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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

대전광역시 법정동 177개의 이름과 유래

by 범여(梵如) 2021. 10. 12.

No 동명 유 래
    대덕구
1 갈전동(葛田洞) 칡밭이 지천으로 덮여 있어 갈밭, 갈대밭이 있어서 갈밭 또는 갈전이라 하였다. 칡갈()
2 대화동(大禾洞) 땅이 매우 좋아 벼가 잘 되므로 대화(大禾)라고 하였다. 벼화()
3 덕암동(德岩洞) 옛날 한 노승이 덕암사(德岩寺)라는 절을 짓고 도를 닦으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노승이 죽자 절의 뒤편에 바위가 솟았는데 덕바위라고 하여 사람들이 숭상하였으므로 마을의 이름을 덕바위, 그 음이 와전되어 덤바위 또는 덕암(德岩)이라 하였다.
4 목상동(木上洞) 남해(남개,목포)마을 위쪽에 있으므로 위남해(위목포) 또는 목상(木上)이라고 하였다.
5 문평동(文坪洞) 넓은 들이 있으므로 먼벌 또는 문평(文坪)이라고 하였다.
6 미호동(渼湖洞) 금강(錦江)이 미호동을 휘돌아 흘러내리는 모습이 호수처럼 아름다워서 물결무늬미()자와 호수호()자로 이름을 지었다. 문의면에 있는 현암사(懸岩寺)에 올라 그 곳에서 내려다보면 이 마을 근처의 강은 아름다운 호수와 같다고 한다.
7 법동(法洞) 계족산(鷄足山)과 매봉의 높은 산, 깊은 골짜기에 찬 샘물이 있어 법천동(法泉洞)이라 하였다. 그 유래설은 회덕읍지에 있다. 그 후에 법천동이 법동(法洞)으로 되었다.
8 부수동(芙水洞) 연화부수(蓮花浮水) ,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의 명당이 있다해서 부른 것이 부수(芙水)로 변한 이름이다.
9 비래동(比來洞) 마을 북동쪽 골짜기에 비래암(飛來庵)이라는 절이 일찍부터 있었으므로 비래암의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도 비래암(飛來岩)이라 하였다. 일설에는 꿩이 매에게 쫓겨 이곳에 날아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왜냐하면 비래암(飛來庵)의 전 이름이 용자암(龍子岩)이고 지금 비래리(比來里)의 직전 이름이 비래리(飛來里)이며 그 전의 이름이 우래리(雨來里)인 것을 보면  라는 글자는 단순히 음차(音借)한 것에 불과하며, 이 지역을 자와 관련지어 보더라도 비()와 깊은 관계가 있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이 비래동의 중심마을은 고성이씨의 집성촌인 원비래(元比來)이다. 그 뒤 음이 변하여 비럭골이라고도 부른다.
10 삼정동(三政洞) 옛날에 이 지역은 산전(山田)을 일구어 살았으므로 산전골이라 부르던 것이 후에 변하여 삼정(三政)골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한편 어느 노승이 이 지역의 지세를 보고는앞으로 이 땅에는 세 정승(政丞)이 나올 명당이 있다고 예언한 땅이라 하여 삼정골(三政谷)로 바뀌어 불려 졌다고 한다. 이 세 혈은 천혈(天穴), 지혈(地穴), 인혈(人穴) 등인데 그 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미 천혈에는 은진송씨가 묘를 썼고 지혈에는 여흥민씨(驪興閔氏), 그리고 인혈에는 충주박씨(忠州朴氏)가 각각 묘를 써서 모두 가문이 현창(顯暢)하게 되었다고 한다.
11 상서동(上書洞) 옛날에 이곳에는 위쪽과 아래쪽 두 곳에 서당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위쪽에 있는 서당을 웃서당 또는 상서당(上書堂)이라고 하였다.
12 석봉동(石峰洞) 봉우리에 돌이 많으므로 석봉이라 하였다.
13 송촌동(宋村洞) 은진송씨의 집성촌이 있었던 마을
14 신대동(新垈洞) 새로 터를 잡아서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새터말 또는 신대(新垈))라고 하였다.
15 신일동(新一洞) 새로 마을이 생겼으므로 새터 또는 신대라고 하였다. 그 후 대전시로 편입되면서 신일동이 되었다.
16 신탄진동(新灘津洞) 새여울나루
17 연축동(連丑洞) 연방죽이 있으므로 연축골이라 하였다. 또는 옛날 이 곳에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연축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옛날 연축골에 있던 집들은 모두 방향이 축좌(丑坐)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축좌(連丑坐)가 줄어서 연축(連丑)이 되었다고 한다.
