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3년 04월 15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날씨에 오후에는 중간중간 비가 내림
☞ 산행거리: 도상거리 6.6km +들머리 3.9km + 날머리 4.2km / 5시간 35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유가사 주차장-극락교-도성암 갈림길-유가사-대견사 갈림길-돌탑
비슬산 갈림길-갈림길-폐헬기장-금호 남(청룡)지맥 분기봉-천왕봉
조망바위-안부-1,054.0m봉-도성암 갈림길-쉼터-무명봉-명품송
무명봉-안부-802.4m봉-십자 안부-암봉-무명봉-844.9m봉-단양우공 묘
쉼터-정대잿들-876.0m봉-무명봉-암봉-갈림길-703,4m봉-NO56 송전탑
무명봉-696.4m봉-폐헬기장-용연사약수터 갈림길-정대초곡 갈림길
687.5m봉-이정표-가창임도-쉼터-쉼터-용문폭포-용문사 입구
화원자연 휴양림-제2주차장-마비정 벽화마을 갈림길-용천4교
마비정 백화마을 삼거리
☞ 소 재 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창면, 옥포읍, 화원읍 / 경북 청도군 각북면
다음주는 개인 일정이 너무 많아서 아무래도 토요일에 산행을 해야겠는데 구라청의
예보로는 토요일에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하니 고민이 많다...월욜날은 모임에서
골프 라운딩을 가야하고, 화,수욜날은 병원 검진, 목요일에는 지인들과 라운딩이
있어서 한 주 쉴까도 고민을 해봤지만 가볍게라도 산을 갔다와야 편할것 같다.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한다...지난주에 갔던 만경 남(모악)지맥을 마무리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이곳은 너무 편한 곳이라 컨디션이 안 좋을때 가려고 남겨둔다.
그러다가 고민 고민끝에 대구 금호강의 남쪽에 있는 금호 남(신산경표상:청룡)
지맥을 가기로 하고 날씨를 검색해보니 15일(토) 아침 9시 이전에만 비가오고
그 이후로는 흐린 날씨라고 표기가 되어있어 이곳의 첫 구간을 찜한다
이 지맥의 첫 구간을 가기 위해서는 유가사를 가야하는데 이곳은 예전에는
경북 달성군이었고, 지금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되긴 했지만 교통편은 아주
불편하다
1, 고속버스로 가려면 경부터미널에서 06시에 출발하는 첫 차를 타고 동대구까지
가는데 3시간 30분이 소요되고, 동대구역에서 대구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부주차장
까지 가서 현풍가는 버스를 타야하는데 서부주차장에서 현풍가는 첫 차가 09:10,
10:00, 13:00라서 동대구역에서 서부주차장까지 지하철로 40여분이 걸리기에
10시 차를 타기도 힘들것 같아서 포기를 한다
2, 서울역에서 05시 30분 이전에 출발하는 ktx열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도착하면
07시 30분 전.후이다...이곳에서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고 대곡역에서 내려
유가사까지 가는 600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첫 차가 06:45, 07:35,10:15,
11:05인데 대곡역에서 유가사까지 빙빙 돌아서 가기에 소요 시간이 1시간
35분이고, 버스 종점이 유가사 밑에 있는 척진교 금방이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이곳을 접근하기 위해서 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요즘 비슬산 진달래
축제기간이라 안내산악회에서 많이 가고 있어서 예전에 두어번 따라갔던
안내 산악회를 따라가기로 하고 신청한 다음에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밥 한숫갈을 먹고 7시에 양재역에서 출발하는 산악회 버스를
타기 위해서 집에서 가까운 양재역으로 향한다
06시 50분에 양재역 탑승장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7시가 넘어서도 오질 않아서
행여 버스가 출발해 버렸나하고 전화를 해봤더니만 첫 출발장소인 사당역에서
사고나 나서 늦는다고 하면서 연신 미안하다는 소리에 아무말도 못했다
07시 30분이 지나서야 산악회 버스에 올라 유가사로 향한다...중간에 화서휴게소에
들려 볼 일을 보고 부지런히 출발하여 유가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11시 20분이 조금
시간이다
금호 남(청룡)지맥 개념도
신산경표상의 청룡지맥(靑龍枝脈)은?
비슬지맥의 비슬산(琵瑟山) 동남쪽 400m 지점의 분기점(x1038m) 에서
북쪽으로 분기해서 비슬산(△1082.8m), 청룡산(靑龍山 △792.9m), 산성산(△653.4m)
을 지나 대구 시내를 가로 지르며 두류산(x125.4m), 와룡산(x299.7m), 궁산(x250.9m)을
지나 대구 달서구 파호동 강창교앞 금호강 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4.7 km 되는
산줄기로 금호강의 우측 분수령이 되며, 강창교에서 1.7km 정도 제방둑을 따라 내려가면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수되고 합수점 부근의 낙동강에 강정고령보가 위치해 있다.
水界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금호강의 우측 산줄기라 하여 금호 남 지맥이라
하며, 코스는 신산경표상의 청룡지맥과 주행이 일치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유가사 주차장에 조금늦게 도착한 탓인지는 몰라도 주차장에 관광버스는 그리 많지않다.
하기사 나같은 맥꾼이 아닌 진달래를 보기위한 등산객이라면 유가사쪽보다는 반대편인
대견사쪽이 훨씬 났지...주차장에 내리니 비는 오지 않으나 잔뜩 흐린 날씨에 생각보다
날씨가 엄청 춥다...산행을 준비하는데 같이 타고온 등산객들은 버스가 늦게 도착한
때문인지 아니면 산행대장의 재촉 때문인지는 몰라도 버스에 내리자마자 도성암쪽으로
가버렸다... 나야 안내산악회 버스를 타고오면 아는 사람도 없고, 가는 길이 달라서
알 필요도 없다...버스에서 산행 대장에게 개인 산행을 할 것이니 기다리지 말라고
하고 나홀로 도성암이 아닌 유가사 방향으로 향한다
유가사 일주문(一柱門)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가사 일주문이 경상도 지역에 있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이채롭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절집에서의 전각들이 화려한
단청을 한 것 보다는 이렇게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 일주문(一柱門)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들을 걸어 사찰의 격(格)을 나타내기도 한다.
규모가 작은 절에서는 가끔 생략되어 '천왕문(天王門)'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절의 규모가 작거나 제한이 있어 '삼문'(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모두 갖춰 세우기
어려울 때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 당간지주(幢竿支柱)란 불교 법회 따위의 의식이 있을 때 쓰는 기(旗)를 달아
세우는 장대인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 두 개의 기둥을 말한다
산행을 시작하다(11:35)
비슬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은 유가사쪽이 아닌 대부분이 도성암쪽으로 가는지
유가사쪽으로 향하는 등로는 참으로 호젓하고 좋다...딱 내 스타일이여...
도로옆에는 밤에 내린 비로인해 촉촉히 젖어있는 개별꽃이 범여를 반갑게 맞아준다
극락교(11:40)
도성암 갈림길(11:41)
이곳에서 비슬산으로 오르는 많은 등산객들은 수도암쪽을 택해서
오르는데 난 유가사도 들려야 하기에 유가사 방향으로 향한다
비슬산 등산지도
유가사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유가사 108돌탑을 세운 의미를 새긴 안내석이 보이고
주위에는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진 詩를 새긴 표시석과 돌탑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가사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난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한
뛰어난 學僧이셨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1289)스님의
“찬 포산 이성 관기 도성(讚 包山 二聖 觀機 道成)”이란 詩碑를 만난다
일연(一然)스님은 경상북도 경산(慶山) 출신으로 9세 때 전라도 해양(海陽) 무량사
(無量寺)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승과에 급제하였고, 1277년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왕에게 법을 강론하였다.
저서로는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및 향가를 집대성한 《삼국유사》, 《제승법수》 등이 있다.
역사는 어떻게 편찬하느냐에 따라 기전체(紀傳體), 편년체(編年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기전체는 역사책을 쓸 때 사용하는 체재로 군주의 정치관련 기사인
본기와 신하들의 개인 전기인 열전, 통치제도·문물·경제·자연 현상 등을 내용별로 분류해
기록하는 방법으로 중국 사마천의 <사기>가 그 시작이다...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고려사>가 기전체로 이것들은 왕조의 정사(正史)를 다룬 내용들로 국가차원에서 편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는 위에서 말한 편찬체재를 갖추었다기보다는 삼국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해주는 책으로 <삼국사기>에서 빠뜨린 것을 보완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데,
<삼국사기>가 정사(正史)라면,<삼국유사>는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야사에 해당한다.
