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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탄천지맥(終)

탄천지맥 제1구간 - 분기점에서 태재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20. 1. 25.

☞ 산행일시: 2020년 01월 24일

☞ 산행날씨: 맑고 포근한 날씨에 짙은 미세먼지

산행거리: 15.3km + 들머리 3km  / 5시간 3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물푸레 버스 정류장-파3 골프장입구-향린동산 입구-철대문- 88C.C-297.8봉

                  서코스 13번홀-벙커봉-무푸레고개-쉼터봉-안부-법화산-317.3봉-382.1봉

                  안부-할미산성 갈림길-346.1봉-작은무등치-도태굴 고개-큰무등치-309봉

                  응달길 고개-NO93송전탑-43번 국도 지하차도-대지고개-구 대지고개

                  NO 94송전탑-내대지 마을갈림길-대지산-NO63송전탑-삼면경계봉-휘남애고개

                 구미동 갈림길-318.3봉-쉼터봉-골안사 갈림길-정자동 갈림길-대광사 갈림길

                  정자쉼터-부천당고개-숙골갈림길-불곡산-산림욕장-311.7봉-수내동 갈림길

                  정자동 갈림길-형제봉-242.3봉-상태마을 갈림길-태재

소 재  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수지구, 처인구  / 광주시 오포읍 / 성남시 분당구

 

또 한해는 흘러가고...가야할 산은 많은데 세월은 왜 이리도 빠른지?

己亥年 섣달 그믐날 마땅히 갈데가 없다...위천(보현)지맥을 가려고 했지만 전날 내려가서 

하룻밤 자고 산행을 해야하고 산행이 끝나고 귀경할 교통편이 마땅찮아 걱정을 하다가

근처에 있는 지맥길을 검색해 보지만 한남과 한북정맥에서 가지를 치는 22개 지맥은

진작에 끝내버려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탄천지맥이다

 

우리나라 맥꾼들은 박성태 선생이 저술한 신산경표를 기준으로 맥길을 이어가는데 신산경표를

기준으로 걷다가 보니 늘 아쉬운 맥길이 눈에 보이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한남정맥에서 분기한

신산경표에서 검단지맥이라 부르는 대한산경표상의 탄천지맥이다.

 

내가 지맥길을 처음으로 시작한 곳이 신산경표상의 검단지맥이었다.

2011년 9월 13일에 맨 처음 지맥길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 어언 80여개의 지맥길을

했으니 참으로 감회가 깊다...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상의 검단지맥과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상의 탄천지맥은 한남정맥 88C.C.근처의 봉우리에 분기하는 대한산경표상의 탄천지맥과

신산경표상의 검단지맥은 남한산성 수어장대(청량산)까지는 똑같이 오다가 대한산경표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봉은교쪽으로 향하고, 신산경표는 직진하여 벌봉과 은고개를

지나고 용마산, 검단산을 지나 외창모루로 내려서 팔당대교 아래 한강으로 맥길을 입수한다

 

분기점에서 청량산(수어장대)까지 걸어서 나머지 부분만 걸어서 보완하려 했지만 신산경표상의

검단지맥을 걸어본 지가 9여년이 되어서 다시 걸어볼 요량으로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선다

탄천지맥 개요도

탄천(炭川)지맥이란 한강과 한강의 지류인 탄천을 구분하는 수계 산줄기로, 할미산성이 있는 한남정맥

선장산(349.7m)에서 1.7km 지점인 향린동산 금호베스트빌리지 뒤 무명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하여

88컨트리클럽, 물푸레고개, 법화산(383.2m), 대치(43번국도), 불곡산, 태재(57번지방도), 영장산, 갈마치,

이배재, 망덕산, 검단산(536.4m), 남한산성(청량산 497.1m), (북)위례택지지구,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장지근린공원, 두댐이공원, 투구봉(개롱공원 59m), 성동구치소(62m), 웃말공원, 양재대로, 새싹어린이공원,

송파사거리, 석촌동고분군, 아시아공원, 잠실종합운동장을 지나 올림픽대로 청담교 아래의 탄천과 한강

합수점에서 끝나는 40.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청량산 수어장대에서 북서쪽 능선으로 내려오면 위례택지지구 부터는 낮은 산들이 도시개발로 사라져서

산줄기를 찾기가 어렵고, 송파사거리부터 합수점까지는 오랜기간에 걸쳐서 한강과 탄천의 토사가 퇴적되고

한강의 유로가 변경되면서 형성된 지형으로 산줄기를 찾는다는 것이 무의미하기는 하나 탄천과 한강 수계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남정맥과 탄천지맥 분기점에서 볼 때 탄천지맥 좌측의 물줄기는 모두 탄천으로 유입되고

탄천지맥의 우측의 능원천, 목리천, 직리천, 모현천, 번천은 경안천을 경유하여 한강으로 유입되고,

성내천은 바로 한강으로 먼저 유입되었다가 탄천과 한강 합수점에서 지맥으로 인하여 좌우로 갈라졌던

물줄기가 다시 만나게 된다.

