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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

청도군 각북면(角北面)의 마을 지명유래

by 범여(梵如) 2021. 10. 11.

각북면(角北面)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에 속해 있는 법정면이다.


[개설]
청도군 서북쪽 맨 끝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각북면은 비슬산과 삼성산이 높게 솟아있어서 남쪽으로는 트여 있으나 삼면(三面)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과 서쪽은 대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풍각면과 마주하고 있는 아주 전형적인 산골 오지이다.


[명칭 유래]
각북면이란 풍각현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각북면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이서국의 한 부분이었던 각북은 신라에 복속되어 상화촌현으로 불리었다. 다시 풍각현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풍각현에서, 밀양군에 속한 풍산현으로, 다시 유산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풍각현으로 개칭되었는데 이전의 기록은 청도군에는 없다. 1413년까지는 밀양군 풍각현으로 있었는데 1709년에 각북면으로 나누면서 19개의 동이 정해졌다. (남산동(南山洞). 낙성동(樂盛洞). 고산동(高山洞). 오이동(梧耳洞). 부곡동(釜谷洞). 비지동(飛地洞). 송천동(松川洞). 상지동(上只洞). 하지동(下只洞). 덕산동(德山洞). 지촌동(枝村洞) 방지동(芳旨洞). 풍산동(豊山洞). 율정동(栗亭洞). 우산동(牛山洞). 저대동(楮垈洞). 명동(明洞). 미대동(美大洞))
1906년 청도군 각북면으로 이속되었다. (낙성동(樂盛洞). 고미동(古弥洞). 오이동(梧耳洞). 삼청동(三淸洞). 부곡동(釜谷洞). 지곡동(枳谷洞). 지촌동(枝村洞). 남상동(南上洞). 남하동(南下洞). 방지동(芳旨洞). 풍산동(豊山洞). 저대동(楮垈洞). 귀명동(歸明洞). 석교동(石橋洞). 우산동(牛山洞). 율정동(栗亭洞).)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방지(芳旨)와 율정(栗亭), 풍산을 합해서 삼평동(三坪洞)이 되었는데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가 있었다. 남산동(南山洞)은 남산(南山)과 소말 그리고 낙성을 합해서 만들어진 동네이다. 덕촌동(德村洞)은 덕촌(德村)과 지촌(芝村)을 합했다. 오산동(梧山洞)은 고산(高山)과 오리(梧里)를 합했다. 지슬동(芝瑟洞)은 옛 지명을 그대로 따랐다. 금천동(金川洞)은 금곡(金谷)과 송천(松川)을 합해서 만든 동이다. 우산동(牛山洞)은 우산(牛山)과 저대(楮垈)를 합했다. 명대동(明大洞)은 미대(美垈)와 계명(啓明)송동(松洞)을 합해서 형성된 동네들이다. 1989년 동(洞)을 리(里)로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 환경]
각북면은 청도군에서 가장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뒤쪽은 청도군 서북쪽에서 가장 높은 비슬산을 중심으로 홍두깨산과 헐티재를 경계로 달성군과 접하고 있다. 서남쪽으로는 풍각면 수월리와 경계를 하고 있고 동으로는 이서면과 경계를 두고 길쭉하게 남북으로 형성된 면이다. 비교적 높은 산 때문에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도천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풍각면에서 부곡천과 합류하여 각남면으로 흘러 들어간다.
각북면은 골 깊은 한통속의 산골로 형성된 면으로 골의 좌우로 마을이 취락해 있고 좁은 면적이지만 경지 정리가 비교적 잘된 곳이다. 곳곳에 저수지가 마련되어 있어 수리면에서도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삼평리와 현리리가 마주한 곳에 재일동포가 만든 사과재배단지에는 일찍이 선진농법을 형성하였고 군내에 사과농사 선진화에 앞장 선 곳이었다.


[현황]
각북면은 청도군의 최서북단에 자리 잡고 있고 골 깊은 곳의 하나이다. 각북천 좌우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50.94㎢이며. 총 1,118세대에 2,194명[남자1,064명 여자1,131명]이 거주하고 있다. 관내에는 명대리(明大里), 우산리(牛山里), 삼평리(三坪里), 남산리(南山里), 덕촌리(德村里), 지슬리(芝瑟里), 금천리(金川里), 오산리(梧山里)의 8개의 법정 리를 두고 있다. 각북면 면사무소는 남산리에 위치하고 있고 파출소도 남산리에 있다. 남산리에는 각북중학교가 학생수가 줄어들어 현재는 풍각중학교 각북분교가 되었으며 각북우체국도 남산리에 있다. 사질토가 많은 각북면에는 물 빠짐이 좋아 자연산 송이가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고 산비탈과 냇가 모래밭에는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 맛있고 당도 높은 사과로 각광받고 있다. 대구시 달성군과 인접하였으며 헐티재를 통하여 대구를 잇는 길이 개통됨으로 해서 교통편이 편리해진 뒤로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전원주택의 적지로 많이 알려져 있어 대구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는 것도 특징이다. 접근도로는 풍각면과 달성군 가창면을 잇는 902번 지방도가 각북면을 통과하고 있다.