서양에 그리스로마신화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삼국유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모두 5권 2책이며, 상권(1~2권)은 주로 역사 사실을 다루었고,
하권(3~5권)은 불교 사실을 다루었으며, 내용은 주제에 따라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
신주·감통·피은·효선 등 9편으로 구성되었으며 하권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까지 있었던 정형시인 향가가 14편, 균여전에 11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향가로는‘서동요, 혜성가, 풍요, 원왕생가, 모죽지랑가,
헌화가, 원가, 도솔가, 제망매가,찬기파랑가, 도천수관음가, 우적가, 처용가, 안민가’다.
相過踏月弄雲泉 (상과답월롱운천)
달빛 밟고 서로 오가는 길 구름어린 샘물에 노닐던
二老風流幾百年 (이로풍류기백년)
두 성사(聖師)의 풍류는 몇 백 년을 흘렀던가
滿壑煙霞餘古木 (막학연하여고목)
안개 자욱한 골짜기엔 고목만 남아 있어
偃仰寒影尙如迎 (언앙한영상여영)
쓰러져서 우러르는 찬 나무 그림자 서로 맞이하네
위에서 말하는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는 신라 42대 임금인
흥덕왕(826~836) 재위 때 활약했던 스님들로 이곳 비슬산 북쪽에는 도성대사가
지금의 도성암 옆, 도통바위가 있는 굴에서 수도하였고 10리 밖 남쪽 관기봉 인근에
관기대사가 암자를 지어 수도하며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서로 내왕하였다.
도성(道成) 스님이 관기(觀機)스님을 보고 싶을 때는 산중의 나무들이 모두 관기가
있는 남쪽을 향하여 엎드리면 관기가 이를 보고 도성을 찾아갔고, 관기가 도성이 보고
싶으면 역시 나무들이 도성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쓰러지면 그걸 보고 도성이 관기를
찾았다고 한다... 반사, 첩사 또한 속세와 인연을 끊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동굴에서
수도하다가 달 밝은 밤 바위에 앉아 선정에 들어 바람 따라 사라졌다고 한다
조금전의 안내석에 108개의 돌탑을 세워놨다고 하는데 탑의 형태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않은 남방불교에서나 볼 수 있는 스투파(Sthupa)형식으로 된 게 이채롭다.
탑과 詩碑를 보면서 좌측의 돌계단으로 올라선 후에 低頭三拜의
예를 올린 다음, 유가사 경내(境內)로 통과하는 사천왕문으로 들어선다
유가사 사천왕문(瑜伽寺:11:45)
비슬산 유가사는 대구 달성군 유가면 양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고 절의 창건에 관하여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기 765~780년, 신라 혜공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신라 흥덕왕 2년 (827년 )에
도성(道成) 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후자인
도성국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사천왕문(四天王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으로,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곳으로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사방에 있는 사왕천(四王天)의 네 왕으로, 도리천(忉利天)의
우두머리인 제석(帝釋)을 섬기는 신들이다.
사천왕문에 들어서는데 입구에는 “瑜伽寺”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좌측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이 있는데 ,북쪽에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항상 도량을 지키면서 설법을 듣는 천왕이고, 동쪽에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중생을
두루 보살피면서 불국토를 지키는 천왕이다
남쪽에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불법(佛法)을 보호하면서 만물을 소생 시키고,
서쪽에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눈을 부릅뜨고 그 위엄으로 불법을 보호하는 천왕으로
이들은 중생을 보살피고, 불법과 그에 귀의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항상 도량을 지킨다고
하기 때문에 사찰의 입구에 모셔져 있으며, 절집마다 약간의 위치가 다를수가 있다
이곳에서 사천왕에게 예를 올리고 빠져나와 뒤돌아보니 절집 안쪽에는 “四天王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돌계단으로 올라서니 범종루(梵鐘樓)가 나오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범종루는 취적루(翠滴樓)로 불리기도 하는데 1층 아래로는
절집 마당으로 통과하며, 2층에는 절집의 의식때 사용되는 불전사물(佛殿四物)이 있다.
불전사물(佛殿四物)이란 불교의 여러 의식에서 사용되는 네가지의 성구(聖具)를 말하는데,
모든 나는 중생들을 위한 운판(雲板)과. 모든 길짐승을 포함한 중생들을 위한 법고(法鼓),
모든 물속에 사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목어(木魚)와 지옥에서 고통받는 지옥중생을
제도하는 범종(梵鐘)이 있는데,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가진 불교사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사물이라 할 수 있다.
유가사 시방루(十方樓)
시방루(十方樓)의 ‘시방(十方)’은 불교에서 우주에 대한 공간적인 구분으로 동·서·남·북의
사방(四方)과, 동북·동남·서남·서북의 사유(四維)와, 상·하의 열 가지 방향을 말하는 것으로
시간 구분인 삼세와 통칭해 전 우주를 가리킨다고 한다
범종루를 지나 마당을 통과한 다음에 나타나는 시방루(十方樓)는 2004년에 건축된
누각(樓閣)으로 1층은 차를 마실 수 있는 쉼터 공간이고, 외벽에는 공감이 가는
불교 경전의 말씀들을 많이 써놨고, 2층은 법당으로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의
삼신불과 2,000분의 원불과 지장탱화가 모셔져 있는 유가사에서 가장 장엄한 전각인
강당(講堂)으로 현재 유가사에서 다수의 대중들이 모이는 법회는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갈 길이 바빠서 2층은 들리지 않고 대웅전으로 향한다
시방루에 외벽에 있는 글귀
시방루를 통과하여 대웅전 마당에 올라서니 초파일을 준비하는 연등들이 보인다.
올해는 윤달이 있어서 초파일이 양력으로 5월말경이나 될 듯 하다...몇년간
코로나라는 역병으로 인해 법회가 열리지 못해서 절집의 곳간 사정이 무척이나
어려울텐데 올해는 정상적으로 초파일 행사를 여법하게 치르져서 절집의 형편이
풀렸으면 좋겠다.
유가사 대웅전으로 오르는 양 옆에는 당간지주가 있고, 사진에서는 놓쳤지만
예쁜 석등과 땅바닥에 연꽃모양의 배례석이 특이한게 마치 스리랑카 같은
남방불교의 집집에서 많이 만나는 Moon stone같은 느낌을 준다
유가사 대웅전(大雄殿)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 중앙에 모셔져 있고, 좌우에 협시불(脇侍佛)로 문수보살
(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있으며,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세울 경우에는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한다.
항상 가람의 중심이 되는 전당(殿堂)이 대웅전인데, 큰 힘이 있어서 도력(道力)과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으로 ‘대웅(大雄)’은 고대
인도의 ‘마하비라’를 한역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英雄) ,
즉 대웅(大雄)이라 일컬은데서 유래했다.
절 이름은 비슬산의 바위모습이 아름다운 구슬과 부처의 형상과 같다 하여 “옥 유(瑜),
절 가(伽)”자를 따서 지어졌다고 경내에 세워진 안내판에 적혀있고, 그 뒤로 진성여왕 3년에
원잠선사가 개축하는 등 여러 차례 중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속 암자로는 수도암, 청신암, 도성암을 거느렸다.
대웅전은 정면·측면 각 3칸으로 내부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본래는 영산회상후불탱화와
지장탱화· 괘불이 남아 있었으나 1993년에 도난당하였다... 현재는 사진을 복사한 것이
걸려 있고, 1964년 우송(友松)스님이 제작한 칠성탱화와 신중탱화가 함께 모셔져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長大石)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주상(柱上)에는 창방(昌枋)을 끼우고 평방(平枋) 위에는 공포를 얹었는데 주칸(柱間)에도
1구씩의 공포를 얹어 외 3출목(外三出目)의 다포계 건물을 이루었으며,내부는 통간(通間)으로
처리하여 우물마루를 깔았고 범종루로 사용되는 취적루는 주심포계의 팔작 기와집이다.
