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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병천(만뢰)지맥終)

병천(만뢰)지맥 제1구간 - 엽돈재에서 장교현까지

by 범여(梵如) 2018. 2. 18.

☞ 산행일시: 2018년 02월 17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생각보다 강한 바람탓에 상당히 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8.5km  / 7시간 20분소요

☞ 참석인원: 수헌아우와 둘이서

☞ 산행코스: 엽돈재-만뢰지지맥 분기봉-355.3m봉-365.6m봉-412.3m봉-435.3m봉-392.7m봉-싸리재

                 조망바위-갈림길-479.1m봉-봉황3리 갈림길-무명묘지-돌목이 고개-44.4m봉-472.5m봉

                 만뢰산 갈림길(왕복)-만뢰산-봉황3리 갈림길-보련마을 갈림길-갈림길-489.7m봉

                 보탑사 갈림길 1-보탑사 갈림길 2-425.1m봉-482.8m봉-무명봉-갈림길-안부-504.7m봉

                 NO185송전탑-무명봉-배성고개-431.7m봉-NO14송전탑-질고개-몽각분맥 갈림길

                 322.3봉-청주한공 묘-장고개-무명봉-갈림길-장교현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백곡면, 진천읍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입장면, 북면, 병천면, 동면

 

요즘처럼 경기가 좋지않은 때에는 명절이 다가와도 그리 반갑지는 않다

설날 오전에 은사스님 사찰에서 부모님의 제사를 모시고나니 딱히 갈데도 없어 내일 오랫만에 북한산이나

한번 갔다올까 아니면 서울에서 성치지맥이나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헌아우님한테서 전화가 온다

선배님 낼 어디 가셔요? 하면서 서울 근교에 있는 병천(만뢰)지맥이나 한바리 하잔다...OK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베낭을 챙긴 다음에 밥한술 먹고 동서울 터미널로 향한다

 

병천(만뢰)지맥 개념도

병천(만뢰)지맥은 금북정맥의 서운산에서 남쪽으로 5.1km 떨어진 엽돈재(34번국도) 남쪽 200m에서

분기하여 서남진하면서 만뢰산( 612.2m.일부 지도엔 만근산으로 표기),덕유산(德裕山.412m),

환희산(歡喜山. 402.2m),취령산(鷲嶺山.목령산(鶩嶺山 .229.1m.)을 일구고 취령산(목령산)에서

방향을 바꿔 서남진하며 다시 상봉산(196m),국사봉(國師峰.171m)을 일구고 경부고속도로를 건넌후

마지막으로 응봉산(175.4m)을 들어 올린후 청주시를 바라보며 미호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9.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를 지나는 산들중 제일높은 산인 만뢰산의 이름을 따서 만뢰지맥이라고 박성태님이 신 산경표에서 표기하고 있다

만뢰지맥의 동쪽으로 흐르는물은 백곡천이나 성암천이 되어 미호천으로 흘러들고 서쪽물은 병천천(46.75km)이 되어

충남의 천안시 북면, 병천을 거쳐 충북의 오창과 옥산면을 거쳐 청원군 강외면에서 미호천(89.20km)에 합류되어

서남진하여 연기군 동면 합강에서 금강(397.79km)에 합류하여 공주로 흘러간다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병천지맥이라고 부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 → 진천행 버스표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여 조금을 기다리니 수헌아우가 도착하고 플렛홈으로 향한다 

06시 30분발 버스를 타고 진천으로 향하는데 승객이 몇명 되질 않는다

차에 오르자마자 일찍 집을 나온 탓인지 깊은 잠에 빠지고 버스는 중부고속도로

일죽I.C를 빠져나온 국도를 따라서 죽산, 두원대, 광혜원, 이월을 지나 진천터미널에 도착한다 

진천터미널(08:05)

난생 처음으로 진천 터미널에 와본다...일기예보와는 달리 상당히 춥다

터미널 앞에 있는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엽돈재로 향한다(택시비 20,000원)

엽돈재(葉錢峙:323m:08:33)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과 충북 진천군 백곡면, 충남 천안시 입장면이 만나는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등 

삼도(三道)가 만나는 지점으로 34번 국도가 여기를 지나며, 금북정맥(차령산맥)에 걸친 고개로 고개 이름이

엽돈재를 다른 이름으로 엽전재(葉錢峙),엽둔재(葉屯峙), 엽둔티, 율둔티 협탄령(脇呑嶺)등 으로도 불렀는데

임진왜란 당시 안성에 사는 홍계남이 의병 수천명을모아 왜군과 접전을 벌여 승전한 곳으로 엽돈재 인근에는

홍계남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갈 길 바쁜 산꾼이 그것까지 확인할 시간이 없다.