18 오정동(梧井洞) 옛날에 큰 우물이 있으므로 우물이라 하던 것인데, 우물가에 오동(梧桐) 나무가 있으므로 오정(梧井)이라고 하였다.
19 와동(瓦洞) 옛날에 이 지역에서 기와를 구웠으므로 왯골 또는 와곡(瓦谷)이라 하였다.
20 용호동(龍湖洞) 옛날에 용이 살고 있는 마을을 용호(龍湖)라 했고, 이후 용호동으로 바뀌었다.
21 읍내동(邑內洞) 회덕현의 소재지이므로 읍내(邑內)라고 하였다.
22 이현동(梨峴洞) 이현동 뒷산의 모양이 둥글 넙적한 배()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배산이라 하였다. 갈밭에서 심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배고개(梨峴)라 했고, 고개 이름을 따서 이현리라 했다.
23 장동(長洞) 계족산과 성재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산디(웃산디), 짚은골, 새뜸, 욕골, 새골을 거쳐 용호동으로 흘러 내려가는 골짜기가 매우 길어서 긴골 또는 진골이라 하는데, 이와 같은 뜻의 한자말이 장동(長洞)이므로 장동이라 했다.
24 중리동(中里洞) 송촌(宋村) 중간이 되므로 중리(中里)라고 하였다.
25 평촌동(坪村洞) 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 또는 평촌(坪村)이라고 하였다.
26 황호동(黃湖泂) 금강이 남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흘러가서 곶을 이루었으므로 느루꾸지, 느릅고지, 황곶, 황호라 하였다.
    동구
1 가양동(佳陽洞) 굉잇들 가에 괭이, 갱이라는 마을이 있어 가양동(佳陽洞)이라 하였다. 햇빛이 잘 드는 마을이라 가양(加陽)으로 부르다 가양(佳陽)이 되었다.
2 가오동(加午洞) 형세는 물론 마을에 분산되어 있는 집들의 구조가 전체적으로 볼 때 가오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3 구도동(九到洞) 9명이 과거급제를 해서 또는 9개의 천이 모여서
4 낭월동(朗月洞) 옥토망월(玉免望月)의 명당이 있다 하여 망월낭이, 만월랑리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낭월(朗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 내탑동(內塔洞) 동구(洞口)에 탑()이 있다 하여서 탑산이라 하였는데,  탑산의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내탑(內塔)이라 불렀다고 한다.
6 대동(大洞) 대전 한밭 동쪽에 있는 큰 마을
7 대별동(大別洞) 큰 자라(大鼈)와 깊은 인연이 있는 지역으로 전해오는데 자라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데에는 다음 몇 가지 유래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대별의 뒷산인 비파산(琵琶山)에 올라 이곳을 내려다보면 대별동의 지형이 마치도 큰 자라()의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옛날 이 곳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못 속에는 커다란 자라가 살았기 때문에 큰 자라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대별리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셋째는 지푸재의 입구 비파산의 아래에는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朴彭年) 선생의 증조부이자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중시조인 박원상(朴元象)의 묘가 있는데 그 묘자리가 큰 자라의 형국을 한 명당이라는 풍수가들의 말에 따라 이 지역을 대별리라 하였다는 설이다.
넷째는 조선조 중기에 송촌동에 사는 송담(松潭) 송남수(宋枏壽)가 아버지 안악공의 산소를 이사동에 모시고 매일 이곳을 지나 성묘를 다녔는데 하루는 밤사이의 장마비로 냇물이 크게 불어서 건널 수 없게 되어 낭패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자라 다섯 마리가 떠올라 징검다리를 만들어 효자 송담을 성묘하도록 무사히 건너게 하였다는 전설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을 큰 대()자 자라별()자 대별리(大鼈里)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 자라별자의 표기가 너무 까다로와 언제부터인가 쉬운 분별 별()자로 고쳐 대별리(大別里)라 부르게 되었다.
8 대성동(大成洞) 대성산 밑에 있는 마을
9 마산동(馬山洞) 말을 닮은 산을 따서 말미라하고, 말마()자 뫼산()자를 따서 마산(馬山)이라고 하였다.
10 비룡동(飛龍洞) 용이 승천한 곳으로 유래
11 사성동(沙城洞) 뒷산이 불모지(不毛地) 순모래로 성처럼 솟아 있는 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모래재(沙城)라 부른다.
