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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달천(계명)지맥(終)

달천(계명)지맥 제3구간 - 마즈막재에서 달천/남한강 합수점까지

by 범여(梵如) 2022. 1. 30.

☞ 산행일시: 2022년 01월 30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약간의 미세먼지...상당히 추움

☞ 산행거리: 도상거리 15.5km / 7시간 4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마즈막재-대몽항쟁 전승 기념탑-공터-615m봉-안부-쉼터-707.9m봉

                 안부-705m봉-안부-헬기장-계명산-조망바위-안부-조망바위-안동권공 묘

                 485.6m봉-안부-419.6m봉-안부-무명봉-작은민재-209.5m봉

                 NO15/NO104송전탑-안부-후곡산-전망좋은 곳-안부-쉼터-막은대미재 갈림길

                 운동시설-막은대미재-231.5m봉-안부-244.9m봉-195m봉-금릉배수지-금릉고개

                 안부-무명봉-작살고개-광명산-충원대로-버스 정류장-오일뱅크-충북선 철길

                 칠지마을회관-충주세계무술공원-대문산-탄금정-열두대-팔천고혼 위령탑-충혼탑

                 탄금대 노래비-중원 문화원-무명봉-무명봉-탄금장례식장-달천/남한강 합수점

☞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안림동, 종민동, 용탄동, 연수동, 금릉동, 목행동, 칠금동

 

며칠사이에 날씨가 너무 춥다...범여의 몸뚱아리는 추위에 쥐약이다.

그래서 따뜻한 울산지역에 있는 태화 북(삼태)지맥 마지막 구간을 끝내려고 열차표를

예매하려고 코레일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상.하행 열차가 전부 매진이란다.

아차!...내가 명절(구정) 밑이라는걸 망각하고 살았나 보나...내가 요즘 정신줄을 놓고있나?

하는 수 없이 지난해 9월 2구간을 끝내고 남겨둔 달천(계명)지맥 마지막 구간을 나선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않은 충주지역이기도 하지만 마즈막재에서 계명산만 빡세게 올라가면

그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고도를 낮추어 충주시내를 접어들고 도심지역을 통과하기에

먹는 문제는 매식으로 해결할 수가 있어서 베낭 무게를 줄일 수 있겠다 싶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충주행 버스표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센트럴(호남)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05시 45분.

명절 연휴가 무색할 정도로 터미널 대합실은 썰렁하고 을씨년스럽다.

코로난가 오미크론인가하는 지랄같은 역병으로 인해 고향으로 가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잠시후에 버스에 오르는데 승객이라곤 나를 포함해서 6명이고, 버스가 시동을 건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버스안은 너무 춥다...버스가 따뜻해지면서 잠깐 잠든 사이에 충주터미널에 도착한다

충주터미널(07:35)

생각보다 너무 일찍 버스는 충주 터미널에 도착한다.

서울에서 6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려다가 명절밑이라 고속도로가 밀릴것 같아서

30분 빠른 첫 차를 탔더니만 평소보다 더 일찍 충주에 도착한 느낌이다.

일단 터미널 안에 있는 김밥천국이란 집에서 라면에다 김밥한줄로 아침을 해결하고

커피까지 한잔을 했는데도 아침 8시밖에 안되었다...터미널 건너편에서 마즈막재로 가는

515번 버스는 08시 50분이라 무작정 기다릴수가 없어서 택시를 탄다

충주터미널에서 15분만에 오늘의 들머리인 마즈막재에 도착한다

마즈막재(心項峴:260m:08:25)

충주시 안림동과 목벌동, 종민동을 연결하는 고개로 계명산과 남산이 연결되는 지점에 있으며

이 고개를 일러 ‘마즈막재’라고 하는데 신라시대에는 나무벌(木伐)과 같은 깊은나무고개(心木峙)라

하였다고 하며, 계명산의 옛 지명인 심항산(心項山)에서 따와 심항현(心項峴)이라 불렀으며

심항현을 한자로 해석하여 마수막재라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마즈막재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즈막재는 계명산과 남산으로 이어지는 남북 산줄기에서 동서 구조선을 따라 낮아지는

산줄기가 마즈막재인데 삼국시대부터 지금은 수몰된 남한강을 통하여 청풍, 단양, 죽령을

넘나들거나 송계리, 미륵리 하늘재를 넘어 영남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옛날 한양에서 배를 타고 충주시 종민동 나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

충주 포도청으로 가든가 아니면 사형장으로 가게 되므로, ‘가기만 하면 살아오지 못한다’는

관례에 따라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라는 뜻에서 ‘마즈막재’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한 설에는 “옛날 이 부근에 호랑이가 많아 충주 성안 사람들이 그 고개를 넘어 가기만 하면

살아오지 못했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라고도 한다

표시석 아래에 있는 마즈막재 안내 표지판

마즈막재 광장에 있는 충주시 무공 수훈자 공적비

충주호가 가까운 고개라서 그런지 바람은 불지 않으나 날씨가 추운지 사진 몇컷 찍는

잠깐 사이에 손가락이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추위가 엄습해와서 서둘러 산행 준비를 한다

마즈막재 광장에서 도로를 건너니 버스정류장이 있고 맥길은 버스 정류장 뒷쪽으로 이어진다

산행을 시작하다(08:35)

등로 입구에 있는 대몽기념 전승기념탑 안내판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이 있는 곳으로 牛步걸음으로 천천히 오르는데 엄청나게 춥다

대몽항쟁전승 기념탑(08:38)

고려 대몽항쟁은 1231년(고종18)부터 1274년(원종14)에 삼별초(三別抄:고려시대 경찰 및 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명칭)군의 패망에 이르는 4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전개 되었다.

1225년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 ? ~ 1225년)의 피살사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된 뒤, 몽고는

조공 거절및 저고여 피살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에 8차례에 걸쳐 한반도 전역을 유린했고, 이 시기의

고려 백성들의 생활은 비참해질대로 비참했고, 고려 왕조의 지배체계가 무너짐으로써 시련기를 맞게됐다.

 

이에맞서 충주민들은 1231년 12월 몽고군의 침략으로부터 1258년 10월 박달현 전투까지 약 27년동안

9차례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대몽항쟁의 최대 전승지가 되었다.

 

특히 충주에서는 백정, 천민, 노비들이 주축이 되어 몽고군과 용감하게 싸웠는데

이는 충주민들의 자생적 지역 보위의 정신이 승화된 주인의식과 애국심의 발로였고

충주민들의 대몽항쟁의 전승을 기념하고 그 호국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충주시 안림동

마즈막재에 2003년 9월 24일 대몽항쟁전승 기념탑이 세워졌다

13세기 중반 몽고의 침공에 대한 고려의 항전은 끊임없는 주변 강대국의 무력에 시달려온

한국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고난스러웠던 기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고려의 무인정권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적극 항전을 결단하고 침입 이듬해인 1232년(고종 19)

수도를 강화도로 옮김으로써 30년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맞서

싸운 것은 정부군이 아니라 농민. 천민 혹은 향리 등에 걸치는 각 지방민들이었다.

