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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

정선군 신동읍 예미리(禮美里) 지명유래

by 범여(梵如) 2021. 8. 24.

예미역


신동읍 소재지인 예미리는 본래 평창군 동면 지역에 속해 있다가 고종 32년(1895년) 정선군에 편입되었다.
평창군에 속해 있을 당시 고성리(古城里)에 내창(內倉)이 있었고 지금의 예미초등학교 뒤에 외창(外倉)이

있어 주민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곡을 저장해 두었으며 노일(魯日)에는 5일장이 열리기도 했다.


예미리(禮美里)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 작업을 하면서 노일, 납돌, 유문동을

합하여 여미산(女美山)을 예미산(禮美山)으로 바꿔 부르면서 불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예미리는 오랜 옛날부터 제천에서 영월을 거쳐 정선 삼척 등지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인 까닭에

신석기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거주했음을 지금의 읍사무소 아래 고인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국 당나라때 파락사(派樂使)로 우리나라에 왔던 사신 임의(林義)로 인해 생겨났다는 의림길 등의

지명을 통해 보더라도 오래 전부터 정선 등지의 산간 지방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가사리(佳士里)일대의 광산 개발로 인해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일본 이름을 단 술집 등이

들어섰고, 병원 등이 들어서기도 했다.

 

그후 해방이 되고 태백산맥 일대에서 엄청나게  많은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인 1960년 초반 국토건설단이 들어와 철도 도로 등을

건설하면서 두메산골인 예미리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함백광업소가 폐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가가 깨끗하게 정비되는 등 폐광과 이농 등에 따라 침체를 보이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새롭게

발전해 가고 있다.
현재 행정 7개리에 587가호 1,996명의 주민들이 상업 농업 등 비교적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창가산
의림길 뒤쪽에 있는 산이다. 고종32년(1895년) 이전까지 신동지역이 평창군 동면에 속해있을때

지금의 예미초등학교 아래에 동창(東倉)의 외창(外倉)이 있었는데 그 뒷산이라고 해서 '창가산'이라고 했다.

지금의 예미초등학교 바로 뒷산이다.

장터거리
지금의 예미농협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옛날부터 사람이 번성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시대 신동읍 일대에서는 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많은 일본 사람들이 몰려들어 '야스하라'

'우미하라'등의 음식점이 번성했다. 지금도 사람이 번성한 곳이다.

비석거리
구 읍사무소 입구 아래를 말한다. 예전부터 면장의 공적비.송덕비가 세워져 있었으므로 '비석거리'라고 불렀다.

그후 읍사무소가 이전하면서 남아 있는 것은 읍사무소 앞으로 옮겼으나 많은 숫자가 훼손되거나 파손되었다.
송덕비는 주민들이 선정(善政)을 베푼 면장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세우는 경우도 있었으나, 면장이 자신의

악정(惡政)은 은폐하고 조작하여 스스로 건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이권을 바라는 무리들의 지나친

아부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일부에서는 선정비 건립을 핑게로 돈을 거두어 일부를 착복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송덕비.선정비 건립은 주민들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비쳐져 원성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돌을 세워 놓고 돌을 던져 비석을 깨뜨리는 비석치기(벼락까기)라는 놀이 문화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쇠진이
지금의 신동읍사무소 뒤쪽 석항천 옆을 말한다. 일설에는 개울 옆에 굴이 있어 돌을 구르면 내려가는

폐철 구덩이가 있어서 생겨난 지명이라고 하지만 인근에서 생산된 산화철을 녹여 가마나 농기구 등을

만들던 쇠점(鐵店)이 있었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쇠점'이 '쇠정'으로 변했고 이것이 다시 '쇠진이'가 되었다.

예전에 도살장이 있던 곳 아래쪽이다.

배영거리
지금은 '용거리'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구 읍사무소가 있는 곳 주변에 의림길 이라는 집단 부락이

있었는데 의림길에 온 손님을 맞아들이고 배웅할 때 이곳까지 나왔다고 해서 '배영거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배영거리'의 본 뜻을 모르고 '뱀거리'로 발음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마을 이름으로는

'뱀거리'가 좋지 않다고 해서 약 30년 전부터 이곳 주민들이 '용거리'로 지명을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위치로 보나 뜻으로 보나 배영거리가 좋은 땅이름이다.

