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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차 북진(終)

제19구간 - 큰재에서 지기재까지

by 범여(梵如) 2022. 12. 19.

산도 사람이 그리운 모양이다

 

☞산행일자:  2022년 12월 18일

☞산행날씨:  맑은날씨에 올해들어 최악의 한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9.6km / 7시간 35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큰재-김해김공&경주손씨  묘지-무명묘지-무명봉-안부-무명봉

                    회룡목장 입구-무명봉-고개-무명봉-광골, 공가실 갈림길-무명봉

                    무명봉-무명봉-회룡재-서낭당-처사 아주신공묘-y자 갈림길-무명봉

                    472.0m봉 갈림길-개터재-무명봉-513.9m봉-안부-무명봉-무명봉

                    474m봉-무명봉-466.7m봉-무명봉-윗왕실재-무명봉-무명봉-묘지

                   무명봉-477m봉-산촌체험관 갈림길-무명봉-백학산-무명봉

                  대포리 임도-갈림길-405m봉-안부-무명봉-안부-무명봉-안부-무명봉

                  무명봉-원삼 삼거리-안부-개머리재-묘지-임도-임도 삼거리-무명봉

                  갈림길-안심산 갈림길-지기재

☞소 재 재: 경북 상주시 공성면, 내서면, 모동면, 모서면

 

올들어 최고로 추운 날씨에 서울이 영하 14도의 강추위다.

거기다가 3일전에 성대 수술로 인하여 산행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지만 목소리만 잘 안나올 뿐 몸뚱아리의 컨디션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라 12월

첫 주에 하고 남은 백하지맥 자투리 구간 6km를 마치고 일찍 귀경하여 쉬려고 했는데

갑자기 몰아친 한파에다 호남 지역에 폭설이 내린다는 예보로 인해 포기를 한다.

 

백하지맥 마지막 남은 구간은 거리는 얼마되지 않지만 까칠한 암릉구간이라 아무래도

나홀로 산행은 눈이오면 좀 부담스러울것 같고, 산행 구간을 변경해야 할 것 같아

많은 고민을 해봤지만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데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곳이

백두대간 중에서 고도가 가장 낮고, 길도 그리 험하지 않는 非山非野이라 불리는

상주지역의 큰재에서 지기재가 생각이 나서 그리로 결정하고 간단하게 베낭을

챙겨놓고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 터미널(05:50)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런지 동서울터미널 대합실에서 평소보다 훨씬 적은 탑승객만 있고,

대합실 안은 마치 냉동고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춥다...잠시후에 상주가는 첫 차에 올랐는데

버스도 춥기는 마찬가지이다...1시간 정도 달렸나?...버스에 온 기가 돌기 시작하고 난

평소처럼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버스가 첫번째 정차한 점촌터미널에서 잠이 깬다.

점촌에서 손님을 내려준 버스는 다시 점촌을 빠져나와 3번 국도를 타고 20여분을

달린 다음에 상주터미널에 도착한다

상주터미널(08:10)

상주터미널에 도착하여 큰재를 가기 위해서 08시 50분에 출발하는 옥산가는 버스표를

매표하고 나니 40여분의 시간이 남아서 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식당에서 해장국

한그릇으로 든든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옥산(공성면)가는 버스에 오른다.

상주 → 옥산행 버스표

상주시 공성면에 있는 큰재를 가기 위해서는 상주가는 김천가는 시외버스가 있고,

상주시내 버스가 있는데 시외버스는 매표소에서 표를 예매해야 하지만, 시내버스는

매표를 하지 않아도 된다...시내버스는 공성가는 길에 상주의 마을 구석구석을 거쳐

가기에 1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시외버스는 20여분밖에 안 걸린다.

 

시간에 맞추어 버스에 오르니 손님이라고는 나말고 달랑 1명 뿐이다.

 그러기에 옥산(공성)에 도착하니 20분이 채 안걸린 시간이다

공성 버스정류장에서 바라본 웅이산(국수봉)의 모습

공성버스 정류장(09:18)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공성택시(054-533-6555)를 호출하니 금방 온다는

택시가 5분이 지나도 오질 않는다...그래도 이곳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부스도 있고, 의자에 히터가 들어오는 바람에 추위를 피할 수 있어서 좋았다.

택시기사가 아침을 먹는중에 전화를 받아서 좀 늦었다고 미안하다고 한다.

옥산에서 출발한 지 15분만에 큰재에 도착하고 택시는 미터기도 안 꺽고 

9,000원을 달라고 한다.

택시와 작별을 하고 큰재에 내리니 이곳도 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잠깐 사이에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추위가 엄습을

해와서 서둘러 산행을 준비한다.

 

백두대간 구간중에서 추풍령에서 부터 화령재에 이르는 구간을 대간 산꾼들은

흔히들 非山非野 구간이라고도 하고 보너스 구간이라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중화대 지구라고 한다...실개천 하나없는 백두대간 화령재에서 추풍령 구간의 

54.69km의 중화대는 1,000m급 이상되는 백두대간이 속리산 천왕봉에서 고도를

200~400m로 낮추면서 화령재에서 추풍령까지 중화지구대를 만든다.

 

큰재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해당하며, 백두대간 길 중에서 지대가 가장 낮고 능선의

힘이 약한 중화지구대 구간으로 해발고도의 편차가 가장 작고,  고갯마루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는 곳 이다.

 

* 중화지구대란?

지구의 단층작용으로 인하여 지각이 요(凹) 모양으로 형성이 된 지형으로 地溝帶(지붓도랑

모양의 띠를 이룬 지형: rift valley)를 말하는 것으로 덕유산과 속리산 사이의 낮은 야산지역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북한에 있는 함경도의 추가령 지구대와 길주.명천지구대, 포항쪽에

있는 형산강 지구대가 있고, 세계적으로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와 사해 지구대가 유명하다.

고도 200~300m의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일교차가 많이 발생하여 과일등이 생육하는데 당도를

높게 해 준다고 하여 과일재배에 유리한 지형이라고 한다.

