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양보경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 ‘국토의 모습을 국민도 알아야 한다’는 사상의 표현
역사, 지리정보 고스란히 담은 한국학의 보고
-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고지도, 나아가 우리나라 지리학의 대명사로 인정받는 고전이다.
- 대동여지도는 현재 국내외에 30여 종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성신여대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대동여지도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고지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 관해 잘못 알려진 사실도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 - 가장 자세하고 가장 큰 지도, 국가의 무관심 속에 김정호 개인의 힘으로 만든 지도,
- 그 이전에는 훌륭한 지도가 없었던 획기적인 지도,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하며 백두산을
- 일곱 차례나 오르면서 만든 지도, 그러나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 하여 결국 김정호를 죽음으로
- 몰고 갔으며, 국가에 의해 불태워진 지도라는 것이다.
- ▲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북피아양계만리임람지도.
-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외에도 많은 지도와 지리지를 편집, 제작한 훌륭한 지리학자,
- 지도학자였으나 이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대동여지도를 실제로 본 사람도 많지 않다.
- 대동여지도를 일반 집의 벽에 걸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지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 대동여지도가 아닌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대동여지도라고 소개하고 있는 책, 표지판이 수없이 많다.
대동여지도는 과학작품이자 예술작품이다. 과학과 문화의 소산물이며, 동시에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동여지도도 조선 후기 사회의 과학, 학문, 예술의 축적 위에 서 있다.
- 먼저 대동여지도가 탄생되기까지의 조선 후기의 지도 제작과 지도 발달의 흐름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대동여지도의 선조들
16~17세기에 조선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전란, 중국의 명과 청의 왕조 교체, - 일본의 도쿠가와 바쿠후의 성립 등 국내외 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해야 했다. 전란 후의 복구와
- 사회체제의 정비에 힘입어 18세기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농업 생산력 증대, 유통경제의 활성화,
- 지역 간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17세기 이후 중국을 통한 서양지식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학문의 세계에도 성리학의 내적 성숙은 - 물론, 새로운 사상적 조류들이 싹텄다. 실학의 등장과 실학자들의 활약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 지리학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지리지와 읍지의 편찬과 함께 실학적 지리학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었다. 전
- 란 후 군사시설의 복구, 왕도(王都)인 서울의 방어를 위해 진보(鎭堡), 성곽, 산성, 관방시설의 수축과 신설이 활발했다.
- 이에 따라 군사지도, 즉 관방지도(關防地圖)의 제작이 많았다. 고산자 김정호는 청구도 범례에서 뛰어난
- 지도제작자로 17세기 인물인 윤영(尹鍈), 황엽(黃曄) 등을 언급했다.
17세기 후반 이후 청나라와의 사이에 북쪽 변경 문제가 새로운 국가 간의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 이에 북방 접경지역에 대한 지리정보의 수집을 바탕으로 북쪽 국경지역을 그린 군사지도들이 활발하게
- 제작되며 지도 제작의 수준을 높였다. 18세기에 유행했던 요계관방지도(遼防地圖),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 (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류의 지도들은 만주 일대를 포함한 대표적인 관방지도다(1).
18세기는 지도와 지리지에 남다른 관심을 지녔던 영조와 정조의 관심 하에 많은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 이와 함께 민간에서도 정교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지도가 농포자(農圃子)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 그린 동국지도(東國地圖)다. 조선 초 대학자 정인지의 후손이자 당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 등과 교분이 있었던
- 그는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북쪽 압록강과 두만강 유로 부분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지도를 만들었다.
- 특히 지도에 백리척이라는 축척을 직접 표시해 18세기 최고의 지도로 손꼽히는 동국지도를 제작했다(2).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조선 전도와 팔도의 도별도로 구성된 지도였으며, 이후 1770년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 여지도(輿地圖) 제작 사업의 바탕이 되는 등, 중앙 정부 차원에서도 적극 활용해 조선 후기의 지도 제작술 발전의
-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 후기 지도 발달사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지방 각 군현을 단위로 한 군현지도의 활발한 제작이다. - 군현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다.