유가사의 건물 배치는 산지 중정식 배치법을 지니고 있는데, 산 중턱 경사면에 터를 잡은
관계로 부지를 자연 경사에 맞도록 3단으로 조성하여 대웅전과 취적루를 중심 축으로 하여
좌우에 백화당과 동산실을 두어 '구(口)' 자형 가람 배치가 이루어졌다... 중정 가운데 삼층
석탑을 두었고, 취적루 전면 한 단 낮게 사천왕문을 앉혔으며, 대웅전 좌측에 나한전, 용화전과
산령각을 배치하여 일곽을 이루고 있는게 특징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그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님이 모셔져 있으며,
영산회상도, 지장탱화, 괘불이 있었으나 도난당했으며, 1996년에 영산회상도, 칠성탱화,
신중탱화를 제작하여 봉안하였으며, 지금의 대웅전은 1979년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시예불(巳時禮佛:(오전 9시~11시)에 올리는 예불 기도)이 끝난 시간이라 그런지
법당안은 조용하고 등산객 한명이 홀로 금강경을 독송(讀誦)하면 삼매경(三昧境)에 빠져있다
대웅전 주련의 글귀
世尊當入雪山中(세존당입설산중)
세존이 설산 가운데 들어가셔서
一坐不知經六年(일좌부지경육년)
한 번 앉아 여섯 해 지남을 느끼지 못했네.
因見明星云悟道(인견명성운오도)
샛별 보고 도를 깨치셨으니
言詮消息遍三千 언전소식편삼천
말씀하신 소식 삼천대천세계에 두루하도다.
유가사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사찰 당우로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살을 모신 당우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진 까닭은, 관음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 아니라 그의 서원(誓願)이 철두철미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인데, 관음전 내에는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연화좌 위에 앉은 관음상을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나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楊柳觀音), 보관 위에 11개의 다른 모습을 가진 십일면관음, 그 밖에
해수관음(海水觀音)·백의관음(白衣觀音)·용두관음(龍頭觀音)·천수관음(千手觀音) 등을
모시기도 하며, 후불탱화(後佛幀畵)로는 양류관음도·백의관음도·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
(千手千眼觀世音菩薩圖) 등, 봉안된 관음상의 유형에 따라 봉안하게 된다.
이번 산행을 시작하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이 유가사에 30여년이나
주석(駐錫)하셨다는 걸 처음 알았다...일연 스님은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승려로,
가지산문(迦智山門) 은 신라 말기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전남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를
거점으로 일으킨 구산선문(九山禪門)중에 하나로 도의 선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원조로 꼽힌다.
선종의 흐름은 고려시대 3대 종파 가운데 하나인 유가종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에
일연스님이 있었다고 하며, 비슬산 자락에 있는 유가사나 유가사가 있는 지명인
유가면에서 자취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내 고향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유가사였지만 난생 처음왔다.
오늘은 성지순례가 아닌 산행을 왔기에 가야할 길이 멀어서
‘처삼촌 벌초하듯’ 走馬看山격으로 유가사 경내를 둘러보고는
비슬산으로 향하는데 언제 다시한번 와서 제대로 한번 돌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운 맘을 뒤로하고 절집을 빠져 나온다(11:53)
유가사를 빠져나와 비슬산으로 향하는 길 주위에는
많은 돌탑과 유명한 詩들을 새긴 돌들이 참으로 많다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묵언스님의 시도 보인다
돌탑과 팔각정이 있는 쉼터도 보이고...
백번 옳은 말씀...
春園의 육바라밀을 뜻하는 “애인”이라는 詩碑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유가사를 빠져 나와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비슬산 정상까지 3.3km란다...버스가 너무 늦게 도착하여 12시가
다 되어서야 산행을 시작하지만 그리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내가 타고온 안내산악회와는 전혀 관련없는 산행을 할 것이고
귀경하는 교통편도 열차를 타고 갈 것이라 걱정할 필요는 없으나
아무래도 처음에 계획했던 구간까지는 산행을 하기에는 무리일 듯 싶다.
이곳은 등산객들이 많지 않아서 호젓하게 길을 걷는데 제도권 등로라서
길은 무쟈게 좋고 중간 중간에 일연선사와 관기와 도성스님의 안내판이 보인다
관기와 도성 스님에 대한 안내판
수성골 계곡으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완만한 오르막길
수성골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은 상수도 보호구역이라
접근조차 못하게 휀스로 막아놨다
휀스에 걸어둔 야생화의 안내판
구조이정목에는 대견사(大見寺)에 대한 안내판이 걸려 있는게 이채롭다
창건자는 미상이나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사찰이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절을 지을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낯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찾게 하였는데,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어 찾아낸 곳이 이 절터로, 이 터가 대국에서 보였던
절터라 하여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대견사는 설악산의 봉정암, 지리산의 법계사와 더불어 1,000m 이상에 자리 잡은 사찰 중
한 곳으로, 일연 스님이 1227년 22세의 나이로 승과에 장원급제 하여 초임 주지로 온 이래,
22년간을 주석한 곳으로 삼국유사 자료수집 및 집필을 구상한 사찰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이유 강제 폐사된 후 100여 년만인
2014년 3월 1일 달성군에 의해 중창되어 민족문화유산을 재현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있다.
대견사에는 불상이 아닌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어 적멸보궁이라 한다
유명한 비슬산 진달래가 아닌 복숭아꽃이 등산객이 아닌 산꾼을 반긴다
비슬산 암괴류라고 하는 너덜지대같은 곳을 만난다
암괴류(岩塊流)란 큰 자갈 또는 바위크기의 둥글거나 각진 암석 덩어리들이 집단적으로
산 사면이나 골짜기에 아주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하는데, 비슬산 암괴류는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의 거석들로 이루어진 특이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길이 2㎞, 폭 80m, 두께 5m에 달하고 암괴들의 직경이 약 1∼2m에 이르는
것으로 국내에 분포하는 수 개의 암괴류 중 규모가 가장 커 학술적·자연학습적 가치가 매우 높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리 비슬산 일대에 있는 달성 비슬산 암괴류(達城
琵瑟山岩塊流)는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의 거석들로 이루어졌으며, 특이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어 2003년 12월 13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암괴류 지형은 주빙하적 기후환경에서 초기에는 거력과 세립의 기질이 뒤섞인 거대한
유동성 덩어리 상태로 솔리플럭션(solifluction)과 동상포행의 양상으로 사면을 따라
서서히 이동하여 발달하며, 주빙하적 기후환경이 끝남과 동시에 유동성은 사라져서
암괴류 지형은 안정화 단계를 맞는데, 이 단계에서 유수가 흐르게 되면 세립의 기질은
침식·운반되어 유실되고 거력들만 남게 된다. 이러한 단계가 지속되면 거력들은 더 이상
이동되지 않아 돌버섯이나 이끼류가 거력의 표면에 나타나게 된다. 이를 화석화 지형단계라고 한다.
암괴류는 비슬산 해발 약 1,000m 부근에서 시작된다. 서로 다른 사면을 따라 내려오던 암괴류가
해발 약 750m 지점에서 합류하여 약 450m 지점까지 이어진다. 암괴류의 규모는 길이 2㎞,
폭 80m, 두께 5m이며, 암괴들의 직경은 1~2m에 이른다. 면적은 989,792㎡이다.
암괴류 거력들의 평균 크기는 장경 약 1.9m, 단경 약 1m이며, 분급은 불량한 편이다.
주위 자연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문화재로, 지형경관도 매우 수려하여 찾는 이들이 많다.
비슬산 암괴류는 지난 최종빙기 동안 한반도의 주빙하 기후를 입증할 수 있어 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며, 동일한 사면경사를 나타내는 산지에서 발달하는 암괴류 중 세계에서 최대
규모일 뿐만 아니라 원형도 잘 보존되어 있다
비슬산 암괴류를 지나니 대견사 갈림길이 나온다
대견사 갈림길(12:13)
비슬산 방향으로 올라간다...여기서부터 빡센 오르막길이라는데
아직까지 그렇게 힘이드는 줄을 모르고 최대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암괴류 지역에는 데크목으로 다리를 설치해놨다
좌측의 암괴류지역으로 올라가는 등산객들도 있는 모양이다
노거수 한그루가 범여에게 말을 걸어온다...월요일에 라운딩을 하려면
집에서 쉬지...힘들게 왜 산에 오느냐고...
돌탑(12:17)
바위라는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바람을 피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산괴불주머니
앙증맞은 계곡위에 있는 목책 다리를 지나니 2번째 갈림길이 나온다
비슬산 갈림길(12:25)
비슬산을 오르는데 2가지 코스의 길이 있다...1.4km로 이어지는 비슬산 가는 길은
빡센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우측의 참꽃군락지 표식이 있는 마령재
방향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1.7km로 0.3km정도 거리가 길지만 완만하단다.
