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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梵如의 山行記

발길 닿는대로 가다보니, 도봉산이더라

by 범여(梵如) 2024. 2. 22.

☞ 산행일시: 2024년 02월 12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날씨에 오후에 눈

 산행거리: 도상거리 9.2km  / 4시간 20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도봉산역-도봉탐방지원센터-광륜사-도봉서원 터-선인봉 포토라인

                      천축사 일주문-천축사-마당바위- 마당바위 쉼터- 갈림길- 선인쉼터

                      도봉산 정상 안부-신선대-다시 도봉산 정상 안부- 갈림길

                      석굴암 갈림길- 쉼터- 인절미 바위- 도봉2교- 만월암 갈림길- 쉼터

                      우이암 갈림길- 고산앙지- 무수골 갈림길- 도봉탐방지원센터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남들은 올해가 靑龍의 해라서 청룡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서 좋은 한해가

될거라고 했는데, 나는 甲辰年(2024년) 새해 들어서 초반부터 액땜을 한다.

신년초에 코로나와 독감 예방주사를 맞고, 1주일 이상을 힘들게 보냈고,

중순경에는 차를 타고 신호등에 걸려 대기하고 있는데 뒤에서 젊은 친구가

핸드폰을 보다가, 내 차를 들이받는 교통사고로 인해 허리를 다쳐서 한동안

개고생을 했는데, 교통사고 휴유증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폐렴 예방

주사를 맞고, 엄청나게 고생을 한다...내가 올해 三災에 걸려서 그런가?...

 

한달이 넘어서야 겨우 몸을 추스리는듯 한데 舊正을 맞이하여, 설 전날에

연세 많으신 형님들 댁에 들려서 인사를 하고, 구정날 내가 다니는 사찰에

가서 부모님의 제사를 모시고 집에와서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데

딸 내외가 세배를 하러 오는 바람에 휴식도 취하지 못했지만, 오랫만에

우리 식구들끼리 오붓하게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니 아침 8시가 다 되어간다.

 

난 평소에는 10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스타일인데... 아침을 먹고나니 마땅히 할일도 없고, 갈데도 없다.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서울 근교 산에나 가자고 할까 하다가 괜히

가족들과 즐기고 있을 분위기를 깨트리기 싫어서 집에서 간단하게 베낭을

챙겨서 집을 나선 시간이 오전 10시 반이 넘었다

 

도봉산 지도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집을 나왔건만 마땅히 갈 곳도 없고,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서 커다란 고민도 않고 무작정 지하철을 타다보니 7호선 열차이다.

땅밑으로 다니는 지하철이야 할배인 나로서는 어디를 가던 공짜이니

차비에 대한 부담은 없으나 이건 사실 공짜가 아니고, 나중에 내 새끼들이

짊어져야 할 빚이라 생각하니 맘은 영 편치가 않다.

 

7호선 열차를 타고 가다보니 수락산역 지나 도봉산역에 도착하니 

11시 20분이다...아침에 일찍 출발했다면 동두천을 지나 대광리까지

가서 고대산과 금학산에 펼쳐질 멋진 雪山을 구경하고 철원에서 귀경하면

참 좋았을텐데 시간이 되지 않으니 우짜겠노...도봉산역에서 내려 신선대를

찍고 포대능선, 망월사를 거쳐서 내려오는 길에 있는 지인스님의 절집에

들려 새배나 할 생각으로 도봉산역에서 내려 골목길을 따라서 가는데

설날 이후라 그런지 등산객들이 많고, 가게들도 많으나 요즘 경기가 좋지

않은 탓인지 상가들은 활력을 잃은 모습이다

늘 독립군으로 혼자 산행을 하는 버릇 탓인지 이렇게 번잡한 산길로 간다는게

엄청나게 부담스럽고 불편하여 번잡한 골목길을 빠져나와 도봉산 버스정류장을

지나 개울가쪽으로 향하는데 예전에는 없었던 유희경과 이매창의 詩碑가 있다.

 

내가 해마다 3월이면 변산바람꽃과 노루귀를 보러가는 청림마을 인근의 쇠뿔바위봉

아래에 있는 이매창의 흔적을 이곳에서 보다니...

이매창과 유희경의 관계를 표시한 詩碑

 

이화우(梨花雨)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離別)한 님

추풍 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온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 작품은 전라도 부안 출신 기생이었던 매창(梅窓:1573~1610)

시조 작품으로 매창은 계랑(癸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이 작품이 실린 가곡원류(歌曲源流)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하고 있다.

 

"계랑은 부안의 이름난 기생으로 시를 잘 지어 매창집(梅窓集:1668년에 부안의

기녀(妓女) 매창(梅窓)의 시 58수를 모아 간행한 시집)이 세상에 나와 있다.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1545~1636)의 오랜 벗으로, 촌은이 서울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었는데, 이에 이 노래를 지어 수절했다."이 기록에서는 매창이 부안에서 관기로 있을 때

그곳을 방문했던 유희경과 헤어진 이후에 그리움을 담아 지은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개성에 황진이가 있다면 부안에 매창이 있다”는 말로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던 매창은

기생 신분으로 거문고와 詩에 능했다고 알려줬는데 이에 반한 남정네가 당시에 천하의

풍류객이라 알려진 허균(許筠), 유희경(劉希慶), 이귀(李貴)라고 한다

 

기생 매창의 본명은 이향금이고, 자는 천향(天香)이 인데, 전북 부안의 기생으로 계유년에

태어나 계생(癸生)이라고도 불렀다... 아전(衙前)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으며,

뛰어난 재주를 지닌 만큼 자부심도 대단했는데,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名妓)의

쌍벽을 이루었는데, 황진이가 한글 시로 이름을 날렸다면 매창은 한시(漢詩)로 이름을 날렸다.  