- 16세기 이후 꾸준하게 편찬된 각 지방 지리지인 읍지에 첨부된 군현지도와 함께 조선 후기에는 개별
- 군현지도의 제작이 급증했다. 18세기 이후에 전개된 군현지도의 활성화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 발달과 어우러져 예술성이 뛰어난 회화식 지도를 발달시켰다. 회화식 지도는 지역의 정보와 지역의
- 감성을 예술로 승화시켜 예술적 지도 유형을 형성했다.
-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정상기의 동국대전도. 보물 제1538호다.
- 또한 전국 각 지방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모든 군현의 지도를 지도책이나 지도첩의
- 형태로 구성한 전국 군현지도집(郡縣地圖集)의 제작이 활발했다. 군현지도집은 한 도(道)의
- 모든 군현, 나아가 전국의 모든 군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지역에 대한 종합적이고
- 균형적인 이해와 파악을 위한 노력을 반영한다. 군현지도 제작의 주체도 이전 시기에 비해 다양화되었다.
- 이전에는 국가, 관청, 특수한 직임을 맡은 관리들이 주로 지도를 제작하고 이용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 민간의 학자들도 지도의 제작과 이용에 참여했다.
군현지도들은 회화식으로 그려진 것과 가로 세로 눈금인 경위선표에 그린 두 종류로 나뉜다. - 회화식 군현지도들은 군현 자체에서 제작된 읍지도에 기초한 것으로 군현의 독자성과 회화성이 높았다.
- 반면 방안 위에 그려진 경위선표식 군현지도는 대축척의 전도를 기초로 하며 각 군현별로 통일된 지도 제작
- 기준이 적용된 것이다. 이것은 좀더 정확한 조선전도의 발전에 기초해 탄생될 수 있었다.
19세기 정확한 조선전도의 제작은 특히 1리, 10리, 20리를 기초로 제작했던 18세기의 경위선표식 - 군현지도들에 힘입었다. 경위선표식 군현지도집은 비교적 일정한 크기의 방안을 바탕에 그림으로써
- 방안을 통해 축척을 적용해 그린 군현지도 모음집이다. 지역의 크기에 따라 군현마다 지도의 크기가
- 모두 다른 지도가 되며, 지도첩(地圖帖) 형태로 제작된 것이 많다. 이른바 ‘비변사지도(備邊司地圖)’로
- 알려져 있는 영남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등 도별 군현지도집(道別 郡縣地圖集)이
- 이 유형의 대표적인 지도다. 이 지도는 1리 방안을 그리고 그 위에 지도를 그렸는데, 방안의 크기는
- 7.0~8.5mm 내외다. 따라서 방안의 크기로 축척을 나타냈으니, 약 1:53,000~1:64,000의 대축척지도다.
- 1747~1750년(영조23~26)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들은 지도 뒷면에 ‘비변사’인이 있어
- 조선후기에 국정을 총괄했던 비변사에서 제작해 소장했던 지도로 추정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조선지도(朝鮮地圖)(7책, 3),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3책), -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3책), 팔도지도(八道地圖)(8책) 등은 20리 방안에 그린 지도집이다.
- 이 지도집의 군현지도는 20리 방안 위에 그렸으므로 1리 방안지도보다 크기가 작고 내용이 상세하지 않다.
- 그러나 전국의 각 군현의 지도를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책자에 그려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도책이다.
20리 방안 위에 그려진 군현지도집의 가장 큰 장점은 전국의 모든 군현지도를 동일한 축척으로 그린 점이다. - 이로써 군현지도들 사이의 분합(分合)을 가능하게 하며, 전국의 각 군현 지도를 연결시켜 지역별, 도별,
- 나아가 전국지도로 합해 볼 수 있고, 나누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축척을 가진 군현지도들은
- 대동여지도와 같은 대축척 전국지도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특히 방안지도를 활용한 군현지도집의 제작은 지도를 통한 지역 인식과 파악의 진전, 그리고 행정적 파악의
- 객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 ▲ 20리 눈금 위에 그린 조선지도 중 광주지도.
