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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次(진행중)

제18구간 -추풍령에서 큰재까지

by 범여(梵如) 2022. 11. 7.

아!...가는 歲月을 어찌할꼬?

 

☞ 산행일시: 2022년 11월 06일

☞ 산행날씨: 맑고 초겨울에 가까운 추운 날씨에 약간의 미세먼지

 산행거리: 도상거리20.6km +들머리 약 2km / 8시간 33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추풍령-금산-매봉재-무명봉-안부-무명봉-안부-들기산-임도-해주오공 묘

                      435.7m봉-곤천고개-무명봉-502m봉-무명봉-무명봉-사기점 고개-전등재

                      난함산 갈림길-갈림길-추풍령 육묘장 입구-신애원 농장 갈림길-임도

                      밀양박씨 묘-386.3m봉-작점고개-안부-무좌골산-갈현-기도터 바위

                      폐헬기장-안부-687m봉-무명봉-무명봉-용문산-안부-상웅마을갈림길

                      안부-무명봉-안부-671m봉-무명묘지-용문산 기도원 안부-청운봉

                      안부-웅이산(국수봉)-안부-무명봉-안부-682.4m봉-무명봉-481.2m봉

                      안부-무명봉-큰재

☞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봉산면, 어모면 / 상주시 공성면, 모동면 /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갈수록 떨어지는 체력으로 인하여 민폐를 끼치면서 산악회를 따라 나선다는 건

焉敢生心이다...혼자서 다니는 건 남에게 신세를 안 지기에 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교통비가 만만찮은데, 돈으로 때우는 교통비는 감당할 수준이지만

코로난가 지랄인가하는 역병 때문에 가는 곳마다 대중교통이 대폭 축소한 바람에

옛날의 교통편 자료를 가지고 나섰다가는 낭패당하기 일쑤이라 그게 문제로다.

지난주에 운곡(각화)지맥 마지막 구간을 끝내고 봉화에서 서울로 오는 차편이

예전에는 막차가 19시 40분 버스라 느긋하게 생각하고 알고 갔는데 산행을 끝내고

알아본 결과 막차가 없어져 버려서 낭폐를 당해 하마트면 봉화에서 迷兒가

될 뻔했다

 

이번주에 가는 추풍령에서 큰재까지 구간만 해도 그렇다.

예전에는 대전으로 가서 대전복합터미널에서 07시 20분에 출발하는 거창행 버스가

추풍령을 거쳐서 가는 바람에 편했는데, 코로나 이후로 손님이 없다는 핑계로

노선이 완전히 폐지되는 바람에 난감했다...다행히 06시 25분에 대전에서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 열차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등로는 그리 힘들지 않지만 거리가 그리

만만하지 않은 이 구간을 하기로 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역(04:55)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첫 버스를 타고 양재역에 도착...이곳에서 다시 421번 버스를

갈아탄 다음에 서울역에 도착하니 04시 50분이다...서울역 대합실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침으로 먹을 새우햄버거와 콜라 하나를 산 후, 인터넷으로 예약한 열차표를 찾으러

매표소를 간 다음에 예약한 열차표를 찾기위해 신용카드를 내미는데 표를 파는 젊은넘이

하도 시건방지고 불친절하여 한마디하려다가 아침부터 기분이 잡치면 안될것 같아 꾹 참는다.

예전같으면 넌 진작에 죽었어...넌 오늘 용꿈 꾼줄 알어...

05시 15분 서울발 → 대전행 KTX열차표와 06시 25분 대전발 → 추풍령행 무궁화 열차표.

서울역에서 출발한 KTX열차는 광명역만 정차하고 논스톱으로 대전까지 가는 바람에

1시간도 안되어 대전역에 도착한다

대전역(06:18)

대합실로 나가지도 않고 곧바로 플렛홈으로 가서 대전에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

열차에 올라 패스트푸드점에서 산 새우버거와 콜라로 아침을 해결하고 창 밖을 주시하고

있는 사이에 열차는 추풍령에 도착한다

추풍령역에도 인근에 있는 황간역과 마찬가지로 항아리와 돌멩이에 詩를 많이 써놨다.

추풍령을 나오면서 바라본 눌의산(訥誼山743.3m)의 모습

눌의산(訥誼山743.3m)의 이름인 `눌의(訥誼)'는 한자어로 정의가 눌하다

혹은 더디다는 뜻이니 추풍령 영마루를 사이하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양쪽 인정(人情)의 교류가 뜸하다는 것을 뜻으로 말씨는 친절해도 더듬거린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단어이다

추풍령역 열차 시간표

추풍령역(07:20)

이곳을 몇번 오기는 했지만 열차를 타고 이곳에 내리기는 난생 처음이다

열차에서 추풍령역에 내린 사람은 달랑 나혼자이다...화장실에 들렸다가 역을

빠져나와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대간 들머리로 향한다

추풍령역을 나와서 추풍령으로 향하는길에 추풍령면소재 중심가를 걷는다.

면치고는 꽤나 큰편이라는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은 커녕

개미새끼 한마리도 안 보이고 쥐죽은듯이 조용하다.

자꾸만 인구가 줄고, 마을이 소멸된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는데

현재 이 나라가 직면해 있는 우리의 농촌 현실을 보는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다

추풍령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대간길 마루금으로 들어선다.

오늘 산행 들머리인 추풍령에 도착한다(07:40)

추풍령(秋風嶺:221m:07:40)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 당마루에서 경북 김천시 봉산면 황천리 죽막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현재 추풍령은 낙동강 유역과 금강 유역의 분수령으로 충청권과 영남권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추풍령리에 1904년에 개설된 추풍령역과 3 · 8일에 개시되는 추풍장 등이 분포하며 지명은 조선 후기의

지리지와 고지도에 다수 등재되어 있는데 『해동지도』(황간)의 금산()과의 경계에 '추풍령'이 기록되어

해당 지명이 처음 등장하며『여지도서』에는 "추풍령은 산맥이 조령으로부터 상주목을 지나 본 현 동쪽 경계에서

끊겨 평탄한 땅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문헌에 황악산 세주()에 추풍령이 등장한다.

 

이후 추풍령이란 지명은 표기자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데『대동여지도』에 '추풍령()'과

'추풍역()'이, 『조선지지자료』(황간)에도 "추풍령역()이 황금소면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추풍령은 본래 죽령, 조령과 함께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일반적으로 추풍령은 영남과 한양을 잇는 고갯길 중에 가장 작은 고개로 인식되고 있다.

러나 조선후기에 인구 변동에 따른 큰 변화가 시작된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경상도 각 읍의 인구수를 성주-경주-김해-안동-진주-밀양-

선산-예천-창원이라 기록 했으나 18세기 후반의 자료인 '호구총수'의 기록에 따르면

경주-상주-진주-대구-성주-밀양-안동-선산-고성-의령의 순으로 인구서열이 변한다.

전반적으로 교통이 편리한 읍의 인구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의 교통체제가 초기에는 죽령-계립령 선에서 서남진하여 추풍령으로 이동한다.

이는 조령의 높이가 약 400m인데 반해 우회로긴 하지만 추풍령은 200m여서 수레교통이

가능하고 충청도의 삼남대로와 연결된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서내륙의 교통이 쇠하고 대구와 김천이 상업도시로써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대한제국 말엽에 경부선 철도가 가설되고 이후 4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명실상부한 나라의 고갯길이 되었다.

 

고개를 구분하여 말할 때 주로 '영'(嶺), '현'(峴), '치'(峙)로 구분한다.

엄밀하게 나누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영'은 큰 고개를 부를 때

사용하고, '현'은 '영'보다 작고, '치'는 '현'보다 더 작은 고개를 의미할 때 사용한다.

헌데 추풍령에는 '영'(嶺)자가 붙어 있으니 꽤 큰 고개이다.

