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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삽교(석문)지맥(終)

삽교(석문)지맥 제1구간 - 남연군 묘에서 우현(牛峴)까지

by 범여(梵如) 2018. 10. 21.

☞ 산행일시: 2018년 10월 20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아침 추움...산행하기 좋은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14.5km어프로치 + 4km(서원산 왕복 1.1km포함)  / 8시간 20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남연군 묘-상가리 저수지-쉼터-가야봉 갈림길-이정표-이정표-금북정맥 갈림길

                 암봉-암봉-사자바위-석문봉-주차장 갈림길-산불감시초소-557.7m봉-전망바위

                 쉼터-갈림길-갈림길-옥양봉-쉬흔길 바위-593.4m봉-갈림길-상가리 갈림길-폐가

                 도로-무명봉-서원산 갈림길(왕복)-서원산-무명묘지-십자안부-시루봉 갈림길-무명봉

                 357.9m봉-안부-부엉이 바위-안부-351.8m봉-268.1m봉-임도 삼거리-수창봉-실터재

                 대추밭-무명봉-무명봉-241.4m봉-NO3 송전탑-갈림길-연안이공 묘-밀양박공 묘

                 임도 갈림길-임도-물탱크-단군성전 갈림길-216.8봉-묘지-단군전길 삼거리-묘지

                 NO69 송전탑-190m봉-우현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봉산면 /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  

 

수술을 한 지가 4개월이 다되어 가는데 아직까지 몸뚱아리는 완전체로 돌아오지 않으니 답답하다.

원래는 진권아우와 천등지맥을 마무리 지어려 했는데 젊은것이 형님한테 배신을 때리고

지리산으로 날라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나홀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렸다.

하기사 이해는 된다...아우의 후배인 김창호 대장이 졸지에 에베레스트에서 사고를

당하니 내년에 에베레스트 등정을 준비하는 진권아우의 맘이 착잡한 모양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오랫만에 멀리 한번 가보자하고 생각한게 석문지맥이다

석문지맥은 들머리 오름길은 힘이 들지만 그 이후로는 계속 내리막길이라 한번 가고 싶었다.

거기다가 백두사랑산악회 산동네님이 시작하는 지맥길이 삽교(석문)지맥이라 따라가고 싶은

맘도 있고해서 삽교(석문)지맥 1구간을 가기로 한다

 

삽교(석문)지맥 개념도

삽교(석문지맥:石門枝脈)은?

삽교(석문)지맥은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에서 충남 태안의 안흥진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 남서부의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운산면등 3개면이 만나는 석문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의 아산만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말하는데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삽교천의

좌측 산줄기라 하여 삽교지맥이라 부른다

 

도상거리는 약 48.3km이고 석문봉(石門峰 653m). 옥양봉(玉洋峰 621.4m). 서원산(書院山 472.7m.-0.4km).

오봉산(五峰山 225.3m.-0.8km), 몽산(夢山 290m), 135.2m봉. 국사봉(國賜峰 148m), 오룡산(五龍山 114m).

철마산(91.8m), 망객산(望客山 64m). 아굴산(42.1m), 석화산(石花山 46.4m)등을 지난다.

산줄기 동쪽이나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덕산천,효교천,대천천,남원천으로 흘러들어 결국 삽교천에

합류하여 아산만에 이르고 북쪽이나 서쪽의 물은 대방들천,백석천.서원천이 되어 황해로 스며들거나

일부는 아산만으로 흐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장항선 첫 차를 타기위해 새벽 3시반에 일어나 간단하게 베낭을 챙기고 집앞에서 04시 1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시청앞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 타고 용산역에 도착하니 05시 20분이다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장항선 첫차를 타고 삽교역으로 향한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선 탓인지 차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도고온천역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잠시후에 삽교역에 열차는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다(07:34)

삽교역(橋驛:07:34)

삽교()는 '섶다리, 삽다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섶다리가 변하여 삽다리가 된 것이 현재 삽교라

부르게 된 것이라 전하며, 지명과 관련해 지금의 삽교 옆에 살던 새아씨가 친정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건너지 못하여 애태우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이 섶으로 다리를 놓아 건너게 하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1860년 무렵 흥선대원군이 남연군묘를 조성할 당시 행차하는 다리가 좁아 섶으로 다리를 더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삽교역을 나오니 좌측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덕산으로 가는 첫 차는 07시 55분에 출발하는

526번인데 이곳에서 20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하고 15분만에 덕산면소재지에 도착한다 

덕산택시 승강장(0817)

버스에서 내려 들머리에 있는 상가리 남연군묘로 향한다.

 

조선시대 왕비 추존왕 장조(이선)의 부인 - 세번째(후궁들)

남연군 가계도

남연군묘(南延君墓: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것을 1846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 자리를 찾기 위하여 지사(地師)인 정만인(鄭萬仁)에게 부탁하였다.

지사는 전국을 두루 살펴보고 이곳을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二代天子之地]’라고 지목하였다.

이곳에는 본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묘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으나, 대원군에 의해 폐사되고

남연군의 무덤이 옮겨졌다.