1872년 지방지도의 직산편에 진천과의 경계부에 청룡산과 함께 엽돈치가 나타나는데 고개가 높고 험해서 옛날에는

도둑들이 많아서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도둑들에게 엽전을 다 털렸으므로 고개이름 유래가 확실한 것이 없지만,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옛날 장을 보려고이 재를 넘나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숲이 워낙 깊어 장꾼을 노리는 도둑이

많았던 관계로 엽전을 가지고 가던 사람은 모두 빼았겼다고 한다.


고개 아래에는 보덕원이라는 원(院)이 있는 마을이 있어 이 고개를 넘는 행인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협탄령(脇呑嶺)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서쪽 협탄소가 있으니

직산소 경계이다’라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는 관아의 서쪽 38리에 대문령에서 뻗어와서 한줄기는

길상산이 되고, 한줄기는 보련산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엽돈재 입장쪽의 모습

엽돈재에는 엽전에 얽힌 전설

아주 먼 옛날, 백곡면 엽돈재 고개마루에서 주막을 하던 노랭이 박서방이 있었는데 박서방은 많은 돈을

벌어놓고 써 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핏줄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어서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주고 나서 사람들은 박서방이 생전에 벌어 놓았던 돈을 찾기 위해 집 안팎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 뒤로 이 주막은 주인 없는 빈집으로 오고가는 길손의 휴식처가 되었는데, 고개를 넘던 길손이 날도 저물고

비가 와서 이 주막에서 묵기로 하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인근 마을 농부에 의해 죽은채로 발견되었다.

그 후로도 이곳 주막에 들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던지 아침에 시체가 되어 나오곤 해서 사람들은 이 주막에

귀신이 붙은 집이라 하여 날만 저물면 얼씬도 않게 되었다.

 

담 세기로 이름난 청년이 자기 손으로 귀신을 잡겠다고 하며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그 주막으로 들어갔다.

등골이 오싹하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으나 청년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불을 밝히고 커다란 몽둥이를

준비해 놓고 귀신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방안에는 바람이 일고 방문이 덜컹덜컹 흔들리기 시작하며,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천장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청년은 마음을 가다듬고 "귀신이냐? 사람이냐? 어서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자 천장 판자가 떨어지며 별안간 사람의 다리 하나가 축 늘어져 흔들리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청년은 벌떡 일어나 저도 모르게 발목을 잡고 힘껏 당겼다.

다리가 쑥 빠지는 순간 천장 속에서 '와르르' 하고 엽전꾸러미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어찌나 많았던지 방에 가득 쌓였다. 그 청년은 이튿날 커다란 자루를 가지고 다시 주막으로

올라가 엽전꾸러미를 자루에 담아 가지고 내려왔다.

 

사람들은 천장 속에 감춰 놓앗던 엽전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둔갑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그 청년은 그 후로 이 고장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살았다고 전한다. 

엽돈과 엽전과는 이름에서 어떤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데 사실은 아무런 연관도 없다

엽돈재 백곡면쪽의 모습 

진천의 郡界지역의 어디서나 生居鎭川의 표시석이 있는데 중북부에 위치한 진천은 예로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으로 불려 왔다... 수해•한해가 없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비옥한 농토, 후덕한 인심에서

붙여진 것으로 흔히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살아서는 이 설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전설 수준이다.


용인시는 지극한 효성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효자정문까지 하사 받은 충북 진천 출신의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ㆍ1343~1413) 선생을 주목하고 있는데 조선 개국공신인 최 선생은 한양 숭례문과 호남 풍남문을

축성했고 청백리로 이름을 날리다 사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자봉산 기슭에 묻혔다. 최 선생의 큰 아들 최사위는

생전에 진천에서 부친을 모셨고 사후에는 부친의 묘소 아래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를 했다. 그는 '내가 죽으면

 이 자리에 묘를 마련하라'고 유언, 죽어서도 부친을 모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런 이유로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친을 모시고자 했던 전주최씨 가문의 효행심에

유래한다고 용인지역 학계와 문중은 판단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8:35)

택시에서 내리니 강한 바람에 손끝이 아릴 정도로 추위가 몰려와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

뒤돌아 본 엽돈재의 모습

병천(만뢰)지맥 분기봉(08:43)

엽돈재에서 급경사의 오르막을 올라오니 병천(만뢰)지맥 분기봉이 나온다

2011년 7월 10일에 나홀로 금북정맥을 걸어면서 비를 흠뻑맞고 걸었던 금북정맥길

겨울에 다시오니 모든게 새롭게만 느껴지는 곳이다

수헌아우님이 인증샷을 찍어주고...본격적인 병천(만뢰)지맥 첫 발을 내딛는다

등로는 정맥길 수준으로 참으로 좋다

355.3m봉(09:00)

등로는 이 지역사람(충청도)들의 인심만큼이나 좋은듯 하다그래서 생거진천이라 했나보다

등로에서 바라본 서수(西水)마을
서수마을을 서수원이라 하는데 엽돈재 밑에 있는 진천쪽 동네를 말한다. 
백곡면 갈월리로 험준하고 깊숙하여 조선시대에는 도적떼들의 소굴이 있었다 한다.