 

매창은 18세에 28살 연상의 천민 시인 유희경(劉希慶)을 만나 평생을 정인(情人)으로 지내게 된다.

여느 기생과는 달리 절개가 매우 곧았던 매창이 한 눈에 반해 정을 주게 된 유희경은 천민 출신

시인이자, 조선시대 최고의 상례(喪禮)사를 지낸 인물로 요즘으로 말하면 ‘장례지도사’라 할 수 있다.

유희경과 이매창의 만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이루어졌다.

1591년(선조 24년) 초봄, 부안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에게

빠져들었는데,  28년의 나이 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매창은 유명한 기생이었고,

유희경도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천민(賤民)과 기생(妓生)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대한 동병상련을 느끼고, 시를 통해 서로 사랑의 깊이를 더해간 것으로 보인다.

 

황진이보다 반세기정도 늦게 살았던 매창은 유희경과는 2년간 지독한 사랑을 거쳤고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는 10여년간 정신적 사랑을 나눈 것으로도 유명하다

허균이 떠나고 또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된 본관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후 매창은 

그를 그리며 거문고로 “산자고새”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매창은 생전에 늘 고독과 이별을 안고 살았으며, 거문고로 시름을 달랬다고 하며,

마음의 고독과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다가 3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고 한다

 

* 가곡원류(歌曲源流)는  1876년 박효관과 안민영이 856수의 시조 작품을 정리하여

   편찬한 가집(集)으로 청구영언(靑丘永言) , 해동가요(海東歌謠)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조집으로 일컬어진다

 

 규중원(閨中怨: 안방에서의 원망) / 이매창(李梅窓)

 

瓊苑梨花杜宇啼(경원이화두우제)

옥 같은 동산에 배꽃 피고 두견새 우는 밤

 

滿庭蟾影更悽悽(만정섬영갱처처)

뜰 가득한 달빛은 더욱 서러워라

 

相思欲夢還無寐(상사욕몽환무매)

꿈에서나 만날까 해보지만 잠은 오지 않고

 

起倚梅窓聽五鷄(기의매창청오계)

일어나 매화 핀 창가에 기대어 새벽의 닭소리 듣네

 

부안 출신인 매창(梅窓)은 개성의 황진이, 함경도의 홍랑(洪娘)과 조선시대  3대기녀(妓女)로

꼽혔으며,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류시인의 하나인 매창(李梅窓)이 지은

"규중원(閨中怨)" 곧 <안방에서의 원망>이라는 시다.

 

옥처럼 아름다운 동산에 배꽃이 피고 밤에는 두견새가 구슬피 우는 밤, 뜰에 가득 채우는

달빛을 보니 오히려 임을 만나지 못한 서러운 마음뿐이다...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어 꿈에서나

만나려고 잠을 자려는데, 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잠이 오지 않고, 그저 잠자리에서 일어나

매화가 핀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새벽녘이 되자 닭이 우는 소리는 처량하기만 하다.

시인 유희경과의 가슴 시린 사랑이 매창의 시 한 편에 잘 표현되고 있는 시다.

 

 매창을 생각하며 / 유희경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浪州(낭주)는 지금 부안의 옛 지명이다

 

유희경(劉希慶:1545~1635)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아버지는 종7품인 계공랑(啓功郎) 유업동(劉業仝)이고

어머니는 배씨(裴氏)이며, 천민(賤民:조선 시대에 천역(賤役:미천한 일)에 종사하던

가장 낮은 계급의 백성)출신이나 당시 한시(漢詩)를 잘지어 사대부(士大夫)들과 

교유했으며, 나라의 큰 장례나 사대부들의 큰 장례를 예법에 맞게 치르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도봉서원 창건에 기여했으며, 이곳이 그의 고향인 듯 하다

이매창과 유희경의  詩碑에서 올라서니 각종 메이커의 등산복 가게들이

보이나 지맥산꾼에게는 그림의 떡이니 눈길조차 안 준체로 올라서니

뭔 단체인지는 몰라도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을 박탈하자고 입에 게거품을

문 채로 열변을 토하지만, 저 자들이 언제 민초들의 애환을 한번이라도

귀기울인적 있던가...저거들 밥그릇 챙기기에만 열심인 저 자들에겐 난

관심조차도 없다

참으로 오랫만 도봉산의 주능 코스를 와본다

최근 몇년동안 도봉산을 와보기는 했지만 대부분 망월사 방향으로 

왔기에 조금은 어색하기는 한데, 코스보다 더 어색한 건 사람들이

많아서 불편한 게 더 어색하다

좌측의 도봉사 방향으로 가면 보문능선을 지나서 도봉주능선으로

향하는 길로 저 방향쪽으로는 등산객들이 많지 않아서 저 길로

향하려다가 망월사 아래에 있는 지인스님의 절집으로 가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것 같아서 그냥 등산객들이 가장 많은

광륜사 방향으로 향한다

도봉산 입구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만난게 ‘자비행(慈悲行)’이 끝이 없어
“불교계의 덕후”로 명성이 자자했던 청화(淸華) 큰스님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절집 광륜사(光輪寺)이다.