 

이장한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 뒤 1866년(고종 3) 통상을 요구하다가 실패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E.J.)가 미국인 젠킨스(Jenkins,F.)를

자본주로, 프랑스 선교사 훼론(Feron)을 통역관으로 삼아 백인 8명, 말레이지아인 20명 등 약 100여 명의 중국인

청년을 무장시켜 4월 18일 홍주에 정박하고 고덕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병사라고 칭하고 남연군의 무덤을 훼손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엄히 하였다.

이 무덤을 파헤친 사건은 국내외로 커다란 비난을 받았다.

무덤 주변에서는 조선시대 기와가 많이 나오고, 또 탑을 파괴할 때 백자 2개와 단차(團茶) 2덩이,

사리도 3개가 나왔다고 이건창(李建昌)은 적고 있다.

남연군은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구(李球). 아버지는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

(麟坪大君)의 6대손 이병원(李秉源)이며, 아들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인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에게

입양하여 남연군에 봉해졌으며, 부인은 여흥민씨이다

 

1771년(영조 47) 양부 은신군이 김구주(金龜柱) 등의 모함으로 관작을 빼앗기게 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뒤 변사하자 불우한 처지에놓였으나, 1815년에 수원관(守園官),

1821년에 수릉관(守陵官) 등 말단직을 역임하였다

계단으로 연결된 남연군의 묘로 올라간다

남연군 묘의 산도

흥선군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는 인조의 차남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차남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은신군은 바로 정조 이산의

이복동생이니 남연군은 정조의 조카가 되는것이고 흥선군은 정조의 손자가 되는 것이다

 

남연군 묘는 얼마전에 개봉된 영화 “명당” 의 주제가 된이 이곳이다.

영화 “명당”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古刹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장한 흥선 대원군의 묘로 이 이야기는 유흥준 교수가 쓴「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

‘불타는 가야사와 꽃피는 개심사 ’에 등장한다.

정조 사후에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장헌세자의 죽음에도 관련되어 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여 다시 벽파가 실권을 잡았다가 이차저차한 이유로 모든 계파는 몰락하고 순조가 친정하면서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득세하기 시작하는 외척의 발호로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가(중간에 풍양조씨로

잠시 넘어 갔지만) 시작되었으며 60년 세도정치는 김조순에서 김좌근으로 다시 김병기로 이어지고,

이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말고는 못하는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서슬이 퍼랬으니...

왕족은 물론이고 임금조차도 무력한 존재였고 강화도령 철종에 이르러 세도정치가 극에 이른다.

 

이러한 정치상황에서 기인으로 행세하며 몸을 감추었던 흥선군은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의 아들 명복을 후계로 지목하자 흥선군도 왕족이었냐고 안동김씨들이 비웃었다고 한다

대원군 이하응은 풍수설을 믿고 아비의 묘를 명당에 장사지냄으로서 묘의 발복을 통해 실추된

왕권을 되찾으려 했는데 그런 와중에 풍수가 정만인을 만나게 된것이다.

원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나  현재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당시 대원군 이하응의 주위에는 많은 한량들이 모여 들었는데 어느날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찾아와 말하기를 충청도 덕산땅에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

(萬代榮華之地)”가 있고, 또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二代

天子之地)”가 있으니, 둘 중 한곳에 선친의 묘를 쓰라는 것이다

흥선 대원군은 만대의 영화보다 2대에 그칠지언정 천자를 낳는다는 자리를 택했다.

 

명당의 조건 해당하는 요소들이 거의 모범 답안처럼 펼쳐져 조산(祖山). 주산(主山).

안산(安山), 좌청룡, 우백호가 뚜렸하게 드러나는 곳을 보기 쉽지 않다 

그 때문에 계곡 아랫쪽에는 석조보살상을 세워 그 기세를 누구러뜨렸다고 한다

오직 흠이 있다면 주산에서 명당으로 흐르는 지맥이 생각보다 짧다.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남연군묘

영화 '명당에서 바위로 된 화기를 누르기 위해 사찰을 지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바위 암석이 참 많았다

정만인을 만나서 그렇게 선택한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가 평범한

산비탈이 아니라 가야산의 유서깊은 거찰 가야사의 보웅전 앞에 있는 금탑

(석탑인데 상륜부가 반짝거려 이런 별명이 붙은 탑) 자리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가야사의 중들을 내쫒고 불을 질러 폐사시킨후 탑을 깨뜨리고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는 남연군 이구의 묘를 여기에 이장하게 된다.

금탑자리 전체가 바위였다는데 금탑을 무너트리고 묘를 파기위해 도끼로

바위를 내려치니 통통 튀기만 할뿐 바위가 파지지 않았다 한다.

하여 흥선군이 도끼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나라고 왜 임금의 아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라고 포효하고

도끼를 내려치니 그후부터 바위가 파였다고 매천야록에 전해진다 한다.


흥선군은 남연군 묘을 이장한 후 7년만에 차남 명복을 낳았으며

명복은 12세 되던 해에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황제(제위44년)로 등극하게 되고

손자까지 순종황제(제위3년)가 되어 2대에 걸쳐 천자가 탄생하게 된다.

상여보관장소

당시 연천 남송정에서 덕산까지는 5백리길이었다하는데 연천에서 덕산까지 상여가 지나는

동네 사람들이 릴레이 식으로 상여를 운구하였고 마지막 주자인 덕산면 광천리 사람들이

선소리 구성지고 요령소리 애처롭게 발맞취 혹여 고인이 불편할세라 정성스럽게 운구하였다

하는데 이를 흡족히 여긴 흥선군이 광천리 사람들에게 남연군을 운구한 상여를 기증하였다 한다.

