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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山經表

대동여지도는 어떤 지도인가?

by 범여(梵如) 2018. 10. 25.

  • 글·양보경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국토의 모습을 국민도 알아야 한다’는 사상의 표현
역사, 지리정보 고스란히 담은 한국학의 보고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고지도, 나아가 우리나라 지리학의 대명사로 인정받는 고전이다.
대동여지도는 현재 국내외에 30여 종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성신여대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동여지도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고지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 관해 잘못 알려진 사실도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
가장 자세하고 가장 큰 지도, 국가의 무관심 속에 김정호 개인의 힘으로 만든 지도,
그 이전에는 훌륭한 지도가 없었던 획기적인 지도,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하며 백두산을
일곱 차례나 오르면서 만든 지도, 그러나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 하여 결국 김정호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국가에 의해 불태워진 지도라는 것이다.

▲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북피아양계만리임람지도.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외에도 많은 지도와 지리지를 편집, 제작한 훌륭한 지리학자,
지도학자였으나 이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대동여지도를 실제로 본 사람도 많지 않다.
대동여지도를 일반 집의 벽에 걸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지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대동여지도가 아닌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대동여지도라고 소개하고 있는 책, 표지판이 수없이 많다.

대동여지도는 과학작품이자 예술작품이다. 과학과 문화의 소산물이며, 동시에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동여지도도 조선 후기 사회의 과학, 학문, 예술의 축적 위에 서 있다.
먼저 대동여지도가 탄생되기까지의 조선 후기의 지도 제작과 지도 발달의 흐름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대동여지도의 선조들

16~17세기에 조선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전란, 중국의 명과 청의 왕조 교체,
일본의 도쿠가와 바쿠후의 성립 등 국내외 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해야 했다. 전란 후의 복구와
사회체제의 정비에 힘입어 18세기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농업 생산력 증대, 유통경제의 활성화,
지역 간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17세기 이후 중국을 통한 서양지식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학문의 세계에도 성리학의 내적 성숙은
물론, 새로운 사상적 조류들이 싹텄다. 실학의 등장과 실학자들의 활약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지리학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지리지와 읍지의 편찬과 함께 실학적 지리학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었다. 전
란 후 군사시설의 복구, 왕도(王都)인 서울의 방어를 위해 진보(鎭堡), 성곽, 산성, 관방시설의 수축과 신설이 활발했다.
이에 따라 군사지도, 즉 관방지도(關防地圖)의 제작이 많았다. 고산자 김정호는 청구도 범례에서 뛰어난
지도제작자로 17세기 인물인 윤영(尹鍈), 황엽(黃曄) 등을 언급했다.

17세기 후반 이후 청나라와의 사이에 북쪽 변경 문제가 새로운 국가 간의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북방 접경지역에 대한 지리정보의 수집을 바탕으로 북쪽 국경지역을 그린 군사지도들이 활발하게
제작되며 지도 제작의 수준을 높였다. 18세기에 유행했던 요계관방지도(遼防地圖),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류의 지도들은 만주 일대를 포함한 대표적인 관방지도다(1).

18세기는 지도와 지리지에 남다른 관심을 지녔던 영조와 정조의 관심 하에 많은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이와 함께 민간에서도 정교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지도가 농포자(農圃子)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그린 동국지도(東國地圖)다. 조선 초 대학자 정인지의 후손이자 당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 등과 교분이 있었던
그는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북쪽 압록강과 두만강 유로 부분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지도를 만들었다.
특히 지도에 백리척이라는 축척을 직접 표시해 18세기 최고의 지도로 손꼽히는 동국지도를 제작했다(2).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조선 전도와 팔도의 도별도로 구성된 지도였으며, 이후 1770년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지도(輿地圖) 제작 사업의 바탕이 되는 등, 중앙 정부 차원에서도 적극 활용해 조선 후기의 지도 제작술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 후기 지도 발달사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지방 각 군현을 단위로 한 군현지도의 활발한 제작이다.
군현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다.
16세기 이후 꾸준하게 편찬된 각 지방 지리지인 읍지에 첨부된 군현지도와 함께 조선 후기에는 개별
군현지도의 제작이 급증했다. 18세기 이후에 전개된 군현지도의 활성화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발달과 어우러져 예술성이 뛰어난 회화식 지도를 발달시켰다. 회화식 지도는 지역의 정보와 지역의
감성을 예술로 승화시켜 예술적 지도 유형을 형성했다.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정상기의 동국대전도. 보물 제1538호다.
또한 전국 각 지방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모든 군현의 지도를 지도책이나 지도첩의
형태로 구성한 전국 군현지도집(郡縣地圖集)의 제작이 활발했다. 군현지도집은 한 도(道)의
모든 군현, 나아가 전국의 모든 군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지역에 대한 종합적이고
균형적인 이해와 파악을 위한 노력을 반영한다. 군현지도 제작의 주체도 이전 시기에 비해 다양화되었다.
이전에는 국가, 관청, 특수한 직임을 맡은 관리들이 주로 지도를 제작하고 이용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의 학자들도 지도의 제작과 이용에 참여했다.

