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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탄천지맥(終)

탄천지맥 제2구간 - 태재고개에서 탄천 / 한강 합수점까지

by 범여(梵如) 2020. 1. 29.

☞ 산행일시: 2020년 01월 26일

☞ 산행날씨: 맑고 포근한 날씨

산행거리: 36.6km/13시간 0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태재-육교-구름다리-196m봉-넘어골 갈림길-240.3m봉-모닝사이드

              아파트 갈림길-봉적골 고개-NO5 송전탑-쉼터봉-새마을 고개-NO8 송전

              율동공원 갈림길-233m봉-271,8m봉-233m봉-일곱삼거리-신현3리 버스

              정류장 갈림길-새나리 고개-문형산 갈림길-344.5m봉-곧은골 고개-안부

             갈림길-응달평산-새마을연수원 갈림길-거북터-영장산-무명봉

             이당골 갈림길-직동 버스정류장 갈림길-무명봉-야탑동 갈림길-357.8m봉

             섬말쉼터-NO9 송전탑-웃말 갈림길-333.4봉-안부-영생관리사업소 안부

             고불산-쉼터-갈마치 고개-갈마터널 위-NO14송전탑-연리지-NO15송전탑

             358.8m봉-NO16송전탑-무명봉-NO17송전탑-313.5m봉-이배재-379m

             무명봉-476.9m봉-보통골 갈림길-망덕산-두리봉 갈림길-무명봉

             사기막골 갈림길-무명봉-무명봉- 윗말 갈림길-만수천 약수터-불당리 갈림길

             쉼터-불당리갈림길-검단산 갈림길-검단산-공군부대 앞 도로-523.9m봉갈림길

             생태공원-검복리갈림길-갈림길-남한산성 제1옹성-쉼터-은행동 갈림길

             남한산성 남문-영춘정-수어장대-청량당-청량산-제6암문-안부 사거리

             갈림길-갈림길-등산로 입구-청운사-84.2m봉-브니엘교회-송파공고-거여역

             개미동산 공원-근린 공원-장지근린공원-두댐이공원-회전교차로-투구봉

             송파중학교-성동구치소-웃말공원-양재대로-가락동 삼익아파트 정문

           한양공원-송파사거리-엄마손백화점-석촌동고분군-석촌고분역-삼전역

            잠실근린공원-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삼거리-아시아공원-17.3m봉

            잠실운동장 동남문-잠실운동장-주경기장-탄천1지하차도-탄천/한강 합수점

소 재 지: 경기도 용인시 광주시 오포읍, 목동, 직동, 삼동, 송정동, 남한산성면

             (舊중부면) /성남시 분당구, 중원구, 수정구 / 하남시 학암동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설날이라 특별할 것도 없다...명절에 고향을 가본지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도 없다

고향도 부모님이 계실때 고향이고, 형제간의 자녀들이 출가하기 전에 고향에 추억이

있을 뿐이다...설날 아침에 일어나 목욕탕에 갔다와서 은사스님의 사찰에 가서

부모님의 제사를 모시고 나서 나는 집으로 오고 마눌과 아들은 처남집으로 가버렸다.

어제 산행을 해서 피곤도 하고 쉬고 싶었는데 저녁에 출가한 딸 내외가 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베낭을 대충 챙기고

섣달 그믐날에 했던 탄천지맥 2구간을 하기위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재

시민의 숲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분기점에서 청량산까지는 신산경표와 등로가 같음)

청량산(수어장대)에서 탄천 / 한강 합수점까지 지도

양재 시민의 숲 버스정류장(06:00)

이른 새벽에 버스 정류장에는 손님이라곤 달랑 나혼자다

15분 정도 기다리니 1151번 광역 버스가 도착하고 역시 손님도 나혼자다

버스는 양재I.C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판교I.C를 빠져나와 판교역,

서현역을 지나 태재고개에서 나를 내려놓고는 어둠속에 버스 종점으로 가버린다

태재고개 버스 정류장(06:45)

버스에서 내리니 태재고개는 아직까지 여명이 찾아오지 않았다

태재(泰峴:180m)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에서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태재라고도

『여지승람에는 추현(秋峴)이라고 표기 되어 있고, 『중정남한지』에는

추령(秋嶺)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부천당고개, 새마을고개, 새나리고개,

고든골고개 등 성남시에서 광주시로 넘어가는 고개 중에 가장 험준한 축에 속한다.

조선 중기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태현 또는 태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는데,태현은 분당구에서 가장 험준한 고개 중의 하나로, 원래는

우마차나 보행자가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이었으나 1937년 돌마면 면장이 주선하여

고갯길이 조성되었고, 1985년경 도로가 포장되었다.

 

고갯마루에 고려 말의 문신이자 충신인 김자수(金子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서남쪽 1지점에는 주몽재활원 설립자이자 사회사업가인 김기인의 묘가 있다.

태재의 성남시 방면으로는 지역난방공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고개 너머

광주시에는 판교공원묘지가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6:50)

아직 날이 밝지 않았지만 멍하니 기다릴 수만 없어서 헤드렌턴을 켜고 산행에 나선다.

원 지맥길은 옳거니라는 막국수 간판 뒷쪽으로 올라가야 하나 등로가 없어 그냥 도로를 따라서 간다

전봇대에는 범여의 중시조이신 상촌 김자수 선생묘 표지판이 보인다 

고려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 선생은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 초에 간원정언(司諫院正言:조선시대 사간원(임금에게 간하던 일을 맡아 보던 관아)의

정6품 벼슬이 되었다...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받은 조민수의 사은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며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다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묘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석양과 망주석이 각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상석·장명등·석양 등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 상촌 김자수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98호,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김자수는 대사헌을 지낸 김영유의 조부로 고려말의 충신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묘가

자리하면서 마을이 생겨났는데 이 마을은 원래 '상이리'(上二里)라 부르다가 '새로 생긴 마을'

이라는 뜻으로 '신현리'(新峴里)리 부르게 되었는데 상촌 이 어른이 범여의 중시조(中始祖)이시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어른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등과 동문수학하였으며

고려조에 충절을 받친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충절은 비단 경주김씨뿐만 아니라

후대에 내려 오면서 충(忠)의 표본으로 추앙받고 있다.

 

상촌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지금의 태백시:백두대간 두문동재 근처)으로 들어 갔다가

태조가 그곳을 불질러 태워 버리자 안동으로 가서 은거(隱居)했으며, 그 뒤에 태종이

형조판서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이를 거절하고 추령(秋嶺)에서 절명사(絶命詞)를

지어놓고 자결했다

 

경주김씨(慶州金氏)는 김알지(金閼智)를 시조(始祖)로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중에

하나로 현존하는 경주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신라 56대)의 셋째아들 김명종과

넷째아들 김은열로 시작됐다...김명종을 중시조로 하는 영분공파와 김은열을 중시조로

하는 은열공파 외에 태사공파, 판도판서공파, 장군공파, 호장공파, 10여파로 계승되었는데

범여는 태사공파(太師公后)중 상촌공파(桑村公派)이다 

삼국사기를 저술한 고려시대의 문신 김부식, 조선시대 서예가이며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

구한말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 등이 경주김씨이며, 참고로 범여는 상촌공파 28대손이다

자료..다음 블로그 범여의 세상사는 이야기 인용

윗태재 마을 입구를 지나니...

가로등이 켜져있는 육교쪽으로 올라간다

육교를 지나니 성남 누비길로 이어지는 통나무 계단이 나오는데 조금전에 오르지 못한

능선에서 나오는 등로를 만나 맥길로 복귀한다.

좌측 아래에는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분당 열병합 발전소의 불빛이 화려하다.

분당에서 오포로 넘어가는 57번 국도에는 예전에는 없었던 멋진 구름다리가 어둠속에 나타난다 

태재고개 유래 안내판도 보인다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태재고개(06:55)

조금전에 출발한 태재고개는 구 고개이고 이곳이 태재고개이다

8년전 검단지맥으로 걸었을 때는 아파트 앞 저쪽으로 맥길을 이어갔는데

지금은 상전벽해가 된 느낌이다...예전에 광주에서 한양으로 넘어가는

가장 험한 고개였다고 한다 

이곳부터는 성남 누비길 제3구간 영장산 구간이란다 

영장산길 안내판을 바라보며...

어둠속에 급경사의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우측이 맥길인데 등산로를 폐쇄해놨다

누비길은 능선 윗쪽이 아닌 사면길로 만들어 놨다.

사면길로 이어지는 성남 누비길을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지도상 196봉으로 올라서니 우측 능선 아랫쪽의 신현리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다

196m봉(07:05)

이곳에 삼각점이 있는데 어둠속에 그냥 지나친다

우측으로는 오리지널 지맥길로 이어지는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좌측으로 내려간다

날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한다

넘어골 갈림길(07:15)

우측 아래에는 현대 모닝사이드 아파트가 보인다

넘어가는 고개라서 ‘넘어골’인가?(범여의 생각 中에서)

광주시 오포읍은 지명유래의 설명 자료가 전혀없어 아쉽기만 하다

완만한 오르막길

240.3m봉(07:20)

사물이 식별될 정도로 날이 밝아지기에 헤드렌턴을 벗고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모닝사이드 아파트 갈림길(07:21)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인간의 탐욕 때문에 맥길이 위협받고 있다

봉적골 고개(논적골 고개:07:24)

좌측으로는 분당 율동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봉적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으나 우측의 400m 아래에 봉적골 마을이 있어서 부르는 모양이다 

주택길 옆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NO 5 / 5 송전탑(07:26)

등로에서 바라본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의 모습

조선조말 대한제국 때까지 태현리(台峴里)와 신촌리(新村里)로 2개

마을이었다...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신촌리의

신(新)과 태현리의 현(峴)을 따서 신현리(新峴里)라고 하였으며 4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막골(東幕) · 새말(新村) · 태재(台峴) · 퉁점골이다.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 능선으로 올라서니...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자연이 망가지면 인간들도 살지 못한다는 것을 우매한 衆生들은 왜 모르는지...

우측으로 문형산이 보이고 이곳도 맥길이 언제 없어질 지 모르겠다

쉼터봉(07:32)

뒤돌아 본 오포읍 신현리 너머로 오포읍 능평리 능선이 아련히 보인다.

저곳은 고려말 충신이었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어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행여(行輿) 도중에 풍덕천에 이르렀을 때,

바람에 상여를 덮은 연이 날려 능곡(陵谷)에 떨어졌다고 한다.

지관(地官)이 그 곳을 살펴보니 능(陵)자리처럼 좋은 명당(明堂)이라고 하여

이 곳에 묘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이때부터 능(陵)자리와 같은 골짜기라 하여

이 곳을 능곡(陵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丹心歌

탄천지맥 능선의 많은 곳이 성남누비길 능선과 겹쳐진다

가야할 영장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쉼터의 의자를 지나서...

급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예전엔 없었던 빌라촌이 맥길을 위협(?)하고 있다

조만간 새마을 고개도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새마을 고개(07:40)

성남시 분당구 율동공원에서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새말(新村)로

넘어가는 고개이다...예전에는 신현리 일대가 첩첩산중이어서 도둑이

많았다고 하는데, 웃말에서 살던 사람들이 도둑을 자주 맞으므로 살 수가

없어 새로 촌락을 이루어 옮겨와서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이름은 ‘서울고개’ 또는 ‘설고개’라고도 부르는데 이 지역에서

서울을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지금은 이곳에 아파트와 빌라촌이 형성되어 있어니 桑田碧海가 되어 버렸다

새마을 고개 이정표

 NO8 송전탑(07:43)

율동공원 갈림길(07:45)

성남의 율동공원은 분당 신시가지에 조성된 대형 근린공원으로 성남시민들뿐

아니라 서울에서까지 사람들이 나들이를 가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는데 성남시가

80만 평의 부지에 340억을 들여 1999년 9월에 개장했다.