[참고 문헌]
이중경,『오산지』(1673)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구읍지』 (대구광역시, 1767)
『청도읍지』(청도군, 1768)
『밀양지』 (밀양문화원, 1987)
『향토사료집』(밀양문화원, 1988)
『청도군지』(청도군.1991)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통계연보』(청도군, 2012)
『각종지리지』 (조선전기)




1. 금천리


[정의]
청도군 각북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금곡(金谷)과 송천(松川)을 합해서 금천이 되었다.


[명칭 유래]
금곡은 191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쇠실(금곡)과 송천을 합해서 만들어진 동네이다.


[쇠실]
쇠실마을은 옛날 마을이 있는 산 개울을 따라 사금을 채취했다고 해서 금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송내]
쇠실마을의 서쪽에 있는 송내는 마을 입구에 솔숲이 우거져서 솔숲 안에 있다고 해서 송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형성 및 변천]
각북에서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금곡은 옛날 풍각, 창녕, 밀양에서 대구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로 행인들이 헐티재 또는 윙계재를 넘어갔다고 한다. 여기에는 고개 이름을 윙계재와 배나무고개라고 불렀는데 원계라는 말은 계곡이 길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배정재 또는 이정현(梨亭峴)이라 해서 큰 배나무가 정자를 만들어 사람들이 쉬어 갔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송내마을 서북 등쪽에 깃든 부근의 짧은 등성이 아랫부분에는 고분군이 있는데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 노출된 곳에서 발견된 토기는 목긴 항아리, 목이 짧은 항아리, 고배 등 4~5세기경의 것으로 신라 토기가 아닌 가야토기로 이 부근의 문화는 가야 문화권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때 발굴된 유물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금천리에서 채취되는 자연산 송이는 맛도 좋을 뿐만 아니라 그 채취량에 있어서도 군내에서는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자연 환경]
헐티재와 윙계재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계곡에 위치한 금천리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전형적인 전원형의 마을이다. 쇠실마을은 골짜기 생긴 모양대로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고 송내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다. 쇠실에는 경지면적이 적은 편으로 대부분 다락 논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山)도 경사면이 심한 편이어서 밭으로 개간하기도 어려웠는지 산자락만 밭으로 일구어져 있다.


[현황]
각북면 제일 북쪽에 위치한 금천리는 2012년 6월 현재 면적 5,159,863㎡이며 총가구수 69가구에 남자 60명. 여자 72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향으로 앉은 금천리는 인근 대도시에 싫증을 느낀 나이 많은 부부들의 노년을 보내기 위한 전원마을을 지향하며 하나 둘 새로이 들어서는 실정이다. 송내 마을에는 풀빛오토캠핑장이 들어서 있어 인근 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다. 또한 송내 마을에는 산간계곡을 막아 농사용 저수지인 송내지를 안고 있어 이 지역의 가뭄을 대비하고 있다. 접근할 수 있는 도로는 풍각에서 대구 가창으로 넘어가는 902번 지방도가 마을 앞을 통과 하고 있어 이 지역을 연계하는 버스가다니고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구읍지』(대구광역시, 1767)
『청도군지』(청도군, 1982)
『마을지명유래지』 (청도문화원, 1996)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통계년보』(청도군, 2012)




남산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각북면 서북쪽에 있는 남산리는 소말과 남산 낙성(가말)등 자연부락이 합쳐져서 이루어져진 동네이다.


[명칭 유래]


[소말]
소말은 인근 마을에 비해 작은 마을이다. 그래서 소(小)마을. 작은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소리(小里)또는 소촌(小村)라고 적고 소말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남산(南山)]
남산이란 이름은 박수춘(朴壽春)선생이 이 마을에 살면서 마을 앞산이 비교적 높아서 앞산 또는 남산이라고 불렀던 것이 남산이라는 마을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박수춘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남산에다 성을 쌓고 의병활동을 하여 산 이름이 ‘성마루 산성’이라고도 부른다.


[낙성(樂盛)또는 가말]
남산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마을로서 가마실로도 불리우고 부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은 서쪽 계곡 애골에 지금도 자기를 생산했던 자기요(瓷器窯)가 무너진 채 남아있어 가마실로 불렀다.


