염병으로 마을이 황폐되고 그곳에서 지금 「덕실」마을로 이주 하였다 한다.

 

※제자, 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의 집을 궁가라고 함.

즉 경안공주가 살던 집이 있었기에 붙여진 지명.

 

ㆍ거지허당골 - 거지허당골은 「궁골」을 이르는 말이다.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듯한 산세와

지형을 이루고 있으나 마을이 없고 인가가 없는 곳을 거지허당골이라 한다.

즉 「궁골」에는 예전에 전염병이 돌아 마을이 황폐된 곳이므로 「거지허당골」 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걸인이 인가를 바라고 들어갔다가 인가가 없어서 동량을 얻지 못하고 허탕을 쳤다는 뜻.

 

ㆍ장자골- 덕실뒤(북쪽) 에 궁골에서 강금산 정상을 바라볼때 나타나는 골짜기를 「장자골」이라 하며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지금은 그곳에 노총연수원을 건립하였다.

 

※잔(小)+자(山)+골(谷)= 작은 능선이 많은 골짜길=잔자골=장자골. 즉 이곳은 작은 능선이 많은

골짜기이므로 장자골이라 불리워진 것이다.

 

ㆍ사당골- 덕실뒤(북쪽)에 궁골에서 서남향으로 바라보이는 계곡을 사당골이라 부르는데 그곳에

예전에 권씨(權氏) 가문의 사당(祠堂)이 있었던 곳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ㆍ주막거리- 「덕실」 마을 동쪽에 형성된 작은 마을인바 장호원에서 여주에 이르는 길가에 위치하므로,

사람들이 내왕하는 거리에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라 불렀다.

 

ㆍ들말 고개- 덕실에서 남쪽 등성이 너머 들말로 가는 산길에 있는 작은 고개

 

ㆍ숯고개 - 덕실에서 가남면 송림리로 통하는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은 강금산 줄기의 작은 산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그 산능선에 있는 고개이름이 「숯고개」이나 그곳에는 작은산의 언덕이지만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덕실에서 숯고개에 이르는 길가에는 「서낭」이 있었다.

숯고개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고 지금은 그 길을 이용하는 이가 없다.

 

※숯은 숟(숟한) 많은, 큰(大)의 뜻일 수도 있다.

ㆍ개기뜰 - 덕실마을의 앞뜰을 「개기뜰」이라 부르는 바 청미천변의 비교적 넓은 들판이다.

이곳의 땅은 가뭄에는 농사지을 수 없는 「괴질땅」으로 비옥한 토질이 아니며 더욱이 수리시설이

없어서 농사짓기 어렵고 소출이 적은 농토였다.

그리하여 「괴질땅」에서 비롯된 「개기」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농토가 척박하여 땅 1마지기와 수수죽(개기) 1그릇하고도 바꿀 가치가 없다는 말에서

유래가 되어 수수개기(죽)의 「개기」라는 말에서 「개기뜰」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지금은 수리시설과 농지정리가 잘된 비옥한 들판으로 바뀌었다.

 

※갯+가(邊)+들(野人坪)=갯가들→개기뜰

ㆍ수반 - 덕실 북쪽 궁골 계곡앞에 펼쳐진 작은 들을 수반이라 하는데 그곳에는 깊이 빠지는

수렁논이 많아 농사짓기에 불편한 농토로 이루어졌다.

 

※숲안 = 수반

ㆍ능안 - 덕실에서 숯고개에 이르는 길이 뻗어있는 계곡으로, 강금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능선 아래에 아늑하게 펼쳐진 계곡

 

※능(陵 산줄기, 능선)+안(內)=능안 (산부리 안쪽의 뜻)

ㆍ은행촌 - 은행촌은 강금산 산줄기가 남쪽으로 흘러내려온 능선 마지막 부분에 형성된 마을.

즉 들 말과 닥박골 사이의 가운데 마을을 은행촌이라 한다.

은행촌 마을 언덕에는 수백년생 은행나무가 서 있으며 이 은행나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은 「은행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ㆍ닥박골 (구전자 : 김동수 68세)

은행촌 옆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이름의 유래는 알수 없다.

 

※달(山)+발(田)+골(谷)=닥밭골(산밭골) 닥(山)+박(山)+골(谷)=닥박골, 산마을

 

ㆍ들말- 은행촌 옆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앞에 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ㆍ엄정골 - 닥박골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산등성이 아래지역을 「엄정골」이라 하는데 가남면

송림리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냇개울」 건너편에 위치하는데 「엄정골」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시냇개울 - 가남면 송림리에서 흘러 닥박골을 거쳐 청미천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

 

제4절 원부리(元富里)

 

원부리는 청미천이 관통하는 마을로서 청미천 동편에는「원양이」「분터(토)골」 「방죽말」서편에는 「삼계통」 「오미」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부리」이름의 유래는 「원양이」와 「분터골」두 마을의 앞자를 모아 「원부리」라 칭하였다 한다.

 

ㆍ원양이 「원양이」는 원양사(元陽寺)라는 큰 절 입구에 자생된 마을로서 절 이름에서 마을 이름을 얻었다.

「원양이」는 마을 서북쪽 청미천변에 비옥한 들(거리들)이 있어 고대로부터 형성된 마을이다.

 

ㆍ안말 - 원양이는 「안말」과 「벌말」로 이루어졌는데 본래 오래된 큰 마을이 「안말」로서 야산 아래 형성된 마을이다

 

ㆍ벌말-(번말, 본말- 원양이 마을 앞 원부교에 인접한 마을로서 마을 앞 들판(벌판)에 생겨난 작은 마을이므로

「벌말」 이라 한다.

즉 원양이 마을 안에서 200m쯤 떨어진 마을

 

ㆍ분터골 (구전자: 황봉노 76세, 정범섭 63세)- 분터(토)골은 원부리 명칭의 유래가 되는 오래된

마을이었으나 최근에는 인가가 없는 빈 마을이다.

예전에 부자가 살았다 하여 「부(富)터」라하고 이것이 「분터」라고 불리면서 「분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황봉노氏)

또한 「분토골」이 바른 이름이고 그곳에는 도자기 원료로도 쓰이는 백분토(白粉土)가 나오므로

(粉土)라 하고 분토골로 칭하였다고도 한다(정범성氏)

 

ㆍ송미뜰 (구전자: 정범섭)- 원양이 주변에 넓게 펼쳐진 들판을 「송미뜰」이라하는 바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솔(松) +미(山) +들(坪)

ㆍ거리뜰 - 「거리뜰」은 원양의 비옥한 농토(들)를 이르는 바 「걸다(비옥하다)」는 뜻에 서 「거리뜰」이라

불려진 것이 지명의 유래이다.

 

※거리(道路邊)+들= 거릿人들

ㆍ자싯물 - 「자싯물」은 옛 원양사에서 쓰던 샘물(우물)이 있던 곳을 이르는 말이다.