그렇게 고개는 크면서 고도는 낮은 탓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금강과 낙동강을 가르는 백두대간 마루금 상에 있는 추풍령에는 사람 사는

분주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정감어린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추풍령은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루는데 높이가 221m로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추풍령은 죽령,조령, 화령과 함께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4대 고개였다.

그러나 다른 고개에 상대적으로 비해 낮기 때문에 관방으로서의 역할이

미약했던 것 같다. 관방이란 방어진지 또는 요새 개념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을 조령과 추풍령으로 정했다.

왜군이 이들 두 고개를 너머 충주와 청주를 진출한 다음에 한양으로 입성했다.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최고의 문장가인 다산 정약용은 ‘추풍령을 넘어며’라는

시를 지어 임진왜란 때 이 고개를 지키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지금은 추풍령을 넘어 대전과 천안을 지나 서울로 이어지지만 옛날에는

청주와 죽산(지금의 안성땅)을 지나 한양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태백산 소백산이 산세도 장하구나.

달리던 용의 머리 여기에서 수그려.

북쪽으로 통한 시내 황간으로 달려가고

서쪽으로 뻗은 산은 적상산을 에워쌓네

봉마다 우뚝우뚝 성벽은 쌓였다만

이 재가 요새란 걸 어디 누가 안단말고

청주 고을 큰 들판 천리에  트였으니

추풍령을 빼앗기면 멱살을 잡히리라

이랑탑

'이랑 탑'은 영동군에서 국악과, 감과 포도의 형상을 융합한 조형물이라고 한다.

추풍령은 해발고도는 221m(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211.2m)로 연중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 추풍(秋風)이라 불렸으며, 추풍령 표지석이 있는 이곳이

당마루고개라고도 불리었던 이유는 고개 아래에 당마루라는 마을이 있어서 붙혀진

지명인데, 당마루 고개와 추풍령 고개가 인접하여 있는 마을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이곳에 당나라 군사가 쉬어 갔다 하여 당마루라 불렀다 한다.

지명 분포로 보아 당-계열의 마을은 거의가 성황당 집이 있던 곳을 이르는

일이 많은데 이곳도 예외는 아닐 것으로 본다.

남상규의 노래비가 서있는 추풍령(秋風嶺)은 본래는 추풍(秋豊)이라 해서

풍요로움을 뜻하는 지명으로 불리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추풍(秋豊), 또는 추풍역리(秋豊驛里)라

기록하고 있으며,  거기에 령(嶺) 자를 붙여 고개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와 그보다는 150년 뒤진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66)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동지지(大東地志)

기록이 처음인데 지금 우리가 부르는 추풍령(秋風嶺)이란 이름은 대개 임진왜란 전후로부터

알려져 온 게 아닌가 싶다...1905년 추풍령에 철도가 개설되었다.

 

♤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저술한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국문학에서 유명한

윤선도(尹善道)의 손자이며 남인 집안으로 옥동 이서((玉洞 李潊:성호 이익의 이복형)

부터 서도를 배우고 성호 이익 집안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함)의 실학(實學:18세기를 전후하여 새롭게 나타난 범유학적 탈성리학

경향을 가진 사회개혁사상) 정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실사구시를 중요하게 여겨 천문, 지리, 의약과 같은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했고

음악, 패관 소설, 화보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렇게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회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윤두서는 그림을 그릴 때 사물을 한 참 동안 관찰한 후에야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상당히 까다로운 성격이어서 여간해서는 부탁을 해도 그림을 그려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야 남에게 주었으며, 또 주는것도 아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었지만 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주지 않았다고 한다

 

주요 작품은 <선차도>와 <팔준도>와 <자화상>.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또는 종애(鐘崖)이며 공재 윤선도의 증손이고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로 불린다.

 

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산수·인물·영모·초충·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으며 특히 인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윤덕희, 손자 윤용에 의해 계승되었다. 저서로는 <기졸>과 <화단>이 있다.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 준공기념탑

경부고속도로의 가장 중간인 추풍령 휴게소에 준공 기념탑이 서 있고 이 기념탑의 설명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우리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이 고속도로를 자랑하기 위하여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의 중간이며 가장 높은 이곳 추풍령에 건설과 번영을 상징하는 높이 30.8M의 탑을 세운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건설된 고속도로로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의 아우토반을 보고 온 뒤

감명을 받아 특유의 군대식 밀어붙이기로 건설한 도로라고 잘 알려져 있으며, 공기는 불과 2년 5개월에 불과했다.
최단기간 건설로 기네스북에 오른 고속도로, 전국 일일 생활권 연결로 산업화 시대를 열어젖힌 조국 근대화의 기수.
경부고속도로를 수식할 때 흔히 하는 말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커팅식(1970년 7월 7일)

현재 추풍령의 날씨는 추워도 너무 춥다...온도계를 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는지 잠깐 사이에 손가락이 빠져나갈 정도로 시리고

귀도 엄청 시리다...시간적 여유가 조금은 있어 고속도로 너머 김천쪽으로

가니 넓은 주차장과 지난번 걸었던 가성산을 바라보니 만산홍엽으로 변해 버렸다.

주차장 옆에는 청풍명월의 고장 충청북도 표지석이 서있고 그 옆에는

진사와 군수를 지낸 분의 공덕비가 서 있다.

진사와 군수를 지낸 분의 공덕비가 있으나 글씨가 마모되어 판독이 힘들다.

다시 추풍령광장으로 되돌아 와서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7:50)

대간 산꾼들의 산행기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카리브모텔 옆으로

들어서면서 오늘 산행을 시작하는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2017년 6월 29일 3차때도 나홀로 걸었었는데도 예전에 없었던 금산 등산안내도도 보인다

반장갑을 끼었더니 손가락이 빠질만큼 손이 시리다.

긴 장갑이 베낭안에 있지만 귀찮아서 꺼내지 않았고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걸으면서 민가 뒷쪽으로 반쪽만 남은 금산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5년전에 없었던 시설물들이 많이 보인다

 

안내판을 보니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계 역할을 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나 완만한 지역적인 특성상

각종도로와 휴게소 등으로 인해 1km 이상의 마루금이 단절된 지역으로 마루금과

실제 종주 노선이 상이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괘방령-4.0km-가성산-1.0km-장군봉-1.7km-눌의산-2.9km-

추풍령-0.7km-금산-4.6km-사기점고개-2.8km-작점고개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든다...서리가 내린 계단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통나무계단 옆으로는 영동에서 김천으로 이어지는 4차선의 4번 국도가 있으나

경부고속도로와 인접한 탓인지 교통량은 뜸한편이며, 뒤돌아보니 눌의산(右)와,

가성산(左)이 만산홍엽에 물든채로 겨울맞이를 준비하는 듯 하다.

기록이 상당히 정확하다...산꾼들에게 도움이 될듯하다.

금산으로 오르는 등로는 낙엽이 수북하여 상당히 미끄럽고, 초반부터 발걸음이 더디다.

미끄러운 등로로 올라서니 반쪽만 남은 금산 아랫쪽에 이정표와 안내판이 있다

금산 안내판

김천(金泉)의 유래가 되었다는 금산은 인간의 탐욕으로 산 정상이 날아간 채로 흉물스럽게 보인다

반쪽만 남은 금산 정상의 모습

금산(金山:385.3m:08:10)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이 있는 산으로

경북지역에서 보면 산이 온전하게 보이나  충북지역은 산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반쪽만 남아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채석장 개발로 대간 자락의 북사면 절반이 사라진 산으로, 자병산과 더불어

대표적인 백두대간 훼손 지역으로 꼽히는데, 일제 때부터 석재를 파기 시작하다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19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용 자갈 공급, 그 다음에는 고속 전철용 자갈 공급을 위해

깎아졌으나 지금은 채석을 중단한지는 오래 되었고 사태 방지 등의 정리 공사한 후 방치 되고 있다.