전국적으로 많은 항쟁지역 중에서 충주민의 대몽항쟁은 가장 주목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의 대몽항쟁을 지역적 시각에서 검토하여 볼 때 충주지역 만큼 숫적으로 풍부한 지역이 없고 큰 의미를

갖는 사례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충주는 고려 대몽항쟁사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지역임에 틀림없다.

총 9차례의 항전사례 중 김윤후의 충주산성 방어전은 대몽항전사상 가장 인상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당시 충주성 방어의 책임을 맡은 인물은 1232년의 경기도 용인부근의 처인성 승첩으로 널리 알려진 김윤후였다.

그는 적장 살례탑을 사살한 승첩 이후 山寺의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정부로부터 섭랑장을 제수받아

무반으로서 관직에 올랐는데 이 무렵 그는 랑장으로서 충주산성의 방호별감에 임명되었다.

 

충주산성의 70여 일간 전투의 승전은 김윤후 장군의 뛰어난 지도력과 충주민들의 강인한 항전의지의

결합으로 이룩된 것이었으며 피지배 민중들에게 잠재된 항전력을 불러 일으켜 이를 실질적인 에너지로

점화, 분출시킨다는 점에 있다.

 

고려의 대몽항쟁은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대외항쟁사례로 1253년 적장 야굴의 포위공격을

70여일 간이나 버티면서 마침내 몽고군을 고려에서 철수케 한 충주산성 전투의 경우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자 김윤후의 공헌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공헌은 바로 충주민의 투철한 저력을 간파하고 이것을

구체적인 항쟁의 동력으로 점화시키는데 성공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戰史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몽항쟁사는 남겨진 자료의 빈곤 등으로 우리의 역사와

기억 속에서는 거의 잊혀진 과거가 되고 있는데 대몽항전의 자료가 빈약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항쟁이후 고려가 정치적으로 몽고의 간섭 하에 놓여짐으로써 대몽항전의 자료들이 의도적으로 지워지고

인멸될 수밖에 없었던 때문이다. 이에 지워진 역사를 가능한 복원하고 또 이를 오늘의 정신적 활력의

자산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7백여 년 전의 위대한 항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될 것이다.

 

이에 김윤후 장군의 뛰어난 지도력과 충주지역민들의 뜨거운 항쟁의지의 결실로 충주산성을 지킨

영령을 기리고 추모하는 의도에서 여기 이곳에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을 건립하여 대몽항쟁사의

역사적 진실과 교훈을 되새기고자 한다.


탑 상단부의 1253은 충주산성 전투가 일어났던 해를 말함이고 그 앞의 동상군에는 가운데 김윤후장군이

칼을 높이 들고 몽고군의 기세를 누르며 충주지역민들을 격려, 고무하는 모습이고 좌우로는 농민군과

승려군 그리고 쓸어진 처자를 부둥켜안고 있는 부녀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동상군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도 당시 전투를 실감할 수 있으며 김윤후 장군과 충주지역민들이

하나로 마음을 모아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시키려는 의지와 기상이 강하게 표출된 모습이다.

기념탑 위의 조형물에는 김윤후 장군을 위시해 천민, 노비, 승려들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걱정하고 피땀흘려 나라를 지킨 사람은 지도자들이 아니고 민초들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蒙塵))했고, 6.25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초들 버리고 자기들은 부산으로 도망가지 않았나...

 

2년전인가 歌皇 나훈아가 콘서트를 하면서 속 시원하게 한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이 나라는 바로 오늘 여러분이 지켰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정말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정치하는 자들이 민초들의 삶의 다독거려 준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저거들끼리 다 해먹고...자기들 입맛대로 법 만들고...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50일도

안 남았는데 대통령 하겠다는 자들은 맨날 돈 퍼주겠다면서 니편 내편 편가르기나 하니...

그 돈이 니끼가...민초들이 피땀흘려서 낸 세금을 '조자룡 헌칼을 휘두릇 하니'

그게 다 우리 새끼들의 빚으로 남는다는 걸 모른다는 말인가...줄라면 니 호주머니 떨어서 줘라

대몽항쟁승전탑을 바라보면서 이 시대의 씁씁함을 맛보면서 계명산을 향한 빡센 오르막으로 향한다

너덜지대도 통과한다

빡센 급경사를 올라오니 우측으로 충주호가 보이는 능선에 올라선다

공터(09:05)

마즈막재의 고도가 260m이고 계명산 정상이 774.3m이나 고도를 500m이상을 높혀야 하는 급경사이다.

예전의 亡者의 집(무덤)인듯한 공터가 있는데 지금의 산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 버렸구나.

공터에서 바라본 충주호는 미세먼지로 인해 아우것도 안 보인다

오르막길로 올라서니...

데크목 계단이 시작되는데 빡세기는 마찬가지이다.

데크목 계단을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 내려서니...

119구급함과 국가지점번호 표식이 안부가 나온다

다시 시작되는 빡센 오르막길

돌탑을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잠시후에 오를 615m봉이 보인다

편안 길을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615m봉(09:28)

이정표와 전망대 표지판, 국가지점번호가 있고 전망은 좋으나 짙은 미세먼지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우측으로는 계명산휴양림으로 가는 등로가 보인다

얼마나 천천히 걸었으면 1km정도밖에 안 왔는데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아랫쪽으로는 충주호가 보이고 그 뒷쪽 능선인 광천(등곡)지맥 능선은 흔적조차 안 보인다

약간의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안부(09:31)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오름길에 뒤돌아 보니 지난해 9월 2구간 때 걸었던 충주의 진산이라는 남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다시 오르막길

능선에 올라선다

쉼터봉(09:50)

쉼터봉에 있는 안내판 

가야할 계명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707.9m봉(09:52)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계명산으로 향한다

내리막길은 잔설이 남아있고 음지라 등로가 얼어있어 상당히 조심스럽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조심스럽게 암릉구간을 통과한다

생각보다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10:03)

암릉구간을 치고 올라간다

앙증맞은 돌탑도 만나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고 다시 오르막길

705m봉(10:13)

우측으로 텃골로 가는 등로가 보인다

충주시 종민동 충주호 주변에 있는 텃골은 基(터 기), 洞(마을 동): 基洞(기동)이란 마을이름을

달리 풀이하기도 하나, 기동(基洞)이란 뜻은 오래전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되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基洞(기동) 즉 ‘터골’이란 마을이름은 전국에 많이 있는데, 대부분 어느 집안에서 터를 잡고 살면서 

유래한 경우가 많으며, 또 다른 지명으로는 달리 ‘토골, 턱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마을 생김새를

의식한 것으로 생각되며 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에도 <턱골>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기동(基洞)에는 평택임씨(平澤林氏)들의 집성촌이다

집채만한 암릉이 등로가 나오고 우회를 한다

좌측으로 우회해서 내려간다

안부(10:19)

계명산 정상으로 향하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등로 우측 아랫쪽은 충주호가 보이고...