큰재(345m:09:40)

경북 상주시 공성면 도곡리와 우하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예전의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의 자리는 상주시에서 운영하는 백두대간 생태 체험장이 들어서 있고, 맞은편에

있었던 대간꾼들에게 욕쟁이 할머니(?)로 악명 높았던 민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주차장으로 바꿔 버려 예전에 비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낙동강과 금강의 발원지로 갈라지는 큰재는 우하재라고 불리기도 하며,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상주에서 한양으로 가기위해 넘어야 할 큰 고개라 해서 큰재라 불리웠다고 한다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라 임진왜란을 비롯한 각종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기도 한 곳이다

예전에 대간꾼들이 마당에 있는 수돗물 좀 쓴다고 온갖 욕을 해댄 욕쟁이

할머님댁은 주차장으로 변해 버렸다...갑자기 욕쟁이 할머니가 그립구나

내가 처음 백두대간을 시작한 지가 13년이 지났으니 할머님은 지금 生存해 계실까.

아님 이승을 하직했을까?...궁금하기도 하다

산행을 시작하다(09:45)

예전에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의 모습은 형태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상주시에서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여 건립한 생태교육장에는 지금은 캠핑장인지

숙박 시설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당에는 세워둔 차량들이 보이고 캠핑온

사람들인듯한 사람들이 보인다.

 

상주시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은 산림청 녹색사업단과 경상북도 상주시 공동으로

백두대간 마루금에 았는 인성분교(97년 2월 27일 폐교)에 자리한 국내 유일한

유-소년 숲 생태 전문교육기관으로 백두대간 역사, 교육, 생태교육을 위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을 벗어나 본격적인 숲속을 들어선다

숲속으로 들어서니 생각보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와서 산꾼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김해김공&경주손씨 묘(09:50)

대간 등로에는 눈이 보이나 아이젠을 착용할 정도는 아니라 그냥 길을 걷는다.

해가 뜨면 날씨가 풀릴줄 알았는데 그럴 기미가 별로 보이질 않는다.

성능이 꽤 괜찮은 장갑을 끼었건만 스틱을 잡은 손가락이 빠져나갈건만 같은

추위라 하는 수 없이 핫팩이 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어간다

무명묘지(10:00)

뚜렸한 등로의 나뭇가지 사이로 잔설이 살짝있는 대간길을 따라서 호젓하게 걷는데

출가한 딸래미한테서 전화가 온다...아빠! 이 추운날에 산에 갔지...그리고 혼자지...

위험한데 또 혼자갔어...시시콜콜 잔소리다...아빠 괜찮으니 끊어라 하고 전화를 끊는다.

추울때는 전화받는 것도 고역이다...그래도 아빠를 생각해주는 딸이 고맙기만 하다.

무명봉(10:02)

봉우리같지도 않은 무명봉을 지나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간길인데

무시할 수도 없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도 카메라 셧터를 눌러 대지만

사진을 찍을 때마다 장갑을 꼈다, 벗었다 하니 추위로 인해서 손가락이

빠질 것만 같은 통증이 몰려온다

안부(10:04)

큰재에서 출발하여 큰 고도차 없이 능선의 파도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파도의

크기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다... 나지막하고 산주름이 거의 없으니 그저

평지를 산보하는 듯한 길인듯 하여, 혹시 대간 마루금 측정이 잘못 되지는 않았나

하는 의심이 갈 정도이지만 대간길을 4번째 걷는 범여가 알바할 정도는 아니고

이 구간에 대해 많은 선답자들이 큰 특징이 없는 코스로 평가하고 있는 것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

무명묘지를 지나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오르지만 오르막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편안한 느낌으로 걷는데, 날씨만 춥지 않으면

그야말로 錦上添花이겠다...그래도 겨울인데 이 정도 추위는 감내

해야지 우짜겠노

앞에 높은 산이 보이지만 이곳은 대간길과는 무관한 회룡목장 서쪽 능선에 있는

회룡산(回龍山:)이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지도상에는 회룡산이란

표기가 없고, 옛날 이곳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해서 상주시 자료에는 공성봉산이라고 한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봉우산이 조선시대 회룡산()의 이명임을 기록하고 있다.

'회룡산'이라는 명칭은 『세종실록지리지』(상주)에 "봉화가 6곳이니 공성 회룡산은

현 서쪽에 있으며, 남쪽으로 금산 소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청리 서산에 응한다."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하며 '회룡' 지명은 풍수 형국상 '회룡고조()'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회룡고조()는 마치 후손이 조상을 되돌아보듯 산 흐름상 뻗어 나온 산줄기를 알파벳

 'C' 자 형태로 되돌아보는 형세를 말하는데, 산기슭에 회룡 마을과 회룡고개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청구도(靑邱圖:고산자 김정호가 전국에 축척을 동일하게 적용하여 1834년에 제작한 전국지도)』에도

회룡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등로 우측 아래에는 공성면 도곡리 웃돝골과 아랫돝골 들녘이 보인다

웃돝골의 남서쪽에 서쪽으로 난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 웃돝골이고,

아랫돝골 마을은 웃돝골이 차츰 번성하면서 아래 냇가로 옮겨 정착했는데,

돝골의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불리는 마을이 아랫돝골이다

완만한 오르막길

무명봉(10:14)

무명봉 아래로 내려서니 등로에는 눈은 얼마 안되지만 음지에 있는 잔설이 미끄럽고

내려서자마자 920번 지방도에서 회룡목장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회룡목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면 우하리 봉골마을로 가는 길이다

회룡목장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회룡목장 입구(10:17)

옛지도에는 이영도 목장이었던 곳인데, 현재는 회룡 목장이라 표기되었다.

임도가 있어서 알바하기 쉬운 곳으로 목장 진입 도로는 1997년에 포장되였으며,

포장하기 전에는 앞쪽의 회룡산(541.2m) 방향을 대간으로 착각하고 가다가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이야 알바하는 대간꾼은 없을듯 하다

회룡목장 입구에서 다시 우측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대간꾼들의 많은 흔적들이

차가운 바람에 휘날린다...햋볕은 따사로이 비치건만 날씨는 여전히 차갑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부지런히 걸어가는데...등로 좌측으로 회룡목장이 보인다.

예전에 이곳을 지나갈 땐 회룡목장의 축분(畜糞) 냄새로 인하여 꽤나 고통스러웠는데

지금은 축사에 소는 보이지 않고 독한 축분 냄사도 전혀 나질 않는다

좌측의 얕은 평지를 차지한 회룡 목장을 바라보면서 마루금을 이루는 대간길은

매우 부드럽고 평온하다...단지 갑자기 몰아친 한파 탓인지 추운 날씨 탓으로

땀한방울 흘리지 않고 된오름도 없이 이어지는 등로는 그저 편하기만 하다.