 

김천(金泉)의 유래가 되었다는 금산은 원래는 김산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까지만 해도 한자로 표기하여 “金山”이라 부르다가 한글을 표기하기

시작하면서 김산”으로 됐고 김천군(당시)의 지명 유래가 된 계기가 된 산이 되었고

김천시가 市로 승격되기 이전의 지명이 금릉군(金陵郡)이 된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닐런지...

금산 정상에 올라서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금산 정상에 오르니 반쪽이 날아가버린 영동쪽으로 토사 방지를 위한 휀스가

설치되어 있고 추풍령 면소지에서 작점리로 향하는 도로가 뱀꼬리처럼 보인다

도로 뒷쪽으로 낮은 산이 마암산(371.7m)과 동모산(262.8m), 그 뒷쪽으로는

동무골산(566.1m)과 학무산(681.6m)이 미세먼지에 살짝 가린채 얼굴을 내밀고 있다.

저수지 뒷쪽 우측으로 오늘 내가 걸어야 할 무좌골산과 용문산이 살짝 보인다

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경상북도 금산군(金山郡)에 소속된 황금소면(黃金所面)지역으로 교통의 요충지라

고려 때부터 추풍역(秋風驛)을 설치하였다. 황금이란 지명은 현 사부리에 있었던

황보(黃寶)와 금보(金寶)라는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1906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충청북도 황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황간군 오곡면(吾谷面)의 일부와 경북 상주군(尙州郡) 공성면(功城面)의

일부를 병합하고 사부리(沙夫里), 추풍령리(秋風嶺里), 죽전리(竹田里), 작점리(雀店里), 관리(官里),

지봉리(池鳳里), 신안리(新安里). 계룡리(溪龍里). 웅북리(熊北里) 등 9개리로 개편하여

 황금면(黃金面)이라 칭하고 영동군에 편입하였다.

 

1971년에 추풍령리를 추풍령1구와 2구로 분리하였고 1982년에는 신안리를

상신안리와 하신안리로, 1984년에는 관리를 관리와 학동(鶴洞)으로, 작점리를 작점과

작동으로 분리하여 14개 이동이 되었다. 1985년 관리를 관리와 후리(後里)로 분리하여

9개 법정리, 15개 행정리, 31개 자연마을을 관할하게 되었고, 1991년 7월 1일부터

지방자치법에 의거하여 군 조례 1332호로 추풍령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금산 정상에서 작점고개 넘어가는 도로를 바라보는데

도저히 현기증 때문에 더 이상을 바라볼 수가 없다.

오늘도 미세먼지 탓인지 바라보는 산들이 뿌옇게 보인다

금산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낙엽이 상당히 미끄러워

조심스레 내려가는데 이른 아침이라 날씨가 추울뿐이지 산행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지만 미끄러운 낙엽이 의외의 복병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금산에서 내려와 사면길을 조심스레 내려와서 안부에서 약간의 오르막으로 오른다

오르막으로 올라...

 무명봉에서 내려서니... 지도상의 매봉재가 나온다

매봉재(08:28)

경북 김천시 봉산면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民草들의 넘나들던 고개였으나 지금은 고개의 역할을 잃어버린지가

오래인듯 낙엽에 묻혀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예전에 있었던 나무의자조차 사라졌다.

무명봉(08:30)

世俗의 살면서 느끼는 불안함은 산속에 들오기만 하면 삶의 무게나

불안을 전혀 느낄 수 없는 魔法같은 일이 일어나는 건 뭔 조화인지

모르겠다...뽕쟁이가 아편에 미치듯 범여는 산에 미치는 모양이다

산은 여름에서 가을옷을 갈아입은지 오래된 듯 하고, 서서히 겨울을 준비하는구나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지나면서 들리는 건 낙엽밟은 소리일 뿐...

안부(08:35)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를 당하는 모양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하루를 바쁘게 돌아 다니면 하루에 500번 이상

CCTV에 노출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고, 요즘은 도난사고가 생기면

도둑넘을 잡는건 경찰이 아닌 주변 CCTV가 잡는다고 한다.

 

3개월전의 일이였다...지인들과 청계산 아래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깜빡하고 손가방을 버스에 놓고 내렸는데 그 가방에는

꽤많은 현금이 들어있는 지갑과 신용카드, 자동차 열쇠, 기타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어 상당히 당황스러워 신고를 했는데 버스를 탄 신용카드를 조회하니

내가 몇시 몇분 몇초에 어디서 버스를 타서 몇시몇분 몇초에 어디서 내렸다는 걸

버스안 CCTV에 녹화되어 있었고, 그 손가방을 버스회사 유실물 센터에서

찾은 일이 있다...세상이 편리한 만큼 불편하고 휴머니즘이 아닌 메카니즘에

의존하다보니 人性이 자꾸 거칠어지는 듯 한데 동물들 한테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

무명봉(08:38)

한 걸음 한 걸음의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1주일간 世俗에 있었던 일을 산과

交感을 나누면서 걷는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이 짓거릴 한지가 13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다. 

안부(08:40)

계속되는 오르막길...초반이라 조금은 힘들긴 하지만 愚公移山의 심정으로 걷는다

두꺼비 바위?

오늘 구간의 등로에 수림대(樹林帶)는 대부분이 활엽수림인데 이곳은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생각보다 계속되는 오르막...등로의 낙엽이 미끄러워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된다

등로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는 추풍령저수지가 보인다

등로 주위에는 벙커의 흔적같은 구덩이가 간간히 보이고 빡세게 올라서니 들기산이 나온다

들기산(501.3m:09:03)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예전에 없었던 산패가 2개나 있다...이곳이 예전엔 무명봉으로 표기가

되었는데 지금은 국토정보지리원에 표기되어 있는 족보있는 산으로 승격(?)이

된 듯 한데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고, 주변에는 참나무와 떡갈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추풍령저수지와 죽전리 마을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들기산에서 바라본 추풍령저수지와 죽전리 마을의 모습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에 속한 죽전리(竹田里)는 면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북, 동, 남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으로 들이 넓고, 추풍령천이 발원하여 흐르고 추풍령 저수지가 있다.

과수와 벼를 주로 재배하는 농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개고개, 검바우(검암), 소야 등이 있다.

개고개는 개고개 아래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검바우는 소야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맷돌바위가 있어 생긴 지명...소야는 죽전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전에 차기지풀이

많았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매봉재에서 한참을 올라온만큼 들기산부터 내리막길이 계속되는데 등로에

쌓인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고 대간길은 남쪽으로 이어진다

임도(09:13)

대간길 좌측 아래로는 추풍령면 작점리 작동마을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가 보인다

해주오공 묘(09:14)

435.7m봉(09:20)

추풍령부터 시작된 오늘 대간길은 웅이산(국수봉)까지 경북과 충북의

道界를 따라서 걸어가는데 덕유산에서부터 기세좋게 북진하던 대간

산줄기가 추풍령을 지나면서 속리산 초입직전까지 고도를 낮추는데

조금을 더 가서 三白의 고장인 상주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백두대간

중화지대라 불리는 非山非野 구간에 발을 들여놓는 들머리가 오늘 구간이다

북진길이라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대간길은 북쪽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오늘의 대간길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어져서 조금 혼란스럽다.

노간주 나무들이 간간히 보이고 대간길은 계속 남쪽으로 이어진다

올해의 가을이 作別을 할 모양인지 따스한 햇살이 비치긴 해도 寒氣가 느껴진다

곤천고개(09:26)

김천시 봉산면 곤천마을에서 영동군 추풍령면 작동마을과 작점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무심코 가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이다.