군현지도들은 회화식으로 그려진 것과 가로 세로 눈금인 경위선표에 그린 두 종류로 나뉜다.
회화식 군현지도들은 군현 자체에서 제작된 읍지도에 기초한 것으로 군현의 독자성과 회화성이 높았다.
반면 방안 위에 그려진 경위선표식 군현지도는 대축척의 전도를 기초로 하며 각 군현별로 통일된 지도 제작
기준이 적용된 것이다. 이것은 좀더 정확한 조선전도의 발전에 기초해 탄생될 수 있었다.

19세기 정확한 조선전도의 제작은 특히 1리, 10리, 20리를 기초로 제작했던 18세기의 경위선표식
군현지도들에 힘입었다. 경위선표식 군현지도집은 비교적 일정한 크기의 방안을 바탕에 그림으로써
방안을 통해 축척을 적용해 그린 군현지도 모음집이다. 지역의 크기에 따라 군현마다 지도의 크기가
모두 다른 지도가 되며, 지도첩(地圖帖) 형태로 제작된 것이 많다. 이른바 ‘비변사지도(備邊司地圖)’로
알려져 있는 영남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등 도별 군현지도집(道別 郡縣地圖集)이
이 유형의 대표적인 지도다. 이 지도는 1리 방안을 그리고 그 위에 지도를 그렸는데, 방안의 크기는
7.0~8.5mm 내외다. 따라서 방안의 크기로 축척을 나타냈으니, 약 1:53,000~1:64,000의 대축척지도다.
1747~1750년(영조23~26)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들은 지도 뒷면에 ‘비변사’인이 있어
조선후기에 국정을 총괄했던 비변사에서 제작해 소장했던 지도로 추정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조선지도(朝鮮地圖)(7책, 3),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3책),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3책), 팔도지도(八道地圖)(8책) 등은 20리 방안에 그린 지도집이다.
이 지도집의 군현지도는 20리 방안 위에 그렸으므로 1리 방안지도보다 크기가 작고 내용이 상세하지 않다.
그러나 전국의 각 군현의 지도를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책자에 그려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도책이다.

20리 방안 위에 그려진 군현지도집의 가장 큰 장점은 전국의 모든 군현지도를 동일한 축척으로 그린 점이다.
이로써 군현지도들 사이의 분합(分合)을 가능하게 하며, 전국의 각 군현 지도를 연결시켜 지역별, 도별,
나아가 전국지도로 합해 볼 수 있고, 나누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축척을 가진 군현지도들은
대동여지도와 같은 대축척 전국지도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방안지도를 활용한 군현지도집의 제작은 지도를 통한 지역 인식과 파악의 진전, 그리고 행정적 파악의
객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 20리 눈금 위에 그린 조선지도 중 광주지도.
김정호가 제작한 전도들, 즉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모두 10리를 기본으로 한 경위선표식 지도라 할 수 있다.