 

합수점을 기준으로 할 때 우측의 탄천과 좌측의 한강을 구분하는 완전한 수계 산줄기가 되므로

이 산줄기를 대한산경표에서는 “탄천지맥”이라 칭한다.(1유형 합수점형 지맥)

 

탄천지맥은 지맥분기점에서 부터 청량산(497.1m)까지는 신신경표 검단지맥과 산줄기가 일치하나

이후로는 탄천지맥이 서쪽으로 탄천과 한강의 합수점으로 진행하는 것과는 달리 검단지맥은 동쪽으로

남한산(522.0m), 은고개, 검단산(658.4m)을 거쳐 한강 팔당대교 앞에서 끝나는 차이가 있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분기점에서 청량산(수어장대)까지는 신산경표와 등로가 같음)

물푸레 마을 버스정류장(06:50: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 소재)

집에서 나와 뱅뱅사거리 버스 정류장(06:12)에서 강남역에서 청덕동가서 1241 버스를 타고

청덕동에 있는 물푸레 아파트 7.8.9단지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는다.

날씨는 생각보다 그리 춥지는 않지만 어둠속에 걷기는 애매하다

아침도 해결하고 날씨를 밝기 기다릴 겸 하여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편의점에 들려서 컵라면과

작은 햇반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며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나오니 날은 많이 밝아졌다

산행을 시작하다(07:25)

편의점을 나와 조금전에 내려던 버스 정류장을 지나 좌측으로 내려간다

신호등이 보이고 88C.C ← 표지판을 바라 보면서 좌측으로 향한다

좌측으로 향하니 지붕으로 덮힌 방음벽이 나오고 이 아래로는 동백.죽전대로가 지나는 구성I.C교다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는데 좌측으로는 물푸레아파트 9단지가 보인다

뒤돌아 본 물푸레아파트 9단지의 모습

이젠 날씨는 완전히 밝아졌으나 일출이 뜨기 직전인지 엄청나게 손이 시리다

파3 골프장 입구(07:40)

이 도로가 한남정맥길이다

향린동산 마을 입구(07:45)

한국의 대표적인 전원주택 단지로 불리는 향린동산을 1970년 향린교회 교인 30명을 포함한 100여명이 각자

30만원씩을 내어 지금의 향린동산 자리 23만평의 산과 전답을 매수하여 전원주택단지로 조성했다고 한다.

우측 향린동산 빌리지 너머로 한남정맥 할미성의 모습이 보인다

 

할미산성(349.3m)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할미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성 내부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180m의 공유 벽을 기준으로 북쪽의 내성과 남쪽의 외성으로 구분이 되며

북쪽의 내성은 정상부를 높은 지대에 축조되었고, 남쪽의 외성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조성되었는데 형태상

사모형(紗帽形)인데 성벽의 전체 둘레는 651m로 할미산성의 정상부와 그 남쪽의 능선을 둘러싸며 협축하였고

내,외벽 기저부에서 보축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최정상부에서 매납 유구와 아궁이, 평지에서는 적심석이 나왔으며 수구지와 토광 등이 조사되었다.

 

할미산성은 조선 후기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考》에는 지금은 폐성(廢城)이 된 고모성(姑母城)이라 

기록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고려시대에 한 노파가 하룻밤에 성을 쌓았다’ 라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어 오랫동안 고려시대의 성곽으로 이해되어 왔다.

향린교회를 지나 계속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는데 지나가는 RV차량이 서더니만

어디를 가냐고 하면서 타라고 한다...이 길은 88C.C로 향하는 외통수길이라

골프장 가는 줄 알고 타라고 하는데 사양을 한다...고맙긴 하지만 가야할 길이

다르기에, 아마도 골프장에 근무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갈림길(07:50)

골프장 정문으로 가기전에 우측의 철조망을 쳐놓은 철대문쪽으로 향한다

한남정맥 산꾼들의 흔적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골프장 철조망이 나오고

철조망을 따라서 우측으로 올라간다

탄천(검단)지맥 분기점이 보인다

분기점 정상에는 88C.C의 골프장 시설물이 있는데 다행히 철문은 열려있다

탄천지맥(炭川枝脈) 분기점(08:05)

이른 아침인데도 생각보다 바람이 드세다...손가락이 빠져나갈 정도로 손이 시리다

다시 철대문 아래로 내려간다

본격적인 탄천지맥 첫 구간이 시작된다(08:07)

골프장으로 내려가는 등로는 길은 좋으나 낙엽으로 인해 상당히 미끄럽다

반가운 시그널이 보이고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골프장 입구 도로가 나온다

골프장 입구를 통과하여 클럽하우스로 향하는데 겨울이라 골프장이 휴장인지 아니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경비실에서 경비원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도 아무런 제지를 안한다

2012년 01월 22일... 그때도 설 전날 이곳을 지나가면서 경비원과 엄청 싸우면서 골프장을 통과했는데...

올해는 이상하리만큼 겨울날씨가 따뜻하여 골프장들이 대박이 났다...그 덕분에 나도 심심찮게 몇번 갔지만...  

88 C.C 클럽하우스(08:15)

88C.C는 88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만든 골프장으로 동.서 코스로

나누어진 36홀 골프장으로 국가보훈처에서 운영하는 골프장이다

클럽하우스를 지나 서코스 티박스쪽으로 향한다

동코스 스타트 하우스를 지나...

동코스 10홀 페어웨이를 따라서 걷는다

전체코스

88C.C 골프코스...88C.C 홈페이지 인용

동코스 10을 따라서 걷는데 우측 능선에 예전에 있었던 국기 게양대는 보이지 않는다 

10번홀 그린이 보이고 가야할 봉우리가 보인다

10번 그린을 지나고 11번홀 가기전에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으로 올라가니...

좌측으로 넓은 임도가 보이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대단하신 분들이다

297.8봉(08:30)

좌측으로 내려간 다음에...

