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1년 09월 19일
☞ 산행날씨: 화창한 맑은 날씨에 산행하기 좋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13.8km + 들머리 접속구간 2.4km / 9시간 47분 소요
☞ 참석인원: 나 홀로 산행
☞ 산행코스: 동학사-향아교-심우정사 갈림길-암봉-지맥 능선-쌀개봉-통천문-너럭바위-암봉-안부
암봉-마당바위-안부-564.7m봉-암봉-안부-무명봉-535m봉-안부-무명봉-오리바위(?)
566m봉-안부-586m봉-조망바위-안부-천왕봉-기암-안부-폐헬기장-황적봉 갈림길(치개봉)
황적봉-다시 황적봉 갈림길(치개봉)-610m봉-무명묘지-안부-무명봉-갈림길-용동리 갈림길
밀목재(민목재)-443.8m봉-518m봉-541.1m봉-관암산-계룡터널 위-백운봉-자티고개
469.9m봉-안부-522.3m봉-가리울 삼거리-묘지-안부-폐헬기장-도덕봉-갈림길-무명봉
무명묘지-492m봉-498m봉-삽재
☞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계룡면 / 계룡시 신도안면 / 대전광역시 유성구 세동, 성북동, 덕명동, 갑동
추석 연휴라 딱히 할 일도 갈곳도 마땅찮은 범여...
어제는 추석전에 바빴던 탓에 사무실에서의 잔무 정리와 청소를 해놓고 집에오니 저녁 8시다
집에와서는 내가 할 일도 없거니와 우리집은 남.녀가 하는 일이 딱 정해져 있어 있어봐야 도움도 안된다
40여년을 그렇게 서로 터치 안하고 사는 편이다...내가 와이프 하는 일에 터치도
안 하지만 간섭받는 것도 지독히 싫어하기에, 그것에 적응하며 살다보니 상당히 편하다.
집에 있어봐야 도움이 안될것 같아서 내일은 어디로 튈까 이리저리 궁리하는데 명절 연휴라
그런지 교통 체증과는 상관이 없는 열차표는 전국적으로 다 매진이 되어 버렸다.
그래 오랫만에 氣도 받을겸 계룡산쪽의 지맥길을 한번 걸어보자 생각을 하고
용수(관암)지맥 첫 구간을 가기로 하고 대전 유성으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잠자리에 든다
용수(관암)지맥 개념도
관암지맥(冠岩枝脈)은 금남정맥의 계룡산 천왕봉(846m) 북쪽에 위치한 쌀개봉(827.8m)에서
동쪽으로 분기해서 동북진하면서 대전시와 공주시, 세종시를 각각 경계를 지으며
세종시 금남면 부용리에서 금강에 그 맥을 다하는 총도상거리 42.2km인 산줄기로
계룡시 신도안에서 발원한 갑천의 북쪽 수계를 이룬다는 측면에서 보면
오봉산에서 불무산을 지나 금강/갑천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은 수태극의 모형을 제대로 그리면서 그 보다 더 긴 산줄기인 오봉산에서
꾀꼬리봉 - 부용봉으로 이어져 금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개념으로 알고 있다.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용수지맥이라 부르는데 초반의 산줄기는
같으나 용수천의 좌측 산줄기를 기준으로 하기에 조금 다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유성행 버스표
이른 새벽에 일어나 베낭을 대충 챙겨서 집을 나와 집앞에서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하니 05시 15분...자판기에서 커피한잔을 뽑아 마시고 버스에 오른다.
일찍 집을 나온 탓인지 차에 오르자마자 늘하던 습관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니
버스는 호남고속도로 유성 I.C를 빠져나와 대전시내를 접어들고 있다
금호고속버스 터미널(07:55)
행여 몰라서 19시에 서울가는 버스표를 미리 예매하고 터미널을 빠져 나온다
터미널을 빠져나와서 김밥천국이란 곳에서 아침을 해결하려고 식당문을 여는데
너무 불결하여 기분이 확 잡친다...식당을 나와서 다른곳을 찾아보는데 이른 시간이라
영업을 하는 곳이 보이지 않아 다시 돌아와 참치 덮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터미널 앞에 있는
택시를 타고 동학사로 향한다...택시로 갈 경우에 동학사 입구 주차장에서 내리거나
바리게이트가 처져있는 일주문에서 내리면 내 걸음으로 산행거리가 1~1:30분정도 차이가
나기에 얼마전에 이곳을 먼저 산행한 산동네님의 정보로는 일주문앞의 바리게이트는 차량이
가까이 가면 센서가 자동으로 작동하여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택시기사에게 가자고
하니 기사는 주차장에서 내리라는 식이다...내가 책임을 질테니 가자고 하니 못 마땅해
하는 투다...일주문 앞에 도착하니 매표소가 있고 바리게이트는 닫혀있다.
내가 탄 택시를 보고는 입장료를 받는 매표원이 못 올라가니 내리라고 한다.
지갑에서 조계종 포교사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절에 잠깐 들렸다가 등산할 계획이라고 하니
입장표도 안받고 택시를 무사통과 시켜준다.
동학사 입구에 도착하니 택시 요금이 13.000원이 나와서 20,000원을 주니 잔돈도 안주고
그냥 돌아 가려고 한다...아저씨! 거스름돈을 주셔야지요 하니까...기사 曰 저 아래 주차장까지
오는데 15,000원을 받는데 이곳까지 왔으니 20.000원을 받아야 한다는 투다.
아저씨! 그것은 당신네들이 정해놓은 것이고, 그렇게하면 고객에 대한 갑질이고
터무니 없는 부당 이익을 취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아무말도 못한다
아저씨! 통과하는데는 내가했고 이곳은 비포장 도로도 아니고 엄연히 자동차가 편히 오는 곳이며
미터 요금이 13,000원인데 20,000원이라니...그게 정상이냐고 물으니까 기분 나쁜 투다.
그라먼 아저씨의 택시 미터기는 폼으로 달고 다니냐고 하면서 쌍팔년도식 습관은 버리라고 했다
그러면 내가 20,000원을 줄테니 요금이 13,000원인데 20,000원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써줄수
있냐고 하니까...아주 기분이 나쁘다는 투로 7,000원을 던져주고는 돌아가 버린다
차량 NO도 찍어놨고 유성구청에 민원을 제기할까도 생각했지만 포기를 한다
아뭏든 이른 아침부터 굉장히 기분이 잡친다.
충남지역의 지맥길을 타면서 느낀 감정이지만 부여와 강경 택시를 빼고는 안 좋은 감정이 많다.
세종시, 조치원, 유성 택시기사들은 얼마나 잘사는지 몰라도 불친절하고 오만하고...기분이 아주 나쁘다.
택시에서 내리니 동학삼사(東鶴三祠:숙모전, 삼은각, 동계사)가 눈 앞에 나타난다
동학삼사(東鶴三祠:08:40)
동학삼사(東鶴三祠)는 계룡산의 동학사 초혼각지(招魂閣址)에 세워진 숙모전, 삼은각, 동계사를 말한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 이색, 길재, 조선의 단종과 사육신 등, 신라, 고려, 조선의
3대 왕조의 충절 인물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특히 숙모전은 신분과 관계없이 국왕, 제상, 관료, 학자,
서민, 노비 등 충절인 351위를 기리면서 왕을 모신 전(殿)이라는 명칭을 갖는 권위가 있는 곳으로
유교와 불교가 어울려 제사를 지내는 특별한 전통을 지닌 곳이다
동학삼사의 정문격인 “인재문(仁在門)”은 코로나 19라는 역병 때문인지 문이 굳게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초혼각지(招魂閣址) 인재문(人在門) 충남 기념물 제 18호.
동학사 입구에 있는 유적지로, 여러 충신열사들의 위패(魂)를 모신 곳입니다. 조선 태조 때는
길재(吉再)가 이곳에서 고려의 왕족과 정몽주(鄭夢周)를 위하여 기도하였고, 1456년(세조 2)에는
김시습(金時習)이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고 세조가 단종을 물리칠 때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며 참살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고 이곳에서 초혼제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1458년(세조 4) 왕이 친히 이곳에 내려와 단종ㆍ안평대군 등의 종실인물과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ㆍ정분 등 3상(三相)과 당시 죽음을 당한 280여 명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초혼각을 세웠다고 한다.
1466년(세조 12)에 김시습 등이 증축하였으나 1728년(영조 4)에 화재로 동학사가 불에 소실된 것을
1864년(고종 원년)에 만화(萬化) 스님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1904년(고종 41)에 숙모전(肅慕殿)으로 사액된 이후 현재 84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1963년
사단법인 숙모회(肅慕會)가 구성되어 봄 가을로 대제를 받들며 그 숭고한 사생취의(捨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함)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숙모전(초혼각지) 배치도
삼은각(三隱閣)은 1394년(조선 태조 3)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雲禪)과
함께 단(壇)을 쌓아서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399년(정종 1) 고려 유신 유방택(柳方澤)이 이 절에 와서 정몽주와 이색(李穡), 길재 등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 해 이정간(李貞幹)이 공주목사로 와서 단 이름을 삼은단(三隱壇)이라고 하고,
또 전각을 지어 삼은각(三隱閣)이라고 했다.