잔설이 있는 등로는 염려했던 우려와는 달리 미끄럽지 않아 부지런히 걸으면서

산행 속도내는데는  많은 도움이 된다

무명봉(10:26)

봉우리 아래로 내려간다

고개(10:29)

상주시 공성면 우하리와 오광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우하리쪽은 목장으로

길이 막혀 있지만 오광리쪽으로는 민초들이 다닌 흔적이 뚜렸하다

좌측의 회룡목장이 보이는 안부에서 나무 계단을 따라서 올라간다

무명봉(10:32)

무명봉을 지나면서 편하게 걷다보니...

 광골, 공가실 마실 등산로가 나온다

마실이란 마을의 경상도 방언이다

광골, 공가실 갈림길(10:36)

광골과 골가실은 상주시 공성면 오광리(五廣里)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에

승지골, 절골, 갓골, 맹갓골 등 큰 계곡이 4개나 있고,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있어서 광골(廣谷)이라 부르면 임진왜란 뒤에 단양우씨(丹陽禹氏)가 정착하여

살았고, 마을 가운데는 수령 300년이 넓은 느티나무가 있다고 한다.

 

강(광)골 마을의 강(岡, 崗)은 지명에서 주로 ‘등성이’의 뜻으로 쓰이는데

옛날에는 가파르고 척박하여 땅 밑에 바위가 노출된 산에 붙혀진

지명에 사용되었다...그러나 광(廣)으로 쓰여진 경우에는 ‘넓은, 늘어진’  

등으로 쓰여진다

전통적인 陸山 등로에 앙증맞은 돌멩이 몇개가 있는 등로가 이색적이다.

무명봉(10:45)

밋밋한 봉우리에는 때가 잔뜩낀 은방울꽃 안내판만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나뭇가지 너머 우측으로 펼쳐지는 병성(신산경표상:숭덕)지맥 능선이 아련히 

보이는구나...저 능선을 걸은지가 엊그제께 같은데 2019년 4월이니 벌써 3년하고도

8개월이란 세월이 흘렀구나...가는 세월이 왜 그리도 빠른줄은 예전엔 몰랐었는네...

오늘 구간도 설악산이 지나는 구간이나 지리산 구간과 마찬가지로 대간 마루금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분명 백두산에서 시작된 마루금이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다...오늘 구간이 없더라면 덕스러운 덕유산이나, 뛰어난 조망을

제공해주는 백운산 그리고 지리산의 웅장함은 결코 없을 것이다.

키가 낮고 보잘 것 없어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누구나 非山非野구간이니 중화지구대라니 뭐니 하면서 고도가 낮고 볼품없는

대간길이라고 하지만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고있는 이곳 대간길이 고맙기만 하다.

무명봉(10:50)

무명봉에서 나무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니 회룡재가 나온다

회룡재로 내려서는데 이정표를 새로 설치했는지 깔끔하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600m만 가면 공성봉산이란 이정표가 있는데

회룡산을 말하는 듯 하다.

 

상산지(商山志)에는 공성봉산(功城烽山)를 표기해 논 자료가 있는데

「回龍山烽燧 在功城縣西南應金山郡所山東應靑里西山(회룡산 봉수 공성현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금산군 소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청리현 서산에 응한다.)」라 적고 있다.

회룡 봉수대는 봉우재에서 30분 정도 된비알을 오르면 우뚝한 봉우리에 올라서는데, 이곳이

봉우산(일명:回龍山 541.2m) 정상인데  측량용 삼각점(상주 314)이 있는 산이다

 

예전에 봉수대가 있다고 해서 봉우산 또는 회룡산이라 했는데, 1894년 갑오경장

(甲午更張, 고종 31)계기로 봉수제가 폐지되고, 봉수대(烽燧臺)와 봉수군(烽燧軍)

폐지하라고 명한 것은, 조선왕조실록(고종 32년 윤 59)에「命各處烽臺烽燧軍廢止

軍部奏請也」라 적고 있는데, 공식적으로 폐지된 건 1895년이다.

 

* 상산지(商山志)는 1617년(광해군 9)에 이준(李埈)이 편찬한 경상도 상주 읍지(邑誌)로

   2권 2책. 필사 본. 규장각 소장. 목사로 부임한 강복성(康復誠)의 후원으로 시작하여 

   그 뒤를 이은 정호선(丁好善)의 재임 기간에 완성했다. 책머리에 목록이 있다.

 

  내용 구성은 권1에

  ① 여지(輿地):연 혁·속현·강역·산천·성지·역원·교량·성씨·풍속·봉수·진도,

  ② 공부:전부(田 賦)·토공(土貢)·토산·호구·군병·요역, ③ 학교:향교·서원·서당·학제·학전,

  ④ 질사(秩祀):단묘·묘제(廟制),  ⑤ 관제:목사·판관·문제 독(文提督)·무제독(武提督),

  ⑥ 공서:객관(客館)·주아(州衙)·부(附)·유향소·의국(醫局),  ⑦ 명환(名宦),

  ⑧ 인물(人物):문관·무학·음서·은석(恩錫)·효열,

  ⑨ 고적(古蹟):고도·고현·산성·부곡·정관(亭觀)·사찰,

 

권2에

 ⑩ 문한:제영(題詠)·기(記)·서(序)·비문·상량문(上梁文)·잡저(雜著)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지방 통치질서 재편의 자료로 편찬된 읍지로서, 임진왜란으로 피폐된

  지방사회 의 모습을 전해주는 동시에 전란으로 거의 인멸된 상주의 문화, 즉 당시까지의

  시문이나 인물을 비롯해 사회 실태 등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예를 들면 호구조(戶口條)에는 평시의 호구수가 7만여 호라고 하나, 근거할 만한 장적(帳籍)이

  없으며, 전쟁 후인 병진년(1616)의 호적 인구수는 겨우 1만 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초기의 사찬읍지(私撰邑誌)의 체제를 보여주는 읍지로서도 의의가 있다.