다시 우측으로 내려가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드세고 차갑다

88C.C서코스 13번홀(08:34)

골프장에서 청덕동으로 이어지는 도로 아래는 정자가 보인다

도로를 지나 급경사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용인시 기흥구에 있는 청덕동(洞)은 수청동에서의 ‘청(淸)’자와 덕수동에서의 ‘덕(德)’자를 따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으며, 본래 용인군 동변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청동·덕수동·

읍내면의 언동() 일부를 합쳐 청덕리라 하여 읍삼(구성)면에 편입되었다.

1996년 3월 1일 용인군이 용인시로 승격되었고, 2000년 9월 1일 구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2005년 10월 31일 구성읍과 기흥읍의 통합으로 기흥구가 신설되어 청덕동이 되었다

 

청덕동 일대가 구성지구라는 택지 개발로 인해 자연 민가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며 마을로는

덕수동(물푸레 마을)과 수청동(웃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 지명으로는 길마재, 덕수굴, 성황당이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운영하는 88골프장과 법무연수원이 있으며, 문화유적으로는 조선조 순조 때 도승지와

대제학을 역임한 윤행림과그의 아버지 윤섬, 아들 윤계 정려문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고,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벙커가 나오고...

벙커봉(08:37)

능선 아래로 내려간다

벙커를 지나니 갑자기 철조망이 길을 막고 나는 철조망 안에 갇혀 버렸다

최근에 설치한 듯한 철조망...숏다리인 범여가 넘어가긴 무리이다

窮하면 統한다고 했던가.

맥길 짠밥이 얼마인데...넘어진 고사목을 지형지물로 삼아 철조망을 넘는다

물푸레 고개(284m:08:45)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에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를 넘는 고개인데 청덕동은 포장도로이나

모현읍쪽은 88골프장이 길을 막아 버렸는데 이곳은 옛날부터 물푸레나무가 많고 항상 맑고

푸른 물이 흘러 내린다’고 하여 '청덕리(淸德里)' 혹은 '물푸레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법화산 아래 이곳은 청덕동과 마북동으로 흘러 내리는 물로 탄천(炭川)의 발원지이다.

 

탄천(炭川)은 탄천지맥을 감싸고 있는 천(川)으로 옛부터 삼천갑자 동방삭의 전설이 내려오는

한강의 지류인데, 묘하게도 남에서 북으로 흘러 용인, 분당, 판교, 송파, 강남 지역을 관통하는

준용하천으로, 이곳에서 발원하여 서울 송파구와 강남구를 거쳐 양재천과 합해지면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한강의 제1의 지류(支流)로 더 유명하다.  

 

동방삭(東方朔·기원전 154~93)은 한(漢) 무제(武帝·기원전 156~87)에게

스스로를 천거해 미관말직에

등용된 이래 평생을 조정에 ‘은거’했다는 익살과 해학의

정치가였는데 언젠가 한국에선 장수(長壽)의 대명사인‘삼천갑자 동방삭으로 변했다.

 

원래 수명이 삼십(三十)이었던 동방삭은 십(十)에 한 획을 더 그은 천(千)으로 바꿔 삼천갑자를 살게 됐다.

이에 동방삭을 잡으러 온 저승사자가 성남 분당탄천(炭川·숯내)에서 숯을 빠는 꾀를 냈다.

길을 지나던 동방삭이 “내 삼천갑자를 살지만 이런 기괴한 모습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가 신분이 탄로나 붙잡히고 만다. 이것이 전해오는 탄천 이름의 유래 중의 하나이다.

88골프장이 막아버린 물푸레고개 모현쪽의 모습

내가 조금전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철조망을 끼고 법화산으로 향한다

길에 나딩굴고 있는 현오님의 흔적

나무에 다시 걸어놓고 법화산으로 향한다

법화산으로 으로는 등로는 맥꾼들이 흔히 말하는 고속도로 등로이다

조선시대에 한양과 지방을 잇는 길이 있었는데 한양과 부산을 잇는 길을 영남길이라 했다 

쉼터봉(08:58)

쉼터봉 우측 아래에는 NO27/84 송전탑이 보인다

송전탑을 지나고 완만한 능선으로 오른다

능선에서 내려서니 법화산 직전의 안부가 나온다

안부(09:05)

우측으로는 현대자동차 마북 캠퍼스와 천주교공원 묘지로 향하는 길이다

안부에 있는 이정표

나무 계단을 따라서 법화산으로 향한다

나무 계단을 따라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법화산은 10여년전에 비해 桑田碧海가 된 느낌이다.

예전엔 없었던 많은 운동기구와 정상에는 데크목 쉼터를 만들 놨다 

법화산 정상의 데크목 쉼터...맥꾼 범여가 보기엔 흉물스럽다

산이란 자연 그대로 두어야 가장 멋있는데...

법화산(法華山:383.2m:09:07)

용인시 기흥구 언남동, 마북동 청덕동과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수지구 죽전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데크목 쉼터와 운동기구들이 있고 정상석이 있으나 10년전에 있었던 삼각점은 보이지 않는다.

법화산은 주변의 형세가 타지역보다 높아 여러 신하가 임금에게 조례를 올리는 군신봉조형(群臣奉朝形)

같다는 전설처럼 예로부터 명당보국(明堂保局)의 길지(吉地)로 알려진 곳으로 기흥구 마북동의 '마북천'과

청덕동의 '청덕천'에 흐르는 물로 인하여 탄천(炭川)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구한말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묘와 병자호란 때 3학사의 한 사람인 충렬공

오달제의 묘, 연안부부인 전씨 묘(延安府夫人田氏墓) 등이 있다.