그 후 광천리 사람들이 죽으면 왕족이 처음 탓던 상여를 타고 마지막 이승길을 떠나는 대접을 받았다 한다.

 

마지막구간을 담당한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매우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광천리 마을에 주었고, 이후로 마을 이름을 따서 '남은들 상여'라고 불러졌다고 한다.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보관중에 있으며, 이곳 상여 보호각에 전시된 복제품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2012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비를 지원받아 국립고궁박물관 진품 실측과 정밀 실측 보고서를 근거로

상여는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전흥수 대목장이, 유소는 무형문화재 32호 배순화 매듭장이 제작하여 보호각에

전시하고 있다.

남은들 상여 안내판

가야사지에서 바라본 남연군 묘

가야사지(伽倻寺址: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하며 고려시대부터 존속하여 있다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이장하면서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청남도에서는 유적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가야사지 남연군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예산군에서는 가야사지의 보수 및 복원.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 부터 2014년까지총 3차례의

문화재 발굴조사결과 중정을 중심으로 하는 8동의 건물지를확인할 수 있었고, 석조불상 8점,

청동불두 1점, '가량갑(사)'명 명문기와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사지에 대한

건물배치 및 사명을 알 수 있게 되었고, 3차 발굴조사를 통해 남연균묘의 제각시설이 확인되었다.

제각은 가야사지를 일부 파괴하고 조성되어 남연군묘 이장에 대한 기록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가야사지는 상가리 중심에 위치하며 현재는 경작지로 변했으며 출토되는 기와조각이 백제시대와 통일신라 것이

출토되고 있는데, 예산군지에도 백제 성왕 계묘(522.A.D)년 겸익대사가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야사는 각종기록과 발굴 성과로 볼 때 3번 중창하며 17세기까지 운영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수덕사를

말사로 두고 가야산 가득 100개 이상의 부속암자를둔 거대한 사찰이었지만 1728~1753년쯤 폐사하고

가야사의 주변에 남아 있던 남전, 보웅전, 묘암사, 인암 등이 가야사로 모칭되며 1846년 대원군에 의해

모두 불태워지며 폐사하게 된다.

예산3층석탑으로 불려지는 탑은 가야사의 법통을 이어가던 암자중 하나의 절집에 있던 탑으로 볼 수 있다.

남연군 묘지가 조성되면서 사찰의 모든 목조물은 소진되어 폐사가 되고 이곳의 석탑과 명문이 있는 모든

석비는 명에 의해 원지의 이탈을 면할 수가 없었다.
정확한 절집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1753년 이전이나 이후 대원군에 의해 최종 폐사하는 1846년께 폐사하며

5층석탑도 붕괴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하나 가야사를 상징하던 거대하고 유명한 탑이 있었는데 현재 마곡사의 탑과 비슷한 규모와 형태의 5층

석탑이 있었으며 평지 금당에서 높은 곳에 위치한 석탑까지 연결하던 77계단의 아름다운 운제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가야사의 금당지에서 금탑이 있던 높이까지 300척 정도라고 기록한다.
이철환(1722~1779)과 이의숙(1733~1807)은 비슷한 시기에 가야사를 방문하여 글을 남기는데 가야사

절집이 불타 사라진후에도 탑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형승조(形勝條)에 “금탑의 윗머리는 구리쇠로 씌우고 네 모서리에 철사를 꼬아 만든

줄을 걸어 늘어뜨리고 풍경을 달았는데 그 형태가 웅장하고 만든 법이 기이해 다른 탑과도 달랐다”고 적혀있다.

아마 공주 마곡사의 탑과 비슷했을 것 같다. 라마교 방식의 탑처럼 탑 상륜에 구리쇠로 보개를 씌었는데 금빛이

나서 금탑이라 한 듯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공민왕 7년(1358) 나옹화상이 세운 것이라 전한다. 금탑이 있던 자리가 현재 남연군묘가 된다.

남연군 묘와 가야사지를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8:40)

상가저수지 둑방 너머로 가야산의 주봉인 가야봉의 모습

감이 탐스럽게 익어간다 

상가저수지 이정표(04:47)

뒤돌아 본 상가저수지의 모습

계속해서 편안한 도로로 따라서 석문봉으로 향한다

덕산도립공원은 덕산면의 시량리, 사천리, 둔리, 상가리, 광천리 등을 포함하여 1973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공원내에는 원효봉, 석문봉, 호서의 소금강이라 일컬어지는

덕숭산과 해태바위 등 폭포와 아름다운 계곡들이 있으며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도로를 따라가다가 끄트머리 집에서 가야봉 가는 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올라선다

비포장 도로로 올라선다

가야봉(우측)과 원효봉(좌측)을 바라보며 임도를 따라서 간다.

쑥부쟁이도 이별을 준비하고...

숲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09:03)

도립공원이라 그런지 등로는 좋다.

쉼터(09:05)

쉼터에는 휴게용 의자 3개와 가야산 안내판, 구조 이정목이 있다

가야봉 갈림길(09:06)

가야봉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오른다

이정표(09:15)

돌무더기를 지나면서 고도를 높혀간다

집터의 흔적같은 곳도 지난다

쉼터를 지나면서 숨이차서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나 자신을 시험하고 싶어 계속 올라간다

이정표(09:35)

의자들이 자주 보인다

우측에는 너덜겅이 보이고...

