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7년 12월 24일
☞ 산행날씨: 비와 우박...짙은 안개에 강풍
☞ 산행거리: 도상거리 10.3km / 5시간 3분 소요
☞ 참석인원: 수헌, 산으로님과 함께
☞ 산행코스: 팔령재-목장-장평마을 갈림길-임도삼거리-안부-투구봉 갈림길(왕복)-투구봉 -헬기장
감투봉-무명봉-안부-7부능선-1,069.2봉-1,109봉-인산농장 갈림길-삼봉산-암봉
헬기장-무명봉-1,047봉-8부능선-우리절 갈림길-무명봉-오도봉-953.2봉
임도-합천이공 묘지-511.4봉-지안재
☞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인월면, 산내면 / 경남 함양군 함양읍, 휴천면
지난 늦겨울인 3월 12일에 남원으로 귀촌한 知人 젠틀맨님의 도움으로 연비(임천)지맥 첫구간을
편하게 들머리로 올랐는데 해를 넘기기전에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수헌,산으로 아우님과
1박2일 예정으로 연비지맥길에 나선다...이곳은 워낙 잡목과 각종 가시나무로 인해 악명높은
지맥길로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산행을 엄두도 못내는 곳이라 겨울에 산행을 나서는데 하루전
수헌아우님한테 카톡이 날라온다...‘선배님! 일욜날 함양쪽에 비가 온다고 하던데요’ 하기에
내가 비가 별로 안 올거야 일정대로 그냥 가자고 하니까 착하고 마음여린 수헌아우는 찍소리도 안한다
아우님은 나와 공통점을 참으로 많이 가지고 있다...우중산행과 어둠속 산행은 딱 질색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인 24일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빗방울이 한방울씩 떨어지긴 해도 우산을쓸 정도는
아니라 그냥 버스를 타고 선릉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터미널(06:40)
지하철 강변역에서 내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06시 40분이다
아직 후배들은 도착하지 않았고 잠시 후 후배들과 조우를 한 후에 07시 지리산 백무동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오늘따라 왜 이리도 잠이 쏟아지는지...버스는 한참을 달려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잠에서 깨어나 차창밖을 바라보니 비가 꽤 많이 내리고 있다
기상청의 예보로는 시간당 1~4mm정도의 강수량이라 했는데 현재 내리는 비는 에보보다 훨씬 많이 내린다
인월버스 터미널(10:48)
버스는 함양J.C를 지나 광주~대구간 고속도로(舊88고속도로)를 들어선 후 함양에 정차를 한 다음
비 때문인지 예정시간보다 30여분 늦게 인월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는데 비가 그칠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고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는데 이 정도면 내 기준으로 산행불가능하다
인월터미널을 빠져나와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점심을 먹으면서 비가 그치길
바라고 그 이후로도 계속 비가오면 차후로 생각하기로 하고 근처의 식당으로 향한다
산골농장식당(10:50~11:48)
식당에 도착하여 비도 피할겸 그치기를 바라면서 김치찌게에다 소주 한병을 시켜서
나눠 먹은 다음에 이곳에서 최대한 시간을 보내는데 전라도라 그런지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반찬이 10여가지나 나온다...맛있는 반찬 때문인지 쐬주가 꿀맛이다
식당에서 커피한잔을 마시면서 밖을 내다보니 비가 그치는게 아닌가
베낭을 둘러메고 서둘러 식당을 빠져 나온다
인월 터미널 앞(11:50)
남원시 인월의 지명은 고려 우왕 6년(1380년)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와의
황산싸움에서 달(月)을 끌어(引) 승전하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1998년까지는 남원군 동면을 인월면으로 개칭하면서 면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버스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팔령재에 도착하여 택시 요금을 내려고 하니
요금을 5,000원을 달라고 한다... 뭔 소리냐고 지난번에 3,000원을 주었는데 하면서
왜 미터기를 안꺽느냐고 하니까 이곳은 가까워서 그렇게 받는다고 하는데 할 말이 없다
3명이 산행을 하면 늘 꼼꼼한 수헌아우가 총무를 맡고 있어서 그냥 모른척 하자
아우님이 피곤하지 않게...