 

법화산은 불경 중의 하나인 에서 법화경에서 따온 이름으로 구성 지역의 중심산이다.

법화경은 우리나라 천태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하면 원명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이다.

『법화경』은 묘법연화경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요사상으로 하고 있으며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으로 우리나라에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것으로

정확히 언제부터 유통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라 고승들의 주석서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유통되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공덕을 쌓기 위해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간행되었다.

정종 2년(1399) 정천익에 의해 간행된 판본이 현재까지 전해진 조선시대 판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고,

이후로 간행기록이 뚜렷한 것만도 약 120여 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이른다. 범어사에는 약 160여 종에

이르는『법화경』이 전해지고 있는데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판본으로 조선 중기 간행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증샷

법화산 데크목 쉼터에서 바라본 할미산성은 미세먼지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용인에는 명당이 많아 인재의 출생이 많다고

전해지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용인...살아서는 진천이 최고이고, 죽어서는 용인이 최고라는데

생전이라 그런지 미세먼지가 심해서 살아서 살기는 그리 좋지 않은 곳인가?

법화산 정상에서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

나무계단을 내려선 다음에 마북캠퍼스 방향으로 향한다

등로는 완전히 고속도로 수준이다

조그만 암릉이 보이고 능선으로 올라선다

317.3봉(09:20)

382.1봉(09:22)

나무 계단으로 내려간다

안부(09:23)

다시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산은 제 무게를 견디느라
스스로 흘러내려 봉우리를 만들고
넘치지 않으려 강은 오늘도
수심을 낮추며 흐른다.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왜 견딤이 아니랴

꽃순이 바람에 견디듯
눈보라를 견디듯
작은 나룻배가 거친 물결을 견디듯
엎드린 다리가 달리는 바퀴를 견디듯

적막과 슬픔을 견딘다.
폭설로 끊긴 미시령처럼
생의 건너에 있는
실종된 그리움의 안부를 견딘다.

 

남유정 시인의  ‘견딤에 대하여’

무명봉을 지나 내려서니...오산리 사기막골로 이어지는 할미산성 갈림길이 나온다

할미산성 갈림길(09:26)

모현읍 오산리에 있는 사기막골은 천주교 공소가 있는데 조선 후기에 박해시절에 형성된 곳이다.

할미산성으로 올라서니 쉼터가 나온다

법화산에서부터 계속해서 현대인재개발원 경고판이 보인다

346.1봉(09:28)

완만한 내리막길

작은 무등치(小無等峙:09:35)

용인시 기흥구 언남동에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사기막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정표에는

좌측 0.5km 지점에 현대지동차 마북캠퍼스가 있다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이곳은 작은 무등치라고

하는데 무등치는 옛날에 사기막을 비롯한 오산리 일대에서 용인고을 관아로 가던 길목이었던 것이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걷다가 보니 일찍 집을 나온 탓인지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앙증맞은 돌탑을 바라보면서 도태굴 고개로 올라간다

도태굴 고개(328.5m:09:41)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사기막골로 내려가는 고개인데

고개 아래에서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운영하는 엄청나게 큰 천주교 공원묘지가 보인다.

 

모현읍에 있는 오산리( 吳山里)는 마을 대부분의 지형이 비교적 완만한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오산, 사기막, 아랫사기막, 양짓 마을 등이 있다.

오산 마을은 삼학사 중 오달제의 산소가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사기막 마을은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으며 아랫사기막 마을은 사기막의 아래에 자리한다는 의미에서 불리워진 이름이며,

양짓 마을은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다는 뜻에서 명명되었다

봉따먹기 하는 산꾼의 흔적이 보인다

좌측 공원묘지로 내려가니 이정표(마북동 주민센터 2.7km)가 보인다

법화산 아래에 있는 기흥구 마북동은 '마북천'과 청덕동의 '청덕천'에 흐르는 물로 인하여

탄천(炭川)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구한말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묘와

병자호란 때 3학사의 한 사람인 충렬공 오달제의 묘, 연안부부인 전씨 묘(延安府夫人田氏墓) 등이 있다

등로에서 바라본 천주교 공원 묘지의 모습

신자들의 편의를 위해 1967년 명동성당에서 최초로 묘지를 개발하였으나 관리·운영상의 어려움으로

1978년 8월초 서울교구청으로 이관되었으며 현재는 재단법인 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1998년 묘지가 만장 처리된 이후로 매장 묘지 분양은 하지 않고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의 수요가 늘어나는데

비해 추가 묘지 확보가 어려워지게 되면서 1991년 6월부터 20년 기한제 묘지 제도를 실시해오고 있다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자 교구장이었던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을 포함한 사제 64명의 묘소가 있다

천주교 공원묘지를 내려서면서 좌측 능선을 바라보니 경찰대학과 한성C.C가 있고

그 너머로 수원의 진산이라는 광교산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언제쯤 편하게 숨한번 쉴 수 있을까

용인 지역에는 골프장만큼이나 유난히 많은게 공원묘지이다.

법화산에서 대지산으로 이어지는 이곳도‘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살아서는

진천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땅이 좋다 라는 뜻)이라 그런지 이곳 용인땅은 명당이 많은 모양이다.