쉬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땀은 비오듯이 이마에서 흘러 내리고...

로프시설은 시작되고...

가야산에도 가을은 시작되고...

마지막 계단... 숨이 멎을것만 고통이 밀려오고...

금북정맥 갈림길(09:55)

상가리 남연군 묘에서 한번도 쉬지않고 이곳까지 한번도 이곳까지 온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

2012년 2월 12일에 금북정맥 길을 걸을때 이곳을 지났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쉼호흡 한번하고 석문봉으로 향한다

암봉(09:57)

누워있는 멋진 소나무(臥松)도 예전 그대로이다

두번째 암봉으로 오른다

암봉(10:05)

암봉에서 바라본 가야산의 주봉인 가야봉의 모습

가야봉은 가야산의 주봉으로서 백제때는 이산을 상왕산(象王山)이라 부른 것을 신라통일 후

이 산 밑에 가야사라는 십리지관(十里地官)의 큰절을 세우고 가야산이라 한다.

경상도의 합천 해인사의 가야산의 가야나 충청도의 가야산의 가야나 쓰기는 일반인데 가야라는

말은 공통성이 있는데 가야(伽倻)라는 말은 원래 인도의 싼스크리트어의 gaya를 음역 한것이라고한다 .

뜻은 흰 코끼리란 뜻인데 석가모니가 진리를 깨달은 곳이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것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한다  

능선 좌측 아랫쪽인 덕산면에는 조선시대 최대 명필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김정희영정 (金正喜影幀)

한국사에서 19세기 최고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전각(篆刻) 또한 최고의 기술을 가져

천재 예술가로서 그의 이름을 능가할 인물은 거의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추사의 고택의 전경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어릴 적 이름은 원춘(元春)이다. 김정희만큼 호가 많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외에도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천축고(天竺古先生) 등 생전에 100여 가지가 넘는 호를 바꿔가며 사용했다.

 

천재의 출생이니만큼 탄생 일화가 없을 리 없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이 아닌 24개월 만에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태어날 무렵 시들어가는 뒷산 나무들이 아기 김정희의

생기를 받아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탄생일화는 천재를 포장해주는 이야기일 뿐이고,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정희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더불어 조선후기 양반가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이었다.

증조부 김한진은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진 인물이다.

 

김정희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실사구시’로 요약할 수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청나라 고증학자 고염무가 주창한 것으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김정희는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천문학에 대한 식견도 괄목할 만한 정도였다. 일식과 월식 현상 등 관측에 근거하여

 서양천문학의 지식을 받아들였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다. 제주도 유배기간을 통해서도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최고의 걸작품인 ‘세한도’도 이 시기에 그려졌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그림이다.

편안한 길을 따라서 걷는다

등로에서 바라본 한서대학교의 모습

덕산도립공원 지역이라 그런지 가야산 등산로가 자주 보인다

사자바위 가는 길에서 바라본 원효봉과 가야봉의 모습

사자바위(10:08)

사자바위 능선에는 6년 전에는 없었던 데크목이 설치되어 있다

데크목 위를 걸으면서 석문봉으로 향한다

가야할 옥양봉의 모습

사자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서산시 해미면(海美面)의 모습

해미를 직역하면 바다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러나 원래는 고려조에 기원한 합성어의 뜻을 지닌다.

다시 말하면 정해현()과 여미현()의 두 고을 이름에서, 하나씩 따서 해미()로 합성한 것이다.

천수만()의 깊숙한 곳에 가려져 있고, 배후에는 이 지방 최고봉인 가야()산이 둘러 있으므로,

전략적 요새지에 알맞는데. 그리하여 원형이 잘 보존된 사적지(제116호)로서의 해미읍성이 오늘에도 남아 있다.

그 기능은 숙종조에 온양에 있었던 충청도의 좌영()을 옮겨 놓은 데서 비롯되었으므로, 조선조에

병영취락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당대의 상황을 서거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백마가 힘차게 세류영()에서 우는데, 중요한 땅

웅장한 진번의 절도사가 큰 성을 이루었네. 아낙네의 쪽처럼 떠오르는 산이 둘러싸고 있고,

바다는 고래 물결로도 동하지 아니하고 맑고 깨끗하다’고. 이것은 읍성을 둘러싼 산세와 포만의 맑고

고요한 모습, 규율이 엄격한 군대의 주둔지 좌영()의 모습을 잘 표현한 글귀이다.

사자바위 안내판 아래로 내려서니...

집채만한 암릉이 나오고 데크목 계단을 오르니 석문봉 정상이 나온다

석문봉(石門峰:653m:10:15)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과 운산면과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인근의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덕

산도립공원에 속해있는 암릉의 산이다. 가야봉으로 부터 북쪽으로 1.7km정도 떨어져 있고 일락산과 가깝다. 

석문봉을 정점으로 옥양봉과 일락산사이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용현계곡에는 산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역내(驛川)는 이곳 석문봉에서 발원하여 서산시로 흘러 당진읍,고대면, 정미면을 걸쳐

퇴적평야를 이루며 기름진 평야지대가 형성되었다. 전망이 매우좋아 남쪽으로는 가야봉과

옥양봉, 북서쪽으로는 일락산이 있고, 서쪽인 해미로는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동쪽 아래의 넓게 형성된 골짜기에는 예산 가야사지(伽倻寺址:충남기념물 150호)가 있다

정상석 뒷면에는 "내포의 정기 이곳에서 발원하다"가 새겨져 있다.