우물에서는 사람이 마실 물도 얻고 그릇을 깨끗이 닦는 곳이므로 그릇을 「가시다」는 말에서

그 이름을 「자싯물」이라고 불려진 것이다.

 

※그릇을 씻는 물은 본래가 자싯물, 설거짓물이라 함.

ㆍ삼계통 (구전자: 황봉노 76세)

이곳은 원부리와 가남면 송림리 그리고 장호원의 풍계리 경계지점으로 3개 지역의 경계와

인접하므로 후대에 불려진 이름으로 「삼계통」이라 칭한다.

 

ㆍ오미- 청미천 서편 야산아래 형성된 작은 마을로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동래정씨(東來鄭氏)의 재실(齋室)을 최근에 건축하였다.

※오미= 외따로 떨어진 산(외+미(山)→오미)

 

ㆍ방죽말 (구전자: 정범섭 63세)- 예전에 작은 저수지를 막아 방죽이 있었으므로 그 주변의 마을

「방죽말」이라 한다. 지금도「방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마을은 「원양리」에서 「관할리」로 통하는 길옆에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ㆍ골말- 방죽말 입구에 오래전부터 인가가 들어서고 작은 마을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인가는 없고

「골말」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ㆍ원부교 (구전자: 황봉노 76세) - 예전에는 원부리 앞 청미천에 목교(木橋:떼다리)를 가설하여 내왕하였는데

철근콘크리트 다리를 1981년 개설하고 원부교로 칭하였다.

목교(木橋)를 가설하여 이용할 때는 다리 밟기(답교) 놀이가 정월대보름에 행하여 졌으나 일제 때 중단되었는데,

「원부교」가 개설되면서 중단된「답교놀이」를 부활하여 매년 재현하고 있다. (踏橋놀이)

 

제5절 관한리(寬閑里)

관한리는 오갑산 정봉아래 형성된 「어우실」과 「한밭들(閑田)」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앞 서편 멀리 청미천이 흐르는데 청미천에 이르는 넓은 들 즉 한전(閑田:황새들)이 있으며

오갑산을 오르는 산 입구에 저수지를 막아 농사에 이용하고 있다.

관한 은 어우실에서 한밭들을 내려다본다는 뜻에서 행정구역 개편당시에 붙인 지명이다.

 

ㆍ어우실(구전자:허만숙72세, 조정소 67세)- 관한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오갑산 아래 깊은 계곡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정월 보름날에는 「산제당」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ㆍ웃말 (구전자: 허만숙72세) - 어우실에서 오갑산으로 오르는 길가에 있는 마을

 

ㆍ새터 - 어우실 아래로 새로이 인가가 형성된 곳을 새터라 한다.

 

ㆍ저두리 - 「한밭뜰」에서 어우실로 올라가는 길가 모퉁이의 모습이 돼지 머리처럼 생긴 지형에서

「저두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재(언덕)+두리(모퉁이)=재두리=저두리=산모퉁이 돌아드는 곳

 

ㆍ이진터(봉) - 이진터는 오갑산 능선 가까운 곳에 평평하고 넓은 공간이 있는 고원지대를 말하는데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마구나 철편 등이 발견되고 예전에 군대가 주둔한 것으로 유추되는 바 오랑캐

주둔지라는 뜻으로 이진(夷陣)터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이라 생각한다.

 

ㆍ바른골(원골짜기) - 어우실에서 오갑산 정상으로 오르는 곳에 가장 긴 계곡이 있는데 이곳을 「바른골」이라 한다.

이곳에는 산신당이 있다.

마을에 곧바로 올려다 보이는 긴 계곡.

 

ㆍ삼선댕이 (구전자: 허만숙 72세) - 지금의 저수지 위쪽에 야산자락이 흘러내려와 있는데 그 모퉁이를

돌아서면 작은 계곡에 인가가 있는 바 이곳을 「삼선댕이」이라 부른다.

지명의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산자락을 돌아가는 모퉁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다.

 

ㆍ벼락칠 양달이(구전자: 허만숙72세)- 이곳에는 큰 바위가 많고 넓적한 바위도 있다.

사람이 쉬고 놀기 좋은 곳이다.

넓은 바위에 햇빛이 들고 산중에서도 평평한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자연스런 지명이다.

 

ㆍ미락골 - 어우실에서 오갑산을 오르는 산중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 밑에 굴이 있다.

지명유래는 알 수 없으며 이곳에서 소도둑이 은거한 적이 있었다.

 

ㆍ호랑이 웃방골, 호랑이 안방골- 오갑산 아래 골짜기인데 이곳에는 절터가 남아 있으며 매화, 해당, 돌배나무 등

사람이 심어 키운 나무들이 아직도 자라고 있다.지명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간마을의 자연스러운 이름이다.

 

ㆍ질마재 - 오갑산에 오르는 계곡에서 만나는 언덕인데 소잔등처럼 생긴 언덕이다.

이곳을 질마재라 한다.

질마재는 길마재와 같은 우리나라 고유지명으로 매우 흔한 지명이다.

 

ㆍ구수박골 - 오갑산의 한 골짜기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청노들- 청노들은 오갑산 험한 산중에 넓은터가 있는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한밭들(閑田) (구전자: 이석종 67세)-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들이 예전에는 황무지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빈 들판, 즉 한전(閑田)이었다.

그리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는 넓은 들을 한밭들(閑田)이라고 하고 인접한 마을의 이름도 「한밭들」로 부르게 되었다.

 한밭들이 농토로 개발되어 옥토가 되었고 마을도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넓은 들을 뜻하는데서 「한밭들」 이라고 불러졌다는 주장도 있다.

 

ㆍ황새들 - 한밭들 마을 앞의 넓은 들을 황새들이라 하여 한밭들의 별칭이다.

 

제6절 뇌곡리(雷谷里)

뇌곡리는 「우뢰실」,「세거리」, 「음달말」「양달말」네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거리 앞에서

넓은 「황새들」이 펼쳐져 있다.

오갑산 초입의 「우뢰실」 마을은 고려시대부터 이미 행정관청이 들어서 있었던 곳으로 아주 오래된 마을이고

「세거리」는 「황새들」이 좋은 경작지로 개발되고 또한 여주와 장호원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면서 크게 형성된 마을이다.

 

ㆍ우뢰실- 「우뢰실」로 불려진 연유는 행정관청터에 있는 은행나무(수령 1,000여년)가 벼락을 맞아 원목은

불타고 현재는 그 후 새순이 나와 거목을 이루고 있으므로 인하여 그 후 「우뢰실」이라 칭한다.