유문동(柳門洞)
예미리에서 동북쪽으로 들어가 고성 터널과의 중간쯤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마을 어귀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마을 주변으로 고목(古木)이 많으며

지금은 높이 20여미터 둘레 6∼7미터의 400년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목으로 서 있다.

구러기재
예미에서 유문동을 거쳐 고성리로 넘어가는 재로 '고성리재'라고도 부른다. 일설에는 골이 아홉개가 있어

'구래기 고개'라고 했다고 하지만, 굴이 많은 어귀에 있는 고개라고 해서 '굴어귀재'라는 이름이 생겨

시간이 지나면서 '구러기재'·'구래기재'로 변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운치 고성 덕천리 주민들이 읍내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이었던 고개는 1991년 산 밑으로

터널이 뚫리면서 인적이 끊기게 되었다.

고성리재
예미리에서 고성리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해서 생겨난 지명으로 '구러기재'라고 한다.

작은 부밭골
유문동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남쪽)으로 난 첫 번째 골짜기로 골 안에 작은 밭이 있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골 안쪽 능선 돌밭 위에는 음력 5월이면 얼음이 언다는 '얼음굴'이 있다. 옛날 마을 사람들이 여름에 잡은

소를 얼음굴에다 냉동시켜 두었다가 팔곤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큰 부밭골
유문동 입구에서 남쪽으로 난 두 번째 골짜기로 골 입구에서부터 큰 밭이 있다고 해서 '큰밭골'이라고도 부른다.

지금도 골짜기 위에까지 채소를 재배하는 큰 밭이 있다.

신밭골
유문동 큰 부밭골과 광판 사이에 있는 작은 골짜기다. 밭을 새롭게 일구면서 골이 되었다고 해서 '신밭골'이라고 한다.

신밭골 굴
신밭골 꼭대기에 있는 수직 동굴이다. 오래 전 마을 사람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가 보았지만 깊이를 잴 수 없었다고 한다.

광판
유문동 서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다. 옛날 '비상'이라고 하는 유비철(아세로파이라이트)을 캐내던 광산이

있던 곳이라고 해서 '광판'이라고 부른다. 예전까지만 해도 '비상'은 악창, 종기 등을 치료하는 설비약으로

쓰였는데 현재는 채광 흔적만 남아 있고 골 안쪽까지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밭이 들어서 있다.

광판 골짜기로 오르면 천포리 지실골로 넘어가게 된다.

애목재
광판에서 천포리 지실골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 밭을 일구는 부모를 따라와 밭머리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호랑이에게 물려 갔는데 아이를 찾아 헤매던 부모와 마을 사람들이 고개 마루 바위 위에서 아이의 머리만을

발견하고서부터 '애목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여년 전까지만 해도 '애목재'근처에 큰 호랑이가 살면서 여러 사람을 해쳤다고 하는데 지금도 고갯마루

근처에는 두 곳의 호식총터가 남아 있다.

호식총터
애목재에서 지실골로 향한 고갯마루 바로 아래에 있다. 백여년전 유문동의 한 남자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이곳에서 남아 있는 시신을 추슬러 태운 후 돌을 쌓고 무덤을 만들었다.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을 때 몸뚱이와 팔다리는 모두 먹고 머리만 남겨 둔다고 한다.

유족들이 그 머리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화장(火葬)을 하고, 그 위에 돌무덤을 만들며, 그 돌무덤 위에

시루를 엎어놓고 시루 구멍에 부지깽이 등과 같은 쇠꼬챙이를 꽂아 놓는 특이 한 형태의 무덤을 호

식총(虎食塚)이라고 한다. 그런데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남은 유구(遺軀)를 발견한 그 자리에서 태워 버리는

것은 모든 화근(禍根)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람이 있는 집안에는

장가나 시집가기를 꺼려하기도 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혼이 창귀( 鬼)라는 귀신이 되어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니며 재앙을 준다는 속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화장한 재 위에 돌무덤을 만드는 것은 금역(禁域)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돌무덤 위에 시루를 엎어놓는 것은 창귀를 가두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시루는 살아 있는 것을 찌는 그릇으로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을 엎어놓으면 사방이 막히게 되고 하늘을 상징하는 9개의 구멍으로 날아서나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지옥과 같은 곳이 된다. 그곳에다가 다시 무기와 벼락을 뜻하는 쇠꼬챙이를 내리

꽂아 두는 것은 창귀가 시루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데서 생겨난 의례로 볼 수 있다.