[형성 및 변천]
밀양과 대구부에 속해 있던 이 지역의 역사는 기록이 없어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1768년 대구읍지에 따르면 이곳의 지명은 남산상리와 남산하리였다. 밀주지에는 옛 사람이 살았던 기록이 없다고 하고 있으나 남산 1리에는 고분군이 산재해 있고 고인돌 또한 마을 속 민가 군데군데 남아있다. 특히 6.25사변 때 비슬산에 은거해 있던 지방좌익들의 은거지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분군은 적석묘이다. 지금도 개인의 집에 남아 있는 석실묘에서 출토된 토기는 가야식의 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이 지역은 가야지역이었다고 한다.
성마루성은 풍각면 성곡리와 경계에 있는 산성으로 둘래가 약 700m로 바깥면은 석축(石築)이고 안은 토축(土築) 으로 남아있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국담 박수춘(菊潭朴壽春)선생이 의병을 지휘하면서 성을 쌓고 주민들을 피난시켰다고 전해진다. 국담선생을 향사하는 남강서원에는 조선시대에 5현의 글씨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5현의 글씨는 국담 선생이 생전에 서신왕래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며 그분들의 글씨를 보관하고 있으나 도난과 멸실의 우려가 있어 지금은 대구은행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자연 환경]
비슬산 동편에 자리 잡고 있는 남산리는 북·서·남 3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비슬산에서 생성된 물은 남산리에서 출발하여 풍각천으로 흘러간다. 북쪽에 작은 고개를 넘으면 덕산리가 있고 서남쪽 고개를 넘으면 풍각면 성곡리(장기)가 된다. 마을은 3면이 산으로 둘러져 있으며 산을 등지고 있고 경지는 마을 앞으로 형성되어있다. 경지는 다락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밭은 기후가 찬 것을 이용하여 사과농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현황]
비슬산을 등지고 있는 남산리는 2012년 8월 현재를 기준으로 면적은 10,465,206㎡이며 총255세대에 남자219명 여자225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산리에 각북면사무소가 있고 각북파출소가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각북초등학교와 각북중학교가 있었으나 급격히 감소하는 인구로 인해 지금은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어 비슬도예원이 되었고 중학교는 풍각중학교 각북분교로 남아있다. 우체국과 농협이 있어 지역민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며 각북시장이 있었던 곳은 이제 흔적마져 없어졌다. 외지에서 전원을 즐기러 들어와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남산 1길과 남산 3길 사이에는 남산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어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남산에서 성곡리로 이어지는 길 왼편에는 비슬리조트 군불로가 있어서 인근주민들의 휴식과 행사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남산리 맨 아랫부분에는 아자방(亞字房) 수목원과 찻집에는 인근 대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인접한 마을로는 서쪽은 비슬산을 경계로 현풍과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지촌리와 개울을 경계로 하고 있다. 북쪽은 덕산리와 접해 있으며 남쪽은 삼평리와 개울을 경계로 하고 있다. 도로는 풍각에서 가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되어 지금은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고 있으며 각북 사과가 당도가 높아 대구 등지에서 많이 찾는 기호식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참고 문헌]
『대구읍지』(대구광역시, 1768)
『청도군지』(청도군, 1982)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8)
『통계연보』(청도군, 2012)




덕촌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점촌과 덕산을 합해서 이루어진 이 마을은 각북면에서는 가장 큰 마을로 분류되고 있다.


[명칭 유래]
덕산리는 점촌(店村:점마)와 덕촌을 합해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점촌]
지실 또는 지슬(只瑟)로 불리는 이 마을은 조선시대 백자를 굽던 자리로 가마터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가마실과는 다른 지역으로 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옹기를 만들었던 곳이 있었는데 우산리(牛山里)로 옮겨간 것이라고 하며 따라서 옹기를 만들었던 곳이기 때문에 점마라고 부른다.


[덕촌]
덕산이란 독산(獨山)이 변하여 덕산이 되었다고 하며 마을 앞 개울 건너에 똥뫼산이 있어 이 산을 지칭하여 독산(獨山)이라 불렀는데 덕산(德山)이라고 표기하고 덕산으로 마을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옛날에 덕촌리에 있는 아주 작은 독산(獨山)이 비슬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현풍현에서 산세(山稅)를 받으러 왔다고 한다. 순박한 주민들이 아전들의 위압에 견디다 못해 여러 해를 산세를 주었는데 밀양 박씨들 문중에서 어른이 있어 이 일을 알고는 똥뫼산(독산)은 우리에게는 아무 필요 없으니 가지고 가라고 하자 세를 징수하러 오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형성 및 변천]
밀양부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의 마을 이름은 지동(枝洞)이라고 표기하고 갓말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에 부사 이영(李英)이 군사를 주둔하여 머물렀는데 선조 정유년에 가을과 겨울이었다. 마을 서쪽 산모퉁이에 무진대(無盡臺)가 있었는데 사인(士人) 박진이 축조하였다. 조선조 후기에는 지촌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져 있었고 1896년에 대구부에서 청도로 이관된 마을이며 1916년 행정구역 재편 때 덕산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자연 환경]
비슬산과 홍두께산 사이에 형성된 마을은 마을 앞으로 오산천이 흐르고 있고 마을 앞 뜰은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경작지가 있다. 오산천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덕산에서 지곡천과 만나서 청도천을 이루고 있다. 마을 뒤 들에도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산곡 내에서는 가장 넓은 들을 형성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부자마을이다. 지촌마을에는 아직도 성황당이 있으며 남성황 여성황을 따로 모시고 있기도 하다.


[현황]
지난날 1970년대 까지만 하여도 각북행 버스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덕산은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대구를 잇는 각북 정대길이 연결됨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지역이며 전원주택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는 현상이다. 2012년6월 현재를 기준으로 면적 6,239,457㎡이며 총가구수144가구에 남자140명 여자147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인근 주민들의 건강을 지키는 보건진료소가 있고 마을 앞개울건너에는 충적토를 이용해서 사과 과수원이 주를 이루고 있다. 덕산 초등학교 서편에는 덕산 저수지가 있으며 저수지 아래에는 저수지와 관련된 공덕비가 하나 서 있다. 마을 입구에는 효자비가 하나 있기도 하다.
덕산마을 한가운데에는 석불상이 많이 훼손된 채 길옆에 세워져 있는데 매년 정월 초에는 음식물을 훼손된 불상 앞에 놓고 비손을 하기도 한다.
덕산리에는 인근의 학생들에게 보금자리가 되는 덕산초등학교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덕산초등학교 뒤 독뫼산 옆 개울가에는 천연기념물 제29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덕촌리 털왕버들이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구읍지』(대구광역시, 1767)
『청도군지』(청도군, 1768)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8)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명대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소속된 법정리이다.


