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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삽교(석문)지맥(終)

삽교(석문)지맥 제2구간 - 우현에서 기지시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by 범여(梵如) 2018. 11. 5.

☞ 산행일시: 2018년 11월 04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미세먼지가 상당히 삼하고 생각보다 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23.5km  / 9시간10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우현-NO69송전탑-해주오공 묘-262.3m봉-전주이공 묘-암소고개-200m봉

                  축사-오봉산갈림길-쉼터-안동김씨 묘- 197.3m봉-안동김씨 묘-묘지

                  장승배기-천주교인 묘-159m봉-163m봉-묘지-190m봉-206m봉-NO20.21송전탑

                  무명봉-NO19, 20송전탑-207.1m봉-140.5m봉-영탑사갈림길-갈림길

                  삼웅육교-SK면천 기지국-나무고개-면천I.C입국-안부-갈림길-제8망루 추정치

                  제7망루 추정치-234.2m봉-제6망루 추정치-성황당-시멘트도로-제5망루 추정치

                 약수터-몽산1봉-몽산-갈림길-양유리 공동묘지-사거리-224m봉-218.3m봉-안부

                 구절산-NO82 송전탑-임도 삼거리-육각정-컨테이너 하우스-삼거리-104m봉

                 안부-면산-안부-NO 89송전탑-119.5m봉-615번 도로-NO91송전탑-안부

                 오봉산 갈림길-임도사거리-121m봉-116m봉-국사봉-삼거리-갈산육교-NO99송전탑

                 133.7m봉-쉼터-NO101 송전탑-NO35 송전탑-가교1리-가교 삼거리

                 오리골길 삼거리-송악배수지-기지시리 육교-기지시리 치안센터- 버스 정류장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봉산면 / 서산시 운산면 / 당진군 면천면, 순성면, 송악읍

 

지난주에 백두사랑 지맥팀을 이끌고 있는 산동네님을 따라서 삽교(석문)지맥 2구간을 하려고했는데

토요일(27일) 월정사와 상원사 성지순례를 갔다가 늦게 집에 오기도 했지만 아침에

산행을 하려고 일어나니 반갑지도 않은 비가 내리고 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진권아우한테서 전화가 온다...

형님! 비가 많이 오는데 형님은 비를 맞으면 안되잖아요 하는게 아닌가?

하긴 담당 주치의가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니 제일 조심해야 할 부분이 감기와 폐렴이란다

비를 맞으면 감기가 걸릴 확률이 높아 산동네님에게 미안하다고 전화를 하고 산행을 포기한다.

지난주에 산행을 안했더니만 1주일 내내 몸이 힘이 든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베낭을 꾸리고, 아침밥을 먹고는 삽교(석문)지맥 2구간을 가기위해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남부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운산행 버스표

해가 많이 짧아진 모양이다...새벽 6시 반이 지났는데도 주위는 어둡기만 하다

06시 40분에 서산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고 짙은 미세먼지가 많이 끼어 앞이 안보인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는 송악을 빠져나와 기지시, 당진, 구룡을 지나

내가 하차할 서산시 운산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08시 20분이 조금 지난 시간이다

운산리 버스 정류장(08:20)

당진을 지나면서  택시기사에게 전화를 했더니만 미리 대기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운산 변전소를 지나 와우2리 우현에 도착한다

택시비가 12,800원인데 12,000원만 받는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산행을 준비하는데 아뿔싸! 차에다 카메라를 두고 내린게 아닌가...

운산으로 가던 택시가 다시 돌아와서 카메라를 갖다주고 간다

우현(牛峴:08:52)

충남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와 서산시 운산면 와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상에는

가정집 형태의 베다니 기도원이 있다... 차에서 내리니 지난번 1구간에 이곳에서

서산까지 태워줬던 분이 나를 알아보고는 오늘은 어디까지 가시냐면 살갑게 대한다

택시기사분과는 잘 아는 사이인지 서로 인사를 나눈다

 

고개 이름이 우현(牛峴)이라?... 이 근처의 지명이 소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동네 이름이 ‘누워있는 소’라는 뜻인 와우리(臥牛里)이고 조금 더 가면 암소고개가 있다.

수도지맥과 양각지맥에 걸쳐있는 경남 거창군 웅양면의 지명이 소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여기도 소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 건 무슨 사연이 있겠지!

산행을 시작하다(08:55)

베다니 기도원 쥔장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밭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초반부터 잡목의 저항이 심하다

밭에서 바라본 베다니기도원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우측에 묘지가 보인다

묘지에서 바라본 262.3m봉

오늘 산행중 첫번째 만나는 선답자의 흔적

외래종 식물인 자리공을 비롯하여 산초나무, 아카시아 등의 저항이 초반부터 범여의 氣를 죽인다

NO 69송전탑(09:02)

변전소가 가까운 탓인지 엄청나게 큰 765,00V의 송전탑이 3개가 연달아 있다

송전탑이 있는 능선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아예 등로는 사라지고 가시나무와 썩은 소나무가 길을 막는다

등로 좌측 아래에는 과수원과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비닐하우스 아랫쪽으로 내려갈걸...원칙대로 걸으려다가 초반부터 개고생을 한다

과수원 위에서 바라본 변전소

이곳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간다

이곳에 불이 났던 모양이다... 불탄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불에 말라죽은 소나무 대신에 자리공, 산초나무, 아카시아 등의 잡목들이 능선을 점령하고 있다

오르막 능선에는 엄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해주오공 묘(09:15)

잡풀이 무성한 오르막이 나오는데 오르막같잖은 이런곳도 아직까지는 엄청 힘이든다

조금을 더 오르니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나 바로 우측에 있는 262.3m봉으로 향한다

262.3m봉(09:23)

정상에는 선답자의 시그널 서너개만 걸려있고 별 특징이 없다.

