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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차 북진(終)

제20구간 - 지기재에서 수청거리 삼거리까지

by 범여(梵如) 2023. 8. 17.

낮은 산이라 우습게 보지마라

 

 

☞ 산행일자:  2023년 08월 13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높은 습도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8.2km  / 6시간 25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지기재-무명봉-금은골 입구-고개-안부-김해김공&창원황씨 묘

                      안부-금은봉 갈림길-너럭바위-무명봉-무명봉-안부-쑥밭골재

                      쉼터-무명봉-안부-무명봉-무명봉-묘지-안부-무명봉-안부

                      NO53송전탑-신의터재-무명봉-329.3m봉-영안동마을 갈림길

                      안부-서어나무 군락지-안부-갈림길-노간주나무 군락지

                      무명봉-임도-노루골-장자봉 갈림길-무명봉-어산리 안부

                      무지개산 갈림길-안부-무명봉-안부-무명봉-안부-무명봉

                      무명봉-364.4m봉-서원마 갈림길-무명봉-안부

                      병성(숭덕)지맥 분기봉-돌탑봉-무명봉-윤지미산-안부

                      무명봉-마륜 갈림길-진다리 갈림길-무명봉-화서1터널 위

                      370m봉-화령-수청거리 삼거리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모서면, 화동면, 내서면, 화서면

 

지난주는 더위를 피해서 조금 시원할까 싶어서 무주로 갔다가 거기도 

덥기는 마찬가지이더라...더위를 피하긴 아무래도 강원도가 나을것 같은데

양양, 강릉, 속초쪽의 대중교통의 버스표는 3주후의 버스표까지 매진이다.

자동차를 가져가면 해결될 문제이지만 편안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게

습관이 된 탓인지, 선뜻 내키지를 않는다...하는 수 없이 귀경길의 버스표

걱정이 없는 상주방면으로 가기로 계획을 잡는다.

 

상주쪽은 교통도 교통이지만 백두대간 구간중에서도 가장 고도가 낮은

중화지대로서 그야말로 非山非野구간이라 바람만 좀 불어주면 편할것 같은

예감이다...늘 습관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동서울터미널로 간 다음에

막바로 표를 예매하고 곧바로 버스를 탔는데도 28인승 버스의 좌석이

절반정도는 비어있는 느낌이다...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점촌을 거친 다음에

상주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상주행 버스표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표를 예매하는데 표는 많이 남아있다.

표를 예매하고 곧 바로 버스에 오르니 차는 출발한다...휴가철임에도

불구하고 강원도가 아니라서 그런지 고속도로는 그리 밀리지 않은 느낌이다.

여주휴게소를 지나면서부터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버스는

이화령 터널을 지나 문경I.C를 지나고 있다...잠시후에 버스는 점촌.함창I.C를

빠져나와 점촌터미널에 들려 손님을 내려주고는 3번 국도를 따라서 상주로

향한다

상주터미널(08:25)

상주터미널에서 지기재를 가려면 모동면이나 모서면을 가야 하는데

교통편이 전혀 맞지않다...하는 수 없이 교통편이 아주 좋은 화령으로

가서 택시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을 듯 하여 09시 05분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예매한 다음, 터미널 내에 있는 분식집에서 라면 한그릇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을 하고 볼 일을 본 다음에

09시가 채 안된 시간에 플렛홈으로 나가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09시 10분이 다되어 가는데도 버스가 오질 않아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좀 일찍 버스가 출발했다고 한다

상주발 → 화령행 버스표

잠시후에 또다시 버스가 오는데 09시 15분 버스이다.

이 버스를 타고 화령으로 향한다

화령버스 터미널(09:50)

버스를 타고 가면서 화령택시 이진석 기사에게 전화를 했더니만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내리자, 곧바로 지기재로 향한다.

20여분만에 지기재에 도착하고 이 사장님이 시원한 포도즙 2봉지를

주면서 날씨가 너무 더우니 산행을 조심하라는 인사를 들으면서 헤어진다

지기재(280m:10:15)

상주시 모서면 대포리와 소정리, 석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기재 버스정류장과

이동식 화장실, 금강과 낙동강의 경계를 나타내는 분수령 표지판과 이정표,

상주고랭지 포도를 상징하는 멋진 조형물과, 포도밭이 있는 고개이다.

 

원래의 지기재는 우측의 대포리 방향으로 300여m정도에 있으나 대간꾼들이

다니기 좋은 버스정류장쪽이 지기재로 굳어진 상태고, 지기재 안내판과 이정표에도

이곳을 지기재로 표시하고 있다

경북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 소정리와 대포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상주와

황간을 잇는 901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지기재의 유래는 옛날 동네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적기(賊起)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마을

이름을 따 ‘지기재’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고 하며, 일설에는 적기(賊起)의

사투리가 ‘지기’로 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지기재를 기준으로 서쪽은 대체로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논과

밭이 넓게 분포하고 있으나 동쪽은 산지가 대부분이며, 마루금 등산로는

대체로 완만하다.

지기재 정상의 모습

상주시 모서면의 홈페이지에 기재된 대포리(里)의 지기재 유래를 보면

석산리의 지기재동 동남쪽에 있는 고개.《지+기(고개)+재(고개)=지기 재. ‘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다만 백두대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꼭대기’라는 뜻으로

‘지(旨)’를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한편, 『삼국사기』에 나오는 옛 지명과 오늘날의 지명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 지(支)→성(城) : 궐지(闕支)→궐성(闕城)<경남 산청군 단성면> ·

기(己)→성(城) : 열기(悅己)→열성(悅城)<충남 청양군 정산면> 즉, 끝소리로 오는 ‘-기, -지’는

모두 ‘성(城)’과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 지’가 ‘재’였다는 증거다.

 

신라 경덕왕 16년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바꿀 때 ‘재’의 뜻이 들어간 지명은 거의 모두

‘성(城)’ 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바꾸었다.》

백두대간 중화 지구대인 이곳 상주지역은 고개마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 표지판이 있다.

동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서쪽으로 떨어지면 금강으로 흘러든다.

자연은 이렇게 양보하고 배려하며 정말 멋지게 살고 있는데 우리 인간들은 탐욕과 집착으로

만물의 영장 역할을 하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구나.

 

*  백두대간상의 중화지구대(中化地溝帶)란

   고려시대 때 고도가 나지막한 중모현(中牟縣, 현 상주의 모동과 모서면)과

   화령현(化寧縣, 현 상주의 화북 화서 화동 화남면)의 첫 글자를 따서 중화지구대라 

   했으며 백두대간 마루금은 추풍령에서 큰재, 지기재, 화령재까지 약 55Km를 말한다

산행을 시작하다(10:25)

산행 시작의 첫발을 내딛으며 포도밭과 우측의 成均 成公之墓 孺人 長水黃氏附 묘

사이의 시멘트 도로를 걷는데 초반부터 도로에서 올라오는 熱氣에 숨이 멎는 느낌이다

백두대간 도로 좌측으로는 금은골 마을로 이어지는 새로운 포장도로가

생겼는데 요즘 대간꾼들은 저 길을 따라서 금은골 마을까지 올라가는

대간꾼이 많다고, 조금전의 기사분이 얘기를 해주신다.

 

하기사 요즘에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세태라 누가 힘든 대간길을 타겠나?

금은골 마을 마을 뒷쪽에 우뚝 솟은 금은봉에 정자까지 보이는데

대간 마루금에서 꽤나 벗어나 있는 지도상의 금은봉(413m)이다

시멘트 도로는 좌측의 금은골 마을로 이어지고 대간길은 우측의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는데 상주시에서는 친절하게도 이정표를 잘 설치해놔서

편하게 대간길을 이어간다

비포장 도로로 올라서니 농막의 비닐하우스가 나오고 대간길의

이정표는 좌측으로 90도 꺽어진다

농막에서 뒤돌아보니 안심산이 물끄러미 산꾼을 내려다 보면서 하는 말...

몸도 안 좋은데 힘들면 집에서 쉬지. 개고생하면서 왜 산에 왔느냐고...

 

안심산(安心山:429.0m)은 소정리 선유동 마을 북쪽에 있는 모서면의

진산이라는데 상주시와 모서면의 어느 자료에도 안심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선크림을 발랐는데도 따가운 햇볕에 살갗이 타는듯한 고통을 안겨준다

요즘 더위는 계절 감각을(?) 잊어버린 느낌이다...입추도 지나고 말복도

지났으니, 부리는 꼬라지는 죽을만도 한데 아직까지도 지랄이다.