산꾼들의 지도상에는 옛고개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작동재밑’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고려 말까지는 마을 앞에 건천내가 있어 건천(乾川)이라 하였으나. 그 후 음향오행설에 의해

조선시대 황간군 백호촌장 손정만이 곤천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손씨를

비롯하여 여러 姓氏가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나무사이로 내리쪼는 따사로운 햇빛에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무미건조하게 걷다보니 초반인데도 졸음이 밀려온다

무명봉(09:32)

비록 이름없는 봉우리이지만 대간길을 이어가며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는

너의 역할에 敬意를 표한다...대간길에 지리산, 속리산, 설악산이라는 명산도

너희들 같은 무명봉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걸 생각하니 늘 고맙기만 하는구나

등로는 희미하고 넓어서 졸음이 쏟아지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산에 대한 虛飢欲望을 향한 순환 법칙은 어쩌면

현재에 대한 일종의 지속 자체를 위한 方便인지도 모르지...

너무 좋은길(?)이라 그런지 아니면 몽유병이 도지는지 잠깐 잠깐 졸면서 걷는다

502m봉(09:43)

들기산 지나면서부터 계속 남쪽으로 이어지던 대간길이 이곳에서 멈추고

좌측으로 이어지면서 등로를 북쪽으로 돌린다...이곳에서 직진으로 가면

봉산면 사기점 마을 뒷쪽에 있는 갈미봉(538.0m)으로 이어지는 등로인데

김천 100명산을 걷는 사람들의 시그널이 걸려있어 조금은 주의해야 할 곳이다

502m봉에서 좌측 아래로 내려서니 우측으로 등로가 열리면서 난함산 정상의 군사시설물이 보인다

대간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난함산(卵含山:717.6m:김천시 어모면 능치리)은,

다수의 백두대간 종주 자료에 묘함산(卯含山)으로 표기돼 있 국토정보지리원의

1:50,000 지도에 '卯含山'이라 표기돼 있기 때문이 빚어진 일이다.

 

그러나 현지명은 분명 난함산(卵含山)이고, 현재 난함산 정상에는 한국통신의

무선통신 중계소가 있는데, 그 이름도 난함산 중계소였다.

 

지도를 만들 때 난(卵)자가 묘(卯)로 오식(誤植)된 게 확실해 보인다.

산의 형국이 알을 품고 있다 해서 명명된 것일 텐데, 십이지(十二支)의 넷째이자

동쪽을 가리키는 말인 묘(卯) 자가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며 아마도 한문에

‘알 난(卵)’을  ‘토끼 묘(卯)’로 잘못 해석한 해프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 세대에게 한자 교육이 필요한 이유이다 (범여의 생각 中에서) 

무명봉(09:46)

호젓한 길을 思索에 젖어 걸어간다...이 편한길을 걸으면 누군던 시인이 되지 않을까.

쉬영간탱이 흔적

좌측으로는 절개지 계곡이 보이고...

무명봉(09:53)

이름없는 봉우리를 아무런 댓가없이 묵묵히 지키고 있는 멋쟁이 소나무

그대가 진정한 hero일세...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는데 주변에는 노간주나무, 소나무, 참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사기점으로 이어지는 계곡 좌측의 능선으로 따라서 걸어간다

아침에 불지않던 바람이 조금씩 불어댄다.

대간꾼들이 걸어둔 빗바랜 시그널들이 타르쵸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 타르초(Tharchog)란 네팔이나 티베트 몽고 부탄 같은 티베트불교를 믿는 곳에서는

   오색경문을 만국기처럼 달아 놓은 천을 말하는데 경문을 적은 천의 다섯가지 색깔은

   우주 5원소를 가리키는데 파란색은 하늘, 노란색은 땅, 빨간색은 불, 흰색은 구름.

   초록은 바다라고 하며, 이것은 우주의 모든 것을 상징하며 모든 생명의 근원과 신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임도가 나오면서 우측의 사기점 마을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는 차량이 다닐만큼 넓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 주변 산에는 어디에든 사기막 골 혹은 사기막 고개를

볼 수 있는데, 산의 지명 가운데 수 많은 사기막 고개가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기막 고개는 대간 마루금에서는 드물게 존재한다.

 

대간 마루금에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구간에 사기점재가 있는 것 또한 대간의  키가 낮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오늘 구간은 키가 낮으니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는 산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사기점 고개(沙器店峙:390m:10:18)

김천시 봉산면 상금리 사기점 마을에서 영동군 추풍령면 작점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沙器店)고개로 불리운다. 

 

사기그릇을 구워오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사기점(沙器店) 또는 점리(店里)라고

불려 왔으나 그뒤 마을은 없어지고 사기그릇을 굽던 가마터의 흔적만 남아있는데,

지금은 그곳으로부터 약 2km 밑으로 내려온 야산지대에 새로이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옛 사기점터에서는 지금도 사기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고속도로같은 넓은 도로를 따라서 북동쪽으로 올라간다

전등재(10:25)

자동차가 다닐만큼 넓은 임도를 따르다가 갑자기 임도가 좁아지는 고개,

직진으로 가면 작점리쪽에 있는 농장으로 가는 길이 보이는데 예전에

이름도 없이 그냥 지나쳤던 고개가 최근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전등재라고 표기가 되어 있으나 지명에 대한 유래는 모르겠다.

농장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올라간다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넓은 임도를 만나고...

넓은 임도를 따라서 ♪룰루랄라♬하면서 걸어간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걷다가 등로에서 농장의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면서 

넓은 임도를 버리고 우측의 희미한 등로 아래로 내려선다

오늘의 추풍령-큰재 구간은, 분명한 자기만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대간길이다.

작은 키(낮은 고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남(다른 구간)과의

비교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비교를 거부하는 제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오늘처럼 순수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일 게다.

남과 비교하지 않으니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원래 비교란 우리 인간들만이 가지는 惡習이 아닌가.

가진 정도를 비교하고, 자리의 높낮이를 비교하고, 출신 지역을 비교하고 심지어

출신학교까지 비교하면서 나타난 결과가 猜忌心일 것이다... 이러한 시기심은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무리수를 두게 하고 이러한 무리수는 각종 병폐와 부조리를 가져오게 한다.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구간이 비록 키(고도)는 작(낮)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구경도 하고

그러면서도 대간의 특징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도의 고도표만 보고  산 높이가 낮다고 우습게 보았던 것이 쑥스럽다. 

오늘 구간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직접 가르쳐주고 있다.

역시 백두대간만한 스승은 없는 듯하다.

겨울옷으로 갈아입는 산자락에 푹 빠지면서 걷는 대간길

언제까지 이런 호사를 누릴지...자꾸만 떨어지는 나의 저질

체력에 엄습해오는 불안함이 나를 괴롭히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걸을 수 있다는게 나에게는 하루 하루를 감사한 맘으로 살아간다

난함산 오르는 길이 가까워지나 보다...도롯가 전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미끄러운 낙엽에 힘들고 빡센 오르막을 올라서니 쑥부쟁이가 반겨주는 도로가 나온다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꿋꿋한 불쟁이의 딸... 쑥부쟁이

한양간 박재상의 아들을 아직도 기다리시나?

이미 남의 남자가 되어 버린 그 사냥꾼은 포기하는게 좋을 것 같네요

세상사는 거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리 집착하오...

난함산 갈림길(10:45)

이곳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면 KBS 송신소와 군부대가 있는

난함산 정상이 나오고 대간 능선은 도로를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간다.

이곳부터 남쪽은 지난구간 가성산부터 같이해 온 김천시 봉산면과 작별하고

어모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도로를 오르자마자 대간길은 우측 숲속으로 올라가야 하나...

3번이나 올랐던 저 길은 오늘은 포기를 하고 도로를 따라서 간다.

왜냐하면 예전과 달리 오후만 되면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으로 인해

어떡게 될지 몰라서 저 능선을 포기하고 우측 능선을 눈으로만 보면서 걷는다

옹벽을 돌아서 걸어가니...