동계사(東鷄祠)는 신라 제 19대 눌지왕 때 인질로 일본에 잡혀간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고 왜지(倭地)에서 혹형으로 산화한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 363~419)의 항일 충혼을
모신 곳으로 고려 태조 19년(939)에 개국공신 류차달(柳車達)이 공의 만고충절을 기려 이곳에
초혼제사를 지내고 왕명으로 동계사를 건립하였는데, 영조 4년(1728) 소실되었으나, 1956년
중건하고 류차달을 추향하였다.
동학삼사와 동학사 범종루가 있는 곳에서 행장을 꾸리고 산행을 준비한 다음에
범종루 지나면서 담장 너머에 보이는 동학사 승가대학을 바라보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초반에 산행을 시작도 하기전에 택시 기사와의 언쟁으로 인해 기분이 잡쳤지만
그래도 산동네님의 소중한 정보로 인해 이곳까지 택시를 타고 왔으니 시간을
많이 줄인 셈이다.
동학사는 청도 운문사, 예산 수덕사(견성암)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사찰을 감싸고 있는 2개의 산줄기가 높고 험해 하루에 볕이 드는 시간이 반나절도 안되며 억울한
영혼을 천도해주는 사찰로 유명하다.
조금전 택시기사와의 언쟁을 참회합니다.
동학사 입구(08:47)
예전에 불교대학 도반들과 성지순례를 왔던 기억이 희미한데 20여년은 된듯 싶다.
일단 계단을 올라서서 절집 마당으로 들어서니 삼층석탑이 반겨준다.
동학사 3층석탑(충남 문화재 자료 제58호)
동학사 3층 석탑은 계룡산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설에는 신라 33대
성덕왕 22년(723)에 동학사를 지을 때 함께 만들어졌다고 하나, 탑의 모습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원래 탑의 1층과 2층 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2008년에
기단부와 3층을 복원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으며 1층 한 면에 자물쇠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동학사 대웅전
대웅전 편액(大雄殿 偏額)은 우리나라 많은 사찰의 일주문과 대웅전의 편액을 쓰신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년) 선생의 글씨이다.
동학사의 유래는 신라 724년(성덕왕 23) 상원(上願) 조사가 동학사의 북쪽으로 2km 떨어져 있는 남매탑 부근에
조그만 상원암을 지었고, 그곳에 회의(懷義) 화상이 절을 창건하여 이름을 상원사(上願寺)라 한 데서 비롯하였다.
921년에 도선이 지금의 동학사 자리에 사찰을 중창한 뒤 고려 태조 왕건의 원당 사찰이 되었으며,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류차달(柳車達)은 지금의 동학사 자리인 이곳에 와서 충신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 363년~418년 추정)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왕건의 도움으로 사당인
동학사(東鶴祠)를 지었다.
이후 절이 번창하여 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뀌었으며, 이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부처님이 학서(鶴捿)에서 열반한 것에 비유하여, 동방의 동학사도
그에 부합하는 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경내에는 대웅전·무량수각·삼은각·숙모전·범종각· 동학사·동학강원 등이 있다.
동학사 대웅전 삼존불
동학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공주시 계룡산 동쪽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갑사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하고 있는 사찰로 1860년에는 이곳에서 최대 규모의 비구니 강원(講院)이 열렸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이 병행되기도 하였다.
1956년 2월 23일 동학사는 동학사 강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전문 강원인 동학승가대학을
설립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불교 건물과 유교 건물이 공존하고 있는 유일한 사찰로 스님과 유림이 같이
제의를 지냈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역대 관찰사가 관장했고, 1963년에 사단법인 숙모회를 설립하여
봄, 겨울에 대제(大祭)를 지내고 있다.
오늘은 절집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산행이 주목적이라 대웅전만 간단하게 둘러보고
뒤돌아 나오면서 대웅전을 향해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절집 계단을 내려와 길을 떠난다
향아교(香牙橋:08:54)
동학사 담벼락을 지나니 향아교(香牙橋)가 나오는데 가운데의 ‘어금니 아(牙)’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자료에 의하면 향아교(香牙橋)가 있는 이곳이 내가 오늘 걷는 용수지맥 용수천의 발원지란다
향아교(香牙橋)를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08:55)
이정표가 나오고 은선폭포 방향으로 향한다
심우정사(尋牛精舍) 갈림길(09:05)
절집 이름이 심우정사(尋牛精舍)인데 오르막길에 걸어둔 연등을 따라서 35분을 걸어 올라오라는
표식이 있는데 심우(尋牛)란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禪畫)인 심우도(尋牛圖)에서 따온 지명으로 ‘마음(心)의 소(牛)를 찾아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은선폭포 이정표 방향으로 향하는 계곡에 이정표가 있다.
계곡의 다리를 지나니...
이정목 표시가 나오고...
관음봉 오르는 구간을 탐방로를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길을 막아놨다.
관음봉으로 올라가서 시작을 해도 되겠지만 그렇게 하면 나같은 느림보는
지맥길을 한 구간 더 해야 할지도 몰라 산동네님께서 주신 중요한 Tip으로
국공파들이 정해준 우측의 등로가 아닌 가지 말라는 플랑카드 너머인
예전의 등로로 향하는데 뒤따라 오시는 분이 그리가면 길이 없다고 한다.
길이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할 문제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그대나 잘 가셔...
예전의 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낙석 위험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철난간을 넘는다.
초반부터 급경사의 오르막은 시작되고...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가니 백두사랑의 띠지가 보인다
이 대장의 흔적은 아닌듯 하고 산중님이나 산동네님의 흔적 같은데
같은 山氏(?)라 헷갈린다
계속되는 빡센 오르막...입내서 단내가 날 정도이나 등로는 걸을만하다
암봉(09:20)
맞은편으로는 금남정맥 능선이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011년 11월 13일 나홀로 금남정맥을 걸을 때 지나갔으니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산은 늘 그대로인데 나만 자꾸 늙어가는 느낌이라 서글퍼기만 하는구나
약간 사면길의 너덜길을 지나다가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시원하게 버리고나니 아픈 배가 씻은듯이 나은 느낌이다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바지를 올리면서 일어서는데 이게 뭐여...눈 앞에 능이버섯이 몇개 보이네...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데 하도 오랫만에 능이버섯을 본 탓인지 확신이 안 선다.
심마니로 활동하면서 약초와 버섯에 조예가 깊은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서 톡으로
보내 감정(?)을 의뢰했는데 친구야!...너 오늘 용꿈 꾸었냐 하면서 능이버섯이 확실하니
그것만 보지말고 주위를 살펴보면 더 있을거라고 더 다녀 보라고 한다
흐미...이쁜 넘
능이버섯 幼生들도 보이고...
꽤나 큰 버섯도 수확을 한다
큰 것과 작은 것을 합쳐서 자그마치 18개나 수확을 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든든할 것 같은 느낌이다...이곳에서 한참동안 시간을 보낸다
다시 빡센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V자 협곡같은 암릉으로 올라가니 보만식계님들의 흔적도 보인다
이 분들이야 이곳이 나와바리 구역이니 개구멍까지 잘 아시겠지
맞은편에 있는 은선폭포는 나무에 가려져 보이질 않는다
북동쪽으로는 삼불봉 너머로 다음 가야할 갑하산과 우산봉 등이 보인다
양호님도 이곳으로 지나간 모양이다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지맥길 능선에 도착한다(10:23)
지맥길 아래의 바위뒤에 베낭을 숨겨놓고 1km정도 떨어진 분기점인 쌀개봉으로 향한다
오르막길로 올라서니 쌀개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짚신나물꽃도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하는구나
초반에 능이버섯을 수확하는 바람에 기분도 상당히 업이 되었고 우리나라의
산 중에서 氣가 가장 세다는 계룡산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 않게
용수(관암)지맥의 분기점인 쌀개봉 정상에 도착한다.
쌀개봉(830.6m:10:50)
충남 공주시 반포면과 계룡면, 계룡시 신도안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펑퍼짐한
넓은 공터가 있고, 남쪽으로는 계룡산의 주봉이라고 할 수 있는 천황봉(846.5m)가 있고,
동쪽으로는 천왕봉, 향적봉, 북쪽은 관음봉, 북동쪽으로는 자연성릉으로 이어지는 삼불봉이
보이는데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그러나 명색이 지맥 분기점이건만 정상에는 국공파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그 흔한 띠지 한장 안 보인다.
쌀개란 지명 유래는 산 아래에서 보면 V자형의 암릉 덩어리인 산봉우리가 마치 디딜방아의 쌀개와
닮았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쌀개란 ‘방아허리에 가로 맞추어서 방아를 걸게 되어 있는 나무막대기’를
말한다
디딜방아의 쌀개 모형
쌀개봉 정상 공터에서 천황봉으로 가니 누군가가 메직으로 쌀개봉이라 적어놨다
인증샷
쌀개봉의 바라본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天皇峯)의 모습
계룡산 천황봉(鷄龍山: 846.5m)은 충청남도 공주시와 계룡시, 논산시 그리고 대전 광역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1968년 12월 3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으며, 충청지역에서 계룡산은
대표적인 산이나 높이나 면적에서 최고나 최대는 아니다.