- 김정호가 제작한 전도들, 즉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모두 10리를 기본으로 한 경위선표식 지도라 할 수 있다.
김정호의 지도와 지리지
조선 후기의 지도 발달의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 지도학의 대미를 장식한 지도제작자가 -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다. 그러나 김정호는 단순한 지도제작자를 뛰어넘는 탁월한 지리학자였다.
- 김정호는 1830~1840년대에 조선전도인 청구도과 서울지도인 수선전도을 제작하고, 전국지리지인
- <동여도지>를 편찬했다. 또 지구전후도를 최한기와 함께 판각했다. 1850년대인 철종대에 전국지도인
- 동여도를, 전국지리지인 <여도비지>를 최성환과 함께 편집하고, 1850년대 말부터 1860년대 초에 전도인
- 대동여지도와 전국지리지인 <대동지지>를 편찬했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志)를 일체로 보았으며, 국가 경영의 근본 자료임을 강조했다. - 그의 지도제작과 지리지 편찬이 학문탐구나 개인적 취향에서가 아니라 치국과 관련한 현실적,
- 실용적 목적이었음을 알게 한다. 국가의 경영과 관련되므로 지도는 정확해야 했으니, 그는 많은 자료를
- 수집하고 기존 지도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노력했다.
<동여도지>(20책 중 17책 영남대 도서관 , 2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 체제와 내용을 기본으로 한 후 김정호가 섭렵한 많은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비교·인용함으로써 자료 수집에
- 노력한 고산자 지지의 초기 형태다. <동여도지>는 지역별 지지 외에 ‘역대주현’, ‘역대강역’, ‘역대풍속’, ‘역대관제’,
- ‘정리고’가 수록되어 역사지리적인 내용과 도로에 관련된 내용이 첨가되었다.
최성환(崔煥)과 김정호가 함께 편찬한 <여도비지>(20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는 내용의 압축과 - 간략한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이 지지에서 주목되는 것은 각 도의 첫머리에 정리되어 있는 호구, 전부,
- 강역표, 극고표(極高表), 방위표(方位表), 군전적표(軍田籍表) 등의 군현별 통계표다.
- 특히 그의 지도 제작에 참고가 되었다고 보이는 전국 각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표로 정리한 극고표와
- 방위표는 다른 지지나 지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록으로 주목된다(5).
<대동지지>(15책, 고려대 도서관 소장)는 김정호의 일생의 집념과 노력이 결집된 지지다. - 〈대동지지>에는 성숙된 지리학자로서의 그의 자세와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 <대동지지>는 각 도별 군현 지지를 앞에 두고, 후반부에 산수고(山水考), 변방고(邊防考),
- 정리고(程里考), 방여총지(方輿總志, 歷代志) 등을 수록했다. <대동지지>의 체제는 <동여도지>의 것을
- 한층 발전시킨 형태로서 <동여도지>의 내용에 산맥과 하천, 국방 문제 등을 강화한 것인데,
- 이 두 부분은 전하지 않는다.
<동여도지>와 <대동지지>의 체제는 이전의 전국지리지나 읍지에서 예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 방식이다. - 즉 각 지역 단위로 지역의 성격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지와, 강역·도로·국방·산천 등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킨
- 형태로서 주목된다. 이는 조선 전기의 전국지리지 편찬과 조선 후기의 읍지 편찬의 맥을 계승한 후 조선 후기에
- 새로 꽃피운 실학적 지리학의 연구 성과를 지리지라는 틀에 종합해 집대성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현대지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지역지리학의 연구방법과 계통지리학적인 연구 방법을 결합해 - 완벽한 지지를 만듦으로써 국토를 좀더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틀을 <대동지지>에서 정립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 이 책에는 김정호의 독자적인 견해가 정리되어 있는데, 연혁, 지명, 산천, 도로 등에서 드러난다. 또한 철저한
- 사실성에 기초해 분명하지 않은 내용은 과감하게 삭제하고, 항목을 조정했다. 또한 실학적 지리학의 대두와
- 발전은 상업·유통 경제의 발달 등 국내의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와 그와 관련된 국토 공간 구조의 변화에
- 바탕한 것이기 때문에, 실학적 지리학을 지리지에 접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변모되고 있던 사회, 경제,
- 공간 구조를 반영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
- ▲ 국립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여도비지> 경기도 극고표.