물탱크가 있는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대간 이정표는 좌측으로 향한다

원래 대간길은 물탱크 뒷쪽의 직진으로 가야하는데 상주시에서

설치한 이정표는 좌측의 대밭으로 이어지는 임도로 가라고 한다.

우짜겠노!...로마로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대밭옆 임도를 따라서 걷는데, 잠깐 사이인데도 땀은 비오듯 흐르고,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대밭이 있어서 그런지 산꾼의

몸뚱아리에서 나오는 땀냄새를 맡았는지 모기가 새까맣게 몰려들어

헌혈을 강요한다...낮은 지역의 산행에는 이런 불편함도 있구나...

대밭을 벗어나면서 오르막을 향한다

무명묘지를 보면서 오르막으로 향한다...묘지 뒷쪽 능선의 원래의

대간길인데 아마 사유지라서 등로를 돌려놓은 모양이다

묘지 윗쪽의 능선에 올라서면서 대간길 마루금에 복귀한다

무명봉(10:33)

무명봉을 지나니 이정표가 나오고 원래의 대간길은 이정표 뒷쪽

직진으로 가야하는데 철조망에다 등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좌측으로 빤빤질한 길이 보인다

좌측의 사면길로 따르다가...

우측으로 내려서니 대간 이정표가 나온다

아침에 화령택시 이진석 사장이 말하는 신백두대간길(?)을 이걸 말함인가 보다.

지기재에서 금은골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인데 요즘 대간꾼들은 지기재에서

이 도로를 따라서 앞에 보이는 저 능선으로 오르는가 보다...

 

시멘트 포장길은 금은골 마을로 들어가는 마을길인데,

문득 모든 대간길이 오늘처럼 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적은 발품만 팔아도 마루금 봉우리에 쉽게 올라서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이 들지 않으니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특히 마루금 좌우 민가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

행복감마저 드는데, 마루금 좌우 마을은 마을대로 서로 쉽게 왕래하며, 이 마을에서

좋은 일이 생기면 저 마을 사람들도 다 같이 기뻐하며, 저 마을에서 좋지 않은 발생하면

 마을 사람들도 안타까워 할 것이다.

서로가 등을 기대어 평화스럽게 지내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평화스러운 모습은 키가 낮은 대간 마루금만이 제공한다는 것은 이미

지난 구간 그리고 지지난 구간의 상주땅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던 것.

그런데 키가 낮은 마루금은 인근 주민들에게 평화만을 제공했을까?‥‥‥

대자연을 대표하는 대간 마루금으로 인위적인 행정구역을 나누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마루금은 행정구역을 나누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마루금을 경계로 습관, 문화 그리고 날씨 등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구간은 행정 구역을 나누지 않는다...마루금 좌우 모두 경상도 상주 땅이다.

그러나 대간 마루금이 관통하고 있는 상주는 평화스러운 경험만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은 아니다.

 

통일신라 전후의 삼국시대와 후삼국 시대에 상주 지역은 서로 간의 힘을 겨루는

戰場(전장)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예전에 인기를 모았던 모 방송국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툭하면 고려와 후백제가 상주 지역을 두고 피를 튀기는 전투를 벌인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 것도 이를 반영하며,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이 지역은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곳이 이곳 상주땅이다.

 

이들 모두가 마루금의 키가 낮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키가 높은 대간 마루금이 지역간 소통을 어렵게하여 평화를 유지한 반면 키가 낮은 마루금은

지역간 왕래를 쉽게하여 오히려 禍(화)를 불렀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오늘 구간을 걷다보면 대간이 얼마나 고심(?)했을까 싶다.

키의 높이, 주변과의 조화 등등이 마치 지난 구간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대간도 분명 같은 구간을 빚어내기는 싫어하고 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도로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듯한 느낌이지만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이 길...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우짜겠노...

앞에 보이는 하얀 민가 뒷쪽이 원래 대간길인데 우회하여 금은골

마을앞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인위적으로 대간길이 변해 버렸다

도롯가에 피어있는 무릇과 닭의 장풀이 초반부터

힘들어 하는 산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은골 입구(10:41)

직진을 하면 금은골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고, 비날하우스

포도밭을 끼고 우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간다.

 

금은골은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石山里)에 속해있는 석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기재 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거문고처럼 생겼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마을 뒤의 바위들은 수성암 지역에 있는데 역암이 많고,  돌의 색깔이 불에 태인 것처럼

뻘겋다... 동북쪽에 부흥사(復興寺)가 있었다고 하며, 마을 뒤 산 너머에 순 암벽으로 된

나지막한 산이 있고, 이 산에 입을 반쯤 벌린 듯한 큰 굴이 있는데 이 곳에서 임진왜란 때

수십명이 피난을 했다고 한다.

 

또 이 굴 속에서 한 부부가 살았는데, 식량이 떨어져 고심을 하다가 우연히 굴 속에 오목하게

파인 곳이 있어서 그 곳을 손으로 만지니 두 부부가 먹을 만큼의 식량이 나왔다.

하루는 손님이 열 명이 왔기에 또 그 곳을 만지니 10명이 먹을 만큼의 식량이 나왔는데,

이 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양식이 나오는데 부부는 욕심이 생기어 이 곳을 파 헤쳤더니

그 후로는 한 톨의 양식도 나오지 않았다 한다

 

금은골은 《‘성스럽다, 거룩하다, 크다’의 뜻인 ‘

1’에서 나온 땅이름이다. ‘:

2’은 ‘감, 검’으로 소리가 바뀌면서 ‘검은, 거문, 가마, 거무, 가막’ 등의 땅이름도 낳았다.

3골→검 골→거문골→검은 골→금 곡. ‘골’은 ‘골짜기’의 뜻도 있지만 ‘마을’의 뜻도

있으므로 ‘큰 마을’ 또는 ‘큰 골짜기’의 뜻이다.(모서면 마을 지명유래 인용)

상주시 모동과 모서 등 이 지역은 팔음산 포도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 보이는 비닐하우스가 전부 포도밭이다

고개(10:42)

모서면 석산리 금은골 마을에서 대포리 노산마을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있는데

금은골마을로 한참을 우회한 다음에 백두대간 마루금에 복귀하여 대간길을 이어간다

 

대포리에 있는 노산(蘆山)마을은 함박골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1560년 경

임득진(林得鎭)이 처음 정착하여 남쪽 노적봉에 갈대가 많은 것을 보고 노산이라

하였다고 하며, 마을의 초가(草家)들도 한 때는 모두 갈대지붕이었다고 한다.

고개 좌측으로 들어서니 길을 잃을까봐 친절한(?) 이정표가 산꾼을 반긴다

절개지 임도를 따라서 올라간다

비에젖은 절개지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스레 올라가는데 대간꾼들이 지나갔는지 풀섶이 누워있다

절개지로 올라서니 이내 등로는 고속도로 수준이다

며칠전에 지나간 태풍의 영향이던지 나무 이파리가 많이 떨어져 있다.

무심코...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걷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자꾸만

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인데, 땀냄시 때문인지 산모기와 날파리가

지랄발광을 하는 바람에 가려워서 미칠것만 같다...하는 수 없이 베낭을

내려놓고 베낭을 뒤져보니 지난번에 불알친구가 사 준 해충기피제라는

스프레이가 있어서 그걸 옷에다 뿌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안부(10:48)

안부에서 올라서니 짐승들이 해코지를 한 묘지가 나온다

김해김공&창원황씨 묘(10:50)

상석(床石:무덤 앞에 제물(祭物) 차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돌로 만들어 놓은 ()에

표기된 글씨가 이채롭다...대체적으로 묘지에 부부가 합장(合葬: 이상의 시신을  

무덤에 함께 묻음)을 했을 경우에는 상석에 기록된 글씨의 크기가 똑같은데 이곳은 남편인

김해김공의 표기는 크고, 부인 창원황씨의 기록은 왜 적게 했을까?

후손들은 뭔 생각으로 저렇게 했는지 궁금하다

지기재에서 출발한 지 25분밖에 안되었는데 벌써부터 더위에 지치기 시작한다

오늘 처음 만나는 오르막길...초반부터 이러니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예감한다

안부(10:52)

더위에 지친듯이 보이는 며느리밥풀꽃

힘들게 능선에 올라서니...

안전로프가 처져있는 편안한 길을 가다가 오르막으로 향한다

금은봉 갈림길(10:57)

이곳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금은골 마을 도로에서 본 정자가 있는 금은봉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보인다...대간길에서 꽤나 떨어져 있어서 갈 일도 없다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려간다

흰가시광대버섯

모양이 닭다리와 흡사하여 ‘닭다리버섯’이라고도 불리며, 여름부터 가을까지

침엽수와 활엽수 등이 있는 숲의 땅에서 자생하며, 갓은 둥근 편이고 대는 밑으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전체에 돌기와 같은 것이 돋아 있다.