능선에서 내려오는 대간길을 3분만에 다시 만나서 대간 마루금인 도로를 따른다.

휘어지는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는데 반사경과 입산통제 안내판이 보인다.

이곳 난함산 일대에는 매년 11월 1일부터 다음해 5월 15일까지 입산통제란다.

갈림길(10:51)

난함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버리고 숨바꼭질하듯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숲속으로 들어섰다가...

곧바로 조금전에 헤어진 도로로 내려선다.

추풍령 육묘장 입구(10:56)

이곳에서 좌측으로 400m정도 올라가면 추풍령 육묘장이 있다.

도로옆에 감나무가 있어 어릴적 고향의 향수에 젖게한다.

난 어쩔수 없는 촌넘인가 보다...홍시 3개를 따서 먹는다

신애원 농장 갈림길(10:58)

우측으로는 경북도립 김천노인전문 요양병원과 신애정신병원, 신애원 농장이

보이고 이곳에서 난함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버리고 좌측의 숲속으로 들어간다

대간길답지 않은 지저분한 도로를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임도(11:01)

우측으로 난함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작점마을로

임도가 이어지고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간다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작점리(雀店里)는 내남산 자락에 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경관이 빼어난 마을로 성동소류지가 있으며 밭농사를 주로 하는

산촌마을들로 자연마을로는 작점, 작동 등이 있으며, 작점은 고려 때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동은 임진왜란 후에 김씨들이 다래덩굴을 쳐 내고 

이룬 마을로 숲이 우거지고 새 소리만 들리는 한가한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예전에 없었던 밀양박씨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고...

나같은 독립군으로 다니는 대간꾼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겠다.

밀양박씨 묘(11:05)

따스한 햇살이 빛치는 천년주택(묘지)에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亡者.

산 자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뭔가 다른 모습...나만이 느끼는 생각일까...

386.3m봉(11:06)

편안한 능선을 따라서 걷다가...

우측으로 내려서는데...아이 깜짝이야...

예전에 없었던 시설물이 길을 막는다...자세히 보니 예전엔 없었던 생태통로가 나온다

작점고개 생태통로 윗쪽을 통과하여 끄트머리에 베낭을 벗어놓고 작점고개로 내려간다

작점고개(雀店峙:340m:11:15)

경북 김천 어모면 능치리에서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 넘어가는 한적한 고개로

성황뎅이 고개, 여덟마지기 고개라는 별칭도 있다 하며, 김천 어모면에서는 능치재라 부른다.

 

작점고개 이름은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에서 딴 것이며, 여덟마지기 고개란,

충북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성황뎅이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정작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 정자에는 ‘능치쉼터’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고갯마루 아래 능치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간 종주 자료에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는 것은,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작점리 마을은 충북 최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부터

 유씨가 자리잡은 마을로 마을 뒷편에는 난함산 상단에 한국통신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200여년전 전국에 제일가는 유기 생산 공장이 작점리 전 지역과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일대까지 공장이 분포되어 있어 유기점포 판매상인도 많이

있었다고 하며, 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새‘작’자의 "雀"과 유기점포가 많아 "店"자를

따서 작점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며 장수하는 마을로 손꼽혀 있다.

2019년에 준공된 백두대간 생태통로로 인해 모든것이 바뀌어

버린듯 한 작점고개는 桑田碧海가 된 듯 ...모든게 어색하기남 하다

작점고개에 있는 팔각정...예전엔 능치정(能峙亭)이었는데 능치쉼터로 바뀌었다.

 

김천시 어모면에 있는 능치리(能峙里)는 예로부터 도요지가 많은 것을 미루어

보아 오래된 마을로 여겨지며,.1568년 평택임씨가 입향하였으나, 거의 떠나고,

몇 집만이 살고 있으며 1578년 경주최씨 진반이 황금면 반수에서 이주하였다.

능청 마을은 1889년 밀양박씨 형희가 공성 영오에서 이주하였고,

황산여씨와 풍양조씨 양문도 일찍 들어와 살았다.

 

능치 1리는 능점. 능청 두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초에는 어모현에

속하였으며, 1416년 김산현이 승군됨에 따라 본현을 흡수하고, 김산군 구 소요면과

아천면을 통합하여 어모면이라 개칭하고 그 관내가 되었다.

 

1949년 군을 금릉이라 개명하고, 1971년 능청. 능점을 합하여 능치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으며 어모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10km 떨어진 산간 오지에 있는

 두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두 마을의 거리는 800m 정도이며, 능청(能靑)에는

 초등학교와 보건진료소가 있다. 동쪽은 옥계리에 인접하고, 북쪽은 깊은 골짜기로 능치 2리에

이어지고 서쪽은 충북땅인 황금면으로 이어진다. 능치 혹은 능점. 능청에서 능(能)-계의 지명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곰을 뜻하는 말이며, ‘능치’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곰티라고 풀이하면 옳을 것으로 본다.

예전엔 없었던 시설물들이 왜 이리 많은겨...

반갑구나...모든게 바꾸었는데 너혼자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니 말이다

베낭을 벗어논 생태통로 윗쪽으로 올라와서 점심을 먹으려니 조금전에

감나무에서 따먹은 홍시탓인지 아무것도 먹고싶은 생각이 없어서

베낭을 베개삼아 누우서 15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길을 떠난다(11:20~35)

산에만 들어서면 설레이는 마음...매주마다 걷는 산길이지만

첫사랑 때의 설레임이랄까...이 맛에 世俗에서의 힘듬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아닐까...이번주에도 스트레스받는 쉰 목소리를 고치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기로 예약되어 불안하지만...잘될거야 하는 믿음을 산이란

스승이 깨우쳐 주는구나

이곳은 민가와 가까운 대간길이라 그런지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없었던 철조망도 보이고 조금을 더 오르니 우측 능치리로 내려가는

사면길의 임도도 보인다

무좌골산을 향한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이다.

안부(11:55)

무좌골산을 향하는 오르막길

무좌골산 오름길의 나무사이로 맞은편에 애플밸리C.C가 보이고 

라운딩을 하는 골프들이 어렴풋이 보이는구나.

흔히들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는 가을 골프는

빚을 내서라도 다니라고 했는데 이곳은 수도권과는 달리

날씨가 따뜻한 탓인지 아직까지 페어웨이가 파랗게 보인다

무좌골산(473.5m:12:02)

경북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는 정상석도 없었고 판독이 쉽지않은 4등 삼각점만 있었으나 지금은 어였한

정상석이 서 있고, 지도상에도 무좌골산이라는 명칭이 있는 산으로 바뀌었다.

무좌골이라는 지명의 유래는알 길이 없고 다만 죽전리에 무좌골이라는 지명이

있는걸로 보아서 그  골짜기 위에 있는 산이라서 무좌골산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무좌골산 정상 삼각점(△452재설 / 78.11 건설부)

인증샷

무좌골산에서 2시 방향으로 대간길을 이어가는데 바람이 약간 불긴해도 힘든 정도는 아니다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내리막길도 등로는 낙엽으로 인해서 생각보다 미끄럽다

갈현(葛峴:12:20)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에서 경북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도치량으로

넘나드는 고개로  갈현 또는 칡고개라 부르는데 예전에 칡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 고개 아래에 도치량마을은 최근까지도 옻(漆)이 많이 생산되어 옻칠을 하는 행랑

즉 도칠랑(塗漆郞)이라 하는 것이 변음이 되어 그 후 도치량(道治良)으로 변했다고 한다

갈현의 죽전리 방향의 모습

능치리 방향쪽으로는 성황당의 흔적같은 돌무더기가 보인다

고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르면서 용문산을 향한 힘든 구간이 시작된다.

편안한 능선을 따라서 가다가...