회룡재(回龍峙:340m:10:57)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봉산리에 있는 고개로 좌측으로는 봉산2리 회룡

마을과 상판저수지로 이어지고, 우측은 봉산1리 공가실 마을로 이어진다. 

 

회룡재의 유래를 보면  풍수에서 재의 형상이 용이 뒤돌아 보는 형세라고 해서

회룡재라고 부르는데  지난 구간인 웅이산(국수봉)에서 고도를 낮춰 이곳까지 왔다가

큰재를 지나 백학산에 오르는 용트림의 地勢의 형태로, 상판 저수지와 회룡재 사이에 있는

마을 이름이 회룡(回龍)인 것으로 보아 마을 이름에서 고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측되며

풍수지리적으로 왼쪽 산줄기를 청룡, 가운데로 산이 뻗어 내려온 것을 내룡, 산이 돌아들면

회룡이라고 하며, 회룡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예(芮)씨들이 지금의 봉산2리에 피란을 와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회룡재를 가로질러 예전엔 없었던 안내판 뒷쪽으로 오르면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우리동네 뒷산인 대모산 둘레길을 걷는 기분이다.

날씨는 춥지만 호젓하게 걷는 이 맛...그 누가 아랴.

회룡재를 올라서니 예전엔 앞 사람 등산화만 보고 빠르게

걸었을 뗀 보지 못했던 망자의 천년주택도 보이는구나.

 

혜민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고...

바쁜 세상에 자기를 한번 뒤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면 좋을텐데...중생들은 

왜 그리 아둥바둥 바쁘게 살아가는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다 보니 돌무더기가 있는 서낭당이 나온다

서낭당(11:05)

상주시 공성면 봉산리 골가실마을에서 회룡마을로 넘어가는 안부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는 서낭당이 있고, 어떤 산행기에서는 이곳을 옛고개라고 해논 기록도 보인다 

서낭당은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며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俗信:민간에 전하는 미신적인 신앙 관습)이 있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으로서 신앙의 장소로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나무·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 다녔으며,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禁忌)가 지켜짐은 말할 나위가 없다...서낭이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농후하다.

 

우리 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하며, 그 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州府縣)마다

서낭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는데, 특히 전주서낭이 유명하였고,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新戶)를

가봉하였던 일도 있었다.

산도 사람이 그리운 모양이다.

산이 마을로 내려와 인간의 삶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가 지금 백두대간을 걷는 것인지 들판에 와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이곳 역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전형을 띠는 구간으로 비록 백두대간이라 하지만

지대가 워낙 낮아서 등산로엔 넝쿨지대가 많고, 주변에 논과 밭이 자주 나타나며,

무덤이 많이 있으며 그리고 대간보다도 주변 산줄기의 표고가 더 높아서 대간을

압도하는 하는 듯하다... 대간 능선이 오히려 주변의 산줄기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 돼 있다.

 

산에게 묻는다.

인간이 사는 마을...그리 그리워 할 일도 없소이다.

예전에 목숨만큼이나 중요시 했던 忠孝사상이나 三綱五倫같은 예의범절은

개밥으로 던져준 지가 오래되어 개만큼도 못한 인간들이 너무 많아 아수라판이

된 지가 오래됐소...오죽하면 올해 대학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가 과이불개

(過而不改)라고 했을까요.

 

* 과이불개(過而不改)란 논어의 ‘위령공편(衛靈公篇)’에 처음 등장한다.

  공자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에 나오는 단어로

  즉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고 했다

서낭당 고개에서 돌계단을 따라서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

정오를 지날 즈음에다 화창하게 햇볕이 내리 쬐건만 추위가

풀린 기미가 보이질 않고 낮은 지역이지만 능선에 불어대는 

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행여 대간꾼들이 알바를 할까봐서 대간길에 예전에 없었던 이런 이정표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평평하고 밋밋한 곳이라 해도 대간길은 대간길이다.

이곳 능선에 비가 내릴 경우 능선의 좌측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금강의 지천으로

흘러들어 금강으로 모여 서해 바다로 흘러들고, 우측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낙동강의 지류를 지나, 낙동강으로 모여 남해로 흘러드는 분수령 역할을 한다.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처사 아주신공(鵝洲申公) 묘(11:12)

신씨하면 대부분의 본(本)이 고려초에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 아니면 고령신씨인데, 처음으로 귀한 아주신씨의 묘를 만난다

등로 좌측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보이는 성봉산(571.9m)은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와

모동면 덕곡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별봉산이라는 이칭(異稱)을 가진 산이다.

저 능선 우측으로 이어지는 곳이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백학산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서낭당에서 고도를 높이는 곳이지만 워낙 능선이 완만하여 별 의미가 없다

y자 갈림길(11:17)

요즘의 대간길은 알바할 일은 거의 없을 듯 하다.

13년전에 처음 대간길을 걸을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활성화되지도 않았고, 앱도 없는 상태에에서는 나침판과 선답자의

산행기만 달달 외워서 산행을 할땐 알바를 밥먹듯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 1도 안해도 될 듯 하다

무명봉(11:19)

무명봉을 내려서니 안부가 나오고  잠시후 올라서니 갈림길이 나온다.

472.0m봉 갈림길(11:21)

갈림길에서 직진의 빡센 오르막으로 오르면 472.0m봉이 있고 원래의

대간길이나 십중에 아홉명의 대간꾼은 472.0m봉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의

사면길로 향하는데 나 역시 이곳을 4번째 통과를 하지만 한번도 472.0m봉을

오른 적이 없다.

오늘도 편안한 사면길을 따라서 백학산으로 향한다

사면길을 걸어가는네...

잠시후에 오를 513.9m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사면길에 양지라서 그런지 바람이 불지않아 잠시지만 춥지 않아 걷기가 편하다.

저 윗쪽이 오리지널 대간길로 472.0m봉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음팍파인 사면길을 지나니...

472.0m봉에서 내려오는 길을 만나서...

 개터재로 내려간다

개터재(380m:11:35)

경북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와 봉산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길은 뚜렸하다

원래 개터재는 이곳에서 공성면 효곡리 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편리상 개터재로 불렀는데 누군가 이곳 이정목에 옛고개라고 메직으로 써놨다.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의 자료를 보면 효곡1리 옥산전마을의 공서초등학교

성문분교 남쪽에 있는 고개로 장석골을 넘어 회룡골을 지나 공성면 봉산리

골가실 마을로 통하며, 개터재에는 상판저수지 물을 청리, 공성, 외남평야를

적시기 위한 수로가 지나는 고개이도 하다.