하지만 그러나 조사자의 생각으로는 산중에 우뢰가 오히려 심하고 어느 때 낙뇌에 의하여 초가에 불이나

마을 전체가 소실되어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는 바 낙뇌를 맞았던 계곡마을을 뜻하는

「우뢰실」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뢰실은 오갑산 초입의 작은 마을이지만 고려시대에는 행정관청이 있었다하여 그 흔적으로

「옥터」「방울장터」「방골」「이수고개」등의 지명이 아직도 전래되고 있다.

이곳을 고려시대에는「여흥골」이라 하였는 바 여주를 「여흥」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곳지명에서

연유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곳이 여흥이씨(李氏)의 집성촌이라는 사람도 있다.

 

※ 윗내(上川) = 울래 = 우래 오갑산 아래 계곡에 흐르는 내(川)의 주변마을

 

ㆍ아랫담= 산중턱에 자리 잡은 우뢰실과 근접한 마을로서 우뢰실 아래에 위치한 마을

 

ㆍ방골- 우뢰실에서 어우실로 넘어가는 고개밑으로 방을 써서 붙이던 곳.

 

ㆍ방울장터- 예전 고려시대에 장터가 있었다는 곳.

 

ㆍ함청골(옥터) - 고려시대 감옥이 있었던 곳

 

ㆍ삼박골(삼밭골) (구전자: 이재복62세)- 고려시대 삼을 재배하던 곳.

 

ㆍ이수고개- 사형장으로 가는 고개.

 

ㆍ갈바닥우물- 갈바닥우물은 고려시대의 우물터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물탕물- 약수터. 물골 소재.

 

ㆍ몰골- 고려시대에 행정관청이 있었다는 곳,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은행나무- 관아에 있던 나무. 수령 1,000여년 추정

 

ㆍ승애바위(구전자; 이복재62세)- 오갑산 초입 고사리골에 있는 바위를 말하며 그곳에는 디딜방아가 남아있었다.

지명의 유래는 알수 없다.

 

ㆍ메다리골 (구전자: 이재복62세)- 오갑산의 계곡이름, 지명유래는 알 수 없다.

 

ㆍ두둠이산- 우뢰실 남서쪽에 있는 야산으로 뇌곡리와 관한리에 경계를 이루는 산이며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의 형상에서 「두둠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ㆍ세거리 (구전자: 손병태58세)- 여주와 충북 감곡(장호원)을 연결하는 도로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마을길이 있는 곳은 삼거리(세거리)가 되는데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붙여진 지명이다.

 

ㆍ아랫세거리- 세거리는 야산 기슭에 위치하는데 점점 아래쪽 도로변으로 마을이 확장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아랫세거리라 불려진다.

예전에는 이곳에 고목인 팽나무와 향나무가 있었고 서낭이 있었던 곳이다.

 

ㆍ양달말 (구전자: 손병태 58세)- 세거리 마을에서도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곳은 「양달말」이라하고

지형상 음달진 곳이 있어 「음달말」이라 부른다.

 

ㆍ황새들- 세거리 앞에 펼쳐진 큰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가장굴 (구전자: 이재복62세)- 세거리에서 우뢰실 마을로 올라오는 계곡의 지명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제7절 성신리(聖莘里)

성신리는 「성자(聖자)동」과 「신이」 두 마을로 이루어졌는바, 「신이」와 「성자동」은 예전에는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성신리」가 된 것이다.

ㆍ성자동 (박희쇠 86세)- 예전에 마음씨 착한 동자(童子)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성자(聖子)동」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마을 앞에는 넓은 「쇠쟁이 뜰」이 펼쳐져 있다.

 

ㆍ노구바위 거리 (구전자: 박희쇠86세)- 성자동 마을 큰길가에 수 백년된 팽나무가 서 있는 주변을

「노구바위거리」라고 불렀는데 그 팽나무에는 서낭이 있었고 마을 토속신앙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도로가 확장되면서 팽나무도 없어지고 서낭도 없어져 그 흔적도 없으며 동리의

노인만이 그 지명을 기억할 뿐이다.

 

※ 노구는 여러 가지가 있음. 늙은 할멈, 작은 솥(노구솥), 늙은개, 안으로 굽고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은 소뿔(노구거리)

 

ㆍ샛담- 성자동과 인근의 용산골 사이의 마을을 일컫는데서 「샛담」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성자동에 근접한 마을이다.

 

ㆍ신(莘)이 (구전자:임성교58세)- 고려시대에 마을 골짜기에 말의 무덤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검은말을 나타내는 신(莘)자를 써서 「신이」라 지명을 얻었다 한다.

 

※신이(辛夷)= 백목연, 개나리의 잘못된 말, 즉 신(莘)=신, 약이름 길쯤한 모양, 많은 모양

 

ㆍ쇠쟁이뜰- 오갑산 아래 넓게 펼쳐진 들의 이름으로 「성자동」마을 아래에서 청미천에

이르는 넓은 들을 칭하나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복희 - 마을 앞에 울창한 오리나무 숲이 우거져 장관을 이루었는데 이곳을 「복희」 라 하였다한다

1970년대 마을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울창한 숲이 완전히 훼손되어 사라져 버렸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가시락- 신이 마을 뒷산의 골짜기. 지명유래는 알 수 없다.

 

ㆍ황학골- 신이에서 오갑산에 오르는 골짜기로서 그곳에는 벼락바위가 있다.

지명의 유래는 없다.

 

ㆍ봉산골- 오갑산 능선 아래 골짜기로서 그곳에 봉산사라는 절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ㆍ무제봉- 「신이」마을의 뒷산의 높은 산봉우리의 이름.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무재= 험준한 고개

 

ㆍ용산골- 「성자골」에서 당진리에 이르는 큰길에서 「신이」마을로 들어서는 작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용(山)+산(山)+골(谷)

 

ㆍ홍동골- 신이 마을 근처의 골짜기로서 참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제8절 당진리(唐辰里)

오갑산 능선 중간에 자리 잡은 「무제봉」의 북쪽 사면 아래 「밀머리」「당밑」「완쟁이」 등 오래된

마을로 당진리는 이루어졌다.

당진리의 지명은 행정적으로 마을 이름을 지을 때 당(唐)밑과 밀머리(辰)에서 조합하여 당진(唐辰)이라는

마을 이름으로서 합당한 것이 아니며 행정개편 당시에 엉뚱하게 붙인 잘못된 이름으로 생각된다.

 

ㆍ밀머리(구전자: 신동운 46세)- 밀머리의 「밀」은 본래 우리말로서 하늘의 별을 뜻하므로 밀머리를

진두동(辰頭洞)이라 표기한 적도 있다.

이 마을에서 한밤중에 남쪽하늘을 바라보면 높고 우람한 오갑산 위에 반짝이는 별이 늘어나 보이므로 이러한 자연조건에서 발생된 지명이다.

 

※미르(龍의 뜻인데 六甲에서 地支에서 辰은 같은 용의 뜻)+머리=미르머리=밀머리=진두동(辰頭洞)=용머리마을

 

ㆍ망골 -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점말 (구전자: 신형식 79세)- 예전에 옹기를 파는 점포가 있었던 곳이므로 「점말」이라고 하였다. 점말에는

전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이었으나 지금은 훼손되고 없다.