김정호의 지도와 지리지

조선 후기의 지도 발달의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 지도학의 대미를 장식한 지도제작자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다. 그러나 김정호는 단순한 지도제작자를 뛰어넘는 탁월한 지리학자였다.
김정호는 1830~1840년대에 조선전도인 청구도과 서울지도인 수선전도을 제작하고, 전국지리지인
<동여도지>를 편찬했다. 또 지구전후도를 최한기와 함께 판각했다. 1850년대인 철종대에 전국지도인
동여도를, 전국지리지인 <여도비지>를 최성환과 함께 편집하고, 1850년대 말부터 1860년대 초에 전도인
대동여지도와 전국지리지인 <대동지지>를 편찬했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志)를 일체로 보았으며, 국가 경영의 근본 자료임을 강조했다.
그의 지도제작과 지리지 편찬이 학문탐구나 개인적 취향에서가 아니라 치국과 관련한 현실적,
실용적 목적이었음을 알게 한다. 국가의 경영과 관련되므로 지도는 정확해야 했으니, 그는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기존 지도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노력했다.

<동여도지>(20책 중 17책 영남대 도서관 , 2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체제와 내용을 기본으로 한 후 김정호가 섭렵한 많은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비교·인용함으로써 자료 수집에
노력한 고산자 지지의 초기 형태다. <동여도지>는 지역별 지지 외에 ‘역대주현’, ‘역대강역’, ‘역대풍속’, ‘역대관제’,
 ‘정리고’가 수록되어 역사지리적인 내용과 도로에 관련된 내용이 첨가되었다.

최성환(崔煥)과 김정호가 함께 편찬한 <여도비지>(20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는 내용의 압축과
간략한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이 지지에서 주목되는 것은 각 도의 첫머리에 정리되어 있는 호구, 전부,
강역표, 극고표(極高表), 방위표(方位表), 군전적표(軍田籍表) 등의 군현별 통계표다.
특히 그의 지도 제작에 참고가 되었다고 보이는 전국 각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표로 정리한 극고표와
방위표는 다른 지지나 지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록으로 주목된다(5).

<대동지지>(15책, 고려대 도서관 소장)는 김정호의 일생의 집념과 노력이 결집된 지지다.
〈대동지지>에는 성숙된 지리학자로서의 그의 자세와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대동지지>는 각 도별 군현 지지를 앞에 두고, 후반부에 산수고(山水考), 변방고(邊防考),
정리고(程里考), 방여총지(方輿總志, 歷代志) 등을 수록했다. <대동지지>의 체제는 <동여도지>의 것을
 한층 발전시킨 형태로서 <동여도지>의 내용에 산맥과 하천, 국방 문제 등을 강화한 것인데,
이 두 부분은 전하지 않는다.

<동여도지>와 <대동지지>의 체제는 이전의 전국지리지나 읍지에서 예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 방식이다.
즉 각 지역 단위로 지역의 성격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지와, 강역·도로·국방·산천 등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킨
형태로서 주목된다. 이는 조선 전기의 전국지리지 편찬과 조선 후기의 읍지 편찬의 맥을 계승한 후 조선 후기에
새로 꽃피운 실학적 지리학의 연구 성과를 지리지라는 틀에 종합해 집대성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현대지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지역지리학의 연구방법과 계통지리학적인 연구 방법을 결합해
완벽한 지지를 만듦으로써 국토를 좀더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틀을 <대동지지>에서 정립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김정호의 독자적인 견해가 정리되어 있는데, 연혁, 지명, 산천, 도로 등에서 드러난다. 또한 철저한
사실성에 기초해 분명하지 않은 내용은 과감하게 삭제하고, 항목을 조정했다. 또한 실학적 지리학의 대두와
발전은 상업·유통 경제의 발달 등 국내의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와 그와 관련된 국토 공간 구조의 변화에
바탕한 것이기 때문에, 실학적 지리학을 지리지에 접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변모되고 있던 사회, 경제,
공간 구조를 반영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

▲ 국립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여도비지> 경기도 극고표.
김정호가 만든 첫 번째 전국지도가 청구도(1834년)다.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구획해 만든 방안지도로서, 당시까지 제작된 조선전도 중 가장 큰 지도다. 각각의 방안은 동서 70리,
남북 100리이며, 이것이 지도책의 한 면을 이룬다. 이에 따라 청구도는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그렸던
이전의 군현지도책에서 보이는 축척의 불일치나 도면 넓이의 차이를 극복했다.

