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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次(진행중)

제24구간- 늘재에서 갓바위재까지

by 범여(梵如) 2023. 1. 30.

☞ 산행일자:  2023년 01월 29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에 미세먼지

 산행거리: 도상거리6.6km + 날머리 4.2km / 5시간 30분 소요

☞ 참석인원: 송백산악회 따라가서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늘재-쉼바위?-570m봉-정국기원단-무명봉-안부-750m봉-전망암-무명봉

                    무명봉-안부-870m봉-원적사 갈림길-헬기장-청화산-암봉-시루봉 갈림길

                    무명봉-안부-무명봉-안부-무명봉-무명봉-신선바위-안부-무명봉-안부

                    무명봉-안부-무명봉-안부-858m봉-조망바위-조망터-무명봉-안부

                    갓바위재-임도1-임도2-계곡-사방댐-임도 삼거리-다리-의상(송면)저수지

                    주차장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화북면 / 문경시 농암면 / 충북 괴산군 청천면

 

날씨가 자꾸만 룰도 없고 원칙도 없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娑婆世界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춥디 춥다는 소한, 대한도 다 지나고 음력 설이 지나고나면 서서히 봄으로 향하는

봄이 다가오는 시절이건만 봄 기운은 고사하고 다시 겨울로 되돌아 가는 느낌이다.

 한 겨울에도 이렇게 춥지 않았는데...

 

하기사 요즘에 사는 사람들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피래미 뭣만큼도 없고 나와 생각이

같으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나쁜놈이라는 이분법으로

살다보니 날씨도 인간을 닮아가는지 제 정신이 아니다.

구정이 지나면서 봄이오나 생각했는데, 추웠다하면 체감온도가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지니 추위에 취약하는 나로서는  이런 날씨에 산행하기엔 엄청난 고역이다.

이번주에는 날씨가 따뜻한 남도지방으로 가서 여수지맥 한 구간을

끝내고 오려고 했는데 송백산악회의 김대장님한테서 문자가 온다

 

예전에 이번에 가는 산행 구간을 할때 빈 자리 하나가 있으면 부탁한다고 해놓고는

난 깜빡 잊고 있었는데 김대장님한테서 연락이 온 것이다...자리가 있으니 오시라고...

그렇다고 추우니 안 가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더군더나 산악회에서는 늘재에서 고모치까지 가지만

난 갓바위재까지 가면 되니까, 부담도 없다...나로서는 나홀로 산행을 할 때에

비해서 경비도 많이 줄이고 오고가는 교통편이 편하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고의

一石二鳥인 셈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집을 나서 버스 탑승장소인 잠실역에서 버스를 타고, 천호, 강동역,

상일동을 거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접어드는데 대부분의 산악회 버스들은

차가 고속도로를 들어서면 차내가 조용해지면서 산꾼들이 잠을 청하는 편인데

이 산악회는 가족들이 여행하는 것처럼 계속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떠들어 대는데

1년중에 90% 이상을 나홀로 산행을 하는 독립군(?)으로서는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그래도 어쩌랴...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안내산악회라 그런지 잠시후에 산악회 송회장님이 마이크로

산악회의 일정을 소개하고 산행 예약을 받는데 나야 특별히 다시 올 일이 없을 것

같아 신청하지 않았고, 버스가 滿車 수준이라 그런지 회장님의 얼굴엔 和色이 돈다

평택~제천간 고속도로 금왕휴게소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괴산I.C를

빠져나와 늘재 아래의 청화산 농장 마당에 도착하여 산행을 준비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청화산 휴게소(09:20)

산악회 버스는 늘재 정상에 버스를 정차하기가 애매한 지 늘재 아래에 있는 

청화산 휴게소에 버스를 세우고 대간꾼들은 내리자마자 늘재쪽으로 사라진다.

이 산악회의 대간꾼들도 조급증(?)이 심한지 금방 시야에 사라지지만 나야

땜방으로 왔고 저 분들보다 산행거리가 3km이상 짧기에 서두르지도 않고

주변에 볼 걸 다봐야 하기에 급하게 갈 일도 없다.

 

휴게소 마당에서 좌측으로 460m만 가면 도창의 대장 운강 이강년의 묘소가

있다는 표시석이 있는데 거기까지 가기는 무리일 듯 싶어서 대간꾼들이

다들 사라진 다음에 늘재로 향한다

 

* 운강(雲崗) 이강년(李康䄵:1858~1908)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이자 을미사변 이후 문경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崗) 으로 무과에 급제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을미사변 제천의 유인석을 찾아가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 활약했으며,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더 큰 규모의 의병부대를 일으켜 1908년 7월까지 500명을 이끌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소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여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으나 전투 중 부상으로 인해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9월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에 처형되었는데,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부하인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과천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 아래 장례하였고, 나중에 제천으로 옮기고 다시 상주군 화북면 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였다...<운강문집>, <운강선생창의일록>의 저서를 남겼다.

청화산 휴게소에서 맨 꼴찌로 출발하여 200여m 올라서니 늘재가 나온다

늘재(371m:09:30)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용유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32번 국도가 지난다.

늘재란 고개 위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붙어진 지명으로 또 다른 표현은 양쪽에서

올라오는 고개가 완만하여 ‘늘어진 고개’라 하여 늘티,늘고개,늘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은 고개이기는 하지만 고개를 중심으로 민초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지역을 나누고, 물줄기가

갈라지는 고개이기에 어느 높은 고개 못지않고크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가올 땐 이 고개에서 북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한강으로 흘러가고 남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분수령이다 

 

늘재에 내려서면서 남.북으로 행정구역이 동시에 바뀐다.