- 김정호가 만든 첫 번째 전국지도가 청구도(1834년)다.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 구획해 만든 방안지도로서, 당시까지 제작된 조선전도 중 가장 큰 지도다. 각각의 방안은 동서 70리,
- 남북 100리이며, 이것이 지도책의 한 면을 이룬다. 이에 따라 청구도는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그렸던
- 이전의 군현지도책에서 보이는 축척의 불일치나 도면 넓이의 차이를 극복했다.
또한 방안을 지도 안에 그리지 않고 도곽선에 10리 눈금을 표시함으로써 방안으로 인한 번잡함을 - 피할 수 있고 도면 외곽의 눈금에 의해 거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각 군현에는 호구·전결·곡총·군병
- 등의 기초적인 자료가 주기되어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양식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각 군현의 경계가
- 그려져 있어 군현의 영역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김정호의 두 번째 전국지도 작품으로 추정하는 동여도(東輿圖)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1857년(철종 8)경에 -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해 대동여지도 저본을 삼았던 것으로 추정하며, 일부에서는 대동여지도 제작 이후
- 모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동여지도와 거의 유사하나, 목판본인 대동여지도와 달리 아름다운 채색
- 필사본 지도이며, 설명과 7,000여 개의 지명이 첨가되어 있고, 산맥의 표현법 등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다.
김정호는 1861년에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간행했다. 대동여지도의 표지에는 ‘當十二年辛酉 古山子校刊 - (당저십이년신유 고산자교간)’이라고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명기했다. 1861년(철종 12)에 고산자(古山子)가
- 만들었음을 김정호의 자호(自號)로 나타낸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當元年甲子(당저원년갑자)’년(1864)에 재간되었다.
그런데 현전하는 1861년 초간본들을 비교 검토해 보면, 계속 수정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 평안도 의주 남쪽의 신미도 섬을 예로 들어 보자. 신유본 중에도 가장 초기본으로 추정되는
-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해좌여도에는 섬만 그려져 있고, 섬이름 등 글씨가 없다.
- 그러나 보물로 지정된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대동여지도에는 섬이름이 추가되었다.
- 이보다 후기본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섬이름과 목장 표시가 추가되었다(5, 6, 7).
- 이는 지도의 오류를 시정하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김정호의 열정과 집념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다.
- 현존 전국지도 중 최대
대동여지도는 전국지도(全圖)다. 지도의 유형을 나눌 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지도에 포함된 - 대상 지역의 범위에 따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나눈 지도의 유형에는 세계를 그린 세계지도(또는 天下圖),
- 한 나라 전체를 그린 전국지도(全圖), 도를 단위로 그린 도별지도(道別圖), 군현 및 그 하위 지역을 그
- 린 분도(또는 군현지도), 외국을 그린 외국지도, 주요 도시를 그린 도성도, 궁궐·관청을 그린 궁궐도
- (宮闕圖)·관아도(官衙圖), 군사지역과 변경지역을 그린 군사지도인 관방지도(關防地圖), 기타 특수도 등이 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국을 대상으로 그린 전도다. 전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지도이므로, - 다른 어느 유형의 지도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지도로서 의의를 지닌다. 우리나라 전체의
-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우리 국토를 어떻게 표현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도가 바로 전국지도이기 때문이다.