12 삼괴동(三槐洞) 느티나무 3그루가 정자처럼 있어 나그네 쉼터 또는 선비들이 시를 짓던 곳으로 유래
13 삼성동(三省洞) 일본강점기 때 영정삼정목이 삼성동으로 변경
14 삼정동(三丁洞) 세 곳의 명당자리가 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진 삼정동(三丁洞)은 본래 골터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골삼정(谷三丁), 마을이 산 안에 있다고 하여 부르는 안삼정(內三丁), 그리고 마을이 산 바깥에 있다고 하여 부르는 바깥삼정(外三丁) 등 세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또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전군 동면의 매전리(수원지가 있는 마을)와 거북이가 놀던 샘이 있다 하여 붙여진 구정골(龜丁谷=구정부리)이 합쳐졌다.
15 상소동(上所洞) 하소보다 위에 있고 양반들이 하소마을보다 좋다하여 상소로 이름을 바꿈.
16 성남동(城南洞) 계족산성 남쪽 언덕진 곳에 마을이 있어, 재성()자와 남녘남()자를 따서 성남이라 하였다. 그러나 성남의 옛 이름은 석남(石南)으로도 불렀다. 성남(城南)이란 지명은 1940년 대전부 구역확장에 따라 성남정(城南町)이라 한 것이 처음이었다.
17 세천동(細川洞) 동네 가운데 가는 개울()이 있어서 유래
18 소제동(蘇堤洞)  소제호라는 큰 호수가 있어서 유래
19 소호동(所好洞) 이 곳은 산세가 순한데다 전답이 기름져서 오곡이 풍족하고 땔나무마저 흔해서 옛날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하여 소호리(所好里)라 불렀던 것인데 그 뒤 음()이 축약, 변형되어 소리, 소올 또는 소흘(素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 신상동(新上洞) 새들의 위쪽 마을로 유래
21 신안동(新安洞) 1905년 대전역이 생기면서 역 뒤편에 마을이 새로 생겨 번성하였는데, 그때 이 마을이 새터·신대(新垈)였으며 신안동(新安洞)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역 뒤편에 편안히 자리 잡은 동이라서, 새신()자와 편안안()자를 따서 신안(新安)이라고 하였다.
22 신촌동(新村洞) 옛날에 환자쌀(還子米)을 저장하는 사창(社倉)이 있던 자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동음이의현상(同音異意現象)이 나타난 것이 이 지명의 특징이다.
23 신하동(新下洞) 새로 생긴 마을 아래쪽에서 유래, 새들의 아래쪽에 있다는 마을
24 신흥동(新興洞) 조선말기 까지도 대동천이 범람하여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가, 1910년대에 대동천을 보수하고 마을이 새로이 들어섰다. 이 마을이 새터말이며, 이를 한역하여 신흥동(新興洞)이라 하였다.
25 오동(梧洞) 풍수설의 오동반월 형국이라고 해서 유래, 또는 마을 아래에 오동나무가 많다고 하여 오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26 용계동(龍溪洞) 용이 살았다는 못이 냇가에 있는 용지말, 용계말에서 유래되었다. , 용계말의 용용()자와 시내계()자를 그대로 동의지명으로 하였다.
27 용운동(龍雲洞) 용운동의 본디 이름은 용방이었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 용방리(龍坊里), 즉 용의 마을이 된다. 그것은 이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지형이 마치도 용이 꿈틀거리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던 것이다.
28 용전동(龍田洞) 용이 노는 지역 용밭에서 유래
29 원동(元洞) 대전에서 개발이 가장 빨랐던 지역으로 대전의 이름도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30 이사동(二沙洞) 이사동은 추로지향(鄒魯之鄕) 즉 선비마을로 알려져 왔다. 그러기에 위사라니 수침골에 가면 소화동천(小簧天)이라고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향교골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는가 하면 오도산이란 산 이름도 있어 이것만 보아도 선비가 사는 고을임을 짐작케 한다.
31 인동(仁洞) 본정이정목이 1946년에 인동으로 바뀜.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장터라고 전해지는 이 지역은 지금도 동의 대부분이 인동시장과 상가로 형성되어 있다.
32 자양동(紫陽洞) 자양동은 가양동(佳陽洞)과 함께 송우암이 궐리(闕里)라 명명한 소제 땅과 연결하여 지은 지명으로 자양부자(紫陽夫子) 즉 주자(朱子)를 연상하여 이곳을 자양이라 하였다. 또한 1940년 대전부에 편입될 때의 명칭인 자양정(紫陽町)을 자양동으로 함.
33 장척동(長尺洞) 산세가 가늘고 긴자처럼 생겨서
34 정동(貞洞) 일제강점기 때 본정영이라 정동으로 바뀌었다.
35 주산동(注山洞) 고래시대 향소, 부곡에 따른 주안향지역인 줄뫼가 줄미 그리고 주산으로 유래
36 주촌동(舟村洞) 이 마을의 지형이 풍수설에 배터라고 한데서 배말(舟村)이라는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는데 현재 대청댐의 완공으로 수몰된 지역이다.