이곳이야 마루금이 아닌 접속구간이기에 굳이 심장이 무리를 주면서 개고생을
필요야 있겠나...당연히 우측의 편안한 길로 향한다
만나기 쉽지 않은 흰색 산벚꽃이 길가에 축 늘어진 채 산꾼을 반긴다
수성골로 흘러가는 계곡물을 지나서니...
데크목 다리가 있고, 대견사 방향으로 향하는 2번째 갈림길을 만난다
낙화/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대견사 갈림길(12:42)
비슬산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빡센 오르막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쉼호흡 한번 크게 한 다음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비슬산 정상을 향하는 첫 걸음을 내딛는다
빡센 오름길에서 바라본 비슬산 정상의 모습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비슬산은 웅장하고 장엄하다.
신라시대 인도 스님들이 와서 산을 보고 '비슬 (琵瑟)'이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비슬은 인도의 범어(梵語)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덮는다'는
뜻으로 한자로 쓰면 포(苞)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연선사는 <삼국유사>에서 '포산(苞山)'이라 했고, 지금도 일대를 일컫는
그 지명은 포산으로 유지되고 있으면, 내 고향(경남 의령)에서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紅衣將軍)이란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의 본관이
바로 포산인데, 유가읍 바로 옆 현풍을을 말한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
주(註)를 남겨 "그 지역 사람들은 소슬산(所瑟山)이라 불렀다."고 적었다.
'소슬'과 '비슬'은 통하는 바가 있다... 소슬은 '솟다'에서 왔고, 비슬은 '(닭)벼슬'에서 왔다.
둘다 우뚝하다는 뜻으로 둘레에서 가장 높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비슬산은 둘레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이 담겼는 산이다.
이정표가 0.5km라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급경사 오름길은 코가 땅에 닿는 느낌이다
이걸 어쩌나 風餐露宿을 하고 있는 부처님의 佛頭가 날아갔는데,
누군가가 불두의 자리에 돌을 올려놓아 불자로서는 안타갑기만 하다
비슬산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날씨가 추운지 아직까지
봄의 기운은 느끼지 못하겠고, 손이 시려울 정도이다.
급경사의 오르막길...코가 땅에 닿을만큼 힘이 들지만 오르다보면 정상이 나오겠지.
모든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一切唯心造의 심정으로 비슬산 정상으로 향한다
비슬산 정상 아래는 아직까지 봄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개별꽃은 그래도 산꾼에게 희망을 주기위해 꽃을 피우고 있다.
폐헬기장(13:00)
등산객이 아닌 맥꾼의 반가운 흔적이 그져 고맙기만 하다
계속되는 급경사의 오르막길...유가사에서 천왕봉까지의 고도차가 적어도
7~800m 정도가 되는 모양이다...잔뜩 흐린 날씨에 날씨도 꽤나 춥다.
해발 950m 정도되는 이곳은 간간히 진달래가 피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봄이 오려면 멀었다... 저 아래는 벌써 봄이 지나 여름으로
가려고 하는데 말이다.
이곳으로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전혀 보이지 않으나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이
가까워졌는지 등산객들은 보이지 않으나 왁자지껄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짙은 안개가 오늘의 전망은 기대하길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다
암릉구간을 지난 다음에...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금호 남(신산경표상:청룡)지맥 마루금에 도착한다
마루금에 도착하니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보이고
세찬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짙은 안개로 인하여 주위의 조망은 오리무중이다
유가사 주차장에서 출발한 지 약 1시간50분만인 13시 25분에 마루금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300여m 지점에 있는 분기점으로 향한다
접속한 마루금에서 우측으로 300여m 지점에 내려와서 돌탑과
이정표가 있는 금호 남(청룡)지맥 분기점에 도착한다
금호 남(청룡)지맥 분기점에 있는 이정표
우측으로는 밀양지맥(신산경표상:비슬지맥) 삼봉재와 헐티재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마령재와 비슬산 진달래 군락지와 대견사, 조화봉으로 이어진다
2021년 10월에 이 구간을 걸었던 기억이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1년반이란
세월이 지나갔구나.
청룡지맥 분기봉(1,038m:13:30)
이곳에서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수점을 만나면서 맥을 다하는 합수점 부근의
낙동강에 강정고령보가 위치해 있는 곳으로 가는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1년반 전에는 종이 코팅지로 된 분기점 표지판이 걸려 있었는데 준.희 선생께서
왔다 가셨는지 깔끔한 산패가 산꾼을 반긴다.
돌탑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지맥길의 마루금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듬성듬성 진달래가 보이긴 하나 비슬산의 진달래를 보려면 주봉인
천왕봉쪽인 대견봉과 월광봉 사이의 계곡에 있는 진달래 군락지가 제격이다
조금전에 지나온 암봉을 지나고...
유가사에서 올라왔던 등로를 지나서 비슬산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바람도 세차게 불고 짙은 안개가 정상을 뒤덮고 있다
날씨조차도 추워서 얼마나 추운지 손이 시릴 정도이다
헬기장에서 점심 만찬을 벌이는 등산객들도 추운 모양이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1회용 우의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산행 경험이 많은 분들인지 추위를 피하는 센서가 돋보인다
비슬산 가는 길
억새 사이로 등로가 보이고 팔각정 뒷쪽 너머로 보여야 할 천왕봉 정상석이
가려져 아주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리무중이다
비슬산 주능선은 저 와와(臥蛙:개구리가 엎드려 있는 듯한 지세))능선을 북서외곽으로
펼쳐 놓은 뒤 1,083.4m 최고봉(비슬산 천왕봉)이 있는데,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넓고
훤히 산상 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주변 마을들에서는 ‘번치’라 불렀다.
북쪽 능선 아래의 달성군 옥포읍 김흥리서는 그냥 ‘번치’, 동쪽 아래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서는
‘이곡번치’라 부는데 “번치”는 고원지대 평원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다른 지방서도 더러 쓰는
단어인데 ‘이곡’은 ‘이고개’의 준말이다.
비슬산 번치는 옛 사람들에게는 보배 같은 곳이라 했다. 오산리 할머니들은 거기서 지천으로
널린 나물을 뜯으러 올라 다녔다 했고, 바깥 어른들은 거기서 거름으로 쓸 모풀을 베었으며,
아이들은 도라지를 캐 제사상에 쓸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안개는 더욱 더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 근처에는 진달래가 아닌 억새가 아름다운
곳이라 가을에 와야 제격일 듯 싶다...날씨가 맑은날에 비슬산 정상에 서면
내 고향(경남 의령)으로 가는 현풍읍 너머 구지와 이방으로 이어지는 곳이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인데 오늘은 10m 앞도 안보이는 짙은 안개로 인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진하게 밀려오는 느낌이다.
비슬산 정상 1등삼각점(△청도11)
흐미!...비슬산 정상이 무너지겠소.
이곳이 100대 명산이란 이유로 인증샷을 남기려고 등산객이 줄을 섰다.
100대 명산을 지정한 산림청이 할 때는 안 그랬는데, 블랙야크라는
아웃도어업체에서 인증샷을 하면 뭔 혜택을 주는지는 몰라도 사진을 찍기위해
줄을 서 있는데 저러다가는 정상의 고도가 내려 앉을수도 있겠다 싶은 느낌이다.
난 명함도 못 내밀겠다...바람도 세차고 날씨는 춥고, 2021년 10월 이곳에 왔으때
남긴 사진도 있고 갈 길도 멀고하여 시간을 허비하면서 인증샷 남길 생각도 없다.
정상 인증샷 찍은 것을 계산하면 난 14년동안 걸으면서 대간과 정맥, 기맥, 지맥을
거친 명산은 1,000여개 가까이는 될 것이다
비슬산 천왕봉(琵瑟山 天王峰:1,083.4m:13:43)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옥포읍, 유가읍과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최고봉은 천왕봉이다...이전에는 대견봉(1,035.4m)이었으나 2014년 10월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최고봉을 천왕봉을 변경하였으며 비슬산괴는 대구분지 남부산지의 주체이며 비슬산
천왕봉은 이 산괴(山塊:단층으로 인하여 산줄기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산의 덩어리)의 주봉으로,
여기서 북북서쪽으로 청룡산(794m), 산성산(653m), 앞산(660m)에 이르러 분지상에 다다르며,
남쪽으로는 조화봉(1,059.4m)과 관기봉에 이른다
비슬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낙동강이 구비쳐 흐르고, 봄철에는 철쭉, 진달래가 가을철에는
억새군락이 장관을 이루며, 스님바위, 코끼리 바위, 형제바위 등으로 이름 붙혀진 기암(奇巖)이
많이 있고, 용연사와 용문사, 유가사 등 명찰(名刹)을 품고있는 산이기도 하다.