또한 방안을 지도 안에 그리지 않고 도곽선에 10리 눈금을 표시함으로써 방안으로 인한 번잡함을
피할 수 있고 도면 외곽의 눈금에 의해 거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각 군현에는 호구·전결·곡총·군병
등의 기초적인 자료가 주기되어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양식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각 군현의 경계가
그려져 있어 군현의 영역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김정호의 두 번째 전국지도 작품으로 추정하는 동여도(東輿圖)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1857년(철종 8)경에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해 대동여지도 저본을 삼았던 것으로 추정하며, 일부에서는 대동여지도 제작 이후
모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동여지도와 거의 유사하나, 목판본인 대동여지도와 달리 아름다운 채색
필사본 지도이며, 설명과 7,000여 개의 지명이 첨가되어 있고, 산맥의 표현법 등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다.

김정호는 1861년에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간행했다. 대동여지도의 표지에는 ‘當十二年辛酉 古山子校刊
(당저십이년신유 고산자교간)’이라고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명기했다. 1861년(철종 12)에 고산자(古山子)가
만들었음을 김정호의 자호(自號)로 나타낸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當元年甲子(당저원년갑자)’년(1864)에 재간되었다.

그런데 현전하는 1861년 초간본들을 비교 검토해 보면, 계속 수정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평안도 의주 남쪽의 신미도 섬을 예로 들어 보자. 신유본 중에도 가장 초기본으로 추정되는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해좌여도에는 섬만 그려져 있고, 섬이름 등 글씨가 없다.
그러나 보물로 지정된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대동여지도에는 섬이름이 추가되었다.
이보다 후기본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섬이름과 목장 표시가 추가되었다(5, 6, 7).
이는 지도의 오류를 시정하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김정호의 열정과 집념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다.
현존 전국지도 중 최대

대동여지도는 전국지도(全圖)다. 지도의 유형을 나눌 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지도에 포함된
대상 지역의 범위에 따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나눈 지도의 유형에는 세계를 그린 세계지도(또는 天下圖),
한 나라 전체를 그린 전국지도(全圖), 도를 단위로 그린 도별지도(道別圖), 군현 및 그 하위 지역을 그
린 분도(또는 군현지도), 외국을 그린 외국지도, 주요 도시를 그린 도성도, 궁궐·관청을 그린 궁궐도
(宮闕圖)·관아도(官衙圖), 군사지역과 변경지역을 그린 군사지도인 관방지도(關防地圖), 기타 특수도 등이 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국을 대상으로 그린 전도다. 전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지도이므로,
다른 어느 유형의 지도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지도로서 의의를 지닌다. 우리나라 전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우리 국토를 어떻게 표현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도가 바로 전국지도이기 때문이다.
전국지도는 여러 유형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된다. 그러므로 각 유형의 지도의 종합이며, 제작 당시
지도학의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동여지도는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큰 지도다. 대동여지도는 전체를 펼쳐 이으면 세로 6. 6m
가로 4.0m에 이르는 대형지도로 적어도 3층 높이 이상의 공간이 있어야 걸 수 있다(8).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대동여지도를 상설 전시해 놓은 곳이 거의 없다. 높이 7m 이상의 공간을 갖춘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동여지도를 잘 볼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 1 성신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해좌여도의 신미도. 2 성신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여지도의 신미도. 3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여지도의 신미도.
이렇게 지도가 크기 때문에 웬만한 책자에는 대동여지도를 수록하기가 힘들었다.
책에 수록하려면 지도가 너무 축소되기 때문에 내용과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사진 촬영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책에는 대동여지도의 부분만을 수록했으며,
이 또한 대동여지도의 전모를 보기 힘들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1925년 10월 8, 9일자 동아일보는 김정호에 관한 기사를 싣고, 기사 끝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대동여지도의 출판을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김정호를 위대한 영웅으로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조선광문회에서 대동여지도를 보급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1910년에 설립된 조선광문회는
 빼앗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 구래의 문헌 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료를 수집, 편찬, 개간하여 귀중한 도서를 보존, 전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니,
대동여지도의 출간 의도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으며, 193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3분의 2로 축소한 대동여지도의
영인본을 간행한 것이 최초의 고지도 영인사업이었다. 이후 대동여지도는 여러 차례 영인 간행되었다.
판매, 간행한 영인본의 경우 모두 원본 크기의 대동여지도가 아니라 3분의 2로 축소된 모습이었다.
축소본 대동여지도의 경우 지도의 면적은 원본 지도의 44.4%, 즉 원본의 반에도 못 미치는 크기여서
 원본의 위용을 제대로 맛볼 수 없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대동여지도, 목판에 조각한 아름다운 국토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목판으로 간행한 목판본 지도, 즉 인쇄본 지도라는 점이다.
물론 15세기부터 목판본 지도가 우리나라에서도 제작되었다. 신숙주가 1471년(성종 2)에 지은
<해동제국기>에 포함된 일본 및 유구국 지도가 현전하는 최고의 지도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1531년)에 수록된 팔도총도를 비롯한 9장의 지도도 목판본지도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된 지도가 아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간행 이후 민간에서 이 유형의 지도만을 따로 모아 지도책들을 많이 만들었고,
이들 중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동국지도나 조선 후기에 유행한 지도책 등 목판본도 많은 수에 달했다.
또한 18세기 이후에는 지도 수요의 증가에 따라 목판본 지도가 증가했다. 특히 서울지도에서 목판지도의
제작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목판지도의 증가는 서울 지도뿐만 아니라 전국지도, 군현지도 등 지도의
여러 유형에서 다함께 일어났다.