북쪽인 충북쪽은 보은군에서 괴산군으로 바뀌고 남쪽은 백두대간 중에 67km를 지나는 상주지역이 끝나고

백두대간이 거쳐가는 33개 시.군중에서 대간길이 장장 116km가 걸쳐있는 문경지역으로 접어드는 시작점이

이곳 늘재이다

늘재에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계를 구분짓는 분수령 표지판과, 이정표와

늘재 표지판, 상주시에서 설치한 ‘白頭大幹’ 돌기둥  뒷면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백남 김 시빈 선생의 속리산이란 詩과 적혀있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망가진 성황당이 안쓰럽게만 보인다

상주시에서 설치한 ‘白頭大幹’ 돌기둥

백두대간 큰 산맥이 동으로 뻗어와서, 금강산 먼저서고 속리산 뒤에섰네

미륵관음 양봉높아 자비세계 너그럽고, 충청, 경상도의 경계한 산 장엄하도나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백남 김 시빈 선생의 속리산이란 詩이다.

 

* 백남(白南) 김시빈(金始鑌:1684~1729)은 조선후기 필선, 장령, 울산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휴백(休伯), 호는 백남(白南). 영천(榮川)

  출신인 아버지는 통덕랑 김정휘(金鼎輝)이며, 어머니는 이상언(李尙彦)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필선(弼善)을

  거쳐 1724년(영조 즉위년) 장령(掌令)이 되어 영조의 탕평책을 두둔하다 오히려 화근이

  되어 명천군수로 좌천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영남지방으로 확대되자 채성윤(蔡成胤)의 천거로 영남의

  요충을 방비하는 데 적합한 인물로 뽑혀 울산부사가 되었으며, 그곳에 부임하여 폐습을 과감히

  개선하는 등 선정을 베풀다가 임지에서 生을 마감하였다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은 늘재에 당(堂)이 있으니 백두대간 성황당이다.

이 당은 원래 탑의 신앙과 산신신앙을 혼성한 서낭신앙에서 유래하여

신라, 고구려 때는 횡액 질병을 막고 길손의 무사여행을 기원하는 소박한

민간 토속이었고 조선에 이르러 동제(洞祭)로 발전하여 오다가 잦은 국난을

당하면서 국태민안을 위해 성황신을 백신(白神)의 장으로 모시고 관민이 신봉하는

전통 신앙으로 승화되어 당(堂)도 지지(地誌)에 등재되어 왔다.

 

이러한 유서를 지닌 신당이므로 그 위치가 환경유적과 사실(史實)이 찬연하다

이를 개관하면 이 늘재는 낙한(落漢) 양대강의 분수령이다.

강의 원류를 따라 개통된 도로는 동남으로 영호남 서북으로 충청도와 서울로

통하는 장정(長程)의 깃점이며 고대의 라제(羅濟)의 국경으로 각축지대라

견훤산성이 축성되었고 근세에는 정기룡(鄭起龍)장군의 임란전첩지가 용화동에

있으며 세조대왕께서 백관과 함께 노니신 문장대와 용화온천을 비롯하여

고승(高僧)과 명장(名將)이 수련한 유적이 있다

 

특히 한말 경술국치후에 의사(義士)들이 창의하고 만세운동이 전개될 때 통로가 되고

쉼터이며 도창의 대장 이강년(李康年) 선생의 묘소가 지척에 있다.

그리고 때맞추어 늘티에 전상석(全相錫) 처사가 우국일념으로 이 성황당을 창건하여

동민과 함께 지성기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백여년이 지난 이제 그의 증손 충환(充渙)이

유지를 받들고 이상배(李相培) 국회의원과 김근수(金瑾洙) 상주시장이 산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당(堂)을 중창하여 선인들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수범하고 후진의 교육장이 되게

하여 백두대간의 영기(靈氣)를 실감나게 하였다. 이에 그간의 유래의 유래와 성황당 중창의

경위를 약기하여 비를 세워 영원히 기념하는 바이다

쓰러져가는 성황당 내부의 모습

같이온 대간꾼들은 성황당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모양인지

아무도 들리지 않고 청화산을 향하여 사라져 버렸다.

성황당 앞 풀섶에 묻혀있는 유래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백두대간의 정기받은 영역 늘재에 당(堂)이 있으니 백두대간 성황당이다.

이 당은 원래 탑의 신앙과 산신신앙을 혼성한 서낭신앙에서 유래하여 신라,

고구려 때는 횡액질병을 막고 길손의 무사여행을 기원하는 소박한 민간 토속

이었고, 조선에 이르러 동제(洞祭)로 발전하여 오다가 잦은 국난을 당하면서

국태민안을 위해 성황신을 백신(白神)의 장으로 모시고 관민이 신봉하는

전통신앙으로 승화되어 다(堂)도 지지(地誌)에 등재되어 왔다

산행을 시작하다(09:35)

산악회를 따라오긴 했으나 어차피 아시는 분이라곤 송회장님과 김대장 뿐이다.

산꾼이 산에와서 내 목적만 이루면 됐지...안면을 트고 인연을 맺게되면 그것

또한 썩 좋은 편은 아니다...예전 같으면 오지랍 넓게 인연도 맺었겠지만

이제는 날고 뛰는 산꾼도 아닌 이빨빠진 호랑이 신세가 돼버렸고, 큰 수술이후 이제는

체력도 안되고, 走力도 형편없다보니 어딜가나 눈치나 봐야하는 밉상이 되다보니

차라리 나혼자 다니는게 훨씬 편하다

청화산으로 향하는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느릿느릿 걷는데 이곳을 3번이나

지나간 곳이건만 지형지물에 관한 기억이 그리만치가 않는구나.