 

율동공원에는 우선 4만여 평의 시원한 율동저수지가 있고 이 저수지를 한바귀

도는 2.5km의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저수지 안에는 높이 45m의

번지점프대가 설치되어 있어, 번지점프의 스릴을 즐길 수 있으며 이외에도

율동저수지의 분수, 높이 13m 인공암벽, 배드민턴장, 어린이 놀이터,

발 지압장, 잔디광장, 사계절 꽃동산, 갈대밭, 궁궁장 등의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어 계절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또, 호수 주변으로 아늑한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어 밤이면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도 인기가 높다

 y자 길이 나오는데 조금 더 가면 다시 만난다

좌측 능선의 등로는 모두 다 율동공원으로 이어지는 등로이다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율동(栗洞)은 지명은  밤의 명산지에서 유래한 것 같다.

서근(三斤)犬?되는 밤이 생산되었다고 풍자할 만큼 밤의 고장이라서 예로부터

취률리(取栗里), 석물을 갖춘 묘역이 많아서 석인리(石人里)라 했다고 한다.

 

성남서지에는 조선조 중엽에 「산일리」라 부르기도 했는데, 1915년에

율리(栗里)라고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안골 순흥안씨

족보에 보면 안침(安琛:1445-1515)등의 묘지가 율리(栗里)로 기록되어 있고,

영의정 이종성(李宗城:1692-1759)이 지은 대사간 유상재(柳尙載) 묘갈문에도

율리(栗里)로 표기되었으며, 유상재의 형 유상경(柳尙儆)의 묘갈문에는

율촌(栗村)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에 1915년 설은 틀린 것이다.


율동에는 순홍안씨, 진주유씨, 청주한씨, 한산이씨 등의 선조묘가 있으며

새마을중앙연수원, 분당저수지 등이 있는데 구전에 따르면 풍수설 또는 정감록에

율동 일대에는 58대장성 10승지지(十勝之地)가 있다하여 사방에서 풍수가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를 입증이나 하듯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 지역은 안전하였으며

분당지구 개발구역에서도 제외되었다고 한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영장산으로 향한다

233m봉(07:50)

오포읍 신현리 새마을고개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무명봉도 지난다

편안한 길을 지나니...

우측에는 사유지이니 출입을 하지 말라는 휀스가 설치되어 있다

휀스 윗쪽 능선으로 올라간다

휀스 능선 윗쪽에서 뒤돌아 보니 어제 걸었던 법화산과 대지산이 멀게만 느껴진다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271.8m봉(08:02)

가야할 영장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쉼터를 지나니...

산악 오토바이의 횡포를 막기위해 방어목을 설치해 놨다

흐릿날 날씨에 문형산 너머 구름속으로 해는 솟아 오르고...

빌라촌의 CCTV가 산꾼을 감시한다

성남 누빌길 안내판

성남누비길은 함께 더불어 느낄 수 있는 성남시의 아름다운 숲길이라는 의미로

성남과 이웃한 시 경계를 이루는 산의 숲과 숲을 연결하는 등산로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2014년 시가 다양한 산행수요에 부응하고 지역주민이 상시 이용 가능한

생활권을 중심으로 시의 특색 있는 숲길 명칭을 공모하여 심의대상에 오른 더디더디

숲길, 두루누리길, 성남어울林(림) 숲길, 성남마루길, 성남숲올레길, 성남누비길

중에서 명칭선정위원회 심의를 열어 성남누비길로 결정한 것이다

누비길의 등산로는 권역별로 7개 구간으로 구성된다.
복정동 완충녹지부터 영장산, 남한산성 남문으로 이어지는 영장산~남문권역

(1구간 남한산설길),남한산성에서 검단산, 왕기봉, 이배재, 갈마치고개로

이어지는 검단산권역(2구간 검단산길),갈마치고개에서 큰매지봉(영장산)에서

태재에 이르는 매지봉권역(3구간 영장산길),태재에서 형제봉, 불곡산을 거쳐 구미동

불곡산 삼림욕장 입구까지의 불곡산권역(4구간 불곡산길),동원동 부수골에서 태봉산,

응달산, 발화산을 거쳐 석운동까지 이르는 발화산권역(5구간 태봉산길),
하오고개에서 시작하여 국사봉, 이수봉, 석기봉매봉을 지나 옛골에 이르는

청계산권역(6구간 청계산길),끝으로 옛 골에서 인능산을 지나 신촌동에 이르는

인능산권역(7구간 인능산길)이다.

빌라촌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간다

233m봉(08:08)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 빌라촌 철조망을 따라서 간다

또 다시 헤어진 등로를 다시 만나고...

오토바이가 왜 산에 오는거야...

일곱삼거리(08:13)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서 광주시 목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고, 현재는 빌라촌이 들어서는 바람에 고개의 흔적이 찾을 길이 없다

신현리 버스 정류장 갈림길(08:14)

신현3리 버스종점 갈림길 이정표

양재동에서 출발한 1151번 버스종점으로 내려가는 등로가 우측으로 보인다

지난번에 이곳까지 왔어야 했는데 오늘은 30km가 훨씬 넘는 거리라 끝까지

갈라란가 모르겠다 

사면길로 향한다

새나리 고개(08:17)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서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우측은 빌라촌으로 막혀있어 고개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갈 듯 한데

자세히 보니 개구멍(?)같은 곳이 보인다

 

새나리라는 어원(語源)은 초가집의 지붕을 농가에서 볏짚으로 엮어 덮는데,

억새풀이나 갈대로 엮어 덮은 지붕을 ‘새나리’ 지붕이라고 하는데 오포읍

예전부터 논농사가 부족하여 볏짚이 부족한 관계로, 산에서 억새를 베어다가

엮어서 지붕을 덮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새나리골에는 억새풀이 많아 새나리골이라고 불려왔다고 하는데  

조선조 말기에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당하여 숨어 다닐 때, 이곳에 교인들이 들어와

화전을 일구어 살았다. 새나리골은 현재 강남 300 골프장 부지에 들어갔다.

문형산 갈림길(08:19)

강남300 골프장 휀스를 따라서 문형산쪽으로 가는길에 등산객들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골프장 휀스를 따라서 좌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휀스 옆에 쉼터와 팔각정이 나오고 우측 아래에는 강남300C.C가 보인다

강남300C.C의 모습

이 골프장은 나와 인연이 참으로 많은 곳이다

1990년대 중반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골프 머리를 올렸고 이곳 골프장의 총무과장이

우리 아파트 옆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1년에 30~40번 정도 왔으니 참으로 많이도

왔었고, 돈도 엄청나게 많이 갖다준 골프장이었는데, 오늘은 골프장이 아닌

능선으로 걷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골프장 너머로 보이는 문형산(山:496.7m)의 모습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 문형리 · 능평리와 목동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문형()은 조선 시대 대제학의 별칭으로, 이곳에서 선비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문형산이라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문현산()은 주 남쪽 4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문현산()이라고 불렀으며, 『해동지도』에도 문현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정남한지』에 "문현산()은 오포면과 낙생면의 사이에 있으며

주맥은 용인의 보개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 광주군 오포면

산곡명에 문형산이 목동에 소재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북쪽으로 영장산, 서남쪽으로 불곡산과 연결되며 남쪽 기슭에는 봉곡사와 판교공원묘지가

있으며, 정몽주 선생 묘소와 충렬서원도 자리 잡고 있는데 문형리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344.5m봉(08:25)

문형산 갈림길에서 헤어진 성남 누비길을 다시 만난다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 우측으로 광주시 목동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곧은골 내려가는 길 옆에는 율동과 마을유래 안내판이 서 있다 

내리막길 맞은편에는 응달평산과 영장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안부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율동으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곧은골 고개가 나온다 

곧은골 고개(峴:08:35)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의 서근배미에서 광주시 오포읍 직동의 곧은골로

이어지는 고개로 곧은골은 직동(直洞)의 순수한 우리말이며 이곳 근처에는

조선조 세종대왕 때 좌의정을 지낸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는 맹사성(孟思誠)의 묘가

있으며 예전에 율동· 서현동· 수내동· 분당동· 이매동 주민들이 광주()

관아에 가거나 5일장인 경안장()을 보러 갈 때 이 고개를 이용하였다 하여

장고개(峴)라고도 하며 일명, 천조장골고개(千鳥長谷), 곧은 골고개라 칭한다.

지금은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놓여 있지 않으며,

청량산에서 불곡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등산로 이정표 역할을 한다

안부(08:39)

능선을 지나서...

내리막 능선으로 내려간다

갈림길(09:42)

오르막 능선으로 올라서니 좌측으로 율동에서 올라오는 능선에는

사각 평상이 있고 우측으로는 영장산으로 이어지는 이정표가 있는데

누군가가 메직으로 ‘응달평산’이라 써놨다 

응달평산(358.3m:08:47)

성남시 분당구 율동과 광주시 직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영장산 바로 아래에

있어서 그런지 그저 밋밋한 산으로 지도상에는 지명이 기록되지 않고 있으며, 지명은

아마도 좌측 아래에 있는 율동의 응달평골의 지명에서 따온 듯 하다(범여의 생각中에서)

응달평산 정상의 이정표

우측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새마을 연수원 갈림길(08:49)

새마을 연수원 이정표

거북터(08:50)

거북터를 지나니 2번째 새마을 연수원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좌측으로 보인다

영장산 오르면서 바라본 광주시 직동(直洞)의 산그리메 

이 고개 아래 좌측에는 청백리의 표상으로 여기는 맹사성 대감의 묘소가 있고

직리천이 발원하는 곳이기도 한 곳으로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은 황희(黃喜)

정승과 더불어 세종대왕의 치세를 도와 조선왕조 초기에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이요 청백리였다. 

 

그는 벼슬이 정승에 올랐어도 청빈·검소하게 살았고, 음률에 정통한 음악의

달인이었으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멋과 여유로 슬기롭게 살며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긴 풍류 명사였다...조선왕조 500년간 정승을 지낸 사람은 많지만

성이나 아호 뒤에 ‘정승’을 붙여 부르는 이는 대체로 네 명밖에 없었는데 그 네 명은

맹 정승을 비롯하여 황 정승(황희), 상 정승(상진), 오리 정승(이원익)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학식과 덕망이 빼어났고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쳤다는 점, 모범적인

청백리라는 점, 그리고 민족 고유의 멋과 슬기인 풍류 정신으로 한평생을 보냈다는

사실 등이다...  맹 정승이 남긴 풍류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높은 벼슬과는

어울리지 않게 평소 말이나 가마 대신 ‘기린’, 또는 ‘기리마’라고 부른 검은 소를

즐겨 타고 다녔다.

고불 맹사성 영정

맹사성(, 1360~1438)은 호가 고불()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조부 맹유()는 두문동() 72현 가운데에 한 명이며 아버지 맹희도()는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희도부상()」에 실릴 만큼 효자였으며 끝내 조선에 출사하기를 거부했던

인물로 맹사성은 풍수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세종대에 좌의정을

지낸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맹사성 대감의 묘소가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요즘의 정치세태를 꼽씹으면서

영장산으로 향한다...요즘 정치하는 자들은 맹사성 대감처럼 청백리야 바라지

않지만 한결같이 지저분한 인간들이 왜그리도 많은지... 

8년전 검단지맥이라는 이름을 따라서 걸었을 때와는 달리 웬 넘의 이정표와 안내판이 많은지...

영장산(山:414.2m:09:00)

성남시 분당구 율동 · 야탑동과 광주시 직동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부」에 "영장산()은 주 남쪽 20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장()은 영묘한 힘을 가진 것의 우두머리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데

영장산 지명의 유래도 '신령한 기운이 서린 뛰어난 산'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중정남한지』에 "영장산은 산의 남쪽은 경안면, 북쪽은 세촌면이다.

