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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무한(봉수)지맥(終)

무한(봉수)지맥 제2구간 - 서낭당고개에서 비티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6. 12. 26.

잡목과 가시한테 온갖 수난을 겪으면 걸었던 충청도길

 

☞산행일자: 2016년 12월 25일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에 짙은 스모그 현상

산행거리: 도상거리15.5km / 7시간 45분 소요

☞참석인원: 수헌, 산으로님과 함께

☞산행코스: 서낭당고개-이동통신 중계탑-통덕랑 청주이공 묘-오봉이 마루-194.5m봉-묘지-밭-명동갈림길-200m봉

                NO85송전탑-무명봉-대영고개(동물이동통로)-묘지-밭-185m봉-경주김공 묘지-NO88송전탑-200m봉

               묘지-237m봉-묘지-비포장 도로-묘지-벌목지-묘지-전주이공 묘지-조림지-300m봉-울산박공 묘지-초롱산

              급경사 등로-전주이공 묘-음미고개-담양전공 묘지-창원류공 묘지-임도-260m봉-암봉-270m봉-갈림길

              벌목지대-구릉고개-마사리버스정류장-홍주마사마을-임도-해주오공 묘지-임도-너덜지재-대슬랩-임존성터

             소나무-헬기장-477m봉-내포문화숲길-봉수산-봉수산 휴양림 갈림길-416m봉-큰 비티고개-넓은 임도-240.2m봉

             임도-210m봉-중계탑-녹슨 철조망-비티고개

소 재 지: 충남 홍성군 장곡면, 홍동면, 금마면 / 예산군 광시면, 대흥면, 응봉면

 

오늘은 크리스마스이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고, 8년동안 매주 베낭을 메고 집을 떠난지라

집에 있어봐야 찬밥일거이고 그렇다고 남의 교주 생신날 내가 특별히 축하해 줄일도 없고하여

지난 3월1일에 첫구간을 시작한 무한(봉수)지맥 2구간을 수헌, 산으로 아우님과 가기로 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박종율 선생 자료인용)

이른 아침 5시에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대충 베낭을 챙겨 용산역에 도착하니 06시 50분 정도이다

대합실 근처 식당을 찾았지만 다들 문을 열지않고, 햄버거집만 보이지만, 햄버거보다는 김밥이

나을것 같아 편의점에서 김밥 한줄을 사서 아침을 해결하고 07시 28분 홍성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오른다

열차에 오르자마자 일찍 집을 나온 탓인지 곧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신례원역 근처에서 잠이 깨고

정신을 차린 다음에 홍성역에서 내린다

홍성역(09:35)

홍성역은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다... 나홀로 금북정맥을 하면서 이곳에서 3번이나 찜질방에서

신세를 졌던 인연 때문인가?... 대합실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서낭당재로 향한다 

홍성역 앞의 卍海 흉상

홍성땅은 시대에 걸출했던 애국자들을 유난히도 배출한 곳이기도 한 곳이다

고려시대 명장 최영장군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명이었던 성삼문, 일제시대 만주에서

청산리 전투로 일본군들을 무수히도 괴롭혔던 백야 김좌진 장군... 그뿐인가 일제시대 독립선언

33명중 한명으로 왜놈들이 보기 싫어 조선총독부가 위치하던 남쪽을 등진 곳을 택하여 북향으로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사셨면서 왜놈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사시다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열반하신 만해 한용운 스님 또한 이곳 홍성 출신이 아니던가

요즘처럼 어지러운 정국에는 왜 이런 분들은 정녕 보이지 않은지...

홍성역에서 바라본 홍성읍의 모습

내포(內浦)의 중심지였던 홍성... 옛 지명은 홍주(洪州)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 ’내포가 가장 좋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쯤에 가야산이 있는데,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데 동쪽은 큰 들판이고 남쪽은 오서산에 가려져 있는 가야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맥으로,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개 고을을 내포(內浦)라고 기록하고 있다.

열군데 고을은 홍성(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예산, 당진을 칭하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내포지역을 홍주목(洪州牧:지금의 홍성군)이 관할하던 충남 서천에서 경기도의 평택까지를

20여 고을을 지칭하기도 했다 

홍성역에서 택시를 타고  천태저수지를 지나 장곡면 월계리 농장의 좁은 도로를 따라 오르니

고개가 나오는데 맨발님께서 서낭당재라는 아크릴 팻말을 걸어 놓았다... 예전에 서낭당이 있었나?