우리나라 최고 재벌인 삼성그룹 창업자인 故 호암 이병철 회장의 묘소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에버랜드에 있고, 故 김대중 대통령도 부모의 묘지를 용인으로 이장한 다음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공원 묘지 안으로 들어선다

이동통신탑이 보이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간다

큰무등치(大無等峙:09:48)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과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사기막골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이정표 옆에는

간이화장실이 보이는데 큰무등치라는 부르는 것은 조금전에 지나온 무등치와 구별하여

큰무등치라고 부른다고 한다.

 

무등치는 뒤에 ‘-치(峙)’가 붙는다. 이는 고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글자인데 일반적으로 현(峴)을

사용하는 고개보다 높고 험한 곳에 주로 붙는데, 고개를 뜻하는 한자는 대관령처럼 끝에 령(嶺)을

붙이기도 하고, 홍천의 삼마치처럼 치를 붙이기도 한다. 원삼면 두창리 황토재는 황토현으로 적는데

현(峴)을 붙인 예가 된다.

 

현재 용인에는 ‘령’으로 표기되는 고개는 없고 ‘치’가 붙은 경우도 매우 드물다.

현이 붙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좌전고개를 좌찬현, 곱등고개를 곡둔현, 메주고개를 멱조현 등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 고개들이 현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100여년 전 『조선지지자료』에는 대지고개를 죽전령, 방울재를 령치, 무네미고개를 수유령,

곱등고개를 곡둔령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고개는 거의 대부분, 적어도 9할 이상 ‘현’를 사용하고 있다.

 

무등치는 앞의 무등(無等)이 광주(光州)의 무등산과 같아서 관심이 간다.

같은 한자표기가 광주와 용인에 있기 때문인데 땅이름 뿌리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등은 무돌, 즉 무재개를 뿜는 돌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이를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한자로 무진악(武珍岳)이라고도 쓰는데 신라 때부터 쓰였다고 하며 산위에 있는 서석대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광주의 옛 이름이 무진주(武珍州)인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데 만약 이를 용인의

무등치에 그대로 연결시킨다면 무돌재가 될 것이다. 또 고개 옆으로 바위라도 있어야 하는데 고개를

특징지을 바위는 없다. 옛날에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조선지지자료』에는 모현면 오산리와 읍내면 상마곡에 있는 고개 이름으로 무등치가 있는데,

오산리의 경우 ‘무듬치’라고 한글 지명이 병기돼 있다. 무듬은 무덤을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마을 주민들의

말을 빌면 무덤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즉 무덤치가 무듬치>무등치로 변화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듬치가 무덤치의 변음이라고 보기보다

한자지명 무등치(無等峙)를 무덤치로 가져다 붙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용인시민신문 자료인용)

큰무등치를 지나니...

죽전 야외음악당으로 가는 좁은 小路가 좌측으로 보인다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묘지쪽으로 올라간다

김녕김공 묘지를 지나...

마북동에서 올라오는 제도권 등로에 합류한다

309봉(09:55)

309봉을 내려간다

송전탑이 보이는 곳까지 걸어가야 한다

좌측 능선 아래 단국대학교 부지인 모양이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와서 그런지 졸음이 몰려와 묘지의 잔디밭에서 베낭을 베개삼아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응달길 고개(317.8:10:15)

정상에는 체육시설과 팔각정이 있고 좌측의 죽전동으로 내려가면 응달길 고개가

나오지만 지맥길은 우측으로 향한다

묘지옆 도로를 따라서 간다

지나온 도태골 고개가 멀게만 보이고 좌측은 레이크사이드 C.C가 있는 능원리이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陵園里)는 포은 정몽주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능(陵)은 임금이나 황제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지명에서 능골이니, 능말이니,

능안이니 하는 말들은 능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용인에는 모현면 능원리의 능골(陵谷),

 매산리의 고시능(高氏陵), 원삼면 문촌리의 능말(陵村) 맹리의 능안(陵內), 김량장동에

속한 능말(陵村) 등이 있다.

 

또한 작은 골짜기 등에 붙여진 능꼴, 능안골, 능안 능모랭이 등의 이름들을 모두 합하면 20여 개

가까운 능꼴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용인지역에 왕이나 왕비를 모신 능은 없다.

따라서 실제로 능(陵)은 없지만 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능으로 비유해서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지고개로 내려가는 능선이 보인다

8년전 트랙도 없고 지도와 나침판만 가지고 맥길을 다니던 시절에는 우측

묘지 윗쪽의 올라왔는데 오룩스 트랙은 좌측의 임도로 향한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간다 

NO93 송전탑(10:23)

NO93 송전탑 아래로 내려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시그널 하나가 보인다

음지의 급경사 내리막길은 땅이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봉우리에서 한번 꺽어지고...

트랙에서는 이곳을 가리키는데 8년전과는 등로가 다르다.

우측의 능선이 더 튼실하다...느낌이 이상하여 우측으로 간다

내려서니 쉴낙원이란 장례식장이 나온다

우측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편한 길을 택했다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서 광주시 오포읍으로 이어지는 43번 국도가 맥길을 짤라 버렸다

대지고개에는 수도권이라 그런지 교통량이 엄청 많아 목숨을 담보로 무단횡단은

엄두도 못내는데 그마저도 횡단보도도 없어 죽전쪽이나 모현쪽으로 가서 지하차도로

건너야 하는데 양쪽 다 거리가 만만찮으나 모현쪽이 조금 더 가까워 모현쪽으로 향한다(10:35)

이런곳에 생태통로를 만들어놔야 하는데...