색깔은 온통 희며, 본래는 독버섯으로 규정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일부 지역에서

식용하기도 한다.

 

뿌리광대버섯과 외관이 비슷하여 혼동할 수 있으며,구분할 때에는 단면을 잘라보면

알 수 있는데, 뿌리광대버섯의 대는 갈랐을 때 속이 텅 비어 있지만 흰가시광대버섯은

속도 하얗고 단단하게 꽉 차 있어 구분이 가능하다.

 

흰가시광대버섯은 식용이 가능하지만 본래는 독버섯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날것으로

먹으면 위장이 상하고 중독이 생길 수 있어 반드시 삶은 뒤 찬물에 담가 독성을 빼낸 후

먹어야 하며, 염장(鹽藏:소금에 절여 저장함)해서 먹는 경우도 있다.

큰재에서 시작하여 화령재까지 이어지는 상주땅을 지나가는 대간길은

백두대간 능선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지역으로 흔히들 말하는 非山非野

구간이라 조금 편하게 걸어보려고 왔지만...등로는 편안하나 바람한 점 없는

날씨에 비가 온 뒤라 엄청난 습도에다, 산모기, 날파리같은 해충이란

伏兵을 만나서 초반부터 엄청나게 힘이드는 느낌이다

너럭바위(11:00)

닭의장풀(꽃말:시샘, 그리운 사이)

외떡잎식물로 닭의장풀, 닭의밑씻개, 달개비라고 불리는데 닭장근처에서 잘 자라고,

꽃잎이 닭의 볏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풀밭, 습기가 있는 땅, 길가 등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1년생 잡초로서 높이 15~50cm이며, 줄기는 옆으로 비스듬히 자라고 마디가

굵고 마디부분이 흙에 닿으면 마디에서 뿌리가 나오는데, 잎은 달걀모양으로 어긋나고

잎의 끝은 뾰족하며 밑부분이 얇은 잎집으로 줄기를 덮고 있다.

너럭바위를 지나 오르막을 만나는데 미끄러운 대습랩지대이다

슬랩지대를 올라서니 이정표가 있는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11:02)

꽤나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산행거리는 줄어들지가 않는구나

그만큼 힘들다는 反證이겠지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에 신의터재로 이어지는 편안한 길이 나온다

황량한 산중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고 나서
문명의 불빛으로 밝은 인간 세계를 보면,
이를데 없이 멀고 먼 길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나를 인류로부터 떼어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도 레이-

무명봉(11:07)

가느다란 소나무 사이를 걸어가는데 이런 길을 걸을 즈음이면

션한 바람 한줄기가 불어주면서 산꾼에 배려가 있을법도 하지만

올 여름의 산은 가혹하리만큼 산꾼에 배려가 인색한 듯 하다

안부(11:10)

안부를 지나면서 뚜렸한 등로가 이어지는 직진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사면길로 대간꾼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나 역시 그 길을 따라서 가는데...

다시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 조그만 개울을 지난다

山自分水嶺의 위배인가?...

 

*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우리나라 산줄기와 갈래를 알기 쉽게 만든 산경표(山經表)의

  원리로 산이 물을 나눈다는 뜻이며 물길이 산을 넘을 수 없다는 의미로, 땅속의 지질구조

  선을 따라 구분지은 산맥도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바탕이 되었다.

 

  산경표(山經表)는 조선 시대 영조 때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 산맥 체계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구분하여 도표로 정리한 책을 말하는데,

 최근 규장각에서 진본이 발견돼 1대간, 2정간(장백정간, 낙남정간), 12정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 이재무

나무가 이파리 파랗게 뒤집는 것은

몸속 굽이치는 푸른 울음 때문이다.

나무가 가지 흔드는 것은

몸속 일렁이는 푸른 불길 때문이다.

평생을 붙박이로 서서

사는 나무라 해서 왜 감정이 없겠는가?

이별과 만남 또, 꿈과 절망이 없겠는가?

일구월심 잎과 꽃 피우고

열매 맺는 틈틈이 그늘 짜는 나무

수천수만 리 밖 세상 향한

간절함이 불러온 비와 바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저렇듯

자지러지게 이파리 뒤집고 가지 흔들어댄다.

고목의 몸속에 생긴 구멍은

그러므로 나무의 그리움이 만든 것이다.

숲길을 빠져 나가니...

쑥밭골재(11:14)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 있는 쑥밭골재는 쑥밭골마을 위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이곳이

쑥밭이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바깥쑥밭골마을은 쑥밭골 바깥쪽이 된다 하여

칭해진 지명으로, 넓은 농로가 나오고 우측으로는 이 지역 특산품인 팔음산 포도가

탐스럽게 열려 있다

차량이 다닐만한 넓은 농로가 나오고 좌측으로는 화동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길이다

신의터재 2.2km 이정표 팻말을 따라서 가는데 잠깐 사이에

내리쬐는 햇빛이 장난이 아니다...이곳이 지도상으로는

화동면 이소리 쑥밭골인데 예전에 마을이 있었는지 넓은 공터에

잡풀만 무성하고 일부는 포도밭이 조성되어 있다.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里)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하였으며 동남쪽으로 두 갈래의 하천이 흐르는데, 자연마을로는 검은골, 관재, 광산,

쑥밭골, 바깥쑥밭골, 시장마을 등이 있다.

 

검은골마을은 빛이 검은 흙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관재마을은 신라 때 관가(官家)가 있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광산마을은 흑연을 캐던 광산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쑥밭골마을은 전에 이곳이 쑥밭이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바깥쑥밭골마을은 쑥밭골

바깥쪽이 된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시장마을은 이소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화동장이 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농로를 따라서 부지런히 걸어 포도밭을 지나...

 숲으로 들어선다

쉼터(11:17)

무명봉(11:20)

좌측의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편안한 사면길을 따라서 걷는다

무명묘지를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등로에서 뿜어대는

습도로 인해 숨이 멎을것만 같은 고통이 수반된다...그러나 우짜겠노...

자연에 순응하면서 걸어야지...

안부(11:23)

오늘 범여는 산 길이 힘드는게 아니라, 습도와 산모기, 날파리 때문에 힘이든다.

넓은 챙의 모자와 팔토시까지 착용을 했는데도 어찌나 물어대는지 가려워서

미칠것만 같다

무명봉(11:25)

졸각버섯

균모의 지름은 1.5-3cm로 둥근 산 모양을 거쳐 편평한 모양이 되며 가운데가 배꼽

모양으로 오목하며, 표면은 살색 또는 연한 홍갈색이고 가운데는 미세한 인편이

덮여 있으며 가장자리는 물결 모양이고 주름이 있어서 부채모양을 한다.

 

살은 얇고 균모와 같은 색이며, 자루의 길이는 3-5cm이고 굵기는 2-3mm로 섬유상이며

질기고 균모와 같은 색이다...포자의 크기는 지름이 7.5-10㎛로 구형이며 가시가 나 있고

길이는 약 1㎛이며, 발생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서 숲속의 땅에 군생하며 식물과 공생하는

균근성 버섯으로 살색깔때기버섯이라고도 부른다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에 묘지가 있고 대간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완만한 오르막길

이정표 뒷쪽으로 올라가 본다

쉼터의자 2개가 있는 무명봉인데 오늘 처음으로 조망을 보이는 곳이다

무명봉(11:30)

무명봉에서 바라본 가야할 윤지미산(좌)과 무지개산은 멀게만 느껴지고,

나무가지 아래로는 화동에서 신의터재를 거쳐 내서면 낙서리로 이어지는

어산로가 살짝 보인다

얼마나 좋을까 / 다산 정약용

 

岧嶢絶頂倦游筇(초요절정권유공)

높은 산 정상을 힘겹게 올랐는데,

 

雲霧重重下界封(운무중중하계봉)

구름안개 겹겹이 시야를 막는구나.

 

向晩西風吹白日(향만서풍취백일)

저물녘 부는 서풍 태양을 드러내니,

 

一時呈露萬千峯(일시정로만천봉)

천산만학 산봉우리 한꺼번에 다 트이네.