서낭당재(09:53)

이곳은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에서 홍동면 문당리 삼밭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택시에서 내리니 고개 주변에는 며칠전에 내린 눈이 보이긴 하지만  아이젠을 착용할 정도는 아니다

이곳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본격적인 산행 준비를 한다(09:55) 

고개 좌측 임도로 올라서니 이동통신탑이 서 있고, 좌측으로는 홍성의 진산인 오서산이 보인다

묘지에서 바라본 오서산

짙은 스모그에 묻혀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으니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통덕랑을 지낸 청주이공 良鎭, 靑鎭 두 분의 묘지가 나오고...

묘지 사이의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 다른 묘지를 바라보면서 걷는다

호화묘지 뒤를 지나서 능선으로 들어선다

잡목들의 저항이 시작되지만 아직은 걸을만하다

오봉이 마루 표지판(10:10)

좌측의 장곡면 문당리 원당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는 곳에 오봉이 마루 표지판이 있다

오봉이 마루는  문당리의 환경생태마을의 주요 시설들이 위치해 있는 자연 풀장을 말한다

194.5m봉(10:13)

지맥 등로를 걷는데 마을에서 올라온 등산객 한명을 만난다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고...

우측으로 문당리 명동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를 지난다

지맥길 등로는 밭 가운데로 지나간다

밭을 지나가는데 같이가던 산으로님이 이곳 아래 마을이 장곡면 월계리 용연마을이라는 곳인데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라 하여 집에와서 컴퓨터를 검색해보니

신라시대의 해동성인으로 칭송되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한동안 은거했던 곳이란다.

 

옛날에는 마을 앞쪽으로 산자수명한 계곡이 장관을 이루었으며 뒤쪽으로는 석성과 함께 극락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있었고,  마을 가운데로는 동쪽과 서쪽의 두 물줄기가 한쌍으로 흘러내리다가 합쳐지며

큰 못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계곡을 최치원 선생이 쌍계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최치원선생은 이 곳의 아른다운 경치를 찬양하기 위해 쌍계의 서쪽 암벽에 13개의 마애 금석문을

남겨놓았는데 그 중에 " 쌍계(雙磎)".와 " 최고운서(崔孤雲書)"라고 새겨진 글은 이곳의 유래와 함께

마애금석문의 주인공이 최치원 선생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 마애금석문은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쌍계의 아름다웠던 옛모습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고 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장곡면 문당리의 모습

무한(봉수)지맥 등로는 장곡면과 홍동면의 면계 능선을 걸어가는데 좌측으로 문당리가 보인다

 

장곡면의 중심에 위치한 농촌마을인 문당리(文堂里)는  자연마을로는 갓굴, 광지울, 문산, 원당 등이 있다.

갓굴은 원당 동쪽 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문산은 원당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정자가 있었다 하여 문산정이라고도 부르며, 원당은 문당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문산과 원당의 이름을 따서 문당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명동갈림길(10:30)

오봉이 마루에서 같이 걸어오던 동네 사람들은 명동 등산로라는 우측 길로 가고 우린 좌측으로 간다

약간 오르막을 오르니...

갑자기 등로가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니...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가 나타난다

200m봉(10:42)

200m봉삼각점(△홍성473 / 79.8)

200m봉에서 조금 내려오니 송전탑이 나온다

NO85 송전탑(10:52)

송전탑을 내려오니 좌측으로 넓은 임도가 나오지만 지맥길은 우측 희미한 길로 들어선다

등로는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등로에서 바라본 장곡면 월계리(月溪里)의 모습

홍성군 장곡면 북부에 위치하며 광천읍 가정리로 가는 고개가 있는 농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월촌, 명천, 화양 등이 있다.

월촌은 지형이 달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명천은 냇물이 급하여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화양은 행섭이라고도 부르며 월계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화양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월촌과 명천의 뜻을 따서 월계라는 명칭이 생겼다

무명봉(10:55)

무명봉에서 바라본 조금전에 지나온 길

무명봉 우측에는 마을 저수조인지 스텐레스 탱크가 보인다

등로가 상당히 애매하다...잡목을 헤치고 길이 없는 곳으로 내려온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오니 무명묘지가 나오고...