비슬이라는 산 이름은 정상의 바위모습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아 붙여졌다고 한다
(사실 "비슬"이란 말은 고대 인도 힌두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에서 온 용어이다.)
비슬산(琵瑟山)의 지명유래는 3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 『신증동국여지승람』과『달성군지』에는 비슬산을 일명 포산(苞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포산은 ‘수목에 덮여있는 산’이란 뜻으로, 신라시대에 인도에서 온 스님이 인도의
범어식(梵語式) 발음으로 “비슬”이라 발음을 해서 그렇게 불리웠다고 하는데
지금도 비슬산 정상을 보면 산봉우리를 덮고있는 수목을 볼 수 있다.
둘째,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물에 잠기지 않은 비슬산의 몇개 봉우리에 배를 매었다는
‘배바위 전설’ 을 토대로 그 바위의 모습이 비둘기 같다하여 ‘비둘산’으로 부르다가
점차 ‘비슬산’으로 바뀌었다는 설로 그만큼 산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셋째, 『유가사사적』에는 산의 모양이 거문고와 같다고 하여 비슬산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산 정상의 바위 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파 비(琵), 거문고
슬(瑟)”이라고 하여 비슬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슬산은 「정상부의 바위 생김새가 신선이 앉아 비파를 타는 형상이어서 비슬(琵瑟)」로
불리고 있으며 대구 달성군과 경북 청도군, 경남 창녕군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北팔공
南비슬로 지칭되고 있고 팔공산은 남자의 산, 비슬산은 여성의 산으로 비유되며 최고봉은
천왕봉이다
비슬산에 관한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문헌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여상우포산(予嘗寓包山 :내가 일찍이 포산에 살 때)이란 기록이 있다.
2014년 3월 1일 대견사 개산일에 비슬산 최고봉 지명이 대견봉에서 천왕봉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최고봉 지명에 대한 착오를 바로 잡은 것으로 일부 유림들이 1997년 명확한 역사적
근거와 행정 절차를 결여하고 비슬산 최고봉에 대견봉으로 표지석을 설치하였으나 역사적 자료,
지명전문가 및 교수들로 구성된 지명심의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비슬산 최고봉 지명을
천왕봉으로 변경하고 대견봉 표지석은 당초의 대견봉으로 이설하고 현재의 천왕봉 표지석을
새로히 설치하였다
또한 주민들도 오랫동안 천왕봉 등으로 불러 왔었고 비슬산의 산신은 정성천왕(靜聖天王)으로
한가지 소원을 꼭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으며 정상부 능선 북쪽 200m부근에는 천왕샘도 있다
비슬산 정상에 잠깐 머무는 사이에 춥기도 하고, 짙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 독립군으로 산행을 하다보니 사람들 많은 곳이 싫기도 하지만,
너무 늦게 산행을 시작한 탓에 갈 길이 멀어서 서둘러 길을 나선다
등로가의 촉촉한 곳에 개별꽃과 노랑제비꽃, 아직은 꽃이 피지 않은
양지꽃이 이웃하면서 살고 있는데, 올 봄에 더웠다 추웠다하는 변덕스런
날씨탓에 개별꽃과 노랑 제비꽃이 冷害를 입어서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갈수록 짙은 안개로 인해 주위의 멋진 선경은 五里霧中이다
조망바위(13:45)
이곳에 서면 내 고향가는 길에 지나가야 하는 달성군 현풍읍이 시원스레 보이는
곳이지만 지금은 10m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로 인하여 많이 아쉽다.
하기사...지금이야 고향에 대한 범여의 愛情이 사라진 지 오래이긴 하지만...
故鄕이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때가 고향이지, 지금은 잊혀진 추억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 저 아래의 어느곳에 2016년인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탄핵을 당해 국가수반직을
빼앗긴 汚名을 쓴 채 落鄕한 그 분이 살고있는 곳이겠지...부디 건강하소...
청룡산으로 내려가는 등로 주위에는 간간히 진달래의 군락들이
보이지만, 군락이라기 보다는 몇그루씩 듬성듬성 보이는 곳이다
안부(13:47)
비슬산 정상 천왕봉에서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오다보니 안부가 나온다
정상에서 0.2km 내려온 지점의 안부에 이정표가 있고 다시 오름길이다
1,054.0m봉(13:50)
있어야 할(?) 준.희선생의 산패도 없고, 맥꾼의 시그널 한장도 안 보이는
암봉이 국토정보지리원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있는 봉우리이나, 무심코
지나가기 딱 좋은 곳이다...1,054.0m봉에서 2분정도 걸으니 도성암
갈림길이 나온다
도성암 갈림길(13:52)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유가사의 부속암자이면서 경상북도의 3대
수도처 중의 하나인 도성암(道成庵)이 있고, 조금을 더 내려가면 비구니
스님들의 수도처인 수도암(修道庵)을 지나서 아침에 지나온 유가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도성암(道成庵)은 비슬산(琵瑟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도성(道成)이
창건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에 속하는 유가사(瑜伽寺)의 부속암자이며, 경상북도
3대 참선수도처 중의 하나로 신라 827년(흥덕왕 2)에 도성(道成)이 창건하였다.
도성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남쪽 고개에 있는 승려 관기(觀機)와 교유하였으며, 평소에는
뒤편 바위 위에서 좌선하였는데, 하루는 바위 사이로 빠져 공중으로 날아가서 행방을
감추었다 하는데, 그 뒤 982년(성종 1) 성범(成梵)이 중창하고 만일미타도량(萬日彌陀道場)을
개설하여 50여 년간을 계속하였는데, 여러 가지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이 지방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채취한 뒤 절에
바쳤는데,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과 같은 빛을 발하였다고 한다... 절 뒷산에는
가섭불(迦葉佛) 때 부처님의 부탁을 받고 이 산중에서 1,000인의 출세를 기다리는
산신 정성천왕(靜聖天王)이 상주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려 초기 이후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예로부터 ‘천인득도지(千人得道地)’로
부를 만큼 이름난 참선도량으로 알려진 이 암자는 1963년 무렵에 지금의 대웅전 앞에
선방을 지으면서부터 선풍(禪風)을 드날리기 시작하였으며, 1975년 증축불사를 시작하여
선원(禪院) 등을 신축하였고, 현재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218㎝의 대견사지 삼층석탑이 있으며
또한, 암자 서쪽 편 산 위에는 도성이 수도하여 도를 통하였다는 도통바위(道通巖)가 있다.
도성암 갈림길에서 앞산과 용연사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너무 자주 만나는 이정표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0.2km마다 만나는 이정표...이것은 낭비이고 헛짓거리이며, 공해수준이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쉼터(14:02)
쉼터를 지나면서 이 능선으로 올라오는 등산객 2명을 처음으로 만난다.
외국인인데 유창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면서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내리막길로 내려오니 이곳은 북사면 지역이라
그런지 이제서야 진달래가 조금씩 피기 시작한다
지맥길은 완전히 고속도로 수준이다
무명봉(14:08)
무명봉에서도 계속되는 내리막길
명품송(14:10)
도도하면서도 고귀한 품격을 유리하고 있는 명품송이 산꾼 범여를 반긴다
명품송 사이로 바라본 대구시 달성군 옥포읍 김흥리(金興里)쪽의 모습
성군 옥포읍 김흥리(金興里)는 마을 주위 산에서 금이 많이 날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넜으며, 또한, 김해(金海) 김씨(金氏)가 피난한 마을로
김씨가 살면 흥한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산의 지형이 금[김](金)
자 모양이어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는 마을이다.