[개설]
각북면과 이서면이 접해 있는 명대리는 계명과 송동 그리고 미태가 합해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명칭 유래]
명대리는 1906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미대와 계명동을 합해서 만들어진 동네로 남북으로 긴 골짜기 아래위로 형성된 마을이다.


[계명동]
계명동은 명대1리의 본 마을이다. 이 계명이라는 말은 조선 초기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이 마을에 거주하였는데 탁영 선생의 선조들이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이 개명(開明)했다고 해서 계명이라 하기도 하고 또 옛 어른들은 기명동이라 불렀다. 기명(旣明)은 일찍이 개명했다고 한 이름이라고 한다.


[나부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 뒤 산의 형태가 나비모양을 닮아서 나부실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메꽃의 줄기모양을 하여 라복(蘿葍)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밀주지에는 만호 신몽태가 살았던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솔동]
밀주지에는 마을 입구에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송동(松洞)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대(美垈) 또는 미태]
밀주지의 기록에는 마을 동남쪽에 삼사암이라는 바위가 있고 북천에 그 앞을 가로지르는 버드나무숲이 있는데 바위 동북쪽 아래(밑에)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미태촌이라 부르고 ‘밑에’가 ‘미태’로 다시 ‘미대(美垈)’로 바뀌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이곳 명대리는 라복산(蘿葍山)이 있고 라복산은 나부실이라고 부른다. 나부실에는 탁영 김일손선생의 증조부와 조부의 산소가 있으며 이곳이 청도군의 칠대(七大)명당지라고 알려져 있다. 미대(美垈)는 풍각면과 각북면의 경계지점에 있으며 삼사암 아래에 있어 밑태촌이라 했고 밑태가 미대로 바뀌었는다는 데 밀주지에는 다대(多大)로 표기되어 있으나 삼사암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자연 환경]
서쪽 고개 너머에 우산리가 있고 동쪽으로는 칠엽리가 산을 경계로 하여 길게 골짜기를 이루어 취락한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각북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뒷산은 홍두께 산의 한 자락이 골을 이루고 골이 길게 이어져 있어서 경작지는 골 가운데에 논이 있으며 마을 앞 들은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다. 계곡 간에 형성된 경작지는 산골이면서도 상당히 큰 두락을 짖고 있어서 기계농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어있다. 계곡 좌·우로 산에 비탈진 곳에는 밭을 만들어 복숭아와 감이 주 농사가 되고 있다.


[현황]
명대리는 2012년 7월 현재 면적 2,709,136㎡이며 93세대에 남자 90명 여자 96명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수에 비해 경작지가 많은 명대리 입구에는 비육우를 기르기 위해서 우사가 들어와 있는 실정이다. 마을 전체에 논은 2모작으로 양파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재궁골에는 김해김씨 삼현파의 가장어른인 절효 김극일 선생의 묘와 묘재(墓齋)가 청도에서는 명당중의 명당이라고 하여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꼭 한번 씩은 다녀가는 곳이 되고 있다. 미대마을 뒷산에서부터 솔동까지 양지바른 산등과 자락에는 명당의 기를 받기 위해서 묘지가 많이 조성되고 있어 밭을 많이 잠식해 가고 있다. 접근하는 길은 서쪽마을인 우산리에서 기명으로 해서 아랫마을인 미대를 거쳐 풍각으로 가는 길이 유일한 통로이다. 또 가금다리에서 이서로 가는길과 각북면으로 가는 길이 있긴 하나 많이 이용하지는 않는다. 예전에 도보로 다닐때는 각북면의 사람들이 이서면 학산리로 갈 때는 대부분 명대리에서 대전리를 거쳐 각계리 산등을 너머 학산으로 통했었다. 지금은 신작로를 이용해서 다닌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8)
『대구읍지』(대구광역시, 1687)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통계연보』(청도군, 2012)
『청도군지』(청도군, 1982)




삼평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삼평리는 율정과 방지 그리고 풍산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법정리이다.


[명칭 유래]
[방지]
방지는 1980년대까지 면사무소와 각북 지서가 있었던 곳이다. 방지라는 이름은 마을 바로 앞에 못(저수지)이 있어서 방지(防池)라고 한다. 즉 못은 모은다는 말을 하지 않고 막는다는 말을 하기 때문에 방지라고 하였다.
[율정(栗亭)]
율정은 옛날 이 마을로 해서 대구를 가는 지름길이 있었다. 그때 큰 밤나무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율정(栗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풍산(豊山)]
풍산은 진읍촌이라 한다. 옛날 이곳 현(縣)의 이름이 풍산현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에 부사 이방좌(李邦佐)와 조전장 박경신(朴慶新) 이영(李英)이 머물렀다고 하는 곳이다.