계명산 정상으로 향하는 빡센 오르막길

헬기장이 나오고 우측으로 정상석이 2개나 있는 계명산 정상이 보인다

계명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충주호(忠州湖)의 모습

 

충주호는 면적 67.5㎢, 높이 97.5m, 길이 464m, 저수량 27억 5000t으로, 1985년 충주시 종민동· 동량면

사이의 계곡을 막아서 만든 충주댐으로 인해 조성되었으며, 육지 속의 바다로 불릴 만큼 소양호(29억t)

다음으로 담수량이 큰 호수이다. 주변 경관이 뛰어나고, 풍부한 수량과 넓은 수면, 심한 굴곡과 경사도로

인해 붕어·잉어·향어·백연·떡붕어 송어· 등의 어종이 풍부해 사철 낚시꾼으로 붐빈다.

주변에 월악산국립공원·청풍문화재단지·단양팔경·고수동굴·구인사· 수안보온천·노동동굴·충주호리조트 등

관광명소가 많으며 충주댐나루터에서 신단양(장회)나루까지 52㎞에 걸쳐 쾌속 관광선과 유람선이

운항하여 단양팔경을 돌아볼 수 있다. 충주호리조트에는 각종 놀이기구와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충주호 너머로는 월악산의 영봉의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뭇 남성을 유혹하려는 듯 요염하게 누드로 누워있는 듯한 여인의 형상인 듯한

 월악산 영봉 정상을 똑닥이 카메라로 당겨봐도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라 아쉽기만 하다.

계명산(鷄鳴山:774.4m:10:34)

충주시 안민동, 종민동, 용탄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2개의 정상석과 훼손된 삼각점이 있다.

원 지명은 이 산에 오동나무가 많아 오동산(梧桐山)이라 했고,심항산(心項山) 또는

계족산(鷄足山)이라 불렀는데 계명산이라 불리게된 유래를 보면 옛날 심항산에 지네가 많아

가끔 주민의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충주가 백제의 땅이었을 때 마고성주(지금의 충주산성)의 딸이 지네에게 물려 죽었다.

마고성주는 해로운 지네를 없애기 위해 고심했고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어느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지네는 닭과 상극이니 많은 닭을 산에 풀어 길러라고 일려주었다.

산에 닭을 풀어 기르니 닭이 지네를 잡아먹어 지네가 없어졌으며 이때부터 이 산을 계족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계족산이란 이름은 닭발처럼 산줄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간 이 산과 어울리는 이름 이었다.

그러나 닭이 파헤치는 분산의 성질이 있어서 충주에 부자가 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 때문에 1958년 ‘닭 울음이 새벽을 알린다’는 뜻으로 계명산(鷄鳴山)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계명산 정상 삼각점...깨져있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범동(범골)로 이어지는 정상 우측엔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충주시 종민동에 있는 범동(凡洞:범골)은 凡(무릇 범), 洞(마을 동)으로 우리말 지명 '범골'을 '범(虎)'자는

<음옮김> 즉 우리말과 음이 같은 한자중 쉬운 한자 '무릇 범 凡 '자를, '골'은 한자로 '마을 동(洞)'으로 

<뜻옮김>한 표기로 다른 지명으로는 '봉골'이라 하는데 이는 '범골'을 편히 발음이다.

<봉골>을 실제로 길게 빼어 발음하는데 산쪽으로 치우치고 봉우리로 둘러싸인 마을이다보니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범골’이란 마을이름은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과거 ‘범’이 살던 골짜기에서 유래한 마을이름이라고

생각되며, 가까운 안림동 '범의(凡衣)마을'과 호암동 ‘범바위'도 ‘범 '과 관련된 마을이다.

 

마을 앞쪽 산에 있는 밭 부근을 <봄밧뜽>이라 하는데, 여기서 <봄밧>은 우리말 <범박>

즉 <범 모양의 바위>를 편히 부르는 것으로 <범바우>란 바위가 현재 숲속에 있으며

<봄밧등>은 <범바위가 있는 등성이>의 뜻이 된다.

백두사랑 이대장의 흔적

인증샷

마즈막재에서 출발한 지 2시간만에 계명산 정상에 도착했다.

이곳에 잠깐 머무는 사이에 손이 엄청 시리다...아침 비해 날씨가 많이 풀리긴 했으도 아직은 춥다

서둘러서 막은대미재 방향으로 향한다

광천(등곡)지맥(앞쪽) 너머로 백두대간 능선상에 있는 포암산에서 대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잘 안보이고, 월악산 영봉은 미세먼지 속으로 숨어 버렸다...좌측에 우뚝 서 있는

문수봉만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오늘은 힘든 산행이 끝이난 듯 싶다...나에겐 내리막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등로 좌측으로 살짝 벗어난 조망바위로 가본다

조망바위(10:5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남산의 모습

남산(南山:635.6m)은 충주시 살미면, 안림동과 직동및 목벌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금봉산(錦鳳山)으로

 불리워 지기도 하는 아담한 육산으로 산 정상에는 일명 남산성이라고 부르는 성터 및 성벽이 있으며

금봉산성, 마고산성, 혹은 충주산성이라고도 부르는데, 금봉산이라 부르는 연유는 산 모양이 봉황이

날개를 드리운 것과 같아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고려 대항몽지로 유명한 충주산성을 두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보통 이 남산성을 일컫는다.

이 산성은 최초에 백제 구이신왕 시대(420~426년)에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국성으로

불리우다가, 백제 개로왕 21년(475년)에는 백제의 도읍지 후보로 충주가 증장되어,

이 성의 바로 아래인 충주시 안림동 어림 마을에 궁궐지가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가

신라 진흥왕(540~575)에 난장성으로 바뀌어 불렸다고 한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충주시 안림동(安林洞)의 모습

안림동은 안심리(安心里)·범의동(凡衣洞)·어림리(御林里)·교동(校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생겨난

마을로 그 이름도 안심리와 어림리의 지명을 따서 안림동이라 했는데 안심리는 안림동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예부터 피난지로 안전한 곳이라 하여 안심이라 불리었다.

어림리는 백제 문주왕이 가행궁을 짓고 있던 솔밭이란 뜻으로 지은 마을 이름이다.

마루금으로 되돌아 와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국가지점번호 라바4205 8806 이정표를 지난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안부(11:01)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선다...제도권 등로인지 간간히 등산객을 만난다.

편안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조망바위(11:05)

미세먼지에 갇혀버린 충주시내

낡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내리막길로 향한다

등로 우측으로는 충주 산업단지가 보인다

마루금은 암릉이 길을 막고...

