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9년 11월 02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짙은 미세 먼지
☞ 산행거리: 도상거리 7.5km + 들머리1.1km , 날머리 2,1km / 4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수헌 아우님과 둘이서
☞ 산행코스: 모래재-전망대-안동권공 묘-가산산성-지맥 분기점-무명봉-이정표-무명봉-구조이정목-임도삼거리-안부
580.2봉-계정사 갈림길-갈림길-무명봉-536.5봉-무명봉-진번대기 고개-유해발굴 기념비-오계산-묘지
394.9봉-학명리 갈림길-NO79송전탑-무명봉-갈림길-해주최씨 묘지-소야고개-다부원 삼거리-실봉산
경주배씨 묘지-추모의 집-현대공원 묘지(제2묘원)-다부초교-다부동 전적기념관
☞ 소 재 지: 경북 칠곡군 가산면, 동명면
다음주 월요일에 병원에 종합 검사를 받아야 하기에 이번주는 지난 여름에 희말라야 로체 정복에
나선 진권아우가 돌아와서 일요일에 그 동안 미뤄왔던 짧은 구간의 천등지맥 마지막 구간을 하기로했는데
주중에 갑자기 수헌 아우님한테서 전화가 온다
500대 명산을 하고있는 아우님의 친구 희승씨가 구미에 있는 천생산을 가는데 우리는 근처에 있는
황학(금호)지맥 첫 구간을 가자고 솔깃한 제안을 해오는 바람에 앞.뒤 생각없이 무조건 오케이한다
거리가 짧다기에 간단하게 베낭을 챙겨 탑승지인 복정역에서 수헌 아우님을 만나 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늦가을의 단풍행렬로 인해 고속도로는 상당히 막힌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 휴게소에서 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상주I.C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보다 더 시원하게 뚫린 25번 국도를 타고 한참을 달린 다음에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 팔공산도립공원 금화자연휴양림쪽으로 꺽어져 들어간다
휴양림 안으로 들어서니 바리게이트는 열려있고 초소에는 아무도 없다
예전엔 이곳에서 내려 모래재까지 1시간 이상을 걸어서 접속 구간인 모래재까지 가야 하는데
지금은 모래재 너머 군위군 부계면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포장이 되어 있어 무작정 오른다
오르는 길은 구절양장의 멋진 도로 옆으로 단풍이 환상적이라 눈이 호사를 누린다
황학지맥(黃鶴枝脈) 개념도
황학지맥(黃鶴枝脈)은 팔공지맥 가산(901.6m) 북서쪽 1.5km지점 851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 경계를 따라 오계산(466m), 황학산(758m)을 지나 남진하다가 금호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달성군 다사면 죽곡리 강정마을에서 맥을 다하는 41.1km의 산줄기다.
팔공지맥과 더불어 대구시민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금호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며, 합수점에서
강 건너편 청룡지맥의 끝점과 마주 보는데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 산경표에서는 금호지맥이라 한다
금호(황학)지맥 전체지도
금호(황학)지맥 고도표
오늘 산행 구간의 지도
구절양장의 도로를 따라서 모래재에 도착을 한다
2012년 5월 20월 팔공기맥 산행때 이곳을 걸었으니 얼마만이던가
그 당시에는 비포장 도로에 팔각정도 없었는데 모든게 隔世之感이다.
이곳에서 막걸리잔을 같이 기울였던 젠틀맨님은 잘 사시는지 모르겠다
모래재(沙峴:578m:10:45)
경북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에서 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모래가 많아서 모래재라고
불렀다고 하며 팔공산 도립공원 금화자연 휴양림이 있고, 정상에는 넓은 공터에 예전에 없었던
쉼터와 팔각정, 도로준공 기념비가 있다.