무명봉(14:13)
무명봉으로 오르지 않고 사면길을 따라서 청룡산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비슬산 정상에서 1.4km를 걸어면서 7번째 이정표를 만나고
무명봉으로 이어지는 직진 능선이 아닌 우측 내리막 사면길로 향한다
안부(14:17)
비슬산 1.6km 지난 지점 이정표를 만나면서 올라서니 802.4m봉이 나온다
802.4m봉(14:18)
802.4m봉에서 급하게 내려서니 십자안부가 나온다
십자 안부(14:20)
십자안부 좌측으로는 달성군 옥포읍 김흥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대구 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정대리 바깥매내미 버스 종점으로 가는 길이고
지맥길은 용연사 방향으로 가야 하는길인데 저 버스 종점은 밀양(비슬)지맥 6구간을
할 때에 대구 칠성시장에서 가창 2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헐티재로 오른 기억이 있다
정대리(亭垈里)는 이 지역의 정대라는 명칭에서 나온 것으로, 원래 마을 뒷산이 가마솥 같이
생겼다고 하여 솥 정(鼎) 자를 써서 정대(鼎垈)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마을에 정자나무가 있어 정대(亭垈)로 고쳤다고 하며, 자연 마을인 매계(梅溪)는 계곡에
매화가 피어 유래한 이름으로 매남·매내미로도 부르는데, 안매남·안매내미 마을과
바깥매남·바깥매내미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올해 산에서 처음 만나는 각시붓꽃(꽃말:기별, 존경)
이 꽃도 냉해를 입었는지 피다말고 시들어 버렸다
십자안부에서 오르막으로 올라가다가 뒤돌아 보니...
안개가 걷히면서 비슬산 정상이 뚜렸이 보이고, 좌측 끄트머리에 있는
조화봉도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시거리가 좋다...정상에 있을 때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감사합니다
오르막길은 지난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등로가 생각보다 미끄럽다
해골바위?
다시한번 비슬산 정상을 뒤돌서 본 다음에...
능선으로 올라간다.
맞은편으로는 잠시후에 오를 844.9m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암봉이 시작되고 마루금의 좌측 아래의 사면길로 이어진다
암릉 정상이 아닌 잘 만들어진 사면길로 마루금을 유도한다
부지런히 왔다 싶었는데 이제 비슬산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 겨우 2km라니...
등로에서 바라본 정대리로 이어지는 용계천(龍溪川) 계곡의 모습
용계천(龍溪川)은 달성군 가창 정대리 산182 번지 비슬산 북동 사면에서
발원하여 북동으로 최정산(最頂山)[915m]과 청룡산(靑龍山)[793.1m] 사이의
가창면 정대리와 오리를 흐르고 가창댐에 저수된 후 가창면 용계리에서
신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용계(龍溪)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으로
'계천'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전해져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암봉(14:28)
대구광역시 달성군은 돈이 많은 모양이다...200m마다 서 있는 씨잘데 없이
많은 이정표가 범여의 눈에 엄청 거슬린다...대체적인 이정표는 국립공원은
500m, 도립공원은 300m에 하나씩 서 있는 편인데, 비슬산은 군립공원이라
200m마다 설치한 건가?
무명봉(14:33)
암릉으로 된 무명봉을 내려서니 비에젖은 푹신한 낙엽이 산꾼을 반긴다
우측 아래로 이어지는 뚜렸한 사면길을 버리고 직진으로 향한다
제도권 등로를 벗어나서 암릉구간을 지나서 봉우리 정상에
도착하는데 선답자들의 시그널 서너개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데
이곳은 지도상에 등장하는 족보있는 844.9m봉에 도착한다
844.9m봉(14:40)
844.9m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능선으로 타고 내려가는 길에는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참을 내려오니 조금전에 헤어진 제도권 등로를 다시 만난다
단양우공&경주이씨 묘(14:46)
예전에 헬기장이었는지 보도블럭이 간간히 보이는 폐헬기장 같은
넓은 공터에 단공우공 부묘지가 있고 다시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걷는다
단공우공 묘지를 지나면서 갑자기 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덮이더니만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앞이 컴컴하다
구라청의 예보로는 이곳 비슬산 지역에는 오전 9시끼지만
간헐적으로 비가 오다가 개인 다음에 10시이후부터는 흐린 날씨라고
했는데...하기사 구라청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누구 탓을 하랴.
쉼터(14:48)
빗줄기는 굵어지고 갑자기 내린비로 옷이 순간적으로 다 젖어 버렸다.
기왕 버린 몸이라 우의를 입기도 불편하여 그냥 계속 비를 맞으면서 걷는다
대구9산 종주팀들이 걸어둔 표식을 보면서 내려서니 갈림길인 정대잿들이 나온다
정대잿들(14:52)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반송리와 가창면 정대리 잿들마을 경계에
있는 곳으로 정대잿들이라 부르는데 정대리 잿들마을을 줄여서 표시한
것이라 한다
이정표 (←청룡산 7.5km 앞산 13km,용연사 2.5km ↓ 비슬산 2.8km)가 있고
직진으로 올라가면 삼각점이 있는 876.0m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잠시후에 마루금을 다시 만날 수 있는데, 876.0m봉을
짤라먹고 좌측의 편안한 길을 갈까하고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명색이 정통
산꾼으로 자처하는 범여가 그라먼 안되제...비를 맞으면서 꾸역꾸역 위로 올라간다
홈처럼 파여있는 등로에 쌓여있는 낙엽이 엄청 미끄러워 시간이 지체된다
능선에 올라서니 걷혔던 짙은 안개가 다시 몰려오면서 주위의 仙景은 오리무중이다
876.0m봉(15:08)
이곳을 트랭글앱에서는 정대봉이라고 하는데 공식 지명은 아닌듯 하다
876.0m봉 정상 삼각점(△청도 304 / 1982 재설)
876.0m봉 정상에서 내려서는데 봉분이 사라진 묘비가
보이고 짙은 안개가 반복적으로 몰려오기 시작한다
移葬을 했는지 묘지 봉분은 사라지고 묘비만 남은 단양 우공 묘지를 지나면서...
급하게 좌측으로 내려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짙은 안개가 밀려오고 땅바닥은 상당히 미끄럽다
보이지 않은 등로로 내려서는데 구세주처럼 보이는 선답자들의 흔적이 반갑기만 하다
뫳돼지가 마구 파헤쳐놓은 안부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5:13)
무명봉에서 2시방향으로 내려선다
능선 끄트머리의 절개지로 내려서기 전에 좌측으로 내려간다
암봉(15:15)
암봉 사이의 협곡처럼 생긴 절개지 사이로 맥길을 이어가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누군가가 길다란 로프를 설치해놔서
걱정없이 내려갈 수가 있다.
그래도 안전이 최우선이 아닌가...조심, 또 조심하면서 협곡 아래로 내려간다
로프가 끝나는 지점을 내려와서 잠시 방심하다가 비에젖은
낙엽속 나뭇가지에 걸려서 된통 꼬꾸라지는 바람에 5m정도의
아래로 쳐박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피력인가?...오늘도 산이란 스승에게 하나를 배운다
有備無患의 의미를...
급경사를 내려서니 낙엽이 푹신한 넓은 등로가 나오고 빗줄기는
비가 오는지 안오는지 모를 정도의 가는 빗줄기로 변해 버렸고
조금을 더 내려서니 조금전 정대잿들에서 헤어진 제도권 등로로
복귀한다
갈림길(15:25)
긴 의자 / 장석남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午前엔 새가 한 마리
모퉁이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대다 간
새가 혼자 앉기에는
너무 큰 긴 의자
종일 햇빛만 앉아 있는
긴 의자
새가 그 맑은 눈으로
곰곰 궁금해했던 것이
離別에 대해서였다는 것을 나는
밤이 다 늦어서야 알고
다시 내다보는
긴 의자
오세요
앉았다 가세요
가끔은 누웠다도 가세요
얼룩진 그늘도
가지고 와서 같이 있다 가세요
오세요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비슬산 등산로 표시판을 지나니 시멘트로 만든 사각의자들이 보인다
이정표를 지나 좌측 아래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이제 비는 완전히 그쳤지만 대신에 짙은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고 있다
물에 빠진 새앙쥐가 내 몰골이 우습지만, 그나마 천만다행인 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쪽팔림은 없다...이것도 독립군의 특권이다
무명봉으로 올라서니 지도상에는 나타나지 않는 준.희 선생의 산패가 보인다
703,4m봉(15:28)
지도상에는 나타나지 않는 봉우리인데 준.희선생의 산패가 걸려있다.
봉우리 아래로 내려섰다 올라서니 안개에 갇혀버린 송전탑이 나온다
NO56 송전탑(15:30)
NO56 송전탑 아래로 내려서니 갑자기 길이 사라진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좌측 아래로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진 도로를 다시 만나서 마루금을 이어간다
일몰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등로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나홀로 산행이라 그런지 조금은 불안하다
유가사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 지 8km정도 된 지점이다
부지런히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얼마걷지 못한 느낌이다.
