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양산 정상에서 봉암사를 바라보면서 禪師들에게 묻습니다.
둘로 갈라진이 나라의 民心을 정녕 치유할 방법은 없는지?
☞ 산행일자: 2012년 11월 13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에 지독하게 짙은 안개
☞ 산행거리: 도상거리 7.5km + 들머리2.4km +날머리 2.3km / 7시간 50분 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따라서
☞ 산행코스: 은티마을 주차장-은티마을회관-은티재-주치봉-안부-오봉정재-암봉
680m봉-너럭바위-무명봉-746.6m봉-조망바위-마당바위-구왕봉
전망바위-전망바위2-지름티재-전망바위3-희양산 갈림길-마당바위
희양산-다시 희양산갈림길-희양산성터 사거리-암봉-안부-871m봉
안부-910m봉-안부-무명봉-무명봉-배너미평전-사선봉-무명봉-안부
시루봉 갈림길-너럭바위-도막 갈림길-이만이골 능선 -도막마을
☞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연풍면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지난 한주간은 소득도 안되는 일에 정신없이 다니다보니 상당히 피곤하다.
오랫만에 짧은 구간이긴 하지만 은티재에서 주치봉~구왕봉에서 희양산 오름 구간,
암릉의 직벽구간은 백두대간 코스중에서 가장 힘이드는 난코스이지만 3번이나
이곳을 무난히 걸었기에 큰 걱정은 안된다마는 예전에 비해 너무나 떨어진 체력이
문제이고, 거기다가 비가 온다는 예보로 인해 걱정이다...후배들이 다니는 산악회가
이곳을 간다기에 신청을 해놔서 안 갈수는 없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산행
당일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양재역에서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에 접어드는데 비는 내리지 않으나
짙은 안개가 주위를 감싸는 바람에 오늘 산행에서 멋진 仙景은
일찌감치 접어버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있어나니 버스는
어느새 은티마을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산행을 시작하다(09:20)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한 다음에 은티마을로 들어서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주차장 입구에 있는 등산 안내도
조선 초기 연풍현 당시 현내면 연지동에 속해 있었으며 1812년에 작성된 동절목(洞節目)에는
인지동 의인촌리로 기록되어 있고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인(義仁)이라는 동리명이 한국의
민족 정신이 함유 되었다고 하여 은치(銀峙)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1914년 일제 때 행정구역 통폐합시 주진리라 하였으며 8.15이후 행정구역 세분화 작업시
이곳은 다시 주민들에 의해 “은티”라고 하였으며 풍수 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여궁혈(女宮穴)로서 동리 입구에 남근을 상징하는 물건을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주민들이 아들딸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입구 송림에 남근석을 세우게 되었다.
은티마을 유래비
은티마을은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周榛里)의 마을로 산꾼들에게 있어 주진리보다
더 유명하며, 희양산,구왕봉,마분봉,악휘봉 등을 산행하기 위해서는 이 마을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은티마을 초입에는 기풍있는 노송들이 사열하듯이
즐비하게 서 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한 산골마을로 은티마을 입구의 유래비에서는
계곡의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으로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쌘 음기를 막기위한 풍수의 하나로 남근석과 소나무등를 심어 놓았다 한다.
은티마을 남근석(男根石)
은티마을은 희양산과 악휘봉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이 만나는 합곡점에 있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 때문에 가끔 수해를 보는데 그 개울 줄기가 여인네의
오줌줄기 같다해서 수해의 방패막이로 마을앞에 남근석을 세워놓고 끔찍이도 위하고 있다.
약 50cm정도의 작은 비석처럼 생긴 돌인데 은티마을이 자궁혈의 형상을 띠어 살기 좋지만
여자들의 기가 너무세다하여 입구에 소나무숲을 만들고 남근석을 세워 남녀 기를 조화시켜
놨는데 남자가 기도를 올리면 구구팔팔 복상사 여자가 남근석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원하는 아들을 낳는다 마을에서는 매년 동고제(洞告祭)를 지낸다
은티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초이튿날에 남근석에서 동고제(洞告祭)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옛날에는 제의식을 엄격하게 준수하여 제관으로 선출되신 분은 보름전부터 대문에
금기줄을 쳐놓고 바깥출입도 삼가하고 부부생활도 금기하고 불경스러운 것도 보지않고
동고제 아침에는 계곡에서 찬물로 몸을 딲고 제를 주관하는 의식이 전해 왔는데 최근에는
젊은층이 많이 없어지고 고령화되다가 보니 약식으로 진행하는 경향이 짙다고 한다.
은티주막을 지나서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데 기아자동차 박물관에
있어야 할 골동품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은티마을회관(09:25)
앞서가던 후배산꾼들이 마을에서 농장쪽으로 가다가 쫓겨난다.
난 처음부터 마을회관에서 마분봉가는 포장도로를 따라왔는데
이곳에서 다시 만난다.
마을과 농로를 지나서 숲속으로 들어선다
은티재로 오르는 길... 원시림을 방불케하는 산자락 능선으로 시선을 옮기며
오르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은 밝아지고, 머릿속은 차고 맑아지는 느낌이고
은티계곡은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잠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오랫만에 후배들과 같이하는 산행...꾸역꾸역 오르다보니 은티재에 먼저 도착한
후배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오늘은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니 그것 또한 범여에겐 스트레스로 돌아온다.
혼자 산행을 할 걸, 괜히 후배들 따라왔나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은티재(銀峙:520m:10:12)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오봉정에서 괴산군 연풍면 은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은티재 또는
오봉정 고개라고도 부르며 은티(銀峙)마을은 조선시대에 의인촌리(義仁村里)라는 동네 이름이
일제 강점기에 인재의 출현을 막기위해 은티(銀峙)라고 개명을 하였으며 이곳에 은광(銀鑛)
탄광이 있었다고 한다.
은티재의 가은읍 오봉정마을로 이어지는 남쪽은 늘 출입금지지역이다
먼저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후배 산꾼들
제주댁 비바리...오랫만에 만난 제주댁은 늘 씩씩한 모습이고
표정은 밝은데 밥은 안굶고 잘사는지 모르겠다.