팔령재(八嶺峙:513m:12:00)
함양군 함양읍과 남원시 인월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동쪽인 함양쪽은 비교적 급경사면이고,
서쪽은 운봉(雲峰)을 거쳐 남원에 이르는 사면으로 인월리ㆍ운봉 등 분지 사이의 작은 고개를 넘어간다.
동쪽은 남강(南江)의 상류인 함양에서 서쪽으로 분기하는 팔량천(八良川)의 계곡으로 통하고,
서쪽도 같은 남강의 지류인 임천(臨川)의 지곡과 이어진다. 따라서 이 고개의 양쪽 사면은 같은
하천의 하곡에 의하여 연결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팔량치를 통과하는 24번 국도도 이들 하곡을 따라 개통되고, 동쪽으로 함양ㆍ안의(安義)를 거쳐 거창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운봉을 거쳐 남원에 이르는데 천연적 요새를 이루어 군사상ㆍ교통상의 요지로 중요시되며
신라 때의 성이 남아 있고, 옛날부터 경상남도의 북부 산간지방과 전라북도의 남동 산간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주변에는 흥부전에서 나타나는 흥부일가의 출생지로 알려진 흥부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팔량관(八良關)이 설치되어 관문 역할을 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함양과『천령지』에“ 팔량현은 군 서쪽30리 지점에 있다.
전라도 운봉현 경계로서 요충지대로고개위에 신라 때 옛 진터가 있다”라고 적었다.
『함양군지』에는“상산(霜山)이 남쪽으로 내달은 것이 이 고개이다. 전라도 운봉현의 경계이자 요해처이다.
고개 위에는 신라시대의 옛성(壘]이 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였다.팔량재를 통과하는 24번국도가 동쪽으로
함양·안의安義)를 거쳐 거창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운봉을 거쳐 남원에 이르며 팔량재라는 명칭은 마한의
마지막왕이 행궁을 삼아 최후의 항전을 벌인 무대가 운봉 일대인데 8명의 뛰어난 병사가 지켰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흥부 출생지와 발복지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 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
'흥부제비노정기'에 나오는 대목으로 흥부의 출생지로 알려진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는
전북 남원시와 경남 함양군이 나뉘어지는 팔령재 아래에 있는데 흥부의 고향인 탓인지
이 마을에는 흥부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연비봉, 화초장 바위, 흥부네 텃밭, 연하다리 등이 그것이다.
성산리가 흥부의 출생지라는 사실을 가장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이 마을에서
전래되고 있는 '박첨지 설화'로 '흥보전'과 내용이 비슷하다.
박첨지는 부자였지만 아주 인색하여 재물만 탐하여 소작인들과 이웃을 혹독하게 괴롭혔다.
그는 또 하나밖에 없는 동생 흥부를 내쫓았고, 다시 찾아온 동생에게 매만 주고 내쫓았다는 것이다.
그 뒤 함양 땅에서 민란이 일어나 박첨지가 죽임을 당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의 시체조차 거두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부자가 된 흥부는 형의 참변 소식을 듣고 찾아와 동네사람들에게 돈과 토지를 나눠주고
해마다 형의 제사를 지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산리 주민들은 지금까지 매년 삼월삼짇날 박첨지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가난으로 방황하던 흥부가 정착하여 복을 받게 된 흥부 정착촌으로 알려진 아영면 성리에도
화초장 바위며 허기재 등 흥부전 내용과 관련된 지명들이 남아 있으며 또한 복덕촌(福德村)으로
추정되는 복성리가 복성이재 너머에 있고, 도탄 변사정(桃灘 邊士貞)이란 학자에 의해 이 마을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성리가 흥부 정착촌임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 마을에 전해오는 '춘보(春甫) 설화'가 있다.
'춘보 설화'는 보은(報恩)의 이야기로 춘보는 가난하여 허기가 져서 마을길에 쓰러졌는데,
마을의 어떤 사람이 업어다 흰죽을 먹이고 구해 주었다.
그 뒤 부자가 된 춘보는 자기를 살려준 사람에게 논 9마지기를 사주어 보답했다.
지금 마을에 있는 '흰죽배미'라는 논이 바로 그 논이며, 춘보가 쓰러진 곳을 '허기재'라고 한다.
삯꾼이 곡식을 지고 복성이재를 넘어오다 넘어져 곡식을 쏟았다는 얘기를 들은 춘보는
품삯을 후히 주고 쌀 한 섬도 주었다는 것이다.