그런고로 이 곳을 왕래하는 상인이나 나그네들은 이곳을 지나는 것이 큰 골치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임걱정이 한때 이 곳에서 관원(官員)을 괴롭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국경을 이루고 있던 곳이기에 병정들이 진을치고 주둔했던곳이 서수마을이다.

당시는 이 곳을 서술원(西戌院)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서수원(西水院)이라 부르며, 아직도 그 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또한 역마가 있던 자리여서 교통의 편의와 통신의 주역(主役)을 맡기도 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안성사람인 홍계남(洪季男)이 의병 수천을 모군(募軍)하여 여기에 주둔하면서 왜군과 한바탕 싸워 이긴 곳이다.

그 후 이 곳 사람들은 왜군의 침략을 받은 일이 없이 편안하게 지냈으며, 조정에서 이 소문을 듣고 홍계남공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명했다...엽돈재에는 홍계남이 왜군과 싸울 당시 쌓아놓은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365.6m봉(09:10)

365.6m봉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현오님의 시그널이 정상임을 알려준다

편안하고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양넘 지갑줏는 기분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조금 높은 봉우리로 올라선다

412.4m봉(09:25)

412.4m봉 삼각점(△441복구...아랫쪽은 판독불가)

다시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걷는다

435.3봉(09:40)

J3클럽 중부지부에서 독립운동 기념산길 50km 월봉산이란 코팅지를 붙혀놨다

등로에는 잔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392.7m봉(09:57)

정상에는 논산에 사시는 바랑산님께서 산패를 붙혀 놨는데 트랭글 맵에서는 이곳을 바랑산이라 한다

트랭글에서 이곳을 와보지도 않고 행한 탁상행정이 아닌지... 참으로 한심하다

그렇게 치면 대한민국 지맥길의 80%는 준.희봉으로 해야 하는거 아닌가...빨리 시정해 주시길

그나저나 지난해 노성지맥에서 만났던 바랑산님... 감축드립니다

수헌아우님! 우리는 운제 수헌봉, 범여봉을 만드나

392.7m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능선 아랫쪽은 벌목지가 나오고 지맥길은 빙둘러 가는 형태이다

가야할 만뢰산이 아련히 보이기 시작하고...

가야할 능선의 모습지맥길은 항아리 형태 (⊃) 빙 둘러가는 형국이다

싸리재(10:03)

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 대산마을에서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새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백곡쪽은

벌목으로 인해 시원스러우나 천안쪽은 잡목으로 인해 전혀 등로가 보이지 않은데 자료에 의하면 산이 높고

깊어서 싸리가 고복같이 있다해서 붙혀진 이름이란다.우측 능선 아래에 대평리에는 싸리재 마을 있다
1914년 이전에 발간된 조선지지 자료에는 싸리고개로 나오고 축현이라는 한자 지명도 보이며싸리재는 산이 높고 깊어서 비탈이 매우 심한 고개로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40여년전까지만 해도
백곡에서 천안의 입장장을 보러 다닐 때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였다고 하니 민초들에겐 유익한 고개였다

조망바위(10:13)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진천군 백곡면 구수리(九水里)의 모습

백곡초등학교 뒤쪽에 있는 마을을 구수골 또는 구수라 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삼국시대

김유신() 장군이 군사 훈련을 하면서 말에게 먹이는 죽 그릇을 아홉 군데에 설치하였다 하여

구슬 또는 구실이라 하였다가 구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구수는 구유의 방언형으로 중세 국어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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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소급된다. 따라서 구수골은 ‘구유처럼 긴 골짜기’로 풀이할 수 있다.

 

진천군청에서 서쪽으로 약 8.1㎞ 떨어져 있으며 자연마을로 구수·개죽 등이 있다. 국도 34호선이 남동 방향으로

뻗어 있어 경기도 안성시와 진천 시가지로 이어지며 구릉지가 많은 지역 특성상 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발달하여

콩 등의 잡곡류와 고추·잎담배가 많이 재배된다.

