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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山經表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은 어떻게 다른가 ?

by 범여(梵如) 2017. 1. 21.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은 어떻게 다른가 ?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백두대간은 지리상의 인식을 바탕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고, 태백산맥은 지질상의 지식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땅 속의 지질구조선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백두대간으로 요약되는 전통적인 지리 개념(산경도)과 고토 분지로의 「조선 산악론」에서 비롯된 산맥개념(태백산맥으로 대표, 현재의 지리 교과서)은 다음과 같은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 백두대간(산경도 )
1) 땅 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과 강에 그렸다.
2) 산경은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고
3)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지리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선이다.

* 태백산맥(산맥도)
1) 땅속의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그렸다.
2) 산맥은 강에 의해 여러 차례 끊기고
3) 실제 지형에 일치하지 않는, 인위적(지질학적)인 선이다.

『태백산맥은 없다』(조석필. 사람과 산. 1997)에서 인용

이렇게 분류를 하고 보면 명확한 사실을 한 가지 알 수 있다. 중간에 무엇인가가 잘못 끼어 들었을 가능성 말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백두대간은 보이는 것 중심이니 지리학에서 다루고, 태백산맥은 보이지 않는 지질 구조 중심이니 지질학에서 다루면 제자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백산맥은 지리학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앉아 있고, 백두대간은 제자리를 잃고 잊혀져 왔다. 중간에 잘못 끼어 든 것은 바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그 정신적 유산들이다. 그 결과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보이는 것인 양 교육을 받아 왔고, 또 그렇게 믿고 살아 왔다. 그 세월이 어느새 100년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잘못된 것 같기는 한데,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무슨 관계가 있나. 이 때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서도 잘 살아왔고 생활의 불편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이런 분들께는 다음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다.

몇 백년 전 유럽에서는 천동설과 지동설이 자리다툼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알려진대로 천동설은 지동설이 등장할 때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태양, 달, 별들의 운행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이론으로서 천년이 넘게 사람들에게 의심없이 받아들여 졌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면서 천동설을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배워 온 대로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하늘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늘을 보며 천체를 관측한 자료가 쌓여 갈수록 천동설로는 해결 안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생겼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천동설은 자꾸만 복잡해져 갔다.

그런데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진 이론이 나타났다. 바로 지동설이다. 지동설의 등장은 천동설보다 훨씬 간단 명료한 이론으로 천체와 지구에 관련된 사실들을 설명해냈다. 특히 관련 자료가 쌓여갈수록 이 이론의 진가는 더욱 빛을 발했다. 하지만 이 이론을 인정하는 데는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필요로 했고, 그 결과 기득권을 가진 종교 및 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 후의 결과는 역사가 말해준다. 천동설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사람들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며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느닷없이 천동설과 지동설의 역사를 꺼낸 것은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으로 대표되는 지리개념의 자리다툼도 이와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의 부활이 초기에는 산악인 중심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에는 다음과 까닭이 있다. 산행이나 등산을 통해 이 땅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는 산악인들의 열망은 태백산맥 종주, 소백산맥 종주같은 좀 더 인내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종주 산행으로 이어졌다.

태백산맥 종주는 태백산맥이 백두대간의 일부와 낙동정맥을 이어놓은 것이므로 아무 의심의 조건이 없었다. 하지만 소백산맥을 종주하려던 이들에게는 상황이 달랐다. 고로쇠 물로 유명한 전남 광양의 백운산은 지리산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산 중의 하나로 소백산맥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소백산맥의 종주는 이곳이 출발점이 된다.

(그림/ 백운산은 지리산을 지척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지만, 소백산맥을 따라가서는 지리산에 가 닿을 수 없다. 하지만 호남정맥을 따라가면 멀지만 닿을 수 있다. 붉은 색의 점선은 소백산맥을 나타내며, 타원형안에는 백운산과 지리산 사이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종주팀들은 백운산의 마루금(능선)을 따라 지리산을 향해 힘든 발걸음을 내딛었다. 지리산이 멀리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 난감한 일 생겼다. 더 이상의 산행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누가 부상을 입어서도 아니다. 이유는 바로 앞에 섬진강이 누워 있기 때문이었다. 배를 타지 않으면 건널 수가 없는 상황이다. 학교 때부터 우리는 산맥은 산에서 산으로 이어진 것으로 배웠고, 당연히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분명 소백산맥은 산으로 이어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설명을 내놓았다.
"일단 소백산맥을 지리산에서 끝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백운산은 독자적인 산으로 인정하자. 그러면 소백산맥은 끊김이 없이 계속 이어지니 이제 문제가 없다. 하지만 소백산맥에는 분명 백운산이 포함되어 있으니 어떻게 하나. 아마 책에서 실수를 한 것 같으니...."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푸념했다.
"지질학적으로 같은 구조선이라는 데야. 그것이 이어지건 안이어지건 무슨 상관이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지. 쩝쩝...."

그렇게 이해하고 산악인들은 소백산맥의 종주는 불가능함을 알고 포기했다. 하지만 갑갑함은 영 가시지 않았다.

설명이 복잡해지거나 쩝쩝같은 말이 등장하면 본질과는 자꾸만 멀어지게 된다. 설명할 수 있는 간단 명료한 이론을 찾든지 아니면 만들어 내든지 그도 아니면 그 설명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백두대간의 등장(1980년 『산경표』 발굴)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백두대간의 개념으로 보면 왜 백운산에서 지리산으로 갈 수 없었는지 바로 답이 나온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에 속해 있고, 백운산은 호남정맥에 있는 산이다. 그러니 거리는 지척이라도 호남정맥을 빙 돌지 않으면 가 닿을 수 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 닿을 수는 있는데 소백산맥을 타고서는 안된다. 산경도를 보면 이 사실이 명확해진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태백산맥(지질구조선에 따른 산맥)은 지질학이나 지구과학의 교과서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일반인을 교육시키는 지리학에는 백두대간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옛부터 내려 오는 지도들도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거기에는 단순히 이 땅을 현대 지도에 비추어 비슷하게 그렸구나 아니구나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조상들이 땅을 바라보는 시각, 자연과 우주 바라본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땅은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은 존재 곧 함부로 다루거나 헤쳐서는 안되는 용으로 상징한 '땅의 기운(地氣)'이 흐르고 있다는 인식이 들어 있다.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광물탐사사업의 학술 책임자였던 고토 분지로가 1900년과 1902년의 두 해에 걸쳐, 14개월동안 이 땅을 답사하고 만들어 낸 '산맥'의 개념이 어느새 100년동안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일제의 침략기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해방이 된지 55년이 되어 가는 이 시간에도 아직 (정신의) 식민지는 계속되고 있다.

또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아직 한 번도 우리 손으로 이 땅을 제대로 조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교통과 통신 시설이 너무나 보잘 것 없던 시절, 말을 타고 다니며 100년 전 한 개인이 조사한 지질 구조가 현재에도 그대로 이 사회에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기초 자료를 수집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백두대간을 살리는 일이 비단 이름을 하나 바꾸고 안바꾸고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조상들이 이 땅을 바라본 관점에서 현재의 개발과 보존에 대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또한 우리 손으로 이 땅을 다시 답사하고 조사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되살려 후손들에게 정신적으로도 부끄럽지 않을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 모두의 중심에 백두대간이 서 있다.


[출처 : 안강의 싸이트, www.angkang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