37 중동(中洞) 대전이 역이 생기고 원도심이 생길 때 중간에 있는 동
38 직동(稷洞) 핏골이란 마을이 피가 직으로 바뀌어서 직동으로 됨.
39 천동(泉洞) 좋은 약수 물이 있어서 유래
40 추동(秋洞) 옛날부터 가래나무(楸木)가 많아서 가래울이라 부르던 지역을 한자로 잘못 음차하여 추동(楸洞) 추동(秋洞)이라고 하였다.
41 판암동(板岩洞) 옛이름은 너더리 또는 판교(板橋)라고 했다. 너더리란 널다리가 변해서 생긴 말인데 대전-옥천간 국도변에 있는 은혜주택 옆에 널판지로 다리를 놓아 대동천을 건너다녔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널다리 동네이고 그것이 널다리너더리로 변했다. 조선시대 너더리, 한자로는 판교리(板橋里)라 하였던 것이다.
42 하소동(下所洞) 상소전이 있었으나 상소동 양반들이 상소보다 아래 있어 하소라 부름
43 홍도동(弘道洞) 옛날부터 이곳에는 동산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며, 동산과 마을에 복숭아나무가 유난히 많아서 홍돗골이라고 불렀다.
44 효동(孝洞) 자연 마을명을 따지 않아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건국 초에 ()과 효()를 생각하여 인동이니 효동이니 하였다고 한다.
45 효평동(孝坪洞) 높은 산 속에 들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 들(효들, 소들) 이름에 따라 효평(孝坪)이 되었다.
    중구
1 구완동(舊完洞) 왜구의 침범에도 이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완전하였다 하여 완전이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완전 남쪽 소호리에 있는 산골에서도 신완전이라 하여 이 마을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완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2 금동(錦洞) 금동천의 맑은 물이 흘러서 또는 산세가 비단 같아서
3 대사동(大寺洞) 옛날 이 곳에 큰절이 있었기에 한절골로 불리었는데, 음이 변하여 ''''한적골, 한잣골''''이라 하였다. 지금도 보문산 주변에는 많은 절터와 절들이 들어서 있다.
4 대흥동(大興洞) 새롭게 크게 흥한 지역으로 유래
5 목달동(木達洞) 목다리 마을로 유래, 나무() 다리()가 있어 남달리라 하였고, ()다리로, 목다리가 목달로 불리다 한역화 되어 목달촌(木達村)이 되었다.
6 목동(牧洞) 목골 마을에서 유래, 목동 선병원 근처에 일제 때 군량미 수송을 위해 송참봉의 땅을 빼앗고 그 땅의 일부에 긴 못을 파 논에 물을 대었는데, 그 못 근처의 마을을 목골 또는 못골이라고도 하였다. 또 못이 있었기에 못이 목골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7 무수동(無愁洞) 원래 물과 무쇠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무쇠골 또는 수철리(水鐵里)라 부르던 곳인데, 조선조 숙종 때 대사간 권기가 정착하면서, 그의 호를 무수옹(無愁翁)이라 하고 마을도 무수리라 부르게 된 지역이다.
8 문창동(文昌洞) 서동서정으로 부르던 것을 마을의 학문적 기풍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1946년 왜식 명칭 개칭 때, 문창동으로 짓게 된 것이라 한다. 옛날에는 장이 있었던 마을로 장터라고 했으며, 지금도 문창시장이 있다.
9 문화동(文化洞) 1935년 문화정, 1949년 문화동으로 변경하였다. 과례가 큰 마을이며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고려말 우징복이 이 마을에 살면서 제사나 제사상에 정성을 쏟는 습관을 마을 사람들에게 기르도록 하였다하여 과례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충남대 의대, 대전문화재단, 한밭도서관 등 교육문화시설이 많이 있다.
10 부사동(芙沙洞) 부용이와 사득이 전설로 유래
상부사 부용이와 하부사 사득이가 사랑에 빠졌지만 사득이가 백제 때 전쟁이 나가 돌아오지 않자 부용이가 보문산 선바위에서 죽고 만다. 부용과 사득을 기리는 거리제가 부사칠석놀이로 재연되고 있다.