계룡산의 천황봉과 연천봉, 삼불봉을 잇는 능선이 닭의 볏을 쓴 용을 닮았다하여 계룡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최고봉인 천황봉이고 계룡산 전체면적은 60.98평방킬로미터이다.
계룡산 기슭에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 유명한 사찰이 있으며, 국어교과서에 소개되었던 남매탑이 있다.
계룡산의 남쪽 지역인 신도안은 조선 왕조 개국 직전 도읍 후보지로 꼽히기도 했다.
계룡산은 백제시대도 중요한 산으로 중국측의 문헌에 계산 또는 계람산으로 기록된 것이 확인되는데,
신라에서 계람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미루어 계룡산이 계산 또는 계람산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 오악의 하나로 중요시 되었다.
신라는 국가의 제사를 대사, 중사, 소사로 분류하였는데, 계룡산에서 지내는 제사는 중사에 해당되었다.
이후 이 신앙은 고려와 조선에 걸쳐 전해져 내려왔고, 이 제사는 신원사의 중악단에서 지내져왔다.
계룡산의 주봉은 천왕봉이며, 연천봉, 삼불봉, 관음봉 등 20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세는
동쪽으로 U자형으로 열려진 침식분지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5악(五岳)의 하나인 중악으로 중시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인 중사(中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제사를 지내던 중악단(中岳壇)이 남아 있다. 계룡산의 신도안이 신종교 및
각종 민간신앙의 터전이 된 것은 1920년대부터인데, 이는 조선건국 때 무학대사가 새로운 도읍을
여기에다 세우려 했던 사건과, 그에 얽힌 많은 구전이나 풍수지리설및 정감록에서 이 신도안이
십승지지(十勝之地)이자 새로운 정씨 왕조의 수도로 지목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태조가 계룡산 남쪽에 도읍을 세우기 위해 기초공사까지 마쳤으나
조운(漕運)이 멀어 중단했는데, 그 이후 이곳을 신도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실용적 이유를 댄 공식
기록일 뿐이고, 이후 계룡산 신도설은 조선왕조의 운명과 연관된 수많은 이설을 낳으며 민간의 반왕조적(反王朝的)
성향에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최근까지도 신도안에 거주하던 풍수가들에 의하면 계룡산은 백두산으로부터
흘러내린 지기(地氣)가 멈춰 선 곳으로 이른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지세라고 한다.
계룡산 천황봉...2011년 11월 13일 나홀로 금남정맥을 걸을때의 사진
쌀개봉 정상에서 바라본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陽化里)의 모습
조선 전기에 양화부곡(良花部曲)이 있었고, 양화산성(陽花山城) 아래에 위치하여 양화(陽化)라 하였다.
양화리(陽化里)는 계룡산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로 동에서 서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지형이며, 비교적 평탄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양화, 능산, 보목,
송현 마을 등이 있다...양화 마을은 양화산성 밑에 위치한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능산 마을은 능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보목 마을은 봇들의 목이 된다 해서 보목 마을이라
불리며, 송현 마을은 소나무가 무성하였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문화 유적으로는 국보 제299호인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盧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293호인 계룡산
중악단(中嶽壇),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5호인 『공주순천박씨공신녹권(公州順川朴氏功臣錄卷)』 2책,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인 신원사 대웅전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인 신원사 오층석탑이 있다.
계룡산의 산 이름은 무학대사가 말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과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에서,
두 주체인 계(鷄)와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계룡산은 오랜 역사속에 숭배 받아온 산으로 예언적으로는 비결서에 만주 곤륜산과 같은 영산으로
여기고 있어서 향후 계룡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품어왔던 산. 어쨌든 계룡산
일대는 풍수지리적으로 신비스런 곳으로 믿어 웬만한 도인들은 계룡산을 갔다와야 명함을 만들고 경력이 된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도인들과 온갖 무속인들이 모여들어 이름도 생소한 간판을 걸고 골짜기
구석구석에 들어 앉아 있었는데 그 수가 2백 곳도 넘었다고 한다.
이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종교정화운동을 하면서 정리가 되었다고 하나, 아직도 계룡산은
터가 센 수도처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쌀개봉 정상에서 연천봉(742.9m:맨 좌측 봉우리) 능선의 모습
연천봉에는 암각문이 있으며 계룡산에서 풍수지리적으로 제일의 명당이라고 하는 봉우리 중 하나로
갑사와 신원사 계곡을 좌우로 하여 눈 아래로 펼쳐지는 계룡지, 경천지 등이 펼쳐지고 저녁 노을이 지는
연천봉 낙조는 계룡8경중 제3경으로 제1경에 속하는 천황봉 일출에 비견될 정도라고 한다
연천봉 아래에는 고즈넉한 암자 하나가 보이는데 유명한 등운암(騰雲庵)이다.
등운암은 1300여년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사찰로, 등운암은 민족의 영산 계룡산의 관음봉, 쌀개봉,
국사봉, 천황봉 등 병풍처럼 펼쳐있는 봉우리 중에서 가장 영험하다는 연천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원사의 말사이다.
등운암의 유래
계룡산 연천봉에 있는 등운암은 신라 문무왕 5년(665)에 등운대사가 창건한 절로서 13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사찰로 등운암의 유래는 전북 부안의 월명암이 소장하고 있는 부설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진덕여왕때 진광세라는 영리한 아이가 경주에 살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모든 것을
힘들이지 않고도 깨달았다. 다섯살에 불국사로 출가하여 득도하고 부설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영의, 영조 두 도반과 더불어 각처를 행각하여 도를 닦다가 오대산을 찾아가던 중 날이 저물어
김제 망경현 백연지 옆 청신도 구무원의 집에서 하루를 유숙하게 되었다.
구씨 집에는 무남독녀의 묘화라는 벙어리 딸이 있었는데 부설스님을 보고는 갑자기 말문이 열리자,
스님과는 삼생의 연분이 있다하여 죽기를 다하여 부부의 결연 맺기를 소원하였다.
부설스님은 자비보살의 마음으로 중생제도는 인연 있는데서 할 것이라며 묘화와 부부의 연을 맺고
등운과 월명 남매를 두었다.
부설거사는 비록 몸은 속세에 두었으나 마음만은 사물의 밖에 높이 두고 수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초연히 삼업을 닦고 육바라밀을 널리 행하고 내외의 경전을 두루 통달하였다.
세월이 흘러 오대산으로 구도를 떠났던 도반들을 다시 만나 도력을 시험한 결과 부설거사의 도력이
훨씬 수승하여 두 도반이 스승으로 모셨다.
아들 등운은 계룡산 등운암, 딸 월명은 월명암, 묘화부인은 장흥의 보림사, 부설거사는 망해사를 창건
열심히 용맹정진하여 부설거사를 비롯한 이들 일가는 모두 성불하였다고 부설전에서 전한다.
신라의 부설거사의 사부시, 팔죽시는 오도시의 백미이며,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더불어
세계 3대거사 중의 한 분이다.
연천봉 정상의 '方百馬角 口或禾生"이란 암각 글자는 "482년후에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으로 이씨 조선의
천명을 지적한 것. 이에 조선왕조는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연천사 등운암을
압정사라 개명하여 조선왕조의 운명을 더 늘렸다고 한다.
이처럼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해당하는 수승한 곳이 등운암이다.
등운암에서 솟아나는 靈泉은 해발 740m 높이에 위치한 맑고 차가운 암반수로서 나병까지도
고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약효가 뛰어난 영험한 샘물이다.
몇 발작 아래 등운암의 운무는 날 등(騰), 구름 운(雲) 이름처럼 압도적인 광경이다.
쌀개봉에서 바라본 관음봉쪽의 모습
관음봉(觀音峰:765.8m)은 산의 모습이 후덕하고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님을
닮았다고 하여 관음봉이라 부르면 정상아래에는 관음정이란 정자가 있다.
쌀개봉에 머물면서 이곳 저곳을 두루 조망을 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급경사로 내려서니 통천문이 나온다
통천문(通天門)...하늘과 통하는 문이라는 지명답게 정말 멋진 바위이다
쌀개봉에서 이어지는 지맥길은 비탐구간이긴 하나 등로는 생각보다 뚜렸하다
앙증맞은 돌탑봉을 지나고...
조금전에 지나온 쌀개봉을 뒤돌아 본다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서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쌀개봉 내리막길에서 바라본 천황봉의 모습
계룡산은 예로부터 오악(五嶽)의 하나로 국가의 모심을 받던 산악이다.
민간의 먹거리는 밥이지만 임금의 먹거리는 수라이다.
민간인에게는 산이지만, 나라에게는 산악이다. 계룡산은 산악으로 대우받아 왔다.
이렇게 사전(祀典)에 의거한 산악은 신명(神明)인 셈이다. 나라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 산악이 된 것이다.
계룡산은 국가적인 의례를 받을 만큼 감응(感應)이 있다는 것이다.
계룡산에는 나라의 산신이 있다. 바로 계룡산 중악단이다.
계룡산 중악단은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 경내에 있다.
대한제국의 사전(祀典)으로 삼악단(三嶽壇, 묘향산 상악단·지리산의 하악단) 중의 하나이다.