 

상주시 공성면의 마을 자료를 보면 개터재에 관한 자료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에 ‘개자(개+산)’가 있는데 ‘가장자리 산’이라고 한다.

‘자’는 ‘산(山)’을 뜻하는 옛말로 지금은 ‘척(尺), 성(城), 자(子), 작(芍)’으로도 쓰인다.

‘개 터’는 ‘개 티’로 본다. · 개(邊)+티(峙)+재(峴)=개 티 재 즉, 마을의 가장자리에

우뚝 솟은 산의 고개인 것이다.

개터재 좌측에 있는 효곡리는 효자와 열녀가 많이 배출되어 마을 이름이 효곡리로

지어졌고, 인심 좋고 범죄없는 마을로도 유명세를 다 하고 있다고 한다.

 

개터재의 유래는 유용하게 식량을 제공한 날짐승들이 많아 개터재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산세가 마치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설은 천지가 개벽(開闢)할 당시 물길이 터진 곳이라 해서

개터재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또한 부근의 봉산마을, 효곡마을, 왕실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 해서 봉산재, 효곡재, 왕실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금씩 고도를 높일수록 바람의 강도는 더 세지는 느낌이다.

무명봉(11:45)

무명봉에서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 간 다음에...

편안한 능선을 따라서 앞에 보이는 512m봉으로 향해서 조금씩 고도를 높혀간다

왔던길을 뒤돌아 본다...지난 11월에 걸었던 웅이산(국수봉)은 날씨가 맑건만 산은 흐릿하다.

눈 위에 쓰는 겨울 시 / 류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513.9m봉(11:51)

안부로 내려섰다가...

오르막으로 올라서서...

급경사의 우측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1:56)

날씨가 올 겨울에 춥다는  혹한(酷寒)이라는 구라청(기상청)의 빈 말은 아닌 모양이다.

시간이 정오가 되었건만 잠깐 사진 몇 컷 찍는 사이에 손이 굳어 버리는 느낌이다.

능선에서 좌측으로 비스듬히 대간길을 이어간다

무명봉(12:05)

고도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간길이라 그런지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수없이 오르 내리건만 아직도 윗왕실재는

보일 기미조차도 없다.

무명봉(12:07)

편안한 등로를 내려가니 지도상의 474m봉에 도착한다

474m봉(12:16)

가느다란 소나무길 사이로 대간길은 호젓하게 이어진다

능선에 올라서서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윗왕실재를 향하는데...

이곳에서 방심하다가 눈에 미끄러져 된통 꼬꾸라진다.

사고는 방심하다가 당하게 마련이지.

 

오늘도 산이란 스승에게 하나를 배운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준비해 두면 근심할 것이 없고

시불재래(時不再來)

‘한 번 지나간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는 뜻으로

 

우리네 인생은 백년을 산다 해도 삼만 육천 오백일 밖에 되지 않으며,

이 중에서 잠잘 때와 병든 날과 어려서 철모르던 때와 늙어 활동하지

못할 때를 빼고 나면 정말 짧은 우리 인생인데 아둥바둥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듯 하다

무명봉(12:25)

고도차가 전혀없는 지루한 능선을 한없이 걸아간다

성봉산에서 백학산으로 오르는 능선도 살짝 얼굴을 내민다

백학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상주시 山河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를 함께 부르면서 유래되었다”
"백두대간과 낙동강이 빚어낸 삼백(三白)의 고을 상주는 흰쌀과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으로 쌀, 누에, 곶감의 공통점은 모두가 하얗다는 것이다.

 

영남지방의 큰 고을이었던 상주(尙州)는 예부터 이 세 가지로 유명해 상주를 흔히

‘삼백(三白)의 고을’이라고 불렀는데, 우선 ‘삼백미’로 불리는 상주쌀은 경기미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질이 좋았고, 임금의 수랏상에도 오르던 진상품이었다.

게다가 생산량도 많아 한때 상주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은 강원도 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그것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고 한다.


 그 다음은 누에...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누에치기를 시작한 지는 4,000년쯤

되었는데, 상주 함창읍은 신라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하지만 한때는 산기슭을 온통 차지했을 뽕밭인데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양잠농가도

더불어 사라져 예전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그러나 요즘도 함창 장날엔 명주장이

설 정도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 은척면 두곡리에 은척뽕나무로 불리는 350년쯤 된

늙은 토종 뽕나무가 있는 것도 이 고장의 누에치기가 아주 오래됐음을 알려준다.

곶감은 분명히 말간 빛이 도는 주황색인데 왜 ‘삼백’에 속할까? 사정은 이렇다.

타래에 그대로 건 곶감에서는 하얀 분가루가 생기지 않고 사람이 손으로

만지작거려야만 분이 생겨난다...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곶감을 걸어놓고 손으로

만지며 모양을 만들었기에 하얀 분이 나와 곶감을 감쌌던 것이다.

이렇게 해야 곶감을 오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기술이 발달 하얀 분이 나오지 않아도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삼백의 고을’로 유명한 상주는 영남지방에선 확고한 권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우선 영남의 행정명인 경상도(慶尙道)는 신라의 천년 고도인 경주(慶州)와 상주(尙州)고을의

첫 글짜를 하나씩 따온 것이며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은 삼한시대에 상주 벌판에 자리 잡았던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던 낙양(洛陽)에서 유래했는데, ‘낙양의 동쪽에 와서야 강다운 면모를

갖추고 흐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하니 상주가 대단한 곳임을 이해할 만하다.

 

상주는 낙동강 주변의 기름지고 널찍한 들녘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곡창지대 뿐만 아니라 천혜의 방어막인 백두대간에 금과 철을 비롯한

지하자원을 품고있어 옛날부터 전략적 요충였다고 한다

 

화북면 속리산 자락에 있는 견훤산성과 모동면 백화산에 있는 금돌산성이 그 좋은 예다.