11 사정동(沙亭洞) 마을 입구에 큰 반송이 서 있으며 모래수렁이 있었던 마을이라 사정(沙亭·沙汀)이라고 부른다. 498년 동성왕 때 둘레 350m 사정성(沙井城)을 축조하고 한솔 비타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12 산성동(山城泂) 근처 산에 산성이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마을
13 석교동(石橋洞) 남분붕이 큰 바위로 다리를 놓게 된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후로 봉소루가 소재한 이 마을을 돌다리라 하고 석교(石橋)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4 선화동(宣化洞) 충청남도청 자리를 감삿골이라 했는데, 그래서인지 도청이 있게 되었고 감사가 있는 당이 선화당이므로 선화동이 되었다.
15 안영동(安永洞) 현재의 원안영마을은 세조 때 충신 박심문(朴審問)의 후예들이 살던 마을이다. 이곳에는 충정공 박팽년(朴彭年)과 청재(淸齋) 박심문을 모신 사당 창계숭절사(滄溪崇節祠)가 있다.
16 어남동(於南洞) 공주로부터 길게 늘어져 마을 이름이 유래 느나미가 어남으로 바뀜. 도리미 마을은 단재 신채호 생가가 있다.
17 오류동(五柳洞) 5개의 큰 능수버들이 있어서 오류동이 되었다. 서대전역이 있다.
18 옥계동(玉溪洞) 이중환의 택리지에 진산, 옥계의 물과 합쳐 갑천이 된다는 기록이 있다. 옥계는 대전천이다.
19 용두동(龍頭洞) 대성고등학교가 있는 야산의 봉우리 생김새가 용머리 같다고 용두봉이라 했다. 지형의 형상을 상징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송지경이 세운 만취정(晩翠亭)이란 별당이 있었다.
20 유천동(柳川洞) 버드냇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버드내, 유등천, 유천이라 불렀다. 옛날에는 수양버들 늘어진 강변과 마을의 풍경이 절경을 이루었는데 버드내(柳等川) 근처에 있던 마을이었으므로 유천동이라 했다.
21 은행동(銀杏洞)  은행나무와 정자가 있는 은행나무골 으능정이에서 유래
22 정생동(政生洞) 정승이 나온 마을이라 하여 정생동
23 중촌동(中村洞) 중말에서 유래
24 침산동(砧山洞) 침산 밑에 있는 마을. 중심 마을은 방아미 마을이다.
25 태평동(太平洞) 넒은 들로 형성된 마을
26 호동(虎洞) 호랑이가 살았던 마을, 사냥꾼이 호랑이 어미를 잡았는데 새끼 호랑이들이 사냥꾼을 어미로 생각해 결국 사냥꾼과 새끼호랑이는 사람이 없는 깊은 산속에서 살았다는 전설
    서구
1 가수원동(佳水院洞) 개수원이라고 불리다 앞의 냇물이 아름다워 가수원으로 부름
2 가장동(佳狀洞) 넓은 들판에서 생산한 곡식을 창고에 많이 가두는 동리 '가둔이'이라 하였다. '가둔이'를 한자로 '가장(加藏)'으로 표기, 훗날 가장동(佳狀洞)으로 변천. 옛날에는 한밭의 농악하면 가장동의 농악을 지적할 만큼 구성진 농부가가 끊이지 않는 마을로 유명하였다.
3 갈마동(葛馬洞)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자리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 갈마동은 처음에는 목마를갈()자이었을 터인데 뒤에 칡갈()자로 변한 것이다.
4 관저동(關雎洞) 진잠현의 관아 즉, 기성관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어 관하촌(館下村), 관저리(關底里)
5 괴곡동(槐谷洞) 마을이 고리 모양처럼 생겼거나 또는 느티나무가 있는 골자기 마을에서 유래
6 괴정동(槐亭洞) 정자처럼 잘자란 괴목나무가 서 있었기 때문에 괴목나무 괴, 정자 정자를 따서 괴정동
7 내동(內洞) 산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서 생긴 이름 안골이 내동으로 바뀜.
8 도마동(桃馬洞) 산모양이 도마뱀처럼 생겼다하여 도마달 또는 도마실이 있으므로 도마다리라고 불렀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공주목의 동유등천면(東柳等川面)에 보면, 도마교리(道馬橋里)로 기록되어 있다. 현지조사를 통해 보아도 도동, 도동현, 손도동, 박도동 등이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도마동(桃馬洞) 길도자 도마동(道馬洞)으로 환원되어야 마땅하다. 무의미하게 도()자로 쓰게 된 것은 일제하에서 와전된 지명임이 분명한데 촌로들의 증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밀양손씨 족보에는 도교(道橋)로 나온다.
9 도안동(道安洞) 선비들이 입신출세하는 것보다 안빈낙도(安貧樂道) 정신으로 여기를 떠나지 않고 지켰기 때문에 도안리라고 불러오다가 도안동이 된 것이다.