계룡산 중악단은 1999년 3월 2일에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되었다.
계룡산 중악단은 일제강점기에 끊어졌다가 1998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룡산 중악단은 계룡단을 계승하였다. 나라에서 계룡단을 중시한 것은 궁중 발기에서도 확인된다.
‘무자이월탄일각처위축노자전(戊子二月誕日各處爲祝路資錢) 발기’와 ‘이월탄일각처위축노자전
(二月誕日各處爲祝路資錢) 발기’ 등의 창경궁 고문서 2건에는 계룡산에 각각 30냥의 노자 돈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잠시후에 걸어야 할 능선의 모습
천왕봉과 향적봉, 치개봉이 뚜렸하게 보인다
관음봉에서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 자연성능의 모습
자연스런 성곽의 능선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예로부터 계룡산 일대가
도읍지로 여겨온 이유중의 하나가 이 자연성능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앞은 천혜의 요새이고 뒤는 물좋은 평야, 말그대로 금상첨화이라. 이 능선은 계룡산을
대표하는 능선으로 늘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남쪽 기점인 관음고개에서 동학사, 신원사, 갑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나있고, 북쪽 기점인
삼불봉 역시 동학사, 갑사 천장골, 삼신리계곡, 신선봉 코스가 만나는 지점으로 자연성능을
찾는 등산객이 붐비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남으로 쌀개봉을 거쳐 천황봉 또는 황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북으로 수정봉-말재능선, 그리고 북동으로 신선봉-장군봉 능선등 사방팔방으로 뻗은 능선뿐만 아니라
동학사 계곡과 갑사계곡을 모두 볼 수 있어 산행 묘미 또한 멋진 곳이다.
마치 설악산의 용화장성의 일부를 옮겨 놓은듯한 자연성능은 동학사 계곡쪽은 자연성곽을 이루고 있어
가슴 서늘한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험한 산세이나 갑사계곡의 부드러운 산세는 가슴을 포근하게 해주어
강약의 산세를 함께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논산시 두마면을 거느린 해발 845m의 계룡산국립공원을 동학사
지역에서 바라봤을 때, 천황봉 정수리에서 북쪽으로 내리뻗은 쌀개릉은 닭비슬처럼 생겼다.
그 아래의 길다란 자연성릉은 용의 등줄기와도 같아서 마치 닭비슬을 쓴 용처럼 생겼다 하여
계룡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흔히들 계룡산을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극치라고 한다.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의 영취산 마이산으로 휘돌아 주줄산에서 운장산, 대둔산으로
휘어지면서 계룡산까지 굽이치니 산태극이다.
또한, 금남정맥따라 흐르는 금강은 계룡산의 북쪽으로 휘감아돌며 서해바다로 태극형상으로 돌아들어가니
이를 수태극이라 부른다. 이렇듯 강물과 산맥이 태극형상으로 굽이치는 계룡산을 천하명산이라고 한다
능선 아래에 보이는 동학사의 모습
계룡산은 백제문화권의 중심지로서 관광자원이 풍부하며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의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 계룡산 서쪽 기슭에 있는 갑사(甲寺)는
화엄종 10대 거찰의 하나로 철당간(鐵幢竿) 및 지주(支柱, 보물 제256호)와 부도(浮屠, 보물 제257호),
그리고 구리가 800근이나 소요됐다는 범종(보물 제478호)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동학사(東鶴寺)나 신원사(新元寺)의 것 등을 합치면 크고 작은 사찰이 22개소가 있고, 백제 문화
유적과 불교 문화재, 아름다운 전설의 오뉘탑 등 지정 문화재 15점과 비지정 문화재 13점이 있다.
계룡산 동쪽 기슭에는 여승들의 불교 전문 강원인 동학사가 있다.
신라 때 창건된 이 절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삼은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야은 길재(冶隱 吉再),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위패를 모신 삼신각이 있고 이로 인해 일주문 대신 홍살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부지방에 자리한 계룡산 국립공원은 전국 어디서나 접근이 용이하고 특히 서울·대전·대구 등 대도시에서
3시간 내에 닿을 수 있으며, 주변에는 대전의 유성, 아산·도고 등의 이름난 온천 관광지와 공주·부여
문화 유적지와 연결되는 좋은 관광 조건을 갖고 있다.
계룡팔경으로 천왕봉의 일출, 삼불봉 설화(雪花), 연천봉 낙조, 관음봉 한운(閑雲), 동학계곡의 신록,
갑사계곡의 단풍, 은선폭포의 운무(雲霧), 오뉘탑의 명월 등이 유명하다.
너럭바위(11:17)
등로에서 바라본 삼불봉의 모습
삼불봉(三佛峰777.1m)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계룡산의 연봉중의 하나인 삼불봉은
계룡산의 연봉 중 하나로 남쪽의 천황봉(845.1m, 쌀개봉(827.8m)으로부터 시작되는 계룡산 주능선에
해당하며, 천황봉이나 동학사에서 바라보면 세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계룡산은 전체적으로 화강암질 산지이며, 그 중 삼불동은 편마상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불동의 동쪽에는 신선봉과 장군봉이 있으며, 서쪽에는 갑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능선이 이어지며, 남동쪽에는 동학사가 있고, 북쪽으로는 수정봉을 지나 금강 에 이른다.
삼불동은 조망이 좋은 편인데, 동쪽과 서쪽으로 동학사와 갑사를 볼 수 있으며, 관음봉, 문필봉,연천봉
등을 조망할 수 있으며, 삼불봉은 겨울에 눈이 내리면 그 아름다움이 더 해진다고 하여,
계룡팔경 중 제2경인 삼불동설화(雪花)로 유명하다.
무명봉이 나오고 우측으로 우회를 한다
암봉(11:20)
ㄱ자 나무도 만난다.
뒤돌아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쌀개봉이 보인다
안부(11:22)
너럭바위쪽으로 내려와서...
바위뒤에 숨겨논 베낭을 찿고, 물한모금을 마시면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베낭에 나오는 능이버섯의 香이 진동을 한다...기분이 너무 좋다.
이곳에서 쌀개봉까지 약 2km정도의 거리를 걸어서 갔다왔다
다시 길을 나선다
며느리밥풀꽃도 작별을 고하려는 모양이다
암봉이 길을 막는다...우측으로 우회를 한다
천황봉의 군시설과 쌀개봉(右)을 뒤돌아 본다
암봉(11:26)
쌀개봉에서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모습
관음봉에서 이어지는 자연성능의 모습
산자락의 바위가 흰색을 띠고 있는데, 예전에 계룡산의 바위들은 검은색이었는데 근래에 들어
흰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정감록』에 계룡산에 바위가 흰색을 띠면 … 세상일을 가히 알리라는
‘계룡백석 …세사가지(鷄龍白石 世事可知)’라는 내용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마치 천연요새를 방불케 하는데 태조 이성계가 저것에 반하여 천도를 하려했나?
맥길은 서서히 지맥스러움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마당바위(11:29)
용수(관암)지맥 능선과 마주보며 같이가는 자연성능의 능선
옛부터 영산(靈山)으로 알려진 계룡산은 계람산(鷄籃山)·옹산(翁山)·서악(西岳)·중악(中岳)·계악(鷄岳)·
계립(鷄立)·마목현(麻木峴)·마골산(麻骨山)·마곡산(麻穀山) 등으로 불렸다. 산세와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으로는 구룡산·용산·화채산·화산 등이 있다.
계룡산이라는 이름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시작하여 연천봉·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벼슬을
쓴 용의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무학대사가 신도(新都)를 정하기 위해
태조 이성계와 함께 이곳을 둘러보고 “이 산은 한편으로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요, 또 한편으로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니 두 주체를 따서 계룡(鷄龍)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한 데서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안부(11:30)
564.7m봉(11:32)
준,희 선생의 산패는 고사하고 그 흔한 선답자들의 띠지 한장도 안 보인다
564.7m봉에는 고사목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등로 좌측 아래에 숨어버린 은선폭포(隱仙瀑佈)
은선폭포는 옛날 신선들이 숨어서 놀았을만큼 아름다운 곳이라하여 이름지어졌으며, 폭포의
물줄기가 낙차되며 피어나는 운무는 계룡팔경 중 7경으로 지정되어 계룡산의 자랑거리가 되고있다.
이 폭포는 홍색장석질 화강암에 나타난 20㎝정도의 두께로 겹겹이 쌓인 판상(板狀)의 사(斜)절리들이
외부로부터 떨어져나가 만들어진 높이 46m,폭 10m, 경사 60도 정도의 폭포로써 지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산지의 정상부 주변에 위치하여 폭포를 형성 할 수 있을 만큼의 유수량이 계속
유지될수 없기 때문에 갈수기에는 낙수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은다.
등로 북쪽 아래에는 동학사가 뚜렸하게 보인다
잠시후에 가야할 천왕봉과 향적봉 치개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동학사를 품고있는 동학계곡 아랫쪽엔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2구간에 걸어야 할 갑하산, 우산봉 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암릉 구간이 시작된다...이곳에서 스틱을 접고 암릉을 두 발이 아닌 네발로 기어서 올라간다
저 암봉으로는 오를수가 없어서...