오르막을 올라서니 봉우리 정상에 검은 차양막을 둘러논 흉물스런 움막이 길을 막는다.

기도터 바위(12:35)

움막뒤에 있는 바위가 지도상에는 기도터 바위라고 표시되어 있늗데

기도가 잘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곳을 기도터 바위라고 부르기도 하고,

심마니의 움막이라고도 하는데 심마니의 움막보다는 기도처가 맞는듯 하다.

이곳 우측 아래에는 부산에 있는 박태선 장로라는 자가 설립한 신앙촌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종교집단인 애향숙이란 이름의 용문산 기도원이 있기 때문이다

움막이 있는 곳을 내려선 다음에...

가야할 용문산과 기양지맥 분기봉인 청운봉이 보이는데 이곳의 등로는

작점고개에서 올라와 무좌골산에서 웅이산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형태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폐헬기장(12:38)

폐헬기장 우측 사면으로는 능치리로 내려가는 넓은 임도가 보인다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이른 아침에 열차에서 먹은 햄버거 하나와

난함산 도로를 따라서 내려오다가 따먹은 홍시 3개 이외는 먹은것이 없어서 그런지

허기가 지고,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요즘은 이상하리만큼 산에만 들어오면

먹는것이 부실하고 입맛이 없어서 거의 먹지않고 걷는 편이다

휴식(12:40~50)

용문산을 향하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되고 배고픔보다는 졸음이

우선인 듯 싶어 낙엽이 푹신한 대간 등로에서 베낭을 베개삼아

10분정도의 꿀잠을 자고나니 머리가 개운하고 몸이 훨씬 가볍다.

초콜렛 하나와 콜라 한병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오르막에 올랐다가 능선을 따라서 걸어간다

무명봉에 올랐다가 내려서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할 용문산(우)과

작은 용문산이라 부르는 687m봉(좌)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어느 산을 가더라도 꼭 철없는 넘은 하나씩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안부(13:03)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에...

687m봉(13:13)

산꾼들이 작은 용문산이라 부르는 687m봉은 그저 밋밋하다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늘 오르는 산은 예전 그대로인데 

나 자신만이 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요즘...

흐르는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리수 없음을 이제서야 느낀다

암릉길 오름은 낙엽이 엄청 미끄러워 한발 올라갔다가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갔다가 또 미끄러지고를 반복하니 체력소모가 엄청 심하다

용문산이 코앞인가 싶더니 올라서면 또 아닌 무명봉이다

무명봉(13:28)

갈현에서 시작된 용문산가는 길의 힘든 구간은 지난 모양이다

무명봉(13:40)

암릉구간을 통과하니 ...

용문산 정상석이 보이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용문산(龍門山:708.3m:13:55)

경북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옛 지명은 맷돌봉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도 용문산이 아닌

맷돌봉이라 표기가 되어있고 정상석과 유래비, 삼각점, 넓은 헬기장이 있다.

 

1800년 무렵 박송(朴松)이란 유생이 산세를 보고 용문산(龍門山)이라 이름 지었고,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기도원인 애향숙(愛鄕塾)을 세우고,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는

누구나 다 용납하고 만나 준다’는 뜻으로 ‘용(龍)’자를 용서하다는 의미의 ‘용(容)’자를 써서

용문산(容門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25000 지형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산이지만 용문산기도원(일명 용문산 신앙촌)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경북 상주군 공성면 백학산, 국수봉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 

산줄기가 용문산을 지나 갈현(葛峴),사기점고개, 추풍령(秋風嶺)으로 이어지며 이 일대 

백두대간 산줄기 높이는 500~700m로 대체로 낮은 산지를 이룬다.

능선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고, 동쪽 비탈면인 용문산마을에서는

어모면의 주요 하천이자 어모천을 대표하는 지명인 아천(牙川)이 발원하여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다가 갈현 부근에서 발원한 아천의 다른 지류인 감천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본류를 이루며 영동군에 속하는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반계천추풍령천

이루어 초강으로 흘러드는 낙동강과 금강의 수계가 갈라지는 곳이기도 하다

판독이 쉽지않는 용문산 정상 삼각점

정상석과 유래비

인증샷

용문산 정상에 서니 바람이 심하여 서둘러 길을 나선다.

가야할 청운봉과 웅이산(국수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며  우측 아랫쪽엔

용문산 기도원이라 불리는 애향숙(愛鄕塾)이 보이고 미끄러운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등로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애향숙(愛鄕塾)

내려가는 길도 그리 만만하진 않다...

낙엽은 미끄럽고...

그런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내리막길에 나무계단이 있어서 편하게 내려간다

안부(14:04)

산이란 참으로 공평한 듯 하다...편안한 내리막길이 있으면

어김없이 힘든 오르막이 있는 법...우리네 人生과도 같은

산길...그러기에 산은 늘 인간에게는 참 스승인 듯 하다

웅북리(熊北里) 상웅마을 갈림길(653m:14:07)

영동군 추풍령면에 있는 웅북리는 추풍령면의 동북쪽에 있으며 지장산 자락에

위치하여 맷돌봉(용문산), 국수봉(웅이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관리천이 흐르며,  쌀과 과수를 주로 재배하는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곰뒤(웅북), 각골(각곡,중웅), 상웅, 하웅 등이 있으며 마을이 곰산(웅이산)

뒤쪽에 있어 곰뒤 또는 웅북이라는 지명이 생겼으며 상웅은 웅북 위쪽에 있는 마을이며,

하웅은 웅북리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 중평이라고도 부르고 신수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4:10)

무명봉(14:13)

無病最利(무병최리)

세상에 병 없는 것이 가장 큰 은혜요 

 

知足最富(지족최부)

만족할 줄 아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네

 

厚爲最友(후위최우) 

친구 중에 제일은 믿음이란 벗이요

 

泥源最樂(이원최락)

즐거움의 제일은 고요한 열반이네

法句經 중에서

등로에서 바라본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 마을의 모습

용문산 오름길부터 체력이 저하되기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산행시간보다

지체된 느낌이다...귀경길을 생각하며 시간의 조급함에 허덕이며 부지런히

몸뚱아리를 움직여 보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아!...가는 歲月을 어찌할꼬?

意志

우측 사면으로 흐릿한 등로가 보이는데 용문산 기도원으로 내려가는 길처럼 보인다

안부(14:18)

낙엽속에 숨은 나무계단이 지친 산꾼을 조금이라도 도와 주려는 모양이다.

나뭇계단을 따라서 계속되는 내리막길

671m봉(14:26)

이정표( ←용문산 정상 820m, →국수봉 1,490m)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내리막길로 계속 내려가니...망자의 천년주택(묘지)가 나온다

무명묘지(14:27)

가야할 웅이산(국수봉:뒷쪽)과 청운봉이 보이는데 ...

급경사로 내려서니 용문산 기도원으로 내려가는 안부가 나온다.

2019년 6월 9일 감천(신산경표상:기양)지맥 첫 구간으로 올라왔던 길이다

용문산 기도원 대성전...2019년 6월 19일 산행때의 사진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용문산 기슭에 설립된 국내 최초의 개신교 기도원으로

평안북도 박천군 출신인 나운몽(羅雲夢,1914∼2009) 목사가 1947년 4월 5일 ‘애향숙’이란

이름으로 설립한 기도원으로, 한국 개신교 기도원의 모체이다.

 

나운몽은 한국전쟁 시기에 입신·방언·신유 등의 신비 체험을 한 후 용문산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에 나섰고, 이를 통해 용문산기도원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젊은 시절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번민하여, 불교에 귀의해 승려 생활을 하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1940년 5월 7일 용문산에 입산하여 개인적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해방된 해에 수표감리교회로

옮겨 1946년 장로 임직을 받았다


나운몽은 1947년 다시 용문산에 들어가 4월 5일 ‘애향숙’이라는 이름을 짓고 5명의 숙생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이후 신비체험을 하고 전국 각지에서 부흥회를 주도하였으며,

애향숙과 구국 기도를 접목시킨 용문산기도원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 운동은 더욱 발전해

나운몽의 3겹줄 전도운동인 부흥·문서·기도 전도의 열풍도 크게 일어났다.