 

광륜사(光輪寺)는 673년 의상 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당시의 사찰 이름은 만장사(萬丈寺)였으며 천축사(天竺寺), 영국사와 더불어

도봉산의 대표적인 가람으로 성장하였지만, 조선 시대 중기 이후 쇠락하였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신정 왕후(神貞王后:1808~1890)가 부친인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풍양 조씨 선산과 인접하고 산수가 수려한 도봉산 입구에

만장사(萬丈寺:현재 광륜사)를 새로 짓고 별장으로 삼아 만년을 보내기도 한 절집으로,

그 후 고종 때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국정을 보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보살 금득이 사찰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였으며, 2002년 5월 5일 임창욱과

박현주의 시주를 받아 무주당(無住堂) 청화(淸華) 대종사(大宗師)가 사찰 이름을 광륜사

(光輪寺)로 바꾸고 새롭게 개원하였다... 광(光)은 동서(東西), 륜(輪)은 남북(南北)이란 뜻으로

광륜(光輪)은 ‘넓이’를 의미하며, 청화스님은 부처의 자비가 동서남북 사방 천지에 두루두루

미치기를 염원하며 광륜사라고 이름 지었다.

 

* 덕후란 일본어인 오타쿠(御宅)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부르는 말인 ‘오덕후’의 줄임말로 뜻은

  오타쿠와 동일하며, 197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로 본래 ‘집’이나 ‘댁(당신의 높임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이 의미가 확장되면서 초기에는 집 안에만 틀어박혀서 취미생활을 하는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는데, 하지만 현재는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광륜사 일주문에 들어서서 합장저두삼배(合掌低頭三拜)의 예를 올리고

경내로 들어서는데, 지금 대웅전에서는 어느 靈駕의 49재를 모시고 있는지

스님의 낭랑한 염불소리가 들린다...광륜사의 가람배치가 특히한데, 殿閣은

대웅전과 삼성각만 있고, 금강선원을 중심으로 도심포교를 하는 절집인듯 하다.

 

대웅전은 들리지 않고, 잠깐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난다

광륜사 입구에 있는 신정왕후와 청화 큰스님의 자료

 

역시 산꾼은 산에와야 물만난 물고기처럼 활력이 솟는 법인가보다...

주위의 등산객들이야 떠들던 말던가에 묵묵히 도봉산 정상을 향한다

오늘이 목적 산행이 아니라, 아무런 제약도 없고, 歸家 시간에 대한

부담도 없으니, 속된말로 엿장수 맘대로 발길가는대로 걷고 싶다

도봉서원 앞 계곡에는 다양한 형태의 수석이 있는데 이곳에는 이름난 유학자이자

명필가인 한 송시열, 송준길, 권상하, 이재, 김수증 등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들이 있다. 

도봉서원(道峯書院)터는 텅빈 공터에 휀스가 처져있고, 그 앞에는

시인 김수영의 “풀이 눕는다”라는 詩의 일부가 새겨져 있는 詩碑가 보인다

 

시인 김수영(金洙映:1926~1968)은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시를 통해 당대의 상황을

표현하며 참여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시인은 도봉동에서 양계장을 하면서 암울했던

시대에 깨어있는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며 문학의 현실 참여를 실천하다가 교통사고로

타계한 비운의 시인이었다, 

이 도봉서원은 조금전에 지나온 길에서 만난 이매창과 유희경의 시비가

있었던 당사자인 유희경은 이곳 도봉서원 근처에다 임장(林裝)을 지어

기거하다가 여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유희경은 비록 하층이었지만, 남언경(南彦經)에게서 문공가례(文公家禮:

중국 명나라 때의 구준이 관혼상제 등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모아서 만든 책)를

배워 국상(國喪)을 자문할 정도로 禮에 밝았다고 하며, 이곳 도봉서원(道峯書院)

창건의 전반적인 책임을 맡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공로 등을

인정받아 품계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 조선시대 종2품 상계(上階) 문관의 품계)

까지 올랐다고 하며, 촌은집(村隱集:  조선시대 시인 유희경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07년에 간행한 시문집)을 남겼다고 한다

도봉서원(道峯書院)터는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조선전기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1573년(선조 6)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창건과 동시에 ‘道峯(도봉)’

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96년송시열(宋時烈)을 추가배향하였다.