- 전국지도는 여러 유형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된다. 그러므로 각 유형의 지도의 종합이며, 제작 당시
- 지도학의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동여지도는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큰 지도다. 대동여지도는 전체를 펼쳐 이으면 세로 6. 6m - 가로 4.0m에 이르는 대형지도로 적어도 3층 높이 이상의 공간이 있어야 걸 수 있다(8). 이 때문에
- 국내에서는 대동여지도를 상설 전시해 놓은 곳이 거의 없다. 높이 7m 이상의 공간을 갖춘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 우리가 대동여지도를 잘 볼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
- ▲ 1 성신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해좌여도의 신미도. 2 성신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여지도의 신미도. 3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여지도의 신미도.
- 이렇게 지도가 크기 때문에 웬만한 책자에는 대동여지도를 수록하기가 힘들었다.
- 책에 수록하려면 지도가 너무 축소되기 때문에 내용과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 사진 촬영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책에는 대동여지도의 부분만을 수록했으며,
- 이 또한 대동여지도의 전모를 보기 힘들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1925년 10월 8, 9일자 동아일보는 김정호에 관한 기사를 싣고, 기사 끝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 대동여지도의 출판을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김정호를 위대한 영웅으로 널리 알린 것으로
- 유명하지만, 조선광문회에서 대동여지도를 보급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1910년에 설립된 조선광문회는
- 빼앗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 구래의 문헌 도서 중 중대하고
- 긴요한 자료를 수집, 편찬, 개간하여 귀중한 도서를 보존, 전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니,
- 대동여지도의 출간 의도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으며, 193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3분의 2로 축소한 대동여지도의 - 영인본을 간행한 것이 최초의 고지도 영인사업이었다. 이후 대동여지도는 여러 차례 영인 간행되었다.
- 판매, 간행한 영인본의 경우 모두 원본 크기의 대동여지도가 아니라 3분의 2로 축소된 모습이었다.
- 축소본 대동여지도의 경우 지도의 면적은 원본 지도의 44.4%, 즉 원본의 반에도 못 미치는 크기여서
- 원본의 위용을 제대로 맛볼 수 없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대동여지도, 목판에 조각한 아름다운 국토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목판으로 간행한 목판본 지도, 즉 인쇄본 지도라는 점이다. - 물론 15세기부터 목판본 지도가 우리나라에서도 제작되었다. 신숙주가 1471년(성종 2)에 지은
- <해동제국기>에 포함된 일본 및 유구국 지도가 현전하는 최고의 지도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 (1531년)에 수록된 팔도총도를 비롯한 9장의 지도도 목판본지도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된 지도가 아니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간행 이후 민간에서 이 유형의 지도만을 따로 모아 지도책들을 많이 만들었고,
- 이들 중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동국지도나 조선 후기에 유행한 지도책 등 목판본도 많은 수에 달했다.
- 또한 18세기 이후에는 지도 수요의 증가에 따라 목판본 지도가 증가했다. 특히 서울지도에서 목판지도의
- 제작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목판지도의 증가는 서울 지도뿐만 아니라 전국지도, 군현지도 등 지도의
- 여러 유형에서 다함께 일어났다.
목판지도는 지도의 보급과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다. 대동여지도는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대형 목 - 판본 전국지도였다. 대동여지도 이전에 목판본 전국지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의 대표적인
- 목판본 전국지도로 세로 길이 100cm 정도의 해좌전도(海左全圖)나 길이 140cm 정도의 팔도전도(八道全圖)
- 등이 있다. 이러한 크기의 전국지도는 벽에 걸어 놓고 한눈에 우리나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작
- 은 크기의 지도에 각 지역의 산, 하천, 역원 등 상세한 내용은 담기가 어렵다.
인쇄본으로 만들 경우 가장 큰 장점은 많은 수의 지도를 찍어낼 수 있어 지도의 보급이 용이하고, - 지도를 대중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자세한 지도들은 많았으나 그 지도들은 필사본으로서
- 제작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또 내용이 상세하고 풍부한 지도일수록 일반 국민들에게는 접근이
- 어려운 관청이나 궁중에 소장되어 있었다.