문현산으로부터 15리는 영장산이고, 또 꺾어서 동쪽으로 10여리면 청량산이다.

북쪽으로 불당산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문형산과 연결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1872년지방지도』 「광주전도」에 세촌면 동북쪽에

영장산()이라고 표현되어 있고『광주부읍지』에 영장산에 기우단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서쪽 자락에 있는 매지봉과 함께 맹산 · 영장산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 구봉()으로 변경되었다가 2000년 지역민의 '산이름 되찾기 운동'을

통해 영장산으로 확정· 고시되었으며 서쪽에는 분당신도시가 위치하며, 산기슭에는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이 있다

이 산봉우리 명칭의 유래에는 옛날 잘 훈련된 매를 이용하여 이 산 정상에서

매사냥을 한 것에서 매지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전설에는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는데 이 산봉우리에 매 한 마리가

앉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남았으므로 매지봉이라 부른다고도 전해지며 영장산은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매지봉’이나 ‘맹산’이라고 불렀다. 맹산(孟山)은 조선시대

세종이 명재상인 맹사성에게 이 산을 하사해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전해지며 산아래

직동(곧은골)에는 맹사성의 묘와 맹사성이 타고 다녔다는 흑소의 무덤인 흑기총이 있다

인증샷

영장산 정상 삼각점(△수원437 / 1987재설)

검단산 방향으로 향한다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가야할 검단산이 멀게만 보인다

안부로 내려갔다가...무명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09:08)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이당골 갈림길(308m:09:12)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과 도촌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능선에서 광주시 직동

이담골로 넘어가는 길이다... 야탑동은 조선시대 광주군 돌마면 오야소동(梧野所洞),

상탑동(上塔洞), 하탑동(下塔洞) 지역이었는데, 오야소(梧野所)'()' 자와 상탑,

하탑의 '()' 자를 취한 것이다. 오야소란 이름은, 원래 마을 앞의 들이 넓고 주위에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오동나무 들마을'이라고 하다가 오동나무 열매가 많이 열리는

오야실(梧野實)’로 변하였고, 그것이 한자로 표기할 때 오야소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또 상탑, 하탑의 은 그 정확한 축조 및 해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300여 년 전

이 지역에 탑이 있어 탑골이라 부른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이 지역에 제선충이 심했던 모양이다...소나무 무덤이 많이 보인다

직동버스 정류장 갈림길(19:14)

좌측으로 공동묘지가 보이는데 분당메모리얼파크(공동묘지)이다

분당메모리얼파크와 광주시 이당골 안내판이 서 있다

무명봉(19:24)

등로는 무쟈게 좋다

야탑동으로 내려가는 등로가 좌측으로 보인다

야탑동(도촌 사거리) 갈림길(09:26)

성남시 중원구에 있는 도촌동(島村洞)의 동 명칭은 마을 앞과 뒤에 하천이 있어서

마치 섬처럼 생겼다 하여 섬말(島村)이라 칭한데서 유래되었는데 일설에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마을만 섬처럼 남아서 섬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조선시대

지리지에 도촌리(島村里)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무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912년과 1917년에 발간된 지지(地誌)에는 옹점리(甕店里)로 기재되어 있는데,

예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구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측의 편안한 능선으로 향한다

357.8m봉으로 올라간다

357.8m봉(09:27)

357.8m봉에서 바라본 분당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357.8m봉의 쉼터의자

좌측의 우회길로 내려간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이정표가 나오고...

우측 봉우리로 올라서야 하나 길도 없고 갈길이 멀어 편안한 좌측 사면길을 따른다

좌측의 누비길로 내려가는데...

우측의 봉우리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맥꾼이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되...

나말고 다른 맥꾼들도 이 길로 내려갔구나...

 내리막 능선을 내려서니 중원터널이 지나가는 안부로 내려선다

사거리 안부(09:38)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응당말에서 광주시 직동 이당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아래로는

3번국도가 지나가면 최근에 생긴 제2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중원터널이 지나고 있다.

직동으로 내려가면 능안산이 나오고 도촌동쪽으로 내려가면 모라야산 기도원이 있다

안부에 서 있는 이정표

능선으로 올라선다

섬말쉼터(09:40)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조병화님의 詩 의자

NO9 송전탑(09:47)

송전탑을 지나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서 올라간다

등로에서 자주 만나는 의자

웃말 갈림길(09:53)

좌측으로는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웃말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인다

웃말 갈림길에 있는 또다른 이정표

333.4m봉으로 올라간다

333.4m봉(09:54)

성남시에서 설치한 이정표는 이곳을 고불산이라고 하는데 실제 고불산은 이곳에서 좀 더 가야 한다

333.4m봉 삼각점(△수원311 / 1983복구)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09:57)

광주시 직동과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웃말을 연결하는 안부이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무명봉이 나오고...

맥길은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넓은 공터가 보이고...

좌측으로 살짝 꺽어졌다가...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니...영생관리사업소 내려가는 안부가 나온다

영생관리사업소 안부(10:05)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능선 우측에는 송전탑이 보인다

고불산(古佛山:321m:10:08)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과 광주시 직동, 삼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영장산 아래에 있는 직동에 조선조 세종대왕 시절에 청백리의 표상인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1360∼1438)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맹사성 대감의 호가 ‘古佛’ 이라

산을 고불산이라 부르는 모양이다(범여의 생각中에서)

고불 청백리 맹사성 대감의 일화(逸話)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열 아홉에 장원 급제하여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무명 선사를 찾아 물었다.

스님! 군수인 제가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면 좋겠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지요.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고작 그것 뿐 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스님은 녹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그의 찻잔에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차를 따랐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난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 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워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다가 문틀에 세게 부딪쳤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등로에서 바라본 성남시

뚜렸한 성남 누비길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앙증맞은 돌탑이 있는 넓은 공터도 지난다

쉼터(10:10)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능선 좌측 아래쪽으로는 성남시 영생관리사업소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길은 질퍽거리는 등로가 상당히 미끄럽다

갈마치 고개로 내려간다

갈마치고개에 서 있는 안내판

갈마치 고개(葛馬峙:10:17)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에서 광주시 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389 지방도가 지나가며

갈현(葛峴)이라고도 불리며 고개 좌측 성남쪽에는 화장장이라 불리는 성남영생사업소가 있고

동물이동통로가 있어 도로로 내려갈 일이 없어졌다.

 

갈마치(葛馬峙)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최초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갈마치라 부른 것으로 추정되며 갈마(渴馬)란 ‘말(馬)이 갈증(渴症)이 난다’는 뜻으로

예전의 갈마치는 매우 가파른 고갯길이어서 말이 이 고개를 넘으면 목이 말라 헐떡임으로

꼭 물을 먹이고 쉬었다는 고개로 옛날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여 갈증을 풀어주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갈마치(葛馬峙) 또는 갈현(葛峴)이라고 했다는데 언제부터인가 지명의 유래가 옛날부터 칡이 많이나서

갈현(葛峴)이라 불리웠다고 하는데 평택임씨 족보에는 이곳을 갈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갈현동의

지명은 갈마치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갈마치 위로 설치되어 있는 동물이동통로

갈마치 동물이동통로를 통과하여 이배재로 향한다.

이곳부터는 성남누비길 제2구간이 시작되는 검단산 구간이란다

개념없는 안내판

아직까지 일제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안내판이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자본 수탈을 위해 만든 지리지에

기록된 태백산맥을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ㅉㅉㅉ

태백산맥은 백두대간이라 불러야 하며 광주산맥은 한남정맥으로 불러야 하는데

민초들의 祿으로 사는 공무원들은 산도 안타고 지리 공부도 안하는 지...답답하다

성남시에 돈을 좀 썼는지 길은 아주 잘 만들어 놨다.

하기사 지금은 도지사하는 양반이 성남시장 할 때 뭣이든지 공짜로 퍼주는데는 1등이었지.

교복도 그냥준다, 여성 생리대도 그냥 준다...복지 넘 좋아하지마소...세상엔 공짜 점심은 없소

묘지를 지나 앞에 있는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우회하는 길도 있다

나무 계단으로 올라간다

갈마터널 위(10:24)

이 봉우리 아래로는 성남시 모란에서 경기도 광주, 곤지암으로 연결되는 경충대로 갈마터널이 있다

등로에서 내려다 본 광주시 삼동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조금전에 헤어진 우회도로를 다시 만난다

NO14 송전탑(10:29)

송전탑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유명한 연리 소나무가 나온다

예전에 비해 데크목 계단을 해놨는데 왠지 화려한 게 어색해 보인다

연리지(連理枝:10:32)

연리지(連理枝)란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자라면서 나뭇가지가 서로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엉켜져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연리지라 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내고

있으나, 현재에는 남녀간의 애뜻한 사랑을 비유하여 “사랑나무”라고 불려지고 있다. 

연리지에 대한 유래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 강왕(康王)이 절세미인인 한빙(韓憑)의 부인 하씨(何氏)를 빼앗았다.

한빙이 이를 원망하자 그를 가두고 성단(城旦, 변방에서 낮에는 도적을 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는

일을 하는 형벌)의 형벌을 내렸다. 한빙은 자살하고 말았는데, 부인 하씨 역시 한빙과 합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왕과 함께 누대에 올랐을 때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화가 난 왕은 두 사람을 합장하지 않고 무덤을 서로 바라보도록 만들게 했다.

그날 밤 두 그루의 개오동나무가 각각의 무덤 끝에 나더니, 열흘도 안 되어 아름드리나무로 자라 몸체가

구부러져 서로에게 다가가고 아래로는 뿌리가 서로 맞닿았다.(宿昔之間, 便有大梓木, 生於二冢之端,

旬日而大盈抱, 屈体相就, 根交於下, 枝錯於上.) 그리고 나무 위에는 한 쌍의 원앙새가 앉아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울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며 그 나무를 상사수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상사수가 바로 ‘연리지’ 혹은 ‘연리목(連理木)’이다. ‘연리지’는 ‘비익연리(比翼連理)’라고도 한다.

비익은 날개가 한쪽뿐이어서 암컷과 수컷의 날개가 결합되어야만 날 수 있다는 전설상의 새인 비익조를 말한다

 

臨別殷勤重寄詞(임별은근 중기사):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 량심지): 그 말에는 둘이서만 아는 맹서가 들어 있었지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 장생전): 칠월 칠석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 사어시):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인 말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 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 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 유시진):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 무절기):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수령은 50년이 조금 지나듯 하다

연리지를 둘러본 다음에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좌측의 나무 계단으로 올라간다

NO15송전탑(10:40)

이른 새벽에 집을 나온 탓인지 피곤하기도 하고 졸리기도 하여 잠깐 휴식을 취한다

雌雄

358.8m봉(10:52)

우측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삼동 요골고개로 내려가는 길인데, 지금은 뉴서울 골프장이 자리를

잡고 있어 요골고개는 흔적조차 없다

삼동에 있는 요골마을은 조선조 인조때 예조판서를 지낸 경주 김씨란 분이 나라에 공을 세운 대가로

남한산성에 딸린 땅을 포함한 골짜기 일부를 받았다고 하는데, '작은골'이라 하여 '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맥길은 좌측의 이배재로 간다

NO16 송전탑(10:53)

송전탑을 설치한 이후에 원상복구를 비교적 잘 해놨다

무명봉(10:55)

가야할 봉우리가 곧추 서있는데 갑자기 걸음이 멈춰지는 느낌이다

NO17 송전탑(11:00)

이배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등로 아래에서 차량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최근에 설치한 듯한 쉼터의자도 보이고...  

호젓한 등로를 홀로 걷는다...유일한 친구는 베낭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뿐... 