 

송시열은 1723년(경종 3) 중앙의 정치세력 변화로 출향(黜享)되었다가 1775년(영조 51)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배향되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단이 설치되어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오다가 6·25사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가 그 뒤 1972년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원을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유도문(由道門)이라 편액된 신문(神門), 동협문(東夾門)·

서협문(西夾門) 등이 있다. 사우의 오른쪽에는 조광조의 위패가, 왼쪽에는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이며, 재산으로는 전답 700여평 등이 있다

좌측으로 가면 봄철에 진달래가 멋지게 피는 도봉주능선으로 쭈욱 가다가

오봉능선 갈림길에서 도봉산 정상으로 오를까 생각도 해봤지만, 오늘은

산행을 너무 느게 시작한데다가, 겨울 산행에 등로 상태가 어떨지 몰라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천축사 방향으로 향한다...인간의 심리란 참으로 묘하다.

조금전만 해도, 웃고 떠들어 대면서 산길을 걷는 등산객이 엄청 불편했는데,

잠깐 사이에 내가 등산객에 同化되어 가는지 아무런 불편없이 걷는다

선인봉(仙人峰)  포토라인(12:00)

해발 708m의 암봉(巖峰)으로서 도봉산의 최고봉인 자운봉(739.5m), 만장봉(718m)과 더불어

'삼형제 봉우리'라 칭하기도 하는데 지명의 유래는 ‘신선이 도를 닦는 바위’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벽의 높이는 약 200m, 너비는 약 500m인데, 암벽으로 되어있어 일반

등산객은 정상에 접근이 불가능하다...암벽등반의 명소로서 표범길·재원길 등의 이름이 붙은

40여개의 루트가 있다.

바라만 볼 수 있는 선인봉을 눈도장찍고 본격적인 오름을 시작한다.

오늘의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니 최적의 날씨인 듯 싶다

종로로 갈까요,명동으로 갈까요♩,차라리 청량리로 떠날까요♬가 아닌

만월암으로 갈까, 천축사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만월암쪽은 음지라

등로가 빙판인 것 처럼 보여서 천축사 방향으로 향한다.

우로 가던, 좌로 가던간에 윗쪽으로 올라가면 선인봉 가기전에 다시

만나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대피소를 지나서 오르막을 오르는데

갑자기 나타난 천축사 일주문과 안내판...니가 왜 거기서 나와...

천축사 일주문(天竺寺 一柱門:12:20)

천축사는 도봉산(道峰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로

통일신라 시대인 673년(문무왕 13)에 의상(義湘)이 만장봉 동북쪽 기슭에 있는

의상대(義湘臺)에서 수도할 때 현재의 위치에 절을 창건하고 옥천암(玉泉庵)이라고 하였다.

 

그 뒤 고려 명종 때는 영국사(寧國寺)를 창건한 뒤 이 절을 부속 암자로 삼았으며, 1398년(태조 7)

함흥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태조가 옛날 이곳에서 백일기도하던 것을 상기하여 절을 중창하고

천축사라는 사액(寺額)을 내렸다... 절 이름을 천축사라고 한 것은 고려 때 인도 승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에게 이곳의 경관이 천축국의 영축산과 비슷하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일주문(一柱門)은  절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번째의 문을 말하는데,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들을 걸어 사찰의 격(格)을 나타내기도 한다.

오랫만에 와본 이 길이라 그런지 많은것이 변해버려 어색하기만 하다.

예전에 없었던 위압적이고 화려한 일주문이 눈에 거슬린다.

조계종 직영사찰에 속하더니만 절집 살림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다.

그러나 돈은 함부로 쓰지마소...민초(신도)들이 허리띠 졸라가면서

부처님께 시주한 돈...부처님도 저런건 원하지 않았을겁니다

일주문을 지나서 천축사로 향한다

天竺寺 경내에 들어서니 수많은 立佛들이 오랫만에 

도봉산에 오른 범여을 격하게 환영해주는 느낌이다

선 채로 低頭三拜의 禮를 올리고 천축사로 향한다

천축사(天竺寺:12:25~45)

천축(天竺)이란 지명은 고대 중국에서 인도 또는 인도 방면에 대해 부르던 호칭으로

문헌에서는 《후한서(後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천축국(天竺國)은 일명 신독(身毒).

월지(月氏)의 남동쪽 수천리에 있다”고 한 것이 최초인데, 이 호칭은 위(魏) ·진(晉) ·

남북조(南北朝) 때 널리 이용되었으며, 우리나라 기행문화의 효시로 알려진 혜초(慧超)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도 등장하는 용어이다

 

도봉산 만장봉 동쪽 기슭에 있는 천축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 의상스님이 문도들을

이끌고 만장봉 동쪽 기슭에 왔다가 그 산세의 빼어남에 감탄하여 현재 위치에 창건하고

옥천암이라 했는데, 그 뒤 고려 명종 때 영국사 부속 암자가 되었고, 조선 태조 7년(1398)

함흥에서 돌아오던 태조가 예전 이 곳에서 백일기도하던 것을 상기하여 절을 중창하고

천축사 현판을 하사했다. 

천축사라는 절 이름은 지공이 나옹화상에게 이곳의 경관이 옛 인도인 천축국의 영축산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였으며, 천축사가 유명해진 계기는 1965년 무문관이 건립되면서다.

종단 정화를 주도했던 문정영스님은 정화 정신에 걸맞게 참선에 매진해야한다는 생각에

사제인 제선스님의 청을 받아 이곳에 무문관을 세웠다.