43번 도로를 따라서 모현쪽으로 내려오니 우측에는 유진레미콘 공장과

희창냉장이 있고 넓은 도로를 버리고 좁은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좌측으로는 43번 국도가 있다

43번 국도 지하차도(10:50)

지하차도를 나오니 맞은편엔 고기창고란 식당이 보이고 좌측 도로로 향한다

다시 대지고개로 올라간다

대지고개(大峙峴:180m:11:00)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서 처인구 모현읍을 지나서 광주시 오포읍을 넘어가는 43번국도가

지나는데 서울근교에 있는 도로라서 차량 통행이 굉장히 많고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곳이다.

고개 북쪽은 대지산·숫돌봉 등 300m 내외의 산으로 되어 있으며, 동쪽은 능원천이 발원하여 경안천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데 대지산 아래에 위치한 고개로서 예전에 임금님이 행차하시어 꽤 넓은 들이라 했다는데

유래하여 넓은 들을 가진 고개라는 의미의 대지고개(大池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 대지고개(11:05)

생태통로가 있었더라면 5분이내로 올 길을 35분을 삥 돌아서 왔다

예전에 이곳이 대지고개였는데 새로이 4차선 도로가 생긴는 바람에 잊혀진 고개이다

8년전 이 길을 걸었을 때는 산마루촌이라는 찻집이 있었는데 지금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온 탓인지 졸음이 밀려온다

양지바른 곳에서 베낭을 베고누워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NO94 송전탑(11:17)

NO94 송전탑 아래를 지나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洞)의 모습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북쪽에 위치하는 동으로 조선 시대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묘소가 있다.

본래 용인군 수진면() 지역으로 큰 못이 있어 대지 또는 죽전()이라 하였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지 · 감바위() · 내대지(안대지말) 등 죽전동 일부를 죽전리라 해서

읍삼면(구성면)에 포함시켰다가 1973년 수지면에 이속시켰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대지()는 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득세하였을 때 마을 앞에

큰 연못을 파고 대지라 부르게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고기는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풍수적 소응을 관련짓는 속설로 이해된다.

 

또 다른 설로 모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명칭인 돼지고개는 대치()의 변음으로 결국 대치고개

아래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대지라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지 마을 앞에 있는 다리를

죽전교()라 부르는 것을 보면 오히려 대지는 죽전()의 한글 표기가 아닌가 한다.

 

『1872년지방지도』에도 죽전이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이것은 이 마을이 어떤 식으로든 대나무와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케 하는데 대나무하면 충절 · 절개를 상징하는데, 모현면 능원리에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전해지는 이야기로 본래 개성의 풍덕에 있던 선생의 묘소를 이장하려 할 때 이 지역이

면례과정에서 용인으로 묘소를 결정하게끔 하는 의미 있는 장소로 떠오른다.

만약 그렇다면 포은 선생의 충절을 의미하는 대나무를 떠올려 이 마을의 이름을 죽절() · 죽전 등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측의 골프연습장에서 심어논 소나무 사이를 걷는다

오르막길 좌측에는 가묘(假墓)들이 보이고...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내대지(內大池)마을 갈림길(11:31)

죽전동에 있는 마을로  안대지, 안대지말 등으로 불리우며, 내지마을 중 안쪽에 있기 때문에 내대지라 하였다.

대지(大池)마을은 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득세하였을 때 마을 앞에 큰 연못을 파고 대지라

부르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고기는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풍수적 소응을 관련짓는 속설이다

대지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대지산(大地山:326m:11:35))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와 모현읍, 광주시 오포읍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지도상에는

326봉이라 표기되어 있는그냥 밋밋한 산이다.

 

용인시 최북단 죽전동에는 대지라는 마을이 있고 대지산이라는 산도 존재한다.

대부분 慶州 金氏 門中소유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이 평야지대도 아닌데

왜 큰 땅이라는 이름의 대지(大地)가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옛날 이곳에 큰 연못이

있다가 매몰되어 못 지(池)자를 써서 대지(大池)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기라고 본다.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많은 문중의 족보에는

조상의 묘의 위치가 대부분 대지산(大地山) 선영이라고 땅지(地)자로 기록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도 그렇다. 전해들은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임금님이나 관리들이 지방 나들이를 할 때 주로 사용하던 큰 길 중의 하나가

서울 양재와 판교를 거쳐 신갈로 이어지는 지금의 23번 국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님이 경복궁에서 아침을 먹고 행차를 하면 남산을 지나 서빙고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 점심때가 되어 말에게도 말죽을 먹였다하여 그 곳의 이름을 '말죽거리'(지금의 양재동)라

부르게 되었으며, 점심 후에 다시 발길을 재촉해 달래내 고개(지금 경부고속도로 위)를 지나 판교에

이르니 소나기가 쏟아져 운중천이 범람하여 길이 막히자 마을 주민이 널빤지를 가져다 임시가교를

설치하여 임금님을 무난히 건너게 하였다하여 그곳을 '널다리' 즉 판교(坂橋)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모처럼만에 그래도 다소 넓은들이 나타나자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한 백성이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조달하는 군량뜰'(지금의 수지 레스피아 일원)이라고 말하자 임금님이

대지고개 쪽을 바라보며 '그래도 이곳은 꽤 큰 땅 이구먼!'하였다고 말하여 그 때부터 이곳을 '큰 땅'

즉 '대지(大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베낭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대지산 정상 3등 삼각점(△수원320 / 1983재설)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숫돌봉을 갔다 오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어 그냥 불곡산으로 향한다