남쪽으로 4.3km 떨어진 거리에는 조선시대 석축산성인 가산산성(架山山城)의 방어벽이 고개 아래
갈림길까지 이어지며, 동쪽에 금화계곡, 서쪽에 저수지 가산지(架山池)가 형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신라신대의 사찰인 대둔사(大屯寺)와 금곡사(金谷寺)가 있다
우리를 태워주고 천생산으로 향하는 수헌아우 친구분들
늘 힘든 들머리를 오늘은 그냥 왔으니 마치 양넘 지갑줏은 기분이다
산행을 시작하다(10:50)
전망대(10:51)
북쪽으로 예전에 걸었던 팔공기맥 능선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모래재
전망대에서 올라 조그만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팔공기맥을 걸었던 분들의 흔적을 만난다.
조금전에 내가 차를 타고 올라왔던 금화휴양림 계곡의 모습
금호(황학)지맥 분기점이 보인다...저 곳까지 올라가야 한다
좌측 능선으로 가도 황학(금호)지맥으로 가는 길을 만난다
안부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등로 우측에 안동권공 묘지가 보인다
안동권공 묘(11:00)
안동권공 묘지위에 있는 암봉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팔공기맥길이라 그런지 등로는 아주 좋다
묘지를 옮긴듯한 피묘의 흔적도 만난다
오르막을 오르다가...
안부로 내려선다
숨이 멎을듯한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앞서가던 수헌아우는 보이지도 않고...
죽을 힘을 다해서 올라가니...
가산산성터가 보인다
가산산성터 이정표(11:30)
동쪽으로는 7년 반전 팔공기맥 종주 당시 걸었던 가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가산산성에서 당겨본 가산(架山:901.6m)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위치한 가산은 신라시대 오악신앙의 중심지인 팔공산에서 서쪽으로
약 10km정도 떨어져 있으며 경상도 지리지『팔거현(八居縣)』조에는 ‘가사산 재북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사(갓의 음차, 변, 말 - 팔공산의 연봉 서북쪽 끝)산 - 갓산 - 가산으로
이름 지어진 명산으로 일명 칠봉산으로 불리며 칠곡군내의 최고봉이다
1640년(인조18년)에 가산성을 쌓고 칠곡도호부의 처소가 약 180년간 산성내에 있었다.
6.25때는 이곳에서 낙동강 전투의 최고 격전지가 된 곳이다
가산산성(架山山城)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산성(山城)으로 가산산성은 인조 17년(1639)에 내성의
축성공사가 시작되어 약 100여 년간의 긴 세월을 거쳐 축성되었다.
따라서 가산산성은 17~18세기에 걸쳐 정상에 내성, 중턱에 중성, 하단에 외성을 쌓은 3중의
포곡식 석성(石城)으로써 금오산성, 천생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방을 방비한 그야말로 ‘영남 제1관방’이 되었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가산(架山) 요새에 삼중(三重)으로
축성이 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제수된 이명웅(李命雄:1590~1642)이
‘경상도 60주(州) 산성중에 믿을만한 곳은 진주(晉州), 금오(金烏), 천생(天生)의 삼성(三城) 뿐이므로
적지(適地)에 축성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도임 후 천생산성(天生山城)은 형세가 험하기는 하나 좁고 천정(泉井)이 없으므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가축(加築)하는 한편, 최적인 팔거현의 가산(架山)에 축성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그 해 9월부터
이듬해(1640년) 4월까지 내성(內城)을 쌓았다.
가산산성이 축성되면서 5월부터는 경상부(京山府:현재 성주)에 속현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七谷都護府)’로
승격되고, 이후 약 180년 동안 부(府)의 치소(治所)인 읍치(邑治)를 산성내에 두었으며 진관(鎭官)은
4개 현(군위, 의흥(군위의 옛 지명), 신령, 하양)을 관장 하였다
칠곡도호부 관아(官衙)가 험준한 산정에 있게 된 후, 읍민들은 불편한 점이 많아 관아를 옮기기를 갈망하여 왔다.