무문관은 부처님처럼 6년 고행을 하자는 취지에서 한 평 규모의 방에 6년 동안 나오지 않고

면벽수행하는 가장 극한 수행이다. 무문관을 건립하여 6년 폐관정진했던 제선스님은 천축사를

내려간 뒤 부산에 들렀다가 종적을 감춰 지금껏 전설처럼 떠돈다. 


*무문관(無門關)이란

  중국 남송(南宋)시대 무문혜개(無門慧開:1183~1260)가 편찬한 공안(公案) 모음으로 무문혜개는

  선종(禪宗)의 일파인 임제종(臨濟宗)의 승려로 수행자를 위해 임제종의 화두(話頭) 48가지를

  정리하여 해설을 붙이고 외우기 쉽도록 하여 <무문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간행했다.

 

  <무문관>은 <벽암록(碧巖錄)>, <종용록(從容錄)>과 함께 선종을 대표하는 공안집으로 알려져 있는데,

  내용이 어렵지 않으며 잘 정리되어 있어 선승들이 화두를 얻기 위해 읽는다.

  독방에서 면벽수행을 하기 위해 일정 기간 수행하는 폐쇄된 공간이나 수행 자체를 ’무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축사 대웅전 주련(柱聯)

 

身和同住用身一(신화동주용신일)

화합하는 몸으로 함께

머무니 한 몸처럼 쓰이고

 口和無諍同口說(구화무쟁동구설)

화합하는 입으로 다툼이

없으니 한 입처럼 말하고

 

 意和無偉一心行(의화무위일심행)

화합하는 입으로 어긋남이

없으니 한 마음으로 행하고

 

 見和同解無等觀(견화동해무등관)

화합하여 견해를 한가지로

풀어가니 차별없는 세상을 보고

 

 戒和同遵眞修行(계화동준진수행)

화합하여 계법을 한 가지로

쫒아가니 참된 수행일세

 

 利和同均心平等(이화동균심평)

화합하여 이익을 함께 나무니

차별없는 고운 마음이라네

 

천축사 대웅전 주련의 쉽게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1, 身和敬(신화경)

     몸으로는 부처님처럼 수행하여 화합하고

 

 2, 口和敬(구화경)

     입으로는 부처님 말을하여 화합하고

 

 3, 意和敬(의화경)

      뜻으로는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하여 화합하고

 

 4, 戒和敬(계화경)

     율법을 서로 지켜 바른 행동을 하여 화합하고

 

 5, 見和敬(견화경)

     바른 견해를 가지고 화합하고

 

6, 利和敬(이화경)

    이익을 고르게 나눔에 충실하여 화합하라

 

* 주련(柱聯)이란 기둥(柱)마다에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르는데,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붙이거나 그 내용을 얇은 판자에

  새겨 걸기도 하며, 판자 아래위로 하엽(荷葉)을 양각(陽刻)하든지 연꽃을 새기든지

  당초무늬를 새기든지 하여 윤곽을 정리하고 그 가운데에 글귀를 적어 새김질한다.

  글씨의 윤곽만 새기는 기법을 쓰는 것이 보편적인 방식으로 더러 튀어나오도록 양각하는

  수도 있으나 드문 일이며, 양각한 부분과 새김질한 글씨에 색을 넣어 장식한다.

천축사 경내 대웅전에 들려 간단하게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대웅전 마당에

신도들을 위한 것인지, 등산객을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놓고 커다란 난로에다. 나무로 만든 식탁과 의자가 있으며, 무료로 차와 커피를

제공해주는 바람에 이곳에서 편안하게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혼자 있을 때는 자기 마음의 흐름을 살피고

여럿이 있을 때는 자기 입의 말을 살피라

 

             ...법구경 중에서 ...

천축사에서 마당바위로 향하는 길에 검은 고양이 2마리가

겁도없이 등산객들이 준 먹이로 맛있는 점심식사 중이다

마당바위로 향한다.

인생이란 긴 旅程에서 고통없는 삶이 있었던가...

마당바위라는 비탈길을 오르면서 몸뚱아리에서 전달되는

통증을 감내하며 한발자국, 한발자국을 올라간다.

마당바위(13:00)

이름에 걸맞게 비스듬한 넓은 바위...시야가

트이면서 보이는 오봉의 주능선이 시원스럽다

純白으로 치장된 오봉의 주능선...올해 처음으로 순백의

雪山을 만나는 이 기분...정말 날아갈 것같은 기분이다.

6년전 몸뚱아리에 칼질을 한 이후부터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첫번째는 일상에서 매일 겪는 고통중에 하나가 매운 음식을

먹을수 없다는 것이고, 두번째가 추위에 지독히도 약해졌다.

 

그 바람에 추운 겨울산행이 하기가 힘들어서 늘 겨울에는 춥지않은

남녘지방으로 산행을 가고, 여름에는 북쪽 지방으로 산행을 하는 탓에

멋진 겨울의 深雪을 맛볼수 없는 걸 이곳에서 만나다니...

산은 나에게는 신앙같은 존재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고도를 높혀가니 저 아랫쪽에서는

불지 않던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기 시작하고, 기온도

갑자기 뚝 떨어지는 기분이다

마당바위 쉼터(13:07)

쉼터에서 내려서자말자 만월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13:08)

늘 힘들다, 힘들다하면서도 매주 산으로 향하는  범여...