목판지도는 지도의 보급과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다. 대동여지도는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대형 목
판본 전국지도였다. 대동여지도 이전에 목판본 전국지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의 대표적인
목판본 전국지도로 세로 길이 100cm 정도의 해좌전도(海左全圖)나 길이 140cm 정도의 팔도전도(八道全圖)
등이 있다. 이러한 크기의 전국지도는 벽에 걸어 놓고 한눈에 우리나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작
은 크기의 지도에 각 지역의 산, 하천, 역원 등 상세한 내용은 담기가 어렵다.

인쇄본으로 만들 경우 가장 큰 장점은 많은 수의 지도를 찍어낼 수 있어 지도의 보급이 용이하고,
지도를 대중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자세한 지도들은 많았으나 그 지도들은 필사본으로서
제작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또 내용이 상세하고 풍부한 지도일수록 일반 국민들에게는 접근이
어려운 관청이나 궁중에 소장되어 있었다.

▲ 보물 제850호로 성신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여지도 22층 전체를 연결시킨 모습. 세로로 약 7m에 이른다.
고산자 김정호는 방대한 크기의 대동여지도를 목판으로 인쇄했다.
그러므로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지도를 접하기 어려웠던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대동여지도는
획기적인 지도였을 것이다. 대동여지도가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목판본 지도여서
여러 본을 찍을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호는 1834년에 전국지도인 청구도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청구도는 목판본이
아닌 필사본 지도책이었는데, 김정호가 27년에 걸쳐 수정해 만든 발전된 지도가 대동여지도였으며,
청구도에 비해 획기적으로 개선한 점이 바로 목판본의 형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에서 지도가 소수의 정치가, 관리, 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김정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국민들도 국토의 각 지역에 대한 정보를 가져야 하며, 국토의 모습을 담은
지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고 전달되어 국민의 교양으로 뿌리내려야 함은 물론, 국가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지도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중앙이나
지방 관청에는 상세하고 정확한 지도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지도는 일반인들은 볼 수도,
이용할 수도 없었다. 김정호는 정밀한 지도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욕구와 변화를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했던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서울 목판지도의 백미로 꼽히는 수선전도를 목판본으로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대동여지도는 목판본 지도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춘 지도다. 내용상의
풍부함 위에 목판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선명함, 그리고 힘을 지녔다. 정밀한 도로와 하천, 정돈된
글씨와 기호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있는 산줄기의 조화와 명료함은 다른 어느 지도도 따를 수 없는
판화로서의 뛰어남을 지니고 있다(10). 고산자 김정호는 위대한 지도학자이자 훌륭한 전각가이며 예술가였다.