그러나 이곳은 예산군 봉산면, 서산시 운산면, 당진시 면천면이 만나는 삼면 경계봉이다

다시 좌측 아랫쪽으로 넓은 임도를 따라서 되돌아 간다

구술붕이도 이별을 준비하는구나

이른 아침에 개고생하면서 올라온 걸 보상이리도 하려는지 등로는 뮤자게 좋다

지도상에는 우측 아래에 보광사가 있는데 내려가는 길은 보이질 않는다

전주이공 가족묘(09:35)

이곳에서부터 우측은 예산군 봉산면에서 당진시 면천면으로 면계가 바뀌지만 좌측은 계속 운산면이다

능선을 따라서 내려서니...

암소고개 내려서기 직전에 커다란 보호수 한그루가 보인다

암소고개(09:44)

서산시 운산면 와우리 우현마을과 당진시 면천면 율사리 밤절마을 경계에 있는 고개로

고개 정상에는 수령(樹齡)이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고, 도로가에는 와우2리

버스 정류장과 암소고개 이정석, 그리고  松泉 李來性 공덕비가 있는데 지명의 유래는

이곳이 “암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암소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암소고개 표시석

도로를 가로질러 축대 윗쪽으로 올라선다

휀스 옆으로 올라서니...

묘목이 심어져 있는 곳을 치고 올라선다

넌 뭔 미련이 남아 있길래?

200m봉(09:52)

소나무가 하도 빽빽하여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천신만고 끝에 묘목 조림지로 빠져 나온다

묘목 조림지 가운데를 지나다가...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등로는 없고 잡목의 저항이 무쟈게 심하다

넓은 임도를 만난다(10:00)

넓은 임도를 따라서 가는데...

우측에는 전원주택이 보인다

직진으로 조금을 더 가니...

축사(10:05)

개사육장을 지나는데 개쉬끼들이 난리부르스를 친다

오봉산 갈림길(10:06)

이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 오봉산이 있지만 포기하고 지맥길에 충실한다

쉼터(10:11)

안동김씨 묘(10:12)

197.3m봉(10:15)

안동김씨 (10:17)

가야할 지맥 능선이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묘지옆의 샛길로 내려선다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공작단풍 나무가 있는 묘지를 지나고...

등로가 잠깐 거칠어지더니...

묘지(10:28)

묘지 좌측으로 내려가니 밤나무단지가 나온다

다시 임도를 만나고...

뚜렸한 직진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올라간다

인삼밭 옆으로 지나간다

인삼밭 옆에는 청주이씨 가족묘가 보인다

인삼밭을 따라 가다가 우측으로 내려서니...

통나무 계단이 있는 절개지로 내려서니 장승배배기 고개에 도착한다

장승배기(10:38)

서산시 운산면 고산리와 대치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상에는 목장승과 석장승 여러개가 서 있고,

내포문화 숲길 안내판과 원효 깨달음의 길이란 안내판이 있고 장승배기의 내용을 쓴 비가 이채롭게 서 있다

장승배기에 있는 내포문화 숲길 안내판

내포문화숲길은 가야산 주변의 4개시군(서산시,당진시,홍성군,예산군)이 내포지역에 남아 있는 많은

불교성지들과 내포 천주교 성지, 내포 지역의동학, 역사인물 및 백제 부흥운동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지점들을 옛길과 마을길, 숲길과 임도, 들길, 하천길을 따라서 연결한 충청남도 최초,최대의 장거리

도보트레일로서 약 320km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내포문화숲길은 내포지역이 지닌 역사, 문화, 생태적 가치를 바탕으로 지금의 우리네 삶을 천천히

되돌아 보고, 내포지역에서 살고 있고 또 앞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해 나가기

위한 나눔과 성찰의 순례길이다

 

내포란 사전적 의미로 바다나 호수가 육지로 휘어 들어간 부분 즉 내륙 깊숙이 바다와 연결되는

물길을 통하여 포구가 형성되어 있는 곳을 의미하는데,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저서 <택리지>의

팔도총론에서는 내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 쯤 에 가야산이 있다.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內浦)라 한다. 지세(地勢)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壬辰)과 병자(丙子)의 두 차례 난리에도 여기에는 미치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위에서 언급한 가야산 앞뒤의 열 개 고을은 태안,서산,홍주,덕산,예산,신창,대흥,청양,결성,해미를 칭하는 것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서산시, 당진시, 예산군, 홍성군, 태안군과 보령시, 아산시, 청양군의 일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장승배기에 관한 내용을 적은 비 

장승사이로 올라서며 지맥길을 이어간다

천주교 묘지(10:42~57)

이곳에서 망자(亡者)의 밥상을 빌려 우유 하나에 초코파이로 원기를 보충하고 휴식을 취한다

천주교 묘지에서 바라본 한티마을의 모습

당진시 면천면 대치리()는 읍내면 방향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마을에 큰 고개가 있어서 크다는 뜻의

 '한'과 고개를 의미하는 '티'를 써 '한티[]', 또는 '대티[]'라 하게 된 데서 명칭이 유래하였다.