조금을 더 내려가니 새로 생긴 도로가 나오고 절개지라 도저히 갈 수가 없다

등로에서 바라본 동물이동통로 - 수헌아우님 사진 인용

다시 좌측으로 돌아 나오니 도로 윗쪽으로 최근에 설치한듯한 동물이동통로가 보인다

그런데 이곳에서부터 카메라가 갑자기 속을 썩이기 시작하는데 앞이 캄캄하다

하는 수 없이 세컨드 카메라를 꺼냈는데... 이건 베터리가 달랑달랑한다

등로 좌측으로 돌아 나오니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나오는 도로와는 달리 새로 확.포장한

29번 국도가 시원스럽게 뚫려있고,  아직도 공사중인지 등로 옆에는 중장비 소리가 요란하다

대영고개를 지나면서부터 우측은 홍성군 장곡면과 작별을 하고, 예산군 광시면으로 접어든다

대영고개(大英峴:11:12)

홍성군 홍동면 대영리와 장곡면 월계리, 예산군 광시면 노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29번 국도가 지나간다

예전의 2차선 도로를 확장하면서 고개에는 예전에 없던 동물이동통로가 새로 생겨서 맥산꾼들은 편하게 고개를 넘는다

고개의 지명은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따온듯 하며 대영리는 홍동면의 동부에 위치한 농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대조,

영촌, 수골 등이 있으며 대조는 황새울, 한새울, 또는 한사라고도 부르며 전에 황새가 많이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영촌은 대영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천호 가까이 사는 마을이었으며 안씨라는 장자가 천석을 했다고 하여 천봉터 또는

천분터라고 불렀고,수골은 물이 많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대조와 영촌의 이름을 따서 대영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동물이동통로를 지나니 묘지들이 보이고...

묘지를 지나면서 잡목지대가 나오기에 우측의 밭 가장자리를 따라서 간다

지나가다 전기선에 살짝 부딪혔는데 전기가 통한다... 농사철이 끝났는데 나 원참

184.4m봉(11:30)

밭을 지나 임도로 오르는데 이런 밋밋한 임도가 개념도상에는 184.4m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심한 잡목지대... 곧이어 조그만 小路를 만난다

경주김공 묘지(11:34)

小路를 지나니 양지바른 곳에 경주김씨 가족묘지가 나오는데 맨 위쪽이 ‘齋’ 돌림이고, 그 아래는 ‘東’자 돌림이다

나와같은 경주김씨인데 아마 나와 같은 상촌공파인 모양이다...‘齋’자 돌림은 할아버지 뻘이고, ‘東’ 돌림은 아버지뻘이다

묘지를 지나면서 잡목사이로 가야할 초롱산이 보이고, 잡목지대로 들어서는데 카메라가 정상 작동이 된다

거친 잡목지대가 시작되다가...

다시 넓은 임도가 나오고...

NO 88송전탑(11:37)

200m봉(11:39)

묘지(11:42)

묘지를 지나 희미한 등로를 따르는데 코앞에 뾰족한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최근에 지나간 모양이다

237m봉 오르는길

237m봉(11:50)

가야할 초롱산이 보이기 시작하고...맥산행에 관한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산꾼인 산으로 아우님

걸어온 길이 4.5km밖에 되질 않았는데 어느듯 점심시간이라 237m봉 아래에 있는 양지바른

묘지에서 점심상을 펼친 다음에 떡라면을 끓여서, 술한잔 하면서 1시간 넘게 여유로운 점심시간...

점심 식사후 포만감을 느끼면 다시 길을 떠난다

지나 가신지가 오래된 모양이다 ... 존경합니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임도(13:15)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 등골마을에서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 동달마을로 이어지는 임도이다

임도를 건너 올라서니 벌목을 하고 새로운 묘목을 심어놨다

묘목지대를 지나니 묘지가 나오고 그너머로 초롱산이 가깝게 보이기 시작한다

또다시 잡목과의 전쟁은 시작되고...미치겠다

갈림길(13:18)

뚜렸한 좌측 등로를 버리고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지데 등로는 잘 보이질 않고...

전주이공 묘지를 지나 조금을 더 가니...

묘목 조림지(13:22)

묘목 조림지를 지나 오르막길은 아예 등로는 보이지도 않는다

양반의 고향이란 충청도에 와서 잡목한테 엄청난 수난을 당하며 길을 걷는다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그렇다고 안 가냐

300m봉(13:37)

다시 묘지로 향하는 희미한 등로를 만나고...

묘지 가운데로 난 지맥길을 걷는다

울산박공 묘지(13:42)

초롱산(339m:13:46)

홍성군 홍동읍 금당리와 예산군 광시면 은사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멀리서 보면 삼각점 맨 윗부분처럼

뾰족하게 생긴 산으로 또다른 지명으로 금룡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지명은 초롱불을 밝히던 산이라는데서

유래되었는데, 초롱산 아래 살았던 고려의 충신 이성(李晟)과 깊은 관련이 있다.

초롱산 정상석 뒷면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성은 고려 시대의 충신으로서 제주의 벼슬로 시작하여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고려말엽에 국정이 어지러워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홍주에 내려와 있었는데 그는 사서오경에 통달하여

오경사(五經師)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의 학식과 인품이 출중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제자가

되기를 청할 정도였다... 그 당시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줄 인물들이 필요했다.