지명의 유래는 산봉우리에 십여길 되는 큰바위가 양쪽에 서 있어 그 모양이 흡사 문(門)과 같아서 석문봉이라 하였다.

석문봉 정상에서 인증샷

석문봉 정상에는 예산과 서산지역에 있는 산악회에서 세운 여러개의 정상석이 보인다

해미산악회에서 세운 백두대간 종주 기념돌탑

석문봉 정상에 있는 가야산 안내판

가야한 능선의 모습

삽교(석문)지맥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10:21)

제도권 등로라 그런지 등로는 무쟈게 좋다.

석문봉을 지나 내려서니...

주차장 갈림길(10:22

멋진 소나무를 지나고...

산불감시초소(10:23)

 단풍

 

 

나무는 할 말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잎잎이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다

 

 

봄에 겨우 만났는데

가을에 헤어져야 하다니

 

 

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상국 시인:1946~)

客을 기다리는 벤취

泊장소로는 끝내주겠다

제도권 등로라 그런지 등로는 아주 좋다

이정표를 지나니...

557.7m봉(10:30)

우측으로 내려서는데 안면이 있는 반가운 선답자의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편안길 걸어가니...

전망바위(10:32)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상가리

가야할 옥양봉과 그 너머 서원산의 모습

등로에는 가야산 등산 안내도가 보인다

쉼터(10:34)

갈림길(10:39)

옥양봉으로 가는 길의 갈림길은 모두 다 상가리 주차장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벤취와 가야산 등산 안내도가 있다

뒤돌아 본 갈림길의 모습

갈림길(10:45)

상가리 주차장에서 옥양봉으로 오는 가장 짧은 등산 코스이다

소나무가 있는 등로를 지나니...

멋진 바위덩어리를 만난다

옥양봉으로 향하는 길...고도를 높이니 힘이든다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원효봉과 가야봉...석문봉이 아련하게 보인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灣)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은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內浦)’라 하면서 비옥한 평야 중심에 가야산이 놓여 있는데 

 내포란 지금의 예산·서산·홍성·당진 지방과 태안·아산 일부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원효봉(元曉峰)은 신라 원효대사가 이 산에 절을 세우고 산명을 원효봉이라 하고

연엽봉은 산모양이 연잎과 같다 하여 연엽봉(蓮葉峰)이라 한다.

옥양봉 데크 능선에서 바라본 상가리(里)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는 가야봉, 성문봉 등의 산지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마을 앞으로 덕산천이

흘러들고 마을에 상가리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는데 가야골 위쪽이 되므로 상가야, 혹은 상가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가야골, 사기점골, 큰말, 오얏구시마을 등이 있는데 가야골마을은 상가리와 옥게리에

걸쳐 있는 마을로, 가야산 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기점골마을은 약 70년 전까지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남아있는 이름이고 큰말 마을은 말 그대로 큰 규모의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오얏구시마을은 가야골 서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상가리의 남연군의묘()는 시도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양봉(玉洋峰:621.2m:11:03)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운산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멀리서 보면 암봉으로 보이는데 정상에

오르니 온 천지가 일망무제로 시원하게 가을을 준비하는 단풍이 화사하게 보인다

지명의 유래는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가 옥(玉)과 같이 맑고 바위에서 흐르는 물이

옥양목(옷감 종류)과 같다고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옥양봉에서 바라본 금북정맥 능선과 일락산의 모습

옥양봉 아래 쉼터의자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가지고 온 떡한팩과 보온병에

담아온 따끈한 쌍화차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단체로 산악회 회원들이

하도 시끄럽게 하는 바람에 서둘러 길을 떠난다

옥양봉을 지나자마자 안내판과 의자가 있는 봉우리가 나오는데 옥녀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서도 상가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쉬흔길 바위(11:18)

커다란 암릉이 아랫쪽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쉬흔길이란 “쉰질” 또는 “쉬흔길(50리)”라는

충청도 사투리로 ‘매우 높다’ 또는 ‘매우 깊다’라는 뜻으로 매우 높고 우람한 바위를

대부분 쉰길바위로 부른다

 

이 쉰길 바위는 일명 ‘장수바위’라고 하는데 옛날 어머어마하게 덩치가 큰 장수가

이 쉰질 바위에서  뛰어내린 발자국이 상가리 주차장 인근 바위에 찍혀 장수 발자국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로 포장 등으로 장수발자국이 새겨진 바위는 깨어져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아랫쪽의 쉬흔길 바위의 모습

옥양봉을 지나면서 제도권 등로를 벗어나는지 등로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오랫만에 산에서 뱀을 만난다

우측으로 갈림길이 나오고 조금을 더 올라가니 지도상의 593.4m봉이 나온다

좌측으로는 수정봉으로 가는 길인데 선답자의 흔적이 보이는데 독도에 주의할 구간이다

593.4m봉(11:28)

593.4m봉 우측으로 가니 조망바위가 나온다

이곳 아래로 내려서니 등로가 없어 다시 되돌아 올라온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가야할 서원산의 모습

참 곱다

갈림길(11:38)

593.4m봉에서 다시 되돌아 내려오니 좌측으로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상가리 갈림길(11:45)

상가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향한다

너럭바위를 지나고...