흥부마을 입구에 있는 성복동성황당의 모습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을 지나 성산마을로 들어선다
성산마을의 모습
성리 마을 주민들은 춘보가 어느 때 사람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부자로서 마을의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주고 덕을 많이 베풀었던 선덕가(善德家)로 알고 있다.
춘보의 존재는 설화로만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매년 정월보름날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
'춘보제(春甫祭)', '춘보망제(春甫望祭)'라 불리는 제사까지 지내오고 있다면 그가 실존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리의 춘보가 흥보일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다른 얘기들도 전해오지만 족보와 같은 '확정적인 자료'는 물론 없다.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의 '박첨지 설화'나 아영면 성리의 '춘보 설화'는 흥부의 출생지와 흥부 정착마을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학문적인 고증을 받았으며이에 따라 이 두 마을을 흥부민속촌으로 조성하고 있고,
민속축제 '흥부제'도 성대하게 열고 있긴 하지만 고전소설 '흥부전'의 내용과 주제에서 그 근원 설화는
'방이 설화'란 주장이 더 강한데 '방이 설화'는 '금추(金錐) 설화'라고도 하는데, 중국에까지 전해져
그 내용이 당나라의 여러 전적에 실려 있다. 흥부전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 흥미롭다.
신라 때 김방이가 살았는데, 그의 아우는 부자였고 형인 방이는 몹시 가난했다.
어느 해 방이는 아우에게 누에와 곡식 종자를 구걸하자 심술 사납고 성질이 포악한 아우는 누에와 곡식
종자를 삶아서 형에게 주었고, 이를 모르는 방이는 누에를 열심히 치고 씨앗도 뿌려 잘 가꾸었다.
그 중에서 단 한 마리의 누에가 생겼는데, 그것이 날로 자라 황소만큼 컸다.
소문을 듣고 샘이 난 아우가 찾아와 그 누에를 죽이고 돌아갔다.
그러자 사방의 누에가 모두 모여들어 실을 켜 주어 형은 누에왕이 됐다.
또한 곡식도 한 줄기밖에 나지 않았으나 역시 이삭이 한 자가 넘게 자랐다.
하루는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이삭을 물고 산 속으로 달아났다.
새를 좇아 산 속에 들어가니 붉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타나 금방망이를 두드리니 원하는 대로 음식이 나왔다.
방이가 그 금방망이를 주워와 아우보다 더 큰 부자가 됐다.
심술이 난 아우가 형처럼 하여 새를 쫓아갔더니 아이들이 금방망이 도둑이라며 모질게 벌을 받은 데다
코마저 뽑히고 쫓겨났다. .."내 코가 석 자"란 속담도 여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고전소설 '흥부전'의 내용이나 전개과정은 이 '방이 설화'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흥부의 출생지와 정착촌으로 성산리와 성리를 단정하는 것에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박첨지와 춘보는 주민들이 제사까지 모셔오고 있는 만큼 실존인물로 보이는데,
이들의 얘기를 '방이 설화'를 빌어 '흥부전'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지리산 북쪽 관문에 흥부마을이 있고, 흥부제가 열리고 있다면
지리산을 찾는 길에 누구나 한번은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흥부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多産을 상징하는 멋진 男根石이 이채롭다
흥부소공원
예로부터 남원 지역에서는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와 놀부가 실존인물이라고 전해져왔는데
1992년 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의 조사에 따른 고증에 의하면 인월면 성산리 성산마을은
흥부가 출생한 곳이고, 아영면 성리 상성마을은 흥부가 부자가 된 마을이라고 한다.