사면길로 맥길을 이어간다
암봉(11:39)
기다시피하면서 암봉 정상으로 올라갔다가 곧바로 내려선다
안부(11:44)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1:50)
나뭇가지 사이로 동학사가 보인다
너럭바위가 나온다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천황봉과 쌀개봉의 모습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계룡시 신도안면(新都內面)의 모습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하기 이전, 계룡산의 신도내(신도안이라고도 함)를 왕도 건설의 후보지로 떠올렸다.
그것은 계룡산이 이미 통일신라 이후 오악(五岳)의 하나로 신성시되어, 국민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사실과 관련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태조가 계룡산 남쪽으로 직접 나아가 도읍지를 정하려 마음먹었으나, 조운로가 멀어
그만두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왕이 머무는 대궐터, 종소리로 시각을 알리는 종로의 국지 지명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정감록(鄭鑑錄)》의 비결에 의한 ‘정씨왕도설(鄭氏王都說)’이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으면서
‘새 왕조의 도읍지’란 의미로, 신도내란 땅 이름이 출현하게 되었다.
궁전이 들어서는 일들이 구체화된 도읍지가 아니라, 미래에 실현가능한 예언적 의미가 담겨 있다.
실학자로 알려진 이중환도 ‘계룡산은 오관산보다 웅장하지 못하고 삼각산보다 수려하지 못하나,
내맥(內脈)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를 함축하고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
정감록의 신봉자는 ‘약은 자는 너무 일찍 들어왔다가 나가서 망하고, 현명한 자는 적당한 시기에 들어와
기다린다’는 예언을 믿어 왔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 기반이 열악한 데서 오는 곤궁을 당하면서도,
인고의 세월을 기다리며 희망을 품어온 곳이다. 입주자들은 종교와 신앙의 대상을 찾았고, 여기에
편승하여 한때 신도 안에는 85종의 유사종교가 들어서는 성황을 누렸다.
그러나 1984년 6 · 20개발계획에 의하여 불확실성에 근거한 모든 것은 철거되고,
3군 통수권이 자리한 계룡대(鷄龍臺)가 들어서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도내 [新都內] - 새로운 도읍지 (땅 이름 점의 미학, 2008. 5. 15., 오홍석)인용
535m봉(11:53)
우리나라 산 중에서 가장 기가 세다는 계룡산은 신전(神殿)이라 할만하다.
천황봉, 천왕봉, 연천봉, 문필봉, 쌀개봉, 장군봉, 도덕봉이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문필봉은 과거나 입시와 관련되어 있고, 쌀개봉은 풍년과 연관되어 있다.
천황 아래에 천왕과 장군이 있고, 도교의 최고 신명인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老子)를 신격화한
것으로 장자(莊子)와 함께 도가(道家)의 시조(始祖)이다)인 도덕이 있으며, 이 지명들은 치병(治病)과
관련이 있고, 또한 불교와 관련이 있어 보살도를 서원하는 관음봉, 향적봉, 삼불봉 등도 있다.
삼불봉 아래에 있는 심우정사는 숲에 묻혀 버렸다
가야할 암릉구간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안부(11:58)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암릉구간이 시작되고...
살짝 우회를 하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국공파들이 띠지를 제거하지 않은걸로 보아 이 분은 지나가신지가 얼마 안된 모양이다
무명봉(12:02)
무명봉에서 뒤돌아보니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는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에서 조금전에
지나온 지맥길의 분기봉인 쌀개봉~관음봉~자연성능으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이 멋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명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직진으로는 잠시후에 오를 556m봉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릿지구간의 암릉이 길을 막는다
능선에서 바라본 계룡시 신도안(新都內)쪽의 모습
계룡산의 역사는 ‘신도안’(新都內)의 역사다. 하늘의 최고신인 천황대제가 강림한다는 천황봉
(天皇峯)을 비롯한 계룡산의 여러 봉우리로 둘러싸인 남북 4㎞, 동서 3㎞의 분지가 바로 신도안이다.
이곳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위해 공사를 시작한 ‘도읍 후보지’였다.
신도안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됐다. 태조가 한양 천도를 결정하면서 1년 만에 공사가
중단됐지만, 이후 〈정감록〉 등을 통해 ‘민중의 이상향’을 표상하는 핵심 공간이 됐다.
윤용혁 공주대 교수(역사교육학)는 “이 때문에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한 대원군은 전국의 〈정감록을
압수해 불태우고 이 지역의 출입을 금지하면서도, 은밀하게 신도안 천도를 위한 터닦기 공사를
지시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반역의 상징적 공간으로 일종의 ‘봉금’(封禁) 지역이었던 이곳은
결국 일제 강점 이후 종교취락지로 변모했다. 신도안에 정신적 뿌리를 둔 동학이 일제를 거치며
사분오열하는 와중에 ‘탈정치 노선’을 주창한 시천교가 탄생했고, 그 내부에서 다시 친일파와
절연한 상제교도들이 1924년 2월13일 신도안으로 이주한 것이다.
〈정감록〉과 동학의 은근한 연관, 일제강점과 민족종교세력의 내분, 그리고 정신적 상징공간으로의
귀향이라는 드라마틱한 과정은 이후 수많은 신흥종교 탄생의 씨앗이 된다. 그 거름은 근현대사의 격랑 가
운데서 〈정감록〉의 예언이 바로 이 신도안에서 실현될 것이라고 믿은 이름없는 필부들이었다.
그러나 1975년 계룡산 국립공원화 사업으로 무허가 암자와 종교건물을 철거하면서 신도안의 쇠락이 시작됐다.
1984년에는 육군 계룡대 설치 사업을 이유로 이 지역 주민들의 분산이주 정책이 실시됐다. 그들과 함께 깃들었던
종교인들도 함께 이곳을 떠나야 했다.
진철승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이주정책 실시 당시 “시민아파트와
간척지 우선분양권을 주겠다는 특혜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이주한 신도안 주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계룡산이 내다보이는 인근 마을과 도시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한세기에 걸친 민족의 수난과
민중의 아픔이 빚어낸 세계 개벽에 대한 변함없는 열망” 때문에 신도안에서 새 세상이 펼쳐지는 날을
지켜보겠다는 이유였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힘들게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쌀개봉에서 시작되는 지맥길...조금전에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본다
오리바위(?)...범여의 생각 中에서(12:10~25)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오리(?)처럼 생긴 암릉이 나오고 넓은 공터가 있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데 날씨는 좋으니 햇빛이 상당히 따갑다.
오리바위에서 바라본 장군봉(앞에 보이는 암릉)과 그너머로 갑하산이 보인다
장군봉(將軍峰:512.4m)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계룡산 연봉 중의 하나로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개가 있는데, 산 봉우리가 장군 모양 같다고 하거나 산 모양이 오줌통(장군)을
닮았다고 해서 장군봉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만한 큰 장군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떨어뜨렸다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해서 장군봉이라 불린다고도 한다.
장군봉은 계룡산 국립공원 동학사지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봉우리로 홍색장석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룡산의 동쪽 능선 중 하나이다. 서쪽으로는 신선봉[642m], 삼불봉[775m]으로
연결되며, 남쪽에는 동학사계곡이 있다
다시 길을 떠난다...오리바위에서 올라와 능선에서 우측으로 맥길은 이어진다
566m봉(12:28)
암릉구간 너머로 가야할 천왕봉과 치개봉, 향적봉이 보인다
566m봉에서 내려가는데 우측으로는 계룡대가 아련히 보이고 앞에는 용동저수지이다.
용동저수지가 있는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리(龍洞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계룡산 땅 속에 암룡과 숫룡 두 마리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그 두 마리 용은 때가 되어 하늘에 오를 날만 기다려 계룡산 밑을 파서 산의 물을 금강으로
흐르게도 하고, 갑사, 동학사, 마곡사 등 어디든지 다니면서 다정하게 살았다.
하지만 땅위 여러곳에 사는 속된 이무기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몸을 땅 위에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다만 하늘이 부르지 않을까 하여 비가 몹시 내릴때나 천둥이 칠 때에만 얼굴을 내밀어 하늘을 보있다
그러던 어느날 밖에 비가 몹시 비가 내리는데도 용들은 땅 속 여기저기를 다니느라 하늘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하늘에서 수차례 용들을 불렀으나 응답하지 않자 하늘은 땅이 울리도록 진노하였다.
그제서야 용들이 알아듣고 용서를 빌었으나 하늘은 두 용이 정이 너무 지나쳐 하늘의 부름에
응하지 못하므로 두 용에게 따로 떨어져 다시는 만나지 말도록 명하였다.
두 용은 헤어지기가 몹시 아쉬웠지만 하늘의 뜻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 헤어진 후 제각기 자리를 정해 땅을 파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때가되어 암룡이 먼저 하늘의 부름에 따라 하늘로 올라갔고 뒤이어 숫룡이 올라갔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암룡이 살다 올라간 곳(신도안면 용동리)을 암용추, 숫룡이 살다가 올라간 곳
(신도안면 부남리)를 숫용추라고 부르고 있다
급경사의 안부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가야할 암릉구간...우측 능선에는 최근에 내린비로 산사태가 났는지 계곡처럼 생겼다
안부(12:35)
안부 좌측으로는 동학사 아래에 있는 길상암과 미타암을 이어지는 등로가 보인다
동물이동 감시카메라를 보면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조금전에 지나온 566m봉의 모습
쌀개봉에서 관음봉~자연성능~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마치 천연 요새를 방불케 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왜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려했는지 알 것만 같다
독수리 바위(?)...범여의 생각중에서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인 릿지구간이 시작된다...스틱을 접어 베낭에 넣는다
릿지 구간이 시작되고...