개시골
유문동 느티나무 서쪽에 있는 골짜기다. 옛날 사람들이 구래기로 들어와 처음 터를 잡고 살았던

골짜기라고 해서 '개시골'이라고 부른다. 일제시대 초까지는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용골
유문동 안쪽으로 들어가 고성터널 입구에 거의 이르러 왼쪽으로 난 골짜기다. 용굴이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용골'이라고 했는데,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고성리 고림(古林)에 이르는 북실길과 마주하게 된다.

용굴
용골에 있는 자연동굴이다. 옛날부터 굴 안에 용 한 마리가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성터널
예미리에서 고성리로 통하는 길이 600m의 터널이다. 1990년 덕천리에서 신동읍민들이 마시는

식수를 끌어들이는 송수관을 묻을 때 만든 터널로 폭이 좁아 대형버스는 다니지 못한다.

큰구지
유문동에서 고성터널에 이르기 바로 전 오른쪽으로 난 언덕배기를 말한다. '구지'란 우뚝 솟은 곳에 있는

깊은 골을 말하며, 그 골이 크다고 해서 '큰 구지'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식 지명으로 일제때 만들어진 이름이다.

작은구지
큰구지 아래쪽에 있는 진흙 토양의 작은 언덕배기라고 해서 작은구지라고 한다.

큰뗏골
유문동 샘터 뒤의 넓은 골짜기를 말한다. 예전부터 이곳에는 산과 들녘에서 흔히 잘 자라는 다년초로 끝이

뾰족한 모초(茅草)인 띠가 많았으므로 '띠골'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뗏골'로 발음하면서 이름이 변해 버렸다.

작은뗏골
예미에서 유문동을 향해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첫 번째 골짜기다. 강원석회에서 석회석을 채광하는

곳으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쉰패랭이굴
구러기재 밑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예전에 고개 너머 뒷산에 은을 캐던 광산이 있었는데

굴 막장에서 엄청난 은맥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나자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굴 안의 동발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한 사람도 살아나 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 죽은 사람이 몇인지 알 수 없었으나 광부들이 굴에 들어가기 전 머리에 썼던 평량갓(平凉笠)인

패랭이(대나무로 만든 갓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썼음) 쉰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때부터 이곳은 쉰 명의 인부가 죽은 굴이라고 해서 '쉰패랭이굴'이라고 했다.
소규모 영세 광산이 있다가 문을 닫은 곳이면 쓸쓸한 모습 때문에 '쉰패랭이굴'전설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그 이야기 속에는 노다지 꿈을 좇아 떠도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경구(警句)의 뜻을 담고 있다.

괴그무
유문동 북쪽 굴뼝창에 있는 굴이다. '괴'는 고양이를 뜻하며 '그무'는 구멍, 즉 굴을 뜻하는 말로 옛날

남면에 있는 굴로 들어간 고양이가 이 굴로 나왔다고 해서 '괴그무'라고 한다.
'굴뼝창굴'이라고도 부르는 이 굴 안에서는 물레와 바가지 등이 오래 전에 발견되어 옛날 마을 주민들의

피난처로도 이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유문동에서 바라보면 벼랑에 있는 굴의 모양이 여자의 음부를 닮았고

그 굴 바로 앞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짓궂은 동네 청년들이 베어 버리자 동네 처녀들이 모두 도망가듯

서울로 떠났다고 한다. 한창 서울 바람이 불때 직장을 구해 서울로 간 동네 여자들을 굴과의 풍수

지리적 해석에 빗대어 지어낸 얘기로 볼 수 있다.