이는 성산리에 전해 내려오는 박첨지와 그의 동생 박춘보의 이야기가 《흥부전》의 내용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데에서 기인하며 성산리에는 '연비봉', '화초장바위', '흥부네 텃밭',
'연하다리' 등 흥부전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흥부의 자식이 12명이라는데 6명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산행을 시작하다(12:10)
지맥 등로는 시멘트길 좌측 능선이나 초반이라 그냥 도로를 따른다
목장(12:15)
맛있겠다
삼봉산 휴양림으로 통하는 지하수 호스가 터져서 멋진 그림을 연출한다
장평마을 갈림길(12:25)
좌측으로 삼봉산 휴양림을 끼고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삼봉산 안내판
삼봉산 휴양림 입구(640m:12:30)
그쳤던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조금은 불안하지만 이곳에서 산행을 중단할 수는 없다
베낭을 내려 레인커버를 씌우고 카메라를 베낭속에 깊숙히 넣고 세컨드 카메라를 꺼낸다
삼봉산에는 등산객들이 꽤 많이 오는 모양이다...편의 시설이 많이 보인다
삼봉산 휴양림 안내판
비는 생각보다 많이 오지만 우의를 입지않고 그냥 맞으면서 걷는다
전나무 숲을 끼고 나무계단을 따라서 급경사의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관리가 잘되어 있는 삼봉산 전나무숲
앙증맞은 바위도 지나고...
투구봉가는 길에서 만난 구조이정목
팔령재에서부터 계속되는 오르막길...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이다
이정표(12:55)
비는 계속 내리고...
공터(13:05)
삼도봉 가는 능선
갈림길(13:10)
우측으로 편안한 우회길이 있으나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오른다
편안한 우회길의 모습
가지말란다... 그렇다고 안 갈 범여가 아니지
過猶不及이라 했던가 급경사의 오르막길은 낙엽 아래 얼어있고
미끄러지면서 정강이를 바위에 심하게 부딪쳤는데 너무 아파 일어설 수가 없다
한참을 앉았다가 일어서는데 북숭아뼈가 퉁퉁부어 오른다
앞서가는 아우들은 그것도 모르고 비를 맞으면서 선배를 기다리고 있다
미끄러져 옷은 흙으로 범벅이 되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오니 상당히 춥다
투구봉 갈림길(1,010m:13:20)
삼봉산으로 가는 주능선으로 올라선다
우측으로 100m 지점에 투구봉이 있는데 안 가볼수도 없고, 베낭을 벗어놓고 투구봉으로 향한다
투구봉(兜鍪峰:1,032.5m:13:25)
전북 남원시 인월면 상우리와 산내면 중군리, 그리고 경남 함양군 함양읍 죽림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삼봉산의 첫번째 봉우리로 정상에는 산불감시 카메라와 정상석 안내판이 있으며 날씨가 좋을 경우에
지리산 능선이 한 눈에 보일 정도로 멋진 조망처인데 오늘은 짙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안 보인다
경남과 전북의 도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산 아랫쪽엔 경상남도 기념물 172호인 팔령산성이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고, 고려말인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가 황산벌 싸움의 전초지로 삼았고
무신란 때는 반군이 호남으로 넘어가는 저지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도계인 남원시 인월면에는 흥부마을(성산)이 있고, 50여m 떨어진 경남 함양읍 죽림리 상죽마을에는
팔령산성이 있는 팔령마을이 있고, 산내면 대정리에는 통일신라시대 석탑(국보 제10호)인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이 있고, 북쪽 상죽마을에는 인산 김일훈 선생을 기린 민속의학 연구소와 인산관광농원이 있다
투구봉에서 인증샷...흙으로 범벅이 된 바지 좀 보소
투구봉 안내판
가야할 삼봉산쪽으론 짙은 안개가 밀려오고 비는 약간 소강상태이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투구봉 정상의 모습
다시 투구봉 갈림길(13:30)
헬기장(13:33)
지난 3월에 걸었던 맞은편 능선의 오봉산(상산)도 안개에 갇혀 버리렸다
비는 소강상태... 그러나 강한 바람이 산꾼을 괴롭힌다
다행히 날씨는 그리 춥지 않지만 비에 젖은 옷이 신경 쓰인다.
체온을 뺏기지 않기위해 상당히 신경을 쓰면서 걷는다
자꾸만 짙은 안개가 밀려오고...
감투봉(13:45)
이곳이 삼봉산중의 2번빼 봉우리인 감투봉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냥 무작정 걷기만 한다
감투봉을 지나면서 뒤돌아 본 모습
무명봉(13:48)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으로 우회하여 급경사로 내려선다
안부(13:58)
다시 오르막길
칠부능선(14:00)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가야할 삼봉산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비를 맞으면서 뭔 청승인지?