안부를 지나면서 무명봉이 나오고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등로는 뚜렸하나 길은 험하다

뚜렸한 등로를 만나고...

폐가(12:08)

폐가를 지나니 시멘트 도로가 보이고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등로 좌측으로 올라서니 이곳이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운산면의 면경계 지점이다  

좀 특이한 형태의 장승 2기가 서 있다

장승에서 되돌아 와 아랫쪽으로 도로를 따라서 간다

조금을 더 가니 사각정자와 돌탑이 있는 곳에서 서원산으로 향한다

이곳이 백제의 미소길이라고 한다

사각정자(12:12)

등로가 희미하다

짧은 곳의 오르막이라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 드는 느낌이다

서원산 갈림길까지 몇번을 쉬었는지 모른다

폐묘(12:27)

폐묘에서 내가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 본다

무명봉(12:28)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

서원산 갈림길(12:47)

지맥길에서 떨어진 서원산을 갔다 오기로 한다

서원산 가는길

서원산(書院山:480m:13:0)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와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나무로 만든 이정표와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있는데 지명의 유래는 이 산 아래에

사현 서원이 있어 서원산이라 하는데 우측으로 내려가면 정대영 가옥이 있다

예산의 역사문화를 향유하는 정대영 가옥 3

정대영 가옥

예산군 봉산면에 있는 정대영 가옥은 정대영 씨가 소유하고 있는 한식 기와집으로 ㅡ자형 평면을

갖춘 건물로 앞면 7칸 반·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기와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이다. 대문에서부터 부엌·방 2칸·마루·건넌방 순서로 되어있다. 

1926년에 정대영의 조부인 정홍모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건물로 살량문에 개국 기원 4259년 병인이월에

지었다고 쓰여 있다.

 

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해 지은 집을 가옥이라고 하죠. 가옥(家屋)이라는 말도 집 자체를 뜻하며,

저택(邸宅)은 비교적 큰 집을 말하며, 민가(民家)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건축가가 건축하기보다

목수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로 지은 일반백성들의 집을 일컫는다(자료 - 펌)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

선답자들의 흔적

다시 서원산 갈림길(13:12)

무명묘지(13:15)

이곳도 덕산도립공원에 속하는지 등로는 좋다

십자안부(13:20)

우측으로는 예산시 봉산면 봉림리에 있는 서원저수지로 내려가고, 좌측으로는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로 이어지는 길인데 지맥길은 안부를 가로질러 직진길로 향한다

이곳도 산악오토바이가 많이 다니는 모양이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직진으로 올라서니...

시루봉 갈림길(13:25)

이정표(←시루봉 0.9km, 부엉이 바위 0.7km →서원산 1.0km가 있는 곳에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이정표 뒷쪽의 우측 능선으로 올라 서는데 좌측으로 가도 되지만 조금 돌아서 간다

우측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등로가 없는 직진 능선으로 오른다

등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오르막길이라 숨이 많이 찬다

무명봉(13:40)

357.9m봉(13:41)

1분정도 가니 다시 387.9봉이 나오고 이곳에서 90도 우측으로 꺽어진다

습지같은 넓은 공터를 지나니...

안부(13:42)

이정표(↗부엉이 바위 0.1km)가 있고 그곳으로 향한다

부엉이 바위(13:43)

김해 봉화산에만 부엉이 바위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 예산에도 부엉이 바위가 있네.

그런데 노통이 生을 마감한 김해 부엉이 바위보다 훨씬 규모도 적고 옹색하기 그지없다

오룩스 앱에서는 이곳 부엉이 바위가 357.9m봉으로 나와 있는데 어떤 지도에는 387.9m봉

어떤 산꾼은 388m봉 또는 386m봉으로 표기했는데...오룩스 맵을 따르기로 한다 

부엉이 바위 안내판

부엉이 바위에서 바라본 지나온 서원산의 모습

부엉이 바위를 지나 직진길로 지맥을 이어간다

등로에서 뒤돌아 본 부엉이 바위의 모습

안부(13:48)

이곳에도 부엉이 바위 이정표가 있다...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완만한 오름길을 지나니...

351.8m봉(13:58)

제도권 등로를 벗어난 탓인지 등로가 거칠고 보이질 않는다

이리저리 헤치고 내려서니 뚜렸한 임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뚜렸한 임도를 따라서 조금을 더 진행하니...

벌목지가 나오고...

벌목지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등로에 밤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좁은 등로를 따라서 간다

올해 처음으로 모싯대꽃을 만난다

모싯대는 고려시대의 이두향명으로는 장의피(獐矣皮)·저의화차(猪矣和次)라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계노지(季奴只)라 하는데 『동의보감(東醫寶鑑)』·『훈몽자회(訓蒙字會)』·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등에는 ‘계로기’로 기록되어 있다. 학명은 Adenophora remotiflora (S. et Z.) MIQ.이다
숲속의 약간 그늘진 곳에서 자라는 식물로 높이 40∼100㎝이고 뿌리가 굵고 잎은 난상 심장형으로
어긋난다. 길이 5∼20㎝, 너비 3∼8㎝로서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예리한 톱니가 있다.