북면산(478.6m)

음지라 그런지 등로에는 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겨울내내 남쪽으로 지맥길을 탄 바람에 눈을 보지 못했다

갈림길(10:20)
479.1m봉(10:30)J3클럽 중부지부에 북면산(멧돌봉)이라 표기해놨고 우측으로는 개죽산으로 이어지는 작성단맥 길이다

이곳은 주로 충청도 지역 산꾼들이 많이 오르는 산길인 모양이다...나야 단맥, 분맥길을 걸을 생각은 없다

개죽산(介竹山)갈림길

개죽산(452m)은 천안시의 동남구 북면 오곡리와 병천면 봉항리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조선지형도』에

북면 오곡리와 갈전면 봉항리에 걸쳐져 그려져 있는데산 이름의 유래는 특별한 내력이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개죽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개죽나무는 보통 가죽나무라고도 하며 나무의 새순을 식용으로 사용한다.

개죽나무는 가죽나무의 충청남도 지방 방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작성단맥 개념도

작성단맥은 금북정맥 엽돈재 분기봉에서 남동으로 약5키로 지점에 위치한 478.6봉에서

남쪽으로 분기된 산맥인데 개죽산,봉암산,작성산,은석산,상봉산등으로 연결된다.

독립기념관이 위치한 흑성산을 중심으로 금북정맥과 작성단맥이 시계반대 방향으로 휘감고 있어

천안독립 종주로란 명칭으로도 불린다.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인지 지적도근점인지 분간이 안간다

충남도경계의 띠지를 따라서 만뢰산 방향으로 향한다

봉황3리 마을회관 갈림길(10:40)

좌측 능선으로 내려선다

등로에서 바라본 봉황3리 마을의 모습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자연마을인 봉황리(鳳項里)는 만뢰산과 개죽산 사이의 좁은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두 하천이 흐른다.

소근리, 삼성리, 석항리와 봉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암과 석항의 이름을 따서 봉항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돌모리,

삼성, 서근바미마을 등이 있으며. 돌모기마을은 봉항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돌이 많이 있으므로 돌모기라 하였다.

삼성마을은 돌모기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 효자가 있어 부모 산소에 매일 세 번씩 성묘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근바미마을은 삼성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 밤이 잘 되는데 예전에 밤 한 개가 매우 커 세 근이 나갔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낙엽속은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산에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난다

무명묘지(10:48)

좌측 능선 아랫쪽에 잣나무 조림지가 보인다

돌목이 고개(10:55)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황리 돌목이 마을에서 충북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칡목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이정표와 성황당 흔적의 돌무더기와 벤취 3개와 준.희 선생의 산패가 걸려있다

 

돌목이고개는 돌목이와 고개로 나뉜는데 돌목이는 돌목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고,

돌목은 ‘돌’과 ‘목’으로 나눌 수 있다...여기서 돌은 여러 가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첫째, 돌[]로 풀이할 수 있다.

돌은 지명의 전부 요소로 빈번히 사용되어, 전국적으로 돌고개·돌다리·돌담·돌들 등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석성2리의 돌꼬지도 이에 해당한다. 마을 동쪽 뒷산이 까막개울까지 길게 뻗어

곶을 이루며, 이 곶에 가마바위를 비롯한 큰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돌꼬지 또는 돌패기[돌ㅎ+박+이]가 되었다..

둘째, 들[]로 풀이할 수 있다. 들이 변하여 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달곶·달구지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달은 때로 돌로 바뀌어 돌곶·돌고지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셋째, 돌다[]의 어간으로 풀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돌모랭이·돌목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돌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1914년 이전에 발간된

『조선지지자료()』에는 대문리의 돌목이고개가 석항치()와 대응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돌은 첫째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목’은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된 항()·색()에 소급되는데 원래 ‘목’은 ‘머리와 몸통을 잇는 잘록한 부분[]’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나, 지명에 전용되면 ‘통로의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이나

 ‘좁다란 산협이나 물속을 가로 지르는 길목’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돌목이고개는 ‘돌이 많은 좁은 길목으로

되어 있는 고개’로 해석되며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현()’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돌목이고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인용

뒤돌아 본 돌목이 고개의 모습

돌목이 고개의 이정표

돌목이 고개에서 급경사의 오르막길로 올라선다

445.4m봉(11:08)

멀리서 오셨네요

다시 내리막길

가야할 만뢰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날씨는 그리 춥지 않으나 바람이 생각보다 상당히 차갑다

472.5m봉(11:37)

오늘따라서 수헌아우님이 상당히 빠르게 걷는다

등로 우측으로는 금북정맥 능선에 있는 위례산과 위례산성,성거산이 아련히 보인다

백제사조 온조왕이 마한 목지국의 진왕으로 부터 북동 100리 땅을 봉토 받아

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 위례(529.9m)의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퇴뫼식 산성으로 둘레는950m정도이고,

성벽은 토, 석혼축 공법과 석축 공법의 2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흙과 돌을 혼합하여 쌓은 부분을 자연암반을 평탄하게 고른 후 1.5m너비로 2열로돌을 평행으로 쌓고,

그 위에 흙과 잡석및 기와조각을 섞어 쌓았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1.5m이고 돌로 쌓은 성벽은 경사가 급한 40m 구간에만 남아 있는데

주로 자연 암석으로 쌓았으며 현재 높이는 4m정도이다 이 성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백제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으로 보기도하나 조사결과도읍성이라기 보다는 방어를 위한 산성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직산위례성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이곳은 그동안의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백제의 첫 도읍지가아니라고 부정되었다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고 한다. 