1,069.2봉(14:08)
등로는 미끄럽고 또다시 바람의 강도는 쎄지는 느낌이다
1,109봉(14:15)
대한산경표의 저자 산으로님
다시 내리막길
낙엽속이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인산농장 갈림길(14:24)
우리나라에서 죽염의 이론을 최초로 정립한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 1909~1992) 선생의 농장으로 가는 길이다
삼봉산으로 향하는 길
다시 바람은 거칠어지고 안개는 짙게 밀려오고 연비지맥의 최고봉인 삼봉산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 1909~1992) 선생 동상
김일훈(金一勳, 1909년 음력 3월 25일 - 1992년 양력 5월 19일)은 한국의 한의사,
한의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 약초 연구가, 조리사이다.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한의사, 한의학자이자 민간 죽염의 발명자이다.
유황과 다슬기의 효능을 연구하였고, 유황오리 요리를 개발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항일 무장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였고 이후 산지에서
약초를 캐며 약초 연구를 하였고 정치활동으로는 제1공화국 당시 이승만의 측근의 한 사람이자
자유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다시 약초 연구와 진료, 강연 활동을 했으며
무료 진료로 명성을 날렸다.
성리학 으로는 노론 화서학파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호는 인산(仁山)이다.
죽염( 竹鹽 )이란 대나무 통 속에 넣어 구운 소금을 말하는데 소금은 인간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예로부터 식품조미료 뿐만 아니라 미용재료, 공업용 원료로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죽염은 이러한 소금을 고온에서 여러 번 가열함으로써 몸에 해로운 성분들을 없애 만든 소금이다.
죽염의 유래에 대해서는 1300년 전부터 불가(佛家)에서 민간요법으로 전승되어온 것이라고도 하고,
근대에 인산(仁山) 선생이 새롭게 발명한 것이라고도 한다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로 올라선다
삼봉산(三峰山:1,186.1m:14:32)
경남 함양군 함양읍과 마천면,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앙증맞은 정상석과 삼각점
삼봉산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과 이정표... 그리고 짙은 안개와 강한 바람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삼봉산을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인월면 서쪽으로는 산내면 남쪽으로는 마천면으로 이어진다.
산의 남쪽으로는 백운산과 금대산으로 맥이 뻗어 마천면 소재지에 닿고 서쪽으로는 투구봉과
서룡산으로 맥이 뻗어 산내면에 닿는다. 남쪽사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임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함양군지』에“석복(席卜)과 마천의 경계에 있다. 군 서쪽으로 15리 거리이다.
팔량현이 남쪽으로 꺾여서 동쪽으로 내달으면 이 산이 된다”라고 기록하였다.
백두대간의 큰 지맥이 함양 백운산에서 한가지를 뻗어내려 나온 삼봉산은 지리산 능선을 따라 흐르는
지리산를 그리워 하는 산으로 3개의 봉우리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동쪽부터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는 삼봉산(1186.7m),감투봉(1068m),촛대봉(1083m)을 일걷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며, 산봉산은
산의 유래보다 는 산이 안고 있는 조망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우리들의 옛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것이다.
고전소설 흥부전의 주무대인 성산마을(일명 흥부마을),판소리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등구마을,가락국의 마지막 구형왕 궁전이 있었다는 빈 대궐터(빈대굴) 등은 이 산록 주변에 오래동안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영남지도(함양), 광여도(함양)1872년 지방지도(함양). 등에 삼봉산이란 산 이름에 관하여
투구봉, 촛대봉, 삼봉산의 세 봉우리를 합쳐서 삼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삼봉산 주변의 지도
삼봉산은 지리산 주능선을 지척에서 볼 수 있는 북으로는 상산(오봉산)과 연비산, 백운산
동남쪽으로는 법화산과 금대산이 있고, 산삼과 산약초의 寶庫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심마니들이 많이 다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산 남동쪽에 있는 마천면 축동마을 앞에는 일두 정여창 선생과 탁영 김일손 선생이 지리산