1819년(순조 19)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평지인 팔거구지(八?舊地)로 읍치를 옮기고, 이후로 가산산성
수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담당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제6대 칠곡도호부사 이지형(李枝馨, 1608~?)이
경상감사 이만(李曼, 1605~1652)과 합심하여, 군병과 승려를 동원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건물(建物)·포루(砲樓)·
남쪽 곡성(曲城)·북쪽 구책(舊柵) 등을 중수(重修)하였다. 외성(外城)은 1700년(숙종 26) 경상도 관찰사
이세재(李世載, 1648~1706)의 장문(狀聞:임금에게 글을 올림)으로 왕명을 받아 1701년에 완성하였다.
중성(中城)은 1741년(영조 17) 경상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가 장문하여, 왕명으로 그 해에 완성되었다.
가산산성에는 식량과 병기를 충분히 비축할 양창(糧倉, 남창·북창)·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중성의 성벽은 내·외성에 비해 작고 동문은 홍예문(虹霓門, 무지개문)이었다. 1812년(순조 12)에는
가산산성에 별장(종9품)을 두고 가산진(架山鎭)을 설치하였다
분기점을 향한다
가산산성에서 바라본 팔공기맥 능선
금호(황학)지맥 분기점(846.5m:11:35)
모래재에서 분기점까지 1.1km의 거리를 얼마나 급경사의 오르막이었는지 40분이 걸렸다
수헌아우님은 얼마나 빨리 왔는지 웃통을 벗어놓고 육체미를 뽐내고 있는데 젊음이 부럽기만 하다
인증샷
분기점이 있는 가산산성의 모습
다시 길을 나서다(11:37)
급경사의 산성 아래로 내려선다
등로는 보이질 않고...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내리막길에 낙엽이 수북한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요즘 맥길에서 자주 만나는 비실이부부님과 산으로님의 흔적
생각보다 등로는 상당히 뚜렸하다
최근엔 지맥길이 걷은 사람이 없는지 산꾼의 흔적은 찾을길이 없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계속되는 내리막길
무명봉(11:45)
팔공산도립공원 구조이정목을 만난다
시몬너는 아느냐 나의 외로움을
새벽은 점점 아침이 되어가고.
긴긴 밤이 지날수록
더해가는 내 외로움을
너는 아느냐.
시몬
너는 느끼느냐 나의 슬픈 영혼의 목소리를
어젯밤 내린 눈이 녹아
창문사이로 떨어지는 그 아련한 소리를
정영 그 소리의 의미를 알겠느냐.
시몬
우리의 모든 추억
아련한 기억속에 남아둔채
자유를 찾아 떠나는 저 새들처럼
그렇게 마지막 가는 길을 가고 싶구나
시몬
사랑 받는 일 보다
사랑 하는 일이 더 쉽다고 하듯이
사랑 받기를 원하지 말고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하고
그 다음 나 아닌 타인을
사랑하라
그러면 너는 행복해 질 수 있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다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걸 잊지 말아라
시몬
시몬
이제..
서서히 태양이 떠 오르면
그땐
난 내가 그토록 원하던
제3국의 나라 그 곳에서
나 보다 못한 내 이웃을
사랑하며 있을 테지
시몬
시몬
사랑하리라
모윤숙님의 詩
계속되는 내리막길
이정표(11:49)
넓은 임도를 버리고 우측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낙엽이 물들어 가는 맥길
나뭇가지를 헤치고 가지만 맥길은 의외로 뚜렸하다
무명봉(11:50)
내리막길인 하지만 오늘따라 수헌아우가 얼마나 속력을 내는지 따라서 가려니 죽을 맛이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2번째 구조 이정목이 나온다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가는데 잠시후에 길은 다시 만난다
구조이정목(팔공03-01:11:56)
조금을 더 가니 임도 삼거리가 나온다
임도삼거리(11:58)
임도 삼거리 ...모래재 방향의 모습
넓은 공터가 있는 임도삼거리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맥길로 접어든다
수헌아우의 발걸음은 여전히 빠르다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고도차가 없는 봉우리를 지나고...