어제 내린 비탓인지 등로의 낙엽은 물기에 촉촉히 젖어 있다.
오늘 이곳도 경방기간이라 출입이 통제된 지역인데 다행히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편하게 대간길을 걷는다
주치봉을 오르는 빡센 오르막길
조금전까지만 해도 뒷모습이 보이던 후배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홀로
미끄러운 낙엽길을 따라서 급경사의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초반이라 몸뚱아리가
예열되지 않은 탓인지 심장이 터질듯한 통증이 수반되면서 걸음은 늦어진다.
선 채로 가다 쉬다를 하면서 주치봉을 올라가는 심정은 옛날 중국에 살았던 우공(愚公)이 산을
옮기듯 愚公移山의 심정으로 천천히 올라서니 예전엔 없었던 산패가 2개나 있는 주치봉에 도착한다.
은티재에서 300m정도 밖에 안되는 오르막길을 극심한 심장의 고통을 느끼며
거북이 걸음으로 걷다보니 26분이란 시간이 걸려 주치봉 정상에 도착한다
주치봉(珠哆峰:696.6m:10:38)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은티마을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오봉정 마을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이 큰(哆) 구슬처럼 보여 주치봉이라고 하는데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지명 표기없이 696.6m봉으로만 표기가 되어 있을 뿐이다
정상에는 해밀산악회 관우님이 설치한 조금만한 산패와 자유인 24기 종주대에서
설치한 산패에는 “周峙峰”이라 표기를 해놨고 고도도 정부에서 발행한 지도와는
차이가 난다
정상에서 숨한번 크게쉬고 미끄러운 낙엽길을 따라서 올라온 만큼 내려간다
안부(10:45)
은티마을에서 올라오는 등로는 뚜렸하나 오봉정 마을로 이어지는 우측은 막혀있다.
은티재에서 배너미평전까지의 남쪽 등로는 봉암사로 인해 차단되어 있는 상태이다
은티마을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
안부를 지나 3분동안 젖은 낙엽을 밟으며 호젓하게 걷다보니 너무 좋다.
산악회를 따라오긴 했지만 실제로는 나홀로 걷는 독립군인데 이게 참으로 좋다.
잠시후에 安東權公과 慶州孫氏 묘비가 있고 좌측으로 은티마을로 내려서는 오봉정 고개에 도착한다
오봉정재(640m:10:48)
安東權公 묘지뒤에 이정표(→악휘봉 3.0km, ←구왕봉1.6km, ↓은티마을 3.8km)가 있고,
기둥에 누군가가 메직으로 호리골재라고 적어놨는데 옛 문헌에는 오봉정고개라고 되어있다.
좌측의 은티마을에서 올라오는 골짜기가 호리골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고
옛날에 원북리 오봉정 마을에서 봉암 용곡으로 오다가 은티로 가는 최단 길이 이곳이고
은티재는 돌아가는 길이었기 이곳이라 오봉정고개가 맞는 듯 하며 오봉정마을 쪽은 지금
폐쇄되어 있다.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에 있는 오봉정 마을은 주위가 구왕봉, 원평봉, 주치봉,
장성봉, 애기암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였다고 하여 오봉정이라 불렀다하며,
봉암사에서 산길로 약4km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1970년대 독가촌 정리시에
완전히 폐촌이 되었다고 한다
가을이 가고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지난밤에 내려는지 촉촉히 젖은 낙엽을 밟으며
홀로걷는 이 맛에 산길을 걷는 독립군 범여는 어쩌면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구왕봉을 향하는 꾸역꾸역 오르막이 시작되지만, 조금전에 은티재에서 주치봉
오르는 심장이 터질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빡센 오르막을 올랐던 학습효과 탓인지
아니면 몸뚱아리가 예열된 탓인지는 몰라도 수월하게 오르막으로 오른다
예전에는 저 위에 보이는 암릉구간 윗쪽으로 대간길을 이어갔는데
힘들어 하는 범여를 배려함인지는 몰라도 암릉 아래 사면길이 나있다.
암봉(10:52)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등로를 부지런히 걸어보지만 앞서간 산꾼들은
코빼기도 안보인다...대장이 하산 시간을 오후4시라고 했는데 큰 걱정은 안한다.
어차피 구왕봉에서 희양산 오름길은 직벽의 암릉구간이라 이곳을 통과하는
시간차는 그리 많치않을테고...그 이후에 후배들은 이만봉, 곰틀봉을 지나서
사다리재로 내려가지만, 난 지난번에 나홀로 그 구간을 했기 때문에 시루봉
갈림길을 지나 이만이골 능선을 따라서 내려가면 3km정도 산행거리가
짧기 때문에 아무리 느려도 비슷하게 하산 시간을 맞출것 같다
680m봉(11:00)
등로 주변에는 아직 잎이 떨어지지 않은 꼬리털진달래가 간간히 보인다
암릉이 대간길을 막는다...우측으로 우회하면 내려간다
구왕봉에서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암릉구간에 보여주는 맛보기인가?
암릉구간 능선에서 사면으로 대간길이 나있어서 편하게 부지런히 걷는다.
知者不言(지자불언) :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言者不知(언자부지) :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노자 도덕경 제56장의 첫 구절로 나오는 문구로 말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말로 인한 오류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無說說(무설설) : 말하는 바 없이 말하고
不聞聞(불문문) : 듣는 바 없이 듣는다.
불교 경전인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에
관음보살과 남순동자가 나눈 대화에 나오는 문구이다
능선에 올라 좌측으로 대간길을 이어가니 너럭바위가 나온다
너럭바위(11:20)
너럭바위 아래로 내려가니 바위 사이로 좁은 공간이 나오는데...