유람갈에 유숙한 등구사지가 있다...한편 “등구, 마천 큰 애기는 곶감 깍으러 다갔다”는 우리
민요와 같이 곶감의 주산지로 유명한 곳이며, 가루지기 타령의 변강쇠와 옹녀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 이 삼봉산 아래라고 한다
삼봉산 주변에는 실상사를 비롯한 금대암, 안국암, 백장암등 전통사찰이 있고 동자를 잡아먹은 전설이
깃던 절터골과 오도재 아래 살구징이에는 인산 김일훈 선생이 은거했던 초당터가 있는 곳이다
삼봉산 정상 삼각점(△운봉 303 / 1981재설)
삼봉산 정상에서 인증샷
삼봉산 정상의 이정표
삼봉산 정상에 서니 강풍이 세차게 불어온다... 옷이 다 젖어 엄청나게 추위가 몰려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백운산, 금대산 금대암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일반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지 많은 시그널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지만 지맥길은 좌측 정상석 아래로 내려선다
좌측의 급경사로 내려서니 지맥길은 금대암 방향과는 달리 산꾼들이 별로 다니지 않고 음지라 그런지
엄청나게 미끄러운데 조금전 넘어지면서 다친 다리가 내리막길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는 바람에
자꾸만 후배들과 산행 거리는 멀어지는 느낌이라 미안하기만 하다
암봉을 내려서는데 밀려오는 통증... 주저않고 싶은 마음이다
암봉(1,167m:14:45)
암봉 우측 능선이 지맥길이고 좌측으로 우회하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까칠한 산꾼들이 갔는지 암릉 옆으로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데 가고 싶은 맘은
굴뚝같지만 미끄러운 눈길에 아픈 다리... 자신이 없어 좌측으로 우회한다
계단으로 내려갔다가...
암릉을 우회하여 다시 계단으로 올라선다
암릉구간 쪽으로 차단목이 처져있고 추락주의 프랑카드가 걸려있다
지맥길로 복귀한다
헬기장?(14:52)
마천면쪽에서 계속해서 밀려오는 짙은 안개
무명봉(14:57)
다시 내리막길...아이젠을 착용했는데도 엄청나게 미끄럽다
1,047봉(15:00)
삼봉산 8부능선(15:07)
8부 능선에 있는 뾰족한 암봉
등로는 완만해지고...
함양읍 방면으로는 넓은 임도가 연결되어 있다
삼봉산에서 한참을 내려오니 바람은 잦아 들었으나 이젠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우리절 갈림길(15:18)
우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우리절로 내려가는 길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등로 아래에 있는 마천면소재지가 희미하게 보인다
지나온 삼봉산의 모습
오도봉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무명봉(15:25)
우측의 마천면 지역은 안개가 살짝 걷히면서 지리산 능선들이 조금씩 보이고 곧이어 오도봉으로 올라선다
오도봉(悟道峰:1,038.5m:15:28)
함양군 함양읍과 마천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석과 이정표가 있다
오도(悟道)란 불가(佛家)에서 고승(高僧)들이 불도(佛道)의 진리를 깨닫고 지은 시가(詩歌).를 말한다
오도봉의 지명 유래는 이곳에서 2.3km 떨어진 오도재에서 따온듯 하다
오도재(오도령)는 조선시대의 시인묵객들이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유랑의 고개이자 함양사람들과 남쪽 해안가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위해 장터목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했던 생존의 고개이기도 하다
오도(悟道)재란 지명의 유래는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靈源寺)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
유명한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청매(靑梅) 인오조사(印悟祖師)(서기1548~1623)께서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한 연유로 오도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오도봉 정상에서의 인증샷
오도봉에서 바라본 백운산(함양군 마천면 소재:우측)과 금대산의 모습
금대산(852m)은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일대에 있는 산으로 삼봉산에서 맥이 뻗어내려 백운산과 금대산을 이루었다.
임천이 금대산을 에워싸고 구불거리며 흐르다 동북쪽으로 빠져나간다. 금대산을 끼고 있는 임천을 따라서 여러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산의 남서사면에는 마천면 소재지가 있고『광여도』(함양), 『1872년지방지도』(함양),
『영남지도』(함양)에서도 금대산이 표기되었 있는데 금대산에 있는 옛 절로는 안국사와 금대사가 있다.