 

1955년 기드온고등성경학교 설립, 1956년 기드온신학교와 기드온수도원을 창설하였고,

1961년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고 1962년 용문산기도원에는 신도 4백여 명

외에 남녀 학생 3백 명을 합쳐 7백여 명이 있었다.

 

1960년 4·19 직후에는 ‘북진통일’을 한다며, 신학생 3백여 명이 김천에서 대전까지 무임승차하는

사건도 발생했고, 1968년 2월 9일에는 용문산기드온신학생·수도생·수도사 등 400여 명이

십자군전도대회 깃발과 플래카드, 멸공통일이라고 쓴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임진강 자유의

다리를 향해 행진하며 북괴의 만행을 규탄하는 행진을 하다 미군과 충돌하기도 했다


지나친 신비운동을 막았던 기존 교회들로부터 논란이 벌어져, 1968년 7월 22일 예장(고신)

총회의 경남노회는 용문산기도원을 이단으로 결정했고, 이후에도 이단 논쟁 시비는 계속 일어났다.

 

현재 형태의 기도원으로는 한국 최초라고 하며 통일교의 문선명, 부산 신앙촌의 박태선과

더불어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보기도 하는데 나운몽목사는 2009년 별세했고 현재는 그의

아들이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하며, 이단으로 몰리긴 하지만 위 3인의 교리에 한 때 우리나라

전체 기독교인 절반 정도가 따랐다고 할 정도였다. 

용문산 기도원 안부(14:32)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근처에 기도원(애향숙:愛鄕塾)을 세운 뒤,

일명 용문산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곳으로, 서울과 부산 사이 바로 중간에 위치하고,

영남과 호남의 분계선이며, 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남북 양대 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의 특성으로, 남한 중심에 위치한 소위 '성산'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이며, 초창기

애향숙은 신앙적인 목적보다 일제하의 설움에서 오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출발하였다가 이후 애향숙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기도원 운동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라 하는데 현재 전국 3만여 명의 신도가 연중행사로 기도대집회를 열고 있다.

 

 1979년 3월 30일 미국 오순절(五旬節) 성결교회와 제휴하여 대한예수교 오순절 성결교회를

 설립하고 재단법인체를 구성하여 7명의 인사로서 사무, 전도, 교육, 출판, 농림, 건설, 후생의

 7국을 각기 분담하여 용문산기도원 사업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있다고 한다.

빡센 오르막길...숨이 막힐정도의 힘든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든다.

가다서다를 반복을 하면서 오르는데 먹은게 없었던 탓인지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용문산을 지나 갈령, 기도원 안부, 청운봉에서 웅이산(국수봉)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의표를 찌르는 길이다...고도가 낮다고 우습게 보았다간 큰 코 다치기

십상인 곳으로 파도처럼 이어지는 능선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는 빨래판

구간의 능선의 연속...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된비알 등등‥‥

거기다가 수십번도 더되는 오름과 내림의 파노라마같은 반복 현상... 

 

고도가 높은 다른 구간의 산행에서 볼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 모두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간길로, 특히 국수봉에서의 조망은 마루금 상의 어느

명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나, 아쉽다면 오늘은 미세먼지로 인해 흐리다는 점이다

오늘 가고 있는 구간 역시 이 땅이 한반도의 등뼈임을 알게 해주는 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감천(기양)지맥 분기점의 시작이 되는 능선엔 용문사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다.

올라오는 길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500m 정도의 거리를 25분이나 걸렸다.

난이도가 힘든게 아니라 먹은게 없어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탓인듯 하다.

청운봉(靑雲峰:734.2m:14:57)

이곳이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감천(기양)지맥의 분기점으로 예전엔 국토정보지리원에

734.2m봉으로만 등록된 봉우리이나 지금은 청운봉이란 지명을 부여받았지만 지도상엔

등록이 되어있지 않는 지명이다...이곳부터 남쪽으로는 김천시에서 상주시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감천(기양)지맥 개념도

 감천(기양)지맥(岐陽支脈)은 백두대간 국수봉(794m) 남쪽 0 .6km지점인 무명봉( 734m)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여남재(3번국도),백운산(631m),기양산(705m),수선산(683m),주아현,

형제봉(532m),신산(457m)를 지나 감천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구미시 선산읍 원리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45.8km되는 산줄기로 감천(甘川.69km)의 우측 분수령이 되는데 산으로님이 저술한

대한산경표에서는 감천지맥이라 부르는데 2019년 6월 첫 구간을 걸을 때 올라 왔으니

벌써 3년하고도 6개월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기도원 안부에서 청운봉까지 올라오면서 너무 힘이 들었는데 이곳에서 

웅이산으로 향하는 등로는 편안한 능선이라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걸어간다

안부(15:02)

안부를 지나 낙엽속에 묻힌 나무 계단을 따라서 올라간다

나무 계단을 지나서 암릉구간으로 올라서니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

마을과 영동의 산그리메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미세먼지로 인하여 

모든게 흐릿하게 보인다

웅북리 뒷쪽으로 지장산, 그 뒷쪽으로 보이는 백화산은 완전히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암릉구간을 지나서 잡목을 헤치면서 올라서니...

 웅이산(국수봉)이 나온다

웅이산(熊耳山:794.2m:15:17)

경북 상주시 공성면 영오리와 모동면 신곡리,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가

만나는 삼면(三面)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원래는 국수봉((掬水峰)이었으나

2012.5.18.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웅이산(熊耳山)'으로 확정하였다 하며 국수봉이라는

지명이 유래도 뜻도 없이 붙여졌다고, 상주시에서 국가지명위원회에 변경의뢰를 한

결과라고 하는데,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덩치에 비해 작은 곰의 귀(熊耳)처럼

산정(山頂)이 능선에서 살짝 솟아올라 있다고 한다

 

국수(掬水)란 ‘두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물을 뜬다는 의미의 掬水’,라 부르는데

뜬 물은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내리게 마련이다...말인 즉 국수봉 또한 물을 가르는

(낙동강과 금강을 가른다) 분수령이라는 뜻일게다.

 

큰재에서 남쪽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상에 솟은 산으로 맑은 낮에 국수봉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난함산, 황악산, 민주지산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날이면 백두대간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되는 곳이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山)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정상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고 아울러 낙동. 금강의 분수령이므로

국수(菊水)라 한 듯 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던 산인데,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하여 웅이산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의 지리지와 고지도에는 학무산과 용문산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고 이를 통해 같은 산을 마을에 따라 달리 불렀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한국지명총람에는 '학무산'과 다른 이름 곰산, 웅이산(熊耳山), 용문산

(龍門山)이 기록되어 있는데, 학이 춤을 추는 풍수 형국을 가졌다는 것과 

옛날에 곰이 살았다는 점, 그리고 이 일대에서 가장 높아 머리처럼 우뚝 솟았다는

유래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한자 지명을 단순하게 뜻풀이한 것이다.

인증샷

좌측으로부터 주행봉, 한성봉, 와곡산, 팔음산이 보이고 뚜렸하게

보여야 할 속리산 능선과 구병산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예전의 국수봉 정상석은 사라져 버렸고 유래 안내판만 보인다

웅이산 표시석 뒷면의 모습

무좌골산을 지나면서부터 급격한 체력저하로 인해 발걸음이

느려지는 바람에 예상 시간보다 너무 많이 지체되어 웅이산에서

곧바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길을 가다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나는 하늘을 밟고 가리라.

 

기다림은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아니다.