강호동이는 못 지나가겠다
경북과 충북, 강원 남부지역에 자생하는 꼬리털 진달래
산림청이 지정한 멸종희귀식물로 늘 푸른 잎으로 겨울을 나고
6~7월에 하얀꽃이 피는데 하얀꽃과 잎이 다른 진달래의 식물보다는
키가 작은게 특징이며, 긴 꽃대에 꽃꼭지가 있는 여러 개의 꽃이 어긋나게
붙어서 밑에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끝까지 핀다고 하여 한문 표기로는
총상화서(總狀花序)라고 한다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너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무명봉(11:22)
구왕봉 가는길
좌측 능선이 대간길이나 우측으로 가라고 하네...
사면길로 걸어서 가니...
능선에서 좌측으로 올라간다
746.6m봉(11:32)
그저 밋밋한 봉우리이나 엄연히 국토정보지리원에 등록된 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대간꾼들에게는 무심하게 홀대받는 봉우리이다
아침보다 더 짙은 안개가 몰려온다
조망바위(11:40)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은티마을은 모든게 餘白이다
계속되는 암릉구간
마당바위(11:40)
마당바위로 아래로 내려서면서 부터는...
구왕봉가는 길이 아주 편하다
대간길의 수호신으로 자처하는 소나무?
구왕봉(九王峰:879m:11:50~12:10)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맞은편에 있는 희양산의 명성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신라 헌강왕 5년(879년) 지증대사가 봉암사에 자리를 정하고 그 곳에
있는 큰 못을 메울때 연못에 살던 아홉마리의 용을 지증대사가 신통령을 발휘하여 내쫒았는데
쫒겨난 용들이 멀리가지 않고 봉암사와 희양산이 잘 내려다보이는 이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
지증대사에게 연못에 살게 해달라고 울부짖었으나 소원을 들어주지 앉자 여기에서 돌로 변했는데
이 봉우리를 구왕봉이라 하는데 원래는 구룡봉(九龍峰)이었는데 봉암사에서는 이 산을 날개봉이라
하며 매년 이곳 정상에 소금단지를 묻어 氣를 눌러 준다고 한다
구왕봉은 희양산 아래 봉암사 창건 당시 각종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모양새나 경치로 보면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산으로 그저 일반 산이나 다름없이 둥그스럼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양산보다 구왕봉이 더 마음에 든다.
나는 ‘사리’가 아니라 ‘사리 항아리’ 혹은 ‘들러리’라도 좋다. 가능하다면 구왕봉을 닮고 싶고,
구왕봉처럼 살아가고 싶다. ‘남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산 ...
살아가는데 필요한 평범한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산이기 때문이다.
꼴찌로 구왕봉에 도착하니 선두는 이곳에서 점심만찬을 끝내고 가버렸고 후미팀으로
남은 산꾼들이 출발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총무을 맡고있는 여성 산꾼이 너무 늦게온
나를보고 안쓰러웠는지 사과 2쪽과 호도과자 3개를 주면서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보면서
먼저가는게 미안했던지 뒤돌아 보면서 간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으로는 가져온 단감 2개와, 보온통에
담아온 따뜻한 생강차, 조금전에 총무님과 노루 아우님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다솜이라는
여성산꾼이 준 호도과자로 점심을 대신하며 20분간의 여유로운 휴식을 취한다
인증샷
20여분간의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는데 땀으로 젖은 옷으로 인하여
갑자기 寒氣가 몸뚱아리를 엄습하여 오기에 베낭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전망바위(12:12)
마당바위에 서니 짙은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맞은편의 희양산이 조금씩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오늘 희양색시의 全裸를 감상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지름티재로 내려가는 본격적인 직벽의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짧은 로프 구간이 지나고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니 전망바위가 나온다
전망바위2(12:20)
전망바위에 올라서니 맞은편에 있는 희양산이 요염한 자태로 속살을 드러내며
夢幻的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짙은 안개로 인해 오늘 산행을 하면서 멋진 선경을
포기했는데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자체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지름티재에서 우측으로 뻗어있는 봉암구곡 끄트머리에 있는 봉암사가
안개에 가려있어 肉眼으로는 뚜렸하게 보이나 똑딱이카메라로는 흐릿하다
천년가람 봉암사는 신라 헌덕왕 5년 지증대사가 창건한 구산선문중 하나이며
성철,한암, 청담스님을 비롯한 고승대덕을 배출한 유서깊은 사찰로 오늘까지
계보가 이어지며 1년중 사월초파일 딱 하루만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사찰이다.
*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아 그 문풍(門風)을 지켜 온 아홉 산문(山門)을 말한다
1, 홍척(洪陟)국사가 개창한 남원 실상사(實相寺)의 실상산문(實相山門)
2, 도의(道義)선사가 개창한 장흥(長興) 보림사의 가지산문(迦智山門)
3, 범일국사(梵日國師)가 개창한 강릉 굴산사(崛山寺)의 사굴산문(闍崛山門)
4, 혜철((惠哲)선사가 개창한 곡성(谷城) 태안사(泰安寺)의 동리산문(桐裏山門)
5, 무염(無染)국사가 개창한 보령 성주사(聖住寺)성주산문(聖住山門)
6, 철감선사 도윤(道允)이 개창한 영월 법흥사의 사자산문(獅子山門)
7,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스님이 개창한 문경 봉암사의 희양산문(曦陽山門)
8, 원감(圓鑒)선사 현욱(玄昱)스님이 개창한 창원(昌原) 봉림사(鳳林寺)의 봉림산문(鳳林山門)
9, 이엄(利嚴)선사가 개창한 해주(海州) 광조사(廣照寺)의 수미산문(須彌山門)을 말한다.
잠시후에 저 직벽 능선을 오를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하지만 가야할 길이라면 가야지
조선조 4대 명필중에 한 사람인 양사언(楊士彦)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하지 않았던가...험하던 험하지 않던간에 길을 걸을 때는 최선을 다해 걸어야 함이니,
긴장을 하고 마음가짐을 제대로 가지고 오른다면 오르지 못할곳은 없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갑자기 사람소리가 들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같이온 동료산꾼들이 직벽구간을 한 사람씩 조심스레 내려간다
조심들 하소...나뭇 뿌리는 밟지 마시고..