낙엽속은 얼어있어 생각보다 상당히 미끄럽다

완만한 오르막길

만뢰산 갈림길(11:45) 

만뢰산 갈림길에 똑같은 위치에 있는 이정표

그런데 거리가 한쪽은 한쪽은 정상(만뢰산 0.4km)이고 한쪽은 만뢰산 정상 0.57km 라니 상당히 헷갈린다 

만뢰산 정상가는 길

다람쥐의 집인가?

넘어갈까 조마조마

호젓한 길을 걷다가 보니 만뢰산 정상에 도착한다

만뢰산 정상의 이정표

만뢰산 정상의 모습

만뢰산 등산 안내도

만뢰산(山:611.7m:12:00)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와 진천읍 연곡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만노산()·금노산(

금노산(금물노산()으로도 불리는데, 고구려시대의 지명을 따서 그대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 온다.

본래 고구려 땅이었던 진천 지역이 신라 땅이 된 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만노태수로 부임하였는데

북으로 고구려, 서쪽으로 백제군과 대치하면서도 군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이 평화롭게 지냈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덕성산(山:519m)의 한 지맥이 서운산(山:547m)을 이루고, 다시 엽둔재(:323m]를 넘어

남방으로 뻗치어서 이루어진 산으로 봄철이면 능선에 진달래가 만발하여 산행하기에 좋다.

연곡계곡이 발원하며, 연곡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태령산(山:421m)과 이웃하고 있다.

만뢰산 남사면에는 보탑사가 있고 문화재로 보물 404호로 지정된 진천 연곡리 석비()가 있다

만뢰산 정상 1등 삼각점(△진천11 / 1984재설)

만뢰산 정상에서 바라본 진천읍내와 연곡저수지

만뢰산 정상에서 바라본 안성시

잠시후 내가 걸어야 할 능선의 모습

만뢰산 정상의 모습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은 진평왕 17년(595)에 만노군(진천군) 태수를 지내던 김서현의 아들이다

김유신의은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으로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귀족으로 편입, 경주에서

살면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김서현은 무장으로서 공을 세우고  김유신 자신은 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내고

조카딸이자 무열왕의 딸인 지소공주를 아내로 맞이는 등 결혼 관계를 통해 신라의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김유신은 진평왕 31년(609)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서 공을 세워 압량주 군수가 되었고, 선덕여왕 때 상장군으로

무열왕 7년에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하고

태대각간에 올랐으며 한수 이북의 고구려땅을 되찾아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문무왕 13년(673)에 세상을 떠난 후 흥무대왕으로 추증되었다

 

김유신이 태어난 터는 지금의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이며 오래전부터 담안밭이라 불리던 곳으로 장군터라고도 했는데

이곳에 큼직한 주춧돌들이 있어 만노 태수 김서현의 집터로 확인1983년 김유신의 생가를 복원하고 옆에 흥무대왕

김유신 유허비를 세워놓았다. 

만노산성()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보련마을과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하수문 절골 사이에 있는 만뢰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의하면 만노산성은 고을 서쪽으로 약 9.42㎞에 있었다고 하며, 『조선환여승람』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유창국()이 조감()과 함께 만노산성을 지켰는데 그 동쪽에 장대지가 있다고 하였다.

 

만노산성의 축조에 대한 정사의 문헌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의 토기편, 신라시대의 기와편, 고려시대의 그릇

조각과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어서 삼국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병자호란 때에도 입보()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만뢰산(山:611.7m)은 경상북도 진천의 삼국시대 지명인 만노군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지명이다.

『조선환여승람(輿)』에 의하면 만뢰산은 신라 때의 만노군 읍묘()로서, 김유신(信:595~673)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태수()가 되어 백제에 대항할 때 만뢰산에 만노산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만노산성()은 문헌 기록에 만노성()·만뢰성()·이을성 등으로도 나타나는데, 현재는

만노산성 또는 만뢰산성으로 불리는데 그러나 조선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輿)』에

표기된 바에 따라 이을산성이라 칭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의하면, 만노산성은 석축으로 둘레는 약 1.2㎞이고 안에 우물이 1곳 또는 2곳이 있는데

성은 이미 폐하였다고 하며『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만노산성은 진천의 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성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성의 형태를 분간하기 어렵고 흔적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노산성은 산 정상부에 둥글게 석축의 성벽을 돌리고, 동쪽으로는 능선을 따라 길게 쌓아 평면이 장타원형인