전부다 무박으로 지나간 탓이련가...2번은 어둠속에 지나갔고, 한번은 남진을

하여 날머리로 내려갔지만 산이란 곳은 똑같은 곳을 걷더라도 오르막과 내리막은

맛이 전혀 달라서 그런 모양이다 

산악회를 따라오긴 했지만 그 분들과 같이 갈 이유도 없고, 거리도 3km이상을

덜 가도 되기에 부담은 전혀없다...느릿느릿 牛步걸음으로 걸으며 주위를

살피면서 가는데 다행히 청화산으로 오르는 길은 눈이 그리많지 않다

지난 구정 다음날 대관령에서 닭목령 가는길을 혼자 걷다가 많은 積雪量으로

인해 개고생을 했었는데, 윗쪽은 몰라도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쉼바위?(09:50)

진혁진님의 지도상에는 쉼바위로 표기되어 있고, 일부 대간산꾼들의 산행기

등장하는 의자바위로 불리는 바위를 지나 약간을 돌아서 계속되는 오르막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늘재를 출발한 지 0.8km...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 오르면서 고도를 높혀가기 시작한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올라서니 산악회 버스를 같이 타고온 산꾼을 만난다.

난 독립군의 체질인가?...1년 산행중에 90% 이상을 혼자 다니다보니

등로에서 山客을 만나는게  왠지 부담스러워 길을 비켜주는 편이다.

앞서 가시라고 길을 비켜주고 일부러 걸음을 멈추면서 천천히 간다

오르막을 오르다가 만난 裸木

570m봉(09:53)

다시 고도를 높히기 시작하는데 예전엔 어둠속에 걸었던 탓인지

기억이 전혀 나지않는 암릉구간의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그나마 다행인게 이곳은 양지라서 그런지 암릉구간의 오르막길에는

눈이 없어서 걷기는 편하지만 오르막길이라서 숨을 헐떡거리면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정국기원단이란 곳이 나온다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정국기원단에는 코팅지 몇개가 걸려 있어서 자세히 본다.

마운틴벨리라는 산객이 정국기원단이 야스쿠니신사를 뜻하다는 정국기원단에

대한 불만섞인 내용인데...가방끈이 짧은 범여로서는 뭐가 뭔지를 모르겠다.

냉정하게 생각하셔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도 한번 생각볼 문제이다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09:58)

이 기원단은 2005년 인근 한농복구회 공동체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烏石의 碑에는 “白衣民族(民族中興) 聖地

不失其祖 三巴水 靖國祈願壇 白頭大幹 中元地”라는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고

백두대간의 중간지점과 삼파수라 적혀 있는데, 삼파수란 “한강, 낙동강, 금강의

세 물줄기가 갈리는 곳이다”라는 의미이다.

정국(靖國)이라는 단어가 일부에서는 일본식(야스쿠니:靖国神社)를 나타내는 단어라 하여

비하하는 글도 보이는데, 정국(靖國)이라는 이름은 중국 노(魯)나라의 학자 좌구명

(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오는 노희공(魯僖公)이 "과인으로써 나라가 안정되었다

(吾以靖國也)"는 기록에서 따 왔다고 한다.

 

정국(國)이란 용어는 “조용하고 편안한 나라”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백두대간 중원지라 한 것은

남한에서 동서남북의 정중간의 뜻이 아닐까

 

또한 백의민족 성지 부실기조 삼파수(白衣民族 聖地 不失基祖 三巴水)라 적혀있다.

부실기조란 백의민족인 우리 조상들의 얼을 잃지 않겠다는 뜻이며

삼파수란 “세갈래의 물줄기 근원지”란 뜻으로 민족 뿌리의 성지란 뜻이란다

정국기원단은 나라를 평안하게 해달라는 기원단과 의병장

이강년 장군의 공덕비를 겸하고 있다.

 

이강년은 조선말기 의병장으로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부사과로서

선전관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을 하고 낙향하였다.

 

1885년 명성왕후 민비가 시해되자 1896년 고향인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 등 부정부패한 관리들을 효수(梟首)하고

제천의 의병장 유인석(柳麟錫)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어 문경새재, 조령 등에서

1907년 한.일 신협약으로 조선군대가 해산을 당하자 단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주 등을 공격하였고 이어서 싸릿재, 유치(柚峙), 죽령 등에서 전과를 올리며

북진을 하여 1908년 가평전투에서 승리한 뒤 적의 기습으로 체포되어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국기원단에서 바라본 속리산은 잔뜩 흐린 날씨 탓인지 멋진 모습은 일찌감치 포기한다

무명봉(10:07)

안부(10:13)

청화산을 향하는 빡센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느릿느릿 걷다가 뒤돌아보니 산꾼 한명이 뒤따라 오는데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걸로 보아서 산악회의 후미대장인듯 하다...서로의 안부를

묻고 닉을 물어보니 대모산이라고 한다...혹시 개포동쪽에 사시냐고

물어보니 일원동에 사신다고 하는데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750m봉(10:22)

안부를 지나서 오르막으로 오르는데...

안전로프 뒷쪽으로 집채보다도 더 큰 암릉이 길을 막는데 힘들게 암릉위로 올라선다.

암릉으로 올라서는데 암릉에서 내려다보니 아침에 버스에서 내린

청화산 휴게소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경미산과 백악산도 보인다

암릉으로 오르는 것이 그리만만하지는 않다.

 

같이온 산꾼들은 야속하게도 산 속으로 사라지고

홀로걷는 독립군의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덧 없는 산길을 지나갈 제, 오르막 내리막이 人生의 苦行이고
빡센길을 힘들게 오르다가 뒤돌아 본 보이지 않는 속리산의 능선은
내 삶의 자취가 강물처럼 흘러갔고, 홀로 걷는 이 길에 정해진 것이
어디 있었던가...컨디션 좋으면 더 가고, 힘들면 중간이라도 내려가면

되는것이 나홀로 걷는 독립군(?)의 특권이 아니던가....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북면 우복동천(牛腹洞天)의 모습

 

상주시 화북면은 흔히 삼산 삼수의 고장이라 부르는데 서쪽 속리산, 동쪽

도장산, 북쪽 청화산이 삼산(三山)이요,속리산 천황봉이 한강 금강 낙동강

분기점인 삼수(三水)이다... 화북면의 장암리 용유리 상오리는 북쪽 청화산에서

남쪽 갈령(葛嶺)에 이르기까지 서쪽으로는 속리산 문장대, 천황봉, 삼형제봉이

활처럼 둘러치고, 청화산, 시루봉, 도장산, 갈령을 잇는 동쪽은 일자(一字) 산마루로

이어져 있는 곳으로 사방(四方)이 험준한 산으로만 둘러쳐져 있다.