걸어서 누군가에게로 찾아가는 것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에서 겨울로

산이거든 들이거던 바다거던

 

길이란 낯선길을 만나

낯설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가는 앎다운 과정이다

 

나는 오늘도 그 아름다운 길을 만나야겠다.

항상 베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깃처럼 가벼워진다

 

김 택근 시인의

베낭을 메면 몸이 가벼워진다 中에서

언제올 지 모를 다음 구간 상주를 통과하는 대간길

대간길 코스에서 가장 고도가 낮고 편한 길이다.

흔히들 이 구간을 非山非野 구간이라고 하는 곳이지

앞에 보이는 산은 백두대간에서 벗어나 있는 와곡산이다

큰재까지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다.

잠시후에 오를 682.4m봉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내려간다

안부(15:32)

무명봉(15:34)

이곳의 낙엽은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15:38)

682.4m봉(15:39)

정상에 오르니 판독이 쉽지않은 삼각점과 대간꾼들의 시그널이

많이 걸려 있고, 트랭글앱에서는 민영봉이라고 하나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682.4m봉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682.4m봉에서 만난 대간꾼들의 흔적

판독이 불가능한 683.5m봉 삼각점

북쪽으로 능선을 걸으면서 큰재로 향한다

무명봉(15:43)

백두대간 등산로 팻말이 있고 우측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암릉구간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산이나 권좌나 내려올 때 늘 조심하라고 했제.

그런데 산꾼들은 확실히 인지하는 듯 한데

권력에 취했던 자들만이 그걸 모르는 듯 하다

오늘 산행 구간은 백두대간의 전 구간 가운데 키(고도)가 가장 낮은 곳으로

추풍령-속리산 아래(화령재)로 이어지는 대간길인데, 높은 산이라고는 없으며

가장 높다는 웅이산(국수봉) 조차도 높이가 794.2m에 불과하다.

그래서 정통지리에서는 이 구간을 두고 “ 백두산에서 내려오던 氣가 덕유산 및

지리산까지 뻗어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신선들의 공깃돌

아주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481.2m봉(16:00)

오늘 산행중에 마지막 봉우리이다...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아무런 흔적도 없고 봉우리 자체가 안보이는데 봉산행을 

하시는 분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 띠지 하나가 족보있는

봉우리임을 알려준다

봉우리에서 살짝 비켜서 내려 갔다가...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니 낙엽속에 묻힌 나무 계단이 나오고...

등로 좌측 아랫쪽 잘 관리된 묘지가 보이고...

계속해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등로 좌측 아래에 비닐하우스가 보이는데 큰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이정표를 지나니 안부가 나온다

안부(16:15)

무명봉(16:20)

예전엔 우측으로 내려가는 등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철망으로 막혀있다.

아그들의 흔적

철조망을 따라서 계속 내려간다

잔차가 왜 산으로 오는겨?

산꾼은 산길로, 잔차는 잔차길로...

남실마을은 상주시 공성면 신곡리에서 도곡리를 넘어가는 920번 지방도 지나는

곳으로 이 신곡리는 일면 납실 또는 남실이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김천에

살던 신씨(申氏)가 이곳으로 피란와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신곡(申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곡리 남실마을 입구로 내려서면서...

큰재에 도착한다

큰재(320m:16:23)

경북 상주시 모동면 신곡리에서 공성면 도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예전의 초등학교 자리는

상주시에서 운영하는 백두대간 생태 체험장이 들어서 있고, 예전에 비해 변해도 너무 변해 버렸다

낙동강과 금강의 발원지로 갈라지는 큰재는 우하재라고 불리기도 하며,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상주에서 한양으로 가기위해 넘어야 할 큰 고개라 해서 “큰재”라 불리웠다고 한다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라 임진왜란을 비롯한 각종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기도 한 곳이다

산행을 종료하고 백두대간 생태 교육장 앞에서 두리번 거리는데

교육장 안쪽에서 RV차량 한대가 나오는데 앞에 차단봉이 막혀있어

내가 그걸 치워주면서 어디로 가시냐고 물으니 옥산으로 간다고 한다.

그러시면 내가 상주에서 서울로 가야하는데 옥산까지 태워주면 안되겠냐

하니까...차에 농산물이 실려있어 좁다고 하면서 좀 불편하시더라도

타라고 한다...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땐가...마스크를 쓰고 얼른

차에 탄다

내 또래쯤 된 60대 후반의 부부이신데, 농사를 짓는건 아니고

소일거리로 텃밭을 하는데 무우와 배추를 좀 수확해서 집에

가는 중이라고 한다...지난 3차 대간길에서 어느 여인에게

신세를 져서 편하게 산행을 했는데 오늘도 저 차의 쥔장 땜에

편하게 공성면 소재지인 옥산까지 편하게 왔다...복받으셔요.

상주시 공성면의 중심지인 옥산리(玉山里) 전경

공성면의 모든 행정기관과 옥산역이 있는 옥산리는 상주시 남부지역의 거점으로

장동천과 옥산천이 만나 같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덕미와 주산이 있었는데,

1913년 대홍수로 인하여 주산(珠山)마을을 덕미로 통합하여 "주산"이라 부르다가

후에 옥산(玉山)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옥산이란 말은 대홍수시 마을 중간에 있던

소하천의 제방이 유실되어 홍수 후 주민들이 이 제방을 복구하던중 구슬(玉)이 나왔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대부분의 주민이 상업과 농업을 겸하고 있는 마을이다

공성버스 정류장(16:40)

공성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김천에서 출발하여 상주로 가는 시외버스는

16시 15분에 이곳을 통과하는데 이미 지나갔고, 다음 버스는 19시 15분,

19시 45분이라 너무 늦다...이곳에서 상주까지도 30분이상이나 걸린다

정류장안 유리창에 붙은 상주시내버스 시간표는 외지인들에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상주여객 회사로 전화를 하니, 옥산에서

상주로 오는 970번 버스가 있는데 17시 55분과, 18시 30분에

있다고 한다...이곳에서 1시간 이상을 죽치고 있어야 하다니...

그래도 버스가 있다는게 어딘가...버스 정류장 안에 있는 의자에는

우리동네 버스정류장처럼 바닥에 따뜻한 히터가 들어온다.

 

이곳에서 수통에 남은 물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베낭에 남은 빵 하나와 우유를 먹고나니 궁뎅이가 따뜻해서 그런지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따뜻한 의자에 누워 베낭을 베개삼아

정신없이 자다가 일어나니 17시 45분...1시간 가량을 꿀잠을 자고나니

몸뚱아리는 개운하고, 주위는 벌써 어둠속에 숨어 버렸다.

17시 55분 정확하게 버스는 도착하고, 옥산에서 상주까지 나혼자

버스를 전세(?)를 내어 상주터미널에 도착한다.

상주터미널(18:30)

상주터미널 버스 시간표
상주터미널에 도착하여 서울가는 버스표를 예매 하려니 우리집과 
가까운 강남터미널가는 19시 40분행 버스표는 매진됐고, 다음차는
21시 10분에 있는 막차밖에 없다고 하고,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도
매진되었다가 한 사람이 취소를 했는데 이 사람이 현금으로 예매했다가
취소를 했기 때문에, 현금으로 달라고 하는데 이 차가 막차란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 버스표를 현금으로 주고 산 다음에 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해장국집에서 선지해장국 한그릇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화장실에서

깔끔하게 씻고, 커피한잔 마시고 터미널을 왔는데도 30분이나 기다린다

상주발 → 동서울행 버스표

터미널 대합실 의자에서 30여분간 멍때리기를 하다가 버스에 오른다.

19시 40분에 출발한 버스는 점촌을 경유한 다음에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선다

난 잠에 빠지고 한참을 잔 다음에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호법j.c를 지나면서 차는 엄청나게 정체되고

2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버스가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11시 20분이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다 된 시간이다...아!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