 

이미 이성의 인물 됨됨이를 잘 알고 있던 이성계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하지만 이성은 고려의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이성계의 부름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다급해진 이성계는 직접 이성을 찾아와서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성계가 이성을 찾아왔을 당시의 일화들이, 1923년에 발간된 「여조충열록(麗朝忠烈錄)」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 원문의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가 말하기를,
비욕청신(非欲請臣) 원위빈사(願爲賓師)
“신하가 되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이성이 말하기를
옥출곤강(玉出崑崗) 산기진출옥호(山豈盡出玉乎)
금생여수(金生麗水) 수기진생금호(水豈盡生金乎)
여필종부(女必從夫) 인기진부이종호(人豈盡夫而從乎)
“옥이 산에서 난다 한들 어찌 산마다 옥이 나겠느냐. 또한 금이 고운 물에서 난다 한들 어찌 모두 금이 나올 수 있겠느냐.

아내는 남편을 따른다 하나 어찌 모든 아내가 남편을 따를 수 있겠느냐”고 답하였다.
이성의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성의 집을 떠나면서 손에 쥐고 있던

금단장으로 주변 사방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근처의 산과 전답을 이성 자손들의 녹으로 내어주어라”고 명하였다.


후에 이곳은 왕이 준 땅이라고 하여 ‘금동(金洞)’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옛날에는 이곳의 이름이 ‘홍주군 금동면’이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홍성군 홍동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초롱산이라는 이름도 이성계가 이성을 찾아와서 하룻밤 묵을 때, 초롱불을 밝히던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초롱산 바로 아래에 ‘백동(栢洞)’ 마을이 있는데, 옛이름은 ‘등골’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왔을 때 등불을 밝혔던 마을이라는 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옛날부터 사용하던 ‘등골’이라는 이름을 즐겨 부른다.

초롱산 정상에서 봉수산을 배경으로 인증샷

초롱산 정상 3등 삼각점(△예산315 / 2008 복구)

가야할 봉수산과 임존성은 스모그에 갇혀버려 모든게 흐릿하게만 보인다

초롱산 내리막길은 산불인 난 흔적이 보이고...

짧은 구간에 고도 200m을 낮춰야하는 엄청난 급경사, 거기다가 음지에 낙엽위에 눈이 살짝있어

내리막길에 2번이나 쳐박혔더니만 며칠전 가벼운 교통사고 때의 부위에 엄청난 통증이 몰려온다 

급경사로 내려오니...갑자기 등로가 잘 안보이고...

묘지 가운데로 지맥길이 이어진다

전주이공 묘지(14:02)

묘지를 지나면서도 길이 보이질 않으나 최근에 지나간듯한 선답자의 시그널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

길을 찾는데 애를 먹는다

여름 산행은 상당히 애를 먹을듯 싶다

음미고개(14:08)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에서 예산군 광시면 은사리를 지나 광시면 소재지로 넘나드는 옛 고개로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지나가고, 광시면쪽은 축사가 있는지 가축 분뇨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Y자 도로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져 임도로 올라선다

임도 좌.우측으로는 담양전공을 비롯한 잘 관리된 묘지들이 많이 보인다

묘지 가운데로 올라서니...

昌原兪氏 묘지(14:18)

선 채로 5분정도의 휴식을 취한다

창원유씨 묘지에서 바라본 초롱산의 모습...마치 고흥의 첨산처럼 보인다

묘지를 지나 임도로 가다가...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260m봉 갈림길(14:26)

독도에 상당히 유의해야 할 구간이다...우측 봉우리로 올라서는 등로는 보이나

지맥은 좌측으로 꺽어져야 하고, 그러나 자세히 보면 좌측 너머로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260m봉(14:28)

우측 봉우리로 올라서니 ‘홍성둘레길 226m’이란 표지판이 있으나 지도상에는 260m로

표기되어 있어 혼란스럽고 직진쪽으로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있어서 알바하기 딱 좋은 곳이다

다시 지나온 갈림길로 되돌아 와서 좌측의 지맥길 능선으로 향한다 

지금부터는 잡목과 가시와의 전쟁이 시작되는 고난의 등로이다

홀대모 출신인 바랑산님이 최근에 지나가신듯 하다

음미고개에서 올라와 묘지를 지난 다음에 만나는 이곳 마치 악명높은(?) 고흥지맥을 걷는듯 하다

지맥 산꾼들에겐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청미래(망개나무)... 니들의 괴롭힘에 죽을 맛인데 이 넘들은 엄청 아닌척 한다

꼭두서니 열매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쭈그렁 밤탱이가 되어 버렸고...