또다시 우측으로 내려간다
오늘 따라서 유난히 빨간 노끈의 흔적을 많이 만난다
안부(12:04)
싸리나무가 길을 막지만 등로는 아주좋다
안부를 지나...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580.2봉(12:11)
등로에는 멋쟁이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계정사 갈림길(12:14)
숲길을 헤치고 나가니...
빨간천 표지기가 길을 안내한다
등로는 희미하고...
갈림길(12:16)
이곳도 계정사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맥길은 우측으로 확 꺽어진다
넓은 공터를 지나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좌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무명봉(12:21)
등로는 고속도로 수준이다
536.5봉(12:24)
정상은 묘지를 옮긴듯한 파묘의 흔적과 선답자들의 시그널 몇장만 보인다
다시 내리막길로 향한다
싸리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약간의 내리막길로 향한다
고도차가 거의 없는 등로를 따라서 간다
무명봉(12:33)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진번대기 고개(12:35)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 진번대기에서 동명면 학명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안부를 지나면서 공원묘지로 가는 넓은 임도가 보인다
진번대기 마을은 갈정산 등마루에 있으며, 2013년 현재 2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이다. 가산 산성을 오르는
북쪽 입구에 있는 마을로 성문의 초소에 해당되며 병사의 무기가 번득이는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개를 지나면서 우측의 직진능선으로 올라간다
좌측으로는 묘지로 올라가는 뚜렸한 길이 보인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밋밋한 봉우리가 나오고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로 오른다
근처에는 유해발굴 현장이 많이 보인다
이곳은 6.25동란 당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많이 희생을 치르면서
승전보를 올린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 선조들이 흘린 피로 지킨 이 나라가 요즘은 風前燈火 같은 느낌이다
민족의 피를 그렇게도 많이 흘리게 한 북한을 지금 적으로는 커녕
철전지 웬쑤인 저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절절 매고 있으니...
목숨을 바쳐 이 나라를 지킨 선조들에 뵐 면목이 없구나...미안합니다
능선에서 올라 좌측으로 꺽어진다
유해발굴 기념비(12:48)
오계산(午鷄山:466.3m:12:50)
경북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 남부와 동명면 학명리 북부에 걸쳐 있으며 산 모양이
닭이 앉아 있는 모습을 닮아 오계산(午鷄山)이라고 하는데 대구시를 거쳐 금호강으로
유입되는 팔거천(八渠川)의 발원지이며, 서쪽에 55번 중앙고속 국도가 지나가며,
남쪽에 학명공원묘지, 북쪽에 금화계곡이 있으며산 일대에 풍치림이 우거져 경관이 아름답다.
영진 2만5천 지도에는 牛鷄山(우계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것은 ‘낮(午)를 소(牛)’
한자 표기의 誤記로 보이며 산 남쪽의 소야고개는 조선시대의 영남대로가 지나가는 곳인데
오계산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사료에 기록이 없다.
오계산 남사면인 동명면 학명리에서는 팔거천(八莒川)이 발원한다
팔거천은 발원지에서 남쪽으로 흘러서 금암천(錦岩川)은 송산천(松山川)·구지천(九池川)·
반포천 등을 합류하여 팔달교 좌측에서 금호강으로 합류한다.
4세기 초 신라시대 지명인 팔거리현(八居里縣, 북구 팔달동, 칠곡일대)에서 유래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팔거리현을 팔리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시대 팔거현(八居縣)이
되었다가 나중에 팔거현(八莒縣)으로 개칭하였다.
고문헌 기록에는 『여지도서』에서 처음으로 팔거천이 나타난다.
판독이 불가능한 오계산 정상 삼각점
점심시간(12:50~13:30)
최근에는 주로 나홀로 산행을 하다가 보니 늘 힘든게 베낭 무게이다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는 먹거리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오늘도 점심이라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산 찰보리빵과 집에서 가져온 단감,
수헌아우가 타 준 따뜻한 커피한잔이 전부이지만 불만은 없다
이렇게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게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오랫만에 맥산행을 같이한 수헌아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보니
꽤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다.