 

不亦快哉(불역쾌재)

얼마나 좋을까

 

不亦快哉行:五( 불역쾌재행5)

무명봉에서 되돌아 나와서 우측 등로를 따라서 신의터재로 향한다

묘지(11:34)

안부(11:38)

고도가 낮다보니 등로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共存하려는지 묘지들이 많이 보인다

오늘 산길에서 자주 만나는 짚신나물(꽃말:감사)

짚신나물은 장미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유럽과 아시아가 원산지이고, 풀밭과 길가에

서식하며, 크기는 약 30cm~1m이며, 줄기에는 털이 나 있고, 잎은 갈라진 상태로 어긋나게

자라며 꽃은 여름에 피는데, 어린 잎을 나물로 먹고, 한방에서는 약재로 쓰며, 잎과 줄기를

염료로도 쓴다.

온갖 일들이 규칙적으로 묶여있는 오늘날,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완전한 자유로운 삶의 방식 하나가 등산이다.

 

- 폴베이사르 -

무명봉(11:41)

길은 고속도로이나 션한 바람의 협조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이 걸으려니 폭염속에 대간길 걷는 자체가 고역이다

안부(11:44)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반도 안되었는데 벌써 몸뚱아리는 지치기 시작한다

NO53송전탑(11:46)

이런 곳을 지날때면 션한 바람이 꼭 불어줄만한 곳인데도

나무 이파리 하나 까딱도 하지않고 靜中動 자세이다

신의터재가 가까워졌는지 간간히 차량소리가 들리고...

방귀버섯

방귀버섯은 담자균류 방귀버섯목 방귀버섯과 버섯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면 포자를

방출하는 모습이 마치 방귀를 뀌는 듯하여 붙여진 이름라고 하는데, 방귀버섯

여러 종류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테두리방귀버섯, 목도리방귀버섯, 애기방귀버섯,

마른방귀버섯 등이 있다.

묘지 아래로 내려서니...

잔차족들의 산행 출입을 막기위해 설치한 시설물로 내려서니 신의터재이다

등로 아래로 내려서니 산림청에서 세운 덩치 큰 정상석을 가장 먼저 만난다.

신의터재에는 정상석이 3개나 있는데, 산림청에서 세운 정상석, 화동산악회와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정상석이다 

인증샷

신의터재 안내판

신의터재((新恩峴:280m:11:53~12:10)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와 어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도로명 주소가 어산로인

2차선 도로가 내서면 낙서리로 이어지며, 작은 공원으로 꾸며진 곳에 커다란

표시석 전면엔 '신의터재 해발 280m'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임란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렀고, 임란 때 의사 김준신(金俊臣)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 四월 二五일 장령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라 불리게 되었고,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치다"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화동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로 이 고개는 '지방의 관리나 귀양 중인

옛 벼슬아치들이 나라님(御)으로부터 승진, 또는 복직 등 좋은

소식(義信)이 오기를 기다리던 고개'였다는 사연이 전해지는 고개이다.

 

그리고 한쪽에 '義士 節谷 金俊臣 遺蹟碑'가 세워져 있고, 쉬었다가 갈 수 있는

나무의자가 설치되어 있으며, 新義峙亭과 팔음산 포도 안내판, 새마을 표시석,

버스정류장, 장선생 치산 공적비, 산꾼을 위한 사워까지 할 수 있는 음용수대와

간이 화장실까지 있을 건 다 있는 셈이다

무릇(꽃말:강한 자제력, 자랑)

식용이 가능한 백합과의 다년생초로 둥근 공처럼 생긴 땅속 비늘줄기에서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두 장의 잎이 나오는데, 봄에 나오는 잎은 여름에 말라버린다.

잎은 길이 15~30㎝, 너비 4~6㎜ 정도이고, 꽃은 연한 보라색이며 7~9월 비늘줄기에서

길다란 꽃줄기가 나와 그 끝에 총상꽃차례를 이루어 핀다.

 

꽃은 여섯 장의 꽃덮이조각과 수술 여섯 개, 암술 한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열매는 삭과로 열리고, 해가 잘 비치는 곳에서 흔히 자라고, 씨로 번식하기보다는

비늘줄기로 영양번식을 한다

 

꽃의 모양이 맥문동과 비슷하지만, 맥문동은 가늘고 질긴 잎이 여러 장 모여 나며

뿌리줄기가 굵고 딱딱해서 구분할 수 있으며, 또 맥문동은 학교나 정원, 길가 등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무릇은 야생에서만 볼 수 있는 품종으로, 백합과에 속하며 물구,

물굿, 물구지, 면조아라고도 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타이완, 중국, 우수리강,

일본 등 아시아 동북부의 온대에서 아열대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다

 

살짝 단맛을 가지고 있으며, 이뇨작용을 활발하게 하는 데에 탁월한 효능이 있고,

각종 통증을 억제하는 성분이 들어있어 진통에도 도움이 되며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으며, 체내의 독소를 제거하거나 붓기를 빼는 데에도 좋다.

나에게 가장 유용했던 음수대(飮水臺)

오늘 산행을 하면서 준비한 음료는 생수 2L 한병, 1L짜리 이온음료 2병,

식혜와 쥬스 등 마실거리만 5L정도인데, 지기재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날씨가 얼마나 더웠던지 이온음료 한병과 생수 절반을 마셨다.

 

오늘 산행거리가 화령재까지 18여km 정도인데, 이제 겨우 4.4km 정도

걸었다...총 산행거리중에 겨우 1/4밖에 못 걸었으니 이 음수대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이곳에서 이온음료 빈병과 생수병에다

물을 가득 채우고, 수도꼭지를 틀어서 머리에다 물을 쏘아대니

조금은 나은듯 하다...그런후에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아이싱 해온

황도로 점심을 대신한다

장선생 치산공적비와 새마을 표시석

신와 장선생 치산공적비(新窩張先生治山功績碑)

공적비 뒷면에 적혀있는 신와(新窩) 장묵상 선생의 치산공적비 내용은

고장 사람들을 위하여 신와 장묵상이 산을 되찾아 치산을 한 공적을 적어 놨는데

선생의 휘(諱)는 묵상이요, 자(子)는 성신(聖信)이며 호는 신와(新窩)라고 적혀 있었다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

큰재, 지기재, 신의터재, 오늘 가야할 화령재까지 고개마다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있다...빗물이 좌측으로 떨어지면

금강으로, 우측으로 떨어지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뜻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라는 뜻으로

백두대간이란 민족 성산(聖山) 백두산에서 남한 내륙 최고봉 지리산까지

강이나 계곡을 건너지 않고 이어진 분수령의 연속된 산줄기인 것이다

백두대간은 분수령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곧 분수령을 걷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의사 절곡 김선생 준신 유적비(義士 節谷 金先生俊臣 遺蹟碑)

신의터재는 임진왜란 초기 의병 김준신이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해서 이름 끝자를

따서 신의터재인 듯하며, 이번 구간 중간쯤의 화령재에는 화령장전적비가 있다.

 

이곳 신의터재는 조선의사 김준신이 상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후 왜적이 김준신에게

당한 보복을 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 판곡리 생가를 쳐 들어가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때 당시 능욕을 피하기 위해 부녀자들이 마을 앞 연못에 투신하여 절개를 지켰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절곡(節谷)이라고 하였고 연못이름을 낙화담(落花潭)이라 하였으며

이곳 고개 이름을 신의터재 라고 하였다고 한다

 

節谷 마을 앞 연못 중앙에 소나무 한그루가 있으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선생이 쓴

화담의적찬양시비에는 그때 당시 상황을 시로써 이렇게 찬양했다고 한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집

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 절사곡(節士谷)

피 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있으리 雪岳(白鶴山) 높은 봉이

본대로 이르는 말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는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신의터재는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왜군을 처음 꺾은 곳이고 화령장에서는 

6ㆍ25 때 이곳 전투로 낙동강전선을 구축하는데 시간을 벌었다는 얘기가 있다

신의터재 팔각정에서 여유로운 휴식을 취한 다음에 선교리쪽으로

간 에 우측의 시멘트 도로로 올라가야 하는데 저 멀리에

2021년 7월에 보청(신산경표상:팔음)지맥에 있었던 팔음산이 보인다

 

팔음산(八音山:762.3m)은 상주시 화동면 평산리와 모서면 득수리,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명치리와 경계에 있는 산으로 흑연이 많이 생산되었던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천지개벽 당시 파리 등만큼 남고 모두 물에 잠겼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임진왜란 당시

여덟 번 소리가 났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八音山이란 기록이 있다

 

‘팔음(八音)’은 불교에서는 부처가 지닌 여덟 가지 특색이 있는 음성, 즉 ‘극호음. 유연음.