테뫼식으로 축조되었다. 만뢰산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 곳곳에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장성의

형태로 남쪽을 방어하도록 길게 쌓은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만뢰산 정상에 있는 안내판

만뢰산과 산성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다시 만뢰산 갈림길로 되돌아 간다

다시 만뢰산 갈림길(12:17)

남쪽으로 갈수록 잔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봉황3리 마을회관(12:19)

지나온 만뢰산 정상의 모습

마치 둘레길을 걷는 기분이다

보련마을 갈림길(12:26)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에 있는 보련마을은 보련산(만뢰산) 아래에 있다고 붙혀진 이름이다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곡리, 보연리, 비립리를 병합하여 보연과 상곡의 이름을 따서 연곡리라 했다.

자연마을로는 보련골(보련, ), 비선골(비립), 쥐눈이 등이 있다. 보련골은 보련산 밑에 있는 마을로

신라시대에 절이 있었다. 극락세계()를 연화세계()라 하므로 연곡리()라 하였고,

연화대()와 관련지어 보련골이라 했다. 비선골은 보련골 남서쪽 1.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백비(:글씨가 써 있지 않은 비)가 서 있다 하여 비선골 또는 비립동이라 부른다...

이곳에 서 있는 백비가 보물 404호인 진천 연곡리 석비이다.

보련마을 갈림길 안내판

관리가 안된 비상구급함

다시 길을 나선다

식사 장소를 잡아야 하는데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마땅한 곳을 찾을수가 없다

길을 가다가 바람이 불지않은 등로에다가 밥상을 펼친다

오뎅에다가 떡국을 끓여 막걸리 한통으로 1시간여의 여유로운 점심만찬을 펼친다

갈림길(13:35)

좌.우측으로 다 보탑사로 이어지는 등로이나 지맥길은 우측이다

갈림길의 이정표(←보탑사 1.02km, ↓만뢰산1.57km, →보탑사 1.3km)

489.7m봉(13:37)

음지라 그런지 잔설은 점점 많아지고...

보탑사 갈림길 1 (13:43)

지맥길은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등로에서 바라본 보탑사의 모습등로에서 선 채로 보탑사를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린다

 

보탑사(寶塔寺)...사진 모셔옴

보탑사는 진천읍 보련산 자락의 연꽃골(연곡리, 蓮谷里)에 있는 사찰로서 연꽃골은

진천읍에서 서쪽으로 약 12Km 되는 곳에 있으며 가는 길에 김유신장군 생가터가

있으며 보탑사 못미처에는 큰 저수지가 있어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보탑사의 3층 목탑은 신라가 새로운 통일국가를 염원하여 황룡사 9층탑을 세웠듯이

남북통일은 물론 옛 고구려 땅까까지도 통일하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지은 탑이다.

 

보탑사는 옛날 절터에 1996년에 창건되었으니 16년의 역사 밖에 되지 않으나,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과 함께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아주 유명하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는 도덕봉, 약수봉 옥녀봉 등 아홉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마치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난 모습처럼 아름다워 옛부터 연곡리라 하였다.

 

연곡리 절터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큰 절터만 전해 왔는데, 그 중심에

보탑사가 삼국시대 건축의 전통을 잇는 3층 목탑을 세움으로써 새롭게 되살아났다

보탑사 경내에는 보물 제 404호인 고려시대의 진천 연곡리 석비(비문이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있으며,주변에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생가가 있어 역사적인 명당지였음을 알 수 있다.

 

높이 42.73m 에 이르는 웅장한 3층 목탑은 연꽃의 꽃술을 상징하고 있으며,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대탑의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일반 목탑과는 달리 걸어서 법당 내부를 오르내릴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목탑이다.

남산봉(504.7m:13:47)

이장한 묘지의 흔적도 보이고...

보탑사 갈림길 2 (13:50)

보탑사 3번째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 등로를 이어 가는데 능선 아랫쪽엔 자작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등로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하나 다른 지맥에 비해서선 고속도로 같은 느낌이다

425.1m봉(13:55)

능선 좌측으로 철조망이 보이고...

조금 트인 나무가지 사이로 성거산(聖居山:579.1m)이 보인다

고려 태조가 이 산을 바라보니, 산위에 오색의 구름이 떠있어 신이 계시는 산이라 하고
조선 이태조와 세종대왕이 온양온천에 갈때 이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능선을 따라서 걷는데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만 느껴진다

등로에서 바라본 관성리(冠星里)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 위치한 관성리는 만뢰산 밑의 평지에 위치하였으며 농지가 넓게 분포한다.