희양산 남쪽 봉암사가 있는 고을이 문경시 가은읍인데 후삼국 시대 한반도의 한쪽을
장악하고 고려, 신라와 자웅을 겨루던 인물이 문경 가은 출신의 견훤(甄萱)으로
황간 견(甄)씨의 시조로 본래의 성은 李氏로 아자개의 아들이다
892년(진성여왕6년)에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측하여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후백제를 세워 왕이되어 세력을 넓혀 나갔지만 935년 왕위
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로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였다가
이듬해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킨 비운의 인물이다.
문경군 가은읍은 1970년대에는 탄광이 40여 개나 있던 탄광촌이다.
지금도 읍 소재지 석탄 박물관에 가면 실제로 지하 갱도의 채굴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가은읍 갈전리 아차 마을은 후삼국 시대 패권을 다투던 견훤이 내어난 곳이며,
지나온 조항산 아래 궁기리는 군사들을 훈련 시킨 곳이며 상주시 화북면과 화남면 지역에는
견훤의 이름이 붙은 산성도 남아 있다.
북측의 은티마을 뒷쪽에 있는 광산터의 흔적도 보인다
1차 직벽구간을 내려선 다음에...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 봉암사!
봉암사는 대동여지도에는 양산사(陽山寺)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봉암사와 양산사의
관계를 보여주는 문헌은 흔치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양산사란 문헌이 보인다.
한국 불교의 불교의 생명수와도 같은 봉암사를 품고있는 희양산은 너무도 아름답다
일체중생이 번내의 틀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출가인은 분발하여 사람마다
본래 구국한 불성을 바로보아 사람과 스승이 천상됨이라...
봉암사와 성철스님...타락하고 세속에 찌든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신 분이 퇴옹당 성철스님이다
흔히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유명한 법문으로 유명한 큰 스님
‘부처님 삶으로 돌아가자’는 성철 스님의 ‘봉암사 결사’ 정신
그 당시 일제에 의해 일제에 의해 타락의 길을 걸었던 한국 불교의 법맥을 살리기 위해 해방 직후
성철 스님을 필두로 청담·자운·보문 스님 등 수행승들이 “부처님 법대로”를 외치며 펼친 자정운동이다.
이후 수행과 참선을 중시하는 한국 불교의 법맥이 기사회생했던 곳이 저 곳 봉암사이다
봉암사(鳳巖寺)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국사(智證國師) 도헌(道憲)이 창건했다.
그리하여 봉암사에 선풍이 크게 떨치니 이것이 바로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국정쇄신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런 헌강왕의 개혁의지를 심어준 이념이 곧 지증국사의 선사상이었다.
그리고 특기할 사항은 해방 직후인 1947년에 소위 '봉암결사'라 하여 한국 현대불교의
초석을 다져놓은 획기적인 불사가 봉암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며, 그리하여 1982년
봉암사를 조계종 종단에서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 뜻에 부응하여 문경시에서는 사찰 경내 땅을 확정 고시했으며 희양산
봉암사의 법당을 중심으로 반경 4km 이내는 특별수도원 지역으로 고시함으로써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불교계의
염원이 담긴 사찰이므로 그 배후가 되는 희양산에 대한 특별관리를 등산객들은 이해해야 할 줄 믿는다
2차 직벽구간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구왕봉 직벽구간의 위험지대를 벗어나면서...
우측의 봉암사를 내려다보면서 철저하게 둘로 갈라진 현재 이 나라의
현실을 보고 성철 큰 스님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하다.
작금의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내편이면 무조건 선하고 착한 사람이고,
나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악마같이 나쁜 넘이라는 이분법으로
갈라치기를 한다...하기사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분단국가라서 그런가.
성직자들이 존경받는 것은 言行이 타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전에 사람들이 김수환 추기경에 물었다
“추기경님은 여러나라 말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어떤나라 말을 가장 잘하십니까”
그런데 돌아온 뜻밖의 대답이 “내가 가장 잘하는 말?... 그건 거짓말이지”
온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던 추기경이 거짓말을 잘 했을리 없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했을지도 모를 거짓말에 대해서 겸손하게 고백했을 뿐일 것이다.
저 아래 보이는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를 외치면서 수행했던 성철 큰스님도
“한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라고 했다.
큰 스님께서는 일찍이 깨달음을 얻고 후학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남겼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을 後學들이 잘못 받아들였다면 결과적으로 속인것이 된다는 뜻일게다
얼마전에 벌어진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155명의 젊은이의 아픔을 가지고도 애도와 추모는
형식적이고 자기들의 정치적 이익에 매몰되어 있고, 정의를 구현한다는 신부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해외에 순방중인 대통령의 전용기가 추락했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올렸다고
SNS에 글을 올리며 민초들을 선동하고 있는 걸 보면서 저 성직자에게 배운 人性이 어딜갈까
싶은 생각에 원망보다는 惻隱之心이 드는 건 가방끈 짧은 나만의 생각일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누차 강조했건만 저 신부가 사제 활동을
하는 성당에서 그것보다는 ‘원수에게 증오와 적개심’만 설교 내용에 있는 모양이다.
“義人의 입은 생명의 샘, 惡人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 는 성경 말씀은 배우지 않은 모양이다
요즘은 김추기경이나 성철 큰스님같은 스승은 없고, 다 그런건 아니지만 시정잡배보다도
못한 성직자들에게 가야산의 호랑이라 불리셨던 성철 큰스님께서 생존해 계셨더라면
우매한 중생들에게 竹篦를 내리치면서 어떠한 법문을 하실까?...
직벽구간을 벗어나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봉암사 초소가 있는 지름티재로 내려선다.