점말은 청안리, 현수리, 충북의 감곡으로 연결되는 삼거리에 위치한다.

 

※ 점(店)말= 옹기점만이 아니고 주점(酒店)이 있던 곳도 점말이다.

 

ㆍ주막거리 (구전자: 신동운46세)- 주막거리는 현수리와 당진리의 경제지점의 삼거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ㆍ원수골 (구전자: 신동운 46세, 신형식 79세)- 「원수골」의 위치는 성신리와 경계지점으로서

쇠쟁이뜰의 북쪽 끝부분이다.

 

이곳은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곳으로 「온수골」이라고 불려져야 하는바 「원수골」로 발음되면서

그곳의 지명이 되었다.

한편 겨울에 얼지 않는 수렁샘이 나오므로 농사짓기에 너무 힘든 농토였다.

경작하기에 힘든 것을 표현하여 즉 원수 같은 농토가 있다하여 「원수골」이라고 불렀다는 사람도 있다.

 

ㆍ누에머리 (구전자:신형식79세)- 밀머리에서 청미천으로 향하여 바라보면 누에모양의 능선을 가진 야산이 있다.

이곳을 「누에머리」라고 하는 바 오랜 옛날부터 주거지였으며 고기 잡는 그물추도 발견되고 기와 파편들이 산재해 있다.

 

ㆍ도래미 고개- 성신리와 당진리 경계 근처에 있는 언덕으로 예전에는 사람이 내왕하기에 불편하고 한적한 고개였으며 「돌마르미 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자락에 굽어진 언덕길을 돌아내려 온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서낭이 있어 돌무더기가 있었으며 예전에는 주막도 있었다.

※돌(廻)+마르(項)+미(山)= 도는 마루턱산= 돌마르미= 도래미

 

ㆍ무제봉 (구전자: 신동운 46세)- 당진리와 성신리의 경계를 이루는 높은 산봉우리.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이름 없는 봉우리= 무명봉우리= 무제봉(無題峰). 혹은 무재봉=험준한 산봉우리

 

ㆍ당밑 (구전자: 신형식)- 오갑산처럼 큰 산 아래 야산이 펼쳐지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큰 산 아래 마을이 있다하여 「당밑」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당진(唐辰)리라는 행정지명을 만들때 「당밑」마을 이름에서 당(唐)자를 취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山)+밑(下)= 산 밑에 있는 마을= 당밑

 

ㆍ보안말- 완쟁이 계곡(完長谷)에서 흐르는 물을 보를 막아 농사에 이용하였는데 물을 막은 보 안쪽에 마을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ㆍ샛담(구전자:신동운 46세)- 아랫마을에서 웃마을인 완쟁이로 오르는 길가에 있는 마을이므로 「샛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즉, 마을과 마을의 사이에 작은 마을이 있다는 뜻으로 「샛담」이라 한 것이다.

※새(間)마을(小村)= 새간에 있는 마을= 샛담

 

ㆍ완장(完長) (구전자:신형식 72세)- 오갑산 아래 당밑이라는 마을에서 오갑산 능선 중턱까지 깊은 계곡이 이어져 있는데 이 깊은 계곡을 이르는 말이 완장곡(完長谷)이다.

이 완장곡이 완쟁이 계곡이며 그곳에 작은 마을이 있어 「완쟁이」라고 불려진다.

완쟁이는 충청도로 넘어가는 지름길의 길목이며 예전사람들이 도보로 움직였으므로 이곳은 예전에 여행객이 쉬어가는 곳으로서 오래된 마을이며 유명한 곳이었다.

※완장골(완쟁이), 완만하고 긴 능선이 뻗어있는 골짜기

 

ㆍ마당재- 오갑산 높은 능선 가까이에 평평한 고원(高原)지대가 있는 바 높은 곳에 마당처럼 넓은 곳이 있다하여 「마당재」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상당히 넓은 경작지가 있으며 예전에는 인가도 있었으며 충청도로 연결되는 지름길이 있었다. 「완쟁이」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ㆍ봉골산 (구전자: 신동운 46세)- 봉골산은 당진리와 현수리 사이에 있는 산이며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봉(峰)= 골(谷)+산(山) = 골진 봉우리의 뜻

 

제9절 현수리(玄水里)

현수리는 가마섬(玄湖洞)과 수릉(롱)골(水湃) 두 마을 이름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오갑산의 긴 능선아래 펼쳐진 작은 산과 계곡, 그리고 청미천에 이르는 넓은 들 사이에 가마섬,

수룽골, 샛담, 웃담, 옷나무 백이 등의 마을이 형성 되었었다.

 

ㆍ가마섬- 청미천의 물 흐름에 따라 수로가 구불구불하게 형성되면서 거기에 섬과 같은 지형이

나타나고 이와같이 반도(半島)로 된 큰 섬을 가마섬 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근처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의 지명도 「가마섬」이라 불리게 되었다.

 

즉 청미천의 흐름에 의하여 반도가 생기고 그 주변에 깊은 물(玄湖)이 있어 자연스럽게 마을 이름이 가마섬이 되었다.

청미천 수로를 직선화하면서 가마섬(半島)도 없어지고 깊은 물(玄湖)도 없어졌다.

※가마(가운데 中)+섬= 가운데섬= 가마섬

 

ㆍ샛땀- 현수리의 「가마섬」마을과 당진리 「점말」사이에 있는 마을이므로「샛담」이라 불려진 마을이다.

샛담을 가마섬과 가까이 인접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새(間)+ 땀(村)= 샛땀

 

ㆍ망바우- 반도(半島) 같은 섬(가마섬)이 청미천에 있었는데 그곳은 약간 지형이 높고 거기에 바위가 있어서

그 바위에서 굽이쳐 흐르는 청미천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 「망바우」라 일컬었다 한다.

그러나 청미천의 수로가 직선으로 정비되면서 가마섬도 망바우도 없어지고 이름만 전한다.

 

ㆍ수롱동(水弄洞) (구전자: 이경수 56세)- 뜻밖에 수해를 당하여 물에 우롱 당하였다는 뜻에서 수롱동이라 하였다함.

 

ㆍ옷나무백이(구전자: 이경수56세)- 수롱동에서 산 계곡으로 오르는 길가 근처 마을을

「옷나무 백이」라 하는데 예전에 옷나무가 서 있던 연유로 그곳을 「옷나무 백이」라 한 것이다.

 

ㆍ음달말 - 수롱동 마을에서 산자락 바로 밑에 위치한 곳을 「음달말」이라고 한다.

 

「양달말」에 비하여 산 밑에 위치하므로 상대적으로 음달진 곳이라 하여 「음달말」로 부른 것이다.