칡넝쿨이 너무 많아 치고 오르기가 불가능하여 우측으로 가니 개구멍이 보인다

얼굴이 할퀴고 거미줄이 태클을 걸고 진권아우 안 데리고 오길 천만 다행이다 

잡목을 피해 낮은 포복으로 올라가는데 반가운 선답자의 흔적이 보인다 

159m봉(11:05)

잡목이 우거진 159m봉에서 좌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묘지를 지나 다시 오름길

163m봉(11:15)

오늘 따라서 칡넝쿨의 저항이 상당히 심하다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묘지(11:24)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정호승·시인, 1950-)

190m봉(11:28)

좌측으로는 수리봉과 웅산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나 지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고도를 낮추는데...이곳부터는 서산시 운산면과 작별을 하고 좌.우가 온전히 면천면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이제서야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묘지를 지나 다시 오르막길

206m봉(11:36)

잡목의 저항을 받으면 힘들게 능선을 올라서니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내포문화숲길 원효 깨달음의 길”팻말이 있다.

내포의 역사, 문화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화가 종교문화인데 특히, 불교는 백제시대에 한반도에 들어와 융성한

종교로 내포(內浦)가 그 중심이 되었다...해양으로부터 전해지는 불교가 처음 도착하여 융성한 곳이 가야산이며,

이곳 가야사와 보원사라는 큰 절들이 들어서 계(戒)를 내리고 강의를 하여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였으며

한반도 내륙과 일본으로 전파하는 산실이 되었다.

 

지금도 가야산에는 100여개의 옛 절터가 남아있다.

또 근대 한국불교를 살려낸 선불교의 중심사찰인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어 깨달음을 얻는 성지로 알려져 있다.

해골물 전설의 “一切唯心造”를 꼽씹으며 원효대사의 깨달음의 흔적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절과 절, 옛 절터와

옛 절터를 연결하는 길을 조성했으며 예산의 수덕사, 서산의 천장암, 일락사, 개심사 홍성의 용봉사, 당진의

영랑사 등 현존하는 사찰과 가야산의 옛 절터인 원효암터, 백암사지, 가야사지, 보원사지, 서산 마애삼존불,

당진의 안국사지를 연결해 놓았고 성찰을 통한 마음의 치유와 깨달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반갑습니다...아직도 여전하시네요

NO 20, 21송전탑(11:38)

무명봉(11:40)

묘지를 지나고...

예쁜 모습은 내년을 기약하고...

다시 약간의 오르막길

NO 19, 20송전탑(11:47)

능선에는 밤이 지천인데 모두 다 벌레가 먹어 버렸다

다시 오르막길

예전같으면 뛰어 다닐 길이건만 수술이후 이런 곳도 힘이드니 참으로 답답하다

207.1m봉에 오르니 우측으로 뭣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겠고 그 옆으로 한치고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207.1m봉(11:55)

정상에는 ‘상왕정(象王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항아리로 만든 조형물이 있는데

상왕(象王)이라면 불교적인 용어인데 아마도 이 근처에 사찰이 있는 모양이다

오늘 산행중 유일한 인증샷

항아리 조형물을 지나...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등로는 무쟈게 좋다... 오늘 산길은 험한데는 엄청 험하고 좋은데 무쟈게 좋으니 극락과 지옥을 두루 경험한다

직진의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묘지가 있는 우측으로 올라선다

140.5m봉(12:08)

140.5m봉 정상의 모습

직진으로 내려서니 등로는 보이질 않고...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넓은 임도를 다시 만난다

영탑사 갈림길(12:14)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물 제409호인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모셔져 있는영탑사가 있다.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 (唐津 靈塔寺 金銅毘盧遮那佛三尊坐像:보물 제409호)

신라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영탑사(靈塔寺)에 모신 불상으로, 8각형의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이 있고 양 옆으로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三尊佛) 구도로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다.

 

사각형의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주며 선으로 표현된 옷주름은 도식화되어 보인다. 상반신은 길고 큼직한 데 비하여

하반신이 무척 위축되어 있어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무릎 높이도 상반신에 비하여 낮아서 몸의 균형이 고르지 못하다.

가슴 역시 평면적이며 하반신 처리는 둔중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수법은 고려 중기 이후 나타나는 특징이다.

손은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모양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 보살과 오른쪽 보살은 모두 같은 자세에 똑같은 수법을 하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은 따로 만든 것이며,

그 안에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길게 어깨까지 내려온다. 얼굴은 본존불과 기본적으로는 같으나

좀더 여성다우며, 가슴의 목걸이 장식은 유난히 크다. 잘록한 허리에 둘러진 천의(天衣)는 몇 가닥 띠로 허리를

잔뜩 졸라 맨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보살들의 대좌(臺座)는 본존불의 대좌에서 나온 두 개의 연꽃 줄기가

올라가서 만든 연꽃 봉오리이다.

영탑사 갈림길에서 내려오니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도로에서 바라본 웅산의 모습

갈림길(12:20)

도로에서 지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지는데...

우측으로는 택지 개발을 하려는지 마구 파헤쳐 있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등로가 당진~영덕간 고속도로로 인해 허리가 짤려있다

 시멘트 계단으로 내려선다

조금전 갈림길에서 도로를 따라서 오면 1분이면 오는데 후답자들은  그냥 도로를 따라오면 편할 듯...