대동여지도, 10리 축척의 전국지도

큰 지도가 좋은 지도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흔히 조선 후기의 지도학의 성과로 손꼽는 것이
대축척지도(大縮尺地圖)의 발달이다. 지도는 지표면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일정한 크기로
지표 현상을 줄여서 나타내는데, 이 줄인 비율, 즉 지도상의 거리와 지표상의 실제거리의 비율을 축
척이라 한다. 대축척지도란 현실을 될수록 크게 종이에 나타낸 지도이며, 소축척지도는 많이 줄여서
현상을 작게 표현한 지도다. 대축척지도의 제작이 어려운 것은 지도가 커지는 만큼 그 안에 채워야
할 내용이 많으며, 정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는 지도에 축척을 명시한 축척지도(縮尺地圖)이며,
경위선표식 지도다.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여지도 목판 함경도 갑산 부분.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이전 지도에서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축척을 표시했다.
대동여지도 제1첩에 원고지같이 눈금이 그려져 있는 면이 보인다. 가로 8개, 세로 12개의
눈금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지도 한 면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 제목이 쓰여 있지 않다.
이를 오늘날 ‘방괘표’ 또는 ‘방격표’라고 부른다. 이 한 개의 눈금(方眼)에 ‘매방(每方) 10리’라고
기록해 눈금 하나가 10리임을 명시했다. 또 ‘매편(每片) 종(縱) 120리 횡(橫) 80리’라고 기록해
지도 한 면(片)의 동서 길이가 80리 남북 길이가 120리임을 나타냈다(10). 하나의 눈금, 즉 10리가
2.5cm이고, 지도 한 면이 동서로 80리이므로 20cm, 세로로는 120리이므로 30cm가 된다.
지도상에서 축척은 일반적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데 사용된다. 대동여지도는 한 면이 120리 80리로서
쉽게 거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축척은 지도 내용에도 표시되었다. 즉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거리, 축척 표시방법은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다. 특히 도로상의 10리
점은 그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평탄한 평야지역에서는 10리 간격이 멀게, 산지가 있는 곳에서는
10리 간격이 가깝게 표시되었다. 이는 10리 간격의 점이 지도의 축척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지형적인 조건을 알려 주며, 지점과 지점 간의 직선거리가 아닌 도로상의 거리를 표현한 것임을 알게 한다.
실제 지도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편리한 지도다.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얼마인가? 이는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쟁점이다.
대동여지도의 축척에 관한 이견은 1리를 오늘날의 거리 단위로 환산하는 데서 연유한다.
오늘날 우리는 10리를 4km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일제시기 일본의 거리 단위가 도입된 이후의 일이다.

19세기 후반, 즉 대동여지도를 만들던 당시의 10리가 오늘날의 거리 개념으로 얼마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당시의 10리를 약 4.2~4.6km로 보는 견해와 5.4km로 보는 견해다. 10리를
4.5km로 보게 되면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1:165,000 정도가 되며, 10리를 5.4km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축척은 1:216,000이 된다.

1:160,000 계열의 축척을 주장하는 견해는 지도의 크기와 실제 지표면의 크기를 대비해 축척을
계산한 것으로, 면적·지점 간의 거리 등으로 계산한 것이다. 216,000의 축척은 경위도 1도의 거리
관계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축척이 실제 지표상의 거리를 지도상에 어떤 비율로 줄여
나타냈는가 하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1:165,000 계열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18세기에 만든 군현별 지도인 ‘비변사지도(備邊司地圖)’는 1:50,000~80,000의 축척을 지닌
경위선표식 지도로, 이 지도를  이으면 대동여지도보다 더 큰 우리나라 지도가 된다.
그러나 이 지도는 군현지도였지 전국지도는 아니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지도 중에서
가장 크고 자세한 지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전국지도 중에서 가장 큰 대축척지도다.

분첩절첩식 형태의 편리한 지도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국지도이면서 그 형태상의 편리함으로 감탄받았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형태로 만들었다. 이 점은 대동여지도에 앞서
1834년(순조 34)에 김정호가 완성했던 전국지도인 청구도(靑邱圖)와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해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도록 구성된 전국지도다. 1층(첩)의 지도는 동서로 80리 간격으로
구분해 1절(折 또는 1版)로 하고, 1절을 병풍 또는 아코디언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
지도를 만들었다. 22첩을 남북으로 연결하면 전체가 되며, 하나의 첩(帖)은 다시 절첩식으로
접혀져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형태다.