313.5m봉(11:03) 

능선으로 살짝 올라 섰다가...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 내려간다 

등로 좌측으로는 이배재로 이어지는 338 지방도가 보이고 성남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이배재를 통과하는 육교가 나온다 

이배재(二拜峙:260m:11:09)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과 광주시 송정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성남공단과 광주를 연결하는 338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망덕산(왕기봉)과 검단산,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로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고문헌에는 이보치(利保峙)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뜻은 조선시대에 남한산성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보장지(保障地)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라고 한다

 

지명의 유래는 ‘절을 두번 하는 고개’라고 해서 이배재라 불렀다고 하는데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경복궁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번 절을 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조선조에 유학자로 이름을

날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서 임금이

있는 한양 도성을 향해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두번 절을 하였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이배재 고개 유래 안내판 

망덕산 가는 길

이곳에서부터는 등산객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배재 육교에서 바라본 광주쪽의 모습

나무계단을 따라서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숨은 가파지기 시작하고...섯다가 가다가를 반복하는데 죽을 맛이다

계속되는 오르막길

379m봉(11:34)

등로에서 바라본 광주시 송정동의 모습

다시 오르막길은 시작되고...

무명봉(11:43)

또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오르막길에서 만난 준.희님의 격려문

476.9m봉(11:57)

476.9m봉 이정표

망덕산으로 가는길은 안부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보통골 갈림 구조 안내목을 지나 내려간다

망덕산을 바라 보면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보통골 갈림길(12:04)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있는 골짜기로, 이 일대는 본래 보곡동()이었는데,

상대원이란 명칭은 이 지역에 고려 중엽인 1225년경에 사원()이 건립되어 원터 또는

대원()이라 부르다가 원터 위쪽을 상대원, 아래쪽을 하대원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집()의 서원이 있는 곳을 하대원이라고 한데 대하여,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언신()의 서원이 있었던 이 지역을 상대원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보통천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으로 보통천(普通川)은 중원구 상대원동 보통골에서 발원하여

대원천으로 합류하는 지류 하천이며 대원천은 다시 탄천으로 합류한다.

하천 길이는 740m이며 단대천, 독정천과 함께 대원천의 지류하천을 이루고 있다 

斷石

암봉을 지나고...

넓은 공터가 있는 봉우리도 지난다

등로 우측 너머로 두리봉과 큰두레봉이 보이지만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광주시 남한산성면 불당리에는 두리봉과 큰두레봉이 있으나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암릉구간을 지나...

망덕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망덕산(望德山:498.9m:12:14)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과 광주시 남한산성면(舊중부면) 불당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왕기봉이란 표시석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망덕산이라 표시석으로 바뀌어 버렸구나.

정상에는 쉼터와 누비길 안내판과 이정표가 있다

인증샷

두리봉 갈림길(12:16)

등로에는 신남성돈대 안내판이 보인다

신남성 돈대는 남한산성의 방어기지로 검단산 정상부에 축조한 2개의 돈대(墩臺)를 가리키며

서쪽에 있는 것을 서돈대, 동쪽에 있는 것을 동돈대라고 하는데, 돈대(墩臺)란 성을 쌓을

여건은 안 되지만 전략적인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의 침입이나 정찰, 탐색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물이다

이곳 남한산성 동쪽에 있는 돈대는 한봉과 함께 산성 방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었다  

두리봉 갈림길(12:40)

두리봉 갈림길에 있는 쉼터

누비길 등로는 좌측으로 살짝 꺽어지는데 맥길은 직진으로 향한다 

무명봉(12:24)

다시 헤어졌던 등로로 내려온다

산초나무 안내판이 보이지만 정작 산초나무는 한 그루도 안 보인다

사기막골 갈림길(12:28)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있는 사기막골은 옛날 이곳에 자기그릇을 굽던 막(幕)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2:30)

또 다시 제도권 등로로 내려오는데 맥길과 성남 누비길이 숨바꼭질을 한다

또 다시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미끄러운 낙엽으로 인해 상당히 미끄럽다

점심시간(12:32~12:52)

이른 새벽에 잡을 나온 탓인지 상당히 피곤하다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양지바른 곳에 이곳으론 아무도 오질않아 베낭을

베개삼아 10분 가량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꿀맛같은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떠난다

무명봉(12:55)

등산객 3명이 버너에다 라면을 끓여서 소주 한잔을 하다가 나를 보고는 산불감시요원인 줄

알고 깜짝놀라 어쩔줄을 모른다...괜찮소! 과부 심정 홀애비가 안다고...

산에서 끓여먹는 그 맛 누구보다 잘 알아요... 예전엔 내가 전문가였으니까 

다시 제도권 등로로 복귀한다

윗말 갈림길(12:58)

광주시 남한산성면 불당리에 있는 윗말은 계곡 안쪽의 절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만수천(萬壽泉) 약수터(12:59)

이곳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은 용천약수쪽으로 향하지만

맥길은 약수터 뒷쪽 직진 능선으로 이어진다

약수터 물이 지저분하여 마시기는 부적절한 듯 하여 그냥 지나간다

불당리(里) 갈림길(13:04)

우측으로는 광주시 남한산성면 불당리 윗골로 내려가는 길인데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위치한 불당리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불당을 지어놓고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을 믿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불당골이라 부르다가 불당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쉼터(13:05)

조금전 약수터에서 헤어진 등로를 다시 만나는데 이곳부터는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쉼터에 있는 이정표

좌측 능선이 맥길이나 그냥 제도권의 사면길을 따른다

불당리 갈림길(13:10)

등산객들이 많아서 그런지 예전에 없었던 시설물들이 많이 보인다

검단산 갈림길(13:12)

우측으로는 검단산을 거치지 않고 남한산성 남문(지화문)으로 가는 길이다

맥길은 직진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맥꾼들도 정작 검단산 정상엔 오르지 않는다

이곳은 등산객들이 참으로 많지만 이곳으로 오르는 등산객은 한명도 없다

등로에서 올라서니 넓은 헬기장이 나오고 검단산 정상석과 성남누비길 안내판이 있다

헬기장에 올라서니 진짜 검단산 정상에는 KT송신소와 공군부대가 쥔장 행세를 하고 있고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그 아래 있는 헬기장이 대신 검단산 행세를 하고 있다

검단산(黔丹山:534.7m:13:17)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과 광주시 남한산성면 불당리와 검복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KT송산소와 공군부대가 자리를 잡고 있어 검단산 아래에 있는 헬기장이

검단산의 쥔장 노릇을 하고 있는데 헬기장 모퉁이에 검단산 정상석이 있다.

 

검단산은 이곳보다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는 팔당댐 윗쪽에 있는 하남 검단산(657m)의

유명세에 가려서 이곳이 검단산으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는 편이다.

 

검단산의 지명유래는 백제시대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곳에서 은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 다른 유래는 각처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物産)이 이곳에서

검사를 받고 단속을 하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인증샷

넓은 비포장을 따라서 내려간다

도로에서 바라본 진짜 검단산의 모습 

도로 좌측 아래로 내려가면 황송공원과 성천약수터 내려가는 길이다 

공군부대 앞 임도 삼거리(12:23)

좌측의 오르막으로는 KT 검단산중계소, 정면은 공군8630부대, 우측은 내리막이다.

마루금은 좌측이 옹성봉화대로 표기된 KT기지국이지만 그 길로는 갈 수가 없다

아쉬움을 가지고 우측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좌측 능선이 맥길이나 공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도로를 따라서 간다

523.9m봉 갈림길(13:24)

우측 아래로는 조금전 검단산을 거치지 않고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로이다

설날 연휴라서 그런지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공군부대가 점령(?)하고있는 좌측 능선이 지맥길이다

공군부대에서 쳐놓은 철조망과 경고판 안내판

이정표(13:30)

산꾼은 산길을 걸어야제 도로를 걸으니 지루하고 다리가 아프다

생태공원(13:31)

생태공원에는 힘없는 나라의 설음을 혹독하게 치른 병자호란의 기록을 적은 안내판이 있다

작금의 요즘 이 나라가 병자호란의 전철을 밟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정치하는 인간들은 역사 공부는 하지 않는 모양이다

착잡함이 앞선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검복리(里) 갈림길(13:37)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검복리는 검단산 밑에 자리하고 있으며 자연마을에는 남벽수와 양치촌 등이 있다.

남벽수는 검단산 남쪽 계곡의 산이 병풍과 같이 펼쳐져 있고, 그 앞을 맑은 물이 흘러 한 폭의 산수화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양지촌은 양지바른 곳에 있어 생긴 이름이다

공군부대 가압장도 보인다

셀카놀이

슬픈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이 보인다

남한산성(南韓山城:사적 제7호)은 경기도 광주시와 서울 송파구,성남시, 하남시에 걸쳐있는

산성으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이다.

 

흔히 북한산성()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며,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누()·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으며,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갈림길(13:43)

도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니 우측에 남한산성 제1옹성이 보인다

남한산성 제1옹성(瓮城)

남한산성에는 옹성(瓮城)이 많은데 성(城)의 모양이 항아리를 닮았다고 해서

‘독 옹(瓮)’자를 써서 옹성이라고 불렀는데,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둘러 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됐다.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삼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으며 성문을 방어하기 시설물은 아니고 엄밀히

말해 치(稚)나 용도(俑道)라고 할 수 있으며, 제1옹성은 둘레가 426m이며, 7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고, 원성과 연결되는 시축지점은 약간 넓게 벌어졌다가 가운데는 잘룩하고

끝부분은 다시 넓어져 뭉툭하며 옹성 중간에 장대가 구축되어 있다 

쉼터(13:45)

쉼터에서 올려다 본 제1옹성

지화문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제도권 등로를 버리고...

성곽 아래로 올라간다

뒤돌아 본 제1옹성

남한산성 옹성 지도(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제1옹성 안내판

성곽 아래서 좌측의 남문(지화문)으로 향한다

남한산성은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로 자연석을 다듬어 석축을 쌓고 있는데

한양도성에 비해서 성벽이 상당히 투박한 편이며, 성벽 위에 쌓은 여장은 조총 사용을

전제로 만든 방어시설로 가까운 곳을 향하는 가까운 곳을 향하는 근총안 1개, 먼 곳을

향하는 원총안 2개를 두고, 평여장을 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유래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둘째부인 소서노 둘째 아들 온조 가 하남위례성에 자리를 잡고

백제를 세웠으며 군사 요충 지대로써 성을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백제사는 기록이 소략하여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으나 백제도읍이 검단산 아래 지금의 하남시가 이였으며, 남한산성의 내성의 길이는

성의 둘레가 4,360보이며 1보는 6척(1척은=31cm) 전체의 길이는 8.1km 경사거리로 측량에 의한 수

평거리는 약 7.5km 이며 외성은 4.3km로 전체 산성의 총길이는11.8km이며 낮은 곳은 3m 높은 곳은 7m

내외로서 토성과 산성으로 축조 되어있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일제, 호국의 성지 및 역사적 군사요충지 로써 남한산성은 본래 지금의 성남시와

하남시는 물론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서초구를 거느렸던 넓을(광廣) 고을(주州) 광주 땅이었으며,

예부터 남한산성은 광주의 얼굴이였다.

 

1917년 광주군청이 현 산성 안에서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초라한 산촌마을로 변하였으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가 4.19민주화 운동 후 제2공화국 때 남한산성은 국립공원에서 무효화 되었다가

1971년 3월17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1974년 광지원~남한산성~성남으로 이여지 는 도로가 포장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천하게 되어 년 200백만 명이상 등산으로 건강을 챙기면서 나들이 삼림욕 역사탐방으로써

볼거리 먹거리가 풍부하며 몸과 마음달래는 가족과 함께하는 안식처가 되었다.