삼웅육교(12:25)

이 육교 아래로 당진~영덕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육교에서 바라본 서산방면의 모습

우측의 마을이 삼웅리인데 당진시 면천면 삼웅리(里)는 평지가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동쪽에는 수예들이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 하천이 유입해 들어오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삼웅, 각골, 밤골 마을 등이 있다. 삼웅 마을은 수미산 밑에 위치하고 있어, 수미 또는

웅산이라고 불리다가 후에 삼웅이라 개칭되었으며, 각골 마을은 중웅 옆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각골 마을이라 불리며, 밤골 마을은 밤나무가 많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삽교(석문)지맥을 짤라먹고 있는 고속도로

삼웅육교를 지나 우측으로 올라간다

등로를 따라서 올라서니...

SK 면천기지국(12:27)

잡목을 헤치고 능선으로 올라선다

절개지 능선에서 급하게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잡목과 잡풀로 인해 개고생을 하면서 내려서는데 철조망이 길을 막는다

이곳으로 내려온다

철조망을 월담하면서 내려서니 면천삼거리 표지판이 나오는데 이곳이 나무고개이다

나무고개 버스 정류장

나무고개(12:43)

당진시 면천면 삼웅리에서 면천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70번국지도로와 당진가는 1번군도

만나는 삼거리가 나무고개인데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바람이 상당히 세차다

삼거리에는 새마을의 고향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 구미에서도 여당 시장이 되고나서

홀대를 받고 있는데 이곳은 새마을기와 태극기가 많이 걸려있는게 이채롭다.

나무고개 삼거리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꺽어지다가 목장승 2기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지난주 이 길을 걸었던 산동네님이 이곳에 대한 트랙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잡목이 심해서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으니 우회를 하라는 것이다...저 윗쪽에 성상리 산성이 있지만

현재의 내 건강과 컨디션으로 불가능 할 것 같아 도로를 따라서 우회길을 택한다 

목장승 뒷쪽 능선에 있는 성상리 산성

성상리산성(충청남도 기념물 제162호:사진 펌)

성상리산성은 면천면 성상리와 삼웅리의 경계지점인 해발 119m의 산정상부를 중심으로

하여 성내부의 경사면을 삭토한 흙으로 성벽을 축조한 산정식(山頂式)의 테뫼식 산성이다.
규모는 성주위 약 400m이며 성벽높이 외벽 약 4~5m, 내벽 약 1~1.5m이고 성벽 기저부는 1~2m이다.

축조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면천관내에서는 가장 고식의 산성이며 마한 또는

백제시대의 치소(治所)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당진군 행정·군사적 중심지였던

면천지역의 역사성을 밝힐 수 있는 자료이므로 가치가 크다

 

성상리 산성의 남쪽과 동쪽 사면에서는 지난 2005년 발굴조사를 통해 석곽묘(지하에 깊이 움을 파고 돌로

직사각형의 널빤지를 짠 무덤) 2기와 수혈유구(인간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잔존물) 3기, 토광묘(지하에

수직으로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매장하는 형식의 무덤 유형) 47기 등 총 56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출토된 해무리굽 청자나 대웅 등에서 이 유적의 중심 시기는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석곽묘의 경우 1기는 백제시대, 1기는 고려시대 초의 유구로 추정하고 있으며, 47기의 토광묘는 고려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상리 산성은 면천면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의 산성으로, 당진의 행정과 군사 중심지였던 면천 지역의

역사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면천I.C입구(12:53)

면천I.C 입구를 지나면서 마루금으로 복귀하기 위해 우측으로 향한다

대구서씨(大丘徐氏) 묘지를 지난다... 동료산꾼 젠틀맨은 달성서씨인데

대구(大邱)가 아닌 대구서씨(大丘徐氏)라... 자료를 찾아보니 

大丘徐氏는 고려 중엽 軍器 少尹公 諱 ()遠祖로 하고, 達城徐氏는 고려 중엽

판도판서 諱 晉을 시조로 하는데 大丘徐氏 先祖께서는 大丘達城을 병행하여 사용하였으나

(1975四佳公 선영 이장시에 발굴된 묘지석에 大丘人으로 되어 있는데 문과 방목에 의하면

성종때까지는 大丘, 이후 영조때 까지는 達城, 그 이후에는 다시 大丘를 사용한것 같다

안부(12:58)

마루금으로 복귀를 한다

외래종 식물인 자리공과 가시나무의 저항을 받으면 올라서니 과실수 밭이 나온다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심어져 있는 밭을 지난다

가을의 정취

과실수 밭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오를수록 잡목의 저항이 심하다

반가운 현오님의 흔적을 만나고...

갈림길(13:17)

힘들게 잡목지대를 헤치고 올라오니 좌측에서 올라오는 능선 갈림길을

만나는데 면천면소재지에 있는 면천중학교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능선을 따라서 올라가니...몽산성 제8망루 추정치 안내판이 나온다

몽산성 제8망루 추정치(13:19)

성의 방어.감시.통신.지휘. 조망(眺望) 등을 위하여 구릉부에 설치하는 누각(樓閣)으로

포곡성 산성인 몽산성에는 지장대를 중심으로 양쪽 능선에 대칭으로 8개의 망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8망루 윗쪽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무 의자가 있어서 이곳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산성으로 추정되는 돌담 너머로 지난구간 내가 걸었던 능선을 바라본다

의자 앞에는 체험마당 성벽쌓기 안내판이 있다 

제7망루(13:23) 

234.2m봉(13:26)

편안한 안부 능선을 따라서 걷는다

제6망루 추정치(13:28)