암봉(14:55)

270m봉(14:58)

270m봉에서 우측으로 90도로 꺽어져 내려선다

270m봉 아래는 ‘山神祭壇’ 상석이 뿌러진 나뭇가지 속에 묻혀있고 조금은 더 내려오니 우측으로

李瑞圭묘가 나오며 우측으로 넓은 임도가 보이고 한동안 이 길을 따라서 계속 내려간다

10여분 정도 임도를 따라오다가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들어서니 아예 등로 자체가 사라졌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겨우 능선을 찾아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이 길이 지맥길인지 누가 알겠노

연륜이 묻어나는 시그널... 지나가신지가 오래된 듯하다

벌목지대를 만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또다시 잡목과의 전쟁...정말 미치겠다

등로에서 바라본 산수골 마을(광시면 마사리 소재)

산수골 마을은 산소가 있었다 하여 칭하게 된 이름이란다.

벌목지는 갈참나무가 점령하고 있고...

언 넘의 짓인지?...농가에서 키우는 검은 닭한마리가 이곳에 죽어있다

다시 잡목지대... 윗쪽은 청미래 가시에 할퀴고, 바닥은 칡넝쿨이 산꾼을 괴롭히고...

천신만고 끝에 잡목지대를 빠져 나온 다음에...

전주이공과 부인 밀양박씨의 묘지 뒷쪽을 지나간다

갈림길(15:20)

뚜렸한 갈림길에서 빨간 지적경계점이 있는곳에서 등로가 아예 안보이는 우측으로 꺽어진다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걸어온 학습효과인지 이런곳은 식은 죽먹기다

등로에서 바라본 봉수산과 홍주 마사마을(홍성군 금마면 소재)의 모습

국립지리원 자료에 의하면 땅이 척박해서 말을 키웠다고하는 마사(馬沙) 마을로 바로 옆의 예산군

땅은 상마사,하마사이고 이 동네는 홍성땅이라 홍주(홍성의 옛이름)마사마을로 부른다

당겨본 봉수산의 모습

봉수산에 위치한 임존성은 백제가 나.당 연합에 망하고 백제를 부흥시키고자 부흥군이

일어났는데 내부분열과 임존성 전투에서의 패배로 백제는 부흥의 싹 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구릉고개(15:32)

예산군 광시면 마사리와 홍성군 금마면 월암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19번 군도가 지나가며

마사고개라고도 부르며 예산군 방향으로는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양 군 경계의 표시판이 서 있다.

준.희 님이 ‘여기가 구름고개입니다’라고 했는데 구름고개가 아니고 구릉고개이다

구릉고개 홍성군 금마면 방향

홍성군 금마면은 동쪽으로 예산군 응봉면()·대흥면()과, 서쪽으로 홍성읍(),

남쪽으로 홍동면()과 예산군 광시면(), 북쪽 및 북서쪽으로 홍북면()에 접하고 있다.

퇴메산·철마산() 등의 낮은 산지가 있을 뿐 대부분의 지역이 높이 50∼100m의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홍성읍 ·홍북면과의 경계를 따라 금마천()이 화양리()에서 송정거리()에 걸쳐 흐르고 있으며

그 유역 일대에 비교적 넓은 평야를 이룬다. 특히 홍성군의 곡창지대로서 양잠·잎담배 재배 및 한우사육과

양계가 활발하다.

교통은 홍성읍과 인접하고 있어 비교적 편리하며, 장항선() 철도와 예산으로 통하는 국도가 있다

구릉고개 예산군 광시면 방향

예산군 광시면은 마한의 거친국인 지금의 홍주에 속하였고, 백제시대에는 임존성에,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는

 대웅천 소관인 임존군 지역이었으며, 고려 태종 2년에는 임존군의 개칭인 충주군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현재의 광시면이 되었다. 

 

광시면의 광시리는 본래 대흥군 일남면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역말이 있어 광세역, 역말, 역촌, 광시 등으로

부르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대광시리, 웅산리, 탑동 등을 병합하여 광시리라 하였다.

광시면은 광시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광시면의 구례리 역시 본래 대흥군 일남면 지역으로 구례골 또는

구례동으로 부르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강진리, 상구례동, 하구례동, 상촌, 황곡리를 병합하여

례리라 하였고, 구례란 협곡사이에 넓은 들이 발달한 곳을 말하며, 수렁배미논이 많고 물이 풍족하여 예전에는

상답으로 여겼다. 광시면 마사리 역시 본래 대흥군 일남면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말을 먹이던 곳이라 마사, 마새,

 매사라 부르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가막사리, 상마사리, 하마사리, 내상산리, 점촌리를 병합하여

마사리라 하였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자마자 좌측 小路 방향으로 들어선다

봉수산을 바라보며 묘지와 밭 가운데로 걸어가니...