우회를 하면서 내려간다

살짝 얼어있는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스레 내려서니 등로 가운데 묘지가 있다

안동권공 묘(11:18)

좌측의 연수동으로 내려가는 사면길이 보이고 마루금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능선으로 올라간다

485.6m봉(11:22)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등로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충주호에서 내려오는 남한강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편안하게 능선을 따라서 내려간다

안부(11:28)

안부에서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419.6m봉(11:32)

정상에는 국가지점번호 라바4088 8880 표지판과...

장의자 2개가 산꾼을 기다리고 있다

가야할 마루금 산줄기가 보이고 저 멀리 합수점에 있는 탄금대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419.6m봉 아래에는 충주시 연수동이 보인다

충주시 연수동(連守洞)은 본래 충주군 북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원(連原),

동수동(東守洞)과 대가미리(大加味里), 칠지동(漆枝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연원(連原)과 동수(東守)의

이름을 따서 연수리라 하고 읍내면에 편입되었으며, 1962년 연수동으로 편제되었음. 총면적은 5.08㎢로

충주시 전체면적의 0.5%를 차지하고 있으며, 택지개발로 인한 도시개발로 대단위 아파트단지 및

신흥상권을 형성하는 충주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마을이라고 한다

419.6m봉 돌탑을 바라보면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좌측으로 내려갔다가...

고도를 확 낮추면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억새가 무성한 묘지인듯한 곳을 지난다

안부(11:42)

우측으로는 작은민재, 연수동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고 지맥길은 좌측으로 향한다

좌측으로 간 다음에 우측으로 꺽어져...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1:45)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등로는 잘 안보이고 우측으로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제도권 등로를 다시 만난다.

녹색 휀스를 지나고...

작은민재(11:51)

충주시 연수동 금곡마을에서 용탄동 절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금곡(錦谷)마을은

옛날에 쇠가 많이 났다고 한다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등로 좌측에는 뒷골목산 연리지란 팻말이 보인다

이 나무가 뒷골목산 연리지인 듯 하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갈림길이 나오나 곧이어 다시 만난다

희한하게 생긴 바위...상상의 나래를 펴보셔요

오름길에서 뒤돌아 보니 계명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능선에 올라선 다음에 좌측으로 향한다

290.5m봉(12:00)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송전탑이 보이고 그너머로 잠시후에 오를 후곡산(292.2m)이 보인다

NO15/NO104 송전탑(12:02)

안부(12:03)

안부를 지나서 능선으로 오르는데 갈림길이 나오고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완만한 오르막길로 올라서니 지형도상에는 292.5m봉이라고만 표기된 후곡산 정상에 오른다

후곡산(後谷山:292.5m:12:10~20)

충주시 연수동과 용탄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4등 삼각점과 운동기구 쉼터 의자가 있다.

예전에는 두루봉이라고도 불렀으며, 충주시내와 가까워 계명산과 연계산행을 하기도 하는

산으로 충주 북부지역 주민들에게는 남산만큼이나 사랑받는 산이라고 한다.

산 아래에 있는 두진아파트의 뒷쪽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 뒷골목산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를 하다보니 후곡산(後谷山)이라 한다

후곡산 정상에 있는 산패

이곳에서 오늘 산행을 시작한 뒤로 처음이로 이곳에서 물 한모금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다.

아침에는 엄청나게 추웠는데 오후가 되면서 날씨는 평상 기온으로 되돌아 온 느낌이다

후곡산 정상 삼각점(△충주421/1999재설)

후곡산 정상에서 바라본 충주시 용탄동의 모습

용탄동(龍灘洞)은 본래 충주군 북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동(臼洞),

용동(龍洞), 사라리(沙羅里), 기탄리(岐灘里) 일부를 병합하여 용동과 기탄의 이름을 따서 용탄리라

해서 읍내면(충주시)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다시 길을 나선다

전망좋은 곳(12:22)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지그재그로 내려가니 이정표가 2개나 있는 막은대미재에 도착한다.

 안부(12:25)

충주시 연수동 금곡마을에서 용탄동 충주산업단지 쪽으로 넘어가는 안부이다.

충주산업단지는 남한강변에 위치한 지역으로 충주비료공장이 위치하여 우리나라 공업화의 주춧돌이

되었으며 현재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많은 공장이 운영되고 있으며 제2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계명산 남쪽 산줄기에는 물맛이 차기로 유명한 약수터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정표에도 약수터의 표시들이 간간히 보인다.

 

막은대미재 중턱 엄씨종중답(嚴氏宗中沓)이 있고, 그 바로 옆에 박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은

장마 때나 가물 때나 수량이 일정하며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얼지도 않음. 이상하게도 이 물을

마시고 간 사람은 재수가 없다는 소문이 나서 아무리 목이 말라도 절대 안마신다는 물이라고 한다

안부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쉼터(12:28)

쉼터 옆에는 칡넝쿨이 무성한 참호가 보이고...

안내판도 보인다

쉼터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풍경길이란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한다

막은대미재 갈림길(12:32)

이곳에서 독도에 주의해야 할 지점이다...막은대미재가 아닌 직진길로 맥길을 이어간다

운동시설(12:32)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막은대미재(12:35)

충주시 연수동과 용탄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연수동 금곡마을과 용탄동 학골 마을을 잇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충주에서 강원도를 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조선시대에 죄인들이

이 고개만 넘으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마즈막재와 같은 스토리다 

우측으로는 서래실로 이어지는데 아마도 충주지역의 둘레길인 모양이다

서래실은 절골 동북쪽에 있는 서래실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막은대미재에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위에 막은대미재 유래판이 서 있다

나무 계단이 나오고...직진으로 올라간다

무명봉을 지나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을 다시 만난다

다시 오르막길에 좌측의 사면길이 나오고...직진으로 올라간다

231.5m봉(12:42)

좌측으로 내려간다

안부(12:43)

나무 계단옆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쉼터 의자가 보이고...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244.9m봉(12:47)

庶子(?) 취급을 받고있는 백두사랑 산패?

244.9m봉 내리막길 등로 가운데는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있다

묘지 아래로 내려간다

마루금은 제도권 등로를 벗어나 지맥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능선에서 약간 우측으로 내려간다

등로는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묘지를 옮긴듯한 공터를 지나...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195m봉(12:54)

멋진 바위를 지나고...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등로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인도어 골프장이 보인다

능선에서 사면길로 내려서니...

충주금릉배수지가 보인다

충주금릉배수지(13:00)

금릉배수지는 배수장인지 태양광단지인지 모를 정도로 태양광 패널로 덮혀있다

배수장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건너에 보이는 능선이 마루금이다

배수지 입구 도로 우측으로는 도로명 주소가 국원대로가 지나가고 있다

금릉고개(13:04)

충주시 금릉동에서 목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위에는 금릉배수지가 있고,

목행동쪽에는 충주공원묘지가 있으며, 목행동을 지나 동량, 산척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차량들의 통행이 아주 많은 편이다.