우측으로 꺽어져 ...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성황당(城隍堂:13:31)

우리 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한다. 그 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州府縣)마다 서낭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는데, 특히 전주서낭이 유명하였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를 가봉하였던 일도 있었다

 

수호신으로서의 서낭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다. 조선시대의 서낭은 국행(國行)서낭과 민간에서의 서낭으로
나누어지는데 국행서낭은 호국(護國)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으며, 태종은 백악(白岳)서낭과 송악(松岳)서낭을
신도(新都)서낭으로 모셨고, 그 밖의 조선시대의 이름난 서낭으로는 해주·괴산·현풍·양산·신성(新城)·

밀양·전주·고성서낭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하려 하였는데, 서낭당의 형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서낭나무에 잡석을 난적(亂積)한 누석단이 있고, 이 신수에 백지나 청·홍·백·황·녹색 등의 오색 비단 헝겊을 잡아맨 형태,

② 잡석을 난적한 누석단 형태, ③ 서낭나무에 백지나 5색 비단 헝겊 조각을 잡아맨 형태,

 ④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형태, ⑤ 입석(立石) 형태 등이다 [Daum백과]

몽산사 주지 여공 법원의 글귀 

넓은 임도를 따라서 가니...

익살스런 목장승과...

돌탑 3기가 있는 시멘트 도로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2.2km 내려가면 면천면 소재지가 나온단다

시멘트 도로(13:33)

이정표와 국가지점번호 표지판이 서있다

국가지점번호란?

국토및 이와 인접한 해양을 격자형으로 일정하게 구획하여 지점마다 부여한 번호로

부여 기준은 100km 단위는 문자로 사용하고, 이하부터는 10km, 1km, 100m, 10m를

나눈 수를 연결하여 사용한다

☆다바 2554(가로 25540m) 7065(세로 70650m)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아미산(峨嵋山 349m)

충남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에 있는 산으로 충청남도 당진군 군내 최고봉이다. 아미산(峨嵋山)은

미인의 눈썹같이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며, 예전에는 소이산 또는 소미산으로도 불렀다.

당진시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남북으로 분수령을 이루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다불산이 뻗어있다.

 

예로부터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산으로, 아미산 신인(神人)이 중병에 걸린 중국 승상의 아들을

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남쪽 산자락에 면천읍성이 있고, 주능선에는 면천읍성의 외성이었다는

몽산성터가 남아 있다. 당진군(현 당진시)이 등산로 1,040m를 개설하고 약수터, 쉼터, 취사장, 삼림욕장

시설을 비롯해 아미산에서 다불산을 연결하는 구름다리 등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산행을 하기에 편리하다.

1997에는 정상에 2층으로 된 6각형 누각 아미정을 준공하였다.

 

면천초등학교 운동장에는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의 딸 영낭이 집 뜰에 심었다는 수령 약 1천100년 된

면천 은행나무(충남기념물 82) 2그루가 있다. 은행나무 뒤편에는 안샘(內井:일명 꽃샘)이 있는데, 영낭이

아미산에 핀 진달래꽃을 따서 안샘 물로 술을 빚어 아버지의 중병을 완쾌시켰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몽산성 제5망루 추정치(13:38)

약수터(13:42)

몽산으로 가는 길

능선으로 올라서니 보도블럭이 깔린 넓은 공터가 나오고 사각정자와 체육시설이 있다

아미산 방향으로 몽산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는 내성과 외성으로 이뤄진 몽산성이 있다

아미산이 이곳에서는 유명한 지 그쪽으로 띠지들이 많이 보이는데 신경수 선생께서는 아미산

방향의 산줄기를 아미단맥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몽산 1봉(13:47)

성(城)의 역사와 자료를 적은 내역의 표지판이 여럿 보인다

성(城)을 분류하는 내용의 표지판

몽산성과 면천읍성에 대한 자료 안내판

면천면에 소재한 문화재와 유물에 대한 자료

몽산 당산 기우제와 여단(厲壇)에 대한 안내판

여단(厲壇)이란 의학 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시절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거나

병이들어 객사(客死)한 뒤, 상주도 없이 구천을 헤매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위무(慰撫)하여 마을에 우환을 없게하는 제사, 즉 여제(麗祭)를 베풀던 곳이다

여단은 돌과 흙으로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으며 관(官)이 설주(說主)가 되었다.

미혼 남.여의 귀신이나 임자없는 귀신들이 나라와 백성들을 헤친다고 믿어

이들의 영혼을 달래 무서운 역질이나 재난을 막으려는데서 생겨난 신앙이다.

 

당진에는 이러한 여단이 2군데나 있다.

당진의 여단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당진현 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두리부근으로 추정되면 면천의 여단은「충청도읍지」면천군 편에‘군의 북쪽 3리에 있다’고

되어 있어 몽산 자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몽산성에서 아미산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몽산이 나온

사각정자 주위에서 시를 적은 안내판이 많이 보인

이곳 정자에서 휴식을 겸한 점심상을 펼치는데 식사라 봐야 빵 하나에 우유 하나이다. 

휴식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정자 윗쪽 능선이 몽산 정상이란다

진짜 몽산 정상의 모습

몽산(夢山:299m:13:48)

당진군의 중남부 면천면 성상리, 송학리와 순성면 성북리, 백석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몽산성(夢山城)'이라 불리기도 하며 조선 시대 면천군의 진산(鎭山)이었다. 북쪽으로 아미산(峨嵋山350m)과

이어지며, 북서쪽에 다불산(321m)이 있다. "몽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1,314척이다. 안에 2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면주(沔州)이던 때에 이곳에 관아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돌로 쌓은 성이 안팎에 있는데, 내성은 산의 정상부에, 외성은 바깥 약300m 지점에 있다.