10 둔산동(屯山洞) 둔지산 밑에 있는 마을, 둔지산의 둔지봉(芚之峰) 둔지처(芚之處)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라는 구전이 있었다고 한다.
11 만년동(萬年) 만년을 살아도 식량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농사골이라 하여 만년동
12 매노동(梅老洞) 원매노 마을에서 유래, 김해 김씨 4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는 마을로써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따르면 이 마을에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어서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13 변동(邊洞) 유등천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갓골이라 지칭하였다. 옛날에는 홍수로 자주 침수되던 냇가 마을이었다.
14 복수동(福守洞) 고려 시대에 복수소(福守所)가 있었던 마을로 복수소>복수로 부르게 되었다.
15 봉곡동(鳳谷洞) 귀소형(飛鳳歸巢形)의 명당이 있다하여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바위가 많아 부엉이가 많이 살았으므로 부엉골 또는 봉곡이라 했다.
16 산직동(山直洞) 옛날부터 연안 이씨네의 산직이 집이 있어서 산직동이라 붙여졌다고 전해지는가 하면 달리 산직동 일대에 장군대좌(將軍大坐), 옥토망월(玉土望月), 금계포란(金鷄抱卵) 세 명당이 일렬로 늘어져 있어 전체로서 산()자를 이루고 있으므로 산직(山直)동이 되었다 함.
17 오동(五洞) 오동은 본래 오리(五里)였다. 물에 떠서 노니는 오리 형국의 명당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이와 달리 골()이 짧아 오리밖에 안돼서 유래된 명칭
18 용문동(龍汶洞) 용두봉(龍頭峰)을 향하고 있는 마을이므로 용문동(龍紋洞)이라 칭하였는데, 후대에 용문동(龍汶洞)으로 오기하여 비하되었으므로 오자를 바로잡아 본래의 용문동(龍紋洞)으로 써야 될 것이다.
19 용촌동(龍村洞) 용이 있는 마을. 입구에 용두처럼 생긴 바위가 있고, 마을 뒤에는 또한 용처럼 생긴 해발 133ml 용산(龍山) 있어서 마치 그 형상이 용이 누워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리 부른다.
20 우명동(牛鳴洞)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계곡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여울을 이루어 울었다하여 울여울 또는 울어동이라 불렀다는데, 그 뒤 표기가 변하여 우명(牛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1 원정동(元亭洞) 옛날 마을 앞에 큰 정자가 있어 원정이라고 했다.
22 월평동(月坪洞) 원월평 마을에서 유래, 유성쪽에 건너다보면 반달형의 지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옛날부터 반월형(半月形)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온다.
23 장안동(壯安洞) 대둔산(大屯山)에 뿌리를 둔 산줄기가 뻗어 산수가 장엄하고 아름다워서 붙여졌다고 전하는 이곳은 또한 임진왜란당시 장씨가 난을 피해 장군봉 아래 베틀굴에서 숨어 3년간 베를 짜며 살다가 비로소 지금의 원장안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하여 원장안이 되었다 하며 얼마 전까지 이근처 전답과 산은 거의가 장씨 일가의 소유였다고 한다.
24 정림동(正林洞) 숲 밑에 있는 마을. 수밋들 순평(淳坪) 정림초등학교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숲밑들>숨밋들>수밋들(수미뜰)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다.
25 탄방동(炭坊洞) 옛날에는 참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었고, 숯을 굽는 숯방이 있었던 마을이라 생긴 이름이다.
26 평촌동(坪村洞) 옛날에는 진벌(眞坪) 또는 질마루라고 부르던 곳. 평촌동의 연동진남 가찰만인(連東鎭南 可活萬人) 그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예로부터 연산 동쪽 진잠 남쪽에 만인이 피난해 살 수 있다는 예언이 있다.
27 흑석동(黑石洞) 옥녀탄금형의 명당이 있어 금평이 거믄들 바뀌고 검은들이 다시 흑석동으로 바뀜. 옛날엔 금평(琴坪)이라 하였다 그 금평의 우리말은 거믄들이었다. 이 검은들이 후에 와전되어 거문은 검은()으로, ()으 돌()로 변하여 흑석으로 변용 되었다.
    유성구
1 가정동(柯亭洞) 나뭇가지가 축 늘어진 큰 정자나무가 있어서 가정자 또는 가정(柯亭)이라 하였다.
2 갑동(甲洞) 옛날에 갑소(甲所)였으므로 갑골 또는 갑동(甲洞)이라 부른 곳이다.
3 계산동(鷄山洞) 삼한시대 마한의 신흔국이 있었다는 빈계산(牝鷄山)이 있으므로 계산이라고 함.