- ▲ 보물 제850호로 성신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여지도 22층 전체를 연결시킨 모습. 세로로 약 7m에 이른다.
- 고산자 김정호는 방대한 크기의 대동여지도를 목판으로 인쇄했다.
- 그러므로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지도를 접하기 어려웠던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대동여지도는
- 획기적인 지도였을 것이다. 대동여지도가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목판본 지도여서
- 여러 본을 찍을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호는 1834년에 전국지도인 청구도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청구도는 목판본이 - 아닌 필사본 지도책이었는데, 김정호가 27년에 걸쳐 수정해 만든 발전된 지도가 대동여지도였으며,
- 청구도에 비해 획기적으로 개선한 점이 바로 목판본의 형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에서 지도가 소수의 정치가, 관리, 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김정호의 -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국민들도 국토의 각 지역에 대한 정보를 가져야 하며, 국토의 모습을 담은
- 지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고 전달되어 국민의 교양으로 뿌리내려야 함은 물론, 국가가
- 어지러울 때일수록 지도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중앙이나
- 지방 관청에는 상세하고 정확한 지도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지도는 일반인들은 볼 수도,
- 이용할 수도 없었다. 김정호는 정밀한 지도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욕구와 변화를 인식하고 그것을
- 실현했던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서울 목판지도의 백미로 꼽히는 수선전도를 목판본으로
-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대동여지도는 목판본 지도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춘 지도다. 내용상의 - 풍부함 위에 목판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선명함, 그리고 힘을 지녔다. 정밀한 도로와 하천, 정돈된
- 글씨와 기호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있는 산줄기의 조화와 명료함은 다른 어느 지도도 따를 수 없는
- 판화로서의 뛰어남을 지니고 있다(10). 고산자 김정호는 위대한 지도학자이자 훌륭한 전각가이며 예술가였다.
대동여지도, 10리 축척의 전국지도
큰 지도가 좋은 지도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흔히 조선 후기의 지도학의 성과로 손꼽는 것이 - 대축척지도(大縮尺地圖)의 발달이다. 지도는 지표면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일정한 크기로
- 지표 현상을 줄여서 나타내는데, 이 줄인 비율, 즉 지도상의 거리와 지표상의 실제거리의 비율을 축
- 척이라 한다. 대축척지도란 현실을 될수록 크게 종이에 나타낸 지도이며, 소축척지도는 많이 줄여서
- 현상을 작게 표현한 지도다. 대축척지도의 제작이 어려운 것은 지도가 커지는 만큼 그 안에 채워야
- 할 내용이 많으며, 정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는 지도에 축척을 명시한 축척지도(縮尺地圖)이며,
- 경위선표식 지도다.
-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여지도 목판 함경도 갑산 부분.
-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이전 지도에서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축척을 표시했다.
- 대동여지도 제1첩에 원고지같이 눈금이 그려져 있는 면이 보인다. 가로 8개, 세로 12개의
- 눈금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지도 한 면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 제목이 쓰여 있지 않다.
- 이를 오늘날 ‘방괘표’ 또는 ‘방격표’라고 부른다. 이 한 개의 눈금(方眼)에 ‘매방(每方) 10리’라고
- 기록해 눈금 하나가 10리임을 명시했다. 또 ‘매편(每片) 종(縱) 120리 횡(橫) 80리’라고 기록해
- 지도 한 면(片)의 동서 길이가 80리 남북 길이가 120리임을 나타냈다(10). 하나의 눈금, 즉 10리가
- 2.5cm이고, 지도 한 면이 동서로 80리이므로 20cm, 세로로는 120리이므로 30cm가 된다.
- 지도상에서 축척은 일반적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데 사용된다. 대동여지도는 한 면이 120리 80리로서
- 쉽게 거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축척은 지도 내용에도 표시되었다. 즉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나타낸 것이다. - 이러한 거리, 축척 표시방법은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다. 특히 도로상의 10리
- 점은 그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평탄한 평야지역에서는 10리 간격이 멀게, 산지가 있는 곳에서는
- 10리 간격이 가깝게 표시되었다. 이는 10리 간격의 점이 지도의 축척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 지형적인 조건을 알려 주며, 지점과 지점 간의 직선거리가 아닌 도로상의 거리를 표현한 것임을 알게 한다.