[형성 및 변천]
신라 때는 상화촌현이 지금의 풍각현이라고 말하며 그때는 각북과 풍각이 따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설이 있고 풍각현의 전신은 풍산현이라고 말하며 그 본거지가 삼평리라고 전해오고 있다. 풍산마을 앞에는 사미정이 있었는데 진읍촌 동남쪽 산기슭에 그 자리가 있다. 이 정자를 처음 이룩한 사람은 정자 아래에 살고 있는 밀양 손씨인데 무과에 급제하여 3월3일에 신은(新恩)을 축하하는 연회를 여기에서 베풀었는데 그날 선비들이 이 정자의 이름을 사미정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누구인지는 상세하지 않다고 밀주지는 전하고 있다.
방지(防池)에는 저수지가 있어서 방지라는 동명을 얻었고 각북면의 중심지가 되기 때문에 면사무소가 1990년대까지 주재하고 있었다. 왜정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각북파출소가 있었는데 각북면사무소와 파출소는 남산리에 청사를 새로 지어 옮겨갔다. 현재는 민가와 옛 터만 남아있다. 삼평리에서 우산리 골안으로 넘어가는 고개입구에 신라 때 못이라고 하는 오래된 저수지가 있었으나 1990년대 말에 경지정리를 하면서 메워 지금은 그 흔적을 알 수 없다. 들이 넓고 수량이 풍부하여 옛부터 논농사의 비옥한 땅이었다. 비슬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각북천은 이 부근에서 가장 넓은 충적지를 만들었고 충적지 모래땅에는 일찍이 사과나무재배를 하여 경제작물로 각광을 받았다. 오래전에는 큰 홍수가 일면 제방이 튼튼하지 못하여 사과밭을 휩쓸고 가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튼튼한 제방으로 인하여 홍수피해는 거의 없는 편이다. 1970년대까지 이 마을에 의사가 있어서 인근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기도 하였으며 물레방아가 있어 현대의 정미소와 옛날의 디딜방아 중간 역할을 하였으며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 있는 마을이다.


[자연 환경]
각북면의 중심쯤에 해당하는 삼평리는 청도천 동쪽과 서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남북으로 트여 있고 동서는 산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에는 풍각면 성곡리와 산을 등지고 있고 동쪽에는 우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청도천을 끼고 동쪽에는 율정과 방지가 있고 서쪽에 풍산마을이 있으며 마을 뒤쪽에는 높은 산이 있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예전엔 7~8월 장마철이면 꼭 한두 번씩은 각북천이 범람하였으나 지금은 제방을 튼튼히 하여 각북천 범람은 없다. 들엔 경지정리를 하였으며 풍각면 현리의 사과 농장과 같이 사과나무 재배를 일찍부터 하였던 곳이다.


[현황]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농경지는 경지정리를 잘하여 정리정돈이 되어있다. 2모작으로 양파를 많이 재배하고 있는 삼평리는 면적이 5,427,138㎡이며 총 139세대에 남자 136명 여자 145명이 거주하고 있다. 풍산마을 앞 각북천 변에는 풍산유료낚시터가 있고 삼평동 마을 뒤편 동북쪽에는 의흥인 예인상(芮仁祥) 선생을 배향하는 율강서원(栗岡書院)이 있다. 마을 서쪽에는 사과밭이 있어 맛있는 사과로 정평이 나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구읍지』(대구광역시, 1768)
『청도군지』(청도군, 1982)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7)
『통계연보』(청도군, 2012)