4 관평동(官坪洞) 마을 앞에 관들이 있으므로 관들, 또는 관평이라 하였다고 한다.
5 교촌동(校村洞) 진잠향교가 있어 교육이 있는 촌락마을(항교말) 교촌(향교말)에서 유래
6 구룡동(九龍洞) 지형이 마치 구렁이와 같으므로 구렁이, 또는 구룡이라 하였다.
7 구성동(九城洞) 거북상이 있으므로 거북성 또는 구성(龜城)이라 하던 곳이다.
8 구암동(九岩洞) 거북성 또는 구암(龜岩)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는 구()로 통해온다.
9 궁동(弓洞) 지형이 휘어진 활처럼 생겼으므로 활골 또는 궁동(弓洞)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10 금고동(今古洞)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의 명당이 있어서 금구리>금고리라 하였다고 한다.
11 금탄동(金灘洞) 금강의 여울이 있으므로 쇠여울이라하는데, 줄여서 쇠일, 또는 금탄(金灘)이라 부르고 있다. 대표적으로 금점산에 금 채굴 흔적 남아 있고, 금점산 밑 강가에는 사금이 있어서 금을 채취할 수 있으나 양이 미미하다고 한다.
12 노은동(老隱洞) 원래 이 지역은 넓은 들이었는데, 이 들에 마을이 생겨 논골이라 부르다가 노은골 또는 노은동(老隱洞)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3 대동(垈洞) 큰 대밭이 있으므로, 댓골, 또는 대동, 죽전이라 한다고도 하고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좋은 터전이 되므로 대동(垈洞)이라고도 하였다.
14 대정동(大井洞) 큰 우물이 있었던 동내, 한우물 또는 대정이라 부른다.
15 덕명동(德明洞) 옛날부터 돌멩이가 많으므로 독멩골 또는 덕명골(德明洞)
16 덕진동(德津洞) 고려 때부터 덕진현(德津縣)의 고을이었던 것이 마을로 줄어든 이름이다.
17 도룡동(道龍洞) 뒷산의 모양이 도롱뇽과 같다 하여 도롱 또는 도룡(道龍)이라 하였다. 또는 뒷산의 모양이 용과 같이 생겼다 하여 도룡리라고 하였다 한다.
18 둔곡동(屯谷洞) 신라 문무왕 때 김인문(金仁問)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소문성(蘇文城)을 쳤으므로 두니실 또는 둔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두니실(둔곡)이 법정동의 명칭이 되었다.
19 문지동(文旨洞) 낮은 산기슭에 있으므로 민마루 또는문지(文旨)라 하였다.
20 반석동(盤石洞) 옛부터 이 마을 일대와 주변 산에는 바위가 많은데 어느 곳이고 반석(盤石)이 많이 깔려 있으므로, 반석동이라 하였다.
21 방동(芳洞) 이곳의 지형이 꽃봉처럼 생겼으므로 방골 또는 방동(芳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22 방현동(坊峴洞) 방고개 아래 곧 덕진산성 안쪽에 있으므로, 안말, 내동, 방고개, 방아고개, 방현(坊峴)이라 하였다.
23 복용동(伏龍洞) 복용동의 마을들 뒤의 큰산이 용이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복용(伏龍)이라 부르는 지역이다. 그런데 그 용이 엎드려 있어 이 마을에선 위인이 나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마을을 떠나서만이 출세할 수 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어사 박문수가 비록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이 마을에서 나갔기 때문에 출세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박문수가 지관을 데려와 살핀 즉 계룡산의 줄기에 흑룡산과 청룡산을 발견하고 여기엔 용이 땅속에 있다하여 ''복용의 명당''이라 하여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24 봉명동(鳳鳴洞) 옛날에는 이 지역의 들에 숲이 많아 부엉이가 찾아와 울던 지역이라 하여 봉명동이라 부르던 곳인데, 현재는 유성구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다.
25 봉산동(鳳山洞) 봉산동의 옛명을 백운리라고 부른다. 삼운지지란 백할아버지 자손의 피난처라고 불려왔는데 삼운지란 구즉면 봉산리인 백운리와 백운리 뒷산에 오봉산이 있는 바위 모습이 두꺼비 모양이어서 산세를 보호하는 백운이고, 청운리는 마을이 병풍과 같이 둘러싸여 있어 마을로 들어가고 나오는 통로가 외길로 되어 있어 청운리라 하였다 하는데 피난지로 으뜸인 곳이 여기 삼운지지라 한다.
26 상대동(上垈洞)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상대(上垈)를 달리는 ''위터''라 웃골이라 불렀던 지역이다.