좌측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이정표가 너무 잘되어 있어서 길을 잃어버릴 일은 없다 

다시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서 바라본 숫돌봉의 모습

송전탑을 설치하고 원상복구한 소나무 숲을 지난다

NO 63 송전탑(11:48)

소나무 숲사이를 지나간다

삼면경계봉(11:48)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과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의 경계봉이다

이곳의 좌측은 아침부터 맥길을 같이해 온 용인시와 작별하고 성남시로 들어선다

휘남애 고개(11:50)

좌측으로는 수지구 죽전동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지는데

휘남애 고개 지명의 유래에 대한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10시방향 아래로 내려가면 분당구 구미동으로 이어지는데 맥길은 불곡산으로 향한다

휘남애 고개부터는 성남시로 시계(市界)가 바뀌면서 성남 누비길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한다

검단지맥 안내판도 보이고...

좌측 아래로는 구미동으로 가는 길이다

구미동(九美洞) 갈림길(11:53)

조선시대에는 용인군 수지면 죽전동(竹田洞) 일부지역이었는데, 1914년 광주군 낙생면 구미리(九美里)라

칭하였고, 1971년에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제되었으며,1973년 7월 성남시 구미동(九美洞)으로 개칭되었고

1975년 3월 낙생출장소에 편입, 금곡동 관할이 되었다.


구미동(九美洞)의 동명 유래는 설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어느 설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일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이라 구미(龜尾) 또는, 구산(龜山)이라 한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또한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해김씨- 밀양박씨- 문화유씨 등의 아홉 성씨가 각각 아홉 개의 작은 취락을

이루어 살고 있어 구성리(九姓里)로 불렀다.

 

그런데 9개 성씨가 그 음이 달라서 구음리(九音里)라고 하였고, 그 아홉 성씨가 모두 화목하게 살았고

사람들이 모두 순하기 때문에 구순(九順)으로 부르다가 아름다운 일이 많다고 하여 구미리(九美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는, 금곡리와 동원리 경계 들판 가운데 있는 산이 거북이 형국이라 거북이

그늘 즉, 구음(龜陰)이라 한데서 나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능선으로 올라간다

318.3봉(11:57)

쉼터봉(12:00)

쉼터봉 정상의 이정표

완만한 좌측의 내리막길로 향한다

골안사(骨安寺) 갈림길(12:03)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 있는 골안사는 조선 후기에 창건된 절로 원래 이름은 불곡사(佛谷寺)였으나

분당신도시 개발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찾아올 때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이곳의 옛 지명인 ‘골안’을 따서 절집 이름을 지금의 골안사(骨安寺) 로 바꾸었다

맥길이 아닌 둘레길 같은 느낌...野性을 잃어버린 길을 걷는다

신현리로 내려가는 길도 지난다

정자동 갈림길(12:08)

우측으로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분당구 정자동과

골안사로 내려가는 등로가 있고, 성남 누비길 안내판에는 장자동과 마을유래가 적혀 있는데

구조 이정목에는 부천당 고개라고 적혀 있으나 부천당 고개는 조금 더 가야 한다

정자동 갈림길 안내판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정자동은 조선 중기에 이천부사겸 광주병마진관 등을 역임한

이경인(李敬仁:1575~1642)이란 사람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내놓고, 이곳 탄천변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그 후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정자리(亭子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정자나무가 있어서 정자말, 정자골,

정자동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능선으로 오르는데 앙증맞은 돌탑 하나가 보인다

대광사 갈림길(12:15)

좌측으로 내려가면 분당 서울대병원과, 구미중학교, 대광사로 내려가는 등로이다

대광사는 천태종 구인사의 직영사찰로 분당 서울대병원 근처에 있다

정자쉼터(12:16)

정자옆에 있는 영남길 이야기 안내판

부천당고개(281m:12:17)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골안사 남쪽에서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절골 능선에 걸쳐있는 골짜기로

불곡산 300m 전쯤의 지점에 있는 고개로 불곡산 일대에는 부처지골, 절골, 불당골 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보이는데 높은 고개 너머에 예전에 부처를 모셨던 당집이 있던 골짜기여서

부처당고개라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부천당 고개로 바뀌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량산과 검단산의 남한산성 지대에서 성남시와 광주시, 용인시의 경계를 이루는 대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있는 고개의 하나로, 동쪽으로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로 이어지는 이 산줄기에는 북쪽으로부터

있다갈마치고개, 곧은골고개, 새나리고개, 새마을고개, 부천당고개 등이 있어 동서간의 교통로 구실을 한다. 

서쪽에는 탄천의 동쪽 연안에 구미동이 위치하고 있고, 구미동에는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있다

부천당 고개에 있는 詩 안내판

숙골 갈림길(12:20)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서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숙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좌측의 분당쪽으로 내려가면 LH공사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소나무 있는 성남 누비길을 지나서...

사각정자가 있는 불곡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불곡산(佛谷山:335m:12:23)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정자동과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석과 사각정자,

각종 안내판과 운동기구들이 너무 많이 있어 독립군(나홀로 산행)인 범여는 혼란스럽다

 

산 이름이 한자가 똑같아 경기도 양주의 진산(鎭山)인 불곡산(佛谷山:470m)과 혼동되는 산이다.

분당 지역의 옛지명에서는 큰절골과 작은절골 등에 절터가 있으므로 불곡산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정자동 웃마을 주민들이 이 산을 성스러운 산으로 여기고 산신제를 지낸 것에서 유래하여

성덕산(聖德山)이라고도 하고, 현지에서는 효종산(孝鐘山)이라고도 한다.