다시 길을 나선다(13:31)
좌측의 뚜렸한 내리막길을 버리고 희미한 우측으로 향한다
이별을 준비하는구나
어차피 한번오면 가야하는 세상인데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게나
무명봉을 지나...
우측으로 꺽어진다
오늘 따라서 유난히 자주 만나는 빨간천의 흔적
좌측으로 내려서니 묘지가 보인다
묘지(13:36)
잠시후에 가야할 실봉산도 보인다
묘지옆 우측으로 내려서니...
곧바로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394.9봉(13:41)
능선에는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들
학명리 갈림길(13:47)
좌측으로 휘어지는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직진으로 향한다
칠곡군 동명면 학명리는 가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소규모의
경지가 분포하는 곳이다. 동명원, 삼학동, 두모동 등을 병합하면서 삼학과 동명의 이름을
따 학명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독명, 불당골, 칡골, 삼막골마을 등이 있다.
독명마을은 학명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고, 불당골마을은 불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칡
골마을은 칡이 많은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삼막골마을은 독명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주막 셋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직진으로 향하니 송전탑이 보인다
NO79 송전탑(13:49)
등로를 따라서 조금을 더 가니...
인공 구조물이 보인다
무명봉(13:52)
갈림길(13:55)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등로는 조금 지저분해지고 잡목이 성가시게 군다
등로를 따라서 내려서니...
잘 가꿔진 해주최씨 묘지가 나온다.
해주최씨 묘지에서 바라본 실봉산의 모습
해주최씨 묘지(14:00)
묘지 아래에 있는 해주최씨 영묘단 앞으로 내려간다
대밭 사이로 향한다
소야고개가 나온다
조금전에 내려온 길을 뒤돌아 본 모습
소야고개(所也峙:250m:14:04)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동명면 학명리를 잇는 고개로 가산에서 뻗어온 오계산과 백운산 사이의
안부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5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 고개는 예로부터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어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동래를 잇는 영남대로가 통과하는 곳이었으며, 고개 아래에는
다부원(多富院)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인동현조에는 "소야원(所也院)은 현의 동쪽
41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소야고개 인근에 소야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소야고개에 대한 기록은 『여지도서』에 처음 등장하며, "소야현(所也峴)은 칠곡도호부 관아의 서북쪽 10리에 있다.
가산에서 떨어져 나와 뻗어 가서 소학산(巢鶴山)을 이룬다."라고 쓰여 있다. 『해동지도』에는 칠곡도호부와
인동도호부 지도 모두에 소야고개가 그려져 있으며, 소야치(所也峙)라고 표기되어 있다. 소야고개는 쐐고개,
쐬고개라고도 부르는데, 쐐기 모양을 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소야고개는 삼국시대부터 왕건과 견훤이 대권의 길목에서 혈투를 벌인 요충지였고, 병자호란 임진왜란과
6.25를 거치며 매 고비마다 치열한 전투를 겪은 곳이며. 또한 이 고개는 조선시대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던 옛길 영남대로 길목이기도 한 곳이다. 많은 역과 관원 행상들이 묵어가는 주막촌이 형성되고 돈 많은
거상들이 몰려들면서 부자가 많은 곳이라 하여 다부원(多富院)이란 이름이 생겼단다.
산경표(蘇耶峙)와 대동여지도에도 지명이 표기된 곳이다.
소야고개 - 동명면쪽의 모습
그너머로 칠곡군에서 가장 높은 가산(架山)이 아련히 보인다
신라시대 팔거리현이 고려시대 팔거라 했고 달리 칠곡(七谷)으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 인조18년(1640) 가산산성이 축성되면서 팔거현이 칠곡도호부(七谷都護府)로 승격되면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칠곡(七谷)이란 이름은 팔거현의 명산 가산이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도 불리는데,
산정(山頂)에는 나직한 7개의 봉(峰)으로 둘러싸인 평정(平頂)을 이루고 골짜기도 사방 7개로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명칭을 따서 「七谷」이라고 했는데 그후 일곱 칠(七)자를 칠(柒)자로 바뀌어 「柒谷」으로 사용하다가
칠(柒)과 같은 자인 칠(漆)로 고쳐「漆谷」으로 다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옻나무가 많아서 옻칠(漆)자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서 아우님과 둘이서 오뎅 한꼬치에 캔맥주 하나로 입가심을 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맥길은 도로를 가로 지르는데 무단횡단을 시도해 보려다가 워낙 교통량이 많아서 포기한다
다부동쪽으로 한참을 내려간 다음에...