- 실제 지도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편리한 지도다.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얼마인가? 이는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쟁점이다. - 대동여지도의 축척에 관한 이견은 1리를 오늘날의 거리 단위로 환산하는 데서 연유한다.
- 오늘날 우리는 10리를 4km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일제시기 일본의 거리 단위가 도입된 이후의 일이다.
19세기 후반, 즉 대동여지도를 만들던 당시의 10리가 오늘날의 거리 개념으로 얼마인가에 대해서는 -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당시의 10리를 약 4.2~4.6km로 보는 견해와 5.4km로 보는 견해다. 10리를
- 4.5km로 보게 되면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1:165,000 정도가 되며, 10리를 5.4km로 보는 견해에
- 따르면 축척은 1:216,000이 된다.
1:160,000 계열의 축척을 주장하는 견해는 지도의 크기와 실제 지표면의 크기를 대비해 축척을 - 계산한 것으로, 면적·지점 간의 거리 등으로 계산한 것이다. 216,000의 축척은 경위도 1도의 거리
- 관계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축척이 실제 지표상의 거리를 지도상에 어떤 비율로 줄여
- 나타냈는가 하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1:165,000 계열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18세기에 만든 군현별 지도인 ‘비변사지도(備邊司地圖)’는 1:50,000~80,000의 축척을 지닌 - 경위선표식 지도로, 이 지도를 이으면 대동여지도보다 더 큰 우리나라 지도가 된다.
- 그러나 이 지도는 군현지도였지 전국지도는 아니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지도 중에서
- 가장 크고 자세한 지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전국지도 중에서 가장 큰 대축척지도다.
분첩절첩식 형태의 편리한 지도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국지도이면서 그 형태상의 편리함으로 감탄받았다. -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형태로 만들었다. 이 점은 대동여지도에 앞서
- 1834년(순조 34)에 김정호가 완성했던 전국지도인 청구도(靑邱圖)와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해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도록 구성된 전국지도다. 1층(첩)의 지도는 동서로 80리 간격으로
- 구분해 1절(折 또는 1版)로 하고, 1절을 병풍 또는 아코디언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
- 지도를 만들었다. 22첩을 남북으로 연결하면 전체가 되며, 하나의 첩(帖)은 다시 절첩식으로
- 접혀져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형태다.
- ▲ 대동여지도 제1첩의 방격표이며 온성 부문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분첩절첩식 지도는 연결해 보거나 보관, 열람에 매우 편리하다. 일부분이 필요할 경우
- 일부분만 뽑아서 휴대하며 참고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강릉까지 여행을 할 경우
- 지도 전체를 가지고 갈 필요 없이 서울에서 강릉까지 수록된 제13층 지도만 뽑아서 가지고 가면 된다.
- 또한 절첩식 지도의 장점은 부분으로 자세히 볼 수 있고, 서로 이어 볼 수 있어 분합(分合)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 이렇게 큰 지도를 한 폭의 족자로 만들 경우, 세로 6.6m 가로 4.0m 정도의 큰 지도가 되어 가장자리의 지명만
- 읽을 수 있고 대부분의 중심부에 있는 지명은 읽기 어렵다. 또 책자로 만들었을 경우 넓은 지역을 한 번에
-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분첩절첩식 지도는 필요한 부분을 선택해 연결함으로써 대형지도가
- 지니는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대동여지도, 지리정보의 보고
<지도학사 The History of Cartography> 시리즈의 한국편을 집필한 레드야드(Gari Ledyard) 교수는 - 대동여지도를 한국의 지도 중에서 가장 지도학적으로 우수한 지도라고 평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려 온
- 동양 지도의 지지(地誌, text)적인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우리나라의 지도에는 여러 가지
- 설명을 지도의 여백이나 지도 안에 기록해 많은 정보를 주고자 했던 전통이 강했다. 김정호가 앞서 만들었던
- 전국지도인 청구도에도 이러한 전통이 강하게 반영되어, 군현명 옆에 인구, 전답, 군정(軍丁), 곡식, 별칭,
- 군현품계, 서울까지의 거리 등을 써 넣어 지도가 복잡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 글씨를 가능한 한 줄이고, 표현할 내용을 기호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확립해 현대 지도와 같은 세련된
- 형식을 보여 주었다.