 

차량의 흐름을 파악하고 도로를 무단횡단한 다음에 직진으로 올라가야 마루금인데

급경사에다 잡목이 무성하여 올라갈 틈이 보이지 않아서 충주시내쪽으로 향한다

도로 건너편에는 금능가든 횟집이 보이고...

조금전에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본다

건너편에는 중원랜드 골프연습장이 보이고...

충주시내쪽으로 가는데 자꾸만 마루금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서니 갑자기 앞이 캄캄하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샛길로 빠져 나간다

뒤돌아 보니 골프장 사이로 계명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무대포로 밀어 부친다

좌측 아랫쪽으로는 충주시 금릉동이 보인다

금릉동(金陵洞)은 본래 충주군 북변면(北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제(金堤),

호암(虎岩)과 칠금동(漆琴洞), 연원동(連原洞), 능암동(陵岩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제와 능암의

이름을 따서 금릉동이라 해서 충주시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개고생을 하면서 잡풀지대를 벗어난다

한참을 돌아서 마루금에 복귀하여 좌측으로 내려간다

대전으 보만식계 시그널을 만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반갑습니다

한참을  내려오니...

농가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의 안부가 보인다

안부(13:30)

안부에서 올라서니 사과밭이 나온다

사과밭 너머로 계명산이 보인다

무명봉(13:34)

사과밭 맨 윗쪽의 무명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등로가 전혀없고

직진의 내리막길에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등로가 전혀 안보이는 좌측의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택지 조성지역이 나오고 2차선 도로가 나온다

작살고개(13:43)

 

충주시 금능동에서 목행동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도로명 주소는 팽고리산길로 광명산 동편

도로에 있는 고개라고 하며 돌이 많이 깔였었다고 한다

고개 우측으로는 중고자동차 매매상들이 많이 보이고 금릉동쪽에는 충주여성문화회관이 있다.

고개를 가로질러...

자동차매매센터 마당으로 들어선다...노란 승합차 뒷쪽이 마루금이다.

도로 건너편에는 충주여성문화회관이 있다...아직껏 남성문화회관이란 걸 본 적이 없다

세상이 자꾸만 여인들 천국으로만 흘러가고 남자들은 돈버는 기계로 전락하는 느낌이다

밭을 지나 지저분한 등로로 올라가려는데...  

좌측으로 칼국수집 간판이 보이기에 여태껏 점심을 먹지 않았던 탓에 갑자기 배가 고파온다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저 집으로 가려고 도로로 나온다 

오일뱅크 덕산 주유소를 지나고...

파라다이스 간판을 끼고 우측으로 들어선다 

체리블러썸 식당(13:58~14:40)

메밀칼국수를 시켰는데 서빙하는 여인이 어디 산을 갔다오느냐, 왜 늦은시간에 아직도

점심을 먹지 않았느냐 하면서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안쓰러워 보였던지 양을 엄청나게 많이 준다.

푸짐하게 그리고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핸드폰 베터리가 다되어 충전을 한 다음에 길을 나선다

식당 뒷쪽 능선으로 올라간다

개쉬키도 보이고 닭장도 보이는 능선을 치고 올라간다

마루금에 복귀한 다음 좌측 능선으로 향한다

안부를 지나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광명산(光明山:148.6m:14:51)

충주시 금릉동에 있는 산으로 능암 동편으로 솟은 산으로 또다른 지명으로는

팽구리산이라고도 부르며 안동권씨의 종산(宗山)이라고 하는데 맥꾼들 이외는

찾지않는 산인듯 하다

광명산 정상 삼각점(△306재설/76.9건설부)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리막길로 향한다

조금을 내려오니 도로공사로 인한 절개지가 나온다

절개지에서 바라본 충주시내...우측으로 내려간다

 

충주는 백제시대 낭자곡성(娘子谷城)·낭자성(娘子城)·미을성(未乙省)으로 불렸고,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할 때 고구려의 땅이 되어

국원성(國原城)이라 이름하고 약 70년간 고구려 남진 정책의 중요한 전진 기지가 되었으니

국보 제205호인 충주 고구려비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국원이란 근원이 되는 땅, 나라의

근본이 되는 땅이라 풀이할 수 있다.

551년(신라 진흥왕 12) 신라는 한강 상류 유역을 차지하여 553년 신주를 설치하고 557년(진흥왕 18)

국원소경이 되었고, 558년 귀척의 자제와 6부의 호민을 국원에 이주시켜 부도(副都)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각 지방의 주·군·현의 이름을 바꿀 때 국원소경을 중원경(中原京)으로

개칭하였다. 중원이란 나라의 중심지 또는 중앙 지대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고려 태조는 민족을 재통일하고 940년(태조 23) 주·부·군·현의 이름을 바꿀 때 중원경을 충주로 바꾸어

현재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중원(中原)·중주(中州) 등의 명칭이 쓰였으며, 별호로

대원(大原)과 예성(蘂城)이 있다. 충주는 중심주 또는 중주로 고려 초에 있어 국토의 중앙임을

나타냈으며, 충성스러운 고을이란 의미도 담겨 있다.

들판 가운데로 충북선 철길이 지나가고 있다

휀스를 끼고 우측으로 내려가는데 들판 너머로 가야할 대문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절개지 아래의 도로로 내려간다

접속구간 도로공사중인 충주에서 제천을 잇는 82번 국도 충원대로로 내려선다

충원대로(14:55)

차량의 흐름을 확인하고 중앙분리대를 넘어서 무단횡단을 한다

무단횡단하여 조금전에 내려온 능선을 뒤돌아 본다

흙무더기 너머로 맥길을 이어가야 하는데 충북선 철길이 가로막고 있다

도로를 따라서 좌측으로 향한다

조금전에 내려온 절개지의 모습

(주)한솔조경을 지나고...

길건너에는 파라다이스 웨딩홀도 보인다

GS칼텍스 주유소를 지난다

길건너에는 충주세무서가 있다

충주세무서 버스 정류장(15:03)

도로 건너에는 세무사 사무실이 많이 보인다

오일뱅크 주유소(15:04)

맞은편에는 타이어뱅크라는 곳이 보이는데 저 뒷쪽이 충주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다

주유소를 끼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농로를 따라서 간다

충북선 철길(15:06)

충북선 철길을 지나온 다음에 뒤돌아보니 계명산이 보이고 충주시내 어디서든 계명산이 다 보이는 셈이다

충주시 칠금동 들녘의 모습

논 가운데를 통과하는 시멘트 농로를 따라서 간다

칠금동(漆琴洞)은 본래 충주군 북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대리(琴臺里),

신촌리(新村里), 칠지동(漆枝洞), 능암동(陵岩洞), 봉계동(鳳溪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칠지와 금대의

이름을 따서 칠금리라 해서 읍내면(충주시)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우측으로 보이는 빨간집이 있는 곳이 트랙상의 마루금인데 충북선 철도로 인해서 한참을 우회한다

죽을만큼 사랑했던 사람과

모른척 지나가게 되는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했던 가까운 친구가

전화한통 하지 않을만큼 멀어지는 날이 오고,

 

또 한때는 죽이고 싶을만큼 미웠던 사람과

웃으면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닌것을...