 

남한산성에는 4대문과 16개 비밀문이 있으며 동문(좌익문,左翼門) 서문(우익문,右翼門) 남문(지화문,至和門)

북문(전승문,全勝門)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배달이 시초는 남한산성에는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관계로 음식

문화가 발달하여 그 중에서도 해장국이 한양양반집에 까지 소문이나서 새벽 4시에 항아리에 담요를 쌓아서  식지

않토록 지게에 지고 아침식사 할 수 있도록 장장 4시간 걸어서 배달하였다고 한다.

은행동 갈림길(13:55)

성곽 좌측 아래로 내려가면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은행동(銀杏洞)의 동명(洞名)은 은행정(銀杏亭)에서 유래되었으며 은행시장 뒷편에

수고 30m, 둘레 6m, 수령 약 300년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여름이면 정자나무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은행정이라 불리웠는데, 으능쟁이, 은행쟁이라고 하며 은행나무에서

은행동의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은행나무 안내판

은행동 쉼터 갈림길에서 내려서니...

남한산성 남문이라 불리는 지화문으로 내려선다

좌측으로 남한산성 유원지(은행동)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이는데 예전에 참으로 많이 다녔던 길이다

누비길 2구간 시작이란다...난, 오늘 2.3구간을 종주한 셈이다

남문(지화문) 앞에는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남문앞 역사터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수령이 350년이나 되었다는 느티나무 보호수도 만난다

남한산성 남문(13:58)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의 4개의 대문이 있는데 그중에서 남문이 가장 크고 웅장하여

실질적으로 남한산성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출입하는 문이다

서문은 서울 송파나루와 제일 가깝기는 하지만 길이 험하여 암문(暗門)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남문은 주변이 평탄하여 지금도 성남에서 광주 은고개로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간다

 

병자호란 당시 무능한 인조 임금이 남문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티다가 치욕적인

역사를 맛본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 선조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이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정조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門樓)를 복원하였고, 2009년에 정조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했다 

남문 우측에는 19세기 후반에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남문사진이 보인다.

프랑뎅은 1892년 4월 조선주재 제2대 프랑스 영사및 전권공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들어와

1894년 2월 프랑스로 돌아갈 때 까지 외교관으로서 조선사람들을 만나고, 서울과 주변의

산하를 둘러 보면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다  

남한산성 홍예(虹霓)

홍예란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으로 남한산성의 석축과

방어시설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의 숙종때에 완성되었는데 남문은 송파나루와 성남을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정문 역할을 하는 성문이지만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시 많이 구축하였던 옹성을 별로 쌓지는 않고 있었다.

성문은 조총 공격을 대비하여 철판으로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수어장대 이정표를 바라 보면서...

좌측의 남문 망루로 올라간다

성곽에 올라서서 바라본 남문의 모습

남문에서 수어장대쪽을 향해 걸으면서 몇년전에 읽었던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내용이 주마등처럼 머리속에서 되살아 난다

 

소설 남한산성1636년 병자년 1214일부터 이듬해 정축년 130일까지 47일 동안 조선이 통째로

성에 갇힌절체절명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데. 성의 바깥에는 청나라 30만 대군의 말()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성의 안쪽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의 말()이 성을 쌓고 있었고 임금은 너도 옳고 너도 옳다.”며 하루 하루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창의병은 아니 오고 고립무원이 된 성은 그냥 놔둬도 스스로 말라버릴 것이었다

여러 여진 부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자칭 칸(khan:중세기의 몽골, 터키, 타타르, 위구르 등의 종족에서 군주의 칭호)의 자격으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펴는 조선을 응징하러 온 것이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홍타이지(皇太極)는

이번에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그러나 뼛속까지 친명사대 사상을 가진 인조와 군자의

나라인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하던 서인들에게 예법과 글도 모르는 북로(北虜) 오랑캐 여진족은 하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 주화파(이조판서 최명길)와 척화파(예조판서 김상헌)의 흑백 논쟁은

말에 말의 꼬리를 이으면서 평행선으로 달렸다.   

 

김상헌(金尙憲)은 말한다.

 “저들 마음의 어둡기가 짐승 같아 말길이 막히고 화친의 길이 끊어졌으니, 오직 싸움이 있을 뿐이다.

군신상하가 한 몸으로 성을 지키고 창의를 몰아오는 구원병과 함께 떨쳐 일어서면 대의가 이미 우리와

함께 했으니, 깊이 들어와 의지할 곳 없는 오랑캐를 국경 밖으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주화파 최명길은 다음과 같이 받는다.

전하, 지금 성안에는 말()의 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 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성 밖에 오직 죽음이 있다 해도 삶의 길은 성안에서 성 밖으로

뻗어 있고 그 반대는 아닐 겁니다.”

성안에서 많은 언어와 지표들이 뒤엉켰는데, , 그 지향성 안에는 길이 없었고, 말의 길을 이 세상의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곳에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은 겨우 생겨났다.

그 길은 산성 서문에서 삼전나루, 수항단(受降檀 항복을 받는 곳)으로 이어지는 하산의 길이었다.”

아무도 디딘 적이 없는 땅에 몸을 갈면서 나아가야 했던 임금에 대해 작가는 고해(苦海)의 아비이며

그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명분과 실리!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임금은 자신의 보존은 물론, 백성을 위해서라도

성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아니 나와야 했다. 한겨울 고립된 성안의 군사들은 손에 동상이 걸려

조총과 활을 잡을 수 없었고,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이 상황에서 전시 군정과 민정을 책임지는 체찰사인

영의정 김류는 오락가락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만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이 보인 우뚝한 기상이 인상적이었다.

칸의 명을 받은 용골대(龍骨大)는 무위를 보이려 행궁을 향해 홍이포를 쏘아댔고, 식량은 5일 치가 남았다.


마침내 인조는 칸에게 보낼 국서를 최명길에게 맡겼다. 국서(國書)를 쓰는 것은 ‘만고의 역적’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명길(崔鳴吉)은 썼고 이에 대해 김상헌은 “글이 아니다 폄하했다” 최명길은 “글은 아니지만 길이다”라고 맞받아쳤다.

좌고우면하던 김류(金瑬)가 끼어들었다“글을 밟고서 나아갈 수 있다면, 글 또한 길이 아니겠나이까”

결국 인조는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가서 수항단 땅바닥에서 9단 높이에 앉아 있는 칸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렸다.

절을 세 번하고 이마를 땅에 아홉 번 찧었으니 이런 치욕은 전에 없었다.

이 와중에 조선 기녀 200명이 자진모리 풍악에 맞춰 속곳이 펄럭이고 머리채가 흔들릴 정도로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

흥에 겨운 신바람인가 복수의 춤인가? 힘없는 나라의 군왕이 기꺼이 감수해야 할 치욕은 그동안 준비하지 않은

게으름에 대한 역사가 내리는 준엄한 징벌이었다. 40년 전 임진-정유재란에 국토가 시산혈해로 곤죽이 되었건만,

임금과 조정은 이를 반면교사로 여기지 않고 안일했다. 집권층의 유비무환 자세가 없었던 만큼, 백성들은 어육이

되어 침략자의 성노리개가 되었고 수십만 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17세기 중반 명과 청의 거대한 충돌, 그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던 조선은

문명과 야만, 화하(華夏 중국)와 이적(夷狄 오랑캐)의 관계로 국제질서를 이해했다.

이러한 성리학적 교조주의로 똘똘 뭉친 하급관리 오달제(吳達濟)와 윤집(尹集)은 척화신을 데려오라는

칸의 명령에 따라 희생양을 자처하고 나섰고 여기에 홍익한(洪翼漢)또한 오랑캐에게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신념을 지키며 죽어갔다. 목숨보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더 중시한 그들의 절개는 빛났고 역사는

이들을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로 부른다.

 

남한산성에서 나온 최명길은 임금을 따라서 대궐로 갔고 김상헌은 안동으로 몸을 숨겼다.

왕의 항복 이후에도 대궐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의 권력 투쟁은 한결같았다.

소설은 조선 백성인 서날쇠와 장명수를 내세워 명암의 극적인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대장장이 서날쇠는 김상헌의 청에 의해 군기를 수리해주고 김상헌이 희생시킨 뱃사공의 딸 나루를 보살펴준다.

또 왕의 격서를 가지고 성 밖으로 나가서 창의군을 모으는 데 힘을 쏟는다.

그는 천민이지만 충실한 조선의 영웅으로 그려진다.

반면 평안도 은산 관노 출신 정명수는 압록강을 건너가 여진말을 배워 칸의 역관(譯官 통역사)이 되고 호가호위한다.

는 삼공육정승을 면전에서 모욕하고 양반집 규수와 기생을 맘대로 취하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자신의 조국인 청나라로 돌아갈 때는 공물과 뇌물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다. 부모가 천민인 극천(極賤)으로서

조선에 대한 적개심이 천박한 복수심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병자호란 당시나 지금이나 중국은 한국(조선)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조공국 취급을 한다.

지난번에 대통령이란 분이 중국을 국빈 방문해서 10끼중에 8끼를 혼밥을 먹었다고 하여

국격을 떨어뜨리더니 이번의 우한 폐렴에 대처에 있어서 한국에 부임하여 아직 신임장도

받지못한 주한 중국대사라는 놈이 교만하게 굴어도 찍소리도 못하고 이해한다는 수준으로

얼머버리는 이 정부...뭔 약점이 잡혔길래? ...민초들의 자존심은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다

수어장대로 향하는 범여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위례(慰禮) 신도시

위례라는 명칭은 한성시대 백제의 도성이었던 위례성을 의미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부여계(夫餘系)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건국한 근거지가 위례성이라고 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하남의 땅은 북쪽은 한수(漢水)가 흐르고,

동쪽은 고악(高岳)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은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건국한지 13년만에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므로 처음에 정착한 위례성의 위치는 하북,

즉 한강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 위치는 서울 북한산 동쪽 산기슭이나,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세검동·평창동계곡

 일대 또는 상계동·중랑천 방면을 비정(比定)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숨을 헐떡이면서 힘들게 성곽을 따라서 올라오니 이정표( ← 지화문(남문 0.7km →우익문(서문)1.0km

수어장대 0.4km)라는 이정표가 서 있고 멋진 팔각정이 나오는데 이름하여 영춘정이다 

예전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건물터에는 높이 58㎝, 윗너비 154㎝, 아랫너비 180㎝인 원형의 주춧돌 8기가 210㎝ 간격을 두고

장축 510㎝인 팔각 형태로 남아 있고, 서쪽으로 260㎝ 지점에 약 450㎝의 기단석 흔적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정자를 조성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경질의 수키와 조각들과 암키와 조각들이 산재하여 있다.

1972년 남한산성의 천주봉에 새로 정자를 건립하고 ‘영춘정’이라는 현판을 걸어놓았는데,

그 형태가 팔각으로 지어져 보통 팔각정(八角亭)이라 부른다

영춘정(迎春亭:462m:14:25)
성남시 수정구와 광주시 남한산성면의 경계에 있는 ‘봄을 맞이하는 정자’라는 뜻의

영춘정(迎春亭)이라는 멋진 팔각정이 나오고 이곳의 봉우리가 천주봉(天柱峰)이라는데

남한산성을 수도 없이 올랐지만 이곳이 천주봉(하늘을 떠받치는 봉우리) 라는 걸 처음 알았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서울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성곽에서 바라본 서울시내와 롯데타워

미세먼지로 인해 우리집 앞산인 대모산과 구룡산만 희미하게 보일뿐 도봉산, 북한산은 잘 안보인다

등산객 한분이 성곽에서 사랑도 해봤고 이별도 해봤지... 사는거 별거 없더라...
자네와 난 보약 같은 친구야... 같이가세 보약 같은 친구야’ 라는 노래 연습이 열심이다

성곽을 따라가면서 병자호란 당시 민초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듯 하다

소설 남한산성의 주인공은 우유부단한 임금 인조, 주화파(主和派) 최명길, 주전파(主戰派) 김상헌,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만에 또다시 병자호란을 맞아 온갖 고초를 겪었던 민초들일 것이다.