좌측으로는 동학사가 호젓하게 보이고 맨 윗쪽 삼불봉 아래는 심우정사가 아련하게 보인다
휴정 사명대사의 제자인 소요 태능이 지은《소요집》에 들어 있는 게송 한 편
소요 태능스님은 가까운 곳에 마음을 두고서도 마음을 찾아 고행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을 이렇게 경계한다.
可笑騎牛子(가소기우자) 가소롭구나. 소를 탄 자여
騏牛更覓牛(기우갱멱우)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는구나.
斫來無影樹(작래무영수)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銷盡海中漚 (소진해중구) 저 바다의 거품을 다 태워버리라
태능(1562~1649)은 13세에 백양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후에 묘향산의 휴정 서사대사의 문하에
들어 선(禪)을 깨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에 가담하여 싸우기도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지리산 연곡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이 곳을 황적봉으로 가는 길이라 황적 암벽이라고도 하는데 황적암벽은 약 20미터의 수직구간과
30여 미터의 가파른 구간으로 되어 있어 로프 없이는 불가능한 코스로 설치된 로프는 이곳이
비탐구간이라는 이유로 국공파들이 수시로 철거를 한다고 한다
약간의 다리가 후덜거리기는 했으나 그리 어렵지 않게 릿지 구간을 통과한다
2번째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능선에서 바라본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저수지와 그 너머로는 계룡대 육군본부가 보인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을 도읍으로 삼으려 할 때 향적산 정상 국사봉에서 지형을 살폈다고 한다.
신도안(新都內, 新都案, 神都案)은 지금의 계룡대(우리나라 3군 통합기지) 자리다.
신도안(新都內)으로 도읍을 정하려던 이성계로 인하여 계룡산에는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으로 신도안을 선택하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자신은 계룡산의 사연봉에 올라가 제단을 차려 놓고 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던 곳은
기도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반년쯤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 하얀 할머니가
나타나 공사를 계속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니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다.
계룡산 할머니는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정도령이라는 신인이 나타나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800년간 다스릴 것이니 이성계는 500리 북쪽으로 올라가 도읍을 정하라고 하였다.
이성계는 공사를 중지시켰는데 그때 일군들이 신에 묻었던 흙을 털었는데 그 흙이 모여 신털봉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계룡산은 한 때 토속신앙의 터전이었다.
조선 시대 계속되는 국난으로 국민들은 피난처를 찾았고, 당시 널리 유포되었던 정감록에
나오는 새 도읍지 신도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1984년에는 100여개의 종교단체들이
밀집하여 집성촌을 이루기도 했고, 그 이후 삼군통합본부 이전계획에 따라 모두 해체 및 인근
지역으로 옮겨가, 지금은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번째 릿지구간...첫번째보다는 조금 짧고 쉬운 듯 하다
살짝 좌측으로 돌아서 홈이 파인 곳으로 올라간다
끝이 보인다
벼랑바위쪽은 살짝 좌측으로 우회를 한다
좌측으로 올라간다
숲으로 들어서면서 암릉구간이 끝나고...
586m봉(13:03)
군사기지보호구역 말뚝이 있는 586m봉에 오르면서 다시 스틱을 편다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가는데 웅동저수지 너머로 계룡대가 보인다
웅동저수지 너머 계룡대 구룡골프장이 보이고 희미하게 육안(肉眼)으로는 골프치는
사람들이 보이나 똑닥이 카메라로는 보이질 않는구나.
최근에 해이해진 군기 문란과 각종 비위 사건들...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요즘의 별들은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기들의 출세나 이익을 위해 윗대가리들의 눈치나 보는 똥별들이
너무나 많은듯 하다...차기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저 곳은 분명히 손을봐야 할 듯 하다
좌측 아랫쪽은 계룡산 탐방소가 있는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장군봉, 그리고 삽재I.C 너머로는 다음구간에 가야할 갑하산과 우산봉이 보인다.
학봉리(鶴峰里)는 동쪽에 있는 학(鶴)이 나는 곳에 안식처가 있다는 학바위와 일봉(一峰)의 이름을
따서 학봉(鶴峰)이라 하였으며, 조선 말기 공주군 반포면(反浦面) 지역으로, 1914년 반포면 석봉리(石峰里)·
사기소(沙器所)·동흘리(東屹里)·밀목티[密木峙]가 통합되어 학봉리로 개편되었다. 1995년 공주군이
공주시와 통합되면서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가 되었다
학봉리의 문화 유적으로는 공주 학봉리 도요지, 청량사지, 보물 제1284호인 청량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1285호인 청량사지 칠층석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인 숙모전(肅慕澱)이 있다.
동학사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7호인 동학사 삼성각(東鶴寺 三聖閣), 제58호인 동학사
삼층석탑(東鶴寺 三層石塔) 그리고 제59호인 삼은각(三隱閣) 등이 있다. 국도 1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남쪽으로는 계룡시 남선면에, 북쪽으로는 온천리에 연결된다.
암릉구간이 나오고...
살짝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아랫쪽에는 웅동저수지가 보인다
백두사랑 팀들의 흔적도 만난다
조망봉(13:10)
잠시후에 오를 천왕봉이 눈 앞으로 다가온다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안부(13:17)
천왕봉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천왕봉(天王峰:608.6m:13:20)
공주시 반포면과 계룡시 신도안면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후손들이 찾아오지 않는지
관리가 전혀 안되어 있는 통정대부(通政大夫:조선시대 문신 정3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정삼품(正三品)을 지냈다는 충주 지공(忠州池公) 묘가 있으나 조망은 전혀 없고,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이 있어서 그런지 약간은 헷갈리는 봉우리이고 어떤 자료에는 이곳을 황적봉이라는
기록도 있어 정리가 필요한 부분이다
천왕봉을 지나 내리막길에 도착하니 허기가 몰려온다
점심시간(13:22~13:30)
가져온 빵 하나와 커피 우유로 점심을 해결하는데 옷에서 나는 땀냄새 때문인지
잠깐 사이에 산모기가 몸뚱아리에 새까맣게 붙어서 물어대는 바람에 서둘러 길을 떠난다
암릉 구간을 지나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오를 치개봉(우)과 맥길에서 좌측으로 살짝 떨어진 황적봉이 보인다
용수(관암)지맥의 갑하산과 우산봉의 모습
맥길은 쌀개봉에서 시작하여 관암산까지∪자 형태로 갔다가 다시 ⊃로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간다
너럭바위 위로 올라간다
기암(13:37)
너럭바위 같은 곳을 편하게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13:41)
안부에서 오르막을 올라서니 바위에 일엽초들이 많이 기생하고 있다
능선에 올라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진다
다시 살짝 좌측으로 꺽어지니 폐헬기장이 나온다
폐헬기장(13:49)
좌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오르막으로 올라서니...돌로 삥둘러 싸인 묘지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가 나온다
황적봉 갈림길(662m:13:52)
이곳에서 약간 좌측으로 떨어져 있는 황적봉으로 향한다
국립지리원의 지도나 오룩스맵에서는 그저 무명봉으로 표기가 없으나 트랭글앱이나
어떤 지도에서는 치개봉이라라고 표기가 되어 있고, 또 다른 일부 지도에는 황적봉이라
되어 있어 조금은 혼란스럽다... 치개봉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무슨 뜻인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치개(齒蓋)란 입술을 일컫는 용어’라고 하는데 이 봉우리와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좌측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향적봉으로 향한다
평안한 등로를 따라서 향적봉으로 향한다
황적봉(黃積峰:660.9m:13:55)
충남 공주시 반포면과 계룡시 신도안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아무런 흔적도 없고 조망도 없으며 안면이 있는 선답자들의 시그널 몇개만 바람에 휘날린다
황적봉은 계룡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계룡산 연봉(連峰)중의 하나로 지명의 유래는 누런 볏집을
쌓아올린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며,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으로부터 쌀개봉의
동쪽 산등성이를 형성하며, 지질은 홍색장석(맥반석)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계룡시 신도안면쪽으로 용동 저수지가 있고, 북쪽으로는 동학사 계곡으로 이어지며 이 계곡의
소류지가 용수천을 이루며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가 형성된다.
한편 2007년 국토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와 1986년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천왕봉
동쪽의 664m 봉우리를 황적봉이라 표기를 하였고, 관광지도나 도로 지도에서는 이를 치개봉으로
표기하고 천왕봉 능선 서쪽에 놓인 해발 605m 지점을 황적봉으로 표기하고 있다
황적봉 정상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걸려있어 황적봉인 줄 알지 그렇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치기 딱 좋은 봉우리로 쌀계봉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는 군사시설보호와 자연
보호를 위하여 산행통제구간으로 지정되어 계룡산 능선중에서 지독히 홀대받는 庶子의 능선이다
황적봉에서의 실망만 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다시 베낭을 메고...