남쪽 기슭에는 면천향교가 있고, 동쪽으로 남원천이 흐른다.

 

몽산의 산봉우리는 원래 뾰족했으며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하는데, 몽산의 산봉우리가 뭉툭하게 변한  것

전설에 의하면 "옛날 옛적에 아미산에는 용이 살고 몽산에는 지네가 살았는데 지네는 황량한 몽산과 달리

꽃이 만발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아미산을 시기해 마을 주민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미산 용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지네를 퇴치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는데 몽산 쪽으로

지네가 싫어하는 두꺼비 진액과 약쑥을 태워 날리기로 한 것이다. 이들의 계획은 적중했다.

두꺼비 진액과 약쑥에 고통스러워하던 지네는 결국 괴성을 내며 죽었고 지네가 죽자 몽산 산봉우리가

뚝 떨어져 나갔다고 전한다... 따라서 산봉우리가 지금처럼 뭉툭하게 되었다고 한다.

몽산의 정상에는 당진의 진산인 아미산과 그 주위의 산 안내도가 있다

몽산 정상의 선답자 흔적들

몽산에는 백제시대 퇴뫼식 산성인 몽산성이 있으며 망루의 흔적이 남아있다.

퇴뫼식 산성은 정상부 아레에 석축을 쌓아 만드는 산성인데 주변의 자연석을 이용했다.

산성 일대에는 마룻길이라고 불리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으며 몽산 계곡에는 저수지인 백곡지가 있다.

몽산성(夢山城)은 면천면 북쪽에 위치한 표고 295m의 몽산 정산부를 둘러싼

퇴미산성(백제시대 축성 추정)과 주변 5봉의 봉우리와 능선을 둘러싼 길이 5km의

포곡식 토성혼축 산성(조선 세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서쪽에 있는 문지의 약 50m 지점부터 추정,  남문지까지 약20m 까지 추정되고

남문지에서 동문지를 지나 약 500m지점까지는 토축으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석축이다

 

토루는 능선을 따라 성토하여 축조하였는데 기저부는 5m 내외이고 높이는 1m 내외이다

석축벽은 현재 높이가 약2m, 폭이 약7m로 역시능선을 따라서 축조하였다.

성의 동.서.남.북에는 각각 문지가 있고, 수구지도 있을 것으로 보이나 지형 훼손이 심하여

위치는 알 수 없고 망루지는 좌.우 대칭으로 각 4곳이 확인되었고, 몽산의 정상부는 500여평의

평탄한 지형이 있는데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와편(瓦片), 자기편(磁器片)으로 볼 때 몽산성은 면천읍성의 고성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치소(治所)가 있었던 자리

이곳은 백제, 고려, 조선시대 와편들이 있어 백제시대부터 치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방 50m 지점에도 건물터가 있어 군량과 무기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금을 내려서니 묘지가 있고...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13:58)

등로에서 바라본 당진시 면천면(沔川面)의 모습

면천(沔川)이란 지명은 ‘물이 가득 모여 바다로 흘러들어간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명칭은 조사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불리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시대 면천군과 당진현(‘현’보다 큰 지방단위가 ‘군’) 두 지역으로 나뉘어 있던 지역이

일제의 군현 통폐합정책에 따라 1914년 통합되면서 당진군 면천면으로 불리게 됐다. 
그 만큼 조선시대에는 면천군이 당진현보다 더욱 크고 발전도 잘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 증거가 면천면 성상리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면천읍성이다

양유리 공동묘지(14:03)

이곳부터는 면천면을 벗어나 온전히 당진시 순성면으로 들어선다

공동묘지를 따라서 내려간다

몽산 아래 돌탑 삼거리에서 헤어진 시멘트 도로를 다시 만나 우측으로 내려간다

사거리(14:08)

사거리에 있는 내포숲문화 안내판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숲으로 들어선다

내포문화 숲길 백제 부흥군의 길이란다

구절산으로 향하는 이정표도 있고...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올라간다

224m봉(14:15)

쉼터를 지나서 직진...

다시 오르막...조그만한 오르막길에도 산행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218.3m봉(14:18)

등로에서 바라본 면천면과 순원 저수지

안부(14:20)

구절산(九節山:238.9m:14:24)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와 봉소리, 성북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 정상에는 덕영이공과

부인 원주원씨 부부묘가 차지하고 있으며 지명의 유래는 산세가 아홉마디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구절산이라 부르는데 지도상에는 아무런 지명이 없는 곳이다

예전에는 봉황이 깃들어 있는 형국이라 하여 봉소산(鳳巢山)이 불리기도 했다.

옛부터 봉황이 있고 청룡이 아홉구비를 굽이치는 산세를 띠고 있어 오서산(烏棲山)과

함께 만대 영화지지(萬代 榮華之地)의 명당터가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산 기슭에는 창건연대를 알 수 없는 구절사지(九節寺址)가 있다.