다부원 삼거리(14:22)
신호등을 받고 길을 건넌다
도로에서 숲으로 향한다
뒤돌아 본 소야고개의 모습
좌측의 묘지쪽으로 가야 맥길이지만...
그냥 편한 길을 따라서 올라간다
등로는 없다...최대한 좌측 사면으로 향한다
급경사의 능선은 참으로 힘이든다
마루금으로 복귀하니 선답자의 시그널 하나가 보인다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코가 땅에 닿을만큼 힘든 오르막길...입에서 단내가 나는 느낌이다
늘 감사합니다
뒤돌아 보니 지나온 오계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아주 힘들게 능선에 올라선다
가뿐 쉼을 몰아 쉬면서 실봉산 정상으로 향한다
실봉산(實峰山457.5m:14:53)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북쪽으로는 소야고개가 있고 북동쪽으로는
다부동 전적기념관과 유학산이 있고 남쪽 아래는 현대공원묘지(제2묘원)가 자리를 잡고 있다남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뫳돼지 체력 단련장도 만난다.
서서히 맥길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등로는 보이질 않고...
내가 길을 만들면서 내려간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묘지가 보인다
경주배씨 가족묘원(15:08)
묘지로 내려간다
현대공원 제2묘원이 보인다
1970년 9월 17일에 재단법인 현대공원묘지를 설립하고 1971년 8월 12일에 현대공원묘지를 개원하였다.
1974년 4월 16일에 대구광역시 공원묘지 납골당 관리를 수탁·계약하였으며 1980년 2월 22일에
현대2공원묘지 허가를 받았고,1984년 4월 1일에 칠곡군 납골당 관리로 수탁·계약을 맺었으며 1999년 4월 1일에
납골 묘역을 설치·분양하였다. 2000년 8월 개원 20주년을 맞아 재단사무실을 신축하고, 2001년 3월 개인(부부)
납골묘 단지를 조성, 2003년 2월 가족 문중 납골 단지를 조성하였다
묘지 북쪽으로 유학산이 보인다
묘지 가운데 길로 내려간다.
공원묘지 안에 있는 관문정이라는 육묘전도 만난다
다음구간에 오를 봉우리도 바라 보는데 언제올 지 기약이 없다.
추모의 집(15:10)
산행을 종료하다
도로를 따라서 다부동으로 향한다
다부동 가면서 바라본 유학산의 모습
유학산(遊鶴山:839m)은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 석적읍 성곡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유학산의 정상 부분은 대체로 완만한 억새밭을 이루지만, 남쪽과 북쪽의 사면은 경사가 매우 급하여
단애를 이루고 있으며 팔공산에서 가산으로 이어진 산줄기로부터 서쪽으로 갈라진 곳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천생산, 남쪽으로 황학산과 연결된다.
유학산 남쪽의 다부리 고갯길에는 한국전쟁 때의 승리를 기리는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있는데, 다부리는
대구로 밀려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다. 유학산 남사면 중턱에는 도봉사(道奉寺)가 있다.
유학산이 처음 기록된 사료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에는 유학산이 아닌 유악산(流嶽山)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인동현의 동쪽 10리에 있으며, 인동현의 진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도』에도 '유악(流岳)'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해동지도』에는 '유학산(留鶴山)'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현재 쓰고 있는 '유학산(遊鶴山)'이라는 이름은 『1872년지방지도』에 처음 기록되어 있는데,
학이 놀던 산이라고 붙여졌다고 한다
아우님 때문에 첫 구간을 참으로 편하게 걸었다
공단을 지나고...