화적음.존혜음. 불녀음. 불오음. 심원음. 불갈음’을 뜻하며, 우리나라와 중국의 음악에서는

악기를 만든 재료에 따라 여덟 가지고 나눈 것, 즉 ‘쇠. 돌. 실. 대나무. 박(포). 흙. 가죽.

나무’를 ‘팔음’이라 한다.

어산로를 벗어나 시멘트 도로로 올라서면서 다시 대간길로 들어선다

백두대간 상주구간의 표시판.

백두대간은 6개도 33시군을 통과하는데 상주시를 통과하는 구간이

69km라고 하니, 아마도 문경시(약 116km) 다음으로 긴 거리인듯 하다

폭염경보가 내려졌다는 오늘...이 더운 날씨는 언제쯤 끝나려나?

좌측으로 예전에 있었던 신의터산장은 사라지고 창고처럼 변해 버렸다.

하기사 2009년도 70대 후반의 노인이셨던 산장지기였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어쩌면 산장지기 어르신은 지금쯤 저 세상의

노인일지도 모를 일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仙橋里)의 모습

선교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한 곳이다.

내(川)가 양쪽으로 갈라진 머리쪽에 되므로 선교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갯머리, 갈평, 봉암, 큰말, 골말, 영당, 영안동마을 등이 있는데, 갯머리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선교리의 그것과 같다... 갈평마을은 갈대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봉암마을은 부엉이가 사는 바위가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큰말마을은 선교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골말마을은 큰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골짜기에 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영당마을은 목원 선생의

영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영안동마을은 한산 이씨 영모재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오늘 대간 구간(지기재-신의터재-윤지미산-화령)을 빚어내면서, 지난해 걸었던 

큰재~지기재 구간과는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서 자기복제는 하지 않

으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구간이 지난 구간과는 어디서 어떻게 다른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巧(교)로 흘러 아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固(고)가 되어 답보하기 때문입니다.
교는 그 속에 인생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고는 자기를 기준으로 삼는 아집에 불과한‥‥‥‥”

신영복의 ‘巧와 固’에 나오는 대목이다.

오늘 대간이 말하고 그리고 몸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듯 하다.

시멘트 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폭염에 맞서면서 걸어오다가 재빨리 숲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그런 걱정 안해도 될것 같네요

대간길의 가장 낮은 곳이라 잔차타고 오시는 분들이 많은가보다...

신의터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잠깐을 걸었는데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폭염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온열환자는 조심하라고 하는데 난 뭔

배짱으로 이 길을 걷는지 모르겠다.

이곳의 택시기사들은 대간길을 꿰뚫고 있는 느낌이다.

나처럼 홀로 대간길을 걷는 산꾼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된다

무명봉(12:15)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서 다시 오르막길

마치 사우나의 한증막 시설에 들어온 느낌이랄까...더워도 너무 덥다.

고도차가 없는 능선길을 걷다가 살짝 우측으로 꺽어진다.

下心을 하라고?...그 뜻을 알겠는데 실천이 쉽지 않으니 우짜면 좋노...

329.3m봉(12:25)

등로 가운데의 흙 속에 박힌 삼각점이 있는 능선이 나오는데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 등장하는 족보있는 봉우리로 흙속에

깊이 파묻힌 삼각점을 확인해야 하는데 너무 더워서 포기를 한다.

 

화동면 선교리의 마을유래를 찾아보면 이곳이 건병산이라 나와 있는데 금병산이라고도 한다.

선교 동남쪽에 있는 329m의 산으로 산 모양이 병풍을 친 것처럼 되었다고 한다.

《‘건, 금’은 ‘크다’는 뜻을 가진 말로  ‘병’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을 가진 말이다

 ‘병’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을 가진 말인지 알 지 못한다...다만  ‘병풍’의 뜻으로

보아  ‘둘림(周)’의 뜻을 가진  ‘둠’에서 온 말로 추정된다》...화동면 지명유래집 인용

흙 속에 묻혀버린 삼각점

峰산행 大家들의 흔적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만나고 대간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Y자형 임도가 나오고 곧이어 영안동마을 갈림길이 나온다.

영안동마을 갈림길(12:28)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 영안동 마을에서 어산리 장자동 마을로 이어지는 안부인데

좌측의 영안동 마을은 한산 이씨 영모재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영안동마을 갈림길에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안부(12:39)

묘지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가니 서어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서어나무 군락지(12:42)

서어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한국, 일본, 중국의 산간지대에 분포한다.

내한성이 강하고 그늘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침엽수림의 2차림으로 식재되지만,

목재의 가공성이 좋지 않아 고급 가구나 건축재로는 쓰이지는 않는다.

 

서어나무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목(西木)’을 우리말로 ‘서나무’라고 했다가 발음이

자연스러운 ‘서어나무’가 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독특한 수피에 먼저

눈이 가기 마련이다... 줄기의 굵기 자람이 균등하지 않아 회색의 매끄러운 표면에

세로로 요철(凹凸)이 생겼으며, 중부 이남에서 주로 자라며 키 10~15m, 굵기가

한 아름이 넘게 자랄 수 있다.

 

밀양 상동면 안인리의 마을 뒤편에서 자라는 서어나무는 키 9.4m, 둘레 530cm, 나이가

약 200년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다... 긴 타원형의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끝은 꼬리모양으로 길어지며, 암수 한 나무로 꽃은 잎보다 조금 먼저 피며 열매는 이삭처럼

밑으로 길게 늘어지고, 손가락 길이만 한 열매 대궁에 긴 손톱같이 생긴 포엽(苞葉)

수십 개씩 붙어 있고 쌀알 굵기만 한 씨앗은 포엽 밑에 숨어 있다.

안부(12:44)

땅바닥에 떨어진 자귀나무 군락지 팻말을 보면서 직진 능선으로

대간 마루금이 이어지지만... 

우측의 사면길로 간 다음에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갈림길(12:58)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지나서 능선이 아닌 우측 사면길로 마루금을 이어간다

노간주나무 군락지(13:00)

노간주나무는 측백나무과(Cupressaceae)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노가지나무’라고도

하며, 대한민국과 중국, 일본 등이 원산지이고, 산과 석회암 지대에 서식하며 크기는 8m 정도이다 

 

《행포지(杏浦志)》에 보면 “노간주나무가 옆에 있으면 배나무는 전부 죽는다”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붉은별무늬병의 중간 기주임을 밝힌 최초의 기록인데

그래서 향나무와 함께 노간주나무는 배밭 주인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노간주나무는 해변, 좀, 평강, 서울 등의 접두어가 붙은 여러 품종이 있으며

특히 해변노간주나무는 산림청이 지정한 ‘희귀 및 멸종위기식물’에 포함된다.

 

주로 석회암지대에서 자라며,  물기가 없는 마른 땅에서도 자라지만 해가 잘 드는 곳에서

번성하기 때문에 그늘진 곳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잎이 가시처럼 생겼기 때문에 동물들에 의해 훼손되는 일은 많지 않다

 

가을에 열매를 따서 햇볕에 말린 것을 ‘두송실(杜松實)’이라 하여 한방에서는 발한·이뇨·

신경통·류머티즘의 치료에 사용하며, 열매로 술을 담근 것은 ‘두송주’라고 하여 약주로

마시며, 키가 작은 종류들은 분재용으로 쓰인다.

 

* 행포지(杏蒲志)란 조선후기 문신이자 실학자 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자경(自耕)하며

  경험한 농법을 바탕으로 저술한 농업서(農業書)로 서유구가 순창군수로 재직할 때, 도 단위

  농학자들을 한 사람씩 두어 그 지방의 농업 기술을 조사하고 연구하게 한 후 보고하여

  이것으로 전국적인 농서를 편찬하자는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농업의 백과전서적

  저술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로 집대성할 수 있었다.

 

 『행포지(杏蒲志)』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하기 전에 집필된 책으로 보이는데 이는

 『임원경제지』에 인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행포지』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하기 전,

 그 기초적인 연구로 농업 기술과 농지 경영을 조사하는 것으로 저술이 이루어졌다.

무명봉(13:02)

임도(13:04)

예전에 이 길을 걸었을때는 감나무밭이었는데, 지금은 감나무가 전혀 안 보인다.