 

변해버린 사람을

탓하지 않고...

떠나버린 사람을

붙잡지 말고...

칠금동 옻갓(漆枝)마을이 보이고 시멘트 농로를 버리고 논을 가로질러 비닐하우스쪽으로 향한다.

옻갓(漆枝)은 칠금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 근처에 옻나무가 무성하였다 한다

비닐하우스 사이를 빠져나와 충북선 철길로 인해 짤린 마루금을 한참을 돌아 복귀한다

도로에 들어서니 신명중기 간판이 보이고 좌측으로 향한다

삼거리가 나오고 (주)태원이란 간판이 있는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요즘 애기들은 IT에 익숙하여 저런 감정을 느낄수가 있을까?

우리분식이란 간판을 바라보면서 직진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칠지마을 회관(15:18)

칠지다기능 마을회관이 지나니 도로가 나오고... 

우측으로 충주세계무술박물관이 보인다...도로를 가로질러 골목안으로 향한다

골목안으로 100m 정도 걷다가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GROUND BEAN이 보이고

그 너머로 충주세계무술공원과 달천(계명)지맥의 마지막 산인 대문산이 보인다

신호를 기다렸다가 파란불이 된 다음에 도로를 건너 충주세계무술공원안으로 들어선다

도로를 건너서 뒤돌아 본 모습

충주세계무술공원(15:25)

1989년 충주댐 준공시 한강 주변의 관광지 조성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관광지로 계획하게

된 세계무술공원은 남한강로 24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부지 면적은 617,000m2이다.

 

충주시는 국가무형 문화재 제76호로 등록된 전통무술 택견의 본고장으로서 세계의 무술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충주세계무술축제를 1998년부터 개최되었다

충주세계무술공원을 가로질러...

대문산을 바라보며 충주세계무술공원 후문쪽으로 향한다

충주세계무술공원 후문(15:28)

후문 뒷쪽의 차량이 서있는 곳이 지맥길이나 등로가 보이지 않아 우측으로 향한다

우측으로 향하니...

충주월남참전기념탑이 보인다

참전용사비 옆쪽으로 가니 대문산으로 오르는 등로가 보인다

대문산으로 오르는 등로 우측 아랫쪽으로는 충주호에서 내려오는 남한강이 보인다

잠시후에 마루금에 복귀하여 대문산 정상으로 향한다

대문산(大門山:106.9m:15:35)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동천 권태응의 감자꽃이라는 노래비가 있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 천지개벽할 때에 달천강의 상류인 보은 속리산으로부터 작은 산덩어리가 떠내려 오는데,

그 위에 개가 타고 내려와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개가 충주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해서 견문산(犬門山)이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렇듯 견문산이라고 하던 것이 어느새 점 하나가 빠져 대문산(大門山)이라고 쓰여

왔는데, 견문산으로 환원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양에서 충주를 찾아들 때 이 산이 대문의 역할을 했으므로 대문산이라 지은

것이므로 그대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어서 현재 대문산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주변의 경치가 뛰어나 예전부터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며 남한강 쪽을 바라보는 충주 탄금대(彈琴臺)

국민관광지가 있고 대가야 우륵(于勒)이 이 곳 경치에 취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이 북상해오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기도

한 곳으로 충주문화원, 대흥사가 있으며 한강 8경의 한곳으로 지정되어 있다

대문산 주변으로는 탄금대 공원이 조성되어 각종 시설물들이 많이 보이고 사람들도 많다.

탄금대가 위치한 대문산은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합류점에 있는 고립 구릉이다.

이렇게 두물머리가 만나는 자리는 땅이 갈라진 구조선이 교차되는 지대로서, 넓은 평야나 분지가

발달하기도 하나 오히려 고립된 구릉이나 낮은 산지로 남는 경우도 있다. 암석이 풍화되는 과정에서

일단 암벽이나 급사면으로 남게 되면 오랫동안 견디는 습성이 있다.

특히, 하천을 끼고 있는 곳에서는 풍화된 물질이 빨리 제거되므로 토양이 쉽게 자리잡지 못하여 풍화의

매개체인 수분 공급이 어렵게 된다. 비가 내려도 지하로 스며들지 못하고 곧바로 배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좀 더 척박하고 양지바른 환경에서 잘 자라는 소나무림이 우거질 수 있다.

탄금대공원에는 키가 크고 오래된 노송들이 산책로를 따라 많이 자라고 있어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그리고 소나무숲 사이로 간간이 참나무를 비롯한 낙엽수들이 함께 자라고 있는데, 이들은 비록 인위적으로

식재되었을지라도 소나무 키에 못지않게 잘 자라고 있다. 때로는 덩굴이 노송을 휘감아 돌고 있기까지 하다.

이는 충주호와 조정지댐의 영향으로 인해 안개가 많아지고, 소나무숲이 안정적으로 가꾸어져 숲 내부의

상대습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됨으로써 낙엽수, 덩굴식물을 비롯하여 이끼류 등 다양한 종의 식물이 살게 된 것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마루금에서 한참 떨어진 열두대를 가보기로 한다.

열두대 가는 길

 조각공원이 시작되는데 여인의 나신상(裸身像)이 눈길을 끈다.

열두대 가는 길 아랫쪽의 남한강 가운데는 용섬이라는 곳이 보인다

용섬은 충주시의 칠금동을 흐르는 남한강과 달천의 합류점에 있는 하중도로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합류점은 유속이 감소되는 구간으로, 하천 공급 물질들이 퇴적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하류에 충주 조정지댐이 생긴 이후 습지 성격을 띤 하중도가 형성되어 있으며 장방형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상부는 포플러 등을 비롯한 여러 초본류들이 서식한다.

 

이는 하중도가 안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최근 충주댐에 의해 토사 공급이 줄어들고 충주 조정지댐 건설로

탄금호가 만들어지면서 수위 변동이나 물질 공급이 약해졌기 때문으로 용섬을 기준으로 남한강 양쪽

기슭의 암벽과 구릉이 심한 비탈면을 이루며 마주 보고 있다.

남쪽은 충주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 암벽이, 북쪽은 금가면 일대에 펼쳐진 화강암 구릉대가 발달하였다.

탄금대기 비(彈琴臺記 碑)

탄금대를 기록한 탄금대기(彈琴臺記)의 내용

이곳에는 탄금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우륵의 고향이 성열현(省熱縣)이라고 나온다.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인 우륵의 출신지를 두고 설이 분분한데 충북 제천, 경북 고령, 대구 불로동,

경남 합천, 의령, 거창 등이 모두 제각각 우륵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며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데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가 삼국사기에 우륵 고향으로 기록된 성열현(省熱縣)이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우륵이 이 지역 출신이라는 설이 힘을 얻어왔다.