 

병자호란같은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죽을 지 언정 굴복할 수 없다”는 주전파 김상헌과

“굴복을 할 지라도 살아야만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두 사람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지만

소설 “남한산성”의 저자 김훈도 판단을 보류한다

누가 옳았다고는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개인의 안위에서가 아닌

진정 나라를 생각하는 충정의 발로(發露)였으니까.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잠시후에 제6암문이 나오고 수어장대를 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신산경표에서 칭하는 검단지맥은 우익문(서문)쪽으로 직진을 하고

탄천지맥은 제6암문을 빠져나가 위례신도시를 지나 탄천으로 향한다.

산줄기로 기준으로 하면 팔당으로 향하는 것이 맞는듯 하나 합수점으로 보면

탄천쪽이 맞으니 그 나머지는 본인이 판단해야 할터인 즉... 

제6암문을 지나 수어장대로 들어선다

수어장대(守禦將臺:497.1m:14:38)

광주시 남한산성면 청량산 정상에 있는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산성 서편에 남한산성

4장대 중의 하나로 인조 2∼4(1624∼1626)년 사이에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수어장대란 요새 방어를 맡은 수어사가 지휘, 명령하는 곳이며, 건립 당시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하였고,

영조27(1751)년 유수 이기진이 2층 누각을 증축하여 내편은 무망루, 외편은 수어장대라 명명하였다.

이 수어장대는 인조14(1636)년 병자호란때 인조가 친히 수성군을 지휘하면서 청태종의 12만 대군과

대치하며 45일간 항전으로 버티던 곳이며, 항전 45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로 면적은 1층

105.08㎡, 2층 43.29㎡이다. 아래층 평면은 내진(內陣) 3×2칸과 외진(外陣) 5×4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였으며, 맨 바깥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높게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 주춧돌을 받쳤다.

외진부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진부에는 긴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기둥이다.

 

공포는 익공계인데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으며, 첨차 끝은 모두 수서(垂舌)이다.

2층 평방 위에만 화반(花盤: 주심도리 밑 장혀를 초새김한 받침)과 운공(雲工: 화반 상부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사용하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로서 고주(高柱) 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쳤다.

마루보 위에는 판대공(板臺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도리를 걸었다.

합각벽(閤閣壁)은 전벽돌쌓기로 되어 있고, 용마루·합각마루 및 1층 추녀마루에 용두(龍頭)를 얹었으며,

사래[蛇羅: 추녀 끝에 잇대어 댄 네모난 서까래] 끝에는 토수(吐首: 용머리와 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바름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창호(窓戶)는 위층에만 있으며 매칸마다

2짝 판문(板門)을 달았고,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아래층 내진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이다.

외부 정면에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쓴 현판이 있으며, 무망루(無忘樓)’라고 쓴 현판은 수어장대 내부에 있었던 것을

보호각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보호관리 하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매바위

수어장대 옆 모퉁이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수어서대(守禦西臺)’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수어장대의 옛지명이 수어서대란다

남한산성을 축성 책임자였던 이회장군이 참수를 당했는데 그 당시 매가 날아와서

슬피 울고 갔다고 하여 매바위라고 부른다

무망루 옆에는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고 뾰족한 돌비석이 있는데 ‘리대통령 각하 행차 기념식수’ 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고 뒷면에는 단기 4285년 9월 6일이 쓰여져 있는데 68년전인 1953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식수(植樹)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무망루(無忘樓)

조선 영조 27년(1751년) 광주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便)의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懸板)을 세워 일반인들에게

볼 수 있게 하였다...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후 북벌(北伐)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탁지부측량소 삼각점(度支部測量所 三角點:광주시 향토문화유산 제7호)

광주시 남한산성면 수어장대 기단부 서쪽에 있는 삼각점으로 대한제국은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지구곡률을 고려한 대삼각측량을 거쳐 소삼각측량을 하여야 하나 규모가 크고 경비가 많이 들어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아래와 같이 탁지부 주관으로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11개 지역을 선정하여 최초로 독립적인

삼각측량을 실시하여 구소삼각원점을 설치한 후 이를 기초로 하여 구소삼각점을 설치하고, 도근측량 및

세부측량을 실시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호조에서 관장하던 호구∙공부∙전량∙식화∙조세∙재정 등의 사무 가운데 조세와

재정 관련 사무는 탁지아문이 승계하고, 경제 관련 사무는 공무아문과 농상아문이 승계하였다.

탁지아문은 1895년 을미개혁 때 탁지부로 변경되었으며 정부의 회계∙출납∙조세∙국채∙화폐∙은행 등의

사무 일체를 통괄하며 지방의 재무를 감독하였다.

 

탁지부는 근대적인 지적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전국에 11개 지역을 선정하여 최초로 삼각측량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을 위해 설치된 삼각점 가운데 1점이 1908년 수어장대 기단부 서쪽에 설치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탁지부측량소 삼각점(度支部測量所 三角點)은 지상으로 노출된 부분이 높이 22㎝, 폭 12×12㎝의

장방형이며, 정상부에 십자(十字) 표시가 있다. 전면에는‘度支部’라 음각되어 있다. 이 삼각점은 조본원점(鳥本原點)을

기초로 한 구소삼각점 34번 장대(將坮)로 위도 37°20′37.445", 경도 127°10′32.180" 지점에 설치되어 있으며, 현

대의 측량 성과와 비교할 때 좌표점의 오차가 30㎝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대단히 양호하다고 평가된다

청량당(淸凉堂)

수어장대를 나오니 문이 굳게 잠긴 청량당이 보인다

청량당은 조선시대의 충신인 이회와 그의 처 송씨부인, 첩 유씨부인,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청량당은 남한산성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와 그의 처첩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회는 조선시대에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동남쪽 부분을 맡았는데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아 처형을 당한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을 쌓는 일을 돕기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는데 그 후에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 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서장대 옆에 사당을지어 그와 그의 처첩의 넔을 달래게 하였다.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자료에 의하면

본당 정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우 편에는 벽암대사와 이회의 처,첩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본은 6.25에 분실되고 지금 있는것은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청량당 안내판

청량당에는 해마다 정월 초이틀이면 인근의 만신(萬神:부당)들이 며칠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충직한 이회와 그의 처.첩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이 날은 송씨부인이 한강에 투신한 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남한산성 도당굿의 유래는 바로 청량당에 모신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당지기 집이 철거되면서 맥이 일시 끊겼으나

1991년에 남한산성 대동굿 보존회가 결성되면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중정남한지」와「남한가람지」에는 관에서 공식적으로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수어장대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청량당 터가 아닌가 짐작된다

청량당 옆에 있는 안내판

청량당을 내려와 성곽도로로 내려선다 

성곽도로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데 병자호란 때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김상헌이 전란 후에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 고국을 떠나면서 느끼는

비분강개한 심정을 노래한 가노라 삼각산... 그 당시 남한산성을 생각하며 청량산으로 향한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송파나루의 모습

청량산(淸凉山:482.6m:14:48)

광주시 남한산성면과 하남시 학암동의 경계에 있는 산이지만 남한산성의 주봉(主峰)이다.

그러나 흔히들 남한산성으로만 알고 있지, 청량산이 남한산성의 주봉이라 아는 사람들은

그리많지 않은데, 실제 정상은 수어장대가 자리잡고 있어서 지금은 수어장대에서 조금

떨어진 성곽옆에 삼각점이 있는 곳을 청량산으로 보고 있다.

 

주봉인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7m), 동쪽으로는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522m), 망월봉(502m), 남쪽으로는 한봉(414m)이 있다

지형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기복을 형성하며, 서쪽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험하지만,

내부의 평지를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산정을 중심으로 서쪽 저지에는 한강의 지류인 탄천, 동쪽에는 또다른 지류인 광안천이 북으로 흘러

본류와 하며 결코 완만하지 않은 산 자체의 경사가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는

관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청량산 정상의 마모된 삼각점(△수원420)

제6암문(서암문:14:49)

암문(暗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남한산성에는 16개의 암문이 있다.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元城)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虹霓式)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平据式)으로 인조15년 7월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제6암문 안내판

제6암문을 빠져나와 검단지맥이라는 곳과 작별을 하고 본격적인 탄천지맥 답사에 나선다

이정표(14:50)

서암문을 빠져나와서 우측의 유일약수터 방향으로 내려간다

수계(水界)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의 저자 산으로(박흥섭)님이 개척산행을 한 모양이다

평탄한 길을 내려간다

참으로 오랫만에 이 길을 걸어본다.

예전에 마천동 버스종점에서 내려 이곳을 통해 남한산성을 참으로 많이 다녔었는데...

쉼터를 지나면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등로가 얼었다 녹았다 하여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사거리(05:10)

군시설물이 보이고..

좌측으로 319.4m봉 능선이 튼실해 지맥길처럼 보이나 맥길은 아니다

바위를 지나 내려서니...

산으로님의 흔적이 보이고...

소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갈림길(15:16)

예전에 거여동 공수부대로 불리웠던 공수특전사 부대 철조망이 맥길을 가로 막는다

군부대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고, 철문이 열려있어 이리로 내려갈까 생각했지만

내려가서 문이 막혀 있으면 다시 올라와야 하기에 다시 왔던길로 되돌아 간다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우회하는 길을 따라서 내려가니 성내천이 나온다

남한산성 북서쪽에서 발원하여 아산병원 옆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성내천의 발원지 아래를 건넌다

다시 군부대 끄트머리에서 좌측 아래로 내려간다

갈림길(15:30)

우측으로 올라가면 남한산성 서문(우익문)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 호국사쪽으로 내려간다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넓은 길로 내려선다

등산로 입구(15:35) 

이곳이 남한산성 옛길인 모양이다.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후기 10대로 중 하나인 봉화로의 일부 노선으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 중 하나였다.

봉화로의 일부 구간과 주변의 다양한 역사문화 자원들을 연결해 탄생시킨 것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이다.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왕들이 여주의 영릉을 참배하러 갈 때, 보부상들이 보따리를 지고 인근 장터를 떠돌 때,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 이었다.

동서남북 4개의 특색 있는 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며,힐링할수있는 코스이다

좌측으로는 위례신도시 가림막이 보이는데 저 안쪽이 맥길이다

이 코스로 산행을 해본지가 어언 20여년이 다 된 모양이다.

내려가다가 길가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려 우유 하나를 마시면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다

청운사(15:55)

청운사를 지나자마자 가설재로 다리를 만들어 놨고, 문이 열려있어 

맥길을 이어가기 위해 위례 신도시 공사지역 안으로 들어간다

위례신도시 안으로 들어가니...

맥길은 한참을 돌아서 마루금으로 우회를 한다

맥길은 공사판으로 바뀌어 버려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맥길은 위례신도시 아파트촌으로 변해가고 있다

공사장 도로를 따라서 좌측 인도를 따라서 간다

상월선원 안내판이 보인다

전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하여 종단을 대표하는 수좌 스님들과 주요 사찰 소임자 스님 등 아홉 분이

참여하는 동안거 천막결사의 봉행은 불교계의 안거 전통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부처님 재세시의 인도에서 안거의 본래 의미는 우기에 대중들이 모여서 집중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선정력과 지혜력을 갖추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묵언수행중인 상월선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인도를 따라서 가다가 계룡건설 아파트 현장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뒤돌아 본 남한산성의 모습

아파트 공사장을 가운데로 가다가...