굴뼝창
유문동 북쪽에 있는 큰 바위로 이뤄진 절벽이다. 절벽 위쪽에 굴이 있다고 해서 '굴뼝창'이라고 부르는데

'뼝창'은 높고 큰 절벽을 말한다.

달구매
괴그무 옆에 있다. '달'은 '산'이나 '산골짜기'를 일컫는 말로 괴그무 옆 골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해까지 한 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빈 집만 남아 있다.

가산(家山)
유문동 북서쪽에 있는 산이다. 지금의 예미농협 앞에서 보면 산 능선의 모양이 큰 집의 지붕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떼밭양지
가산 밑 큰뗏골에 있다. 양지바른 곳에 끝이 뾰족한 모초(茅草) 또는 백모(白茅)라고 부르는

띠밭이 있었다고 해서 '띠밭양지'라고 부른 것이 변해 '떼밭양지'가 되었다.

의림길
예전에 읍사무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집단 부락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예미농협 위에서부터

납돌다리가 있는 곳까지를 말한다. 정선군지(旌善郡誌)등의 기록에는 옛날 숲이 우거져 의림길 이

라고 불렀다고 하나 사실 '의림길'의 유래는 통일신라시대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영월 엄(嚴)씨의 시조가 되는 림의(林義)라는 사람이 중국 당(唐)나라에서 파락사(派樂使)라는

사신으로 신라(新羅)에 왔다. 일을 마칠 무렵 자기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망하게 되자 림의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중국에서는  임의를 체포해 호송해 줄 것을 요청했고 쫓겨다니던 그는

지금의 '의림길'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났다. 마을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그리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는데

그를 맞고서 사정을 들었던 마을 사람들은 훗날 그곳에 머물다가 떠난 사신을 떠올리며 '의림'(義林)이라고

부른 것이 지금까지 굳어져 내려왔다.
림의(林義)의 묘는 지금 영월읍 영흥리 금강정 뒤에 있다.

수리봉
장터거리 동쪽으로 솟은 뾰족한 봉우리로 예미농협 앞 산이다. 산 꼭대기에 수리(鷲)가 산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수리'란 말이 '으뜸' '꼭대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듯 '수리봉'은 마을에서

가장 뾰족하거나 높은 산봉우리를 뜻하기도 한다.

고냉이산
예미농협 뒤에 있는 '공원산'을 잘못 부르면서 굳어진 이름이다.

공원산
지금의 예미농협 뒷산이다. 산꼭대기가 평평해 해방 전까지만 해도 정자(亭子)가 들어선 공원이

있었다고 해서 '공원산'이라고 불렀다.
일제시대부터 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신동읍에는 동면 다음으로 많은 일본 사람들이 머물렀는데,

'공원산'은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의 주된 쉼터가 되었던 곳이다. 해방후 공원이 없어지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공원산'은 '고양이산' '고냉이산'으로 잘못 불려지게 되었다.

장소(裝沼)
조동리 쪽에서 흐르는 방제천과 의림천이 합수되는 곳에 있던 소(沼)다. 두물이 합류되는 지점에 큰 못이

생겨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어린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몇 해전 장마에 떠내려온

토사(土沙)로 대부분 묻히고 지금은 어귀에만 약간의 물이 고여 있다.

노일(魯日)
상노일과 하노일이 있었다. '노일'이라고 하면 보통 상노일(上魯日)을 말하는데, 지금의 예미역 앞 마을부터

예미우체국까지 일대를 말하나 확실한 지명유래는 알수 없다.
옛날 '노일'에는 큰 장(場)이 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 영조 46년(1770년)펴낸《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보면 매달 4일과 9일 5일장이 섰다고 나와있다. 당시에는 평창군 동면에 속해 있었으며, 평창장·미탄장과 함께

큰 장이 섰던곳이다. 하나 확실한 지명유래는 알수 없다.