꽃은 자주색으로 8∼9월에 핀다
뿌리에는 해열·해독·거담 작용이 있어서 감기로 열이 심하고 기침이 날 때 이용되며, 가래를 삭히기도 한다.

산후 임산부의 이뇨를 촉진시키고 약물의 중독도 풀어준다

등로 좌측에는 커다란 송전탑도 보인다

다시 등로는 무쟈게 좋다

다시 벌목지가 나오고 맞은편에는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수정봉이 보인다

벌목지 가운데의 등로로 이어지는데 송전탑도 같이 간다 

벌목지에서 바라본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 신사동(新寺洞)의 모습

운산면 원평리는 조선 시대 때 홍주목()의 교통 요지로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원집이 있어 원벌 또는

원평리()라 하였는데 원평리에 있는 신사동(새절)은 새로 생긴 절이 있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벌목지를 지나니...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잡풀이 무성한 넓은 곳을 지나니...

 또다시 밤밭이 나오는데 오늘은 갈 길이 멀어 그냥 패스한다

 고속도로(?) 같은 임도를 따라서 가다가...

 임도를 버리고 잡목을 헤치며 능선으로 올라간다

268.1m봉(14:20)

268.1m봉에서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고...

 묘지에서 내려와 뚜렸한 임도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임도삼거리(14:28)

수창봉(237.3m:14:30)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와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산 정상에는 간벌을 하고 새로운 묘목을 심어놔서 산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으며 벌목지 안에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있다

판독이 불가능한 수창봉 정상 삼각점

수창봉에서 바라본 운산 변전소

지맥길은 벌목지 우측의 숲속이나 등로가 전혀없어 벌목지 가장 자리로 내려가는데 상당히 급경사이다.

 급경사로 내려오니 임도가 나오고 좌측에는 민가가 있고 정자가 보인다

도로를 따라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실터재(140m:14:40)

예산군 봉산면과 서산시 운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618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고개 정상에는

면계를 표시하는 운산면과 봉산면의 표지판이 있고,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표지판과 시온 수양관

표지판이 보인다...지명은 실터재 또는 실티재라고도 부르는데 지명에 대한 유래는 우측 아랫쪽에 있는

봉림리 실티마을에서 따온 듯 하다

 

부지런히 걸어 오다가 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서 그냥 왔더니만 갑자기 허기가 진다

이곳에서 선 채로 가져온 찹쌀모찌와 과일로 허기를 면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실터재 도로 윗쪽의 옹벽으로 올라서니 이동통신탑이 숲속에 숨어있다

 통신탑을 지나면서 갑자기 등로가 사라지고 잡목의 저항이 엄청 심하다

얼굴을 할키면서 무작정 내려서니 봉림리에서 올라오는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따라서 올라가니 우측으로 커다란 묘지가 보인다

조금을 더 진행하여 올라가니 커다란 대추밭이 나온다

대추밭(15:04)

대추밭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울타리를 따라서 걷는다

대추밭 끄트머리에서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선답자의 흔적이 보이니 제대로 가고 있다는 거겠지

 무명봉(15:15)

우측으로 내려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등로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무명봉(15:22)

좌측 사면으로 나있는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직진의 능선으로 치고 오른다

241.4m봉(15:32)

241.4m봉에서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을 만난다.

 등로로 내려오니 임도 좌측에 송전탑이 지나간다

 NO3송전탑(15:35)

갈림길(15:37)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으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좌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나오는데

운산면 와우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인 모양인데 좌측으로 맥산행길에 난다 긴다하는

고수들의 시그널이 몽땅 그쪽으로 다 걸려 있어서 무심코 갔다가 약 100m정도의 알바를

하고 다시 되돌아 와서 직진의 뚜렸한 등로로 내려간다

묘지가 보이고 묘지 좌측으로 내려간다

연안이공 묘(15:45)

 묘지 아래로 내려서서 조금을 더 진행하니...

 밭이 보이고...

밭 가장자리로 걸어간다

 깡통이 매달린 곳으로 올라간다.

능선으로 올라 갔다가 내려오니 묘지가 나온다

밀양박공 묘(15:55)

통정대부와 승정원좌승지를 지낸 밀양박공 묘지를 지난다

묘지를 지나 시멘트 도로를 따르다가...

 도로가 굽어지는 지점에서 도로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선다

지나온 서원산 너머로 옥양봉이 목을 빼고 산꾼 범여와 작별을 한다

구절초도 내년을 기약하는 듯... 잡목의 저항이 너무 심해 다시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 갈림길(16:05)

이곳에서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90도 꺽어져야 하는데 독도에 상당히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나뭇가지에 하얀 비닐끈이 2군데 묶여 있는 곳에서 내려간다

잡목의 터널을 따라서 내려간다

 임도(16:08)

∪자 형태로 굽은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서 가다가 오르막을 오르니...

녹색 휀스안에 물탱크가 보인다

물탱크(16:12)

 물탱크 뒷쪽으로 가니 등로는 아예 안보이고 철조망 한가닥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서산시 운산면 와우리(里)의 모습

와우리는 누운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누운고개라고 하기도 했고, 또는 마을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와우리()라 하였는데 마을 북쪽으로는 지역의 북쪽으로 역천()이 흐르며 중앙부가

높고 북부와 남부 지역에 골짜기가 형성된 산악 지세를 나타낸다.