 

이곳의 유일한 출구는 쌍용계곡으로 청화산과 도장산을 경계하며 흐르는 병천이다.

이러한 지형을 일러 우복동(牛腹洞)이라 하는데, 우복동에 수려한 산수 어우러진

동천까지 있는 이곳은 우복동천(牛腹洞天)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으로 이곳은 갈령과

늘재를 잇는 49번 도로가 지나고 있다.

전망암(10:29)

전망에서 바라본 가야할 청화산의 모습

정국기원단 밑에서 시작된 위험한 암릉구간을 벗어나서 조금은 편하게 걷는다

무명봉(10:32)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묵묵히 대간길에서 산꾼을 기다리는 변함없는

저 소나무가 존경스럽기만 하는구나...가급적 산에 들어서면 아무런

생각없이 비어있는 머리(空)로 산길을 걷다보면, 마음은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으로 늘 만땅이다

무명봉을 지나면서 등로는 좌측으로 꺽어져서 청화산으로 향한다

무명봉(10:36)

무명봉으로 오르지는 않고 사면길을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지맥길과는 달리 대간길은 예전과는 달리 사면길을 많이 만들어 놔서

가끔 가다가 털도 안뽑고 날로 먹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안부(10:42)

낙엽이 푹신한 오르막길에는 안전로프를 부여잡고 올라서니...

상당히 미끄러운 암릉구간을 치고 올라선다

870m봉(10:57)

좌측으로 꺽어져서 내려가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청화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원적사 갈림길(10:58)

무명봉에서 내려오자마자 우측으로 사면길이 나있는데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에 는 절집인 원적사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이고 팻말까지 걸려있다

청화산 가는길에는 집채만한 암릉구간을 만나는데 예전에는 걸었을 때의

기억에는 전혀 없는듯 하다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서 손이 시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추운 날씨는 아니라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아무 생각없이 무심코 걷다보니 청화산 정상 아래에있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헬기장(11:04)

헬기장을 지나자마자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청화산에 도착한다

청화산에 도착하니 이곳부터는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등로에 눈이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아침에 버스가 섰던 청화산 농원으로 가는 길인가 보다.

이곳으로도 내려가는 산객들이 있는지 시그널 몇장이 걸려있다.

청화산(靑華山:987.7m:11:06)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경북 문경시 농암면,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죽군락과

소나무가 많아 겨울에도 푸르게 보인다고 해서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앞,뒤면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라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고 극찬을 한 곳이다

 

청화산은 원래 북쪽 골짜기의 산아래 청운동 마을과 남쪽 방향의 신화동 마을 동쪽으로 화실이란

마을이 있어 자연스럽게 화산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 중환이 스스로의 호(號)

‘靑華山人’으로 불리면서 청화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으로

불리우는 이중환(1690~1752)은  조선중기 인문지리서의 바이블이라 일컬어지는 택리지의 저자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데 우리나라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추구했으며, 재종손(再從孫)인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 ~ 1763)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인문지리학 연구의 선구를 이루었다.

 

* 이중환(李重煥1691~175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사상가, 철학자로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으로 우리나라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추구했으며,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인문지리학 연구의 선구를 이루었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김천도찰방을 거쳐 병조좌랑을 역임했으며,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하자 남인인 그는 목호룡의 당여로 지목되어 1725년(영조 1) 2~4월에 4차례나 형을 받았다.

  1726년 절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해 12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되었으며, 이후 죽을 때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관직에서 탈락된 후 주자학적 세계관에 의해 움직이는 조선사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현실에 대한 자구책으로 관심을 집중한 분야는 인문지리학이었다.

   당초 자신이 안주할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정치적으로 불운한 처지에 있는 사대부가

   초야에 있거나 또는 조정에 있어도 몸둘 곳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현재 사는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능동적인 노력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또한 지리학에 대한 관심은 역사인식의

   공간적 확대를 추구하던 실학적인 학풍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지리학에 대한 평생의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 택리지(擇里志)로 택리지는 그가 남긴 유일한

  저서로 1751년 62세 때 저술한 자서전과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종래의 풍수학적(風水學的) 지리를 지양하고, '자아의 인식'을 전제로 했으며 실용성을

  추구했으며, 그의 지리학은 오늘날 현대지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으며, 실생활에

  참고가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중환이 탄복을 했다는 청화산 정상

그러나 凡夫인 범여가 보기에는 그저 밋밋한 산에 불과하고 그나마 정상석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봉우리에 불과할 뿐일것 같은데... 仙人과 凡夫의 차이인가?

 

청화산의 경치가 아니더라도 이중환하면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두어가지 있다.

‘大幹’이라는 명칭을 그가 처음 택리지에서 사용했다는 것인데, 물론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은 약 1,000년 전 고려 건국이념(신화 혹은 설화)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지리 개념으로서의 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는 이중환이 처음이라고 하며

그가 조선 중기 대표적인 실학자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풍수사상!

다소 초현실적이며 객관적이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서구 학문에 비해 검증 면에서

한계를 지닌 풍수사상은 미신으로 치부되어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풍수는 환경오염 및 생태계 파괴를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테면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 수 있었던 것이 좋은 예가 된다.

 

평양일대가 배가 떠가는 행주형(行舟形:풍수지리에서, 배가 떠나가는 듯한 지세)이라

우물파기가 금지되어 있었으며, 우물(구멍)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풍수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지금 검증할 방법이 없지만 평양 일대의 지반이 실제 우물을 파면

침하의 우려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검증된 사례도 있는데 그곳이 안동 하회마을이다.