노루골(13:06)

상주시 화동면 어산리(於山里)에서 선교리(仙橋里)를 넘는 고개로 노루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북진을 알리기 위해 봉화대에 불을 지피는 장작을 쌓아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장자발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길게 늘어난다는 뜻을 가진 ‘느르’ 가 변음화 되어

‘노루’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노루골을 지나 어산리로 이어지는 임도를 지나 좌측 숲으로 

대간길이 이어지는데 앞에는 대간길에서 벗어나 있는 장자봉이 보인다

어산리로 이어지는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숲으로 들어선다

산악잔차를 타는 라이더들의 횡포가 심한 모양이다

나는 이런 곳이면 졸면서 걸어가는 버릇이 있는데 땀냄새를

맡고 달라드는 벌레들의 극성으로 미칠것만 같다

장자봉 갈림길(13:15)

이제 대간길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장자봉을 갔다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많이 남아있어 

포기를 하고 서북쪽으로 향한다

대간길에서 꽤나 벗어나 있는 장자봉(長者峰:383.5m)은 지도에는 

그냥 숫자로만 표시된 봉우리이지만 어산리 장자발마을 뒷산에 있는

산이라 이 지역 사람들은 장자봉(長者峰)이라 부르는데, 장자발마을은

장자(부자)가 살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라고 한다

등산은 길이 끝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 알랑 드 샤뗄리우스 -

2번째로 만나는 노간주 군락지 표지판을 지나 무명봉에 도착한다

무명봉(13:22~30)

다리는 천근만근이다...베낭을 내려놓고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데 갑자기 몰려든 산모기가

아예 내 몸뚱아리에다 빨대를 꽂아놓고 헌혈(?)을 강요하는데

가려워서 미칠것만 같다...서둘러 길을 떠난다 

부지런히 내려서니 성황당의 흔적같은 돌무더기가 있는 안부에 도착한다

어산리(於山里) 안부(13:40)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에서 어산리로 이어지는 안부인데 좌.우로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옛날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였는지 커다란 돌무기가 무너진 채

그대로 방치가 되어 있다

 

상주시 화동면에 있는 어산리(於山里)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소규모로 분포하며 동쪽으로 작은

하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어산, 갈미바웃골, 바랑골, 터골, 돌적골, 장자발,

점골마을 등이 있는데, 어산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갈미바웃골마을은

갈모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바랑골마을은 바람이 센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터골마을은 절터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돌적골마을은 어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돌이 많이 쌓여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장자발마을은 장자(부자)가 살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점골마을은 그릇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완만한 오르막길이긴 해도 고도차가 거의 없는 등로이다

왜 이 구간을 非山非野 구간이라 부르는지 알 것만 같다.

걷는게 힘드는게 아니고 더위에 지쳐서 힘이 드는데

아직도 가야할 길이 절반이나 남아있어 食水를 조절해야 

할 듯 싶다...이곳까지 오면서 2L 이상의 물과 음료수를

먹었는데도 오줌한번을 누지 않았고, 땀이 얼마나 흐르는지

속옷까지 다 젖어버린 상태이다

더위에 지쳐서 非夢似夢간의 무의식중에 오르막을 오르니 무지개산 갈림길이 나온다

무지개산 갈림길(13:55)

멋진 정상석을 세워놨다고 유혹을 한다...권하는 장사 밑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뭇가지로 사이로 보이는 무지개산은 0.2km의 거리가 20km처럼

느껴지는데, 몸뚱아리는 천근만근이라 과감히 포기하고 화령재로 향한다

지난 3번의 대간길에 갔다 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니 큰 미련도 없다.

무지개산(448.1m)은

경북 상주시 화동면 어산리와 선교리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2등 삼각점이 있다... 그런데 높이는 지도마다 달라 혼란스럽다.

 

상주시청 자료에 의하면 산 근처에 무지개폭포가 있어서 붙혀진 지명이라는데

무지개골은 개울을 뜻하는 묻이개골에서 변음화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13:58)

산벗나무 조림지라는 팻말이 보이나 정작 산벗나무는 별로없다

무명봉을 오르면서 뒤돌아 본 무지개산의 모습

무명봉에서 만난 이정표

무명봉(14:01)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잣나무조림지가 나온다

잣나무 조림지를 지나니... 이정표가 있는 안부가 나온다

안부(14:07)

안부 좌측의 300m지점에 금강블루베리 농원이 있다고 한다

블루베리는 암을 억제하고 뇌의 기능을 활성화 하며 뇌졸증및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하며 이뇨작용을 돕는다고 한다

나무계단이 있는 오르막으로 오르는데 자꾸만 발걸음은 

느려지고, 가야할 길은 먼데 몸뚱아리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

쥔장!...잘못만나 개고생하는 몸뚱아리에게는 늘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다...기왕 참은 것...2년만 기다려다오...그때쯤이면 지맥길이

끝나지 않겠나...

무명봉(14:12)

"왜 나는 산에 오르는가 ?"
이 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다.
다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가야겠다는 것뿐이다.

- 마르쿠스 슈무크 -

안부(14:17)

오늘은 등로에서 亡者들과 조우를 많이한다

무명봉(14:22)

너무나 피곤한 탓일까...힘든 와중에서도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무명봉(14:35)

윤지미산을 향해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364.4m봉(14:45)

족보있는 봉우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봉산꾼들의 흔적

서원마 갈림길(14:47)

좌측으로는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서원마와 우측의 산데기못으로 

이어지는 길이 어렴풋이 보이나 민초들이 발길이 끊어진 지가

오래인지 등로는 퇴화되었다

 

판곡리에는 꽤나 큰 판곡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주변으로는 예전에

광산이 많았던 곳으로, 조금전 신의터재에서 만난 김준신 장군이

이곳 판곡리 출신이다

 

상주시 화동면에 있는 판곡리(板谷里)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하였으며 동남쪽으로 두 갈래의 하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판곡, 말구리,

서원, 적덕마, 전대, 중마마을 등이 있다.

 

판곡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너러실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말구리마을은 지형이

몹시 가팔라서 말이 굴러떨어졌다는 고개 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서원마을은

서산서원이 있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적덕마마을은 청도 김씨가 살면서 덕을

많이 쌓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전대마을은 밭이 넓게 분포한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중마마을은 판곡리에서 중심되는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라 한다

 

이곳 판곡리에는 김준신의사 제단비(경북기념물 제113호)가 있는 곳으로

김준신의사는 청도사람으로 이곳 판곡에서 태어났는데, 판곡은 고려시대 이후로

청도김씨 세거지였다...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준신은 솔령장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기위해 칠곡 석전까지 전진하였다가 다시 상주 본진으로 돌아와 상주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을 무찌르다가 순국하였으며 유적비는 신의터재에 있다

낙화담(落花潭)- 사진 펌

화동면과 내서면을 오가는 백두대간 신의터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판곡리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준신 의사 제단비가 있다... 김준신 의병장은 앞서 들렀던 북천에서

의병을 이끌고 왜군 정예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분이다.

 

당시 김준신 의병장은 중과부적으로서 처음부터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남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며 부하들과 함께 왜군 수백 명을

죽이고 장열하게 전사했다.
 
왜군은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예기치도 않은 곳에서 타격을 입게 되자 분풀이를 하기 위해 

김준신 의병장 가족이 살고 있는 화동면 판곡리로 몰려갔다... 그러나 어찌 무기도 없는 

민간인이 왜군 정규군을 당하겠는가...마을사람들은 힘을 합쳐 저항했지만 남자들은 거의

학살당했고, 부녀자들은 왜군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 마을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연못 이름이 낙화담(落花潭) 이다.

 

임진왜란 당시 1,600여 평에 이르렀다는 낙화담은 세월이 흐르면서 메워져 이제는 불과

60~70평 남짓한 연못으로 변해 버렸고, 못 가운데 조성한 작은 섬엔 수백 년 묵은 노송

한 그루가 옛 이야기 들려줄 듯 서있다.

우측에 재령강공과 유인 풍양조씨 묘지가 보이고 묘지 좌측 윗쪽으로 올라간다

완만한 오르막을 조금씩 고도를 높혀가는데 오늘 산행을 하면서

먹은거라고는 물과 스포츠 음료, 쥬스 등의 액체로 된 것만 먹었더니

이제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난 느낌이다...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진다

무명봉(14:58)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윤지미산을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등로에 있는 무명묘지 3기를 연속적으로 지나고...

병성(신산경표상:숭덕)지맥 분기점인 437.4m봉을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좌측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안부(15:21)

좌측으로는 윤지미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고 우측으로는

병성(신산경표상:숭덕)지맥의 분기점이다...2019년 4월 28일에

병성지맥 첫 구간을 걸었으니 벌써 4년이란 세월이 지났구나.