산을 향한 지독한 짝사랑일까, 아니면 맹목적인 사랑일까?

아니면 마음의 고향이라 산에 오르는지 나도 모르겠다

선인쉼터(13:25~35)

많은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바라바리 싸온 간식을

먹으면서 웃고 떠들며 談笑하는 풍경이 늘 독립군으로 홀로

다니는 산꾼 범여에게는 왠지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나 역시 이곳에서 바람이 불지않은 외진곳에 곳에 앉아 가지고 온

도리야끼 빵 2개와 보온병에 넣어온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후에 정상으로 향한다

선인 쉼터에서 바라본 선인봉(仙人峰:708m(좌))과 만장봉의 의 모습

선인쉼터에서 올라서니 시야가 트이면서 매서운 강풍이 불어대면서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데, 우측으로 도봉산 만장봉이 얼굴을 내민다

 

만장봉(萬丈峰:718m)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경기도 양주시 및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는 도봉산의 봉우리로 ‘높고 높은 산봉우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넓고 큰 바위가 천장만장으로 깎아지른 듯 서 있는 기세가 웅장하다는 데에서

생겨난 이름으로, 봉우리는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부는 매우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식생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하는데,

정상부에 가까울수록 소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북쪽에는 도봉산의 최고봉인 자운봉이, 남쪽에는 선인봉이 위치하며, 해발 350m부터

정상부로 올라갈수록 화강암의 바위 덩어리 모양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닭의 벼슬처럼

날카로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봉우리의 동쪽 기슭에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천축사가 있는데, 이러한 연유로 만장봉을 천축사의 후봉(後峰)

이라고도 한다.

인증샷

정상의 오름길에는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편하게 올라간다

도봉산 정상 안부(14:00)

도봉산의 정상인 선인봉과 신선대 사이의 안부에 도착한다.

우측에 있는 도봉삼봉이라 부르는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은

암벽장비가 없는 일반 등산객들에게는 오를 수 없은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꿩 대신 닭이라고 좌측의 신선대는 오를수가 있다

 

정상 안부에 올라서니 강한 바람에다 강추위로 인하여 손가락이

빠질듯한 고통이 수반되는데, 역시 명산은 정상을 함부로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도봉산 정상 안부에 있는 도봉산 안내판

도봉산 정상의 도봉삼봉(峰三峰)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맞은편의 신선대로 오르는데 눈이 내려서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완전히 빙벽이 되어버려 아이젠을 착용했는데도 상당히 難解하다

철제 난간에 몸뚱아리를 내맡긴 채 힘들게 정상에 올라서니 주변으로

펼쳐지는 雪山의 풍경은 환상 그 자체다

神仙이 놀아았다는 신선대 정상 가는 길...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암벽 능선을 따라서 올라서면서 보이는 오봉능선이 환상적이다.

그래!...겨울산은 이 맛이야...

겨울 산길 / 유안진

 

속세의 웃음맛과

속세의 울음맛을

영영 끊어버린

겨울 나무들

 

산사(山寺)로 올라가며

염불 외는 소린 듯

바람이 분다.

 

뉘우친 파계승(破戒僧)

뒤처져 걷는 길에

때묻은 발자욱을

따라가며 지워주는

 

눈발이 흩날린다

풍경(風磬)소리 들린다

향 내음도 자욱하다 

 

* 파계승(破戒僧)이란 불교의 계율을 어긴 승려를 말한다

신선대 정상에서 바라본 송추계곡의 모습

불알친구 淸眼과 아련한 추억을 쌓았던 곳이기도 하제...

신선대 정상에서 바라본 선인봉(仙人峰:708m)의 모습

도봉산에 있는 암봉(巖峰)으로서 도봉산의 최고봉인 자운봉(739.5m), 만장봉(718m)과

더불어 '삼형제 봉우리'라 칭하기도 하는데,지명의 유래는 ‘신선이 도를 닦는 바위’라 하여

붙여졌으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벽의 높이는 약 200m, 너비는 약 500m이다.

암벽등반의 명소로서 표범길·재원길 등의 이름이 붙은 40여개의 루트가 있다

신선대(神仙臺:726m:14:05)

도봉산의 정상에서 일반 등산객들이 유일하게 오를 수 있는 신선대 정상.

신선은 출타중인지 보이지 않고, 등산객들이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서

정상 표지목 쟁탈전이 마치 아수라판을 연상케 한다...나까지 이런 추한

꼴을 보여서야 되겠는가...쟁탈전의 찰나에 표시목을 찍고 하산한다

신선대에서 바라본 자운봉(紫雲峰:739.5m)의 모습

도봉산의 주봉이자,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740m)의 지명은 높은 산의

봉우리에 붉은 빛의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

‘자운(紫雲)’은 불교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뜻한다.

 

정상부는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침식과 풍화 작용을 받아 절리면이

잘 발달해 있으며, 마치 다듬어진 바윗덩어리 여러 개를 포개놓은 듯한 모습이다.