 

와우1리와 와우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구시울·모촌·삽절 등의 자연 마을이 있으며 구시울은 모촌 동쪽에 있는

마을로 모양이 구시[구유]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촌은 띠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삽절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와우리 단군전이 있다. 삽절은 누운고개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과거 삽사()라는 절이 있어서

삽절이라고 부른다

계곡처럼 파인 곳으로 내려가니...

주택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오고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단군성전 갈림길(16:18)

마을 도로로 따라 내려 가다가 우측으로 올라간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면 단군성전이 있는 와우1리이다

와우리 단군전(殿)...사진 서울백두클럽 카페 인용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와우리에 있는 단군전은 천진궁()이라고도 부르는데

와우리(臥牛里) 모촌(茅村)마을에 자리잡은 단군전(檀君殿)은 우리나라를  개국(開國)하신

 

단군성조(檀君聖祖)의 영정을 봉안한 성스러운 전각으로 조선 순종2년(1908)에 홍암대종사(弘岩大宗師)

나철이 단군 진영(眞影)을 모사하여 전국에 배포할 대 김용학(金容學)선생이 부졸(副卒)이란 관직을 버리고

왜관(倭冠)의 눈을 피해 단군영정을 와우리(모촌부락)로 가지고 내려와 천진궁(天眞宮)이란 집을
짓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건국신화(建國神話)에
단군은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태어나 (기원전 2333년) 아사달(지금의 평양)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건국 이천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 후 중국의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왕에 봉하자 황해도 구월산 장당경으로 옮겨 가셨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山神)이 되셨다고 기록되었다

 단군전 뒷쪽 능선으로 올라서니 십자가가 그려진 묘비가 보이는데 대부분 전주이씨 묘지이다

묘지를 지나 직진방향으로 능선을 치고 올라서니...  

 216.8m봉(16:22)

 임도를 버리고 잡목이 우거진 곳으로 90도 꺽어져 내려가는데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좌측으로 폐가옥이 보이고...

묘지(16:30)

조금을 더 내려가니 단군성전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가 보인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간다

 단군전길 삼거리(16:33)

넘어진 이정표에는 ‘와우 단군전 600m’라고 쓰여 있다.

삼거리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른다

좌측에는 묘목 조림지가 있고... 

우측에는 신평이씨 판서공파 종중묘지가 보인다 

묘목 조림지 뒷쪽으로 올라가니... 

등로는 희미하고 거미줄이 산꾼 범여에게 태클을 걸어댄다  

희미한 등로를 지나니 선답자들의 흔적들이 보인다 

빛바랜 준.희 선생의 흔적  

묘지(16:45)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는데 등로는 거칠고 잡목이 갈길 바쁜 산꾼을 붙잡는다.  

묘지 너머로 송전탑이 보인다 

NO69 송전탑(16:47) 

묘지 아래의 임도를 따른다 

잔디가 잘 가꿔진 묘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묘지를 지나 좌측으로 꺽어져 올라간다  

190m봉( 16:50)

190m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오니 묘지가 보이고... 

얼굴을 할키면서 잡목을 헤치고 내려오니 민가가 보이고 베다니 기도원이 보이는데 이곳이 지도상의 우현(牛峴)이다  

우현(牛峴:17:00)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와 서산시 운산면 와우2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인데 고개 정상에

민가가 한 채 있는데 이 집이 베다니 기도원이다...원래 예상했던 암소고개까지는

시간상 무리일듯 싶어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면서 스틱을 접는다

그리고  실터재에서부터 식수가 떨어지고 점심을 먹지 않았던 탓인지 배가 엄청 고프다

우선 물을 얻을 먹을 요량으로 대문을 열고 쥔장을 찾으니 연세드신 분이 나온다

목이 말라서 그러니 물을 좀 달라고 하니 하수오 달인 물을 수통에 가득 채워 주신다

그리고 몰골이 불쌍해 보이는지 단감을 서너개 주는데 얼마나 고맙던지...

단감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우고 나니 조금을 살 것만 같다.

 

그 사이 남자 분이 오신다...이곳은 등산로가 없고 뫳돼지가 많은 곳인데 위험하게

혼자 다니냐고 하면서 어디 가시냐고 묻길래 운산으로 나가서 서울가는 차를 탈거라고

하니까...지금 시간으로는 운산에서 서울행 17시 10분 차는 지금가서는 탈 수가 없고 그 다음 차는

18시 55분 차인데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면서 서산으로 나가면 서울가는 차가

많다고 하면서 자기 차가 1톤 트럭인데 좀 지저분하지만 서산까지 태워 주겠단다

이게 웬 떡이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서산으로 향하는데 공사구간과 운산을 지나면서

교통사고로 인한 정체로 인해 생각보다 도로가 많이 막힌다

서산 터미널에 도착하니 18시 17분 인사를 하고 터미널로 들어서니 표가 달랑 1장 남았다.

서둘러 표를 예매하고 버스에 오르니 차는 서울로 향한다

서산을 출발하는 버스는 고속도로가 막힌다고 하면서 국도로 가겠단다 

버스는 아산만 방조제를 지나 인주에서 평택으로 하여 서울로 가는데

생각보다 국도는 별로 막히지 않아 센트럴시티에 도착하니 20시40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