이 지역 역시 행주형(行舟形)이어서 우물을 파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 하회마을은 지반이 뻘과 모래로 이루어져 帶水가 형성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런 땅에서 나오는 물은 식수로도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문·무과를 제외한 잡과(雜科:고려와 조선 시대에 기술관을 

뽑던 과거의  가지)에 해당하는 실용 기술학이었던 풍수학이 오랜 기간 동안의

찬밥대우에서 벗어나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셈이다.

 

특히 풍수학은 최근 백두대간 마루금 타기가 새로운 트랜드로 자리잡으면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고 하는데 원래 풍수사상이 신라 말 선승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水根木幹(백두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개념)

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대간꾼들은 충분히 가슴 뿌듯하게 생각할 만하다...

그러고 보니 대간은 죽었던 학문까지 살려내는 별난 재주도 가지고 있다

인증샷

청화산 정상을 내려서면서 부터는 적설량도 꽤나 많고, 바람이 불어서

겨울 냄새가 나지만 앞서가신 분들이 고맙게도 러셀을 해놔서 걷는데는

큰 불편이 없고,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걸을만 하다

올 겨울에 처음으로 만나는 상고대도 환상적이고 겨울 산행의 진수를 만끽한다.

오늘 송악회를 대간길을 따라 나서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매주 산을 걸은것이 올해로서 13년째이다.

이제 산이란 나에게는 신앙과도 같은 존재로 산을 통해서 인생을 배우고

모든걸 영위하는 셈이다...그러나 늘 미안한게 쥔장을 잘못 만나서 죽도록

고생을 하면서도 싫은 내색한번 내 두다리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어쩌랴...이것도 인연인데, 다음 生에는 편안한 쥔장을 만나

편안한 餘生을 보내려마...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서 내려가니...

로프가 걸려있는 암릉구간을 통과한다...겨울철엔 로프가 없으면 통과가 힘들것 같다.

다시 편안한 능선을 걸어간다...앞서간 산꾼들이 해 논 발길(러셀)로 인해서

난 털도 안뽑고 날로 먹는 기분으로 편안한 산행을 하면서 여유로운 산행을 한다

잠시후에 통과할 잔봉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섭긴 해도 생각보다 그리 춥지는 않다

암봉(11:17)

아무런 생각없이 텅빈 머리로 걷다보니 늘재에서부터 이곳까지 같이

중복돼서 걸어온 상주 십승지의 우복동천과 백두대간 능선이 겹쳐지는

시루봉(도석재) 갈림길이 나온다

시루봉 갈림길(976m:11:23)

이정표(↑회란석 6.9km,시루봉 3.1km(우복동천)↖조항산 3.7km(우복동천)

↓늘재 2.6km(우복동천)의 표지판이 있는 갈림길에서 대간길은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가야 한다

 

이정표에 표시된​ 회란석(廻瀾石)이란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쌍용계곡에

있는 바위로 두 마리의 용이 마주앉은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가 있다 해서

이름붙은 바위중에 용이 발톱으로 긁어놓은 듯 물결치는 기이한 모습의

너럭바위라고 한다

늘재부터 이곳까지는 백두대간과 십승지 우복동구간이 겹쳐지는 등로이다.

우복동(牛腹洞)은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서쪽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병풍바위에 막혀있고 북쪽은 백두대간 고개인 늘재를 넘어야 괴산으로

연결되며 남쪽 역시 백두대간 상에 있는 고개인 갈령을 넘어야 상주로 갈 수 있다

고개를 넘지 않는 유일한 통로인 동쪽인 문경가는 길은 가파란 벼랑이 있는 쌍룡계곡이 있다

예전부터 접근조차 하기 힘든 아주 깊은 골짜기의 마을이다.

이 우복동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게 살 수 있다하여 이 땅의

민초들에게 이상향(理想鄕)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소의 배 안처럼 생겼다는 우복동(牛腹洞)은 흉년, 전쟁, 전염병의 삼재(三災)가

들지 않아 사람들이 살기에 더 없이 좋다하여 이 땅의 민초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복동의 명칭은 호리병에서 맑은 물이 흐르는 지형을 닮아 붙혀진 지명으로

조선 숙종(19대) 때 청담 이중환 선생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에 ‘우복길지(牛腹吉地)가

청화산에 있다’ 하여 ‘우복동’이라 불리며 이 중환 선생의 호가 청담(淸潭) 또는

청화산인(淸華山人)이라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우복동천(牛腹洞川)’이란 명칭은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우복동 중심 용유동 길가에 비스듬히 누운 바위에 ‘洞天’이라 새긴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동천이라는 뜻은 하늘의 동네라는 의미일진데 민초들의 이상향인 우복동을 함부로 밝힐 수 없어

양사언이 지명을 밝히지 않고 ‘洞天’이라고만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제들도

우복동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을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그의 저서

다산산문집에 수록된 ‘우복동가(牛腹洞家)’라는 싯구에 은유적으로 꼬집어 놓았다고 한다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상주 십승지길

2년안에 162지맥길을 끝내고 다시한번 십승지란 이름으로 걸어볼

예정인 길이다...십승지중에 영주 금계촌 십승지 구간을 끝내 놓고는

지맥길 다니느라 마무리를 못했다... 언제가는 다시 와야할 길인데

그때까지 체력이 버텨줄지는 모르겠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어디 쉬운 산길이 있던가?.

내리막길은 등로가 살짝 얼어 있어서 조심스럽고 까칠하다

암릉 구간을 통과해서 내려가는 길은 두발이 아닌 네발로 내려가는데

사이즈가 적은 범여는 이런 곳에서 숏다리의 悲哀를 뼈저리게 느낀다

무명봉(11:31)

무명봉을 지나니 암릉 구간이 나오고 직진으로 진행을 할 수가

없어서 좌측으로 내려가서 우회길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오늘은 범여의 德이 부족함인가...날씨는 눈은 내리지 않지만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것만 같은 잔뜩 찌푸린 날씨가 며느리에게 꼬라지를 부리는

시어머니상과도 같다...하기사 이런 저런 핑계로 날씨 탓을 하면서 산행을

하면 어느 세월에 목적했던 산을 다 끝냈을 수 있겠는가...