 

ㆍ양달말- 수롱동 입구의 양지바른 마을을 이르는 것인데 수롱동의 일부마을이다.

 

ㆍ망개울- 수롱동 뒷산 계곡의 이름으로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없다.

 

ㆍ성지골- 수롱동 뒷산의 계곡이름으로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없다.

 

ㆍ액겨울- 수롱동의 뒷산 계곡이름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서들밑-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없다.

 

ㆍ행이나들이- 현수리 수롱동에서 장안리 「관골」쪽으로 가기 위하여 청미천을 건너야 하는데

이곳을 행이 나들이라고 한다.

장호원지방에서 「되래」「단진개」로 가서 수운(水運)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내왕이 빈번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루(행이나루)로 청미천을 건너면 「행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따라서 청미천을 건너

마을 밖으로 나가는 뜻에서 여기를 「행이나들이」라고 부른 것이다.

 

제10절 사곡리(沙谷里)

 

사곡리는 달걀봉에서 흘러내린 산기슭에 자리 잡은 「가래울」과 청미천에 근접한 「모래실」마을로 이루어졌다.

ㆍ가래울 (구전자: 이홍우 64세)- 「가래울」은 점동면 청안리에서 장안리로 나가는 길에 있는 가래울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산기슭에 첫 번째 있는 마을이다.

가래울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므로 가래울(木秋谷)이라고 하였다 한다.

조사자가 알아본 결과 가래울에서 가래나무를 본 사람은 없으며 가래나무가 우거져서 가래울이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주장은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래울」은 숲이 울창한 곳을 이르는 우리말 「가래」에서 온 지명이며 이곳이 예전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진 곳이었기 때문에 「가래울」이라고 불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가래울에는 세종때 영중추원사를 지낸 문열공(文烈公) 이수묘의 묘가 있다.

※갈내(分川) + 울(마을) = 갈래울= 가래울(큰 개울의 支川 발원 마을)

 

ㆍ멀근이 (구전자: 윤환노 62세)

가래울에서 달걀봉 정상을 향하여 북쪽으로 뚫린 계곡으로 지명 유래는 알 수 없다.

 

ㆍ모래실 - 모래실은 마을 앞을 흘러가는 청미천의 흐름에 따라 깨끗한 모래마당이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얻어진 마을 이름이다.

모래실은 먼저 터골(안말 內沙谷)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터골은 인가가 없어지고

밖앗말(外沙谷)이 큰 마을 되었는 바 이곳이 모래실이다.

 

모래실은 마을 북쪽의 「달걀봉」에서 흘러내린 산자락에 위치하는데 풍수 지리적 관점에서 모래실은

「용(龍)이 알을 품은 형상」을 갖고 있으므로, 그 용의 알을 굴림으로써 알에서 용이 깨어나고 따라서

자손을 많이 생산하고 풍년이 든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정월 대보름에 용의 알을 굴리는 「장치기」놀이가 전래되고 있다.

 

※장치기놀이- 나무로 둥글게 축구공만 하게 깎은 나무공((龍)의 알)을 농기구인 「괭이」처럼 생긴,

나무로 만든 「장채」를 가지고 동과 서로 편을 갈라서 서로 뺏어 굴려, 마을을 관통하는 내의 뚝방

너머로 용의 알인 나무공을 넘기려는 대동놀이다.

이때 쌍방이 나무공을 가로채려는 격렬한 노력으로 무질서의 큰 소란이 벌어지는데 승패와

관계없이 이러한 놀이를 통하여 마을의 화평을 얻고 풍년을 기원하였다.

※몰(전부, 모두의 뜻 몰이)+내(川)+실(마을)=모래실(모두가 내로된 마을) 합류지점에 들보다 하천이 많다는 뜻.

 

ㆍ새터- 1946년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청미천에 인접하여 수해를 당한 인가를 집단 이주시켜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새터는 마을을 관통하여 흐르는 작은 내를 경계로 모래실과 마을로 모래실과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사이에 있는 마을= 새간터= 새터

 

「목교(木橋)개설」모래실과 새터의 사람들은 청미천 건너 현수리(수롱동) 사람들과 내왕하고 그 곳의

경작지를 관리하기 위해서 목교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은 매년 추석 전에 목재로 교각을 세워 다리를

조립하여 개설하고 늦은 봄이 되면 즉 장마전에 하천에 물이 불기전에 조립식 목재다리를 해체하였는 바

현수리와 사곡리를 연결하는 목교(木橋)인 것이다.

청미천에 물이 불면 나룻배로 사곡리와 현수리 사람들은 오고간 것이다.

이 목교를 가설하고 그 위에 잔디떼장을 깔았는데 그리하여 목교를 떼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ㆍ터골- 지금 모래실보다 산골짜기 쪽으로 마을을 처음 이루었는데 이곳을 터골이라 하였으며

모래실(밖안말)과 구별하기 위하여 안말(內沙谷)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터골에 인가가 없으며 지명만 남아 있다.

※옛날에 마을이 있던 터

 

ㆍ용장골- 모래실 남쪽의 야산 골짜기를 이르는 말,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산줄기(龍)+장(長)+골(谷)= 산 능선이 긴 골짜기 =용장골

 

제11절 장안리(長安里)

장안리는 「승안리」「안평」「관골」「건쟁이」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미천 하구에 위치하는 곳으로

예전에 수운(水運)을 이용하던 시절 매우 빈번하게 사람의 왕래가 있었던 곳이다.

 

ㆍ승안리 (구전자: 민순호67세)- 지명의 유래는 분명치 않다.

이곳에 예전에 스님이 살았다는 이유에서 「승안리」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찰의

흔적이 없으며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성안(聖安)」이라는 말에서 「승안리」라는 지명을 얻게 된 것으로 안다.

이곳은 원래 마을이 없었고 마을이 형성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으며 여주에서 도리와 삼합리로

연결되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ㆍ안평(安平) (구전자: 조명수 44세)- 안평의 지명유래는 알 수 없으나 야산 아래 아늑한 평지에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 앞에는 넓은 경작지가 있으며 그 너머에 청미천이 흐르고 있다. 또한 청미천 너머

어느 정도 멀리 오갑산 줄기가 흘러내려 마을의 형세가 평안하게 느껴지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이곳을 거쳐 사람들이 수운(水運)을 이용하였으므로 빈번한 사람의 내왕이 있었다.

※안(內)+평(坪) = 안들

 

ㆍ작실 (구전자:정희진 40세)- 안평마을에서 「건쟁이」로 향하는 동북방향에 야산이 있는데

그 야산에서 평평한 지역을 「작실」이라 불렀다.

그런데 바로 그 옆이 「장터걸이」였는 바 예전에는 인가가 있어 마을을 형성했었다.

지금은 토착인가가 없고 다만 별장이 들어서 있다.