오산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청도군의 가장 서북쪽에 위치한 오산리는 고산(귀미)와 오리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명칭 유래]
오산리는 자연부락인 고산(高山)과 삼천(三泉) 오리(梧里)를 합해서 만들어진 동네로서 자연부락의 명칭은
[고산]
덕산과 오리 사이에 있는 고산은 대구읍지에는 고며리(古旀里)라고 적고 마을 사람들은 귀미라고 부르고 있다. 유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밀양의 비입지는 대부분 고며라고 한 것은 아마도 당시에 밀양땅이 청도에 들어온 비입지는 모두 고며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리]
오리는 오산을 말하는데 옛날 조선시대에 달성군 화원이나 가창으로 가려면 산기슭에 당도하면 해가 저물어 오이원(吾耳院)에서 자고 떠났다고 하며, 대구읍지에는 동네이름을 오이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오리라고 부른다. 오이원은 지금의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亭垈里)와 오이리(梧耳里)를 잇는 길목에 있는데 대구읍지에는 지금의 가창면을 상수서(上守西)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청]
삼청 또는 삼천이라고 하는 자연부락은 마을에 세 곳에 우물이 있다고 하여 삼천(三泉)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형성 및 변천]
비슬산 동쪽 첫 동네인 오산리는 청도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동네이다. 그러나 1896년 이전은 대구부 풍각현 각북면으로 청도읍지에는 기록이 없다. 대구읍지에 의하면 각북면은 달성군 화원과 가창면 정대리와 인접한 곳이다. 옛날 북쪽으로는 화원과 월배로 통하였고 동쪽으로는 상수서로 가는 산길의 길목에 있기에 원(院)을 두어 길손의 편의를 제공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읍지에는 신라 때 의상대가사 지어 현재까지 이어오는 용천사(湧泉寺)는 고려 때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으며 아무리 가뭄이나 홍수에도 넘치거나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용천(湧泉)이라고 하였다. 비슬산 아래 있는 큰 절인 용천사에 속한 방사(房舍)는 승당(僧堂)· 선당(禪堂)· 서상실(西上室)· 수월료(水月寮)· 흥복료(興福寮)· 양진당(養眞堂)· 경장실(經藏室)· 괘월당(掛月堂)· 연백당(練白堂)· 관음전(觀音殿)이 있었다. 부속암자는 극락암(極樂庵). 청련암(靑蓮庵). 남암(南庵). 관불암(觀佛庵). 백련암(白蓮庵). 내원암(內院庵). 서암(西庵). 부도암(浮屠庵)이 있었다고 사적지는 전한다. 오리 입구에 있는 주유소 바로 앞에 비석이(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79호: 용천사 동하도로(洞下道路) 수치송공표석)하나 있는데 용천사로 오는 길을 닦고 나서 그 힘들었던 것을 삼국지에 나오는 잔도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990년대 각북면 오산리와 가창면 정대리를 잇는 902지방도가 개설되고부터는 인근 대도시 문화를 이끌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하나둘 정착하여 전원생활을 영위하며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또 대구와 가까운 곳으로 휴일 나들이 지역으로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지면서 새로운 고급 식당가가 형성되고 있다. 지금은 휴양지로서 또는 요양원이 끊임없이 들어서고 있는 실정이며. 여름이면 피서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동골은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에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자연 환경]
비슬산 동쪽에 있는 오산리는 청도에서는 오지중의 오지다. 오리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데 사하촌(寺下村)이다. 비슬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마을은 넓은 경작지가 없는 편인데 계단식 밭과 다락논으로 점철되어 있다. 고산마을 북쪽에 있는 들은 경지정리가 말끔히 되어 있고 오리 서쪽에는 대동골이라는 계곡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청도천의 원류는 오산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있는데 서출 동류수이다. 대동골은 여름이면 피서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비슬산(해발1064m)에 오르는 길 몫인 오산리는 넓은 면적을 대부분 산골계곡이 차지하고 있으며 자연친화적인 면을 고려해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 실정이다.


[현황]
오산리는 청도군에 서북쪽에 끝 부분 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로. 2012년 8월 현재 면적은9,247,605㎡이며. 총 235세대에 남자 224명 여자 228명이 거주하고 있다. 용천사에서 샘솟는 샘물은 물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서 대구에서 용천사 물을 받아가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길을 잇고 있다. 오지중의 오지 오산리는 1990년대에 각북면 오산리에서 정대로 이어지는 길이 연결되어 전원마을로 각광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구에서 노후 삶을 즐기기 위해서 이곳으로 들어온 예술인들이 이곳에 하나 둘 정착하며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오산리는 동향(東向)을 하고 있는 골짜기. 골짜기 마다 식당촌이 들어서면서 곳곳에 식당과 휴양지를 만들어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시골버스의 종착지이기도 한 이 마을에는 고시원과 용양원 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다.


[참고 문헌]
『대구읍지』(대구광역시, 1768)
『청도군지』(청도군, 1982)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비슬산』(경북대학교 학술조사보고서, 1997)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8)
『통계연보』(청도군, 2012)




우산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속해있는 법정리이다.


[개설]
우산리는 청도군의 지명이 기록된 때부터 있던 마을이며 4개의 자연부락이 모여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명칭 유래]
우산리는 마을 앞산이 와우산(臥牛山)이다. 와우산을 앞산으로 하고 자리 잡은 동네이기 때문에 우산(牛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객실]
우산리의 옛 이름은 객실이다. 와우산 북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서 각실(角室)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설은 용천사가 아주 번성했을 때 마을에 큰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 이름이 도덕사(道德寺)였으며 골 이름도 도덕골이라고 했다. 그때 마을 전체가 객실(客室)이라 했다고 전한다.
[점마]
와우산 앞쪽에 옹기굴이 있고 옹기굴은 약 150여 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원래는 골안(객실안쪽) 옛 저수지 안쪽에 있었는데 점토(粘土)가 바닥이 나서 점마와 저대(楮垈: 딱재) 사이에 있는 점토를 찾아서 지슬에 있던 옹기장과 골안에 있던 옹기장이 이곳으로 와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히 각광받던 옹기는 플라스틱 용기가 들어오면서 사향길에 접어들고, 많았던 옹기장들도 하나둘 떠나고 지금은 장작불로 굽는 옹기가 아니고 가스 가마에 옹기를 굽는 집만 두 집이 있다.
[딱재:(楮垈)]
명대리(기명동)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재 이름이 딱재이다. 이 딱재라는 말은 낮은 재라는 뜻이다. 이 딱재마을에는 허부자의 전설이 서려있다. 1700년대에 살고 있던 허인발이라는 분이 만석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마을 뒷산 곳곳에 고분군이 있어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려준다. 현재 옹기굴이 있는 점마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닌 듯하다. 큰 마을 앞산 골짜기가 까막골이다. 까막골이란 어른들도 근원을 모른다. 필자와 향토사학회가 샅샅이 살펴보다가 토기 가마터를 발견하였다. 전문가와 함께 답사해 본 결과 4~5세기 정도로 보이는 토기들이 산포해 있었다. 가마골이 까막골로 변했던 것이다. 이 부근에 점토가 토기를 만들기에 알맞았던 것이다. 골 안에도 옹기골이 있었고 현재에 까막골이 있고 또한 옹기굴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토기의 근본이 되는 점토가 있어야 하고 산에 나무가 많아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군내(郡內)에 많은 옹기굴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지속되는 옹기굴은 우산리의 점마 뿐이다. 화학으로 만든 용기보다는 흙으로 빚은 옹기가 위생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어 옹기를 찾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고 있으나 지금은 장작으로 굽는 옹기가 아니고 가스 가마에서 구워내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자연 환경]
각북면 지슬리와 대구시 가창면 우록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홍두깨산과 칠엽리와 경계를 이루는 대밭골산을 배경으로 좁고 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우산리는 넓은 경작지는 딱재와 점마 사이에 있으며 경지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 있다. 이 들(平野)의 토질은 점토질이다. 이 흙들은 지금이라도 옹기를 구울 수 있는 부드러운 점토이다.
딱재는 옛날에는 저대(楮垈)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송서에서 기명동(명대2리)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 앞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딱 붙은 낮은 재란 뜻으로 딱재이다.