 

산이라는 같은 공간 안에서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늘 감사하고 고맙고 세상을 잘 살았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대리만족인가?

무명봉을 지나 산죽이 죽어있는 까칠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1:31)

무명봉(11:40)

무명봉에서 지나온 청화산을 뒤돌아 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청화산은 이중환이 극찬한 모습과는 달리 자꾸만

눈구름이 가려지고 간간히 눈발이 휘날리긴 해도 눈이 올 것 같지는 않다

안부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가는데 바람 탓인지 눈은 점점 많아진다

청화산에서 의상골로 이어지는 능선의 모습

좌측 능선이 대간길이나 사면길로 향하는데 바람의 세기는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다

사면길을 걷는데 바람이 조금 수그러진다.

아침을 먹지않고 왔더니만 약간의 허기가 지기에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가져온 보온병의 따뜻한 물로 커피 한잔을

타서 도리야끼 빵 2개로 점심을 대신한다...잠깐 사이에

옷이 땀에 젖은 탓인지 추위가 엄습해와 서둘러 길을 떠난다

안부(11:58)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봉우리를 향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좌측으로는 오늘 내가 내려가야 할 의상저수지가 보이는구나.

지도상에는 의상저수지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송면저수지로

명찰을 바꿔 달았다

능선길에는 간간히 불어오는 칼바람이 산꾼을 괴롭힌다.

큰 수술이후에 몸뚱아리는 유난히도 추위를 많이타는 체질로 변해 버렸다

무명봉(12:07)

지나온 능선 끄트머리의 청화산은 눈구름에 가려서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우측 능선으로 우복동천 십승지 능선으로는 시루봉과 도장산이 얼굴을 내민다

도장산 좌측 계곡으로는 견훤과 관련이 있는 궁기리가 보인다

무명봉(12:13)

눈길이 미끄러운 까칠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걸어야 할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직진의 암릉구간을 피해서 좌측으로 내려서서 우회길을 따라서 걷는다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신선바위(神仙巖:895m:12:20)

그저 밋밋한 봉우리인데 오룩스맵 지도에는 신선바위로 표기가 되어있다.

잠시후에 걸어야 할 능선과  새의 목덜미처럼 생겼다는 조항산과 그 뒷쪽으로 둔덕산이 보인다

안부(12:24)

무명봉(12:26)

소나무 옆의 능선인 암릉길을 내려간 다음에...

가야할 봉우리 뒷쪽으로는 도장산과 대궐터산이 멋진 모습으로 산꾼을 유혹한다.

 

도장산(道藏山:828m)은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와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용유리 등에

걸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택리지』에 "병천(甁川) 남쪽이 도장산이다.

또한 속리산 한 가닥이 뻗어 내린 것으로 청화산과 맞닿았으며, 두 산 사이와 용추

이상을 모두 용유동(龍遊洞)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산의 모양새가 공자의 제자인 안자와 증자가 스승을 모시고

시립하는 것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산 북쪽에 심원사(深源寺)라는

유서 깊은 사찰과 용유동·쌍룡계곡 등의 절경이 있다

이곳은 양지라서 그런지 눈이 많이 녹아있다

청화산 아래에서 이어지는 상주십승지 능선의 모습

우복동천 환종주 개념도...사진 펌

우복동천(牛腹東川) 십승지는 조선시대 예언서인 격암유록(格菴遺錄)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菴十勝地論)를

저술한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는 조선 명종 때(1509∼1571)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능통한 사람이었다)와

鄭鑑錄(조선 중기 이후 백성들 속에 유포된, 나라의 운명과 백성의 안위에 관하여 풍수지리에 입각한 예언서로

이심(李沁)과 정감(鄭鑑)의 문답을 기록한 책이라 하나 이본이 많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등에서 유래하여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에 의해 정리된 십승지 중 한 곳으로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일대 병천(川)의 물줄기를

감싸고 있는 원형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는 병천(쌍룡계곡)의 수문이라 할 수 있는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쌍룡마을(내서3교)을 기점으로

시루봉. 청화산. 늘재, 문장대. 천왕봉. 형제봉. 갈령. 도장산. 사우정을 지나 내서3교로 원점회귀하는

환종주 거리가 37km에 이른다.

뒤돌아보니 청화산이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아주 급경사의 암릉구간을 내려서니 안부가 나온다

안부(12:30)

지나온 신선바위 능선을 뒤돌아 보니 과연 신선이 노닐다 갈 정도의 멋진 모습이다

까칠한 저 능선을 내려오면서 개고생을 했는데...

梵如...넌 참 대단한 친구여!...내 자신이 대견스럽다

무명봉(12:32)

까칠한 무명봉의 암릉구간을 통과하는데...

곡예하듯 암릉구간을 통과하니...

조항산 너머 뒷쪽으로 보이는 둔덕산 기슭에는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구나

안부(12:35)

다시 미끄러운 오르막길

무명봉(12:37)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다

겨울산에서 / 이해인

 

죽어서야

다시 사는 법을

여기 와서 배웁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모든 이와 헤어졌지만

 

모든 이를 다 새롭게 만난다고

하얗게 눈이 쌓인 겨울 산길에서

산새가 되어 불러보는

 

당신의 이름

눈 속에 노을 속에

사라지면서

 

다시 시작되는

나의 사랑이여

무명봉을 지나면서 갑자기 나타난 절개지의 끝...

여기서 내리막길은 내린 눈이 얼어붙은 암릉구간, 가슴조이며 조심스레 내려간다

초반에 잔뜩 찌푸린 시어머니상을 하고있던 산에 눈구름이 걷히면서

가시거리를 많이 좋아지고 맞은편에 우뚝솟은 조항산 뒷쪽으로는

세숫대야를 엎어놓은듯이 보이는 대야산과 그 뒷쪽으로는 괴산의 명산들인

남군자산과 칠보산 등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와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오금이 저릴정도의 급경사의 내리막 암릉구간 아래로 내려간다

연엽산과 남산, 그 뒷쪽으로 2109년 11월에 영강(운달)지맥 산행때

홀로 걸었던 대궐터산도 아련하게 보이는구나

당겨본 조항산과 둔덕산(屯德山:976.0m)의 모습

안부(12:43)

안부에서 다시 암릉으로 된 봉우리를 치고 올라간다.