지름티재(周峴:642m:12:42)
괴산군 연풍면과 문경시 가은읍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재로 희양산과 구왕봉 오르는 길이
지름(기름:油)을 칠해 놓은것 처럼 미끄럽다하여 지름티재라고 불리고 있으며 지름티재 정상
바로 위에는 감시초소가 있고 우측의 봉암사 쪽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초소와 목책이 있어서
봉암사쪽으로는 출입을 할 수 없으며 은티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주현(周峴)이란 표기가 보이는데 지름티재의
옛 지명인듯 하며, 周峴의 ‘두루 주(周)는 수학에서 사용되는 ‘원(圓)’이나 ‘구(球)’를
표현할 때 그 중심을 지나가는 직선을 ‘지름’이라 하는데, 한문으로 표기를 하다보니
周峴이 되었고, 근대들어 한글로 풀어쓰다보니 고개를 나타내는 ‘재’ 붙혀서
지름치(峙), 자름티가 된 듯 하다.
지름티재는 지릅티재라는 지명도 간간히 보이는데 은티마을에서 봉암사로 갈 때,
‘질러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생긴 명칭으로 어떤 이는 ‘지름’은 ‘기름’의 경상도 방언을
따서 ‘유치(油峙)’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이 지름티재가 은티마을에서 희양산으로 오르는 최단거리이다.
이곳에서 봉암사가 있는 원북리 방향은 봉암사의 수행 공간이라는 이유로
목책으로 꽉 막혀 있어서 대간꾼의 원성이 자자한 곳인데 佛者인 나도 불편하다.
꼭 저래라만 수행이 잘될까...그래도 예전과는 달리 초소는 있으나 다행히도
눈을 부라리고 지키고 있는 스님들이 보이지 않으니 지나가기가 훨씬 수월하다.
이곳은 봉암사와도 거리가 있고, 스님들의 수행공간을 해칠정도는 아닌것 같은데
절집과 대간 산꾼들과의 원만한 합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지름티재에서 희양산 갈림길까지 1.1km의 거리를 고도를 330m를 높혀야 하는
급경사의 직벽구간이다...본격적인 빡센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목불인견(木不忍見)
거대한 암릉을 손가락보다도 더 적은 나뭇가지로 받쳐있는
저 뜻은 선지식(禪知識)은 어떻게 해답을 내 놓을까?
희양색씨(?)를 만나러 가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첫 관문을 통과하고...
봉암사 목책을 따라서 황소걸음으로 오르는데 같이온 산꾼들은
산속으로 빨려 들어 갔는지 도데체 보이지가 않는구나
전망바위3(12:55)
전망바위에서 뒤돌아 본 구왕봉의 모습
암릉구간이 시작되고...
암릉사이를 비집고 지나가야 하는데 뚱돌이 산꾼들은 힘들겠다.
금방이라도 떨어질듯한 암릉의 겁에 질려 서둘러 빠져 나간다
봉암사를 외호하는 멋쟁이 소나무
중들이 헛짓거리 하지 못하게 수행만 전념하는지 잘 감시하소
희양산 오름길의 본격적인 직벽구간이 시작되는데 산꾼을 급박하는 문구가 보인다.
너무 걱정하지마소...희양산을 오르는 산꾼은 그리 나약한 사람은 없소이다
빡센 오르막길...범여에겐 쥐약같은 구간이다
심장의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급경사의 오르막과 눈이 마주쳤을 땐 단숨에 기를 죽일 태세였지만,
愚公노인이 산을 움직이듯 느릿느릿 한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면서
희양산을 향한 직벽구간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苦行
한검선사께서는 어둠속에 지나가신 모양이다.
너덜길을 올라서니 동료산꾼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직벽구간의 정체지역이 시작되는 지역인가보다
동료산꾼들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나도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빡센 오르막을 올라서니...
마지막 직벽구간이 앞을 가로 막는다
바짝 긴장을 하면서 암릉구간을 올라서는데 다리에 힘이 빠진다.
속된말로 게거품을 품어면서 능선에 올라서니 후배 산꾼이
베낭을 받아주고, 먼저 올라선 후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희양산 갈림길에 도착한다
희양산 갈림길(975m:13:40)
지름티재에서 희양산 갈림길까지 1.1km의 거리를 58분에 걸쳐 힘들게
도착하여 물 한모금을 마신 다음에 갈림길에 베낭을 벗어놓고 스틱만
가지고 대간길에서 400여m 떨어진 희양산으로 향한다
희양산가는 길에 바라본 구왕봉은 잠깐 사이에 구름속에 숨었다,얼굴을
내밀다가하는 모습이 마치 예전에 개경(개성)에서 뭇남성들의 애간장을
다 태웠던 황진이의 치맛자락을 연상케 한다
마당바위(13:45)
마당바위의 아랫쪽을 바라보니 봉암사가 짙은 안개에 숨어 버렸다.
30년도 넘은 시절에 성철스님께서 종정으로 계실때 조계사 법상(法床)에
올라 사자후(獅子吼)로 하시던 그 법문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벌써 입적하신지가 30년이 다 되어 가는구나...왠지 이 난세에 큰 스님이 그립구나.
아무래도 조만간에 산청에 있는 겁외사를 한번 갔다와야겠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
산 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 열반송(涅槃頌)이란 선불교를 공부하는 선사(禪師)들이 남긴 ‘죽음을 노래하는
한 편의 시’라고 할 수 있으며, 삶을 마감하면서 살아있는 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언어로 그 속에는 한 인물의 전체 삶이 압축되어 있어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희양산(曦陽山:996.4m:13:57)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정상은 백운대라 부르면
동.서.남 삼면이 거대한 암벽으로 구성된 암산(岩山)으로 거대한 통바위 형태로
압도적인 덩치의 화강암으로 이루진 산으로 햇볕 '희(曦)`, 볕 '양(陽)`이란 이름으로
백두대간의 단전(丹田)이라 불리는데 희양산에 대한 또 하나의 별칭은 봉암(鳳巖)으로
봉암이라는 표현은 지증대사 비문에서 희양산의 계곡을 '봉암 용곡(鳳巖龍谷)`이라고
한 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암봉(岩峰)들이 열두판의 꽃잎처럼 펼처져 있어 멀리서 보아도 우람하고 단단한 기운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세로 주위의 산군(山群)을 호령하고 있는듯 하며 남쪽 산 아래에는
천년고찰 봉암사가 자리를 잡고있다.