치개봉 정상으로 올라선다
치개봉(齒蓋峰:662m) 정상(14:00)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직진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국공파의 소행(?)
계속되는 내리막길
너럭바위를 지나고...
주위가 나무로 가려있어 조망은 없다
610m봉(14:20)
석재로 된 군사시설보호구역 말뚝이 참으로 많이 보이는데 아마도 계룡대와 관련이 있는 듯 싶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빠르게 걷는다
철쭉 군락지를 지난다
군사시설보호구역 말뚝을 지나니 묘지가 나온다
무명묘지(14:29)
이곳에서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곳이다.
우측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등로가 희미한 좌측으로 맥길은 이어진다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니...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잘 계시죠?
계속되는 사면길
암릉을 살짝 우회하면서 내려간다
안부(14:35)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등로는 좋다
사면길이 있으나 직진하여 무명봉으로 올라가 본다
무명봉(14:40)
용동리 갈림길(14:42)
이곳에서도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약간 우측의 내리막길은 등로가 아주 좋은데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저수지 방향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 수준(?)이고 좌측으로 이어지는 지맥길은 아예 등로가 보이지도 않는다
좌측으로 꺽어져 급경사로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흔적들이 보인다
등로는 희미하다
우측에서 내려오는 뚜렸한 임도로 내려선다
잠시후에 오를 능선 뒷쪽으로 관암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묘지가 나오고 밀(민)목재로 이어지는 좌측의 뚜렸한 길을 버리고 직진한다
직진하니 키작은 대나무가 보이나 등로는 전혀없다...트랙상으로는 이 길인데...
결국에는 좌측으로 향한다...처음부터 좌측의 좋은길로 갈 껄...사서 개고생을 한다
밀(민)목재 동물이동통로로 올라선다
내가 10년 넘게 산을 다니면서 만난 동물이동 생태통로 중에 가장 친환경적인(?) 동물이동 통로이다
잡풀이 너무 우거져 걷기가 힘이들 뿐 아니라 동물이동을 체크하는 카메라도 많이 보인다
밀목재(密木峙:270m:15:10)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와 계룡시 신도안면(구 지명: 논산시 남산면) 용동리의 경계의 있는 고개로
각종 지도와 자료에는 민목재가 아닌 밀목재로 나오는데 약간은 헷갈린다
금강의 지류인 용수천의 상류부에 해당되며 고개가 밋밋하여 민목재라고 부르며 옆에 있는 산을
민산이라 부르는데 민씨((閔氏)네 소유의 산이라고 해서 민산((閔山)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이동통신탑과
잡풀이 무성한 동물이동 생태통로가 있고 남, 북으로 가림막을 어찌나 완벽하게(?) 쳐놓았던지 차량소리만
요란하게 들리지 2차선의 구1번 국도는 전혀 볼 수가 없다
동물이동 생태통로를 지나서 올라가니...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오르막으로 오르고...
이정표가 나오고...계룡대 방향으로는 괴목정이 이정표의 포스트다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리에 있는 괴목정은 유서깊은 공원으로 옛날에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이 근처에 자리잡고 살았다고 하며 또한, 조선 태조가 수도를 옮기기 위해 풍수지리상 천하의
대길지(大吉地)라고 알려진 계룡산을 찾았는데 이때 수행했던 무학대사가 꽂아놓은 지팡이가
큰 느티나무로 자라 괴목정(槐木停)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점심으로 먹은 빵과 커피 우유가 좀 부실했던지 허기가 지고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443.8m봉(15:38~45)
좌측의 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막혀있고 맥길은 관암산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데 옷에서 나는 땀냄새
때문인지 산모기가 새까맣게 붙어서 뭉뚱아리를 물어대는데 미치겠다
443.8m봉 이정표
제도권 등로인지 길은 아주 좋다
암릉구간을 지난다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518m봉(15:58)
나뭇가지 사이로 계룡대 구룡골프장과 활주로가 짧은 비행장 활주로도 보인다
541.1m봉(16:06)
맥길은 살짝 좌측으로 꺽어진다
고도차가 거의없는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관암산으로 향한다
잠시후에 관암산에 도착한다
관암산(冠巖山:526.5m:16:22)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와 계룡시 신도안면 남선리, 대전광역시 유성구 세동에 걸쳐있는
3계 시봉(市峰) 경계이며, 정상에는 이정표와 3등 삼각점, 구조 이정목이 있으나 신산경표상의
관암지맥의 주봉인 셈인데 그 흔한 정상석 하나조차도 없는 참으로 볼품이 없는 산이다
지명의 유래는 “산 중에 갓처럼 생긴 관암바위”가 있어 붙여진 것으로 전하며, 산지 방향이
남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 북쪽으로는 동학계곡이 위치하고 있고, 동학계곡에서 흘러
내린 물은 금강의 지류인 용수천과 합류하고, 산 서쪽으로는 계룡대골프장과 괴목정이 있다.
산 동쪽 산록으로는 1번 국도가 지나가며 온천터널과 반포터널이 연결되어 관암산 아래를 통과한다
관암산 정상 3등 삼각점(△대전 33 / 1979.8 재설)
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져 백운봉이 있는 동북쪽으로 향하는데 이곳부터는
우측으로는 분기점인 쌀개봉에서부터 같이해 온 계룡시와 작별을 하고
온전히 대전광역시로 들어서지만 좌측은 계속해서 공주시 반포면과 함께 한다
계룡터널 위(16:33)
이 능선 아래로 신 1번국도 계룡터널이 지나가는 곳이다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백운봉(白雲峰:535.5m:16:40)
대전광역시 유성구 세동.성북동과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상세동재를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관암산과, 자티고개를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금수봉으로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자티고개를 지나 약사봉으로 이어진다.
수통골을 에워싼 봉우리중 가장 높은 봉우리로 신산경표상의 관암지맥 주봉인 관암산보다
높으며 지명의 유래는 산에 항상 흰구름이 끼어있어 백운봉이라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백운봉 계룡산국립공원 남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북쪽으로는 금강 지류(支流)인 용수천이
곡저(谷底:골짜기의 밑바닥 부분) 충적지를 형성하며 흐르고 있고, 백운봉 서쪽으로는 32번
국도가 통과하고 계룡터널이 지난다
백운봉 우측 아래로는 상세동 마을회관(2.2km)과 상세동산림욕장(2.3km) 이정표와
세동마을 안내도가 서 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세동(細洞)은 길고 가는 골짜기가 있다고 하여 세동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으며, 상세동(上細洞)과 중세동(中細洞)을 합쳐서 세동(細洞)이라고 한다
세동은 우리밀, 쌈채소, 농촌체험 휴양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백운봉 이정표 뒷쪽인 북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너럭바위 같은곳을 지나고...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자티고개(460m:16:48)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을 자티고개라고 하는데 우측으로는 금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맥길은 무명봉 직전인 y자 갈림길에서 도덕봉으로 향하는데 실제의 자티고개는
바로 앞 무명봉을 넘어에 있다
희미한 등로를 내려서니...
목책이 나오고 뚜렸한 제도권 등로가 보이는데 우측은 금수산으로 가는 길이고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도덕봉으로 향하는 길은 아주좋다
등로 우측으로는 묘지에다가 돌담을 만들어 놨다
등로는 아주 편하나 먹은것이 부실했던지 체력은 점점 떨어지는 느낌이다
다시 약간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아직도 도덕봉이 2.1km나 남았다니...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왔고 등로가 편안하니 졸음까지 밀려오기 시작한다
469.9m봉(17:10)
119산악 구급함이 있고 ...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자꾸만 발걸음은 무거워지건만 도덕봉으로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더 내려간다
안부(17:20)
안부에서 조금전 내려온 만큼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가야 한다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느낌이다...쥬스와 초코렛으로 허기를 면하면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휴식을 취하면서 바라본 금수봉(金繡峯:530.4m)과 나뭇가지 뒷쪽에 있는 빈계산(413.8m)의 모습
금수봉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성북동 새뜸마을 위에 있는 산으로 계룡산 천황봉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민목재를 지나 백운봉에서 두갈래로 갈라졌는데 오른쪽이 금수봉, 왼쪽이 도덕봉이다.
이같이 계룡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금수봉은 정산에 올라서서 사방을 내려다보면 주위의 풍경이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이 아름답다하여 금수봉이라 불렀다. 특히 북쪽으로 마주보이는 도덕봉의 기암이 장관이며,
유성을 비롯한 대전 서남부 일대와 방동저수지까지 잘 내려다 보인다.
금수봉 일대의 백운봉, 도덕봉, 빈계산 지역 즉, 수통골 지역은 계룡산 국립공원에 포함된 국립공원 지역이다.
지나온 쌀개봉과 황적봉, 치개봉은 빛내림으로 인해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진다
잠시후에 오를 522.3m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대전 시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우측으로는 빈계산도 보인다
빈계산(牝鷄山:413.8m)은 대전시 유성구 계산동과 성북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암탉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여지도서,호서읍지,조선지지자료등 옛 기록에는 분계산(分鷄山)으로, 대동지지에는
분계산(分界山)이라 적혀있으며 빙게산이라고도 부른다.