마을 서쪽으로는 광기천이 흐르며 의동저수지가 자리한다. 자연마을로는 명성골, 의동, 사잣골마을

등이 있으며 명성골마을은 관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고, 의동마을은 명성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뒷산의 모양이 옷은 널어 높은 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사잣골마을은 의동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웅장고 큰 재 밑이 되므로 사잣골이라 하였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서 걷다보니...

482.8m봉(14:12)

482.8m봉 이정표...멱수 방향으로 향한다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

무명봉(14:16)

우측 능선에는 잣나무군락지가 보이고 아랫쪽에 송전탑이 서있다

커다란 소나무를 지나고...

갈림길(14:25)

안부(14:28)

소나무가 있는 능선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니...

조금은 까칠한 능선이 나온다

504.7m봉(15:00)

504.7m봉 이정표

이곳에서 지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지고 멱수방향 이정표가 보이는데 진천읍 상계리에 있는 멱수 마을에는

조선의 개국공신 이거이(李居易) 묘소가 있는 곳으로 이거이는 청주이씨이고, 청주이씨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지낸 이능희 선생인데 이거이는 충간공 4째 아들로 자는 낙천(樂天), 호는 청허자(淸虛子)로

문백면 사양리에서 태어나 고려말 문과급제 조선조 태조 2년에 우산기사를 걸쳐 병마절제사, 문하부사,

한성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일등정사 공신이 되었고, 정조 2년에 좌명공신으로

책봉되었다...그러나 왕자의 난 이후로 태종이 집권한 다음 대간들의 탄핵으로 아들 저와 함께 진천으로

내려와 유배 생활을 하다가 복직되어서 우정승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사람이다

아들 저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인 경신공주와 혼인하였으며, 또다른 아들 백강은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와 혼인했다 
이곳 상계리에는 김유신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김유신의 부친 김서현 장군이 진천(옛 지명은 만뢰)에
태수로 봉직하고

있을 때,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504.7봉 삼각점(△진천318)

J3중부지부에서는 남산봉이라고 해놨다

우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간다

엄청난 급경사의 내리막길인데 낙엽속에는 등로가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조심스레 내려선다

안부로 내려서니...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 진다

NO185 송전탑(15:12)

무명봉(15:15)

좌측으로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임도가 나오고 배성고개 삼거리가 보인다

배성고개(星峙:15:17)

충남 천안시 동남구 동면 덕성리 배성마을에서 충북 진천군 진천읍  금암리를 잇는 고개인데 임도 삼거리이고

고개 윗쪽 나무가지에 준.희 선생께서 ‘여기가 배성고개입니다’라는 팻말을 붙혀놨다 

지명은 덕성리에 있는  배타니 마을을 배성()이라고도 하는데 높은 산이 사방에 둘러 있으므로

박달안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바타나가 되고 또 배성이 되었다었다고 한다

배성고개를 장고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잠시후에 가면 장고개가 나타난다

준.희 선생의 팻말

능선으로 올라서서 좌측으로 올라선다 

431.7m봉(15:23)

지맥길에서 살짝 떨어진 431.7m봉을 찍고 지맥길로 복귀한다

등로는 내가 만들어서 걸어가야 한다

아름다운 강산님도 이 험한 길을 걸었던 모양이다

임도로 내려와서 다시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송전탑 아래로 지나간다

NO14 송전탑(15:27)

질고개(15:30)

천안시 동남구 동면 덕성리에 있는 고개로 잡목이 무성한데 천안 6산(동성산-광덕산

몽각산-덕유산-환희산-국사봉)으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고개의 뚜렸한 특징은 없고 그저 밋밋하다...전국에 많고 많은게 질고개에다

이 지역의 지명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질고개에서 갈라지는 곳에 우측 아래에는 묘지가 있고, 누군가 몽각분맥(夢覺分脈) 분기점이란 표기를 해놨다 

몽각분맥이란 만뢰지맥 만뢰산을 지나 덕유산 못 미쳐 남쪽으로 분기하여 몽각산, 서림산, 약사산, 솔림산,

돛대산(17.6km)을 지나 병천천으로 맥을 다하는 길이 18.0km(?) 천안 청원 지역의 마루금으로 좌측으로 용

두천으로 우측으로 녹동천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흐르게 한다.

편안한 내리막길

여름철에는 좀 힘이 들것 같구나

등로에서 바라본 천안시 동면 덕성리의 모습

천안시 동남구 동면에 있는 덕성리(德星里)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단지박골, 벌터, 배타니, 머귀나무골, 범박골 등이 있다. 단지박골은 모양이 단지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벌터는 신리() 벌판에 있는 마을로 잔덕재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새로 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배타니는 배성()이라고도 하는데 덕성리에 있는 마을인데 높은 산이 사방에 둘러 있으므로 박달안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바타나가 되고 또 배성이 되었고, 머귀나무골은 장교다리 입구쪽에 있는 골로 머구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범박골은 이곳에서 주물철을 생산하는 틀을 생산하였다. 특산물로는 고추, 오이 등이 있다.