그래서 신라는 상주를 북방 경영의 전초기지로 삼았고,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이곳을

제2의 도읍으로 일컬을 만큼 소중하게 여겼는데 이런 상주의 위상은 고려를 지나 조선까지

이어졌고 세종 때에는경상도 감영이 설치되기도 했던 상주의 전성시대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경상도 감영이 대구로 옮겨가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능선 위를 걷다가 보니 바람을 피할 공간이 없어 바람과 맞서면서

걷는데 코까지 덮는 마스크와 귀마개 겸용은 코에서 나오는 수증기로

인해서 꽁꽁 얼어버린 동태처럼 되어 버렸다.

조금씩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466.7m봉(12:40)

계속되는 내리막길

쓰러진 고사목이 길을 막고있는 안부를 지나...무명봉으로 올라선다

무명봉(12:45)

참으로 지루하다.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윗왕실재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윗왕실재 동물이동통로에 바라본 윗왕실 마을쪽의 모습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에 있는 윗왕실 마을은 백학산이 마을을 마치 학이 알을 품은 듯

감싸안은 형세인데, 이런 터를 포란지세(包卵之勢)라고 하는데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이 으뜸으로 치는 명당이라고 한다.

윗왕실재 윗쪽으로는 동물이동통로가 지나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스텐레스 파이프로 난간을 만들어놔서 동물이동통로가 아닌 인간의

이동통로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도로 아래에서 바라본 윗왕실재 동물이동통로

(2017년 8월 2일) 백두대간 3차때의 사진

윗왕실재(400m:13:00)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윗왕실 마을과 독주골을 연결하는 고개로 소형 트럭이

다닐정도의 넓은 임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동물이동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윗왕실마을 고개라 해서 윗왕실재라고 하는데 왕실(旺室)이란 사위가 산으로

둘러 쌓여, 마치 구중궁궐처럼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산세가 왕이 기거하는 왕궁과 같다 하여 ‘왕재’라 하였으나, 민초들이

 함부로 왕을 입에 올리지 못하던 시절이라 뒤에 ‘실’자를 붙여 왕실재가 되었다고

하며 윗왕실마을 윗쪽이자 백학산 아래의 사면에는 반계천(磻溪川)의 발원지가 있다.

 

반계천(磻溪川)은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에서 발원하여 모동면 신천리 석천으로

합류하는 금강 수계의 지방하천으로 금강의 제 3지류, 초강의 제 2지류, 석천의

제 1지류로 하천연장은 10㎞, 유로연장 12.8㎞, 유역면적 53.99㎢이며,하천 중·

상류부에 상판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윗왕실재를 지나니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묘지가 있고 바람이 좀 잠잠한 곳이라

묘지를 바람막이 삼아서 가지고 온 찹쌀모찌 2개와 보온병의 따뜻한 생강차 한잔으로

점심을 겸한 휴식을 취한다(13:02~17)

간단한 점심을 끝내고 백학산으로 향하는 긴 호흡을 가다듬으며 오르막길로 향한다.

지맥 산꾼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망개나무(청미래)는 숨을 죽이고 있다.

눈이 없는 양지 능선을 치고 오른다

윗왕실재에서 빡세게 한달음을 치고 올라서니 능선이 나오고...

무명봉(13:30)

무명봉에서 좌측 능선 아래로 내려간다

이 능선은 키 큰 철쭉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봄철 산행이 제격일 듯 싶다.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서...

또다시 조금씩 고도를 높히기 시작한다

능선으로 오르지 말고 좌측 사면으로 가라고 하네...

연리지를 닮아 가는가?

무명봉(13:40)

가야할 백학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건만 고도를 높힐수록 바람의 강도는 드세진다.

묘지(13:50)

바람의 세기가 강할수록 함께 잔설도 조금씩 늘어난다

무명봉(13:56)

가야할 백학산을 바라보면서... 

완만한 내리막으로 올라간다

대간 등로 서남쪽 성봉산 아래에 있는 공성면 효곡리마을에는 효곡재사가 있다.

 

효곡재사(孝谷齋舍)는 조선조 선조 때 충신이며 학자인 우곡(愚谷) 송량(宋亮) 선생을

향사하고 자재를 훈육하기 위해 증손인 송영(宋領)이 숙종 11년(1685)에 효곡서원으로

창건했는데, 이후 규모가 협소해 정조 8년(1784)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서원의 강당

건물과 사당을 합해 효곡재사라고 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곡 송량 선생은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해 공을 세워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본향에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면서 아버지 송당(宋璫)에게
효행이 지극해 그가 살던 소곡(素谷)리를 효곡(孝谷)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존애원과 도남서원을 창설하는 데 참여했다.

우곡 송량 선생의 딸 노실부인은 노경건의 부인으로 임진왜란 때 남편과 함께 피난 중
남편이 왜군에게 죽고 부인을 겁탈하려 하자 노실부인이 ‘내가 죽을지언정 너희들을
따르지 않겠다’ 하고 꾸짖으며 항거하다 죽었으며, 또 막내딸인 정실부인은 정이괄의
부인으로 남편이 사망하고 홀로된 시어머니를 봉양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
아버지 묘 옆에 장사지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477m봉(14:02)

여러 개 구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대간 마루금에는 쓸모없는 구간은 없고,

각 구간마다 서로 보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으니 인간세상으로 치면 ‘사회적 동물’에 해당한다.

인간이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있어도 그 개인이 유일적(唯一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477m봉에서 고도를 살짝 낮췄다가... 

라디오의 노랫소리에 정신이 팔려서 아무런 생각없이 오르막을 오르는데

갑자기 뒤에서 부스럭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뒤에서

산꾼 한명이 무서운 속도로 나를 추월한다...미끄러운 등로에 스틱도 없이...

오르막으로 계속 오른다...잔설이 많아지긴 하지만

아직도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도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백학산이 가까워질수록 눈의 양은 늘어나지만 추운 날씨라 그런지

신발 바닥에 눈이 달라 붙지 않아서 걸어가는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산촌체험관 갈림길(14:22)

윗왕실재에서 이곳까지 오늘 산행구간중에 가장 힘들게 올라왔고,고도도

높았지만, 중화지구대라는 곳이라 그랬는지 비교적 편하게 걸어왔다.

 

큰재에서 출발하여 좌.우가 온전히 공성면의 구간을 걸었지만 이곳부터는

우측으로 상주시 공성면에서 내서면으로 들어서지만 좌측은 아직도 공성면이다

좌측으로 꺽어져 백학산으로 향하는 능선에는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들 정도로 바람이 드세다...이름난 산 치고 정상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모양이다.