자운봉에 오르면 만장봉, 오봉능선, 칼바위, 포대봉, 우이암 등이 한눈에 보이고

멀리 북한산까지 조망할 수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만장봉과 선인봉이 연속적으로

위치하고, 서남쪽으로는 주봉(柱峰)이 있으며, 봉우리의 북쪽으로는 포대 능선이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도봉 주능선이 연결된다.

만장봉[718m] 및 선인봉[708m]과 더불어 ‘삼봉’ 또는 ‘삼형제 봉우리’로 불리는데

이들 삼봉은 도봉구를 상징하는 상징 휘장에 세 개의 봉우리로 형상화되었다.

자운봉은 경사가 아주 급한 암봉이기 때문에, 봉우리를 걸어서 오르거나 암벽을

등반하는 것이 위험하여 산행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던 때가 있었으며

전문 등산 장비와 암벽 등반 기술이 없으면 오를 수 없는 봉우리다

신선대에 내려서면서 포대능선 너머로 보이는 맨 뒷쪽의 사패산은

햇빛이 비치는지 마치 몇년전에 갔던 티벳의 메리 설산처럼 보이는데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의정부시 의정부동과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사이에 걸쳐있는 사패산(賜牌山:552m)

사패(賜牌)이란 이름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왕이 공을 세운 왕족이나 신하에게 

땅이나 노비를 하사할 때 그 소유권을 인정하는 문서를 사패라고 했다. 

 

사패산은 조선조 선조의 6째 딸인 정휘옹주가 유정량(柳廷亮)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인데, 또 다른  지명으로는 큰 봉우리의 바위 모양이

삿갓처럼 생겨서 갓바위산 또는 삿갓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사패산에는 석굴암(石屈岩)이 있는데, 이곳은 백범 김구가 일제강점기에 상해로

망명하기 전 숨어지낸 곳이자 광복 이후에도 즐겨 찾은 장소로 전해진다.

도봉산의 명칭은 큰 바윗길이 산 전체를 이루고 있어 ‘도봉(道峰)’이라 명명하였다는 설과

천축사·희룡사 등의 사찰에서 조선 왕조 창업의 길을 닦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는데 조선 왕조의 흥업은 도봉산의 정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는 이 산은 서울의

근교 산이라 옛부터 시인과 묵객들의 흔적이 많은 산이다

 

선인봉, 자운봉, 만장봉, 신선대, 오봉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대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봉우리들 사이로 수 십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는 도봉산은 세종 때의 문장가이며, 한성부 판윤

(지금의 서울 특별시장) 을 두 번씩이나 지냈던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만장봉 아래에서 도봉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이렇게 읊었다 한다

 

높은 다락에서 술잔 들고 한번 웃어 보는데

수많은 푸른 봉우리 뽀족뽀족 무더기를 이루었고

십년 세월 하는 일 없이 귀거래시만 지었는데

백발이 다정하여 자꾸만 재촉하누나

산이나 인생사나 늘 정상에서 내려갈 때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름아닌 여의도의 나리들...

그러다가 말년에 개고생하는 걸 많이 봤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나리들이 있는 모양이다

다시 도봉산 정상 안부(14:18)

정상으로 내려서니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원래 계획은 포대능선을 통과하여, 망월사로 내려가서

망월사역 위에 있는 도반스님 절집에 들려 스님에게

새배를 하고 茶談을 나누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왔던길로 되돌아 내려간다

왔던길을 되돌아 가는 산행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인데 너무 늦게 산행을 시작한 탓에 방법이 없다

점점 눈발은 굵어지고...괜시리 맘이 급해진다

도봉(道峰)  /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나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움일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갈림길(14:43)

조금전에 올라왔던 마당바위와 천축사가 아닌 만월암 방향으로 내려간다

올라올 때 천축사 윗쪽에서 만난 그 괭이 새끼인가?

한참을 내려오니 눈은 그치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소나무가

산꾼에게 말을 걸어온다...올해는 너무 모나게 살지말고

그냥 두리뭉실하게 살아가라고...

석굴암 갈림길(14:52)

자운봉으로 향하면 가파른 계단길이 계속는데, 마지막 봉우리를 향해

오르기 전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석굴암...도봉산에는 석굴암이 3곳 있다.

만장봉 아래와 송추쪽 오봉 아래, 그리고 김구 선생이 기도했다는

사패산 회룡사의 석굴암이다. 

석굴암은 이름 그대로 굴법당인데 만장봉 아래 자연굴에 법당을 조성했다.

그 옆에는 5백나한전이 있으며 석굴암에서 도봉대피소 까지 내려와서

다시 좌측으로 올라가면 만월암(滿月庵)이다

석굴암 갈림길 우측 아래에는 도봉산 특수산악구조대가 있다

명절의 旅毒을 풀기위해 목적 산행이 아닌 healing으로 한 산행

내가 살아서 걸을수 있을때까지 산을 벗어나지 않으리라...

해골바위?

쉼터(15:05)

좌측으로는 석굴암, 우측은 만월암 가는 길이다

물개바위?