홍주마사마을(15:37)

마을 가운데로 시멘트 도로가 있는데 이 조그만 도로가 홍성군과 예산군의 郡界가 되는 셈이다

좌측에 보이는 마을이 홍성군 금마면에 속한 홍주마사 마을이고 우측이 예산군 광시면 마사리다

마을 도로에서 우측으로 오르다 좌측으로 꺽어져 봉수산으로 향한다

해주오공 묘지(15:42)

임도(15:50)

해주오공 묘지로 올라서니 임존산성으로 오르는 넓은 임도가 나오고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들어선다

불법 묘지 조성이 심한 모양이다

선답자의 시그널만 보일뿐... 등로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너덜지대로 올라서니...

대슬랩 지대가 나오고...

어떤 산꾼들은 대슬랩 지대로 지났는지 시그널이 보이나 이 나이에 목숨을 걸 필요까지야 있겠나

낙엽이 수북한 슬랩지대를 우회하여 걷지만 낙엽이 상당히 미끄러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능선에 올라 뒤돌아보니 저 멀리 구름처럼 보이는 오서산은 백설로 뒤덮혀 있고 그 앞에 뾰족한

초롱산은 마치 여인의 乳頭처럼 보이는데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환상 그 자체이다

요즘 최모 여인이라는 자 하나 때문에 촉발된 작금의 사태... 그걸로 인해 여의도에 상주하는

정치꾼들은 이 험한 시대를 빙자하여 고통받는 민초들은 眼中에도 없고 자기 잇속 챙기기만 바쁘다

 

一犬吠形 百犬吠聲(일견폐형 백견폐성)

한 마리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니

수많은 개들이 덩달아 짖네

一人傳虛 萬人傳實(일인전허 만인전실)

한 사람이 거짓을 퍼뜨리니

많은 사람들이 진실인것처럼 떠들어 대네

 

요즘 개짖는 소리에 너무나 짜증이 많이난다

세월의 흐름에

이 또한 지나가겠지만

풍전등화같은 이 나라가

과연 어떻게 발전해 갈런지...

봉수산 오름길에서 뒤돌아 본 홍성군 금마면 월암리(月岩里)의 모습

봉수산 아래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월굴, 봉암, 마새, 질패기 등이 있다.

봉암은 월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봉암이 있어 붙은 이름이고, 마새는 지시턱굴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다 하며 예산군 광시면에 마사리가 있는데 그 위쪽이 되어 붙은 이름이다.

질패기는 땅이 몹시 질어 붙은 이름이다. 월굴과 봉암의 이름을 따서 월암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소나무 사이를 걸어 올라가니...

좌측으로 봉수산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임존성(任存城)터(사적 제90호:16:30)

임존성(任存城은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금마면 등 3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수산 484m의

정상부 남쪽 경사면 분지를 둘러싼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임존성의 축조에 관하여는 묘순이 남매에

얽힌 유명한 전설이 전하며 백제부흥전쟁(AD 660-663)당시 크게 보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석축방법 : 테뫼식 (외벽 : 석축, 내벽: 토석 혼축)
-성의 둘레 : 2,450m
-성의 높이 : 2.5m
-성의 폭 : 3.5m(상단부는 1.6m)
-성벽 안쪽 : 7∼8m 의 내호(성 안쪽에 넓은 도랑을 파놓음)
-성벽 4구석 : 2m 정도 더 두텁게 축성하여 망루 또는 지휘소로 사용함
-성의 넓이 : 28만 8,000평

성이 위치한 봉수산은 산세가 험하고 예당 저수지, 삽교, 예당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지형으로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운 산세를 하고 있으며 주로 북쪽 곡창지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된 산성으로 보인다.

이 곳 임존성은 백제시대에는 수도경비의 외곽 기지였으나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로서,

후삼국시대에는 다시 견훤과 왕건이 겨루었던 곳이다.


봉수산과 그 동쪽 900m 쯤에 떨어져있는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형 산성이어서 한편으로는 봉수산성이라고도 한다.
돌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석축산성으로 안으로는 흙을 파내서 다지고, 밖으로는 축대를 쌓는 방식으로 성을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형으로 세계에서 하나뿐인 수정식성으로써, 가장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성안에 모아두었다가
적이 공격할 때에 물꼬를 터뜨려 1차로 곤경에 빠뜨리고 나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성안은 경사를 약간 이루면서도 평평한 넓은 분지인데 넓이가 28만 8,000평에 이른다. 이러한 요건들로 인해

임존성은 방어에 있어서 최적의 고지였다.