⚫-허부자 전설-
1700년대 딱재에 허인발(許仁發)이라는 만석꾼이 살았다. 허인발이 부자가 될 때에도 스님의 말을 듣고서 부자가 되었고 망할 때도 스님의 말을 들어서 망했다고 한다.
어느 해 어떤 스님이 길을 가다가 허인발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스님에게 정성스레 대접을 하였더니 아침밥을 먹고 나서 스님께서 “내가 이집에 와서 하룻밤 신세를 톡톡히 졌는데 제가 도와 드릴 것은 없고 해서 내가 집터를 하나 점지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스님이 허인발과 함께 동네 뒤에 산으로 갔다. ‘산 아래 다 달으니 들겅(너들강)이 있는 곳에 와서 이곳에 집을 지으시오. 그러면 부자가 될 것입니다.’ 하고는 스님은 길을 떠났다. 몇 발짝 가던 스님은 되돌아보고는 말을 한마디 던졌다. “집을 지을 때는 한 두어 자 (60cm) 낮추어서 지어야 되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허인발은 기가 찼다. 그냥 평범한 터가 아니고 돌 들겅에다 집을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스님의 말씀이라 다른 생각없이 부자가 된다고 하니 지금까지 모아 두었던 엽전을 아침마다 한 되씩 돌 들겅에다 집어 던져놓았다. 그러니 먹고 살기가 어렵던 시절에 그 엽전을 줍기 위해서 아이들부터 장정들까지 그곳에 모여들었고 그 돌들은 결국 모두 치워졌다. 터가 만들어진 후 허인발은 그곳에 집을 지었다. 집을 짓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부자가 되는데 그때마다 스님이 와서 올해는 무슨 농사를 지으라고 말을 하고 돌아갔다. 스님의 말을 듣고 농사를 지을 때마다 살림은 계속 늘어갔다. 가장 많을 때의 살림은 만석이나 되었다. 급작스럽게 부자가 된 이유를 풍수인들은 말한다. 스님이 점지해준 곳이 송아지의 배꼽부분이라서 젖을 빨면 바로 배가 불러지는 곳이라는 것이다. 만석의 살림으로 당시 흉년이 들면 허인발은 대구와 청도, 창녕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휼을 하였고 이 사실의 기록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풍족한 생활은 3대에서 끝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새로 들어온 며느리의 생각없이 한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항상 몰려오는 과객이 귀찮아서 스님이 왔을 때 스님에게 ‘어떻게 하면 과객이 오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그러면 살림이 좀 지금처럼 풍족하지 못할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하지만 며느리는 이 많은 살림이 좀 줄어들면 어떠랴 싶어 그렇게 되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스님은 앞산과 이 산 사이에 작은 못을 두 개 파시오 하고는 길을 떠났다. 과객이 안 온다는 소리에 하인들을 데리고 가서 못을 두 개 파고 나니 그해부터 5년 내에 집에 불이 나서 문서가 타고 젊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하여 불과 5년 만에 모두 축이 나자 자손들은 모두 떠나 버리고 허인발의 묘만 그 터를 지켰다. 그때 그 며느리의 성씨는 서씨이고 친정은 신당리인데 며느리는 지금 시아버지 옆에 묻혀 있다. 마을 앞에는 허 효자의 집터가 있고 효자목(孝子木)이 있었으나 효자목은 최근에 죽었고 그 옆에 새로 돋아난 버들나무가 있다. 효자목으로 버드나무를 심는 까닭은 효자는 굳건하고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아서 버드나무처럼 약간은 부드러워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현황]
골안 마을은 저수지 축조로 인해 완전하게 수몰이 되었으며 마을 서쪽 들은 삼평리와 인접해 있는데 마을 입구 삼평리 앞들에는 경제작물로 딸기 재배를 하여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우산리는 2012년 7월 현재 면적 3,651,179㎡이며 총 71가구에 남자 81명 여자 71명이 살고 있다. 골짜기 안 자연부락 골안은 저수지로 인해 수몰되어 사람들은 큰 동네 앞쪽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본동은 약간 뒤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근래에 전원주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원래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주해 갔다. 마을 앞 언덕 위에 딱재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앞쪽에 와우산이 있다. 와우산 뒤편에 찜질방이 한 때 호황을 누렸으나 유행이 지나 이용객이 찾지 않으면서 현재는 문을 닫고 폐가가 되어 있다. 와우산 앞쪽에는 옹기를 만들던 곳이 있는데 지금은 나무로 옹기를 굽지 않고 가스로 옹기를 굽고 있다. 이 옹기는 원래 지슬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옹기장 김치곤 씨가 점토를 찾아 옮겨와서 만들었는데 약 15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우산리에는 박현재(朴鉉在)선생의 강학지소인 모원재가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구읍지』(대구광역시, 1767)
『청도읍지』(청도군, 1767)
『청도군지』(청도군, 1982)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7)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1998)
『통계연보』(청도군, 2012)