구절산 주변에는 주민들을 애환을 간직한 미륵당과 당산이 있으며 백석리 남쪽으로

매봉재, 다람쥐산 등 토속문화가 서려있는 작은 산들이 보인다

구절산 정상에 있는 덕영이공의 묘

구절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다

NO82 송전탑(14:25)

송전탑을 지나 내려오니 우측으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부여서공 묘지가 나온다

성균관 대사성이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충숙왕대인 1308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대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 )·서무(西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

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으며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감하여 문묘종사(文廟從祀)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였다.

다시 임도로 내려온다

임도 삼거리(14:30)

편안한 임도를 만나 극락의 길을 걷는다...언제 지옥(가시밭길)의 걸을지는 몰라도...

육각정(14:40)

육각정과 체육시설이 있는 곳을 지난다

계속되는 편안한 길

컨테이너 하우스(14:43)

이동통신탑을 지나 급경사의 내리막길

좌측으로는 아미산이 계속 보이고...

등로에서 바라본 당진읍내의 모습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삼거리(14:48)

우측이 윗거문들이고 좌측은 화전소류지가 있는 성북리와 붕소리를 잇는 도로인데 맥길은 직진으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에...

거미줄의 심한 저항을 받는다

우측으로 꺽어져 맥길을 이어간다

자리공 풀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며 지맥길을 이어간다

104m봉(14:58)

조림지를 지나니...

안부(15:03)

안부 우측으로는 축사가 보이고...

공터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철지난 영지버섯

잡목의 강력한 저항을 피해서 밭 가장자리로 간다

다시 능선으로...

반갑구먼

거미줄이 많아서 개고생하면서 올라서니...이곳이 면산이란다

면산(142m:15:20)

아무런 자료가 없어서 그냥 통과

등로가 애매하다.... 좌측으로 내려선다

안부(15:27)

NO89송전탑(15:31)

등로가 아주 난해한 구간이다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등로가 아예없는 우측으로 내려선다

내가 아무 연고도 없는 당진땅에 와서 개고생을 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119.5m봉(15:40)

이 험한 곳에도 선답자들의 흔적이 보이는데...참으로 대단들 하셔 

등로가 너무 험하여 우측으로 살짝 돌아내려 오니 밀양박공 가족 묘지가 나온다

임도를 따라서 내려오니 도로가 보인다

615번 도로(15:52)

당진시 순성면 갈산리와 봉소리의 경계인 이곳에 615번 도로가 지나가고 고개 정상에

(주)하나이엔지 간판이 보이고 서해안 고속도로가 가까운 탓인지 생각보다 통행량이 많다

고개를 가로질러 올라서니 이곳 아랫쪽으로 송유관 파이프가 지나가는지 경고판이 많이 보인다

능선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이곳 역시 잡목의 저항이 상당히 거세다... 아직도 갈 길은 먼데 해는 해는 서산으로 넘어갈 채비를 한다

NO91 송전탑(15:59)

빛바랜 준,희 선생의 흔적

안부(16:01)

안부 우측으로는 공장이 보이고...

공장옆 절개지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곳 역시 지맥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오봉산이 보인다

생전에 천주교 신자였던 연안 김공묘를 지난다

밀양손씨 묘 능선 윗쪽으로 올라서니 넓은 임도가 나오고 오봉산 갈림길이 나온다

오봉산 갈림길(16:08)

오늘 산행구간에는 오봉산이 2개나 있는데 한결같이 맥길에서 떨어져 있다

지나온 오봉산은 맥길에서 많이 떨어져 포기했으나 이곳은 왕복 10분이면 갖다올

거리이건만 지금 상태로는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가야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어 조금을 올라 가다가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온다

임도사거리(16:11)

아직도 갈 길이 먼데 칡넝쿨의 저항이 심하다

우측으로 꺽어져 올라서니...

121m봉(16:17)

121m봉 아랫쪽에는 묘지들이 있다

묘지를 지나 잡목을 헤치고 나가니...좌측 아랫쪽에는 민가들이 보인다 

잡목을 헤치고 나오니 시멘트 도로가 나오는 고개가 있는데 왼쪽 성북교쪽에서

올라온 임도는 고개넘어 동미마을쪽으로 내려가고 바로 앞에는 잘 가꿔진 묘지가 있다 

묘지 뒷쪽을 지나...

아카시아 숲을 헤치고 내려선다

밭이 보이고...

콩밭과 초지인듯한 밭을 지나니...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들깨밭이 나오고...

116m봉(16:30)

이정표가 나오는데 숲속이라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괜스레 맘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국사봉(國賜峯:147.1m:16:38)

당진시 순성면 갈산리와 성북리, 송악읍 가교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육각정자와 체육시설이 있다... 대부분의 국사봉이 ‘스승 사(師)자를 쓰는데 이곳은

줄 사(賜)’를 쓰는게 특이하다.그런데 이 지역 사람들은 국사봉이 아니라 함박산이라 부르고 있다

국사봉을 찍고 가교리 방향으로 급하게 내려선다

내리막길에는 쉼터 의자도 보인다

삼거리(16:48)

삼거리에 있는 국사봉 안내판...이곳에는 함박산으로 되어있다

이곳부터 날머리까지는 길이 좋다

도로를 따라서 가니 이동통신탑이 보이고..,

갈산육교(16:58)

이 육교 아래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갈산육교에서 바라본 서해안 고속도로

갈산육교를 지나 시멘트 도로로 올라선다

시멘트 도로에서 바라본 몽산과 아미산의 모습

NO99 송전탑(17:03)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묘지 뒷쪽 능선으로 올라간다

조경업자가 소나무를 이식해 논 모양이다

133.7m봉(17:13)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이곳에 준.희선생의 표지판과 삼각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쉬운 맘을 달래며 임도로 내려간다