백학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무명봉(14:30)

우측으로는 상주시 내서면 노류리가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나 대간길은 좌측이다

백학산 가는 길...바람의 영향인지 눈이 등산화 발목까지 차오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오늘 큰재-개터재-백학산 구간이 던져준 화두이다.

설악산이 아름답다는 것도 지리산이 웅장하다는 것도 오늘 구간처럼 확연히

대비되면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는 구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일명 장자봉이라고도 하는 백학산은 부드러운 육산이고, 정상의 공터에 세워진

표지석엔  '백두대간 白鶴山 615m'라 새겨져 있고, 수목에 시야가 가려 전망은

신통치 않다.

백학산 정상에는 예전에 없었던 안내판도 보이고...

백학산(白鶴山:617.7m:14:36)

경북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와 내서면 노류리, 모서면 대포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또 다른

이름으로 장자봉(莊子峰)이라고도 부르며,  백학산 서쪽 능선은 성봉산(572.1km)으로 이어지며, 

백학산은 세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세번째 봉에 앙증 맞게 생긴 정상석이 서 있다.

 

내서면 노류리 배골마을에서는 백골봉이라고 하는데, 골이 깊어서 한 번 들어가면 백골이 되어

나온다는 뜻이라고 한다...《‘백’은 ‘:1’에서 온 것으로 본다. ‘:2’은 ‘밝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백화산. 태백산. 소백산’에서 보듯 땅이름을 한자로 바꿀 때 대개 ‘백(白)’을 취했다.

이것은 옛 사람들이 산을 신성시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이며 ‘학(鶴)’은 봉황이나 거북과

기린처럼 상서롭게 여기던 동물이어서 풍수적(風水的). 기복적(祈福的)으로 지명에 많이

사용되었다.

 

지명의 유래는 산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 산 주위에 백학이 내려와 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정상에서 윗왕실마을을 바라보며 백학산이 마을을 마치 학이 알을 품은 듯

감싸안은 형세라고 하는데, 이런 터를 포란지세(包卵之勢)라고 하는데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이 으뜸으로 치는 명당이란다.

인증샷

엄청난 강풍으로 인해 잠깐 사이에 손이 굳어 버리는 느낌이다

너무 추워서 1분도 못 서있고 서둘러 길을 나서는데 백학산을

내려서면서부터 잠깐 조우했던 내서면과 작별하고 공성면과

모서면 경계 능선을 따라서 내려간다

중간중간 거리 표시도 없이 백두대간의 팻말이 있건만 바람도 드세고

손이 너무 시려서 바람을 피하려 뛰다시피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정신없이 내려가다보니 멋쟁이 소나무 한그루가 있는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14:45)

무명봉에서 살짝 좌측으로 꺽어지니 나무 계단이 나오고...

이내 넓은 임도로 내려서니 바람이 잠잠하다.

대포리(大浦里) 임도(400m:14:50)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에서 모서면 대포리로 연결하는 임도가 나오는데 소형

차량이 다닐 정도의 비포장 도로인데, 상주시 모서면에 있는 대포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소규모의 경지가 분포하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며 작은 하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함박골, 노산, 들안마을 등이 있다.

함박골마을은 대표리가 시작된 마을로, 백학산 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노산마을은 함박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갈대가 많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들안마을은 들이 넓게 펼쳐진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임도를 따라서 천천히 내려가니...

갈림길(14:52)

넓은 임도는 우측의 대포리 저수지로 내려가고 대간길은 임도와 작별하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이정표가 가르쳐준 능선으로 올라서니 대간꾼들의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추풍령에서부터 간간히 만나는 지기재 산장 안내판.

지기재 산장 쥔장의 나와바리 구역은 상당히 넓다. 

이곳부터는 고도차가 별로없는 고만고만한 무명봉을 오르내려야 한다 

405m봉(14:58)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걸어가는데 우측에는 약초 재배지인지

하얀 노끈으로 영역 표시가 되어 있다.

아무런 생각없이 無念無想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뒷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길래 뒤돌아보니 서너명의 대간꾼들이

인사를 하면서 나를 추월하여 간다

안부(15:00)

무명봉(15:05)

안부(15:07)

짧은 구간에 계속되는 오르내림이지만 고도차가 없어

그리 힘드는 줄 모르고 걸어가는데 들리는 소리라곤

눈을 밟는 뽀드득 하는 소리뿐...

무명봉(15:13)

안부(15:15)

참으로 지루하다

무명봉(15:25)

간간히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편안한 사면길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무명봉(15:30)

편하면 생기는 못된 버릇이 또 도지는 느낌이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온 탓인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산속을 벗어나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원삼 삼거리(15:45)

좌측으로는 상주시 모동면 덕곡리 원산마을로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가 보이고

우측은 모서면 대포리의 가장 큰 마을인 함박골로 이어지는 등로이며, 예전에

이곳이 서낭당이 있었는지 지도상에 서낭당이란 표기가 되어 있어나 지금은

서낭당의 흔적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원산 삼거리에서 함박골로 이어지는 등로의 모습

원삼삼거리 임도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간다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갔다 내려서니...

안부가 나오고 농토를 확장하는지 대간길이 야금야금 홰손되기 시작한다

안부(15:55)

안부에서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2017년 8월의 3차 대간길에서는 없었던 포도밭이 길을 막는다.

포도밭의 검은 차양막을 끼고 눈덮힌 농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이정표를 만나고...

개머리재로 내려서는데 조금전에 추월했던 대간꾼들이 타고온

차량인지 대구의 번호판을 단 버스 한대가 도로옆에 주차되어 있다

혼자놀기...오늘 산행중 유일한 인증샷

개머리재 좌우로는 전부 포도밭이다.

이 지역은 팔음산 포도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곳으로 이곳에는

씨가 없는 청포도의 일종인 샤인머스캣이란 이름의 포도 산지이다.

개머리재(犬頭峙:290m:16:04)

상주시 모서면 소정동과 대포리(일명 함박골)를 잇는 도로로, 개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포도나무밭 사이로 농로인 포장도로가 나 있으며 이곳 사람들은

소정재((召井峙)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소정동은 산 중턱에 위치하여 식수를 길어 올려야

했기 때문에 우물을 길어 올린다는 뜻의 소정(召井), 대포리(大杓里)는 이곳 지세가 북두칠성의

자루인 두 병이 능히 될 수 있다는 뜻에서 부른 것이라고 한다.