노일을 가로지르는 철길이 놓여 마을의 운이 다했다는 얘기도 나돌았으나 장수하는 마을이기도 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노일에는 나이를 잊은 채 백수를 넘기고 돌아가신 분들이 있을 정도로 장수하는 분들이 많이 살았다. '일'(日)은 '실'과 마찬가지로 '마을'을 뜻한다.

재건촌
예미우체국 옆 다리 위쪽으로 있던 마을이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붙인 이름으로

'다시 건설한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재건촌이 들어서기 전에는 자연 연못이 형성되어 신동읍에 있던

세곳의 보(堡)중 하나인 중보(中堡)가 있었다.
 
새물보
장소(裝沼)아래에 있었던 보로 땅속에서 솟는 샘물이 고여 자연히 보(堡)를 이루었다고 해서 '샘물보'라고

한 것이 변해 '새물보'라고 불렀다. 신동읍에 있던 세곳의 보 가운데 하보(下堡)였던 곳으로, 옛날 보 옆에

소를 매어 놨는데 소 고삐만 남고 소가 온데간데 없어 이무기가 잡아먹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인돌
신동읍사무소 앞에서 천포리간 36번 국도변 밭머리에 있다. 선사시대 지석묘로 너비 1m50cm의상석을

50∼80cm의 지석이 고이고 있어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상석에는 성혈이 6∼7군데 눈에 띄며 이미 오래 전에

도굴되어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석항천변의 평지인 이 일대에는 불과 5년여전 까지만 해도 5∼6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밭을 일구면서 모두 훼손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두곳밖에 없다.

예미산(禮美山)
예미리 남쪽에 있는 해발 989m의 산으로 본래는 '여미산'(女美山)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시대부터

'예미산'으로 바뀌었다. 예미초등학교 뒤에 있는 창가산에서 예미산을 보면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모습인데다 용주골 샘터가 여자의 음부에 해당하는 곳에서 흐른다고 하여 '여미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영월군 중동면 수라리재에서 보면 산세가 여자가 모로 누워 있는 아담한 모습이어서 '여미산'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용주골
예미역 바로 앞 산에 있는 골짜기다. 옛날 이 골짜기에서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자리에서

샘물이 솟기 시작해서 '용수골(龍水谷)'로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용수골'은 '용주골'로 변했고 그 샘물을

식수로 삼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골짜기에서 솟는 샘물이 마르지 않는 이곳은

수년전 풍수 지리적인 형국 때문에 공원묘지 자리로 검토된 적도 있다.

예미역
1957년 함백선이 개통되면서 세워진 역이다.

피란선
예미역 위쪽에서 용주골 쪽으로 뻗어 있는 단선 철도를 말한다. 1950년대 말부터 함백선이 개통되면서

함백, 자미원 쪽에서 내려오는 열차가 가속이 붙어 예미역 위쪽에서 부터 제동이 힘들게 되자 역구내에서

충돌 및 추돌 사고가 잦았다. 이에 따라  달려 내려오는 기차를 역 외곽으로 돌려 사고를 막기 위해 철도를

놓았는데 이를 '피난선'이라고 불렀다. 용주골 쪽으로 향한 피난선의 끝부분은 언덕으로 나 있어 아무리

가속이 붙은 열차도 저절로 멈추곤 했다. 그 후 '피난선'은 몇 차례 이용되다가 새로운 제동장치 등이

개발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고, 지금도 도로를 관통한 철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물레방아터
예미역앞에서 방충메기에 이르는 지방도 옆에 있었다. 예전에 방충메기에 상보(上堡)가 있었는데

그 보에서 끌어들인 물로 돌리던 물통방아가 있었다고 해서 '물레방아터'라고 한다. 지금의 예미 6리

한전 출장소 밑에 있었으며 아직도 물이 흐르고 있다.