우측으로 섬처럼 보이는 언덕이 맥길이다

길은 막혀 버렸고,,,

다시 좌측으로 한참을 돌아서 수로 윗쪽 능선의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마루금상의 84.2m봉은 절반이 날아가버렸다

롯데타워를 바라보면서 걷는다

마루금 좌측 아래의 모습

84.2m봉(16:30)

봉우리의 절반은 날아가 버렸고, 산으로님의 시그널만 바람에 휘날린다

원 지맥길은 구리~판교간 고속도로가 끊어버려 이곳도 한참을 우회해야 한다

도로를 내려선 다음에 우측으로 가니 브니엘 교회가 나온다

브니엘 교회(16:34)

거여동 우체국도 지나고...

송파공고(16:38)

거여역 이정표를 바라보면서 도로를 따라서 간다

거여역 건너편에 붙은 모 정당의 플랑카드

‘언제나 국민곁에 서겠습니다’라고 읽고 행동은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살겠습니다’ 라고 읽는다

거여역(16:41)

송파구 거여동(巨餘洞)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이 본래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대면(中垈面)의

일부로서 거암(巨岩)이란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김이」,「겜리」라 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잔버드리, 개롱리, 뒷말을 병합하여 거여리(巨餘里)라 하다가,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거여동이 되었다

국방과학 연구소도 지나고...

구리~판교 고속도로 아래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개미동산 공원16:47)

이곳부터는 서울둘레길인 모양이다...리본이 많이 보인다

개미동산을 공원을 지나...

고속도로 방음벽을 따라서 걷는다

우측에는 송파베드민턴 체육관이 보인다

우측의 공원으로 올라간다

근린공원(16:54)

다시 고속도로 방음벽으로 내려간다

서울둘레길 이정표를 만난다

문정 시영아파트 쪽으로 향한다

장지근린공원(16:58)

구리~판교간 고속도로가 맥길을 가로막아 한참을 돌아서 마루금에 복귀한다

데크목 계단으로 내려간다

장지근린공원에서 서울둘레길과 작별을 하고...

주택가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문정동 시영아파트 담벼락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문정동 시영아파트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맞은편엔 프라자아파트 12동이 보인다

다시 좌측으로 꺽어지고...

또 다시 우측으로 꺽어진다

좌측에는 공원이 보이고 도로가 나오는데...

도로를 건너 좌측 두댐이공원으로 올라가는데 예전에 임경업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란다

임경업 장군 ...사진 펌

가락동 프라자 아파트가 세워진 이곳은 1985년 이전까지는 오금동 지역이었는데 이곳에

임경업 장군 증조부의 묘지가 있었으나 5.16 이후에 이장했는데 이 묘소의 자리가

매화락지형(梅花洛地形:매화잎이 떨어지는 형세)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전설을 소개하면 지금부터 500여년전 한양에서 빈한(貧寒)하게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임(林)도령이 끼니를 이을 수가 없어 광주(廣州)의 친척집으로 식량을 구하러 떠나서

이곳까지 왔는데, 길을 헤매었다.

마침 먼 곳에 불빛이 반짝거려 찾아가 보니 묘령의 처녀가 혼자 거처하는 집이었다

이 집에서 술과 음식을 대접받고 용녀라는 여인과 동침까지 했다.

 

아침이 되자 여인을 두고 길을 떠난 임도령은 용녀를 생각해서 다시 돌아와서 그 집에 오니

집 대신에 고목이 서 있고, 용녀를 머리를 풀어헤친 채 말하기를 500년 묵은 암구렁이인데

당신 덕에 용이되어 승천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하늘로 올라가던 용녀는 임 도령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 비늘이 3개 떨어질 터이니

이곳에 묘지를 쓰면 자손중에 유명한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비늘 3개가 떨어지고 그것이 매화나무 3그루로 변하였다...이에 임도령은 어머니와

상의해서 부친의 산소를 이곳에 이장했더니 그 후손에 임경업장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좌측의 계단으로 올라간다

두댐이 공원(17:08)

옛날 이곳에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는 마을이 있어 두댐이 공원이라고 부른다

공원에서 우측으로 향한다

나무 계단을 내려간 다음에...

수로를 따라서...

조금전에 헤어진 도로로 내려선다

회전교차로(17:13)

좌측에는 문정동 래미안 아파트 정문이 보인다

협진자동차공업사 건물을 끼고 도로를 건너 우측으로 꺽어진다

빌라건물 앞에서 좌측 공원으로 올라간다

투구봉(70m:兜鍪峰:17:17)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개롱공원이 있고,  개농마을의 유래비가 서있다

투구봉은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이 개롱리에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마산(馬山:지금의 마천동)에서

용마를 타고 출전한 곳이라 유래된 지명이며, 한편 이 봉우리의 모양이 투구와 같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개롱리(開籠里)는 임경업의 갑옷이 농 안에서 나왔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지금은

장지동, 오금동, 문정동, 거여동, 가락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투구봉 자리에 있는 개농마을 유래비

개농이란 지명은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이 현재 판교~구리간 고속도로가 가로 지르는

해발 60m 갑박산 기슭에서 조그만 농(籠)이 발견되어 이를 열어보니(開) 갑옷이 나와

이 갑옷이 화신이 되었다고 한다...농을 열었다는 뜻에서 개농마을이란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개농마을은 오래전부터 오금동, 거여동, 가락동 등 50여 세대가 형성된 마을로서 온 동네가

한가족같은 분위기 속에서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해온, 옛 시골

내음새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다...현재는 프라자 아파트 2동 지역에 임경업 장  조부님이

묘소가 있었고, 삼환아파트 10동 지역에  해발 70m의 조그만한 산에서 임경업 장군이

임전때 사용한 투구가 나왔다고 하여 투구봉이라  전해지고 있다.

1983년 도시계획사업으로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신도시로 탈바꿈하여 법정 지명은

문정동과 가락동을 거쳐 가락2동으로 불리우고 있다.

온고지정(溫故之情)이란 옛말이 있듯이 옛 선조님들은이 갈고 닦아온 터와 정취를 잊지않고

후손에게 도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이 비석을 세운다

 

西記 一九九二年 八月 二五日(유래비 뒷쪽 내용) 

투구봉을 내려오니 도로가 나오고 쌍용 프라자 상가가 나오고 국회의원

나오겠다는 자의 커다란 플랑카드가 보이는데 정치하는 자들은 대체 믿음이 가지 않아서...

송파중학교 정문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송파중학교 담벼락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맞은편에는 서울가동 초등학교가 보인다

성동구치소 앞(17:26)

예전에 범털들이 많이 수용된 교소도였으나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날씨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맞은편에는 가락2동 성당이 보이고...

가락2동 주민센터 버스 정류장도 지난다

이정표를 따라서 양재대로 방향으로 향한다

도로를 건너서...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쌍룡아파트 104동을 바라보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쌍용아파트 104동에서 우측의 웃말공원으로 올라간다

웃말공원(17:36)

양재대로(17:40)

양재대로를 건너니 삼익아파트 버스 정류장이 나오고...

삼익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간다

가락동 삼익아파트 정문(17:45)

삼익아파트 정문을 빠져나와 좌측으로 꺽어진다

송파레미안 파인탑 아파트 정문을 지난다

건너편에는 송파2동 주민센터가 나오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한양공원(18:10)

한양아파트 앞에 있는 한양공원도 지난다

날은 점점 어두워 지고...

이곳은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가는데까지 가보기로 한다

송파사거리(18:18)

엄마손 백화점(18:21)

직진을 하면 배명고등학교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측 골목으로 꺽어진다

백제초기의 적석총과 고분군이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송파구 석촌동 석촌호수 인근에는 백제초기 적석총과 석촌동 제1호분에서

제5호분까지의 무덤이 있고, 3호 움무덤이 있는데 지금은 주민들이 산책하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석촌동 고분군(서울 石村洞 古墳群:사적제243호:18:30)

서울 석촌동 고분군(서울 石村洞 古墳群)은 백제 초기의 무덤인데 이 일대에는 1916년 조사

당시 90여 기의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봉토분(흙무덤)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석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돌무지무덤이 많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덤은 개발로 인해 없어졌으며, 1974년 조사 당시 3호와 4호 적석총까지만 남아 있었다.

1985년에는 이 일대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백제고분군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1호와 2호

 적석총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이곳의 적석총은 외형상 고구려의 발달된 기단식 적석총과 같지만 내부 구조면에서는 서로 다른 유형이다.

즉 3호 적석총은 무덤의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고구려식이며, 2호와 4호 적석총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백제식이다. 기단부만 남은 1호 적석총은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남분은 고구려식이고 북분은 백제식이다. 무덤 내부와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와당, 금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3호 적석총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촌동 제5호분

분구를 흙으로 쌓은 봉토분으로서 유존 상태가 양호하고 또 이 일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봉토분이므로

보존하기 위하여 분구 일부만 발굴 조사하고 내부 구조는 확인하지 않았다.

분구는 내부 구조 위에 흙을 다져 쌓아 덮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을 섞어 한 벌 깐 다음에 다시 그 위에

흙을 엷게 덮은 즙석분구인데 이와 흡사한 즙석분구의 본토분인 가락동 제1·2호분이 이 고분에서

동분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2기의 고분은 1969년의 발굴 조사에서 그 내부 구조가

확인되었는데 가락동 제1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형식이었고 제2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협의의 것과 옹관묘 형식의 것이 함께 묻힌 구조형식의 고분이었다.

 

가까이에 있고 거의 같은 시기인 백제 전기 2기의 고분인 점으로 미루어 석촌 제5호분도 그 내부 구조는

목관토광묘 형식의 것으로 추측케 되며, 분구의 현재 크기는 지름 17m, 높이 3m인 원형봉토분이다

1호분은 학술조사 중인데 그 너머로 롯데타워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석촌동 제1호분은 일찍이 파괴된 고분 위에 흙이 덮이고 민가가 들어서 상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적석 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으로 보인다

즉 동서 9.9m, 남북 8.9m 크기의 북분과 동서 9.6m, 남북 9.8m 크기의 남분이 합쳐진 것인데 함침에 있어

남·북분 서쪽 기단부는 너비 3.2m의 적석단으로 이어졌으며, 내부 구조는 남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길이

20cm~30cm 크기의 표갠돌로 네 벽을 쌓고 바닥에 10cm 안팎 포갠 돌 조각·자갈 등을 깐 석곽 4개가 있었다.

 

4개의 석곽 중 중앙에 가장 큰 것이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놓였으며 작은 석곽 3개는 북쪽 적석벽에 잇대어

동서 방향으로 1열을 이루고 놓여 있었다. 가장 큰 중앙의 석곽은 길이 약 2.5m 너비 약 2.3m이고 1호

소형석곽은 길이 약 1.8m·너비 1.2m, 2호 소형석곽은 길이 1.6m·너비 1.4m, 3호 소형석곽은 길이 1.2m·

너비 1.0m이고, 평면모양이 이 적석총과 거의 같은 것으로는 고구려의 적석총인 중국 길림성 환인현

고려묘자촌 제15호분, 평안북도 송암일 제45호분 등이 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주마간산격으로 대충 둘러보고 다시 길을 나선다

골목을 나오니 석촌고분역으로 이어지는 지하차도가 나온다

석촌고분역(18:43)

석촌고분역 도로를 건너니 예전에 가끔 들려 점심을 먹었던 나주곰탕집이 보인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5km나 남았기에 배가 너무 고파 이곳에 들려 저녁을 먹기로 한다

저녁식사(18:45~19:20)

오랫만에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서 느긋하게 곰탕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다 먹고나니

이제서야 조금 살 것만 같다... 밖으로 나와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나려는데

이게 뭐야! 울고 싶은데 빰 맞는 기분이네...카메라 베터리가 나가 버리는 것 아닌가.