빈계산은 옛적 마한 54국의 하나인 신흔국(臣釁國)이 있었던 곳으로 전하며, 관암산,백운봉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금수봉을 지나 빈계산으로 이어진다.
암릉구간이 나오고...
안부에 내려섰다가 오르막으로 오르니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의 우회길이 아닌 직진으로 향한다
522.3m봉(17:45)
522.3m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을 다시 만난다.
가리울삼거리(17:47)
가리울삼거리에는 이정표(↖도덕봉 0.8km ↗수통폭포 삼거리 1.3km ↓자티고개 1.9km)가
있고 우측의 사면길로는 수통골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좌측의 능선을 따라서 도덕봉으로 향한다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유성은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공주목 임내(任內)에 붙였다."라고 되어 있다.
임내란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지 않는 행정구역을 말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유성현은 고려 때
공주목에 속했으며 본조에도 그대로 따랐다."라는 기록과 함께 "옛날 유성은 유성현 동쪽 4리 거리에
있는 광도원(廣道院) 옆에 있다. 객사, 향교, 창고 등의 옛터가 아직 남아 있다.
유성산성은 유성현 동쪽 5리 거리에 있고 돌로 쌓았으며 그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17세기 중반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에는 '유성폐현(儒城廢縣)'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를
지나면서 유성현이 없어지고 공주목에 완전히 예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 유성이라는 지명이 확인되고 그 북쪽으로 내성령(乃城岺) 남사면에 덕진(德津)이 보인다.
묘지(17:55)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안부(498.7m:17:57)
안부에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폐헬기장(18:02)
능선으로 올라가니...
이정표가 있는 도덕봉 정상에 도착하는데 우측으로는 수통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수통골의 뜻은 말 그대로 물이 잘 통한다는 말인데, 예로부터 물길이 풍부한 곳을 일컫는다고 하여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수통골의 연혁과 지명유래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골짜기가 길고 크게 물이
통하는 골짜라고 해서 수통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수통골은 계룡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지만, 대부분의 계룡산 봉우리들이 공주군 반포면에 위치한 반면
수통골을 이루는 도덕봉, 금수봉, 빈계산이 대전광역시에 속해 있어 시내에서 접근이 쉽고 산에 오르면
대전시내 뿐만아니라 계룡산 전망도 좋은 곳이다.
도덕봉(道德峯:534.2m:18:05)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와 대전광역시 유성구 계산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정상석과 이정표(↖삽재1.6km ↗수통골1.5km ↓가리울삼거리0.8km)가 이정표가 있다
계룡산 천황봉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간 봉우리중의 하나로 우산봉, 갑하산, 백운봉, 관암산으로
이어지는 산으로 옛날에 이 골짜기에 도둑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며
또 다른 설은 신라의 고승(高僧)이신 의상대사가 이 산의 석굴에서 道를 닦았던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흑룡산(黑龍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판독이 불가능한 도덕봉 삼각점
도덕봉은 봄철에는 진달래가 물들고 산벚꽃이 많이피어 주민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서쪽은 숲이 우거져 있지만 동.남쪽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 끝에서는
갑천의 지류인 화산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백운봉을 지나면서 이곳까지 오는데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도덕봉을 지나면서부터는 구조이정목이 보이나 등로는 조금씩 野性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갈림길(18:10)
좌측으로 이어지는 뚜렸한 사면길을 버리고 직진으로 올라간다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8:13)
맥길은 무명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누군가가 코팅지로 표식을 해놨다
무명묘지(18:15)
정상에는 무명묘지 한 기가 있고 직진으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서 다시 오르막길로 오른다
492m봉(18:20)
오늘 지나온 향적봉(하얀 암릉) 너머로 분기점인 쌀개봉이 보인다
암릉 구간을 지나는데 우측으로 등로가 열린다
능선 아래로 삽재로 이어지는 32번 국도가 보이고 주택이 보이는 갑동 북동쪽으로
아침에 지나온 국립 대전현충원이 마치 골프장처럼 파랗게 보인다
갑자기 날씨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진다
498m봉(18:23)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삽재I.C가 보이기 시작한다
앞에 보이는 능선은 삼불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이고 1번국도와 32번 국도가 만나서
공주시 반포면과 세종시쪽으로 향하는 곳이고 우측으로는 갑하산이 살짝 보이고 도로옆으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용수천(龍水川)이 흐릿하게 보인다...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
상에서는 내가 걷고 있는 이 맥길을 용수지맥이라고 한다
용수천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서 발원하여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에서 금강으로 유입되는
금강수계에 속하는 지방하천으로서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의 향아교를 기점으로 하여
금남면의 금강 합류점에 이르기까지 총 연장 20.9㎞로 용수천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고려를 개국한 왕건이 차령 이남의 사람들을 거용하지 말라는 훈요십조(訓要十條:고려 태조가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942년(태조 25)에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遺訓)의 풍수적 근거가 금강이 북으로 흐르는
모습과 계룡산이 화살촉을 당긴 활시위같은 모습 때문이라는 속설이 있다.
이는 당시 개성이나 한양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들이 볼 때 반역의 기운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변혁의 기운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에 어쩌면
용수천은 그 당시 기득권의 세력으로 볼 때는 반역의 하천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급경사로 내려서면서 대전 유성구의 택시를 호출하는데 아무도 응답을 하지 않는다.
114에 전화를 하여 처음으로 연결된 곳이 양반콜이라는 대전 유성택시...안내원이
하는 얘기...‘우리는 삽재라는 곳을 모른다’ 하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
2번째 연결된 한양콜이라는 택시회사...‘지금은 차가 없으니 차량이 연결되면 연락주겠다’
하고는 아무런 연락이 없고 전화는 계속 통화중이다
그러는 사이에 삽재에 도착하고 모든게 어둠속에 묻혀 버렸다
삽재(160m:18:38)
충남 공주시 반포면과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32번 국도가 지나는데
대도시 지역이라서 그런지 교통량이 엄청나게 많고 차량 속도도 무쟈게 빨라서 상당히 위험하다
지금 동물이동통로를 조성중이고 우측의 갑동쪽으로는 국립대전현충원이 있고 반대편인
반포면쪽으로는 32번 국도와 1번 국도가 만나는 삽재I.C가 있다
도덕봉과 갑하산 사이에 있는 삽재는 예전부터 대전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통로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들의 물건을 터는 도둑들이 많이 활동을 했고, 도둑들은 물건을 털어 가파르고
험한 도덕봉 안쪽으로 숨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도둑골이라는 골짜기가 도덕봉 북쪽(갑하산쪽)에
남아 있듯이 예전에 도둑골, 도적골로 불리웠으며 도덕봉은 도둑봉으로 불리웠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부드럽게 순화되어 도둑봉이 도덕봉이 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택시는 오지않고 오룩스앱을 보니 대전쪽의 갑동보다는
반포면쪽의 학봉리의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 보이기에 학봉리쪽으로 5분정도 내려가니
삽재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넓은 도로에 한창 공사중인 도로변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10분 이상을 버스를 기다리는데 지나가는 버스는 여러대가 있으나 어두워서
내가 보이지 않는지 다들 그냥 지나가 버린다.
하는 수 없이 공사중인 도로 좌측으로 내려가니 펜션과 식당들이 불을 켜놓고 영업을
하고 있어 유성터미널을 가야하는데 택시를 좀 불러 달라고 하니 어느 누구도 대꾸조차 않는다
양반의 고장 충청도 인심이 이렇게 야박한 지는 예전에 몰랐었는데...
좁은 도로를 따라서 가는데 길가에서 낡은 트럭으로 파지와 고물을 줍는 노부부가 있기에
나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니 안쓰러워 보였던지 트럭에 타라고 한다.
이 분들도 몇 년전까지 서울에서 사시다가 쫄딱 망하고 이곳에 와서 고물을 줏어다
팔면서 연명을 한다고 하신다...학봉리에서 15분 걸려 금호고속버스 유성터미널에
도착하니 19시 50분...어르신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20,000원을 드렸드니만 한사코 사양한다
트럭에 내리면서 노부부의 부인에게 돈을 쥐어주고는 건강하시라고 인사를 나누고 작별을 한다
아침부터 택시와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김이 세었고, 저녁에 콜택시의 불친절에 안 좋은 추억을 남긴다.
유성발 → 서울행 버스표
아침에 예매한 19시 버스표를 환불하니 위약금 4,500원을 제한다
새롭게 20시 정각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예매한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20시에 출발하는 프리미엄 고속버스를 예매하니 10분정도 여유가 있어서
얼른 화장실에 가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버스에 올라서 깊은잠에 빠진다
오늘 산행의 전리품...요런게 2개...유쾌하지 못한 산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대박을 친 셈이다
'용수(관암)지맥(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수(관암)지맥 제3구간 - 자운초등학교 앞에서 용수천/금강 합수점까지 (0) | 2021.11.13 |
---|---|
용수(관암)지맥 제2구간 - 삽재에서 자운초등학교 앞까지 (0) | 2021.10.11 |
용수(관암)지맥 개념도와 지도 (0) | 2021.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