지슬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소속된 법정리이다.


[개설]
우미산 아래 펼쳐져 있는 3개의 자연부락이 합쳐진 마을이다.


[명칭 유래]
옛 기록에는 지곡(只谷)이라 했고 또 『대구읍지』에는 상지곡, 하지곡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지슬동이라 했으니 자연부락 이름은 다음과 같다.
[지슬 : 上只. 中只]
우미산등이 남으로 내려오다 서쪽으로 뻗어내린 곳. 높은 둔덕에 동네가 자리 잡고 있다. 풍각현과 밀양 그리고 대구로 옮겨지다가 1906년에 청도로 편입되었다. 지슬이란 이름은 고증할 길이 없으나 옛 어른들은 각북에서 치실을 거처 우록으로 해서 대구로 가는 고개 아래에 있다고 해서 치곡(峙谷=峙室)또는 치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골짜기의 마지막 부분이라서 지곡(至谷)이라고 하기도 한다. 치실은 고개 입구라는 뜻이라 한다.
[다래미 : 下只]
우미산의 산동이 뻗어 내린 등성이 아래 자리한 다래미는 상지와 중지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지역에 있다. 그래서 하지라고 한다. 이 마을을 한문으로 ‘월암(月岩)’으로 표기하는데 달바우가 ‘다래미’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각북의 끝, 골짜기의 끝이기에 지곡(只谷)으로 쓰고 지실이라고 불렀는데 막마침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형성 및 변천]
각북면 전체의 일이긴 하지만 청도에서는 행정 명칭이 가장 많이 변했던 곳이기도 하다. 상지(上只)마을에서 달성군 가창면 우록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밤티재이다. 옛날 사람들은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다닐 때. 이곳 지슬에서 대구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였고 1960년대 까지만 하여도 각북. 풍각. 각남. 에서 대구 서문시장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 이 고갯길이였으나 지금은 이 길이 있는 것조차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


[자연 환경]
지슬리는 가창면 주리와 가창면 백록과 인접해 있어서 대구로 넘어갈 때 주리로 해서 대일리로 가는 길과 우록리에서 삼산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예전에 지금의 대구의 서문시장까지 걸어서 오고 갔다고 한다. 비슬산과 삼성산 사이에 있는 지슬리는 지곡이라고 해서 끝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트여 있다가 하지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쳐져서 남쪽으로 내려가 청도천에 합류하는 계곡에 있다. 우미산 서남쪽 밤티재 아래에서부터 형성된 다락논과 밭은 철저하게 계단식이다. 밭에는 물 빠짐이 좋아 과수가 잘 되고 계곡이 깊어서 사과나무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1리에는 지슬지(芝瑟池)가 있어 아래 들의 농사용 물을 감당하고 있다.


[현황]
지슬리에도 많은 사람들의 전원마을로 지목 받아 하나둘 귀농과 아울러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동네로 면적은 8,044,374㎡이며 총세대수 139세대에 남자 119명, 여자 146명이 거주하고 있다. 풍각에서 가창으로 넘어가는 지방도 902호선 덕산리에서 금천리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자리한 지슬리는 가장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마을 뒤쪽에 다락논 과 밭이 대부분이고 마을 앞에는 경지 정리가 된 논이 있다.
지슬리는 동쪽은 우미산을 등지고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와 격해있고 서쪽은 낮은 등성이를 경계로 금천리와 마주하고 있다. 남족으로는 계곡을 따라 덕산리와 접해있고 북쪽은 비슬산 지맥이 가창면 최정산으로 이어져 있다. 산을 등지고 앉은 마을은 양지바른 곳이라 인근 대도시에서 전원생활을 꿈꾸며 찾아 들어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추세이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구읍지』 (대구광역시, 1767)
『청도읍지』(청도군, 1768)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8)
『청도군지』(청도군, 1991)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통계연보』(청도군, 2012)

박윤제(청도 문화원장)​







[출처] 청도군 각북면|작성자 청도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