그 당시 큰 수술을 한 지 1년도 안되어 이곳을 걸으면서 개고생한 기억이

아직도 아련하다

병성(숭덕)지맥 분기봉(437.4m:15:22)

437.4m봉 삼각점(△관기420)

병성(숭덕지맥:崇德枝脈) 개념도

신산경표상의 숭덕지맥(崇德枝脈)은 백두대간 봉황산(740.8m)과 신의터고개 중간쯤인

(봉황산 7.9km.신의터고개7.6km) 437.7m봉에서 북동쪽으로 가지를 쳐 낙동강과 영강이

만나는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44.3km되는 산줄기를 말한다.


이산줄기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봉성천이 되어 낙동강에 들고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이안천이 되어 영강에 들었다가 낙동강에 합수되며 소머리산(442m),우산재, 범산(416.5m),

국사봉(339m), 숭덕산(236m ), 서산(192.2m) 오봉산(240m), 두리봉(249.7m), 금지봉(386.5) , 

군암산(280.0m)을 지나며 영강(潁江.길이 66.2km)의 좌측,병성천(屛城川.길이 32.3km)의

우측 분수령이 되는데 대한산경표에서는 병성지맥(屛城枝脈)이라 부르고 있다

안부로 되돌아와서 윤지미산을 향하는 빡센 오르막이 시작된다

빡센 오르막을 오른후에 안부로 살짝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오른다

돌탑봉(15:32)

오르막을 향하다가 다시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

오르막을 향하는데 심심하지 말라고 간간히 멋진 바위들이 보인다

무명봉(15:37)

이곳 상주에는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던 정기룡 장군을 비롯해 우복 정경세,

김준신 의병장 이렇듯 환란의 시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 분이 모두

한 해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주 에서 태어났으니 참 특별한 인연임에 틀림없다.

무명봉을 지나면서 금방 윤지미산이 나올것만 같은 기분인데

생각보다 그리 가깝지 않은건지, 아니면 체력이 바닥나서 힘이

들어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윤지미산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태풍의 영향탓인지 등로 주위에는 나무 이파리가 많이 떨어져 있고

한발, 한발 움직이다보니 윤지미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윤지미산(533.6m:15:43)

경북 상주시 내서면과 화동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름이 좀 특이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알 수 없었는데 어느 대간꾼의  산행기를 보니

윤지미산의 정확한 시기와 유래는 알수 없으나 언제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일부 설에 의하면 사서삼경 대학에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는데, 윤집걸중(允執乞中)이란 "인생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 맞힌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예전에 백두대간이 있기전에 선배 산꾼들이 여수에서 경기도,강원도까지

산맥길을 이어가면서 걸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당시 윤지미라는 여성 산꾼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여성들이 맥 산행을 하지 않았던 터라, 남자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곳을 오르면서 하도 힘이 들어서 엉엉 울었는데 남성 산꾼들이 그 여성 산꾼의

이름을 따서 윤지미산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었다는데 범여는 솔직히 믿음이 가질 않는다

 

원 지명이 있었는데 그 지명을 버리고 사람을 따서 산 이름이 된곳이 가끔 보이는데

가장 대표적인 산이 양평에 있는 유명산이 아닐까?...유명산의 원 지명은 마유산(馬遊山)

이었는데 1973년 한 일간신문사(한국일보)의 후원으로 국토 중앙자오선(127도 30분) 

등반대가 여수에서 자오선을 따라 북상을 하다가 종주 등반을 하던 엠포르산악회 회원들이

지도에 표기가 없었던 이 산을 발견하고 대원중에 홍일점이었던 진유명(晉有明)씨의 이름을

따서 붙혔는데 이후에 언론보도로 유명세를 타면서 이 산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윤지미산에 오르면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명배우 김지미를 연상케하는건

나만의 생각일까...하기사 요즘의 젊은 친구들이야 그 배우를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인증샷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산이고, 유일하게 공식적인 지명을 가진 산이다.

이제 힘든구간은 거의 끝난 것 같은데 이제는 방전된 체력으로, 화령까지

가야하는데 그게 문제로다...여기서는 탈출로가 없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

잠깐의 휴식을 취하려고 베낭을 벗는데, 산모기가 떼거지로 달려드는 바람에

서둘러 베낭을 메고 줄행랑을 친다

자유인 산악회에서 예전에 없었던 멋진 이정표를 세워놨다.

정상석과, 이정표, 안내판의 고도는 538m라고 표기를 해놨는데

국토정보지리원의 지도에는 533.6m로 되어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한참을 내려오니 안부가 나오고...

안부(15:53)

안부를 지나니 좌측으로 판곡리 방향이 보이나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무명봉(15:57)

왜 이곳이 非山非野 구간이라 부르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만 같다.

산(山)도 들(野)도 아닌 곳을 더위에 지쳐 魂이 나간 상태에서 영혼없이

걸어가는 내 몰골이 우습기만 하다... 내가 좋아서 하는 짓거리이지만

내 자신도 이 더위에 뭔 지랄인지도 모르겠다...

등로가 끝나는 지점 아래로 내려서니 이정표가 있는 넓은 임도가 나온다

오늘 구간은 백두대간도 체통 없이 가라앉아 도로에 끊기고, 임도에 끊기고 하다가

포도밭 주저앉아 버렸다...근근히 농로로 백두대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심한 현장이다.

 

비산비야(非山非野)란 말이 있듯이 여기야말로 비산비야의 대표적인 곳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데, 들판(野)이라 하기엔 백두대간 한가운데라 그럴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산(山)이라 하기엔 농로이니 그럴 수도 없는 그런 곳이다.

묘지 뒷쪽으로 올라서서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소로(小路)를 지나 이어지는 대간 길 묘터들이 그 보존 행태에 따라

뭔가를 일러주는 듯하다...대간 길을 걸으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명당자리에 관한 엉터리 이론이다.

 

우선 대간길이 약간 동서로 향하는 곳의 남향자리가 명당이다.

비록 관룡자(觀龍子)로 그 용맥(龍脈)을 다 짚어 나가지는 못해도

큰 산의 음택(陰宅)에 좌향(坐向) 이 대간길을 베고 누워야지

길방향으로 곧추세워져 산(生)사람들의 걷는 방향과 같은 향은 별로 좋질 못하다.

"향(香)을 쌌던 종이에서는 향내(香氣)가 나고,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에서는 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본래는 깨끗하지만 차츰 물들어

친해지면서 본인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물은 본래 깨끗한 것이나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죄 지을 일을 하고
복을 받을 일을 하게 된다.” 

 

가장 진한 물듦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천천히

스며들며 닮아가는 것이다.

 

 법구경 비유품 중에서...

화령은 가까워지건만 다리는 천근만근 그냥 주저안고 싶은 마음이다 

숲 끄트머리에 있는 이정표 아래로 내려서니

시멘트 임도가 나오는데 판곡리 마륜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마륜 갈림길(16:15)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로 내려서는데 좌측으로는 상주시 화동면

판고저수지가 있는 판곡리 마륜마을로 향하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화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이다

 

마륜 (말구리) 마을은 화동면 판곡리(板谷里)에 있는 마을로 예년에는 관청의 말을

사육하던 곳으로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입주한 것이 이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

산골 마을이지만 큰 마을이었는데 판곡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되어 지금은 20여호만

남아 있다고 한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3분 정도를 걸어가다가 도로를 버리고 숲으로 올라간다

진다리 갈림길(16:18)

좌측으로는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진다리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대간길은 능선으로 올라간다...신봉리(新鳳里)에 있는 

진다리마을은 이곳의 흙이 매우 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이곳부터는 신의터재에서부터 같이 걸어온 화동면과 작별을 하고,

좌측은 상주시 화서면이고 우측은 내서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오르는데 비에젖은 등로가 상당히 미끄럽다

아이 깜짝이야!...아무 생각없이 걸어가는데 발밑에 손가락

굵기만한 비얌 한마리가 여유롭게 지나가고 있는게 아닌가...

자칫하면 밟을뻔 했다...올해 처음으로 만난 비얌이다

무명봉(16:23)

화서1터널 위(16:25)

이곳 아래로 당진~영덕간 고속도로 화서1터널이 지나는 곳이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로 올라간다

등로 좌측에는 풀섶에 묻혀있는 商山金公과 全州李氏 부부 묘가

보이는 힘든 오르막길, 더위에 지친 肉身으로 무명봉을 오르는데

산행이 이리도 힘든 줄은 정말 몰랐다... 

무명봉(16:35)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다.

휴!...하는 안도감으로 화령으로 내려선다.

화령(化寧:324.4m:16:37)

경북 상주시와 충북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고갯마루로

정상엔 '화령재 해발 320m'라 새겨진 표석이 있고, 도로

왼편(북쪽)엔 상당히 넓은 주차장과 화령재 정자가 있

도로 건너 산행 들머리엔 '낙동강-금강 분수령' 안내판이 서 있다.