아침부터 꼬이기 시작한 산행이 12시가 다 되어 시작했으니 방법이 없다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버리고 직진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5:38)
그쳤던 비가 또다시 간헐적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등로는 무쟈게 좋고 부지런히 걸어가는데
청룡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696.4m봉(15:43)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어서 무심코 걷다보면 놓치기 쉬운 봉우리다
696.4m봉에서 내려와서 등로로 복귀한다
폐헬기장(15:46)
비가 내리니 똑닥이 카메라의 렌즈에 성애가 끼면서 그림이 엉망이다
좌측으로 갈라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아마도 옥포읍 어느마을로 내려가는 길인 모양이다
비는 계속 내리지만 빗줄기가 가늘고 어차피 옷이 다 젖어버려 무작정
걸어가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고도의 편차가 별로없는 길이라 그리
힘이 들지는 않는다
편안한 길을 지나니...
암릉이 보이고, 달성군 명의로 세워둔 경고판을 지난다
용연사 약수터갈림길(15:52)
좌측으로 2분거리에 용연사 약수터가 있다고 하나
오늘은 춥고, 비가 온 탓이라 이곳까지 오면서
물을 한모금도 먹지 않아서 약수터로 갈 일이 없다.
용연사(龍淵寺)는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비슬산(琵瑟山) 북사면 아래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로 통일신라시대인
914년(신덕왕 3)에 보양화상(寶壤和尙)이 창건하였고, 1419년(세종 1)에
천일(天日)스님이 중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3년(선조 36)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탄옥(坦玉)·경천(敬天) 등에게 명하여 중창하도록 하였다
문화재로는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1971년 보물로 지정된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이 있으며,
이 사리는 원래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사명대사가 제자 청진(淸振)을 시켜 이 절에 봉안한 것으로
이 계단은 1673년에 완성되었으며, 통도사 불사리계단(佛舍利戒壇)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다.
또한 1995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용연사 삼층석탑이 있다.
화원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하얀색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똑닥이로 잡아 보지만 그림이 영 엉망이다
정대초곡 갈림길(15:54)
동남쪽으로는 가창면 정대리 초곡마을로 내려가는 길인지 이정표에
‘정대 초곡 2.5km’라는 표식이 보이는데 초곡마을은 초막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마을로 농부들이 비를 피하여 은신할 수 있는
초막(草幕)이 있던 마을이다.
뚜렸한 제도권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암릉구간으로 올라간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권력은 십 년을 못가고
활짝 핀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한다)이라 했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재물에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음을 이르는 말)라고 聖人들은 말씀하시면서 살아가면서 늘 言行을
조심 또 조심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셨건만 명색이 지도ㅈ라
자청하는 여의도에 얼빠진 자들만이 그 의미를 모르는듯 하다.
길가에 떨어진 落花야...너라도 얼빠진 인간들을 제도할 방법이 없을까...
능선에 올라선 다음에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이곳에서 좌측 능선을 따라서 가면 옥포읍과 화원읍 경계에 있는
함박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다
이정표 좌측으로는 용문삼거리와 기내미재로 이어지는 길이고,
지맥 마루금은 뒷쪽의 직진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올라간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 조심해서 걷는다
이정표를 지나고 687.5m봉에 도착한다
687.5m봉(16:02)
누군가가 이정표 안내목 1-13 표시위에 닭지만당산이라 적어놨다가
지워버렸는데, 뭔 뜻인지도 모르겠고, 아마도 위치 표기를 잘못한 듯 싶다.
집에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옛날 대홍수 시대에 닭한마리 앉을 만큼만 남아 있는 산이라 생긴이름이고
용연사 뒷산으로 비슬산에서 앞산 종주 능선상에 솟아 있는 산이라고 한다.
망가진 이정표가 있는 687.5m봉 우측 아래로 내려서니
미끄러운 목책 계단이 나오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비에젖어 새앙쥐가 되어버린 범여를 반긴다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는데 청룡산으로 이어지는 지맥 능선은
짙은 안개 뒷쪽으로 숨어버려 아무것도 안 보인다
또다시 갈수록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고...
암릉이 길을 막는다...우측으로 우회하여 내려간다
비에젖은 낙엽이 쌓인 내리막길은 엄청 미끄럽다
이정표(16:06)
추락방지용 로프가 처져있는 곳을 지나서 편안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다시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가는데...
우측 아래로 가창읍 정대리로 내려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진달래가 아닌 철쭉을 보면서 걷는다
목책이 설치되어 있는 계단 아래로 내려서니 넓은 임도 삼거리가 나온다
가창임도(16:15)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와 화원읍 본리리의 경계에 있는 곳으로 차량이
다닐만큼 넓은 임도인데 가창에서는 차량이 올라올 수 있으나 화원쪽은
임도의 종점인 삼거리인데 이정표에는 가창 임도로 표기가 되어있다
가창임도 이정표(←비슬산 6.2km →청룡산 4.9km 앞산 10.3km ↑용문사 1.5km)가
있는데 서울로 귀경하는 교통편 때문에 아무래도 이곳에서 산행을 접어야 할 듯 싶다
이곳이 비슬산 산악자전거 종점이라고 한다
가창임도에서 마비정 벽화마을 방향으로 마루금 산행을 종료하고 내려간다
산의 허리를 따라서 사면길로 내려가는 호젓한 길
대도시 근교의 지맥길이라 조금은 늦을지언정
우짜든지 서울로 가는 길은 그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한참을 내려오니 북사면길이긴 해도 날씨가 따뜻한 지 계곡 주위에는
하얀 병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면서 산 윗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리 피곤한 줄 모르고 내려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비는 완전히 그쳤고, 비로인해 물기를 머금은 철쭉이 淸楚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옛날에는 진달래가 지고 잎이 돋아날 즈음에야 철쭉꽃을 볼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참꽃(진달래)와 개꽃(철쭉)이 동시에 피고지니 환경 탓이련가...
꽃도 혼란스럽고, 그걸 바라보는 인간도 혼란스럽다
많이 내려온 모양이다...조금을 더 내려서니 쉼터의자가 보인다
쉼터(16:30)
계곡을 건너고...
비에젖은 호젓하게 누구의 방해도 없이 걷는 이 발길...독립군의 특권 아님감...
산괴불주머니가 是非를 걸어온다.
비오는 날에는 집에 있지 왜 산에 오는냐고...
나도 그러고 싶었다... 비를 안맞고 걷고 싶었는데
구라청의 엉터리 예보를 개고생을 했다고...
쉼터(16:40)
쉼터를 지난 다음에 계곡을 건너니 용문사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이 나오고 윗쪽으로는 용문사와 화원자연휴양림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이고 계곡 옆으로 호젓한 등로가 있어서 용문사쪽이
아닌 계곡쪽으로 내려가본다
용문사 계곡이 나오고 미끄러운 계곡을 따라서 내려간다
용문폭포(16:48)
용문사 입구(16:50)
계곡에서 도로로 올라서니 저 윗쪽으로 용문사라는 절집의 지붕이
보이는데, 언제올 지 모르지만 다음 구간에 들리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패스하고 내려간다.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인 용문사(龍門寺)는 용이 승천하도록 하늘과 땅의 기운을 이어주려고
세운 사찰로, 절 이름 역시 용의 관문이라는 뜻의 '용문'이라고 지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용문사와 용문사의 주변에는 '용문'이라는 지명이 산재해 있다
1938년 승려 수월이 쓴 글을 기본으로 해서 1948년에 추가로 작성한 『사적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사적기』 내용의 일부는 『비슬산 용문사 창건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용문사는 1937년 승려 수월이 창건하였다...
그러나 용문사 주위에 기와편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이 지역이 옛 절터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인근 인흥사와 관련이 있는 사찰일 것으로 추정된다
화원자연휴양림 방향으로 향한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화원자연휴양림의 멋진 화장실이 보이기에
이곳에서 잠시 들려 볼 일을 본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화장실 좌측으로는 기내미재로 가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유명한 고인가 보다.