이곳은 백제 수도를 웅진(공주)로 옮긴 뒤에 수도인 웅진을 방위할 목적으로 백제 시대에 쌓은 성으로 보이며,
백제가 멸망한 뒤에 백제 부흥 운동군의 거점으로 흑지상지, 지수신 등의 장군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켜
약 3만명의 군사가 3년 동안 신라와 당의 군대와 혈전을 벌였으나
성 안 사람들의 내부의 분란으로 인하여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 사이에 격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임존성터를 따라서 봉수산을 향하면서 이곳에서 백제의 부흥을 꿈꾸던 시절에 나오는 복신, 도침과 함께

등장하는 흑치상지(黑齒常之)장군... 당나라의 역사서에 이르기를 중국의 동남쪽에는 나국과 흑치국이 있는데

흑치국은 지금의 필리핀을 말한다고 한다...그러면 흑치상지 장군은 과연 필리핀 사람이란 말인가?

백제가 멸망 당시에 무역을 왕성하게 한 국가였기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까?

또 하나는 이곳에서 가까운 예산군 덕산면의 옛 지명이 백제 금물현(今勿縣)으로 이 주장에 따르면

黑은 검다는 의미로 금(今)을 훈차한 것이며 齒는 내(川)라는 의미로 물(勿)을 훈차한 것으로 보이며

“흑치(黑齒)”가 한자 발음상 ‘검은냇가’라는 뜻으로 역사학자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한다

660년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신라의 김유신이 각자 지휘하는 18만 나ㆍ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수도 사비성을 점령하니 의자왕은 소정방에게 항복하였다. 하지만 당의 소정방이 의자왕을 포로로 삼아 온갖

모욕을 주고 군사를 풀어 젊은이들을 죽이는 등 갖은 약탈을 일삼자, 두려움을 느낀 흑치상지는

10여 명의 장수와 함께 임존성(任存城)으로 도망쳐 백제 부흥운동에 가담, 당에 항거했다.

 

이때 그를 따르는 무리가 열흘 만에 3만 명이나 모였다고 하며 소정방은 흑치상지를 치려 했으나 패배했고,

흑치상지는 그 기세를 몰아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그러나 663년~661년 무렵에 백제 부흥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부흥군의 수장이었던 귀실복신(鬼實福信)이 함께 거병했던 도침(道枕)을 죽이고 전권을

장악했다가 다시 풍왕(豊王)에게 살해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고, 마침내 663년 백마강 어귀에서 당병에게 대패한다

 

이 무렵 당 고종의 계속되는 초유(招諭)를 받고 있던 흑치상지는 결국 고종의 초유를 받아들여, 함께 백제부흥군 편에서

싸우던 별부장 사타상여와 함께 당에 항복했다... 이때 그는 당으로부터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ㆍ

양주자사(佯州刺史)로 임명되었으며 유인궤의 주선으로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임존성 공격에 앞장서는 등

당의 장수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그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가 머물던 임존성을 쳐 멸망 시키는데...

이 때문에 역사에서는 그를 베신자로 낙인 찍혀 버렸다 

봉수산 가는 길에 멋진 소나무 한 그루는 아픈 역사를 알고나 있는지...

헬기장(16:35)

내포의 중심인 가야산

구름에 둘러쌓여 마치 섬처럼 보이는데 환상 그 자체이다

5년전 금북정맥 산행때 홀로 저 가야산을 걸었을 때가 좋았는데...

제도권 등로에도 산꾼을 괴롭히는  잡초... 오늘 산행은 참으로 고된 여정이다

477m봉(16:38)

홍성군의 최동쪽인 모양이다

봉수산 가는 길

본격적인 제도권 등산로에 접어든다

내포문화숲길 이정표(16:40)

직진으로 대련사로 가는 등로가 있고 우린 우측으로 봉수산으로 향한다

 대련사 극락전...사진 펌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서  656년(백제 의자왕16) 의각()과 도침()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인근 임존산성()에 연당()과 연정()이 있어서 절 이름을 대련사()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 《가람고》 등에는 대련사()라고 적혀 있다.