유학산을 바라 보면서 다부동으로 향한다
유학산은 6.25전쟁중에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로서 산 남쪽 다부리에 다부동전승기념관과 기념비가 있다.
6·25전쟁 당시 왜관∼다부동을 잇는 방어선은 낙동강전선의 교두보이자 대구를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정겹기만 한 농촌의 감나무
좌측으로는 대구예술대학교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다부 I.C방향으로 향한다
실봉사 아래에는 법전사라는 커다란 절집이 보인다
다부초등학교(15:34)
조금전에 지나온 오계산 능선을 바라 보면서 걷는다
천생산으로 간 수헌아우님 친구들을 만나러 다부동 전적 기념관으로 향한다
다부동 전적 기념관(15:40)
다부동(多富洞) 전투는 6·25전쟁 낙동강선 방어작전간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고자 온 힘을 다했던 북한군의 8월 및 9월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대구 북방 다부동 일대
(낙동강 연안·다부동·팔공산 방어선)에서 수행한 전투를 말한다. 이번 답사의 목적은 제1사단이 수행한
다부동 전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가 있음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신주막-다부동 축선 전투’ 현장을
확인하고 그 의의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사무소(과거 지명 ‘신주막(新酒幕)’)에 도착해 5번 국도를 따라 다부동으로
내려가면서 국군 제1사단 11연대와 미 제25사단 27연대가 북한군의 집요한 보전협동 공격을 격퇴한
발자취가 있는데 ‘신주막~다부동 5번 도로축선’은 임시 수도였던 대구의 점령을 목표로 한 북한군의
최단거리 주 타격 축선이었고, 다부동의 동쪽에 있는 ‘466고지’(일명 ‘오계산’)는 이 축선을 통제할 수 있고
대구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T-34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제13사단은 광복 제5주년 기념일인 8월 15일 아침 증강된 1개 대대 규모로
보전협동 공격을 개시했지만 제11연대 1대대의 분전(奮戰)으로 적의 진출이 18일까지 저지되기는 했지만,
대대의 손실은 극심했다. 제15연대 2대대는 제11연대에 배속돼 15일 저녁 466고지에 급히 방어 배치됐다.
대대는 약 2개 대대 규모의 적과 조우했지만, 철야 육박전과 효과적인 화력지원으로 적을 격퇴했고,
다음 날 공세로 전환해 18일 신주막을 통제할 수 있는 356고지를 탈환했다. 만약 이 축선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하지 못했다면, 다부동 방어선은 붕괴했을 것이고, 국가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을 것이다.
전사 ‘다부동 전투’에서는 466고지를 ‘사단 주 저항선의 아킬레스건(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미 제8군 사령관 워커(Walker)는 8월 18일 예비로 있던 미 제25사단 27연대를 이 축선에 투입했고,
연대는 국군 제11연대와 협조하에 7회에 걸친 북한군의 보전협동 공격을 모두 격퇴했다.
이때부터 미군들은 이 지역을 ‘동양의 베르?(Verdun)’, 이 전투를 ‘볼링 앨리(Bowling Alley) 전투’라고 불렀다.
다부동 전적 기념관 안내판
6,25동란 당시 한국군의 주력 공군기
백선엽 장군 호국 구민비
6.25 동란 당시 영웅이었던 백선엽 장군
광장에서 바라본 실봉산
다부동 전투의 의의를 꼽자면...
1, 그 당시 風前燈火였던 대한민국이 다부동 전선 사수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고,
2, 낙동강 방어선 사수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계기를 마련했다.
3,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으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점이다
그 당시 사용되었던 비행기도 전시되어 있다
전적 기념관을 둘러 보면서 우리는 지금 공산주의의 실체는 너무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착잡하다
다부동 전적 기념관을 走馬看山 격으로 둘러본 다음 화장실에 가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 입고 있으니 수헌아우님의 친구들이 도착하고... 덕분에 편하게
판교까지 와서 집으로 향한다...다들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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