모란고지
조동리와 예미리의 경계가 되는 방충메기를 예전엔 '모란고지'라고 불렀다. 예미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이곳에 와서 멈추었는데, 그 앞쪽으로 길이 나 있어 살짝 모퉁이를 돌아가게 되어 있다. 모퉁이를 사투리로

'모랭이'라고 하고 '모랭이'를 다시 '모란'이라 불렀다고 한다.
'모란'은 본래 '모퉁이 마을'이라는 뜻인 '몰앗'에서 유래된다. 즉 '몰'은 '산'을 뜻하고 '앗'은 '밭'을 의미하므로

'몰앗'은 '산안 쪽에 있는 마을'로 풀이할 수도 있다. 이 '몰앗'이 '몰안'으로 변해 다시 '모란'이 되었는데, 실제로

물을 막는 방축(防築)공사를 해 '방충메기'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해도 '모란고지'라고 불렀다.

'고지'는 '고디'에서 나온 말로 산자락의 근원을 나타낸다.


옛말에 "모란에 모여 어메(남을 모함하거나 시기함)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예전부터 이곳을 경계로 신동,

함백의 미묘한 갈등이 불거져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노름바우
모란고지 앞 철도옆 다리 근처에 있는 바위다. 큰 바위 밑이 움푹하게 파여 있어 몇 사람이 구부려 앉아

놀기가 좋았는데, 오래 전부터 그 밑에서 어른들이 노름을 했다고 해서 '노름바우'라고 부른다.

밤나무숲
예미에서 조동으로 가는 방충메기를 돌아서기 전 오른쪽 산등성이에 토종밤나무 숲이 있다고 해서

'밤나무숲'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한전 출장소 뒷산에 해당된다.

납돌(納乭)
의림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는 냇물이 흐르는 바닥의 돌이 넓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영월 엄(嚴)씨로 인해 생겨난 지명이다.
옛날 영월 엄씨로 이곳에 처음 들어 온 세익(世翊)이라는 분이 자식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백(白)씨라는 여자를 맞아들여 자손을 보게 되었다. 그때 백씨부인을 맞아들이던 길을 들일

납(納)자를 써 '납도(納道)'라고 했는데 그 후 '납도리'로 변해 일제시대 지명 통폐합을 하면서 지금의

'납돌(納乭)'로 바뀌었다. 이곳에 처음 들어와 '납돌'이라는 지명을 낳게 했던 '세익'이라는 분의 묘는 지금 '납돌'에 있다.

소골
의림길에서 납돌사이에 있는 의림교를 지나 바로 왼쪽에 있는 골짜기다. 골이 좁아 '소골' 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소골의 지주로부터 땅을 뺐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골 안쪽에 공동묘지를 만들면

땅을 뺏지않겠다고 해 일제시대부터 공동묘지터가 된 골짜기다.

큰앞실
납돌 북동쪽에 있던 마을이다. 국도 변에 큰 산을 깎아 석회석 채광을 하면서 사람들이 떠나 지금은 흔적이 거의 없다. 석회석을 채광하기 전에는 아카시아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뤄 어린아이들이 꽃을 따먹으로 다니자 문둥이가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작은 앞실
큰앞실 아래쪽에 있던 마을로 석회석광이 개발되면서 폐촌이 되었다. '실'은 '일'과 마찬가지로 '마을'을 뜻한다.

작은 앞실 재
납돌위 작은 앞실에서 새골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를 넘으면 조동리 구 과장사택 안쪽의 애매골로 통하게 된다.

갬골
범골과 작은 앞실골사이에 있는 골짜기다.

겉둥이골
납돌 서북쪽으로 난 골짜기다. 옛날 땅이름에 사방으로 막힌 고갯길을 '둠지' 또는 '둔지'라고 불렀는데,

땅이 마른 골짜기라는 뜻인 '건둔'이 '겉둥이 골'로 변해 불려지게 되었다. 골 안쪽에 젖소를 키우는

농장이 있으며, 고개를 넘으면 운치리 기일(基日)로 통하게 된다.

범굴
의림길에서 동쪽으로 난 골짜기다. 옛날 조동리 밝은 밭으로 넘어가던 길이 있었는데 범을 자주 보았다고

해서 '범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절골
예미초등학교 앞에서 동쪽으로 난 골짜기로 옛날 골 안에 백운사(白雲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고 한다.

건다이
옛날부터 절골 안의 땅이 메말랐다고 해서 '건둔'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건다이'가 되었다

 

                                                   (정선아리랑 연구소 자료 -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