기내미재는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와 옥포읍 반송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재에 대한
정확한 명칭 유래는 찾을 수 없지만, ‘귀넘이’ 또는 ‘귀네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이것은 『정감록(鄭鑑錄)』의 "이상향으로 가는 길목의 귀내미골"과 토정 이지함의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에 "우이령(牛耳嶺) 넘어 이상향"이라고 기술된 내용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책에서 말한 우이(牛耳)는 '소귀'를 말하는 것으로 이두식(吏讀式)
표기에 따라 '어귀'를 뜻한다고 하며. 이것은 "이상향(理想鄕)인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로 해석될 수 있고, 그 고개를 '귀넘이재' 또는 '귀네미재'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기내미재'가 된 것으로, 이와 관련된 지명으로는 강원도 황장산 귀네미재[牛耳嶺],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귀네미 마을 등이 있다.
* 이두(吏讀)란 신라 때부터 한자(漢字)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차자(借字)
표기법. 또는 그 문자. 넓은 의미로는 향찰이나 구결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문을 국어 어순에 따라 배열하고 이에 토를 붙인 것을 이르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관공 문서에 서리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샛길을 따라서 내려서니 화원자연휴양림이 나온다
화원자연 휴양림(16:55)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는 자연 휴양림으로 목재로 조성한 콘도형 산림 문화
휴양관[9실], 펜션형 숲속의 집[6동], 야외 화장실[1동] 등의 숙박 시설, 산책로,
등산로, 육각 정자, 계곡 트레킹 코스 등의 산림 체험 시설, 삼림욕을 체험할 수 있는
삼림욕장, 아이들을 위한 물놀이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심 가까이에 인접하고 숲과 계곡이 있어 예로부터 여름철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고, 비슬산 능선과 서로 맞닿아 있어 많은 등산객이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도보로 10분 거리에 마비정 벽화 마을을 비롯하여 전통 사찰인 용문사,
인흥사 절터에 이루어진 전통 한옥 마을로 조선 시대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대구광역시 민속 문화재 제3호],
『천자문(千字文)』에 버금가는 교육의 기본 도서로서 유전되어온 명심보감 판본
(明心寶鑑板本)[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7호] 유일본이 보관되어 있는
인흥 서원 등이 있다
화원자연 휴양림을 지나니 용천2교가 나오고 제2주차장에 도착한다
제2주차장(16:57)
제2주차장을 지나자마자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샛길로 향한다
이곳이 비슬산 둘레길이란다
비슬산 둘레길에서 바라본 화원읍 본리리(本里里)의 모습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는 원래 대구부 인흥면의 면 소재지였기 때문에
'근본이 되는 마을'이라는 뜻의 본리라 하였으며, 본리리의 많은 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비슬산 북사면에 형성된 골짜기들에서 발원한 천내천(川內川)이 본리리를 흐르고
있으며, 하천 주변으로 인흥동(仁興洞)[인흥 마을], 마비정(馬飛亭) 등의 마을이 있다.
인흥동이 위치한 천내천 주변은 비교적 넓은 하안(河岸)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용문지와 용문 폭포가 있는 골짜기의 수려한 자연 경관으로 인해 화원 자연 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소래풀(꽃말:치유)
푸른빛을 띤 자주색 꽃이 줄기 끝에 모여 피며 꽃 지름은 3cm전후이며,
꽃은 흰색이며 긴 꽃줄기 끝에 4∼10개의 꽃이 산형(揀形)꽃차례를 이루는데
'보라유채'라고도 불리우는 꽃으로 중국에서는 '재갈채'라고 하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재갈공명이 군량으로 활용하려고 심었다고 한다
마비정(馬飛亭) 벽화마을 갈림길(17:00)
급경사의 2차선 도로가 나오는데 우측의 오르막길 방향으로는
마비정 벽화마을이 있다는데 이곳에서 1.2km정도 올라가야 하기에
아무래도 차 시간이 걱정되어 좌측으로 내려간다
마비정(馬飛亭) 마을은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떤 장군이 마을의 산에 이르러 건넛산의
바위를 보고 활을 쏴 놓고는 말을 보고 활보다 늦게 가면 죽이겠다고 명령했는데 말이
재빨리 달려갔으나 활을 따라가지 못해 장군이 말을 죽였다.
이것을 안 마을 주민들이 말을 불쌍히 여겨 마을에 마비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말을
추모하였다고 하며, 여기서 마을 이름을 마비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일설에는 마을에서 말을 기르면 말이 살쪄서 하늘로 날아간다는 전설이 있어 마비정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마비정 마을은 위쪽 마을이라 상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천4교(17:02)
용천4교 아래로 흐르는 천내천을 보면서 도로로 올라선다
천내천(川內川)은 청룡산(靑龍山)[793.1m] 남서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화원 자연 휴양림 계곡과 마비정 계곡에서 흘러나와 북서쪽으로 흐르면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방 2급 하천으로, 지명의 유래는 천내리를 가로질러 흘러 천내천이라고
불리는데 천내(川內)는 하천에 접하여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화원자연휴양림과 용문사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서 역으로 내려간다
이곳도 미나리가 유명한 지 곳곳의 비닐하우스로 된 미나리
재배단지가 많이 보이고, 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우측의 주차장
방향으로 내려간다
대구 달성군은 미나리가 꽤나 유명한 모양이다
1년반전에 밀양(비슬)지맥을 진행할 때 지나갔던 가창면 정대리에도
미나리가 유명하다고 하던데 그 반대쪽인 이곳 화원읍 본리리도
미나리가 유명한 모양이다
주차장을 지나서 좌측으로 향하는데 이곳도 미나리재배단지가 보인다
마비정 백화마을 삼거리(17:10)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맞은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베낭을 정리한다
마미정마을 유래 안내판
마비정 삼거리 앞 버스정류장에서 베낭을 정리하고 있는데
경찰 순찰차가 화원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손을 드니
차를 돌려서 내 쪽으로 온다... 내가 이곳에서 방향 감각이 없고
길을 잘 몰라서 그러니 대구시내의 지하철역으로 가야 하는데
택시를 좀 불러 달라고 경찰에게 부탁을 한다.
처음에는 어디서 왔느냐고 꼬치꼬치 캐묻길래 서울에서 산악회 버스를
타고와서 유가사에서 비슬산을 거쳐 이곳까지 왔다고 하니 나를 쳐다보고는
머리가 백발이고, 비맞은 새앙쥐꼴의 몰골이 측은해 보였던지 ‘어르신 혼자서
산에 다니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실려고 하냐’ 하면서 마치 피의자 다루듯
하더니만 순찰차를 타라고 하고 화원역까지 태워준다.
화원역에 나를 내려주고 되돌아가는 경찰 순찰차...당신이 진정한 민중의 지팡이입니다
화원역에서 바라본 화원읍(花園邑)의 모습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속하는 화원읍은 대구광역시 달서구에서 달성군으로
진입하는 관문에 해당되는 읍으로 옛날부터 달서구 월배 지역과는 동일
행정 경계 내에 위치하였을 때가 많아, 두 지역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화원읍(花園邑)의 명칭은 이 지역의 화원 동산[화원 유원지]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의 성산(城山)에 조성된 화원 동산 일대에는 조선 시대 상화대(賞花臺)라고
부른 봉수대가 있었는데,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낙동강의 절경과 어우러져서
경치가 매우 뛰어나 신라경덕왕(景德王)이 아홉 번이나 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으로, 꽃동산이라는 뜻의 화원이라 불리었던 고장이다.
화원역(17:20)
나를 태워준 경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베낭을 정리하고 베낭에 남은 빵하나로 허기를 면한 다음에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동대구역(18:30)
화원역에서 동대구역까지 약 50분가랑 걸리는 듯 싶다
동대구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지하철역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근 다음에, 깔끔하게 씻고, 비에젖은 옷을 갈아입고
동대구역으로 향한다
동대구발 → 서울행 열차표
매표소에서 예약한 열차표를 받고나니 긴장이 풀리고 허기가 몰려온다.
그러고보니 산악회에 준 김밥한줄로 점심을 해결하고 그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안했더니만 배가 고파도 너무 고프다...시간적 여유도 있고해서
대합실 내에 있는 분식집에 들려서 따끈한 국물이 먹고싶어 유부우동을
하나 시켰더니만 8,900원이란다...비싸도 너무 비싸다...그래도 어쩌랴
지금 배가 너무 고픈데...유부우동으로 양이 차지 않아서 공깃밥을 하나
시켰는데 가격이 1,900원...서빙을 하는 여인이 내 몰골이 안쓰러웠던지
공깃밥을 무료로 준다...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밥그릇을 깨끗이 비운
다음에 대합실에서 한참을 멍때리기 한 다음에 서울가는 열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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