※잣(작은, 자딴)+실(동네)= 작은 마을

 

ㆍ장터거리(구전자:조명수 44세)- 점동면 장안리 「건쟁이」를 거쳐 도리의 「되래」이르는 길이 장안리

안평마을 앞 청미천 뚝방을 따라 있었는데 이 길은 장호원이나 음성, 괴산 등지의 중부 내륙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하여 이용되던 길이다.

그리하여 「되래」에 가기 위하여 안평마을을 지나게 되고 안평마을에서 쉬어가는 장소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물물을 유통하는 장거리가 자연히 생겨나고 그곳을 「장터거리」라 불렀다.

 

ㆍ평평바위 (구전자: 정희진41세)- 승안리에서 안평에 이르는 길은 작은 야산 사이의 계곡을 이루고 있는 바

계곡으로 길이 뻗어 안평에 이르고 또한 삼합리로 갈 수 있다.

즉 이 계곡 길옆에는 평평한 바위가 있어 이곳을 「평평바위」라 일컫는다.

 

ㆍ옹골(구전자:정희진41세)- 「평평바위」라고 불리는 지역의 중간쯤에 작은 평평한 밭이 있는데

그 부근을 「옹골」이라 일컫는다.

여기에는 옹기의 파편이 많고 예전에 옹기를 구웠거나 옹기장사가 살던 곳으로 추정된다.

※움골이 변음된 경우도 있다.

 

ㆍ바지랑골- 지명유래를 알 수 없다. 인가가 없다.

※바지랑 = 받혀주는 뜻

 

ㆍ새낭골(구전자:조명수 44세)- 「새낭골」은 안평마을의 뒷산에 있는 작은 계곡을 일컫는 데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다만 서낭이 있었던 유래로 불려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새(新)+낭(나루터, 柴草場)+골(谷)+새나루터. 옛날 권세가에서 시초장(柴草場)을 정하고 다른 사람의 이용을 금하였다.

 

ㆍ부채골- 안평마을의 뒷산에 작은 계곡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부처골= 부채골

 

ㆍ개갱이- 안평마을에는 청미천까지 펼쳐진 작은 들이 있는데 이 마을 앞들 좌편의 부분을 「개갱이」라 부른다.

「개갱이」는 강 하구에 부명개흙이 퇴적하여 쌓이는데 이러한 갯흙이 쌓여 만들어낸 평지이므로 「개갱이」라 일컫는다.

※갯+가(개)+리(里)=갯가마을=갯개이=개갱이

※ 여주지역에서는 가를 개로 발음하였음.

 

ㆍ관골(구전자:박종열 45세)- 관골은 풍수지리로 보아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정(鄭), 박(朴), 신(申)씨 성을 가진 양반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관직(官職)을 얻은 이가 많아 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가(邊)+골(谷)= 갓골= 관골

 

ㆍ행이- 관골마을에서 청미천 「사래울」로 가는 길가 근처를 「행이」라고 한다.

행이는 사래울의 행이나루를 건너 수롱골(현수리)로 연결되는 도로변에 있으므로 예전에는 사람내왕이 빈번한 곳이므로 「행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것이다.

※한(大)+말(里)= 한이= 행이(큰 동네라는 뜻)

 

ㆍ행이나루- 「행이」에서 「수롱골」로 이어지는 도로에 청미천이 흐르므로 그곳에 나루가 있었는데 「행이나루」라 한다.

장호원, 충주, 음성방면의 사람들이 남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하거나 행상하는 사람들이 항상 이곳을 거쳐가야 하는 길목이다.

따라서 이곳 통행을 쉽게 도와주기 위해「행이」주민들은 매년 나무다리(木橋)를 가설했는 바 행상들은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이 「행이나루」터 근처에 남아있다.

 

ㆍ사래울- 관곡에서 남쪽으로 500m 내려가면 청미천이 나타나는데 청미천이 급하게 굽어 도는

그 근처를 「사래울」이라 한다.

이 청미천을 건너면 점동면 현수리 수롱골로 갈 수 있으며 예전에 남한강 수운을 이용하고자

장호원 방면의 사람들은 대게 사래울을 거쳐 갔었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강변의 작은 모래밭과 굽어 도는 내의 모양에서 「사래울」이라

불려진 것으로 짐작되며 주변의 경치가 아름답다.

※살+울=삳아울= 사래울(질러가는 동네)

 

ㆍ장승모랭이 (구전자:조명수44세)- 점동면 장안리 안평마을에서 관골마을로 가는 길 야산

모퉁이에 장승이 서 있었는데 그 곳을 「장승모랭이」라 일컫는다.

지금은 장승이 서 있지 않다.

 

ㆍ안산골- 지명유래는 알 수 없고, 인가가 없다.

※산모퉁이 안 골짜기

 

ㆍ능말(구전자:박종역 45세)- 예전에는 「능말」에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인가가 없으며 이곳에서는

점동면 사곡리로 질러가는 길이 있었다.

능말 에서는 사곡리로 가는 그 길에는 큰 참나무 밑에 서낭이 있었고, 지금도 돌무더기와 참나무가 남아있다. 원래 관골마을이 형성 되기 전에 마을이 들어섰던 곳이나 그 이후 도적이 침입하여 관골로 이주하였다 한다.

※능(陵=산능선 또는 구능지대)+마을 =능말

 

ㆍ건쟁이- 건쟁이 마을은 청미천 하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군이 봉 산기슭의 가파른 계곡 협착한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건쟁이는 오래된 마을로서 수운(水運)을 이용하려던 사람들이 예전에 많이 지나친 마을이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고 비교적 살기 편리한 마을이었다.

※건장리(乾長里)

 

ㆍ용두럽- 예전에는 청미천이 남한강에 이르는 하구에 매우 깊은 곳이 있어서 가뭄에도 깊은 하상이 드러나지 않아 그곳이 매우 깊은 곳임을 알 수 있고, 평상시에는 검푸른 물이 소(沼)를 이루고 있어 그 소에 용이 살고 있다고 사람들이 믿게 되어 그곳을 「용두럽」이라 일컬었다. 지금은 제방을 쌓고 청미천 하구를 정비하여 지형이 바뀌어 용소는 없어지고 이름만 전한다.

예전에는 용두럽 부근에서 풀을 뜯던 소가 없어졌는데 그 소를 용두럽에 살고 있는 용이 잡아먹었다는 전설이 있다.

※용(山)+두(머리 頭)+ 늪(산뿌리끝에 늪지대)

 

ㆍ진골- 건쟁이에서 신선바위 가는 길 산중에 계곡이 있는데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거나 대동놀이를 하였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가장 나이 많은 할머니가 제주 되었다 한다. 지명유래는 알 수 없다.

※진(長)+골= 진골= 긴골 (긴 골짜기)

 

ㆍ산지당골- 정초에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며 그곳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고 바위가 있어서 서낭과 함께 산신을 모시던 곳이다. 동네 뒷편 언덕에 있다.