2차서 도로를 가로질러 지기재로 향한다.

처음에는 너무 추워서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할까도 생각했지만 이곳에서

한 구간을 끊으면 다음 구간이 힘들기도 하지만 이곳은 교통도 좋지않고,

차량도 많이 다니지 않아서, 히치하기도 그리 쉽지 않을 것 같고, 지기재까지

거리도 3여km밖에 남지 않은데다가, 비산비야 구간이라 어둡기 전에

지기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그러면 지기재에서 앵벌이(히치)를

시도하거나 운이 좋으면 버스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흔히들 하늘길이라고 불리는 백두대간이 마을 가운데까지 내려왔다.

이곳은 포도밭과 사과밭 그리고 농사들 짓는 민가들도 보인다.

산이 내려와 물끄러미 인간세상을 바라본다.

뭣이 그리도 궁금한 지?  궁금할 것 하나도 없소이다.

오직 사바세계의 苦行만 있을 뿐...

 

산이 아니 높고 낮음은 백두대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 같다.

백두대간은 하나의 산줄기이며 그 산줄기 자체가 하나의 산이다.

높고 낮음,오름과 내림, 들어감과 나감이 모두 하나였다. 높은 산이나 낮은 산,

오르막이나 내리막, 산으로 들어가는 일과 나오는 일 등이 모두 한가지였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 하나의 산, 하나의 산줄기를 이루는 것이다.
  
  '옛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하나의 산줄기로 인식한 것은 조화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화를 이루어야 숲이 되고, 산이 되고,자연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포도밭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농로를 지나서 숲속으로 들어간다.

저녁이 다되어 가는 시간에 포근한 숲속은 바람이 전혀 없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면서 육포와

보온통에 남아있는 따뜻한 생강차로 체온을 유지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나무계단에 깔려있는 잔설에다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묘지(16:25)

묘지가 있는 무명봉에서 조금을 더 진행하다가...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산악자전거 통제 시설물이 보이고 임도가 나온다

임도(16:30)

임도를 따라서 내려가니...

묘지가 있는 안부가 나오고,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서 걸어간다

임도 삼거리(16:33)

임도를 버리고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2000여리 대간 마루금 중에서 상주지역을 통과하는 175리(약 70여km)길을

경계없이 안고 차지하니 그 세가 만만치 않다...백두대간을 지나는 33여개

지자체중에 문경(116km) 다음으로 대간길이 많이 지나가고 있는 곳이 이곳 상주이다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는데 눈이 미끄러운게 아니라 눈 아래의 낙엽이 미끄럽다.

무명봉(16:40)

무명봉을 내려서는데 가느다란 소나무가 빽빽하고 조금전에

헤어진듯 한 임도를 다시만나 올라서니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16:45)

갈림길을 올라서서 조금을 더 가니 넓은 평상이 있는 안심산 갈림길이 나온다

안심산 갈림길(429.0m:16:50)

상주시 모서면 소정리와 대포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곳이 정상은 아니고

조금을 더가야 하는데 트랭글 앱과 지도에는 이곳을 안심산이라고 하고, 누군가가

이정표에다 안심산라고 메직으로 적어놨고 대간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모서면의 진산이라는데 상주시와 모서면의 어느 자료에도 안심산에 대한 기록은

없고,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어 갔다와도 될 시간이지만 그냥 대간길을 이어간다.

해는 저물고 산속이라 그런지 금방 어둠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살짝 꺽어져 내리막으로 향하는 급경사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스레 내려가다보니 시간이 조금 지체되는 느낌이다

산 속을 벗어나 들판으로 내려선다

지기재가 보이기 시작하고 대간길 가운데 포도밭 하우스가 

대간을 점령(?)하여 좌측이든 우측이든 삥 돌아가야 하는데 겨울에

포도농사철이 아니라 하우스옆 황토밭을 가로질러 지기재로 향한다

지기재로 내려서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헤드렌턴을 

안 켜고 산행을 마친다...추운 날씨에 고생한 내 몸뚱아리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2년반만 버티어 주라...

지기재(260m:17:20)

경북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에서 대포리를 잇는 고개로 901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주위에는 팔음산 포도라는 브랜드로 알려진 포도밭이 즐비하며

각종 이정표와 안내판이 어지럽게 서 있고, 금강과 낙동강의 수계(水界)를 가르는

분수령(分水嶺)이기도 한 고개이다.

 

지기재의 지명유래는 옛날 동네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적기(賊起)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마을 이름을 따 지기재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 없었던 지기재 안내 표지판도 서 있다.

산행을 끝내고 지기재 버스 정류장 안으로 들어서서 추위를 피할검

베낭을 정리하고 정류장 안에 붙어있는 버스 시간표를 읽어 보지만

외지 사람들은 전혀 알아볼 재간이 없다...주위에 농가가 몇 채 보이긴

하지만, 한결같이 불이 꺼져있는 적막강산이라 사람을 구경할 수 가 없어서

버스 시간을 알 수가 없다.

외지인에겐 무용지물인 상주시내버스 시간표.

버스 시간표를 보고 있는 사이 약간의 어둠속에 상주시내로 가는 버스가

나를 보지 못했는지 버스정류장에 정차도 않고 지나가 버리는구나...이제는 방법이 없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차량도 별로없어 히치할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지기재 좌측 아래에 있는 모동면 택시를 호출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오면 이용하는 화령택시 이진석 사장님에게 전화를

하니, 내 전화번호를 입력해놨는지 단박에 나를 알아보고는 춥고 늦은 시간에

왠일이냐고 한다...빨리 지기재로 와 달라고 하니 15분정도 걸린다고 한다.

택시가 도착하고 이 사장을 만나서 상주터미널로 향한다

상주터미널(18:02)

이사장이 택시에 내리는데 포도쥬스 2개를 주지만 추워서 먹을수는 없다.

버스표를 예매하고 나니 35분정도 시간이 남아있어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터미널 내 구멍가게에서 라면하나를 끓여서

저녁을 해결하고  오뎅 2꼬지에다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팩소주 하나로

몸을 녹인 다음에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