다시 등로는 좋아지고...

묘지 뒷쪽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이 친구는 언제 지나간거야?...

좌측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직진 능선으로 올라선다 

322.3m봉(15:44)

청주한공 묘지(15:48)

청주한공 묘지를 지나니...

등로는 고속도로 수준이다

진천읍 방향으로는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봉화산이 보인다

장고개(場峴:15:51)

진천군 진천읍 금암리와 천안시 동남구 동면 동산리에 있는 고개로 임도 삼거리이다.

예전에 천안쪽 사람들이 진천 읍내장을 보러 다닐때 넘었던 고개로 추정되는 고개인데

잠시 후 가야할 오늘의 날머리도 장교현이니 조금은 헷갈린다  

 

늘 감사합니다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우측으로 묘지가 보이고...

무명봉(15:57)

묘지를 지나니...

임도가 나오고 곧이어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무명봉(16:03)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다...이곳이 천안.아산 태극종주 길인 모양이다... 난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천안.아산 태극종주(135km)

청원군 오창읍 양청리(양청고등학교)에서 출발하여 목령산을 거쳐 만뢰지맥로 접어든다.

만뢰지맥 장교현 까지는 잔잔한 능선이지만 지맥길이 그렇듯 가시밭길에 마루금 찾기 쉽지 않으나

장교현 이후 부터는 큰 오름.내림이 없어 진행하기는 좋다.

 

지맥길이 있어 가시밭길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조망은 좋다.

만뢰산 지나면서 금북정맥길로 이여지며 서서히 오름.내림이 심해지며

차령고개에서 각흘고개까지 18km구간이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금북정맥 분기점에서 봉수산으로 이여지며 오형제 고개로 내려서서 아산시에서 개발한 아산기맥길을

따라 이여가다 학성산지나 아산시 신창면 오목2리 마을로 내려서면 끝나는 135km 산줄기이다

무한도전클럽 자료 인용

갈림길(16:04)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무심코 직진의 뚜렸한 등로를 걷다보면 알바하기 좋은 길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등로가 전혀없는 좌측으로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등로가 전혀없는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니...

반가운 현오님의 시그널이 보인다

거친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니...

오늘의 날머리인 장교현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의 절개지...상당히 난해하다

장교현에 서있는 고드미와 바르미

“고드미”와 “바르미”는 중원문화의 발상지요, 애국충절의 고향인 우리 충북 전래의 선비정신과

기상을 바탕으로 21C 세시대를 “올곧고”, “바르게” 바르게 나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한글을 소리나는데로 적고 있는데, 자꾸만 한글을 왜곡하는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 그래도 요즘 한글이 왜곡되어 젊은 애들이 한글의 이해도가 낮은데 지자체에서 조장을 하다니...

장교현(長峴:16:15)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덕성리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금암리 경계의 국도 21호 선상에 위치한 고개로

장교다리고개, 장교티(치)라 고도 부르며『팔도군현지도』(목천)과 『조선지도』(목천)에 직산, 안성과의 경계에

장교치()가 나타난다... 『조선지형도』에 덕유산 북쪽 동면 덕성리와 진천 금암리 경계로 장교현()이

표기되어 있으며,1464년(세조 10년) 임금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전국의 여러 명산대천을 찾아다녔다. 그때 세조가

보은 속리산으로 거둥하게 되었는데, 진천의 길상산(, 467m)에 충청도 군사 4만여 명을 모아가지고 큰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때 충청도 목천 서쪽에 있는 각 고을의 장교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 고개에서 쉬어갔으므로 장교고개, 혹은 장교다리고개

등으로 부른다고 한다...한편, 장교 지명의 '교()'는 '교()'로 해석될 수도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진천 터미널(16:48)

아침에 엽돈재를 타고갔던 택시를 불렀는데 15분만에 도착하긴 했으나 강한 바름으로 인해 상당히 추웠다.

택시를 타고 진천터미널에 도착하여 따뜻한 국물에 소주한잔 하려고 하니 구정 다음날이라 그런지 식당이란

식당은 다 문을 닫아 버렸고, 하는 수없이 표를 예매하고 기다리는데 수헌아우님이 사가지고 온 캔맥주 하나로

입가심을 한 다음에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 

진천발 → 동서울행 버스표

버스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진다...얼마나 잤는지 모른다...잠을 깼는데 주위가 어두워 어딘지를 모르겠다

구정 다음날이라 그런지 고속도로를 엄청나게 밀린다...예정 시간보다 배로 더 걸린 3시간여만에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