희양산은 문경지방에서 보아야만 희양산을 참맛을 느낄 수 있지만 산문(山門)을
1년에 한번밖에(사월 초파일) 개방하지 않는 희양사가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부득히 은티마을로 오를 수 밖에 없다.
희양산을 둘러보고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가 ‘산이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 처져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고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의 물은 백겹의 띠처럼되었으니
뿔없는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듯 하다’ 며 감탄을 하고 이 땅을 얻은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둑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백화산을 일으켰던 소백산 줄기가 서쪽으로 휘어지면서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그 산들 중 하나가 희양산으로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산이다.
산 중턱에서 정상쪽으로 암벽을 두르고 솟은 모습이 특이하며 옛날 사람들은 장엄한 암벽을
보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 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빚어논 바위들이 기기묘묘하고 바위끝에서 내려다 보는 봉암사의 까만
기와지붕이 감회를 불러 이르키고 20리 봉암구곡이 소나무숲에 쌓여 진풍경을 연출하는
곳으로 백두대간을 달려간는 백화산과 이만봉이 가까이에 서 있고 원북리 계곡이 깊게 느껴진다.
희양산!
오늘 백두대간 길의 불교에서는 희양산을 우리 국토의 사리라고도
하며, 혹자는 희양산은 우리 국토의 丹田이라고도 한다.
버리미기재에서 희양산을 거쳐 하늘재에 이르는 마루금은 여타 마루금과는
달리 인체의 內臟처럼 동서로 반복적으로 휘어지며, 이 가운데 희양산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고해서 호칭으로 그래서 그런지 희양산 아래에는 한국 선불교의
대표 사찰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희양산은 이런 산세나 지형보다 불교사적인 면에서 더 가치를 발한다.
희양산 산정에는 40m 정도의 벼랑을 이룬 암봉에 다섯 줄이 파여져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의 흥기를 막기 위하여 칼로 혈도(穴道)를 끊은 것이라는
전설이 얽혀 있고 또한 봉암사의 용바위에서는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祈雨祭)가
행하여졌는데, 특이한 것은 삶은 돼지머리로 지내지를 않고 산 돼지를 몰고 올라가서
바위 위에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용이 피 묻는 것이 싫어서
비를 내린다는 속신에서 유래한다.
이밖에도 희양산에는 대궐터라 불리우는 석성(石城)과 군창지(軍倉址)가 있고, 산록에는
홍문정(紅門亭) 배형정(拜行亭)·태평교(太平橋) 등 임금과 관련된 명칭을 가진 곳들이 많아
신라 후기의 난세 때에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임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또한 봉암사 주변의 계곡에는 기생이 세상을 비관하며 몸을 던졌다는 용연(龍淵)을 비롯하여
최치원(崔致遠)이 낚시를 즐겼다는 취적대(取適臺), 야유암(夜遊巖),백송담(柏松潭), 백운대(白雲臺)
등의 소(沼)들이 있다.
인증샷
희양산에서 내려다 본 봉암사 계곡
해방 이후 한국 불교는 600년 동안 이어온 조선왕조의 억불(抑佛)정책의 족쇄와
일제의 ‘사찰령’으로 대표 되는 종교말살 정책의 폐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47년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혁신 운동이었다.
스님들은 제일 먼저 왜풍을 일소하고 수도 도량으로 거듭날 것을 결의했다.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 재를 없애고 화려했던 가사(袈裟)도 괴색으로 바뀌었다.
신라 헌강왕 때 창건된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이지만 근대와 와서는 한국 현대불교의 탯 자리로도 유명하다.
해방 직후 성철, 청담, 자운 등의 스님들이 “부처의 법대로 살아보자”며 용맹 정진한 곳이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것이
봉암사의 기본 수칙이 되었다... 오직 부처님 뜻대로 살자!
희양산 정상에 서면, 오늘 비록 조망은 시원찮지만 정상 그 자체의 자태만으로도
명산 반열에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아래로 내려다 보면
풍수에 문외한이라하더라도 봉암사 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다.
희양산과 봉암사. 이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산과 사찰을 없을 게다.
이런 희양산의 화강암 덩어리는 한북정맥에 있는 산들에서 볼 수 있는 판상절리(板狀節理) 현상의
박리(剝離) 작용으로 생긴 돔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언뜻 보면 서울의 불암산을 확대시켜
놓은 듯하다...그래서 그런지 불암산의 불암사도 지증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바로 앞에 있는 애기암봉과 원통봉은 비교적 뚜렸하게 보이나 그 뒷쪽의 대야산과
조항산, 둔덕산, 청화산, 연엽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이곳에서 서면 속리산의 주능선까지 확연히 보이는 곳이지만 오늘은 인연이
안되는 모양이다
다시 희양산 갈림길로 되돌아 가는데 맞은편의 구왕봉은 짙은 안개속으로 숨어 버렸다.
희양산에서 남아 사진을 찍어면서 산에대한 여유를 한껏 만끽하는 후배들을
뒤에두고 부지런히 왔던길을 되돌아 간다...그래봐야 금방 후배들에게 추월
당하는 신세가 되겠지만, 밉상이 안 되려면 부지런히 가야겠제
다시 희양산 갈림길(14:10)
다시 대간길을 복귀하는데 산악회의 회장님을 역임하셨고, 현재 후미대장을
자청하신 내가아는 진정한 산꾼중에 산꾼인 금물회장님이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30분 이상을 베낭을 지키고 있는데 후미에 있는 후배들은 희양산에서
사진을 찍느라 아직도 올 생각이 없는듯 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회장님께 대단히 미안하다...양해를 구하고 먼저 길을 나선다
희양산 갈림길을 조금 지나니 산죽길이 나오고...
희양산성 성곽들이 보이고...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희양산성터 사거리(14:20)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은티마을과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를 잇는 사거리로
이곳은 은티 마을에서 우측으로 가은읍 봉암사 옆 성골로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지금은 가은 방향으로는 봉암사에서 길을 막아 놓아서 통행이 금지 되었다.