27 성북동(城北洞) ()의 뒤쪽에 위치해 있어 잣뒤 또는 성북(城北)이라 부르던 지역이었다.
28 세동(細洞) 상세동으로부터 중세동을 거쳐 방동(芳洞)의 하세동까지 가늘고 긴 골짜기로 되어 있어 가는골 또는 세동(細洞)이라 불리운 곳이다.
29 송강동(松江洞) 소나무가 무성하므로 송강(松江)이라 하였고 강물이 흐르는 곳에 소나무가 무성하다 하여 송강이라 부른다. 옛날엔 금강이 이 마을 앞으로 흘렀다 한다.
30 송정동(松亭洞) 이 곳에 정자처럼 서 있는 소나무가 있었으므로 소정이(<솔정이) 또는 송정(松亭)이라 불렀다.
31 수남동(水南洞) 뒤에는 높은 금병산이 둘러 있고 물이 남쪽으로 흐르므로, 무나미, 무남리 또는 수남이라 하였다고 한다.
32 신동(新洞) 신흥리(新興里)와 녹동리(鹿洞里)를 병합하여 신흥과 녹동의 이름을 따서 신동이 되었다.
33 신봉동(新峰洞) 자연마을 ''새울''을 한자어로 바꾸면서 신봉이라 하였다.
34 신성동(新城洞) 산이 성 같이 둘러 쌓였으므로, 삼성이, 산성이 또는 신성(新城)이라 하였다.
35 안산동(案山洞) 길마재 산 아래에 있으므로, 길마재 또는 안산(案山)이라 하였다.
36 어은동(魚隱洞) 마을이 산골짜기에 있으므로 은골, 언골을 한문화하여 어은(魚隱)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 산골짜기에 물고기가 숨어 있다는 해석은 동음견인(同音牽引)에 의한 후세인의 어원 풀이일 뿐이다.
37 외삼동(外三洞) 새미레 삼미천(三美川) 바깥쪽이 되므로 바깥새미레라 하였다.
38 용계동(龍溪洞) 용의 머리처럼 생긴 산의 모양을 따라 밀머리, 용계(龍溪)라 부르는 지역이다.
39 용산동(龍山洞) (龍山) 밑이 되므로 용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40 원내동(院內洞) 진잠현을 관할하는 행정적 중심지인 읍내 또는 내동에서 유래
41 원신흥동(元新興洞) 넓은 들판에 새로 형성된 마을임으로 신흥(新興)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42 원촌동(院村洞) 이 곳에는 숭현서원(崇賢書院)이 있었으므로 서원말, 원촌, 원촌동이라고 함.
43 자운동(自雲洞) 잔산 밑에 있으므로, 잔골, 또는 자은동(自恩洞)이라고도 하였다.
44 장대동(場垈洞) 유성장이 있으므로 장터를 한문화하여 장대(場垈)라 부르는 곳이다.
45 장동(長洞) 장자(부자)가 살았으므로, 장자울, 장재울 또는 장동리라 하였다고 한다.
46 전민동(田民洞) 본래 이름은 정민(貞民)이다. 이곳에 정민역(貞民驛)이 있어 삼남에서 서울을 오가는 교차로 였다. 정민이 변하여 전민(田民)으로 부른 것은 정민역은 없어지고 아마도 주민들이 밭을 일궈 살았기 때문인가 한다.
47 죽동(竹洞) 이 지역에는 대나무가 울창하였기 때문에 대울 또는 죽동(竹洞)이라 부르던 곳이다. 봉은 죽순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전설로서 봉명동이 있으니 죽동이 필연적으로 상응된다는 부자 마을이다.
48 지족동(智是洞) 산이 즐비하게 이어 내려와서 골짜기를 이룬 두메 지역으로 지족실 또는 지족동(智足洞)이라 부르는 곳이다.
49 추목동(秋木洞) 금병산(錦屛山) 밑에 있어 가래나무가 많으므로, 가래울 또는 추목동이라 하였다. 그러고보면 추목(秋木)은 가래나무추()자로 써야 옳다. 동구의 추동(秋洞)도 마찬가지이다.
50 탑립동(塔立洞) 아랫말(下塔)에 석탑이 서 있었기 때문에 제단으로 사용하곤 하였는데 그 탑이 서 있는 지역이라 탑립(塔立)이라 불렀다.
51 하기동(下基洞) 텃골 아래에 있으므로 아래텃골이라 하였다.
52 학하동(鶴下洞) 이곳의 지형이 학()이 내려앉는 형국이라 하여 학하동(鶴下洞)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53 화암동(花岩洞) 꽃봉바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꽃바위 또는 한자어로 화암(花岩)이라 하였다

 

1994년판 대전지명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