 

불곡산은 분당주민의 휴식처 역할을 하는 곳으로 성남시 녹지 축의 최남단에 있으며 남서와 북서 방향에

행글라이딩 이륙장이 있고 특히 겨울에는 용인의 말아가리산과 더불어 분당에서 생성된 열기류 동호인들이

모여 행글라이딩 하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고, 중앙공원· 율동공원· 영장산· 탄천의 분당천과 함께

분당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산이다.

 

인증샷

불곡산 정상의 운동기구 시설들

불곡산은 미륵불(彌勒佛: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래에 사바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이

솟은 산이라 부르는데 지금의 골안사 자리에서 미륵불이 솟아올랐다 하여 이름이 붙혀졌으며 정자동의

웃마을 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냈기에 성덕산(聖德山)이라고도 한다

 

백제시대에는 태자궁에서 훈련을 할 때에 특별히 왕이 동참하여 사냥에 나서면 많은 군중들이 왕의 건재함에

탄복하여 만세를 불러 왕이 온정을 베풀어 왕의 성덕이 영원하라는 뜻의 ‘성덕영세(聖德永世)’라는 산말을 가지고 있다

불곡산에서 태재고개로 향한다

불곡산을 내려서면서 밤나무와 참나무가 계곡, 정상까지 뒤덮어 불곡산 전체는 산림욕장이다.

불곡산에는 산림욕장도 물론 있지만 숲 속 고사리, 둥글레, 고비 산나물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산림욕장(12:30)

전통적인 육산(陸山)에 암릉군이 보이고 이곳을 지나면서

태재고개로 이어지는 뚜렸한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올라가니...

분당구 정자동 정든마을 아파트와 광주시 능안골의 경계지점인 311.7봉 정상이 나온다

311.7봉(12:33)

정상에는 준.희 선생과 맨발님의 똑같은 산패 2개가 있고 삼각점이 보인다

311.7봉 정상 삼각점(△수원312/1987복구)

우측으로 내려서 조금전에 헤어진 등로를 다시 만난다

좌측으로 정자동으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이고 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수내동 갈림길(12:37)

수내동(藪內洞)은 고려 공민왕 때는 낙계(落溪)라 부르던 곳인데, 조선조 경종때 청백리

병태가 숲을 가꾸어 숲안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숲안(藪內)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중기에 취락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곳은 한산이씨 선조 묘와 신도비, 정려(旌閭),

 

고가(古家), 사당, 지석묘(支石墓), 보호수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수내동 갈림길에 있는 구조이정표

정자동 갈림길(12:39)

이정표가 한 곳에 보통 2~3개가 서 있어 헷갈린다

산악오토바이 출입을 막기위한 고육지책으로 목책을 지그재그로 설치해놨다

쉼터와 정자가 있는...

형제봉으로 내려선다

형제봉(兄弟峰:280m:12:43)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과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좌측으로 내려가면

분당동 주민센터가 나오고 사각정자와  불곡산 詩길 표지판과 넓은 공터가 있다

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맥꾼이 꽃길만 걸으니 野性을 잃어버리는 느낌이다

벙커봉을 지나고...

계속되는 완만한 내리막길

242.3봉(12:52)

분당동과 오포읍 신현리 뒷골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이다

산악 자전거 한 대가 힘들게 올라오고 있다

상태(웃태재)마을 갈림길(12:55)
태재 마을 윗쪽에 있는 자연부락을 말하며 범여의 중시조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묘소가 있다

태재로 가는길로 내려선다

이곳이 성남 누비길 시작구간인 모양이다

좌측 도로로 내려 간다

태재(泰峴:180m:13:00)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에서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태재라고도 하며 

『여지승람에는 추현(秋峴)이라고 표기 되어 있고, 『중정남한지』에는 추령(秋嶺)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부천당고개, 새마을고개, 새나리고개, 고든골고개 등 성남시에서 광주시로

넘어가는 고개 중에 가장 험준한 축에 속한다.

조선 중기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태현 또는 태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태현은 분당구에서 가장 험준한 고개 중의 하나로, 원래는 우마차나 보행자가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이었으나

1937년 돌마면 면장이 주선하여 고갯길이 조성되었고, 1985년경 도로가 포장되었다.

 

고갯마루에 고려 말의 문신이자 충신인 김자수(金子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서남쪽 1지점에는

주몽재활원 설립자이자 사회사업가인 김기인의 묘가 있다. 태재의 성남시 방면으로는 지역난방공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고개 너머 광주시에는 판교공원묘지가 있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와 편의점에서 컵라면에다 햇반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고

이곳까지 걸어왔더니만 배도 고프고 상당히 피곤하여 이곳에서 산행을 접기로 한다

원래 계획은 길이 너무 좋고 집이 가까워 이배재까지 가려고 했으나 오늘이 섣달

그믐날이라 집에가서 씻고 연로하신 큰누님과 형님댁이라도 갔다 와야겠다

산행을 종료하고 태재 고개 바로옆에 있는 추어탕집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추어탕이 꿀맛이다... 이렇게 맛있게 추어탕을 먹어보긴 처음이다

다음 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집앞에 까지 가는 버스가 지나가려

하기에 얼른 손을 들어 버스를 타고 집에와서 86세인 큰누나와 형님댁을 갔다오니 저녁

9시경이라 상당히 피곤하지만 마음은 편안하다...오래오래 사셔야 할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