▲ 대동여지도 제1첩의 방격표이며 온성 부문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분첩절첩식 지도는 연결해 보거나 보관, 열람에 매우 편리하다. 일부분이 필요할 경우
일부분만 뽑아서 휴대하며 참고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강릉까지 여행을 할 경우
지도 전체를 가지고 갈 필요 없이 서울에서 강릉까지 수록된 제13층 지도만 뽑아서 가지고 가면 된다.
또한 절첩식 지도의 장점은 부분으로 자세히 볼 수 있고, 서로 이어 볼 수 있어 분합(分合)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렇게 큰 지도를 한 폭의 족자로 만들 경우, 세로 6.6m 가로 4.0m 정도의 큰 지도가 되어 가장자리의 지명만
읽을 수 있고 대부분의 중심부에 있는 지명은 읽기 어렵다. 또 책자로 만들었을 경우 넓은 지역을 한 번에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분첩절첩식 지도는 필요한 부분을 선택해 연결함으로써 대형지도가
지니는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대동여지도, 지리정보의 보고

<지도학사 The History of Cartography> 시리즈의 한국편을 집필한 레드야드(Gari Ledyard) 교수는
대동여지도를 한국의 지도 중에서 가장 지도학적으로 우수한 지도라고 평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려 온
동양 지도의 지지(地誌, text)적인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우리나라의 지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을 지도의 여백이나 지도 안에 기록해 많은 정보를 주고자 했던 전통이 강했다. 김정호가 앞서 만들었던
전국지도인 청구도에도 이러한 전통이 강하게 반영되어, 군현명 옆에 인구, 전답, 군정(軍丁), 곡식, 별칭,
군현품계, 서울까지의 거리 등을 써 넣어 지도가 복잡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글씨를 가능한 한 줄이고, 표현할 내용을 기호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확립해 현대 지도와 같은 세련된
형식을 보여 주었다.

이를 위해 ‘지도표(地圖標)’라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는 지표상의 각종 현상을 지도상에 어떤 기호로
표현했는지를 그려 놓은 것으로 현대 지도의 범례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14개 항목 22종이 표시되었다.
 예를 들어 능(陵), 역(驛,) 창(倉), 방리(坊里), 산성(山城), 진보(鎭堡), 고현(古縣) 등의 경우 공통된
어미를 지도에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즉 문수산성의 경우 산성 표시 기호를 그리고 ‘문수’라고만
기록해 글자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대동여지도에는 총 1만1,000여 개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글자 수를 줄인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이 지도의 내용과 표현상 가장 큰 특징은 산과 물의 특징적인 표현과 분별성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이 가장 강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이유는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하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줄기를 가늘고 굵게 표현함으로써
산의 크기와 높이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사람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형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분수계(分水界)와 산줄기가 이를 통해 명료하게 드러난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대간(大幹)을 가장 굵게 나타냈으며, 다음으로는 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큰 강을 나누는 정맥(正脈)을
굵게 그리고, 정맥에서 갈라져 나가 큰 내를 이룬 줄기를 그 다음으로 굵게 표현하는 등 산줄기의
위계에 따라 굵기를 달리했다. 이는 조선 시대 사람들이 지녔던 산천에 대한 인식체계를 지도화한
것으로, 지도의 사상적인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지도 속에는 당대인들의 국토관, 세계관 등이 담겨 있다.
대동여지도의 산천 표현을 통해 우리는 지도의 중요한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산맥 표현은 풍수나 묫자리를 그린 산도(山圖)에서도 보였지만 이를 지도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은 대동여지도다. 대동여지도가 고전(古典)인 이유를 여기에서도 본다.

대동여지도의 장점은 많지만 주목되는 내용이 도로, 군현의 경계 표시, 봉수, 역원, 1,100 여 개에
달하는 섬(島嶼), 목장, 그리고 앞서 언급한 역사지리적인 옛 지명들이다.
특히 대동여지도에는 봉수(烽燧), 능침(陵寢), 역참(驛站), 창고(倉庫), 고개 등과 현재의 주요 현상은
물론 옛 현(古縣, 옛 읍터), 옛 진보(鎭堡), 옛 산성(山城) 등 당시에는 이미 사라진 역사적인 흔적,
그중에서도 군사, 역사적인 유적을 세밀하게 표시해 놓았다. 또한 군현의 경계선을 그려 놓아
조선시대의 군현의 경계 등 행정구역의 복원은 물론, 각 지역의 고대로부터의 옛 모습을 알고자
할 경우 대동여지도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더욱이 다른 문헌이나 지도에 없는 정보들을 표시해
한국학의 보고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