 

ㆍ장꾼나들이- 건쟁이 앞에 오솔길이 있는데 그 길이 「되래」와 연결되어 장호원 방면의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이 길을 장꾼나들이라 칭한다.

 

제12절 삼합리(三合里)

삼합리는 남한강과 남한가의 지류인 섬강 그리고 청미천이 합수(合水)하는 지역으로 삼합(三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이곳은 경기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도의 경계가 근접하는 지역으로서

오갑산 능선의 꼬리 부분이며, 능선 서편아래 오리골, 중간말, 단진개(아랫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ㆍ단진개- 「단진개」는 강 하구에 가까이 형성된 마을로서 가장 오래되고 큰 마을이다.

수운을 이용하던 시대에는 매우 번창했던 마을이며 청미천 맨 아래에 마을이 위치하므로 「아랫말」이라고도 한다.

「단진개」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분명치 않은 바 다음 세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① 장마가 지나면 마을 앞강의 하상이 들어나면 붉은색을 띠므로 단진개(丹津)라고 일컬었다.

② 단진개는 단수(丹樹)라고 불려진 일이 있다하며 이 단수라는 마을 이름에서 단진(丹津) 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③ 청미천 맨 끝 하구에 위치하므로 단진(斷津)개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진개에 전래되어온 민속놀이는 백중 때에 씨름과 줄다리기 행사를 해온 것이다.

 

ㆍ중간말(구전자:한종호63세)- 마을에는 단진개 마을이 아랫말이고 웃마을이 오리골이다.

그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중간말」이다.

※ 중간촌(中間村)

 

ㆍ오리골-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산중턱의 「닭이 머리」를 지나 능선으로 넘어서면

충북으로 넘어가는 길이 개설되어 있다.

 

ㆍ닭이머리- 「닭이머리」는 예전부터 충청도로 넘어가는 산중턱의 생김새가 닭머리처럼 생긴

지형 때문에 오래전부터 불려진 지명이다.

「닭이머리」로 오르는 길가에 「미륵」이 있으나 최근에 도난당하였다.

※닭(달山)+머리(모퉁이, 모롱이, 모리)= 산모퉁이= 달머리= 달기머리

 

ㆍ공양소 (구전자: 한유동85세)- 오갑산 능선 맨 끝 꼬리에 「봉우재」라는 산이 있고 경사가 급한

산아래 남한강이 흐르는 바 그곳에 깊은 소가 있는데 이곳을 공양소라고 한다.

예전 공양왕이 삼척으로 유배갈 때 이곳에서 쉬어갔다는 전설이 유래되어 공야소라 일컬어진다.

 

ㆍ창내미- 남한강변에 위치하며 강원도로 도강하기 위하여 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강 건너 부른 땅에 「흥원창」이 있었는데 그 남쪽 강 건너에 있다하여 「창」의 남쪽이라는

「창내미」라고 불려진 것이다.

※창(興原倉)+내(川)+미(山)= 창고 있는 냇가 산마을(倉川山) 즉 남한강 건너편 산기슭에 있는 마을

 

ㆍ한티고개 (구전자: 한종호63세)- 「닭이머리」에서 충청도의 「검단」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한티」고개라

하는 바 큰 고개라는 뜻이다.

※한(큰)+티+고개=큰고개

 

ㆍ소너미고개- 삼합리 중간 말에서 충청도로 넘어 다니던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예전에 사람들

내왕이 빈번하고 물건도 소등에 얹어서 넘나들었기 때문에 「소너미」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소(고양소 마을)+너머(너미)+고개= 고양소 너머고개

 

ㆍ봉우재- 오갑산 능선 꼬리에 위치한 산을 이르는 말인데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예전에 봉화를 올린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봉우(봉우리)+재= 봉우리재= 봉우재

 

ㆍ마골산- 마골산은 삼합리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마(막)+골(谷)+산(山)= 막힌골산= 막골산

 

ㆍ도림골산 (구전자:한유동 85세)- 도림골산은 해발 192m이며 마골산에서 흘러내린 산봉우리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개내골산 (구전자: 한종호 63세)- 청미천변에 우뚝 솟은 얕은 산(해발 56m)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개(蒲)+내(川)+골(谷)+산(山)→갯가 내 골짜기산

ㆍ대오- 창내미 나루 근처에 최근에 형성된 작은 마을로 마을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깊은 오지라는 뜻이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한다.

 

제 13절 도리(道里)

점동면 장안리의 지금 승안리 마을 서편에 도호동(桃湖洞) 마을이 있었는데 남한강에 수운이 발달하면서 강변 쪽의

생활이 편리하고 토양이 비옥하며 어떤 계기로 도호동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며 큰 마을(큰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호동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는 뜻에서 「도래(桃來)」가 되고 이곳이 「되래」로 발음된 것이며 여기서

행정 리명(里名)으로 「도리(道里)」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되래」마을은 여러 차례의 전란에서 안전하여 환란을 모면하였다는 뜻으로 환란에서 돌아난

지역이라 하여 「되래」라 일컬었다는 주장도 있다.

 

「되래」는 범선이 정박하던 곳으로, 곡물이 이곳을 통하여 서울로 가고, 소금, 생선 등이 이곳을 통하여

중부 내륙지방으로 유통되어 「흔바위」와 함께 상당히 번창하였던 마을이다.

강변을 통하여 「흔바위」로 연결되는 「아홉 사리」라 불리는 오솔길이 있어서 서울과 충주지방으로

이동하는데 요긴한 통로의 역할을 하였으며 되래의 동쪽으로 「중군이봉」이라는 그리 높지 않는 산이 있다.

이 산자락이 강변에 절벽을 이루며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낸다.

 

그중에 「되래」에서 동쪽 약1.2㎞ 지점에 「신선(神仙) 바위」가 있는 바 남한강변의 빼어난 절경으로

명소였으나 지금은 찾는 이가 없어 그 절경이 아깝게 숨어 방치되어 있다.

마을 앞 강변 경작지에서는 지금도 선사주거유적지가 발견되고 있다.

※ 돌(回)+내(川) =돌래= 도래= 되래

 

ㆍ큰말-「되래」마을이 큰 마을을 이루고 남한강 수운으로 번창하였으므로 「큰말」이라고 불려졌다.

남한강의 물줄기가 돌아나가는 지형에서 얻어진 지명.

 

ㆍ새마을- 새마을은 점동면 도리의「되래」마을에서 남서쪽으로 500m 떨어져 있는 바 1972년의

홍수로 피해를 당한 강변주민들을 집단 이주시켜서 형성된 마을이다.

 

ㆍ사장골 (구전자: 민순호 67세)- 원래 사장골은 사정(沙亭)에서 유래된 마을이다.