 

원칙적으로 현재 화령(化寧)이란 행정지명은 없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화서면 일대를 화령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예전에 그 일대의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 화령현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는데

리하여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지금도 상주에서는

중화(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49번 국도 상주 화북면과 괴산군, 그리고 문장대관광단지로 이어지는 길이고,

동서로 뻗은 25번 국도의 서쪽 방향은 화서면(화령;化寧), 청주, 보은 등지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화령재와 상주, 선산으로 가는 길이 있고, 그 삼거리의 상곡1리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동쪽 상주, 선산 방향으로 300m 정도 완만한 고갯길을

올라가면 화령재인데 이 지역은 해발 200∼300m의 고원지대로서 일교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질 좋은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지대였고,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할 때에도 이 화령재에서부터 북상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며, 후삼국시대에도

견훤이 중요시했던 고개였으며, 6·25 때도 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었다고 하는데, 

이런 배경을 가진 고개였기에 싸움이 잦아서 화령(火嶺), 곧 '불붙는 고개'라는 별칭이 있다

상주와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화령재는 한때 제법 번잡하던 고개였다고

하며, 고갯마루 서쪽의 화서면 신봉리 장터에선 매월 끝자리가 3, 8일인 날에

화령장이 서는데,  고려 때부터 화서•화동•모동•모서•화북•화남 등 상주 서부인

중화지역의 중심시장으로 역할을 해온 화령장은 1965년부터 현대식 정기시장이

개설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고, 이후 70~80년대엔“다른 지방에서는

화서는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에서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거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북한군 제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령 주변은 백두대간을 따라 나있는 산간도로인 보은~화령장~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갈령~화령장~상주 도로의 합류지점으로 백두대간을 통과하여 상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국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병력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이곳에 제15사단을 투입하여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령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민군 전령을 생포한 국군 제17연대가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 화령 동쪽의 상곡리와 갈령 주변의 동관리에서 각각 매복작전을

펼친 끝에 남진하는 인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두대간 분수령을 넘어 상주 지역에서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코자 했던

인민군의 의도는 저지되었고 결국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후의 낙동강 전선 구축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자료 인용 - 민병준님의 향토기행 상주 4 에서)

인증샷

19세기 말에는 화령재 서쪽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에서 동학교도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른바 보은집회, 지리산 북쪽 대간길 남원땅에는 동학농민전쟁기념비가

있지만 이곳 보은은 그 중요한 마디(結節)였다... 1860년 서학에 대비되는 동학을 창시한

교조는 최제우. 몇 년 뒤 잡혀서 처형을 당했다. 이후 동학은 꾸준히 조직을 갖췄고

1893년 교조(敎祖)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명목으로 교조신원운동 모임을 가졌으니

그것이 보은집회다.

 

한양땅에서 적당한 거리에 있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좋은 중심지이며

속리산의 험한 산맥을 끼고 있는 지형이라 선정됐을 듯하며, 일본군에 의해 동학

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나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뚜렷하다

화령 안내판

화령재 정자 아래에 있는 옛 표시석 뒤에 적혀있는 화서(化西) 연혁을 보면

이 고개는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으로 조령, 남으로 추풍령과 연하여

화령(火嶺)으로 불리어 왔다고 택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화령(化寧)은 본래 신라 때는 건비군(建匕郡)이었으나 경덕왕 때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쳤고, (화령化嶺이란 지명은 화령火嶺의 고개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때는 현으로 되었다가 근대에 와서 화서면(化西面)으로 되었다.

 

예부터 화령 시장(化寧市場)은 상주장, 관기장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으며, 6.25 때는

국군이 인민군 15사단을 섬멸한 전승지로 이름있는 곳이며, 남으로 황간, 북으로는

화북 문장대에 지방도가 있고, 상주 보은 간 국도가 동서로 관통하여 교통의 요충지이다.

 

서기 1987년 8월 건립

산악회의 차량을 타고 왔으면 화령 정상에서 산행을 종료했겠지만

나야 홀로 다니는 독립군이라 어차피 화령터미널로 가야 하기에

도로를 따라서 수청거리삼거리까지 가기로 한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도로 우측의 철조망 안쪽이고, 옛날에는 도로가 아닌

철조망 안쪽 능선으로 걸었는데 지금은 사유지로 바뀌었는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25번 국도를 따라서 걸어간다

좌측으로는 화서태양광발전소라는 곳이 보이는데 수지타산은 맞는지 모르겠다.

수청거리삼거리까지 1km정도 남았다

쌀, 곶감, 누에를 이루는 삼백(三白)의 고장 상주는 경상도의 어원이 되는

지역으로,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 영남을 경상도(慶尙道)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부터 상주는 지역적, 지리적으로 영남의 주요 도시였으며,

또 낙동강은 그 어원이 '낙양의 동쪽에 있는 강'이란 의미이며,

상주의 옛 지명 낙양(洛陽)에서 유래됐다고 하니, 상주는

지명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지역이란 느낌이다.

해질녘이 다되어 가는데도 아스팔트 도로에서 뿜어되는 열기는 식을줄 모른다

오늘의 날머리인 수청거리 삼거리에 도착한다

봉황산으로 오르는 다음 구간의 산행 들머리를 확인하고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수청거리 삼거리(16:50)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와 상곡리와 맞닿아 있는 삼거리로 상주에서 화령, 보은으로

이어지는 25번 국도와 화령에서 화북으로 이어지는 49번 도로가 만나는 곳인데

신봉리 수청마을의 지명을 빌려와 수청거리 삼거리라 부른다

 

수청거리마을은 화령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술청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도로옆에 있는 상곡1리 마을 표시석

상주시 화서면에 있는 상곡리(上谷里)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금강의 지류가 동남방향으로 흐르며, 계곡리, 명통리, 상달리, 금곡리 등을 병합하면서

상달과 금곡의 이름을 따 상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금곡, 중촌, 명통, 퉁점마을 등이 있다. 금곡마을은 상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금이 났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중촌마을은 상곡리의 중앙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명통마을은 금곡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퉁점마을은 명통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놋점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폭염경보가 내려지는 날에 개고생을 하면서 산행을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린 탓일까...갑자기 어지러워 도로옆에 누우니 하늘이

노랗다...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남은 물을 다 마시고 나니 정신이 돌아온다

여기서 버스터미널까지 도로를 2km가량을 걸어가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아침에 타고갔던 택시를 호출하니 멀리 있다고 한다...30여분을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화령 터미널로 향한다.

 

정말 힘들었지만 해냈다는 자부심...이 맛에 산행을 하는것 아닌가...

화령터미널(17:30)

화령터미널에 도착하니 17시 20분에 출발하는 버스는 가버렸고,

18시 15분에 버스가 있는데 버스표를 예매하고는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편의점에서 물한병과 아이스크림 하나, 우유와 박카스 한병등 사서

한꺼번에 다먹고 나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 느낌이다

화령터미널 버스시간표

웬 떡이야!

정신을 차린후에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 입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헐!... 뭐여...샤워기가 달린 수도꼭지 있다...저녁 늦은 시간에 터미널 대합실에는

나 혼자다...문을 닫고는 홀라당 벗고 10분정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날아갈듯한 기분이다...무릉도원에 온 것처럼 정말 개운하다

화령발 → 상주행 버스표

쿨하게 씻고는 버스 타는데로 나오니 잠시후에 상주가는 버스가 

동시에 버스 2대가 도착하는데 하나는 직행버스인데 요금이

5,000원이고, 하나는 마을마다 들리는 완행버스인데 요금이

2,600원이다...이럴줄 알았으면 완행버스 탈걸...아깝다

화령에서 상주까지 직행버스의 손님은 달랑 나혼자다

버스를 전세내어 상주터미널까지 온 셈이다

상주터미널(18:40)

상주에 도착하니 경부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 출발

시간이 똑같이 17시 40분 버스라 출발 시간이 1시간이나 남았다.

시간도 때우고 저녁도 해결할 요량으로 아침을 해결한 분식집에서

김밥 한줄과 오뎅 하나로 저녁을 해결하는데, 분식집 쥔장 여인이

아침에 튼 안면이라 아는척 하면서 살갑게 대한다

 

저녁을 해결하고도 30분 이상을 대합실 의자에서 멍때리기를 한 다음에

버스타는 곳으로 향한다

상주발 → 서울행 버스표

버스에 오르자마자 피곤했던 탓인지 깊은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버스는 경부고속도로 죽전 휴게소를 지나고 있다.

잠시후에 터미널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