845년(문성왕 7) 무주() 무염() 스님이 중창하였고, 1648년(조선 인조 26)과 1691년(숙종 17),

1745년(영조 21)에 각각 중수하였다. 1836년(헌종 2) 보월()이 수선당()을 중수하였으며,

1843년(헌종 9)에는 노전(殿)을 새로 지었다. 보월은 1849년(헌종 15)에도 법당을 중수하여 절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이후 1975년 원통보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며, 근대 불화(佛畵)의 대가 문성스님(: 1876∼1954)이 머물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노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고, 이 중 극락전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7호로 지정된 문화재로서, 본래는 원통보전이라고 하였으나 1975년 해체 보수할 때 《대련사법당중수상량문》과 함께

 ‘극락보전’이라는 현판이 발견되어 극락전으로 바꾸었다

또 다른 이정표를 지나 봉수산으로 오른다

봉수산 도착

봉수산(鳳首山:483.9m:16:45)

홍성군 금마면과 예산군 대흥면의 경계에 있는 봉수산은 산의 지세가 봉황새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이며, 예산군 대흥면에 있는 산이라 하여 대흥산이라고도 부른다.

정상 동남쪽에는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임존성(사적 제90호)이 남아 있고, 바로 앞에는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크고, 충청도에서는 가장 크다는 예당 저수지가 보인다

 

봉수산은 충남의 진달래산으로 임존산성 오른쪽 성곽 아래에는 봉수산의 최대 진달래 군락지가 있다

산 중턱에 있는 임존산성 성곽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정상 부근에는 억새가

우거져 있고 예산군 대흥면과 홍성군 금마면 경계에 자리한 봉수산(483.9m)은 백제의 역사가 숨쉬는 산이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서기 660년에 멸망한 후 부흥운동을 펼쳤는데 거점으로 삼은 곳이 봉수산의

임존산성이다. 임존성이 실패한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인 탓인지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었으나 돌로 쌓은 성터는

아직도 뚜렷이 남아있어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인증샷

봉수산 정상 2등 삼각점(△예산 26 / 1985 재설)

봉수산 정상에서 바라본 오서산(뒷쪽)과 지나온 초롱산(뾰족한 곳)

동남쪽으로 바로 아래는 예당 저수지가 보이고, 그너머 섬처럼 보이는 능선이 금북정맥이다 

날이 저물어 오기 시작한다... 서둘러 비티고개 방향으로 향한다

봉수산 휴양림 갈림길(16:48)

스텐레스로 만든 봉수산 등산 안내도와 벤취 2개가 있고, 직진의 약수터(기도원) 방향으로 간다

하루종일 개고생하면서 걸었던 등로를 보상이라도 받는 느낌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제도권 등산로를 편하게 걷는다

416m봉(17:00)

416m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멋진 조망바위가 나오고...

가야할 무한(봉수)지맥 능선

등로에서 바라본 예당 저수지

짙은 스모그 현상으로 인해 저수지 형태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예당 저수지는 예산군 대흥면, 응봉봉면, 광시면, 신양면의 걸쳐 있으며, 유순한 호반으로 마치

아름다운 남화와도 같은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담수어 서식지로서 국내 제일의 낚시터로 평가받고 있다.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개발 등으로 다양한 휴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 몽리면적 : 10,005ha
- 유효저수량 : 46,070천톤
- 만수위 때의 호면 둘레 : 약 40Km
- 1952년부터 12년 동안 공사하여 1964년 12월에 완공

급경사의 내리막길... 상당히 미끄럽다

큰비티고개(17:10)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에서 예산군 대흥면소재지가 있는 동서리로 연결하는 임도이다

큰비티고개 이정표

차량이 다닐정도의 넓은 임도를 따라서 빠르게 걷는다

계속되는 편안한 길

임도끝(17:22)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잠깐이지만 또다시 잡목의 괴롭힘은 시작되고...

242.2m봉(17:24)

임도(17:27)

조금전에 헤어졌던 임도를 다시 만나고...

좌측의 편백나무숲을 끼고 가는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210m봉(17:30)

녹슨 철조망이 있는 210m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이동통신 중계탑(17:32)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렌턴을 켜지않고 내려오니 비티고개가 보인다

비티고개(飛峙峴:17:45)

홍성군 금마면과 예산군 대흥면, 응봉면 등 3개면의 만나는 고개로 금마에서 예당저수지로

이어지는 616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예전에는 아주 험한 고개였다고 한다

다행히 헤드렌턴을 켜지않고 산행을 종료하고 한 숨을 돌린 다음에 예산 택시를 호출하는데

예산 택시들은 비티고개를 전혀 알지를 못한다... 하는 수 없이 이 곳 주소를 가르쳐주니

그때서야 제대로 찾아오는 바람에 고개에서 20여분을 허비한 다음에 택시를 타고

예산역으로 향한다 (택시요금 15,000원)

비티고개에서 15여분만에 예산역앞 순대국집에 도착하여 따뜻한 물에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뜨끈한 순대국에다 술한잔 거하게 하고 열차를 타러 예산역으로 향한다

예산역 플랫홈

19시 35분에 예산역을 출발하여 영등포역에 도착하니 21시 40분경...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