암릉구간 치고는 그리 어렵지는 않고 먼저간 산꾼들이

러셀을 해놓긴 했으나 은근히 눈길을 걷는데 체력 소모가 많다 

등로에서 당겨본 연엽산(連葉山:791.5m)의 모습

연엽산(蓮葉山:791.5m)은 문경시 농암면의 화산리·종곡리·궁기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연엽(蓮葉)' 이란 지명은 산의 모양새가 마치 연잎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서쪽으로 시루봉, 청화산과 이어져 있다.

858m봉(12:46)

아래에서 보면 까칠한 암봉인데 정상에는 그저 밋밋한 육산이다

낙락장송을 끼고서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정오를 지나면서 날씨 조금씩 풀리는 기미인지 추위가 많이 누그러진 편이다

암릉구간을 지나서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에서 다시 오르막길

무명봉이 나오고...

정면이 아닌 사면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앞에 보이는 저 봉우리가 지도상의 801m봉인데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9부능선에서 사면길을 따라서 조항산으로 

향하는 곳이다

조망바위(13:00)

801m봉에서 내려오면 만나는 암봉인데 실질적인 801m봉 역할을 하는 곳으로

그야말로 一望無際로 주변의 산들이  한 눈에 다 보이는 곳이다

조명바위에서 바라본 의상저수지와 괴산군 청천면의 산그리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상리(松上里) 의상골 위에 있는 저수지로 신라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수도했다 하여 지어진 의상골 윗쪽에 있는 저수지인데

등산 지도에는 의상저수지로 되어 있지만 현재의 지도에는 송면저수지로 되어 있다

개울가에 앉아
무심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우리가 겪는 것은 
모두가 한때일뿐,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세월도 그렇고 
인심도 그렇고 
세상만사가 다 흘러가며 변한다.

 

인간사도 전 생애의 과정을 보면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지나가는 
한때의 감정이다.   
 
이 세상에서 고정불변한 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일이란,
내 자신이 지금 당장 겪고 있을 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런 일도  
 
지내 놓고 보면 그때 그곳에 
그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이 세상 일에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우리 스스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과 그 고통을 
이겨 내기 위한 의지적인 노력은 
 
다른 한편 이 다음에 
새로운 열매가 될 것이다.   
 
이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는가에 따라 
내일의 우리 모습은 결정된다.

 

- 법정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中에서 - 

오늘 산행중에 나야 조항산으로 오를 일이 없으니 힘든 구간은

다 지나갔고 편안한 발걸음으로 주위의 멋진 仙景을 감상하며

황소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서 갓바위재로 향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둔덕산(屯德山:976.0m)의 모습

둔덕산( :970m)은 문경시 가은읍과 농암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과 조금전 정국기원단에서 만난 의병대장

이강년의 고향이 둔덕산 아래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대야산과 조항산 사이에서 동쪽으로 솟아 있으며

암벽 능선이 아름다운 곳으로, 수림이 울창하나 부근의 대야산과 희양산의

명성에 가려 있어 찾는 사람이 드물지만, 산 아래에는 산세가 아름답고 물이 맑은

선유구곡()으로 유명한 선유동계곡이 있는데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하여 선유동이라 불렀다.

둔덕산 아래 가은읍 갈전리는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의 고향으로 가은읍과 농암면 일대에는

견훤과 연관된 금하굴·마암궁터·견훤산성이 전하며, 특히 둔덕산은 운강 이강년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이강년은 한말에 전국도창의대장으로서 일본 침략자에 항거하였으며 13년간

경상도·충청도·강원도에 걸쳐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순국하였다.

 

1858년 12월 30일 가은읍 완장리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기 3일 전부터 둔덕산이 웅웅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둔덕산이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신기하게 생각하였는데 이강년이 태어나자 울음이 그쳤다고 전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宮基里)의 모습

궁기리는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이 활을쏘고 무술을 연마하며 야망을

키웠던 마을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으로 궁기(宮基)는 우리말로 궁터라는 뜻으로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서 궁을 짓고 군사들을 훈련시킨데서 유래된 지명이며 이터골,

옛터골, 궁터 등으로 불렀다고 하며, 당초 문경현의 자료에는 궁기리라는 지명은 없고

고모리가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모리와 마암리(馬巖里) 일부를 병합해 

농암면으로 편입시켰다고 한다

 

문경 가은읍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태어난 고향답게 견훤의 전설이 많은 고향이다

농암면 궁기리는 견훤이 군사를 모아놓고 훈련을 하던 곳이라 했고 궁기리 아랫마을에 있는

말바위는 견훤이 야생마를 길들여 천하의 명마를 만들어 타던 중 활과 말이 누가 빠른가를

내기 하였는데 아차산으로 활을 쏘고 말을 달려 말이 졌다는 성급한 생각으로 말의 목을치니

그때서야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조항산과 그 뒷쪽으로의 둔덕산의 모습

조항산(鳥項山:953.6m)은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와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맞은편의 둔덕산 갈림길에 있는 마귀할멈 통시바위에서 

바라보면 갓바위봉이 새의 부리로, 조항산이 새의 목덜미로 보이는 지세라 조항산(鳥項山)

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하면 옛날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홍수 때 이곳 정상이 물에

떠있는 새의 목덜미를 닮았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또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 주민들은 옛부터 이곳 조항산을 갓바위봉이라고 부른다.