★참고로 범여의 고향이 경남 의령군 부림면(신반)이다

탄금정(彈琴亭:15:38)

열두대 내려가기 직전에 탄금정이란 팔각정이 있다.

 

탄금대는 옛날부터 유명한 지명으로 지리지와 고지도 등 각종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탄금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다. 푸른 절벽은 낭떠러지로 높이가 20여 길이요, 절벽 위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후세 사람이 이곳을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는 “충주 서쪽으로 8리에 위치하며, 강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라고 하여 가야금을 타며 쉬던 곳이란 의미로 쓰였다.

이밖에도 《해동지도(海東地圖)》, 《구한말지형도》, 《조선지형도》 등 다수의 고지도에 탄금대 지명이 나타난다.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嘉悉王) 때의 사람으로 490년경 대가야의 직할 현인 성열현에서 태어났다.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은 현재 어느 곳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치적 · 문화적으로 발달된

지역이었던 곳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고, 우륵이 12곡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가야금은 중국의 악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가야국의 혼이 담긴 새로운 악기로 만든 것이다.

가야금은 우리의 고유한 악기다. 본래 대가야연맹을 상징하며 가야인의 천문의식을 담고 있다.

가야금은 위가 둥글고 아래가 평평한데 이것은 천원지방의 천문관을 나타내며, 12개의 줄은 1년 12달을 상징한다.

가야금은 가야국이 예악(禮樂)을 중시한 문화국가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악으로서 백성을 통치하고자

했던 가야의 높은 문화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에서 만들어진 가야금은 고국을 떠나 충주에서

탄금대라는 장소와 결합하여 장소적 의미를 취하게 된다. 가야국보다는 오히려 충주가 가야금의 고을이 된 것이다.

탄금대는 임진왜란의 참혹한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도순변사였던 신립(申砬)은 8,0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에 맞서 탄금대에서 격전을 치렀다.

그는 배수진을 치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결국 패하고 말았다.

신립은 이곳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투신하여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탄금정에서 열두대로 내려가는 데크목 계단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영 찜찜하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다시 대문산 정상으로 향한다

열두대의 지명에 관한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며 바위의 층계가 12개이기 때문에 열두대라 하기도 하고,
절벽 아래 물이 12번 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교전 중 달구어진 화살을
식히느라 12번을 오르내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열두대 아래는 깊은 소가 있는데
이를 양진명소라 하는데 이곳에 뱃길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선주, 선박 상인들은 양진명소에서 안전과 번영을 빌었다고 한다.
 
탄금대 주변에는 지금도 가야금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칠곡리(칠금동), 금뇌리(금능리), 청금리(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모두 가야금과 관련된 것이다

다시 대문산 정상으로 되돌아와서 합수점으로 향하는데 정상 옆에는 팔천고혼 위령탑이 있다

팔천고혼위령탑(八千孤魂慰靈塔:15:42)

팔천고혼위령탑은 1592년 음력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申砬)이 김여물 등 휘하 장졸 8천명과

함께 충주 탄금대 일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倭敵)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전적지임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이다.

탑 상단에 형상화 된 혼불은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모습으로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을 의미하고,

아래 부분의 신립 장군과 4인의 군상(群像)은 죽음으로써 조국을 지키는 불굴의 충정을 나타내고,

또 바위와 밑바닥 부분의 원반 모양은 탄금대를 싸고도는 남한강과 달천강의 불결 모양을 살려

구성한 것이며, 탑 뒷부분의 부조는 당시의 탄금대 전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다.

팔천고혼위령탑 안내문

팔천고혼 위령탑을 지나니  충혼탑이 나온다.

충혼탑(15:43)

광복이후에 전사한  충주, 중원지역의 장병과 경찰관, 군무원, 군노무자 2,838위의

넋을 추모하고자 1955년 11월에 세운 것으로 현존하는 전국 충혼탑 중 가장 오래된

충혼탑으로 忠魂塔의 휘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충혼탑 안내판

중원문화원 방향으로 향한다

탄금대 조감도

탄금대(국가명승 제42호)는 널찍한 주차공간에다 야외음악당, 산책로, 황토광장, 궁도장, 감자꽃 노래비,

탄금대 사연 노래비 등 역사, 문화, 레포트 등의 시설로 충주 시민들의 휴식공원이 되어 있었다.
탄금대에 모신 분이 악성 우륵을 비롯해 임진왜란의 전적지라 신립장군과 8,000 고혼을 모신 탑 등이 있다. 
우륵당을 지나 야외음악당을 굽어보며 직진한다.

탄금대(彈琴臺) 노래비

탄금대(彈琴臺)는 552년(진흥왕 13) 가야국의 악사 우륵(于勒)이 신라에 귀화하여 대문산 산정에서

가야금[琴]을 연주[彈]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탄금대는 임진왜란(1592년) 때 신립 장군이

장병 8,000명과 함께 배수진을 치고 일본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분전역투하다가 참패하여 한강 물결에 투신 자결한 전적지로도 유명하다. 하안에는 토성취락(土城聚落)이

발달해 있다.

 

탄금대는 달천과 남한강의 합수머리에 위치하여 경관이 아름다우며 특히 열두대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은 절정을 이루며, 탄금정 인근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팔천고혼탑과 충혼탑 등

현충시설을 갖추고 있디.

탄금대 노래비 아래에는 주현미 탄금대 사연이란 노래 가사가 있다.

탄금정 굽이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장군 배수진이 여기인가요

열두대 굽이치는 강물도 목메는데

그 님은 어딜 가고 물새만이 슬피우나.

 

송림이 우거져서 산새도 우는가요

가야금이 울었다고 탄금인가요

우륵이 풍류읊던 대문산 가는 허리

노을진 남한강에 님 부르는 탄금 아가씨

중원문화원 광장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우측으로 콘서트홀같은 야외 음악당이 보이고

주차장 좌측 한켠에는 임란충신 백기장군조웅기적비(白旗將軍趙熊奇績碑)가 서 있다.

임란충신 백기장군조웅기적비(白旗將軍趙熊奇績碑)

 

백기장군조웅은 임진왜란 때 왜놈의 한양까지의 북상(北上)을 저지할 마지막 희망이었던 신립장군이

충주 달천전투에서 대패하자, 국왕 선조는 할 수 없이 신의주로 몽진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신립장군의

승리를 믿던 많은 백성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충주의 조웅(趙熊)장군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5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충주의

앙성면 태자산 아래에 주둔하여 서울로 향하여 북상하는 왜적의 후속부대를 막아 물리쳤다.
당시 팔도 의병 중 가장 용맹을 떨치던 유명한 장군이 호서(湖西)의 백기장군 조웅(白旗將軍, 趙熊)과

영남(嶺南)의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祐)였다.