이를 위해 ‘지도표(地圖標)’라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는 지표상의 각종 현상을 지도상에 어떤 기호로 - 표현했는지를 그려 놓은 것으로 현대 지도의 범례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14개 항목 22종이 표시되었다.
- 예를 들어 능(陵), 역(驛,) 창(倉), 방리(坊里), 산성(山城), 진보(鎭堡), 고현(古縣) 등의 경우 공통된
- 어미를 지도에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즉 문수산성의 경우 산성 표시 기호를 그리고 ‘문수’라고만
- 기록해 글자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대동여지도에는 총 1만1,000여 개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 글자 수를 줄인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이 지도의 내용과 표현상 가장 큰 특징은 산과 물의 특징적인 표현과 분별성이다. -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이 가장 강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이유는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 표현하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줄기를 가늘고 굵게 표현함으로써
- 산의 크기와 높이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사람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형을 이해하는 데 가장
- 중요한 요소인 분수계(分水界)와 산줄기가 이를 통해 명료하게 드러난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 대간(大幹)을 가장 굵게 나타냈으며, 다음으로는 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큰 강을 나누는 정맥(正脈)을
- 굵게 그리고, 정맥에서 갈라져 나가 큰 내를 이룬 줄기를 그 다음으로 굵게 표현하는 등 산줄기의
- 위계에 따라 굵기를 달리했다. 이는 조선 시대 사람들이 지녔던 산천에 대한 인식체계를 지도화한
- 것으로, 지도의 사상적인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지도 속에는 당대인들의 국토관, 세계관 등이 담겨 있다.
- 대동여지도의 산천 표현을 통해 우리는 지도의 중요한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산맥 표현은 풍수나 묫자리를 그린 산도(山圖)에서도 보였지만 이를 지도학적으로 - 승화시킨 것은 대동여지도다. 대동여지도가 고전(古典)인 이유를 여기에서도 본다.
대동여지도의 장점은 많지만 주목되는 내용이 도로, 군현의 경계 표시, 봉수, 역원, 1,100 여 개에 - 달하는 섬(島嶼), 목장, 그리고 앞서 언급한 역사지리적인 옛 지명들이다.
- 특히 대동여지도에는 봉수(烽燧), 능침(陵寢), 역참(驛站), 창고(倉庫), 고개 등과 현재의 주요 현상은
- 물론 옛 현(古縣, 옛 읍터), 옛 진보(鎭堡), 옛 산성(山城) 등 당시에는 이미 사라진 역사적인 흔적,
- 그중에서도 군사, 역사적인 유적을 세밀하게 표시해 놓았다. 또한 군현의 경계선을 그려 놓아
- 조선시대의 군현의 경계 등 행정구역의 복원은 물론, 각 지역의 고대로부터의 옛 모습을 알고자
- 할 경우 대동여지도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더욱이 다른 문헌이나 지도에 없는 정보들을 표시해
- 한국학의 보고로 꼽힌다.
'山經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남정맥의 재발견 (0) | 2017.03.29 |
---|---|
산경표와 산맥 -광주산맥의 실체를 중심으로...... (0) | 2017.02.10 |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은 어떻게 다른가 ? (0) | 2017.01.21 |
신산경표>의 우리나라의 산줄기 간략 개념도 (0) | 2016.04.01 |
[스크랩] 신산경표상의 남한의 산줄기(157지맥)요약 (0) | 2015.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