금대산이라는 산 이름의 유래는 금대사(金臺寺)에서 연유되었으며 금대사는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년)에
행우(行宇)가 창건하였고, 도선(道詵)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1430년(세종 12)에 행호(行乎)가 안국사(安國寺)와 함께 중창하였다
팔령재에서 오도봉까지는 속칭 제도권 등로라 산길이 상당히 좋았으나 이곳에서 제도권 등로인
오도재로 향하는 좋은 길을 버리고 오도봉 정상석 뒷쪽의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야 하는데
무심코 가면 알바하기 십상이니 독도에 상당히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오도봉에서 제도권 등로를 버리고 지맥길로 내려서니 드디어 지맥길의 野性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철쭉 군락지 사이의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니 낙엽이 무릎까지 차오르고 산꾼의 흔적이 전혀없다
953.2봉(15:45)
철쭉가지가 얼굴을 할킨다
완만하고 편안한 내리막길... 위치 선정이 잘못된 듯합니다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대단들 하십니다
내일 걸어야 할 능선들이 얼굴을 내민다
갑자기 절개지가 나타나며 시멘트 임도가 보이는데 높이가 높아 숏다리 범여는 조금 힘들게 내려선다
임도(16:12)
임도로 내려서 물한모금 마시면서 선 채로 휴식을 취한다
임도를 가로질러...
또다시 잡목이 태클을 걸어댄다
계속되는 희미한 등로의 내리막길
등로 우측에 합천이공 묘지가 보인다
합천이공 묘지(16:40)
先達 벼슬을 한 陜川李公在桓之墓 부인 星山李氏 묘지가 있는데 선달(先達)이란 고려와 조선 시대 때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은 사람을 부르던 말로서 후진의 반대인 선진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예부시에 합격한 선배를 가리켰다. 조선시대에 와서 문과출신자는 말직이라도 대개 벼슬을
하고 벼슬을 받기 전에 죽으면 증직했으나, 무과출신자는 평생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 선달은
무과출신자에게만 쓰는 말로 잘못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과를 합격한 다음 친척이나 친지들에게서 오
는 축하 서신에 '선달댁 입납'이라고 씌어진 것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과 하예들이 벼슬을 받기 전의
문과출신자에게 '선달님' 또는 '선단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문과 출신자에게도 썼음을 알 수 있다
넓은 임도가 보이고 다시 오르막길 그 다음에 봉우리 직전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진다
등로가 살짝 열리면서 서북쪽으로 첫구간에 걸었던 상산(오봉산)에서 뻗어나온 옥녀봉이 함양읍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산속이라 그런지 오후 5시가 안 되었는데도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511.4봉(16:55)
511.4봉 삼각점(△운봉415 / 1981재설)
511.4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지안재가 다온 느낌이다...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지안재로 내려선다
지안재·(蹄閑峙:17:13)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와 휴천면 월평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함양쪽에서 휴천쪽으로 24번 국도에서
갈라진 1023번 지방도가 지나는데 꾸불꾸불한 S자의 도로를 대여섯번을 돌아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지안재(지안치)라는 지명은 ‘제한치’가 변한 것으로 고개 밑 조동(대추징이) 마을에, 말을 쉬어 가게 하던
조선시대 역인 제한역이 있었다고 한다
지안재 전망대
이 전망대가 포토포인트란...이곳은 건교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選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 덕분에 사진작가(찍사)들이 모여들어 밤에도 찍고 새벽에도 찍는 출사 명소이기도 한 곳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안재와 옥녀봉의 모습
지안재에서 바라본 오도재 방향의 모습
도를 깨친다’는 뜻을 지닌 고개 오도재(773m)엔 ‘지리산 제일문’이라 현판을 내건 대형 문루가 세워져 있고
옛날 벽소령·장터목을 거쳐 온 하동·광양의 소금과 해산물이 이 고개를 넘어 경북 지역으로 운송됐다고 하는데
조선 중기의 승려인 청매 인오조사가 이 고개를 넘나들며 도를 깨쳤다는 데서 고개 이름이 유래했다.
내일 산행 들머리인 이곳을 확인하고 다시 전망대 방향으로 향한다
우리가 부른 카카오 택시가 올라오고 있다
택시를 타고 함양읍내로 향한다... 땀이 마르니 추위가 엄습해 오기 시작한다
엘도라도 모텔(17:40~07:25)
택시 기사의 소개로 터미널 바로옆에 있는 엘도라도 모텔에서 여장을 풀고 근처에 있는
감자탕집에서 감자탕에다가 소맥으로 거하게 한잔을 한 다음에 다시 숙소로 들어가
내일 산행를 위해 21시쯤에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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