조웅 장군은 언제나 백기(白旗)를 날리며 싸워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호를 백기당(白旗堂)이라 하였으나,

어느 날 안개가 짙게 깔리어 어두운 무렵 왜놈들과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끝내 적의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사로잡히게 되었다...생포 되어서도 왜적 꾸짖기를 그치지 않다가 끝내는 사지(四肢)를

찢기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전후에 조정에서는 그의 충성과 절의를 기리어 병조참판에 추증하였다.

중원문화원(15:50)

중원문화원 뒷쪽으로 향한다

화장실이 나오고 뒷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공터(15:47)

안부를 지나고...

선답자들의 흔적이 보인다

사면길을 버리고 무명봉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5:50)

좌측 아래로 내려간다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무명봉(15:53)

달천(계명)지맥 마지막 봉우리이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 다음에...

탄금장례장례식장 마당으로 내려선다

탄금장례식장(15:58)

탄금장례식장 끄트머리에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달천(좌)과 남한강(우)가 만나는 탄금교(맨 좌측 구 다리)와 탄금대교...저 멀리는 우륵대교가 보인다.

 이곳에는 교량이 3개나 있는데 탄금대교, 우륵대교, 탄금교 등 전부 우륵과 연관이 있는 다리이다

우리나라 3대 악성은 고구려의 왕산악, 가야(신라)의 우륵, 조선의 박연을 말하는데, 난계 박연은

고향이 충북 영동이지만, 우륵의 고향은 사실상 확실치가 않다.

 

우륵을 자기 고향 출신이라고 우기는 곳은 충북 제천(청풍), 경북 고령, 대구 불로동, 경남 합천,

의령, 거창 등이 모두 제각각 우륵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며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있는 형국이다

내 고향인 의령군 신반이 고향이라는 설도 자료에 많이 등장한다

 

우륵은 신라의 음악가로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아 정확한 생존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가야국 가실왕과 신라 진흥왕 때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가실왕의 뜻에 따라 12현금(絃琴, 가야금)을

만들고, 가야금 연주곡 12곡을 지었다.

 

우륵은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성열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근처라는 설과(범여의 고향) 신반해국(散半奚國)이라는 설이 엇갈린다. 결국 그가 어떤 가야에서

태어났는지, 그에게 12현금을 만들도록 한 가실왕이 몇 대 임금인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가실왕이

우륵에게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며 12곡의

악곡을 지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만 전한다.

이는 가실왕이 음악을 통해 가야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내 고향에는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가 있는데 해마다 우륵 탄신지인 부림면(성열현)에서 우륵탄신기념

전국가야금경연대회가 우륵 탄신지인 부림면(성열현)에서 성대히 개최되고 있다

강가에 내려서서 바라본 우륵대교의 모습

탄금교(좌)와 탄금대교(우) 아래의 달천이 남한강이 만나 우륵대교로 흐르는 합수점에 도착한다.

합수점 너머로는 2017년 11월4일 부용(청미)지맥 마지막 구간을 걸었던 능선이 보인다.

달천(계명)지맥 합수점(16:05)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 도착하면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단양에서 흘러내리는 남한강(南漢江)과 충북의 젖줄인 달천(達川:124.7km:일명 달래강)이 합류하는 곳이다.

 

달천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괴산 칠성댐을 지나는 달천 서편의 강으로 탄금대 서편에서 남한강과

합쳐지며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과 같이 왔던 명장 한사람이 이 달천을 건너다가 목이말라 물을

마시며 명나라에서 유명한 수렴약수보다 낫다고 했다해서 맛이 달은 냇물이라는 달-냇물(달강)이라

부른데서 유래 되었다 하며, 이 강에 수달이 많아 달강이라고도 한다.

 

이조시대 한 도승이 이 강변 어느 집을 지나다 집주인의 명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암시하고 면액의

길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으라고해 다리를 놓았으며 그 다리를 위급한 환자가 건너와 덕을 입은 강이라고

하였다하여 덕천(德川)이라고도 불렀다고도 한다

인증샷

합수점에서 스틱을 접고 달천이 보이는 탄금교 윗쪽으로 올라선다.

 

달천(達川)은 일명‘달래강’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남매간의 근친상간(近親相姦)에 고민하다

죽은 남매의 슬픈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옛날 어느 해 여름 젊은 남매가 함께 산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앞서가는 누나의 얇은 모시옷이 성숙한 몸에 착 달라붙은 그 여체의 아르다운 몸매에 동생은

그만 참을 수 없는 성적 충동을 느꼈다.


누나에게 자기가 앞서 가자고 하였으나 동생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누나는 ‘무섭다’고 말을 뿌리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리적인 욕구라도 이런 생각만이라도 큰 죄를 짓는구나 하고 생각하던 남동생은 자기를 탓하며

자기의 거시기를 돌로 쳐서 그만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앞서 가던 누나가 뒤 따라 오지 않는 동생이 이상하여 뒤돌아 가보니 동생이 거시기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비로소 안 누나는 동생을 끌어안고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차라리 달래나 보지 그랬어, 말이나 해 보지 그랬어!”
누나도 이 달래강(達川)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이 고개를 후세 사람들은 ‘달래나 보지 고개’라 하였다.

달천을 한자로 ‘達川’이라 쓰는데 ‘達川’에서 ‘川’이 내 ‘천(川)’ 자이니 , ‘達(달)’에서는 음(音)인

'달'을, ‘川’에서는 훈(訓)인 '내'를 따오니 '달내'가 된다. ‘달내 → 달래’로 소리가 나니 그래서 생긴 전설일 것이다.
이런' 달래나 보지 고개'가 충주, 철원, 부산, 진주에도 달래강, 달래산, 달래고개 등이 민간전설로 전하여 온다 한다.

탄금대교가 지나가는 굴다리를 지나니 탄금장례식장이 나온다

탄금장례식장 버스 정류장(16:20)

탄금장례식장 버스 정류장 버스 시간표

이곳에서 베낭을 정리하면서 버스 시간표를 보는데 장례식장에 왔다가 나가는 택시가 보인다.

얼른 택시를 잡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는데 10분만에 터미널에 도착한다(택시비 4,000원)

충주고속버스 터미널(16:35)

충주고속버스 터미널 버스 시간표...버스 시간표를 확인한다.

내가 타고 가야할 버스는 18시 05분...1시간 30분이나 남아있어 대합실

벤취에서 한참을 멍때리기를 하는데 갑자기 뭔가 허전하다.

핸드폰이 보이지 않아 갑자기 머리속이 하해지는 느낌이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잠깐 빌려 전화를 하는데 이게 뭐여!

내 오른손에 핸드폰과 버스표가 있는게 아닌게...요즘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충주발 → 서울행 버스표

충주를 출발한 버스는 예상시간보다 훨씬 빠른 19시 25분에 서울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