참고로 난 휴대폰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 내일 할 일도 없는데 나머지는 내일 하기로 하고 집으로 향한다

1월 27일 삼전역(13:45)

오랫만에 늦게까지 잠을 자고 근처 찜질방이 있는 사우나에 갔다가 집에오니 아무도 없다

베낭에 물 한병과 비가 올 것 같아 우산만 넣고 집을 나와 석촌고분역으로 향한다 

도로 건너편에 송파구의회 건물이 보인다

합수점으로 걸어가는데 과연 이렇게 걸어가는게 뭔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삼전역(三田驛:13:57)

서울 송파구에 있는 삼전동은 원래 서울근교 한강 5진(津)중의 하나였던 삼전도(三田渡)로서

마전포(麻田浦)라고 하였는데 삼밭(麻田)이 있어서 유래된 지명이며, 일설에는 밭이 3개가

있어서 삼전(三田)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서울근교 5진중의 하나인 이곳은 다른 곳은 조수(潮水)가 올라왔으나 이곳은 물이 밀리지 않아

유일하게 밭이 3개가 있었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도로를 건너니 잠실관광호텔이 보인다

찜질방을 지나니 잠실근린공원이 나온다

잠실근린공원(14:05)

잠실근린공원에는 새내(新川)마을 유래비와 부군당 표시석이 있다

부군당(府君堂) 표시석

조선조 인조 때 남한산성 축성 당시 서남쪽 성벽을 맡아 공사를 하던 이회(李晦)는

다른 구간보다 튼튼히 잘하여 타의 질투와 모함으로 무고하여 처형을 당하였다.

 

이회의 부인 송씨(宋氏)는 남편의 축성 사업을 재정적으로 도우려고 쌀을 비축하였으나

남편이 처형당한 것을 알고  한강에 빠져 자결하였다.

이에 인근 주민들이 이 자리에 부군당(府君堂)을 지어 송씨 부인의 넔을 달래왔다고 한다

현재 이 자리에 있었던 부군당은 없어지고 그 유래만 전해지고 있다

원주민들이 세운 잠실새내 유래비

삼전동이 있는 이곳 잠실은 1971년 남쪽으로 굽어돌던 송파강을 메워 잠실섬을

75만평의 육지로 만들었다...이 사업뒤인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주변 터와 합친 340만평에 잠실 아파트 단지와 잠실 종합운동장을 만드는 잠실지구

종합개발 계획사업이 추진되어 새로운 개발지로 변하였다.

 

이곳에는 조선조 세종때부터 성종때까지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길렀는데 잠실의

누에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다고 하며, 이곳의 감독관은 궁궐의 환관, 즉 내시를

보내서 누에꼬치의 생산실적을 점검하게 하였다.

새내마을은 100여가구가 있는 큰 마을이었지만마을이 사라질 때까지 전기도 안들어왔다고 한다

송씨 부인의 애절한 사연이 깃던 잠실근린공원을 지나 합수점으로 향한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삼거리(14:14) 

삼거리를 건너 아파트 담벼락에서 우측으로 향한다  

송파문화원 주차장으로 향한다 

송파문화원 주차장을 지나 아시아 공원으로 들어선다

아시아 공원(14:20)

아시아 공원은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치를 때 선수단 숙소로 사용햇던  아시아 아파트를

지을 때 만든 공원이다 

17.3m봉(14:21)

아시아 공원 정상으로 족보가 있는 봉우리이다

대체적으로 삼각점은 봉우리 정상에 있는데 이곳은 엉뚱한데 있어서 한참동안 헤매다가 찾았다

17.3m봉 정상 삼각점(△성동467 / 1994재설)

아시아 공원에 있는 부리도(浮里島)표시석

송파구 잠실동에 있던 섬으로서, 한강 가에 있어서 큰 물이 지면 사방에 물이 들고, 오직 이곳만 남아서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는데,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현재의 잠실이 섬으로

있을 때 이름으로 양재천,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형성된 모래섬으로 동잠실이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양잠을 장려하여 이곳에 뽕밭을 조성하고 잠실(蠶室)을 두었으며, 신천리와 잠실리가

있었던 관계로 잠실도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강에 홍수가 발생할 때마다 유로를 변경하면서 자연제방이 침식되고 유로가 변경되면서 커다란 하중도가 생긴 것이다.

잠실도가 육지로 된 것은 한강 공유수면 매립 사업 때문인데 이때 당시 남쪽으로 흐르던 한강이 흐름을 바꾸면서

만들어진 호수가 석촌호수인데 1971년 송파강을 메워서 잠실섬을 2.5㎢의 육지로 만들었다.

 1973년 주변 터와 합친 11.2㎢에 잠실아파트와 잠실종합운동장을 만드는 잠실지구 종합 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되었다.

잠실섬에는 새내마을(신천)과 잠실마을, 그리고 부렴마을(부리섬)이 있었다

부리도 표시석 뒷면

내가 카메라 공부를 하러 다니는 송파문화원

시간은 많겠다...아시아공원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다시 길을 떠난다

잠실운동장 동남문(14:37)

운동장 가운데 도로를 따라서 합수점으로 향한다

경기를 하는지, 행사를 하는지 차량들이 많다 

조형물 이름이 웅비(雄飛)란다

잠실주경기장(14:44)

좌측으로 야구장도 보이고 직진으로 향한다

좌측으로 나간다

서1문이 나오고 탄천1지하보도로 내려간다

탄천1지하보도(14:50)

잠실 유수지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탄천을 끼고 잔차도로를 따라서 합수점으로 향한다

이곳은 시간이 날 때 잔차를 타고 바람을 쐬러 나오는 곳이다

망중한을 즐기는 새때들

드디어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 도착한다.

탄천(炭川)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 법화산(法華山)에서 발원해 서류하다가

마북동에서 유로를 틀어 북류한 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서 동막천(東幕川)을 합한다.

성남시 수정구를 지나 계속 북류하던 탄천은 서울특별시로 접어들면서 북서쪽으로 유로를 튼 후,

강남구 대치동에서 양재천(良才川)을 합쳐 한강으로 유입된다. 탄천은 유역면적이 302㎢이고,

유로연장이 35.6㎞이다.

 

탄천은 성남시의 옛 지명인 탄리(炭里)에서 비롯되었으며. 탄리는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수진동·신흥동 등에

해당하는 곳으로 과거에는 독정이·숯골 등의 마을이 있었다. 조선 경종 때 남이(南怡) 장군의 6대손인

탄수(炭叟) 남영(南永)이 이곳에 살았는데, 그의 호 탄수에서 탄골 또는 숯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탄천은 탄골을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이다

드디어 합수점에 도착하여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인증샷을 남긴다 

오늘은 석촌고분역에서 이곳 합수점까지 약 5km를 걸은 셈이다

탄천/한강 합수점(15:02)

약37km의 거리를 13시간 05분에 마감을 하고 나니 해냈다는 벅찬 감동에

짜릿한 전율을 느낌을 느끼면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데...이 맛이 지맥하는 거 아닌감

아쉬운 마음에 합수점을 한번 뒤돌아 보고 잠실운동장역으로 향한다   

시간도 남겠다...텅빈 집에 가봐야 할 일도 없고 하여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비를 가보기로 하고 

잠실종합 운동장에서 버스를 타고 잠실역으로 향한다...버스에서 내려 롯데호텔을 지나 석촌호수

한 켠에 있는 삼전도가 있는 쪽으로 간다  

삼전도비(三田渡碑:사적 제101호)

삼전나루가 있었던 삼전도(三田渡)도 한양 동쪽의 진출로였다.

삼전도는 새내(新川)마을 동쪽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광주부 서북쪽 한강 연안에 있던 나루터였다

이 나루는 여주, 충주로 가던 길목으로 뽕밭나루, 삼밭개, 세밭나루, 삼밭나루, 삼밭게라고도 하였다.

「동국여지비고」와「대동지지」에도 “삼전도와 신천(새내)사이에 뽕나무밭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강의 흐름이 가끔 둘로 갈라졌는데 송파 본류는 삼전도 앞으로 빠르게 흐르고신천 지류는

가물면 모래밭이고, 물이 넘치면 강이 되었다고 한다     

 

삼전나루는 ‘삼밭나루’ 또는 ‘삼밭게’라도도 했는데 밭이 있었다는 뜻이다

서해 바닷물이 미치지 않는 땅을 갈아 삼(麻:대마)을 심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한강도, 노량도, 양화도와 더불어 4대 도선장의 하나로 그 위치가 한양도성의

동쪽에 치우쳐 있는데 태종의 헌릉이 대모산 근처에 설치되면서 능행로 개설이 요구되어

세종 21년에 삼전도가 신설되었다

삼전도비 안내문

삼전도 비 받침대

삼전도비의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으며,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ᡳ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ᡳ
ᡤᡠᠩ
ᡝᡵᡩᡝᠮᡠᡳ
ᠪᡝᡳ

Daicing Gurun-i Enduringge Han-i Gung Erdemui Bei,몽골어: ᠳᠠᠶᠢᠴᠢᠩ
ᠤᠯᠤᠰ ᠤᠨ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ᠤ
ᠡᠷᠳᠡᠮ
ᠪᠢᠯᠢᠭ᠌ ᠢ
ᠳᠠᠭ᠌ᠤᠷᠢᠰᠭ᠌ᠠᠭᠰᠠᠨ
ᠪᠡᠢ
Dayičing ulus-un

Boγda Qaγan-u erdem bilig-i daγurisγaγsan bei)는 청 제국의 전승비이며 송덕비(頌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숭덕제가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 (인조 17년)에 세워졌다.

머리와 받침돌 조각이 정교해 조선 후기의 뛰어난 비 중 하나로 손꼽히며 치욕비(삼전도의 욕비(辱碑))라고도

불리며, 비를 만들 당시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는데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 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조정의 명으로 조선에서 건립하였는데 비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의 높이는 3.95m, 폭은 1.4m이고 무게는 32t이다.

비문은1637년 11월 25일 인조 15년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짜,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삼전도는 송파에 있었던 나루터로 조선시대의 한양의 교통 중심지로 한강에 최초로 생긴 나루터다.

삼전도를 건너 경기도 여주나 이천, 충청도 충주를 갈 수 있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1636년 후금(後金)의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원인은 청이 조선에게 형제의 나라로 지내자고 하였으나 청과 가까이 지내지 않고,

명나라와의 기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청의 군대가 빠르게 한성으로 진격하자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는 일부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는데, 남한산성은 곧 청의 군대에 포위되었고, 성 안에서는 식량이 부족하였으며 겨울이라

얼어죽는 사람마저 생겼다...이에 김상헌을 비롯하여 청과 싸울것을 주장(주전파:主戰派)와

최명길이 주동이 되어 청과 화해를 하자는 주화파(主和派)가 연일 싸웠으나 무능한 인조 임금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 45일만인 1637년 1월 30일 세자와 신하 수십명을 이끌고

남한산성 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皇太極) 앞에서 무릎을 꿇고 3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의 “삼배구고두레((三拜九叩頭禮)” 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삼전도비 옆에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대가 있는데 처음에는 이 받침대 위에 비를 세우기로 했으나

청나라가 더 큰 규모의 비석을 원하여 폐기되면서 받침대만 남아있고 그 옆에 다시 만든 비가 서 있다

항복을 한 후 조선은 청과 군신(君臣)관계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을 청에

인질로 보냈으며 조공을 하고, 청이 전쟁을 할 때는 지원군을 보내는 등 굴욕적인 역사를 이어갔다 

삼전도비를 둘러보는 범여의 마음이 착잡하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가 무능하면 민초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아직도 저 자들은 모르는 것 같아서... 

“아픈 역사를 忘却하는 민족은 늘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맥길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