이곳은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혹은 고려)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좌측의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아주 급경사로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은티마을 갈림길을 지나서 산성의 돌담과 예전에 없었던 목책 사이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희양산성터
삼국사기에 견훤이 희양산성에서 가은땅을 공격했다가 실패했다고 했는데
자세한 기록은 없고, 신라말에 경순왕이 봉암사로 피난 왔다가 이곳 희양산성
중턱 성골(城谷)이라는 곳에 피신했는데 성터가 지금도 성 아래 있는데 수백명이
들어가는 굴이 있다고 한다.
이 성터가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혹은 고려)의 국경이었다고 하는데
바로 후백제 견훤의 고향이자 그 아비 아자개(阿慈介:고향은 상주)의
세력 기반이었던 곳이 바로 남쪽의 가은읍 일대였기 때문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뒷산인 희양산 정상에 있는 석성(石城)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 성이 있으니 삼면이 모두 석벽(石壁)이며
옛 군창(軍倉)이었다고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희양고성은 가운현 북쪽 15리에
삼면이 모두 석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약 1300m가 되는 이 산성은 929년 경순왕 3년에 쌓은 성터로 전해지며 신라와 후백제가
국경을 다투던 접전지로 신라말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이 성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시루봉이 흐릿하게 보인다
예전에 걸었던 능선길이 아닌 편하게 사면길로 대간길을 안내하지만
아직까지 내가 꼴찌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너럭바위가 나오고 암봉으로 올라간다
암봉(14:28)
암봉에서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과 숨바꼭질하듯 다시 만나고
또다시 옛 추억을 떠올리며 남들이 오르지 않았던 능선길을 걷는다
잠시후에 오를 871m봉이 안개가 잠깐 걷히면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산행을 하면서서 중요한 건 산풍경 자체의 美的인 화려한 외형이 아니라
산길 주변에 스며있는 역사성과 산에서 풍기는 산내음 등등...산을 걸으면서
그걸 얼마나 받아 들여야가 중요한 게 아닐까...
서북쪽으로 은티마을과 마분봉, 악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비교적 뚜렸이 보이고,
우측에 하얀 속살을 드러내보이고 있는 은티광산은 아직도 인간들이 더 파먹을게 있는가 보다.
조금전에 걸었던 구왕봉을 뒤돌아 본다...그 뒷쪽으로 이어지는
악희봉, 마분봉 능선은 아직까지 뚜렸하게 볼 수가 없어서 아쉽다
등로가 보이지 않는 암릉구간으로 내려서니 미끄러운 안부가 나온다
안부(14:32)
871m봉(14:38)
잠시후에 오를 910m봉을 바라보면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4:41)
부지런히 걷는다고 걸었는데 이곳에서 희양산에서 여유를 즐기던
후배들에게 추월을 당한다...구왕봉과 희양산 구간의 직벽에서
체력 소모가 컸던 탓인지 이곳을 걷는데 엄청나게 힘이든다.
고만고만한 봉우리의 빨래판 구간...여태껏 한번도 없었던 몸뚱아리가
경련을 일으키며 쥐가 나는데 참으로 난감하다...베낭을 내려놓고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가지고 다니는 아스피린 1.000ml짜리 한알을
먹고는 멍하니 앉아 있다 오름길을 올라서니 후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910m봉(14:48)
910m봉에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암릉으로 오르는데 물기먹은 낙엽이 엄청 미끄러워 조심스럽다.
암릉구간을 우회하면서 걸으니...
산죽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부(14:52)
무명봉(14:55)
조금씩 편안한 능선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배너미평전이 가까워지나 보다.
안부를 지나서 완만한 무명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4:58)
부지런히 내려가니 펑퍼지만 배너미평전이 나오고 갑자기 사람소리가 들린다.
웬 사람소리...잠시후에 배너미평전에 도착하니 앞서간 후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예전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편하게 통과했던 빨래판 구간의 이곳...오늘은 왜 이리도 힘드는지...
아무래도 대간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젠 스틱을 내려놔야 할 모양이다.
배너미평전(舟越嶺:15:10)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군 경계에 있는 백두대간 안부능선으로 좌측의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고개를 배너미 고개라고도 하는데 배너미라는 뜻은 고개의 불룩한 부분이 배가
넘어가는 곳이라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호남정맥의 보성군 주월산 아래에 배너미고개가 있었는데 배너미재를 한자로 풀어쓰면
‘배 주(舟) 넘을 월(越) 재 령(嶺)’이라 배가 넘어 다녔다는 고개라는 뜻이다,
지리산 성삼재에서 문복대 가는 길에서 만난 고리봉도 배를 묶어둔 곳이라 했는데
아마도 예전에 이곳이 강이나 바다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지리산 세석평전, 덕유산의 덕유평전에 이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평전(平田)이라는
지명답게 이곳부터 시루봉 갈림길, 그리고 은티 마을 갈림길까지는 넓고 평탄하다.
시루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낙엽이 길을 덮고 군데군데 박석이 쌓여 있는
아름다운 길인데 오늘은 갈 길이 너무멀어 시루봉으로 오르는 걸 포기를 한다
박석(薄石)은 경복궁 근정전 앞 마당에 깔아 놓은 검고 얇은 돌로서
균일한 두께로서 단단하고 크기도 적당하여 아주 용도가 많으며 강화도에 많다고 한다.
이곳에 도착하니 금물 회장님을 비롯한 예닐곱분들의 산꾼들이 선 채로 휴식을 취하며
과일을 먹으면서 내가 오길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하다가 나에게 과일을 권한다
그러면서 이 시간에 자기들이 사다리재를 통과해서 분지리로 내려가는 걸 포기하고
내가가는 이만이골 능선을 따라서 도막을 가겠다는 것이다...내야 탱큐죠...