옛날 천지개벽으로 온 세상이 물로 잠겼을 때 정상 꼭대기만 ‘갓(冠帽)’만큼

물 위에 나와 있었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라는데, 궁기리에서 이 산을 바라볼 때

정상이 M자형으로 봉우리가 두개로 보인다고 한다

 

실제 봉우리중 좌측 봉우리가 갓바위봉보다 낮게 보인다고 한다

우측으로 정상보다 높게 보이는 암봉을 갓바위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구한말 지형도」에는 이 산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조선지형도」에는 현재와

같은 지명이 표기가 되어있다

의상저수지 뒷쪽으로 낙영산, 도명산, 가령산, 사랑산 등 괴산의 멋진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조망터(13:05)

조망터 아래로 내려 가면서...

조항산을 바라보는데, 내가 가야할 갓바위재는 소나무가 보이는 뒷봉우리 아래에 있다

무명봉(13:08)

앞에 보이는 저 봉우리 아래가 갓바위재이다

또 암릉구간의 내리막길...눈길이라서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곳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사고나기 딱 좋은 곳으로 바짝 긴장을 하면 걷는다

안부(13:15)

등로에서 바라본 궁기리 골짜기의 모습

호젓한 길을 홀로 걷고 있는데 송백산악회 회장님한테서 전화가 온다

내가 날머리로 잡은 의상저수지 주차장에서 송백산악회의 하산점인

삼송리 이장님댁까지는 거리가 꽤나 멀어서 걸어서 가기는 불가능

할 것 같아서 화북택시나 청천면 택시를 부를까 고민을 하고 있는중에

송회장의 부탁으로 삼송리 이장님이 나를 의상저수지 주차장까지

픽업을 하러 오겠다고 하는데, 갑자기 양넘 지갑을 줏은 느낌이다

송회장님!...복받을깁니다

저 봉우리로 올라섰다가 내려가야 갓바위재인데...

등로는 사면길로 나있어서 편안하게 갓바위재로 향한다

갓바위재(769m:13:25)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에서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갓바위란 지명은 조항산의 한 봉우리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하며 지나온 청화산과

가야 할 조항산 사이에 있으며 고모치가 삼송리로 편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삼송리에서 이 고개를 넘어 농암면 소재지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갓바위재보다는 고모치를 주로 많이 이용했는데 고모치는 지금 대간

산꾼이나 이용하는 고개이고 이곳 갓바위재는 의상저수지에서 오르는 일반

등산객들의 발걸음으로 등로는 뚜렸하다

친절하게도 탈출로 표식을 해놨는데 난 탈출이 아닌 땜방구간이라

정상적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내리막길은 아무도 가지 않았는지 발자국이 전혀 없다.

지난해 10월 22일에 수헌아우와 이곳을 올라왔으니 

3개월만에 이곳으로 하산을 하는 중이다

내려가는 등로는 뚜렸하고 편안하게 의상 저수지 방향으로 향한다

급경사로 내려가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 1(13:38)

임도를 가로질러서 다시 숲속 아래로 내려간다

뱀또아리처럼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서 가면 편하긴 해도

한참 돌아가야 하기에 직진길로 내려 가는게 훨씬 가깝다

임도 2(13:52)

2번째 임도를 만나고 또다시 임도를 가로질러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조금을 내려오니 의상저수지로 이어지는 골짜기 계곡으로 내려간다

갓바위재에서 내려오는 산악회들이 있는지 시그널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계곡을 지나고...

지난 가을에 이곳을 오를 때 수헌아우님이 이곳 단풍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던 곳인데...이 단풍들도 세월의 무게는 이기지 못하는가 보다

사방댐(14:10)

사방댐을 지나서 계곡을 건너니 마지막 임도를 만나고 이곳에서 아이젠을 벗는다

임도 삼거리(14:17)

다리를 지나고...

의상저수지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저수지의 갓길을 따라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갓길에서 바라본 의상저수지의 모습

지금은 송면저수지라고 부르고 있다.

참으로 지루한 길을 걷고 있다

내가 오늘 걸었던 능선들을 뒤돌아 본다

저수지 안에서는 강태공(姜太公)이 홀로 얼음낚시를 즐기고 있다.

3,000년전 중국의 강태공(본명:강자아(姜子牙)은 고기를 낚은게 아니고

사람을 낚아서 80이 넘은 나이에 주나라의 문왕을 도와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제상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저 태공은 고기를 낚는지 세월을 낚는지 알 길이 없다

드디어 의상저수지의 끝이 보인다

의상저수지(14:35)

의상저수지에서 뒤돌아 본 갓바위재의 모습

뚝방길 우측 수로를 따라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뚝방 아래로 편하게 내려서니...

쉼터들이 보이고 잠시후에 의상저수지 주차장에 도착한다.

의상저수지 주차장(14:42)

주차장에 도착한 후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고 베낭을 정리하고 있는데

얼마 안되어 삼송리 이장님이 나를 픽업하러 오시고 버스가 있는 삼송리

이장님댁에 도착한다

삼송리 이장님댁(15:25)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三松里)는 옛부터 산자수려한 고로 선인들의 유서깊은

고장이기도 한 곳으로 2도3군의(경북 충북 괴산군 상주군 문경군) 접경을 이루는

삼송천(三松川)을 따라 고송 3그루가(천연기념물) 유일하게 자생되었기에 지명을

삼송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토세가 화강암으로 유명하고 또한 전국에서 특이하게

맥반석의 광맥이 형성되어 농바위골은 찾는 이로 하여금 신비함을 더하게 하는

마을이다.

 

이장님댁에 도착하니 나보다도 3km이상을 더 걸으신 분들이

대부분 다 도착하셨다...이장님댁 농막 비닐하우스 안에서

점심 만찬이 벌어지고, 산악회에서 준비한 식사에다 머릿고기.

과메기에다 소주와 막걸리 등 푸짐한 음식을 먹은 다음에

귀경하는 버스에 오른다...오랫만에 입이 호강하는 하루였다.

송백 산악회 회장님, 김대장님 동료 산꾼들 다들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