쉼터(17:17)

이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가야 지맥길이나 조경업자들이 마구 능선을

파헤쳐 놨고 올라섰다가 이내 내려오는 길이기에 그냥 임도를 따라서 걷는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걸어간다

N0 101송전탑(17:19)

차량이 한 대 지나간다... 차를 세우더니 산도 아닌곳에 늦게 다니냐고 하면서

태워주겠다면서 타라고 하는데 가야 할 길이 남아 정중히 사양한다

NO35 송전탑(17:25)

가교1리(17:33)

당진시 송악읍에 있는 가교리(里)는 기지시리의 남쪽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중앙에는 1958년에 준공한 송악 저수지[가교 저수지]가 있으며 유명한 신암산에 구예의 무덤과 보물

제987호인 신암사 금동 여래 좌상이 있으며 이 밖에 구서와 구예의 신도비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가재울, 굴냇골, 뒷골 마을 등이 있다. 가재울 마을은 삼다리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굴냇골 마을은 긴 골짜기 안에 자리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뒷골 마을은 신암 뒤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슬슬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다...이 근처에 신암사 금동여래좌상이 있건만 그냥 지나간다

당진 신암사 금동여래좌상(보물987호)

충남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 신암사(申菴寺)에 봉안된 고려시대 금동불좌상이다.

신암사(申菴寺)는 고려 충숙왕 때 능성구씨(綾城具氏)의 4대손인 구예(具藝), 이판전의사(二判典儀事))가

가교리에 터를 잡으면서 가문의 원찰(願刹)로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이때 주존불(主尊佛)로 봉안한 것이

바로 이 금동불상이라 한다.

 

전체크기 88㎝, 머리높이 23㎝, 무릎폭 60㎝에 전체적인 불상의 형태는 충남 서산의 문수사(文殊寺)

불상보다는 청양의 장곡사(長谷寺) 불상에 가깝지만 장곡사 불상보다는 좀더 당당하고 볼륨있는 상이다.

얼굴은 장곡사 불상과 흡사하지만 장곡사 불상과는 달리 좀 더 박력있고 양감있는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격의 없는 미소를 지고 있다. 상체(上體)는 장대하여 떡 벌어진 어깨, 묵중한 아랫배, 당당한 가슴 등 장곡사상

보다 한층 의젓하지만 젓가슴이 처진 표현(U형)은 장곡사상 계통이다.

 

길상좌(吉祥坐)로 앉아 있는 하체(下體)는 넓고 당당한 모습이며 특히 무릎의 탄력적인 근육묘사는 얼굴,

상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간략한 선조(線條)와 일정한 두께의 불의(佛衣)는 앞의 두 상(像)과 흡사하나

왼쪽 팔소매에서 옷자락이 무릎으로 내려온 것은 다르다. 또한 통견(通肩)으로 입은 오른쪽 어깨의 반달같은

대의(大衣) 자락, 왼쪽 어깨의 초생달모양과 옷깃표현, 두 필에서 휘어져 내려온 옷자락 등은 장곡사상과 거의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왼쪽 팔의 Ω형 주름, 승각기 또는 군의(裙衣), 나비형 때매듭, 승각기 치레 등에서도 유사함을 찾아볼 수 있다

가교길 삼거리(17:42)

오리골길 삼거리(17:45)

송악배수지(17:46)

우측 절개지가 맥길이나 그냥 도로를 따른다

송악배수지 입구에서 우측으로 향한다

송악배수지 앞에는 당진3동 둘레길 관광안내도가 있다

맥길을 점령하고 있는 민가...개쉬끼 여러마리가 난리부르스를 친다

좌측으로 당진공업사 정비공장이 보인다

기지시리 육교(17:50)

육교 아랫쪽에는 당진과 서산을 잇는 32번 국도가 지나간다

육교를 지나니 건널목이 나오고 삼거리 식당이 있는 샛길로 들어선다

가보자 맛집도 지나고...

송악수퍼와 한용목욕탕

송악읍 재향군인회 건물을 지나니 좁은 사거리가 나오고 직진을 한다

다시 삼거리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기지시 치안센터(17:58)

치안센터 맞은편에는 기지시우체국이 보인다

당진군 송악읍에 있는 기지시리(里)는 틀처럼 생긴 못이 있으므로 틀모시, 즉 기지시()라 하였다.

이곳 지형이 베틀[기()] 모양인데다, 짠 베를 담가 놓는 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못[지()], 그리고

이곳이 예전엔 교통의 요지로 시장이 서는 곳이었던 것에서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우체국 앞 세갈래 길에서 우측으로 향한다

미소야 카페를 지나니 로터리가 나오고 아침에 지나갔던 기지시 시외버스 정류소가 맥길이다

기지시 시외버스 정류장(18:05)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이 맥길이다...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매표소겸 수퍼에 들어가 서울가는 표를 예매하는데 표가 2장밖에 없다고 한다

서둘러 표를 예매하고 배가 너무 고파서 우유와 빵하나를 사먹고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서울가는 버스가 오고 있다

기지시 버스 정류장 시간표

기지시 → 센트럴 버스표

버스에 올라 잠을 청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던지 잠은 오지 않는다

오늘 버스도 서해안 고속도로가 막히는지 국도를 타고 오다가 평택에서

북천안I.C로 들어선 다음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오는데 생각보다

일찍 터미널에 도착한다(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