후배 산꾼들이 주는 과일 몇개를 얻어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배너미평전의 원래 대간 능선은 직진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지금은 돌려놔도 너무 돌려놨다
한참을 우측으로 올라갔다가 능선으로 올라가며, 밟는 젖은 낙엽은 空虛한 無彩色이다
가은 방향인 남쪽으로 한참을 갔다가 너덜길같은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자꾸만 후배들과의 간격이 벌어지더니 이젠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조금전에 다리에 난 쥐 때문에 먹은 아스피린으로 인하여 쥐는 나지 않으나
체력 저하로 인하여 다리가 풀려 버리는 느낌이지만 여기서 주저앉아 쉬면
도막까지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하기 힘들것 같아서 계속 오른다
능선에서 오른 다음에 좌측으로 꺽어서 사선봉으로 오르는데 왜 저리 높아 보이는지?
산의 고도는 마음에 있는 모양이다...컨디션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져 보이니 말이다.
사선봉(四仙峰:963m:15:45)
지도상에 963m봉인데 아무런 흔적도 없이 앙증맞은 돌멩이만 서 있는 무명봉이다.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고, 트랭글 앱에서는 희양산 사선봉으로
나오고 예전에 있었던 희양산 사선봉이란 아크릴 산패는 어디 있는지 아무리 찿아봐도 없다.
사선봉(四仙峰)이라... 4명이 신선이 노닐었다는 곳인가?
이제 대간 날머리는 얼마 남지 않았고, 등로도 평지라 부지런히 걸어가는데
일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짙은 안개가 몰려온다
무명봉(15:48)
후배들과의 많은 시간의 차이가 나지만 내가 내려가야할 곳은 후배들보다는
3km나 적게 가도 되기에 늦으면 늦은 대로, 서두르지 않고 걷는다.
느리던 빠르던 간에 이렇게 걸을수 있다는 자체가 나에겐 즐겁고 살아있음을 확인하다.
안부(15:57)
안개가 몰려오는 작은 봉우리를 지나니 내가 오늘 가려고 했던 시루봉 갈림길이
보이는데 후배 산꾼들이 동행한다기에 시루봉을 포기하고 이만이골로 가야겠다
시루봉 갈림길(15:57)
시루봉(914.4m)은 은티마을 뒷산인데 지명의 유래는 시루처럼 생겨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지는 산으로,시루란 떡이나 쌀 따위를 찌는 데 쓰는 둥근 질그릇을 말하는데 모양은
자배기 같고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다.
늘 배고픔을 참아야 했던 우리 조상들은 하늘에서 오는 가루눈이 싸래기로 보여 싸래기눈이라
불렀듯이 높고 둥근 산봉우리를 보고 시루봉이라 한 것은 가난하게 살았던 조상들의 힘든 생활을
보는 것 같아 한편으로 눈물겨운 이름이기도 하다.
시루봉의 어원을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시루같이 생겨서 시루봉이라 한 것이 아니고
'높음, 으뜸'을 나타내는 고대어인 '살'에서 유래한 것으로 시루봉은 음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떡을
찌는 시루를 연상하고 연관지은 지명이 많지만 사실은 수리봉으로서 '주변에서 으뜸이 되는 높은
봉우리'를 의미하며 수리산, 수레산, 시루산 등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로서 한자로 웅산(熊山),
차산(車山), 차남(수레넘이-車南), 증산(甑山) 등으로 표기되면서 여러 가지로 분화됨으로써 오늘날
지명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혼란을 일으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시루봉 갈림길에 있는 국가지점번호 안내판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완만한 오르막으로 오른 다음에...
내년을 기약하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호젓하게 걷고 있는데 너럭바위가 나온다
너럭바위(15:59)
진달래만 철없는 넘인줄 알았는데 너도 따라하냐...아서라! 정신 차리거라.
도막 갈림길(16:02)
이곳에서 대간길을 종료하고 좌측으로 향하는 이만이골 능선을 따른다
도막 갈림길에 있는 국가지점번호 안내판
한달전인 지난 10월 8일에 이곳을 내려갔으니 전혀 낯설지가 않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 너덜길깉은 암릉구간에다 낙엽이 쌓여있어
상당히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
뒷모습 / 나태주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소리,
찌르레기 울음소리에게도
뒷모습은 있을까?
저기 저
가문비나무 윤노리나무 사이
산길을 내려가는
야윈 슬픔의 어깨가
희고도 푸르다
등로는 아주 難解하다...여성 산꾼은 길이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면서 힘들어 한다.
그래도 지맥길에 비하면 이런길은 고속도로입니다
계속되는 급경사의 내리막길
산죽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급경사는 거의 다 내려온 것 같으나
이곳부터는 등로 바닥이 마사토로 되어있어 상당히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
산죽길이 끝나고 좌측으로 꺽어젹 계곡을 건너 농로로 향한다
지난달 이곳을 통과할 때 어둠속을 길을 잃어버려 계곡에서 30분간 개고생을 한 곳이다.
민가가 보이는 걸로 봐서는 거의 다 내려온 모양이다.
우측으로는 도막 마을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안말, 흰드메 가는 길이다
이만봉 등산 안내도
도막마을 도로로 내려서면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도막마을(17:10)
도막마을은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선조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하여 도원수 권율장군 이곳에 군막을 첬든 곳이라고 전해져 도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다리재에서 분지로로 간 동료들이 아직 출발하지 않았단다.
이곳에 서 있으니 옷이 젖은 탓인지 꽤나 추워서 마을회관이 문이 열려있나 가보니
문이 굳게 닫혀있어 벽에 붙어 추위를 피하면서 20분을 넘게 기다리니 버스가 온다
버스를 타고 수안보로 가서 샤워를 하고, 식당에 가서 염소탕으로 몸보신을 하는데
오늘 어느 한 분이 거금을 쏘시면서 저녁 식대를 전부 내셨다...고맙습니다.
복받을깁니다...돈을 쓰야 들어오는 법을 제대로 아시는군요.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는데 뭔가 허전하다...근데 이건 뭐야, 옷가방이 없잖은가.
재빨리 사우나로 가니 내 옷가방이 탈의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네...ㅋㅋㅋ
이래저래 오늘도 후배들에게 밉상이 된 꼴이다...차에서 졸다보니 서울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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