이것은 묘비의 비문이나 족보에 분명히 이 마을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사장골」은「되래」마을에서 서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장골」,「새마을」 부근에는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선대묘가 여러 기 분포하고 있는데 그 묘비는 모두 땅에 묻혀져 있어, 그 묘의

실체를 숨기고 있으며 돌보는 이 없이, 숲이 우거져 묘역조차 분간이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경사진 산 아래 경사면에 위치한 마을

 

ㆍ중군이봉 (구전자: 민영주73세)- 「되래」의 동쪽에 솟아있는 산봉우리로서 남한강과 청미천의 합수머리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봉우리가 강변 쪽으로 흘러내린 끝단에는 신선바위가 있으나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ㆍ아홉사리- 도리와 흔암리를 연결하는 강변의 오솔길로 길이 좁고 험하며 아홉구비를 굽이굽이 돌아

다닌다하여 아홉 사리라 하였다.

 

경상도, 충청도에서 서울을 왕래할 때 이용되던 길이며 예전에는 빈번한 통로였지만 지금은 왕래하는

이가 거의 없는 황폐된 길이다.

※사리는 꼬불꼬불하거나 감아놓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사리로 발음하는데 아홉구비를 아홉 사리로 칭한 것이다.

 

ㆍ신선바위- 중군이봉에서 남한강변 쪽으로 흘러내린 곳에 신선바위가 있는데 이곳은 남한강과 청미천이 합수(合水)되는 지점이다.

신선바위는 빼어난 경관으로 남한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히고 있다.

이곳 바위에 공룡발자국 같은 형상이 새겨져 있다.

 

제14절 흔암리(欣岩里)

흔암리는 「흔바위」와「동마루」, 두 마을로 이루어졌는 바, 흔바위는 남한강 수운의 요충지로 고래로

오래된 마을이고 「동마루」는 최근에 몇몇 인가가 산재하여 마을을 형성한 곳이다.

마을 앞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안산이 있고, 마을 뒷산은 이름 없는 바위산으로 급한 경사로 남한강과 접하고

있으며 그곳 강변에 좁은 공간이 있어 「우산절」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는 바 이곳에서 선사주거 유적이 발견되었다.

흔바위에 전래되는 민속놀이는 「쌍용거줄다리기」가 있으며 정월대보름에 치르는 큰 행사이므로 주변 마을 사람들까지 그 놀이를 즐기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강천면 굴암리로 연결하는 나루가 있었다.

 

ㆍ흔바위 (구전자: 심상대 73세)- 흔암리의 어원은 흰바위에서 비롯된 것인 바 마을 앞 강바닥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어서 마을이름이 「흰바위」가 되었고 흰바위가 흔바위로 발음된 것이다.

「흔바위」는 남한강을 오고가는 배의 정박지로서 사람의 내왕이 빈번하고 상업이 번성한 곳으로

옛적에는 대단히 활기찬 지역이었으며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흔바위에 전래되는 민속놀이는 「쌍용거줄다리기」가 있으며 정월대보름에 치르는 큰 행사이므로 주변마을 사람들까지 그 놀이를 구경하며 즐기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한다.

마을 앞에는 수백 년생 훼나무가 있으며 강천면 굴암리로 연결하는 나루가 있었다.

「흔바위」를 「흔암(欣岩)」으로 쓰는 이유는 알 수 없으며 다만 행정구역을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잘못된 이름이다.

ㆍ동마루 (구전자: 김종철 56세)- 「동마루」는 점동면 처리에서 흔암리 「흔바위」로 통하는 길옆 야산에 최근에 몇몇 인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 바 인가는 밀집되지 않고 산재해 있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마루터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한다.

「동마루」의 위치는 서편에 넓은 「가마뜰」에서 바라볼 때 동쪽의 야산지대로 그 형세가 가마뜰 보다 다소 높은 지역이므로, 동쪽의 마루터기라는 뜻에서 마을이 형성된 지역을 「동마루」라 부르게 된 것으로 짐작한다.

※동+마루= 동편 산마루

 

ㆍ우산절-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흔바위 뒷산이 급한 경사로 강변에 접하여 있는데 그 경사면의 중턱에 좁은 공간이 있는데 이곳을 「우산절」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선사주거유적이 발견되었다.

3.000년이 넘은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된 곳으로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정착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위(上)+산(山)+절(턱)= 윗산턱= 우산절

 

ㆍ안산- 흔바위 앞산을 안산이라 부르는데 남쪽의 바람을 막아 주고 흔바위 마을을 아늑하게 감싸주는 얕은 산이다.

 

ㆍ고살래고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흔바위에서 장호원쪽으로 가려면 예전에는 「고살래 고개」를 넘어 점동면 처리를 거쳐 가야 하는 바 흔암리에서 서편으로 200m 위치에 있는 언덕(고개)으로서 서낭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낭이 훼손되고 큰 향나무가 베어져 없어졌다.

또한 사람의 내왕이 거의 없고 겨우 처리(범솥)으로 연결하는 한가한 길로서 옛적의 큰길의 역할이 사라졌다.

 

제15절 처리(處里)

「처리」는 「범솥」마을의 행정지명인데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조사자의 생각으로는 처리(處里)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는 이곳에 왕궁(王宮)으로 물품을 조달하는 방곡근처가 있었던 곳이므로 처리라는 지명을 얻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ㆍ범솥 (구전자: 주근식 68세)- 소무산(韶舞山) 서편 계곡 깊숙이 자리 잡은 큰 마을이 처리의「범솥」마을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호랑이가 빈번히 출몰하였는데 어느날 새벽아침 인가에 들어온 호랑이가 큰 가마솥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을 본 유래로 범솥이라 칭한다.

이 소무산에는 호랑이와 신선이 그려져 있는 산신각(山神閣)이 있었고 1980년대 말까지 산신각에서 대동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예전에는 「범솥」은 소무산 너머 강변마을인 「흔바위」로 내통하는 지름길이 있어 이곳으로 물건을 싣은 우마차와 사람의 내왕이 빈번한 곳이었다.

 

ㆍ동학골 (구전자:주근식 68세)-「달걀봉」아래 「가래울」 넘어 가는 깊은 계곡으로 동학군이 숨어 지내던 골짜기,「범솥」에서 약1㎞ 남쪽에 위치한다. 인가는 없다.

 

ㆍ달걀봉 (구전자:주근식 68세)- 「달걀봉」은 218m 높이의 작은 산인데 산 정상에 달걀 모양의 바위가 서 있어서 「달걀봉」이라 부르며 처리, 사곡리, 도리의 경계분기점이다.

 

ㆍ선바위 (구전자: 주근식 68세)- 청안리에서 여주로 들어가는 도로변 약 1㎞지점에 선사유적인 「선돌」이 있으며 선돌자체를 「선바위」라고도 하며 그곳의 지명을 선바위하고 일컫는다.

선바위는 인가가 1가구 있으며 도로변이 개발되어 공장 마당에 「선돌」이 위치하므로 훼손의 염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