인절미 바위(15:08)

인절미 바위 안내판

등로 우측으로 한국산악연맹에서 운영하는 도봉대피소가 보인다

도봉2교(15:13)

만월암 갈림길(15:14)

정상에서 내려와서 마당바위 가기 직전에 좌측으로 내려와서

이곳까지 왔다...오전에 올라갔던 천축사로 가는 길과 다시

만나는 길인데 만월암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도봉산에서 암벽 등반으로 유명한 선인봉 아래에 있는 만월암(滿月庵)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후 만월암은 보덕굴(普德窟)이라는 참선 도량으로

알려져 오다가 1940년 여여 거사(如如居士) 서광전(徐光前)이 중창하였으며,

혜공스님이 2002년에 법당과 요사로 사용하는 만월보전을, 2004년에 산신각을

새로 지었으며, 조선시대 조성한 만월암 석불좌상(滿月庵 石佛坐像: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1호)이 있다

도봉산 하면,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빼놓기 힘들다.

조광조는 소년시절부터 도봉천 계곡의 수려한 산수를 즐겨 벗들과 함께 와서

학문을 토론했고, 출사한 뒤에도 집과 가까웠던 도봉산을 자주 찾아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조광조는 특별히 도봉천 계곡의 수석(壽石)을 좋아했다.

 

그는 중종의 파격적 지원 아래 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1519년(중종 14) 훈구파에

반격을 당해 전남 화순으로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는데, <정암집(靜庵集)>에 따르면, 조광조는 죽기직전 “밝은 해 이 세상을

내려비추고 있으니(白日臨下土), 내 거짓없는 마음 환히 밝혀주리라(昭昭照丹衷)”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조선중기 문장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도 도봉산을 즐겨 찾았다.

1615년(광해군 7) 가을에는 조정에서 축출돼 불암산 기슭 노원촌에 우거 중이던

백사 이항복과 함께 도봉산을 찾았으며 <월사집>은 “바위는 더욱 늙어 예스럽고

나무는 더욱 늙어 기이하며, 봉우리는 더욱 높아졌고 물은 더욱 맑아졌다”고 감회를 밝혔다.

 

천민시인 유희경(1545~1636)도 ‘도봉인’이었다.

신흠(1566~1628)의 문집인 <상촌집>은 “유생(劉生·유희경)은 ··· 어진 사대부를 따라

놀기를 좋아했으며 시와 예로 몸단속을 하였지. 도봉산 아래에 집을 짓고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지금 나이 79세이지만 몸놀림이 가볍고 건강하며 얼굴도

젊구나”라고 했다.

쉼터(15:23)

아무런 목적지도 정해놓지 않고 발길가는데로 걷다가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발걸음...매주 목적을 정해놓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 아둥바둥거렸던 발걸음과는 확연히 다르게 편하다.

‘목적’이란 굴레를 벗어나 아무런 생각없이 걷는게 이렇게

좋을줄은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신선대를 찍고 내려오니 우측으로 보문능선에서 내려오는 길을 만난다

우이암 갈림길(15:30)

우이암(牛耳岩:542m)의 명칭은 봉우리의 모습이 소의 귀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된 명칭으로 본래는 바위의 모습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관음보살을

닮았다 하여 관음봉(觀音峰)이라고도 하고, 사모관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사모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도봉산에 분포하는 많은 바위들이 호랑이·코끼리·두꺼비·코뿔소·학 등 각종

동물의 형상을 하고 관음봉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다고 하여 불교에서는

우이암을 관음성지(觀音聖地)라 여기기도 하며, 암벽등반 코스로도 유명하다

여의도 패거리들한테 배웠나?...相生이란 단어는

엿바꿔 먹었는지 맨날 쌈박질만 하는구나

우이암 갈림길에서 내려오니 도봉계곡의 바위에 고산앙지가 있다

고산앙지(高山仰止:15:32)

이 글씨는 1700년(조선 숙종26년) 7월에 곡운 김수증(金壽增:1624~1701)이

쓴 글씨로 고산앙지(高山仰止)란 시경(詩經) 나오는 것으로 “높은 산처럼

우르러 사모한다”는 뜻이며, 김수증이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에서 새긴것으로 추측된다 

도봉산을 가리켜 옛 선인은 ‘푸른 하늘에 깎아 세운 만 길 봉우리’라고 노래했다.

기기묘묘한 자운봉・만장봉・선인봉 등이 빚은 산세는 금강산이 부럽지 않을

만큼 수려하며, 울창한 숲과 아찔한 암봉이 어우러진 산세는 겨울이 되면 더욱

아름답게 피어난다

무수골 갈림길(15:34)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에 속해있는 무수골은 보문사계곡이라고도 하며

무수골은 '무수울'이라고도 하는데, '걱정 근심이 없는(無愁) 골짜기'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물골[水谷水洞]'을 뜻하는 '무싀골'이 변형된 것이라고도 한다.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의 3대 계곡으로 꼽히는

계곡으로 도봉역에서 무수골공원지킴터~무수골~우이암에 이르는 무수골 코스는

4㎞ 거리에 약 2시간이 소요된다

내려오는 길에 광륜사를 참배하고 도반 스님에게 전화를 오라고 한다.

다음에 가겠노라 하니까...세뱃돈 준비했는데 하기에 내 구좌로 넣어

달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한바탕 웃는다.

도봉탐방지원센터(15:40)

도봉산을 벗어나 일상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도봉산역 가는 골목길에 있는 어탕국수집에서 국수

한그릇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집으로 향한다